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이름

이한열 (李韓烈)

국적

대한민국

본관

전주 이씨

출생

1966년 8월 29일[1],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사망

1987년 7월 5일(향년 만 20세), 서울특별시

종교

개신교

직업

대학생, 학생운동가

가족

아버지 이병섭, 어머니 배은심
누나 3명, 남동생 1명

학력

광주 동산초등학교
광주동성중학교
광주진흥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사인

최루탄 피격에 의해 사망

1. 개요
2. 생애
2.1. 6월 항쟁, 사망
2.2. 사후
3. 영화 <1987>에서
4. 기타

1. 개요

"한열이를 살려내라"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은 후 학생운동의 구호이다.

"장하다, 미운 오리 새끼. 이럴수가 있느냐, 이한열. 네 모습이 보고 싶구나"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민주열사

연세대학교 학생으로 재학 중이던 생전의 모습.

최루탄에 맞은 후 이종창[2]에게 부축받는 모습[3]

전라남도 화순군[4] 출생으로 학생운동가이다. 1987년 6월 9일 최루탄을 맞고 같은해 7월 5일 사망하여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2. 생애

어린 시절 대부분을 전남 화순군에서 보냈다고 한다. 광주 동산초등학교와 동성중학교를 나온 후 광주진흥고를 졸업한다. 광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만큼 광주 5·18 민주화운동도 몸소 겪었는데, 그 당시 모범생이었던 이한열은 부모님의 말씀대로 집에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이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도 연세대 경영학과는 굉장히 대규모 학과로, 1학년 학생만 450명이 넘었다. 이한열은 경영학과 C반 소속, 최루탄 피격 당시 입고 있던 것도 C반 반티였고 본인도 상당히 마음에 들어 자주 입고 다녔다고 한다.

재학 당시 중앙동아리인 '만화사랑'을 창설하였으며, 운동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 동아리는 1987년 당시 운동권이 인천 5·3사태 등으로 대중과 멀어지자 대학생들을 운동권으로 더 쉽게 포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대놓고 학생운동 서클을 만들면 결단코 무사하지 못할 시대였기 때문에, 만화나 음악 등등 명목을 붙여 동아리를 만들고 활동 구심점으로 삼는 사례가 잦았던 탓도 있다. 혹자는 이 동아리를 보고 운동권을 위해 거짓말로 학생들을 포섭하냐고 화낼 수도 있겠지만, 이한열은 이 동아리에 들어온 후배들에게 시위에 함께 나가자고 권유할 때도 조심스러워할 정도로 배려심이 깊었다. 이한열은 "비록 명목상일지라도 동아리가 '만화 동아리'를 표방하고 있으니 만화를 열심히 배워야한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부원 중에서 만화를 가장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이런 제안에 힘입어 민중화가를 불러다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이한열은 과격한 운동권 학생들과 진짜 만화가 좋아 들어온 학생 간 가교 같은 존재였다. 이한열은 그렇게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성실했던 인물이었다. 동기들은 집회 후 항상 학생회관 휴게실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시위를 기록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그는 운동과 공부 양쪽에서 성실했고 사상서만큼이나 영어공부에도 열중했다. 하지만 해당 동아리는 1989년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뒤 운동권과 전혀 무관한 동아리가 되었으며, 이한열 열사 관련행사 역시 학생회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동아리에서 보관 중이던 사료들은 전부 이한열 기념사업회에 기증되었다.

2.1. 6월 항쟁, 사망

[5]

1987년 6월 9일, '6·10 대회 출정을 위한 범연세인 총궐기 대회'에서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정확하게는 당시 학생 운동 용어로 '소크(soc)'라고 부르는 전위대 역할이었다. 학생과 전경 사이에서 대치하면서 학우들을 보호하고 시간을 버는 훗날 '사수대' 등으로 불리는 조직. 이종창도 과는 달랐지만 마찬가지로 소크였다. 그날 오후 4시 40분경, 이종창은 수류탄을 공격적으로 쏴대는 전투경찰들을 피해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같은 시각, 이종창처럼 쫓기고 있었던 이한열 역시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일부 전경이 최루탄을 수평으로 직사하였고 이것이[6][7] 이한열의 뒷머리에 맞아 그의 얼굴에서 피가 번졌고, 코에서도 피가 쏟아졌다. 이한열을 발견한 이종창이 그를 끌어안고 학교로 들어가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뒤통수가 아파. 나 괜찮아?"라고 중얼거렸고, 뛰어 온 학생들이 그를 급히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8] 그날 오후 5시 30분에 이한열은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의식이 있을 땐 자기를 들어옮기는 학생들에게 '쉬었다 가자'고 하기도 했다 한다. 이한열의 선후배들은 이런 배려심 있는 모습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이한열은 6월 항쟁이 끝나고 6.29선언이 이루어짐으로써 그의 바람이었던 민주화를 보지도 못한 채 결국 7월 5일 오전 2시 5분에 2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9]

