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전국시대)

李信

생몰년도 불명

1. 개요
2. 생애
3. 패배의 의문점
4. 족보의 의문점
5.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중국전국시대 말기와 진나라 초기에 활약한 장수. 신당서 종실세계표에 따르면 자는 유성(有成).

2. 생애

생몰년이 불명인 만큼 이신의 초기 행적 또한 불명이다. 주요 기록은 조나라 남쪽 태원(太原)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는 기록[1]과 기원전 227년에 연나라를 정벌할 때, 수천 명만을 이끌고 요동까지 가서 연나라 태자 희단[2]을 추격하여 잡아온 (혹은 목을 가져온)[3] 공적이 남아 있다.

진시황은 이신을 젊은 나이에 현명하고 용기 있는 장수라 여겼다.

그의 이름이 가장 유명하게 남은 것은 기원전 224년에 초나라 정벌 실패인데, 〈왕전 열전〉에 따르면[4] 진시황이 초나라 정벌에 병력이 얼마나 필요하겠냐고 묻자 이신은 병력 20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했고, 이에 진의 백전노장 왕전이 60만은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이에 진시황은 왕전 그대도 나이가 들더니 담력이 작아졌소. 하면서 이신에게 20만 장병을 데리고 초나라를 정벌하라고 명령한다. 초반에는 몽염과 함께 군을 나누어 진격해 평여에서 초나라 군을 격파하고, 언영을 함락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초나라 장수인 항연에게 대패한다.

초나라 공격 이후 이신은 다시 중용되어서 기원전 222년에 4년전에 한 번 박살낸 연나라를 왕분과 함께 다시 공격하고, 요동을 넘어 당시 조선국과의 경계지역이었던[5] 압록강을 넘으려던 연왕 희를 사로잡아서 연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켰다. 기원전 221년에는 제나라를 정벌하는 전쟁에 참여헸다. 그리고 천하통일 후에 이 공적으로 농서후에 봉해졌다.

중국에서는 그가 노자[6]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으며,[7] 농서 이씨의 선조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자손은 이후 전한에서 대대로 군문에서 일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신궁으로 이름 높은 비운의 명장 이광[8]과, 사마천고자로 만들어버린 사건의 주역인 이릉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릉이 흉노에 투항했다는 이유로 많은 일족이 주살되어 가문이 쇠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장 가문이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인지 전한 이후 후한을 거쳐 오호십육국시대까지도 명성이 이어져서, 당나라 황실 사람들은 이신의 자손을 칭하였으며, 신당서에 따르면 당나라 황실인 이씨 가문의 선조라고 기록하였다.[9]

즉 그의 후손들이 중국사에 기록되는 유명한 사람들이다.

3. 패배의 의문점

이렇듯 역사에서는 패배의 기록만 크게 쓰여있을 뿐 다른 이야기는 적은 걸 보면 몽오의 몽씨 가문과 왕전의 왕씨 가문에 비해서 이신의 출신이 낮아서 평가절하되었다는 역사가들의 추측도 있다. 하지만 이신의 조부가 진나라의 발원지인 농서 태수를 맡고, 부친은 남군 태수를 맡을 정도의 가문이었음을 볼 때, 이신의 출신이 몽오나 왕전에 비해 한미하다고 하기에는 어렵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신의 패배의 기록도 왕전의 열전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사기》 〈진시황본기〉나 〈초세가〉 그리고 같은 열전에서도 이신의 후손인 〈이장군 열전〉이나 이신의 부장으로 참전했다는 〈몽염 열전〉에는 일절 기록이 없다. 원래 사기에서는 그 인물 조상에 대한 업적을 간략하게나마 써주는데 항연은 후손 항우의 〈항우본기〉에서도 왕전에게 패배한 기록만 있지 이신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기록이 없다. 비슷한 시기 열전에 이목이 진나라와 싸워 이긴 기록은 〈조세가〉에도 잘 기록되어서 교차검증이 가능한 것과 대조적이다.

