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

일제강점기 왕공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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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덕수궁 이태왕

이희(고종)

창덕궁 이왕

이척(순종)이은(영친왕)

공족

운현궁 종주

이희(흥친왕)이준(영선군)이우이청

사동궁 종주

이강(의친왕)*이건

궁가의 종주만 표기함.
밑줄표시는 왕공족의 수장을 표기함.
※ *표시는 생전에 도중 종주 양위를 표기함.
※ 후작 이하의 작위와 관련한 정보는 조선귀족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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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동궁의 역대 주인

사동궁 역사 시작

1대 의친왕 이강

2대 이건

2대 이건

1대 의친왕 이강

매각

義親王
의친왕


의화군 시절


대한제국 육군 부장 예복 차림

군호

의화군(義和君)

출생

1877년 3월 30일
조선 한성부 창덕궁 덕인당(德仁堂)

사망

1955년 8월 16일 (향년 79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사동궁 별궁

능묘

홍유릉 내 의친왕묘(義親王墓)

본관

전주(全州)

강(堈)

아명

평길(平吉)

만오(晩悟)

부모

부황 고종태황제, 모후 명성태황후
생모 귀인 장씨(貴仁張氏)

친왕비

연안 김씨(본명: 김수덕, 의친왕비)

종교

천주교(세례명: 비오,Pius)

1. 개요
2. 생애
2.1. 고종의 왕자
2.2. 일제강점기의 행적
2.3. 해방 후 말년
3. 인물됨
4. 후손
5. 관련 서적
6. 대중매체에서

1. 개요

고종황제의 5남이자[1] 독립운동가이다.[2] 휘는 강(堈)[3], 초명은 평길(平吉), 호는 만오(晩悟). 가톨릭 세례명은 비오(Vio).

2. 생애

2.1. 고종의 왕자

귀인 장씨(張氏) 소생이다. 어머니 장씨는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의친왕을 낳은 이후에 궐 밖으로 축출되어 궐 밖에서 살다가 명성황후가 죽은 후인 1900년에야 숙원(淑媛), 1906년에야 귀인(貴人)으로 추증되었다.

1891년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졌으며[4]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6개국 특파 대사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1899년 미국 유학을 갔는데, 다음 해 8월에 의친왕(義親王)으로 승격되었다.[5]

1901년 3월에는 미국 버지니아 주 세일럼의 로어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김규식 등을 만났으며, 그해 6월에는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 대회에 수행원 및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했다. 이후 로어노크 대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델라웨어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및 하와이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계속하였다. 당시 LA에 기거하던 안창호와는 김규식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독립 운동 자금을 보태기도 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있던 1905년 미국에서 귀국하여 대한 제국의 육군 부장, 제2대 적십자사(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냈다.

한편 이 때 의친왕은 도쿄에서 손병희를 우연히 만났다. 손병희가 마차를 타고 시내를 지나다가 마침 의친왕을 보고 마차에서 내려 예를 표하였는데, 이 때 시종관이 영어로 무언가 의친왕에게 아뢰자 손병희가 "내 나라 국왕을 모시는 놈이 어디 감히 외국말로 아뢰느냐!!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나라가 이 꼴이다!!"라고 일갈했다. 이에 의친왕이 "그대가 옳다."며 다독였고, 이러한 손병희의 의개에 감복해 통교하게 되었다.

1907년 1월 15일에 의친왕이 북한산성에 문관 3명, 군관 105명, 민간인 120명 등 총 228명을 비밀리에 소집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의병정미의병 봉기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다. 실제로 이들 중에는 의병을 일으킨 사람도 있었다. 대체적인 기록은 참가자 중 하나였던 목형신(睦衡信)에 의해 남아있으나 228명 전원의 명단은 남아 있지 않다.

