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

1. 개요
1.1. 역사
1.2. 해외 사례
1.3. 조선의 사례
1.4. 정치적 사례
1.5. 중국의 수탈 사례
2. 인터넷 은어
3. 게임 은어
4. 助攻

1. 개요

샤한샤에게 조공 바치는 사신들 (페르세폴리스)

朝貢, Tribute

전근대 동북아시아에서 제후가 천자에게 바치는 예, 또는 그것으로 구성된 국제 질서 체제. 조회 참례를 의미하는 조(朝)와 공물을 의미하는 공(貢)으로 이루어진다. 조공의 반대 개념으로는 책봉이 있으며, 조공을 통해 천자 국가의 질서에 편입된 제후국은 책봉을 통해 그 존재를 인정받는다.

근대국제체제와 동아시아의 유교세계의 차이가 있다. 원래 전근대 유럽권은 기본적으로 종교(교황)의 영향아래에 있다는 전제하에서,[1] 서양의 군주는 결혼으로든 무력으로든 한 군주가 여러 지역의 수장이 될 수 있었고, 백작이나 후작, 공작 등의 제후가 반드시 왕의 신하일 필요도 없었고 왕이 황제의 신하일 필요도 없었지만[2], 동양의 군주는 반드시 한 국가의 수장이며 황제 아래 제왕과 제후들이 입조를 한다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은 이론적으로 반드시 황제의 신하여야 했다. 이런 시스템은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조선말에 세워진 독립문은 일게 주권국가인 중국에서 독립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존 조공-책봉관계를 베이스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체제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조금더 쉽게, 예를들어 서양에 대응을 하자면, 기존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버리겠다는 선언과 비슷한 의미다.

한편, 서양에서는 30년 전쟁을 거치고,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주권평등원칙'이 확립이 되었고, 이것을 근대국가의 시발점으로 보았고,[3] 개화기에 동아시아지역에도 그대로 도입이 되었으며, 당시 주권평등시스템이 뿌리내린지 150여년이 지난 서양의 시점에서는 아직 전근대적인 국제체제를 가지고 있던, 동아시아의 체제를 오해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근대국제체제에서 내려오는 현대의 관점으로, 조공책봉체제를 바라보려고 하는것은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많은 오해를 낳고 있다

야심이 있다면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을 썩 유쾌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라 고구려신라, 고려에서도 호시탐탐 외왕내제를 하려고 한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입조나 조공을 한다는 것이 반드시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4].

1.1. 역사

원래 천자와 제후국으로 이루어진 봉건제의 주나라에서 채택된 제도로, 천자와 제후의 개념이 중국의 경계를 넘어서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로 개편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외교 관례로 굳어졌다. 중국에서는 국내에서도 행해졌지만, 점차 황제권(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실질적인 의미의 제후가 사라지게 되자 자연스럽게 조는 망궐례 등으로 간소화되고, 공은 세금화 되었다.

조공무역의 이익과 손해도 매우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익을 볼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당시 관점으로 보느냐 아니면 지금의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도 이익과 손해가 달라지기도 한다.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딱히 당시 국력에 도움은 되지 않는 사치품을 잔뜩 받고 중요한 전략 자원인 말 같은 것들을 주면 지금 관점에서는 손해로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이익이고 다른 무역에서 중요하게 쓰일 수도 있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선진 문물을 배운다는 학비 취급을 하기도 했다. 동북아시아 국제 관계에 있어서 조공은 사대에 따른 일종의 외교 의례였고, 조공을 한다는 것은 국가 대 국가로서의 위치와 외교관계를 확정한다는 의미였다.

송나라 때는 일부 지나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상당히 과장되기는 했지만 상대국인 송나라의 안습한 외교적 현실[5]을 적절히 이용해서 나름 실리도 챙기고 체면도 살렸다.[6][7][8]

14세기 말 몽골족의 원나라를 대신하여 중국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명나라는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송나라 때 만들어진 책봉조공(冊封朝貢) 체제를 더욱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한 세계 체재, 곧 중화주의(中華主義)를 완성하기 위해 사대관계를 굳건히 하고자 하였다. 주변국들의 반발도 거셌는데, 특히 고려의 공민왕은 가장 적극적이어서 북방의 동녕부(東寧府)를 침공하였고, 명나라는 요동도사(遼東都事)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고려를 압박하였다. 고려는 요동정벌이라는 초강수를 두었지만,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이 건국되었다. 조선은 원나라를 버리고 친명(親明)을 분명히 하였고, 이에 명나라는 조선의 건국을 즉각 승인하였다. 조선은 ‘조선(朝鮮)’과 ‘화녕(和寧)’이라는 두 가지 국호를 올려 선정을 위촉하였고, ‘조선국왕(朝鮮國王)’을 새긴 새로운 옥새를 요청하였다. 이로써 조선과 명나라는 황제가 왕을 봉하여 주고, 왕은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는 전통적인 책봉조공(冊封朝貢) 관계를 수립하였다.

