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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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text-shadow: 0 0 10px #ffffff; color: #fede58;">건국훈장</span> 대한민국장(重章)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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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훙커우 의거 이전
3. 훙커우 의거
3.1. 몇 시간밖에는 쓸 수 없는 시계
4. 최후
5. 반향
6. 평가
6.1. 이승만의 평가
6.2. 박헌영의 평가
6.3. 현대의 총평
7. 사진 논란
8. 가족관계
9. 그 외
10. 롯데그룹과의 관련 논란
12. 관련 문서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대장부가 집을 떠나면(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1. 개요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 대한민국독립운동가. 호는 매헌(梅軒). 1932년 4월 백범 김구의 지시를 받아,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절 및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義擧)를 성공시켰다.

2. 훙커우 의거 이전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1]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윤우의(尹禹儀)다. 글자를 몰라 아버지의 묘소를 찾지 못하는 농부[2]를 보고 교육에 뜻을 가져, 월진회를 조직, 야학과 강습회를 열어 문맹 퇴치 및 계몽운동에 힘썼다. 참고로 월진회는 설립초기에는 계몽운동조합으로 운영되었지만, 현재는 농촌체험마을 사업이나, 마을 도서관 건립운동, 윤봉길 문화 축제 등을 추진하며 여전히 활동 중이다. 1944년부터 1946년까지 우진회란 이름으로 존속했지만 1946년에 다시 월진회로 환원했다. 현재 공식 명칭은 초대 회장이던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매헌윤봉길월진회로 쓰고 있다. 윤봉길은 이후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만주 등의 지역에서 갖가지 사회 활동을 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한인 애국단에 소속되었다. 칭다오에서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하며 때를 기다렸으나, 만주사변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죽을 자리가 없어졌다."라면서 임시정부로 가서 김구와 만났다고. 이때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로 써 달라"라고 부탁했다.[3]

3. 훙커우 의거

1932년 4월 29일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이겼다고 주장하며[4] 상하이 훙커우(홍구) 공원(현재의 루쉰 공원)에서 쇼와 덴노 탄생기념 행사와 전승 기념 행사를 가진다. 전날 구파 백정기 의사도 나름대로 계획했지만 입장권을 얻지 못해 실패했으며, 백 의사는 그 이듬해 중국 주재 일본 공사였던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하려다 실패, 이시하야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 효창공원에 나란히 묻혔다.

거사 얼마 전에 있었던 이봉창 의사의 의거로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군은, 기념식장에 물통과 도시락 이외에는 가져오지 못하게 했다. 이에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물통으로 위장한 특수 폭탄을 사용했다. 이때 투척했던 폭탄도시락이 아닌 물통 폭탄이다. 도시락 폭탄은 자폭용(!)으로 들고 갔지만 불발로 알려져 있다. 이는 KBS 스펀지 197회 방송분에서도 소개되었다.

다만 체포된 후 조서에서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

"29일 아침 자동차를 타고 신공원(훙커우 공원)으로 가는 도중, 자동차 안에서 손가락으로 보자기를 찢어서 구멍을 뚫었다. 구멍을 뚫은 것은, 폭탄을 보자기에 싼 채로 던지려고 폭탄의 발화용 끈을 당기기 위해서였다. 상황을 보니 도저히 2개를 던질 여유가 없었다. 물통 모양 폭탄에 끈이 있어서 던지기 쉽다고 생각하여, 도시락 상자 폭탄은 땅 위에 내려놓고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진 것이다."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자결하여 중일 간의 분노를 고조시키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윤봉길 의사의 조카 윤주 매헌기념관 관장은 자살용으로 들고 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 의거로 상하이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테이지(河端貞次)는 그 자리에서 말 그대로 인수분해되고, 상하이 파견군[5] 사령관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부상을 입은 후 상처가 악화되어서 죽었다.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츠 마모루와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츠(村井倉松)는 중상을 입었으며, 제9사단장 육군중장 우에다 켄키치(植田謙吉)는 왼쪽 다리를 잃고, 해군중장 제3함대 사령장관 노무라 키치사부로(野村吉三郎)는 오른쪽 눈이 날아가 애꾸가 되었다.

