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스튜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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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스튜어트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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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 남우주연상

제12회
(1940년)

제13회
(1941년)

제14회
(1942년)

로버트 도나트
(굿바이 미스터 칩)

제임스 스튜어트
(현대의 여신)

게리 쿠퍼
(요크 상사)





역대 베니스 국제 영화제

볼피 컵 - 남우주연상

제22회
(1958년)

제23회
(1959년)

제24회
(1960년)

알렉 기네스
(말의 입)

제임스 스튜어트
(살인자의 해부)

존 밀스
(턴스 오브 글로리)


역대 베를린 국제 영화제

은곰상 - 남자연기자상

제11회
(1691년)

제12회
(1962년)

제13회
(1963년)

피터 핀치
(노 러브 포 자니)

제임스 스튜어트
(미스터 홉스 휴가 가다)

시드니 포이티어
(들백합)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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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제임스 스튜어트
JAMES STEWART

분야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1708 Vine 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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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제임스 스튜어트 (James Stewart)

본명

제임스 메이틀런드 스튜어트 (James Maitland Stewart)

국적

미국

출생

1908년 5월 2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인디애나[1]

사망

1997년 7월 2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베벌리힐스

직업

배우, 군인

신장

192cm

데뷔'

1932년, 'Carry Nation'

계급'

미 공군 준장

1. 개요
2. 1908년 ~ 1932년
3. 1933년 ~ 1941년
3.1. 스튜디오 시스템 속에서
3.2. 로맨틱 코미디
3.3. 아카데미
4. 군복무
5. 제 2차 세계대전 참전후
5.1. 멋진 인생 (1946)
5.2. 앨프리드 히치콕 영화
5.3. 서부극
5.4. 살인의 해부 (1959)
5.5. 기타
6. 제임스와 정치
7. 트리비아
8. 루머
9. 출연작 목록
9.1. 영화
9.2. 연극
9.3. 다큐멘터리
9.4. 라디오
9.5. TV
9.6. 그 외

1. 개요

제임스 스튜어트는 할리우드 황금기의 국민배우[2][3]이자 할리우드의 대배우를 넘어 현실에 존재했던 영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192cm[4] 장신에 긴 다리[5], 회색눈,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외로 완벽주의자에 여유롭고 순탄한 모범생, 비행 덕후, 수시로 변하지않고 기복도 없는 역대급 필모 등등 완벽한 인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2. 1908년 ~ 1932년

영국계 미국인 가족이고 관광과 문화 생활을 열심히 했다. 어린시절 말수가 적고 기계설계도를 그리거나 화학 실험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릴적 소원은 아프리카와 사파리에 가보는 것이었다. 간행물과 책을 좋아하고 보이스카우트에서 열심히 활동하기도 했다. 기계, 공구상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사업차 출장으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고 칼럼니스트 동생은 제임스가 유명해지기전에 출연한 망한 연극 리뷰를 기고한 적이 있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장래희망은 파일럿이었다. 미국해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아이비리그[6]에 전원 합격 하고 대통령 아들들이 다니던 머서스버그 아카데미에 갔다. 10대에 친구와 만든 광석 라디오를 팔고 경험삼아 도로 작업과 마술사를 도우면서 고등학교 학비를 벌고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지만 라틴어는 싫어했다고 한다.

14세에 192cm 가 되면서(14세에 성장 멈춤) 항공사나 의류 모델 제의를 받곤했다. 10대가 되기전 피아노와 아코디언 등 악기를 수준급으로 다루고 운동신경도 좋은 자신에게 엄격하지만 평범한 학생이었다. 미식축구 학교 대표팀은 광탈했지만 54kg팀 센터였고 야구와 육상 선수였다. 라디오공학(재즈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문학, 합창단, 글리클럽, 토론대회 참여, 교내 신문 편집자로 활동하는 등 교내 모든 활동을 했지만 독서와 데이트겸 영화관람이 가장 기억에 남고 즐거운 일이었다고 한다. 연출과 기획도 하면서 개구리 왕자로 연기를 처음 해보게 된다. 그러나 병약해서 한번씩 기숙학교에서 돌아와 안정을 위한 휴식을 취했고 더 야위고 건강이 나빠지면서 외출도 못하고 가톨릭 신자가 아님에도 종부성사까지 받았다.[7] 입학도 한 해 미루게 된다. 밖에 걸어다니기 조차 힘든 기간 동안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찰스 린드버그를 보면서 더욱 비행사를 선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등 연구소도 속해 있던 신입생 500명 규모의 프린스턴 대학교를 다녔다. [8]

마천루가 들어서던 1920년대에 건축을 전공한 걸로 알려져 있지만 프린스턴 대학에만 건축과가 있었고 학부에서 가업을 위한 전기공학과였다. 기계제도 수업에서 모두 채플을 설계할때 미래적인 공항을 설계한 논문으로 동대학 대학원의 건축과 전액 장학생이 되기도 했다. 동네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학생 제임스는 평소에 여유가 넘치는지 영화속 보다 더 느린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과외할동까지 열심이었다. 운동은 잘하는 편이었지만 힘들고 공부할 시간도 필요해서 그만두고 치어리더팀에 들어가서 단장이 되었다.

연극부에 들고 영화관람도 많이 했다. 후에 영화에서만 보던 스타와 데이트하게 되어 신기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가 회원이면 자동으로 가입 되는 가장 보수적인 사교 클럽에서 대학극단과 트라이앵글 클럽 활동, 데이트가 많았음에도 대담한 조슈아 로건과의 소문만 무성한 관계로 처음에는 가십거리가 되었다. 조슈아 로건은 제임스가 순진하진(?) 않았고 허약하지만 감수성이 뛰어나 대학 극단 단원이 되기를 기대했었다고 한다. 부유하고 여러번 결혼 했지만 게이였던 로건은 어디서든 성향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다녔다. 극단단원만이 그를 대수롭지 않게 대했고 극단에는 배우 밀드레드 냇윅과 미남 배우 앤서니 퍼킨스(젊은 시절이 제임스와 비슷한 이미지였다고)의 아버지 오스굿 퍼킨스도 있었고 사이가 좋았다. 배우 헨리 폰다도 여기서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극단은 소련 영향으로 사회주의자가 많고 개방적이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조슈아 로건을 따라 연극계 인사를 만나러 소련에 가기도 했다. 연극부와 달리 폐쇄적인 클럽은 동성애자가 가입할 수 없었다. [9] 클럽 멤버들은 제임스를 게이로 의심하며 냉소적으로 대했지만 제임스는 곧 클럽의 최고 인기남이 된다. 여대생을 끌어 클럽 멤버들 미래의 신부를 만나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나와서 혼자 생각에 잠기는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렇게 알찬(?) 학창 시절을 보내고 졸업 후에는 고향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대공황으로 취업이 어려워졌다. 프린스턴으로 돌아가려다 조슈아 로건에게 설득당해 뉴욕 브로드웨이로 간다. 사실 제임스는 조슈아 로건의 연극 공연(제임스가 뮤즈)에서 일찍이 워너브라더스의 명함도 받아 놓은 상태였다. 대학 공연에서는 훌륭하지만 항상 어딘가 부적응자 처럼 보였고 뮤지컬에서 금방 웃을수는 없는 독특한 분위기로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사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제임스의 아버지는 아들이 연예계에서의 성공보다는 장학생이니 학교로 돌아가거나 가업을 직업으로 삼기를 바랬다고 한다.

3. 1933년 ~ 1941년

조슈아 로건의 설득으로 뉴욕 브로드웨이에 잠시 머물다가 1935년 헐리우드에 데뷔. 단편영화 단역으로 시작했고 초기에는 싱거워보여 좋은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캐스팅에 난항을 겪어야 했다. 펄 벅의 <대지, The Good Earth, 1937>에서 반나절을 걸려 중국인으로 분장 하지만 당시의 편견에 따른 눈매와 큰 키가 중국인으로 보이지 않는다하여 모두 편집 당했다. 헐리우드 신인시절에 대학극단 단원이었던 마가렛 설리번과 헨리 폰다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마거릿 설리번에 의해 작은 영화에 출연하거나 큰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기 시작해 점점 메이저 영화 주연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제임스도 설리번에게 힘이 되고자 했었다. 헨리 폰다와는 불확실한 미래를 함께 준비하며 평생지기가 되었고 설리번과 에이전트 헤이워드 부부 옆집에 살면서 설리번에게 개인 연기 지도를 받았다. 설리번과 여러번 공연하면서 많은 영화인과 친분이 생기고 할리우드에 무사히 정착하게 된다.

