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

1. 역사 용어
1.1. 개요
1.2. 특징
1.2.1. 유럽의 경우
1.2.2. 동아시아의 경우
1.3. 사례
1.3.1. 해외의 사례
1.3.2. 일본의 사례
1.3.2.1. 일본의 고려에 대한 조공
1.3.2.2. 일본의 조선에 대한 조공
1.3.3. 고려조선의 사례
1.3.4. 정치적 사례
1.3.5. 중국의 수탈 사례
1.4. 기타
1.5. 같이보기
2. 인터넷 은어
2.1. 개요
2.2. 사례
2.3. 바깥고리
3. 게임 은어
3.1. 개요
3.2. 사례
4. 군사 용어
4.1. 개요
4.2. 같이보기

1. 역사 용어

1.1. 개요

샤한샤에게 조공 바치는 사신들 (페르세폴리스)

朝貢, Tribute

전근대 동북아시아에서 제후가 천자에게 바치는 예, 또는 그것으로 구성된 국제 질서 체제. 조회 참례를 의미하는 조(朝)와 공물을 의미하는 공(貢)으로 이루어진다. 조공의 반대 개념으로는 책봉이 있으며, 조공을 통해 황제는 국가의 신하들에게 책봉을 내렸다.

유럽의 전근대의 문화와 동아시아의 문화에는 차이가 있다.

1.2. 특징

원래 천자와 제후국으로 이루어진 봉건제의 주나라에서 채택된 제도로, 천자와 제후의 개념이 중국의 경계를 넘어서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로 개편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외교 관례로 굳어졌다. 중국에서는 국내에서도 행해졌지만, 점차 황제권(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실질적인 의미의 제후가 사라지게 되자 자연스럽게 조는 망궐례 등으로 간소화되고, 공은 세금화되었다.

조공 무역의 이익과 손해도 매우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익을 볼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당시 관점으로 보느냐 아니면 지금의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도 이익과 손해가 달라지기도 한다.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딱히 당시 국력에 도움은 되지 않는 사치품을 잔뜩 받고 중요한 전략 자원인 말 같은 것들을 주면 지금 관점에서는 손해로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이익이고 다른 무역에서 중요하게 쓰일 수도 있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선진 문물을 배운다는 학비 취급을 하기도 했다. 동북아시아 국제 관계에 있어서 조공은 사대에 따른 일종의 외교 의례였고, 조공을 한다는 것은 국가 대 국가로서의 위치와 외교관계를 확정한다는 의미였다.

송나라 때는 일부 지나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상당히 과장되기는 했지만 상대국인 송나라의 안습한 외교적 현실[1]을 적절히 이용해서 나름 실리도 챙기고 체면도 살렸다.[3][4][5]

14세기 말 몽골족의 원나라를 대신하여 중국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명나라는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송나라 때 만들어진 책봉조공(冊封朝貢) 체제를 더욱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한 세계 체재, 곧 중화주의(中華主義)를 완성하기 위해 사대관계를 굳건히 하고자 하였다.

주변국들의 반발도 거셌는데, 특히 고려공민왕은 가장 적극적이어서 북방의 동녕부(東寧府)를 침공하였고, 명나라는 요동도사(遼東都事)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고려를 압박하였다. 고려는 요동 정벌이라는 초강수를 두었지만,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이 건국되었다. 조선원나라를 버리고 친명(親明)을 분명히 하였고, 이에 명나라는 조선의 건국을 즉각 승인하였다. 조선은 ‘조선(朝鮮)’과 ‘화녕(和寧)’이라는 두 가지 국호를 올려 선정을 위촉하였고, ‘조선국왕(朝鮮國王)’을 새긴 새로운 옥새를 요청하였다. 이로써 조선과 명나라는 황제가 왕을 봉하여 주고, 왕은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는 전통적인 책봉조공(冊封朝貢) 관계를 수립하였다.

명나라는 요동 문제를 비롯한 현안이 남았기 때문에 명나라는 외교적으로 조선을 압박하여 힘의 우위에 서고자 했다. 과도한 공물과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였고, 사신의 자질 문제를 들어 조선 사신의 입국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에 조선은 반발하며 강력한 항의를 하자 명나라는 사신을 1년에 3번 파견하는 1년 3사가 아니라 3년에 1번 파견하는 3년 1사를 권하였다. 사행 횟수를 줄여 사행을 통해 조선으로 누설되는 군사적 정보를 줄이고, 여진족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사행 제한에 대해서 강력히 반발했다. 이는 정치적 안정과 권위를 인정받는 문제 외에 사행이 갖는 경제적ㆍ문화적 이익이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군역을 피해 압록강을 넘어온 요동 사람을 쇄환(刷還)하는 문제와 조선이 작성한 표전문(表箋文)으로 벌어진 논란 등 여러 사건이 중첩되며 얽힌 관계는 대명관계에서 강경파였던 정도전(鄭道傳)이 왕자의 난으로 리타이어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세종 대를 지나 국내외가 안정되면서 대명관계도 요동을 중심으로 한 영토문제에서 문화와 교역을 중심으로 안착되었다. 조선은 서책과 약재, 활(각궁)의 재료가 되는 수우각(水牛角) 수입에 적극적이었다.참고자료

주문사(奏聞使) 남재(南在)가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와서 아뢰었다.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고 또 명령하기를, ‘너희 나라 사신의 행차가 왕래하는데 길이 멀어서 비용이 많이 드니, 지금부터는 3년 만에 한 번 조회하라.’ 하였습니다.

(甲辰/奏聞使南在回自京師曰: “帝厚待之, 且命曰: ‘爾國使臣行李往來, 道遠費煩, 自今三年一朝。)

( 태조 4권,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9월 2일(갑진) 1번째기사, 링크)

중국은 세계의 문물을 동아시아에 전파하는 역할을 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서양의 기술이 직접적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중국과의 조공 무역이 없었던 나라들은 그만큼 뒤쳐지게 된다는 의미. 물론 조선여진이 조공해올 때는 하사품을 신경썼었다. 조선뿐만 아니라 몽골,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교역도 명목은 조공이었다.

1.2.1. 유럽의 경우

원래 전근대 유럽권은 기본적으로 종교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전제 하에서[6] 서양의 왕 또는 공작, 선제후들은 한 군주가 여러 지역의 수장이 될 수 있었고, 백작이나 후작, 공작 등의 제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신하였다. 선제후국들의 선제후들은 영토 내에 봉건적으로 존재하며, 비독립적이고 병역과 세금의 의무가 있었다. 유럽중세 초기에는 동북아시아와 비슷하게 각국의 왕이 명목상으로는 로마 제국의 신하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여러 게르만족들이 난립하여 왕국을 세우고, 게르만족 장군인 오도아케르동로마 제국에게 왕위를 인정받고 서로마를 한 때 지배한 적도 있다.

동로마 제국의 경우 확실히 동로마에 소아시아 지역 또는 유목 민족들을 상대할때 군사적 도움이 될수 있는 게르만족이 필요하였고 교황도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아예 유력한 서유럽 왕국의 군주를 새로 황제옹립하고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책봉하였는데 이 경우에는 서로마 제국 또한 선제후국들을 거느리는 이중 제국의 형태가 시작되었다. 프랑크 왕국이 세 개로 분열된 후에 중세에는 신성 로마 제국 안에 로마 황제에 대한 의무를 지닌 선제후들이 존재하였고, 동로마 제국 또한 러시아의 공국들에게 공작을 하사하는 봉건 제도가 존재하였다. 이런 제도는 통일 로마 제국 시기부터 내려온 전통인데, 고대의 로마 제국도 이런 식으로 자국의 속국이나 위성국의 군주나 유력자를 현지의 왕으로 책봉하였고[7], 일부는 그 댓가로 그 나라의 왕족이나 귀족에게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로 유학을 오도록 하여 로마식 교육을 시켜주고[8], 작위를 책봉받기 전까지 고관대작으로 임용하는 특혜를 제공하기도 했다.

안도라1993년에 국민 투표로 헌법을 제정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공동영주인 스페인 우르헬 주교와 프랑스 대통령에게 조공을 바쳤다. 워낙 작은 나라고 유럽의 정세구도상 관심 밖이었기 때문에 심각한 인권 유린이나 탄압이 없어서 낡은 제도가 20세기 말까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것. 안도라는 1년씩 번갈아가며 프랑스 대통령에게 현금 960프랑(약 14만원)을, 우르헬 주교에겐 현금 460페세타(약 3,000~4,000원)와 6개의 햄, 6개의 치즈 그리고 12마리의 닭을 보냈다. 이것이 그들의 주군에게 바치는 조공이었다. 이는 1993년 입헌공동군주제가 되면서 폐지되었다.

1.2.2. 동아시아의 경우

동양의 경우에는 중국의 경우 주나라 때부터 중국 영토 내 여러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 신하들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제후로 삼는 책봉을 시작하였다. 제후들은 황족이나 공신들로 이루어졌으며 중앙 정부에 대한 병역과 조공이라는 세금적 의무가 있었고, 중앙 정부가 지배하는 영토 안에 존재하였으며 중앙 정부에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후를 바꿀 수 있는 비독립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중앙 정부가 혼란스럽거나 무너졌을 땐 독립적인 주체가 되어 패왕을 자처하며 황제가 되려고 여러 지방 제후국들과 전쟁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 사실상 중국 영토가 아니며 중국 중앙 정부에서 친인척이거나 신하로서 책봉되거나, 파견된 제후가 아닌 독립적인 국가들이 중국 왕조들과 교역을 하기 위해 중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도 이와 같은 중화사상의 시스템이 작동하여 중국 왕조에선 고구려신라, 백제, 국 등에 책봉을 내리고 신하로 삼았다. 즉 주나라, 한나라 같은 중국 제국 영토 안에 있는 비독립적인 제후국들과 중국 제국 영토 밖에 있지만 독립적인 왕들이 통치하는 국가들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봉권 시스템은 화하족 또는 한족들이 주나라부터 춘추시대를 거쳐 한나라까지 중국 영토 내에 봉건 시스템적으로 중앙 정부에서 공을 세운 자들을 파견하거나 지방 유력자들에게 책봉을 내려 그 지방을 완전히 제국 내의 영토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시스템은 사실상 중앙 정부의 신하도 아니며 친인척도 아니고 제후도 아닌 다른 독립적인 민족들이 세운 국가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초나라오나라, 월나라의 사례다. 본래 초나라는 몽몐어족 계통의 민족인 몽족이 세운 나라이며[9], 오나라와 월나라는 현대 베트남인과 같은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의 민족이 세운 나라여서, 한족이 세운 주나라 중심의 봉건 체제에 낄 자격이 없었으나, 자기들이 직접 제후를 사칭하면서까지 주나라에 칭신해서 중화권의 정세에 개입하고자 했다[10]. 물론 이런 속보이는 짓을 주나라 측에서 인정할 리가 만무했으므로 이들의 칭신을 거부하였다. 심지어는 이 중에서 가장 강대한 초나라를 정벌하려고도 했지만[11], 막상 이들이 너무 강대한 나라들이어서 주나라와 여러 제후국들 입장에서는 공격하기에 너무 부담되었던지라, 결국 정책을 바꾸어서 이들에게도 정식으로 제후로 책봉하고 칭신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한족이 아닌 이민족의 군주들을 명목 상의 신하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은 것은 이때가 첫 시작이었다[12]. 아래에서도 후술하겠지만, 중국 왕조들보다도 강대한 나라들조차 일부러 칭신하고 조공을 바쳤을 만큼, 조공-책봉 체제는 결코 중국만 이익을 보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좋은 증거이기도 하다.

