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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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의 주요 수상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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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홍콩 금상장 시상식

남우주연상

제10회
(1990년)

제11회
(1991년)

제12회
(1992년)

주윤발
(우견아랑)

장국영
(아비정전)

증지위
(쌍성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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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
張國榮 | Leslie Cheung

이름

장국영(張國榮, Leslie Cheung)

국적

홍콩[1]캐나다

출생

1956년 9월 12일

영국령 홍콩

사망

2003년 4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향년 만 46세)

신체

175cm, 64kg

학력

리즈대학교 섬유학 (중퇴)

데뷔

1977년 앨범 『I Like Dreamin'』

종교

무종교

1. 개요
2. 상세
3. 전반적인 생애
3.1. 아시아의 톱스타
3.2. 커밍아웃
3.2.1. 반론
4. 거짓말 같은 비보(悲報)
4.1. 의문점
5. 출연작
5.1. 드라마
5.2. 영화
6. 수상내역
7. 디스코그래피

1. 개요

1980~90년대에 황금기를 누렸던 홍콩영화계를 대표하는 미남 배우이자 가수.

원래 이름은 張發宗(장발종). 한자 표기는 張國榮(간자체로는 张国荣). 영어로는 Leslie Cheung(레슬리 청)이다. 레슬리 라는 이름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애슐리 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레슬리 하워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광동어식 예명을 살려서 Leslie Cheung Kwok-wing(레슬리 청궉윙)이라 하기도 한다. 홍콩 영화계를 빛낸 여러 스타들의 동판이 있는 홍콩 스타의 거리에는 한자와 영어 이름만 있어서, 그의 영어 이름과 한자를 모른다면 못 알아보기도 한다. 레슬리(Leslie) 이전에는 바비(Bobby)라는 예명을 썼다. 언론에서는 중국어의 표기법을 따라 장궈룽이라고도 표현하는데, 대중들은 압도적으로 이 남자를 장국영 내지는 레슬리 청이라고 부른다.

2. 상세

스타의 거리에 있는 장국영의 동판. 아쉽게도 핸드프린팅이 비워져 있다.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엄청난 동안이자 미중년이었으며, 실제로 설운도보다 나이가 2살 많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현재 살아있다면 환갑을 넘은 63세다. 손석희, 유동근과 동갑.

우리나라의 전담성우는 김승준. 부드럽고 젠틀한 목소리가 딱이다. 김승준의 경우, 《패왕별희》 연기가 가장 힘든 역 중 하나로 밝힌 적이 있다. 특히 거의 신인급이던 그가 대선배들 사이에서 가뜩이나 긴장하면서 녹음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녹음 8시간이 넘어가고 밤 10시 경 마지막 '문화대혁명'의 자아비판씬을 녹음할 땐, 본인도 엄청난 괴로움을 같이 느꼈을 정도라고.

정식적으로 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한 후 aTV와 계약하지만, 방송국과 영 조합이 맞지 않았는지 그에게 약 6~7년 간 무명기간이 존재한다. 전 매니저인 '진숙분'은 TV에서 우연히 장국영을 보고, "귀엽고 잘생긴 청년이 열심히 하는 게 맘에 들어" 그에게 협업을 제안한다. 그렇게 소속을 TVB로 바꾸고, 화성레코드와 계약하여 1983년 《풍계속취》로 제대로 된 성공을 맛본다. 물론 이 성공이 '우연히 좋은 매니저 만나서 된 것'은 아니고, 당시 화성레코드 소속이었던 매염방을 포함한 가수들이 비행기 타고 각 국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스스로를 홍보한 결과이다. 당시에는 "행사 뛰는 것=밤무대" 였고, 그렇게 힘든 일정을 열심히 소화한 결과가 누적되어 홍보도 되고 실력을 높이게 된 것이다. 《풍계속취》는 가수로써 장국영을 메인으로 올려놓을 만큼 히트한 작품이지만, 우리나라의 '10대 가요제'와 같은 홍콩의 십대 경가금곡 시상식에서 11위를 하는 바람에 상을 타지 못한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후술.

그렇게 하여 칼을 갈고 나온 노래가 1984년 《MONICA》. 전 매니저 '진숙분'이 상을 못타 분해하던 장국영을 위해 일본 원곡의 판권을 사서 그에게 어울리게 홍보활동을 하였고, 그렇게 초대박을 터트린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작품들은 가요 연말 시상식에 꼭 등장하여 상을 타게 해주었고, 특히 1987년 나온 《Summer Romance》의 판매량은 단일 앨범 기준으로 당시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라고 한다. 《천녀유혼》 삽입곡은 물론이거니와 《무심수면》이라는, 장국영 본인 입으로 '가장 히트한 곡'으로 언급한 곡도 포함되어 있다. 장국영 본인은 자신의 가장 궁극적 목표로 '가수로 성공하는 것'을 언급했고, 가장 이상적인 직업은 '가수'라고 하였을 만큼 장국영에게 음악은 메인이요, 배우는 당시 홍콩 분위기 상 해야하는 덤과 같은 것이었다.

목표였던 가수로써는 레전드를 찍었고, 《영웅본색》의 '당년정', '분향미래일자'가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유명하다. 80~90년대의 가왕 3인방은 알란 탐, 매염방, 그리고 장국영을 꼽는다.

1985년부터 가수로써 안정된 성공을 보장받기 시작하자, 배우 쪽에도 신경쓰기 시작한다. 《(장국영의) 위니종정》은 장국영의 음악과 연기력이 시너지를 일으켜 히트한 작품이며, 제목에서 아예 (장국영의)라는 걸 붙여 온전히 그의 작품이라는 것으로 홍보를 할 정도였다. 배우로써도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연기력 자체도 이미 인정 받은 상황. 이 두 작품 역시 장국영이 '얻어 걸린 것'이기 보다는, 오우삼 감독이 장국영의 잠재력을 보고 1983년에 이미 《영웅본색》에 캐스팅이 된 상황이었고, 《천녀유혼》으로 인한 폭발적 인기 역시 9개월 간을 밤샘 촬영하여 고생하였던 것에 대해 보상 받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상까지 탔으면 좋았겠지만, 그의 상복을 생각하면...

여튼 당시에는 없었던 보호하고 싶은 소년 이미지로 아시아 전역에서 특히 여성분들이 인기가 엄청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장국영을 따라 5:5 가르마(이건 응답하라 1994의 삼천포를 생각해보자.)를 유행처럼 하고 다녔고,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며 빨간 물감 흐트리면서 공중전화에서 피를 흘리며 '송-호-연'을 외치다가 부스 담당이 오면 얼른 튀어버리던 학창시절이 있었다. 지금 이런 짓 하면 당연히 민폐.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확 뜬 이후에는 본인이 좋아하는 시나리오를 고를 수 있어서 좋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데뷔작인 《홍루춘상춘》은 삼합회에 의해 강제적으로 찍었고, 그 뒤로 《갈채》, 《실업생》, 《연분》 등등으로 이어지는 청춘물은 본인이 이것저것 가릴 처지도 아니었거니와 돈이 필요했기에 들어오는 대로 받았다고 한다. 다만, 1980년 aTV에서 방영했던 이벽화(릴리안 리) 작가의 《아가적여인》과 홍콩에서 거장으로 추앙받는 담가명 감독의 1982년 작 열화청춘은 장국영 배우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갖는다. 바로 《아가적여인》을 보고 담가명 감독, 그리고 왕가위 감독이 장국영에게 팍 꽂혔다고 밝혔기 때문. 당시의 미남 기준으로는 좀 다른 방향으로 귀공자 스타일에 연약한 느낌을 갖고 있기도 했고, 사실 장국영과 비슷한 느낌의 배우는 당시에는 아예 없었다고 봐도 된다. 《열화청춘》은 제 2회 홍콩 금상장 시상식에서 장국영에게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게 해준, 장국영 배우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될 작품이다. 실제로도 장국영은 《열화청춘》이 실질적인 본인의 영화 데뷔작으로 언급한 바가 있다.

