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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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묘 배향 18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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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문순(文純)

이름

이황(李滉)

경호(景浩)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 청량산인(淸凉山人)

본관

진성 이씨

국적

조선

생몰년도

양력

1502년 1월 3일 ~ 1571년 1월 3일 (69세)[1]

음력

1501년 12월 25일 ~ 1570년 12월 8일

표준영정 (이유태 작, 1983) [2]

1. 개요
2. 유학에서의 절대적인 위치
3. 대학자의 인간적인 면모들
4. 율곡이 평가한 퇴계
5. 현대 매체에서
6. 윤리 과목에서
7. 관련 문서

1. 개요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큰 병이다. 천하의 의리義理에 끝이 없는데, 어찌 자기만 옳고 남은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不能舍己從人, 學者之大病. 天下之義理無窮, 豈可是己而非人.[3]

조선의 대유학자.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 청량산인[4] 등이 있으나 가장 유명한 것은 퇴계(退溪). 본관은 진보(眞寶) 혹은 진성(眞城)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사후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유통 중인 화폐 천원권 지폐의 앞면 모델이기도 하다.

1501년 11월 25일 경상도 안동부 예안현 온혜리[5]에 있는 할아버지 이계양의 집[6]에서 진사 이식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남매의 막내인 퇴계에게는 형이 여섯, 누나가 하나 있었다. 모친은 춘천 박씨인 박치의 딸로, 전처인 의성 김씨와 사별한 후 아버지 이식이 들인 후처였다.[7]

2. 유학에서의 절대적인 위치

이언적의 사상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영남학파의 브레인이자 동인의 스승격이 되는 유학자. 이이와 함께 이기론을 형성해 성리학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받으며 두 명이 함께 대비되는 경우도 많다[8]. 그러나 실제 두 사람은 나이차가 부모자식 뻘로 나는 것 등으로 인해 대립하던 관계는 아니었다고 하며, 학문적인 합의를 보지는 못했으나 지속적으로 편지를 교환하면서 이기론을 논했다고 한다. 실제 그가 편지를 통해 이기론을 논했던 사람은 기대승이다. 그 유명한 사단칠정논변이 그것이다. 그리고 실제 학문적 대립관계에 있던 사람은 남명 조식이다.

이황은 을사사화를 비롯한 정치 난맥상에 많이 관여했으며, 이 때문에 관직에서 벗어난 때도 많아 이이보다는 은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때문인지 도산 서원에서 후학을 양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서경덕과 논쟁을 벌여 '기를 이끄는 이'를 부각시켰으며, 이러한 그의 사상은 조선 시대 주리론(主理論)의 뼈대가 되었다. 이는 당시 정치상에 도덕성 회복과 개인의 수신을 강조하는 원리주의로 대응하려는 모습으로도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실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 때문에 비판받기도 하였으며, 이는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다양한 사회 경장론을 제시한 이이와 여러 모로 비교될 만한 실천주의 유학자 조식과 대비되어 부각되기도 하였다.[9] 정치면에서는 전반적으로 왕권을 중시하고 군주의 책임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밖에 예안향약을 짓기도 했지만 이이의 해주향약이 더 유명해졌으므로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저서인 전습록변(傳習錄辨)을 통해 양명학의 지행합일설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한동안 조선 유학에서 양명학이 자리잡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찾아왔고, 일본에도 영향을 끼쳐서 메이지 시대의 교육 이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들어가 문순공(文純公)의 시호를 받아 동국 18현의 한명으로 모셔진다. 이황과 비교해서 이이가 한국 내에서 인지도와 평가가 더 높다면, 이황의 경우 한국에서보단 외국에서 더 높이 평가받는 편이다[10][11]국제적으로 가장 많이 연구되는 한국 철학자가 바로 이황이다. 중국의 양계초가 성인으로 인정했다거나, 일본 내에서 조선 성리학자 하면 이황이 대표적으로 언급된다거나 하는 등의 일이 많다. 한때 '왜 이씨 성을 가진 조선 시대의 남자 위인만 화폐의 모델이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12] 화폐의 모델이 될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물론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에 대해선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다

묘소는 고향인 안동 도산면 퇴계리에 있다. 묘비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직역하면 '도산에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 이씨 묘')라고 적혀 있고 이황이 자신의 일생을 짧게 정리한 글인 자명(自銘)이 있다. 생전에 이황이 유언으로 '조정에서 장례를 치러준다고 해도 사양하고 묘비명도 따로 부탁하지 말고 내가 남긴 이 글만 묘비에 새길 것'이라고 정해 두고 조카에게 이를 지키도록 전했다. 그러면서 '기대승 같은 이가 글을 쓴다면 분명 장황하게 글을 써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아직 젊은 기대승이 지나치게 이황 자신을 띄워주는 것을 경계한 듯. 그러나 이황 같은 대학자의 묘갈문을 간단히 하는 것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묘갈문을 쓰기로 결정이 나 버렸고, 결국 기대승이 묘갈문을 쓰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묘비석은 묘의 앞에 있지만, 퇴계 묘비의 비석은 퇴계의 말을 어긴 것 때문에 죽은 퇴계의 눈치를 보아 퇴계의 묘 오른쪽에 세웠다(....).