재미있는게 이 때 부상을 입은 생존자 중 노무라 키치사부로 사령장관과 시게미츠 마모루 공사는 각각 태평양 전쟁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인물이란 것. 노무라 장관은 예편 후 외교관이 되었다. 본래 초급 장교 시절부터 해외로 나가는 국방무관으로 자주 활동하며 외교 분야의 경험이 많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외교관으로 전향한 것. 미국 주재 대사로 활동하며 진주만 공습 직후 선전포고문을 들고 코델 헐 국무장관에게 간 사람이 이 사람이다. 그리고 이 당시 한쪽 다리를 잃은 시게미츠 마모루는 아이오와급 전함 USS 미주리 호(BB-63)에서 가진 항복문서 조인식에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나타나 일본의 전권대사 자격으로 문서에 사인한 그 인물이다.

여기서 민간인이 휘말렸다는 주장이 있으나 피해자로 기록된 민간인 신분인 2명은 각각 상하이 거류민단장 가와바타와 일본 거류민 서기장 토모노(友野) 뿐이다. 즉 일제와 무관하게 구경하러 온 민간인이 죽었다는 말은 거짓이다. 애초에 철저한 검열이 있던 자리의 귀빈석에 아무 연고도 없는 민간인은 있을 수 없다.

이 거사에 숨은 조력자가 있으니 바로 미국인 선교사인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그는 자신의 자동차 요인석에 윤의사를 태우고 직접 홍커우 공원으로 운전했다. 피치 선교사는 후에 욘 라베와 함께 난징학살에서 중국인들을 구했다.

3.1. 몇 시간밖에는 쓸 수 없는 시계

홍커우 의거를 시작하기 전, 자신이 살아 돌아올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김구와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6] 자신의 새로 산 시계김구에게 주고, 김구의 낡은 시계로 바꿔 품에 넣고 갔다고 한다.[7] 이 때 김구에게 한 마지막 말이 정말 패기넘치는 명언이다.

시계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와 바꾸어 주십시오.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는 쓸 일이 없으니까요.

또 식장에 가는 길에 김구에게 남은 돈을 다 주었는데, 김구가 "돈 좀 가져가면 어때서 그렇소?"라고 묻자 윤봉길 의사는 "자동차 값 다 치러도 5~6원은 남을 정도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참고로 당시 소학교 교사 월급이 20원이었다.

현재 이 두 시계는 효창공원백범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다만 위의 사진은 독립기념관 제 5전시관의 전시물 사진이다. 즉 모조품.

4. 최후

이렇게 일본 군민 관료들을 싹 날려버린 건 좋았으나, 앞서 말한 도시락 폭탄의 불발로 결국 붙잡혀 순국했다. 시신은 봉분도 없이 모처에 암매장됐는데, 훗날 김구의 지시로 박열 의사가 수습했다.

1994년에 일본의 시민 운동가인 야마구치 다카시가 펴낸 <윤봉길 암장의 땅, 가나자와에서>라는 책에 의하면, 사실 일본군은 윤봉길을 현장에서 공개 처형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오히려 윤봉길에 대한 여론이 좋아지고 일본군이 침략군이라는 이미지가 심어질 수 있을 것을 염려해서, 일본 육군 9사단 주둔지였던 이시카와카나자와 형무소에서 사형을 집행했다고. 어쨌든 이때 윤봉길 의사의 나이는 25세. 그야말로 짧고 굵게 살다 갔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최후의 모습.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27분, 윤봉길은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후 숨을 거두었다. 사진에 보면 일부러 윤의사에게 흰 천을 둘러 미간을 쏘고 붉은 피가 나오게 만든것은 일장기 모양을 내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 카나자와에서 이른 아침 사형이 집행된 데에 대해서 윤봉길 의사 의거 당시 중상을 입고 숨진 육군 사령관 시라카와의 세력 근거지에서 그가 병상에서 사망한 시각에 형을 집행한 것이란 설이 있다. 이렇듯 일제는 순국마저 욕되게 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계단에다가 방치해 놨는데, 지나가면서 윤봉길을 밟으며 가라는 뜻이다.

