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

이괄의 난
(李适—亂)

날짜

1624년 1월 24일 ~ 4월 1일

장소

한반도 북부 일대

결과

관군의 반란군 진압

교전국

조선

반란군(조선)

장만
정충신
남이흥
이시발
이중로
이원익
박효립
김충선
임경업

이괄
기익헌
한명련
흥안군 이제
이수백
이흥립
한윤
김효신
서아지
사쇄문
고효내

병력

관군 3만여명
정충신, 남이흥의 별동대 2천여명
항왜 3백명

관서군 1만 2천여명
관군 포로 5천여명
항왜 120여명

피해 규모

지방군 와해 및 도주
다수의 베테랑 지휘관 사망

전 병력 전멸 혹은 도주

영향

병자호란 때의 청의 신속한 진군 성공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금부도사를 죽이다
3.2. 뿌리가 미약했던 서인 정권
3.3. 반란 초기, 양측의 삽질
3.4. 황주 전투
3.5. 마탄 전투
3.6. 임진강을 넘어 한양으로
3.7. 단 하룻밤 동안의 한양 생활
3.8. 안령 전투
4. 결말
5. 평가
6. 관련 인물
6.1. 이괄 군
6.2. 조정
6.3. 관군
7. 관련 링크
8. 관련 서브 컬쳐

1. 개요

1624년 1월(조선 인조 2년)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정치적인 혼란으로 일어난 대규모 반란.

조선 역사에서 한양이나 경기도 외부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한양을 점거한 유일무이한 반란이다.[1][2]

2. 배경

조선 중기의 무신 이괄인조반정광해군을 실각시키는데 동참했으나, 김류이귀처럼 다른 공신들과 사이가 틀어져서 2등 공신으로 밖에 배정을 받지 못했다.[3] 물론 이괄도 그다지 잘한 짓은 없는데, 한성 판윤으로 부임하기 이전에 잠깐 치안 담당으로 그를 시험할 때부터 난폭한 월권을 행하여, 당시 생존 자체가 불확실했던 서인들이 그를 위험 인물이라고 판단하는 상황이 벌어졌다.[4]

이괄은 반정 당시에 집에서 벌벌 떨다가 막판에나 등장한 김류가 1등 공신이 되고, 앞장서서 군대를 지휘했던 자신이 2등 공신이 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5] 하지만 인조는 가벼운 생각으로 청나라에 대비하여 이괄을 평안 병사로 보낸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이괄의 앙금은 더 커졌다.[6][7]

단, 이괄을 관서 지방에 보내달라고 추천한 인물은 장만[8]인데, 장만은 고령인데다 눈 질환 때문에 업무를 자주 쉬었으므로, 이괄은 유사시 장만의 도원수 역할을 명목상으로 대신할 수도 있는 다른 시기의 부원수들보다 상당히 유효한 실권에 가까웠다. 이괄은 지금 당장에는 국가를 좌지우지 하는 자리에 못 올랐을 뿐, 군사적으로는 국가의 생명을 대신 맡아두는 것이나 다름없는 막중한 책임을 받았다고 볼 수 있었다.[9]

3. 전개

3.1. 금부도사를 죽이다

이괄이 북방으로 좌천된 이후에도, 김류이귀 같은 1등 공신들마저도 목숨을 걱정해야할 정도로 정치 암투는 계속되고 있었는데, 이괄의 아들이 반역 스캔들에 휩쓸려 압송될 처지에 놓인다.[10] 중세 조선의 법으로 볼 때 이괄도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관서의 병사들이 두려웠으므로, 주모자로 거론된 이들 중에 이괄정충신에 대해서는 체포하지 말라고 했으나, 금부도사 고덕상을 보내 이괄의 아들은 압송하도록 명령하였다.

분노한 이괄은 "아들이 역적인데 아비가 무사한 경우가 있다더냐?"라고 묻고,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살해하였다.

3.2. 뿌리가 미약했던 서인 정권

이괄이 난을 결심한 데에는, 이괄의 지지파였던 이귀의 갑작스런 배신도 한 몫을 했다. 인조는 '나의 이괄은 그러지 않아'라고 상당히 비호했으나, 이귀는 표독스러울 정도로 이괄을 잡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인조를 압박했다.

이귀는 자신의 문집인 묵재일기에서 '김류와 이괄의 뿌리깊은 불화가 결국 이괄이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라는 기록까지 남길 정도로 이괄을 후원하는 연기를 했으나, 실제로는 매우 강력하게 이괄을 체포해야 한다며 인조를 압박했다. 오히려 김류증거도 없이 이괄을 잡을 수 있냐고 이괄을 비호할 정도였다. 그러자, 이귀는 김류가 이괄과 내통했기에 감싸고 도는 것이다라는 모함까지 하면서 강경한 주장을 반복했다. 이름이 바뀐듯하지만 분명 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11]

인조 측에서는 의외로 이괄에 대한 신뢰가 있었으므로 반란은 생각조차 못 했다.[12] 인조는 이괄을 평안도로 파견보낼 때 엄청난 신임을 보여주어서 마차를 손수 밀어주기까지 했으며, 북쪽에는 이괄보다 경험이 뛰어난 다른 서인 계통의 장수들도 있었음에도, 굳이 이괄에게 조선의 유사시 군사 전권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신뢰를 맡겼을 정도였다. 상식적으로 이괄을 의심했다면, 그 정도로 막중한 군단을 맡겼을 리가 없다.[13]

이때가 1월 24일. 이괄은 항왜 100여 명과 휘하 병사 1만여 명을 모두 통솔하여 영변에서 남하하기 시작한다.

깜짝 놀란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또, 김류의 주장에 따라서 반란군과 내통할 수 있다며 아무런 심문 없이 전 영의정 기자헌, 전 훈련 대장 이시언 외 37명을 처형하여 민심이 크게 악화되었다.[14] 이때 이괄과 내통했다고 알려진 한명련을 잡아 압송하였으나 이괄이 구출해내어 자신의 군에 편입시켰다. 반면 함께 이괄과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은 안주 목사 정충신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군무지를 이탈, 도원수부에 합류해 토벌군의 선봉에 섰다.

3.3. 반란 초기, 양측의 삽질

반란 초기에는 변변한 전투가 없었다. 아무런 명분 없이 '임금님 옆 간신배'를 몰아내자는 식의 주먹구구식 궐기였으니 제대로 된 전략이 있을리가 없었다. 때문에 이괄이 택한 전략은 빠른 전격전이었다. 이괄군은 토벌군과의 전투를 극도로 회피하며, 철저하게 산속 오솔길만을 통해 진군했으며[15] 관군이 징발되어 빈 고을들을 빈집털이하여 쌀과 군수품을 노획하는 식으로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이괄 군이 후발대로 남겨둔 김효신이 투항해버렸고, 한명련의 옛 부하들 역시 투항한데다가 이괄의 중군 이윤서 등이 병력을 이끌고 이탈하는 바람에 이괄 군은 숫자가 많이 줄었다.[16] 그러나 장만이 자만하여 정찰을 게을리하는 바람에 이괄 군은 산속으로 숨어 이동했고 결국 평양을 우회해 배후로 돌아갈 틈을 내주고 말았다. 이 때문에 장만은 이괄의 난을 진압한 최고 책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까이게 된다.[17] 심지어 '애초에 네(장만)가 일을 똑바로 했으면 일이 이렇게까진 안됐는데 지가 일을 키워놓고 역적 토벌 공신이라니, 아이고'라는 사관의 기록도 있다. 사실 전후 사정까지는 아무도 예상 못한 것이라고 쳐도, 뒤의 병크들을 보면 장만이 까일 만도 하다.