3. 대학자의 인간적인 면모들

아래에 그와 관련된 일화를 몇 개 소개한다. 대학자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매우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이야기가 많다. 이는 이황의 사상이 인간의 선함을 포착한 주리론이라는 것을 당시 백성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래 내용에는 역사적 기록과 야사, 민담이 서로 섞여 있으므로 어디까지나 이황의 성격과 행동을 가늠하는 지표 정도로 판단하자.

  • 어렸을 때 형인 이해가 놀다가 손을 다쳐 상처에서 피가 흐르자, 이황은 형의 손을 잡고 울기 시작했다. 이황의 어머니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정작 손을 다친 형은 울지 않는데 어찌하여 네가 우느냐?"하고 물어보자, "형은 저보다 나이가 많아서 울지는 아니하나, 피가 이렇게 흐르는데 어찌 아프지 아니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이황이 27살이 되던 해에 첫번째 부인과 사별한 뒤 3년 째가 되던 해, 마침 예안에 귀양가 있던 권질(權礩)이 그를 불렀다. 권질에게는 집안의 참극[13]으로 정신을 놓아버린 여식이 있었는데, 권질은 이황에게 "자네가 아니면 내 딸을 맡아줄 사람이 없네"라며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결국 이황은 권질의 여식을 아내로 받아들인다. 유홍준의《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보면 권씨부인을 요즘말로는 '사이코'라고 표현하였다. 흠좀무...후술된 행동을 보면 아마 일족의 몰살로 인한 충격에 의해 유아퇴행을 한 것 같다. 그래도 이황의 성격이 무던해서 서로 잘 지냈던 모양이다. 덧붙여 첫째부인이 많은 유산을 남겨놓고 죽었기 때문에, 이황은 그 덕을 보았으며, 첫째부인의 어머니, 즉 장모를 그녀가 죽을 때까지 보살폈다고 한다. 하지만 정신병을 앓던 권씨는 이황을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했는데, 그녀는 제사가 시작되기 전에 제사상에 있는 배[14]를 남몰래 집어 치마 속에 숨겼고, 결국 이를 눈치챈 이황의 형수가 그녀를 질책하자 이황은 "제사를 지내기 전에 음식을 먹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 일입니다. 하지만 조상님께서도 후손을 귀엽게 여기실 터이니 손자며느리의 행동을 노엽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라고 변설하여 아내를 감싸주었다. 나중에 제사를 마친 뒤 이황이 아내에게 왜 그랬냐고 묻자, 권씨부인은 배가 몹시 먹고 싶어서 그랬다고 답하였다. 이에 이황은 아내를 위해 배를 가져다가 손수 깎아 주었다고 한다.
  • 한번은 이황이 상가집에 가기위해 흰색 도포를 입으려하였는데, 도포가 해져있기에 권씨부인에게 기워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권씨부인은 붉은천을 덧대어 기웠다. 이황은 아무 말없이 도포를 입고 상가집에 갔다. 예법에 정통한 퇴계가 상가집에 빨간색 천을 덧대 기운 흰도포를 입고 온 것을 본 사람들은 상당히 놀랐는데, 빨간 천을 덧대는 것이 예법에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이황은 아무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 이혼 상담을 하러 온 제자 이함형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편지를 써주었는데, 부부 금슬의 중요함을 설명한 다음, '나는 일찍이 두 번 결혼했으나 한결같이 불행이 심하였네'라고 적기도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던 때도 있었지만 홀어머니를 보아 참는 한편 아내에게 잘 해주면서 부부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려 몇십년간 애쓰며 노력했다는 회고였다. 이를 계기로 이함형은 크게 깨달아 부부가 금슬을 회복하였으며 이듬해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이함형의 부인은 삼 년간 소식하였다.
  • 이황은 권씨 부인의 집안 출신 문제로 출세에 지장을 받았다. 게다가 권씨 부인의 정신도 온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권씨 부인이 죽을 때까지 그녀를 아끼고 존중해주기 위해 노력했으며 행여 자신이 먼저 죽은 후 혼자 남겨질 권씨 부인을 염려하여 전처 소생인 두 아들에게 권씨 부인을 친어머니와 같이 예우하도록 당부하였다. 권씨 부인은 이황이 47살 되던 해, 즉 혼인한지 16년 되던 해에 출산 중 난산으로 사망하였고 태어난 아이도 며칠 후 죽고 말았다. 이에 권씨 부인을 친어머니처럼 여기라는 이황의 당부를 좇아서 두 아들들은 권씨 부인의 묘에서 시묘살이를 하였고, 이황 자신도 묘 근처에 암자를 짓고 한해동안 기거하였다. 이는 2018년 8월 19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이야기를 다뤘다.
  • 은근히 병약체질이었는지 소화불량이 있고 병약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야사인지 아닌지는 알수 없고, 그래서인지도 알수 없지만 어쨌든 운동을 중요시하며 도가적 요소인 '도인술'을 바탕으로 기체조의 일종인 활인심방(活人心方)을 개발해 권하고 또 수련하기도 했다.
  • 이황은 첫째 부인과 사별한 직후 첩실을 들였는데, 그녀는 이황 집안의 안살림을 충실히 보살폈고, 또한 권씨 부인과 이황이 혼인한 뒤에도 장애가 있는 권씨를 대신해 실질적인 안살림을 보살폈다. 이러한 첩실의 노력에 보답하는 의미로 이황은 첩실이 사망한 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서자 '이적'을 호적에 올렸고, 이적의 후손들이 행여 적서 차별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족보에 적서의 구별을 두지 못하게 금하였다. 이후로 지금까지 퇴계 가문의 족보에는 적서의 기록이 없다고 한다.
  • 자신의 아내를 소중히 대한 것처럼 이황은 부부관계에 대한 많은 조언을 남겼다. 부부사이에 불화로 갈등을 겪는 제자에게 이황은 집 밖에서 있었던 온갖 울분과 괴로움을 집안으로 들이지 말고 사립문에서 마음을 정화한 뒤에 집안으로 들어서라고 조언했으며 '부부는 처음 만난 남녀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큰일이므로 가장 친밀한 관계를 이룬다. 한편 부부관계는 서로에게 바르게 해야 하고 가장 조심해야 하는 관계다. 그래서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된다.' 라는 말도 남겼다.
