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장보고
張保皐[1]

생몰년도

785년 이전[2] ~ 841년 / 846년

직업

군인, 무역가

별칭

아명은 궁복(弓福)[3][4], 궁파(弓巴)[5]
현대 호칭은 해상왕(海上王)

직위

청해진 대사(淸海鎭 大使)[6]
감의군사(感義軍使)[7]
진해장군(鎭海將軍)[8]

종교

불교

옛 사람이 말하길 의로움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라 했습니다. 난 비록 평범하고 미천하지만 당신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古人有言 見義不爲 無勇. 吾雖庸劣 唯命是從.

신무왕의 부탁을 받은 해상왕의 답변. 이후 장보고는 조정에 강한 영향을 휘두른다.

해양 상업 제국의 무역 왕자[9]

The Trade Prince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

에드윈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하버드-옌징 연구소 소장.[10]

1. 개요
2. 일대기
2.1. 유년기
2.2. 신라 청년, 당나라 장교가 되다
2.3. 신라로 귀국, 청해진 대사가 되어 한중일 바다의 패권을 장악하다.
2.4. 장보고의 난과 비극적인 최후
3. 반란과 최후에 대한 의문
3.1. 왜 반란을 일으켰나?
3.2. 그는 언제 죽었는가
4. 사후 영향
5. 의도적인 부각?
6. 평가
7. 각종 매체
7.1. 드라마
7.2. 애니메이션
7.3. 소설
7.4. 게임
7.5. 다큐멘터리
8. 해외에 있는 장보고의 흔적
9. 기타

1. 개요

한국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호족[11]

통일신라군인, 호족. 어린 시절 당나라에서 벼슬을 했다가 본국인 신라로 돌아와 군인이 되었으며 훗날 청해진 대사가 되어 당시 한중일 사이의 바다를 지배하며 엄청난 부와 권력을 지녔던 인물이다. 그 힘은 실로 막강하여 비록 지방 호족이라고는 하나 중국일본, 신라 중앙의 왕실에까지 그 영향력이 미칠 정도였으며 실로 희대의 영웅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흔히 그를 수식하는 말로 해상왕(海上王)이라고 하곤 한다. 물론 이는 당시 신라인들이 아니라 현대 한국인들이 붙여 준 이름이지만 한때 동아시아 해상에서 그가 지녔던 영향력과 비추어도 과장이 아니다.

바다에서 크게 활동했고 국제적인 인물이었기에 현대 대한민국 해군에서도 상당히 좋아하고 밀어주는 위인. 해군에서는 '대사'라 칭한다.

여담으로 19세기 이전 사람으로 한정하고, 왕이나 왕족 또는 연개소문처럼 국가 정치 핵심이었던 사람을 제외한 한국인 중 유일하게 한중일 정사 역사서에 모두 등장하는 사람이다.

나중에 만들어진 거긴 하지만, 한국 완도에는 장보고 기념관이 존재하며, 중국 법화원에는 장보고 동상과 기념관이 있고, 일본 엔라쿠지에는 청해진대사 장보고 비석이 있다. 한중일 삼국 모두 기념하는 한국인은 한국 역사 이래, 장보고가 거의 유일하다.[12]

2. 일대기

2.1. 유년기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로[13]삼국사기》에서 그 출신을 알 수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가문은 5두품 이하로 한미했던 것으로 보인다.[14]

그의 출신에 대해 다양한 이설이 있는데, 기병이었기 때문에 당시 서남해안 지역 섬에 목장을 운영하던 신라 귀족의 생활과 연관시켜 목동 출신으로 보는 설이 있다. 특히 전쟁사 교양 서적을 여럿 낸 서영교는 아예 단정하듯이 썼는데 그렇게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증거가 있는 편은 아니다. 그 외에 친구 정연이 50리를 단번에 헤엄칠 수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바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꽤 높다.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본인이 청해진을 설치한 완도 출신일 가능성도 높은 게, 완도라는 지역 자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고향인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다는 것이 개연성이 상당한데다 중국에서 기아에 허덕이던 정연이 '고향에서 죽는 게 낫다'고 하면서 청해진의 장보고를 찾아왔던 사연, 그리고 이후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려 할 때 대신들이 장보고가 해도인, 즉 육지가 아닌 사람임을 지적했던 점을 미루어봤을 때 그렇다.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 반도장보고의 고향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청해진이 있었던 지금의 완도군 장도는 장군도(將軍島) 또는 조음도라고도 불렸는데, 장좌교 서북쪽 100 m의 장좌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왼쪽의 동백나무숲 언덕에 여섯 기의 무덤이 있고 그 중 목 없는 시신이 묻힌 1기가 장보고의 것이고 나머지는 그의 양친과 근친 선대의 것이라는 전승이 있으며, 장보고는 반농반어로 먹고 살던 그의 아버지를 따라 이곳 장도 바깥의 바다에서 고기 잡이와 노젓기, 수영을 배우고 활과 창으로 무술을 연마하였다는 민간 전설도 전하고 있다.

2.2. 신라 청년, 당나라 장교가 되다

신라인 장보고와 정년이라는 자는 자기 나라에서 서주(徐州)로 와서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장보고의 나이는 서른 살이고 정년의 나이는 열 살이 젊어, 장보고를 형이라고 불렀다. 모두 싸움을 잘하였고,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나라와 서주에서 능히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정년은 또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걸어가면서 물을 내뿜지 아니하였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기예(技藝)로서 항상 맞서 서로 지지 않았다.

《번천문집》[15] 권6, 장보고⋅정년전

일찍 동료이자 의형제인 정년과 함께 당으로 건너가서 군에 들어갔다고 한다.[16]

당시 당나라에는 신라방이라는 일종의 코리아타운이 형성돼 있었고, 당은 번장이라 해서 이민족 출신을 무장으로 기용하기도 하는 등 이민족의 등용에 대해 개방적인 국가였다.[17][18]

중국에서 친구 정연과 함께 당나라 군대에 입대한 장보고는 말 타고 창 쓰는 데에 탁월한 실력을 보이고 곧 서주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少將)[19]으로 출세한다. 무령군은 산동 반도에 웅거한 고구려 유민 출신 절도사 이사도[20]를 정벌하려고 만든 부대였는데, 장보고는 무령군 소장 신분으로 평로치청번진 진압에 참전했다고 한다.