1990년 은퇴 선언을 했다가 다시 배우로 돌아온 이후에는 스케일이 큰 상업영화나 홍콩 느와르 영화보다 예술영화나 저예산의 영화에 주로 출연하였다. 물론 왕가위 감독과 '첸 카이거' 감독이 만들어 준 길이긴 하나, 장국영 본인의 노력과 재능으로 왕가위 시리즈의 첫 도입을 《아비정전》으로 안정감있게 이끌어 주었고, 《패왕별희》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실제로 왕가위 감독은 항상 시나리오를 쓸 때, 장국영을 주연으로 생각하고 집필한다던데, 장국영 입장에선 애증의 관계가 아닐 수 없다. 《해피투게더》 역시 사실 장국영이 연기한 '보영'의 시점에서 극을 이끌어나가려 하였는데, 장국영이 홍콩 콘서트 때문에 본인 분량을 먼저 찍고 가버려 보충이 안되는 상황. 분량의 모자람은 왕가위 특유의 질질 끌기 때문이었고, 결국 주연이 뒤바뀌어 버린다. 장국영은 홍콩 콘서트가 끝나고 아르헨티나에 다시 가서 약 열흘 간 늘어진 자신의 분량을 연기한다.

여튼 이 애증의 관계에서 장국영 본인이 언급하기로, 《아비정전》때, 유덕화와의 추격씬을 위해 필리핀까지 날아가서 촬영을 하였는데, 갑자기 왕가위 감독이 촬영 직전 "연기할 때 지붕 조심하라고, 몇 군데 구멍이 있더라고" 웃으면서 말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땅에서 20미터 위면 낮은 것도 아닌데, 말을 미리 했어야지 참 황당했다고. 또한 《동사서독》을 촬영할 땐, 중국의 사막으로 가서 찍었는데, 투명한 어린 전갈이 장국영의 목 뒤에 붙어있더란다. 검은 전갈이었으면 큰일 날뻔 했다고. 그리고 《해피투게더》 촬영 당시엔, 남미의 위생이 그리 나쁜지 몰라서 예방접종도 안하고 그냥 갔는데, 도착 3일째부터 설사가 시작되고, 약먹을 때만 괜찮아지고 하면서 증세가 반복되기에 근 3주간을 죽과 계란 흰자만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해피투게더》를 보면 굉장히 말라보이는 장국영을 볼 수가 있다. 장국영은 웃으면서 왕가위 감독과 1번만 더 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는 왕가위 감독과 일하지 않겠다고 농담을 던졌는데, 괜히 기레기들에게 떡밥만 제공한 꼴이 되어버렸다. 예정대로 《중경삼림》을 했다면 어찌 되었을지 소름.

첸 카이거 감독 역시 장국영 사망 뉴스를 접하고, "말도 안된다. 이건 완전히 (패왕별희의) 데이 아닌가." 라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또한 장국영을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제작한 작품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그 작품이 《무극》에서 사정봉 역할이 아닐까 팬들은 추측하고 있다. 물론 장국영이 받았을지는 의문이다. 그것은 《매란방》도 마찬가지. 한 번 했던 캐릭터는 웬만해서 다시 하지 않고 다양한 역할을 하려고 하는 장국영이기에 아마도 안 받았을 확률이 높다. 물론 장국영이 지인들이 제안하는 시나리오를 단칼에 거절하지는 못했기에, 오랫동안 제작자 '황백명'의 작품(대부분 하세편. 물론 《천녀유혼》이나 《야반가성》 같은 작품도 있지만)에 불려다녔고, 결국 장국영이 '하세편'은 찍기 너무 힘들다라는 말 한마디로 더 이상 하세편에는 출연하지 않는다. 죽기 직전 그의 말기 3작품인 《색정남녀》, 《창왕》, 《이도공간》과 관련된 '이동승' 감독 혹은 제작의 작품을 거절하지 않고 찍은 것도 있다.

《색정남녀》는 베를린 영화제의 경쟁부문 후보였는데, 사실 영화 자체는 완벽하지도 않고 영화가 거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예상할 수 없는 스토리와 적당한 유머, 그리고 배우들의 호연으로 꽤나 괜찮은 작품이 탄생하였다. 당시 장국영 말고는 다들 신인이었고, 심지어 촬영감독으로 나오는 분은 진짜 촬영감독이었다고. 지금은 중화권 대스타가 된 서기와 개성있는 연기자로 큰 막문위는 이 작품이 첫 데뷔작이었고. 한마디로 배우 쪽에서는 장국영이 모든 걸 이끌어야 하는 상황. 그는 감독 연습에 의의를 두어 촬영장에서도 연출부에서 할 법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 이 작품의 인연으로 1997년 콘서트에서는 서기막문위가 특별 게스트로 나와 섹시하면서도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표현받는 《아비정전》. 호화 캐스팅에 한국 배급사의 병크(느와르로 홍보) 덕에 극장에서 난동이 있었다는 풍문.

《패왕별희》의 우희이자 데이인 장국영. 기자협회에서 만약 장국영이 예쁘지 않았다면 망했을 거라고 언급될 정도로 매우 아름답다. 실제로 장국영은 칸 황금종려상을 받고, 자신의 메이크업 전담사이자 중국의 경극단에서 1급 경극원으로 생활하던 '송소천'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덕분에 예쁘게 나와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패왕별희》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후, 기자회견 당시의 모습. 이 기자회견은 아니지만 칸의 상징인 유명한 선착장에서 첸 카이거 감독과 장국영이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를 하는 분이공부 좀 하지 장국영이 홍콩에서 얼마나 유명한 배우인지, 유명하지 않다면 이런 훌륭한 배우를 어디서 발굴했냐며 언급을 하는데, 아마도 이때 장국영은 헐리웃에 진출하더라도(실제로 헐리웃 시나리오가 2편 들어왔었다고)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구나. 차라리 현재처럼 홍콩의 넘버원으로 남는게 낫다고 생각하였다고 밝힌 바있다.

참고로 《패왕별희》는 모든 것이 완벽했고, 연출진들, 스탭부터 경극 관련 장국영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까지 모두 신뢰할 만한 사람들로만 채워져 있어서 좋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 뒤로 북경에만 가면 패왕별희 스탭진들이 장국영의 초대로 모여 즐겁게 즐기다 갔다고 한다. 아니, 영화나 드라마를 오래 찍었으니 막내 스탭진들까지 챙기기는 힘들었을 텐데, 장국영은 그런 막내진들까지 이름을 외우고, 연락을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하겠다. 대스타 임에도 특별한 대우도 받지 않고, 스탭들이 도시락을 먹고 있으면 같이 먹고 수다도 떨고 그러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부분이 나중에 장국영의 자살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바, 후술.

3. 전반적인 생애

3.1. 아시아의 톱스타

장국영은 '홍콩직물왕' 아버지 밑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가 태어나기 직전 아홉째가 죽었다고. 공교롭게 생일이 같아 가족들은 그를 죽은 아홉째의 환생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말론 브란도, 히치콕도 옷감을 주문할 정도의 명성을 자랑했지만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았고 첩도 있었다. 부모와의 나이차도 컸고 누나와 형들에게 치여 외롭게 자라면서, 유모를 친부모보다 더 많이 의지했다고. 유모와는 평생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은 이런 성장환경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리즈대학교에서 유학했으나 아버지의 건강악화로[2] 중퇴하고, 1976년부터 연예계의 문을 두드렸다. 정식 데뷔는 1977년 참가한 아시아 가요제였다. <American Pie>로 무려 2위에 오르면서 연예계에 데뷔했다. 홍콩 aTV와 계약한 후, 다양한 드라마에 출연하나 대중들에게 임팩트를 주진 못했다. 덕분에 1977, 78, 79년 한국 포함 아시아를 두루 다니며 인지도 향상을 꾀했다. 그가 치고 딱히 올라온 계기는 그를 처음 보고 잠재력을 느낀 매니저 진숙분과 의기투합한 이후이며, aTV에서 TVB로 이적하여 연기와 가수 활동 모두 주류로 올라섰다.