명나라는 요동 문제를 비롯한 현안이 남았기 때문에 명나라는 외교적으로 조선을 압박하여 힘의 우위에 서고자 했다. 과도한 공물과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였고, 사신의 자질 문제를 들어 조선 사신의 입국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강력한 항의를 받은 명나라는 사신을 1년에 3번 파견하는 1년 3사가 아니라 3년에 1번 파견하는 3년 1사를 권하였다. 사행 횟수를 줄여 사행을 통해 조선으로 누설되는 군사적 정보를 줄이고, 여진족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은 사행 제한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다. 정치적 안정과 권위를 인정받는 문제 외에 사행이 갖는 경제적ㆍ문화적 이익이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군역을 피해 압록강을 넘어온 요동 사람을 쇄환(刷還)하는 문제와 조선이 작성한 표전문(表箋文)으로 벌어진 논란 등 여러 사건이 중첩되며 얽힌 관계는 대명관계에서 강경파였던 정도전(鄭道傳)이 왕자의 난으로 리타이어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세종 대를 지나 국내외가 안정되면서 대명관계도 요동을 중심으로 한 영토문제에서 문화와 교역을 중심으로 안착되었다. 조선은 서책과 약재, 활(각궁)의 재료가 되는 수우각(水牛角) 수입에 적극적이었다.참고자료

주문사(奏聞使) 남재(南在)가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와서 아뢰었다.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고 또 명령하기를, ‘너희 나라 사신의 행차가 왕래하는데 길이 멀어서 비용이 많이 드니, 지금부터는 3년 만에 한 번 조회하라.’ 하였습니다.

(甲辰/奏聞使南在回自京師曰: “帝厚待之, 且命曰: ‘爾國使臣行李往來, 道遠費煩, 自今三年一朝。)

( 태조 4권,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9월 2일(갑진) 1번째기사, 링크)

중국은 세계의 문물을 동아시아에 전파하는 역할을 했는데 다른말로 하면 서양의 기술이 직접적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중국과의 조공무역이 없었던 나라들은 그만큼 뒤쳐지게 된다는 의미. 물론 조선도 여진이 조공해올 때 하사품을 신경썼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교역도 명목은 조공이었다.

1.2. 해외 사례

오이라트의 경우, 조공하는 말의 숫자와 가격을 마음대로 부풀리기도 했다. 여기서 '가격'이라는 것은 말 한 마리당 '하사'하는 은의 분량을 의미한다. 사실 가격 자체는 고정되어 있었지만, 오이라트 측에서는 말의 숫자를 실제로 조공하는 말의 숫자와 다르게 멋대로 부풀려서 몇 배의 은을 받아냈다. 실제로 과거에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지 않아 상부가 제대로 된 내용을 알기 쉽지 않으니 어떻게든 속일 방법이야 있었고 여러 국가에서 시도되기도 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이 조공무역을 '막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 이유가 덴노가의 세력이 무역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는데, 하필이면 무로마치 막부 밑의 6대 가문들이 몰래 하는 바람에(...)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지는 원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전국시대(일본)가 도래한다.

오키나와류큐 왕국은 경제적으로 중국과의 조공무역에 많이 의존해왔다. 땅도 좁고, 농사도 잘 안되다보니 그렇게 된 것.

만주족은 조공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전세계를 자신들의 통치 아래 두었다고 한족들에게 선전했다.물론 세계정세에 밝은 한족 학자들도 있어서 청나라 호구화 입증에 군벌 크리

1.3. 조선의 사례

원래 명나라는 조선에게 조공품으로 을 요구했으나, 세종대왕은 말과 포로 대체하였다. 명이 말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나라는 그 반대 급부인 사여(賜與. 말은 번드르하지만 결국 말값)를 포로 지불하였다. 게다가 미리 명나라가 나중에 사여품을 줄 테니 말을 먼저 달라고 하자 태종은 거절했다. 무조건 현금 박치기. 나중에는 이상하게 사여품을 명나라가 먼저 주고 조공품인 말은 나중에 줬다. 한마디로 말해서 선결제. 게다가 값은 조선에서 정했다.

의정부에서 무역하여 바꿀 말 값을 정하였다. 큰 말 상등값은 상오승포(常五升布) 500필, 중등 값은 450필, 하등값은 400필이고, 중말 상등 값은 300필, 중등 값은 250필, 하등 값은 200필로 정했다. - 태종실록 1년 10월 3일

상등마는 당시 가격으로 아무리 낮아도 쌀 300두 정도였다. 참고로 조선은 여진에서 말을 조공받기도 하였는데(말하자면 수입) 이때도 말값은 조선이 정했다.

호조에서 상계하였다. '말을 올린 야인(野人: 여진족)에게 답례로 내려주는 물품은 큰 말의 상등은 면포 45필, 중등은 40필, 하등은 35필로 하며, 중질 말의 상등은 30필, 중등은 25필, 하등은 20필로 하며, 작은 말의 상등은 15필, 중등은 10필, 하등은 6필로 하는 규례를 정하게 하소서'이에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8년 1월 7일

이때의 상등마의 가격은 쌀 30두. 한마디로 조선은 엄청난 폭리를 누렸다. 심지어 정난의 변 와중에는 건문제에게 후진 말을 팔아먹고도 이걸 명나라에서 추궁할까봐 그 담당 관리를 보호하려 했던 케이스도 있다. 항목 참조.