3.4. 황주 전투

1624년 2월, 평양 남쪽의 요충지인 황주를 우회하여 진군하던 이괄 군은 황주와 봉산 사이의 산산(蒜山)에서 관군에게 덜미를 잡힌다. 장만이 이끄는 관군의 본대는 중화로 나아가 이괄군을 쫒는 한편, 황해 감사 임서(林㥠)로 하여금 황해도의 병사들로 황주 동쪽에 위치한 상원과 수안을 지키도록 하였다. 황주 남쪽의 봉산에도 관군이 집결하여 이괄 군을 막을 준비를 하니, 이괄 군은 북, 동, 남 삼면으로 포위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괄은 봉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이 관군에 의해 차단되자, 남쪽으로 이동하던 군을 되돌려 지나쳤던 황주로 되돌아가서 포위망을 살짝 흔들어본다.

뜻밖의 움직임에 당황한 장만은 선봉이었던 정충신에게 남이흥을 비롯한 지원군을 보내 맞서게 하였다. 하지만 정충신 군은 기동 병력에 약간의 지원군만 받고 이괄 군을 상대해야했으므로, 장만의 포위망은 단순히 관군의 병력만 여러 갈래로 분산시킨 채 정작 전투 부대에는 큰 지원을 못 해주는 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마침내 2월 2일, 황주 신교(薪橋)에서 이괄 군과 관군은 처음으로 회전을 벌이게 된다. 정충신, 남이흥 군은 급작스러운 작전 변경으로 휘하 병력만 이끌고 왔기에 규모가 크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기록된 정충신의 병력은 2천여 명 이하이며, 다른 장수들도 포함한 것이기에 추가 병력도 확실치 않다. 최대로는 8,000명을 초과한 이상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는데, 당시 북방 병력들의 분포를 보면 굉장히 미심쩍은 수준이다.

그런데, 교전이 시작될 무렵 이괄의 병력이 대규모로 관군에게 투항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실록에 따르면 교전 중 정충신과 남이흥이 반군을 향해 "옳바른 이치"에 대해 크게 소리치자 반군 1천여 명이 순식간에 흩어지고, 이괄 군의 선봉이었던 허전, 송립 등이 관군으로 투항해 왔다고 한다.[18] 흩어진 병사 1천여 명도 대부분 토벌군에게 귀순했으나, 관군이 투항병들로 어수선해져 진형이 무너지자 이괄은 과감하게 항왜들을 앞세워 기습하여 관군을 패퇴시킨다.[19]

의아하게도, 관군은 와해되고 장수 중에서 사상자와 포로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사 30여 명, 포로 30여 명에 그쳤다고 연려실기술은 기록하고 있다. 이토록 황당할 정도로 적은 피해자를 두고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정충신은 패배 이후에도 큰 타격없이 이괄을 추격하기 때문에 정말로 피해 자체는 적었다고 볼 수 있다.[20] 즉, 애초부터 관군 장수들이 적은 병력으로 싸움을 걸었고, 첫 번째 해프닝만으로도 병사들이 붕괴되어버리고, 장수들만이 계속 싸우려고 하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 자체는 아귀에 맞는다.

즉, 당시 관군 측에서는 지휘관들을 제외한 병사들은 싸움없이 흩어질 정도로 병사들의 상태가 안 좋았다. 한편으로 전투는 승리했을지언정 1천이 넘는 병사가 관군에 투항한 이괄 군의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낮은 결속력과 명분[21]을 확인할 수 있는 전투이다.

3.5. 마탄 전투

황주에서 패배한 것은 정충신의 선봉대 뿐으로, 관군의 포위망은 아직도 건재했다. 또한 이괄 군이 한성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영변에서 황주까지 진군해왔던 거리보다 먼 거리를 가야 했다. 따라서 황주 전투 이후에도 이괄은 소모전을 피해서 오솔길을 골라 진군하고, 정충신은 이괄의 뒤를 지독하게 추적했으며, 장만의 본대는 투항병들과 패잔병을 추스려 봉산 남서쪽 서흥에서 평안도 병마 절도사 이수일과 합류하는 전개가 이어진다.

이괄 군은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각 지역의 관군보다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한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예성강을 건너야 했으므로 스스로 사지를 돌파해야 했다. 때문에 관군은 예성강을 방어선으로 설정하여 방어사 이중로 등의 방어군이 강을 지키고, 정충신의 추격 부대와 장만의 관군이 뒤에서 협공을 가해 이괄 군을 포위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괄 군이 예성강을 건너게 된다면 개성이 지척일 뿐 아니라 계속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기 때문에 관군의 입장에서 예성강은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지점이었다. 설령 이괄 군을 섬멸하지 못한다고 할 지라도 방어선이 제대로 형성되어 삼남(충청, 전라, 경상)의 병사들이 집결하는 시간만 벌 수 있다면 이괄의 반란은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었다.[22]

결국 이괄은 최대한 소모전을 피하고 신속하게 강을 건너기 위해 예성강 상류인 마탄(馬灘)으로 이동한다. 이중로 또한 이괄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마탄에서 미리 병력을 결집했다. 문제는 황해도 지방군이 나름대로 훈련 수준이 높았다고는 하지만 이괄 군에 합류한 북방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데다가, 지원군이라고 도착한 경기도 지방군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하루에 160리나 되는 거리를 강행군한 끝에 겨우 도착한 상황이라 절대로 싸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물론 이들의 후방에는 재편성을 마친 정충신 군[23]이 이괄을 뒤따라 오고 있었지만, 당시는 한 겨울인 데다가 이괄 군이 앞서 진격하면서 식량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불살랐고 배후에는 항상 복병을 두어 10리간의 간격을 유지했다. 게다가 이괄 군의 진로가 험악한 산길이었기에 그 뒤를 뒤따르는 정충신 군의 고생은 엄청났고, 결국 지치고 굶주린 정충신 군은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장만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 병사들이 먼 거리를 행군하여 피곤하니 안타깝고 염려된다고 썼을 지경이다.

결국 2월 7일, 마탄에서 관군은 이괄의 기습으로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고 인조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24] 전투의 양상은 황주 전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괄 군은 기동력, 훈련도, 숫자까지 관군을 크게 웃돌았고, 순식간에 얕은 여울을 건너 관군을 격파해 버린다. 이중로를 포함한 8명의 장수들은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강을 건넌 이괄 군이 역으로 관군을 강쪽으로 몰아서 포위해 버려 전멸한다. 도망치다가 강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항복했다고 하며 관군을 이끌던 장수들이 7명이나 전사했다. 이 중 이중로는 직접 조총으로 적병 7명을 쳐 죽였다(擊殺)라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을 정도니 전투가 얼마나 처참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25] 그나마 살아남은 평산 부사 이확(李廓)은 자신의 말을 일부러 죽인 뒤 피를 바르고 밑에 숨어 죽은 척 해서 살아남았을 정도니 관군의 참상에 대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26]

이괄은 전사한 관군의 충성파 장수 7명의 목을 베어 뒤늦게 도착한 추격군에게 보내 일시적인 공황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를 본 남이흥이 "잡혀간 우리 장수는 나와 잘 아는 자들이다. 이 얼굴들을 보니 모두 장수가 아니다. 틀림없이 군졸들의 머리인데 적이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다." 라고 둘러대는 기지를 발휘하여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물론 충성스러운 장수들이 7명이나 사망하고 반란군에게 효수까지 당한 사건으로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27]

3.6. 임진강을 넘어 한양으로

관군은 최종 방어선인 임진강이라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기서도 엄청난 병크를 저지르게 된다. 이괄 군의 기동력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임진강 하류에는 이귀, 상류에는 수원 부사 이흥립, 임진강으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지인 청석령에는 이서를 배치해놓았는데, 정작 도하 지점인 임진 나루에는 파주 목사 박효립이 지방 포졸도 아닌 민병대 수백(...)만 이끌게 되었던 것이다.[28]

이괄은 이를 신속한 기동으로 돌파했는데, 일단 청석령에는 항왜 병사들을 보내 밤중에 소리를 질러 마치 포위되었다는 인상을 주어 이서 군을 묶어둔 후에 샛길로 지나쳤으며, 너무나 신속한 나머지 이귀는 임진강 방어선에 도착하지도 못했고, 게다가 이흥립 군은 무질서하게 패주하여 통제가 되지 않았다.[29] 결국, 이괄은 임진강의 나루가 허술하다는 점을 간파해 신속하게 강을 건넜다. 결국, 인조는 음력 2월 8일 밤에 급히 공주 산성으로 피난하였으며, 이괄은 음력 2월 10일에 한양에 입성했다.