실제로 이때 즈음에 장국영은 정말 생각치도 않은 굴욕을 당한 바가 있다. 1983년, 아직 장국영은 그냥 뜨지 못한 그저그런 엔터테이너였고, 장국영과 비슷한 또래였고 인기도 훨~씬 많았던 '진백강'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노래와 춤을 하였다. 문제는 한창 신이 난 장국영이 자신의 모자를 관객석으로 던진 것이다. 그렇다면 싫어하더라도 기념으로 가질만 한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명도 그 모자를 갖고 싶어하지 않았고, 바로 무대 위로 모자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 때, 장국영은 다짐을 굳건히 하면서 꼭 성공해야 겠다고 생각했단다.

1983년 홍콩 십대 경가금곡 시상식에서, 장국영 본인은 스탭진이 알려준대로 그냥 앞자리에 앉았을 뿐인데, 앞자리에서 유일하게 상을 받지 못했던 장국영은 눈물까지 흘리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굴욕들을 발판삼아 그 다음 해 부터 장국영은 《MONICA》로 기어이 가수로서 엄청난 성공을 맞게 된다. 또한 《백발마녀전》의 노래를 작곡하여 대만 금마장 시상식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후에도 될 수 있으면 본인이 직접 대부분을 작곡하려고 한단다. 그렇게 장국영은 가수로 먼저 성공한 탓에, 중화권에서는 장국영을 가수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워낙 가수로써도 레전드고, 배우로는 두말 하면 입아플 정도.

가수로 성공한 후, 영화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건 1986년 오우삼 감독의 영화 《영웅본색》과 1987년 정소동 감독의 《천녀유혼》에 출연하면서였다. 《천녀유혼》에서 왕조현과 물속에서 키스를 하던 장면은 홍콩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키스 씬으로 뽑히기도 했다.

영웅본색의 부부. 장국영과 주보의. 진짜 신혼 같은 느낌이 난다.

천녀유혼의 그 키스신. 당시에 굉장히 센세이셔널했던 키스신인지라, 우리나라에서도 난리가 났다. 우리 여신 왕조현을!!

장국영이 지금까지도 탑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다른 배우들에게 기대서 성공하지 않고 본인이 홍콩 영화의 붐을 이끌었다는 데 기여가 있어서이다. 실제로 다른 스타들보다 일찍 사망한 탓에 실적에서는 밀릴지 모르나, 중화권, 그리고 범아시아적으로 장국영 본인이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홍콩 영화를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즐기면서 최고의 인기를 얻게 한 공신이기에 그를 인정하고, 그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쿄 콘서트에서 천안문 6.4 항쟁에 대해서 중국 정부를 비난하는 한 편, 삼합회의 영화계 진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발언을 한 것이 논란이 된다. 원래부터 장국영의 성격은 매우 솔직한 편이었다. 그와 함께 작업했던 전 매니저 진숙분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편이라 많은 오해와 적지 않은 문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매스컴과도 사이가 안 좋았다. 한 쪽만 적으로 만들어도 위험할 판에 그는 좌충우돌하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때마침 장국영의 콘서트에서 팬 중 하나가 알란 탐의 팬과 주먹다짐을 하다가 사망한다. 홍콩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 장국영 같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연예인은 연예계를 은퇴해야 한다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자기 편도 하나 없었을 뿐 더러, 이미 연예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장국영은[3] 1990년 은퇴를 선언한다. 당시 은퇴 콘서트는 비디오로도 나와 있는데, 무대를 옮겨 다니면서 사방을 둘러싼 팬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는 장국영을 볼 수 있다.

본래 장국영은 은퇴 콘서트 후 연예계 자체에서 발을 빼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조용히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매니저인 진숙분은 장국영이 이미 화려한 연예계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캐나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 보도 자료를 배포할 때 완전 은퇴가 아닌 가수로서만 은퇴하는 내용으로 배포했고 계속 영화 스케줄을 잡아줬다고 한다. 그녀의 예상대로 장국영은 곧 아무도 자신을 몰라주는 캐나다 생활에 지루함을 느꼈다고 한다.

가수 은퇴 이후, 장국영은 아이돌 태생의 배우라는 한계를 딛고 《아비정전[4], 《동사서독》, 《패왕별희》, 《춘광사설》 등 당시 홍콩 영화들 중에서도 굵직굵직한 작품들에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선보임으로써 아시아 전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1995년에는 가수로도 다시 복귀하여 《A Thousand Dreams Of You》[5], 《추(追)》, 《유심인(有心人)》, 《좌우수(左右手)》, 《아(我)》 등의 히트곡을 내놓는다.

특히 가수로 복귀한 후 발매한 《총애 장국영》 앨범은 우리나라에서도 50만장 이상 팔렸던 엄청난 히트작이었다. 그래서 장국영은 콘서트 투어를 하거나 꼭 크게는 아니더라도 미니 콘서트처럼 한국에서 자신의 콘서트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당시에는 비싼 표를 사서 콘서트를 관람한다는 것에 낯선 한국인들이라 매니저 진숙분은 수익성이 없다며 투어에서 빼버린다. 냉정할세

장국영은 대외적으로는 내성적이고 낯을 가렸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나 스태프들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매너가 좋은데다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인격자' 그 자체로 통했다고 한다. 삼합회에 관련된 사람도 많고 각종 괴짜들이 넘쳐나는 홍콩 연예계인데, 그런 사람들조차 기를 못 펴고 착하게 굴도록 만들었던 사람이라고. 다만 둘도 없는 절친이었던 진백강[6]과는 데뷔 이후 서로 사이가 틀어져 한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촬영 당시 한 컷도 서로 같이 찍지 않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93년 진백강이 우울증으로 인한 약물 및 알콜 중독으로 고생할 때 화해했다. 이 일화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된 적이 있다.[7]

서로 다양한 작품에서 같이 캐스팅되어 여러가지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친해졌는데, 문제는 장국영이 뭔 팩폭 할지 항상 두려운 토크쇼(...). 진백강과 장국영이 같이 토크쇼에 나갔을 때, 진백강이 자신의 피부는 타고났기에 관리하지 않고, 화장품도 거의 안쓴다고 언급한다. 그러자 장국영이 아니라고, 진백강을 가까이서 보면 화장도 잘 해 놨고, 매일 피부를 위해 케어를 받는다고 하자 진백강은 굉장히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났다고 한다. 장국영도 별거 아닌데 꺼거 별거 맞아요. 화를 내는 건 너무하는 거 아니냐. 라고 하면서 서로 절교했다고 한다. 심지어 진백강 주연, 장국영 조연, 이려진 등이 열연했던 《성탄쾌락》 때는 진백강이 여러가지 조건을 내달았다고 한다. 그 중에서는 "절대 두 사람의 모습을 동시에 잡지 말것" "같이 찍는 것은 근거리든 원거리든 무조건 안됨" 등등이 있었다고 한다. 여튼 《성탄쾌락》은 당해 가장 관객이 많이 든 히트작인데 이런 비하인드가 있었다.

1989년에 오리온제과에서 나온 초콜릿 '투유' 광고에 출연해서 수많은 소녀 팬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었다. 한국에서 투유 초콜릿 광고를 촬영할 때 촬영장을 방문하는 기자들이나 관계자들에게 손수 초콜릿을 나누어 주며 연습한 한국어로 열심히 인사를 하고 일일이 챙겨주고 배려하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당시 오리온에서는 초콜릿을 먹고 실제로 본인이 겪은 사랑의 사연을 보내주는 사람들에게 추첨을 통해 장국영의 마지막 콘서트 티켓을 주는 마케팅을 추진했는데 이로 인해 이 초콜릿은 불티나게 팔렸다. 투유 노래는 한국 한정 싱글이었지만 보통화광둥어 2가지 버전으로 발매됐다.

