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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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신 대만 달러 지폐에 나온 장제스. 밑의 건물은 타이베이 총통부다.

중화민국의 제1, 2, 3, 4, 5대 총통

본명

장중정 (蔣中正, Jiǎng Zhōngzhèng)

장개석 (蔣介石, Chiang Kai-shek)

출생

1887년 10월 31일, 청나라 저장 성 닝보[1]

사망

1975년 4월 5일 (87세), 중화민국 타이베이 스린 구, 스린 관저[2]

국적

청나라 중화민국 중화민국
중화민국

학력

바오딩 전군 육군 속성 학당 제1기 졸업

최종 계급

특급 상장(特級上將)

정당

중국 동맹회
중화 혁명당
중국국민당

직업

정치가, 군인

배우자

마오푸메이(毛福梅, 1번째 부인, 기간 : 1901년 ~ 1921년)
야오예청(姚冶誠, 첩, 기간 : 1913년 ~ 1921년)
천제루(陳潔如, 2번째 부인, 기간 : 1921년 ~ 1927년)
쑹메이링(宋美齡, 기간: 1927년 ~ 1975년)

자녀

슬하 2남 2녀
장남 장징궈(蔣經國)
장녀 장젠화(蔣建華)
차남 장웨이궈(蔣緯國)[3]
차녀 장야오광(蔣瑤光)

종교

개신교

주요
경력

1919년 중국 국민당 입당
1924년 황푸군관학교 교장으로 취임
1935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
1937년 중일전쟁 발발
1948년 중화민국 초대 총통에 취임

총통
재임 기간

1대 : 1948년 5월 20일 ~ 1949년 1월 21일 (246일)
복귀 : 1950년 3월 1일 ~ 1954년 5월 20일 (4년 81일)
2대 : 1954년 5월 20일 ~ 1960년 5월 20일 (6년)
3대 : 1960년 5월 20일 ~ 1966년 5월 20일 (6년)
4대 : 1966년 5월 20일 ~ 1972년 5월 20일 (6년)
5대 : 1972년 5월 20일 ~ 1975년 4월 5일 (2년 320일)

서명

1. 개요
4. 장제스의 사상과 성격
4.1. 권위주의 성향
4.2. 반공
4.3. 파시즘?
4.3.1. 장제스의 공식적인 입장
4.3.2. 장제스 정권 분석
5. 대인관계
6. 이름 표기법
7. 트리비아
8. 한국과의 관계
9. 매체에서
9.1. 역사서
9.2. 창작물
10. 주요 경력
11. 참고 문헌
12. 관련 문서
12.1. 인물
12.1.1. 국민당 계열
12.1.2. 공산당 계열
12.1.3. 군벌
12.1.4. 가족
12.1.5. 열강
12.1.5.1. 미국
12.1.5.2. 일본
12.1.5.3. 영국
12.1.5.4. 소련
12.2. 사건
12.3. 단체
12.4. 기타

1937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Time Man&Wife of the Year 1937

월리스 심프슨
1936

장제스, 쑹메이링
1937

아돌프 히틀러
1938

1. 개요

"나는 중국이다. 중국은 나 없이 이뤄낼 수 없다."

- 신생활운동을 비판한 외국 고문인 윌리엄 헨리 도널드에게.

"중화민국의 존재국제연합이 아니라 중화민국 스스로가 결정한다."

- 1971년, 국제연합 자진 탈퇴 직후

중화민국군인, 혁명가, 정치인. 총 재임 25년 282일. 중간의 1년 38일을 더하면 1948년 5월 20일부터 1975년 4월 5일로 26년 320일. 난징 정부 수뇌로 치면 1928년부터 47년간 중화민국의 지도자로 있었다. 다만 장제스는 한번도 마오쩌둥이 가졌던 것 정도의 권력을 대륙 전체에 행사한 적도, 가진 적도 없다. 그의 정권은 어디까지나 수많은 군벌들의 연합체였고 북벌반장전쟁으로 겨우 기세를 꺾어놨을 뿐 그들의 반항기는 여전했다. 그는 대만 섬으로 건너간 후에야 (비로소) 철권 통치를 행할 수 있었다.

현대 중국(또는 대만)의 국부(國父)이자 개척자,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구한 항일영웅에서부터 부패를 방조한 무능한 독재자, 무고한 시민들을 죽인 학살자라는 다양한 평가가 공존하는데[4]이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그만큼 복잡했음을 방증한다.

2. 생애

이 나라가 진정 민중이 주체가 되고 궁극적으로는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다 바쳐 주권이 민중한테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주로써 민권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 중정기념당 장제스 동상에 새겨진 문구

장제스/생애 문서 참조.

3. 평가

장제스/평가 문서 참조.

4. 장제스의 사상과 성격

4.1. 권위주의 성향

“좁은 의미에서 가족은 단지 한 가정을 뜻한다. 하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가족은 민간 및 정부의 모든 조직을 포함하고 여기에 혁명당과 학교까지 든다.”

"우리 개인의 모든 말과 행동은 국가와 민족을 유일의 전제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장제스의 권위주의 사상은 1912년경 스스로 발행인을 맡은 군사학 잡지 군성잡지(軍聲雜誌)에서 최초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장제스는 "우리 당이 중국을 강대한 공화국으로 건설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 10년 안에, 단지 미국과 프랑스 공화정의 껍데기만을 치리(治理)하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개명전제의 정신을 이용하여 계획을 세워야한다." 라고 언급했다. 개명 전제론은 중국의 사상가 량치차오가 공화 혁명론에 대항하여 내놓은 입지로 "중국이 급하게 공화제를 도입할 경우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으니 개명한 군주가 우선 민도를 향상시켜야한다."는 주장이었다. 즉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우선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통치자가 있어야한다고 보았고 쑨원의 삼서론에 입각하여 국민당의 총재인 본인이 그 역할을 맡아야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장제스가 기본적으로 추구한 것은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 대가정'이었다. 장제스는 일본 유학 과정에서 영향을 받은 일본의 초국가주의와 유년 시절에 받았던 전통 교육, 국민당원으로서의 쑨원의 사상 등의 영향을 모두 받았는데 이 사상들의 공통점들은 바로 강력한 권위를 통한 질서의 확립이었다. 장제스는 쑨원의 발언을 언급하여 "중국인은 자유를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으며[5] 지금 필요한 것은 빈곤의 격퇴(와 이를 위한 권위)."라고 주장하였다. 즉, 장제스는 인민의 자유가 사회의 발전에 비례한다고 보았고 그래서 의회 민주주의가 언젠가 중국에 도입돼야 함은 인정했지만 당대 중국의 상황에는 언감생심이라면서 도입을 거부했고[6] 이 과정에서 헌법 제정을 추구한 쑨커나 다른 지식인과 충돌하기도 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훈정 시기 국민당은 언론과 교육을 국민당이 총괄하고 쑨원의 이론과 삼민주의 사상을 국가 전체의 이데올로기로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그의 지지자들은 강력한 지도력을 좋아하다 못해 준파시스트화하여 여러 인권 문제를 일으켰다. 장제스를 위한 첩보 / 테러 조직 남의사는 백주 대낮에 반대파 암살이나 고문과 같은 테러를 저지르고 다녔고 CC단도 한 몫 했다. 중국의 강제 수용소는 이미 국민당 시절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국민당 치하에서도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이런데 끌려와서 코렁탕을 먹고 있었다. 이것은 지식인의 반발을 불러오며 이후 국공 내전에서 일부 지식인들이 공산당으로 전향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4.2. 반공

장제스의 정치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반공 성향이다. 국민당은 1차 국공 합작에서 보듯이 공산주의에 꽤 우호적이었지만, 장제스 본인은 소련 방문을 기점으로 오히려 공산주의에 대해 회의감을 품어 여러번 쑨원에게 국공 합작을 끝낼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친소, 용공 성향으로 평가받았다는 것이다. 소련 고문인 보로딘은 장제스의 성향을 의심의 여지 없이 믿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고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에 사인을 해서 장제스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중산함 사건도 장제스가 국민당 내부 공산당원과 좌파들의 쿠데타를 선동하여 역이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또 장제스의 사상은 반공적이었으나 그의 정책은 자본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그 당시 군벌들이 다 그러했지만 장제스는 자신의 적들과 손을 잡아 이용하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던 사람이다. 장쉐량을 비롯한 만주 군벌들도 북벌 시절엔 적이었고 펑위샹, 옌시산과는 천하를 놓고 한 번씩 다투어봤으며 리쭝런, 바이충시는 반란을 두 번이나 일으켰던 사람들이다. 룽윈, 천지탕 등의 지방 군벌들과도 이합집산과 반목을 반복했다. 그 장제스가 국공 합작을 깨기 전까지 일관되게 적대했던 것이 공산당이었다. 편하게 헤쳐모여가 가능한 군벌들과 공산당의 성격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당이 군벌들에 우세한 점이 삼민주의를 기반으로 한 혁명 사상인데 공산당은 국민당보다도 혁신적이라 위협적인 경쟁자였다. 이를 알기에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목을 매달았다. 더불어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군벌군을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중앙군을 지방에 박아 군벌들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는데, 이 때문에 쓰촨, 윈난, 화북의 군벌들은 장제스하면 치를 떨게 되고 아예 공산당과 내통하여 태업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장쉐량의 시안 사건이다. 하지만 장제스가 공산당과의 합작을 아주 거부한 것은 아니어서 대장정 이후 공산당에 홍군을 해체하는 조건으로 국민당에 다시 받아주겠다고 제안한 바도 있고 시안 사건으로 강요된 합작도 번복하진 않았다. 이미 반일 감정이 너무 고조되어 합작을 거부했다간 국민당의 집권 기반이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 컸다. 그래도 공산당은 결국 없애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 사라진 건 아니었고 중일 전쟁 이후 무리한 공세를 취하다가 망했다.

4.3. 파시즘?

여기서 더 나아가서 권위주의 + 반공 성향 정치가였고 대륙에서 장제스의 시대가 세계적으로 파시즘이 날뛰던 1930 ~ 1940년대였던 것에 주목하여 장제스가 파시즘을 추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 실제로 국민당의 유력 정치가 왕징웨이장쉐량 등은 유럽을 방문하면서 히틀러, 무솔리니를 칭송하며 파시즘에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장쉐량은 장제스를 중국의 히틀러로 옹립 하여 중국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후 천리푸, 다이리 등 장제스의 측근들이 지휘한 CC단, 남의사 등은 게슈타포, SS와 같은 파시즘 단체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중화민국과 나치 독일이 밀접한 교류를 하면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협력한 것 역시 장제스 파시스트 설의 근거로 제기된다.

4.3.1. 장제스의 공식적인 입장

분명히 장제스 정권이나 장제스를 옹호하는 다이리남의사, 천리푸, 천궈푸CC단 등에서 파시즘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며 흑룡회를 비롯, 일본의 파시즘 성향이 짙은 비밀결사와의 연계가 있었으며 1932년 남의사 결성 이후 중국 내부에서 장제스와 파시즘의 연계에 관한 의혹이 제기된 바가 있다. 예컨대 1932년 7월 대공보는 장제스에게 '귀하가 파시스트 당을 조직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라는 공개 질문서를 제출했고 왕징웨이 계통의 황포동학구국단은 장제스에게 다음과 같은 공개질문을 보냈다.