1909년 10월 의친왕이 경남 거창군의 정태균을 방문하여 1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이 지방의 뜻 있는 사람들과 북상의 사선 대 일대를 장차 의병의 근거지로 확보하기 위해 일부 땅을 매입하려다가 발각되어 서울로 호송되었다. (다만 이 이야기가 진실인지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다. 거창군에서 편찬한 '거창군지'를 제외한 다른 기록에는 관련된 기록이 거의 전무하며, '조선총독부 시정25주년 기념표창자명감'에 기록된 정태균의 기록에 따르면 오히려 정태균은 그 당시에 거창군의 폭도를 진압하기 위하여 수비대를 위해 주택을 개방하고 임시 막사를 제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정태균은 총독부의 시책에 협조해 기념표창까지 받은 인물로서 독립운동을 할 만한 인물은 아니다. 정범준의 '제국의 후예들' 396-397페이지에 관련된 내용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1911년 봄에 의친왕과 손병희는 극비리에 우이동에서 만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방도를 면밀히 모색했다. 이어서 8월에 손병희가 우이동을 다시 방문하여 주변의 땅 3만평을 매입하였고, 그 이듬해에 봉황각(鳳皇閣)을 세웠다. 봉황각은 바로 3.1 운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황자 순위로는 순종황제 다음이었으나, 자신의 아들 영친왕 이은을 밀던 엄귀비와 이준용 파와 의친왕 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져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이미 나라는 망해 가는데 잘들 하고 있는 짓이다.

2.2. 일제강점기의 행적

1915년 의친왕은 신한 혁명당(新韓革命堂)[6]고종황제북경(北京)으로 망명시키려 한 보안법 위반 사건[7]에도 연루되었다.

1916년, 대한 독립 의군부 총사령관 임병찬이 타계하자, 이에 의친왕이 추모 제문을 보냈다. 이러한 사실로 임병찬 등 독립군과 연통 혹은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의친왕의 처소인 사동궁(寺洞宮)에는 일본제국 경찰이 보초를 서면서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일일히 감시했고, 궁내 사무실에서는 일본인 사무관이 파견되었으며 의친왕의 처소에는 감시를 위한 유리창이 달렸다.

그런데 이러한 삼엄한 감시를 받아 가면서도 의친왕은 3.1 운동 준비와 관련하여 손병희와 모의했다. 1919년 11월 24일자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본국 외무 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공(公)은 즐겨 시정 잡배와 왕래하였는데, 올 봄 독립 운동의 주모자 손병희와는 몰래 회합 모의하였고 손병희가 체포되자 공은 매우 낭패한 빛이 있었다고 한다."라고 말한 걸 봐도 알 수 있다.

1919년 늦가을 의친왕은 최진동 장군[8]과 연통했다. 이후 독립군 단체인 군무 도독부(軍務都督部)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의친왕은 3.1 운동을 통해 침략한 일제를 몰아내려면 무력 독립 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고 "최진동 장군"에 나와 있다. 후에 1939년, 의친왕은 최진동 장군이 아들을 얻자 족자를 보냈는데, 이 족자 사이에 항일 독립 운동에 관련한 밀서를 같이 보내기도 했다.

1919년 11월 9일 나창헌 등의 주도로 상해임시정부로 탈출하려던 사건이 가장 유명하다. 3.1 운동 직후인 4월 13일, 여러 독립 운동 세력들은 드디어 세를 규합해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창설한다. 이 상해 임시 정부 내무 총장 안창호는 아직 미약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상해 임시 정부에게 내부적으로는 구심점, 대외적으로는 정당성을 강화하고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관심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의친왕 망명을 계획한다. 만약 성공한다면, 황족의 입을 통해서 한국인이 마음으로 일본의 통치를 원한다는 일본의 선전전에 대항할 수 있을 거라 기대되었다. 게다가 의친왕은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겠다고 선언하였다.

1919년 11월 20일자 독립 신문에 실린 의친왕의 성명에 “독립되는 우리 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한 일본의 황족 되기를 원치 않는지라.”라고 언급했다.

이전부터 의친왕 이강은 독립운동 세력과 접촉한다든지 독립 자금 지원이 있었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그러던 중 대동단의 전협, 최익환 등과 연락하여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기 위하여 변장하고 거처를 탈출했다. 그 날 밤 10시 쯤 궁의 후문을 감시하던 일본인 리와가 어둠속에서 의친왕과 비슷한 용모의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급히 시내로 향하는 것을 보고 이를 미행하였으나, 이동문 부근에서 이들을 놓쳤다. 이를 상관에게 보고하고 이에 궁내 사무관 구로사와가 결재를 핑계로 의친왕을 만나려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거듭 요청하였으나 거부당하자 막무가내로 의친왕을 만나려 하였고, 결국 의친왕의 탈출은 발각되고 만다.