같은 해에 KBS 젊음의 행진에 출연해 이선희합동 공연을 했고(풀버전 영상), 당시 인기 최정상을 달리던 쟈니 윤 쇼에도 출연했다.

사실 유명세를 얻기 이전인 1978년과 1979년에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아시아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국제가요제를 개최하였는데, 한국의 MBC 주관 국제가요제에 2년 연속 출전했던 것.

79년 <서울 송 페스티벌>은 6월 2일에 개최되었었다.

3.2. 커밍아웃

공식적으로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밝힌 적은 없지만, 인터뷰 중 연예인의 양성애에 대한 질문을 받자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나도 그 상대방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중요치 않다. 만일 남녀 모두 ok라면, 기회는 두 배가 되는데 뭐가 안 좋다는 것인가" 라고 한 발언과 2000년 《타임》지에 본인이 "나는 '양성적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등의 발언들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커밍아웃했다.

공연을 할 때 긴 머리에 여성 전용의 긴 하이힐을 신고 나온 적이 있다. 본인은 데이비드 보위의 퍼포먼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으나, 정작 보위는 훗날 자신의 양성애가 사실 컨셉이었고 흑역사라고까지 밝혔다. 하지만 장국영은 의상 디자이너가 컨셉을 잡아주자 "이런걸 해봐도 괜찮을 듯? 이라 생각하였다고 한다."

3.2.1. 반론

그는 자신의 성적 지향성에 대해서 확연하게 동성애다, 양성애다라고 확정지어 말한 적이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인류애적 사랑이 엄청나다는 점을 세간에서 상업적으로 이용했으며 그로 인해 판매부수를 늘린 찌라시 언론사가 많다는 점이다. 이는 매염방이 장국영 사후 <명보>와 가졌던 인터뷰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황색언론이 과도하게 집착하는 그의 성 지향성은 단순 가십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며, 사후에도 여전히 그에 대한 논란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또한, 데이빗 보위의 퍼포먼스를 따라 한 것도 그냥 겉모습만 따라한 것일 수도 있기에 모호하다. 데이빗 보위 특유의 인터섹슈얼한 이미지는 장국영뿐만 아니라 일본의 사와다 켄지도 시도한 적 있었다. 게다가 보위는 실제 양성애자였던 적은 있으나 젊은 시절 한때 일이고, 행적을 보면 평생 양성애자로 산 것은 아니다. 상술했듯 말년에는 심지어 "양성애는 음악 활동을 위한 컨셉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장국영은 당학덕을 연인으로 인정한 적이 없고 항상 부정했으며, 동성연애는 모두 당학덕이 언급한 것들이다. 당학덕은 1983년 1월 초부터 연인관계가 시작되었다고 추도사에서 밝혔으나, 장국영은 당시 꾸준히 여자친구가 있었으며, 모순균 이외에도 프로포즈를 한 여성도 더 있었다.

실제로 장국영의 이성문제가 실질적으로 올라왔던 상황을 정리해보면, '모순균'은 장국영에게 사랑의 열병과 함께 아픔을 준 여인이다. aTV에서 서로 각자의 음악 프로그램 진행을 하고 있었는데, 장국영이 우연히 본 모순균에게 첫눈에 반한 것이다. 20살 때로, 17살 그녀에게 실제로 프로포즈를 했는데 차였다고. 프로포즈 성공을 위해 모순균의 가족들에게도 온갖 정성을 보였고, 특히 남동생이나 아버님을 집중 공략하여 프로포즈 성공률을 높이려 하였으나 모순균이 "우린 아직 어리다"는 말로 프로포즈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2000년 모순균 진행의 토크쇼에 장국영이 출연했을 때, 예전 나의 프로포즈를 당신이 허락했다면, 둘 다 인생이 바뀌었을 거라고 언급했다. 장국영 뿐만 아니라 모순균도 2번의 이혼과 3번의 결혼으로 결코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

그리고 홍콩 언론지였던 '명보'에서 1980년, 장국영과 '설이'의 스캔들을 직접 취재한 적이 있다. 솔직한 장국영은 당연히 쿨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그 후, aTV 방송국에서 대놓고 커플로 밀고 나가서 화제성을 잡으려고 했던 모델 출신 배우 '예시배'와 약 2년 간 사귄 적도 있다. 예시배와는 《요철신탐》, 《첨첨입사미》, 《대대호》에서 호흡을 맞추었으며, 그 드라마들이 끝나서 애정이 식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헤어진 후엔 예시배가 다른 에이전시와 계약하여 대만으로 갔다. 그런데 그 후 장국영이 《영웅본색》 시상식 참가 때문에 대만으로 가서 기자회견을 하였을 때, 어떤 기자가 "예시배와 헤어진 후 연락을 주고 받은 적이 있냐?"고 물었고, 장국영은 연락하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내심 본인에게 아직도 미련이 있다, 고 말해줬으면 하였으나 위의 단호한 인터뷰 때문에 그가 본인에게 미련이 없다고 느끼자 예시배는 자살시도를 하였다. 다행히도 실패. 또한 장국영이 은퇴하고 캐나다로 간 것도 좋아하던 이성이 미국에서 유학한다고 하자 그쪽에서 잘해서 결혼까지 하기 위해 따라 갔던 게 큰 이유. 이 부분은 고별콘서트 당시 한국 기자와 인터뷰하며 드러난 사실이다. (금옥만당 이야기가 떠오르는데, 서극 감독과 협업하면, 유독 장국영의 실제 생활을 극 속에 녹이곤 한다.) 아마 진숙분이 그가 연예계로 돌아올 거라고 확신한 것도, 그 여성과 장국영이 잘못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당학덕 말대로 진짜 둘이 연인관계였다고 하면, 그것은 꾸준히 장국영의 여자친구였던 사람들을 물먹이는 행동 밖에 되지 않는다. 분명한 건, 당학덕과 장국영이 연인사이라는 증거 자체가 없으며, 2000년 열정 콘서트를 위해 외국으로 나가기 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한 기자가 "당학덕도 같이 가는거냐?"라고 물었을 때, 장국영은 여러 번 관계를 부정했음에도 또 이런 질문이 나오자 "나는 당선생 말고도 친한 친구가 많다."며 크게 화낸 부분도 있다. 또한 당학덕이 연인 사이라고 밝힌 여러 장의 사진들은 그냥 매니저와 스타 사이의 관계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스킨쉽은 손잡고 걸어가던 단 한 장의 사진 밖에는 없었다. 손잡은 걸로 왈가왈부 할거면, 이동승 감독과 손잡은 건 왜 스캔들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인지. 둘의 비밀을 캐기 위해 적외선 카메라까지 동원하면서 파파라치 짓을 하지만 그 수많은 언론들이 결정적 단서를 잡지도 못한 것 보면 뭐 별거 아닌 건 당연한 거 아닌가. 팬들은 장국영의 말만 믿기에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인건 둘째치고, 끝까지 자신과의 관계를 부정했던 자칭 '애인 장국영'이 본인의 언급으로 찌라시의 완벽한 먹잇감이 된 것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참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다.

2002년 매염방 콘서트에서. 이 때도 역시나 몸이 너무 아프고 우울증이 심했으나 오누이 같은 관계인 매염방을 위해 공연을 하였다. 워낙 몸이 좋지 않아 관객들이 앵콜을 외쳤음에도 다시 무대에 올라오지 않았다. 평소 장국영의 쇼맨쉽을 생각하면 절대 생각할 수 없는 행동.

《색정남녀》에서 실질적인 여자 주인공인 서기를 게스트로 초대하여 퍼포먼스를 한다. 서기는, 본인에게 가장 상냥했고, 뭐든지 상담을 받아주는 남자는 장국영 하나였다며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영화 특성상 계속 붙어있다보니 당연히 좋은 감정이 생기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예의와 상냥함이 넘치는 잘생긴 남자를 보면 말이다.