모종의 일로 당나라 군인을 그만두고 신라로 돌아왔다. 장보고가 귀국을 선택한 이유로 몇 가지 추측이 있다. 장보고가 당에서 귀국해 흥덕왕을 만나 '신라인이 당에서 해적들에게 잡혀 노비로 매매되고 있었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淸海鎭)의 이름[21]을 감안하면, '같은 신라인들이 노비로 팔려가는데 차마 나만 혼자 호의호식할 수 없어서'가 1차적인 이유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22] 함께 당에 갔던 친구 정연은 당군에 남았는데 훗날 정연이 당의 군축 조치로 실직해 끼니조차 잇기 어려울 정도로 몰락하고 나서 장보고에게 의지하기를 망설였다는 기록을 보면, 장보고가 무관을 그만둔 일이 정연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정확히 사정은 알 수 없다.[23]

이 시기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 부족해 자세한 행적은 알기 힘드나 후술할 엔닌의 기록을 볼 때 신라방 신라인 사회를 이용해 상업에 뛰어들어 국제 무역업에 종사했고 중국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 해안 지역은 앞서 나온 이사도와 같은 번진들의 발호로 당나라 조정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고, 덕분에 신라인들까지 잡아다 노예로 팔아먹는 해적이 들끓고 있었다. 기록대로 단순히 이들이 동족인 신라인을 노비로 팔아넘기는 것을 볼 수 없어서라는 도의적인 이유가 아니어도 장보고로써는 이들 해적 때문에 바다를 통해 오가던 해상 교역까지 위협을 받게 되면 장사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상인으로써의 실제적인 계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장보고는 귀국했다. 805년 전후에 당나라로 넘어가 828년에 귀국했으니 20년 ~ 30년 만이었다.

2.3. 신라로 귀국, 청해진 대사가 되어 한중일 바다의 패권을 장악하다.

828년 여름 4월,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인데【일명 보고(保臯)라고도 한다.】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후에 귀국하여 임금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진(淸海鎭)【청해는 지금의 완도(莞島)이다.】을 지키게 되었다.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 흥덕왕

신라로 귀환한 장보고는 곧바로 흥덕왕에게 "중국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자꾸 잡아가 노비로 삼으니 저에게 군사 1만을 주시면 제가 중국 해적들을 막겠다." 하니, 흥덕왕은 즉석에서 허락하고 대사(大使)라는 특별 관직까지 제수해주었다. 이에 장보고는 한반도 서남부 앞바다, 지금의 완도의 장좌리, 죽청리, 대야리, 그리고 부속섬 장도에 청해진을 건설, 이를 기점으로 서남해안의 상권을 장악했다. 장보고가 귀국하기 6년 전인 822년에 신라에서는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던 대사건 김헌창의 난이 있었는데, 비록 이 시기의 신라는 후삼국시대 때와 달리 전국적인 반란을 제압할 만큼의 능력은 있었지만 왕권과 지방 통제력의 약화로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828년) 통일신라 형편상 1만의 군사를 주기는 어려워 보인다.[24] 따라서 1만의 군사라는 것은 신라 정부의 일부 군사들과 추가로 장보고의 사병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사병이 맞다면 장보고는 서양의 사략선처럼 진짜로 정부의 허가만 받았지 제멋대로 해적질을 한 셈이다. 물론 해적을 때려잡긴 했지만 불법 군사 조직. 이후 장보고의 행보를 보면 정말 해상 마피아가 따로 없다.

그러나 1만 병력이 원래 사병이라는건 학계의 통설이 아닌데, 이 병력이 사병이라고 기록한 역사적 기록은 없다. 사료상의 기록은 장보고가 정식으로 신라왕(흥덕왕)을 찾아가서 병력을 받아냈다는 것 뿐으로[25] 사병이란건 그냥 후대 사람들의 가정일 뿐이다. 사병을 먹이고, 입히는데는 엄청난 재원이 필요한데, 이때 신라는 후삼국시대처럼 막장으로 떨어지진 않았다. 세금 받아 재원을 마련하는 국가인 신라가 형편상 1만 군사를 내주기 어려웠다면 대체 일개 개인인 장보고가 무슨 수로 사병을 1만이나 거느렸다는 말인가? 서남해를 지배했다는 수달(능창)이 동원한 사병이 겨우 500명, 일본을 뒤집어놓은 현춘신라구 해적함대가 2500명,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병집단인 이성계의 가별초가 1천~2천 명에 불과했다.[26] 그나마 이성계는 동북면(함경도)을 영주나 다름없이 지배했기 때문에 이 정도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사병도 아닌 후고구려군의 나주 공략시 병력이 2500명, 후백제군의 나주 탈환전(910년)시 병력이 3천 명이다.[27] 그런데 아직 청해진을 설치하기도 전에 사병이 1만이라면 장보고가 왕이나 다름없는 대호족 출신이란 말인데, 삼국사기에 고향과 아버지, 조상에 대해 알 수 없다고 기록한건 이상하지 않은가?[28] 오히려 삼국유사(권2 기이편 신무대왕 염장 궁파조)에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것에 대해 신하들이 미천한 신분이라며 반대했다는 기록만 있다. 현재 학계의 입장은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 교역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여 이 병력이 점차 사병집단화 되었다는 점은 통설로 인정하는데, 처음부터 사병 조직이었는지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아무튼 해로 안전 확보를 위해 원래 보고한 목적인 해적 소탕에도 열을 올려 삼국사기에서는 장보고의 활약으로 신라인 노예 매매가 거의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고, 청해진은 사실상 당대 최고의 해상 무력 집단으로 발전했다. 838년 당시 일본 최고의 승려로 꼽히던 엔닌(圓仁)[29]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는 일본인이 신라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 가는데도 신라어 통역 김정남(金正南), 박정장(朴正長) 등을 고용해 배마다 배치해 동행시킬 정도로 신라의 영향력이 커져있었다. 이 시기 중국 해안가도 대부분 신라인 커뮤니티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엔닌은 당나라 활동 중 무사히 일정을 마칠 수 있도록 장보고에게 보호를 부탁했다.

장보고는 산둥 반도에는 적산법화원이라는 절을 세워 신라, 일본 등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이 적산법화원은 장영 등 신라인들이 운영했고 정기적으로 강경법회를 열어 재당 신라인의 결집을 담당했다고 한다. 현대 코리아타운한인교회와 비슷한 역할인 셈. 적산법화원은 당무종 시대의 대대적인 불교 탄압 때 훼철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복원되어 중국에 있다. 한편 장보고는 청해진과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에도 법화원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어떤 불교의식이 거행되었는지는 기록이 자세하지 못해 알 수 없지만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면 관세음보살 신앙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방 사회 구성원은 거의 바다와 관계가 깊은 직업이었고, 당시 바닷사람과 관세음보살 신앙의 관계는 삼국유사 민장사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상술한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30]라는 여행기에 장보고의 도움을 기록했다. 덕분에 장보고의 활을 든 영정이 지금도 일본 교토 히에이 산 적산선원에 있다. 행적과 명성이 한중일을 넘나들어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매우 국제적인 인물이었던 셈.