이에 일본은 필사적으로 의친왕의 행방을 계속 추적했다. 의친왕 일행은 다음날 밤 고종황제가 남긴 150만원의 채권을 전달받는데 성공하는 등 일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결국 의친왕은 11일 만주 안동에서 그의 얼굴을 알고 있던 요네야마 경무에게 적발되어 붙잡히게 되고, 상해임시정부행 탈출은 실패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그에게서 한반도 내에서의 여행의 자유[9]를 빼앗아 사실상 강제 연금 당했다. 이 시기에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사법적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이런 상태에서도 대동단 총재 명의로 독립 선언서를 공포했다. 이후, 총독부 관사에 연금된 채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았지만 그는 거절했다.

일본 측의 수사 기록에 의하면, 의친왕은 자의로 탈출한 것이 아니고 돈이 궁하던 의친왕이 일금 3만원을 빌려준다는 꾐에 넘어가 궁을 몰래 나섰다가 납치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3.1 운동이 한창이던 당시의 사정과 이후 일본이 의친왕에게 대한 태도를 보면, 사실이 아니라고 봐야한다. 가뜩이나 뒤숭숭하던 차에 조선 땅에 거처하면서 황족 중에서 백성들의 신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10] 그가 상해임시정부로 탈출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여파를 몰고 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일본이 수사 기록을 은폐, 조작했던 것이다. 물론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의친왕이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려 했다고 말했다.

물론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일본 측의 수사 기록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행적과 잘 맞지 않는데다가, 적어도 그의 탈출에 임시 정부가 개입된 건 확실해 보인다.

1921년, 대한민국 대표단의 청원 사건에서 연명부에 황족 대표로 이름이 올랐다. 그런데 이 청원서는 실제로 사람들의 서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닥치는 대로 이름을 올린 위작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청원서에 따르면 서상일 등 항일운동가들과 민족종교였던 천도교 등 민족세력 뿐만 아니라 박영효와 같은 친일파들, 마찬가지로 친일괴뢰였던 시천교 등까지 13도와 260여개 군과 각 사회 단체의 대표자 372명이 뜻을 모아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자고 서명을 했다는 것이니, 그 자체로 이미 택도 없는 소리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서명과 필체를 확인하여 위작이라고 결론내리고 연명부에 이름을 올린 인사들에 대한 처벌없이 조사를 마무리지었으나, 여하여튼 진위여부를 알 수 없는 이 건의서와 연명부는 이승만에 의해 워싱턴 회의에 제출되었다.

경주 최 부잣집 12대 마지막 부자로 알려진 최준을 돕기도 했다.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에 따르면 최준의 호 문파(汶坡)도 의친왕이 지어준 것이며, 최준이 독립 운동 자금으로 막대한 자금을 송금해 주다가 정작 자신의 백산 무역 회사가 100여만 원의 부채를 급히 갚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채무를 조정하는데 의친왕이 나섰다는 것이다.

