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켈

Inkel.[1]

1. 개요
2. 상세
3. 이모저모

1. 개요

대한민국[2]전자제품 제조 회사. 1996년 해태전자에 흡수 합병되었다.

2. 상세

1973년 조동식 창업주가 일동제약과 일렉트로보이스가 1970년 3월 설립한 한미합작법인 한국일렉트로보이스를 인수하여 인터내쇼날코리아전자를 설립한 것이 시작이다.

1978년에 신방전자로 시작했다. 1979년 해태그룹에 인수되면서 1988년 해태전자로 바뀌었고, 1994년 구.인켈을 인수하였고, 1995년에는 나우정밀을 인수하였다. 1996년 구.인켈과 나우정밀을 흡수 합병하였고, 해태그룹이 부도가 나면서 2001년 이트로닉스로 변경되었다가 2007년 인켈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부분은 해태전자를 중심으로 한 기업의 역사인데, 현재 인켈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연혁이다. 신방전자는 턴테이블 제조전문업체로 인켈의 하청기업이었다. 모기업인 해태의 지원을 받아 원청인 동원전자를 삼킨 셈. 동원전자는 부영, 일진 등과 함께 민영방송(현재 SBS)설립 경쟁에 참여하였다 태영건설에 밀린 후 사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여 해태전자에 인수되었다.

스코트(Scott), 듀얼(Dual), 텔레풍켄(Telefunken), 세(SAE) 등 해외 유명 기업들의 하청을 받아 OEM생산을 하면서 기술력과 품질 관리 기술을 획득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하청 생산으로 갈고 닦은 기술을 바탕으로 양질의 국산 오디오 생산을 시작했다.[3]

인터내쇼날코리아전자는 필소닉이라는 브랜드명을 사용하다가 이후 1976년 사명을 동원전자로 바꾸고 인터내쇼날코리아전자의 약자인 인켈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미국의 오디오 브랜드 셔우드를 자체 브랜드로 인수하고, 독일의 오디오 잡지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자회사와 계열사를 모두 포함한 종업원 수가 4000명도 안 되는 중소기업이었지만, 오디오 분야에선 광고도 많이 하고 품질을 인정받아 7~80년대에는 대기업 급으로 인지도를 쌓아가기도 했다. 소니코리아가 정식으로 출범하기 전에는 소니 워크맨트리니트론 TV를 수입, 판매했던 적도 있었다. 또한 야마하 디지털 피아노의 공식 수입처이기도 하였다.

하청 생산 제품 중 세(SAE) 제품은 원청 본사의 허락을 받아 INKEL/SAE 브랜드로 국내에도 판매하였는데, 국내에서 볼수 없었던 직선의 묵직한 디자인과 뛰어난 앰프의 성능은 당시 국산품에 비해 한수 위라 한동안 오디오 팬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해외 유명 제품을 국산 가격으로 살수 있었으니. [4] 자체 개발작으로는 시카고전자박람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명작 CS9000세트를 꼽을 수 있다. 당시 럭스만이나 아큐패이즈와 같은 일본의 최고급앰프들이나 사용하던 MOS FET 출력단을 채용한 제품으로 진공관의 음색을 재현하기 위해 프리앰프부터 공들인 설계로 유명하다. 80년대 인켈의 기술력을 대표하는 최고의 제품이다. [5]

동원전자 시절이던 1979년 당시의 광고

1988년 브랜드명 인켈을 사명으로 바꾸었다. 1980년대 후반 오디오 시장이 정점을 찍고 내려오게 되는데, 인켈도 민영방송경쟁참여, 칼라TV시장진출, 중국으로의 생산시설 이전 등을 비롯해 새로운 활력을 도모했지만, 시대의 흐름에 사운이 기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92년 창업주인 조동식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는 등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1994년에 해태그룹 계열인 해태전자[6]가 조동식 회장으로부터 인켈을 인수하였다.[7] 해태전자가 해태 그룹의 해체로 함께 사라질 위기가 되자, (무선 전화기 등을 생산하던)나우정밀 등을 합병하면서 한동안 인켈이라는 회사 이름이 사라지기도 했다. (그래도 인켈 브랜드명은 유지하고 있었다.)