87년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학생이 정부의 폭력진압으로 희생되는 본 사건이 발생하자 5공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가중되었고, 이는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2.2. 사후

태극기를 들고 있는 우현 당시 총학 사회부장과 영정을 들고 있는 우상호 당시 총학생회장이다.[10]

장례식은 7월 9일에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훗날 국회의원이 되는 우상호 총학생회장이 민주국민장 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11] 위 사진에서 보이듯, 시위 현장에서 이한열의 영정사진을 들고 선봉에 서기도 했다. 우현 총학 사회부장은 장례식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본관 → 신촌로터리 → 서울시청 앞 → 광주직할시 5.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되었는데,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광주 50만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이순신장군 이래에 두번째이며 박정희전 대통령의 장례식 추모객 200만명다음으로 두번째로 많은 행렬이었다. 이때 문성근의 아버지인 문익환 목사는 아직도 대한민국 현대사의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히는 연설을 하는데 바로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26인[12]의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짖는 것이었다. 여담으로 이때의 인연으로 이한열의 어머니인 배은심은 우상호를 친아들처럼 여겨 왔다고 한다.

당시 연설을 하던 문익환 목사의 모습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김태훈 열사여! 황정하 열사여! 김의기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이동수 열사여! 김경숙 열사여! 진성일 열사여! 강성철 열사여! 송광영 열사여! 박영진 열사여! 광주 2천여 영령이여! 박영두 열사여! 김종태 열사여! 박혜정 열사여! 표정두 열사여![13] 황보영국 열사여! 박종만 열사여! 홍기일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우종원 열사여! 김용권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14]

거의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연설[15]이었으나 효과는 엄청 났고, 소름이 끼친다는 평이 자자한 명연설이다.유튜브[16] 또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 정문 앞에서 한풀이춤을 추던 서울대 이애주 교수 역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운구 행렬 이후 서울시청 광장에 남은 백만여 명은 연좌집회를 열었고 '전두환 퇴진', '청와대 진격'을 외치며 6.29 선언에 주저앉지 말고 전두환 퇴진을 위해 항쟁을 계속하자고 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서울시청에 "조기", "조기"를 외치며 조기를 달 것을 요구해 이는 곧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장례위원회도, 국민운동본부 지도부도, 서대협도 백만 인파가 모인 것을 예측하지 못한 까닭에 군중들은 광화문 4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광화문 4가 쪽을 방어하던 경찰 병력이 다연발 최루탄을 발사하자 결국 군중들은 흩어지고 말았다. 6월 항쟁은 그것으로 막을 내렸다.

3. 영화 <198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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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7일에 6월 항쟁을 다루는 영화 <1987>이 개봉하였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과 그들의 노력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김윤석, 하정우 등의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한다. 여기서 특별출연으로 나오는 강동원이 이한열 열사 역을 맡았는데, 영화 내내 그저 잘생긴 운동권 대학생 정도로만 묘사되다 영화 막바지에 가서야 이한열 열사였음이 밝혀지기 때문에 나름 반전 요소가 되었다.[17]

특히 영화 막바지에 연세대 정문에서 뒤통수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은, 피가 흐르는 모습까지 당시 상황과 일치할 정도로 똑같이 재현하여 관객들을 놀라게 하였다.[18] 그리고 동시에 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해당 장면을 찍은 사진이 극중 신문 1면에 실려있는데, 본 문서 상단의 실제 사진과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19] 여기서 이한열은 단순히 교과서에 실린 열사의 수준에서 그려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누군가의 풋풋한 첫사랑, 누군가의 소중한 친구, 그리고 의를 행하는 의인으로 묘사되어 인간적인 이한열의 모습을 담아내었다.