일례로, 18세기에 이르면서 아예 아시아 국가도 아닌 영국조차 무역의 이권을 노리고 청나라 황실에 칭신한 사례가 있다. 이 시기에는 조공품으로 당대 아시아권의 기축통화이던 을 바쳤는데, 문제는 은은 아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기축통화처럼 취급되는 물건이었고, 때문에 영국 측이 청나라를 상대로 조공무역을 할 때마다, 외려 적자가 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13]. 그래서 청나라로 보내는 조공품에 은근슬쩍 아편을 끼워서 같이 조공하면서 중국 내에 아편중독자가 늘자, 거꾸로 영국으로 유출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일어난 것이 바로 아편 전쟁이다. 조공-책봉 체제가 중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양날의 칼이었다는 증거다.#

이는 조공-책봉 체제를 유지하는 모든 나라의 특징이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 초기에 일본 사신이 한양까지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면서까지 일본으로부터 조공을 받아왔는데, 그 조공로가 임진왜란 때 그대로 침략길로 바뀌게 되자(...), 뒷날 조선이 다시금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할 때, 조선 통신사들만 일본의 행정 수도인 에도까지 갈 수 있게되고, 반대로 일본 사신이 한양을 방문하는건 금지되었다[14]. 조공을 받는 입장에서는 칭신하던 나라가 삽시간에 조공하러 오던 길로 쳐들어와서 칼을 꽂을 수도 있던 불안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반복됐던 것이다[15]. 괜히 명나라 초기에 주원장조선요동 방면으로 쳐들어올까봐서 히스테리를 부린 게 아니다.

중화사상이 존재하는 중국 왕조와 교역 또는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이 조공 책봉이라는 시스템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북방 민족들, , 삼한,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은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 형식적인 책봉을 받았다. 또한 고구려, 백제국의 왜5왕들처럼 그 책봉을 오히려 이용하여 다른 외국들에게 자신들이 통치하고 있는 지역을 홍보하기도 했고, 외왕내제의 정책을 실행하였다.

하지만 북방의 몽고계 등의 민족들이 세운 독립적 국가들은 좀 다르다. 초기에는 중국과 교역하기 위해서 중화사상 시스템으로 책봉을 받고 중국 문화를 습득하였으며 중국 왕조의 신하로서 있었다. 하지만 국력이 중국 한족들의 왕조보다 강해졌을 때는 스스로 중국 왕조에 동급이라 주장하거나 중국 한족 정권을 오히려 책봉하려고 하였으며, 다른 속국 국가들 또는 독립 국가들을 똑같은 중화사상 시스템으로 책봉을 내렸다.

이러한 중화사상은 북방이나 다른 지역의 독립적인 민족들이 세운 국가들, 한족들이 세운 국가들의 충돌을 야기했다. 그리하여 중국에는 북조남조 등이 발생하였다. 수많은 민족들이 이 화하족들이 사용한 동아시아의 교역 문화에서 중화사상의 책봉 문화에서 우위를 얻기 위해, 또는 자존심을 내세우기 위해 전쟁을 하고 멸망하고 사라졌다.

삼한이나 고려, 조선, 일본국의 경우에도 다른 민족 국가들과 같이 중국밖에 존재하며 독립적인 국가이지만 중국과 교역, 무역하기 위해 중국 문화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조공 책봉 문화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중국의 북조들이 행한 것처럼 고구려는 자신들을 천자로 자칭하였고 여러 다른 민족들에게 조공을 받았다. 고려의 경우 중국 왕조와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기 위해 외왕내제를 행하였고 일본의 경우에도 중국에 책봉을 받고 조공을 하든 말든 자국에서는 천자로 칭했으며[16] 중국과의 먼 거리로 인해 교역이 뜸할 때는 교역을 위한 조공 자체를 안 한 기간이 길다. 다만, 일본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지라, 전근대 시대 내내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로 있었기에 헤이안 시대 직전까지는 다른 나라들처럼 조공 무역에 많이 의지했다. 아스카 시대 전후에 백제가야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이나, 헤이안 시대 초기에 견수사, 견당사중국에 파견한 것이 그 예였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등장한 것은 이런 조공 책봉 체제의 결과물인데, 원래 쓰던 라는 국호가 한 글자 국호라는 점이 문제가 된 바람에 같은 뜻의 두 글자 국호로 바꾼 것이다. 동북아시아에서 한 글자 국호는 중국의 정통 왕조로 대접받는 나라 내지는, 중원에 소재한 나라들만 사용하는 게 암묵의 룰이었던지라[17], 당시로서는 아시아 변방의 듣보잡 국가 대접받던 일본이 한 글자 국호를 쓰는 건 외교적 분쟁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18].

야심이 있다면 형식상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을 썩 유쾌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라 고구려신라, 고려에서도 외왕내제를 행하고 북조 등이 송나라와 결판을 내려고 한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역을 위해 입조나 조공을 한다는 것이 반드시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나라가 서하. 서하의 경우는 송나라요나라에게 공격받을 때 덩달아 공격하면서 황제국을 자칭하려고 했다. 다만 송나라 측에서도 황제국 칭호만큼은 용납하지 않아서 그때마다 대대적으로 격퇴하거나 역으로 공격을 했다. 결국 요나라와 협상을 맺게 되면서 서하와 송이 1:1의 상황이 되자 서하에서도 칭신하고 막대한 양의 세폐를 선물을 받는 것으로 외왕내제의 선에서 그쳤다. 그래도 이후 기회가 될 때마다 공격하고 황제국으로 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3. 사례

1.3.1. 해외의 사례

오이라트의 경우, 조공하는 의 숫자와 가격을 마음대로 부풀리기도 했다. 여기서 '가격'이라는 것은 말 한 마리당 '하사'하는 의 분량을 의미한다. 사실 가격 자체는 고정되어 있었지만, 오이라트 측에서는 말의 숫자를 실제로 조공하는 말의 숫자와 다르게 멋대로 부풀려서 몇 배의 은을 받아냈다. 실제로 과거에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지 않아 상부가 제대로 된 내용을 알기 쉽지 않으니 어떻게든 속일 방법이야 있었고 여러 국가에서 시도되기도 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이 조공무역을 '막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 이유가 천황가의 세력이 무역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는데, 하필이면 무로마치 막부 밑의 6대 가문들이 몰래 하는 바람에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지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센고쿠 시대가 도래한다.

오키나와류큐 왕국은 경제적으로 중국과의 조공무역에 많이 의존해왔다. 땅도 좁고, 농사도 잘 안 되다보니 그렇게 된 것.

만주족은 조공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전 세계를 자신들의 통치 아래 두었다고 한족들에게 선전했다.

1.3.2. 일본의 사례

1.3.2.1. 일본의 고려에 대한 조공

11세기 중엽 고려일본 간에는 북큐슈와 금주(김해)를 오가는 무역로가 있었다. 고려에 도항하는 일본인들 중에는 상인 이외에 일본국사, 대마도주, 살마주사 등 토산물을 헌상하고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지방관에 의한 고려에의 ‘조공’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문종대인 11세기 후반부터 큐슈 각지의 지방관과 민간상인들이 고려에 도항하여 ‘방물(方物)’을 바쳤기 때문에, “동쪽에 있는 왜(倭)가 바다를 건너 보배를 바쳤다”는 평가가 내려질 정도였다.

일본에서 내왕하는 선박을 일본인들이 '진봉선(공물을 바치는 배)'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물품을 바친다는 뜻으로 진봉이란 용어사용은 이미 오래되었으며 일본인이 물품을 진봉하는 항례적인 법규가 제정되었다.

때로는 고려에서 주는 사급품을 노리고 일본인들이 진봉하기 위하여 상호간에 경쟁이 심하여 서로 싸우는 폐단까지 생겨 고려에서는 진봉 그자체에 대하여 좋아하지 않은 경향을 보였다. 이같은 경향은 일정 기간내에 일본상선을 출입선수 횟수에 대하여까지 제한을 두었다.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된 일본의 조공 내역》

1056년 문종 10년 10월 日本國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문종 27년 7월 日本國人 왕칙등 42인 나전 외에 12가지 물건을 진상

문종 27년 7월 일기도(규슈 나가사끼)구당관 등정안국 등 33인 방물을 진상

문종 27년 11월 日本國 에서 예물과 명마를 헌상

문종 28년 2월 日本國 선두 중리 등 39인 특산물을 진상

문종 29년 4월 日本國 오옹에 등 18인 특산물을 진상

문종 29년 6월 日本人 조원. 시경등 12인 특산물을 진상

문종 29년 7월 日本國 상인 59인 고려에 도착

문종 30년 10월 日本國 승속(승려와속인) 25인 불상을 헌상

문종 33년 11월 日本國 신통 등 소라.해조 등을 흥왕사에 진상

문종 34년 9월 日本國 축전주에서, 방물을 헌상, 살마주(가고시마)에 사신을 보내와 헌상

문종 36년 11월 대마도에서, 방물을 헌상

1084년 선종 원년 6월 日本國 축전도의 후지와라,,수은을 헌상

선종 2년 2월 대마도주 구당관, 감귤을 진상

선종 3년 3월 대마도주 구당관, 방물을 진상

선종 4년 3월 日本 상인 중원.친종 등 32인 특산물 진상

선종 4년 7월 대마도의 원평 등 48인 수은.진주.보도.우마 등을 헌상

선종 6년 8월 다자이후의 상인, 수은.진주.궁전.도검 등을 진상

예종 11년 2월 日本國에서 감자[19]를 진상

고려사(高麗史)

1.3.2.2. 일본의 조선에 대한 조공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왜국조선에 조공한 내역과 함께 보낸 서한의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본 쇼군과 지방 정권 태수들은 조공서한에서 조선을 상국(上國)또는 대방(大邦)이라 하였고 자신은 누방으로 낮추어 칭했다. 이 일부 일본 쇼군들은 스스로 백제의 후손임을 자칭하며 조상님의 나라인 조선과 교역하길 간절히 원했다. 간간히 백제 왕릉에 참배하러 자주 방문하는 오우치 가문같은 일본의 교역권을 관리하던 큰 세력들이다. 일본이 조선 군주를 '황제폐하'로 부른 사례도 여려차례 발견되는데, 조선이 자체적으로 황제라는 직함을 두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조선 군주를 황제로, 조선을 상국(上國)으로 부를 만큼, 조선은 동아시아에서 명나라 다음으로 역량있고 높은 위치에 있는 국가였음이 사실이다.

참고로 조선이나 명나라에서는 쇼군을 ‘일본국왕’이라고 불렀는데, 메이지 유신(1868년) 이전에는 소위 ‘천황’이 아닌 쇼군(막부의 수장)이 일본의 실력자이고, 대외적인 국가대표기관이었다.

세조 9년 계미(1463, 천순 7)

일본 국왕이 사인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올린 서계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인(使人)을 보내 와서 토물(土物)을 바치니, 그 글[書]에 이르기를,

“보린(寶隣)이 근년에 음모(音耗)6179) 가 소활(疏闊)하오며, 하늘은 멀고 바다는 막혔으니, 어찌 목마르게 바라는 것을 이기겠습니까? 이제 천룡(天龍)6180) 의 준초 서당(俊超西堂)과 범고 수좌(梵高首座) 등을 정사(正使)·부사(副使)로 삼아, 차견(差遣)하여 전과 같은 호의(好意)를 닦으옵니다. 이에 수년 전에 사선(使船)을 귀국(貴國)에 보냈더니, 이르시기를, ‘가까운 장래에 마땅히 포궤(包?)6181) 를 명(明)나라 조정에 바쳐서 전년[前歲]을 사례하라.’고 하시었는데, 행사(行使)가 불궤(不軌)의 죄(罪)를 범하였습니다. 비록 그러나 누방(陋邦)은 근년에 동벌 남정(東伐南征)하느라고 군사(軍事)에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능히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고, 인순(因循)하여 지금까지 이르렀으니, 자못 돈어(豚魚)6182) 의 신(信)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폐하(陛下)께서 일찍이 일서(一書)를 오는 편에 전(傳)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송처검(宋處儉)·대호군(大護軍) 이종실(李宗實)을 보빙 사자(報聘使者)로 삼아 보내었는데, 해상(海上)에서 홀연히 태풍[?風]을 만나, 두 배가 표몰(漂沒)하여, 글 속[書中]에 기재한 건건(件件)의 방물(方物)은 비록 이 지방에 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예의(禮意)의 두터움을 받았으며, 인하여 바닷가 제국(諸國)에 나아가 그 일을 다 찾았으나, 모두 연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표류한 배를 돌려보낼 수 없었으며, 또 그 나머지 시체를 장사지냈습니다.

우리 천룡선사(天龍禪寺)에 명하여, 수륙 대재회(水陸大齋會)를 베풀어 두 사람[二子]을 위하여 명복(冥福)을 자천(資薦)하였을 뿐입니다. 천룡선사(天龍禪寺)는 곧 조종(祖宗)이 창업(創業)하여 누방(陋邦)에서 복(福)을 심는 신령한 도량[靈場]입니다. 근자에 회록(回祿)의 변(變)을 만나서 구관(舊觀)을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연곡(年穀)이 익지 않고 재앙(災殃)이 자주 이르러서 이제 장차 승당(僧堂)을 경영하려 하는데, 대방(大邦)의 도움을 빌지 않으면 즐겨 이루기가 어렵겠습니다.