의친왕은 1930년 6월 12일, 공족으로서의 작위와 전 재산을 장남인 이건(李鍵)에게 넘겼다. 이에 대해선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아, 그가 하는 일을 위험하다고 판단한 일제에 의해 작위가 박탈당한 거라는 주장과 일제의 압력에 의해 의친왕 스스로가 물러난 거라는 주장이 있다. 어쨌든 이후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 큐슈에 옮겨가서 살게 되었으나 나중에 도쿄로 옮겨졌다. 자료에 의하면 이 때 일본어로 쓴 각서가 있는데 "친왕은 은퇴하고 공(公)의 칭호와 모든 재산을 장남인 이건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은퇴 후에는 일본에 머물기로 하며, 일본 국내에는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다. 의친왕에게는 당시 화폐로 30만원을 지불하고 의친왕비에게는 생활비로 1년에 12만원씩을 지불한다"는 등의 내용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장남 이건과 사이가 나빴다는 증언이 있다. 의친왕의 5녀인 이해경은 <나의 아버지 의친왕>에서 "차남 이우는 총애했음에도 이건은 미워했다"고 술회했다. 술을 마시면 이건에게 "일본으로 가서 살라"며 화를 냈으며, 이우가 귀국할 때는 직접 경성역으로 마중 나가놓고 이건이 귀국할 때엔 일부러 피하는 등 노골적인 차별 대우가 있었다고 한다. 본인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만큼, 일제에 부정적이었던 이우와 달리 일제에 순종했던 이건이 미덥지 않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건은 “일본 황실의 태도에는 따뜻한 맛이 있는데 한국 황실에는 냉담함 만이 있다”라고 하거나 1945년 8월 12일 황족 회의에서 히로히토를 보고 “그 말투며 태도며 실로 경복하기에 족한 것이 있었다”라 하였으며, 어떻게든 조선인 박찬주[11]와 결혼한 이우와 달리 일본인 마츠다이라 요시코(松平佳子)[12]와 결혼한데다, 일본으로 귀화하면서 다이쇼 덴노가 묻힌 모모야마(桃山)를 성씨로 정하며 “아버지와 연을 끊고 싶어 귀화했다”고 하는 등, 노골적으로 자신을 일본 황실의 일원으로 여겨 아버지인 의친왕과 사이가 나빴던 인물이다.

1930년대에 귀국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때는 알 수 없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창씨 개명이 자발적이라고 모양새를 보여주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내버려두었다는 말이 있...는데 애초에 어차피 씨가 없는 일본 황실의 예에 따라서 조선 왕족들에게는 처음부터 창씨 개명이 강요된 적 조차 없다.

2.3. 해방 후 말년

해방 후에는 김구김규식상해임시정부 각료들과 방문하기도 했다. 딱히 정치적인 경향을 보이거나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으면서 단순한 사회원로 정도로 말년을 누리고 있었으나 황족 재산이 국유화되고 황실 인사를 배척하던 이승만이 정권을 잡으면서 물질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소외당한다.

그리고 6.25 한국전쟁도 겪는데, 고종의 자녀들 중에서 유일하게 전쟁에 휩쓸린다.[13] 개전 후 불과 3일만에 서울이 북한 공산당군에 의해 함락당했는데 북한의 지배하의 서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피죽만 겨우 먹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나마도 딸 이해경이 목숨걸고 노력해서 구한 것이라고. 이후 1.4 후퇴 무렵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70 노구를 이끌고 피난가려니 상당한 고생을 안할 수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도 역시 제대로 못 먹었으니 자연스레 영양 실조에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 노환이 겹쳐, 1955년 8월 15일, 79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임종하기 며칠 전, 천주교 서울대교구 가회동 성당 제3대 주임 박우철 바오로 신부로부터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14] 과거의 인기가 무색하게, 신문들은 짤막하게 "사동궁주 이강이 졸(卒)했다"라는 기사만 한 귀퉁이에 내걸었다고 한다.

사후 어머니 귀인 장씨의 묘소가 있는 서삼릉 묘역에 매장되었다가 의친왕의 자녀들이 홍유릉 묘역에 매장된 의친왕비(김수덕)와의 합장을 추진해 1996년 유해를 이장해 합장묘로 조성했다.

3. 인물됨

술을 잘 먹고 여자를 좋아하고 권총을 잘 쏴서, 젊을 때는 파티장에서 권총을 빼들고 샹들리에의 등불을 쏘며 쇼를 벌인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확실히 범생이 스타일은 아니었으며 풍류를 즐길 줄 아는 탕아 기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탈출극 이전에나 이후에나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이상 과장되게 탕아처럼 행동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면에서 외모도 그렇고 성격 쪽도 아버지 고종황제보다는 비교적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기질을 더 닮았던 것 같다.[15]