장국영의 엄청난 유산과 보험금을 수령한 당학덕에게 팬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유는, 장국영이 여러 번 부정한 연인 인정이 1순위요, 그가 자신이 받은 어느 정도의 유산을 가지고 장국영의 기념관이나 추모공간을 만들어 주었으면 했는데, 근 20여년이 지났음에도 아무것도 없는 부분 때문에 화가 난 것이 크다. 실제로 중화권 최고의 여가수였던 등려군은 추모 무덤에, 스피커를 달아 하루종일 등려군 음악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거 당학덕이 받은 460억에 보험금 80억으로 충분히 가능한거 아닌지? 또한 가다리산에서 많은 팬들이 추모를 하고 꽃이나 선물 등을 놓고 가곤 했고, 장국영 자택에서도 추모의 예를 갖추었는데, 이사를 가는 바람에 이제는 팬들이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추모객들 때문에 현관에는 매일매일 항상 불이 켜져 있었다고 하던데... 아쉬운 부분.

4. 거짓말 같은 비보(悲報)

2003년 4월 1일, 그는 자신이 머물던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香港文華東方酒店) 24층 객실에서 몸을 던져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이때가 향년 46세.

공교롭게도, 이날이 만우절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처음엔 거짓말로 여기고 그의 사망 소식을 믿지 않다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큰 충격에 휩싸였으며[8] 그가 세상을 떠난 지 9시간 만에 홍콩에서는 6명의 팬이 그를 따라서 투신하였고 그 중 5명이 사망했다. 홍콩 본토뿐만 아니라 전 아시아권의 영화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당시 유행하고 있던 전염병 사스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4월 5일에 그의 추도식에는 전 세계에서 수많은 팬들이 찾아와 그의 명복을 빌었다. 특히 그와 함께 《영웅본색》을 찍었던 주윤발은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와서 장례식에 참석했다.

국내에서도 송광사에서 49재를 치르려고 했으나 SARS 확산 우려의 이유로 무산되었으며, 5월 2일에 일산에서 국내 장국영 팬들이 모인 가운데 천도재(遷度齋)가 열렸다.

4.1. 의문점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무성한 소문들이 떠돌았는데, 삼합회에서 살해했다는 음모론부터 천안문 발언 등 공산당에 비판적이었던 탓에 중국 정부가 살해했다는 설, 그의 동성 애인이라고 알려진 당학덕(唐鶴德)이 유산을 노리고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9] 실제로 캐나다 정부에서 홍콩 영화배우들을 삼합회와 연관이 있다며 이민을 거부했다는 루머가 돌 때도 장국영만은 유일하게 이민 허가가 내려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삼합회가 영화판에 뛰어드는 것에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10] 장국영이 삼합회에 치를 떤 이유는 그의 영화 데뷔작 《홍루춘상춘》이 중국 고전 《홍루몽》의 에로 버젼이었는데, 영화 수준도 조악했지만 삼합회 관련 스탭들이 가수로 활동하고 있던 장국영을 협박하다시피해서 영화를 찍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1] 은퇴번복 후 처음 출연한 《가유희사》는 필름탈취를 겪기도 했고, 생전 인터뷰에서 삼합회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장국영이 감독 데뷔를 하려해도 삼합회와 연결되어 있는 대다수의 홍콩 영화 투자자들이 투자를 하지 않아 계속 제작이 미뤄지다가 막판에 겨우 중국의 사업가인 '석설'에게 투자를 받아 준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국영의 죽음으로 그의 재산 460억을 물려받은 당학덕은 평소 삼합회의 행사에 모습을 자주 드러냈었다.

실제로도 수상한 점이 상당히 많다.#

  • 경찰은 '장국영의 유서가 발견되었다'라고 밝혔지만, 이 유서는 2019년 현재까지 전문(全文)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 장국영은 심한 고소공포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24층에서 투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국영을 아는 사람들과 팬들은 모두 믿지 않았다. 실제로 장국영은 비행기를 탈 때가 가장 무섭다고 언급한 적도 있고, 실제로 같이 탔던 사람들은 장국영이 이 정도로 심한 고소공포증인가 싶어 놀랐다고 한다. 또한 2~3층 높이의 바닷가 바위나 나즈막한 옥상에서도 촬영하는 걸 힘들어했다.
  • 장국영이 24층에서 투신한 호텔은 중간 부분이 튀어 나온 구조라서 정상적으로 떨어져 죽은 것이라면 호텔 앞에서 시신이 발견돼야 정상이지만 장국영의 시신은 마치 멀리뛰기라도 한 듯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아스팔트 위에서 발견되었다. 만, 이 항목의 의혹은 법의학에 대한 지식 부족 때문에 생겨난 오류이다. 각종 법의학 교양 서적들 때문에 제법 알혀진 사실인데, 자살자가 투신할 때 드라마나 영화처럼 아래를 보면서 그대로 몸을 던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땅을 보면서 그대로 몸을 던지는 일은 엄청난 공포를 유발하기 때문에 제정신으로는 실행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대부분의 투신자살자는 추락지점 한참 뒤에서 달려와서 앞으로 점프하듯이 뛰어내리기 때문에, 이 항목에 적힌 장국영의 사례처럼 ‘마치 멀리뛰기라도 한 듯 건물에서 멀리 떨어져’ 추락사 하는 쪽이 오히려 정상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의혹이라고 할 수 없다. 라고 하지만, 실제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을 보면, 튕겨나갈 부분이 헬스장 창문 열고 나오면 24층 바로 아래 넓은 공간이 하나 있고, 또 떨어지다보면 3층 높이에 카페 발코니가 하나 있으며, 그 아래는 택시가 모여있거나 하는 블로킹 구역이 하나 더 나온다. 그런데도 추락사 후에도 30여분간 호흡이 붙어있었고, 피가 적게 쏟아졌고, 추락사의 경우, 몸에서 무거운 머리가 먼저 떨어지며 큰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은데 상대적으로 머리가 온전했다는 점은 의심할 만 하다.
  • 사람이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굉장히 큰 소리가 나야 하는데, 정작 호텔 현관 앞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현관 도어맨은 아무 소리도 못 들어서 신원이 불분명한 행인이 시신을 최초로 발견했다.
  • 투신해서 죽은 것 치고는 혈흔이 너무 적었다. 다만 의사나 전문가들의 의견에 의하면 투신해서 죽어도 혈흔이 꼭 많지는 않다고 한다.
  • 24층 정도의 높은 높이에서 낙하하면 보통 신체에서 가장 무거운 부분인 머리로 떨어지게 되는데,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이 TV에 중계되었을 때 잠시 노출된 장국영의 시신은 머리 부분에 외상이 거의 없었다. 이에 논란이 일자 당시 경찰은 기자회견에서 발부터 떨어져서 그렇다고 밝혔다.
  • 그의 매니저였던 진숙분 역시 "장국영은 사망 전 스케줄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라며 보통 자살할 사람의 행적이 아닌 평상시와 다름없는 행동을 했다고 밝혔다.
  • 또한 진숙분은 사망 당일 그가 사망하기 10분 전인 오후 6시 30분에 장국영과 통화했는데, 그는 주차장에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 말이 맞다면 장국영은 차를 주차한 뒤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12] 계단을 이용해 24층까지 뛰어 올라간 뒤 바로 투신했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장국영과 비슷한 체형을 가진 남자가 실험해봤는데, 주차장에서 지하도를 거쳐서 호텔 입구까지 오는 데만 9분이 걸렸다고 한다. 항간에는 호텔 주변에 있는 스타페리 주차장이면 10분 안에 도착할 확률이 높아진다고는 한다. 물론 장국영이 주차장에 있다고 거짓말을 했을 확률이 더 높아보인다만.
  • 사건 당일 그의 연인이자 유산상속인이었던 당학덕의 행적 또한 여러 점에서 의문을 갖게 했다. 장국영 사망 당시 당학덕은 그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장국영이 사망하던 날 그와 배드민턴을 치기로 약속했었다고 알리바이를 댔지만 그가 말한 시간은 이미 장국영과 매니저가 '2004년 장학우 콘서트 게스트 출연'에 관한 내용을 상의하기 위한 약속을 잡아 놓고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의 관리인이나 응급 구조요원의 말을 종합해보면, 장국영의 첫째 누나인 장녹평이나 당학덕이 병원에 왔었다는 건 사실이 아니며, 어디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응급 구조요원은 3명이 병원에 왔었는데, 한 명은 장국영의 로드매니저 격인 '케네스', 그리고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책임자, 그리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성 한 명이 왔었다고 했는데, 아마도 이 여성은 진숙분일 가능성이 크다. 여튼 장국영이 사망하기 얼마 전에는 당학덕과 장국영 두 사람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장국영의 죽기 전 마지막 생일파티에 진숙분과 함께 참여하지 않은 사실도 있고.[13] 장국영 사망 며칠 전 당학덕과 장국영이 심하게 싸우는 걸 봤다는 목격자도 나타났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과 증거들로 보아, 어떤 법의학자는 "누군가 장국영을 둔기로 살해한 뒤, 현장에 시신을 유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장국영의 사망 직후 장국영의 조카 알리사가 '평소 장국영이 우울증을 앓아 왔고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 라고 밝혔고, 장국영이 사망한 당일 점심을 함께 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막화병에게 "죽고 싶을 땐 수면제보다는 뛰어내리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오전 중에 운전을 하다가 어디론가 확 부딪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살 이유가 우울증이었다고 하면 의외로 간단해지는데, 자살은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이며, 사람들 앞에서는 끝까지 평상시와 다름 없이 행동하려 하기 때문에 일정이나 다른 것을 자살을 대비해서 정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14] 그래서 자살 직전까지도 주위 사람이 평소 알아차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고통스러운 일로 자살을 결심하는 사람은 주변에 자살의 위험 신호를 많이 보내지만, 만성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다들 '원래 저런 사람인가 보다' 하는 면도 없지 않고, 또 이렇게 일상 생활을 잘 영위하다 갑자기 죽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자살의 징후가 나타나긴 하지만 주변에서 알아차릴 만큼이 못 되는 편. 국내에서도 모 대학 학생이 수업 중인 학교의 건물에서 투신자살을 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해당 학생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자살 당일에도 학교에 수업을 받으러 왔었다.