그윽이 명하여 의염(義廉)·생관(生觀)·교직(敎直) 등에게 집사(執事)를 치의(致意)하게 하였습니다만, 무릇 우리 나라가 부처[佛]를 섬겨 착하게 된 것은 바로 귀국(貴國)의 비로 법보(毗盧法寶)를 얻은 소이(所以)이니, 대저 하나의 장서[一藏]를 얻은 것은 그 큰 것을 내려 줌입니다. 더구나 구(求)함을 따름으로써 상도[常]를 삼으시니, 누방(陋邦)이 엎드려 청(請)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인(仁)의 고찰(古刹)을 세우면서 1만 민(緡)을 주는 것을 얻어, 윤환(輪奐)을 아름답게 고치었으며, 이제 또 천룡 만당(天龍滿堂)의 해중(海衆)이 폐하의 비음(庇蔭)을 입으면 어찌 서북(西北)을 바라보며 만세(萬歲)의 축복이 이르지 않겠습니까? 토의(土宜)가 변변치 못하오나 별폭(別幅)과 같이 갖추었습니다. 봄추위가 아직 남았으니, 때를 따라 아끼어 보전하소서.”

하고, 별폭(別幅)은 채화선(綵?扇) 1백 파(把), 장도(長刀) 2자루[柄], 대도(大刀) 10파(把), 대홍칠 목거완(大紅漆木車椀) 대소 합하여 70사(事), 대홍칠 천방분(大紅漆淺方盆) 대소 합하여 20사(事), 홍칠 흑칠 잡색 목통(紅漆黑漆雜色木桶) 2개(箇)이었다.

*상국(上國) : 조선(朝鮮)을 말함

*폐하(陛下) : 세조를 말함

*대방(大邦) : 큰 나라를 의미함. 여기서는 조선을 가르킴

*누방(陋邦) : 일본을 말함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조공물품과 함께 조선에 보낸 서한에 조선의 세조폐하라고 부르면서, 일본 자신은 '누방'으로 조선은 '대방(大邦)'으로 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조 9년 계미(1463, 천순 7)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인(使人)을 보내 와서 토물(土物)을 바치니,

그 글[書]에 이르기를,

“보린(寶隣)이 근년에 음모(音耗)가 소활(疏闊)하오며, 하늘은 멀고 바다는 막혔으니, 어찌 목마르게 바라는 것을 이기겠습니까? 이제 천룡(天龍)의 준초 서당(俊超西堂)과 범고 수좌(梵高首座) 등을 정사(正使)·부사(副使)로 삼아, 차견(差遣)하여 전과 같은 호의(好意)를 닦으옵니다.

폐하(陛下)께서 일찍이 일서(一書)를 오는 편에 전(傳)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송처검(宋處儉)·대호군(大護軍) 이종실(李宗實)을 보빙 사자(報聘使者)로 삼아 보내었는데, 해상(海上)에서 홀연히 태풍[?風]을 만나, 두 배가 표몰(漂沒)하여, 글 속[書中]에 기재한 건건(件件)의 방물(方物)은 비록 이 지방에 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예의(禮意)의 두터움을 받았으며, 인하여 바닷가 제국(諸國)에 나아가 그 일을 다 찾았으나, 모두 연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표류한 배를 돌려보낼 수 없었으며, 또 그 나머지 시체를 장사지냈습니다.

성종 1년 경인(1470, 성화 6)

일본 국왕이 보낸 입도 등이 와서 서계와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 국왕(日本國王) 회수납정소(懷守納政所) 이세수(伊勢守) 정친(政親)이 보낸 입도(入道)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정친은 삼가 글을 조선국 의정부(議政府) 합하(閤下)에게 바칩니다. 공손히 바라건대 나라가 크게 평안해서 금상 황제(今上皇帝)의 어위(御位)가 오래도록 가소서! 폐하(陛下)께서는 공손히 덕(德)이 건곤(乾坤)과 일치하여 당우(唐虞)의 어질고 장수하는 지역(地域)을 보전하고, 현성(賢聖)을 신하로 모아서 이주(伊周)의 순수하고 소박한 기풍을 회복하도록 원하며, 성의를 다하여 축복합니다. 그런데 부상(扶桑) 전하의 높은 명령에 응하여 같은 날에 서계를 봉하여 조선(朝鮮)과 유구(琉球)의 두 나라에 사선(使船)을 보냅니다. 이는 나의 개인적인 의사가 아니니, 이와 같은 간절한 뜻을 폐하에게 주달(奏達)하여서 허락하여 주시면 오직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귀국의 남은 힘을 입고자 하는데, 바라는 물건은 면주(綿紬) 3천 필, 면포(綿布) 5천 필, 백저포(白苧布) 1천 필, 쌀 5천 석이니, 자비로 살피소서. 오직 우리 나라의 태평을 거두고 더 나아가 번신(藩臣)으로서의 충성된 공훈을 세우기를 빕니다. 보잘것 없는 토산물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바야흐로 새 눈이 온 산을 뒤덮었으니 풍년이 들 길조(吉兆)입니다. 이만 그칩니다. 별폭은, 금(金) 2원(員) 21냥쭝[兩], 주(朱) 4포(包) 40냥쭝, 대도(大刀) 15파(把), 단자(段子) 1필, 수자(?子) 1필, 부채[扇子] 50본(本)입니다. 받아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성종 32권, 4년( 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일본국 인백단 삼주 태수 원교풍이 양영서당을 보내어 선물과 글을 올리다

일본국(日本國) 인백단 삼주 태수(因伯丹三州太守) 산명전(山名殿) 소필(少弼) 원교풍(源敎?)이 양영 서당(亮瑛西堂)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치고, 아울러 사서(四書) 각각 1건(件)씩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는 이르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천운(天運)을 이어받으시니, 구방(舊邦)이 유신(維新)하며, 덕(德)이 하(夏)나라·은(殷)나라의 초정(初政)보다 뛰어나시고 도(道)가 요(堯)임금·순(舜)임금보다 위에 짝하시니, 지극히 축하하고 지극히 축수합니다. 신은 선조(先祖) 이래로 가세(家世)에서 상국(上國)3198) 에 빙문(聘聞)을 통하지 아니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경인년3199) 가을에 일개 암자승(菴子僧)과 석도문(奭都聞) 등을 차견(差遣)하여서, 옛날의 맹세를 닦으며, 또 토의(土宜)의 미미한 정성을 바쳤습니다. 다행히 금상 황제(今上皇帝)3200) 께서 왕위(王位)를 이어받으시는 초정(初政)을 만나서, 눈으로는 한(漢)나라 관리의 위의(威儀)를 보겠고, 귀로는 주(周)나라 시(詩)의 가송(歌頌)을 듣겠으니, 아아, 성대(盛大)합니다. 실로 문무(文武)의 나라인지라 영우(榮遇)하기가 너무나 크옵니다. 전사(專使)3201) 가 일을 끝마치고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매, 화로 동반(火爐銅盤) 1개와 동경(銅磬) 1개를 더하여 내려 주시니, 이미 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감격하고 기쁜 마음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만복사(萬福寺)의 주지(住持) 양영 서당(亮瑛西堂) 등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박(薄)한 폐물(幣物)을 바치어 오로지 황제께서 왕위를 이으신 것을 배하(拜賀)하게 합니다. 신은 비록 먼 하늘, 먼 바닷가의 땅에 있어서 위궐(魏闕)3202) 아래에 달려가 마음을 바치지는 못하나, 구구(區區)한 단성(丹誠)3203) 을 엎드려 예찰(睿察)하여 주시기를 빌며, 그리하여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신의 봉지(封地) 안의 백주(伯州)에 만복 선사(萬福禪寺)라고 하는 옛 사찰(寺刹)이 있는데, 허물어져 무너진 지가 세월이 오래 되었으므로 장차 다시 영조(營造)하려고 하여, 저번 때에 상국(上國)에 조연(助緣)3204) 을 구(求)하였으나, 너그러이 용납하여 주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바라는 바는 대왕께서 관인(寬仁)으로써 포금(布金)3205) 의 봉시를 속히 행하여 주시면, 불각(佛閣)과 승방(僧房)을 일시에 다시 옛날처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길이 성수(聖壽)가 만안(萬安)하시도록 봉축(奉祝)하는 일단이 될 것입니다. 하정(下情)3206) 은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변변치 않은 방물(方物)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상국(上國) : 조선(朝鮮)을 말함

*금상 황제(今上皇帝) : 성종(成宗)을 말함

*위궐(魏闕) : 임금의 궁궐

*단성(丹誠) :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성

*하정(下情) : 윗사람에게 대하여 자기의 마음이나 뜻을 낮추어 이르는 말

*봉지(封紙) : 제후의 영토(봉토).

성종 4년 계사(1473, 성화 9)

일본국의 다다량정홍이 보낸 원주덕이 하직하니 인견하고 재물을 하사하다

신숙주(申叔舟)를 시켜서 원주덕(源周德)에게 말하기를,

“너희 대내전(大內殿)은 족계(族係)가 우리 나라에서 나갔으므로 서로 교호(交好)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듣건대 편안하다고 하니 기쁘고 위로되나, 다만 너희 나라 전쟁이 어떠하냐?”

하니 원주덕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연(那衍)은 특별히 성상의 은덕을 입어 무양(無恙)합니다. 본국은 전란이 그치지 아니하기 때문에 상국(上國)에 오래 통신(通信)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란이 평정될 기한이 없어서 특별히 신(臣)을 보내어 성심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성종 33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일본국 방장섭천 4주 태수 다다량정홍이 원주덕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국(日本國) 방장섭천 4주 태수 대내 별가(大內別駕) 다다량정홍(多多良政弘)이 원주덕(源周德)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었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근래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상국(上國)에 조공(朝貢)하고 돌아온 자는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모두 축하하며 말하기를, ‘폐하의 용봉(龍鳳)과 같은 자태는 천일(天日)의 표상이라 성스러운 덕이 계속 일고, 인자한 교화(敎化)가 바야흐로 풍성하여 역시 중흥(中興)을 선광(宣光)할 것 같습니다.’ 하였으니, 누군들 서쪽을 향해 기꺼워하지 않을 자 있겠습니까?

성종 45권, 5년( 1474 갑오 / 명 성화(成化) 10년) 일본국 방장섭천 4주 태수가 사람을 보내 토의를 바치다

일본국(日本國) 방장섭천 4주 태수(防長攝泉四州太守) 대내 별가(大內別駕) 다다량 정홍(多多良政弘)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삼가 황제 폐하(皇帝陛下) 께서 명덕(明德)이 일월(日月)보다 빛나고 성수(聖壽)가 장래에 장구(長久)하시기를 빌고 빕니다. 상국(上國)4246) 과 우리 선조(先祖)가 통호(通好)한 지 정홍(政弘)까지 26대째입니다. 상국과 대주(對州)와 아직 동맹(同盟)하기 전에 자주 전쟁하였는데, 그 때에 신(臣)의 선인(先人)이 상국을 위하여 구원병을 보내어 사졸이 죄다 전사하고 한 사람도 귀국하지 못한 것이 이제 8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게다가 존명(尊命)4247) 을 받들어 수우(水牛) 암수를 바치기도 하였으니, 그렇다면 선인의 상국에 대한 충성이 적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정홍은 그 후사(後嗣)로서 임진년4248) 에 처음 사자(使者)를 보내어 선인이 맺어 온 구호(舊好)를 닦았는데, 그때 구례(舊例)에 어그러지는 일을 당하여 아껴 주시는 뜻이 매우 없었습니다. 집사(執事)가 옛 맹약(盟約)을 잊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또 사자가 변변치 못하였기 때문입니까? 정말 모를 일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존명에 따라 곧 거듭 사선(使船)을 보내어 명을 받고자 합니다. 따라서 유구국(琉球國)에서 보내 온 사향(麝香) 1필(匹)을 존명을 받들어 바칩니다. 정홍이 몇 해 전부터 산명 좌금오(山名左金吾)의 군사를 돕느라고 경사(京師)에 머문 지가 몇 해 되었는데, 지난해 3월 18일에 금오가 서거(逝去)하고 그달 28일에 세천 경조(細川京兆)도 서거함에 따라 두 집안의 자제들이 점점 화목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전하(殿下)가 대명국(大明國)에 사선(使船)을 보내고자 하매, 신이 명을 받들어 배를 꾸미는데, 공사간(公私間)에 그 비용이 매우 많습니다. 상국의 풍부한 재물의 나머지로 은사(恩賜)를 굽어 내리시기를 바라며 앞으로 갈수록 옛 맹약에 따라 충절(忠節)을 지키고자 합니다. 대명국과 유구국에서는 신에 대하여 은문(恩問)이 더욱 후한데, 상국만이 옛 맹약을 잊으신 듯합니다. 교맹(交盟)이 보탬이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보명(報命)에 따라 그 뜻을 알아서 엎드려 진정을 아뢰겠습니다. 변변치 않은 토의(土宜)나마 작은 뜻을 표합니다.”