이후 카나자와의 노다야마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광복 직후인 1946년에서야 대한민국으로 유해를 옮겨올 수 있게 되었다.

해당 지역 인근에는 윤 의사 기념비와 총살을 당한 지역의 비석이 설치되어 있다. 링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5. 반향

당시 중국의 통치자였던 장제스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된 계기.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대한독립운동에 대단히 중요한 방점을 찍었고, 1945년 대한민국의 독립에 하나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였다. 순전히 윤봉길 의사의 의거덕분에 우리가 독립하였다고는 물론 말할 수 없지만,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될 정도이다.

실제로 이 사건 직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조선인들을 '일제의 앞잡이'로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이 때문에 만보산 사건(완바오산 사건) 같은 중국인 - 조선인의 대립까지 발생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긴 상하이 사변을 자축하는 일제의 기념 행사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고, 이게 조선인 청년 한 명의 의거라는 것이 알려지자, 중국인들 사이에서 조선을 항일 동지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퍼졌다.

더구나 윤봉길 의사의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은 수많은 세계인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세계 여론을 완전히 긍정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었다. 특히 중국 대륙의 실권자였던 장제스는 윤봉길의 의거 소식에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1명이 이뤄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는 말로 극찬한 뒤 김구를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사진에서 보듯 나중에 장제스는 윤봉길의 거사에 장렬천추란 휘호를 써서 유족에게 전달해주기도 했다. 이후에도 장제스는 김구의 임시정부를 보호하고, 김구의 임시정부에 물적 지원을 제공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또한 장제스는 한반도의 독립을 지지하고, 카이로회담에서 전후 조선의 독립을 적극 주장하여 관철시키는 등 대한민국의 독립 자체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6. 평가

6.1. 이승만의 평가

이승만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절하했다. 이승만은 철저한 외교론주의자로 장인환과 정명운이 스티븐스를 암살했을 때 미국내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되는걸 목격했고 미국식 의회민주주의를 배운 사람으로서 '정치인 테러' 같은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훗날 한인애국단 활동의 성과 보고서 형식으로 출판된 '도왜실기' 서문에서 이승만은 "윤봉길의 의거는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중국 국민당 정부와 임시정부의 연합을 가능케 한 사건이며, 카이로 회담에까지 이어지는 국제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즉, 윤봉길의 의거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결의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했다.

6.2. 박헌영의 평가

박헌영은 윤봉길의 의거 정신 자체에는 높이 평가했지만 방법론에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다. 1932년 7월박헌영은 '상하이 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다. 그는 여기서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들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개인적인 테러공산주의와는 무관하다.'고 못 박았다. 즉, 박헌영은 '개인적인 테러는 군중의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에 장해가 되며, 그들에게 비조직적이고 개인적인 투쟁의 환상을 심어, 결과적으로는 적에게 유리한 무기가 되고 만다.'라고 보았으며,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은 극소수에 의한 폭력' 행위라며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6.3. 현대의 총평

독립투쟁에는 외교론, 실력양산론, 무력투쟁론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사실 1930년대는 셋 중 어느 하나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게 없던 상황이었다. 외교로만 하자니 그 당시 국제질서는 힘에 의해 돌아갔던 때였고, 실력양성론은 일제의 교묘한 친일 부역자 양산에 이용되었고, 무력투쟁을 하자니 일본제국과의 전쟁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즉,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돌아가거나 가능성이 없던 때였는데 이를 타개하고자 마지막 수단으로 김구는 의거(義擧)를 택한 것이다. 일본은 물론 독립운동 내부에서조차 큰 비난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외교, 실력양성, 무장투쟁 모두 한인애국단의 의거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7. 사진 논란

한 때 윤봉길 의사가 의거 후 연행되는 사진이 진짜냐 가짜냐고 논란이 되기도 했다.