  • 장가를 든 둘째 아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퇴계의 며느리는 청상과부가 되어 수절을 하였다. 그런데 밤마다 며느리가 외로움에 눈물짓는 모습을 목격한 이황은 사돈에게 '며느리가 불쌍하니, 데려가서 알아서 하시라.'라며 편지를 보내 재가를 허락하기도 했다. 당시의 예법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으며, 18세기 이후 유교적 가치관이 극도로 교조화된 사회였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15] 이후에 이황이 여행 중에 어느 집에서 식사를 대접받았는데 유난히 반찬들이 입에 맞았고 집을 떠날 때 선물로 버선을 받았는데 그것도 발에 편하게 잘 맞아 이상하게 여겼는데, 알고 보니 그 집의 안주인이 바로 그 재가시킨 며느리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야사가 있다.
  • 처복이 없었던 퇴계인지라 며느리 사랑이 지극했던 모양인데, 맏며느리 봉화 금씨가 시집 올 때 퇴계의 집이 가난하다 하여 친정에서 혼수를 대충 줘 버렸고, 퇴계가 사돈집에 방문했을 때 냉대를 당하기도 하여[16] 봉화 금씨가 중간에서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퇴계는 성난 자신의 문중 사람들을 다독이며 며느리를 감쌌다고 한다. 또 맏며느리가 자신의 버선이나 옷을 기워 주면 잊지 않고 있다가 꼭 바늘 같은 것을 선물로 주며 고마움을 표하였다. 이런 퇴계의 사랑을 받은 봉화 금씨가 시아버지를 지극히 존경하여 '죽어서라도 아버님을 모시겠으니 근처에 묻어 달라'라는 유언을 남겨 퇴계 묘 근처에 묻혔다. 지금도 퇴계의 묘로 올라가는 길에 봉화 금씨의 묘를 볼 수 있다.
  • 율곡의 제자들과 이황의 제자들이 서로 자신들의 스승이 더 성현이라고 우기다가 결국 그들은 스승들의 밤일(…) 광경을 보았다. 율곡이 참으로 얌전하게 일을 치른데 비하여 이황은 알려진대로 격렬하게(…) 일을 해서 다음날 이황의 제자들이 "성현으로서 어찌 그렇게 짐승처럼 일을 치릅니까!"하고 묻자 이황이 웃으며 3번 항목의 부부관계에 대한 말을 하며 "율곡은 밤일도 그렇게 너무 조심스럽게 치르니 후사를 늦게 얻을 것이다"라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퇴계의 종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17대 종손 이치억 씨가 퇴계철학을 공부하여 성균관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 등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나, 율곡은 본처에게서 적자를 얻지 못하여 서자가 대를 잇는 등 후손들이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대를 근근히 이어나가고 있다. 현재 율곡 종손들에 비하면 퇴계 종손들은 자손 규모에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한편 사람들이 부인에게 이황에 대해 물으니 (앞에서 소개한대로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낮 퇴계랑 밤 퇴계는 다른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했다는 소리도 있다(…). 어디까지나 야사인지라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이 '낮 퇴계 밤 퇴계'는 현대에도 이황의 이중적인(?) 면을 가리키는 농담으로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 젊은 시절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이황은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어 잠시 쉬고 있는데 같이 한양으로 가던 하인이 어디선가 콩밥을 지어왔다. 이황은 하인에게 "쌀은 내것이로되 콩은 어디에서 나서 콩밥을 지어 왔느냐."라고 물었다. 하인이 답하기를 "예, 도련님. 길에 있는 콩을 몇 개 따서 지었습니다. 길에 많던데요?" 청렴결백하던 이황은 절대로 그 콩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하인에게 콩 주인을 찾아 그 값을 치르고 사죄를 드리고 오라고 했다. 하인이 콩값을 치르고 사죄를 드리고 온 후에야 그 콩밥을 드셨다는 이야기.
  • 정구정인홍이 이황의 제자가 되기 위해 도산서원으로 찾아왔다. 더운 여름인데도 예를 갖추기 위해 도포에 갓을 하고 있었는데 담화를 하기 시작할때 정구는 덥다며 도포와 갓을 벗고 수건으로 땀을 닦았으나 정인홍은 반대로 갓과 도포를 벗지 않은 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정자세로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농운정사에서 쉬었는데 정구는 더위를 못참고 씻느라 바쁜데 정인홍은 여전히 정좌세로 있었음을 이황은 전해 듣는다. 다음날 이들은 폐백을 갖추고 이황의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왔는데 정구는 제자가 되었으나 정인홍은 이황이 거절했다. 제자들이 이유를 묻자 이황은 "정인홍은 상정(常情)[17]을 무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말하였다. 얼마뒤, 정인홍은 이황의 라이벌격인 남명 조식의 제자가 되었고 벼슬자리에도 올라 승승장구하였으나 류성룡을 탄핵하고 계축옥사를 일으켰다. 결국 인조반정때 참형을 당하고 남명 조식도 부관참시 당하였다. .......이런 일화가 있었으나 이는 남명 학파에 대한 왜곡된 이야기라는 주장이 있다. 조식의 제자 정인홍이 인조반정 당시 처형된 것은 사실이나, 조식은 생전과 사후 형벌을 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할석분좌(割席分坐)의 유래로 유명한 화흠관녕의 일화와 비교할때, 무척 대조적인 이야기이다.[18]
  •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변은 매우 유명하다. 이때 이황은 58세의 대사성, 기대승은 갓 과거에 급제한 32세의 신출내기였다. 대사성은 바로 성균관의 우두머리로서, 이황은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학교 총장쯤 되는 셈인데 이는 의전에서 장관급에 해당한다.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 총장이나 장관이 이제 갓 시험에 합격해 부서 배치를 받은 5급 사무관이나 7급 주무관과 토론을 벌인 것이다. 현대에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거기다 이황은 선조 임금의 스승이었다. 임금도 어려워하는 대학자였음에도 기대승은 정말 겁없이 대든 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13년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치열한 철학적 논쟁을 이어나갔고, 이황은 기대승의 견해를 자신의 학설에 일부 수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의 학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건 아니다. 후대의 학자 정약용정조와의 대화에서 기대승에게 판정승을 내렸다. 정약용의 집안이 이황의 학통을 이은 남인이란 점을 생각하면 묘한 구석이 있는 부분. 현대 분석철학의 논리적 도구를 이용한 분석 역시 기대승에게 판정승을 내리고 있다. 이황의 주리론은 사단과 칠정을 논리적 기준 없이 우열관계로 구분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일관성이 부족했으며, 우주론과 실천윤리를 무리하게 하나의 틀로 통합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에 실패한 기획이라는 평이 있다. 하지만 그 정도 스케일의 학설을 주체적으로 제시한 것 자체가 충분히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위업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보다 더 정밀하고 논리적이라고 해서 플라톤의 철학사적 위대함이 반감될 수 없다. 굳이 평하자면 청출어람이었을 뿐.
