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

이응준(李應俊)

1891년 ~ 1985년

복무

대한민국 육군

기간

1914년 ~ 1955년

임관

일본육사 26기

최종계급

중장

최종보직

모슬포 제1훈련소장[1]

주요보직

육군 제3보병사단장
육군대학총장
육군 참모총장

1. 소개
2. 해방 이전 및 친일 행위
3. 해방 전후
4. 건군에 기여
5. 여담
5.1. 성폭행

1. 소개

한국군인이자 친일파. 계급일본군으로는 대좌, 대한민국 국군으로는 중장. 대한민국 국군 창설을 주도했으며, 초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그리고 성범죄자. 이형근이 그의 사위이다.

2. 해방 이전 및 친일 행위

평안남도 안주군 출신으로 1906년 상경하였다. 고향선배이자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인 노백린의 영향을 받아 군인이 되기로 하였고 육군무관학교에 1908년 편입하였다. 조선인 일본군으로 일본 유학을 허가받아 191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 소위임관하였다. 당시 일본군이 될 수 있는 조선인은 왕공족이거나 한일강제병합 당시에 협조했던 대한제국군장교들, 그리고 합병 당시에 사관생도였던 일부 인원만이 가능했다. 26기 동기로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치홍사익, 지청천, 김경천이 있다.

임관 직후 제1사단 제3연대에 배속받은 뒤, 치바 보병학교에서 전문 교육을 받으면 육군 중위로 진급하였다. 1918년 8월 시베리아 간섭전쟁에 일본이 가담하자 블라디보스토크에 설치된 일본 파견군 사령부에 배속되었다. 그곳에 살고있는 조선인을 통해 러시아인, 중국인, 조선인 공산주의자를 파악하고 대민 정탐 활동 업무를 담당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지청천, 김경천 등과 일본군을 벗어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할 것을 합의하고 망명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이응준은 실행하지 않았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독립운동을 하던 최성수에게 권총을 빌려주었는데 최가 체포되면서 그도 헌병대로 끌려가 취조를 당했다 한다. 그러나 그를 아끼던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 대장의 배려로 풀려났고 대신 망명을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20년 최성수에게 권총을 제공한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단순 도난 사건으로 처리되어 무혐의로 풀려났다고 되어 있다. 친일파들이 자신의 행적을 회고록을 통해 정당화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다.우쓰노미야 대장에게 칭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그는 신태영과 함께 동경으로 가게되었다.

1925년 11월 궈쑹링 사건이 발생하자 펑톈에서 현지 경비 업무를 담당했다. 1928년 장제스의 북벌군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이 제남 사건을 일으켰을 때 펑톈에 파견되었다. 펑톈에서 장쭤린 폭살 사건이 일어나자 현장으로 출동하여 경비를 섰다. 1933년 일본군 육군 소좌로서 조선군 제20사단 제79연대 부관으로, 1934년 8월에는 조선군 제20사단 제79연대 대대장으로 근무했다. 1935년 7월 일본군 장교로 장기간 복무한 공적을 인정받아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6년 중령으로 진급했고 이듬해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전선에 배치되어 주로 병참 업무와 징집 업무에 종사했다. 산동성에서는 직접 팔로군과 싸웠고 남원 전투, 석가장(스자좡) 전투, 산서성(산시선) 전투에도 참전했다. 선무공작을 맡아 대동아 건설 정신을 중국인들에게 계몽시키는 업무에 종사했다. 그 뒤 임분 전투와 산시성 일대를 장악하는 전투에 종군했다. 1939년 1월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서보장은 “국가 및 지방 자치 단체의 공무 또는 공공적인 업무에 다년간 종사하고 공로를 쌓아 성적을 올린 자”에게 수여하는 만큼 이응준은 적극적으로 활동한 친일파다.

1941년 대좌로 진급했고 학병 홍보 등을 했다. 홍보의 내용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자는 선동이었다. 이응준은 징병제 실시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와 적극적인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방하면서 인력 동원에 앞장섰다.[2][3]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패망했을 때는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원산항 수송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응준은 패전과 동시에 개인적으로 탈출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그의 아내는 민족지도자들의 수발이나 교류를 서슴없이 하곤 했는데 도산 선생의 병수발을 했다던가 이를 위해 모금활동을 하기도 했다.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을 비롯한 주요 민족지도자들과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그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인을 통해 대민 정탐 활동을 한 것으로 보아, 다른 의도가 있었을 의심의 여지도 있다.

창씨개명에 따른 일본식 이름은 가야마 다케토시(香山武俊)였다.