위의 연행되는 사진은 日 아사히 신문의 보도사진인데, 상하이 타임즈 등의 중국 신문은 윤봉길 의사가 의거 직후 수십 명의 일본군에게 구타당해 피투성이가 되어 질질 끌려가 차에 '던져'졌다고 보도되었다. 즉, 일본중국 양측의 보도내용이 다르기에, 이 사진 속의 인물이 정말 윤봉길 의사가 맞는가?가 논란이 되었다.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마무리한 시점에서, 주변 군인들(내지 중국 군인-민간인 포함)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라는 점에서, 중국 상하이 타임즈 쪽의 보도가 신빙성이 높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가설을 채택하여, 사실 사진 속의 인물은 윤봉길 의사가 아니고, 일본군 측이 자신들의 신사적인 대우를 어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체포하여 연행한 것을 찍었다고 방영했다. 해당 방영분에서는 실제 중국 측의 신문도 자료로 제시되었다.

8. 가족관계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다. 두 아들을 고국에 남긴 채 이역만리로 떠나,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자기 목숨 바칠 각오를 하면서도, 어린 두 아들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밟혔던지 아래와 같은 유서를 두 아들에게 남겼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가 있고 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인 윤모순(模淳)과 윤담(淡)에게 남긴 위 유서는 후에 보물 568호로 지정되었다.

1949년 4월 29일, 충남 예산에서 거행된 '윤봉길렬사비' 제막식에 참가한 김구와 윤봉길 유족들.

안타깝게도 아들 둘 중에 작은 아들은 두 살 때 사망하였으며, 큰 아들 윤종에게서 장손녀 윤주경과 장손자 윤주웅이 나왔다. 그런데 장손녀인 윤주경은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 인수위에 소속되어 활동하였으며,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하였다. 장손자 윤주웅은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93학번), 고려대 대학원 기계공학과 석박사통합과정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현재 학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조카 윤용은 전 고려대 신방과 교수로 현재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 대표로 재직중이다.

9. 그 외

의거에 실제 사용된 폭탄은 도시락이 아닌 물통 폭탄이었음에도, 불발된 도시락 폭탄이 왠지 모르게 '윤봉길 의사 전용 유니크 아이템' 이미지가 더 강해서, 어린 아이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던 시절 도시락을 던지며 윤봉길 의사 흉내를 내는 장난을 종종 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디시위키 에선 윤봉길 의사를 요리사인 것처럼 묘사한다. 일명 일본 제국주의자 통구이 전문 요리사.

그리고 윤봉길 의사가 사용한 폭탄은, 독립운동가김홍일 장군[8]이 제작한 것이다. 백범일지에 왕웅이라는 가명으로 나오는 김홍일 장군은 이봉창 의사가 사용한 폭탄도 제작했는데, 폭탄의 위력 부족으로 이봉창 의사가 실패하자 안타까워하면서, 윤봉길 의사가 사용할 폭탄을 열심히 제조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성능 실험에서는 성공적으로 폭발했으나, 도시락 폭탄은 터지지 못했다.

정확히는 누가 제작했는지 모른다. 독립운동의 경우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대부분이 독립운동가들의 기억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매우 높다. 그렇기에 의열단의 활동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독립운동은 절대적인 객관적 기록이 부족한 상황이다. 그래서 이봉창, 윤봉길 폭탄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혼선을 빚고 있다.

이에 대한 설은 2개가 있다. 하나는 김홍일이 제작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김홍일이 폭탄제조자 왕백수(왕바이수)를 소개시켜주었다는 설이다. 결론은 둘 중 무엇이 맞는지는 모르나 김홍일이 이 사건에 깊이 개입했다는 것은 자명한 듯하다.