장보고는 교관선을 당나라에 수시로 파견했고, 당나라 동해안의 신라방 사회를 원격 통제하고 이를 활용해 막대한 무역 수익을 올렸다. 엔닌의 일기에 의하면 839년 6월 27일에 장보고가 보낸 두 척의 교관선이 적산포에 도착했는데, 청해진 병마사라는 직함을 가진 최훈십이랑이란 인물이 매물사[31]로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훈의 일정은 적산법화원[32]에 들러 장보고를 대리해 이를 관리하던 장영 등을 위로하고, 7개월 반 동안 중국 동해안의 주요 항구 유산포, 해주, 초주, 양주 등을 들러 무역 활동을 한 뒤 다시 적산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적산포는 장보고 무역선의 중국 측 주요 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는 동쪽의 일본에도 회역사라는 무역 선단을 주기적으로 파견했는데, 회역사는 어디까지나 장보고가 사적으로 보낸 무역 선단에 불과했지만 그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 공식 사신단을 방불케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의 공식 대외 교역 창구 역할을 하던 규슈다자이후[33]는 회역사를 받지 말고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4. 장보고의 난과 비극적인 최후

서울에서 사자(使者)가 이르렀는데, 대신(大臣)이 그 왕을 시해(弑害)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며 왕이 없다 하였다. 장보고는 드디어 군사 5천을 나누어 정년에게 주며, 정년을 잡고 울며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환란을 평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정년은 국도(國都)에 들어가 반란자를 베고, 왕을 세우고 보답하였다. 왕은 드디어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으로 장보고를 대신케 하였다.

《번천문집》 권6, 장보고⋅정년전


4월 20일

이른 아침에 신라인이 작은 배를 타고 왔다. 문득 듣건대 “장보고(張寶高)가 신라 왕자와 합심하여 신라국을 징벌하고 곧 그 왕자를 신라국의 왕자로 삼았다." 하였다. 남풍이 다소 세차게 불고 역류하는 조수의 물결이 거셌기 때문에 한 곳에 가만히 머물 수가 없었다. 동서로 왔다 갔다 하여 요동이 매우 심했다.

《입당구법순례행기》 개성사년(839년)

이렇게 청해진이라는 신라 중앙과 유리된 특수한 환경에 막대한 수익을 바탕으로 장보고는 급기야 신라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838년 2월 중앙 정계의 왕위 다툼 끝에 밀려나 별 수 없이 청해진으로 피난 온 김우징을 돕기로 약속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삼국사기 및 신당서에는 바로 이 즈음에 정년이 당에서 귀국해서 장보고를 찾아온 것을 장보고가 환대하면서 잔치를 열고 있는 중에 서라벌에서 반란[34]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장보고는 '네가 아니면 이 반란을 진압할 사람이 없다.'며 정년에게 5천 군사를 내주어[35]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고 한다. 3월에 지금의 남원시까지 쳐들어갔다가 잠시 소강상태를 거치고, 이후 838년 12월 다시 출정해 달벌(대구광역시)에서 이찬 김흔, 대흔, 대아찬 윤린, 억훈 등이 지휘하는 신라 정부군 10만을 상대로 한 달벌대전에서 크게 승리해 병력의 절반 이상을 괴멸시켰고, 이 소식을 듣고 별궁으로 도망친 민애왕을 찾아내 시해하고는 우징을 왕으로 옹립시켰다.

그렇게 옹립된 신무왕 김우징이 1년도 못돼 승하하면서 그의 아들인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 기간 동안에 장보고는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하사받고, 진해 장군에 임명되는 등 신라 조정으로부터 나름의 포상을 받기는 했지만,[36] 자신의 딸을 왕의 아내로 들이겠다고 했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이미 신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자신을 도와주면 장보고에게 사돈 결의를 사전에 약속했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있다. 그런데 그 신무왕이 금방 죽어버렸으니 장보고는 후임인 문성왕에게 약속 이행을 요구한 것이다.

8년(서기 846년) 봄, 청해(淸海)의 궁복이 그의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에 근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그를 토벌한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후환이 있을 것이 염려스럽고, 그를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근심하였다.

《삼국사기》 제11권 신라 본기 제11 문성왕


이 무렵 궁파는 청해진(淸海鎭)에 있으면서 군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모의하려 하였다. 이때 장군 염장(閻長)이 이 말을 듣고 아뢰기를, “궁파가 장차 충성스럽지 않은 일을 하려 하니 소신이 청하건대 그를 없애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삼국유사》 기이 신무대왕(神武大王) 염장(閻長) 궁파(弓巴)

원래 문성왕도 아버지의 약속을 이어 장보고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결혼을 하려 했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단념하고 말았다. 이후의 상황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미묘하게 다른데, 삼국사기상으로는 이 소식을 들은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고, 삼국유사상으로는 원망하여 반란을 모의하려고 했다고 한다. 즉 삼국유사의 장보고는 반란을 실제로 행동으로 일으키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가 세력을 일으키기 전에 신라 조정은 염장을 장보고에 보냈고, 염장은 장보고에게 가서 '제가 왕에게 원망이 있는데 당신에게 의지해 살려고 도망쳐 왔다.'고 전하게 했다. 장보고는 처음에는 '너희들 때문에 내 딸이 왕비가 못 됐는데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나를 찾아와?' 하며 받지 않으려 했지만 염장은 '그건 백관들이 간언한 거지 저하고는 아무 상관 없거든요?'라며 기어이 청해진에 들어가 장보고를 대면할 수 있었다. 장보고는 평소 협객을 아꼈던 탓에 염장을 협객이라며 반겼지만, 그날 염장을 환영하기 위해서 열었던 연회에서 장보고가 잔뜩 술에 취한 사이 염장이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취한 장보고를 찔러 죽였다고 한다.[37]

장보고의 최후와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는 일본 측 기록인 속일본후기 제11권 닌묘 덴노(仁明天皇)조에서도 어느 정도 전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장보고가 죽고 장보고의 부장 이창진(李昌珍)등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자 염장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살짝 다른데,[38] 상황을 보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장보고 암살 사건 직후의 상황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고, 살짝 와전된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그리고 장보고가 죽은 후 장보고의 신하와 세력은 염장이 대신 차지하려 한 듯 하다. 속일본후기의 해당 기록에서도 장보고의 부하가 일본에 가지고 간 물건들을 회수하려고 하는 상황을 다룬 기사다.

3. 반란과 최후에 대한 의문

3.1. 왜 반란을 일으켰나?

