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C. 마셜


노벨평화상 수상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901년

1902년

1903년

1904년

1905년

장 앙리 뒤낭
프레데리크 파시

엘리 뒤코묑
샤를 알베르 고바

윌리엄 크리머

국제법학회

베르타 폰 주트너

1906년

1907년

1908년

1909년

1910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르네스토 모네타
루이 르노

클라스 아르놀드손
프레드리크 바예르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국제평화국

1911년

1912년

1913년

1914년

1915년

토비아스 아서르
알프레트 프리트

일라이휴 루트

앙리 라퐁텐

수상자 없음

1916년

1917년

1918년

1919년

1920년

수상자 없음

국제적십자사

수상자 없음

우드로 윌슨

레옹 부르주아

1921년

1922년

1923년

1924년

1925년

칼 브란팅
크리스티안 랑에

프리드쇼프 난센

수상자 없음

오스틴 체임벌린
찰스 도스

1926년

1927년

1928년

1929년

1930년

아리스티드 브리앙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페르디낭 뷔송
루트비히 크비데

수상자 없음

프랭크 켈로그

나탄 쇠데르블룸

1931년

1932년

1933년

1934년

1935년

제인 애덤스
니컬러스 머리 버틀러

수상자 없음

노먼 에인절

아서 헨더슨

카를 폰 오시에츠키

1936년

1937년

1938년

1939년

1940년

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

로버트 개스코인 세실

난센국제난민 사무국

수상자 없음

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1945년

수상자 없음

국제적십자사

코델 헐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1950년

에밀리 그린 볼치
존 모트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
영국 퀘이커 봉사협회

수상자 없음

보이드 오어

랠프 번치

1951년

1952년

1953년

1954년

1955년

레옹 주오

알베르트 슈바이처

조지 C. 마셜

국제연합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수상자 없음

1956년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수상자 없음

레스터 B. 피어슨

도미니크 조르주 피르

필립 노엘 베이커

앨버트 루툴리

1961년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다그 함마르셸드

라이너스 폴링

국제적십자사

마틴 루터 킹

국제연합아동기금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수상자 없음

르네 카생

국제 노동 기구

노먼 볼로그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빌리 브란트

수상자 없음

헨리 키신저
레득토 (수상 거부)

숀 맥브라이드
사토 에이사쿠

안드레이 사하로프

1976년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베티 윌리엄스
마레드 코리건

국제앰네스티

안와르 사다트
메나헴 베긴

마더 테레사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국제연합 난민고등판무관실

알바 뮈르달
알폰소 가르시아

레흐 바웬사

데즈먼드 투투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엘리 비젤

오스카 아리아스

유엔 평화 유지군

14대 달라이 라마

미하일 고르바초프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아웅산수지

리고베르타 멘추

넬슨 만델라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야세르 아라파트

조지프 로트블랫
퍼그워시 회의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카를루스 벨루
조제 하무스 오르타

지뢰금지국제운동
조디 윌리엄스

존 흄
데이비드 트림블

국경 없는 의사회

김대중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국제연합
코피 아난

지미 카터

시린 에바디

왕가리 마타이

국제원자력기구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그라민 은행
무함마드 유누스

앨 고어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

마르티 아흐티사리

버락 오바마

류샤오보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엘런 존슨 설리프
리마 보위
타우왁쿨 카르만

유럽 연합

화학무기 금지기구

말랄라 유사프자이
카일라시 사티아르티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후안 마누엘 산토스

핵무기 폐기 국제운동

드니 무퀘게
나디아 무라드

}}}

<span style="text-shadow: 0 0 10px #ffffff; color: #fede58;">Congressional Gold Medal
<span style="text-shadow: 0 0 10px #ffffff; color: #fede58;">의회 명예 황금 훈장</span>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마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우즈 2세
대위 에드워드 맥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톤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컵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즈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

1835년

1846,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의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던컨 잉그함

1858년

1863년

1864년

1866년

1867년

프레데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우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바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자레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셉 프란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콤