*황제 폐하(皇帝陛下) : 조선 국왕(성종)을 가리킴.

*상국(上國) : 조선을 가리킴

*존명(尊命) : 일본 국왕의 명을 가리킴.

*임진년(壬辰年) : 1472년 (성종 3년)

태종 8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7월 30일(기사) 1번째기사

일본 국왕 원도의가 사신을 보내 내빙하고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어 내빙(來聘)하고, 또 토물(土物)을 바쳤다. 일본 국왕은 원도의(源道義)였다. 일본국 방장 자사(防長刺史) 대내다다량성견(大內多多良盛見)도 또한 예물을 바쳤다.

▶ 원도의는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대외적으로 사신을 보낼 때 쓰던 이름

태종 6년 병술(1406, 영락 4) 일본국왕이 《대장경》을 청하고, 구주 절도사가 포로와 토물을 바치다

일본 국왕 원도의(源道義)가 사신을 보내어 내빙(來聘)하고, 《대장경(大藏經)》을 청하였고,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도진(源道鎭)이 사람을 보내어 토물(土物)을 바치고 부로(?虜)를 돌려보냈다.

세종 5년 계묘(1423, 영락 21) 일본 국왕의 사신 규주·범령 등 135명이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 국왕의 사신 규주(圭籌)·범령(梵齡)과 도선주(都船主) 구준(久俊) 등 1백 35인이 대궐에 나아가서 토산물을 바치니,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서 예를 받은 뒤에, 규주와 범령은 대궐 안에 들어오도록 명하고, 구준은 대궐 밖에 있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자판은 조종조로부터 서로 전하는 것이 다만 1본뿐이다. 만약 겹쳐서 여러벌 있다면 국왕에 대하여 굳이 아끼어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겠느냐.”

하니, 규주 등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자상하시니 깊이 감사하고 깊이 감사하옵니다. 신들도 또한 잘 헤아려서 아뢰겠나이다.”

하였다.

《이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등장하는 일본의 조공 기록들》

태조 2년 계유(1393) 6월 16일(경인) 일본 일기도의 중 건철이 포로 200여 인을 돌려보내고 방물을 바치다

태조 4년 을해(1395) 7월 1일(임진) 일본 구주 절도사 원요준이 중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4년 을해(1395) 7월 11일(임인) 일본 일향주 사람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4년 을해(1395) 7월 16일(정미) 일본 살마주 사람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4년 을해(1395) 12월 16일(을사) 일본 대내전의 다다량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6년 정축(1397) 6월 21일(신축) 일본 구주 절도사 원요준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6년 정축(1397) 10월 1일(기묘) 일본 구주 절도사가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6년 정축(1397) 11월 14일(임술) 일본 육주목 의홍이 중 영범·영확 편에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7년 무인(1398) 7월 27일(경자) 일본 비전주 준주 태수 원경이 예물을 바치다

정종 1년 기묘(1399) 9월 10일(정축) 이달에 일본국의 절 주지가 사람을 시켜 예물을 바치다

정종 1년 기묘(1399) 11월 1일(정묘) 일본 서해도 준주 태수 정종(貞宗)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정종 2년 경진(1400) 8월 1일(계사) 일본이 사신을 보내 방물과 감자, 매화를 각각 한 분씩 바치다

태종 1년 신사(1401) 6월 18일(을해) 일본국 비주 태수가 말과 약재를 바치다

태종 1년 신사(1401) 9월 29일(을묘) 일본의 대마도 임시 태수 종정무 등이 말·석고·백반을 바치다

태종 2년 임오(1402) 9월 29일(기유) 일본 살주 산성의 태수 원뇌수와 일기주 지주 원양희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3년 계미(1403) 2월 27일(갑술) 일본 사자가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3년 계미(1403) 1월 23일(신축) 일본에서 사신 12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3년 계미(1403) 10월 8일(임자) 일본 사자가 잡혀 갔던 우리 나라 사람을 데리고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4년 갑신(1404) 7월 30일(기사) 일본 국왕 원도의가 사신을 보내 내빙하고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4년 갑신(1404) 7월 17일(병진) 일본 전평전 원원규가 토물을 바치다

태종 5년 을유(1405) 6월 29일(계사) 일본 국왕 원도의가 사신을 보내 도적을 잡은 것을 보고하고 예물을 바치다

태종 5년 을유(1405) 6월 3일(정묘) 일본 지좌전이 중 도군 등을 보내 약재 등의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5년 을유(1405) 5월 24일(무오) 일본에서 예물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12월 21일(병오) 일본 단주 수와 비주 수가 사신을 보내 소목 등의 물품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8월 6일(임진) 일본 일기주 지주 원양희가 포로 76명을 소환하고 종정무도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4월 22일(임오) 일본 호자전 객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4월 16일(병자) 일본 서해도 단주 태수 원영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2월 27일(무자) 일본국왕이 《대장경》을 청하고, 구주 절도사가 포로와 토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10월 26일(병오) 일본 살마주 등원뇌구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11월 26일(병자) 일본 대마도 수호 종정무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5월 6일(기미) 일본 지좌전, 호자전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7월 21일(임신) 일본국 대내 다다량 덕웅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8월 5일(병술) 일본 전평전이 사자를 보내어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2월 1일(병술) 일본 살마주 태수가 사자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2월 27일(병오) 일본 진서탐제장군 원도진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6월 3일(경진) 일본의 지좌전·어주전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10월 28일(임인) 일본 국왕 원도의가 좀도적을 금지시켰다고 알리고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4월 19일(정유) 일본 구사전이 사자를 보내어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7월 6일(임자) 일본의 대내전이 옥교자·병풍·약재·기명·능견 등의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7월 20일(병인) 일본 살마주 태수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8월 21일 (병,신) 일본국 구주 절도사가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9월 29일(갑술) 일본의 축주 태수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12월 6일(기묘) 일본 구주 목 원도진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1월 26일(을해) 일본의 원만직이 예물과, 불로원이라는 약 1백 개를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3월 6일(기유) 일본의 지좌전이 사람을 보내 예물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3월 26일(기사) 일본 일기주와 비주전에서 진위하고 예물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11월 8일(병자) 일본 축전주 객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9월 6일(을해) 일본 일향주 사람이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윤 4월 11일(계축) 일본의 대내전 다다량덕웅이 중 주정을 보내 토산물과 관음화상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3월 26일(기사) 일본 하송포의 삼하 수 융군이 예물을 바치다

<중략>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14일(경인) 일본 일향주 태수가 표를 올려 신(臣)이라 칭하고 방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29일(을사) 일본 비전주 중·일향주 태수·관서도 축전주 석성 관부가 칼·향 등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30일(병오) 일본 관서로 구주 도원수 원도진이 방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1월 29일(을해) 일본 서해로 미작 태수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2월 6일(신사) 일본 대마도 종정성이 방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13일(기축) 일본 구주 총수와 서해로 미작 태수가 방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8월 21일(무술) 일본 서해도 일향주 태수와 대마주 조율 산성수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2월 29일(갑진) 일본 축전주 태수가 소목 백반 등을 바치다

세종 1년 기해(1419) 1월 3일(무신) 일본 대마도 만호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1년 기해(1419) 3월 7일(신해) 일본 구주 도원수가 《대반야경》을 청구하고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1년 기해(1419) 4월 4일(무인) 일본국 비주 태수·장주 태수·대마도 화전포 도만호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윤 1월 28일(정유) 일본 구주 총관 평종수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2월 2일 (병,신) 일본 방장풍삼주 도호 다다량만세가 공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1월 28일(임진) 일본 비주 태수 원창청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1월 25일(기축) 일본국 구주 총관 원의준이 공물과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0월 26일(신유) 일본국 구주 절도사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8월 9일(을사) 일본 전 서해도 구주 도원수가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월 5일(갑진) 일본국 경도·구주 등에서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8월 2일(무술) 일본 서해도 비전주 평우진 준주목 원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2월 8일(임인) 일본국 구주 도원수 우무위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2월 9일(계묘) 일본국 구주 총관 원의준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3년 신축(1421) 9월 9일(기사) 일본 평만경이 조공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7월 5일(경신) 일본인 삼주 태수와 대마도 좌위문대랑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3월 27일(갑신) 일본국 대마주의 좌위문대랑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2월 26일(계축) 일본의 원의준·등원뢰·원성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윤 12월 23일(병자) 일본 구주 총관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7월 23일(무인) 일본 도영·평만경·웅수·평민소조천·입도상가 등이 방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7월 22일(정축) 일본국 대내다다량도웅·원도진·원의준 등이 방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3월 26일(계미) 일본국 구주 총관 원의준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3월 5일(임술) 일본의 전 구주 총관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3월 5일(임술) 일본의 원의준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0월 18일(을축) 일본국 구주 원의준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0월 25일(임신) 일본국 원의준·평만경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1월 24일(신축) 일본국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5월 19일(무술) 일본국 관서도 원준신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월 12일(갑오) 일본국 축주 관사 평만경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2월 25일(임신) 일본 국왕의 사신 규주·범령 등 135명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0월 15일(임술) 일본 구주 다다량덕웅·평만경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중략>

세조 1년 을해(1455) 10월 14일(병진) 일본국 오도 우구수 원승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0월 29일(신미) 일본국 상송포 구사도의 등원의영과 이세수 원문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1월 1일(임신) 일본국 살주 등희구·오도 우구수 원승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2월 9일(경술) 일본국 관제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9월 20일(임진) 일본국 일기주 왜 호군 등구랑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8월 22일(을축) 일본국 비전주 상송포의 지좌원씨의 딸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8월 18일(신유) 일본국 대마주 왜 호군 정대랑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8월 17일(경신) 일본국 등원의영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2월 12일(계축) 일본국 비전주 전평우진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1월 27일(무술) 일본국 일기수 원고와 이세수 원문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1월 13일(갑신) 일본국 살주 등희구·오도 우구수 원승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1월 6일(정축) 일본국 오도 우구수 원승과 비전주 상송포 단후 태수 원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0월 8일(경술) 일본국 관서로 축전주 냉천가무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9월 29일(신축) 일본국 살주 이집원 우진 우주 태수 등희구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9월 2일(갑술) 일본국 살주 이집원 우진 우주 태수 등희구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윤 6월 16일(경신) 일본국 대마도의 종성직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윤 6월 21일(을축) 일본국의 원지직·상송포의 중 원우·대마주의 종성직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윤 6월 29일(계유) 일본국 상송포 파다도의 원납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3일(병자) 일본국 대마주의 종성직·종성가가 각각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21일(갑오) 일본국 원고·원영과 대마주 종성직·종성홍·종호웅와가 각각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30일(계묘) 일본국 석견주의 등원·주포화겸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2월 15일(병진) 일본국 오도 우구수 원승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1일(갑술) 일본국 비전주 종상군 지수 종상조신씨정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8월 3일(병오) 일본국 오도 우구수 원승·비전주 단후 태수 원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11일(갑신) 일본국 등원조신교뢰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7월 28일(을미) 일본국 비전주의 진궁 병부 소보 원영이 사자를 보내 토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6월 26일(갑자) 일본국 대마주 종성직이 사람을 보내와 토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6월 2일(경자) 일본국에서 사람이 와서 토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5월 24일(임진) 일본에서 사람이 와서 토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4월 22일(신유) 일본국 대마주 호군 정대랑의 아들 사정 정가문수계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중략>