작년 이래의 외모, 수재, 비화는 귀하의 6년간에 걸친 전정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귀하는 조속히 하야하여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처지인데도 오히려 불한당들을 이용하여 파시스트 당을 조직하려는 것은 위로 쑨원 총리의 유언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아래로 동지의 기대에 배반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귀하에 대하여 다음의 제항목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 귀하는 어찌하여 황포동학을 자기옹호에 이용하고, 혁명을 돌보지 않는가.

2. 귀하는 국민당의 영수임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당 외에 파시스트당을 조직하여 국민혁명을 파괴하려 하는가.

3. 삼민주의를 고취함에 있어서 폭력정책을 사용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귀하는 어찌하여 철혈대로 하여금 민중을 압박하는가.

4. 귀하는 황제가 되어 인생의 부귀를 누리려고 하지만 황포동학을 이용하여 혁명군인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말라.

5. 만약 혁명구국을 위하여 파시스트당을 조직한다고 하면 바야흐로 항일을 위해 출병하라.

6. 파시스트 당의 유일한 수단은 암살에 있으나 귀하는 3천명의 사병으로 4억 민중을 모조리 살해할 수 있다고 사료하는가.

7. 파시스트 당의 경비는 1개월 120만 원에 달한다고 하는데 귀하의 강회 지역의 영세민이 날마다 초근목피로 끼니를 떄우는 궁핍한 상태를 염려한 일이 있는가.

8. 귀하는 파시스트당의 조직을 알지 못한다고 하지만 어째서 중앙군관학교의 군관특별연구반, 교육총대 및 단경반에 대해 파쇼적인 훈련을 하고 있는가.

9. 귀하는 무솔리니를 존경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부의 내부는 무솔리니의 친척으로 충만되어 무솔리니 일가의 천하로 보이지 않는가.

10. 귀하는 파시스트당을 존경한다고 했다. 하지만 각국 파시스트당은 대외 무저항주의를 국멘에게 강제할 것인가.

이에 대해 장제스는 "나는 파시즘을 아주 싫어한다."라고 답변할 뿐 입장표명을 하지 않았다. 이어 대공보에 다음과 같은 답변을 보냈다.

"중국혁명의 조직과 방략에는 쑨원 총리가 정한 조직과 방략만으로도 국민혁명의 사명을 완성하기에 충분하다. 외국의 혁며앙략을 좇아서 중국의 민족성과 상반되는 조직을 사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혁명의 성공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만약 내가 사욕을 품는다면 국가도 민족도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중국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쑨원 총리를 배반한 반혁명분자가 국민당 고유의 조직과 방략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 고유, 유일한 혁명조직을 회복하지 않고 파시스트의 조직을 좇아서 이를 중국에 강행하려고 함은 공산당이 중국을 적화하려고 함과 다를 것이 없다. 나는 살아서도 중국 국민당원이요, 죽어서도 당귀가 될 뿐이다. 중국혁명의 조직에는 국민당의 조직이 있을 뿐이며 중국혁명의 방략에도 역시 국민혁명의 방략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중국혁명 완성을 위한 유일무이의 도립이다. 이외의 조직은 절대로 반대한다. 나의 유일한 소망은 민국 13년에 성립한 국민당의 혁명정신과 국민혁명의 조직 및 방략을 부흥시킴으로써 삼민주의의 실현을 기대함에 있다."

하지만 장제스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파시즘이 필요하다는 연설을 하기도 했으며 파시즘의 혁명적 열기에 관심을 보였다. 1924년 1차 국공합작 이후 기존 국민당원들에게서 혁명적 열기가 사라지고 오히려 중국 공산당에게서만 열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장제스의 맹우이며 반공 이데올로그 다이지타오도 한탄했던 문제였는데 장제스는 혁명열기를 고취시키고 경제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이 파시즘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고 분명 관심과 희망을 가졌었다.

"1931년 9월 18일 이후, 이탈리아 파시즘을 모방하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앞으로 중국 혁명에 대한 협의체는 삼민주의와 파시즘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국민당의 삼민주의 원칙이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피를 수혈 받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 파시즘은 중국의 미래입니다. (...) 우리는 내용면에서 삼민주의를 활용하고 기능면에서 파시즘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1934년에는 이렇게도 말했다.

"유명한 정당이 있는 외국에서는 그 당이 통치권을 갖고 있으며, 중국의 경우 유명한 정당은 국민당입니다. 그러나 국민당은 권력이 없는 형식적인 기관일 뿐입니다. 다른 나라의 파시스트 정당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최근 더 큰 성공을 거두며 세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중국에도 파시스트 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는 장제스가 파시즘의 사상적 면을 이해하고 공감했다기보다는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안정시키는 기능적 수단에 주목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당시 중국 엘리트들에게 파시즘은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매우 진보적인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정두음 박사는 장제스가 유럽 파시즘에 관심을 보인 분야는 '조직'에 있지 '사상'에 있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런 부분적인 기능적 수단을 차용하는 경우는 비 파시즘 계열의 여러 국가[7]에 대해서 얼마든지 보인 경우이다. 사상면에서는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트들은 유교 사상이 근반이 되었다.

그나마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장제스의 파시즘에 대한 관심은 예전과 달라졌고 1938년 인민정치위원회에서 장제스는 자신의 정치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중화민국을 설립한지 27년이 지났습니다. 이 시기 동안 소위 대중집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나 헌정주의는 없었습니다. 또한 불행히도 이런 초기 집회들이 몰고 온 수많은 부패 관행들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국가를 혼란과 허약한 상태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우리나라는 우리의 적들로부터 억압과 굴욕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인민정치위원회는 의회가 아니지만 여러분은 정당정치가 빚어낸 과거의 실수들이 지속적인 경고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동시에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 정부를 세울 수 있는 굳걷한 기반을 세울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요약해서 장제스가 20년대 후반~30년대에 파시즘을 중국 근대화의 수단으로 여기고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한정적인 기간 내에서 관심을 보인 수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4.3.2. 장제스 정권 분석

중국 국민당이 권위주의 정권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학적 분석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고 중국 파시즘에 대한 연구도 남의사, CC단, 그 중에서도 남의사에 집중되어 있다. 당시 중국에서 파시즘의 영향을 받아 준동한 세력으로 그나마 지목되는 것이 남의사이기 때문이다. 맨 처음 남의사와 파시즘의 연대를 연구했던 것은 로이드 이스트만인데 그는 이렇게 규정한다.

남의사가 파시스트 조직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때 역행사의 지도층이 국가를 되살리기 위한 명시적인 방법으로 파시즘에 전념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파시즘이 역행사에 뚜렷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잠깐이었다.

우선 이런 문제는 무엇이 파시즘이냐는 파시즘의 정의 차원에서 상당히 민감한데 권위있는 파시즘 연구자들인 로버트 팩스턴이나 케빈 패스모어의 경우에는 남의사가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파시즘 단체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소위 '파시즘의 최소치'에 중점을 두는 팩스턴의 경우 구조주의적 파시즘 연구에 입각하여 일본 제국조차도 파시즘이 아니라고 분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는 장제스나 남의사나 파시즘 얘기를 꺼낼 건덕지가 없게 된다. 케빈 패스모어의 경우에도 남의사는 대중정당이 아니라 비밀결사로 파시즘식 대중정당으로는 볼 수 없다고 분류한다.

물론 일본 학계에서 주장하는 일본식 파시즘의 존재를 긍정할 경우에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긴 한다. 일본식 파시즘을 긍정할 경우, 현양사, 흑룡회를 비롯한 비밀결사들의 행동이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일본 파시즘은 대중운동보다는 위의 군사, 정치 엘리트들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파시즘'의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파시즘은 파시즘 정당이 대중운동을 통해 권력을 탈취한 서구와 달리 기존의 국가조직과 지도자를 탈바꿈하는 식으로 집권하기 때문에 없잖아 국민당의 통치에도 맞아 떨어질 건덕지가 있긴 하다.

하지만 남의사는 1938년 이후로 해체되어 중일전쟁을 위한 정보기관에 흡수되었고 그 이전의 남의사의 첩보활동들도 단순히 권력 탈취와 국가 개조를 위한 행동으로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정두음 박사의 경우, 남의사를 파시스트 단체로 정의하지만 이는 남의사의 공식적 이념보다는 선전자료, 출판물을 중심으로 정의하고 있다.

5. 대인관계

어째 협력 관계에 있던 사람 중엔 힘이 될만한 사람이 없다

5.1. 천치메이

장제스가 복종하고 존경했던 인물 1호

천치메이는 장제스가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난 인물로 장제스의 형이자 사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장제스는 그를 위해서 그의 정적을 병원에서 쏘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고 그를 맹렬히 추종했다. 천치메이도 장제스를 아꼈고 그에게 상하이 암흑계의 거물들과 인맥을 쌓아주기도 했다. 그리고 천치메이가 암살된 이후 장제스는 그야말로 한동안 폐인이 되어 상하이의 홍등가를 뒹굴고 다니면서 술과 여자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후 장제스는 천치메이의 조카들인 천리푸와 천궈푸를 최측근으로 삼아 총애했다.

5.2. 쑨원

[8]

장제스가 복종하고 존경했던 인물 2호

일각에선 쑨원과 장제스의 인연이 장제스의 일본 유학 시절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장제스와 쑨원이 일본에서 만났다고 하기엔 정황이 맞지 않을 뿐더러 설사 만났다 하더라도 어쩌다 스친 정도이지 의미 있는 만남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장제스와 쑨원의 본격적인 인연은 장제스가 천중밍의 반란으로 위기에 처한 쑨원을 구하면서다. 이전까지 장제스는 천중밍와 대립하던 처지라서 그와 연합하던 쑨원에게 크게 실망했고 쑨원도 장제스에게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았으나 이 사건 이후로 장제스는 쑨원의 측근이 되었다.

쑨원은 천치메이가 죽은 이후 장제스가 복종한 마지막 인물로 장제스는 거의 병적으로 쑨원의 신임을 갈구했다. 소련행을 자처하면서 그의 신임을 얻고자 했으며 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왜 믿지 않냐고 거의 애원하기까지 했다. 장제스의 이런 돌발적인 행동들에 쑨원은 어린애를 타이르듯이 대처해야 했다. 이후 장제스는 황푸 군관 학교 교장을 맡는 등 국민당의 간부가 되었고 쑨원이 가장 믿는 심복 중 한명의 위치에까지 오르지만 우리 나라에 흔히 알려진 것처럼 쑨원의 정치적 후계자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쑨원이 죽은 이후 장제스는 쑨원의 처제인 쑹메이링과 결혼하는 등 자신과 쑨원의 연계를 끊임없이 강조하며 죽을 때까지 자신이 쑨원의 후계자로 자처했다.

5.3. 왕징웨이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1. 시선부터 예술이다.

어제의 동지에서 오늘의 원수로

대부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이라면 놀라겠지만 원래 장제스는 랴오중카이, 왕징웨이와 친밀하여 국민당의 온건 좌익 성향의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쑨원 사후 한동안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제스를 왕징웨이의 사람으로 보았다.