그러나 이는 조선이 팔고 싶어서 팔았다기 보기엔 힘든데, 명의 사정에 맞춰서 갑자기 많은 숫자의 말을 팔라고 하는 경우도 많아 조선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유쾌한 거래[9]는 아니었다.[10] 즉, 조선이 이득을 보기 위해 말을 팔았다기 보다는 손해를 벌충하기 위해 명나라에게 많은 액수의 돈을 받아낸 것에 가깝다는 것. 조선도 중요한 전략물자인 말이 많이 나오는 땅이 아닌지라 자국에서 필요한 말조차 여진족에서 수입해다 썼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명은 우방이지만 위협적인 적이 될 수 있는 조선을 견제도 할 겸, 어차피 자국에서는 생산이 제한적인 말도 살 겸 조선을 이용했고, 조선은 이 관계에서 돈이나 받으며 국방력 강화는 꿈도 못꾸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은 현대의 탱크나 기갑차 같은 전략자원이었고, 전근대 사회에선 생산량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명은 상대적으로 여유있는 돈을 주고 소중한 전략자원인 말을 받으며 우방이지만 적국이 될 수도 있는 조선의 전력약화를 노렸던 것, 이러한 종류의 전략물자 생산제한 은 현대에도 존재한다.

그래도 이런 관계는 조선명나라 양국에 큰 이득을 주어서 명나라는 동북아시아 주요국 중 하나였던 조선을 자신들의 혈맹으로 삼을 수 있었고, 조선도 명나라로부터 선진 문물을 대거 수입하고 국력을 착실히 키워나갈 수 있었다. 일본무로마치 막부도 이걸 노리고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 이래로 명나라에 칭신했으나, 다이묘들이 막부의 무역선단을 사칭해서 몰래 조공하는 바람에 별 이득을 보지 못하고 망했다(...).

물론 조선도 따지고보면 조선이 명나라에게 조공만 한 건 아니고 여진족 부족들이나 대마도 도주로부터 조공을 받기는 했다. 마찬가지로 고려도 건국 초부터 고려 중기까지 야인들로부터 조공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외에도 고려중순까지 명목상으로는 독립국이었던 탐라국으로 조공을 받았다.

하지만 여진족 부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것도 고려전기나 조선전기의 일로 고려시대때는 금나라가 건국되고 요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조선은 후금이 건국되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후금이 청나라로 국명을 바꾸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기를 거쳐 중국을 정복을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관계가 역전되어 고려는 금나라, 조선은 청나라를 상국으로 모시면서 조공을 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사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더더욱 충격을 받았던것이고 조선후기에 임경업전이나 박씨전같은 소설이 인기를 끈 면이 많다.

게다가 명나라에 조공하는 건 명나라가 조공한 양에 못지않은 하사품을 주는, 일종의 교역이었기 때문에 조선 측의 불만이 없었지만, 청나라병자호란 이후로 한동안 일방적으로 삥뜯기를 시전했기 때문에 청나라에 대한 분노가 상당했다. 이게 다시 명나라 때와 같은 일반적인 무역 형태로 전환된 뒤에도 국민 감정이 남아서, 소중화주의같은 국수주의적인 사상으로까지 이어졌다.

금나라의 경우는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내외부[11]의 정치적 분쟁이 심해서 청나라마냥 갑질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그래서 고려와는 군신관계만 확인하고 가능하면 고려를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처지가 달라서, 눈치 볼 것도 없이 조선을 탈탈 털고는 상전 노릇 제대로 했다. 물론 명나라를 패망시킨 이후에는 조선과의 관계를 중요시해서 이런 식의 갑질을 많이 줄였다. 그래서 숙종백두산정계비를 두고 국경 분쟁이 났을 때에도 외교적으로 원만하게 해결했다.

1.4. 정치적 사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책봉이나 조공에 정치적인 의미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가장 결정적인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에서 무신정변이 일어나서 의종이 퇴위하고 명종이 즉위한 뒤에 당시 고려와 조공책봉 관계에 있었던 금나라에다 뭐라고 해야할지 고민하던 도중에 금나라에서 의종의 생일사(제후국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를 보낸다고 하자 고려 조정은 난리가 났었다. 결국 고려는 가리고 가려서 유응규를 금나라에 파견하는데, 보내는 사람들도 그렇고 유응규도 그렇고 책봉을 받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으나 금 황제(금세종)는 명종의 책봉을 짐짓 미루고 명종의 정당성을 물었다. 이에 유응규는 의관을 갖추고 황궁 앞에서 꼿꼿히 선채로 음식을 거부했다. 사흘이 지나자 금세종은 책봉 약속을 해줄 테니 그만 음식을 먹으라고 했지만 유응규는 거부했다. 조공국의 사신이 황궁 앞에서 굶어죽는 변이라도 당하면 대국으로서는 큰 망신이기 때문에 결국 7일이 지나서 유응규가 계속해서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자 금세종이 이를 불쌍히 여겨 책봉 교서를 내렸다. 물론 고려로 돌아온 유응규는 대환대를 받아 영웅이 되었고, 금세종은 유응규의 충성심에 탄복하여 사신 편에 언제나 그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낮은 위치이니 정말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일들도 있었다. 우리나라를 주로 예로 들자면