  • 당대의 거유(巨儒)인 조식과의 라이벌 관계도 유명하다. 학풍도 현실 참여 vs 학문 이론 중시로 갈라졌고 사는 곳이 멀지 않음에도 한번도 만나지 않고 편지로 자주 논쟁을 벌였다. 위에 언급된 기대승과 이황의 사단칠정논변 땐 조식이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을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고,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도리어 남에게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칩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황은 이에 대해 제자들에게 "(조식은)잘난 척은 심하고 하는 말은 과격하고 노장(老莊=도가)에 물들어 있다. 어떻게 그 사람을 도를 아는 사람이라 하겠는가?"라며 뒷담화를 했다고. 그래도 명색이 당대의 대학자들이라 대립은 학문적 논쟁으로 국한되었고, 조식과 이황이 정치적으로 부딪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 하루는 영의정을 지낸 권철[19]이 도산서원으로 이황을 찾아왔다. 두 학자는 기쁜 마음으로 학문을 토론했다. 그런데 식사가 문제였는데 저녁상에는 보리밥에 콩나물국, 가지잎에 명태무침이 차려져 있었다. 이황은 다른 때와 달리 명태무침이 나왔으므로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그러나 권철은 도무지 입에 맞지 않아 식사를 할 수가 없었는데 이튿날 아침 식사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권철은 일정을 앞당겨 도산서원을 떠나기로 했다. 아쉬운 마음에 권철은 떠나기 전 이황에게 "마지막으로 선생께 좋은 가르침을 하나 받고 싶습니다."라 청하자, 이황은 옷깃을 바로하고 말했다. "대감께서 이 먼 곳까지 찾아 주셨는데 융숭한 대접을 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나 대감께 드린 식사는 일반 백성이 먹는 것에 비하면 성찬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대감께서 식사를 못 하시는 것을 보니 나라의 장래가 걱정됩니다. 정치의 근본은 여민동락(與民同樂), 즉 관과 민이 일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감께서는 앞으로 백성과 고락을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부끄러워진 권철은 얼굴을 붉히며 "참으로 좋은 가르침입니다. 백성에게 다가가는 길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이후 권철 본인도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 매화 사랑으로도 유명했다.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며, 죽기 직전에 저 매형에게 물을 주라고 했던 일화도 매우 유명. 현대에도 후학들이 이황을 기리는 의미에서 도산서원에 매화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다만 아쉽게도 이황이 직접 키우던 매화나무는 이미 말라 죽고 없다.
  • 단양 군수로 재직하던 시절 관기였던 두향과의 로맨스 또한 알려져 있다. 군수에 재직 당시 이황의 나이는 48세, 두향의 나이는 18세. 두 사람이 만난 기간은 9개월 남짓으로 그다지 길지 않았는데 이황이 곧 풍기 군수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풍기 군수로 발령이 난 이유는 이황의 형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서는 상피제라 하여 가까운 친인척끼리는 같은 관청에서 근무할 수 없어서 경상도 풍기로 옮기게 된 것. 이황이 떠난 뒤 두향은 남한강 근처에서 살다가 사망했으며[20], 남한강 강가에 있는 그녀의 묘는 현대에도 이황의 후손과 지역민들이 관리해 주고 있다. 두향의 묘가 현대에 알려진 것은, 정비석의 소설 '명기열전'에서 두향을 언급하면서부터이다. 충주댐 건설로 수몰될 상황에 처하자 현재의 위치로 이장해 주기도 했다. 이황과 두향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야사 기록마다 조금씩 다른 편으로 학자의 이미지에 맞게 플라토닉 러브에 가까웠다는 이야기부터 위의 ' 밤퇴계'(...) 에피소드처럼 매우 열정적인 애정 관계였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조선 후기의 문인이었던 이광려는 두향의 묘를 찾아가 그녀를 추모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야사에 따르면 두향이 이황에게 매화를 선물했는데 이것이 이황이 평생 아끼던 그 매화라는 설도 있다.
  • 제자인 이덕홍의 증언에 의하면, 죽기 나흘 전인 1570년 12월 4일에 제자들을 만나고 "내 평소에 잘못된 소견을 갖고서 제군과 종일 강론하였는데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平時以謬見, 與諸君終日講論, 是亦不易事也.)라고 말했다고 한다.(《퇴계집》 언행록5 〈고종기〉 中) 말인 즉, "너희들이 나도 모르는 것을 물어봐서 그거 대답하고 가르쳐주느라고 무지하게 힘들었다."라는 소리.(...)
  • 인간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가 오히려 증손자를 죽게 만든 이야기가 있다. 1568년 장손인 이안도가 자식을 얻었다. 당연히 이황도 이 증손자의 탄생에 매우 기뻐했다. 그런데 하필 안도의 아내가 또 임신을 하는 바람에 젖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안도는 이황에게 유모를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이황의 하인 중 마침 딸을 낳은 하녀를 유모로 데리고 가겠다고 한 것. 그러자 이황은 '내 자식 살리겠다고 남의 자식을 굶겨 죽일 수는 없다. 둘째가 태어나면 모두 살릴 수 있을 것'이라며 거절했다. 결국 안도는 첫째에게 미음 등을 먹이며 키워야 했고, 이 증손자는 결국 두 돌을 갓 넘기고 병으로 죽었다. 이에 이황은 안도에게 편지를 써서 위로하면서도, '너라면 어떻게 했겠느냐?'라는 글귀를 남겼다. 이황도 증손자의 죽음에 심경이 매우 복잡했을 듯 하다.