일단 장보고가 실제로 반란을 일으켰는지도 이를 다룬 기록마다 약간씩 말이 틀려 애매한 편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진골 귀족들이 보낸 염장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나와있지만, 삼국유사에서는 반란을 모의하는 낌새가 있어 염장과 신라 조정에서 미리 선수를 쳐 암살했고, 일본 기록상으로는 장보고가 죽은 뒤에 장보고의 부하 이창진(李昌珍)이 청해진에서 반항했고 염장이 이를 토벌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반란을 일으켰다고 쳐도, 반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권력욕이 강해져서'라는 주장도 은근 많이 나오긴 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을 따른다면 장보고로써는 자신이 응당 받아야 할 정당한 약속 이행을 요구했을 뿐이고, 그것을 신라 조정이 묵살했을 뿐이다. 심지어 귀족 대신들은 장보고를 '천하디 천한 바다 섬 사람'이라고 매도하면서 그의 딸이 왕비감으로 적절하지 못하다고[39]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장보고의 반역 시기가 지나치게 별안간이라는 점을 통해 장보고는 기득권을 빼앗길 것이라는 불안에 휩싸인 진골 귀족들에 의해 살해당한 이후 반란군의 수장으로 매도되었다는 가설도 있다. 엄청난 세력을 가졌던 그가 어떠한 실제적인 반역 행위를 행동으로 보이기도 전에 염장에게 어이없는 죽임을 당했다는 점이 너무나도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시기는 문성왕의 혼인 시기와도 상당히 떨어져 있다(문성왕 혼인 시기 4년 후에 난이 일어난다).

3.2. 그는 언제 죽었는가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본측 기록이 각자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기록을 참고한 삼국사기에는 846년(문성왕 8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에는 841년 11월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4년 앞당겨져 있다. 신라쪽 기록을 참고한 삼국사기의 정확도가 높다고 볼수도 있지만, 장보고와 관련된 당대 기록인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기록을 참고하면 일본쪽 기록이 신뢰도가 높다고 볼수도 있다는 점이 골치 아픈 부분.

845년 7월 9일, 엔닌은 중국에서 청해진 병마사 최훈과 만났는데 이때 최훈[40] 이 중국으로 건너온 이유가 "신라의 국난을 피해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직접 최훈과 만나서 그에게 들은 이야기이니 청해진 병마사가 나라를 피해 도망쳐 나올 정도로 큰 변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청해진 병마사가 도주할 정도의 사안이라면. 841년에 청해진의 난이 벌어져 장보고가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41]

현에 도착하여 먼저 신라방으로 들어갔다. 신라방 사람들을 만나보았으나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총관 등에게 머물 수 있도록 보증해 줄 것을 간곡히 구하였으나 매사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최훈십이랑(崔暈十二郞)을 만났다. 그는 일찍이 청해진병마사(淸海鎭兵馬使)로 있었는데 등주의 적산원에 머물고 있을 때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이름을 적어 남기고 약속하여 말하기를 “스님께서 불법을 구하여 귀국하실 때 반드시 이 이름을 적은 명함을 가지고 연수(漣水)에 도착하시면 제가 백방으로 힘을 써서 함께 일본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서로 약속을 한 뒤 그 사람 또한 신라로 돌아갔는데, 국난(國難)을 만나 도망하여 연수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금 만나보니 바로 알아보았고 그 정분도 소원하지 않았다.

《입당구법순례행기》권4, 회창(會昌) 5년 7월 9일조.

4. 사후 영향

장보고의 근거지인 청해진은 장보고 사후에도 바로 없어지진 않았다...라기보단 이후 상황을 보면 못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 없어지진 않았더라도 장보고 암살 당시 상당히 혼란에 빠졌던 것은 일본 측 기록 속일본후기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기 어려계(於呂系) 등 여러 사람이 일본에 귀화하면서 '우리는 장보고가 다스리던 섬의 백성입니다. 장보고가 작년에 죽었으므로 평안하게 살 수 없어 당신 나라에 온 것입니다'라고 증언했으며, 그 외에 장보고가 죽은 뒤에도 자손들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42]

13년(서기 851년) 봄 2월, 청해진(淸海鎭)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제11권 신라 본기 제11 문성왕

851년에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완전히 일소해버렸으며 청해진에 살던 주민들은 현재의 전라북도 김제시인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한다.

청해진은 사라졌지만 장보고가 남긴 영향은 그대로 남았다. 학계에서는 장보고와 청해진이 후대 한국사에 남긴 영향으로 선종의 국내 확산과 중국 도자기 기술의 도입을 들고 있다. 우선 장보고가 교역했던 중국 저장 성 월주(越州) 지역의 자기인 월주요(越州窯)가 신라 시대 국내에서 제작된 흔적인 가마 터가 청해진의 세력권으로 추정되는 전남 서남해 강진, 해남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이곳에서 월주요 가마 터가 발견된 것에 대해 당시 중국 월주요의 제작 기술을 신라 국내에 도입해서 그것을 자체생산해 다시 수출하는 시스템을 구상한 것이 장보고였다는 설명이 따른다. 이때 국내에 도입된 월주요 기술이 훗날 고려청자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

또 장보고의 시대 이후에도 서남해 지역은 당으로 가는 승려들의 출발지이자 도착 지점이었는데, 서남해 지역에서 선종이 유행하게 된 것도 당시 장보고가 해적들의 출몰을 막고 선종 승려들이 당으로 유학하러 가는 항로를 보호함으로써 선종 사상의 자유로운 전파와 세력 확장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훗날 신라 말기에 일어난 호족들이 대부분 선종 승려들로부터 사상적인 배경을 얻었고 끝내는 호족 정권에 의해 신라가 무너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장보고는 후대의 한국 역사의 흐름에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 공헌한 셈이다.

5. 의도적인 부각?

장보고가 현대에 들어 부각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며 여기엔 두 가지 설이 있다.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삼성그룹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의도적으로 장보고를 띄웠다는 설을 제기했다. 애초에 집권 민주공화당의 정치 자금을 대기 위해 중앙 정보부와 손잡고 했던 밀수가 정권에 의해 뒤통수를 맞자 해상 무역과 비운의 기업인 이미지가 있는 장보고를 주목하여 장보고 기념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43] 즉 장보고는 삼성이 의도적으로 거물로 포장시킨 인물이라는 것. 반면 중앙일보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지지를 받아 부각되었다는 설을 제기하면서 대표적인 예로 소설 - 드라마 해신을 들었다.

즉, 장보고의 행적이 다음과 같이 김대중 대통령과 겹친다는 것이다.

  • 전라남도 완도 일대에 청해진을 세웠는데, 이는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인 신안군과 가깝다.
  • 해상 무역을 통해 경제적 부를 일구어 냈는데, 경제 대통령 이미지를 앞세운 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해양 수산부를 많이 밀어주었다.[44]
  • 신라 중앙 정치의 탄압을 받은 장보고는 빨갱이로 몰렸던 김대중과 겹친다.

강준만의 가설에 따른다면 삼성은 2~3을, 중앙일보의 가설에 따른다면 김대중 정부는 1~3번을 주목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드라마 해신은 2004년 노무현 정부 시기에 방영되었고, 당시 해군 출신인 윤광웅 국방 장관이 전군에 시청하도록 했으니 김대중 정부가 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게다가 원작 소설을 집필한 최인호는 정치적으로 한나라당에 우호적인 작가로 특별히 김대중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항간에는 우스갯소리로 장세동과 장보고의 행보가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단 같은 장씨를 쓴다. 고향도 인근이고 쿠데타에 기여했으나 정권이 바뀌자 토사구팽당했다. 하지만 전두환이 8년이면 신무왕은 불과 1년이며 장세동이 죽지도 않았다(....) 1980년대 띄워진건 삼별초지 장보고가 아니다.