세부적인 기록들도 모순적인데, 몽염은 자신의 열전에 원래 진나라의 법률업무를 맡다가 기원전 221년이 돼서야 장군직을 맡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몽염이 이신의 부장으로 초나라의 침을 공격했던 시점은 왕전이 복귀한 시점인 기원전 224년 이전의 이야기이다. 그 외에도 왕전의 열전에는 왕전이 초나라 공격 때문에 은퇴한 것은 삼진(조, 위, 한)을 멸망시킨 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본기에 왕전이 은퇴할 때는 위나라는 건재한 상황이었고, 왕전이 은퇴한 다음 해에 멸망한다. 때문에 본기에 왕전이 병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복귀해 초나라를 공격했다는 기록을 조합해보면 이신이 대패를 당한 것이 아니라 대치상황에서 왕전과 단순히 임무 교체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사기 <백기왕전 열전>에서도 이신의 패배 과정은 모순적인데, "이신은 평여(平與)를 공격하고 몽염이 침(寢)을 공격하여 초군을 대파한다. 이신은 다시 언(鄢), 영(郢)을 공격해 격파하고 서쪽[10]으로 진군해 몽염과 성보(城父)에서 만난다. 초나라 사람들이 따라오면서 3일낮 3일밤을 쉬지 않고 이신의 군대를 대파한다. 두 개의 보루를 치고 들어오고, 7명의 도위(장군)을 죽인다. 진나라 군대가 패주한다"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언'과 '영'은 이미 진나라 영토였기에 '초나라 사람들이 따라오면서'라는 서술 등에서 이신은 이미 주 전장을 떠나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는 당시 창평군이 일으킨 반란에 의해서 이신의 보급로가 막혔고, 그것을 뚫기 위해 움직였다는 점을 가리키는 기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초나라에서의 패배는 항연이 잘 싸운 것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후방에서 창평군이 일으킨 반란이라는 설이 현대에 들어서 각광받고 있다.

실제로 그 당시 일어난 전쟁이나 사건 등을 연표로 나타내 보면 기록마다 차이가 있으며, 그 내용이 확연하게 차이가 나기에 그에 대해서는 좀 더 아래에서 설명하고 항연의 죽음 과정을 진시황 본기와 초세가, 왕전 열전의 기록을 조합해 만든 가설을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 기원전 226년, (본기) 진왕 영정의 명에 따라 창평군이 '영'(郢) 땅으로 옮겨 살게 됐다.
  • 기원전 225년, (열전) 이신이 몽념과 함께 2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침공했다.
  • 기원전 224년, (열전) 진나라 군이 초군을 대파하며 평여, 침, 언, 영 땅을 점령했으나 그 후 항연에게 대패했다.
  • 기원전 224년, (본기/세가)진왕의 요청에 의해 왕전이 몽무와 함께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 정벌을 시작했다. (열전에는) 60만 대군으로 1년 동안 지구전을 펼쳤다.
  • 기원전 223년, (본기)항연이 왕전의 계략에 말려 초나라 군대가 대패하고, 초왕 부추가 사로잡혀 초나라가 멸망했다. (세가) 이때 항연이 사망했다.
  • 기원전 223년, (본기)창평군이 항연에 의해 추대되어 초왕에 옹립되고 회남에서 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 기원전 223년, (본기)왕전, 몽무에 의해 반란이 진압 되어 성이 함락되고 창평군은 사망했으며, 그후 항연도 자살 또는 사망했다.

위의 기록들을 보았을 때 창평군이 반란을 일으키고 초왕으로 등극한 시기가 상당히 절묘하다. 창평군의 초왕 등극이 거의 초왕 부추의 죽음 직후인데, 그 기간은 1년도 채 차이가 나질 않는다.[11]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보통 왕과 자식, 또는 고대였으므로 왕의 형제가 정상적으로 남아 있을 경우 왕이 죽은 바로 직후 자식 또는 형제가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창평군의 경우 비록 초나라의 공자이긴 하나 초나라를 떠난 지 오래였기 때문에 초나라에 자신의 세력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으며, 진나라로 건너간 이후에는 진나라의 관리로 있었고, 나중에는 재상직까지 지냈는데, 만약에 초왕 부추가 사망할 때에 당시 그가 여전히 진나라에 남아 있었다면 아무런 사전 모의 없이 초왕 부추가 죽자마자 갑자기 진나라에서 살고 있던 창평군이 뜬금 없이 초왕으로 옹립되었다는 얘기가 된다.[12]