사실 대한제국의 황실 인사 중에는 의외로 자동차를 좋아하던 인물로, 자동차 드라이브를 즐기면서 풍류적인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특히 드라이브를 하다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지나가는 여인들을 감상하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게 바로 위에 적힌 대로 과장되게 탕아처럼 행동한 것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의 행적을 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그 이전에는 자전거 광으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당시 탔다고 알려진 차는 미국의 오버랜드.[16]

민족문제연구소 소속의 윤덕한[17]에 의하면, 방탕한 생활 덕에 이토 히로부미에게 여러 차례 꾸지람을 당했다고 한다. 다만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건 탈출 사건으로부터 10년이나 이전이다. 확실히 당시에는 미국에서 사랑에 빠져 '이 여인을 위해서라면 황족도 포기 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윗사람들 뒷목 잡게 하는 행동을 했었다. 그래서 윤덕한은 그가 임시 정부로 가려고 한 걸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사실 윤덕한 뿐만 아니라 고종을 부정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의친왕의 행적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같은 저서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하자 순종황제는 통감부로 가서 그를 조문한 뒤, 의친왕을 도쿄로 보내 이토의 장례식에 참가토록 했으나 일본 정부가 거절했다는 말도 있다.

판단은 알아서. 고종황제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국제 감각과 경험이 많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는 안타까운 면이 있어 보이지만, 일제 하에서 감시라는 명목하에 사실은 어느 정도 보호받고 대우받으면서, 즉 호의호식하면서 호색한으로 살았다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렵다. 황족들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 경력이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만 하지만 일제의 감시가 있었다고는 해도 한 차례의 망명 시도나 간접적인 지원 이상의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지는 않았으며 그렇다고 검소하고 청렴한 삶을 살면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지도 못했다. 결국 대한 제국 황실은 일제의 보호를 받으면서 신망을 잃어 갔고, 그런 황실에 실망한 양반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상당수가 아나키스트로 급진화된다. 이승만이 황실을 싫어했어도 개인적 감정으로만 왕조를 배척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데 그런 이승만에게 의친왕을 포함한 대한 제국 황실 인물들의 무책임함은 황족들을 배척하는 데에 좋은 명분이 되었다.[18]

4. 후손

위장이었든 진짜 모습이었든 탕아답게 그는 여러 처첩을 두고 자식도 많이 낳았다. 현재 인정된 자녀는 총 12남 9녀. 다만 정실인 김수덕와의 사이에서는 자녀를 낳지 못하는 바람에 의친왕의 후손들은 전부 서자 출신이다.

그의 이복형인 순종황제는 후손이 아예 없었고, 의민황태자이방자 여사 슬하의 두 아들 역시 큰 아들 이진은 갓난아기 때 죽고 장성한 황세손 이구 역시 후손 없이 사망했다.. 이복여동생인 덕혜옹주의 외동딸 소 마사에도 후손 없이 자살(로 추정)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고종황제의 후손들은 모두 의친왕계이다.

워낙 자녀가 많아서 아들 중 몇 명은 대가 끊긴 다른 왕족의 양자로 보냈다. 다음은 출계하여 법적으로는 의친왕의 자녀가 아닌 황손들이다.

아들

순서

황실명

생모

출계

2남

이우(아명 이용길)

수인당 김흥인

운현궁영선군 이준용

3남

이방(아명 이흥길, 호적명 이해진)

수현당 정운석

소현세자파의 이기손

4남

이창(아명 이창길, 호적명 이해직)

조병숙

은전군 종가의 이헌용

5남

이주(아명 이수길, 호적명 이해일

수인당 김흥인

인평대군 종가의 이인용

7남

이광(아명 이형길, 호적명 이해청)[19]

송씨

계동궁[20]의 이기용

순서

황실명

생모

출계

1녀

이영(아명 이길순, 호적명 이해완)

수덕당 이희춘

계동궁의 이기용

2녀

이진(아명 이길운, 호적명 이해원[21])

수덕당 이희춘

계동궁의 이기용

3녀

이찬(아명 이길련, 호적명 이해춘)

수완당 김정완

계동궁의 이기용

4녀

이숙(아명 이길영, 호적명 이해숙)

수길당 박영희

계동궁의 이기용

5녀

이공(아명 이길상, 호적명 이해경)

김금덕

계동궁의 이기용[22]

단, 아들들과 딸들의 출계 이유는 약간 다르다. 아들들의 경우 말그대로 대가 끊어진 다른 친척의 후사를 잇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으나 딸들의 경우는 학교를 보내야 하는데 일제가 황실 호적을 인정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다른 친척의 호적으로 입양시킨 것이다.