다만 강동원의 외증조부 이종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점 때문에, 친일파 후손이 이한열 열사 역을 맡아도 되느냐는 논란이 생겼다. 실제로 네이버 영화 사이트에서 <1987>의 평점은, "친일파 후손이 이한열 열사 역을 맡다니!" 라며 1점을 주는 사람들과 "본인이 외증조부 친일파 논란에 대해 사과했고 반성했다. 본인이 친일파 자손 되고 싶어서 태어났냐? 앞으로의 본인 행실을 보고 판단하면 된다." 라며 10점 주는 사람들의 키배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영화 평점이 개봉하기도 전에 6점대를 달리는 등 영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한열 열사의 모친인 배은심 여사가 강동원의 캐스팅에 대해 본인이 성실하게 잘 살아왔고 열심히 하겠다고 하니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의견을 밝혔고# 외증조부의 만행을 강동원 본인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다소 부당하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강동원의 캐스팅이 꼭 잘못 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4. 기타

안치환&quot;마른 잎 다시 살아나&quot; 라는 곡은 이한열 열사의 추모곡이다.

박종철 열사의 기념비가 모교인 혜광고등학교서울대학교에 있는 것처럼 이한열 열사의 기념비는 모교 광주진흥고등학교연세대학교에 있다.

김숨 작가의 장편소설 "L의 운동화"는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가 복원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광주진흥고등학교 강당 앞에는 이한열 열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20] 이한열 열사 흉상추모식

연세대학교 안에는 이한열 동산과 기념비가 있다. 신촌에 민주화운동가로서는 유일하게 어머니 배은심이 국가에서 받은 보상금을 사용해 '기념관'이 설립되어 있다. 또한 연세대학교에서는 매년 학생회의 주도로 6월에 중앙도서관 앞에서 이한열 열사 추모제가 열린다. 특히 2008년 촛불시위 열기가 한창일 때에는 6월 10일 세종로에 수십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노제가 열리기도 하였다. 또한 국제캠퍼스가 생긴 현재에는 국제캠퍼스에서도 이한열 열사를 기리는 현수막이 걸리고 위의 최병수의 걸개그림이 국제캠퍼스 종합관 벽에 걸렸으며, 생협 앞에 이한열 열사의 영정과 향이 놓이는 등 뜨거운 추모가 이루어지고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살던 집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열사의 형제들이 좋은 집으로 모시고 가려고 했지만 사양하였다.

△국제캠퍼스에 걸린 이한열 열사 추모 현수막

△국제캠퍼스 1기숙사 생활협동조합 앞에 놓인 이한열 열사의 영정

또한 배우 신현준이 대학 신입생 시절 당시 이한열 열사가 사망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봤다며, 월간 1996년 4월호에서 인터뷰했다.[21] 당시 5공정권 심판 등 정치권에 큰 불신을 가지던 시기라 이 사건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부끄럽다'고 말하기도.

배우 박철민이 그의 중학교 동창이다. 박철민의 기억에 따르면 중학교 친구 이한열은 학교에 흔히 있는 착한 모범생 친구였던 듯하다. 똑똑하고 착하고 성실한 데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고집을 절대 꺾지 않는 학생이라 증언하고 있다.

팟캐스트 방송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는 출연자 중 물뚝심송이 연세대 학생이였을 때 이 현장 근처에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딴지라디오 시절 61화 역사=나 편에서 나온다. 누군가가 최루탄에 맞아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그 피해자가 이한열이였는지도, 최루탄을 직사로 맞아서 쓰러졌다는 내용을 몰랐다고 한다. 이후 연세대 학생들이 경찰의 시신 탈취증거인멸 목적의 병상 습격을 막기 위해 순번을 짜고 세브란스병원을 지켰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공포와 분노를 함께 느끼면서 6월 항쟁의 현장을 겪었다고 방송에서 밝혔다.

2015년 여름,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제1공학관 철거를 위해 짐을 들어내다 학생회 창고에서 피묻은 연세대 화학공학과 과기가 발견되었다.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피흘리며 쓰러질 때의 피가 묻은 학생회기였다. (일설엔 이 기로 이한열 열사를 지혈했다고도 한다) # 해당 기는 이한열기념사업회에 기증되었으며, 기념사업회는 보존처리 후 이한열기념관에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한열 열사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근처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촌로12나길 26에는 이한열기념관이 위치하고 있다. 관심있는 위키러라면 방문해볼 것을 권장한다. 열사의 생전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개장시간은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다.