중위 데이빗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사무엘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대령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즈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들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스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코한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란시스 퀸

윌리엄 시노트

1942년

1945년

1946년

롤랜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멤버들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미합중국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들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마스 안소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미합중국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중장 아이라 C.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호레이쇼 험프리

1979년

1980년

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

1983년

프레드 워링

조 루이스

루이스 라머

레오 라이언

대니 토마스

1984년

1985년

해리 S. 트루먼

레이디 버드 존슨

엘리 비젤

로이 윌킨스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

1987년

1988년

나탄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

에런 코플런드

메리 래스커

제시 오언스

1988년

1990년

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

로렌스 록펠러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콜린 파월

1994년

1996년

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넬슨 만델라

리틀록 9인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테오도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먼로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 족 코드 토커

2002년

2003년

대장 휴 쉘튼

토니 블레어

재키 로빈슨

도로시 하이트 박사

조셉 디레인 [br[ 해리 & 엘리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

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

14대 달라이 라마

바이런 넬슨

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

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

아웅산수지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에드워드 브룩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

2010년

여성 공군 서비스 조종사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

무함마드 유누스

100연대 보병 대대
442 연대 전투단
군사 정보국

2011년

2012년

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대

2001년 9월 11일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으로 사망한 남녀들

라울 발렌베리

애디 매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롤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들

미국의 공군 에이스들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들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

2015년

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들

OSS

2017년

밥 돌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47 0%, #17177A 20%, #17177A 80%, #000047)"


미합중국 국무부장관}}}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7F7F7 0%, #FFFFFF 20%, #FFFFFF 80%, #F7F7F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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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토머스 제퍼슨

에드먼드 제닝스 랜돌프

티모시 피커링

존 마셜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임스 매디슨

로버트 스미스

제임스 먼로

존 퀸시 애덤스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헨리 클레이

마틴 밴 뷰런

에드워드 리빙스턴

루이스 맥래인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존 포시스

대니얼 웹스터

에이벌 P. 업셔

존 C. 칼훈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제임스 뷰캐넌

존 M. 클레이턴

대니얼 웹스터

에드워드 에버렛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윌리엄 L. 마시

루이스 캐스

제레미아 S. 블랙

윌리엄 H. 수어드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엘리후 B. 워시번

해밀턴 피시

윌리엄 M. 에버트

제임스 G. 블레인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프레드릭 T. 프레링후이슨

토머스 F. 바야드

제임스 G. 블레인

존 W. 포스터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월터 Q. 그레섬

리차드 올니

존 셔먼

윌리엄 R. 데이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존 헤이

엘리후 루트

로버트 베이컨

필랜더 C. 녹스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윌리엄 J. 브라이언

로버트 랜싱

베인브리지 콜비

찰스 에번스 휴스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프랭크 B. 켈로그

헨리 L. 스팀슨

코델 헐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 Jr.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제임스 F. 번즈

조지 C. 마셜

딘 애치슨

존 포스터 덜레스

제53대

제54대

제55대

제56대

크리스찬 허터

딘 러스크

윌리엄 P. 로저스

헨리 키신저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사이러스 밴스

에드먼드 머스키

알렉산더 헤이그

조지 프랫 슐츠

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제임스 베이커

로렌스 이글버거

워런 크리스토퍼

매들린 올브라이트

제65대

제66대

제67대

제68대

콜린 파월

콘돌리자 라이스

힐러리 클린턴

존 케리

제69대

제70대

제71대

제72대

렉스 틸러슨

마이크 폼페이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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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국방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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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임스 포레스털

루이스 A. 존슨

조지 C. 마셜

로버트 A. 러벳

제5대

제6대

제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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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윌슨

닐 매클로리

토머스 게이츠

로버트 맥나마라

제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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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빈 레어드

엘리엇 리처드슨

제임스 슐레진저

제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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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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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럼즈펠드

해럴드 브라운

캐스퍼 와인버거

프랭크 칼루치

제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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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 체니