3.7. 단 하룻밤 동안의 한양 생활

인조는 내통 위험이 있다는 김류의 주장으로 기자헌 외 37명의 정적들을 몰살시키고 도망쳤다. 이런 명분이 없는 숙청 덕분에, 백성들의 민심이 매우 악화되었다. 게다가 기자헌은 북인이였지만 폐모론에 반대하여 서인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덕분에 조정에 등돌린 민심은 이괄을 지지 했고, 이괄은 한양에 입성했다. 그때 이괄의 아우 이수는 이충길과 이시언의 아들 이욱[30] 등을 데리고 급히 모은 수천명을 거느리고 무악의 북쪽에서 이괄 일행을 영접하여 앞을 인도하였다. 또 각 관청의 서리와 하인들도 의관을 갖추고 나와 영접하였으며 도성민들은 길을 닦고 길 위에 황토를 펴고 극진히 환영하여 맞이하였다. 이괄은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추대하고 살아남은 북인들을 등용하려고 했으며, 곳간을 열어서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려고 했다. 실제로 광해군 때의 권세가들의 빼앗긴 집은 그들의 살아남은 친족과 노비들에게 도로 점거되었다.

수도 한양을 내어준 관군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최고 지휘관인 장만조차 "군사를 물려 힘을 기른 다음 다시 싸우자" 라고 할 정도였다. 사실상 패배를 인정한 셈. 하지만 이괄이 한양에 입성한 것부터가 큰 실수였는데, 정충신이 예언한대로[31] 왕인 인조를 붙잡는데 실패하자 추격할 생각은 안하고 한양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스스로 관군의 포위를 기다리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32]

한양에 도착한 정충신은 후퇴를 주장하는 장만에게 '병법에 북쪽 산을 먼저 점거하면 이긴다는 말이 있다' 안령(무악재)을 점거하면 한양을 내려다 보니 적이 나오지 않을 수 없고 적이 공격하면 우리는 높은 곳에 있으니 적을 이길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남이흥이 동조하여, 2월 10일 저녁에 정충신의 추격 부대는 병사 2천 명으로 야음을 틈타 안령을 점거한다. 안령을 점거한 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상없다는 봉화를 올려 반란군을 안심시키는 바람에 2월 11일 아침이 되어서야 이괄은 안령이 점령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3.8. 안령 전투

정충신의 예측대로 이괄은 관군이 무악재(안령)에서 자리를 잡으면 한양의 민심이 이반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한양 농성을 포기하고 정면으로 대결을 결심한다.

이괄은 안령을 점령한 정충신의 병력이 작은 규모라는 점을 파악하자, '저 정도 병력은 점심 먹기 전에 처리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여 판을 크게 벌인다. 이괄은 방을 붙여 "큰 싸움이 있으니 싸움 구경하고 싶은 자는 오라, 관군을 정ㅋ벅ㅋ하겠다"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백성들도 얼씨구나하고 구경을 갔다. 이리하여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안령 전투는 2월 11일 아침(묘시. 5시 ~ 7시 사이)에 수많은 백성들이 몰린 가운데 펼쳐지게 된다. 이기는 사람 우리 편!![33]

이괄의 군대는 이미 실력을 보인 항왜들을 앞세웠고, 북방에 배치되었던 조선의 최고 정예 군단을 끌고 내려온 것이었으나, 이에 비해서 관군은 급조된 지방 병력인 데다 2천 명밖에 안 되는 등 전력이 딸렸기에, 선봉을 맡은 선천 부사 김경운이 전사하고 토벌군 전체까지 궤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정충신이 높은 곳에 견고한 진지를 확보해놓았기에, 이괄군은 진격 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었고, 점심을 먹기 전에 끝내겠다던 생각과는 달리 전투는 묘시부터 사시(9시부터 11시 사이)까지 약 4시간 가량 지속되면서 만만치않은 피해를 입는다.[34][35]

하필 이괄의 진영으로 엄청난 돌풍이 불었을 때, 고춧가루로 인해[36] 시야가 확보되지 못해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 와중에 이괄의 군기가 제대로 서지 못하고 자꾸 기우는 데다 부장인 한명련이 화살에 맞아 부상으로 전선을 이탈한다. 이때 한명련과 외모가 닮은 이양이란 군관이 탄환에 맞아죽게 되자, 남이흥이 기지를 발휘해 이괄의 깃발이 쓰러지고 한명련은 죽었다!! 너네들은 졌다!! 이괄이 도망친다!!라고 외쳤고 눈이 보이지 않던 이괄의 군대는 그 소리를 듣고 헐 우리가 정말로 졌나? 하면서 모랄빵 이괄 등의 명령도 무시하고 전부 도망가서 와해되고 만다.[37] 여기서 패병 400여급의 머리를 베고 300여명을 사로잡았다. 이괄 측은 숫자, 숙련도, 사기까지 절대적으로 우세했음으로 더 공세를 퍼부었으면 정충신의 군대는 패배했을 것이고, 관군의 본대를 이끌었던 도원수 장만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상황이어서 관군 입장에선 말 그대로 기적같은 역전승이었다. 반군은 죽음을 면할 겨를이 없어 민가에 달아나 숨기도 하고 마포 서강으로 달아나 강물에 빠져 죽는 자도 있었다.[38]

성벽 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한양 주민들은 이괄군이 패배하자 서대문을 지키던 이괄군을 몰아낸 다음 성문을 걸어잠가버렸고[39] 그리하여 이괄군은 한성을 뺑돌아 남대문으로 겨우 입성하나 이젠 지킬 병력이 없어서 한성에서 물러나게 된다.[40]

이괄은 결국 패배했고 사기가 오른 관군이 추격하러 했으나 남이흥과 정충신이 궁지에 몰린 적은 쫓으면 안된다고 극구 말리며 이괄의 목은 앉아서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해 관군은 추격을 멈춘다.[41]

4. 결말

결국 이괄은 예상대로 경기도 광주에서 도주 중 밤중에 잠을 자다가 부하 장수이던 기익헌, 이수백에게 배신당해 한명련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둘은 참수 대신 유배로 용서받았는데, 기익헌은 7년 뒤 유배가 풀리고 하위 군관으로 평생을 잘 살았던 반면에, 이수백은 유배로 풀려난지 몇 해 안 있어[42] 마탄 전투에서 전사한 이중로와 박영신의 아들들인 이문웅, 이문위 형제와 박지병, 박지원, 박지번 형제에게 대낮에 끔살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마탄 전투 막바지에 관군 8대장의 목을 베어 보내게 한 모략을 꾸민 장본인이었다고 한다.[43] 이들 형제는 이수백의 목을 잘라 대궐을 찾아가 자수하는데[44][45] 이에 대한 처벌을 놓고 비록 역적이었다곤 하나 이미 왕이 용서를 해주었는데도 사적인 복수를 하는 것이 옳으냐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수백은 수절하는 과부를 모욕하고 겁탈한다든지 거리에서 행패를 부려 민심도 나빴고, 정작 이수백이 5명에게 끔살당하자 주위 반응은 '고놈 당해도 싸다'라는 분위기라서 안습... 삼정승은 이수백이 역적이라는 점과 효도라는 가치관을 들어 용서해줄 것을 청했으나 임금인 인조는 법 기강 확립을 들어 처벌할 것을 명했다. 다만 부친들이 충신이었다는 점을 참작하여 이씨 형제는 전라도 익산, 전주에, 박씨 형제는 경상도 창평, 의성에 유배보내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내렸다. 지형 공부를 조금이라도 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부분 햇빛 잘 받고, 밥 잘먹을수 있는 평야 곡창 지대다. 대부분의 유배지가 섬이나 산골 마을 등 밥은커녕 수수깡이나 배불리 먹을까 말까한 곳이라는것을 생각해보면, 그냥 강제 이사 수준이다.