장례 행렬때 사용되었던 이한열 열사 초상화도 이한열기념관에 있으며, 6월 10일을 전후로 연세대학교에 전시된다. 단, 지금의 영정사진은 1987년 당시의 것이 아니고 2007년에 새로 제작된 것이다. 정확히 지금의 초상화는 3번째로 다시 만든 것이다. 1987년 당시의 초상화는 그 이듬해인 1988년 9월에 누군가에 의해 검은 스프레이로 훼손되었고, 이로 인해 다시 그려진 초상화도 2004년 6월에 누군가에 의해 칼로 찢겨져서 새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 참고로 이 초상화도 걸개그림와 마찬가지로 최병수가 그렸다.

이한열 열사의 묘는 광주광역시망월동 옛 5.18 묘역에 있다.

2016년 이한열 열사 추모식 때 연세대학교 정문 앞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았던 위치에 동판을 설치하여 이곳에서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

2017년 5월 이한열 열사의 피격 전후 사진이 최초 공개되었다. 참고

사망 30주기를 맞은 그해 6월 9일 밤,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 이한열이 찼던 전자 손목시계를 찾고자 하는 내용이 전파를 탔다. 1988년 당시 수배 학생이 이한열의 사촌형에게 이한열의 시계를 가지고 있으며 다시 찾아주겠다는 말을 전하였으나, 그 학생은 행방이 묘연하였으며 현재도 그의 전자 손목시계는 찾지 못하고 있다. 관련 스토리펀딩

고은 시인은 <만인보> 별편[22]에서 그를 다룬 시를 썼다. 제목은 사람 이름과 같은 '이한열'.

