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C. 마셜

조지 C. 마셜의 주요 수훈과 수상

Congressional Gold Medal
의회 명예 황금 훈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마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우즈 2세
대위 에드워드 맥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톤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컵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즈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

1835년

1846,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의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던컨 잉그함

1858년

1863년

1864년

1866년

1867년

프레데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우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바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자레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셉 프란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콤

중위 데이빗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사무엘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대령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즈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들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스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코한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란시스 퀸

윌리엄 시노트

1942년

1945년

1946년

롤랜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멤버들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미합중국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들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마스 안소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미합중국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중장 아이라 C.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호레이쇼 험프리

1979년

1980년

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

1983년

프레드 워링

조 루이스

루이스 라머

레오 라이언

대니 토마스

1984년

1985년

해리 S. 트루먼

레이디 버드 존슨

엘리 비젤

로이 윌킨스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

1987년

1988년

나탄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

에런 코플런드

메리 래스커

제시 오언스

1988년

1990년

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

로렌스 록펠러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콜린 파월

1994년

1996년

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넬슨 만델라

리틀록 9인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테오도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먼로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 족 코드 토커

2002년

2003년

대장 휴 쉘튼

토니 블레어

재키 로빈슨

도로시 하이트 박사

조셉 디레인 [br[ 해리 & 엘리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

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

14대 달라이 라마

바이런 넬슨

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

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

아웅산수지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에드워드 브룩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

2010년

여성 공군 서비스 조종사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

무함마드 유누스

100연대 보병 대대
442 연대 전투단
군사 정보국

2011년

2012년

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대

2001년 9월 11일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으로 사망한 남녀들

라울 발렌베리

애디 매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롤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들

미국의 공군 에이스들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들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

2015년

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들

OSS

2017년

밥 돌

}}}


노벨평화상 수상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901년

1902년

1903년

1904년

1905년

장 앙리 뒤낭
프레데리크 파시

엘리 뒤코묑
샤를 알베르 고바

윌리엄 크리머

국제법학회

베르타 폰 주트너

1906년

1907년

1908년

1909년

1910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르네스토 모네타
루이 르노

클라스 아르놀드손
프레드리크 바예르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국제평화국

1911년

1912년

1913년

1914년

1915년

토비아스 아서르
알프레트 프리트

일라이휴 루트

앙리 라퐁텐

수상자 없음

1916년

1917년

1918년

1919년

1920년

수상자 없음

국제적십자사

수상자 없음

우드로 윌슨

레옹 부르주아

1921년

1922년

1923년

1924년

1925년

칼 브란팅
크리스티안 랑에

프리드쇼프 난센

수상자 없음

오스틴 체임벌린
찰스 도스

1926년

1927년

1928년

1929년

1930년

아리스티드 브리앙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페르디낭 뷔송
루트비히 크비데

수상자 없음

프랭크 켈로그

나탄 쇠데르블룸

1931년

1932년

1933년

1934년

1935년

제인 애덤스
니컬러스 머리 버틀러

수상자 없음

노먼 에인절

아서 헨더슨

카를 폰 오시에츠키

1936년

1937년

1938년

1939년

1940년

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

로버트 개스코인 세실

난센국제난민 사무국

수상자 없음

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1945년

수상자 없음

국제적십자사

코델 헐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1950년

에밀리 그린 볼치
존 모트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
영국 퀘이커 봉사협회

수상자 없음

보이드 오어

랠프 번치

1951년

1952년

1953년

1954년

1955년

레옹 주오

알베르트 슈바이처

조지 C. 마셜

국제연합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수상자 없음

1956년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수상자 없음

레스터 B. 피어슨

도미니크 조르주 피르

필립 노엘 베이커

앨버트 루툴리

1961년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다그 함마르셸드

라이너스 폴링

국제적십자사

마틴 루터 킹

국제연합아동기금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수상자 없음

르네 카생

국제 노동 기구

노먼 볼로그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빌리 브란트

수상자 없음

헨리 키신저
레득토 (수상 거부)

숀 맥브라이드
사토 에이사쿠

안드레이 사하로프

1976년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베티 윌리엄스
마레드 코리건

국제앰네스티

안와르 사다트
메나헴 베긴

마더 테레사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국제연합 난민고등판무관실

알바 뮈르달
알폰소 가르시아

레흐 바웬사

데즈먼드 투투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엘리 비젤

오스카 아리아스

유엔 평화 유지군

14대 달라이 라마

미하일 고르바초프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아웅산수지

리고베르타 멘추

넬슨 만델라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야세르 아라파트

조지프 로트블랫
퍼그워시 회의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카를루스 벨루
조제 하무스 오르타