이괄의 아내 예이와 며느리 계이는 마탄 전투가 있던 시점에 빡친 인조의 명령으로 칼이 채워진 채 연행당한 후 모두 효수당했다. 이괄이 승승장구하던 시점인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양에 입성한 만큼 거리에 매달린 이들의 수급을 봤을 이괄의 입장에서는 참 암담했을듯... 물론 이괄 본인도 마탄 전투에서 충성파 장수들의 목을 베는 짓거리를 했으니 별로 불쌍할 것은 없다.

이괄의 난으로 북방의 정예 군단과 임진왜란 때부터 유지되었던 명장들은 패가 갈려서 와해되었고,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 등 이괄 밑에 있던 장수들은 후금 (청나라)으로 도망가서 조선을 침공하자고 부추겼다(…). 결국 조선은 이괄의 난으로 조선군이 거의 반토막이 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청군에게 싸움다운 싸움조차 못 해보고 당한다.[46] 게다가 청나라로 도망친 부하들이 이괄의 난 진격 루트를 그대로 알려주는 바람에 청군은 이전의 어떤 보다 빠르게 내려와 왕을 붙잡는데 큰 기여를 한다. 그리고 허수아비로 왕위에 며칠 올랐던 흥안군 이제는 대역죄로 심기원에게 참수 당하는데, 흥안군이 참수당할 때 억울하다고 외치며 심기원에게 "네놈도 억울한 대역죄로 죽을 것이다!"라고 저주했다는 야사까지 전해진다. 하지만 야사는 야사일 뿐, 흥안군은 이괄의 난 초기부터 내통했다는 기록이 많으며, 인조를 호종하다가 중간에 달아나 한강까지 도로 건너서 이괄과 합류했다.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그냥 배신자 맞다. 그런지 200여년 뒤인 고종 초기(1871년)에 복권되었다가 30년 뒤인 1900년에 도로 복권이 취소된다.

한편 심기원은 인조를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세우는 역모를 모의하다가 소현 세자가 왕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곤 인조와 소현 세자를 모두 몰아내는 역모를 꾀하다 들켜서 능지처참 당하고 만다. 그리고 또 7년 뒤 심기원 처형에 관여한 김자점도 아들들과 난을 꾸미다가 들키는 바람에 일가와 함께 처형당한다.

반란 당시 선봉에선 항왜들이 무지막지한 전투력을 발휘하자 동래에서 인 1천명을 용병으로 사용하자라는 건의가 있자, 정신없던 나머지 다들 좋다고 했으나, 이원익이 "천명보다 많이 보내면 어쩔 것이며 그 왜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라고 강하게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당시 인조는 가도의 모문룡에게도 지원을 요청할 정도로 다급해 했는데, 이괄의 항왜들은 무악재(안현)에서 섬멸당했다. 안현에서 살아남아 이괄과 함께 도망쳤던 항왜들은 왜관이 있는 경상도 쪽으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같은 항왜 출신 장수 김충선... 망했어요 당시 김충선은 대구 우륵동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는데, 전란의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경상 감사의 명을 받아 자신을 따르는 항왜 25명과 조선인 포수 17명을 데리고 52세의 노구를 이끌고 추격전을 벌여 서아지를 비롯한 항왜들의 목을 베어 난을 마무리 짓는다. 다만 같은 항왜들을 처벌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김충선은 상으로 받은 벼슬과 토지를 극구 사양했고 억지로 떠받은 서아지의 토지조차 수어청에 반납하여 둔전으로 쓰게 했다.[47] 심지어, 13년 후 김충선은 남들 은퇴할 나이에 다시 한 번 전쟁에 참가한다.

이 사건으로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 양화전(養和殿), 환경전(歡慶殿)이 불탔고, 춘추관 사고도 불타 전란 이후 복원한 조선왕조실록 5질 중 1질이 소실된다. 이후 조선 멸망까지 춘추관 사고는 다시 복구되지 않는다.

5. 평가

서인들이 벌인 가장 큰 삽질 중 하나.

단, 반란의 전후 사정을 보면 광해군 중기의 대숙청에서 시작되었던 원한과 피바람이 해소되었다고도 볼 수도 없었던 상황이며, 단순한 1위 권력 다툼의 문제로만 보기 힘든 다양한 생존 문제들이 겹쳐서 일어난 해프닝임을 생각해야 한다. 특정한 서인들이 이러한 상황을 꾸몄다는 기존의 기술은 당시 시대 배경을 마음에 드는 것만 뽑아서 축약한 단순화에 가까운데, 서인들은 이괄보다 객관적으로 능력이 더 뛰어난 장수들과 서인조차 제치고 이괄에게 큰 책임을 맡겼으며, 설마 누가 이득을 보겠다고 반란을 일으키겠어? 라고 생각했던 정황이 여러 기록에서 드러난다.[48]

정리하자면, 광해군의 대숙청부터 시작된 피바람이 인조반정 이후에도 수습되지는 못하여, 쿠데타에 성공한 1등 공신들마저 생존을 걱정하며 도성에서 떠도는 소문들의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기도 힘든 정보 혼란 상황이었고, 인조는 너무나 어리석게 반란의 방아쇠를 당겨버렸고, 이괄은 인조와 장만 등이 맡긴 신임과 막중한 사령관의 도의를 현실적으로 배반하여서, 제각기 살아남기 위한 심리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만일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병자호란이 해볼만한 전쟁이였을 것이란 낡은. 떡밥이 자주 보인다. 북한에서는 이괄을 홍경래와 동급으로 존경하다고도 한다. 이유인즉, 썩은 나라를 빨리 망하게 만들어서라는 패기 넘치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괄이 있었다면 병자호란이 해볼 만했을 거라는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괄과 관군의 대결은 병사들의 숫적,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나서 패배한 전투에 가까우며[49][50] 마찬가지로 조선군과 청나라의 군대는 병력의 질적인 면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침공군의 규모는 너무나도 컸고 방어군의 질적인 열세는 뒤집을 수 가 없었다. 단순히 수로 계산을 해 볼 때도 정묘호란 수준의 3만 정도는 어떻게 해 볼 수 있겠지만, 병자호란 당시의 12만의 황제까지 직접 내려온 친정은 어떻게 해 볼 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괄이 있어봤자 2만의 마지막 남은, 제대로 된 야전군을 이끄는 병자호란 당시의 김경징처럼 청의 후방에서 버티고 있는 것 외에는 별로 할 것이 없다. 즉 병력의 질이 낮은 속오군 중심의 지방군들의 질적 수준을 메꾸기 위한 고참병 / 부사관 / 초급 장교 역할을 하도록 그들을 나누던지의 행동을 할 것이 아니면 병자호란의 전개는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인조 시대의 평가를 죄다 부정하는 흐름이 있으나, 위의 지적은 인조 시대에 충분 이상으로 행한 방법이기도 하다. 농업 생산력의 복구를 통한 병력의 수효 증강이나 장기전 대비 면에서는 조선도 딱히 부족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괄의 난으로 관서의 사령탑이었던 장만과 정충신 세력을 뒷받침해줄 정치 여론이 완전히 무너지는데, 준비되지 않은 반란에 잔존 북인, 남인들이 호응했다가 쓸려나가고, 더욱이 반란 대비로 이루어진 숙청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하여 새로 합류하여 반전 여론을 형성한 청서파들의 원리주의에 의해서, 청나라와의 첩보나 교류에 대한 중립 파벌에 속했던 김류와 이귀마저도 군사 실권만을 겨우 유지했을 뿐 이후의 후금 논쟁에서 밀려나며 전쟁 방비 여론이 열화되도록 정치 지도가 급변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51]