성종 즉위년 기축(1469) 12월 8일(정사) 일본국 구주 도원수 원교직이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월 25일(갑진) 일본국 대마주의 종정국·종정수와 인위군의 종성가와 종성직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4월 5일(계축) 일본국 축전주 종상군 지수 씨향이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6월 21일(무진) 일본국의 원승·종언팔랑무세·등희구·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19일(을미) 일본국의 종정국·종성가·종성홍·원만·등씨의 어미가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27일(계묘) 일본국 석견주의 등원주포좌근장감화겸과 귀해지국의 교공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24일(기사) 일본 국왕이 보낸 입도 등이 와서 서계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0월 24일(무진) 일본국 관서도 구주 도원수 원교직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2월 18일(신유) 일본국과 올적합 등에서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2월 27일(경오) 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13일(기축) 일본국 주방주 산구 소사 대삼하수 원홍안이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3월 12일(신묘) 일본국 일기주 수호 대관 진궁 병부 소보 원무가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6월 23일(경오) 일본국의 종정국·종성가·종성홍·종조육성준 등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6일(임오) 일본국의 종정국·종성홍·종무차·원승·원중실 등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2월 8일(신해) 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1월 1일(을해) 일본국 구주 시소의 종언팔랑무세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0월 8일(임자) 일본국 풍주 태수 대우팔랑사능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9월 28일(계묘) 일본국에서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9월 19일(갑오) 일본국에서 서계와 함께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28일(계유) 일본국 세천 좌오두 지현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25일(경오) 일본국에서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23일(무진) 일본국에서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7일(임자) 일본국 여러 태수들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19일(을미) 일본국 경성 관령 전산전 좌경 대부 원의승이 중 향양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12일(무자) 일본국 종정국·종정수·종성홍·종성가·원덕 등이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2년 신묘(1471) 2월 28일(신미) 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2년 신묘(1471) 5월 22일(갑오) 일본국 비전주 원덕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2년 신묘(1471) 6월 11일(임자) 일본국 장문주 적간관진수 충수가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 2년 신묘(1471) 6월 27일(무진) 일본국에서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이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의 조공기록들이 매우 많이 나온다.

1.3.3. 고려조선의 사례

원래 명나라조선에게 조공품으로 을 요구했으나, 세종대왕은 말과 포로 대체하였다. 명이 말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나라는 그 반대 급부인 사여(賜與. 말값)를 포로 지불하였다. 게다가 미리 명나라가 나중에 사여품을 줄 테니 말을 먼저 달라고 하자 태종은 거절했다. 무조건 현금 박치기. 나중에는 이상하게 사여품을 명나라가 먼저 주고 조공품인 말은 나중에 줬다. 한마디로 말해서 선결제. 게다가 값은 조선에서 정했다.

의정부에서 무역하여 바꿀 말 값을 정하였다. 큰 말 상등 값은 상오승포(常五升布) 500필, 중등 값은 450필, 하등 값은 400필이고, 중말 상등 값은 300필, 중등 값은 250필, 하등 값은 200필로 정했다. - 태종실록 1년 10월 3일

상등마는 당시 가격으로 아무리 낮아도 쌀 300두 정도였다. 참고로 조선은 여진에서 말을 조공받기도 하였는데(말하자면 수입) 이때도 말값은 조선이 정했다.

호조에서 상계하였다. '말을 올린 야인(野人: 여진족)에게 답례로 내려주는 물품은 큰 말의 상등은 면포 45필, 중등은 40필, 하등은 35필로 하며, 중질 말의 상등은 30필, 중등은 25필, 하등은 20필로 하며, 작은 말의 상등은 15필, 중등은 10필, 하등은 6필로 하는 규례를 정하게 하소서'이에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8년 1월 7일

이때의 상등마의 가격은 쌀 30두. 한마디로 조선은 엄청난 폭리를 누렸다. 심지어 정난의 변 와중에는 건문제에게 후진 말을 팔아먹고도 이걸 명나라에서 추궁할까 봐 그 담당 관리를 보호하려 했던 케이스도 있다. 항목 참조.

그러나 이는 조선이 팔고 싶어서 팔았다기 보기엔 힘든데, 명의 사정에 맞춰서 갑자기 많은 숫자의 말을 팔라고 하는 경우도 많아 조선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유쾌한 거래[20]는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 기록을 보면 기병 전력의 약화를 우려하는 신하의 간언이 기록되어 있다. 즉, 조선이 이득을 보기 위해 말을 팔았다기보다는 손해를 벌충하기 위해 명나라에게 많은 액수의 돈을 받아낸 것에 가깝다는 것. 조선도 중요한 전략물자인 말이 많이 나오는 땅이 아닌지라 자국에서 필요한 말조차 여진족에서 수입해서 썼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명은 우방이지만 위협적인 적이 될 수 있는 조선을 견제도 할 겸, 어차피 자국에서는 생산이 제한적인 말도 살 겸 조선을 이용했고, 조선은 이 관계에서 돈이나 받으며 국방력 강화는 꿈도 못 꾸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은 현대의 탱크나 기갑차 같은 전략자원이었고, 전근대 사회에선 생산량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명은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돈을 주고 소중한 전략 자원인 말을 받으며 우방이지만 적국이 될 수도 있는 조선의 전력 약화를 노렸던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전략물자 생산 제한은 현대에도 존재한다[21].

그래도 이런 관계는 조선명나라 양국에 큰 이득을 주어서 명나라동북아시아 주요국 중 하나였던 조선을 자신들의 혈맹으로 삼을 수 있었고, 조선도 명나라로부터 선진 문물을 대거 수입하고 국력을 착실히 키워나갈 수 있었다[22]. 일본무로마치 막부도 이걸 노리고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 이래로 명나라에 칭신했으나, 다이묘들이 막부의 무역 선단을 사칭해서 몰래 조공하는 바람에 별 이득을 보지 못하고 망했다(...).

물론 조선도 따지고 보면 조선이 명나라에게 조공만 한 건 아니고 여진족 부족들이나 대마도 도주로부터 조공을 받기는 했다. 마찬가지로 고려도 건국 초부터 고려 중기까지 야인들로부터 조공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외에도 고려 중기까지 명목상으로는 독립국이었던 탐라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하지만 여진족 부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것도 고려 전기나 조선 전기의 일로 고려시대 때는 금나라가 건국되고 요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조선은 후금이 건국되고 청나라로 국명을 바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기를 거쳐 중국을 정복을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관계가 역전되어 고려금나라, 조선청나라를 상국으로 모시면서 조공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더더욱 충격을 받았던 것이고 조선 후기에 임경업전이나 박씨전 같은 소설이 인기를 끈 면이 많다.

게다가 명나라에 조공하는 건 명나라가 조공한 양에 못지않은 하사품을 주는, 일종의 교역이었기 때문에 조선 측의 불만이 없었지만, 청나라병자호란 이후로 한동안 일방적으로 삥뜯기를 시전했기 때문에 청나라에 대한 분노가 상당했다. 이게 다시 명나라 때와 같은 일반적인 무역 형태로 전환된 뒤에도 국민 감정이 남아서, 소중화주의 같은 국수주의적인 사상으로까지 이어졌다. 다만, 청나라의 경우는 유목민족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여전히 삥을 뜯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301&index_id=cp03010473&content_id=cp030104730001&search_left_menu=2 그냥 엄청나게 삥을 뜯다가 줄인 것이 전부다. 삥을 뜯기고 있으니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이나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차이로도 볼 수 있는데, 농경민족의 제국은 밑에 들어가면 부를 하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유목민족 제국은 밑에 들어가면 삥을 뜯는 경우가 많았다.[23] 그래서 대부분 당시 사람들은 유목민족 제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조선이 실리를 위해 명나라와의 군신관계를 빨리 끊고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어야 했다는 기존의 역사관은 잘못돼도 너무 잘못된 것이다.[24]

금나라의 경우는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내외부[25]의 정치적 분쟁이 심해서 청나라마냥 갑질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그래서 고려와는 군신관계만 확인하고 가능하면 고려를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절대로 고려를 자극하면 안 돼[26] 명나라자국중심주의적 외교를 보여서 주변국들로부터 막 나간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으나, 일단 조선만큼은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서 가능한 자국 사신들이 갑질하는 것을 단속하고자 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처지가 달라서, 눈치 볼 것도 없이 조선을 탈탈 털고는 상전 노릇 제대로 했다.

물론 명나라를 패망시킨 이후에는 조선과의 관계를 중요시해서 이런 식의 갑질을 많이 줄였다. 앞의 각주에서 언급된 조위총조선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황사영이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으로 만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으나, 청나라 측이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편지를 조선 측에 보여주면서 '황사영이 망발을 지껄인다'고 알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청나라가 중원에 입관한 이후에는 일부 하층민을 제외한 만주족 대다수가 중원으로 이주하여 만주의 인구가 거의 희박해졌기 때문에, 청나라의 입장에선 언젠가 자신들이 쇠퇴하여 조선 위에서 마음껏 상국으로 군림하기 힘들어질 때 조선이 그 틈을 타 자신들이 만주로 돌아가기도 전에 선수를 쳐서 만주 정복을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27] 게다가 만주족의 고향인 만주가 고대에는 한민족 왕조인 고구려발해의 영토였으므로 이를 근거로 조선이 만주 영유권을 주장할 거라는 불안감도 존재했을 것이다.[28] 무엇보다 두만강 이남의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이후에도 여진족을 상대로 예방전쟁을 자주 벌인 나라가 조선인데, 조선의 이러한 정책은 조선인을 약탈하는 여진족에 대한 징벌적인 성격도 강했으므로, 여진족의 후손인 만주족의 입장에선 조선과의 험악한 관계를 영원히 이어나가 봤자 역관광당할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숙종백두산정계비를 두고 국경 분쟁이 났을 때에도 외교적으로 원만하게 해결했다. 심지어 대한제국 시절이 되자 간도 관리사 이범윤이 군대를 끌고 멋대로 간도를 털어먹고 다녀도 함부로 문제삼지 못했다.[29]

1.3.4. 정치적 사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책봉이나 조공에 정치적인 의미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가장 결정적인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에서 무신정변이 일어나서 의종이 폐위당하고 명종이 즉위한 뒤에 당시 고려와 조공책봉 관계에 있었던 금나라에다 뭐라고 해야할지 고민하던 도중에 금나라에서 의종의 생일사(제후국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를 보낸다고 하자 고려 조정은 난리가 났었다. 결국 고려는 가리고 가려서 유응규를 금나라에 파견하는데, 보내는 사람들도 그렇고 유응규도 그렇고 책봉을 받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으나 금 황제(금세종)는 명종의 책봉을 짐짓 미루고 명종의 정당성을 따졌다. 이에 유응규는 의관을 갖추고 황궁 앞에서 꼿꼿이 선 채로 음식을 거부했다. 사흘이 지나자 금세종은 책봉 약속을 해줄 테니 그만 음식을 먹으라고 했지만 유응규는 거부했다.

조공국의 사신이 황궁 앞에서 굶어죽는 변이라도 당하면 대국으로서는 큰 망신이기 때문에 결국 7일이 지나서 유응규가 계속해서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자 금세종이 이를 불쌍히 여겨 책봉 교서를 내렸다. 물론 고려로 돌아온 유응규는 대환대를 받아 영웅이 되었고, 금세종은 유응규의 충성심에 탄복하여 사신 편에 언제나 그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낮은 위치이니 정말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일들도 있었다. 우리나라를 주로 예로 들자면

"배신(陪臣) 조임(趙琳)이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와서 삼가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삼가 황제의 칙지를 받들었는데 그 내용에, 이번 고려에서 과연 능히 천도(天道)에 순응하고 인심에 합하여, 동이(東夷)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변방의 흔단(釁端)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면, 사절(使節)이 왕래하게 될 것이니, 실로 그 나라의 복이다. 문서가 도착하는 날에 나라는 어떤 칭호를 고칠 것인가를 빨리 달려와서 보고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삼가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은 왕씨(王氏)의 후손인 요(瑤)가 혼미(昏迷)하여 도리에 어긋나서 스스로 멸망시켰으면서 스스로라니(...) 멸망하는 데 이르게 되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신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를 보게 하였으므로 놀라고 두려워서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요사이 황제께서 신에게 권지 국사(權知國事)를 허가하시고 이내 국호(國號)를 묻게 되시니, 신은 나라 사람과 함께 감격하여 기쁨이 더욱 간절합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國號)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小臣)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등의 칭호로써 천총(天聰)에 주달(奏達)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裁可)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이처럼 명나라가 허락을 해주기 전까지는 왕이라는 칭호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권지국사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국호와 왕 칭호를 받고 나서야 왕실 복장도 칭호도 간지나게 쓰거나 만들 수 있었다. 고려시대 이후로 우리나라는 왕이 즉위하면 중국에 정식으로 알린 뒤 승인을 받아야 왕호를 사용할 수 있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명나라에 왕위 즉위를 승인해달라고 요청할 때 권지고려국사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게 정치적으로는 참 귀찮은 일이었다. 또 영은문이라는 것도 있어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왕이 이 문까지 마중 나가는 것이 상례였는데, 역시 귀찮은 일이었다. 상국에 바칠 공녀 등을 심사하거나 하는 것들 따위도 당연히 좋은 일들은 아니었다.