.......믿거나 말거나인 일화도 있으나(…) 어쨌든, 이런식의 후덜덜한 일화가 많다. 한편으론 이런 일화 덕에 엄숙하기만 한 유학자가 아닌 경험 많고 조언을 해줄수 있는 큰 어르신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위의 '밤퇴계' 일화나 두향과의 이야기를 두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이황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성애(性愛) 자체에 대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임을 인정하고 터부시하지 않았다[21]. 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윤리 도덕이 있음을 주장한 것.

대학자인만큼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두각을 나타냈을 것 같지만 의외로 과거 시험에서 고배를 많이 마셨다. 23세인 1523년 성균관에서 공부하였고, 24부터 과거시험에 응시하였으나 세 번 낙방하였다. 27세인 1527년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생원 2등으로 합격한 후, 이듬해 진사시험에 2등, 32세인 1532년 과거시험에 문과 초시 2등으로 합격하였고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쯤되면 누군가와 [평행이론]으로 엮을만할 정도...

이황은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대대로 내려오고 있어 현재 종손 집안은 대강 16대, 현재 종손 이근필과 17대 이치억, 이주현 부부, 18대 이이석이다. 2017년 현재 퇴계종택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16대 종손인 이근필이다. 이치억은 차종손인 셈. 이근필은 2009년 15대 종손 이동은의 장례 때 무리를 하여 청력을 잃은 것을 빼면 여전히 직접 쓴 휘호를 손님들에게 선물로 주는가 하면 종택을 방문한 손님들을 대문 앞에서 일일이 배웅하는 등 정정하게 활동하고 있다. 종손이 손님 받는 거야 종손의 의무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이근필의 경우 종택 옆에 있는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의 설립자이기도 해서 종택을 찾는 손님의 규모가 좀 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일일이 해내는 것을 보면 경외감마저 들 정도. 이치억은 젊었을 적 자신이 종손이라는 사실을 굴레라고 생각해서 일본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났지만[22], 할아버지의 사상이 안동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양 전체에 퍼졌다는 것을 깨닫고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석사에 입학, 퇴계 철학으로 박사까지 땄다. 이후 공자의 79세손이자 2대 대성지성선사 봉사관인 공수장 봉사관을 한국에서 맞이하기도 했다.