하지만 창평군이 이신의 초나라 침공 당시 초나라로부터 사전 모의 또는 사주를 받고 이미 반란을 일으켜 진나라 군대의 배후를 끊고 퇴로 및 보급로를 차단하여 이신의 군대를 위험에 빠뜨리고, '초나라 사람들이 따라오면서'라는 위의 말에 따라 반란을 진압하러 간 이신의 군대를 항연이 빠르게 공격해 대파한 후 창평군이 초나라로 넘어가 있다가, 초왕 부추가 죽은 직후 초왕으로 옹립되었다면 이야기가 좀 더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런데 이 내용이 《사기》를 기준으로 작성하였으나 위에서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고 한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 때문이다. 사기 안에서도 이 부분과 관련하여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항연의 죽음 시기이다. 《사기》의 〈초세가〉나 〈왕전 열전〉 등에서는 항연이 왕전에게 대패한 직후 기(蘄)의 남쪽에서 죽었다고 하나, 〈진시황본기〉에서는 항연이 왕전에게 대패한 후에도 살아서 창평군을 옹립했다고 나온다. 그렇기에 〈왕전 열전〉 등에 따르면 이신은 저런 설과는 무관하게 그냥 대패한 것이 된다.

이후 이신이 다시 중용되어서 연나라제나라를 정벌하는 전쟁에 참여해 그 공로로 천하통일 후에 농서후에 봉해진 사실[13]도 이신의 패배가 이신 본인의 실책 때문이 아니라 창평군의 반란 때문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본인 이신의 책임이었다면, 진왕 앞에서 20만으로 충분하다는 망언을 하고 나섬으로써 결과적으로 심각한 군사적 위기를 초래했으니, 그가 모셨던 진시황의 성격과 행적으로 보아 참수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그랬다면 이신이 계속 군사적으로 중임을 맡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전한 시대에도 불운의 아이콘 명장 이광이 나오는 등 이릉의 사건 이전까지 이신의 후손들은 알아주는 무인 가문이었으며, 오호십육국 시대에도 그 명성이 이어져서 무천진 관롱집단의 당나라 이씨는 그의 후손을 자처했을 정도였으니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자였던 건 분명해 보인다.

4. 족보의 의문점

신당서에는 전국시대의 명장인 이목이 이신과 5촌 관계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한번 그게 맞는지 살펴보자.

興族,字育神,一名汪,秦將軍。

이흥족(興族)의 자는 육신(育神)이며, 다른 이름은 이왕(汪)이고 진나라 장군이다.

生曇,字貴遠,趙柏人侯,入秦為御史大夫,葬柏人西。

아들 이담(曇)의 자는 귀원(貴遠)이며, 조나라에서 백인후(柏人侯)로 봉해졌다가 진나라에 와서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고, 백인(柏人) 서쪽 지역에 묻혔다.

生四子:崇、辨、昭、璣。

아들 네 명을 낳았는데 이숭(崇)ㆍ이변(辨)ㆍ이소(昭)ㆍ이기(璣)이다.

崇為隴西房,璣為趙郡房。

이숭(崇)은 농서방(隴西房)이 되고 이기(璣)는 조군방(趙郡房)이 되었다.

崇字伯祐,隴西守、南鄭公。

이숭(崇)의 자는 백우(伯祐)이며, 농서태수(隴西守)ㆍ남정공(南鄭公)이다.

生二子:長曰平燕;次曰瑤,字內德,南郡守、狄道侯。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이평연(平燕)이고, 차남은 이요(瑤)이며 자는 내덕(內德)이고 남군태수(南郡守)ㆍ적도후(狄道侯)이다.

生信,字有成,大將軍、隴西侯。

아들 이신(信)의 자는 유성(有成)이며 대장군ㆍ농서후(隴西侯)이다.

<신당서> 종실세계표

종실세계표 안에는 분명 이신의 이름이 있다. 하지만 이목의 이름은 없다. 그 대신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다.

崇為隴西房,璣為趙郡房。

이숭(崇)은 농서방(隴西房)이 되고 이기(璣)는 조군방(趙郡房)이 되었다.

<신당서>

조군방이란 무엇일까? 바로 이기가 조나라로 옮겨간 이후에 그곳에서 번성한 조군 이씨를 말한다. 이숭이 농서 이씨로, 이기가 조군 이씨로 이어지는 것이다. 조군 이씨의 족보를 살펴보자.