아래는 법적으로 확실히 의친왕의 자녀로 인정된 황손들이다.

아들

순서

황실명

생모

1남

이건(아명 이용길)

수관당 정씨[23]

6남

이곤(아명 이명길)

수인당 김흥인

8남

이현(아명 이경길)

수경당 김창희

9남

이갑(아명 이충길, 호적명 이해룡)

함개봉

10남

이석(아명 이영길, 호적명 이해석)

홍정순

11남

이환(아명 이문길, 호적명 이해선)

김혜수

12남

이정(아명 이정길, 호적명 이해준)

홍정순

순서

황실명

생모

5녀

이공(아명 이길상, 호적명 이해경)

김금덕

6녀

이장(아명, 호적명 이희자)

김혜수

7녀

이용(아명 이숙기, 호적명 이해란)

홍정순

8녀

이현(아명 이숙향, 호적명 이해련)

홍정순

9녀

이민(아명, 호적명 이창희)

김혜수

의친왕의 장남 이건은 모모야마 켄이치라는 이름으로 1955년 일본으로 귀화하였고 그 후손들도 일절 황실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완전한 일본인이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의친왕의 자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고 표에서 보듯이 2남부터 5남까지는 전부 다른 왕족들의 양자로 갔기 때문에 의친왕의 가계는 6남 이곤이 이었고 현재도 이곤의 후손들이 의친왕의 제사를 받들고 있다. 2018년 2월 현재 의친왕의 아들은 총 3명이 살아 있고 10남 이석만이 유일하게 한국에서 살고 있는데 이 때문인지 마지막 황손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11남 이환[24], 12남 이정[25]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이구의 사후, 이구의 양자가 되어 황실의 후계자(황사손)가 된 사람이 의친왕 9남 이갑의 아들인 이원이며 이갑은 2014년 12월 13일 미국 뉴욕 롱 아일랜드 자택에서 향년 7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리고 많이 알려저 있지는 않지만 , 2남 이우의 아들인 이청 또한 생존해있다. 이우의 야스쿠니 합사와 관련된 KBS 8.15 다큐에서 등장한바.

그리고 2018년 2월 현재 의친왕의 딸은 총 6명이 살아있는데 그 중 그나마 대중들에게 알려진 사람으로는 둘째 딸 이해원(황실명 이진)과 다섯째 딸 이해경(황실명 이공) 등이 있다. 이해원은 2006년 대한 제국 황족회라는 단체에 의해 대한 제국 제30대 여황제로 옹립되었다.(...) 그리고 8녀 이해련(황실명 이현)의 딸은 탤런트 박승아로 KBS 2TV 청소년 드라마 스타트 등에 출연했다.

5. 관련 서적

5녀인 이해경 여사가 1997년에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라는 수기를 펴낸 바 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6.25 직후까지의 사동궁(의친왕의 본가) 생활 및 왕실 상황에 대해 회고하고, 저자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도서관 동양학 사서로 일하면서 발견한 의친왕 관련 각종 기록(항일 운동 관련 기록)도 소개하고 있다. 현재는 절판되었다.

역시 이해경 여사가 써서 2017년에 출간된 <마지막 황실의 추억>이 있다. 저자 일신상의 이야기가 좀 더 많이 실리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위의 수기와 겹치는 내용이 많다. 1930년 생인 저자가 얼마 안 남은 삶을 정리하고 싶기도 하고 위의 수기도 희귀본이 되는 등 의친왕에 대한 자료가 워낙 적은 탓에 다시 책을 펴냈다고 한다. 개인의 수기라고는 해도 의친왕이 항일 운동에 관여한 자료 부분은 출처까지 밝혀가며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상당히 객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6. 대중매체에서

MBC 8.15 특집극 - 의친왕에서 이정길이 주인공 의친왕으로 출연했으며 MBC 조선왕조 500년에서는 아역은 강현종[26], 성인은 이정훈이 맡았고 KBS 명성황후에서는 강태성이 배역을 맡았다. 특이하게 대한민국 초기를 다룬 정치 드라마 제1공화국에도 등장했는데 당시 중견 배우였던 양일민 씨가 연기했다.