이후 국민당 보수파인 쉬충즈와 후한민이 쑨원의 비서이자 국민당의 대표적 좌익인 랴오중카이를 암살하자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함께 후한민과 쉬충즈를 모두 숙청하였다. 이렇듯 매우 돈독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장제스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둘의 사이는 조금씩 틀어졌다. 이것이 1차로 폭발한 것이 중산함 사건이다.

장제스는 '자신을 납치하려는 공산주의자'들에 맞선다는 구실로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켜 소련 고문들과 공산당원들을 체포하였다가 다시 풀어주었는데, 이것으로 사람들은 장제스가 좌익도 아니고 왕징웨이 똘마니도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게 된다. 사실상 이때부터 왕징웨이는 장제스를 자신의 위협적인 라이벌로 인식하게 되었지만, 북벌 때문에 두 사람은 일단 협력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장제스가 우한과 상하이를 잇달아 점령한 이후 발생한 신수도 논쟁에서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반대파들에 의한 자신의 실각을 병적으로 겁내던 장제스는 자신에게 위협적인 소련 고문 보로딘의 해임을 요구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군사 독재자와 폭군의 등장을 용납할 수 없다고 오히려 장제스에게 부여된 초법적 사령관 특권을 회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때 장제스는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고 결국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당 내부의 공산당에 대한 기습을 감행하게 된다. 상하이 쿠데타가 벌어지기 직전까지 일단은 장제스에 협조하던 왕징웨이는 당연히 경악했고, 우한 정부를 세워 장제스의 난징 정부와 대립했다.

군벌 장쭤린의 공격으로 둘은 다시 일시적으로 협력하게 되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왕징웨이는 펑위샹과 동맹을 맺어 장제스에 대응하려 했으나, 펑위샹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결국 왕징웨이는 난징 정부에 합류했지만, 둘의 대립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중일 전쟁이 시작되던 순간까지 계속 되었다.[9]

이후 중일 전쟁이 터지자 왕징웨이는 중국이 사는 길은 일본에 협력하는 것 뿐이라 굳게 믿고 일본에 붙어버리는 희대의 병크를 저질렀다. 이로써 그는 혁명가에서 한간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온 대륙의 적으로 떨어져 죽어도 보복을 염려해 무덤을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철옹성 같이 만들었지만 장제스는 옛 동지의 무덤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부관참시로 그에게 배신자에 걸맞는 대접을 해주었다.

5.4. 후한민

5.5. 이오시프 스탈린

둘은 장제스가 1920년대에 소련에 가던 때부터 관계가 시작된다. 장제스는 스탈린 대신에 트로츠키를 만나긴 했지만 국민당과 소련의 협력 관계의 초석을 다졌고 이후 스탈린이 권력을 잡은 후에도 이 커넥션은 유지되었다. 친소파로 인식되던 장제스에게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에 사인을 해서 보내주기도 했다. 스탈린은 한동안 공산당에 국민당과 협조할 것을 요구하며 장제스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며 여러 지원을 해주었다.

하지만 상하이 쿠데타 이후 스탈린은 돌연 노선을 바꾸어 국민당 내부 반혁명분자들을 숙청하고 공산당의 자체 무력을 갖추어 국민당을 장악할 것을 지시하여 왕징웨이 - 공산당 합작까지 깨고 만다. 한동안 소련과 국민당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고 소련 고문 보로딘은 국민당을 아무리 물을 퍼부어도 악취가 가시지 않은 화장실 같은 곳이라고 디스해댔으며 스탈린은 장제스를 '즙을 모두 짜낸 레몬'이라고 불렀다. 어찌 마오쩌둥을 마가린 공산주의자라고 부른게 생각난다. 음식 비유를 좋아하시는 강철의 대원수?

하지만 몇년 되지 않아 둘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마오쩌둥과 소련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말 처럼 스탈린과 장제스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이는 1차 국공 내전과 대장정을 거치면서 마오쩌둥이 소련에서 유학한 공산주의자 들을 모조리 숙청했기 때문이다.[10]이 우호 관계는 유지되었으며 국공 내전으로 장제스가 쫓겨나는 순간까지도 스탈린은 굳이 따지자면 마오쩌둥보다는 장제스의 편에 가까웠다. 하지만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난 후 소련은 즉각 중화 인민 공화국을 인정하고 중화민국과 연을 끊었다.

5.6. 조지프 스틸웰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2

장제스, 쑹메이링, 스틸웰. 사진에선 웃고 있지만 실제로 장제스와 스틸웰은 사이가 매우 나빴다.

장제스와 미국에서 파견한 군사 고문이자 버마 - 중국 전역 연합국 총참모장[11]인 스틸웰 대장은 사이가 매우 나빴다. 스틸웰은 인종 차별주의자였으며[12] 서로가 독선적이라 의견 충돌이 잦았다. 이렇게 양측이 계속 반발하다가 1944년 이치고 작전에서 중국이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군수 물자와 전략 예비대인 Y군의 파병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 책임을 장제스에게 떠넘기면서 양측의 관계는 마침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이후 스틸웰은 피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전 중국군의 지휘권을 요구하였고 이에 분노가 폭발한 장제스는 미국 정부에 스틸웰을 선택할 것이냐, 중국을 선택할 것이냐라는 최후 통첩을 날렸다. 결국 스틸웰은 해임되었고 이후 오키나와에서 근무하다가 지병인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스틸웰은 유능한 장군이라서가 아니라 중국어 잘 한다는 이유로 미중 우호 관계를 상징하기 위해 보낸 얼굴마담이었다. 그는 대규모 부대를 지휘해본 경험은 없었고 처음으로 대규모 전선을 지휘해보자 자신의 능력 밖의 황당한 지시만 내렸다. 스틸웰의 본래 임무는 미중 관계를 조율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미국에 국민당은 멍청하며 공산당 잡을 생각만 하고 비겁하다고 이간질했으며 전략적으로도 일본군 공세를 앞두고 중국군 예비대와 정예 부대를 빼내서 자신의 명예를 위해 소모시키는 행동만 반복했다. 그는 대규모 병력을 이용한 야전에서의 승부를 노래 불렀고 장제스의 지연전,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을 미개하다고 비웃었는데 정작 그는 버마에서 자신이 그리 좋아하던 야전을 시도했다가 처참하게 깨지고 남 탓만 했다.

5.7. 마오쩌둥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3

유방 vs 항우, 조조 vs 유비, 주원장 vs 진우량에 못지 않을 역사적 라이벌 중의 하나다.

1차 국공 합작이 파기된 이후로 장제스는 평생 마오쩌둥을 잡아 죽이거나 국민당의 밑에 복종시키려 했고 한번도 그를 믿지 않았다.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여담으로 1차 국공 합작 시기에 마오쩌둥이 몇번 황포 군관 학교에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후일 장제스는 '씻지도 않는 놈이 경전은 줄줄 외운다'라고 하면서 불쾌해했다.(...)[13]

결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싸움이 계속되던 와중에 호남군벌 허젠이 1930년 리리싼의 지시로 창사 폭동이 일어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오쩌둥과 떨어져 지내던 첫 아내 양카이후이(양개혜)를 찾아내 처형했다. 정강산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던 마오쩌둥은 당시 허쯔전과 결혼까지 한 상황이었지만, 양카이후이의 처형 소식을 들었을 때 통곡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그녀를 기리는 시를 짓고 정권을 잡은 후에도, 국가적으로 그녀를 추모하는 사업을 벌였다.

중일전쟁 후에는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이는 미국의 중재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평화 협상을 위해 만난 것이었는데, 마오쩌둥은 충칭에 도착하자마자 마음에도 없는 "장 위원장(장제스를 지칭) 만세"를 삼창하고, 기자들에게는 자신은 중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제스를 존경하며 그의 뜻을 따를 것이라고 천명해 국공 양당의 휴전 합의를 이뤄내기도 하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돌아가자마자 이 협정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라고 하면서 협정을 파토내버렸다. 결국 분노한 국민당 측은 공산당을 공격한다.

중일 전쟁 직후인 1945년 9월 충칭으로 온 마오쩌둥을 환영하는 연회에서 마오와 건배하는 장제스.

이후 국공내전이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돌아감에 따라 둘의 관계는 끝장났지만 마오쩌둥은 장제스를 나름 고평가했는지 미중관계가 회복될때 미국 기자에게 장제스를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용기있는 지도자"라고 했으며 그가 죽었을때는 충격을 받았는지 하루 종일 장송곡을 틀고 그 음악을 듣고 있기도 했다.

5.8. 저우언라이

[14]

한때의 친밀한 동료였던 각별한 적

저우언라이와 장제스의 인연은 저우언라이 - 마오쩌둥보다도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제스가 황푸 군관 학교 교장이었을 때 저우언라이는 학교 정치 주임이었다. 정치 주임은 학교에 배치된 정치장교. 둘은 매일 같이 아침을 같이 할 정도로 친했다고 저우언라이가 후에 밝힌 바 있다.

이때는 저우언라이가 공산당 뿐만 아니라 국민당 당적을 가지고 있었고, 국민당 소속 정치 장교로서 국민당의 이념인 삼민주의를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황포 군관 학교에서 국민당 일을 하면서도 장제스 모르게 비밀리에 학생들을 포섭하여 학교 내에 공산당 세포 조직을 만들었다.[15]

어쨌든 장제스는 저우언라이를 각별히 여겨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두려고 했으나 장제스의 반공 성향을 눈치챈 저우언라이는 그와 거리를 두었다. 둘이 틀어지게 된 계기는 중산함 사건[16]]인데 저우언라이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장제스를 배신한다. 이후 둘은 장제스가 북벌 과정에서 상하이를 점령하면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상하이 공산주의자의 거물로 장제스에게 상하이의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저우언라이는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국민당군에 한번 사로잡히는데 장제스는 옛 정을 생각해서 그를 놓아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이는 실수였다. 다만 이 시기의 기록이 부정확해서 체포되지 않고 마오쩌둥의 해방구로 도피했다는 설도 있다.

이후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측근으로 전락한다. 둘이 다시 만난 것은 시안 사건 때로 장제스는 협상을 하기 위해 나타난 저우언라이를 보고 반가워하면서 "우린 적이지만 자네를 잊은 적이 없네, 언젠가 우리 둘이 다시 일할 날이 오길 바라겠네." 라고 말하였다. 이후 중일 전쟁이 터지자 저우언라이는 충칭에 거주하면서 장제스가 자주 회동했지만 국공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고 결국 둘은 총부리를 겨누게 되었다.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것은 마오쩌둥과 공산당으로 장제스는 결국 대만으로 이전하게 된다.

5.9. 장쉐량

장제스의 적이면서도 동지였던 인물이다. 국민당이 만주를 차지하는데 정통성을 부여했으며, 반장 전쟁 당시 장제스를 지지했지만 시안 사건으로 HP 1 남은 마오쩌둥에 마지막 한 방만 날리면 되는 상황에서 취소시킨 주역이다.

