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감부

朝鮮統監府

Japanese Resident Genral of Korea

1905년 11월 2일 (통감 취임은 1906년 3월 2일) ~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1905년 을사조약 강제체결에 따라 한반도에 설치된 통감기관. 조선총독부의 전신기관으로 1910년 한일병합 때까지 존속했다가 그 해 한반도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메이지 일왕(덴노)의 명령하에 조선총독부로 격상하였다. 약칭 '통감부(統監府)'.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대한제국일본의 보호국으로 지정하면서 일제한양조선통감부를 설치하고 이를 계기로 한국의 정사(政事) 및 행정 등을 장악하며 그들이 직접 통치하도록 하였다.

조선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대한제국은 을사조약 조항에 따라 모든 통수권과 행정권, 사법권, 질서유지권 등을 조선통감부에 위임하고 모든 국정 절차는 반드시 통감부의 감독 및 검토하에 실행해야하는 부담감까지 앉게 되었으며 이 때부터 일본 경찰을 한반도에 파견시켜 그들이 한국의 질서유지를 관할하도록 하고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켜 일본 육해군 및 헌병이 한국의 국방 및 병무 책임을 맡도록 위임하였다.

처음에는 외교 및 국방 위주로 맡는다는 조항을 따랐으나 나중에 가서는 한국의 행정 및 내정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향후에 조선의 모든 국책이나 국사 등은 반드시 통감부의 감독 및 허가를 받도록 조항을 개정시키게 됨에 따라 사실상 한국의 모든 분야를 감독하고 관리하는 감시기관으로 바뀌었다.

초대 통감은 1906년 조약의 체결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가 역임하였으며 이를 통해 한국의 정치, 사법권은 물론 경제권까지 침탈하여 이득을 탈취하고 침략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야욕을 보이기도 하였다.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으며 마침내는 대한제국 군대도 강제 해산령을 발령함에 따라 국방 및 병무 체계도 모두 일본군 위주로 편성변경하였다.

이후에는 을사5적이자 친일파 이완용을 내각 총리에 앉히고 신(新)한일협약체결을 이끌어냈으며 차관직을 신설하여 일본인이 차관을 맡도록하는 차관정치, 고문정치를 실행하였다.

1909년에는 사법권 및 질서유지권도 박탈하여(정미7조약) 일본 경찰과 법정이 직책을 맡게 하였고 감옥소에서도 모든 간수를 일본인으로 교체하여 항일 및 반일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들을 수감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1909년 6월 소네 아라스케의 취임 이후 안중근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시키기도 하였으나 이미 대세는 기운 상황이었다.

1910년에는 3대 조선통감이자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취임하게 되었고 동년에 "한일합방"이 성립되면서(경술국치) 천황(일왕)의 명령하에 조선총독부로 격상하여 1916년 한양의 남산 청사에서 경복궁 주변 돌건물 청사로 이전하였다. 또한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으로 격상되었다.

대한민국 해군기가 조선통감부기와 유사해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의혹이 있다. 다만, 저런 좌측에 국기를 배치한 도안은, 영국이 원조이며, 영국함선들은 좌측 상단에, 유니언잭을 나머지부분은 파란색 혹은 붉은색을 배치했는데, 참고로, 파란색은 민간, 붉은색은 정부소유의 함선을 뜻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 관습이 영국의 식민지 였던 국가들(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그외 여러 식민지들)의 국기에 영향을 미쳤다. 전세계적으로 해군은 복식이나 관습면에서, 영국해군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는데, 대한민국 해군기도 그중 하나다. 즉, 상단의 통감부기와는 관련성이 거의 없다 할수 있다. 거기다 해군 자체가 상선사관 출신들이 창군을 주도하고 일본군 출신들은 죄다 해병대로 편제된지라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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