"배신(陪臣) 조임(趙琳)이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와서 삼가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삼가 황제의 칙지를 받들었는데 그 내용에, 이번 고려에서 과연 능히 천도(天道)에 순응하고 인심에 합하여, 동이(東夷)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변방의 흔단(釁端)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면, 사절(使節)이 왕래하게 될 것이니, 실로 그 나라의 복이다. 문서가 도착하는 날에 나라는 어떤 칭호를 고칠 것인가를 빨리 달려와서 보고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삼가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은 왕씨(王氏)의 후손인 요(瑤)가 혼미(昏迷)하여 도리에 어긋나서 스스로 멸망시켰으면서 스스로라니(...) 멸망하는 데 이르게 되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신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를 보게 하였으므로 놀라고 두려워서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요사이 황제께서 신에게 권지 국사(權知國事)를 허가하시고 이내 국호(國號)를 묻게 되시니, 신은 나라 사람과 함께 감격하여 기쁨이 더욱 간절합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國號)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小臣)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등의 칭호로써 천총(天聰)에 주달(奏達)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裁可)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이처럼 명나라가 허락을 해주기 전까지는 왕이라는 칭호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권지국사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국호와 왕 칭호를 받고 나서야 왕실 복장도 칭호도 간지나게 쓰거나 만들 수 있었다. 고려 이후 우리나라는 왕이 즉위하면 중국에 승인을 받아야 왕호를 사용할 수 있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명나라에 왕위 즉위를 승인해달라고 요청할 때 권지고려국사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게 정치적으로는 참 귀찮은 일이었다. 또 영은문이라는 것도 있어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왕이 이 문까지 마중 나가는 것이 상례였는데, 역시 귀찮은 일이었다. 상국에 바칠 공녀 등을 심사하거나 하는 것들 따위도 당연히 좋은 일들은 아니었다.

조선에서도 중종반정으로 중종을 옹립한 반정세력은 명나라에 이 쿠데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혹시 명나라가 중종의 승인을 거부하고 연산군을 밀어주면 어떡해야 할지 난감해하다가 명나라에 연산군이 중병에 들어 스스로 동생에게 양위하고 별궁에서 요양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여 중종의 책봉을 받았다. 그 후 연산군이 병들어 죽었어도 이를 명나라에 알리지 못하고 명나라 사신이 물어볼 때마다 연산군은 살아있지만 장애인이 되어 외부인을 만날 수 없다고 계속 거짓말을 했다. 심지어 중종 34년에 중종이 신하들에게 "이번에 사신이 오면 연산군이 창덕궁에 있다고 하는게 좋을까?" 라고 묻는다.

삼국시대에는 책봉을 받기위해 왕비의 성을 갈아버리기도 하였고,[12] 고려 최씨 무신정권 때는 최충헌이 명종을 밀어낸 뒤에 다음 왕으로 왕진과 왕민 중 누구를 왕으로 밀까 고민하다가 결국 금나라도 익히 알고 있는 왕민이 금나라의 책봉을 그나마 무난하게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겨 왕민 곧 신종이 옹립되기도 하였다. 조선에게는 황제의 책봉은 곧 임금의 정치적 정통성이었다. 물론 전반적으로 서구식의 식민지 프레임에 엮어넣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13][14]

1.5. 중국의 수탈 사례

조공을 통해서 직접적인 경제적 수탈도 하려고만 하면 가능했다. 물론 조선도 이걸 알고 있었다.

태종 때, 그러니깐 명나라가 한창 원나라를 만리장성 이북으로 쫓아보낸 영락제 때는 조선에 대한 무리한 요구가 이어지자 조선에서 사신을 보내 사소한 트집도 잡을 수 없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면서도 할말은 다해가며 읍소를 가장한 항의를 했고, 세종 때에는 명나라 사신 해수가 인삼값 때문에 시비가 붙고 여기에 개입하려는 조선의 지역관리를 때리자 세종이 열받아서 명나라에 문책사를 보내려다가 신하들이 뜯어말려서 관두기도 하고, 명나라 사신 윤봉이 귀하디 귀한 해동청을 달라고 끈덕지게 요구할 때는 거절하다가도 가죽이나 놋쇠주전자 같은 걸 달라고 할 때는 챙겨서 주기도 하는 등 그때 그때 사신들의 요구와 상황을 봐가며 대처하였다.

그래도 태종 때에, 명과의 관계가 굉장히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조공무역으로 크게 이득을 보긴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과 베트남 그리고 태국은 3년에 1회, 일본과는 10년에 1회, 류큐 왕국과는 2년에 1회 조공무역을 하였다. 그런데 명나라는 태종이 친명 노선을 천명하자 파격적으로 1년에 3회 조공무역을 허용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그 후에 명나라는 수시로 조공무역을 줄이자며 조선에 요청했지만, 조선은 강하게 거부하였다.