시안 사건 이후 장쉐량은 10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게 되지만 바로 다음 해 중일전쟁이 발발, 국민당의 천도가 계속되면서 장쉐량도 계속 거처지를 옮기게 된다. 어찌됐건 장쉐량은 만주 지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고, 전쟁 때 장제스는 비록 전에는 적이었어도 공공의 적과 싸우기 위해 나름 너그럽게 봐줬지만 장쉐량은 예외였으므로 장쉐량봉천군벌서안 사건을 기점으로 완벽히 몰락하게 된다.[17]

2차 대전 종전 후 국공 내전을 거치면서 국부천대까지 이뤄졌지만 장쉐량은 감옥에서 수감 생활 하는 것 에서 가택 연금으로 바뀌었을 뿐 그대로 묶여있었고 오죽하면 1953년 장제스 생일에 장쉐량이 시계를 선물로 보내[18]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다. 풀어줄때가 되지 않았느냐"라는 메시지를 보낸 데 대해 장제스가 낚시대를 보내 암묵적으로 "낚시나 하면서 시간을 때워라."라는 답을 줬을 정도이다. 일설에 의하면 장제스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말 중 하나가 '장쉐량을 절대 풀어주지 말것이라는 설도 있으니 원한이 심하게 생긴 모양.[19]

장제스가 죽은 후 후계자였던 장제스의 장남 장징궈가 계엄 해제에 민진당의 활동을 자유롭게 풀어줄 정도로 민주화에 힘썼지만 장쉐량은 예외였고 그대로 연금 생활이 지속되다가 장징궈도 죽은 후 후임 총통인 리덩후이 시기에서야 연금이 풀린다. 이때가 1993년으로, 1937년 부터 수감 및 연금 생활을 했으니 56년 동안 감옥에서 있었다고 보면 된다.

여담으로 장쉐량은 반 세기동안 대륙, 그리고 대만에서도 갇힌 상태로 지내다 석방 후 10여년 정도를 더 살고 2001년에 104세의 나이로 하와이에서 사망한다.

5.10. 프랭클린 루즈벨트

카이로에서 만난 장제스, 루즈벨트, 처칠.

처음엔 괜찮았다. 루즈벨트는 중국에 막연한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장제스를 지원하지 말자는 미 육군의 조언을 물리치고 대중 지원을 승인했으며 장제스에게 수차례 친전을 보내어 안부를 묻기도 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를 만난 루즈벨트가 장제스에게 그동안 자신이 상상하던 카리스마나 패기를 느끼지 못하고 실망하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소통 부재와 미국의 중국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루즈벨트는 장제스가 항일 의사가 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여기에 스틸웰의 곡해가 중간에 개입되면서 더욱 틀어졌고 말년에는 루즈벨트가 장제스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는 일을 의논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루즈벨트는 마지막까지 장제스를 지원했고 루즈벨트가 죽었단 소식에 장제스는 후임 지도자인 트루먼이 지원을 줄이거나 아예 그만두지 않을까 크게 우려했다. 특히 장제스가 우려한 것은 트루먼이 공산당과 손을 잡는 것이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실수로 망하게 되었으니... 여담으로 국부천대 직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에 맞서 만주 핵폭격 및 50만 국민당군 화남상륙을 계획했다. 장제스 에겐 대륙수복의 적기였지만 트루먼은 전쟁의 확대를 우려해 맥아더를 해임해 버렸고 이제는 누구도 대만이 대륙의 한자락 땅이라도 얻을 것이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고위층에도 대륙 출신이 줄어들고 대만 본성인이 늘어나는 현재에는 오히려 대만의 탈 중화 가능성이 높아지는 중.

장제스 본인은 루즈벨트에 꽤 호감을 품은 모양으로 루즈벨트를 처음 만났을 때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5.11. 윈스턴 처칠

꽤 험악했지만 상대방이 뛰어난 인물임을 인정했다. 윈스턴 처칠은 전통적인 제국주의자였고 장제스는 영국을 침략자들로 보아 매우 혐오했다. 이후 홍콩 문제나 조계지 문제로 영국과 중국은 사사건건 충돌했고 중일 전쟁이 터지면서 협력 관계가 된 후에도 영국은 장제스가 동남아에 영향력을 확보할까봐 중국과 험악한 사이였다. 또한 전후 처리에(특히 일본의 식민지 처리) 대해서도 의견이 갈렸는데 장제스는 조선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반면에 처칠은 이에 대해서 애매한 입장이었고 장제스가 만주, 타이완의 회복을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재점령' 야욕이라고 상당히 좋지 않게 보았다. 게다가 처칠은 끝까지 장제스를 카이로 회담에 불러오는 것을 반대했으며[20] 불러온 다음에도 피라미드 관광이나 시키자는 입장으로 중국을 우습게 봤고 결국 중영의 험악한 관계는 카이로 회담 내내 지속되었다. 그래도 처칠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조용하고 신중하며 민완하다고 평가했다. 또 처칠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장제스가 공산당에 패하고 대만으로 물러난 것은 애석한 일이며 자신은 카이로에서 장제스, 쑹메이링과 촬영한 기념 사진을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하는등 나름의 애정(?)도 있었던 모양. 그냥 공산당이 싫었던게 아닐까?

장제스도 처칠을 제국주의자 우두머리라고 욕하곤 했으며 카이로 회담 도중에는 이런 악감정이 더 심해져서 루스벨트와 동렬에 놓을 수 없으며 속이 좁고 교활하며 이기적이며 완고하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이로 회담 이후에는 처칠이 그래도 걸물이라고 인정했다.

5.12. 김구

장제스와 김구

비교적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훙커우 의거 이후 장제스는 김구의 최대 후원자였고 장제스는 김구가 죽은 이후에도 김구를 항일 동지라고 높였으며 김신을 집안 사람처럼 대우하는 등 김구와 자신의 인연에 대해 수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임시정부가 1940년 광복군을 조직했을 때 행동 준승을 만들어 국민당 통제하에 두려 하였다. 광복군이 일종의 군벌화 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 이것이 풀린 것은 1944년이다.

5.13. 그 외의 군벌들

  • 리쭝런(이종인) : 장제스의 가장 오래된 군벌 동지임과 동시에 최대 정적 중 하나. 반란을 거듭하다가 중일 전쟁 직전에 다시 한편이 되었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국공 내전 중에 장제스는 이 양반에게 총통 자리까지 잠시 내줘야 했다. 하지만 대만으로 망명한 후, 다시 오너가 자리를 잡자 바지 사장 리쭝런은 축출되어 미국으로 갔고, 미국에서 생활고를 겪던 중 중공 측이 접근해 좋은 대우를 약속하자 대륙으로 귀환하여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 바이충시(백숭희) : 리쭝런과 함께 광시계 군벌로서, 장제스에 반역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는 그를 신용하지 않았다. 작은 제갈량이라 불리는 뛰어난 능력으로 여러 차례 중일 전쟁에서 유의미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런 반역 경력 때문에 장제스는 그를 총참모장으로 기용하라는 스틸웰의 제안을 거부하고, 심복 허잉친(하응흠)을 이 자리에 앉혔는데, 허잉친은 바이충시보다도 훨씬 역량이 뒤졌다. 그래도 바이충시는 반역 경험에 비하면 꽤 중용되어 5전구 참모장, 군훈 부장, 구이린 행영 주임을 전쟁 기간 동안 역임했고 전후엔 초대 군정 부장이 되었으며 동북 초비 사령관이 되어 만주 진공 작전을 지휘했다. 장제스의 삽질로 국공 내전의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지자 화중에서 최후의 항전을 지휘하며 창사에서 린뱌오 군대를 개발살내는 등 공산당과의 전투에서도 여러차례 승전을 거두었지만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고 최후의 전역인 하이난 섬 방어에 실패하고 리쭝런의 망명 권유를 뿌리치고 대만으로 갔으나 별 볼일 없이 지냈다.
  • 옌시산(염석산) : 역시나 장제스와는 반목과 동맹을 반복한 군벌 중 하나. 산시의 개인 왕국에서 떵떵거렸으나 처음에는 일본군, 그 다음에는 공산당의 공격으로 결국 영지를 잃어버리고 장제스에게 달려갔다. 실권없는 자리에서 별 볼일 없이 죽어갔다.
  • 펑위샹(풍옥상) : 장제스와 동맹과 반목을 반복했던 수많은 적들 중 하나. 국공 내전 후반기인 1948년에 소련 선박을 타고 귀국하다가 흑해에서 화재로 죽었다고 한다. 크리스천 제너럴, 즉 기독교도 장군으로 유명했으며[21] 군벌 중에선 도덕적이고 소탈한 사람이라서 누가 보면 대군벌이 아닌 노동자나 졸병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한다. 장제스와 왕징웨이 사이를 저울질하다 장제스와 동맹을 맺었으나 반장 전쟁에서 장제스와 반목했고 이후 다시 합쳤다. 국민당의 거물 중에서도 강경한 인물로 봉천파나 일본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태도를 고수했다.
  • 천중밍 : 장제스가 가장 싫어했던 군벌. 장제스의 절강성 사투리[22] 때문에 그는 늘 천중밍의 광둥 출신 참모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고 천중밍이 공공연하게 쑨원을 허풍선이라고 비방하는 통에 쑨원을 존경하던 장제스는 그때마다 반발했다. 쑨원은 장제스와 천중밍 사이의 화해를 주선하려 했지만 둘 다 거부했다. 장제스는 천중밍과의 관계를 끊으라 했고 천중밍은 반대로 저 무뢰배를 내쫓으라고 요구했다. 결국 천중밍이 선빵을 때리면서 쑨원과 천중밍의 관계는 틀어졌고[23] 이후 천중밍은 국민당의 첫번째 공격 목표가 되어 두들겨맞고 패망한다.
  • 위안스카이(원세개) : 장제스가 두번째로 타도하고자 했던 대상이나[24] 꼬꼬마 혁명가였던 장제스와 중국의 지배자인 위안스카이 사이에 딱히 인간적 접점이 있을 리는 없어 크게 서술할 것은 없다. 그리고 위안스카이는 알아서 죽었다
  • 천지탕(진제당) : 광둥의 군벌. 군벌 중에선 장제스에게 고분고분한 편이었으나 장제스 밑에 들어가고 나서도 장제스의 인형을 참수하며 장제스에게 노골적인 반항심을 드러낸 인물. 결국 미신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다 쫄딱 망했다.(...)

5.14. 장제스의 추종자 젭 부시

의외로 장제스의 추종자 중에서 미국의 정치인 젭 부시가 있다. 젭 부시는 장제스를 전설의 신비로운 전사라고 표현하곤 한다. 2005년 당시 자신을 삼촌처럼 따르던 신참 정치인 마르코 루비오에게 검을 수여하면서 아래와 같이 장제스를 찬양했다.

“I told you that we were going to ‘unleash Chang’ on the election. And Marco, being a relatively young guy, didn’t know who Chang was. Chang was a mystical warrior. Chang is someone who believes in Conservative principles, believes in entrepreneurial capitalism, believes in moral values that underpin a free society. I rely on Chang with great regularity in my public life ... Chang, this mystical warrior, has never let me down. (...) I’m going to bestow to you the sword of a great conservative warrior. I know that Chang won’t let you down, and you won’t let him down either.”