3. 해방 전후

어제까지도 일군의 고급장교 신분이었던 사람이 조국이 해방되었다 해서 세상 표면에 나서서 날뛴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해방되는 날까지 일군에 있었던 사람일뿐 아니라 영어도 제대로 못하니 지금 정세가 전혀 달라진 신국면 제일선에 나설 자격이 없다. 더욱이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1945년 8월 15일원산에 근무하고 있었으며 간신히 탈출하여 남한으로 내려왔다. 당시 일본 육사출신의 대다수 장교들처럼 근신하던 중[4][5] 미군정의 호출을 받게 된다. 이는 범 일본군 출신 중에서 가장 최선임이면서 고급 장교(대좌)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내 일본군 장교 중 최고위급은 이응준과 1년후배인 김석원이었다. 동기인 신태영은 중좌.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군정에 출두해서도 해방되는 날까지 일군에 있었던 사람일뿐 아니라 영어도 제대로 못하니 지금 정세가 전혀 달라진 신국면 제일선에 나설 자격이 없다. 더욱이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군 아고우 대령이 일본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한 분이 어째서 자기 나라를 위해서는 못하겠다는 것인가?라는 말에 군사고문직을 주위와 고심 끝에 수용했다 한다.

해방 전의 행적을 보면 민족운동가 등과 교류하고 그들의 병 구완을 하는 등의 모습이 보이면서도 일본군 고급장교로서 친일 활동을 하는 이중적인 식민지 지식인의 모습이 보인다. 이는 1년 후배인 김석원의 경우도 매우 비슷한데 이 둘은 각자 회고록을 통해 반성을 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매우 비슷하다.

4. 건군에 기여

임시정부 요인들께서 말씀하시는 법통을 우리나라 군대로 하여금 계승하는 일이 숭고한 사명이라고 생각해 달라 (이응준이 유동열을 설득하면서)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그의 군사고문직 수용 덕분에 임정 출신의 유동열이 통위부장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챔프니 대령과 뱀부 계획을 세우면서[6] 군사영어학교를 세웠는데 60명의 1기를 선발할 때 만주군 출신 20명은 원용덕중국군 출신 20명은 조개옥이 추천하기로 했고 일본군 출신 20명은 이응준이 추천하기로 결정이 되었는데 이때 중국군, 즉 광복군 출신들이 미군정의 정책을 보이콧하는 바람에 대다수는 일본군과 만주군으로 채워졌다. 광복군들은 나중에 1946년 9월에 통위부 장관에 자군 출신인 유동열이 오르자 입대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유동열의 경우도 임정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미군정 협조에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임시정부 요인들께서 말씀하시는 법통을 우리나라 군대로 하여금 계승하는 일이 숭고한 사명이라고 생각해 달라고 설득하여 통위부장으로 위촉하였다.[7]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통위부장 선정에 대한 의뢰를 미군으로부터 받고 후보로 유동열, 지청천, 이범석 3인을 꼽았으며 이 중 최선임격인 유동열을 추대하기로 했다고 한다.

미군정의 의지로 1946년 6월 대령으로 특별임관하고 1948년대한민국 육군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원래 건국과 동시 초대육군총사령관으로 송호성이 부임하였으나 국군조직법에 따라 총참모장제가 도입되면서 그가 초대 육군 총참모장이 된 것이다.[8]

이응준은 강-표 월북사건으로 초대 총 참모장에서 물러난 이후 3사단장, 5사단장, 미아리전선전투사령관, 전남지구전투사령관 등을 지냈으나 이범석 후임인 국무총리 서리 겸 국방장관 신성모와의 불화로 군문을 떠났다. 이후 1952년에 육군대학총장으로 현역복귀하였고 제주도 모슬포 제1훈련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중장으로 진급했다.[9] 3년 후인 1955년에 동계급으로 예편했는데 나이 60이 넘은 상태였다. 그후 체신부(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과 한국반공연맹 이사장(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등을 지내다 1985년 7월 8일에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여담

16세 때부터 93세로 사망할 때까지 약 80여 년간 일기를 거의 빠짐없이 썼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회고 90년'이라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일본군 대좌 출신이었던 점과 주로 징집 및 신병 교육 업무 그리고 학도병 지지, 권유와 연설 등에 적극적으로 친일 부역한 점이 강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장인이었던 이갑이 독립운동하면서 맡긴 고명딸 이정희와 혼인을 했고 일제시대임에도 도산 안창호 선생의 수발을 계속하였고 특히 부인 이정희 여사가 도산 선생의 병수발 및 선생 돕기운동을 벌여 김성수, 방응모, 박흥식 등의 도움을 얻어내어 수발하였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인을 통해 대민 정탐 활동을 한 것으로 보아, 의심의 여지도 있다.

