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1907년, 영국 신문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극동 특파원으로 조선에 파견된 프레더릭 매켄지(F.A. Mckenzie)가 양근군(오늘날의 양평군)에서 만난 의병들을 찍은 사진. 중앙에 다른 사람의 의상과 대비되는 정모코트를 착용하고 환도로 보이는 칼을 멋들어지게 어깨에 댄 사람이 보이는데, 그는 해산된 뒤 자신에게 지급된 피복과 장비를 그대로 챙겨 의병에 합류한 구 대한제국군 육군 장병들 중 한 명이다.[1] 후에 이 사진은 항일 무장 투쟁 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유물이 되었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는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위 사진을 찍은 영국인 기자 매켄지와 인터뷰를 한 의병 부대의 의병장이 남긴 말.

"...전술을 알지도 못하는 유생이나 무기도 없는 농민이 순국을 각오하고 맨손과 맨주먹으로 적과 싸워 뼈를 들판에 파묻을지언정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오랜 역사적 전통 가운데 배양된 민족 정신의 발로였다..."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義兵

1. 본문
2. 의의
2.1. 부정적 측면
3. 군사적 한계
4. 효과
5. 한국의 의병
5.1. 조선 시대 의병 지도자 목록
5.2.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시대 의병 지도자 목록
5.2.1. 의병목록
6. 중국의 의병
7. 유사 개념
8. 서브컬처에서의 묘사
9. 관련 문서

1. 본문

왕조 시대 외적의 침입이나 대규모 반란에 대항해 사적으로 조직하여 정부군을 돕거나 향토 방위에 힘쓰는 군대를 뜻하는 말. 요즘말로 하면 의용군이나 민병대.

기록에는 보통 "○조 ○○년 하늘이 노하시어 나라에 망조가 드니 외적이 들끓어 백성들이 고통에 신음할 제, ○○의 땅에 한 선비[2]가 있음에 이름은 ○○이라 하였다. 국난의 상황에 스스로 웅대한 의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어느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니 그 곁으로 천하의 호걸 협객이 모였으메, 경공이 뛰어난 자, 의협심이 강한 자, 권법이 출중한 자들이 모여 정의로 불의를 심판하여..."같은 식으로 묘사된다.

2. 의의

나라의 국난 극복을 위해서 민간인들이 일어났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애초에 국가의 정규군이 외침을 막아내지 못했거나 대규모 반란을 야기하게 했다는 점에서 국가의 실패를 드러내는 면이라 의병 활동을 그저 좋다고 보기만은 곤란하다. 하지만 국가와 내가 하나이며 외적은 나와 다른 이질적인 공격자라는 의식이 없으면 의병이라는 것 자체가 생길 수가 없다. 이런 면에서 민족적 일체감이나 국가적 일체감이 없으면 의병 자체가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2.1. 부정적 측면

국가의 입장에서는 사실 달갑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본래 군대를 운영하는 것은 돈을 밑 빠진 독에 쏟아 붓는 것처럼 엄청난 자금을 필요로 한다.[3] 단순히 의기만 가지고는 의병을 조직하기 힘들기 때문에 의병장은 보통 자기 지역에서 재력을 가지고 있거나 명성이 높은 인물이기 마련이다. 이들의 의병 활동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면 의병장들은 더욱 높은 명성을 얻게 되며 무력 집단지역 근거지까지 가지게 된다. 의병의 활동으로 인해 문제가 해결된다면 더욱 명성이 높아지고, 스스로 국가적 난제를 수습하지 못한 중앙 정부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추락한다.

그 결과 문제가 해결되면 의병은 군벌화 하고, 의병장들은 지방의 권력자가 될 수 있다. 실제로도 처음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런 출세를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키는 인물도 많다. 당장 유명한 삼국지의 유비만 하더라도 의병으로 군세를 일으켜 한 나라의 왕이 된 인물이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한 이홍장, 증국번 같은 한인들 역시 이런 사례에 속한다.[4]

3. 군사적 한계

다만 의병 체제는 성공의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만은 않다. 일단 의병은 중앙군의 소속이 아니라서 중앙군이 받을 수 있는 만큼의 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전투 도중 부상을 입거나 사망했을 경우 중앙군은 이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보장해주지만, 의병의 경우는 그 소속 조직의 상황에 따라 지원이 없을 수도 있다. 물론 의협심으로 자발적으로 싸우다 그렇게 된 것이긴 하며, 곽재우 등 임진왜란의 의병장들이나 전공을 세운 의병에게 정부에서 벼슬을 주거나 칭송을 해준 사례는 많다.