3.1. 스튜디오 시스템 속에서

2차 대전 후에 염세주의자나 무례한 캐릭터, 선악이 모호한 역을 맡을 때도 있지만 선하고 확실한 이미지를 추구했기 때문에 악역만은 하지 않으려 했다. 유일한 악역은 시나리오를 선택할 수 없었던 신인 시절에 해보았는데 어색하고 악역에 소질이 없어 보였다. 할리우드 초기에는 여자친구에게 의지하는 역할을 많이 했고 순수하고 유쾌한 프랭크 캐프라 감독 영화에 출연하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캐프라는 영화 <Navy Blue & Gold> 의 사관생도 스튜어트를 보고 출연 시키기 시작한다. 발성과 목소리, 동작 하나하나까지 멋있는 배우도 있지만 그런 카리스마있는 배우와는 다르다고 할수있다. 알프레드 히치콕도 무엇보다 평범해서 제임스를 캐스팅했다고 한 적이 있다. 군필에 적당히 교육받고 누구나 좋아하는 성격미남이며 등등을 덧붙였지만.

제임스 스튜어트, 헨리 폰다[10], 조슈아 로건은 할리우드 신인시절에 동거 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했다고 한다.

  • Born to Dance, 1936

제임스 스튜어트의 처음이자 마지막 뮤지컬 영화. 유니폼을 입은, 그의 여자친구 말대로 언제나 이기는 허우대 좋은 해군장교역.

  • Of Human Hearts (1938)

  • Navy Blue and Gold, 1938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의 드라마. 사관학교 선전물인듯하지만 익숙한 장치들이 적절히 배치되어있어 재미도 있는 편이다.

  • Destry Rides Again, 1939

1939년은 작품상을 받고도 남을 걸작이 많이 나왔지만 모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묻힌 해이기도 하다. 이 무렵, 안소니만과 존 포드와의 작업 보다는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첫 서부극 출연작 <사진(沙塵, 1939)>을 찍는다. 극에서 폭력을 싫어하고 서부극 세계에서 총을 가지고 다니지 않지만 약탈을 일삼는 건달들에게는 치명적인 명사수이다. 바에서 우유를 찾고 레이스 양산을 쓰는 허허실실한 영웅으로 젊음을 발산하였다.

3.2. 로맨틱 코미디

초기 출연작은 대부분 로맨틱 코메디였다. 당시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위트있는 대량의 시나리오 중심이었고 연극처럼 배우의 매력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상업적인 프랑소와 트뤼포, 우디 앨런 영화 같았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동시대 배우의 느끼함이 없는 상냥하고 귀여운 옆집 오빠, 형 같은 이미지였다. 낭만적인 허당으로 나와 가끔 노래도 부르고 필요하면 사지가 흐느적거리는 춤도 추며 순수 오락을 선사했다.

잘하는건 없었지만 노래를 부르면 평소와 다르게 목소리가 좋아 졌다고 한다. 아카데미를 받은 <필라델피아 스토리, 1940>에서 <오즈의 마법사, 1939]> OST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부르기도 했다. 콜 포터 [11]에게 <Easy to Love>를 부를 사람으로 산택되어 완벽했다는 반응을 얻기도 했다.

듣기 Easy to Love

듣기 DAY AFTER DAY

  • Next Time We Love

  • Vivacious Lady, 1938

<vivacious lady (1938)>는 지금 보아도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이다. 영화에서 삼각관계를 이루는 빈틈 많은 식물학자로 젊은 제임스 연기의 장기인 알코올 흡입 후 이상행동 연기는 이 영화에서 가장 훌륭하다.

  • You Can't Take It With You, 1938

통속적이지만 개봉 당시에는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고 알고보면 수많은 드라마의 오리지널(영상 매체에 한해서) 격이다.

영화에서 1930년대 조차 양산된 호남의 속물스럽지 않은 재벌 캐릭터이지만 제임스 스튜어트가 맡으니 그 사회적 지위가 안맞는 옷을 입은것 마냥 어색하기만 하여 생각보다 적역이었다. 빅 애플도 추고 생기 넘치지만 무난했고 담배 연기를 코로 뿜어대는 행위가 역할에는 어긋나 보이지만 오히려 인상적이다. 크게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처음 출연한 프랭크 캐프라 감독 영화가 아카데미까지 받으면서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 Made For Each Other, 1939

TV 연속극 같은 시부모, 부부 사이의 갈등.

  • It's a Wonderful World, 1939
  • The Shop around the Corner, 1940

모퉁이 상점은 헝가리 부다페스트가 배경이고 원작과 설정이 조금 다르지만 멕 라이언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유브 갓 메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펜팔로 싹트는 유사 사내 연애 속에서 사회 생활 전반에 대한 고찰이 돋보여 로맨스의 감동만으로도 훌륭하지만 전부가 아니다. 귀여운 커플. 세련된 코미디 영화를 만드는 에른스트 루비치 감독은 제임스 스튜어트를 출연시키려고 제임스의 스케쥴 따라 촬영일을 조절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 No Time for Comedy, 1940

관객 반응에 희비가 교차하는 코미디 작가 역. 고상하고 아름다운 배우의 너그러움으로 로맨스는 순탄하지만 작가의 슬럼프는 후원자의 아낌없는 지원에도 쉬이 극복되지 않는다. 스튜디오 대여로 참여하여 초기에 출연한 영화에서와는 사뭇 다른 입체적인 캐릭터. 표정과 조명이 달라지니 가끔씩 잘생겨 보이기도 한다.

  • Come Live with Me, 1941

로맨스 소설 작가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국적 취득을 위해 접근하는 유럽인 그리고 그녀의 애인과 애인의 아내까지 느슨한 삼각관계 내지 사각관계 로맨스이다. 바램을 길게 썼더니 출판해주질 않나, 게다가 글이 픽션에서 논픽션이 되려는 상황에 이른다.

3.3. 아카데미

프랭크 캐프라 감독의《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1939》로 처음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뉴욕 비평가상을 받는다.

프랭크 캐프라는 비상식의 상식화를 재치있게 풍자하여 아카데미에서 환영받는 감독이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스미스씨로 아카데미를 수상하지 못해 다음 해에 보상 차원으로 《필라델피아 스토리, 1940》로 받았다는 반응이 있지만 제임스 본인은 <필라델피아 스토리>의 연기가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에서 보여준 배짱을 연기력 보다 높게 샀다. 막 주목받기 시작하던 때라 열정이 앞서 초췌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애쓰다가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스튜어트는 이 영화를 찍을 때쯤 자신이 영화속 캐릭터를 은연중 모방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기도 했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로 명성을 얻고 이로인해 평생 사람좋은 이미지로 많이 소모되었지만 단순하고 한정된 이미지는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헐리우드 고전기 극영화 연기스타일 이긴 하지만 초기에는 부자연스럽고 과장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코미디 연기에서만큼은 늘 적절한 타이밍과 센스로 돋보였다. 자신이 외모로 관객들의 호감을 얻는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총각시절 볼품없는 다리는 어릴 때부터 콤플렉스였는데 영화에서도 다리가 불편한 역이 많다.

프랭크 캐프라, W.S.밴 다이크와 MGM사의 루이스 B.메이어 를 비롯해 늘 5kg 정도의 증량을 요구했고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면 촬영에 들어갔다. 영화 찍을때마다 들으니 비쥬얼을 위해 계절 가리지 않고 내복하의를 즐겨 입고 바지는 맞춰 입었다는 후문이 있다. 영화감독에게 부탁해서 다리 대역도 썼다. "관객들이 내 다리를 보면 제 영화계 커리어는 그날로 끝이에요." 라며 사정 했다고 한다.

《필라델피아 스토리》의 수영복 입는 장면도 캐서린 헵번에게 부탁하여 없던일로 하기로 했다. 헵번이 상태를 보고 "그래요. 정말 끔찍하네요."라면서 들어줬다고.

하워드 휴즈의 저작권 선물로 헵번은 영화의 제작자에 가까웠다. 이 영화로 헵번은 흥행 독약도 만회 하게된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커플은 아니지만 <필라델피아 스토리> 헵번 & 스튜어트를 미국 영화 최고의 커플로 선정했다. 영화는 그레이스 켈리의 마지막 영화 <상류사회>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스튜어트를 제외한 배우들은 저돌적으로 대사를 쏟아내고 연극연기같은 과장된 감정표현이라 조금 구식 연기로 느껴지기도 한다. 배우들의 열정으로 실수 한번 없는 분위기였지만 하필 제임스에게만 주어지는 느끼한 대사로(헵번도 인정) 인해 실수를 반복해 진땀을 뺐다. 하지만 이 영화의 기자, 작가역으로 조연 분량이었지만 특급 배우들과 연기하다 보니 일취월장하여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게된다. 이 영화에서는 평소와는 다르게 말도 빨리한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 조연분량이 주연상을 받은 드문 경우이다. 당시에는 최연소 수상이었다. 여우 주연상은 최연소 수상자가 1920년대부터 20대였지만 남우주연상 최연소 수상자는 최근에서야 30대 기록이 깨졌다. 키스 4부작으로 화제가 되었던 <피아니스트 (2002년)>의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지금까지도 유일한 20대 수상자이다. 당시의 오스카 시상식은 무대와 절차가 간소했고 대통령의 오스카 축하 메세지가 있었다. 제임스가 아카데미를 수상한 1941년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나오기도 했다.