이후 해방 후에도 계속 추모사업을 진행하였다.

동생인 이영준은 3.1 만세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2008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군인 부문에도 들어 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을 가까이 모셨는데 1930년 그가 돌아가자 장례식에 참석을 했던 일로 용산경찰서에서 형사가 찾아와서 '일본군 대위가 참석했다고 들었다'고 하며 참석경위를 묻자 나는 자칭 뿐만 아니라 타칭도 육군 대위로 휴일을 이용하여 아는 분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 무슨 문제가 되냐고 물리친 일화가 있다고 한다. 더하여 이를 연대장에게 보고하니 연대장은 오히려 정정당당하게 군복을 입고 참석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라고 하며 일소에 부쳤다고 한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대한인정책은 민족사상 소유자에 대한 시찰이 매우 가혹했으나 군부인사들 가운데는 비교적 대범한 생각을 가지고 처신하는 인사가 간혹 있었다고 회고록에 적고 있다.

김석원등과 마찬가지로 일본군 고급장교로 복무(부역)하였고 일본군 장교로 재임하면서 학병 강연과 지지, 팔로군 토벌, 시베리아 출병 등 일본 군인으로 전쟁에 나선 전력이 있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었다.

학병강연 관련하여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학병 출정에 대한 강연을 계속 거절했으나 매일신보 사장 이 모로부터 부민관과 교섭하여 의견만 제시하는 것으로 하고 김석원 등과 참석했다고 한다.

흥미로운건 부민관에서의 강연 내용은 학병 출정을 막거나 한일합병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내용은 아니나 일제의 조선인 차별대우에 대한 지적을 하여 일제로부터 지적을 받을 정도의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내용은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의 차별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중략) 똑같이 의무를 다하고 나서도 차별이 계속될 경우에는 제군의 선두에서 항쟁할 생각이 있다이다. 참전을 종용하는 원리가 당시 지식인들의 논리와 비슷하여 친일부역자로 분류되는 주 요인이지만 현역 일군 대좌가 공개석상에서 대중을 대상으로 총독부의 조선인 차별대우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실제 당시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이와 관련하여 조선군사령부나 총독부에서 호출이 없어 의아해 하던 차에 총독부 만찬에 참석을 하니 총독이 자네가 일전에 연설을 했다지? 그 뭐 철저하게 했다며? 하고 넘어갔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 대령으로 적잖이 높은 위치에 있었고 그간 희한하게 일본군 고위급으로 부터 받은 총애가 작용한 것이 작용했던 것 같다.[10]

우쓰노미야 대장은 일본에서 근무하던 김석원 중위가 조선근무를 희망하자 주둔군 78연대로 끌어주고 관심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응준의 경우도 중위시절 그와 인연이 닿았는데 점심을 같이 하기도 하고 퇴근 길엔 이응준 사무실에 들러 '나 먼저 가네'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가 본국으로 전임하게 되었을 때 이 장군 집에 찾아와 '차나 한잔 주게'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일본인의 언동에 불쾌할 때가 많은 줄 아나 참아주기 바라네' 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11]

중국 국민혁명군 및 광복군 출신인 김홍일과 일본 육사 출신인 이응준의 관계는 그들의 출신과는 무관하게 상당히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김홍일과 이응준은 1976년 『세대』의 지면을 통해 광복군, 창군 시절을 회고하는 대담을 나누면서 창군기에 대해 “李=만주와 중국 출신, 그리고 일본 출신, 더러는 유해준, 이성가 씨와 같은 광복군도 대거 새로운 조국의 깃발 아래 모여 들었”고 “金=그때의 보기 좋았던 광경은 출신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지만 서로 추천하고 천거하는 모습”이었다고 공감했다(이응준,김홍일,1976「光復軍․創軍時節」 『세대』제14 권,통권 157호,71쪽). 또한 김홍일의 오산학교 후배이자 이세호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작전참모를 맡았던 전제현 예비역 소장에 따르면 중국 망명 당시 김홍일 장군의 편지를 망명 3개월 만에 국내의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전달한 사람도 이응준 장군이었다고 한다(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 업단,「전제현 장군 3차 구술면담」2014.6.9.).

2015년 민족문화사전의 대표적인 친일행적 미화 및 누락 사례 중 하나로 논란이 되었다.[12]

부인은 이정희(李正熙)이며, 독립운동가 이갑의 딸이다. 1897년생이고, 1985년 이응준을 사별하고, 2년여를 더 살다가 이응준이 사망한 곳과 같은 집에서 1987년 9월 29일 새벽 3시 반에 향년 91세로 사망하였다. 사후 이응준의 장군묘역에 합장되었다.