조선에서도 중종반정으로 중종을 옹립한 반정세력은 명나라에 이 쿠데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혹시 명나라가 중종의 승인을 거부하고 연산군을 밀어주면 어떡해야 할지 난감해하다가 명나라연산군이 중병에 들어 스스로 동생에게 양위하고 별궁에서 요양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여 중종의 책봉을 받았다. 그 후 연산군이 병으로 승하한 뒤 이를 명나라에 알리지 못하고 명나라 사신이 물어볼 때마다 연산군은 살아있지만 장애인이 되어 외부인을 만날 수 없다고 계속 거짓말을 했다. 심지어 중종 34년에 중종이 신하들에게 "이번에 사신이 오면 연산군창덕궁에 있다고 하는 게 좋을까?" 라고 묻는다.

삼국시대에는 책봉을 받기 위해 왕비의 성을 바꾸기도 하였고,[30] 고려 최씨 무신정권 때는 최충헌이 명종을 밀어낸 뒤에 다음 왕으로 왕진과 왕민 중 누구를 왕으로 밀까 고민하다가 결국 금나라도 익히 알고 있는 왕민이 금나라의 책봉을 그나마 무난하게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겨 왕민 곧 신종이 옹립되기도 하였다. 조선에게는 황제의 책봉은 곧 임금의 정치적 정통성이었다. 물론 전반적으로 서구식의 식민지 프레임에 엮어넣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31][32]

1.3.5. 중국의 수탈 사례

조공을 통해서 직접적인 경제적 수탈도 하려고 하면 가능했다. 물론 조선도 이걸 알고 있었다.

태종 때, 그러니깐 명나라가 한창 원나라를 만리장성 이북으로 쫓아보내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확실하게 장악했던 영락제 때는 조선에 대한 무리한 요구가 이어지자 조선에서 사신을 보내 사소한 트집도 잡을 수 없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면서도 할 말은 다해가며 읍소를 가장한 항의를 했고, 세종 때에는 명나라 사신 해수가 인삼 값 때문에 시비가 붙고 여기에 개입하려는 조선의 지역 관리를 때리자 세종이 열 받아서 명나라에 문책사를 보내려다가 신하들이 뜯어말려서 관두기도 하고, 명나라 사신 윤봉이 귀하디 귀한 해동청(사냥용 매)을 달라고 끈덕지게 요구할 때는 거절하다가도 가죽이나 놋쇠주전자 같은 걸 달라고 할 때는 챙겨서 주기도 하는 등 그때 그때 사신들의 요구와 상황을 봐 가며 대처하였다.

그래도 태종 때에, 명과의 관계가 굉장히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조공 무역으로 크게 이득을 보긴 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과 베트남 그리고 태국은 3년에 1회, 일본과는 10년에 1회, 류큐 왕국과는 2년에 1회 조공무역을 하였다. 특히 명나라는 태종이 친명 노선을 천명하자 파격적으로 1년에 3회 조공무역을 허용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그러나 나중에가면 명나라는 수시로 조공무역을 줄이자며 조선에 요청했고, 조선은 강하게 거부하여 서로 갈등하기도 했다.

다만 임진왜란 직후에는 조공이 아니라 사신으로 온 명나라 환관들의 조선에 대한 '개인적인' 착취가 극에 달하는데, 이때는 명나라가 조선을 구해 준 '재조지은'의 은혜에 임금인 광해군 개인의 정통성 상 약점 때문에 환관들의 갈취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환관들의 탐욕과 횡포는 명나라 본국에서도 손을 쓰지 못하는 판이니. 이것은 '조공'이라는 제도 자체의 병폐가 아니라 사신 개인의 갈취이니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이 시절조차도 중국에선 조선에서 개인적 착취가 너무 심했다며 탄핵받아 처벌받는 일도 있었다.[33] 그래서 따지고 보면 사신도 무턱대고 거하게 뇌물을 요구할 수도 없다. 민본주의 유교의 왕도정치가 근본인 동양에서 청렴이란 관리의 최대 덕목이었다. 경국대전 형법의 대부분도 관리에 대한 치죄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사신을 보내는 쪽에서도 저 녀석이 타국에서 우리 이익을 잘 실현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부분. 또한 사신님이 드시는 만큼 국가의 몫은 줄어든다. 따라서 사신을 보내고 나서는 공식, 비공식적으로 자기 사신이 상대국에게 뇌물을 받아먹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노력하였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사신이 상대국에서 거하게 얻어먹었다가 들통나 목이 달아난 사례도 있다. 즉, 사신 입장에서도 저쪽이 폭발해서 우리 황제에게 꼬지르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없을 수가 없다. 결국 갑과 갑의 대리인과 을의 관계인데, 여기서 갑의 대리인과 을의 오묘한 공생관계가 생겨나기에 보이지 않는 암묵적 선이 그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조공이라는 것이 원칙적으로는 조공을 바치는 쪽에서 받는 쪽의 덕(德)을 사모해서 하는 행위라는 전제가 있다 보니(쉽게 말해 팬질) 자기의 덕을 사모해서 조공까지 바치는 상대한테 그걸 악용해서 막 부려먹자면 그것도 그것대로 체면이 안 서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세워진 대국의 수탈은 병자호란 이후에도 되풀이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조선이 청나라에 패한 직후에는 청으로부터 심하게 부담스러울 정도의 물품을 요구받았다. 추세를 보면 명, 청 모두 건국 초기 조선을 경계하던 시절에는 조선으로부터 많은 물품을 짜내려 했고 조선이 완전히 자신들의 질서에 편입되었다고 판단한 후에는 조선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측면에서 조공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패턴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명나라 칙사가 조선 처녀를 뽑을 때에는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수백 명의 여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번에 걸쳐 심사를 했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뽑힌 몇 명의 여자를 명나라로 데려갔다. 뽑힌 여자들의 나이는 대개 10대 중후반이었다. 이때문에 당시 처녀들은 이역만리로 잡혀가기 싫어 일부러 얼굴에 독초를 바르고 가족들은 다시는 보지 못할 딸, 누이의 생각에 눈물 흘렸다는 기록이 많다.

태종 16권, 8년(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7월 2일(무신) 1번째 기사

내사 황엄 등이 의정부와 더불어 경복궁에서 처녀들을 선발하다 ~ 태종 33권, 17년(1417 정유 / 명 영락(永樂) 15년) 5월 9일(갑오) 3번째기사 중국에 진헌할 처녀로 황씨와 한씨 등을 뽑다 # ~ #

물론, 당대 동북아시아의 주요국 중 하나이자 동맹국이었던 조선의 국격을 상하게 할 수 있어서 명나라도 이후로는 이런 짓을 삼갔고, 더욱이 가면 갈수록 명나라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 있었으므로, 더이상 이런 식의 갑질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명나라가 점점 이웃한 조선이나, 오이라트, 여진, 일본 등을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조선일본 사이에 사신이 자주 오가는 것을 보고 두 나라가 합심해서 자국을 치려고 한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다만 조선류큐국의 사신이 동시에 일본이 조선을 치려고 한다는 것을 알려옴으로써 금방 의심을 풀었고, 곧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을 위해 기꺼이 군대를 보내주었다.

청나라와의 조공관계에서는 조선이 막대한 손해를 보았고#, 조선 후기 세도정치 아래 관료들의 부패가 극심했던 것을 고려하면 이는 엄청난 부담을 야기했다.

물론 이러한 손해가 정확히는 병자호란 직후부터 청나라의 중원 입관 초기까지의 일로, 중원 정복을 통해 엄청난 경제력을 확보한 청나라는 이후엔 명나라와 같은 조공무역으로 전환했다. 이후에 조선은 훗날 청나라아편전쟁 등의 굵직한 사건으로 쇠퇴할 때까지 청나라일본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큰 이익을 봤다. 물론 일부 대상들과 특권상인만이 이득을 보았을 뿐, 정부는 여전히 궁핍하였기 때문에 민생들은 고통받았다. 19세기 초반부터 중국의 수탈과 중국 및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저렴하고 우수한 질의 상품이 유입되고 동시에 일본자본의 침투가 시작되어 조선의 경제는 끝장나기에 이른다.

1.4. 기타

상술한대로 서양의 조공은 철저히 아랫쪽이 윗쪽에게 무조건적으로 바치는 사실상 세금에 가까운 개념[34]이였지만[35][36][37], 동양의 조공은 한 쪽이 다른 쪽에게 바치면 받은 쪽도 그에 상승하는 보답을 내어주어야 하는 상부상조에 가까운 것으로 서로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헌데 서양에서는 30년 전쟁을 거친 후 주권국가의 개념을 성립하면서 조공이 사라졌지만 동양권에선 여전히 조공 개념이 존속했기 때문에, 동양의 조공이 자신들이 했던 조공과는 다른 성격임을 이해하지 못한 서양에서는 동양을 아직도 구시대적인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낙후된 곳이라고 오해하곤 했다.

이는 현재진행형으로 심지어 서구화가 된 현대의 동양권에서조차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는 오해인데, 상기한 한반도가 중국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부분 하나만으로 한반도의 국가들이 중국에게 절대적으로 복속된 국가였던 것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는 상기한대로 오히려 중국이 조공 횟수를 제발 줄여달라고 요청했고[38] 한반도에서 역으로 조공 횟수를 제발 늘려달라고 요청하는 등 그 조공을 받는 중국조차 부담스러워할만큼 중국만 무조건 이득을 보는 게 아니었던 것이 동양의 조공이였다.

물론 무조건 이득만 보는게 아닐 뿐이지 중국으로서는 큰 이득을 보는게 맞긴 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조공 개념이 사라졌을 것이다. 중국 왕조들의 입장에서는 자국 앞에서 칭신하는 많은 나라들과 자국을 중심으로 강력한 동맹 체계를 구축했는데 그 근거가 되어준 것이 바로 중국과 조공-책봉 체제로 묶여있다는 점이다. 국제기구의 개념이 없던 옛날에는 이런 식으로 상호 연대하는 것이 외적과 상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었기 때문에, 중국은 타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아서 국제적인 위상도 드높이는 겸해서 강력한 군사 동맹을 확보한 것이다. 말하자면, 국가간 연맹체제에서 중국이 그 의장국이 되는 조건으로 연맹 내부의 다른 나라들과 연대해서 연맹 가맹국들을 보호하는 한편, 그 자신도 역으로 보호받는 형식이었다고 보면 된다[39].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에 명나라조선을 도우러 간 것이고, 반대로 나선정벌 당시에 조선이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청나라를 돕고자 군사를 보낸 것이다.[40]

아래에서 설명할 각종 은어들 또한 바로 이런 오해에서 비롯된 사용법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서양식 조공을 근간으로 한 의미를 지닌 용어인 것.

1.5. 같이보기

2. 인터넷 은어

2.1. 개요

1에서 따와서 현대 한국 인터넷에서 쓰는 말.

뇌물이라기에는 부정한 의도가 약하고 선물이라기에는 좀 순수함이 덜한 어중간한 경우에 쓰는 말이다. 한마디로 모종의 대가를 바라고 하는 선물.

예) "유식대장에게 갤러리 개설을 부탁하기 위해 만두조공으로 바치다."

예) "나에게 조공을 바쳐라."