4. 율곡이 평가한 퇴계

1570년 12월,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이이는 자신의 저서 석담일기에 이황의 졸기를 남겼다. 전문을 소개한다.

12월 신축(辛丑)일.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이황(李滉)이 세상을 떠났다.

이황의 자(字)는 경호(景浩)요, 성품과 도량이 온순하여 수연(粹然)하기 옥과 같았다. 젊을 적에 과거로 발신(發身)하였으나 나중에는 성리학에 뜻을 두어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을사사화 때 이기(李芑)가 그 명성을 꺼려 임금에게 아뢰어 관작을 삭탈하니, 그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기가 다시 아뢰어 복작(復爵)시켰다. 이황이 권간(權奸)들이 세력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조정에 설 마음이 없어 벼슬을 시킬 때마다 사직하고 나오지 않기 일쑤였다. 명종(明宗)은 그가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벼슬을 사양함을 가상하게 여겨 작계(爵階)를 여러 급 올려 자헌(資憲 정2품)까지 되었다. 이황은 예안(禮安)의 퇴계촌(退溪村)에 살면서 퇴계(退溪)라 호(號)하고 의식을 겨우 이어갔으며 담박한 것을 즐겼고, 세리와 화려한 것은 뜬구름같이 보았다. 말년에 도산(陶山)에 집을 지으니 자못 임천(林泉)의 정취가 있었다. 명종 말년에 여러 번 불렀으나 굳이 사퇴하고 나오지 않았다. 명종이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는다는 탄식(招賢不至歎)’으로 시제(詩題)를 내어 근신(近臣)을 시켜 시를 짓게 하고 화공(畫工)을 시켜 이황이 사는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 오게 하여 그것을 볼 만큼 그 경모하는 정도가 이와 같았다.

이황의 학문은 문(文)으로 인하여 도(道)로 들어갔고, 의리(義理)가 정밀하여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훈(訓)을 준수하고 여러 가지 학설의 이동(異同)을 이리저리 통하였으나 모두 주자의 학설에 절충시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가한 곳에 홀로 거처하면서 경전 밖에는 다른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가끔 수석(水石) 사이에 산책하며, 성정(性情)대로 시(詩)를 읊으며 한가한 흥을 풀었다. 배우는 이들이 물으면 아는 대로 다 말해 주었으나 제자(弟子)를 모아 선생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평소에 긍지를 가지려 애쓰지 않아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았으나 세상에 나섬과 들어감, 나아옴과 물러남, 사양함과 받음, 취함과 줌의 지조에 있어서는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고, 남들이 선사하는 것도 의(義)가 아니면 받지 아니하였다. 한성(漢城)에 우거해 있을 때 이웃집에 밤나무가 있어 두어 가지가 담을 넘어와 밤이 익어 뜰에 떨어지니, 아이들이 주워 먹을까 하여 손수 주워서 담 밖으로 던져 주었다. 그 청렴하고 깨끗한 점에는 더할 것이 없었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조야(朝野)에서는 아주 잘 다스려지는 정치를 바라, 사론(士論)이 한결같이 이황이 아니면 성덕(聖德)을 성취시키지 못한다고 하였고, 임금도 이황에게 마음을 두었으나, 이황은 스스로 자기 재지(才智)가 대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또 말세에 유자가 일하기 어렵고, 임금의 마음 역시 잘 다스려 보려는 정성이 부족하며 대신 또한 학식이 없는 터이라 한 가지도 믿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작록(爵祿)을 굳이 사양하고 기어이 물러가곤 했다. 도산(陶山)으로 간 뒤에는 당시 정사를 말하지 않았으나, 여론이 다시 나오기를 바랐는데 갑자기 별세하니 나이 70세였다. 조야가 애통해 하고 부고가 대궐에 이르자 임금도 매우 슬퍼하고서 영의정을 추증하시고 1등의 예(例)로 장사하라 명하였다. 이황의 아들 준(寯)이 유언에 따라 예장(禮葬)을 사퇴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태학(太學 성균관)의 여러 학생들이 제전(祭奠)과 제문을 갖추어 가지고 가서 제사하였다.

이황은 특별한 저서는 없으나, 그 논의에 있어서 성현의 교훈을 발휘ㆍ선양한 것이 세상에 많이 행한다. 중종 말년에 화담 처사(花潭處士) 서경덕(徐敬德)이 도학(道學)으로 당시에 유명하였는데 그 이론에 기(氣)를 이(理)라고 인정한 것이 많았다. 이황이 이것을 병통이라 생각하여 글을 지어 변박(辨駁)하니, 그 논지가 밝고 통달하여 배우는 자들이 믿고 복종하였다.