다만 임진왜란 직후에는 조공이 아니라 사신으로 온 명나라 환관들의 조선에 대한 '개인적인' 착취가 극에 달하는데, 이때는 명나라가 조선을 구해 준 '재조지은'의 은혜에다 임금인 광해군 개인의 정통성에 대한 약점 때문에 환관들의 갈취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환관들의 탐욕과 횡포는 명나라 본국에서도 손을 쓰지 못하는 판이니. 이것은 '조공'이라는 제도 자체의 병폐가 아니라 사신 개인의 갈취이니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이 시절에조차도 조선에서 개인적 착취가 너무 심했다며 탄핵받아 처벌받는 일도 있었다.[15] 따지고 보면 사신도 무턱대고 거하게 뇌물을 요구할 수도 없다. 민본주의 유교의 왕도정치가 근본인 동양에서 청렴이란 관리의 최대 덕목이었다. 경국대전 형법의 대부분도 관리에 대한 치죄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사신을 보내는 쪽에서도 저 녀석이 타국에서 우리 이익을 잘 실현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부분. 또한 사신님이 드시는 만큼 국가의 몫은 줄어든다. 따라서 사신을 보내고 나서는 공식 비공식적으로 자기 사신이 상대국에게 뇌물을 받아먹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노력하였다. 실제로 상대국에서 거하게 얻어먹었다가 목이 달아난 사례도 있다. 즉, 사신 입장에서도 저쪽이 폭발해서 우리 황제에게 꼬지르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없을 수가 없다. 결국 갑과 갑의 대리인과 을의 관계인데, 여기서 갑의 대리인과 을의 오묘한 공생관계가 생겨나기에 보이지 않는 암묵적 선이 그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조공이라는 것이 원칙적으로는 조공을 바치는 쪽에서 받는 쪽의 덕(德)을 사모해서 하는 행위라는 전제가 있다 보니(쉽게 말해 팬질) 자기의 덕을 사모해서 조공까지 바치는 상대한테 그걸 악용해서 막 부려먹자면 그것도 그것대로 체면이 안 서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세워진 대국의 수탈은 병자호란 이후에도 되풀이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조선이 청나라에 패한 직후에는 청으로부터 심하게 부담스러울 정도의 물품을 요구받았다. 추세를 보면 명, 청 모두 건국 초기 조선을 경계하던 시절에는 조선으로부터 많은 물품을 짜내려 했고 조선이 완전히 자신들의 질서에 편입되었다고 판단한 후에는 조선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측면에서 조공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패턴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명나라 칙사가 조선 처녀를 뽑을 때에는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수백 명의 여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번에 걸쳐 심사를 했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뽑힌 몇 명의 여자를 명나라로 데려갔다. 뽑힌 여자들의 나이는 대개 10대 중후반이었다.

당시 처녀들은 이역만리로 잡혀가기 싫어 일부러 얼굴에 독초를 바르고 가족들은 다시는 보지 못할 딸,누이의 생각에 눈물 흘렸다는 기록이 많다.

태종 16권, 8년(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7월 2일(무신) 1번째기사

내사 황엄 등이 의정부와 더불어 경복궁에서 처녀들을 선발하다 ~ 태종 33권, 17년(1417 정유 / 명 영락(永樂) 15년) 5월 9일(갑오) 3번째기사 중국에 진헌할 처녀로 황씨와 한씨 등을 뽑다 # ~ #

물론, 당대 동북아의 주요국 중 하나이자 동맹국이었던 조선의 국격을 상하게 할 수 있어서 명나라도 이후로는 이런 짓을 삼갔고, 더욱이 가면 갈수록 명나라가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이런 식의 갑질을 할 수도 없었다.[16]

2. 인터넷 은어

1에서 따와서 현대 한국 인터넷에서 쓰는 말.

뇌물이라기에는 부정한 의도가 약하고 선물이라기에는 좀 순수함이 덜한 어중간한 경우에 쓰는 말이다. 한마디로 모종의 대가를 바라고 하는 선물.

예) "김유식에게 갤러리 개설을 부탁하기 위해 만두를 조공으로 바치다."

예) "나에게 조공을 바쳐라."

특히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서 갤러리 이용자들에게 질문을 할 때 매력적인 신체를 가진 여성 혹은 남성의 헐벗은 사진이 조공으로 주로 이용된다.[17]

예) "이 짤방을 조공으로 바치겠습니다. 굽신굽신."

예) "이 질문에 대답좀 해주세요(조공있음)"

디시인사이드에서 갤러리 개설을 위해 쓰이는 조공과, 이로 인해 만들어진 갤러리들의 목록은 만두조공 항목 참고.