레슬리 애스핀

윌리엄 페리

윌리엄 코언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도널드 럼즈펠드

로버트 게이츠

리언 패네타

척 헤이글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애슈턴 카터

제임스 매티스

← 역대 미합중국 전쟁부장관(육군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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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Time Person of the Year 1943

1942 - 이오시프 스탈린

조지 마셜

1944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1947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Time Person of the Year 1947

1946 - 제임스 번스[1]

조지 마셜

1948 - 해리 S. 트루먼

이름

George Catlett Marshall Jr.,
(조지 캐틀렛 마셜)

출생

1880년 12월 3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사망

1959년 10월 31일, 미국 워싱턴 D.C.

복무

미합중국 육군(1902–1959)

최종 계급

육군 원수

주요 이력

미국 육군참모총장

주요 참전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주요 서훈

노벨평화상

"승리의 설계자(True architect of Victory)" - 윈스턴 처칠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제1차 세계대전 이후
2.3. 제2차 세계대전
2.4. 군인으로서 업적
2.5. 정치가
3. 개인사 및 기타

1. 개요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뛰어난 대전략가[2]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전후에는 마셜 플랜(1947년~1961년)을 수립, 실행하여 유럽 부흥에 큰 공을 세웠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미 육군의 최고책임자였다. 일선 전쟁에서 실제 전투를 수행한 군사령관은 아이젠하워, 맥아더 장군 등이었지만, 이러한 작전들을 기획, 입안, 지시한 이는 조지 마셜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역사상 유래 없는 전쟁에서 미군 전체의 편제, 보급 등을 비롯한 미군 시스템의 전반적인 기획과 관리를 담당했다.[3] 또 합동참모부 안에서 성적이 지랄맞기로 유명한 어니스트 킹 해군참모총장의 협력을 이끌어내거나, 전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의회로부터 예산 동의안을 얻어내는데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처럼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서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참모라는 역할의 특성상 그의 업적은 좀처럼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경우 처음부터 마셜이 이 작전을 구상하고 기획한 후 대통령 등을 설득하여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고 작전이 실행된 후에도 그가 최고책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마셜의 이름은 그 긴 나무위키의 해당 문서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곽재우, 권율 등 장수들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 조정에서 전쟁 전반을 관리한 류성룡의 업적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과 유사하다. 사실 육군 제복군인의 최선임자로서 조지 마셜의 역할은 류성룡의 그것보다 더욱 컸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아이젠하워에게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지휘를 맡기면서 한 말에서 마셜에 대한 루스벨트의 평가의 한 단면이 잘 드러난다.

“당신과 나 정도라면 남북 전쟁의 마지막 해에 육군참모총장이 누구였는지 알고 있지만,[4]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소. 그랜트 같은 유명한 장군은 알지만, 누가 최고 책임자였는지는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나는 50년 후에 조지 마셜이 누구인지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갈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소.”

루스벨트의 예측대로 아이젠하워는 모든 국민이 다 아는 영웅이 되어 나중에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루스벨트는 조지 마셜의 역할과 위대함이 일반 국민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끝내 그를 유명해질 수 있는 자리인 지휘관으로 내보내지 않았는데, 그것은 일선 지휘관으로 보내기엔 마셜이 너무 유능했기 때문이었다. 루스벨트는 마셜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실로 독일에서 발전된 근대적 개념의 장군참모와 그 정점에 있는 참모총장로써 첫손으로 꼽힐 만한 가장 모범적이고 위대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독일 국방군은 비합리적인 조직 체계로 인하여 그 장점을 잘 살리지 못했다. 잘살렸다고 하더라도 장성들 대다수가 전술적 능력에 비해서 대국적 안목이 떨어지는 편이라 한계가 있었겠지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조차 데꿀멍해야 할 정도의 먼치킨. 조용한 인물이었던 오마 브래들리, 아이젠하워조차 마셜에 비한다면 연예인 정도의 진성 히든캐릭터인 인물. 이는 미해군이나 공군도 마찬가지인데 해군참모총장으로서 해군을 총지휘했던 어니스트 킹체스터 니미츠레이먼드 스프루언스와 같은 휘하 일선 지휘관들에 묻혀버렸고[5] 공군참모총장(당시는 육군항공대 사령관)으로 공군을 총지휘했던 헨리 아놀드커티스 르메이 등의 야전사령관에 묻혔다. 합참의장 윌리엄 리히 제독까지 가면 갓 입문한 밀덕들은 이름을 모르는 경우도 대다수.

