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

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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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생활 당시

귀국 후

1947.12.22 ~ 2007.06.26

5.18 최후의 수배자[1]

합수(合水)[2]

1. 일생
1.1. 학생운동으로의 투신
1.2. 전남운동권의 중심
1.3. 5.18과 미국 망명
1.4. 미국에서의 활동
1.5. 귀국 후 활동
2. 여담
3. 논란

1. 일생

1.1. 학생운동으로의 투신

윤한봉은 1947년 전남 강진군에서 태어났다.

1.2. 전남운동권의 중심

그는 동원능력과 인간관계가 굉장히 좋았는데, 이것은 그가 사회운동을 함에 있어서 중요한 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는 함평 고구마 사건에서 활발하게 농민들과 농민운동가들을 지원했으며, 전남대학교의 운동권을 주도했다.

1.3. 5.18과 미국 망명

1980년 5월, 5.17 내란이 터져서 각 대학의 지도부들이 기습적으로 검거되자, 전남대학교의 지도부는 급히 피신했다. 윤한봉 또한 피신해야만 했다. 그 사이 광주에서는 5.18이 벌어졌고 광주 안팎을 오가는 도피생활 동안 그는 5.18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5.18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 채 수배자가 되어 도피행각은 계속 되었다.

그러다가 전남대 후배들의 도움으로 무역선에 밀항, 1981년 미국으로 망명을 가게 되었다.

1.4. 미국에서의 활동

윤한봉은 미국에서 "민족학교"를 만들고 미주 지역의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을 끌어모아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려고 했다.

1.5. 귀국 후 활동

1993년 수배에서 풀린 윤한봉은 국내로 돌아와 5.18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운동에 힘쓰다가 2007년 세상을 떠났다.

2. 여담

3. 논란

그의 증언에서 5.18이 사전기획되었다는 왜곡이 발생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사망한 이후 서울의 봄 동안 윤한봉은 유신체제와 군부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일종의 무장투쟁을 기획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구상은 주변인들에게 씹혔다. 더 자세한 내용은 관련항목을 참고바람.


  1. [1] 1980년 수배된 그는 1993년에야 수배자 생활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
  2. [2] 윤한봉의 아호로 자신은 '똥거름처럼 살겠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했지만 주변사람들은 '그(윤한봉)가 가는 곳에 항상 사람이 모여든다'고 여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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