1980~90년대에 TV광고로도 자주 나와서 성우 한상덕인~켈~이란 목소리로 접할 수 있었고 태광전자와 더불어 중소 오디오 업체에서 인지도가 높았던 시절이 있었기에 1990년대에 설치된 학교 스피커 등이 인켈제인 경우가 많다. [8]

1990년대 중후반, 한국 오디오 업체들은 그간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급 하이파이 제품을 선보였다. 인켈은 테마 시리즈[9]를 발표했고 제법 인기를 끌었다.

수출만 했기 때문에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전화기, 키보드와 컴퓨터용 모니터를 흑백 모니터 시절부터 생산해 왔다. A/V 붐이 일었을 때에는 자체 기술로 브라운관 TV를 생산하기도 했다. 다만 LED, LCD 시대가 오고 본사가 망하며 A/V 컬러 TV 사업은 바로 폭망.

소비 시장 변화와 IMF 사태가 터지며 한동안 암울한 시기를 보냈다. 무리한 확장을 지속했던 해태전자가 모기업이라서 충격이 더 컸다. 회사명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며 어찌어찌 IMF를 극복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소량이나마 오디오 기기를 생산하고 있고, 얼마 후 전자교탁, 내비게이션 사업에도 진출하였다. 2000년대 말, 합병 전 인켈 시절 연구개발 본부장 등 옛 인원들이 모여 경영권을 획득하고 인켈 브랜드를 부활시켰다. 2016년 현재에도 자체 설계, 디자인의 블루투스 스피커나 하이엔드 MP3 플레이어, 내비게이션 시스템 등 몇 가지 제품을 꾸준히 내고 있지만 국내 생산 공장은 전부 없앴고, 중국과 베트남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오디오 전문이었다는 기질은 못 버려서 요즘 흔한 블루투스 스피커를 만들더라도 타사에 비해 음질에 매우 신경을 쓰기 때문에 들어 보면 다르다. http://www.audioht.co.kr/atl/view.asp?a_id=3737

다만 소형 디지컬 음향 기기 분야에서는 코원 등의 쟁쟁한 기업들이 선두를 차지하고 있는 데다가 주력인 오디오 분야의 경우도 세대가 교체되며 MP3 플레이어를 들고 다니기에 오디오를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예전만큼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10] 사실 인켈의 주력 상품이던 앰프, 튜너, 타이머, CD플레이어, 턴테이블이 층층으로 쌓이고 큰 스피커가 좌우에 달려 있던 가정용 컴포넌트 오디오 시장은 2010년대에 들어오면서 온쿄나 야마하등 일부 일본제룰 통해 국내 수요가 충족되는 물건이 되었다. 전성기에는 카 오디오도 자체 셔우드 브랜드로 파는 동시에 미국과 유럽 고급 차량에 납품하던 유럽 유명 브랜드 제품을 OEM 공급하였고, 국내에서는 기아자동차 차량에 기본으로 들어갈 정도로 꽤 많이 팔리고 있었는데, IMF 이후 빠져나간 국내 연구 인력을 채용하여 급격히 발전한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 디지털화와 내비게이션 시스템 보급으로 인한 카 오디오 자체의 사양 산업화로 해태 그룹 해체 시에 사업을 접었다. [11]

중고 오디오 시장 게시판에 가 보면 인켈 물건이 그나마 대접을 받고 있고[12], 과거 명기로 꼽히던 일부 물건은 수명이 다 된 부품(볼륨, 콘덴서, 트랜지스터...)을 바꾸는 등의 개조를 통해 여전히 유통되고 있다. [13] 다만 개조기는 구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 대부분 회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개조하여 설계 의도에서 벗어나가나 파형이 찌그러지는 등 문제가 속출하기 때문. 콘덴서도 인켈은 과거 삼화컨덴서와 협업하여 특주한 최고급 콘덴서를 많이 사용하였으나 개조자들은 거의 멋대로 콘덴서의 용량이나 종류를 바꿔 엉망이다. 트랜지스터도 과거 오디오 시장이 활발할 때 생산되었고 지금은 단종된 소자들이 많아 오리지날보다 못한 트랜지스터를 쓰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가끔 회로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작업자들이 손을 댄 경우나 오리지날에 맞추어 오디오 그레이드 콘덴서를 사용해 설계 용량에 맞춰 노후된 콘덴서들을 교체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드물다. 인켈과 태광, 아남등 국내에서 평가는 낮았지만 당시 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 제품들이 설계 의도에 벗어나게 망가지고 있으니 당시 설계자들로서는 굉장히 억울할 일. [14] (1990년대까지 OEM이든 ODM이든 한국이 오디오 최대 생산기지였다. MADE IN JAPAN도 반조립상태로 수출되어 일본에서 마무리 조립되는 경우도 많았고, Dual은 90년대 이르면 인켈에서 로고만 두알로 바꿔파는 수준이었다.)