마셜 제도와는 상관이 없다. 이 제도는 영국 탐험가 존 마셜의 이름을 딴 케이스.

2. 생애

2.1. 초기 이력

펜실베이니아주 유니온 타운시에서 태어났다. 1901년버지니아군사대학을 졸업하고 임관했으며 필리핀을 거쳐서 1917년에는 소령이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1보병사단의 작전 및 교련 담당 참모로서 프랑스에 파견되어 1918년에는 유럽 파견군 최고사령부에 근무하며 작전계획 담당 참모로 활약했고, 이후 1919년에는 대령[6]으로 승진, 유럽 파견군 총사령관 존 퍼싱 대장[7]부관이 되었다.

2.2.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정규 소령으로 복귀했다.[8] 전간기[9]에는 육군성에서 근무했으며, 주로 교련 프로그램의 입안에 종사했다.[10] 또한 국방대학의 교관으로 복무할 때는 3년동안 국민당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어 1차 국공내전을 직접체험하기도 했다.[11] 1923년에는 중령, 1933년에는 대령이 되었고 참모총장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라이벌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의 후잡질 때문에 좌천당했다. 이후 1935년 맥아더가 물러나기가 무섭게 1936년준장으로 승진하면서 30여 년 만에 을 달았다.

2.3.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39년에는 소장이 되었고, 9월 1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제15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지명됐다. 참모총장이 되며 임시 대장으로 승진우왕 굳, 유럽 반격계획(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입안, 지도했고, 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며 연합군이 전쟁에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12]. 1943년에는,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에도 선정되어 명성의 절정을 달렸으며, 1944년 12월 드디어 원수가 되었다. 2차대전 시기 육군 원수 중에서 웨스트포인트 출신이 아닌 인물은 마셜이 유일하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남서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나 태평양 함대 사령관인 체스터 니미츠 원수와는 달리, 소련이 일본을 치게 해야한다는 주장을 펴서 결국 소련군을 대일 전선에 끌어들였다. 1945년 8월 9일부로 말이다[13]. 전쟁이 끝난 후, 육군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 났다.(육군 원수).

1945년 12월에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중국 전권특사로 임명되어 국공내전에 개입하던 미국의 외교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장제스는 글러먹은 놈이니까 괜히 마오쩌둥 어그로 끌면서 우리 물자 소모할 필요가 없습니다. 버리시죠."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리고 4년 후, 마셜의 예언은 사실이 되었다.

다만 최근 중일전쟁장제스의 재평가, 그리고 국공내전사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저러한 평가는 현재 달라졌다. 일단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 최대 내부의 적이었던 조지프 스틸웰을 임명한 것이 바로 마셜이고, 국공내전 초기 공산당을 궤멸시킬 수 있었던 국민당의 공세를 중단시킨 것도 마셜이기 때문. 그래서 일각에선 중국의 정치상황에 간섭을 일삼은 것이 마셜의 유일한 실책이라 평가하기도 한다.[14] 특히 중국이 미국의 대항마로 빠르게 떠오르고 있는 21세기 현재에는 미국으로선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다.[15]

2.4. 군인으로서 업적

1939년 2차대전 발발 당시 17만 5000명의 조악한 숫자에 소총이 없어 모형총으로 훈련 중이던 군기 바닥의 군대를 단 6년 만에 830만이라는 잘 훈련된 군대와 12만 9천여 대의 항공기, 4천여척의 함정, 2천5백만 여대의 차량, 1억 2천만여정의 소총,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핵무기 2발을 보유. 전세계 6만 마일에 걸쳐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병참 밎 보급 시스템[16]을 구축한 희대의 먼치킨. 이 결과가 미 의회의 엄청난 반대를 이겨가며 그가 만들어낸 결과들이다. 스피치 100 오오. 이런걸 해낸 미국의 국력부터가 먼치킨이다.