아카데미상을 받고 주저없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최초로 실전에 지원한 할리우드 스타가 되었다. 그 뒤 스튜어트 외에도 클라크 게이블을 비롯해 많은 스타가 참전했고 전사한 사례도 있었다.

4. 군복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이 징병제로 전환하자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체중미달로 불합격을 받자[12] 결국, 군의관에게 사정해서 합격판정을 받는다. 1941년 3월 육군 항공대(미 공군이 생기기 전)의 조종 특기 사병으로 전시 군 복무를 시작했다.

1935년에 개인 항공 자격증을 취득했고 소형이지만 전용기도 소유한 숙련된 조종사였다. 비행 훈련을 마치고 1942년 1월 장교로 임관, 전선에 배치되었다. 스타 영화배우라 하여 후방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하거나 위문공연을 하지 않고, 24회나 폭격작전에 참가하였다.

군 기록을 영화로 찍거나 언론에 노출할 수 없다는 기본 복무 조항과 영화사 보험 문제가 겹치지만 The Mountain Road를 제외하고는 전쟁영화 출연은 모두 거절했다. 2차 대전 때 4년 만에 대령으로 진급했고[13] 공군 양성 기관 설립에 자금을 대기도 했다. 원래는 전투기 조종사를 지망했으나 결국 폭격기 조종사가 되었다.

원래는 진급을 거부했었으나 그의 아래 장교가 위관에서 영관으로 올라가는 걸 보고서야 진급을 받아들였다.

1941년 3월 22일, 육군 이병으로 들어가 군번 0433210을 받았다. 입영지는 캘리포니아 포트 맥아더였고, 카메라맨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속옷 입고 있는 사진을 찍어 신문에 냈다. 훈련소의 한 늙은 하사관은 "너 참 불쌍한 새끼구만." 이라고 말했다.

스튜어트의 영화사 주급은 당시 1만 2천불이었는데 결국 21달러로(요즘 미군은 거의 30배 정도) 떨어졌다. 스튜어트는 그중 10%인 2달러 10센트를 그의 소속사에 매달 보냈다. 공백은 소속사 입장에서도 권장사항이 아니라 말리고 보았다고 한다. 스튜어트가 기초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캘리포니아 모펫 필드로 갈 때, 정문엔 그를 잠깐이라도 보고픈 소녀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훈련 소장은 훈련을 끝낼 때까지 모두 쫓아냈다. 언론에서는 그의 군복무를 카메라로 찍고 법석을 떨었지만 정작 스튜어트는 묵묵히 훈련에 임했고, 결국 미 육군 항공대로 들어가 장교가 된 후 훈련을 계속 받았다. 그리고 비행자격을 얻었고 마서 필드에서 큐티스 AT-9로 비행자격을 받고, 이후 커클랜드 필드로 6개월 간 폭격기학교에 들어간다. 1942년 12월, 스튜어트는 4-엔진 비행학교를 자원해 거의 탑으로 수료했고, 결국 솔트레이크 시티의 미 제2공군으로 전출간다. 잠시 행정일을 보다가 오하이오의 제29폭격단으로 가서 B-17 교관이 된다.

그 시기에 그의 룸메이트가 사고로 죽었고 3명의 훈련생도 불운을 겪었다. 스튜어트는 군복무에 관해서는 입이 무거웠다. 스튜어트가 사망하고 몇 년이 지난 뒤 당시 스튜어트의 훈련생이었던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스튜어트는 모든 비행기가 돌아올 때까지 관제탑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모든 부하의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그당시의 모두가)다 그런 건 아니었다."

1945년 부모님과

동료 배우 진저 로저스와

미 예비공군 준장으로 승진 이후

1942년 Jimmy Stewart and Edgar Bergen Radio Routine

어느 날 밤, 비행기에 훈련생이 앉고 부조종석에 교관 스튜어트가 앉아 신형 항법장비를 점검하며 날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1번 엔진이 폭발했다. 파편이 조종석으로 날아와 조종사가 의식을 잃었고 엔진에는 불이 났다. 그러자 스튜어트는 조종석의 훈련비행사를 끌어내고 그 자리에 앉아 소화기를 작동시키고 엔진 세 개로 착륙에 성공했다. 1943년 3월, 그는 445폭격단 703전대 작전장교가 되었고, 3주 후에는 전대장이 된다. B-24로 20회 출격을 하고 나서, 1945년 초 스튜어트는 버킹햄셔로 가서 453폭격단의 작전장교로 발령받았다. 453폭격단은 B-17이 주력이었고, 이때 그는 주로 관제탑에서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이 일에 심드렁해진 스튜어트는 직권남용을 한다. 그는 453폭격단의 선도 B-17 '페이퍼 돌'의 부조종석을 자신의 것으로 영원히 지정한 것이다. 페이퍼돌의 부조종석은 고위장성이 앉았고 스튜어트가 타고 작전에 나가기도 했다. 그 폭격기 기총수 댄 브로디는 이렇게 말했다.

"스튜어트는 우수한 조종사임을 보이고 싶어했다. 특히나 위험한 작전에서."

445폭격단과 마찬가지로 스튜어트는 폭격단 사람들의 많은 신뢰를 받았다. 그는 지프차를 몰다가 막사로 걸어가는 대원들을 보면 항상 태워주었다.

원래 최선임 참모장교는 매 5회 폭격마다 교대된다. 5회째 되는 작전에는 그도 작전에 참가해야 했다. 그런데 스튜어트는 작전장교 보직을 하면서 11회나 출격했다. 2차대전 당시 폭격기 요원을 오늘날의 전투기 조종사 처럼 우아한 병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미군 폭격기 승무원들은 유럽전선에서 땅개보다도 훨씬 죽을 확률이 높았다. 폭격기가 대공포에 직격으로 맞으면 승무원들은 탈출할 여유도 없이 몰살당하는 신세였고, 대공포탄 파편으로 인한 과다 출혈로 너무나 많은 승무원들이 죽은 탓에 Flak Vest라 불리는 방편복을 다른 병과보다 먼저 지급받을 정도였다. 심지어 한번 폭격 작전에 25% 이상의 손실을 기록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는 B-17을 몰게 되었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리버레이터를 그리워했다. 나중에 B-24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전투에서 B-17은 25,000피트 상공 대열폭격에 잘 어울리지 않았다. B-17은 12,000-18,000 피트에 더 잘 어울렸다."

한번은 부하들이 훔친 맥주통을 막사에 숨겨놨는데, 결국 찾아내고는 맥주가 다 떨어질 때까지 같이 마셨다고 한다. 돈을 지급하지 않는 재정장교에게서 부하들의 돈도 받아줬다. 2차 대전 후, 자신의 귀국 파티는 거절했다. 모발은 회색으로 변했고, 종전 후부터 탈모가 진행되었다.

이후 영화배우 활동을 하면서도 군사 재판을 맡거나 미 공군 항공우주 시스템을 선전하는 등[14] 군을 떠나지 않았다. &lt;전략 공군 사령부, 1955&gt; 같은 공군 홍보영화도 찍었다.[15]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린든 존슨 임기 때 상원의원과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마 권유를 받았지만, 공군 직위를 고집하며 거절했다. 사실 할리우드 스타들은 한번씩 저런 권유를 받는다고 한다. 1959년 7월 23일 미 예비공군(AFRC) 준장으로 진급했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있지만, 제복군인으로는 제일 높이 올라간 미국 연예인이다.

매파의 상징 존 웨인이 징집을 피해 전쟁 영화 출연 등으로 때운 것과 비교가 된다. 군 경력은 베트남전까지 이어져, B-52 스트라토포트리스에 옵저버로 탑승하여 베트남 전선에 참가했다. 2차 대전의 원로이자 장군인 헐리우드 스타였지만 항상 소박하고 자상한 태도를 보인 그의 인기는 군부대에서도 일반 사회를 방불케 했다.

스튜어트는 과묵하고 느긋한 성격으로 매사에 느렸다. 말도 느리고 밥도 느리게 먹고 걸음도 느렸다. 그러나 부대 안에서는 다른 사람 같았다고 한다. 군에서 그러기 쉽지 않은데 상사로서 평판이 좋았다. 시키는 일이 없고 알아서 신속 정확하게 기계처럼 움직였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위험한 작전을 수행한 후 이런 말도 했다. "공포는 방심할 수 없는 것이다. 공포는 우리의 판단을 왜곡시키고 반사운동을 잠재운다. 그렇게 실수를 하게 되는것. 더욱 나쁜 것은 그게 전염된다는 것. 내가 공포를 느낄 때 난 그걸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전염시킨다." 1968년까지 복무하고 퇴직금은 미국공군사관학교에 기부했다.