2010년대 현재는 중국 공장에서 일본, 유럽 유수 하이파이 업체의 하청생산에 주력하고 있고, 해외에서는 셔우드 브랜드로 하이파이, AV기기를 생산 판매하고 있다.

3. 이모저모

8, 90년대 당시에 드물게 토요일 격주 휴무를 실시하던 회사다. 우리 나라 주 5일 근무 확대 이전에는 모든 회사가 토요일은 12시에 퇴근이었는데 그것을 2주치씩 몰아서 쉬고 일하고를 반복 했던 것. 오디오 생산 라인은 일부 자동화된 라인도 있지만 자동차 생산라인과 비슷하게 대부분 손으로 작업하며, 부품을 사들여서 조립만 하는 방식이다. 여러 부품을 납땜과 나사, 접착제로 조립하는 수작업 노동 집약적 다품종 소량 생산인데, 공정에 필수적인 자동 납땜기의 납이 녹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8시부터 12시까지 근무하고 식혔다 녹였다를 반복하느니 2주치를 몰아 5시까지 한 번에 일하고 다음 주에 쉬는 쪽을 택한 것. 그래서 라인을 끊는 5시에는 무조건 퇴근. 징검다리 연휴에는 휴일을 옮겨 쉬기도 했다.

중소 기업이다 보니 급여 수준은 보잘것 없었으나, 회사에 대한 만족도는 상당히 높은 편으로, 임금투쟁이나 노사 분규가 일어난 적이 없다. 연구직의 경우에도 17시 이후에 일을 하거나 휴일 근무시에 칼같이 연장/휴일 근무 수당을 챙겨 주었었다. 연구 개발 인력과 창고 물류 인원을 제외한 직원 대부분이 생산 라인의 조립직 여성이었는데, 남자 연구개발/본사 직원 급여는 짰지만 생산직 여직원 급여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고 차별도 없었기 때문에 목소리 크게 내는 사람이 적었기도 하고. 격주 휴무와 정시 퇴근 덕에 직원들 취미 활동도 다양하게 이루어졌고 직장인의 주적인 야근이 없는 평등한 분위기였다. 그런 2000년대식 사내 문화가 일찍 발전했던 회사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망했으니...

도봉동에 본 공장과 연구소, 방학동에 PA / 모니터 공장, 의정부에 카오디오 3공장, 명륜동 대학로 주변에 본사가 있었다. 명륜동 본사 아래층엔 인켈 아트홀이 있었는데, 당시 양희경 윤석화 등이 출연한 뮤지컬 넌센스 초연으로 크게 성공했었다. 사실 이 인켈 아트홀이 인켈이 망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설립자인 회장의 아들이 당시 인켈 사장을 맡고 있었는데, 사업엔 별 관심 없고 아트홀 등 문화 사업에만 치중하자 회장이 빡쳐서 자기 지분을 해태전자에 넘겨서 회사 경영권이 덜렁 해태 그룹으로 넘어가게 된 것. 덕분에 IMF 겹치며 해태그룹이 망하자 함께 망하고 말았다. 그냥 있었으면 기술력이나 당시 준비하던 디지털 기기 사업으로 건실한 중소 기업으로 존속할수 있는 역량은 되었는데... (인켈 PA[15]와 인켈 두 개 회사가 되었지만) 결국 각자 예전 인원들이 주축으로 부활하여 존속하고 있으니, 알고 보면 참 끈질긴 회사, 질긴 사람들이다. [16]

일부 대리점에선 오디오 마니아들을 위해 앰프 단품을 판매할 때 내부 부품을 해외 오디오 부품으로 개조해주는 경우도 있었다.[17]

당사에서 판매했던 모 탁상용 카세트는 중파방송 주파수가 1㎑(!!!)간격[18]으로 올라간다.

1992년도의 어느날,인켈의 창업자이자 오너인 조동식회장은 3공장에 오셔서 3급직원들을 대상으로 다음과같은 사실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회사를 운영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불량이 너무 많다.의견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셨지.

발언하는 직원들이 없자 3공장에 건축허가가 나지 않으면 천안으로 내려가겠다.

항상 회장실문은 열려있으니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하셨다.