장비 수준 또한 지도자의 수준이 미치지 못한다면 중앙군에 못 미치는 떨어지는 장비 수준을 보유하게 될 수도 있다. 또한 중앙 정부의 강력한 인력 소집 능력에 비해 순전히 의협심만으로 인력을 소집하므로 머릿수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핵심 인사들이 전략 / 전술적 개념이 얼마나 있는지도 문제시 된다.

또한 의병의 효과는 힘의 균형이 어느 정도 있을 때나 통하는 이야기다. 임진왜란과 같은 경우에도 초기에 밀린 부분을 제외하면 조선의 군사력이 소멸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서는 시점이 되어서는 보급 차단 및 곡창지 방위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이는 아군의 주력이 적의 주력을 붙잡는 상황에서 볼 수 있는 전술 효과였다. 하지만 구한 말이나 여몽 전쟁기처럼 완전히 정복 당한 상태에서의 의병 활동은 침략군 입장에서는 귀찮은 저항 조직 정도 말고는 큰 의미를 발휘하지 못했다. 적을 상대할 주력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에서 군소 조직인 의병으로 적의 주력을 당해내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의병보다 더 정예한 군사 조직이었던 여몽 전쟁기의 삼별초도 힘의 균형이 기운 상태에서는 그저 일시적인 저항에 그쳤을 뿐이었다.

4. 효과

하지만 의병은 일단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적군에게 지대한 심리적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다. 자신들의 한가운데, 혹은 후방이나 진격로 등에 자신들을 궤멸시키는 것이야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어찌되었든 피해를 입힐만한 세력이 있다는 사실은 진군 속도나 경로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5][6] 전쟁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공격군 입장에서 볼 때 진출 지역의 민간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무장 투쟁에 나설 정도로 공격군을 지지하지 않고 적대한다는 사실은 공격군의 사기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의병은 무장 수준이 비참하기 때문에 정규군처럼 한눈에 구분이 힘든데, 그렇다고 아무 민간인이나 보이는대로 족치면 현지인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의병에 가담하는 현지인들이 더욱 늘어나게 될 가능성이 급상승한다.[7] 민간인 하나 족쳤는데 분노한 현지인 10명이 의병에 가담하면 단순히 주먹구구식으로 계산해봐도 침략군 쪽이 명백한 손해. 또한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군율이 약하고 조직력이 떨어진다는것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전술적인 예측이 어렵고 나 죽고 너 죽자는 식으로 막나가기 시작하면 상당한 피해를 강요받기 때문에 더더욱 골 때려진다.

그리고 의병도 일단은 싸울 수 있는 자들인지라 아무 힘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의병장들도 대체적으로 의병의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의병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게릴라 전술을 주로 활용한다. 이렇게 되면 당하는 침략군 쪽은 짜증을 넘어서 매우 큰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5. 한국의 의병

한국사로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계의병(繼義兵) 등)과 한말 을미 의병 등이 유명하나, 다른 시대 특히 고려몽골의 침입 때나 조선 후기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이 활동한 바 있다. 심지어 홍경래의 난 등 반란군을 상대로 의병이 일어난 경우도 있다. 의병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다양해서 승병들은 한국 불교가 호국 불교의 성향을 띈다는 것을 잘 보여주며, 몽골의 살리타이가 고려를 침입했을 때 약 3,000명의 고려 의병에게 기습을 받는데 이 의병들의 정체는 사실 도적(…)이었다고 한다.[8] 하지만 고려 이전에는 기록이 부실... 아니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의병이 있었다고 해도 알 수가 없다.