5. 제 2차 세계대전 참전후

종전 후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약 80편의 영화 출연작 중 1/3은 참전하기 전까지 5년간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다작 한 결과이다. 영화산업이 첨단이었던 1930 ~ 1940년대 할리우드는 독자적인 작가색과 개성은 부족하지만 완성도 높은 영화를 단기간에 완성하는 꿈의 공장이 되어 많은 명작을 남긴 황금기였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좋은 영화를 성실하게 제작하던 대형 스튜디오의 방식을 좋아했고 고정수입이 있는 배우였다. 그러다가 할리우드에서 처음으로 러닝개런티 를 받은 배우가 된다. 이는 스태프들이 출연료 외에 흥행결과에 따라 개런티를 받는 방식으로 고가의 배우나 감독의 개런티를 줄여 제작비가 지나치게 상승하는 것을 방지하고 계약 당사자로 하여금 최선을 다해 영화의 완성도에 집중하게 할 수 있다. 헐리우드 배우로서는 거의 최초로 독립영화에 출연하여 흥행수입에 비례하는 출연료를 제안했고 영화가 흥행하면서 1950년대 최고수입 스타대열에 들었다.

5.1. 멋진 인생 (1946)

전후에 잠시 은퇴를 고려해본 적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잠시, 군인이나 파일럿이 중요한 일을 힘들게 하는것에 비해 연예인은 과잉수입과 대접을 받는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이 좋은것은 아니지만 자원입대 했고 책임의 한계에 부딪혀본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고 충격적인 경험이었다고 한다. 전쟁 후 첫 출연작은 제임스 스튜어트 출연작중 가장 대중적인 멋진 인생 이다.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왠지 처음에는 이역을 맡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영화의 감독 프랭크 캐프라는 스튜어트를 인민주의 표상으로 활용하여 스타덤에 오르게 하였고 긴 공백기를 가지고 방황하고 있을 때도 출연 제의를 하며 할리우드에 남을 수 있게 해주었다. 스튜어트는 <멋진 인생>으로 다시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 사회도 보고 재기에 성공한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1985년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소감에서 긴 세월 동안 내가 잊혀지지 않았음을 일깨워 주는 상으로 무척 의미있다는 소감과 프랭크 캐프라에게 특별히 감사를 표하였고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멋진 인생》은 영화가 원작이고 낙관적이고 결말이 허무맹랑하지만 폭력을 강조하지 않아 제임스 스튜어트가 가장 좋아하는 출연작 중 하나였다. 이 영화는 여름에 촬영 했고 처음으로 인공눈을 사용했다. 작은 아이디어를 구체화 했고 단조로워 보이지만 보기만해도 마음이 흐뭇해지는 영화로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늘 새롭게 감동할 수 있으며 기준을 제시한 시금석 같은 영화라고 격찬했다. 개봉 당시에는 평범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저작권이 만료되고 TV로 방영되면서 인기를 얻어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클래식이 되었다. 스튜어트에게 이영화는 각별하여 모스크바 국립 대학과 협력하여 러시아어 번역본을 만들기도 했다. 이것은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에 가장 먼저 파급된 미국 TV 매체가 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프랭크 캐프라가 스튜어트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조지 베일리는 악독한 포터씨의 횡포로 평생 집을 구하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고군분투 하는 착한 은행가 이면서 할리우드에 오지 않았다면 세계를 돌며 직접 비행장을 건설하고, 미래 도시를 설계하는 모험가를 꿈꾸지만 양보만 하다 가업을 물려받고 고향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오버랩된다. 그의 보통 영웅 이미지는「멋진 인생」이 한몫했다.

5.2. 앨프리드 히치콕 영화

제임스 스튜어트는 케리 그랜트와 함께 앨프리드 히치콕이 가장 선호한 배우였다. 히치콕 영화에서 어느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냉혹함을 보인다. 히치콕 영화의 두드러지는 특징상 언제나 수사하는 사람이다. 관음증편집증이 있거나 신체가 불편하고 날카롭지만 감정 없는 사람같다. 히치콕은 대중적이고 사려 깊은 이미지의 스튜어트가 서스펜스를 극화 시킬 수 있다고 보았고 a painstaking craftsman 이라고 묘사했다. 제임스는 히치콕이 가장 선호한 배우로 보다 예술성 있는 영화에 나오지만 성실한 샐러리맨 같고(히치콕의 표현) 그랜트와는 다르게 히치콕이 영화를 구상할 때 의견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히치콕이 이미 능수능란하게 해오던 종류의 것보다 영화적 기법을 실험하는 영화에 출연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적어도 10년은 들어 보이면서 영화 안팎으로 일복이 넘쳤는지 오십줄에 들어서자 마자 은퇴한 경찰이나 검사 같은 은퇴한 노동자역(?)을 많이 맡게되고 나이에 맞지 않는 소수의 미스 캐스팅을 인정하면서 더 흥미로운 영화에 많이 출연하게 되었다. 전쟁 전에는 주로 로맨틱 코미디나 코미디 영화에서 순진한 이상주의자를 맡았지만, 1940년대 말부터는 참전으로 복잡한 상황에 처해보고 결혼도 하면서 연기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영화에서 일반적인 로맨스는 물 건너갔지만 노안은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배우 커리어에 있어 좋던 나쁘던 대수였다. 히치콕은 스튜어트의 노안이 《현기증(미국 영화)》 흥행실패의 큰 요인이라 보고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 제임스 스튜어트 대신 4살 연상이지만 케리 그랜트를 캐스팅했다. 스튜어트는 30대 초반까지 소년 같은 면이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후부터 노화가 빠르게 진행 되었다. 현기증의 상대역 킴 노백보다 20살 넘게 연상이었지만 스튜어트는 점점 더 노화해서 1970년대부터는 킴 노백보다 40살은 더 많아 보인다.[16] 동영상. 《현기증》은 제임스 스튜어트의 마지막 히치콕 영화 출연작이 되었지만 히치콕과는 후에도 잘지냈다. 히치콕은 생의 마지막 행사인 제임스 스튜어트의 AFI 행사에 참석해 주기도 하였다. 좋아했다던 그레이스 켈리가 참석해서일 수도 있지만.

  • 로프 (1948)

히치콕 영화 첫 출연작은 실험적인 《로프(1948)》였다. 17세에 로스쿨 입학을 앞둔 영재에 부유한 집안의 커플 레오폴드-로엡 사건을 모티브로 한 연극[17]이 원작이다. 동성애자라는 설정 때문에 몇 명의 캐스팅이 무산된 뒤 세계대전 후 전환점을 맞은 스튜어트가 캐스팅 되었다. 두 남자가 하버드 학생[18]을 살해하고 시체를 넣은 관이 있는 곳에 피해자의 부모와 약혼녀를 초대하고는 스릴을 즐긴다. 스튜어트의 사건을 주도하는, 자신이 초인이며 범인은 죽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머저리 같은 제자가 신봉하는 은사역은 잠을 설칠 정도로 불편했다고 한다. 히치콕은 배우를 곤란하게 만들고 은근슬쩍 딜레마에 빠뜨리곤 했다. 제임스는 로프에 출연한 후에 다음 히치콕 영화에 출연하기까지 6년의 텀이 있었다. 《로프, 1948》에서 원테이크 처럼 보이려는 카메라 워크를 "카메라가 춤춘다." "여기서 리허설은 카메라만 했다."며 농담 하기도 했는데 난해한 촬영법과 현장 분위기 를 떠올리며 《이창》(1954)에 출연하는 것을 망설였지만 곧 출연료를 조절 하면서까지 히치콕 영화의 출연을 원하게 되었다. 히치콕이 지금은 누벨바그 비평가의 공으로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거장으로 재발견 되었지만 당시에는 아카데미와도 인연이 없고 작품성보다 장르영화에 특화된 흥행작 감독으로 알려져 있었다.

  • 이창 (1954)
  •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1956)

OST 케세라, 세라 로 유명한 앨프리드 히치콕의 유일한 본인 작품 리메이크작으로 원제는 「The Man Who Knew Too Much」이다. 모로코 마라케시, 런던을 오간 로케 촬영과 장황한 오케스트라 장면에서 원작보다 대작을 만들어 보겠다는 히치콕의 의지가 엿보인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극중에서 가수와 결혼했다. 그녀는 매일 불특정의 수많은 인파를 겪는 인기 가수인지라 남편보다 이방인이나 낯선사람에 대한 직감이 들어맞는 경우가 많다. 제임스 스튜어트도 히치콕표 일사불란한 주인공이지만 사건해결의 중요한 키는 대부분 그녀가 가지고 있다. 서스펜스의 교과서라 할만한 히치콕 영화 중에서는 재미가 덜 하다는 평이 있지만 모모씨의 위궤양과 모모씨의 알레르기 덕분에 모처럼 얻은 휴가의 즐거운 분위기가 관객에게까지 전해져 흥행했다. 제임스의 대사는 처음 계획 했던 것보다 몸개그와 오케스트라, 풍경으로 대체되기도 하면서 상당부분 줄었다.