그러나 2010년 4월 28일 기사에서 윤봉길의사의 폭탄을 제작한 인물이 공개되었다. 링크

이름은 '향차도'라고 하며 19로군 후원회 병기책임자였다고 한다.

위키백과에서 저격수로 분류되어 있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스나이퍼가 아니고, 당시뿐이 아니라 현재에도 높은 사람을 어떤 형식으로든 처치하면 대개 '저격'으로서 분류된다. 여기서의 저격은 '총으로 쏴서 죽였다'는 뜻이 아니다. 저격(狙擊)[9]의 한자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 문제.

2014년 7월 3일 진수한 손원일급 잠수함 5번함이 윤봉길함으로 명명되어 윤 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게 되었다.

링크 가끔 윤봉길의 폭탄투척 직전이 촬영된 사진이 있다고 애기하는 몇몇 사이트들이 있는데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진을 보면 윤봉길이라 추정되는 사람이 단상 앞에 위치해 있는데 실제로는 단상 앞이 아니라 뒤에서 폭탄을 던졌다. 게다가 사진을 보면 중절모를 쓰고 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는 발언은 단 한마디도 없다. 고로 이 사진에 찍힌 사람은 윤봉길이 아니라 그냥 다른 행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이 사진의 인물이 진짜 윤봉길이라 단정하면 다른 문제가 생기는데 바로 이 남자의 옷차림이 위의 조작논란이 일고 있는 사진의 인물의 옷차림과 완전히 똑같기 때문이다. 중절모까지 손에 들고 있어 확인사살.

10. 롯데그룹과의 관련 논란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현재의 롯데그룹과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는 시게미츠 하츠코라는 일본인 여성과 1945년에 결혼했는데, 시게미츠 하츠코는 시게미츠 마모루조카라는 설이 있다.. 시게미츠 마모루는 주중공사였던 1932년,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맞아 다리를 잃었으며 그후 의족을 사용했다. 2차대전 항복문서 조인식에 일본 외무대신으로 참석해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던 인물이며, 도쿄 전범 재판에서 형을 확정받은 A급 전범이었으나 한국전쟁 와중에 사면된 것으로 알려졌다.

신격호 회장은 일본 내에서 굳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 심지어 한국 이름도 안쓰고 시게미츠란 일본 성을 쓰는데, 일본 국적 취득 당시 아내 시게미츠 하츠코의 성을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시게미츠 하츠코는 신격호 회장의 아들인 신동빈, 신동주의 어머니이다.

한편 롯데그룹에서는 이 사실에 대해 그동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다가', 2015년에 경영권 다툼으로 롯데그룹과 일본과의 연관성이 언론을 통해 드러나면서 한국내 여론이 악화되자 이 부분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롯데측은 오히려 시게미츠 하츠코가 남편의 성을 따랐다고 주장하는데 근거 자료를 내세운 것은 아니기에 단순히 이미지메이킹/언론플레이인지 아니면 정말 전범 집안과의 연관성이 있는 것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다. 어느 쪽이 정말 진실인지는 정확한 증거가 나오기 전에 알 수 없는 상황. 이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시게미츠 마모루, 신격호 항목 참조.

사실 시게미츠 하츠코는 2015년 현재 멀쩡히 살아있고, 경영권 분쟁 당시 김포공항으로 입국할 때 국내 기자들과 대면한 적도 있다.

시게미츠 하츠코가 명확하게 사실을 확인해주면 논란이 결론이 나겠지만, 특별히 부인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롯데그룹측의 해명과는 별도로 아직 명확한 진실은 알 수가 없다.

논란이 커지자 롯데그룹에서는 윤봉길 의사 기념 사업회에 후원을 했다. 10억원을 쾌척했음에도 윤봉길 의사 기념 사업회에서는 떨떠름한 반응.