문제는 "왜 우울증이 생겼는가?"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중국 대륙출신의 사업가 '석설' 이 장국영이 오랫동안 염원하던 자신의 영화 감독[15]의 꿈을 이뤄줄거라 생각했고, 석설 또한 돈은 문제가 아니니 열심히 제작해보라며 장국영을 응원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도 슬픈 에피소드가 있는데, 아직 투자 무산이 되기 전, 본인의 지인들에게 석설을 소개시켜준 적이 있다. 그런데 장국영이 영화 이야기를 하면, 석설이 호언장담하며 자신이 그 꿈을 이뤄주겠다고 하는 부분이 지인들에게는 영 믿음직스럽지 못했다고 한다.사기꾼 스멜 그렇지만 이미 석설이 관금붕 감독, 장예모 감독과 같이 일한 적도 있거니와, 드디어 제대로 된 감독을 하게 되어 항상 기분이 업되어 있던 장국영에게 "정확하게 알아보라고" 말하기 힘들었던 모양. 그 후 장국영은 홍콩에서 제작을 돕겠다는 제작사를 막판에 만나지만, 석설의 투자가 있었기에 거부하였다. 또한 석설은 차기작까지 지원을 약속했으니 얼마나 장국영 입장에서 든든해 했을지는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다양한 문제로[16] 계속 영화 제작이 미뤄지다가 어찌저찌 봉합이 되어 4월 1일부터 크랭크인을 하려 했는데 바로 그때 석설이 구속되는 바람에 아예 물거품이 된것이다. 석설의 구속은 2002년 3월 30일에 걸려 들어가서 세간에서 <3.30 사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 어쩜 타이밍이 이리 완벽한지. 여튼 이 비리사건에 연루되어 투자를 중단하여 영화 제작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 자존심 강하고 자존감이 높던 장국영은 홍콩 제작사를 다시 찾아가나, 이미 그 제작사는 다른 영화에 투자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받기까지 했다. 결국 이에 크게 실망한 장국영이 자살을 선택했다고 결론이 모아지고 있다.

하지만 영화 제작 무산 하나로 이유를 대기엔 더욱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실제로 영화 제작이 좌절되자, 《아가적여인》, 《연지구》를 같이 작업했고, 《패왕별희》 제작시, 다른 이들이 '존 론'[17] 을 외칠 때, 실제로도 장국영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패왕별희》를 집필하였기에 장국영을 강력히 원했고, 결국 성사시킨 이벽화 작가는 장국영이 감독의 꿈이 크다는 걸 알고, 시카고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은 《아가적여인》 리메이크의 감독으로 활동하길 바랬다. 그걸 도와주기 위해 본 시나리오를 1년여간 수정하여 2003년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또한 서극 감독은 몇 번 다른 시나리오 등을 수집하여 보내다가, 장국영이 1년 이상 전부터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읽지도 않는다는 걸 알고, 장국영을 위해 직접 감독 시나리오를 호텔로 가져가서는 부인이자 영화 제작자 시남생, 콜롬비아 영화사 아시아 배급 담당자와 함께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결국 본인이 선택한 시나리오가 물거품 되었다는 상처가 있긴 하나, 그의 감독 활동이 완전히 막혔던 건 아니었던 것이다. 실질적 무명 생활을 8년이나 겪고선, 온갖 굴욕에도 당당하게 활동하던 장국영과도 캐릭터가 맞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제작 무산의 가장 큰 이유였던 석설의 구속과(이 사건으로 석설은 2008년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와 관련된 약 20여명의 구속 및 처벌. 장국영 영화에 투자하고자 했던 약 300억원의 자금이 실제로는 비리 사기사건의 비자금이었던 것들이 도덕적으로 살아왔던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책임감으로 다가와 우울증을 확대시켰다고 보는 게 맞을 수 있다. 워낙 스케일이 큰 비리 사기사건이었는지라 아마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이 상황을 전혀 몰랐던 장국영에게도 일종의 비토와 책임론이 대두되었을 가능성이 컸던 게 사실.

또한, 주요 캐스팅(영정[18], 호군[19], 심전하[20])을 해놓고, 스탭들도 《패왕별희》 스탭진 뿐만 아니라 각 국에서 유명한 정예 군단으로 정해놓고 촬영하려 하였으나, 영화의 크랭크인이 자꾸 밀리면서 그들이 다른 작품을 못하게 되었다거나 하는 스케쥴적인 부분 역시 장국영이 괴로워했던 부분일 것이다. 본인 때문에 적어도 50여명의 스탭진, 캐스팅된 배우들에게 민폐를 끼친 부분이니 말이다. 또한 가수의 입장에서는 유니버셜에서 계약한 대로 1장의 앨범을 마지막으로 내야 했던 것도 스트레스의 요인. 실제로 '황요명'과의 공동 작업이라 어떻게든 둘의 스케쥴이 맞을 때 녹음을 했어야 하나, 장국영의 몸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녹음이 자꾸 미뤄지기도 하였다.

완벽주의자였던 장국영은 이것저것 해야할 일은 자꾸 늘어나고, 그 일들을 수습도 못하고 계속 혼자 삭히면서 고민을 하였고, 결국 돌아오지 못할 선택을 해버린 건 아닌지. 덧붙여서 장국영은 대부분의 친목 활동에서 본인이 주도하였고, 그의 완벽함도 《패왕별희》처럼 좋은 시너지로 나올 수도 있으나, 잘 되지 않는 일이 있어 얼른 포기하는 게 나은 문제에도 끝까지 자기가 해결하기 위해 집착을 보여왔던 것도 이러한 성격 때문은 아닌지 조심스럽다. 이 부분은 송소천과 막화병의 인터뷰에서 언급된 적이 있다.