  • 현기증 (1958)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로 아카데미를 받고 《멋진 인생, 1946》으로 가장 유명하고 대표작이 많지만 개봉한지 50년이 넘게 지난 지금의 영화 평론가와 영화광들은 히치콕의 대표작이기도 한 《현기증》을 그의 대표작으로 본다. 히치콕의 1958년작. 이미 가루가 되도록 분석된 불세출의 걸작. 10년 단위로 걸작 순위를 발표하는 영화소식지 사이트앤사운드 에서 50년만에 시민케인 대신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시민케인이 머지않아 탈환할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예술적 성취를 지향하는 작품보다 사적 의미를 갖는 작품이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 추세가 반영된 결과였다고 한다. 개봉 당시에는 식은땀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루하고, 비교적 비호감 인물만 등장하는 등 흥행할만한 요소가 없어 외면받았었다. 이 영화는 병적인 로맨스 라는 점에서 타르콥스키의 영화 &lt;솔라리스 (Солярис, 1972)&gt;나 히치콕이 존경하고 무신론자로 유명한 스페인 출신 멕시코 초현실주의 영화 거장 루이스 부뉴엘&lt;이상한 정열(Él, 1952)&gt; 과 비교되기도 한다. 시네마베리테 운동 크리스 마르케의 영화 《활주로 (La Jetée, 1962)》에도 영향을 줬다. La Jetée는 활주로 혹은 승강장, 환송대 라는 한국어 제목으로 20분 남짓한 사진으로만 구성된 발전적인 형태의 시네로망 단편이고 <브라질>, <몬티 파이선>시리즈의 테리 길리엄 감독 영화 <12몽키즈>를 비롯한 여러 SF영화에 영감을 준 명작이다. La Jetée가 원작인 <12몽키즈>에서는 현기증의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크리스 마르케는 현기증 단 한 개의 영화만이 기억, 광기의 기억을 영상으로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하였고 자신의 다큐멘터리 영화 「태양없이」에서도 현기증의 여정을 따라가며 영화의 해석을 내놓았다.

5.3. 서부극

지금은 철지난 장르지만 당시 할리우드 스타라면 누구나 서부극에 출연했다. 제임스 스튜어트도 많은 서부극에 나왔고 영화 출연 수입의 대부분일 정도로 서부 영화 흥행성적이 좋았다. 전통적인 교훈을 전달하면서 새로운 시도가 가미된 서부극에 많이 출연 했다.

Bend of The River (1952)

  • 앤서니 만의 서부극

안소니 만[19]의 심리 웨스턴이 대표적이다. 이 서부극들은 개척시대 배경일 뿐 필름 느와르 영향 아래 있었다. 밤의 웨스턴이라고 불리며 카우보이들이 정의롭고 호탕한 영웅이 아니라 불안한 정서에 커피를 많이 마신다. 제임스는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연출하던 안소니 만을 연출가로 추천하고 8편의 영화를 함께한다. 이중 다섯 편은 서부극이고 <The Naked Spur(1953)>는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지만 흥행성적은 보통이었고 나머지 네 편의 서부극은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한다. 이 다섯편의 서부극 모두 로튼 토마토의 토마토 지수 100% 이기도 하다. 1950년대 말 안소니 만은 스튜어트와의 파트너십을 끝낸 후 걸작 <Man of the West>를 제외하고는 평론가들에게 새로운 스타를 원한것이 아니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는데 서로에게 좋은 기회였고 1960년대 인터뷰에서 제임스와의 작업에 대하여 격찬을 아끼지 않은 바가 있다. 앤서니 만과의 첫 작품인 <윈체스터 73>의 시사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영화가.시작하기 전에 제임스 스튜어트의 이름이 주연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키득거렸다. 로맨틱 코미디에나 어울리는 유순한 남자가 웨스턴의 주인공이라는 게 잘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앤서니 만과의 파트너십 시작을 알린 이 영화에서 만의 회상에 따르면, 승마에는 이미 능숙했던 스튜어트는 사격 연습에 매진하며 배역에 몰두했다고 한다. 스튜어트는 서부극에 출연할 때 파이라는 똑같은 말만 타고 똑같은 모자를 쓰고 서부극 통틀어 몇 가지 옷만 돌려 입는다. 존 포드의 요구가 있을 때만 다른 모자를 썼다. 애마 파이는 종종 제임스의 그림 모델이 되곤 했다.

  • 존 포드의 서부극

존 포드의 서부극에도 3편 출연했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이다. 가짜 명성으로 무법자의 세계를 종결짓는 법률인, 정치가로 나온다. <Two Rode Together>에서는 속물근성의 보안관 역으로 실용주의와 시장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자본주의형 영웅을 연기했다.

  • 기타

<The Shootist>에서 존 웨인의 시한부를 알리는 의사로 출연했다. 이 영화는 존 웨인의 유작이다. 스튜어트는 존 웨인에 대해 그보다 뛰어난 연기자들은 많지만 존 웨인은 비슷한 서부 영화 배역만 수도 없이 반복함으로써 신뢰감이 생기고 디테일이 훌륭한 연기를 하게되었다고 했다.

5.4. 살인의 해부 (1959)

유럽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베를린 영화제베니스 영화제 수상경력이 이를 어느정도 증명하지 않을까 싶다. 오토 플레밍거의 《살인의 해부》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볼피컵(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법정영화이며 지금까지도 미국 사법제도를 날카롭고 통렬하고 재치 있게 분석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은퇴한 검사 폴 비글러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연기한 캐릭터 중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영화 캐릭터답게 조금은 유별난 인물이다. 독신주의자에 냉소적이고, 청렴하지만 순진하고, 자신만의 신념으로 일을 해나간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폴 비글러역으로 다섯번째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도 오른다. 이 영화의 판사역은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경력에 종지부를 찍어버린 실제 사법계의 거물 조지프 웰치가 연기했다. 영화의 포스터는 영화지 프리미어가 선정한 최고의 영화 포스터이고 이는 히치콕 영화의 타이틀을 주로 제작하던 솔 바스가 담당, 음악을 담당한 듀크 엘링턴은 재즈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료로 잠시 모습을 보인다. 당시에 보수적이었던 제임스 스튜어트의 아버지는 이영화가 심각하게 나쁜 문제작이니 절대 관람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지역신문에 광고를 내고 아들이 영화 시사회에 참여하는 것도 반대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5.5. 기타

세인트루이스의 정신 (1957)

Call Northside 777 (1948)

1932년 일리노이 주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한 한 종신범의 실화를 그린 작품으로, 무고한 한 인간이 모순된 법에 의해 희생되어야 하는 일면을 파헤쳤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유일한 필름 느와르 출연작이고 극중 시카고 타임즈 기자역이다.

전기 영화

준수한 양산형 전기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다.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 투수 몬티 스트래튼, 마크 트웨인, 칼빈 소총을 만든 칼빈 윌리엄스 등.

하비 (1950)

코미디 영화《하비(1950)》로 네번째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다. 하비에서 보이지 않는 토끼친구 덕분에 그 옛날에 크로마키 촬영하듯 연기했다.《하비》에서의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출연작 중 가장 좋아하는 편이었고 하비의 TV 영화와 연극에서도 같은 역을 했다.

No Highway in the sky (1951), No Highway

세월이 지나 SF 보다 재난물에 가까워졌지만 영국 엔지니어 출신 SF작가의 원작이 있는 <No Highway in the sky 1951> 에도 출연했다. 일말고 다른데에는 전혀 신경을 안쓰는지 집의 위치를 잊어버리는 괴짜지만 책임감 강한 엔지니어 역이었다.

1960년대

1960년대에는 가족 영화에 많이 출연했고 그 외에는 중국의 산악지대와 사막 등 터프한 로케이션을 선호했다. 그중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 사막의 기적(1965)이라는 재난영화는 휴 로리 주연으로 2000년대에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http://clclt.com/imager/maureen-ohara-lauri-peters-james-ste/b/original/3406695/b19c/MrHobbsTakesVacation_2.jpg 1962년에 가족 코미디 영화 <홉스씨 휴가 가다,1962>로 베를린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70년 이후

1970년대에 은퇴한거나 마찬가지였지만 활발한 사회활동으로 매스컴에 빈번하게 노출되었다. 영화에는 단역이나 우정 출연 했고 TV에 많이 출연했다. 버라이어티 쇼나 코미디 쇼, 토크쇼, 연속극 등 여러 쇼에 출연했는데 TV에서도 출연료를 가장 많이 받을수 있었다. 이 시기에 스튜어트는 영화가 수위만 높아지면서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6번째 개정판)중 가장 많은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총 14편 이고 5번째 개정판은 13편, 7번째 개정판은 14편인데 6번째 개정판에 없던 다른 영화들이 있다. '썩토'에서 제임스 스튜어트의 필모는 신선한 토마토로 가득하고 100% 토마토가 열개 넘을 뿐만 아니라 평점 미정인 좋은 영화도 많다. 연기 스타일에 단점이 있지만 작품을 잘 고르고 운도 따라줘 정말 많은 걸작에 출연했다. 다작하지만 망작은 손에 꼽을 정도 이다. 관객은 고객이 아닌 파트너이며 다양한 관객이 가장 좋은 비평가 라고 한 적이 있다. 정직하고 청교도적인 세계관 속 평범한 사람의 소박한 용기와 신념을 스크린에서 실천했다. 느린 말투, 발성이 안좋지만 상쇄시킬 어떤것이 있었다. 연기자임에도 겉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많이 없다. 감탄사를 많이 쓰긴 하지만 목소리나 발성도 상황에 따라 변한다. 유행어 없는 코미디언 같다고나 할까. 이렇게 튀는 점 없는 제임스는 코미디 연기와 클래식 세대 답지 않게 생활연기를 잘했다. 동일한 사람과 여러번 작업하고 나는 나를 연기한다는 연기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데뷔가 늦고 연극 무대에 많이 서지 못한 점을 후회 했다고 한다. 영화에 많이 출연했지만 장시간 연속으로 연기하고 연기와 반응 모두 생생한 연극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특수한 인물을 연기하는 것보다 일상을 연기하면서 감동을 주는 것이 더 고단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일하는 것 같지 않다는 연기평에 영화는 온갖 기술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져 영화연기는 태생적으로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6. 제임스와 정치