되돌아가는 회장님의 쓸쓸한 뒷모습이 거의 30년의 세월이 경과한 지금도 생생하게 잊혀지지를 않는다.

난 토해내야할 말들이 태산같이 많았는데 말 한마디 하지 못하였다.

이때 회장님이 언급한 불량에 대한 기록을 하여볼까한다.

지금도 핸드폰으로 인하여 삼성서비스센터를 찾아가보면 사람들로 바글바글댄다.

그렇다고 삼성핸드폰이 불량 많다고 어느 소비자가 불평하는거 목격하지를 못하였다.

왜냐?

삼성서비스센터의 수리기사들이 즉석에서 수리를 하여주거나 아니면 맡겨놓아도 일정기간이내에 수리를 하여주기 때문에 소비자불만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인켈이 독일지사로 수출한 제품 가운데는 제품 자체가 100%동작불량이어서 독일의 소비자들이 수리를 목적으로 현지의 인켈(그곳에서는 셔우드브랜드였겠지)서비스센터를 찾아가도 수리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왜냐?

인켈본사의 설계부 개발자 누구도 해결을 못하였고 따라서 생산라인에서도 100%불량이니까 아예 검사항목에도 없으니 생산부서에서는 그런 심각한 불량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전혀 인지할 수조차 없었다.

이런 불량품을 최소 5년동안(내가 확신하는 기간만) 생산하여 무지막지하게 독일지사로 수출하였고 이런 불량품들을 구입한 유럽의 소비자들 불만은 얼마나 쌓여갔겠는가?

구매한 제품이 불량이어서 서비스센터를 방문했는데 수리를 못해주니까 유럽의 소비자들의 기분은 과연 어떠했을까?

분통이 터졌을거다.

자초지종 내막을 알 수 없는 현지의 담당 수리기사들 또한 얼마나 당황스럽고 황당하였을까?

아마도 자신이 무능해서 실력이 없어서 수리를 못하는줄로 처음에는 자책하였겠지.

아마도 회장님이 언급한 불량은 독일지사에서 발생된 어이없는 불량을 두고 한 말일거다.

왜냐?

그당시 인켈서비스센터도 오늘날의 삼성핸드폰서비스센터처럼 수리목적으로 찾아온 사람들로 바글바글대었지만 즉각적인 수리가 행하여 졌기에 오너 회장님이 그처럼 직접 나설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야말로 셔우드브랜드에 적어도 장장 5년동안 먹칠을 한거다.

아마도 인켈의 간부사원들이 두리뭉실하게 보고한 결과일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설계부에서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결과가 아니었겠는가?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것은 오너회장을 속여먹은거와 뭐가 다르겠는가?

그러나 창업자인 오너회장이 바본가?

각론에서는 당연히 담당자보다 세세하게 파악하지 못하겠지만 시장전체를 읽는 판세는 과연 동물적 감각아닌가?

인켈은 왜 폭망하였는가?

왜?

시장이 변해서.

시대의 흐름에 사운이 기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브라운관 TV만들던 LG나 삼성은 다 망해야했겠다.

회장이 회사를 넘기지만 않았다면 디지탈기기사업을 할 역량은 갖추었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실상은 어떠한가?

디지탈의 기초,디지탈의 abc인 슈미트트리거도 알지 못한 눈뜬 장님들이었는데 그 결과 독일로 엄청난 불량품들을 수출하여 나라 망신시킨 무능,무사안일의 대명사들이 디지탈기기사업을 할 역량이 있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당시의 인켈은 윤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무너진 세기말적인 그런 회사였다.

윤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망가진 회사였다.

대기업의 문턱까지 간 회사를 누구에 의해서 무슨 이유로 인하여 망가졌을까?

한순간에 망가지지는 않는다.

한창 잘나가는 봄날에 겨울을 준비할 능력이나 의식조차없는 몇몇 무능인사들이 중요 길목을 막고 버티었고 회사를 속였기 때문이다.

QC에서 스코프의 파형을 본 순간 깜짝 놀라 한눈에 원인을 파악한 나에 대하여 옆에 있던 QC직원이 문제의 이들에게 알린 모양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불려간 나는 개발부부장,개발부차장,해외영업부장에게 NEC에 프로그램 수정을 요구하고 NEC에 클래임을 걸어야 한다,손해배상청구를 해야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들이 어떤 행동을 하였는가 간단히 기록한다.

프로그램을 수정하는데 단 1분도 안 걸릴텐데 이들은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 말하겠다.