다음/네이버를 근거로하는 팬카페 등에서 디시인사이드의 연예인/운동선수 갤을 겸하는 사람들이 퍼날라서 쓰는 통에 메이저 포털의 각종 팬까페에서도 자주 쓰는 말이 되어 인터넷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사실 조공이라는 게 없었던 때는 팬이 개인적으로 선물을 하는데, 받는 쪽이나 주는 쪽이나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받는 쪽에게는 불필요할 수도 있고, 주는 쪽은 부담스럽고. 그래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제대로 된 선물을 주자는 게 '조공'이다. 의도는 좋았다 때문에 비싸보이는 선물이라도 팬덤 규모가 크다면 1인당 부담 비용은 의외로 적을 수 있으니, 그럴 돈 있으면 부모님께 쓰라는 둥 무턱대고 비난할 것은 아니다. 아닌 경우도 많지만 부모님한테는 적은 비용도 잘 안쓰는게 문제

"약간의 사심을 담은 선물"이라는 인터넷상에서의 의미를 모르는 일반인들은 "아무리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해도 조공이라니!"라며 엉뚱한 대목에서 분개하기도 한다.

사실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인기 아이돌이 지나치게 비싼 물건을 선물받아 돌려보낸 사건도 종종 있었고, 심지어 방송 관계자들에게 특정 연예인을 "잘봐달라는 의미"로 팬들이 선물을 보내기도 하는 등 원래 의미의 '조공'에 가까운 조공 형태로 변하면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모 드라마는 대놓고 "왜 조공이 안오지?" 같은 발언까지 나오면서 조공문화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10년에는 걸그룹 티아라의 팬카페 운영자가(그것도 공식 팬카페) 조공비 명목으로 기부받았던 팬들의 기부금 천만원 가량을 먹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공먹튀사건

2013년에는 LG 트윈스11년만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가을야구행을 이룩하자 god의 데니안이 SNS에 유광잠바가 갖고 싶다는 글을 올렸는데 이를 본 어느 한 팬이 유광잠바를 한 벌 구해다가 조공했다. 근데 그걸 또 인증샷을 올리는 바람에 욕을 무지하게 먹고 SNS 계정을 폐쇄하는 촌극이 빚어졌다.

연예인 조공 스케일을 잡으면 이정도도 가능하다. 스압을 주의하자. 아이고 배 터지겠다.

관련 기사

한편, 몇몇 연예인은 고액의 조공에 대해 "마음만 받겠다"며 거부 의사를 확실히 밝혀 개념 연예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들이 굳이 조공을 보내려고 해서 일부러 액수가 매우 적은 물건으로 부탁하는 사례가 있다. 또한, 원더걸스의 팬들이 방글라데시에 우물을 만들어 3시간이나 물 퍼러 갈일을 없게 만들었거나 2NE1의 팬들이 남수단에 망고나무 숲을 조성해 현지인들의 휴식처 제공과 기아 해소에 도움을 주었다든가 틴탑의 팬들이 캄보디아화장실우물을 기증했다든가 서태지의 팬들이 브라질 밀림에 숲을 조성했다든가 하는 등 공익성에 중점을 둔 '개념 조공' 또한 눈길을 끌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오히려 스타가 팬들한테 조공을 해주는 이른바 '역조공' 문화도 생겼다. 2011년부터 몇몇 스타들의 선례로 알려지기 시작한 이 문화는 스타가 감사의 마음을 담은 음료수나 초콜릿, 간식거리, 핫팩, 도시락, 밥차와 같은 선물들을 팬들한테[18] '쏘는' 문화다. 역조공을 받은 팬들은 스타에 대한 사랑이 더욱 두터워지고 스타 자신도 팬사랑이 끝내주는걸로 좋은 이미지를 얻는 장점이 있다.

특히 아육대는 역조공 경쟁의 장이라 불릴만큼 아이돌들이 방청을 하러온 팬들에게 '역조공'을 하는 일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아이돌들이 장시간 녹화에 지친 팬들에게 도시락, 밥버거, 피자와 같은 먹거리로 '역조공'을 해줌으로써 위와 같은 장점들은 물론, 팬들은 끼니도 챙길수 있어서 좋고, 타 팬들에게까지 입덕의 길을 열어주는등 1석 4조의 장점이 있다. 다만 현재는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팬사랑을 위해 주는 역조공이 거의 의무적으로 변질되면서 역조공 퀄리티에 대한 과열경쟁이 붙이는 등 부작용도 보이고 있다. 제발 누가 혜자겠네 누가 싸구려줬네 비교하지 말고 마음만 받자

방송 관계자에게 보내는 조공은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에 저촉 될 수 있다고한다.

3. 게임 은어

스타크래프트워크래프트 등의 RTS 게임에서, 아군의 중요한 유닛을 착오나 실수 등으로 어이없이 잃는 일, 이런 상황이 발생 할 경우 대개 유닛을 상대에게 바치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조공'이라는 단어를 쓴다. 혹은 그러한 일이 나기 쉬운 유닛.

따라서 고테크 유닛(캐리어, 배틀크루저 등)을 다수 확보하기 위해 필요없는 일꾼 등을 고의적으로 상대진영으로 보내 없애는 행위는 보통 조공으로 보지 않는다.