로널드 레이건이 한 때 민주당원이었다는 이유로 지지를 철회하려 했던 철저한 공화당원이었지만 1968년 상원의원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하자 민주당 지지자들과 총기 규제 법안에 찬성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고 민주당 정책을 지지하는 등, 사안별로 다양한 의사를 표했다. 민주당 선거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고 유연하고 부드러운 언행으로 민주당과 공화당 양측에서 환영받았다.

그의 조사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겼다.

"미국은 오늘 국가의 보물을 잃었습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위대한 배우이며 신사에 애국자였습니다."

좋아하는 미국 대통령은 에이브러햄 링컨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D. 루스벨트였다고 한다. 실제 생활과 군 경력도 흠잡을 데가 없어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았다. 로널드 레이건이 대권에 대한 야망까지 내비추기 시작했을 무렵 영화사 워너브라더스의 직설적인 잭 워너는 한 인터뷰에서 지미 스튜어트같은 사람은 왜 대통령 생각이 없는건지 의문스럽다고 농담 했는데 많은 미국인들이 공감하기도 했다. 1976년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의 선거운동을 벌였고 1968년과 1972년 선거에서는 리처드 닉슨을 위한 선거운동을 벌였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민주당원 헨리 폰다와는 평생지기였고 정치 프레임을 떠나 건실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다른 성향을 지닌 폰다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냐는 질문에 이런 말을 했다.

"1940년대 헨리와 정치논쟁을 벌이다 싸움이 났는데, 내가 일방적으로 맞았지. 싸움이 끝난 후 폰다가 '우리 앞으로 정치얘기는 절대 하지 말자'고 했고, 나도 그의 말에 찬성했네."

1950년대에도 헨리 폰다는 애들레이 스티븐슨 2세를, 제임스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지지해서 논쟁을 벌이다 서로 냉대한 적이 있고 선거철만 되면 비슷한 일이 있었다. 자신이 애국자이지만 구식임은 인정했고 크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존 에드거 후버의 FBI 홍보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에드거 후버가 캐스팅 하고 카메오 출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내키지 않았지만 1940년대 말에 정보요원으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일을 도운 적이 있다. 누군가의 밀고로 공산주의자로 오해받았던 민주당원 영화인 호세 패러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상당한 고충에 의하여 확실한 극단적 공산주의자의 정보만을 제공했다고 한다.

동시대 영화인 엘리아 카잔과는 다르다. 1970년대까지도 공산주의자들이 불안의 상당한 원인이며 잠재적인 위험으로 느껴진다고 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워드 휴즈 제작의 <스카페이스, 1932>에 잘 묘사되어 있는 갱이 들끓던 20세기 초반을 겪었던 그는 FBI 자격으로 갱과 마피아 정찰에 열성적으로 임했고 자고 있을 때 마피아의 습격으로 생명을 위협받기도 했다.

7. 트리비아

영국출신 영화배우 스튜어트 그랜저의 본명도 제임스 스튜어트였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 예명을 사용했다.

1986년부터 제임스 스튜어트 마라톤이 미국에서 열렸다. 미국 최대 규모 자선 릴레이 마라톤이다. 고향 펜실베니아에 소박한 지미 스튜어트 공항과 소박한 지미 박물관이 있다.

미국 민주당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팬이었다. 외동딸을 뒀으며 아들이 있다면 딱 지미 스튜어트 같았으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다. 오드리 헵번, 레이철 바이스, 이완 맥그리거, 벤 휘쇼, 토퍼 그레이스, 스티븐 스필버그, 프랑수아 트뤼포가 예의상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팬이라고 한 적이 있다. 시민 케인오슨 웰스는 진짜, 상록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배우 맷 데이먼대니얼 데이루이스는 프랭크 캐프라 감독 영화의 그를 좋아한다고 한다. 게리 올드만은 제임스 스튜어트의 외모가 비전형적이고 너무 키 크고, 마르고, 목소리가 이상하지만 연기를 마법처럼 해내는 스타라고 했다.

어느 수상 소감에서 상은 순전히 각도 덕분이라고 말했다. 감독이 정확히 15°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라고 했기 때문에 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1959년부터 프린스턴 대학교 이사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수상경력이나 외부활동 비중을 늘리는 것에 찬성하는 편이었다. 여대합병, 전문 대학원 설립에는 반대하는 편이었고 부잣집 자녀들의[20] 징병회피와 학점 인플레에 반대 했었다. 이 시기에는 너무 바빠져 미리 양해를 구하고 촬영 스케줄 중에 제트기를 직접 몰고 왕복해야 했다고 한다.

택시 고객 불만 처리부에 민원을 넣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미 스튜어튼데요. 기사분께서 제게 20달러를 바가지 씌웠네요. 제가 돈에 연연하지는 않잖아요.(헐리우드 스타 중에서는 부자라 어느정도 여유는 있고) 하지만 이것은 기본적인 사항이고 아시다시피 저만 당하지는 않겠죠." 동행한 조커들(jokers)의 만행이었다고 신속하게 콜 백 했지만 평소 사소한 것들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그 뒤로 직원은 배우로서는 물론이고 인간적으로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행에 관해서는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1930년대 할리우드에서 수입이 늘어나자 비행기부터 구입했고 이 때 구입한 머스탱은 1940년대 제임스의 애마였다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커뮤니티와 미국을 사랑하는 일 잘하고 언행이 일치하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1970년대 중반에 건강 문제로 영화계에서 사실상 은퇴 했고 1983년에 피부암에 걸렸다. 젊은 시절부터 미미한 수전증이 있어 <필라델피아 스토리>나 <스트래이튼 스토리> 등의 영화에서도 보였고 모계 유전인 난청은 40대부터 서서히 진행되기 시작하여 50대부터 보청기를 했다. 시력은 어릴적부터 좋지않아 안경을 쓰고, 공군 신체검사도 시력을 고쳐 써서 통과했다는 루머가 있다.

1988년에 창작의지를 저해시키는 흑백영화의 무절제한 컬러화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원작자의 동의 없이 클래식 필름을 사들여 색을 입혀 다시 파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로비스트였다. 캐서린 헵번, 클린트 이스트우드, 마틴 스코세이지 등의 원작자와 영화인도 동참했다. 스튜어트는 컬러화 작업이 흑백을 전제로 구상한 프레임과 명암을 망가뜨리고 인공적인 컬러로 원작을 훼손하는 행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저작권이 만료되어가는 명작은[21] 내버려 두어야 하며 고전을 피상적으로 복구하는 데만 집중하다가는 새로운 작품이나 의미있는 리메이크에 투자할 비용도 오용하게 될 것이고 어느 면을 따져도 좋을게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 일로 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의도대로 사업가는 자기가 사들인 영화의 원작자에게 어느 정도 예의는 차리게 된다. 제임스는 새로운 기술에는 항상 관심을 가지고 환영 했다.

농담을 좋아하지만 포커페이스가 안되어 항상 망치므로 공적인 자리에서 농담은 자제했다. 농담도 잘하고 평소에 달변가지만 화제가 떨어져 사생활을 늘어놓는 대화는 싫어했다고 한다.

연상 단어로 단어 맞추기 퀴즈쇼인 Password에 영화 홍보도 할 겸 가족과 함께 출연했는데 1960년대에 일찍이 상표와 욕설, 비속어는 자체 잡음으로 대체하는 방송 예절을 알았고 게임 도중 시간이 촉박하면 나는 늙어가고 있다며 재촉했다. 글로리아(아내의 이름, 보통 이름으로 부른다.)팀이 고전하자 힌트를 중얼거려서 게임을 망칠 뻔 했지만 글로리아가 닥쳐(shut up)라고 해서 곧 수습하긴 했다. Genius의 연상 단어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나오자 Theory로 오답을 내기도 했다. 좋아하는 옷은 오래입고 초록색 볼보 세단을 고집했다.