특히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서 갤러리 이용자들에게 질문을 할 때 매력적인 신체를 가진 여성 혹은 남성의 헐벗은 사진이 조공으로 주로 이용된다.[41]

예) "이 짤방을 조공으로 바치겠습니다. 굽신굽신."

예) "이 질문에 대답 좀 해주세요(조공있음)"

디시인사이드에서 갤러리 개설을 위해 쓰이는 조공과, 이로 인해 만들어진 갤러리들의 목록은 만두조공 문서 참고.

다음/네이버를 근거로하는 팬카페 등에서 디시인사이드의 연예인/운동선수 갤을 겸하는 사람들이 퍼날라서 쓰는 통에 메이저 포털의 각종 팬까페에서도 자주 쓰는 말이 되어 인터넷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사실 조공이라는 게 없었던 때는 팬이 개인적으로 선물을 하는데, 받는 쪽이나 주는 쪽이나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받는 쪽에게는 불필요할 수도 있고, 주는 쪽은 부담스럽고. 그래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제대로 된 선물을 주자는 게 '조공'이다. 의도는 좋았다 때문에 비싸보이는 선물이라도 팬덤 규모가 크다면 1인당 부담 비용은 의외로 적을 수 있으니, 그럴 돈 있으면 부모님께 쓰라는 둥 무턱대고 비난할 것은 아니다. 아닌 경우도 많지만 부모님한테는 적은 비용도 잘 안 쓰는 게 문제

"약간의 사심을 담은 선물"이라는 인터넷상에서의 의미를 모르는 일반인들은 "아무리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해도 조공이라니!"라며 엉뚱한 대목에서 분개하기도 한다.

사실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인기 아이돌이 지나치게 비싼 물건을 선물받아 돌려보낸 사건도 종종 있었고, 심지어 방송 관계자들에게 특정 연예인을 "잘 봐달라는 의미"로 팬들이 선물을 보내기도 하는 등 원래 의미의 '조공'에 가까운 조공 형태로 변하면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모 드라마는 대놓고 "왜 조공이 안 오지?" 같은 발언까지 나오면서 조공문화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몇몇 연예인은 고액의 조공에 대해 "마음만 받겠다"며 거부 의사를 확실히 밝혀 개념 연예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들이 굳이 조공을 보내려고 해서 일부러 액수가 매우 적은 물건으로 부탁하는 사례가 있다. 또한, 원더걸스의 팬들이 방글라데시에 우물을 만들어 3시간이나 물 푸러 갈 일을 없게 만들었거나 2NE1의 팬들이 남수단에 망고나무 숲을 조성해 현지인들의 휴식처 제공과 기아 해소에 도움을 주었다든가 틴탑의 팬들이 캄보디아화장실우물을 기증했다든가 서태지의 팬들이 브라질 밀림에 숲을 조성했다든가 하는 등 공익성에 중점을 둔 '개념 조공' 또한 눈길을 끌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오히려 스타가 팬들한테 조공을 해주는 이른바 '역조공' 문화도 생겼다. 2011년부터 몇몇 스타들의 선례로 알려지기 시작한 이 문화는 스타가 감사의 마음을 담은 음료수나 초콜릿, 간식거리, 핫팩, 도시락, 밥차와 같은 선물들을 팬들한테[42] '쏘는' 문화다. 역조공을 받은 팬들은 스타에 대한 사랑이 더욱 두터워지고 스타 자신도 팬사랑이 끝내주는 걸로 좋은 이미지를 얻는 장점이 있다.

특히 아육대는 역조공 경쟁의 장이라 불릴 만큼 아이돌들이 방청을 하러온 팬들에게 '역조공'을 하는 일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아이돌들이 장시간 녹화에 지친 팬들에게 도시락, 밥버거, 피자와 같은 먹거리로 '역조공'을 해줌으로써 위와 같은 장점들과 함께 끼니까지 챙길 수 있어서 좋고, 타 팬들에게까지 입덕의 길을 열어주는 등 1석 4조의 장점이 있다. 다만 현재는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팬사랑을 위해 주는 역조공이 거의 의무적으로 변질되면서 역조공 퀄리티에 대한 과열경쟁이 붙는 등 부작용도 보이고 있다. 제발 누가 혜자겠네 누가 싸구려줬네 비교하지 말고 마음만 받자

방송 관계자에게 보내는 조공은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에 저촉 될 수 있다고한다.

2.2. 사례

  • 2010년에는 걸그룹 티아라의 팬카페 운영자가(그것도 공식 팬카페) 조공비 명목으로 기부받았던 팬들의 기부금 천만 원가량을 먹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공먹튀사건

2.3. 바깥고리

3. 게임 은어

3.1. 개요

스타크래프트워크래프트 등의 RTS 게임에서, 아군의 중요한 유닛을 착오나 실수 등으로 어이없이 잃는 일, 이런 상황이 발생 할 경우 대개 유닛을 상대에게 바치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조공'이라는 단어를 쓴다. 혹은 그러한 일이 나기 쉬운 유닛.

따라서 고테크 유닛(캐리어, 배틀크루저 등)을 다수 확보하기 위해 필요없는 일꾼 등을 고의적으로 상대진영으로 보내 없애는 행위는 보통 조공으로 보지 않는다.

사실 상기한 내용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역사적으로는 후자쪽이 진짜 조공에 가깝고 전자는 정반대되는 틀린 의미인데 게임계에서는 의미가 반대로 역전된 것이다.

보통 강력한 공격력에 비해 피통이 적어 잃기 쉬운 유닛이 나섰다가 일점사에 산화하거나, 이동속도가 느린 유닛이 수송기에 타고 있다가 산화, 혹은 상대방이 만반의 준비나 함정을 깔아둔 곳으로 이동했을 때 생긴다.

게임뿐 아니라 야구 축구 등의 선수 스카우트/트레이드 등에서도 다른 구단에 넘긴 선수가 맹활약을 하게 되면 조공을 바쳤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롯데에서 한화로 옮긴 후 2게임 연속 만루홈런을 친 카림 가르시아.

3.2. 사례

4. 군사 용어

4.1. 개요

助攻

주공(主攻)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공격 시 쓰는 개념이다. 조공이 적을 유인하여 맞서는 동안 후위나 측면을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조공은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모루' 역할을 맡아, 적을 붙잡아 두는 임무를 맡게 되며 주공이 '망치' 역할을 맡아 적의 핵심 목표를 공격하게 된다.

때문에 조공은 마치 주공처럼 꽤나 요란하게 적의 시선을 끌어야 하며 적의 예비대를 조공 쪽으로 돌리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그 동안 기동력이 우수하고 돌파력이 뛰어난 기병, 전차 등이 주공을 맡게 된다. 현대에는 급박하게 전황이 바뀌어 조공이 주공이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도 충분히 대비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전역 당시 독일 B집단군의 네덜란드-벨기에 침공이 조공의 훌륭한 성공사례. 에방에마엘 요새 공략, 네덜란드 공습 등 화려한 전과를 내면서 프랑스/영국의 주력을 해당 지역으로 빨아들였으며, 그 사이에 A집단군이 아르덴 숲 돌파에 성공한다.