는 가장 긴 조시를 네 관 앞에 바쳤다

이한열

네 장례식은

이 땅에서 가장 큰 장레식이었다

1백50만 이상

너를 보냈다

너를 네 고향 빛고을 망월동으로 보냈다

그대 가는가

어딜 가는가

그대 등 뒤에 내려깔린 쇠사슬을

마저 손에 들고

어딜 가는가

네가 남긴 시 한 토막 부르며

너를 보냈다

아름다운 젊음

너를 그렇게 보내고 말았다

1백50만의 상두꾼 장례식

너 한 사람

얼마나 드높은 목숨이던가

그 목숨 끊어져

우리는 너를 보내고 말았다

네 죽음이야말로

군사파쇼와 맞서 싸운 자의 전사였다

이 땅의 모든 늙은이들이

네 장사 지내는 이 땅이야말로

이제까지 망해온 나라였다

이로부터 네 영령 앞세워 나아가리라

가장 아름다운 이념으로

네 젊음으로

저 악의 정치에 나아가리라

북 치고

네 감은 눈

모든 눈으로 떠 빛나며

처럼

처럼 나아가리라

내 강아지야 한열아 하고 부르짖은

어머니와 함께

네 학우와 함께

무등과 함께 나아가리라


  1. [1] 생존해 있었다면 현재 만 51세.
  2. [2] 당시 도서관학과(현 연세대 문헌정보학과) 학생이었으며 이한열과는 일면식도 없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이후 연세대학교 교직원으로 근무하다 2011년 연세대 노조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2017년 현재는 파주시 가람도서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2017년 현충일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아 인터뷰를 하였다
  3. [3] 이 사진은 로이터 통신의 정태원 사진기자가 촬영하였고 중앙일보와 뉴욕 타임스 1면 머릿기사에 실렸다. 또한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에 선정되어 6월 항쟁 항목에 있는 "아! 나의 조국" 사진과 함께 선정되었다.
  4. [4] 모교인 광주진흥고에 세워진 추모비에 적힌 약력에 따르면 전남 곡성군 출생으로 나와 있다.#
  5. [5] 민중미술가 최병수 씨의 걸개그림. 이한열 열사의 장례를 치를 때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걸려 있다. 이 그림의 세로방향 크기는 건물 3층 정도로 크다. 현재 연세대학교에 보관 중이며 6월 9일 무렵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걸어놓고 추모행사를 진행했으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리모델링 이후로 중앙도서관 옥상에 올라가기가 어려워진 관계로 2014년부터는 학생회관에 걸고 있다. 송도신도시에 개교한 1학년 및 몇몇 과의 이원화캠퍼스인 국제캠퍼스에도 동일한 그림을 제작하여 같은 시기에 걸고 있다. 처음에는 전단 크기로 찍어낸 작은 판화였으나, 걸개그림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에 그 판화를 크게 확대해 천에 스케치하고, 먹줄을 튀겨 선을 잡은 그림이다. 학생회관 2층에 펼쳐놓고 작업했으며 학생 수십명이 달려붙어 대략 하루 만에 완성했다. 인근 봉제공장 공단에 가서 걸개그림을 매달기 위해 재봉을 해왔다고 한다.
  6. [6] 이 최루탄은 수류탄처럼 던지는 형태가 아니라 유탄발사기와 비슷한 발사형이다. 원래 30도 이상 위로 들어서 발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즉, 애초에 특정 목표물을 명중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7. [7] 궁금한 이야기 Y 2017년 6월 9일 방송분에 의하면 당시 경찰이 일부러 노리고 쏘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8. [8] 이한열의 왼쪽 뇌 전체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9. [9] 4.19 혁명의 발화선이 되었던 김주열 열사 사망사건도 고성능 최루탄을 직사한 것 때문이었다. 참고로 1960년에 김주열 군이 맞은 당시 최루탄은 알루미늄제 최루탄이 눈에 박힌 끔찍한 모습이였다. 그래서인지 당시 찍힌 사진에서도 몇 장은 그 얼굴을 가린 바 있다.
  10. [10] 인터넷에 해당사진이 올라올때 오른쪽 인물을 배우 안내상이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못된 정보이다. 안내상이 아니고 당시 교육과학대학 학생회장이자 체육교육과 학생이라고 한다. 덧붙여 이 체육과 소속으로 세브란스 병원을 지키던 인원 중 87학번 배우 신현준도 있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좌우가 반전된 사진이다. 항목 인물 소개의 정면 사진이 영정에도 똑같이 쓰였는데 열사 사진의 가르마가 반대로 돼 있다. 우현씨 시계도 어색하게 반대손, 자세히 보면 원경의 건물 간판도 뒤집혀 있다. 같은 날 다른 사진참고사진이 뒤집힌 사연
  11. [11]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자 전 원내대표인 그 우상호 의원이 맞다.
  12. [12] 사실 중간에 '광주 2천여 영령'이 있기 때문에 정확히는 2천여 명 + 25명이다
  13. [13] 1987년 3월에 내각제 개헌 반대와 광주항쟁 책임을 주장하며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분신.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자료에 따르면 '기종도 열사'라고 되어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육성을 들어보면 전혀 기종도로 들리지 않고 표정두 열사라고 들린다.
  14. [14] 각 열사들의 순국 경위는 문익환 항목 참고
  15. [15] 열사들의 명단도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라 연설 직전에 문익환 목사에게 열사들의 명단이 필요하다고 요청 받아서 기억 나는 대로 쓰고 넘겨준 것이라고 한다.
  16. [16] '지금 이 순간의 역사'의 저자 한홍구는(정확한지는 수정바람) 친구들과 함께 민주화 운동 인사들의 연설을 듣고 있는데, 당시 김영삼이나 김대중 같은 유명인사들이 연설을 했다고 한다. 연설이 지루했지만 문익환 목사의 연설을 듣자 졸던 학생들마저 모두 일어나 뜨거운 반응을 보냈다고 한다.
  17. [17] 실제로 각종 포털의 영화 소개 페이지 등에선 단순히 특별출연이라고만 언급되고 배역이 적혀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무대인사와 같은 각종 행사에서도 강동원이 참석하면 그 자체로 그가 중요한 배역을 맡았음을 암시하게 되기에, 개봉일로부터 12일이 지난 1월 7일에서야 처음 참석하였다.
  18. [18] 다만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부축했던 학생(이종창)이 이한열과 모르는 사이였던 실제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쓰러진 이한열을 보고는 "한열아! 한열아!"라고 부르며 그를 부축하러 달려간다. 또한 '궁금한 이야기 Y'에서의 주장을 반영했는지, 영화에서는 전경이 의도적으로 최루탄 발사각을 낮추는 모습이 나온다. (몇몇 전경은 처음부터 직사로 조준하고 있고, 곡사로 조준하고 있던 전경들도 지휘관이 헬멧을 툭툭 치며 지나가자 이내 직사로 조준한다.)
  19. [19] 실제 사진은 영화가 끝난 뒤 엔딩 스크롤에서 나온다.
  20. [20] 예전부터 세워진 것은 아니고 사망 20주기였던 2007년에야 생겼다. 참고로 광주진흥고는 2004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21. [21] 아래 서술한 '그것은 알기 싫다' 속 이야기를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도 당시 병실 주변을 지키던 이들에 속해 있었던 듯하다.
  22. [22] 15권 권말 부록. 주로 1980년 이후 사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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