이미 1980년대, 1990년대에도 '장보고'는 위인전과 국사 교과서의 중요부를 당당히 차지하였으며, 2000년대는 불멸의 이순신 외에도 후삼국시대 시절의 왕건, 견훤, 궁예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 고구려의 연개소문, 주몽 등 그동안 사극에서 잘 다루지 않던 비(非) 조선 시대 인물들을 방송국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하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유명한 이런 사람들을 다 다룬 다음에 드라마 '해신'이 나왔다.) 더구나 '장엄한 사극'을 원하는 방송사들에게 대륙과 바다와 신분을 실제로 넘나들었던 '장보고'는 스케일이나 인생 편력에서 구미가 당기는 소재. 시청률이 딸려서 그렇지.. 실제로 드라마가 나온 순서는 태조 왕건, 해신, 불멸의 이순신,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순이다. 해신이 앞서 나왔다.

6. 평가

장보고는 이미 당대에부터 나름 영웅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당나라의 시인 두목은 자신의 문집 《번천문집》 중에서 따로 장보고와 정연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신당서》 편찬자 중 한 명인 송기 역시 당나라에는 곽자의와 장보고가 있었다는 식으로 자타공인 중국의 충신이자 명장인 곽자의와 비교하면서 높이 평가했다. 거기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 김유신을 평하는 과정에서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용기도 드높고 뛰어나지만 기록의 부족으로 중국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김유신은 그렇지 않았다'는 식으로 기록을 했으며, # 장보고 열전은 일종의 '반역자 열전'인 열전 9권이 아니라 '명장 열전'인 열전 4권에 실었다. 즉 장보고는 현대에 띄워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아주 훌륭한 영웅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45]

더욱이 장보고가 충신으로 발돋음 할수 있던 것은 고려 왕조가 아닌 실은 조선 왕조다. 고려 왕조는 장보고를 상당한 무골이자 삼각 무역을 주도한 인물로 추켜세우며 열전으로 올려도 충신으로까진 평가하지 않았다. 반면 조선의 동국사략과 동국통감의 기록에서는 장보고가 반란을 진압하고 해적들을 소탕한 충신이라고 추어지고 있다. (신무왕의 재평가도 동국사략과 동국통감에서 두드러지는데, 이미 신라 하대기 최고의 성군으로 꼽았다.) 이것은 신무왕을 반역자라고 했던 삼국사기의 평이 결정타인데, 고려 왕조의 경우는 실은 청해진보단 혈구진 문제가 컸다. 혈구진을 설치한게 문성왕과 김양이기 때문이다. 정작 조선 왕조의 경우는 혈구진이 있는 강화 지역이 아닌 전라도 전주를 발상지로 삼아 일어난 나라이기 때문에 결국 기존의 기록을 수정했다.

조선의 실학자이자 국학자였던 안정복동국통감에 실린 최보의 사론을 빌어, 저서 동사강목에서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확실한 증거가 나온 것도 아닌 데다, '도와주면 딸을 왕비로 맞겠다.'고 약속해놓고 입 싹 닦았으니 당연히 열받지 않겠냐.는 식으로 주장했다. 신무왕을 즉위시키는 데 일조한 공신인 만큼 죄를 지었어도 공을 감안하면 죽일 것까지는 없었는데, 함부로 죽였다고 장보고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신무왕을 즉위시키는데 일조했던 김양이 장보고가 죽을 때 한 마디 변호하는 말도 해 주지 않았다며 장보고가 자기와 세력이나 공적이 대등한 것을 내심 꺼려서 그런 것 아니냐고, 어떻게 해석하면 장보고의 죽음에 김양이 배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46]

물론 현재까지는 그 직접적인 배후가 염장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다만 서로 이해 관계가 일치하지 않았던 서남계 호족이자 지방 세력가인 염장과 그 부하들과 경주 귀족인 김양과 그 귀족들이 모종의 결탁으로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47] 염장은 청해진을 장악하기 위해서였고, 김양은 골품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신무왕도 김양이 죽였다는 주장이 있으니...

동국통감의 시각을 이어받아 신라를 대표할 대표적인 인물이자 최후의 인물로 장보고와 신무왕을 부각시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고려 왕조의 시각대로 장보고를 신라 안정의 위협으로 보는 시각도 꽤 있는 편이다. 대체로 고려 왕조의 경우는 전 왕조의 인물들에 대해서 전 왕조와 차별화를 위해 크게 높은 평을 하지 않고 조선의 경우는 고려와 비교하면 고려 이전 왕조에 대해 나름 자유로운 평을 할수 있기에 그런 평을 내렸던 것이다.

동북공정으로 장보고를 중국인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선 엄연히 신라인으로 표현하는데[48] 실제로 중국은 장보고에 대한 사업을 활발히 하고 한국인 관광객들을 모으기 위해 장보고와 관련된 사업을 했는데, 이는 장보고가 당나라에 활약을 생각만큼 많이 했기에 그렇지 삼국사기와 동국통감 모두 신라인이자 신라의 충신으로 기록한다. 고로 이는 중국 측 억지이다. 이는 본시 장보고가 본관이 없고 본래 이름은 궁복이라는 점이 이런 빌미를 제공했다.

환빠 류의 고구려 정통론자들은 본시 장보고가 백제인계였다가 이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자 고구려계 출신인 이사도의 거사를 망친 통일 신라 이후 김춘추 급의 친당파라고 깐다(....) 사실 이것도 웃긴 게, 이사도는 본시 그 가문들도 당에 꽤 협력했었다는 것과 그 관계가 틀어저 반란을 일으킨 것이고, 또한 장보고가 반란을 진압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서도 별다른 큰 기록이 없다. 장보고가 진압을 해도 선봉장 정도는 아니였던 것이다. 또한 오히려 이것이 사실일 경우 장보고와 신라가 당나라도 못하는 일을 대신 한 셈이 되고, 고구려계 후예인 이사도와 이사도 가문의 뒷배를 발해가 봐줬기 때문에 당시 신라가 발해보다 우위라는 설이 확립된다.(...)