동학 농민 운동의 경우는 이를 의병 활동이라고 규정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자발적으로 조직됐으되 중앙 정부와 협력해서 국내외의 위협에 맞서는 민중 무장 조직이라는 게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병의 정의인데, 동학의 경우는 외세에 맞선 민중 봉기라는 점은 비슷하나 중앙 정부를 향해 칼을 겨눈 반란 내지 혁명의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의병과는 구별된다. 다만 아래에 나오듯 항일 의병 중에는 동학 농민 운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는 유형이 있다.

한국에서는 의병이 중국처럼 군벌이 된 일은 없다. 국가 차원에서 유교 이데올로기를 보급하고 지방에 대한 관의 통제를 지속적으로 강화했기 때문. 임진왜란 때도 전쟁 극초반인 임진년 5월부터 의병의 관군화가 진행되어 순수한 의병 부대는 크게 줄고 의병장이 관군을 지휘하거나(정문부) 관군 장수가 의병을 지휘하는(박진) 사례가 나타난다. [9] 김덕령 역시 이경린, 이귀 등 지방관들의 권유를 받아 의병 활동을 시작했고 조정에 이를 알려 충용군이란 칭호까지 받았다. 즉 처음부터 조정의 영향력 하에 있던 의병대다. 대중적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여러 의병장들을 죽이거나 핍박했다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에서 이름이 거론된 이산겸과 김덕령을 죽인 탓이다. 불멸의 이순신 등 드라마에서도 이와 같이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선조가 의병장들을 전부 숙청한 것은 아니어서 의병 활동을 내세워 종전 이후 집권당이 된 대북 같은 케이스도 있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을미사변 이후부터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한데 처음에는 지방 유생들이 주도하였으나 점차 농민이나 포수 출신의 의병장도 나오게 되었고[10] 전국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며 1907년의 군대 해산 이후에는 해산 군인이 합류하여 그 세력이 더욱 커진다. 1908년 의병의 세력은 절정에 달해 7만명에 이르렀다. 이에 일제는 일진회의 회원들을 총알받이로 동원하는 한편 남한 대토벌 작전(삼광 작전)을 전개해 의병은 물론 의병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말살함으로[11] 의병의 세력은 크게 축소되어 불과 1년 후인 1909년에는 25,000명으로 격감했고 1910년에는 고작 수천명 단위만이 잔류했다. 많은 의병이 일본군과 헌병 보조원들에 의해 토벌되었고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주연해주 등지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기에 이른다.

5.1. 조선 시대 의병 지도자 목록

5.2.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시대 의병 지도자 목록

후에 만주로 넘어가 독립군으로 활동하는 이들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한반도 내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인물들이다.

5.2.1. 의병목록

6. 중국의 의병

중국사에서도 이런 예를 볼 수 있는데,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후한황건적에 대항하여 일어난 의병들은 나중에 여러 군웅의 기반이 되었으며, 남북조시대에서 선비족을 격파한 동진의 명장 유유양나라의 장수 진패선은 자신들이 거둔 전공을 무기로 백성들의 명성과 지지를 얻어 나중에 을 세워 황제가 된다.

또한, 나라는 황소의 난에서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 지방 절도사들의 할거로 멸망하게 된다. 이런 문제로 인해 중앙 정부에서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남송 시대에 금나라에 대항하여 의병을 이끌었던 악비 등은 충성하던 정부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리고 원나라남송을 침략 했을 때 남송의 의병에게 크게 당했고 비록 국체 였던 조씨 황가가 애산 전투에서 멸문지화 당해 나라는 멸망했지만 저항은 극심해 원나라가 장강 이남 지역 한족을 심히 탄압하는 계기가 된다.

명청 교체기 때엔 명나라의 잔존 정규군을 포함한 의병이 있어 청나라의 중국 정복을 방해했다. 남명이 북경 함락 이후 바로 건립되었지만 미약한 행정력과 황제들의 무능력으로 북경 이외 지역에 힘을 못써 이들은 무적無的 신분으로 청나라와 오삼계를 비롯한 항장들에게 맞서 양주 십일[21] 과 강음 대학살을 비롯해 피냄새 나는 저항을 이어갔다. 남명도 명조 시절 정규군과는 좀 다른 군대[22]가 있었고 청나라를 효과적으로 막아내 강남 지역 평정에 애를 먹였다.[23]

청나라 대에는 태평천국의 난에 대항하여 증국번이 의병 활동을 하였고, 사실상 국가의 기능을 상실한 청의 실질적 정규군 역할을 일부 담당했다. 증국번의 제자인 이홍장도 함께 활약했으며 이 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권력자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이 의병들은 당시 정규군이었지만 쇠퇴한 팔기군을 대체, 실질적인 청의 군사력을 담당했지만 중앙 정부가 아닌 개인이 통솔했던 경우가 대다수라 군벌화 되었다.