이괄의 난이 호란의 발발에 영향을 준 것은 주로 부정적인 영향이었다. 당장 후금을 방어할 북방의 방어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는데, 후금 입장에선 100의 전력으로, 방어 준비도가 0인 적을 공격하는게 쉬울까? 아니면 방어 준비도가 20인 적을 공격하는게 쉬울까? 이후 호란 때 조선군의 북방 방어 태세를 6.25 당시의 상황으로 예시를 들면 북한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남침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당시 경기도 지방을 방어하던 1사단과 7사단이 쿠데타로 인해 증발해 수도 사단 혼자서 북한군 대부분을 막아야 하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심지어 이괄의 난의 패잔병 일부는 후금에 항복해 그들의 내비게이션이 되어 후금의 쾌속 진격에 기여한다(...).[52]

가장 중요한 점이 병자호란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닌 정묘호란이 먼저 벌어지고, 그 이후에 정묘호란을 통해서 얻은 이익으로 주변을 정리한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바꾸며 압도적인 군세를 선보인 것이었단 거다. 이괄의 난에 의해 엉망진창이 되기 전에는 후금에 대한 방비가 잘 되어있었고, 이것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정묘호란은 일어날 수 없었다.[53] 정묘호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후금은 물자 보충 및 주변의 세를 장악하는 등의 일을 벌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괄의 난에 의해 북방선이 아작나지 않았고, 광해군 때 해둔 방비가 유지되었다면 후금으로는 조선 침공이라는 모험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54]

즉 이괄의 난이 없었더라면 병자호란이 일어날 수 있게 한 정묘호란 자체가 없었기에 후금은 세력을 키우기도 보다 어려워졌을 것이고, 물자 보충도 힘들어 더욱 고전했을 것이며, 병자호란 때와 같은 세력 규모를 얻어낼 가능성도 희박해진다. 이괄의 난이 그야말로 위기의 상황이던 후금에게 있어서 구원이던 셈.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 같은 야사를 다룬 서적에는 이괄의 평이 극과 극. 악역 같이 나온 장면이 많다. 가령 인조 반정 직후 인조가 용상에 앉기 머뭇거리자, 뭐가 두려울 게 있겠냐면서 자기가 용상에 털썩 주저앉아 어그로를 산다거나, 벼슬에 불만이라는 점과 무작정 왕을 추대하고 군림했다든지 백성들이 이괄의 횡포가 싫어 한양 문을 열지 않았다고 나온다.[55] 하지만 또 다른 작품에서는 이괄의 용맹함과 결단성을 인정하며, 무인임에도 시와 글 짓기에 능하며, 왕이 되기 전 인조의 성품을 테스트 하는 등 복합적인 인물로 나온다. 대체로 이괄이 악역이 된 계기를 만든 김류가 나쁜 놈이라는 분위기. MBC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에서도 안하무인으로 나온다.

6. 관련 인물

6.1. 이괄 군

  • 이괄 - 주모자. 항목 참조.
  • 김효신 - 후발대로 남겨두었으나 관군에 투항. 공을 세워 속죄하겠다며 전투 참가 의사를 밝혔으나, 장만이 이를 위장 투항으로 의심하여 전투에 기용하지 않았다. 결국 역모에 가담했다는 비난과 질책, 그리고 죄책감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 한명련 - 서인들의 모함으로 이괄과 함께 엮여들어간 인물. 자신을 잡으러온 금부도사 일행을 죽이고 30여 기병을 이끌고 이괄에게 합류했다고도 하고 금부도사에게 붙잡혀 호송 중에 이괄에게 구호를 받아서 반란에 동참 했다고도 한다. 한성 전투 도중에 부상을 받고 사망한 걸로 알려지면서, 관군의 기적적인 역전승의 원인이 되었다.
  • 기익헌, 이수백 - 부장들. 패주한 이괄의 목을 베어 바친다. 위 항목에서 소개한대로, 이수백은 그야말로 인간 쓰레기(…).
  • 한윤 - 한명련의 아들. 패잔병들을 이끌고 청으로 도망가서 호란을 일으키는 원흉 중 하나가 되었다.
  • 이윤서 - 이괄의 중군. 반란 초기 병력을 이끌고 이탈해 관군에 투항한다. 투항 후 반란에 동조했다는 죄책감에 자결한다.
  • 안늑, 송립, 허전 - 이괄의 부하였으나 관군에 투항. 그러나 이들의 투항으로 혼선이 생겨 관군은 반군에 패배한다.
  • 이수, 이충길, 이욱 - 이수는 이괄의 동생, 이욱은 김류에게 숙청된 이시언의 아들로 반군이 한양에 입성하자 합류한다.

6.2. 조정

  • 인조 - 이괄의 난을 폭발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아쇠를 당겼다. 게다가 도중에 이괄의 며느리와 아내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더 평가가 안 좋다. 심지어 이후로도 무신들을 중용하지 않아서 2차례의 호란을 자초했다.
  • 이귀 - 인조와 함께 성급한 대처로 이괄의 난의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김류의 라이벌 수준이었던 현실과는 달리, 현대에는 막나가고 수습못할 사건들을 벌이는 성격이 멋있다고 옹호해주는 여론도 많은 편이다.
  • 김류 - 사실은 이괄의 난을 막으려고 했던 인물. 하지만 배경 자체에는 그도 책임이 있었다. 항목 참조.[56] 다만 내부 단속을 위함이였어도 이괄의 일파로 몰아 남은 북인의 씨를 말렸고, 기자헌, 이시언 등 애먼 사람들을 희생시킨 잘못은 피할 수 없다.
  • 장만 - 도원수. 관군 총지휘관. 문인 출신. 행적을 보면 딱히 유능한 군인은 아니었지만, 반정 공신이었기에, 당시 조선의 군사 활동을 총괄한 인물. 관서에 이괄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사람도 바로 장만. 하지만 조기에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실패하고, 이어서 벌어진 정묘호란 - 병자호란까지의 병크로 이어지는 행보를 보였다. 당연히 역사가들의 평가도 박하다. 당대의 굵직한 사건에서 고위직에 있었을 데도 불구하고, 대중에서의 인지도가 거의 제로에 가깝다.[57] 다만 완전히 무능하다고 평가하기만은 애매한 것이, 최소 이괄의 난 과정에서는 자기 한계를 알고 처신했다는 점이다. 애초 이괄에게 주 전력을 맡긴 것도 그렇고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병력을 전부 정충신에게 맡겨 실전을 치루게 하고, 자신은 후방에서 예비 전력을 편성하고 보급품을 마련하여 바로바로 정충신에게 보내주었다. 때문에 이때 장만을 가리켜 도원수는 군사 없는 장수라고까지 하였다. 또한 황주에서 정충신이 패전하고 조정에서 정충신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자 오히려 패전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며 정충신을 감싸고 계속 이괄군 추격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었다. 딱 자기 한계만큼 일 했던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다.
  • 이원익 - 당시 영의정이자 전시 도체찰사. 조선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 재상 중 하나. 일명 오리 정승으로 유명한 그 분. 임진왜란정탁과 함께 이순신을 옹호한 인물이며, 쿠테타를 일으킨 인조 세력에게조차 필요한 인재로서 평가받은 내정의 1인자이다. 평안도의 민심을 수습할 수 있었던 건 선조 초에 전염병이 돌던 평안도 지방을 구제해내면서 평안도 백성들이 따랐기 때문이었다.[58] 당연히 남인이라 말년에는 밀려나고 오리곡에서 여생을 보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이괄의 난에서는 김류에게 홀라당 넘어간 인조의 명령으로 역적으로 몰린 신하들을 숙청하자, 공주에서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탄식했다고 한다.
  • 흥안군 - 인조가 수원으로 도망갈 때, 이괄이 왕으로 옹립했다. 행실이 무척 나쁜 인물이었다. 이괄이 패하자 도주했으나 심기원에 의해 교살된다. 이런 놈을 왜 왕으로...