보통 강력한 공격력에 비해 피통이 적어 잃기 쉬운 유닛이 나섰다가 일점사에 산화하거나, 이동속도가 느린 유닛이 수송기에 타고 있다가 산화, 혹은 상대방이 만반의 준비나 함정을 깔아둔 곳으로 이동했을 때 생긴다.

ex) 리버 조공을 해버렸다- 리버가 혼자서 끼익끼익 기어가다가 드라군, 히드라등에게 깡통이 되어버렸다. 혹은 셔틀에 탑승한 리버가 셔틀에서 내리지 못하고 공중분해되었다. 태어나보니 애비가 김씨다.

ex) 아비터 조공, 조공리콜- 상대방 테란이 마인을 잔뜩 깔아둔 마인밭으로 아군 주병력을 리콜했다. 그리고 마인이 일어나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ex)추적자를 조공했다- 무리 군주를 잡으려고 앞점멸을 하다가 진균 번식가시 촉수에 죄다 터져버렸다.그리곤 홍어웨이브 시작!

ex) 사이언스 베슬을 조공했다 - 베슬이 혼자 떠다니다가 스커지에 격추 당하기 시작하면...

ex) 울트라리스크를 조공했다 - 울트라가 뭣 모르고 마인밭으로 닥돌해서 전멸한다거나.

ex) 워크래프트3아처는 후반엔 조공유닛일 뿐이다- 게임 후반까지 아처를 쓰게 되면 강력한 공격력의 후반 유닛이나 AOE등에 녹게 된다.

ex)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에서는 일반 총기 공격을 사용하는 유닛이 중장갑 유닛에게 100만발을 쏴도, 흠집 하나를 낼 수가 없다. 대차량 무기/스킬 사용은 필수.

게임 뿐 아니라 야구 축구 등의 선수 스카우트/트레이드 등에서도 다른 구단에 넘긴 선수가 맹활약을 하게되면 조공을 바쳤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롯데에서 한화로 옮긴 후 2게임 연속 만루홈런을 친 카림 가르시아.

4. 助攻

주공(主攻)과 반대되는 개념.

공격시 쓰는 개념으로 조공이 적을 유인하여 맞서는 동안 후위나 측면을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조공은 망치와 모루전술에서 '모루' 역할을 맡아, 적을 붙잡아 두는 임무를 맡게 되며 주공이 '망치' 역할을 맡아 적의 핵심 목표를 공격하게 된다.

때문에 조공은 마치 주공처럼 꽤나 요란하게 적의 시선을 끌어야 하며 적의 예비대를 조공 쪽으로 돌리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그 동안 기동력이 우수하고 돌파력이 뛰어난 기병, 전차 등이 주공을 맡게 된다. 현대에는 급박하게 전황이 바뀌어 조공이 주공이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도 충분히 대비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전역 당시 독일 B집단군의 네덜란드-벨기에 침공이 조공의 훌륭한 성공사례. 에방에마엘 요새 공략, 네덜란드 공습 등 화려한 전과를 내면서 프랑스/영국의 주력을 해당 지역으로 빨아들였으며, 그 사이에 A집단군이 아르덴 숲 돌파에 성공한다.