최인호의 황실 복원 소설이 아닌. 불교 구도 소설 <길 없는 길>의 주인공이 의친왕의 알려지지 않은 사생아(...)라는 설정. 의친왕이 탈출 실패 후 실의에 빠져서 주색잡기에 골몰할 때 하룻밤 인연으로 관계를 맺은 17세 기생(...)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건전한 삶을 살다가 우연찮게 출생의 비밀을 알고 방황하고 구도를 통해서 극복해나가는 이야기.

입헌군주제인 한국을 배경으로 한 만화 순종황제의 뒤를 영친왕이 아닌 의친왕이 황위를 이었다는 설정이다. 국민들이 일본인 왕비를 받아들였을 것 같지 않아 이렇게 설정했다고 한다.[27]

대체 역사 <대한독립기>도 일단 불쏘시개에 가까운 망작이나, 주인공이 일본에 납치된 덕혜옹주와 함께 수감 중인 의친왕을 구하고 의친왕과 독립운동가들이 본격적으로 일본에게 최강 최고 최악의 복수들을 펼치는 설정이다.

패러독스 사의 전략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는 비동맹주의 한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다만 비동맹주의의 지지도를 올릴 방법이 없기때문에 다른 비동맹주의 국가가 일본을 전쟁에서 이기고 독립시켜주지 않는 한 그의 이름을 보기는 힘들다.[28] 모드의 힘을 빌려 대한 제국 모드를 설치해 플레이하면 프로이센식 입헌 군주제 국가 중점을 통해 볼 수 있다.