장국영을 상징하는 빨간 하이힐.

사망 10주기에 홍콩 타임스퀘어에 전시된 장국영의 모습.

그리고 잘 알려진 사실이 아닌데, 장국영은 베를린 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바가 있다. 하루 3~4편의 영화를 계속적으로 봤다고. 여튼 4월 1일 기일과, 9월 12일 그의 생일에는 많은 팬들이 영상회나 파티를 열고 장국영을 응원하고 있다. 장국영은 일본팬도 많았기에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할 수 있는 동력이 되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만 사진집 3권, 패션투어 콘서트, 희귀작 DVD 발매, 등이 이루어졌다.

5. 출연작

5.1. 드라마

진하게 표시된 작품은 국내 VHS 출시 작품.

  • 홍콩 RTV[21] 작품
    • 《애정고사지(愛情故事之[十九歲])》(1977)
    • 《악어루(鱷魚淚)》(1978) - 사실 이 작품은 빅히트작이긴 한데[22] 주인공이 아니라서 묻혔다.
    • 완화세검록(浣花洗劍錄)》(1978)
    • 《한지붕 아래(屋簷下之(15,16); Teenagers)》(1978)
    • 《아가적여인(歲月山河之 "我家的女人"》(1980): 장국영이 첫 감독작으로 준비하던 영화가 엎어지고 큰 상심과 우울증이 생기자 2002년 5월 1일에 작가 이벽화가 장국영을 찾아가서는 큰 예산이 필요없고, 당시 시카고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을 만큼 인정받은 이 작품을 리메이크하여 감독해보는 건 어떤가 제의했고, 장국영과 약속하여 2003년 5월 1일 크랭크인을 목표로 준비 중인 작품이었다. 장국영은 장백지를 캐스팅하면 좋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어느 정도 이 작품의 진전을 생각했으나, 결국 크랭크인 1달을 남기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 정인전 (情人箭)》(1979) - 드라마에 출연은 안 했지만 타이틀 송을 불렀다. 국내에도 VHS로 출시되었지만, 홍콩에서도 재방을 많이 안 해서 자료가 거의 없는 희귀작. 다만, 2013년에 aTV에서 새로 송출을 시작한 세월류성(歲月留聲)이란 채널에서 《정인전》이 언급되었다. 즉 재방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였지만 그 전에 aTV가 망했다(...). 다행히 TVB가 판권을 사서 현재는 TVB Anywhere에서 VOD로 감상이 가능하다.
    • 《부생육겁(浮生六劫)》(1980)
    • 《소소심원(小小心願)》(1980)
    • 대내군영속집 (大內群英續集)》(1980)[23]
    • 《주해효웅(珠海梟雄》(1981)
    • 유협장삼풍(遊俠張三丰)》(1981)
    • 《대대호(對對糊》(1981)
    • 《첨첨24미(甜甜廿[24]四味》(1981)
    • 《도적고사 "사지성" (島的故事"砂之城")》(1981)
  • 홍콩 TVB 작품
    • 《여인33(女人33)(1983)
    • 《농본다정(儂本多情)》(1984)
    • 무림세가 (武林世家)》(1985)
    • 《일락파리(日落巴黎)》(1999)
    • 《좌우정연(左右緣)》(1999)

5.2. 영화

  • 《홍루춘상춘(紅樓春上春)》(1977)[25]
  • 《구교구골(狗咬狗骨)》(1978)[26]
  • 《갈채(喝采)》(1980)
  • 《실업생(失業生)》(1981)
  • 양과여소용녀(楊過與小龍女)》(1982)
  • 《충격21(衝激21)》(1982)
  • 열화청춘(烈火青春))》(1982)[27]
  • 《영몽가락(檸檬可樂)》(1982)[28]
  • 《고수(鼓手))》(1983)[29]
  • 《첫사랑(第一次)》(1983)
  • H2O)》(1984)
  • 연분(緣扮)》(1984)
  • 《성탄쾌락(聖誕快樂)》(1984)[30]
  • 《삼문치(三文治)》(1984)[31]
  • 위니종정(為你鍾情)》(1985)
  • 《용봉지다성(龍鳳智多星)》(1985)
  • 《구애반투성(求愛反斗星)》(1985)[32]
  • 영웅본색(英雄本色)》(1986)
  • 우연(遇緣)》(1986)
  • 영웅본색 2(英雄本色2)》(1987)
  • 천녀유혼(倩女幽魂)》(1987)
  • 연지구(胭脂扣)》(1988)[33]
  • 살지연(殺之戀)》(1988)
  • 신최가박당(新最佳拍檔)》(1989)
  • 천녀유혼 2 인간도(倩女幽魂II人間道)》(1990)
  • 아비정전 (阿飛正傳)》(1990)[34]
  • 종횡사해(縱橫四海)》(1991)[35]
  • 호문야연(豪門夜宴)》(1991)[36]
  • 가유희사(家有喜事)》(1992)[37]
  • 시티보이즈(藍江傳之反飛組風雲)》(1992)
  • 동성서취(東成西就)》(1993)
  • 백발마녀전 1, 2(白髮魔女傳)》(1993)[38]
  • 패왕별희(霸王別姬)》(1993)[39]
  • 화전희사(花田囍事)》(1993)[40]
  • 동사서독(東邪西毒)》(1994)
  • 금지옥엽(金枝玉葉)》(1994)
  • 야반가성(夜半歌聲)》(1994)
  • 《금수전정(錦繡前程)》(1994)
  • 《기득향초성숙시 2 - 초련정인(記得香蕉成熟時II初戀情人)》(1994)
  • 금옥만당(金玉滿堂)》(1995)
  • 금지옥엽 2(金枝玉葉 2)》(1996)
  • 《대삼원(大三元)》(1996)
  • 《신 상해탄(新上海灘)》[41]
  • 색정남녀(色情男女)》(1996)[42]
  • 풍월(風月)》(1996)[43]
  • 《가유희사(97家有囍事)》[44]
  • 춘광사설(春光乍洩)》(1997)[45]
  • 친니친니(安娜瑪德蓮娜)》(1998)[46]
  • 《구성보희(九星報喜)》(1998)
  • 《홍색연인(紅色戀人)》(1998)[47]
  • 《유성어(流星語)》(1999)[48]
  • 성월동화(星月童話)》(1999)
  •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Buenos Aires Zero Degree)》(2000)[49]
  • 《오키나와 랑데뷰(戀戰沖繩)》(2000)
  • 《스피드 4초(倉王)》(2000)
  • 이도공간(異度空間)》(2002): 장국영의 최후 유작. 이 영화 결말 부분에서, 장국영에게 원한을 가진 귀신은 장국영을 빌딩 옥상에서 투신하도록 몰아넣지만, 투신시도로 그친다. 그리고 상술(上述)했다시피, 장국영은 고층 건물에서 추락사하였다. 덕분에 이 영화가 장국영의 죽음의 원인이라는 괴담이 돈 적도 있다.
  • 《동사서독 리덕스》(東邪西毒 Redux): 왕가위 감독이 언급하기를, 자신의 영화에서 레슬리의 마지막이 '해피투게더'에서 보영이 아휘가 떠난 걸 마음 아파하며 이불을 뒤집어 쓰고 마구 울부짓는 모습이라는 게 너무 맘에 걸렸다고. 결국 1편 때 찍은 필름 보완 등의 2차 가공을 통하여 동사서독 리덕스를 제작하였다.