기록에서 보듯이 장보고는 흥덕왕이 유일하게 크게신뢰했던 신하중 하나인데 아무리 당나라에서 벼슬을 했다고 하지만 장보고는 자신이 벼슬을 할수없는 신라사회에서 비주류중의 비주류인 인물인데 흥덕왕은 장보고의 기개가 마음에 들었는지 청해는 원래 무주도독의 관할인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청해진대사라는 벼슬을 내려 청해를 장보고의 관할로 이전시키고 군사1만 까지 주어 장보고를 등용했다. 이러한 관계를 드라마 해신에서는 이렇게 각색했는데 흥덕왕이 죽기전 왕실의 옥새를 장보고에게 맡기는데 흥덕왕은 이렇게 말하는데 장대사 그대는 여기 이썩은 황도의 관리들과 달리 짐에게 충심을 다하고 진심을 다해 보필하던 신하이다 짐은 장대사를 가까이 두고 싶었지만 짐이 힘이약해 그러하지 못했고 짐이 이제 유일하게 믿을수있는 신하는 장대사 뿐이니 짐의 유언을 장대사가 지켜주었으면 한다는 유언을 남겼을정도

이러한 행적때문인지 대조영이 남북국시대 초반의 주인공이라면 장보고는 남북국시대 후반부의 주인공이라 할만하다

7. 각종 매체

7.1. 드라마

  • 드라마해신》은 장보고를 주인공을 내세운 최초의 역사 드라마로, 그중의 장보고는 최수종이 연기했다. 기존 최수종 스타일의 주인공을 그대로 끌어왔으며, 장신이었다는 장보고에 비해 최수종 본인은 보통 키 정도이기 때문에 다소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최수종, 수애, 송일국 등을 비롯한 연기자들의 열연으로 괜찮은 시청률을 거두는데 성공하였다.
  • 어린이 역사 드라마 점프에서는 이 인물을 지울려다가 저지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때의 장보고 역은 주상욱이 맡았다.
  •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한두 세대 앞 시대의 인물이므로 대사로 언급되는 정도이지만,[49] 왕건이 장보고의 청해진 시절에 구축된 인맥을 통해 견훤의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나주 호족 오다련과 종례를 설득하여 나주 지역을 점령한다. 재미있게도 태조 왕건의 왕건과 해신의 장보고는 모두 최수종이 연기했다.

7.2. 애니메이션

  • 애니메이션 《초롱이의 옛날여행》 (1993)중에서도 6화에서는 장보고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위인전 애니메이션다운 무난한 내용이다.
  • 애니메이션 《청해진 호랑이 : 해상왕 장보고》(1997)는 70분 정도 분량의 TV용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장보고의 생애를 다루었다. 90년대 후반, 한국 애니메이션 전성기의 끝말에 범람했던 그저 그런 퀄리티의 위인전기 애니메이션 중 하나. 작중에 등장하는 장보고는 머리에 짐승가죽을 두르고 다닌다.
  • 애니메이션 《모험왕 장보고》(2001)는 TV용 애니메이션으로, 본래 장편으로 제작되었으나 TV에서는 에피소드를 쪼개어 방영하였다. 현재는 1년 정도 후에 나온 《바다의 전설 장보고》에 밀려서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장보고의 일생을 다룬 전기물으로,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였기에 캐릭터들은 전부 2등신이며 분위기는 가볍고 코믹한 편이다.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나레이션도 깔려있는 등 교육적인 성격이 강하다.

7.3. 소설

  • 오세영의 소설 《만파식적》에서는 조연으로 등장, 민애왕 시기를 배경이로 역사대로 반정을 돕지만, 김우징 측을 신뢰하지 않아서 사로잡힌 주인공을 풀어주면서[51] 보내어 민애왕을 빼돌려 청해진에서 보호하여 보험으로 삼으려 하지만, 주인공이 장보고의 부하들에게 민애왕을 넘기고 안심하고 돌아선 사이 다른 자객이 민애왕을 죽여서 실패한다.

7.4. 게임

  • 국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장보고전》에서는 청해진군의 영웅(수비장 스킨)으로 등장한다. 스토리 자체가 가상 스토리라서 시대 배경과 청해진의 수장이라는 점 말고는 이름만 따 온 수준.
  • 국산 전략 시물레이션 게임인 《해상왕 장보고》에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워크래프트 3의 아류에 가까운 행사흥보용 게임이었기에 별다른 반향은 이끌어내지 못하고 뭍혔다.

7.5. 다큐멘터리

8. 해외에 있는 장보고의 흔적

  •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에는 장보고가 활동한 재당 신라인의 중심이던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 있다. 웨이하이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당나라 당시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고 당무종 시대 대대적인 불교 탄압 때 파괴되었다가 현대에 복원된 곳이다.
  • 일본 교토 적산선원(赤山禅院, 세키잔젠인)에 활을 든 장보고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교토 중심부에서 동북쪽으로 떨어진 사쿄 구에 있는데, 교토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인 슈가쿠인리큐(修学院離宮) 바로 근처에 있다.
  • 일본 교토 시가현 히에이 산에는 엔랴쿠지(延曆寺. 연력사) 에는 청해진대사 장보고 비석이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2002년에 완도군에서 만들어 기증한 것. 엔랴쿠지는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이자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몽땅 불에 타 버린 적이 있어서, 한국의 불국사 급으로 일본에선 유명하다. 모르면 학교 다니면서 잠만 잤다 라고 인증하는 수준.
  • 교토 바로 옆인 일본 시가현 오츠시에는 신라명신(新羅明神, 신라묘진)을 모시고 있는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이 있다. 장보고에게 당나라 여행 중 많은 도움을 받았던 승려 엔닌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신라 남해안을 지나던 중 바람이 불지 않아[52] 위기에 빠졌던 엔닌 일행이 현지 토지신에 빌자 곧 서풍이 불었고, 이 신라 신을 일본에 돌아온 뒤 모신 것이다. 이곳에서 모시는 일본의 국보 목조 신라명신좌상[53]은 엔닌에게 큰 도움을 줬던 장보고의 실제 모습을 본딴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사실이라면 당대의 초상이 남아있는 셈이다.
    • 일본 헤이안 시대의 인물 신라사부로 미나모토노 요시미츠(新羅三郎源義光, 신라삼랑원의광)와 그의 후손인 전국시대 다이묘다케다 신겐 가문이 신라와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2003년 KBS 역사스페셜 장보고 특집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요시미츠가 신라사부로라는 이름을 쓴 것은 오미 신라묘진(신라명신) 앞에서 성인식을 치뤘기 때문에 붙은 것이지 요시미츠 밎 다케다 가문 자체와 한국사의 신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예를 들어 요시미츠의 큰형 요시이에는 하치만신 앞에서 성인식을 치뤘기에 하치만타로, 둘째 형 요시츠나는 교토 카모신사에서 성인식을 치뤄 카모지로로 불렸다. 통칭인 신라사부로를 마치 성씨인 것처럼 해석해 일어난 일이었다.