멀쩡한 NEC칩(PLL IC라고 불렀다)을 도시바칩으로 구매를 변경하였다.

일본의 쪽바리들이 고의로 결정적인 한가지를 엉터리로 만들어 한국에 골탕을 먹인다는 소문이 업계에 파다했던 당시였다.

이렇게 되니 도시바칩을 장착해왔던 LG전자는 인켈로부터 로얄티를 챙겨야 한다며 긴급으로 특허를 출원하였고 인켈로부터 로얄티를 챙겼다.

그때 나는 LG의 특허담당자와 전화통화를 하여 인켈로부터 특허로얄티는 받았으나 액수는 언급하기 곤란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인켈의 간부사원들이 이 모양이다.

당연하게 NEC칩을 수정하여 독일지사로 팔려나간 그 수많은 불량제품들에 대하여 전량 사후 A/S를 실시하여야 했으나 이들은 상식을 벗어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했을까?

전문경영인에 대하여 언급하여보자.

그당시 소비자보호부에는 엄청난 공금횡령이 자행되고있었다.

심지어 여직원까지 수리비에 손을 대는 실정이었다.

소비자보호부 부장 혼자서 센터장 혼자서 먹을 수는 없었을거고 과연 어느 선까지 상납이 이루어졌을까?

9


  1. [1] INternational Korea ELectronics의 약자로 1976년부터 사용된 브랜드명이다. 어느 반도체 회사와 혼동하면 곤란하다.
  2. [2] 이름 때문에 혼동하는 사람이 많은데 엄연히 한국 기업이다.
  3. [3] 당시 대부분 국산 오디오 기업체들은 일본에서 부품을 그대로 들여와 조립하는 수준이거나 일본기업의 생산기지역할을 하면서 일부를 국내시장에 돌리는 수준이었다. 롯데그룹파이오니어, 아남마쓰시타(테크닉스), 대한전선(대우그룹의 전신)은 히타치, 도시바(오렉스), 화신전자소니, 정풍산수이의 부품을 그대로 들여와서 제품을 생산했다. 삼성전자금성사(LG전자의 전신)은 독자적 노선을 걷지만 산요나 파이오니아를 상당히 카피한 것으로 생각되는 제품을 생산했다. 천일사는 어느정도 독자 설계력을 갖추었으나 태광그룹에 인수된다. 독자 설계로 상당한 성능의 하이파이를 생산한 곳은 동원전자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스피커만 놓고 보면 고려전자의 마샬 브랜드가 더 앞서 있었다.
  4. [4] 삼천리자전거가 OEM 생산하던 다혼Dahon의 중급 미니벨로를 본사 승낙 받고 자사 모델로 이름만 바꾸어 거의 절반 가격에 국내에 소량 판매한 것과 비슷한 사례이다. ODM 제품으로 설계는 인켈이 담당했고, 디자인은 SAE 특유의 디자인을 계승하고 있다. 당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이미지가 영 좋지 않던 시절이라 X02모델이 한국산임이 알려지고 미국에서 인기가 식으면서 재고를 한국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는 카더라가 있다.
  5. [5] 파워앰프에 사용된 MOS FET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오디오 출력단 소자에 채용되기 시작했는데, 독특하고 부드러운 특유의 음색으로 상당히 각광받았다. 기술적 완성도 뿐만 아니라 오디오 사(史)적으로 상당히 의의가 있는 제품.
  6. [6] 본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교육시설공제회관에 있었다.
  7. [7] 1984년부터 경영전면에 나선 장남 조석구 사장과 조동식 창업주와의 갈등도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8. [8] 정확하게는 Inkel PA라는 이름의 방송 장비 전문 자회사였다. 설계와 디자인은 대부분 인켈 본사에서 하고, PA는 생산과 판매만 하였다. 해태그룹 합병/해체 이후 함께 없어졌다가, 2008년 같은 이름으로 브랜드가 부활하였다. 원래 하던 대로 스피커, 앰프, 전원장치, 믹서 등 방송 장비, 어학실, 시청각 교육실 장비를 취급한다. 회사는 과거 인켈 PA의 맥을 잇지만, 부활한 현재의 인켈과는 사명도 다르고 별개 회사이다.