4.2. 같이보기


  1. [1] 잠재 적국인 거란을 부족한 군사력으로 견제해야 하는 상황에서 송나라는 몇 안 되는 우호국인 고려와의 관계를 최대한 우호적으로 유지해야 했다.
  2. [2] 안 그래도 송의 재정은 전연의 맹으로 인해 요나라에 세폐를 바쳐야 했고 서하에도 비슷하게 바쳐야 했느네 고려와의 무역까지 겹치니 뭐...
  3. [3] 넷상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사실 그대로 알고 싶다면 출처인 동란섭필,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등을 직접 참고하는 편이 더 낫다. 고려 사신이 양아치로 보일 수준으로 과장된 것들에 비하면 상당히 많이 다르다. 하지만, 소동파고려를 맥적(貃敵)이라고 힐난할 정도로 고려와의 조공무역이 송나라의 재정에 부담을 주던 것은 사실이다.[2] 그리고 과장되었다고는 하나, 고려 사신들이 송나라에서 결코 '예의 바르게' 행동한 것도 아니다.
  4. [4] 참고로 고려 사신들의 깡패짓은 거란에서도 계속되었다. 여요전쟁 이후로는 몇 번의 무력 분쟁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관계가 우호적으로 흘러갔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승전국이라는 이유로 남의 나라에서 거란인들의 변발을 잡고 폭행을 하면서 모욕을 주는 등의 문제는 있었다. 조선으로 치면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승리하고 이후 청나라로 간 조선 사신들이 만주족에게 깡패짓을 한 셈이다.
  5. [5] 그런데 소동파는 더 나은 나라들도 있는데 송나라가 고려에 너무 지나친 대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불만을 가져서 좀 감정적으로 극딜한 면이 있고 고려 역시 친송정책과 함께 거란 때문이니 하는 변명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으로 딱히 무례하게 마구 행동하고 다녔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가 송나라와 꽤 오래 교류가 없어 조공을 바치지 않고 있다 다시 조공하러 왔을 때도 송나라에서 그 진의을 물으니 "우리나라가 거란과 더불어 이웃이 되었더니 그들의 주구에 견디지 못한 국왕 왕휘는 늘 화엄경을 외어 중국이 재생하기를 빌었는데, 하룻저녁 꿈에 별안간 이 경사에 몸이 이르러서 성읍과 궁실의 번영함을 샅샅이 구경하고 꿈을 깨자, 이곳을 연모하여 즉시 시를 읊으셨는데, 악한 인연 어이하여 거란에게 이웃되어 한 해에 바친 공물 몇 가지나 괴롭혔네 이 몸에 날개 돋쳐 먼 중국에 왔건마는 애달파라 깊은 대궐 누수 소리 날 새려네"라며 거란의 탓으로 돌렸다. 송나라 입장에서 거란과 양다리 걸치고 있는 현장을 봤을 때에도 사실은 중국을 사모하고 있다고 말을 하여 송나라 황제가 진의를 조사하기 위해 고려 사신을 부른 적도 있었는데 당시 태도도 무례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냥 양다리 걸친 게 아니꼬왔던 거지.(이것도 그럴만한게 송은 주변국들의 압박에 많이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 고려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니...)
  6. [6] 가톨릭의 경우는 교황의 영향 하에, 정교회로마를 제외한 5대교구의 나머지 총대주교나, 각국의 총대주교의 영향 하에 있다는 전제로 군주나 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개신교의 경우도 자국에서 국교로 지정한 종파의 수장이 나라의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하면서, 군주나 정치인들의 세속적인 권력을 뒷받침하였다.
  7. [7] 성경에도 나오는 헤롯 왕이 대표적이다.
  8. [8] 공식적으로는 볼모 신분이었으나, 실제로는 로마 제국을 방문한 귀빈 겸 유학생으로 간주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로마의 속국이나 위성국의 유력자들이 볼모로 보내지는 것을 선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9. [9]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을 맡고 주연으로 출연도 한 영화인 그랜 토리노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옆집에 살던 동양인 가족과 동양계 갱스터들이 바로 몽족이다. 참고로 중국에 사는 몽족은 따로 묘족이라고도 하는데, 몽족의 한 일파로 보기도 하고 별개의 민족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10. [10] 그나마 오나라는 그 왕실이 주나라 왕실의 방계인 만큼, 당대 중국의 정세에 개입할 명분은 충분했다. 그러나 초나라월나라는 왕실이 한족계가 아닌 현지 원주민계이며, 따라서 주나라 왕실과는 아무 연관도 없어서 중화권의 정세에 개입할 명분도 없었고, 때문에 주나라에 칭신하는 것도 한동안 허락되지 않았다. 더욱이 초장왕주나라의 왕이 전통적으로 제사에 사용했던 솥인 구정의 무게에 대해 물어보는 말로 에둘러서, 여차하면 주 왕실의 지위를 찬탈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자, 주나라와 그 제후국들에게 어그로가 끌렸으니 더더욱 제후국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11. [11] 주나라소왕초나라를 공격하려고 3번이나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특히 3번째 원정에서는 소왕 본인이 초나라를 정벌하러가는 배가 뒤집혀서 물에 빠져죽는 참사가 벌어졌다.
  12. [12] 물론 당대의 비 한족계 국가는 초나라오나라, 월나라 이외에도 중산국을 비롯해 몇 군데 더 있었다. 개중 지금의 장쑤성 일대에 있었던 서나라는 초나라보다도 더 노골적으로 중원 지역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서, 대놓고 칭왕하고 주나라에 개기기도 했다. 비록 중국 정복에 대한 꿈은 서나라가 오나라에 패망하면서, 일장춘몽으로 끝났지만(...).
  13. [13] 요즘으로 치면, 중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각종 물품을 수입해오는데, 이 대금을 미국 달러로 지불하는 바람에 지속적으로 중국에 외화가 유출되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14. [14] 이는 일본임진왜란 당시의 전범국이자 패전국이어서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위한 협상에서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던 탓이 크다. 그래서 종래의 불평등한 조공-책봉 관계에서 대등한 관계로 무역하는 것만 인정받았을뿐, 명목상 조선에게 칭신하던 시절보다 오히려 더 안좋은 위치에서 국교를 맺게 되었다.
  15. [15] 당연하지만, 우리나라도 조공로를 따라서 그동안 칭신하던 나라에 칼 꽂은게 한두번이 아니다. 광개토대왕 시절의 고구려후연을 침공했을때나, 고려원나라를 공격해서 요동을 일시적으로 점령했을때도, 조공을 바치러 가면서 봐둔 길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16. [16] 원래 천황의 어원은 중국 당나라의 황제를 칭하는 호칭 중 하나였다. 그 이전 왜는 조선처럼 '대왕大王'이라 쓰고 '오오키미'라고 읽었다.
  17. [17] 춘추전국시대오대십국시대중국 왕조들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18. [18] 그래서 원래는 타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서 천황을 대왜왕이라고 칭할 만큼, 라는 국호는 일본인들이 거리낌없이 쓰는 자랑스러운 이름이었으며, 바뀐 국호인 일본이 더 자존심 상하는 국명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그 상태로 쿠로후네 사건을 겪고 개화기에 이르렀을 때는 오히려 바뀐 국명이 자랑스럽게 여겨지고, 원래의 이름은 자국에 대한 멸칭으로 간주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조선을 상대로 맺은 불평등 조약제물포 조약에서 왜관이라는 명칭을 일본관이라고 바꾸라는 조항이 들어가있기도 했다.
  19. [19] 지금 현재 우리가 먹는 그 감자가 아니다. 당시에 감자라는 말은 감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바이킹들이 북아메리카 북동부 해안에 잠시 도달한 것을 빼면, 유라시아아프리카의 사람들이 아메리카에 도달한 적도 없던 시기에 그 구황작물 감자가 있었을 리가 만무하다.
  20. [20] 수량에 맞춰서 말을 갑작스럽게 준비하느라 추가적인 비용이 들었고 여진족과 무역으로 죄다 보충했으면 몰라도 직접 말을 준비하는 경우에는 큰 이익을 보지 못하였다.
  21. [21] 당장 핵무기 생산이나 원자력 발전소 가동에 필요한 우라늄이나 플루토늄 및 이를 재처리하는 기술의 유통이나 매매, 보유에 대해 세계 각국에 강력한 규제를 걸어두고 이를 IAEA를 통해 감시하는 걸 생각하면 쉽다. 좀더 옛날 얘기로 가자면, 1930년에 있었던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통해 세계 각국의 군함 생산량과 보유량을 통제한 것도 명나라조선을 포함한 주변국에 군수물자로 쓰일 을 사간 것과 비견될 수 있다.
  22. [22] 당장, 명나라가 자국에 팔 물목으로 을 요구하는 통에 대규모의 기병을 운용할 수 없자, '말이 없으면 대포를 만들면 되지'하는 생각으로 대포를 포함한 각종 화약 무기의 생산에 주력하여, 현대의 대한민국에 비견되는 한국사 최고의 화력덕후 국가가 되었는데, 이는 명나라와의 조공무역으로 얻은 재력이 바탕이 되었다.
  23. [23] 이는 관점 혹은 사회적 차이로도 볼 수 있다. 농경민족의 황제는 형식적, 실질적으로 밑에 있는 군주들에게 월급을주는 입장이었지만 유목민족의 대칸은 밑에 칸들로부터 받는 입장이었다.
  24. [24] 이렇게 될 경우 청나라는 실제 역사와는 다른 명분으로 병자호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은 게 맞는지 확인해보겠다.", "조공국 노릇을 제대로 안 하는 것 같다." 등의 명분으로... 최근에는 병자호란이 조선 측에서 일방적으로 자초한 전쟁이 아니라(조선 측에서 원인 제공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지만) 숭덕제의 대외 정책 자체가 반조선 성향이었던 게 영향을 미친 전쟁이라는 역사관이 힘을 얻고 있다.
  25. [25] 요나라북송의 전토를 병탄하지 못해 서요남송을 남겨두게 되었을 뿐더러, 서하에, 끝판왕까지...
  26. [26] 무신정권 기간에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키고는 금나라에게 40여 개의 성을 할양할 테니 자기를 도와달라고하고는 금나라 황제에게 칭신까지 했으나, 외려 금나라 측에서는 그 말을 씹고는 조위총의 사신을 고려로 보내어서 고려 조정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27. [27] 고려 위에서 부마국으로 군림하던 원나라도 쇠퇴기에는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고려에 빼앗기고 공민왕 제거를 위해 고려에 보낸 군사가 고려군에 대패하는 등 고려에 역관광을 당했으니 청나라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쇠퇴기에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28. [28] 실제로 이런 예측은 틀리지 않아서, 정말로 청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하자, 만주를 두고 "여긴 오랜 옛날부터 고구려나 발해같은 우리 선조들의 땅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살고 있으니 여긴 내 땅임여."하면서 기어이 영토 분쟁을 벌였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간도 분쟁이며, 을사조약으로 인해 조선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기 전까지 청나라는 만주를 두고 조선과 입씨름을 벌여야 했다.
  29. [29] 물론 이건 이 당시 대한제국 군대가 청에 비해 신식 군대였기 때문인 탓도 있다. 대한제국보다도 구식이었으니 당시 청나라의 상황은...
  30. [30] 책봉도 책봉인데 유교 이념이 상당히 도입된 시기에는 동성(同姓) 간의 혼인에 대한 금기도 같이 퍼졌다. 고려 초기(심지어 중기)까지도 근친혼 자체는 존재했지만 이를 숨기느라고 성씨를 일부러 왕과 다르게 해서 중국에 알린 것.
  31. [31] 그래서 개화기 이후로 청나라가 열강들에게 탈탈 털리는 것을 보고 나서는 칭신하던 나라들이 우리가 칭신한 것은 국력을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라며 일제히 자주국 선포를 하고는 칭제를 선언했다. 일본 빼고는 얼마 못 가서 전부 다 남의 나라 식민지로 전락해 버린 게 함정
  32. [32] 하지만 개화기 이후에는 청나라도 이 조공-책봉 관계를 서구식의 속국-종주국 관계로 전환하려고 했다. 그래서 베트남이 자기 속국이라면서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던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거나, 임오군란을 핑계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해서 조선의 국왕이 청나라 황제의 신하임을 못박는 등의 시도는 했지만, 전부 실패하고 프랑스와 일본에 역으로 털렸다(...). 나라 크기가 작았으면, 이쯤에서 타국의 식민지로 굴러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으로 몰린 것이다. 다행히도? 나라는 하나인데 영토가 대륙 하나를 통으로 차지하고 있던 덕분에 그렇게까지는 안 되었지만.
  33. [33]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권, 17세기 서울에 왔던 중국 사신들 참조.
  34. [34] 정확히 말하면 근대의 민족국가들이 이런 삥을 뜯었고 로마나 신성로마 등은 동양과 비슷했다. 바치는 것에 대한 대가로 문물을 주거나 돈을 주거나 방위를 지원했다. 심지어 이런 제국들이 분열하고 망하는 이유도 높은 쪽이 오만해져서 일방적으로 수탈했기 때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로마제국 당시 수도의 로마인들도 나중에 가면 자기들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만 시키거나 세금을 걷어 자기들 복지(라 쓰고 향락과 사치라 읽는다.)에만 쓰면서 막장으로 굴다가 개털렸다.
  35. [35] 물론 동양의 조공 개념과 비슷한 게 없진 않았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도 주변국들에게 조공을 받고 그 대가로 그 나라와 무역을 실시하기도 했고, 중세 유럽에서 신성 로마 제국을 제외한 여러 나라들이 명목상으로 로마교황에게 명목상 칭신을 하고 자국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공인받기도 했다. 교황을 중심으로 한 조공-책봉 체제는 그 영향력이 매우 막강하여, 교황에게 정식으로 책봉을 받지못한 군주는 이라는 칭호도 맘대로 못 쓰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리투아니아로, 원래는 강한 국력과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라서 왕국을 자칭할 수도 있었지만, 워낙 리투아니아의 군주들이 자기 이로운 대로 국교를 가톨릭, 정교회, 발트 신화 등으로 밥먹듯이 갈아치우곤 해서 리투아니아의 군주들은 교황으로부터 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대공이라고 불렸다. 리투아니아가 본격적으로 가톨릭이 주류인 나라가 된 건 리투아니아보다 먼저 완전한 가톨릭 국가가 되었던 폴란드와 동군연합을 형성하면서부터였다.
  36. [36] 애초에 근대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일방적으로 수탈하는 근대적 속국과 비슷한 속국이 없지는 않았지만 드문 편이었다.의외로 후에 제국주의 사상을 만든 농경민족보단 유목민족이 주로 이런 삥을 뜯었다. 예를 들어, 로마가 복속시킨 지역들도 로마의 법으로도 외국인 지역들이 많았으며 내부적으로는 자치를 하거나 로마의 동맹국으로 불리는 나라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들도 로마에 복속하는 외교를 해서 로마가 인프라를 건설해주거나 침공 때 병력을 지원하거나 해서 오히려 이득을 얻었다. 물론 로마도 이런 나라들의 지원을 받아서 위기를 넘긴 적도 많아 이득이긴 했다. 사실 로마가 중국이나 이란 등과 다르게 오랜 세월 지배한 영토에서 부활하지 못한 이유도 로마 제국 자체가 온전히 로마의 영토이자 로마인들의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마도 이를 인식해서 그런지 이탈리아반도의 많은 지역들을 로마의 영토로 삼으려고 심혈을 기울이거나 정기적으로 관리를 보내 속국처럼 다스리는 외국도 늘려갔다. 예를 들자면, 마케도니아 왕국과 페르가몬 왕국은 각각 기원전 146년, 기원전 133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외국의 경우 유대인들처럼 로마에 충성하는 파벌과 로마를 경계하는 파벌 등이 생기기도 했다.
  37. [37] 행정이나 문화 등이 약해도 유목민족들의 영토 판정이 더 잘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38. [38] 그나마도 보면 알겠지만 일방적으로 "이제 조공 그만해라!"하고 명령질을 한 것도 아니고, '너희가 조공을 바칠 때마다 우리는 보답으로 더 큰 선물을 줘야 하는게 너무 부담스러우니 이제 그만 좀 와라!'라는 속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한것도 아니라 "너희들의 사신들이 여기까지 오는데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드니 너희에게 부담이 많이 될 것 같다. 형님으로서 아우에게 그런 부담을 지어주는건 도리가 아니므로 조공 횟수를 줄여도 좋다."라는 식으로 그럴싸한 구차한 변명을 대면서 돌려말하고 있다. 상기한 대로 너무 일방적으로 조공을 금지하거나 이유를 대놓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큰형님으로서의 체면이 안 서기 때문.
  39. [39] 완전히 들어맞는 얘기는 아니지만, 현대로 치면 NATO와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40. [40] 물론 임진왜란 당시의 명나라의 참전이나, 나선정벌에서의 조선의 참전은 다른 이유도 있긴 하지만, 그 이유가 뭐든 간에 조공-책봉 체제로 묶여있는 나라끼리 서로 군사적, 경제적 도움을 주는 것은 일종의 의무이자, 암묵의 룰로 여겨졌기에, 이런 식의 군사 파병은 당연히 해야 할 일로 받아들여졌다.
  41. [41] 덕분에 구글 등지에서 이 단어로 이미지 검색을 할 경우 일반인과 같은 급의 효과를 볼 수 있다.
  42. [42] 대개 음악방송 촬영장이나 팬미팅같이 스타와 팬이 만나는 곳에서 '역조공'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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