6.3. 관군

  • 정충신 - 이괄의 난에서 관군 측의 진 주인공. 각 상황에서 예언자 수준의 기록을 남긴 인재다. 당대부터 고령, 질병, 정치적 요인으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기록이 있었다.
  • 남이흥 - 정충신과 함께 활약한 무관. 정충신이 철두철미하고 예리한 참모라면, 남이흥은 호탕하고 임기응변이 뛰어난 호걸이다. 황주 전투부터 정충신과 나란히 관군을 이끌어 관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안타깝게도 정묘호란 때 전사하여, 충장공 칭호를 받는다. 이전 항목에는 왠지 조정에서 이쁨을 받았다고 되어 있으나, 오히려 인조에게 직언을 했다가 졸렬한 인조에게. 보복성으로 제대로 된 군사 지원을 못 받고 폭약으로 자폭까지 했던 불행한 인물이다. 대신 명나라에서 그의 최후가 인상 깊었는지 그의 죽음을 기리기도 했다.
  • 김충선 - 네임드 항왜 출신 명장. 대구 지방에 은거하여 잘 살고 있었으나, 이괄의 패잔병 토벌에 나서서 항왜들을 썰어버렸다. 그리고 병자호란까지 참전한다.
  • 이중로, 이성부, 이시발, 이확 등 - 마탄 전투에서 대패. 앞의 두 명은 사망. 이확은 말의 피를 바르고 생존. 참고로 이중로는 사격술이 뛰어나 마탄 전투에서 이괄군 군관 7명을 조총으로 저격했다고 한다. 그래도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 이후 사망한 7명은 반란군에게 효수당하여 후대까지도 큰 문제가 되었다.
  • 임회 - 패주하던 이괄을 막다가 역습으로 사망했다.

7. 관련 링크

8. 관련 서브 컬쳐

네이버 웹툰에서 고일권이 연재하는 만화. 이괄의 난을 배경으로, 굉장히 좋은 고증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이괄 미화 논란이 있는 편이다.

  • 고금청담

1976년에 경향 신문에서 연재되던 소설.