11. 대중매체

  • 1980년대에 MBC에서 비록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와 그의 주변을 다룬 드라마가 많이 방영되었다. 1984년 작 조선총독부에서는 배우 정성모가 1989년 백범일지에서는 배우 박영태가 윤봉길로 분했다.
  • 1986년에는 광복절 특집 드라마로 <그의 아내>라는 작품이 방영되었는데, 특기할 것은 윤봉길이 아닌 그의 아내 배용순이 주인공이다.[10] 배용순 역은 김용선, 윤봉길 역은 박영규가 맡았다.
  • 1992년 의거 60주년을 기념하여 문화방송에서 특집 드라마로 만들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상물에서는 자주 나왔지만, 윤봉길 의사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이 작품뿐. 제목은 문자 그대로 <매헌 윤봉길>. 윤봉길 역에 김상중, 김구 역은 정욱이 맡았다. 김상중은 훗날 백범 김구 전기 드라마에서 젊은 시절 김구를, 정욱은 이승만 역을 맡았다. 윤봉길 의사는 차광수.
  • 팩션 웹소설 재벌강점기에서는 소년 윤우의로서 일본 몰락 작전에 가담. 1925년 8월 15일에 히로히토 섭정의 연설이 열리는 도쿄 사쿠라다문 광장에 진짜 도시락을 들고 들어온 뒤[11], 어진 측에서 띄운 애드벌룬을 향해 총을 쏴서 엔화가 광장에 흩어지게 만든다.

12. 관련 문서


  1. [1] 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목바리마을
  2. [2] 안습인 게 글을 읽지 못하니 근처 묘소들에 꽂힌 나무 말뚝들을 모조리 뽑아와 윤봉길 앞에 내려놓고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러자 윤봉길은 "이 중 어떤 것이 당신의 부친 묘에서 뽑아온 것인지 기억하시오?"라고 촌철살인을 날렸고 농부는 멘붕했다고 한다.
  3. [3] 배경식 교수는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와 그 개정판인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을 통해 윤봉길 의사가 김구를 찾아간 것을 최대의 수확이라고 주장했다.
  4. [4] 결과적으로 상하이를 방어하던 19로군과 5군을 쫓아내는데 성공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를 위해 제공권, 제해권을 모두 장악했음에도 2차례나 병력을 증원해야 했으며 무장도 빈약했던 중국군의 2배나 되는 병력을 동원해야 했다. 이겼다고 하면 이긴 셈이겠지만 일본측에서 자랑할 수준은 아닌 찜찜한 결과였으며 일본군 대대장이 포로로 잡히는 등 중국군을 상대로 전에없는 참담한 결과들이 초래되었다.
  5. [5] 해군 육전대만으로 국민당군의 방선을 뚫을 수 없자 해군 사령관이던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의 요청으로 파견된 육군을 말한다. 초기에는 1개 사단+1개 혼성여단으로만 구성되었으나 이 정도 병력으로도 방어선이 뚫리지 않자 2개 사단을 추가 파병하여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를 창설하게 된다.
  6. [6] 백범일지에 의하면 의거 당일 아침을 함께하며 있었던 일화이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조찬 자리가 된다.
  7. [7]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이 때의 시계란 것은 손목에 차는 물건이 아니었다. 당시의 시계는 회중시계를 뜻하는 것이었으며 손목시계의 대중화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나 이루어졌다.
  8. [8] 독립 이후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육군 중장까지 진급.
  9. [9] 노리고 겨냥하여 총을 쏘거나 치는 것
  10. [10] 배용순의 회고를 바탕으로 제작한 드라마이며 당시 생존해 있던 실제 배용순도 얼굴을 비춘다.
  11. [11] 나중에 순사가 이 도시락통을 보려고 몸싸움을 했다가 진짜 도시락인 걸 알고 난 뒤, 모리 순시가 자기 삼촌이라니까 겁에 질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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