9. 기타

  • 은근히 최치원과 이미지가 많이 겹친다. 주목받지 못하는 출신에 당나라에서 경력을 쌓아 귀국해 입지를 얻은 점, 비극적인 최후 등등. 다만 문(文)적인 이미지와 무(武)적인 이미지가 확연히 갈리는 데다가 장보고는 이미 당나라에 있을때부터 나름대로 고위 장교직에까지 오르고 당, 신라, 일본에까지 명성이 천하에 널리퍼진 거물 급이었다는 점에선 확실히 차이가 있다.
  • 대한민국 해군의 본격적인 첫 잠수함 SS-061 장보고함은 그의 함자를 따서 명명되었다.[54]
  • 동일 규격 형식의 함종은 1번함의 이름에 따라 지칭되는 관례에 따라, 장보고함 이후 같은 모델의 잠수함들은 통틀어 "장보고급 잠수함"이라 일컫는다. 이 경우 1번함을 "네임 쉽(name ship)"이라 한다.
  • 2014년 완공된 우리나라의 제2 남극 과학 기지의 이름도 남극 장보고 과학기지로 결정되었다.
  • '장보고'는 사실 '장흥 보성 고흥'의 약어이기도 하다. 전남 남해안 중간 부분에 동서로 꽁꽁 붙어있는 세 지역. 작위적인 이름 같지만 실제로 이 세 지역에서 2016년 2월에 행정 협의회를 구성하면서 이름을 장보고라고 정해버렸다. 정작 인물 장보고와는 별 인연이 없는 곳이다.[55] 그리고 서로 인접한 지역이긴 하나 광역 생활권이 다르고 교류도 많이는 없던 지역이긴 하다. 그리고 이 드립이 그 옆의 강진군과 함께 20대 총선 선거구로 실현되어버렸다.
  • 청해진이 있었던 장좌리 장도는 삼국사기 제사지에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이름이 올라 있다. 현지에서는 지금도 정월 대보름 새벽에 장도에 있는 사당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동제를 지내는데, 사당에는 원래 고려 시대 삼별초의 장군으로 알려진 송징 장군이라는 인물을 주신(主神)으로 하고 여기에 정년 장군과 혜일 대사[56]를 합사해 신령 세 위(位)를 모셨지만, 1982년부터 장보고도 함께 모시고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해 뜨기 전 새벽부터 마을 회관에 장좌리 주민들이 모여서 장도로 향하는데, 그 시간에는 장좌리와 장도 사이에 바닷물이 빠져서 뭍이 드러나 섬까지 걸어들어 갈 수 있고, 제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다시 바닷물이 차 올라 있어 배를 타고 돌아오게 되어 있다. 지금은 물론 장좌리와 장도 사이에 나무 다리가 놓여 있어서 별 의미없게 되었다. 장보고를 제사하게 되면서 원래 모시던 송징이라는 인물은 거의 잊혀져 버렸고 이를 가리켜서 '만들어진 전통'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57] 다만 장보고와 함께했던 정년은 예전부터 송징 옆에 모신 것을 보면 완도 주민들도 이미 그 전부터 장보고를 나름 의식하고는 있었던 셈. 역적으로 죽은 장보고를 버젓이 사당에 모시고 제사하기에는 그들로서도 껄끄러웠을 것이다.# 설득 끝에 장도 주민들은 송징이 장보고의 별호가 아니겠느냐라고 타협하기도 했다.
  • 한가지 설이 있는데 훗날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의 생모가 장보고의 딸이라는 것. 그 설이 사실이라면 궁예는 장보고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58]