5.1. 성폭행

1915년 7월 소위 시절 도쿄 변두리의 아오야마 연병장 근처 숲에서 함께 산책중이던 작가 김명순(1896∼1951년?)을 성폭행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가부장제의 제물 된 김명순, 근대문학사에 부활시켜야 충격을 받은 김명순은 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고 김명순은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여학교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졸업생 명부에서 삭제되고 귀국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당시 언론에서는 김명순이 이응준을 짝사랑하다가 실연하자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도가 되었고, 소설가 김동인은 김명순을 모델로 한 소설 '김연실전'에서 자유분방한 성품이 빚어낸 사건인 것처럼 묘사했다.


  1. [1] 대령, 소장때 역임했던 육군참모총장 보단 중장때 역임한 훈련소장 직위가 최종보직에 합당하다.
  2. [2] 학병 홍보의 경우 계속 사양하다가 부민관에서 김석원과 참석했으며 여기서 문제성 발언을 하게 된다.
  3. [3] 그는 대좌진급을 누락하기도 했는데 회고록에 소위 일제가 얘기하는 불령선인과의 잦은 접촉과 그들(조선내의 독립운동가)에게 가까운 계열 이라는 점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한다. 하지만 출처가 자신의 회고록인만큼 자기 미화의 가능성이 높다.
  4. [4] 대다수의 편견이 일본육사출신 장교들이 해방 후 전면에 나섰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는 대부분 만주군 출신, 만주군-일본군, 학병 출신들이 그러했고 오히려 일본 육사 출신들은 소수 였고 해방 후 대부분 근신했다. 정일권, 강문봉, 박정희 등은 만군-일본육사 계열이다.
  5. [5] 이응준과 동기이자 후임 총장인 신태영이나 그의 아들 신응균, 1년 후배인 김석원, 이종찬 등도 자숙하다가 이승만, 이범석 등의 강권으로 늦게 군에 입대한 경우이다.
  6. [6] 뱀부 계획은 각 도 별로 1개 중대를 배치한 뒤 병력을 모아 도마다 1개 연대 수준을 만들고 합계 25,000명 수준의 육상병력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7. [7] 오히려 그러한 유동열이 장교 채용에 있어 양반 운운하여 시대 착오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문제면 문제였을 것이다. 신언서판을 강조한 송호성도 마찬가지'
  8. [8] 송호성의 경우 월북시비가 걸려있어 현재 육군의 역사속에서 지워져 있는 상태다.
  9. [9] 백선엽의 회고록을 보면 백선엽이 중장계급으로 갓 육참총장으로 부임했을 때의 당시 모슬포 훈련소는 여러 여건이 좋지 않아 인격적으로 원숙한 사람이 훈련소장으로 부임해야 적합하다고 생각했으며, 당시 육군대학 총장으로 있던 이응준을 찾아가 훈련소장으로 부임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응준은 "국가를 위해서라면 노골이나마 헌신해야겠지"라고 하였고, 백 장군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훈련소장 부임과 함께 중장진급을 상신하여 진급토록 했다고 전해진다.
  10. [10] 회고록에 보면 그는 별다른 전선 경험 등이 없음에도 일본인 사령관으로 부터 배려를 많이 받는 모습이 보인다. 근무지도 주로 후방이었다. 1년 후배 김석원과는 대조적으로 김석원도 그의 회고록에 이응준의 이런 부분에 대해 동일한 언급을 하고 있다.
  11. [11] 장창국 저 육사 졸업생 내용 인용.
  12. [12] 민족문화사전은 친일 행적을 두고 독립운동을 위한 포석이었다는 식으로 미화한 사례도 보인다. 일본군 대좌 출신 이응준에 대해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5월 제26기생으로 졸업하였다. 군사력 양성으로 국권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뜻의 결실이었다”, “일본군에 배속되어 1941년 대좌로 진급하였으며 8·15 광복 직전 민족운동가들과 협력하기도 하였다”고 썼다. <친일인명사전>은 이응준을 “일본군 장교로 재직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한편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일본 군인이 되어 천황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선동했다”며 “조선 청년에게도 국가 방위의 숭고한 병역의무가 부여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무상의 광영이며 명예”라고 한 이응준의 글을 근거로 제시했다. 민족문화사전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배재정 의원실(새정치민주연합)은 민족문화사전 내용을 분석, 서춘·이응준을 포함해 43명의 서술이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배재정 의원은 “정부는 광복 70년을 기념하는 정부차원의 요란한 행사보다 친일부역자 기록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이 작업이야말로 진정한 광복일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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