6. 수상내역

수상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1977년

제 2회 아시아 송 콘테스트

2위

American pie

1982년

제 30회 영화평론활동부문

남우조연상

실업생

1988~1989년

제이드 솔리드 골드 시상식

인기 남자배우

-

1991년

제 10회 홍콩금상장영화제

남우주연상

아비정전

1992년

제 30회 대만금마장영화제

주제가상

백발마녀전

1993년

중국영화 표연예술학회

특별공헌상

패왕별희

1994년

일본 영화 평론가협회 외국영화

남우주연상

패왕별희

1994년

제 1회 홍콩영화 평론가협회

남우주연상

동사서독

1995년

홍콩영화 비평가협회

최고배우상

동사서독

1995년

제 6회 홍콩 금상장 시상식

주제가상

금지옥엽

1999년

중문 금곡 반장 음악회

1위

-

1999년

제이드 솔리드 골드 시상식

인기 남자배우

-

2002년

연예동력대장

남우주연상

금침상

-

2003년

20세기 중국 10대 문화우상

선정

-

2005년

중국영화 100주년 기념 가장 사랑받은 남자배우

1위

-

7. 디스코그래피

국어앨범은 (國語), 영어앨범은 (英語) 표시이다. 정선집 (베스트 앨범)은 제외.

  • I Like Dreaming (英語, 1977)
  • Day Dreamin' (英語, 1978)
  • 情人箭 (1979)
  • 風繼續吹 (1983)
  • 一片痴 (1983)
  • Leslie (1984)
  • 為你鍾情 (1985)
  • Stand Up (1986)
  • 愛火 (1986)
  • 英雄本色當年情 (國語, 1986)
  • 愛慕 (國語 + 粤語, 1987)
  • Summer Romance (1987)
  • 拒絕再玩 (國語 + 粤語, 1987)
  • Virgin Snow (1988)
  • Hot Summer (1988)
  • Leslie 側面 (1989)
  • 兜風心情 (國語, 1989)
  • Salute (1989)
  • Final Encounter (1989)
  • 寵愛 (國語 + 粤語) (1995)
  • 紅 (1996)
  • 這些年來 (1998)
  • Printemps (國語, 1998)
  • 陪你倒數 (1999)
  • Untitled (2000)
  • 大熱 (2000)
  • Cross over (2002, 황요명과 공동 작업한 앨범이다.)

  1. [1] 1956년 이므로 정확히는 영국령 홍콩이다.
  2. [2] 술을 마시다가 반신마비가 되버렸다고 한다.
  3. [3] 언론이 자신을 건드리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가족과 친구 등을 건드리는 짓에 대해서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4. [4] 장국영의 가수 은퇴 발표와 함께 개봉된 영화이다.
  5. [5] 영화의 《풍월》주제가. 원곡도 있으나 요새는 검색창에 검색하면 장국영의 노래라고 나온다.
  6. [6] 진백강 역시 장국영 못지않게 여리여리한 미남이었으며 데뷔도 먼저 했다. 이후 장국영의 인기가 넘사벽이 되다 보니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그저 안습하다. 그러나 진백강은 10년 전인 1993년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35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7. [7] 이 장면에서 흐르는 피아노 곡은 '추'의 멜로디이다.
  8. [8] 실제로 이 소식을 들은 주윤발은 만우절 장난치곤 좀 그렇다며 웃어넘겼다가 진짜임을 알고 대성통곡했다.
  9. [9] 생전의 장국영은 당학덕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어려울 때 늘 도움을 준 전우라고만 말하며 자신의 동성 애인이라는 설을 꾸준하게 부인하였다.
  10. [10] 삼합회와의 연계를 의심하여 홍콩 배우들의 이민이 캐나다에서 거부되었다는 것은 이후 사실무근임이 드러났다.
  11. [11] 홍콩영화 항목에도 있지만, 히트한 홍콩영화의 아류작이 수없이 나온 배경에는 이러한 삼합회의 압박이 있었다.
  12. [12] 엘리베이터 CCTV에는 그의 모습이 찍히지 않았다.
  13. [13] 이 둘은 영혼의 파트너인지 행사 같은 데에 같이 참여하거나, 아니면 같이 참여하지 않거나 하는데 왜 그런건지?
  14. [14] 평상시처럼 행동하는 것은 스스로 자살 염려가 없어서가 아니고, 우울증을 이겨내고 살아 나갈 거라고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버티려 했다는 증거가 된다.
  15. [15] 장국영은 홍콩 정부의 지원으로 매염방과 함께 출연한 '연비연멸'이라는 금연 홍보 영화의 감독을 맡은 적이 있다.
  16. [16] 시나리오의 수준 낮음과 영화 배경으로 하려 했던 청도가 너무 많이 변했다는 부분
  17. [17] 마지막 황제, M.버터플라이 등의 출연작이 있다.
  18. [18] 장국영과는 《신상해탄》에서 같이 호흡을 맞추었으며, "장국영 감독의 영화라면 무급으로라도 무조건 출연하겠다."라고 인터뷰하였다.
  19. [19] 《람우》에서 인연을 맺은 관금붕 감독이 직접 장국영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람우》는 공교롭게도 '석설'이 제작지원한 영화이다.
  20. [20] '뚱땡이 언니'라는 애칭을 가졌던 홍콩의 국민 코미디언. 2008년 간암으로 별세하였고, 그녀의 유골함은 장국영과 나란히 놓였다.
  21. [21] 현재의 aTV.
  22. [22] 이래봬도 2006년에 리메이크하려다 aTV가 돈이 없어서 취소될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작품.
  23. [23] 소생(蘇生) 감독, 이혜민(李惠民) 연출. 《무협풍운》이란 부제로 출시되었다.
  24. [24] 스물 이.
  25. [25] 삼합회의 협박에 어쩔수 없이 찍은 영화. 그런데 그 뒤로는 삼합회 협박없이 영화 참여를 하게 된다. 대놓고 연기 못하는 척을 해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26. [26] 카메오
  27. [27] 제 2회 홍콩 금상장 남우주연상에 지명되었다.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28. [28] 《레몬콜라》
  29. [29] 《드러머》
  30. [30] 그 해 홍콩 흥행 1위. 여기서는 조연으로, 이려진과 커플로 나옴.
  31. [31] 《샌드위치》
  32. [32] 《구애대작전》
  33. [33] 우리나라에서 VHS 출시 때 한자 변환을 잘못해서인지, 《인지구》로 나왔다. 그러나, 홍콩영화를 무수히 소개하던 월간지 로드쇼조차도 1989년 소개 당시 인지구라고 소개했다.하지만 1998년 KBS 추석특선영화 방영시 에는 제목 그대로 《연지구》로 방영했다.
  34. [34] 장국영의 은퇴 발표와 함께 개봉된 영화이다.
  35. [35] 장국영이 은퇴 발표 직전 주윤발, 종초홍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출연한 작품이다. 영화 자체는 은퇴 후 개봉되었다.
  36. [36] 1959년에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홍콩 수제민을 돕기 위해서 제작되었다.
  37. [37] 장국영이 은퇴 번복 후 처음 출연한 영화로 촬영은 1991년에 이루어졌다.
  38. [38] 2편에서는 후반 10분에 출현
  39. [39] 영화사상 최초로 중국 본토에서 제작된 영화에(홍콩 영화와는 다르다) 홍콩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작품.
  40. [40] 가유희사의 연장선 작품. 천녀유혼을 패러디 하여 레슬리가 여장을 하고 나오는데 엄청 예쁘다(...).
  41. [41] TVB 드라마 《상해탄》의 리메이크작
  42. [42] 제목만 보고 야할 거라 생각하지 말자. '서기'의 가슴만 조금 노출되며, 영화 자체는 오히려 저예산 독립예술 작품의 느낌이다.
  43. [43] 첸 카이거, 공리와 2번째 협업한 작품. 영화 자체는 너무 어려운 탓에 흥행에는 실패했다. 칸 초청 받은걸로 위안을.
  44. [44] 막판 1분전에 나오는 카메오
  45. [45] 《해피투게더》
  46. [46] 특별출연
  47. [47] 당해 중국 대륙에서 흥행 5위권에 든 흥행작이나, 우리나라에선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순위권에는 《타이타닉》도 있었는데...
  48. [48] 1홍콩달러만 받고 촬영한 작품.
  49. [49] 《해피투게더》 메이킹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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