"나는 일찍이 이번 선거에서 우리가 '장제스를 출정시킬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그리고 마르코는 아직 상대적으로 젊어서 장제스가 어떤 사람이었지 잘 모를 것이다. 장제스는 신비로운 전사였다. 장제스는 보수의 원칙을 믿고 시장을 믿고, 자유로운 사회의 버팀목이 될 도덕적 가치를 믿는 사람이었다. 나는 나의 공직생활 동안 자주 장제스에게 의지했었다. (...) 신비로운 전사 장제스는 나를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 나는 이제 당신에게 위대한 보수주의 전사의 칼을 수여하겠다. 나는 장제스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며 당신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

검을 수여하던 당시의 사진

6. 이름 표기법

그의 이름 표기는 다양한데,

  • 장제스의 본명은 '장즈칭(蔣志清, Jiǎng Zhìqīng)'이다. 그의 두 번째 이름이 1913년경 바꾼 '중정(中正, Zhōngzhèng)'이다. '제스(介石, Jièshí)'는 본래 1912년경부터 사용한 필명이었으나 이후 자(字)로 사용했다.
  • 이 문서 표제로도 올라와 있는 '장제스'는 '장개석(蔣介石)'의 표준중국어 발음을 국립국어원의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옮겨 적은 것으로, 한어병음의 표기를 따르면 'Jiǎng Jièshí'가 된다. 병음을 보면 알겠지만, 는 권설음이라 한국어 '스'와 다른 발음이다. 만약 온갖 표기 원칙을 무시하고 실제 발음에 가장 가깝게 표기를 하면 지앙지에시으 정도일 듯.
  • 영어권을 비롯해 대부분의 서양 언어권에서는 그의 이름을 'Chiang Kai-shek'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표기는 광동어 발음 '쬥가이쎅(표기법 기준) / Zoeng2 Gaai3-sek6 (홍콩 언어학 학회(LSHK) 표기법 기준)'의 변형이다. 성씨 '蔣'은 표준중국어 발음 기준 웨이드식 표기법인 'Chiang'이고, 나머지는 광동어 발음 표기의 변형. 초기에 중국 국민당의 본진은 광동성에 있었고, 장제스가 두각을 나타낸 때가 광동 국민 정부 시절이었기에 광동어식 발음으로 서구에 알려졌다. 영어 위키 백과 해당 항목명도 'Chiang Kai-shek'. 드물게 표준 중국어 발음을 웨이드 식으로 옮긴 Chiang Chieh-shih도 쓰이기는 한다.[25]
  • 한국의 경우 국립국어원의 중국어 표기법에서 신해혁명 이후 중국 인물에 대해서는 한자 인명을 표준 중국어 발음으로 옮겨 적는다는 원칙을 두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장제스'라는 표기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한국 한자음 그대로 표기해 '장개석'이라고 한다.
  • 대만에서는 '蔣介石'보다도 본명을 적은 '蔣中正'이 더 널리 쓰이며(표준 중국어 발음으로 'Jiǎng Zhōngzhèng'. 한국 한자음과 비슷한 '장중정'으로 읽는다.), 대만 내 영어 표기에서는 'Chiang Kai-shek'을 쓴다. 대만어 발음으로는 Chiúⁿ Kài-se̍k. 간단하게는 중정/C.K.S.으로 쓴다.
  • 일본에서는 '蔣介石'을 자신들 방식으로 읽어 'しょうかいせき(쇼카이세키)'라고 한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중국 인명을 표준중국어 발음에 따라 표기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있고, 그나마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에 활약한 인물은 거의 그렇게 표기하지 않는다.
  • 베트남에서는 '蔣介石'을 베트남식 독음으로 읽어 Tưởng Giới Thạch(뜨엉 저이 타익, 또는 뜨엉 저이 탓)으로 부른다. 베트남은 중국 인명을 표준중국어 발음으로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고 거의 일괄적으로 베트남식 독음으로 읽고 쓴다.

7. 트리비아

  • 종교는 기독교(감리교)였다. 아내인 쑹메이링과 아들인 장징궈도 기독교인. 원래 쑨원을 포함한 중화민국 및 중국 국민당의 초기 정치적 주요 인사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장제스가 처음부터 기독교인이었던 건 아니고 쑹메이링과 결혼하면서 개종을 한 것이다. 쑹메이링이 장제스와 결혼할 때 내건 조건 중 하나였다고.
일본의 항복 직후인 1945년 12월 3일에 걸린 것으로, 지금의 마오쩌둥 초상보다 컸는데, 고작 3년 1개월 만에 내려지게 되었다.
  • 장제스의 사진이 톈안먼에서 내려진 것과 달리 난징 총통부 안의 옛 집무실에는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중화 인민 공화국 건국 이래 옛 총통부 건물은 한국으로 치면 도청(道廳)에 해당하는 장쑤 성 정부 청사 등으로 쓰여왔다. 따라서 건물을 제외하면 장제스 및 국민당과 관련된 상징물이 지속적으로 남아있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던 정부 기관을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고 옛 총통부 건물을 사적으로 지정했다. 1990년대 후반 옛 총통부는 태평천국 및 근대 역사 박물관이 되었고, 2003년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이 초상화는 박물관으로 재개장할 때 만든 것으로 장제스가 집권하던 시기에 저 초상화가 걸려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여기가 그의 집무실이었다는 상징적 의미가 강한 물건이다. 가끔가다 대만의 젊은이들이 난징 국민당 청사로 가 청천백일기를 들고 인증샷을 찍기도 한다.
  • 비록 대만으로 도주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금성에 있던 진귀한 역사적 유물의 핵심을 보존해 대만으로 실어왔다. 이 유물들은 중국의 여러 황실에서 계속 모아온 보물 중의 보물로 지금까지도 중화민국이 가진 가장 큰 보물로 꼽힌다. 정말 문화적인 면에서는 중화민국의 유물 보존 노력이 많이 도움이 되었고 현재 유물을 전시 중인 고궁박물원을 세계 4대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장제스가 유물을 이전한 이후 자금성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아 관광객을 맞이하기도 했는데, 이후 중국 정부가 대륙 전체에서 유물을 수집해 양적으로는 과거의 규모를 능가했지만 질적으로는 국립 고궁 박물원의 그것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장제스가 자금성의 유물을 가져가지 않았다면 그 유물들은 문화대혁명 시기를 무사히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다.[26] 현재 대만 고궁박물관과 북경 고궁박물관을 비교한다면 대만쪽이 명, 청 및 근대시기 유물이 많고 본토에는 고대시대 유물이 많다고 한다. 당연한 것이 장제스가 유물들고 대만에 넘어갔을 쯤 에는 전제왕조 시절 부터 쌓여있던 오리지널 유물을 가져간거고 그 후에 대약진운동이야 문혁이야 를 거치고 난 뒤 좀 안정됐을때 좀 더 발전된 고고학 기술을 이용해 발견된 유물들이 많기 때문이다.
  • 타이베이 북부의 스린(士林)에는 그와 부인 쑹메이링이 국공 내전 직후 후퇴한 1949년부터 26년 동안 거주했던 총통 관저[27]가 있는데, 1975년 그가 타계한 곳이기도 하다. 2000년대부터 일반에 공원 및 사적지로 개방되어 관광객을 맞고 있다. 공원은 무료지만 관저는 NTD 100달러를 내야 한다.그리고 대중교통이 시원치 않다
http://www.culture.gov.taipei/d_upload_tca_pro/cms/image/A0/B0/C0/D0/E10/F405/c5fc73cf-f6d9-4665-bb22-84b6346ae2c7.JPG2층 구조로 장제스 부부가 사용했던 서재, 침실, 각종 사진, 소장품, 그리고 외국 귀빈과의 접견실 등이 마련되어 중국 현대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가볼만한 곳이다. 아쉽게도 내부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관저 2층에는 장제스와 쑹메이링 여사의 침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이는 군인 출신인 장제스가 규칙적인 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 기상과 취침 시간이 빨랐던 반면, 쑹메이링은 올빼미 스타일로 밤에도 독서와 취미 활동[28]을 해서 서로 취침 시간이 맞지 않았던 점을 반영한 결과다.
  • 오늘날 대만에서는 쑨원과 장제스, 장징궈의 캐리커처형 인형을 과거의 적수였던 공산당의 마오쩌둥, 덩샤오핑 인형과 함께 만들어 기념품으로 팔고 있다.
중정 기념당을 포함한 장제스 관련 사적지에서 이런 인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엔 마잉주와 시진핑의 인형도 추가되었다.
  • 장개석은 살아 생전 자신에 대해 교장 선생님이란 호칭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박사님이라는 호칭을 좋아했던 누구처럼 [29] 그는 황푸 군관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는데, 이 황푸 군관 학교 시절이 애착이 강했다는 것. 이 호칭에 따라 그는 직계 / 방계를 구분했었다고 한다. 국부천대 이후에도 국립정치대학의 총장(중국어로는 '교장'이라고 한다) 직을 죽을 때까지 겸임했다. 그러니까 장개석은 국립 정치 대학의 '교장 선생님'이기도 했던 셈(물론 실제 업무를 하는 총장은 따로 있긴 했다). 장제스가 아직 기력이 남아있었을 시절에는 국립 정치 대학에 때때로 강연을 나가기도 했던 모양이다. 쑹추위2016년 총통 선거 출마 선언 직후에 대만 TV와의 인터뷰에서 국립 정치 대학에 다니던 리즈시절에 장개석을 강단에서 처음 봤다고 말하기도 했다.
  • 여러 모로 말투가 굉장히 험해서, 외국 외교관들과의 대화를 아내인 쑹메이링(송미령)이 번역하는 데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 아, 여보, (씨발) 욕 좀 쓰지 마! 장징궈가 사실상 후계자가 된 후 쑹메이링은 찬밥 먹는 신세가 되어, 국부천대 이후엔 미국에 거주하게 된다.
  • 유명한 카이로 회담에서 담소하는 장제스 사진은 연출이다. 장제스는 영어를 전혀 못 했고 회담 내내 본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상덕 전투의 불리한 전황과 이를 자꾸 캐묻는 미국과 영국 때문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다만 쑹메이링의 활약으로 회담 자체는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 1940 - 1960년대의 전설적인 여배우 이려화(李麗華)의 팬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 <양산백과 축영태(梁山伯與祝英台 1964년)를 측근들과 함께 여러 번 반복해서 보기도 했었다고 한다. 사진은 1957년 12월 10일에 신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려화 - 엄준(嚴俊) 부부를 초청하여 찍은 것이다.
  • 장징궈의 동생(?)인 장웨이궈(장위국, 蔣緯國)는 원래 장제스의 아이가 아니라 손문의 동지이자 신해 혁명에 참가하였던 다이지타오(戴季陶)가 일본 여자와 관계해서 낳고 키울 수 없어서 맡은 아이로 알려져 있다. 이 아이에게 자기의 성과 항렬까지 준 대인배였고 장웨이궈는 독일 유학파 장교로 강하엽병 장교로 오스트리아 병합에 참가한 바 있다.[30] 장웨이궈의 혈통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고 장제스의 친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 장제스가 고자였다는 것은 확실하나 언제 생식 기능을 상실했는지에 대해선 말이 많다. 내가 고자라니 까지 둔 걸로 봐서는 성관계는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장징궈는 장제스의 아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씨라는 말도 있는데, 이게 장웨이궈의 일방적 주장이고 장징궈를 엿먹이려는 의도가 강해서 신빙성이 없는 걸로 판단된다. 장제스가 고자가 된 시기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은 장제스의 두 번째 부인인 천제루(陳潔如)의 회고록에 나와있는 대로 장제스가 30대 초반에 상하이의 윤락가들을 들락거리다 성병을 옮아 부고환염에 걸려 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제스는 자신의 성병을 아내에게 옮겨서 천제루까지 불임의 몸이 되었다.(...) 다만 천제루도 장제스가 장제스의 모친인 왕차이위의 불륜의 결과물이라고 하는 등 신빙성이 없는 주장을 하기도 해서 수상쩍기도 하다. 어렸을 때 고환을 화로에 데어 그 여파로 고자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 무척이나 무뚝뚝하고 웃지도 않고 과묵한 성격으로 젊은 시절 이후로 술 담배를 끊었으며[32] 차조차도 사치라고 즐기지 않았지만 고향인 저장 성 특유의 생선 요리를 무척 좋아하여 대만에 가서도 저장 성 생선 요리를 먹을 때면 생선의 풍미에 대해 얘기하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곤 했다 한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은 내가 살다살다 담배 안 피우고도 오래 사는 인간은 장제스 말고 본 일이 없다고 50년대에 장제스를 까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런 말이 나올만한 게 그때는 담배가 건강에 안 좋다는 것이 잘 알려지지 않기도 했고, 마오쩌둥은 장제스와는 대조적으로 하루 50개비씩(두 갑 반) 꼬박꼬박 피운 골초였다.
  • 증손자인 장여우보(장우백, 蔣友柏)가 매우 미남이라 한때 화제가 되었다.