趙郡李氏,出自秦司徒曇次子璣,字伯衡,秦太傅。

조군 이씨는 진나라 사도(司徒) 이담(曇)의 차남 이기(璣)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이기의 자는 백형(伯衡)이고 진나라 태부(太傅)이다.

三子:雲、牧、齊。

세 아들은 이운(雲)ㆍ이목(牧)ㆍ이제(齊)이다.

牧爲趙相,封武安君,始居趙郡。

이목(牧)은 조나라 승상이 되고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으며 이때부터 조군(趙郡)에 살았다.

<신당서>

이 역시도 같은 <신당서> 안에 기재되어 있다. 이신과 이목이 5촌 관계란 것을 증명하는 자료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 기록보다 더욱 예전에 만들어진 기록을 보자, 바로 <북사>이다.

子孫散居諸國,或在趙,或在秦。

(이씨의) 자손이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았는데 혹은 조나라에 있고 혹은 진나라에 있었다.

在秦者名興族,為將軍。

진나라에 있던 후손은 이름이 이흥족(興族)인데 장군(將軍)이 되었다.

生子伯祐,建功北狄,封南鄭公。

아들 이백우(伯祐)를 낳았는데, 이백우는 북적(北狄)을 무찌르는 공을 세우고 남정공(南鄭公)에 봉해졌다.

伯祐生二子,平燕、內德。

이백우(伯祐)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평연(平燕)ㆍ이내덕(內德)이다.

子信為秦將,虜燕太子丹。

아들 이신(信)은 진(秦)의 장수가 되어서 연(燕)의 태자(太子) 단(丹)을 사로잡았다.

<북사>

눈썰미가 있다면 이상한 점을 알아챘을 것이다. 신당서에는 있는 이담의 이름이 없다.

신당서에는 이흥족 - 이담 - 이숭(이백우) - 이평연 - 이신,

북사에는 이흥족 - 이백우 - 이평연 - 이신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담과 이목은 북사에는 나오지 않는 걸까? 다시 한 번 찾아보자.

在趙者曰曇,以功封柏人,武安君牧其後也。

조나라에 있던 후손은 이담(曇)으로 불렸는데 공을 세우고 백인(柏人)에 봉해졌으며 무안군(武安君) 이목(牧)이 그 후손이다.

<북사>

있다. 있기는 있는데 신당서와는 굉장히 다르다. 이흥족의 아들은커녕 아예 전혀 상관도 없는, 먼 옛날에 갈라졌던 조나라의 이씨로 나오고, 이목은 그의 손자가 아니라 '후손'이다.

어째서 이렇게 기록이 다른 걸까? 북사를 쓴 사람이 오류를 낸 걸까?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 북사를 집필한 건 당태종 이세민의 측근이었던 이연수이며, 심지어 북사의 편찬은 당태종 본인이 명령한 것이다. 이연수가 자신이 섬기는 사람의 조상을 지마음대로 휘갈기는 역적이 아닌 한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당태종은 틈만 나면 역사서를 보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을 조작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자신이 직접 명령해서 만들게 한 역사서에 자신의 족보가 틀리게 기록되어 있다면 그걸 그냥 놔둘까? 적어도 당태종 시절의 농서 이씨는 이목과 이신을 5촌 사이로 인식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한 마디로 신당서 종실세계표는 당나라 시기 누군가가 조작한 사료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신보다 유명한 이목을 농서 이씨 가계내에 집어넣으려는 시도였던 것. 다만 신당서에선 북사 계보도에서 아예 텅텅 비워져 있던 이신의 조상 이흥족의 위쪽 가계도 춘추전국시대 당시 유명한 이씨들로 채워졌는데, 그거 보면 일단 유명한 사람은 닥치고 넣으려던 것 같다. 그러니까 굳이 '이목을 넣고 싶다'기보단 '유명한 사람들로 마구 채워서 더 그럴듯하게 만들고 싶다' 쪽이었던 게 아닐까.

5. 대중매체에서

5.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2, 13

삼국지 12 PK에 고대무장으로 추가되었다.