이황은 당세 유가의 종주로서 조광조(趙光祖) 뒤로는 그에 비할 사람이 없었다. 이황의 재주와 국량(局量)은 조광조를 따르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지극히 정미한 점에서는 또 조광조가 그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23]

5. 현대 매체에서

1970년에는 남산도서관 앞에 퇴계 이황 동상을 건립하기도 했다. 애국선열조상건립외원회가 활동하며 동상 15기를 만들었는데 그중에 남산도서관 앞 두 동상(이황, 정약용)도 포함된 것. 도서관 앞에 세우는 것이므로 일부러 유학자 동상을 선택한 듯하다.

천원권 지폐 도안에 적용되었다. 하지만 진성 이씨 집안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퇴계는 "복건은 중이 쓰는 두건과 같은 모양이라 쓰기에 영 좋지 않다."는 말씀을 남겼다고 하며 대신 정자관(程子冠)을 썼다고 하는데, 오천원권 지폐에서 이이가 쓰고 있는 게 그 관이다. 고증오류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사극을 비롯한 창작물에서는 자주 등장하진 않는 편이다. 대학자의 이미지가 너무 강한데다 인생사에서도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 그렇다고 위에 등장한 개인적인 에피소드들밤퇴계라던가을 잘못 활용했다가는 논란이 될 여지가 많다. 다만 카메오처럼 깜짝 출연해서 주인공과 연관되는 형태로 등장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과 이를 원작으로 한 이두호 화백의 만화 임꺽정에서는 이황이 임꺽정에게 은혜를 입은 장면이 나온다. 을사사화로 이황의 형인 이해가 귀양을 가다가 길에서 죽자 임꺽정과 형인 가도치가 시신을 수습해 주고, 이에 이황이 직접 임꺽정에게 감사를 표하러 찾아온다. 하지만 양반에 반감을 가졌던 임꺽정은 이황의 인사를 탐탁치 않게 여긴다.[24] 그리고 임꺽정 형제는 천한 백정이 양반의 시신에 손댔다는 이유로 관아에 끌려가 곤장을 맞고 말았다.

2001년 1월에 KBS1에서 '굿모닝 미스터 퇴계'라는 신년 특집을 방영한 적이 있는데, 이때 재현극이 20분 가량 삽입되어 있었고, 신구가 이황의 역할을 맡았다. 당시 롯데리아 광고,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등으로 약간 개그 캐릭터화된 상태였으나, 배우와 배역의 싱크로도 상당해 눈길을 끌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젊은 시절의 유성룡이 관료 사회의 현실에 실망해 가르침을 얻으려고 안동의 이황을 찾아간다. 물가에서 낚시를 하던 한 노인에게 도산서원[25]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자신의 집으로 함께 가면 된다고 말한다. 그 노인이 바로 이황이었던 것. 그리고 유성룡에게 진정한 학인(學人)의 길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고 하성군을 소개시켜 준다. 이황 역으론 무서운 싱크로율을 자랑한 이순재 씨가 특별 출연했다. 다만 유성룡이 퇴계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드라마와는 차이가 있다. 실제로는 잠시 만난 수준이 아니라 오랫동안 퇴계가 가르치고 아껴준 수제자가 바로 유성룡이다.

팬텀 하록의 만화 포천에서 잠깐 등장하는데, 위에서 언급한 일화들을 다수 소개하고 있다.

조선의 유학자들의 생애를 주제로 한 최인호의 소설 '유림'에서는 이황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위의 밤퇴계 일화나 두향과의 이야기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2018년 안동의 한 무덤에서 퇴계 이황의 친필 만장 등 문화재급 유물이 대거 출토됐다.# 453년 만인 2017년에 해당 무덤의 이장 과정 중 발견됐다.

6. 윤리 과목에서

앞서 언급한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변이이정약용의 해석을 엮어 수능 사회탐구 영역의 선택 과목 중 하나인 윤리와 사상에서 킬러 문제로 자주 나오기로 악명이 높다. 이는 윤리 교과가 현재처럼 생활과 윤리 / 윤리와 사상으로 쪼개지기 전인 윤리로 출제되던 시절부터 그 기조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7. 관련 문서