인물 주간 - 나의 증조부 장제스

대만 여성이 뽑은 멋진 남자 2위에 올랐던 적도 있다. 그는 장징궈의 3남 장샤오융(장효용, 蔣孝勇)의 아들이로, 장징궈의 아내 장팡량(장방량, 蔣芳良)이 소련 출신이라 장제스의 손자 대부터 혼혈 외모가 나타나는 것.[33] 그는 미국 유학 후 대만에서 광고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진정한 엄친아. 반대 급부로 마오쩌둥의 유일한 손자인 마오신위(모신우, 毛新宇)는 후덕한 외모로 비교가 되기도 했다. 대만과 대륙의 여성 네티즌 사이에선 얼굴로 증조 할아버지의 숙원인 대륙을 탈환해달라는 반응도 있다. 정치와는 큰 관련을 맺지는 않지만 장제스의 대만 통치에 대해 반성의 태도를 나타내는 등 장제스에 대해 여타 장씨 가문 인사들과 다른 인식을 보여 화제를 모은 바 있다.한편 장여우보의 동생인 장여우칭(장우청, 蔣友青)은 모교인 타이베이 아메리카 스쿨에 "교사와 학생을 다 죽이겠다", "학교를 폭파하겠다"는 등의 협박을 일삼은 죄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 환빠들 중 상태가 특히 안좋은 일부 환빠들은 장제스가 중일 전쟁 종전 후에 만주족의 본거지인 만주에 치를 떤 나머지 만주를 조선에 양도하려 했지만 마오쩌둥이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장쉐량을 천하의 개쌍놈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몽골조차도 중국 땅이라도 하는 장제스가 만주를 포기? 정말 아낌없이 주는 나무군요!
  • 2차 세계 대전 당시 주요 연합국 지도자 중에 장제스는 마지막 생존 인물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1945년 졸), 조지 6세(1952년 졸), 이오시프 스탈린(1953년 졸), 윈스턴 처칠(1965년 졸), 클레멘트 애틀리(1967년 졸), 해리 트루먼(1972년 졸)에 이은 마지막 사망자. 하지만 중화민국의 몰락으로 인하여 대개 고려되는 경우가 크게 적다. A.J.P 테일러의 2차 세계 대전의 기원에서도 주요 연합국 지도자들을 언급하면서 당시 생존해 있던 그를 빼고 당시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지도자들 중에 살아있는 것은 드골과 처칠 뿐이며 그중에서 현역에서 정치를 하는 건 드골 뿐이라고만 한다.
  • 장제스의 증손자 중 하나인 장완안(蔣萬安, 장만안)은 장징궈(장경국)의 비서이자 내연녀 장야뤄(章亞若) 사이에서 난 자식의 아들이다.
장징궈의 본처 장팡량이 장징궈의 친자식으로 인정하는 것을 반대하는 바람에 내연녀의 성을 따라 章씨였다. 후에 장팡량이 죽고 장씨 가문에서 인정받아 2005년 3월에 蔣씨로 성을 바꿨다. 이후 2007년도에 2.28 사건의 최고 책임자가 장제스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 나오자 명예 훼손이라며 저자를 고소하기도 하였다. 이후 장완안은 2016년 제9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에서 타이베이시 3선거구(중산구, 쑹산구)에서 중국 국민당 후보로 국회의원(입법위원)에 당선되어 국회 의원으로 활동중이다. 수려한 외모와 참신한 이미지 덕분에 인기가 매우 높아 정계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국민당의 차기 주자 중 하나로 예상되고 있다.

장제스의 실제 육성 연설 중 하나. 중일전쟁 승전 연설(중 일부)이다. 표준중국어로 하긴 하는데 발음이 영 좋지 않은데 저장성 지역의 방언인 오어를 오랫동안 썼기 때문이었다.[34] 타이베이에 있는 중정기념당에서 전문을 재생해주니 갈 수 있는 위키니트는 들어보자.

8. 한국과의 관계

장력제장제스는 임정의 외국인후원자로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해주었다.(또한 얄타 회담에서 이를 재확인했다!)

1932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남의사 계열이나 CC파를 통해 지원하였고, 난징 중앙 군관 학교 분교 지원금을 김구에게 보내줘서 이범석 등의 걸출한 독립 운동가들이 나올 수 있었다. 한국 광복군 창설에도 장제스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물론 장제스가 생색도 냈고 광복군 창설 당시에는 "한국 광복군 9개 준승 사항"이라 하여 활동을 제약한 편이라고는 하나, 별다른 기반이 없었던 망명 정부에 불과한 임정과 광복군은 그것만 해도 받아들여야 했다.

장제스가 임정을 지원한 데는 한국이 독립하면 중화민국의 위성국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의혹이 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은 한국, 태국, 류큐의 독립을 목표로 삼았고 전후 류큐와 17도 이북의 인도차이나를 할양하겠다는 제의까지 거부했을 정도로 장제스가 영토 확장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35] 이러한 계열의 해석은, 장제스의 의도를 나쁘게 보더라도 한반도에서 일본을 떼어놓고 신생 독립국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려는 생각 이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보는 듯 하다. 당시 (대륙 시절)중화민국 신문이 한국의 정세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한 것으로 봐서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 미국 쪽의 장제스 기록이나 연구는 장제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관련 기사등을 참고할 것.

1942년 11월 장제스의 처남이자 외교 부장이었던 송자문(쑹쯔원)이 외교 부장으로 취임하고 가진 첫 기자 회견에서 만주타이완의 중국 복귀를 주장하고, 조선이 전후에 독립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듬해 7월 장제스는 임정 간부들을 맞이한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을 강대국 정상들과의 회의에서 합의를 얻도록 "힘써 싸우겠다(力爭)"고 약속했다.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 출발 전에 휘하의 군사위 참사실에서 올린 의제로 중국 영토 회복 다음으로 한국 독립 승인 건이 올라 있었고, 국방 최고위 비서청에서 올린 의제에도 정치 부문에서 첫머리에 한국 독립 건을 내세웠다. 장제스가 카이로로 떠나기 바로 전날의 일기(1943년 11월 17일)에도 회담의 의제를 기록했는데 조선 독립 항목이 들어가 있고, 의제 전 항목도 국방 최고위에서 제출한 내용과 같았다. "중국, 미국, 영국, 소련이 즉시 한국의 독립을 공동 혹은 개별적으로 승인하거나,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선언을 한다"는 조선 독립 조항을 위한 교섭 지침까지 제시되어 있었다.

장제스의 한국 독립에 대한 의지는 강고했다. 회담 중 걸림돌이 발생할 경우의 전략까지 언급했는데 "한국 독립 조항이 미·영의 반대로 합의가 되지 않아 선언에 삽입할 수 없게 된다면, 중국 단독으로 일방적으로 일본 패망 후에 한국의 즉시 독립을 지지한다"는 강경한 방침을 정했다. 당시 영국은 인도 문제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염려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소련 역시도 일본과 중립 조약을 맺은 관계로 의견 제시가 어렵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장제스는 영국 때문에 미·영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면, 미국이 주저하게 되겠지만 중국이 독단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면, 세계는 연합국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고 보게 되고 이러한 사태가 오기 전에 결국 영국과 미국의 타협안이 나오게 될 것이라는 치밀한 시나리오였다. 결과적으로 카이로 선언은 중국의 판단대로 흘러갔고 장제스의 강경한 태도에 반대 입장을 피력한 영국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회담 후에 장제스는 한국 독립 조항을 넣은 것을 자신의 '유례없는 외교적 성공(Unprecedented Diplomatic Success)'이라고 일기(주간 회고 부분)에 적었다. 출처

http://dams.pa.go.kr:8888/dams/AUDIOVISUAL/2010/10/09/IMG/SRC/0401201010095393600053936011390.JPG

이승만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안 좋았다. 해방 직전에 한국이 해방되면 누가 한국의 대표로 UN에 출석할 것일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장제스의 처남이자 중국의 외교 부장인 송자문(쑹쯔원)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표로 나섰던 김구, 이승만, 한길수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한길수야 처음부터 송자문에게 줄을 대고 있었고 김구는 장제스의 지원을 받는 입장이니 당연히 응했지만 이승만은 이 요청을 씹었고 기분이 상한 송자문은 이승만에 대해 장제스에게 안 좋게 말했다. 당연히 장제스는 이승만은 무시하고 한국의 차기 지도자로 김구를 지지했다. 장제스가 김구에게 준 20만 달러의 독립 자금의 사용처를 두고도 두 사람은 충돌했었다.

이후 기선을 잡은 것은 이승만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49년 8월에 이승만의 별장이 있는 진해에 장제스가 방문하자 이승만은 그에게 "당신처럼 분열이나 조장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고 차라리 마오쩌둥이 훨씬 믿음직하니 앞으로 한반도 문제는 마오쩌둥 주석하고만 논의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고. 근데 마오 주석과 회담했으면 아마 한국이 지도상에서 사라졌을수도 이에 이미 그에게 밀려 타이완으로 쫓겨나기 직전이던 장제스는 송자문 탓을 하며 이승만을 대형이라고까지 부르면서 사과했다는 말이 있다.(...) 아...안습 근데 이 일화에 너무 의미를 둘 것은 없는 것이 대형이란 칭호 자체가 당시 중국에선 굉장히 헤픈 칭호였다. 장제스가 형제 운운했던 사람들 중에선 그와 적이 된 사람도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펑위샹이나 리쭝런. 그 둘과도 의형제 결의를 맺고 하하호호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의 의도가 어쨌건 현실에서는 중화민국이 대륙에서 밀려난 결과, 한국을 위성국화 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작금에 와선 물 건너간 소리가 되어버렸다. 한국도 결코 큰 나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중화민국의 남은 영토인 타이완 섬은 거리도 멀 뿐더러 한국의 1/3을 조금 넘는 수준의 섬이 영토의 거의 전부인 한국보다 많이 작은 나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

장제스에게 수여된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정 기념당에 전시되어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공헌을 기려서 건국 훈장을 수여하였다. 북한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6.25 전쟁을 말아먹어 중공의 타이완 침공을 무산시켰다 카더라. 이후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그의 부인 쑹메이링, 쑨원, 천궈푸, 천치메이와 같이 임시 정부와 한국의 독립 운동을 도운 중화민국의 정부 요인들에게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1966년 타이베이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의 모습.