  1. [1] 의친왕 관련 서적엔 간혹 고종의 차남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사실 순종과 의친왕, 영친왕 3명을 제외한 고종의 자식들이 거의 일찍 요절한 탓에 이렇게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2. [2] 을사늑약(1905년) 직후 의병 운동을 독려, 지원하였고 이후 꾸준히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하려고 시도도 했단 점에서 친일에 매우 협조적이었던 장남 이건과는 달리 독립운동가로 볼수 있다.
  3. [3] 고종황제의 아들들 중 이름을 하사받은 선(墡), 척(坧), 강(堈), 은(垠), 육(堉), 우(堣)는 모두 휘에 흙 '토(土)'변을 공유한다. 대개 같은 왕의 아들들은 이름자에 같은 부수를 공유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고종황제의 사가(私家) 일원인 흥선대원군과 그 형제들의 손자 이름도 항렬자를 제외한 이름 글자에 흙 토(土)변이나 흙 토가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흥녕군의 손자 이기용(李鎔), 흥완군의 손자 이달용(李鎔)과 이규용(李鎔), 그리고 흥인군의 손자 이지용(李鎔),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鎔)과 이문용(李𪣢(土 + 汶)鎔), 그리고 이관용(李土+灌鎔).
  4. [4] 군호는 평안북도 의주에서 유래했다.
  5. [5] 1900년 양력 8월 17일 '친왕' 신분의 '의왕'으로 책봉했다.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황자를 책봉하다. 정식으로 금책을 주는 절차는 의왕이 귀국한 후인 1906년 양력 7월 24일에 거행했다. 의왕 이강에게 옥책과 금보를 주다.
  6. [6] 상하이에서 이상설,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유동렬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독립 운동 단체
  7. [7] 경성으로 잠입한 외교 부장 성락형을 비롯하여 의친왕의 장인 김사준, 김사홍, 김승현, 변석붕, 김위원, 심인택, 박봉래, 정일영, 염덕신, 이경창 등 관련자가 1915년 이후 전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8. [8] 봉오동 전투의 주역이다.
  9. [9] 당시는 황족에게 허용된 특권이었다.
  10. [10] 당시의 신문 광고나 전단을 보면 그저 '전하가 칭찬하신 고무신', '전하가 애용하는 위장약' 등의 광고 카피가 보이는데 당시에는 앞에 아무 말도 없이 '전하'(殿下)라고 하면 의친왕을 가리켰다고 한다. 광고에까지 이용될 정도의 인기였음을 알 수 있다.
  11. [11] 박영효의 손녀
  12. [12] 이방자 여사의 이종 사촌 여동생
  13. [13] 고종의 9남 4녀 중 5남 3녀는 유아기에 사망. 완친왕은 조선 시대였던 1880년 사망. 순종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6년 사망. 의민 태자는 1970년, 덕혜 옹주는 1989년 사망했으나 전쟁 당시에는 둘 다 일본에 거주.
  14. [14] 정실 김수덕도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이복 동생 부부 영친왕이방자 여사도 각각 '요셉'과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의친왕과 영친왕의 경우는 정식 세례가 아니라 비상 세례(대세)일 가능성이 높다. 대세라는 건 임종 직전의 세례로, 일반적인 세례와 다른 방식이다. 대세에 관한 것은 여기를 참조.
  15. [15] 사실 대원군이 자신과 성격, 기질이 가장 닮았다고 생각한 손자는 장손 영선군이다. 하지만 이쪽은 친일 테크. 외모는 할아버지 대원군보다는 아버지 흥친왕을 닮았다.
  16. [16] 현재는 크라이슬러 산하 브랜드가 되었다. 크라이슬러의 프리미엄 SUV인 지프 그랜드 체로키의 고급 버전도 이름이 오버랜드다.
  17. [17] 김완섭에게 사랑받는 학자이니 알아서 판단 잘 하시길. 해당 항목 참조.
  18. [18]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면 탈출실패 이후 일본에 의해 사실상 감금되어 있다가 10년 뒤에는 아예 도쿄로 강제로 끌려갔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걸까? 당장 사동궁에서 기거할때도 독립의 ㄷ자도 나왔다간 최소 일본행을 피할 수 없었을테니 체신에 각별히 주의 했어야하는게 정상이다. 더군다나 의친왕마저 일본으로 끌려간다면 사실상 국내의 구심점은 없어지게 되기도 하고. 그렇다고 고종 및 다른 직계 황족들을 살펴보자면 영친왕은 어린나이에 이미 일본으로 끌려갔고, 순종은 애초에 김홍륙의 독다사건 이후 몸이 정상이 아니어서 움직이기조차 힘들었고, 고종은 이미 노인인데다가 자신의 죽음으로 3.1운동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방계 황족들은 대부분 이우처럼 일본으로 끌려가거나 아직 어린 아이이거나 영선군과 같이 친일파였다. 그나마 멀쩡한 직계황족인 의친왕이 탈출하지 못 한것은 애석하지만 애초에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까지 무리한 잣대를 들이미는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물론 영선군은 까여도 싸다
  19. [19] 의친왕비가 작성한 황손 계보도에는 이해창으로 적혀있으나 사동궁에서 잘 쓰지도 않는 호적상 이름이라 헷갈려 오기한 것이라고 한다.
  20. [20] 영조의 동생 연령군 이훤의 종가. 흥선 대원군의 형 흥녕군의 가계다.
  21. [21] 후술하겠지만 2006년 대한 제국 황족회에서 여황제로 옹립한(...) 그 분 맞다.
  22. [22] 1954년 의친왕비 호적에 정식 입적.관련 기사. 단, 법적 이름은 이해경이 맞다.
  23. [23] 아랫 글 참조.
  24. [24] 아명 이문길
  25. [25] 아명 이정길
  26. [26] ROX Tigers 감독 그 강현종이다.
  27. [27] 단, 드라마판에서는 의친왕이 황위를 잇지 않았다고 나온다. 혈통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1916년 생 황실의 적장자가 해방 후 황실을 복원해 황제가 되었다고 나오는데 의친왕은 적장자가 아니므로.
  28. [28] 한국의 모든 지도자 초상화가 아시아 기본 지도자 초상화로 되어 있어 얼굴은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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