관련 문서 : 양동 작전, 성동격서

5. 조선공산당

항목 참고


  1. [1] 사실 서양역사에서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고, 종교를 배제한 채 설명할 수가 없다. 종교때문에 피터지게 싸운게 워낙에 많았고, 교황의 정치적 권위가 중국황제 못지 않을때도 있었다. 카노사의 굴욕은 이미 유명하고, 또 30년 전쟁의 의의 중에는 구교국가였단 프랑스가 자국이익을 위해 신교국가들을 지원한 것이 꼽힐 정도다.
  2. [2] 중세 초기에는 동양과 비슷하게 각국의 왕이 명목상으로는 로마 제국의 신하일 필요는 있었다. 그래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왕들은 자기 나라에서는 황제나 다를 바 없다는 개드립에 가까운 소리를 해서 동로마 제국이나 로마 교황의 내정간섭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로마 교황도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아예 유력한 서유럽 왕국의 군주를 새로 황제옹립하고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내세우기까지 했다.
  3. [3] 즉, 서양 역시 그 이전엔 동아시아 세계에서처럼 국가간 관계가 평등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4. [4] 대표적인 나라가 서하. 서하의 경우는 자국이 송나라보다도 국력이 넘사벽급으로 우위에 있었기에 아예 황제국을 자칭하려 했는데, 송나라 측에서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면서 황제를 칭하지 말아달라고 사정하고는 서하가 자국에 칭신하는 조건으로 막대한 양의 세폐를 바치겠다고 해서 외왕내제 형식으로 가는 대신에 송나라를 삥 뜯는 선에서 끝냈다. 본격 신하에게 굽신대는 황제
  5. [5] 잠재 적국인 거란을 부족한 군사력으로 견제해야 하는 상황에서 송나라는 몇 안되는 우호국인 고려와의 관계를 최대한 우호적으로 유지해야 했다.
  6. [6] 넷상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사실 그대로 알고 싶다면 출처인 동란섭필,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등을 직접 참고하는 편이 더 낫다. 고려 사신이 양아치로 보일 수준으로 과장된 것들에 비하면 상당히 많이 다르다. 하지만, 소동파고려를 맥적(貃敵)이라고 힐난할 정도로 고려와의 조공무역이 송나라의 재정에 부담을 주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과장되었다고는 하나, 고려 사신들이 송나라에서 결코 '예의바르게' 행동한 것도 아니다.
  7. [7] 참고로 고려 사신들의 깡패짓은 거란에서도 계속되었다. 여요전쟁 이후로는 몇 번의 무력 분쟁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관계가 우호적으로 흘러갔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승전국이라는 이유로 남의 나라에서 거란인들의 변발을 잡고 폭행을 하면서 모욕을 주는 등의 문제는 있었다.
  8. [8] 그런데 소동파는 더 나은 나라들도 있는데 송나라가 고려에 너무 지나친 대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불만을 가져서 좀 감정적으로 극딜한 면이 있고 고려 역시 친송정책과 함께 거란 때문이니 하는 변명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으로 딱히 무례하게 마구 행동하고 다녔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가 송나라와 꽤 오래 교류가 없어 조공을 바치지 않고 있다 다시 조공하러 왔을 때도 송나라에서 그 진의을 물으니 "우리나라가 거란과 더불어 이웃이 되었더니 그들의 주구에 견디지 못한 국왕 왕휘는 늘 화엄경을 외어 중국이 재생하기를 빌었는데, 하룻저녁 꿈에 별안간 이 경사에 몸이 이르러서 성읍과 궁실의 번영함을 샅샅이 구경하고 꿈을 깨자, 이곳을 연모하여 즉시 시를 읊으셨는데, 악한 인연 어이하여 거란에게 이웃되어 한 해에 바친 공물 몇 가지나 괴롭혔네 이 몸에 날개 돋쳐 먼 중국에 왔건마는 애달파라 깊은 대궐 누수 소리 날 새려네"라며 거란의 탓으로 돌렸다. 송나라 입장에서 거란과 양다리 걸치고 있는 현장을 봤을 때에도 사실은 중국을 사모하고 있다고 말을 하여 송나라 황제가 진의를 조사하기 위해 고려 사신을 부른 적도 있었는데 당시 태도도 무례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냥 양다리 걸친게 아니꼬왔던 거지.
  9. [9] 수량에 맞춰서 말을 갑작스럽게 준비하느라 추가적인 비용이 들었고 여진족과 무역으로 죄다 보충했으면 몰라도 직접 말을 준비하는 경우에는 큰 이익을 보지 못하였다.
  10. [10] 실제로 당시 기록을 보면 기병 전력의 약화를 우려하는 신하의 간언이 기록되어 있다.
  11. [11] 중원 전토를 병탄하지 못해 남송을 남겨두게 되었을 뿐더러, 서하에, 끝판왕까지...
  12. [12] 책봉도 책봉인데 유교 이념이 상당히 도입된 시기에는 동성(同姓)간의 혼인에 대한 금기도 같이 퍼졌다. 고려 초기(심지어 중기)까지도 근친혼 자체는 존재했지만 이를 숨기느라고 성씨를 일부러 왕과 다르게 해서 중국에 알린 것.
  13. [13] 그래서 개화기 이후로 청나라가 열강들에게 탈탈 털리는 것을 보고 나서는 칭신하던 나라들이 우리가 칭신한 것은 국력을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라며 일제히 자주국 선포를 하고는 칭제를 선언했다. 일본 빼고는 얼마 못 가서 전부 다 남의 나라 식민지로 전락해 버린 게 함정
  14. [14] 하지만 개화기 이후에는 청나라도 이 조공-책봉 관계를 서구식의 속국-종주국 관계로 전환하려고 했다. 그래서 베트남이 자기 속국이라면서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던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거나, 임오군란을 핑계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해서 조선의 국왕이 청나라 황제의 신하임을 못박는 등의 시도는 했지만, 전부 실패하고 프랑스와 일본에 역으로 털렸다(...). 나라 크기가 작았으면, 이쯤에서 타국의 식민지로 굴러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으로 몰린 것이다.
  15. [15]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권, 17세기 서울에 왔던 중국 사신들 참조.
  16. [16] 그래서 명나라가 점점 이웃한 조선이나, 오이라트, 여진, 일본 등을 두려워 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사신이 자주 오가는 것을 보고 두 나라가 합심해서 자국을 치려고 한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다만 조선류큐국의 사신이 동시에 일본이 조선을 치려고 한다는 것을 알려옴으로서 금방 의심을 풀었고, 곧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을 위해 기꺼이 군대를 보내주었다.
  17. [17] 덕분에 구글 등지에서 이 단어로 이미지 검색을 할 경우 일반인과 같은 급의 효과를 볼 수 있다.
  18. [18] 대개 음악방송 촬영장이나 팬미팅같이 스타와 팬이 만나는 곳에서 '역조공'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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