박정희 대통령과는 이념적 반공 동맹을 유지하는 우호 관계였다. 하지만 대만이 국제 연합에서 추방당하고 미국에게도 버림받자 박정희 정권도 슬슬 중국과 접촉을 시도하는 등 장제스의 애간장을 태웠다. 하지만 한중 수교 때까지 한국과 대만은 현실적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김구와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고 김구의 아들인 김신의 안가를 주선해 주는 등 인연이 깊었다. 1962년 김신이 공군에서 예편하여 대만 대사로 부임하자 몹시 반가워했으며 김신에게 "나는 자네를 일개 대사로 생각하지 않네. 자네 부친과 나는 항일 투쟁 동지였으니 자네는 나의 집안 사람이나 다름없네."라고 환대했으며 복잡한 의전을 생략하고 김신과는 정말 가족을 불러올 때처럼 허물없이 자주 대화하곤 했다고 한다. 과묵하고 웃지도 않는 장제스였지만 김신과 함께 있을 때는 자주 웃고 떠들었으며 장제스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경호원들이 김신을 데려와서 장제스 기분을 풀어줄 정도였다 한다.[36]

1963년 한국에 대흉년이 들어서 긴급히 쌀을 사와야 할 일이 있었는데 박정희 국가 재건 최고 의장은 김신 대사에게 대만에서 쌀 5만 톤을 사올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대만에서도 흉년이 들어서 한국에 쌀을 팔 여유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대만 행정원장은 쌀을 팔 수 없다고 김신을 돌려보내야 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장제스가 즉각 국무 회의를 소집하여 한국에 쌀을 팔 것을 지시했다. 장관들이 반대했지만 장제스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김신을 쌀 5만톤을 사서 한국에 보낼 수 있었다. 이에 김신이 장제스에게 감사를 표하자 장제스는 우리가 대륙을 아직까지 갖고 있었다면 그까짓 5만 톤이 아니라 55만 톤 정도는 거저로 주었을 것이라고 한국 같은 각별한 나라에게 쌀을 돈 받고 팔아야 하는 것이 애석하다며 오히려 미안해했다고 한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했을 때는 박정희의 손을 잡으면서 "내 나이가 이제 80이 다 되어가니 아시아의 반공 지도자는 박 대통령이 이으시오"라고 말했다 한다.

1975년 장제스가 타계하자, 한국 정부에서는 당시 국무 총리였던 김종필을 대표로 조문단을 파견했다. 관련 영상

결론적으로는 한국의 독립과 건국에 도움이 되었던 인물이다. 혹여나 세간의 의혹처럼 당초 품었던 속셈[37]이 있었더라도, 2차 대전 후 마오쩌둥에게 쫓겨 대만으로 도주하게 되면서 그것을 실행에 옮길 기회가 없어졌기 때문에, 결국 정말 한국에 도움만 준 인물이 되었다.

얼마나 제한맨인지 한국이 북한에게 멸망당할뻔하자 당시3만명의 대만군을 파병하겠다며 맥아더에게 제안했다. 물론 거부당했다.그대신 정보부대등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 중심으로 소수의 부대를 파병했다. 물론 근거는 우방인 한국을 위해서 라고하지만 기회를 이용해 본토수복을 위해서였다. 한국에서 남아있는 대만군출신 참전용사들을 먹여살리고있다.

9. 매체에서

9.1. 역사서

  • 장제스의 저서라 알려진 중국의 운명이 1946년(!) 한국에 출판된 적이 있는데 지금은 고서점에서나 겨우 구경할 수 있는 수준...
  • 1970년대 말부터 대만의 전폭적인 지원[38]을 받아 일본의 산케이신문에서 연재 후 출판한 '장개석 비록'이 있다. 한국에선 1976년 6권으로 출판되었으나 옛날에 절판되어서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현재도 판매되는 서문당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가 장개석 비록의 짭퉁(...)인지라 정히 보고 싶다면 이쪽이 있다. 이쪽은 원래 1986년에 출판되었다가 2014년에 재판되었는데 재판을 대충했는지 곳곳에 오탈자가 많으며 문체나 편집 스타일 자체도 좀 예스럽고 장징궈가 아직도 현 중화민국 총통이라고 되어 있는 등(...) 옛날에 나온 책이라는 티를 좀 낸다. 여담으로 이후 산케이 신문에서는 마오쩌둥 비록 역시 내놓은 바가 있다.
  • 장제스는 1915년부터 1973년까지 57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붓으로 일기를 썼다.[39] '제요(題要)'라는 제목 아래 그날 있었던 주요 사건과 알게 된 과정을, '예정(豫定)'이라는 제목 아래 급히 해야 할 일을, '주의(注意)'라는 제목으로 정세 평가와 판단, 유념할 일을 적고 '기사(記事)'라는 제목 아래 그날 한 일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매주마다 반성할 점과 다음 주에 할 일을, 매달마다 반성할 점과 그달 있었던 사건들을 적었으며, 매년마다 반성할 점을 적어두고 빠진 기록들을 보충해놓았다. 주위 인물에 대한 평이나 쌍욕, 또는 검열삭제 관련 기록을 적어두기도 했다. 미국 후버 연구소가 유족으로부터 이걸 빌려와 2006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일기를 공개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국부천대 이후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공개가 되어있지 않다.[40] 허나 절대로 웹 공개를 허락하지 않으며 보고 싶으면 후버 연구소에 열람을 신청하고 다시 후버 연구소가 장제스 유족들에게 허락을 받는 식으로 진행하여서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보기 복잡했을 뿐더러 이후 저작권 문제가 복잡해져서 장제스의 남은 유족들이 누구 맘대로 일기를 후버 연구소에 기증했냐고 소송을 걸어서 현재는 읽기가 좀 복잡해진 상태다. 한편 1917년 이전의 일기의 일부는 어찌된 이유인지 장제스의 은사가 보관하고 있다가 문화대혁명 시기에 발견되어 현재 대륙에서 전시하고 있다.
  • 레이 황[41] 교수가 1930년대과 70년대에 일부 공개된 일기를 바탕으로 <장제스 일기를 읽다>(從大歷史的角度讀蔣介石日記)란 책으로 내놓은 바가 있다.
이는 위에 언급한 공개된 일기가 아닌 일기의 공개 이전에 나온 부분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다. 레이 황 교수는 2006년의 일기 완전 공개가 있기 전인 2000년에 타계했다. 그래서 장제스 일기를 읽다의 역자의 말을 보면 번역이 너무 늦어져서 죄송스럽다는 역자의 말이 남아있다.[42] 타이완 출판 버전과 미국 출판 버전이 다른데, 미국 버전은 미국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 스틸웰-장제스 불화나 카이로 회담 등에 관한 내용을 더 많이 넣었다고 한다.
  •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조너선 펜비 경이 저술한 장제스 평전이 있다. 한국에선 2014년 민음사에서 정발했다. 원서가 나온 시점이 장제스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인 2000년대 초반인데 이를 감안하면 꽤나 전향적인 장제스 재평가를 이뤄내서 '공정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대 언론 보도나 편향된 일부 자료를 사용하고 사실 관계에서도 일부 오류가 발견되는 등 지금 보기엔 좀 비판점이 있으나 그래도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지금까지 한국에 들어온 유일한 장제스 평전.
  • 미국의 외교관 출신인 제이 테일러가 집필하고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장제스 평전(The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and the Struggle for Modern China)이 있는데 이건 국내에 정발되지 않았다. 조너선 펜비의 책보다도 전향적인 장제스 재평가를 시도한 책 중 하나다.
  • 당연하지만 대만에서는 장총통전을 비롯하여 장제스를 칭송하는 저작들을 내놓았으나 이런 저작들의 학문적인 질은 중국 국민당 등 대만의 보수세력들의 정치적 목적이 다분한 만큼 의심해봐야 한다.
  • 본토에서는 장제스를 항일 지도자로 높이 평가하는 여론이 조성되면서 장제스 평전이 출간되는 등 장제스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9.2. 창작물

1989년에 제작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40주년 기념 영화 개국대전의 장제스는 그야말로 간지 폭풍의 인물로 나온다. 배우 쑨페이후가 분했다.

2009년에 건국 6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영화 <건국대업>에서도 재평가된 장제스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장국립이란 배우가 분했는데 마오쩌둥만큼은 아니지만 근엄한 걸물로 나오며 국민당은 국민당 손으로 망했다고 씁쓸하게 읊조리며 퇴장하는 등 가볍게 나오지 않았다.[43]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대립하면서도 나름대로 중국의 발전과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인물로써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타이완으로 쫓겨나기 직전 장징궈와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2000년 중국 CCTV에서 만든 공산당 창당 80주년 기념 드라마 장정에선 건륭제 전문 배우 진도명이 장제스 역을 맡았다.

이후 진도명은 중일전쟁 중의 허난성 대기근을 다룬 2012년작 1942(영화)에서 또 장제스 역을 맡았는데 여기에서 장제스는 카리스마는 있으되, 기근에 허덕이는 국민들은 별로 신경 안쓰는 암군으로 그려진다.

난징 대학살을 다룬 영화 존 라베에서도 잠깐 나오는데 큰 비중은 없다.

10. 주요 경력

중화민국 역대 주석

초대

2대

대행

탄옌카이

장제스
(1928년 10월 10일 ~ 1931년 12월 15일)

린썬

3대

대행

4대

린썬

장제스
(1943년 8월 1일 ~ 1943년 10월 10일

장제스

대행

4대

(중화민국 총통 선출)

장제스

장제스
(1943년 10월 10일 ~ 1948년 5월 20일

난징 국민정부 역대 행정원장

대행

2대

대행

쑹즈원

장제스
(1930년 11월 24일 ~ 1931년 12월 15일)

천밍수

4대

5대

6대

왕징웨이

장제스
(1935년 12월 16일 ~ 1938년 1월 1일)

쿵샹시

6대

7대

8대

쿵샹시

장제스
(1939년 12월 11일 ~ 1945년 6월 25일

쑹즈원

8대

대행

9대

쑹즈원

장제스
(1947년 3월 1일 ~ 1947년 4월 23일)

장췬

11. 참고 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제스의 전반적 생애 관련.
  • 중일 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일 전쟁 시기와 공업화 관련.
  • 중국 혁명사, 서지영, 한울 아카데미 - 장제스의 농업 정책 관련.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 - 난징 10년 관련
  • 덩샤오핑 평전, 벤자민 양, 황금가지 - 국공 합작 결렬과 상하이 쿠데타, 펑위샹 관련.
  •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로이드 이스트만, 민두기 역.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도서 출판 삼화 - 초공 작전 관련.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 역사 - 중일 전쟁 관련.
  • 중일 전쟁과 중국의 대일 군사 전략, 기세찬, 경인 문화사 - 중일 전쟁 관련.
  • 모택동의 사생활 1~3권, 리즈수이, 고려원 - 반우 운동 관련.
  • 장칭, 정치적 마녀의 초상, 로스 테릴, 교양인 - 장칭의 난징 정부 회상 관련
  • 학문의 제국주의, 폴 코헨, 순천향 대학교 출판부 - 서양 학계 시각 비판 관련.
  • 남경 정부 시기 국가 주도하 국민 경제 건설, 강명희, 한세 대학교 - 장제스 경제 정책 관련.
  • 1930년대 농촌 위기와 남경 국민 정부의 농업 정책, 아주 대학교 - 장제스 농업 정책 관련.
  • 1920~30년대 난징 국민 정부의 농촌 정책 : 장쑤 성을 중심으로, 박정현, 고려 대학교 - 장제스 농업 정책 관련.