군대의 유지 비용을 사재로는 감당할 수가 없는 경우 상당수의 의병 집단은 그대로 비적이 되었다. 중국 청나라 말기 나타난 군벌과 비적 집단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고 구 중국군이자 현 대만군의 모체인 국부군도 광동 지역 군벌이었는데다 현 중국군인 인민해방군 의 원형인 홍군 도 공산 비적 군벌 이었다.

7. 유사 개념

이름이나 행동 등은 약간 달라도 비슷한 걸로 일제 때 독립군[24]이나 프랑스레지스탕스, 독소전 당시 러시아 파르티잔 등을 볼수있다.

8. 서브컬처에서의 묘사

게임이나 영화 등에선 초반에 여러므로 안습하고 모든 면에서 정규군에 뒤떨어 지지만 초반을 책임지며 민병대 자체가 점점 강해지는 경우가 많다.

문명 5의 한국 문명에서 임진왜란 시나리오(사무라이의 침공)의 전용 특성으로 의병이 나온다. 효과는 유닛이 하나라도 남아있으면 절대로 멸망 당하지 않으며 도시를 탈환하면 추가 유닛이 나오는 것. 그러나 그 추가유닛이라는게 고작 파이크병[25]과 궁수(...)이고, 그나마 일본군과 싸울 수 있는 유닛인 머스킷병은 적게 나와 큰 도움은 안된다. 궁수일 경우 어찌어찌 아군 진영까지 옮겨 석궁병으로 업그레이드 하고, 나머지는 그냥 고기방패로 쓴다.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RTS게임인 임진록 2의 확장팩인 조선의 반격에서 지대지가 가능한 근접 공격 유닛으로 등장한다. 본영에서 의병 모집 연구를 마친 이후 생산 된다. 일꾼이 쌀800의 비용, 일반 창병이 쌀400의 비용인데 비해 쌀 300이라는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생산되는데, 의병이란걸 반영했는지 제대로 된 무기가 아닌 농기구인 괭이로 공격하는데 정규군인 조선 창병과 공격력이 똑같은 비범함을 보여준다. 단 방어력이 일꾼보다도 낮아서 전투 유닛 보다는 지뢰제거라는 특수한 목적으로 더 많이 쓰인다. 단, 지뢰를 매설하는게 명 나라의 장수인 여여문이라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 싸우기 위해 조직 된 민병대 단체'라는 실제 역사와 다르게 vs일본전 보다는 vs명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유닛이다.