  1. [1] 반란군이 한양을 점거한 반란 자체는 이괄의 난이 유일한 예시는 아니다. 바로 직전의 인조반정만 하더라도 큰 피해 없이 성공하기까지한 반란이다.
  2. [2] 특히 한양(서울)과 경기 지방에 유일하게 한방 먹여줬다는 지역 감정 때문에 북쪽에서 꽤 인기있는 반란(?)이다. 조선 멸망 이후, 이북 지역에서 뜬금없이 이괄의 가문이 각종 유사 역사학이나 환단고기 같은 야사 등의 주인공으로 나왔던 것도 이 때문인데, 주로 이북 지역에서 한양을 박살낸 것이 통쾌하다며 이괄의 능력이나 그의 멸문된 가문을 과대 평가 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3. [3] 하지만 도성의 문을 열고 광해군을 붙잡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수일은 아예 공신 목록에 오르지도 못했다. 게다가 이수일은 임진왜란 때부터 활약한 무인으로 이괄의 아버지뻘 대선배이자 군부의 짬밥이 장난이 아니였다. 그래도 공로가 인정돼 공조 판서에 오르기는 한다. 현대에는 이괄을 지나치게 영웅시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초기까지는 이괄에 대한 처우가 딱히 모자라지 않았다.
  4. [4] 참고로 한성 판윤은 정2품 당상관이자 대감으로도 불릴 수 있는 품계. 오늘날 서울 시장에 해당한다. 지금이야 대권까지 바라볼 수도 있는 요직이지만, 당시는 며칠마다 사람이 바뀌는 한직에 불과했다.
  5. [5] 물론 이것은 이괄이 주제 넘은 판단을 한 것이다. 김류는 능양군을 왕으로 추천한 인물, 즉 킹메이커의 대표자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1등 공신이 확정되어 있는 거물이었다. 이괄이 무턱대고 동급으로 접근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또, 김류 입장에서는 이괄이 너무나 완벽한 타이밍에 자신의 자리를 주워먹은 상황이라 그를 위협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옹졸한 꼼수를 부렸던 김류도 잘한 일은 없으며, 양측 모두 자존심 때문에 큰 비극을 부르게 된다.
  6. [6] 실록에 의하면 "인조 : 도원수(장만), 중원(명나라)과 힘을 합쳐 적(청나라)을 물리치려면 병사가 얼마나 필요함? / 장만 : 10만은 있어야죠. / 인조 : 10만은 너무 많은데? / 장만 : 못해도 5만은 있어야 함. 그리고 부원수 자리 비었는데 이괄이나 이서 중에서 보내주세요."이라는 기사가 있다.
  7. [7] 사실 이귀는 "그래도 대공신을 변방에 보내는건 아닙니다."라고 설득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8. [8] 중립 외교와 조선의 수비 태세에 있어 중요한 존재감을 차지하던 인물로서, 서인 측과 가깝기는 했으나 딱 잘라 서인이라고도 볼 수는 없는 다소 중립적인 인물이었다.
  9. [9] 당장 이괄이 받은 1만 정예군부터 상당한 대우였다. 이는 광해군이 만들어놓기는 했으나, 광해군 시절에 여러가지 실정과 실수로 말아먹고 남은 조선의 최후의 군사력이라고 봐야했을 정도인데, 이괄은 반란 멤버라는 이유로 역사 평가를 종합했을 때 본인보다 더 뛰어난 장수들과, 심지어 서인들조차 제치고 그 정예 군대를 이끄는 인조의 신뢰를 얻은 것이다.
  10. [10] 당시 훨씬 어이없는 이유로 가문이 몰살당한 사례는 넘쳐나고, 정작 이괄도 한양에 있을 때 역적(북인)들을 마구 잡아들였던 전적이 있다. 사실 중세 사람들의 생각에 비추어본다면, 성인을 한참 넘어선 20살 전후의 대공신 가문의 귀족 장교가 입 조심을 못 한 것을 무고라고 생각하는 건 변명에 불과했다.
  11. [11] 어쨌든 김류와 이귀 어느 쪽의 주장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괄은 당시 조선 최강의 정예 군단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부터 김류의 주장처럼 이괄을 건드리지 말거나, 이귀의 말처럼 이괄을 확실히 죽여야 뒤탈이 없었을 것이다. 인조가 어설픈 중도책을 써서 이괄의 아들만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리자, 정예 군단을 가진 이괄은 그대로 반란을 일으켜서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12. [12] 현실적인 판단이 없는건 아니었는데, 당시 배경 상황은 광해군이 당파를 가리지않고 인재들의 목을 날린 대숙청부터 시작되었던 피바람이 인조반정으로 겨우 마무리 되어가는 상황이라서, 이제는 반란을 일으켜봐야 새 정권을 세울만큼의 정치 파벌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무려 반정 공신이 또 반란을 일으키리라고는 생각치 못한 것이다.
  13. [13] 그러나 왕이 금부도사 보냈다는 거 자체가 당시 분위기상 이괄 너를 죽이겠다라고 충분히 읽힐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이징옥의 사례처럼 궁지로 몰린 북방의 장수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건 예상해야 했다.
  14. [14] 이괄의 난에서 김류의 잘못은 이런 숙청으로 백성들의 여론을 크게 악화시킨 점에 있다. 백성들도 눈과 귀가 있었으므로, 왕이 아무런 명분없이 정적들을 몰살시켰다는 사실에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다. 또한 기자헌은 탐관오리라는 비난을 받긴 했으나 인조반정의 모토인 폐모살제에서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한 인물이다. 기자헌의 죽음은 폐모론에 찬동한 이이첨을 죽였던 김류와 반정 세력의 행보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이시언은 임진왜란 때 관군을 이끌고 왜적과 싸운 전쟁 영웅으로 이런 인물들을 내통 죄로 죽였으니, 민심 이반은 자명한 일이였다.
  15. [15] 나중에 정충신 군이 이괄군의 진격로를 따라 들어간 적이 있었다. 문제는 이 길이 말 그대로 절벽을 타고 벼랑에 매달리는 엄청난 악조건이었다. 결국 추격군은 전부 녹다운되어 지쳐서 제 시간에 전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만큼 인조가 이괄에게 맡긴 군대는 조선 최강의 강병이었고, 나머지 장수들이 이끌어야 했던 군대는 포졸 수준의 약한 병사들이었다는 뜻이다.
  16. [16] 이괄의 중군이였던 이윤서의 투항이 결정적이였다. 이윤서는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심복들과 이괄을 제거하려다가 실패, 대신 휘하에 이끄는 군 4천여 명을 해산시키고 장만에게 투항했다. 하지만 직후 죄책감을 느끼고 자결했다. 이윤서의 희생으로 그의 가문은 안위를 보전받았고 이윤서도 사후 공신에 추증된다.
  17. [17] 덕분에 이괄의 난 직후 장만은 책임지고 형식상 잠깐 백의종군 하기도 한다.
  18. [18] 거짓으로 투항하는 척 해서 적진을 혼란케 하려는 이괄의 계략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당시 투항한 송립은 훗날 병자호란 때 왕을 보호해 남한 산성으로 피난시켰다는 기록이 있을 뿐 아니라 정2품 관직인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기 때문에 단순한 거짓 투항으로 보기 어렵다. 사후엔 장정(壯靖) 이라는 시호까지 받는 것으로 미루어 볼때, 오히려 이괄 군에 거짓으로 동참했다가 기회를 엿봐서 휘하 병사들을 이끌어 투항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9. [19] 투항병들을 적들의 대대적인 공격이라 착각한 관군이 스스로 와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20. [20] 실제로, 정충신의 부대는 패배를 겪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이괄을 꾸준히 추격한다. 마지막 날짜 기록을 보더라도, 이괄은 한양을 점령한 바로 다음날, 정충신이 밤중에 만들어놓은 진영에 싸움을 걸었다가 패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충신의 병사들이 황주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기록이다.
  21. [21] 병사들은 유닛이나 기계가 아니다. 이괄의 병사들이 국가의 이치에 대해 논하자 줄줄이 탈주하고 마지막 패배조차 이런 언급이 있는걸 볼 때 국가의 명분을 빼놓고 말할 수가 없다.
  22. [22] 실제로 2월 7일에 전라도 병마 절도사 이경직이, 2월 9일에 충청도 병마 절도사 이완이 병사를 이끌고 올라왔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미 2월 7일에 관군이 마탄에서 대패하고 한양까지 한번에 뚫리는 바람에 구심점을 잃은 상황이었다.
  23. [23] 모자라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이괄 군 투항자들까지 그대로 뽑아 올릴 정도로 반란군에 비하면 숫자와 훈련도가 부족했다.
  24. [24] 황주 전투와 마찬가지로, 마탄의 수비군 자체가 이괄 군에 비하면 질과 양이 모두 빈약한 병력이라서 패배는 확정이었다. 하지만 마탄 전투는 황주 때와는 달리 관군이 전멸해버렸고, 죽은 장수들이 임진왜란부터 활약한 베테랑 장교들이자, 순수하게 국가의 위기 사태를 방지하겠다고 목숨을 바친 충신들이라서 굉장한 파장을 일으켰다.
  25. [25] 저격(狙撃)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격살은 총으로 저격해 죽였다는 의미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논란이 있다. 본 문서는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 변역한 조선 왕조 실록을 참조하고 있다.
  26. [26] 이 패전으로 이확은 죽을 고생을 하고 겨우 목숨만 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괄 군과 내통한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받아 이를 해명하기 위해 고생했다. 그리고 호란이 끝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나라의 원수인 청 황제한테 절하고 왔다는 누명을 쓰게 되고, 훗날 해명이 될 때까지 두고두고 까이게 된다. 안습.
  27. [27] 이괄의 난에서 죽은 선전관이나 이괄의 처자식들과 함께 대표적인 비극으로 언급된다. 결국 충성파 장수들의 목을 베어서 욕보이는 계책을 냈던 이수백은 이후 그 장수들의 아들들에게 백주 대낮에 참살당한다. 같이 계책을 냈던 부장들과는 달리 죽어도 싼 인물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
  28. [28] 당연하게도 박효립의 부대는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으며 박효립 본인은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애초에 민병대만을 이끌었음을 생각해보면 좀 안타까운 죽음이다. 갖춰야할 것을 갖춰주지도 않고 처형한다는 것 자체가...