12. 관련 문서

12.1. 인물

12.1.1. 국민당 계열

12.1.2. 공산당 계열

12.1.3. 군벌

12.1.4. 가족

12.1.5. 열강

12.1.5.1. 미국
12.1.5.2. 일본
12.1.5.3. 영국
12.1.5.4. 소련

12.2. 사건

12.3. 단체

12.4. 기타


  1. [1]중화인민공화국 저장 성 닝보시 펑화시(오타가 아니다)
  2. [2] 안장 지점 : 중화민국 타오위안 시 다시 구 츠후
  3. [3] 다만 친부는 다이지타오라는 것이 정설이고 본인도 생전에 이를 인정했다.
  4. [4] 이는 특정 국가나 세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 거의 모두에 해당한다. 일례로 마오쩌둥의 평가는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고 중원을 통일한 혁명가이자 영웅이라는 평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부라는 평가에서부터 여러 삽질로 수많은 인민을 죽인 무능한 독재자이자 학살자라는 평가 등으로 갈린다.
  5. [5] 이것은 량치차오의 신민설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6. [6] 거부하긴 했지만 중일 전쟁 발발 직전에는 이미 제헌 의회를 위한 총선거가 완료된 상황이었고 1937년 12월 입법원이 열릴 예정이었다.
  7. [7] 예컨대 팩스턴의 견해를 따르면 후안 페론이나 안토니우 살라자르.
  8. [8] 이 사진은 본래 장제스 외에도 2명의 동료 장교들이 쑨원과 함께 찍은 것이었지만, 쑨원의 후계자로서 장제스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다른 2명의 모습을 삭제한 것이다.
  9. [9] 하지만 왕징웨이가 명백히 수세였다. 특히 왕징웨이는 좋지 않은 자신의 건강을 핑계로 결정적인 순간에 매번 유럽 유람을 떠나곤 했는데, 결국 장제스의 공세에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암살 기도로 큰 부상을 입으면서 더욱 몰락하고 말았다.
  10. [10] 소련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공산주의자 들이 중공 초창기를 이끌었고 마오쩌둥은 엄밀히 말하면 듣보잡 이었다. 하지만 책 속에 파묻혀 현실을 직시못한 소련파 들은 결국 장시성에 힘들게 조성한 중화소비에트가 국민당의 5번에 걸친 초공 작전으로 완전 패망 이후 대장정을 거쳐 마오쩌둥이 이끄는 마오이즘 에 밀려 소멸되었다. 소련 입장에선 마오쩌둥이 중국식 공산주의를 만들어 개인플레이를 하는 것이 탐탁치 않았고 이는 후에 중소분쟁 으로 이어진다.
  11. [11] 아시아 대륙 지역 연합국 총사령관은 장제스다.
  12. [12] 그는 기자들 앞에서 “중국 문제는 매우 간단합니다. 우리는 무식하고 문맹이고 미신적인 농민 개자식들과 연맹을 맺은 것입니다.”라고 한 적도 있다.
  13. [13] 엘리트 군인 출신으로 정갈하고 질서있는 생활 패턴인 장제스에 비해 마오쩌둥은 게릴라 스타일에 가까웠고 실제로 대장정 등을 거치며 이론중심 적인 장제스에 비해 실전파 였고 세신 따위는 안중에도 안둘 정도였다. 여담으로 마오쩌둥은 매독을 앓았지만 성기를 씻는걸 거부, 많은 여자들에게 성병을 옮겼다 한다.(.....)
  14. [14] 황푸 군관 학교 시절의 장제스(왼쪽)와 저우언라이(오른쪽).
  15. [15] 이들중 가장 유명한 이가 린뱌오로, 장제스의 제자였던 린뱌오는 제2차 국공 내전에 국민당군에게 만주 방면에서 참패(요심 전역)를 안겨주었고, 이 한판으로 전세는 완전히 공산당 쪽으로 기울었다. 호랑이 새끼를 키운 판.
  16. [16] 국민당 측과 공산당 측의 주장이 다르다. 서로 상대방의 음모라고 주장.
  17. [17] 사실 20세기 중국 군벌 중 최강의 세력을 구축했던건 봉천 군벌 이었고 아무리 젊고 경험이 많지 않더라도 충분히 유용히 써 먹을 수 있던 장쉐량 이지만 장쉐량은 시안 사건 이후 군대는 커녕 세상에 나오는 기회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다. 대신에 봉천군벌의 원로들과 협력하려고 했는데 장징후이 등은 한간으로 변절한 상태였고 우쥔성 등은 죽었으며 장쭤샹 등은 은둔 생활을 고집해서 실패했다.
  18. [18] 중화권 문화에서 시계를 선물로 주는 건 큰 모욕이라 받아들여진다. 마치 죽을때를 재촉하는것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까지 한 걸 보면 장쉐량도 자신의 처지에 달관 한 듯 해 보인다.
  19. [19] 원한이 심할만도 한게 당시 1차 국공내전은 마오쩌둥 및 다른 중공 수뇌부만 잡는 것만 남았는데다 그것도 거의 완수 되어가는 상황이었다. 그 끝무렵에 멈춰버렸고 그 후 중일전쟁을 거쳐 거대해진 중공이 후에 대륙을 완전히 집어삼킨 뒤, 자기는 경상도 만한 섬 으로 쫓겨나는 상황까지 왔는데다 인생 거의 끝자락엔 겨우 얻은 국제사회의 지위도 잃었으니... 기독교인 장제스 에게 최고(苦)의 십자가는 장쉐량이었을 것이다.
  20. [20] 이 부분은 스탈린 역시 마찬가지.
  21. [21] 부하들에게 소방 호스로 세례를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22. [22] 라고는 하지만 중국의 방언들은 8개의 외국어 로 분류 가능 할 정도로 이질적이라 장제스의 오어와 천중밍의 광동어는 전혀 접점없는 언어였고 고로 사실상 외국인과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23. [23] 진형명이 손문의 총통부를 공격하여 손문이 위급할 때에 군함 영풍을 가지고 손문을 상해로 무사히 탈출시킨 것이 바로 장개석이다. 이후 영풍은 이름을 중산으로 개명한다.
  24. [24] 첫번째는 당연히 청나라다.
  25. [25] 2008년 칭화대 교수 왕치(王奇, 왕기)가 Chiang Kai-shek이 장제스임을 알지 못하고 창카이선(常凱申, Cháng Kǎishēn, 상개신)이라는 가공의 인물로 번역하여 크게 망신을 사기도 했다.# 그 이후 '창카이선'과 '창공(常公, 상공)'이 중국 내에서 장제스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쓰이고 있다고...
  26. [26] 라고는 썼지만 자금성 자체가 문혁을 안전하게 넘겼다. 상식인저우언라이가 자금성에 인민해방군을 배치해 홍위병들을 막은 덕에 살아남았다.안 그랬으면 그리스/로마 유적보다 못한 꼴이 되었을 듯
  27. [27] 한국에는 청와대 안에 대통령의 살림집(공관)이 있으나, 중화민국은 밖에 있으며, 거기에서 총통부로 출근한다. 현임 차이잉원의 관저는 리덩후이 집권기 때부터 쓰이는 곳으로 총통부와 약 1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28. [28] 주로 자수, 그림을 했으며, 관저에 걸린 미술품의 상당수가 쑹 여사의 작품이다.
  29. [29] 사실 따지고 보면 장개석과 이승만은 비슷한 점이 꽤 많다. 우선 둘 다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군주정에 대항해 공화정을 제창한 인물들이었다. 일제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데 앞장섰고, 권위주의적인 정치 체제를 고수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었다. 무엇보다 각각 중화민국대한민국의 정식 헌정 체제 수립 이후 초대 국가 원수를 지냈으며, 자기 나라의 보수 우파 세력의 시조라고 할만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둘 다 장기집권에 말년이 좋지 않았다(...).
  30. [30] 일설에는 폴란드 침공 때도 있었다고 한다.
  31. [31] 짱개(중국인) + (조)석 이라서 짱개석이라고 한다...
  32. [32] 다만 중일 전쟁 중에는 담배를 조금 피우기도 했다.
  33. [33] 다만 장징궈에게는 비서와 사통해서 낳은 쌍둥이가 있었기 때문에 이쪽 계통 자손들은 해당되지 않는다. 장징궈 항목 참조.
  34. [34] 장제스는 열혈 중앙집권주의자로 표준중국어를 유일 국어로 밀어 현재도 국민당의 수도 였던 난징은 오어권인 근방과 다르게 관화권 이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본인은 국어가 어색했다. 이는 숙적인 마오쩌둥과 이 둘의 대선배인 쑨원도 마찬가지 였는데 마오쩌둥도 역시 표준중국어만 유일한 공용어로 지원했지만 정작 자신은 고향인 후난성의 샹어를 주로 썼고 죽을때 까지도 표준중국어에 익숙치 않았다. 쑨원의 경우 광동어가 모어이고 정치활동에 쓰던 주 언어는 영어 였다.
  35. [35] 출처 : 장제스 평전
  36. [36] 1975년 4월 7일자 장제스 사망을 다룬 동아 일보 기사.
  37. [37] 작게는 영향력 확대, 크게는 위성국화
  38. [38] 기밀 문서 열람을 허락하는 것은 물론, 장제스의 일기를 비롯한 장제스의 개인 기록들까지도 제공하였다.
  39. [39] 다만 1917년에 푸젠성 지역의 전투에 휘말리면서 1917년 이전의 자료는 일부 망실되었다.
  40. [40]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일기는 시안 사건 때 장제스의 목숨을 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장쉐량은 장제스를 체포했지만, 장제스의 일기를 읽어본 후, (항일을 기피하던) 장제스가 생각보다는 애국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장제스를 처형하려는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41. [41] 본명은 황런위(黄仁宇)로 중일 전쟁에도 참전했던 중화민국군 장교 출신이다. 1950년대 미국으로 유학한 이후, 2000년에 타계할 때까지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다. 전공은 중국 근현대사는 아니고 명나라 경제사다.
  42. [42] 2004년에 원고를 받았는데 중국어 판과 영어 판이 너무도 다른 등 번역에 애로 사항이 꽃피어 2009년에야 완성됐다고...
  43. [43] 다만 실제 장제스를 묘사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장제스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타이완을 잠시 머물 공간으로 삼았을뿐, 언젠가는 본토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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