  9. [9] 90년대 중반 한국 오디오 업체들은 역량을 쏟아부어서 최고급 하이파이 기기 생산에 나선다. 해외 하이엔드 라인 못지 않은 제품을 생산하겠다는 것이 목표였다. 인켈은 모든 기술을 쏟아부어 테마 시리즈를 만들었다. 태광은 아너 시리즈. 아남은 클래식 시리즈와 영국 TDL사와 제휴해 TL 스피커 시리즈를 만들었다. 삼성은 유명 일본 오디오 업체인 럭스만을 인수하기도 했고, 마크 레빈슨 헤일즈 스피커와 하청 또는 기술제휴해 엠페러 시리즈를 만들었다. 그러나 IMF와 함께 폭망. 눈물의 폭풍 세일로 50~70% 할인판매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의 거의 모든 오디오 업체들이 사업을 접었다.그리고 이후로 오디오 분야에선 메이드 인 차이나 시대...2010년대 들어서 인켈과 아남전자가 베트남으로 생산기지를 옮기면서 이제는 메이드 인 베트남 시대로 변했다. 마란츠, 데논, 티악 등도 알고 보면 인켈, 아남이 설계 생산한 경우가 많아서.....
  10. [10] 그렇다고 해서 MP3플레이어를 만들지 않았다는게 아니다. 10여년전에 나온 인켈 오디오 카드는 절륜한 음질과 (그 당시 기준으로)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인해 이 바닥에선 레전설이 된 물건이다. 단지 용량이 적고 전송속도가 안습인데다 배터리까지 오래가지 않아서(스펙상 8시간) 그렇지...
  11. [11] 카오디오사업이 그나마 아직까지 팔리는 오디오 분야이고, 최근 자동차 전장 등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안습....
  12. [12] SAE 세트가 4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30-60만원, 하이엔드 기함급이던 테마 시리즈는 300만원대라는 무지막지한 중고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SAE 세트는 그 인기로 인해 부분별로 거래가 되어 풀세트를 구하기 어렵고, 인티앰프와 리시버는 국내로 돌린 물량이 적어 구하기 쉽지 않은 편. 테마는 당시에 워낙 고가라 생산량이 적어 잘 관리된 세트를 구하기가 아주 어렵다.
  13. [13] 인켈이 제품을 워낙 튼튼하게 만들고 신뢰성 있는 부품을 썼기에 80년대 말-90년대 중반까지 제품도 가동 부분이 있는 CDP, 카세트 DECK, Turntable ,스피커(콘지와 에지만) 을 제외하면 39년이 다 되어감에도 아직도 멀쩡히 움직이거나 간단한 벨트나 픽업 등 소모품 교체만 하면 아직 사용에 문제없는 경우가 많다. 고품질 콘덴서는 수명이 짧다는 단점이 있지만 가정용 기기들은 사용량이 많지 않아 아직 수명이 남은 편.
  14. [14] 일본과 미국에서는 노후된 콘덴서로 교체하고, 납땜을 다시 하고, 출시 당시의 단가 또는 시대적 한계로 저가화된 부분을 개선하는 등의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반적인 개인작업자들의 개조와는 달리 회로를 철저히 연구하고, 계측을 철저히 해 제대로 된 파형과 잡음비를 얻는다고 한다. 1970~1980년대 출시된 오디오들은 오디오 전성기 시대의 제품들로 물량 투입이 엄청나고 특유의 매력적인 음색이 있어서 이런 작업을 한다고. 대표적인 곳이 일본의 AMP8. 유튜브에서는 미국의 복원 사례 비디오가 공유되고 있다. 당시 오디오를 설계 또는 품질관리 파트를 담당했던 직원들이 복원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주크박스란 곳이 상세한 작업내역을 공개하고 기술적인 설명을 하면서 복원 작업을 하고 있다.
  15. [15] 1995년 인터엠으로 사명을 바꾸고 현재 개인용 오디오 장비가 아닌 철도, 항만, 공항, 공장과 같은 시설에 방송용 장비를 공급하는 사업을 영유하고 있다. 대표이사는 인켈 창업자의 아들
  16. [16] 예를 들어, 인켈의 디자인 책임자는 구 인켈 시절부터 있던 사람이다. 근속이 거의 30년...-_-
  17. [17] 몰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오디오 전문지 등에 대놓고 광고를 했었다.
  18. [18] 예를들면 594㎑→603㎑로 9㎑간격으로 올라가지 않고 594㎑→595㎑로 올라간다는것. 물론 해당 탁상용 카세트가 아날로그 다이얼&디지털 액정임을 감안해도 규정상 유럽/아시아는 9㎑씩 올라가야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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