능력치는 통솔력 70/무력 88/지력 43/정치력 56 병과는 창병이며 전법은 단기구.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등장하며 무력을 4로 늘려주는 아이템인 '이광의 활'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이광이 이신의 후손이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전국칠웅에서 무력이 92의 무장이 되지만, 문제는 지력이 43이라서 전법이 조루고, 이광의 활은 궁병에게 효과가 있는데 이신은 창병이라서 쓸모 없다. 시작하자마자 이신에게 이광의 활을 압수해 궁병이지만 원사가 없는 백기에게 주자. 대신 이럴 시에는 이신의 충성도 관리가 상당히 빡세진다. 이광의 활의 가치에 필적하는 보물을 줘 달래거나 후환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이신을 죽여야 한다.

삼국지 13에서도 등장한다. 능력치는 전작과 같으나 활용도 면에서는 오히려 더 떨어진 편이다. 전법은 장료와 같은 효장질구로 장료와 비교한다면 이신이 당연히 밀린다. 전투력 자체가 엉성해서 장료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더군다나 아무리 후하게 쳐준다고 해도 통솔력이 엉망이라 털리는 경우가 태반이고 특기를 봐도 좋게 넘어갈 수가 없다. 특히 효장질구라는 전법 자체는 좋은 전법이지만, 소모 코스트 대비 성능이 좋지는 않은 전법인데 그나마 장료는 PK에서 추가된 고유위명 효과로 전법 효과를 좀더 살려볼 수 있지만, 이신은 그런 것도 없어서 활용도가 상당히 떨어진다. 특기는 훈련 1, 순찰 4, 신속5, 분전3, 연전5, 일기6.

병과와 전법을 보면 아무리 봐도 킹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게다가 일러스트도 1화에 나오는 이신의 모습과 판박이다.

5.2.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고대무장으로 등장. 병종은 보병계고 성우는 김영선이다. 킹덤의 영향을 받은 듯 한데 장수로서의 성능은 병종의 한계로 그저 그런 편이다. 연의는 아직 따로 없다.

5.3. 만화 킹덤

  자세한 내용은 이신(킹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주인공으로 등장해 천민 출신으로 처음에는 성씨가 없이 신으로 등장한다.


  1. [1] 기록 출처: 《사기》 〈자객 열전〉.
  2. [2] 진왕 시절 영정의 암살에 성공할 뻔했던 자객 형가를 보낸 자다.
  3. [3] 〈진시황 본기〉나 〈자객 열전〉에는 연왕 희가 아들 태자 단을 죽이고, 태자 단의 목을 진나라로 보내온 것으로 되어 있다.
  4. [4] 후술하겠지만 이 패배는 〈왕전 열전〉에만 기록되었지 다른 본기나 세가, 열전에는 일절 기록이 없다.
  5. [5] 초기 조선국은 요하가 중심이었으나 연나라에 의해 평양을 수도로 하는 한반도로 밀려났다.
  6. [6] 노자의 이름은 이이(李耳)이다.
  7. [7] 진나라 승상인 이사도 노자의 후손이라는 얘기가 있다.
  8. [8] 수호지에 등장하는 명궁 화영의 별호가 작은 이광인 소이광인 것을 보면 얼마나 뛰어난 명궁이자 훌륭한 장수였는지 알 수 있다.
  9. [9] 다만 실제 당나라 황실인 이씨 집안은 오호십육국 시대 당시 중국으로 남하해 한족에 동화된 선비족이거나 혼혈이라는 게 중론이다. 이를 무천진 관롱집단이라고 하는데, 당나라는 측천무후 시절까지도 무천진 관롱집단의 연합으로 창설되어 힘이 매우 강했다. 수나라를 건설한 양씨 집안도 한화된 선비족 출신이다.
  10. [10] 원문은 서쪽인데 지도를 보면 동쪽을 잘못 적은 듯하다.
  11. [11] 창평군이 초나라의 공자이긴 하나 초왕 부추의 자식이 아니고, 고열왕의 아들인 동시에 부추와 이복형제였고, 초왕 부추는 난을 통해서 초왕에 올랐고, 창평군은 거의 버려지다시피 진나라로 건너갔다.
  12. [12] 만약 사전 모의가 있었다면 밑의 설명처럼 이신과 항연의 전쟁 도중 창평군이 초를 돕는 것이 당연하다.
  13. [13] 다만, 농서후에 봉해졌다는 건 당나라 때의 족보에 나오는 얘기다. 족보는 다른 역사사료에 비해 신뢰도가 낮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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