  1. [1] 정확히 69세 생일을 맞는 날에 사망하였다.
  2. [2] 천원짜리 지폐에도 이것이 사용되었는데, 이유태를 굉장히 많이 닮았다.
  3. [3] 퇴계집에 실린 표현이다. 이황의 이기론과도 통하는 말로 곱씹어 볼만하다. 이황은 理와 氣가 구분되면서도 각각 따로이 있을 수는 없다는 전제 아래에, 이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사단의 선함이 이와 가깝기 때문이라고 해명하는데, 끝없는 세상의 이치를 성찰할 것이지 사물에 대한 이해에 집착하여 다투지 말라는 위의 말은, 이황의 理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사단칠정논변 )아래에 더 자세히 나오겠지만, 이황의 理는 근본주의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4. [4] 청량산에 오르기를 즐겨했다 한다.
  5. [5]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6. [6] 이 집이 현재의 노송정종택(노송정은 이계양의 호면서 당호다)인데 여기에 퇴계가 태어난 방, 퇴계태실이 있다.
  7. [7] 여담으로 춘천시에는 현재 퇴계동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모친인 춘천 박씨의 고향이 지금의 춘천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정확히 이 지역에 그녀의 친정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8. [8] 둘의 이론이 대조적이고 둘의 학파가 후에 동인, 서인으로 대립하기 때문에 혼동하기 쉬운데, 두 사람은 붕당의 형성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이황은 붕당이 만들어지기 전에 사망했고 이이는 붕당을 막기 위해 가장 노력했다.
  9. [9] 그러나 이황의 철학이 실천성을 배제했다는 해석은 과도하다. 16세기 조선은 내부에서 갖가지 위기 상황이 발생하고 있었으며 당시 사림파들의 학문 탐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 개혁론을 겸하고 있었다. 물론 양반 계층의 입장에서 민중의 입장을 내려다보는 것이 한계점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붕당 정치 전반의 문제점으로까지 연결되기 때문에 이황만의 책임을 묻는 것은 어폐가 있다.
  10. [10] 이황이 기존 성리학틀을 유지했고 이이가 마개조했다는 이전 설명은 비약에 가깝다. 이황,이이 모두 기존 성리학틀인 주리론적 입장은 동일했다. 오히려 이황이 이 자체가 발할 수 있다는 독자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11. [11] 이황 사후 그의 계승자들로 이루어진 동인-남인이 몰락하고, 이이의 계승자들인 서인-노론이 장기집권으로 한말까지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이이가 추종세력에 의해 존숭되어 고평가된 경향이 짙다. 사실, 이이의 생존시와 사후 인조반정 전까지 이황은 조선오현으로 문묘에 배향되고, 공식적인 사림의 종주로 추앙되었으므로, 이이와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 국가원로였다.
  12. [12] 세종대왕은 전주 이씨, 율곡 이이와 이순신 장군은 덕수 이씨, 퇴계 이황은 진성 이씨다.
  13. [13] 부친 권주(權柱)가 갑자사화에 휘말려 사사당하는 바람에 집안이 기울었고(이 때 권주의 아내도 남편을 따라 순절했다), 중종반정으로 나아지는가 했으나 얼마 안가서 권질도 '신사무옥'에 휘말려 유배당했고 동생 권전(權磌)은 국문중에 매를 못 이기고 장살(杖殺)당해 죽었으며 권전의 아내는 관노로 떨어졌다. 그야말로 집안이 연거푸 풍비박살난 것.
  14. [14] 대추로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다.
  15. [15] 그렇지 않다. 이런 사례는 시대와 상관없이 그냥 가풍과 가장의 성향에 달린 문제였다. 19세기 중엽의 학자 조병덕이 자신의 셋째 며느리가 가난한 집에 시집와 고생만 하다 병을 얻자 친정에 아들과 함께 보낸 사례가 있다.
  16. [16] 심지어 퇴계가 떠난 후 그가 앉았던 마루가 더러워졌다 하여 마룻바닥을 대패로 모두 벗겨내버렸다.
  17. [17] 평범한 사람의 인정.
  18. [18] 화흠과 관녕은 같이 공부를 하며 살았던 친한 사이였는데, 화흠이 재능이 더 뛰어났다고 한다. 어느날 둘이 밭을 갈다가 금을 발견했는데, 관녕은 신경도 안썼지만 화흠은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혹은 그대로 가지고 갔다는 얘기도 있다). 또 어느날은 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귀인의 행차인지 거리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관녕은 방에서 공부만 했고, 화흠은 밖에 나가서 구경을 하다가 왔는데, 이 일 이후로 관녕은 화흠을 상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화흠은 손권 밑에서 벼슬을 하다가 더 큰 부귀영화를 탐하여 조조 밑으로 들어가 한 황실 찬탈에 큰 역할을 하게 되고, 반대로 관녕은 요동으로 가서 흰 옷을 입고 살며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 [19] 권율 장군의 아버지이자 백사 이항복을 손녀사위로 둔 그 권철이 맞다.
  20. [20] 이황이 사망하자 그의 제를 지낸 후 이황을 따라 남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야사일 뿐 근거가 없다.
  21. [21] 서당 같은 곳에서 논어를 다 배운 사람에게 가르치는게 '보정' 이라는건데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성교육이라 할 수 있다. 이 교육의 요점은 "검열삭제를 하되 인간의 본성을 지켜가며 해라" 정도?
  22. [22] 딱 이 시기에 방송사에서 퇴계 종가 다큐멘터리 촬영을 나왔었는데 일본 유학 준비하며 결혼은 포기한 상태였다. 15대 종손 이동은옹 생전 신문기사를 보면 결혼을 하지 않은 이치억씨로 인해 이동은옹과 이근필씨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알려지진 않았찌만 아예 반항할 마음으로 기독교 학교에 입학한 적도 있다고 한다(....)
  23. [23] 석담일기 상권 융경 사년 경오(隆慶四年庚午) 1570년(선조 3년)
  24. [24] 이황이 돌아간 뒤에는 '고맙다고 인사하러 오는게 무슨 특별한 은혜를 베푸는 것 같소'라며 투덜거리고, 돌이(임꺽정의 아버지)는 '그래도 양반이 직접 백정을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무던한 거다'라고 달랜다.
  25. [25] 도산서원은 이황이 죽은 후에 도산서당 뒤에 세워진 서원이므로 고증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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