9. 관련 문서


  1. [1] 예전에는 교과서 등지에서 이 인물을 ‘학생’이라고 소개했지만. 아니다.
  2. [2] 계급은 중요치 않으나 현직에 있는 고위 관료급은 보통 의병이 되지 않아도 자기가 맡은 군사들이 있어서인지 잘 안 나온다. 관료들이 이를 실행하면 당연히 의용군, 즉 의병 모집이 아니라 징병 혹은 모병이 된다.
  3. [3] 군대 운영 비용이 다방면으로 많이 들어가는 것 자체도 맞지만, 정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유가 전혀 틀리지 않은 것이 군대 운영 자체만으로 파생되는 물질적 이득이 사실상 전무하기 때문이다. 약탈이나 둔전 등의, 비용을 그마나 메울 수 있는 방법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4. [4] 그래서 국가 시스템이 살아있다면 되도록 정규군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조선임진왜란 당시 모인 의병들 상당수를 관군으로 편입시켰다. 의병이 관군으로 편입되면 지휘권이야 기존의 의병장이 갖는다 하더라도 일단 정규군이라 전후 해산이 용이하다.
  5. [5] 한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임진왜란만 해도, 이순신 장군에게 보급로를 털리고 진주대첩에서마저 패하자 어떻게든 보급로를 확보하려 든 왜군에게 골칫거리 수준이 아니라 엄청난 압박이 되었다. 말 그대로 '모든 곳'에서 적이 나타났기 때문.
  6. [6] 특히 독소전쟁처럼 한쪽이 장거리를 이동하는 경우 모든 지상 통로를 통한 보급 부대에 어느 정도 이상의 무장을 시켜야하며 현대에는 IED 등의 설치를 통한 보급로의 봉쇄 등도 가능하기에 진격 거리가 늘어남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병력이 필요해진다.(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한 병력 + 그 늘어난 병력을 보급해야 하는 보급 부대 + 다시.....)
  7. [7] 항우가 이를 모르고 했다가 지 목이 날아갔다.
  8. [8] 이 도적은 일반적인 도적이 아니라 농민 경제 파탄으로 인해 생겨난 유랑민이었다. 이걸 도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고려 정부가 유랑 농민들을 '초적(草賊)'이라고 불렀기 때문. 한낱 거지떼 따위가 대체 무슨 배짱으로 몽골군을 건드린 거지(...)이게 반도의 기상 이다.
  9. [9] 당시 조선은 양인개병제에 의거 농병일치를 수행하고 있었고, 의병에 참가한 전투원들이 사실상 관군(...) 전력이었기 때문
  10. [10] 이것 때문에 계급 간 갈등이 불거진 경우도 있었다. 의병장 김백선이 중군에서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해 따졌더니 유인석이 상놈이 양반에게 대든다며 처형했고, 이를 본 포수 출신의 의병들 중 상당수가 신분제의 한계를 느끼고 이탈해 버렸다. 유인석은 이외에도 동학 출신의 의병을 반역도로 몰아 처형하기도 하였으며 이 때문에 수많은 농민들이 이탈하게 되었다. 물론 이건 해당 항목에 있듯이 좀더 복잡한 사정과 근거가 있긴했지만.
  11. [11] 말이 토벌이지 사실상 학살 수준이었다 한다.
  12. [12] 아들 고종후, 고인후 형제와 함께 삼부자가 모두 의병 활동을 한 충신들이다.
  13. [13] 고경명의 아들이자 고종후의 동생으로 아버지와 함께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14. [14] 고경명의 아들이자 고인후의 형으로 아버지와 동생이 죽은 후 의병 활동을 받아 스스로 복수 장군이라고 칭하며 활약한다.
  15. [15] 임진왜란(고령 사건 사고와 사회 운동)
  16. [16] 정인홍 자료
  17. [17]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삼부자와 비슷한 케이스로 이쪽은 큰 형 최경운, 둘째 형 최경장, 최경희까지 3형제가 의병 활동을 했다.
  18. [18] 의병 지도자 민긍호의 외외고손자는 카자흐스탄피겨 스케이팅 선수 데니스 텐이다.
  19. [19] 배우 손현주 씨가 드라마 제중원에서 카메오로 나올 때 맡았던 배역. 이름 때문에 가공의 인물로 혼동하는 이들이 있는데, 실존 인물이다.
  20. [20] 의병 활동을 하다가 만주로 넘어가 독립군 활동을 한다.
  21. [21]양저우 지역의 명군이 청군과 맞서 싸우다 성 함락 이후 열흘 동안 학살이 일어났다. 양주십일기를 비롯한 기록이 남았다.
  22. [22] 대부분 전력이 약했고 정통성은 당연히 떨어졌다. 일단 가장 네임드가 정성공의 군대인데 정성공 부터가 아버지인 정지룡해적 출신 이었다.
  23. [23] 오죽 그러니 같은 명조인이었던 오삼계, 상가희, 경중명을 번왕으로 내세워 까다로왔던 운남, 광동, 복건을 다스리게 했고 강희제 때가 되서야 삼번의난을 겪고 과거 명조 전토를 청나라 영토 안에 넣었다.
  24. [24] 실제로 한말 의병의 일부가 만주 등지로 흘러 들어가 초기 독립군 결성에 영향을 미쳤다.
  25. [25] 이 시나리오는 창병이 쓰레기 취급받던 오리지널을 바탕으로 한다. 당장 싸워야할 사무라이, 머스킷병 전투력은 16, 파이크병은 겨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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