  1. [1] 장보고의 한자명은 조금씩 다른데, 중국 측 사료인 《신당서》에서의 기록은 張保皐. 한국 기록은 으레 중국 기록의 표기대로 간다. 일본 측 사료인《일본후기》,《속일본기》,《속일본후기》,《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의 기록은 張寶高. 보배 보(寶), 높을 고(高)라는 표기에서 장보고를 당시 일본인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감이 올 것이다.
  2. [2] 장보고가 805년에 당나라 무령군 소장으로써 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세운 제나라의 번진 토벌에 참전한 것을 감안할 때 관직에 나가는 것을 최소한 20세로 보더라도 785년 이전에 태어난 것이 된다.
  3. [3]삼국사기》의 기록. 궁복은 활보라는 뜻. -보는 '먹보', '심술보' 등의 '-보'자 접미사로 추정하기도 한다. 즉 활 잘 쏘는 사람에게 붙는 이름이다.
  4. [4] 장(張)과 보고(保皐)라는 이름도 궁(弓)과 복(福)에 기초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5. [5]삼국유사》의 기록. 사복불언 설화에선 복(卜, 伏)과 파(巴)는 어린아이를 뜻한다고 적혀있다.
  6. [6] 흥덕왕 시기 제수.
  7. [7] 신무왕 시기 제수.
  8. [8] 문성왕 시기 제수.
  9. [9] 이 때의 Prince는 왕의 아들이라는 뜻의 왕자라기보다는 대공(작위)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물론 Prince는 누군가 내려주는 작위가 아닌 스스로 얻어낸 호칭인 2번 항목을 가르킨다.
  10. [10] 그는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영어번역하면서 여기에서 등장하는 재당 신라인들의 역할에 주목했고, 자신의 논문에서 엔닌의 구법행을 도왔던 재당 신라인의 수장 장보고를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에서 흔히 장보고를 부르는 수식어인 '해상왕'을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
  11. [11] 역사저널 그날에서 고려사 전공 이익주 교수가 한 말. 지방출신으로는 최초로 역사서에 기록된 사람이기도 하다. 그 전까지 역사서에 기록된 골품제의 진골, 성골, 6두품은 다 경주사람이었다.
  12. [12] 안중근은 일본 쪽 반응이 극과극이라 애매하다.
  13. [13] 순 우리말로는 ‘활보’ 정도로 읽힌다. 여기에서 장보고가 활을 잘 다루었던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14. [14] 애초에 골품은 수도인 경주의 사람들만 대상으로 하는 거여서 골품의 질서 안에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15. [15] 당나라 시인인 두목이 쓴 책. 장보고에 대한 당대의 기록으로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신라본기에서의 장보고 기록은 신라 측 기록을 인용한 것과 달리, 장보고 열전은 번천문집의 기술을 옮겨놓았다. 그래서 열전의 내용을 보면 '본기와는 다르다.'고 언급된 부분이 등장한다.
  16. [16]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당나라로 가서 벼슬을 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갔다는 이야기는 2002년에 서울무비에서 나온 애니메이션 <청해진 호랑이>의 줄거리에서 나온 얘기다. 사실 신라의 살인적인 신분 제도를 생각하면 골품도 없는 그가 출세할 길은 당에라도 가서 군인이 되는 것밖에 없었다.
  17. [17] 절도사 가운데 이민족 출신으로 출세한 사람이 많다. 대표적으로 고선지, 부몽영찰, 이정기, 복고회은, 가서한, 그리고 안록산.
  18. [18] 특히 안록산은 서역인으로 본명이 알렉산더였다는 설도 있다.
  19. [19] 일종의 장교. 하서절도사 휘하의 관직으로 1천에서 5천 정도의 군사를 거느리는 직책이었다. 현재의 군 체계에 비유하자면 연대에서 여단 급 병력을 지휘한 셈이다.
  20. [20] 이정기의 손자로 당시 그의 세력은 허난 성허베이 성을 연결하는 산동성 지역을 장악해 강력한 지방 군벌로 성장한 상태였다.
  21. [21] '바다를 깨끗하게 청소한다'는 의미.
  22. [22] 장보고를 다루고 있는 대부분 위인전이 이 설을 채택했다.
  23. [23] 참고로 해신에서는 장보고가 때려잡은 옛 고구려 유민 출신 군벌 이사도가 자기는 '조상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당군에서 일하는 장보고 너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해자 충격을 받아, 결국 당나라 장수 일을 때려치는 계기가 된다. 원작이 된 최인호의 동명의 소설에서는 이정기나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언급은 별로 나오지 않는다. 신라인으로써 고구려 유민과 싸운다는 설정 때문에 해신 방영 당시에는 드라마가 의도적으로 고구려 죽이기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기도 했다.
  24. [24] 김헌창의 난이나 나중에 김우징의 쿠데타 때 병력을 보면 밑천 긁으면 가능하겠지만 쉽게 대뜸 내어줄 정도는 아니다.
  25. [25] 대왕이 장보고에게 1만 명을 주었다.(大王與保臯萬人) 삼국사기 권 44 열전 4 장보고, 정년
  26. [26] 이성계는 1361년 독로강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친명 1500명 동원했고, 1362년의 홍건적의 침입으로 함락된 개경을 탈환하는데 친병 2천 명을 동원했으며, 1364년에는 기황후가 보낸 최유의 병력 1만 명을 토벌하는데 친병 1천 명을, 1370년 제1차 요동정벌때는 친병 1600명을 동원했다. 이는 전부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치룬 수 많은 전투 중 한번도 사병을 2천 명 이상 동원한 기록이 없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가별초의 병력을 1~2천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참고로 조사의의 난 때는 반란군이 1만여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이성계는 일개 고려의 지방호족이 아니라 조선의 태상왕이라 사병이 아닌 군대를 동원할 권력이 있었다.
  27. [27] 후백제와 고려의 병력은 나라의 기틀이 잡히면서 점점 늘어나 920년 이후에는 만 단위 이상을 동원한다.
  28. [28] 장보고와 정연은 모두 신라 사람이지만, 그들의 고향과 아버지,할아버지는 알 수 없다.(張保臯【羅紀作弓福】⋅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郷邑父祖) 삼국사기 권 44 열전 4 장보고, 정년
  29. [29] 천태종 승려로, 일본에서는 지가쿠 다이시(慈覺大師)로 더 잘 알려져있다고 한다.
  30. [30]동방견문록》, 《대당서역기》와 함꼐 세계 3대 기행문으로 꼽힌다. 단, 한국에서는 입당구법순례행기 대신에 《왕오천축국전》 또는 《표해록》을 넣는 견해도 있다.
  31. [31] 교관 선단의 우두머리.
  32. [32] 지금도 중국 산동성의 장보고와 관련된 유명 관광지이다.
  33. [33] 고대 일본에서는 제2의 수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후쿠오카 주변의 관광지.
  34. [34] 김명이 희강왕을 주살하고 자신이 왕으로 즉위한 것을 가리킨다.
  35. [35] 청해진을 창설할 때 군사가 1만 명이었다고 했으니 거의 자기 병력의 절반을 내준 것이나 다름없다.
  36. [36] 이런 청해진대사, 감의군사, 진해장군 같은 직책들은 장보고 이전 신라에는 없었던 관직이다. 낮은 신분 출신 장보고에게 골품제의 규정을 초월하는 포상을 내린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37. [37] 이와 유사한 경위로 최후를 맞은 인물로는 훗날 고려무신정권을 열어젖힌 이의방이 있다.
  38. [38] 물건너가 소식으로 전해진 기록이란 점에서 신빙성이 정사보다 낮을 수도 있지만, 반면 속일본후기는 장보고가 죽고 불과 몇십년도 지나지 않은 9세기에 편찬된 기록인 만큼 먼 훗날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삼국유사보다 더 정확할 수도 있다.
  39. [39] 그것도 정식 왕비로 들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차비(次妃) 즉 후궁으로 들이겠다고 하는데도 반대했다. 여담으로 장보고가 암살당한 뒤 문성왕은 김양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40. [40] 崔暈. 중국으로 망명하며 최훈십이랑(崔暈十二郞)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대당 매물사(大唐賣物使)로 중국과의 교역을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41. [41] 참고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42. [42] 속일본후기 권11, 인명 천황 조와 9년(842) 1월 10일
  43. [43]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44. [44] 참고로 김대중 대통령은 20대 시절에 목포 인근에서 해운업으로 성공했고, 이를 기반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45. [45] 이와 비슷한 사례가 이순신박정희가 띄웠으며 원균은 과하게 폄하되었다는 설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개소리다. 정확하게는 박정희가 이순신을 어느 정도 띄운 건 맞는데, 그 이전에도 이미 원래 띄워져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
  46. [46] 장보고가 죽은 뒤에 문성왕은 김양의 딸을 왕비로 들였다.
  47. [47] 드라마 해신에서는 이 설을 반영해서 장보고는 김양의 부추김을 받은 염장에게 암살당한다. 그리고 김양은 장보고가 죽자 군사를 풀어 청해진을 없애고 염장도 암살해버린다.
  48. [48] 정확히는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당대 문인 두목의 번천문집. 중국인이 첫머리에서 장보고는 신라인이다라고 못을 딱 박고 있는데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
  49. [49] 이 장면들에서도 장보고를 영웅으로 은근 호평하는 모습이 나온다.
  50. [50] 실제로 유령섬 에피소드에서 장로가 전설의 제독의 초상화를 보여주는데 바로 장보고의 초상화였다.
  51. [51] 이 주인공은 무열왕계 후손이다.
  52. [52] 범선시대에 바람이 전혀 불지 않음은 사망플래그나 마찬가지다. 전세계의 유령선 전설은 대부분 이것 때문에 생겼다.
  53. [53] 가끔 공개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비공개 유물이다.
  54. [54] 그보다 이전에는 특수 임무용 소형 잠수정만이 있었다.
  55. [55] 청해진을 설치한 완도군의 바로 옆동네 지자체들이긴 하다.
  56. [56] 고려 시대의 승려라고 한다.
  57. [57] 출처 : 윤용혁 <삼별초 - 무인정권, 몽골, 그리고 바다로의 역사>
  58. [58] 이 설의 요지는 바로 궁예를 중시조로 하는 가문들의 족보에 그가 신라 신무왕 혹은 문성왕의 서자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 이 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런 기록들을 두고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을 것이라 추정하면서 문성왕과 장보고의 딸 사이에서 궁예가 태어났지만 846년 장보고가 반역 죄목으로 염장에게 암살당한 후 가세가 기울어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럴 경우 연대 차이가 너무나 심하게 벌어진다는 문제점이 있어서 그가 정말 장보고의 외손자일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244.76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