아이젠하워, 맥아더, 브래들리, 패튼, 몽고메리 등의 연합군 명장들이 거두는 승리에는 마셜이 구축한 전략과 병참/보급 시스템이 뒷받침이 되었으며[17] 그가 쌓아온 시스템은 현대의 미군에게 아직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또한 아이젠하워, 브래들리를 발굴, 패튼이 사고쳐도 계속 돌격대장(?)질 할 수 있게 한 양반. 지휘 체계 일원화하는등 수없이 많은 업적을 쌓은 인물임에도 직접 전장에서 싸운 이력이 없어 정작 졸병대장이라 불린 브래들리한테도 밀리는 겸손함을 보였다. 비슷한 포지션으로 해군의 윌리엄 D. 리히, 어니스트 J. 킹, 육군항공대[18]의 헨리 아놀드가 있는데 마셜을 포함한 이 4인방은 2차대전기 합동참모회의를 주관하고 루스벨트를 보좌하며 실질적으로 전쟁을 주도했다. 직접적인 작전 지휘를 담당했던 킹 제독과 아놀드 장군, 최고 사령부 참모총장[19]으로 각 군대의 조율과 중재를 맡았던 리히 제독과 함께 병참, 군비 증강, 인사를 맡았다.

그의 업적을 찬찬히 뜯어보면 군비증강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의회를 설득하여 기하급수적인 군비증강과 전시경제체제로의 전환, 총력전 체제로 순식간에 전환했다.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2년까지 총력전체제로 전환에 성공했는데 정작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독일은 43년에서야 총력전체제로 전환했으니... 인사 부분을 보면 아이젠하워를 비롯하여 패튼, 브래들리, 공군원수에 오르는 헨리 아놀드가 있고, 리히 제독을 최고사령부 참모총장으로 추천한 것 역시 그의 업적.

2.5. 정치가

1947년, 국무장관으로 취임. 이 해 6월 5일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강연에서 나중에 「마셜 플랜」으로 알려지는 유럽 부흥계획을 발표했으며(11월 실행), 대 중국정책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49년에는 국무장관에서 물러나서 미국 적십자사 총재로 취임했으나 이듬해에는 트루먼의 요청으로 다시 국방장관이 되었다. 문민통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에서는 군인 출신의 경우는 예비역으로 10년 이상 되어야 국방장관으로 임명이 가능하지만, 이러한 사례에서 非 문민 출신(특히 장성급 장교를 기준으로 보면)은 2017년에 제임스 매티스가 국방장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는 오직 마셜이 유일한 특례로 임명되었다. 다만 원수 계급이 종신직이라는 점과 당시 해군과 공군이 예산과 항공전력, 핵무기 등의 문제로 으르렁대던 시기[20]라 이들을 통솔할 리더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특례가 인정된 것이었다. 이때 국무장관이 바로 애치슨 라인을 선포한 딘 애치슨이었다. 당연히 6.25 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 행정부는 국내외에서 호된 비판을 받았고, 트루먼 대통령은 마셜을 국방장관에 기용하는 것으로 이에 대응했다. 그러나 다음 해 건강상의 이유로 국무장관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3. 개인사 및 기타

군인으로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성격도 강직해서 다른 각료들에게도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다.[21] 오죽하면 "조지라고 불러도 되겠소?"라고 묻는 트루먼 대통령한테 "아닙니다, 각하. 마셜 장군으로 불러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전해져 올 정도...