빈곤지역과 의료기관, 재활센터, 각종 비영리단체와 자선단체, 대학 등에 조용히 기부하고 봉사도 했고 그의 많은 영화작업물을 브리검영 대학에 기증했다. 거주지에는 많은 양의 음반, 소설과 계도소설, 그리스 신화, 인류학, 공학, 지리학, 공군에 관한 책, 비행기 모델, 유인원과 동물 모형이 많았다. 로마 문명에 관심 있고 존 골즈워디엘비스 프레슬리의 팬이었다.

가족이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서재였다고 한다. 친구가 그려준 그림을 걸고 미국 중산층같은 인테리어. 커다란 물고기 모형을 매달아놓은 사관학교처럼 집 벽에 작은 물고기 모형을 붙여놓거나 벽난로 주변에 이국적인 고양이 모양 도자기 장식품을 놔두긴 했다.

시쓰기가 취미였고 "지미 스튜어트와 그의 시들"이라는 시집도 냈다. 투나잇 쇼에서 시를 낭송하여 1991년 그래미 어워드 spoken-word 부분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기르던 견공 이름인 시 'beau'를 낭독했던 투나잇쇼는 조회수가 가장 높은 제임스 스튜어트 관련 동영상이다.[22] 그리고 낚시, 골프를 즐길뿐만 아니라 일본 공예품, 멕시코 가면을 수집, 동물, 고고학, 고생물학, 인류학, 여행도 좋아해 뼈도 찾으러 다니고 아프리카 여행을 자주 갔다. 아무튼 취미가 굉장히 많은 사람이었다.

동물단체들과 자연사 박물관의 이사인 아내와 활동 하고 동물 보호 활동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유독 새를 좋아해 새에 대한 잡지식을 습득(?)하고 여러 종의 새와 쉽게 친해지는 것을(?) 선보이곤 했으며 로스앤젤레스 자연사 박물관 새 전시관 비디오를 만들어 홍보도 했다.

게리 쿠퍼와도 친했다. 과묵해서 외출하면 한마디도 안하고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1961년 제임스는 게리 쿠퍼의 아카데미 공로상 대리수상자로 나와 울면서 게리 쿠퍼의 위급한 상태를 알리기도 했다. 제임스가 받은 다음해인 1942년 게리 쿠퍼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고 제임스가 수상자를 호명했다. 게리 쿠퍼는 <요크 상사>의 전쟁 영웅을 연기해 첫번째 아카데미를 받고 제임스 스튜어트는 전시 유니폼 차림이었다.

노년의 제임스 스튜어트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없고 모범적인 스타였다. 결혼 전 플레이보이였지만 게리 쿠퍼의 저녁 식사에서 만난 글로리아와 45년을 해로했다. 제임스는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뉴스릴을 만든 허스트 그룹 경영진의 딸이고(허스트 가문은 아니다.) 뉴욕 출신에 모델, 사교계에서 활동했다. 약간 낸 켐프너 같은 센 언니 스타일이다. 주변에 늙다리가 되어도 호색한 친구가 수두룩 했지만 결혼생활에 전념했다고 한다. 제임스는 초혼이지만 글로리아는 재혼이었다. 부유하지만 애연가에 요리도 못하고 무교라 처음에 집안의 반대가 약간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전 남편은 에블린 월시 맥린[23]의 아들이고 190이 넘는 미남이었지만 알코올 중독에 문란했다. 제임스의 딸은 쌍둥이 자매이다. 한명은 은행가와 결혼 후 이혼, 한 명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만난 교수와 인류학 교수 부부이다. 의붓아들 한 명은 안타깝게 20대에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했고, 한 명은 다른 아들과 반대로 반전주의자여서 제임스 스튜어트와 잠시 멀어진 적이 있었다. 저녁식사 마다 언쟁을 벌이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제임스와 글로리아는 신혼여행지였던 하와이의 목장에서 여생을 보낼 계획이었지만 1994년 하와이에 가기 직전에 글로리아가 폐암으로 사망하고 만다. 제임스는 글로리아가 사망한 후부터 거의 은둔 생활을 하며 나를 걱정하지 않기를 바라고 더 살고 싶지 않다고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1983년부터 착용했던 심장박동 조절기의 전지 교체를 중단했고 1997년에 사망했다. 유언은 "이제 글로리아와 함께 할 겁니다."였다.

8. 루머

1940년대 배우들과 파티

항상 뭔가에 집중하고 바빠서 독신주의자 처럼 보였다고 한다. 화병으로 숨진 영화 제작자 어빙 털번과 사별한 할리우드 퀸 노마 셰어러와 교제 하면서 경력이 급 좋아졌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유명인들 중에는 주로 중성적인 목소리에 유부녀이거나 미망인 여자들과 교제했다. 당시 유명인들이 결혼을 많이해서 미혼이 드문 탓도 있다. 연기파 배우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드하빌랜드법의) 드물게 미혼이었다. 둘은 결혼할 뻔했다. 그녀의 동생 조앤 폰테인과는 앙숙이었는데 조앤 폰테인 역시 아카데미까지 받은 뛰어난 배우로 제임스가 결혼 전 마지막쯤에 사귄적이 있었다. 허스키한 목소리는 아니지만 상대역이었던 진저 로저스와도 교제 했는데 제임스에게 질리지 않고 빠져 들수있었다고 한다. 할리우드 초기 시절 게이루머 파장이 커지자 영화사 MGM 보스에게 매음굴에서의 난교를 증명해야 하기도 했다. 그 뒤 잠시동안 트라우마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이미 기사로도 돌아다니는 내용.)

함께 공연했던 진저 로저스(결혼 5회), 헤디 라마(결혼 6회)[24] 조앤 크로퍼드(결혼 4회) 등과 이성애를 드러내길 바라는 소속사의 압력을 의식하여 공개 데이트하며 우정을 쌓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셋 모두 두 번째 남편과 별거 중이었다. 제임스를 제외하고는 요즘 할리우드 영화인들보다 이혼이 많았다. 제임스와 같은 해에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받은 진저 로저스의 두 번째 남편은 별거 중 제임스와 같은 영화에 조연으로 나오기도 했다. 연예인 학창 시절에 인기 없는 사람 없겠지만 어떤 조건이나 걸림돌에도 일방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9. 출연작 목록

9.1. 영화

  • 1960년대 이후
    • 1960년 The Mountain Road
    • 1961년 마상의 두 남자 Two Rode Together[30]
    • 1962년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31]예고편
    • 1962년 서부 개척사 How the West Was Won[32]
    • 1962년 홉스씨 휴가 가다. Mr. Hobbs Takes a Vacation
    • 1963년 Take Her, She's Mine
    • 1964년 Cheyenne Autumn
    • 1965년 사막의 기적 The Flight of the Phoenix
    • 1965년 셰넌도어 Shenandoah
    • 1966년 희귀종 The Rare Breed
    • 1968년 Firecreek
    • 1976년 The Shootist
    • 1977년 Airport 77
    • 1978년 The Big Sleep
    • 1980년 A Tale of Africa サンリオ映画 「アフリカ物語」[33]

9.2. 연극

  • 미국
    • Carry Nation (1932)
    • Spring in Autumn (1933)
    • Yellow Jack (1934)
    • Divided By Three (1934)
    • Page Miss Glory (1934~1935)
    • A Journey By Night (1935)
    • 하비(Harvey) (1944~1949)
  • 영국
    • 하비(Harvey) (1970)[34]

9.3. 다큐멘터리

  • 1939년 Land of Liberty
  • 1942년 Winning Your Wings 영상
  • http://www.youtube.com/watch?app=desktop&persist_app=1&v=apm8MFVNYiE Everybody Joins U.S. War Effort Etc. 1942]
  • Screen Snapshots 2856, 1950
  • 1954년 Tomorrow's Drivers
  • 1954년 Screen Snapshots: Memories in Uniform
  • 1957년 The Heart of Show Business
  • 1961년 X-15
  • 1962년 The Convair B-58
  • 1965년 Hollywood My Home Town
  • 1967년 Cinema
  • 1970년 F-0299 Aerospace Communications
  • 1974년 That's Entertainment!
  • 1976년 That's Entertainment, Part II
  • 1977년 National Geographic Specials
  • 1979년 V.I.P.-Schaukel
  • 1981년 Margret Dünser, auf der Suche nach den Besonderen
  • 1983년 Hollywood Out-takes and Rare Footage
  • 1983년 James Bond: The First 21 Years
  • 1984년 Olympic Gala
  • 1985년 Palace of Dreams
  • 1987년 Happy 100th Birthday, Hollywood
  • 1988년 Hollywoodism: Jews, Movies and the American Dream
  • 1990년 The Wonderful Wizard of Oz: 50 Years of Magic
  • 1994년 A Century of Cinema
  • 1994년 Entertaining the Troops
  • 1995년 The Universal Story
  • 1997년 Off the Menu: The Last Days of Chasen's
  • 1997년 Hollywood Commandos
  • 1999년 Sasquatch Odyssey: The Hunt for Bigfoot
  • 2003년 Hell's Highway: The True Story of Highway Safety Films
  • 2005년 Cineastas contra magnates
  • 2008년 Erika Rabau: Puck of Berlin
  • 2011년 These Amazing Shadows
  • ABC 2000 : The Millennium