  29. [29] 이흥립은 본래 박승종과 인척 관계였다가 인조 반정 때 슬그머니 참여해 공을 세운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이괄의 반란군에 투항하였다가 난이 평정되자 옥에서 자결하였다.
  30. [30] 이시언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무인이였으나, 김류가 내통을 우려해 기자헌과 함께 이괄의 일파로 몰아 억울하게 참살된다.
  31. [31] 정충신은 장만에게 이괄이 바로 추격하여 어가를 사로잡는다면 상책이고, 가덕도에 주둔 중인 모문룡과 합류한다면 중책이며, 한양에 머무른다면 하책이라고 하였다. 다른 기록에는 장만이 이 말을 했다고 하거나, 청나라에 투항하는 것을 상책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야사에 기록된 것이라서 그리 정확한 신빙성 있는 말은 아니다. 다만 당시 군중이나 민중에서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2. [32] 이괄의 반란군이 장만이 펼쳐놓은 포위망에 갇히기 전에 도망치듯이 한양으로 달려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미래가 없는 판단이었다. 물론 장만이 인정했듯이 관군 측에 이괄 군을 쫓아낼만한 정예 병력이 모자랐으며, 수도를 점령한다는 상징성 자체는 의미가 있었지만, 그것을 활용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33. [33] 사실 한양의 백성들 입장에선 누가 이겨도 상관없는 전투였다. 광해군도 조카를 죽였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리서 왕권이 약했는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조의 인망도 상당히 낮았으며, 왕자 시절부터 평판이 나쁘다가 반란군에 붙어서 왕이 된 흥안군까지, 그들의 권위는 도저히 왕권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본격 왕위 계승 스포츠. 개 싸움. 물론 이괄 측은 별다른 사직상의 드라마도 없고 선조의 혈통답게 날라리로 유명했던 흥안군을 내세운 만큼 인조보다 명분이 빈약했고, 관군이 포위망을 형성하면 이괄 측이 고립되리라는 점은 한양에서 생활하던 백성들의 눈으로도 명확했을 것이므로, 그냥 재미있는 구경거리 정도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34. [34] 게다가 정충신이 임진왜란 당시 권율의 곁에서 행주대첩을 경험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이러한 산악 방어전은 정충신에게 유리한 입지 선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당시 일본 측의 명장이나 우수한 참모들이 죄다 달라붙었음에도 승리했던 전투를 권율의 종자로서 함께 경험해본 인물이다.
  35. [35] 정충신과 남이흥 외에 사서에서 참전한 관군 측 장수들과 주 포진 위치는 이와 같다. 정충신은 유효걸(이순신 부하 유형의 아들)을 거느렸고 휘하에 남이흥과 변흡은 고개 안에서 진을 쳤고 고개 서쪽은 김완(이순신 휘하의 장수와 동명이인), 신경원과 이정은 고개 북쪽을, 황익 안몽윤 최응일 이경정을 중견사(中堅使)로 삼고, 이확은 포수 100명을 거느리고 치마 바위에 주둔해 창의문 길목을 틀어막았다.
  36. [36] 관군이 이괄 군의 눈을 뜨지 못하게 하려고 뿌렸다.
  37. [37] 애초에 이괄이 데려온 정예 병사들은 이괄의 명령이 아니었으면, 같은 나라 병사인 조선군과 싸울 이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이괄의 지휘 능력이 관군 지휘관들에게 압도적으로 이기는 입장이 아니라는 불안감이 현실화되자 더 이상 싸움을 할 이유가 없었다.
  38. [38] 실록에서도 승장인 정충신이 "하늘이 도와 이겼다"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다. 달리 생각해보면, 스스로 사지에 들어가서 진을 쳤던 정충신의 깡이나, 황주 전투에서부터 미약한 병력으로 이괄을 상대했던 충성파 장수들의 용기도 엄청난 수준이었다.
  39. [39] 이괄 일당과 한편으로 취급돼서 반역죄로 연좌당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관군이 한양에 입성한 후에 무고하게 처형당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이런 사람은 극히 일부여서 별로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
  40. [40] 이후 한양에서는 이괄은 꽹괄이고 장만은 볼 만했네라는 유행어가 생겼다. 이괄이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꽹과리를 쳤으나 당해낼 수 없었다 라는 다른 어원도 있다.
  41. [41] 이게 옳은 판단이었는데, 당시 승리 자체가 정충신 군의 소수 특공 작전을 통한 기적이었고, 이후에 이괄을 막던 부사 임회는 잔당에게 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여담으로 임회는 송강 정철의 사위.
  42. [42] 실록에 의하면 이괄의 난이 끝난지 10년 후.
  43. [43] 이 형제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 말 그대로 영화같은 일까지 벌였는데 어엿한 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비로 위장하여 가짜 노비 문서까지 만들었으며 이수백의 이웃집에 머슴으로 들어갔다. 심지어는 이수백의 집 여종과 위장 결혼까지 하여 이수백의 일거수 일투족을 하나하나 추적했다. 출처는 《성호사설》 권17 '이문웅(李文雄)' 편이다.
  44. [44] 조선은 엄연한 법치 국가였고 사적인 복수에 대해서도 같은 시대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엄격한 편이었으나, 효(孝)를 가장 중한 가치로 삼은 유교 이데올로기가 지배한 만큼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보복에 대해선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45. [45] 《인조실록》 권29 12년 3월 13일 기해 2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203013_002
  46. [46] 특히, 여진족을 상대해야 할 관서군의 기병 상당수가 이 난으로 인해 사라져버렸다. 안습.
  47. [47] 서아지와 김충선은 사적인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직접 목을 베었으니...
  48. [48] 광해군 통치 후반기 때는 이미 인재들이 광해군의 기분 따라 쓸려나가서 '똑똑한' 정치 세력이 거의 없었고, 서인들의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을 제외한 정치 세력들이 대부분 정리되었으므로, 이괄처럼 더 이상의 반란을 일으켜봐야 국가 멸망 테크가 현실화 될뿐, 아무도 이득을 볼 수 없는 진짜 막장이 찾아오는 상황이었으므로 더 이상의 반란은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49. [49] 실제 장수들의 전투 기록을 보면, 인조가 각 장수들에게 맡긴 병사들의 차이를 제외하면, 장수들의 능력이나 용기는 이괄 측이 특별히 뛰어나다고 볼 수 없다. 애초에 "병사들이 전투를 하지도 않고 붕괴 혹은 도주했다" 라는 기록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졸렬한 지방군을 이끌고 장렬히 싸운 관군 장수들이 너무 저평가 당한 것이다.
  50. [50] 덤으로 이괄 군이 수도를 휩쓸었다는 업적 자체도 인조반정에서 약점을 노출했던 광해군 시대의 군사 전략이 2년만에 다시 터진 문제에 가깝다. 사실상 인조 정권 초반의 실패는 광해군의 군사 배치와 같은 원인으로 인한 실패였는데, 이때의 군사 배치는 몇가지 요인으로 인하여 북방이 무너지면 왕으로서는 더 이상의 전략을 준비할 여력이 없어 수정이 불가피함을 드러내게 된다.
  51. [51] 특히, 이괄의 난 이후 인조의 군인을 방관하는 성향이 가속되었다. 인조는 이괄에게는 이상할 정도의 신임을 보였으나, 그 이후의 군인들의 활동에는 개입하거나 지원할 의지를 잃은듯한 모습을 보인다. 전제 국가의 특성으로 자연히 중신들의 여론도 왕의 선택을 따라 내정에만 쏠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52. [52] 실제로 12.12 군사 반란 당시 노태우가 가장 욕을 먹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전방 9사단의 병력 일부(!)를 빼돌리는 미친 짓을 저질렀기 때문. 만약 북에서 이 움직임을 알고 무력 도발이나 더 나아가 남침을 했다면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드라마 5공화국에도 장태완 수경 사령관의 입을 빌어 '설마 (노태우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은 안하겠지?'라고 비난한다.
  53. [53] 정묘호란의 초창기 군세는 3만이고, 그마저도 오래 유지하기 벅찼기에 강화를 맺고 급히 돌아가야했다.
  54. [54] 실제로 홍타이지도 정묘호란을 일으키기 전에 가능성이 있는지 의심하면서 망설였는데, 이괄의 난 때 도주한 이들이(...) 열성적으로 조선의 방비가 없다고 설득해 정묘호란을 부추겼다.
  55. [55] 이괄이 한양에 도달할 당시에 백성들이 반군을 죄다 반겼다고 한다. 다만 이건 김류가 기자헌을 국문없이 처형하는 병크를 저질러서, 인조에 대한 여론이 인간 쓰레기 급으로 낮아졌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결국 관군에게 패하고 패색이 짙어지자 (아마도 권세가들이 주축이 돼서) 한양 성문을 잠가버렸다.
  56. [56] 본 항목에도 그렇고 현대인들에게는 김류가 이괄을 모함했다는 낭설이 널리 퍼져 있으나, 김류는 오히려 신중론자였기에 굉장히 현실적인 입장을 보였다. 오히려 이괄의 난에서 직접적인 방아쇠를 당긴 것은 인조와 이귀였다. 하지만 워낙 평판이 나쁜 인물이라서 어떻게든 이괄이랑 엮어서 욕을 하려는 왜곡이 많은 편이다.
  57. [57] 인조반정 - 정묘호란 - 병자호란까지 트리플 크라운. 걸친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고위 공직자인데도 인지도가 바닥이다. 그의 무능력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 결국 대차게 까이고 백의종군했으나, 이후에도 같은 짓을 반복한다. 숨겨진 먹튀.
  58. [58] 실록의 표현을 옮기자면 평안도 백성들이 이원익의 말이라면 어버이처럼 따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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