사실 이 사람도 치명적인 실수를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진주만의 참극을 연출한 공로가 그것이다. 사실 마셜 장군만의 잘못은 아니었지만...[22]

같은 합참의 구성원이자 해군참모총장이던 어니스트 킹 제독과는 그야말로 견원지간이었다. 이는 유럽 및 대서양에 중점을 두던 마셜과 태평양에 중점을 두었던 킹의 성향 차이에 기인한 것. 하지만 마셜이 원래 과묵한 인물인지라 직접적으로 말싸움한 적은 드물다. 근데 사실 킹 제독과 사이가 좋았던 인물이 몇 없어서(...)[23]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4형제 중 홀로 살아남은(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제임스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미션을 최종 승인하는 육군참모총장으로 나온다. 배우는 하브 프레스넬.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소재한 NASA의 조지 C. 마셜 우주센터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이곳은 관제센터인 휴스턴 LBJ 우주센터와 발사장인 케이프 커내버럴 케네디 우주센터만큼은 아니지만 로켓 제작과 테스트를 실시하는 곳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굉장한 인지도를 갖고 있으며 지역의 쏠쏠한 관광자원으로도 기능하고 있다.


  1. [1] 트루먼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 소련 강경파.
  2. [2] 마셜 원수가 구상한 전략들은 졔2차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냉전에서도 미국이 승리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3. [3] 아이젠하워, 맥아더, 패튼, 브래들리 장군 등의 공적은 마셜이 보내주는 잘 훈련된 병력, 충분한 장비, 풍부한 물자 등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들이었다.
  4. [4] 남북 전쟁의 마지막 해의 육군참모총장(육군총사령관)은 율리시스 그랜트였다, 루즈벨트가 잘못 알고 있었던 듯, 북군을 지휘했던 지금의 국방장관에 해당되는 전쟁장관은 에드윈 스탠튼이었다. 대남 강경파였던 그를 링컨의 후임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 무리하게 잘랐다가 탄핵소추의 위기에 몰린다...
  5. [5] 사실 해군에서는 마셜 장군보다 더한 사람이 한 사람 있다. 어니스트 킹의 이름 때문에 묻혀버린, 어니스트 킹의 상관에 해당하는 최고사령관 참모장 윌리엄 리히.
  6. [6] 직위 진급
  7. [7] M26 중전차에 이름이 붙은 그 사람 맞다. 조지 S. 패튼 장군의 은사이기도 하다.
  8. [8] 전쟁 시기에는 전시 임관도 많았고 장교의 수도 부족했기에 승진이 빨랐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방대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기에 군축을 단행하게 되는데 많은 장교들을 예편시키거나 전쟁 이전의 계급으로 강등시켜서 수요를 맞추는 것이 보통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계급 특진 참고.
  9. [9] 프랑스의 포슈 장군이 말한 20년간의 평화. 1차 세계대전 종전일부터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날까지(1918년~1939년)를 가리킨다. 또 다른 말로는 해군 휴일.
  10. [10] 이 때의 경험이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군을 빠른 시간안에 재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1. [11] 이때 국민당 정권의 부패상을 생생하게 목격한 마셜은 훗날 2차 국공내전을 맞이한 미국 정부에 중국 국민당을 버리라고 주문하게 된다. 결국 미국은 국민당한테 등을 돌렸고, 장제스대만으로 도망가게 된다. 대체역사물 떡밥으로 자주 거론되는 "궁지에 몰린 공산 잔당의 만주를 먹지 말라"라고 조언한 것도 마셜. 하지만 장제스는 듣지 않았다
  12. [12] 아이젠하워는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연합군 전체를 지휘하는 자리에 있었다. 스포츠로 바꿔보면 감독(아이젠하워)과 단장(마셜) 같은 사이.
  13. [13] 이때 일본에서는 "소련한테 전쟁 물자 좀 얻어봅시다. 이왕이면 내분도 일으켜보고. 안되면 소련한테 평화 회담을 주선해달라고 합시다"라고 제안했다. 물론 외교 담당자들의 반응은 "나치하고 편먹었던 우리가 소련한테 물자를 받는다고요? 거기에다 미국하고 소련을 이간질 시키겠다고? 머리에 총 맞았소?"총 안 맞아도 이미 정신이 나간 상태였지