9.4. 라디오

  • Red Cross
  • Madame X
  • Single Crossing
  • One In A Million
  • We Hold These Truths - Bill of Rights Day [35]
  • Six Shooter
  • Sealtest
  • Screen Guild Theater
  • Theat Of Rom
  • Cavalcade Of America - A Sailor Who Had To Have
  • Flight from Home
  • Up from the Darkness
  • Spns341
  • Reader's Digest - One Way To Broadway
  • Plays For Americans - Letter At Midnight
  • Radio Fillers
  • Misty Mountain
  • NB CUT

9.5. TV

  • General Electric Theater, 1957 (감독, 출연)
  • Alcoa Premiere, 1962
  • Hollywood and the Stars, 1964
  • The Dean Martin Show, 1967~1974
  • The Brass Are Comin', 1970
  • The Tonight Show, 1970~1989
  • Hollywood My Home Town, 1965
  • A History of Canadian Movies 1939-1953, 1979
  • The Jimmy Stewart Show, 1971~1972 [36]
  • 하비(Harvey), 1972
  • The World at War, 1974
  • Hawkins, 1973-1974
  • Brother, Can You Spare a Dime, 1975
  • America at the Movies 1976
  • Dinah, 1977
  • The Mike Douglas Show, 1978 [37]
  • Showbiz Goes to War,1982
  • 남과 북, 1986
  • Christmas in Washington, 1988
  • Muppet Babies, 1988
  • Yellow Ribbon Party, 1991
  • Wogan, 1991
  • Reflections on the Silver Screen, 1992
  • American Masters, 1992
  • La classe américaine, 1993
  • Celebrity Debut, 2006
  • Pioneers of Television, 2014
  • Biography (1997~2006, 5 episodes)
  • War Stories with Oliver North

9.6. 그 외

시네마 천국, Menace II Society : 멋진 인생

라디오 데이즈 : 필라델피아 스토리

태양없이, 12몽키즈 : 현기증

수상 이력 리스트


  1. [1] 주(State)가 아니라 구(Borough) 인디애나이다.
  2. [2] 현 시대의 미국의 국민배우라는 소리를 듣는 톰 행크스를 제 2의 제임스 스튜어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3. [3] 클라크 게이블, 그레고리 펙, 게리 쿠퍼, 존 웨인, 캐리 그랜트 등 수많은 스타들이 탄생한 할리우드 클래식 시대에서도 뛰어난 연기력과 깔끔한 용모, 기복없는 커리어, 깨끗한 사생활, 2차대전 참전 용사로서의 명예까지 한 마디로 미국의 전국민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던 '국민배우'였다. 21세기 지금까지도 각종 설문조사나 영화 사이트등에서 위대한 배우 랭킹을 뽑으면 클래식 할리우드 배우들 사이에서도 가장 높은 순위를 대체적으로 자랑한다.
  4. [4] 당대 동료 배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영화 장면들과 비교해 실제키가 190 살짝 안 되는 189cm라는 설도 있다. 미국은 생성초기부터 지금까지 계속 무조건 키 큰 걸 매우 선호하여, 심하게 안 늘리는 배우들도 최소 1인치(2.54cm)를 늘리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21세기까지도 이어져 실제키 5피트 11인치의 브래드 피트가 20년간 6피트로 프로필을 유지하다가 40대 이후 실제 키로 바꾸기도 했다.
  5. [5] 이 키다리가 제임스 스튜어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했다. 녹색 광선에릭 로메르는 좌식이 불편한 미국인이라고 한 적이 있다.
  6. [6] 대략 0.5% 서부대학과 공과대학이 요즘같지 않았다.
  7. [7] 당시에 병자성사라는 용어가 없었다. 죽음을 예상한 듯 하다.
  8. [8] 1947년에 명예 석사를 받기도 했다.
  9. [9] 1973년까지 미국에서 동성애는 정신질환으로 취급되었다.
  10. [10] 영화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11. [11] 재즈시대의 대표적인 음악가로 결혼은 했지만 동성애자였다.
  12. [12] 그래도 가장 건강하던 1950년대 말 신체검사에서는 72kg까지 나왔다고 한다.
  13. [13] 이후 59년에 한번 더 진급해 드물게 사병 출신 장성 이 되었다, 전시라서 빠르게 진급한 듯 하다.
  14. [14]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 등에 영상자료가 있다.
  15. [15] 사실 이 영화는 거절을 못 해서 출연했다시피 하다. NASA의 제트기 10대로 시작한 전세기 사업 Executive Jet Aviation 설립에 참여한 것도 비슷한 경우이다. 미공군은 전략군으로, 미국이 경제위기가 오고 전쟁에서 지더라도 제공권은 한 번도 빼앗긴 적이 없어 홍보할 맛이 나긴 했을 것이다.
  16. [16] 의외로 노백이 좋아했다고 한다. 게다가 자진 성상납 비스무리한 걸 하려다가 스튜어트에게 문전박대 당하기도 했다.
  17. [17] 줄거리에 대해서는 뮤지컬 쓰릴 미 항목 참조.
  18. [18] 우수하지만 학습 해야하는 학생. 가해자는 열심히 해야만 하는 학생을 비웃는 뉘앙스.
  19. [19] 무대 감독을 거친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영화감독. 간결하고 경제적인 연출과 시나리오, 야외 촬영 효과의 교묘한 이용에 의해 서부극에 심리적 요소를 삽입하여 묘사.
  20. [20] 미국은 일부 부유한 정치인 케네디라던가 아들 부시라던가, 거대 기업가나 연예인, 셀러브리티와 그 자녀들도 기여입학 제도를 애용한다.
  21. [21] 저작권은 만료 되었지만 흑백영화 시대는 여전히 영화사의 황금기이다.
  22. [22] Beau?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도그마 선언을 지키는 한 편의 단편 같은)
  23. [23] 광산왕의 외동딸로 네드 맥린과 결혼, 이혼했고 호프 다이아몬드(가격을 추정하면 3000억 정도. 현재는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다.)의 소유자였다.
  24. [24] 당대 최고의 미녀 배우. 소신있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CDMA(Code Division Multiple Access)의 핵심인 스펙트럼 확산 통신을 작곡가 조지 앤틸과 개발하여 특허가 있다.
  25. [25] 제임스 스튜어트가 좀더 현대적이지만 로버트 테일러와 닮았다는 말을 들었었다.
  26. [26] 40분 지나서 등장하지만 주연이다.
  27. [27] 히치콕과 스튜어트의 첫 컬러영화.
  28. [28] 제목이 같은 영화가 몇 편 있다. 최초로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시각을 바꾼 영화, 케빈 코스트너 감독의 <늑대와 춤을>과 제임스 카메론감독의 <아바타>에 영향을 주었다.
  29. [29]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최악의 작품상 중 하나로 평가된다. 제임스는 피에로 분장을 하고 조연으로 출연했다.
  30. [30] 미국에서는 범작이라는 반응이었으나 프랑스 영화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그해의 영화 10편에 뽑혔다.
  31. [31] 다크 나이트(영화) 에 영향을 주었다. 영화 속에서 존 웨인은 스튜어트를 순교자라고 부른다. 스튜어트가 극중에서 약간 비겁한 인물이지만 두 사람 입장이 현실에서는 조금 반대인 점이 흥미롭다.
  32. [32] 옴니버스 형식에 곡선 스크린으로 관람하는 시네라마 영화 이다.
  33. [33] 주연은 아프리카 동물들.
  34. [34] 1975 영국 연극 데뷔작
  35. [35] 2차 대전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바치는 연설로 6000만이 청취했다.
  36. [36] TV 시리즈 출연작. 전형적인 안방용 에피소드로 흔한 감동이지만 「Love in a Briefcase」, 「A Bunk for Unc」, 「Period of Readjustment」, 「Paper Work」 등은 훈훈한 편 이다. 지미 스튜어트가 아니고 제임스 K. 하워드 역이다. 그의 조상은 초상화로 한번씩 등장하고 매우 닮았으며 사실은 똑같이 생겼다. 제임스 하워드는 아코디언 연주가 취미이고 가정에 충실하고 가족을 사랑한다. 징그럽게 금술이 좋아 늦둥이가 조카와 또래이다. 평범한 중산층 인류학 교수 할아버지이며 유일한 친구인듯한 동네 할아버지는 노벨화학상 수상자라고는 하는데 하릴없이 직장과 집에서 붙어 다닌다. 자전거를 타고다니고 본인만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다닌다. 연기를 안 하고 있는 거 같다. 정치색이 약간있고 영화에 같이 출연했던 배우들이 게스트로 많이 나온다. 그리고 매니아층이 있는지 가끔씩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한다.
  37. [37] 3세였던 타이거 우즈와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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