  14. [14] 사실 당대의 미국 주요 인물들중, 아시아의 내부 사정에 해박했던 것은 정말 극소수였고 이것은 그후 미국의 대 중국정책에 수십년 동안 악영향을 끼쳤다. 그나마 맥아더, 센놀트, 스틸웰 등이 있었으나 이들의 지식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했던게 절대 다수였다. 중국 전문가들은 식견은 있었는데 마오쩌둥 언플에 죄다 낚여 버렸고 안 낚인 케이스는 앨버트 웨드마이어패트릭 헐리 정도. 스틸웰의 경우엔 개인적으로 톈진의 중국 주재 무관 경험 덕택에 중국어에 능통하고 과거 중국 파병근무를 오래했다는 점이 있었으나 지식이 어디까지나 헬게이트인 20년대 이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혐오감이 컸으며 장제스의 연합군 담당 참모장겸 미군의 BIC(버마,인도,중국)전구 사령관으로서 그는 그가 지닌 직위에 맞는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
  15. [15] 장제스가 권력을 잡았어도 마찬가지 아니었겠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공산당이라는 강력한 독재 집단이 존재하는 공산주의 체제 국가와 어쨌거나 개방이 없을 수 없는 자본주의 체제 국가와는 가능한 대화 수준 자체가 다르기 때문.
  16. [16] 나치독일이 독소전쟁기간 내내 광활한 러시아 영토로 인해 병참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것과는 극명하게 비교된다. 미국은 우월한 병참능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독일과 태평양의 일본을 상대로 동시에 전 세계의 곳곳에서 양면전쟁을 수행할수있었다. 히틀러가 꺼려했던 양면전쟁을 미국은 거뜬히 해냈다.
  17. [17] 그는 직접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 하려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태평양 전쟁이 난 상황에서 이 모든 상황을 조율 할 수 있는 전략적 안목을 가진 장군은 마셜 밖에 없다며 지휘를 말리기도 했다. 오오
  18. [18] 당시 이미 육군에서 반독립하여 실질적인 공군이었다.
  19. [19] 최고 사령부는 합참의 전신. 리히 제독은 지금으로치면 합참의장.
  20. [20] 해군 측의 인물이었던 제임스 포레스탈 초대 국방장관이 자살을 했고, 해군청장과 해군참모총장 휘하 수많은 제독들이 사표를 내거나 좌천, 불명예 제대를 각오하며 국방부에 항명하였다. 후세는 이를 제독들의 반란이라 기록하고 있다.
  21. [21] 서양 문화권에서 상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사적인 친분을 의미한다.
  22. [22] 사실 당시 어니스트 킹 제독과 이승만 (진주만 공습 몇달 전에 《일본 내막기 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써서 일본의 침공을 예언했으나 미국인들에게 비웃음당했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후 이 예언이 재평가되면서 이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을 제외하고는 미국의 어느 누구도 일본따위가 미국을 공격하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은 고립주의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영국등에 밀리는 2류 국가처럼 인식되었는데, 그렇다 해도 일본과는 넘사벽의 간극이 있었다. 또한 미국을 방문했던 이들로 인해 실제 미국의 경제력은 영국, 독일, 프랑스등 구 열강들에 비해서도 월등하다는 결론을 낸 상태였음에도 미국을 공격했다. 당장 연합함대 사령장관(즉 해군 총사령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마저도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던 인물이었으니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3. [23] 또다른 합참의 구성원이자 육군항공대사령관(공군참모총장)이었던 헨리 아놀드 장군은 킹 제독과 폭격전략으로 담판을 짓다가 뒷목을 잡았다(...) 또 킹 제독은 수하였던 태평양 함대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과도 의견이 상당히 갈려서 많이 싸운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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