지뢰금지국제운동
조디 윌리엄스

존 흄
데이비드 트림블

국경 없는 의사회

김대중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국제연합
코피 아난

지미 카터

시린 에바디

왕가리 마타이

국제원자력기구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그라민 은행
무함마드 유누스

앨 고어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

마르티 아흐티사리

버락 오바마

류샤오보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엘런 존슨 설리프
리마 보위
타우왁쿨 카르만

유럽 연합

화학무기 금지기구

말랄라 유사프자이
카일라시 사티아르티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후안 마누엘 산토스

핵무기 폐기 국제운동

드니 무퀘게
나디아 무라드

}}}

조지 C. 마셜의 주요 직책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47 0%, #17177A 20%, #17177A 80%, #000047)"


미합중국 국무부장관}}}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7F7F7 0%, #FFFFFF 20%, #FFFFFF 80%, #F7F7F7)"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border:0px solid; margin:-11px; margin-top:-8px; margin-bottom:-6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토머스 제퍼슨

에드먼드 제닝스 랜돌프

티모시 피커링

존 마셜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임스 매디슨

로버트 스미스

제임스 먼로

존 퀸시 애덤스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헨리 클레이

마틴 밴 뷰런

에드워드 리빙스턴

루이스 맥래인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존 포시스

대니얼 웹스터

에이벌 P. 업셔

존 C. 칼훈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제임스 뷰캐넌

존 M. 클레이턴

대니얼 웹스터

에드워드 에버렛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윌리엄 L. 마시

루이스 캐스

제레미아 S. 블랙

윌리엄 H. 수어드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엘리후 B. 워시번

해밀턴 피시

윌리엄 M. 에버트

제임스 G. 블레인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프레드릭 T. 프레링후이슨

토머스 F. 바야드

제임스 G. 블레인

존 W. 포스터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월터 Q. 그레섬

리차드 올니

존 셔먼

윌리엄 R. 데이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존 헤이

엘리후 루트

로버트 베이컨

필랜더 C. 녹스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윌리엄 J. 브라이언

로버트 랜싱

베인브리지 콜비

찰스 에번스 휴스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프랭크 B. 켈로그

헨리 L. 스팀슨

코델 헐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 Jr.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제임스 F. 번즈

조지 C. 마셜

딘 애치슨

존 포스터 덜레스

제53대

제54대

제55대

제56대

크리스찬 허터

딘 러스크

윌리엄 P. 로저스

헨리 키신저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사이러스 밴스

에드먼드 머스키

알렉산더 헤이그

조지 프랫 슐츠

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제임스 베이커

로렌스 이글버거

워런 크리스토퍼

매들린 올브라이트

제65대

제66대

제67대

제68대

콜린 파월

콘돌리자 라이스

힐러리 클린턴

존 케리

제69대

제70대

제71대

제72대

렉스 틸러슨

마이크 폼페이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35470 0%, #1A7299 30%, #1A7299 70%, #135470)"


미합중국 국방부장관}}}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7F7F7 0%, #FFFFFF 20%, #FFFFFF 80%, #F7F7F7)"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border:0px solid; margin:-11px; margin-top:-8px; margin-bottom:-6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임스 포레스털

루이스 A. 존슨

조지 C. 마셜

로버트 A. 러벳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찰스 윌슨

닐 매클로리

토머스 게이츠

로버트 맥나마라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클라크 클리퍼드

멜빈 레어드

엘리엇 리처드슨

제임스 슐레진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도널드 럼즈펠드

해럴드 브라운

캐스퍼 와인버거

프랭크 칼루치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딕 체니

레슬리 애스핀

윌리엄 페리

윌리엄 코언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도널드 럼즈펠드

로버트 게이츠

리언 패네타

척 헤이글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애슈턴 카터

제임스 매티스

← 역대 미합중국 전쟁부장관(육군장관)

}}} }}}}}}||

3대 미합중국 국방장관
50대 미합중국 국무장관
George Catlett Marshall Jr
조지 캐틀렛 마셜

{{{#!wiki style="margin: -6px -10px"

}}}

이름

George Catlett Marshall Jr.
(조지 캐틀렛 마셜)

출생

1880년 12월 3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사망

1959년 10월 16일, 미국 워싱턴 D.C.

복무

미합중국 육군(1902–1951)

최종 계급

육군 원수

주요 이력

미국 육군참모총장(1939~1945)

미국 국무부장관(1947~1949)

미국 국방부장관(1950~1951)

주요 참전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제1차 세계대전 이후
2.3. 제2차 세계대전
2.4. 전후
2.5. 군인으로서 업적
2.6. 정치가
3. 개인사 및 기타

1. 개요

"승리의 설계자(True architect of Victory)" - 윈스턴 처칠

미국의 군인, 정치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하였으며 이후 미국의 국무장관, 국방장관을 지냈으며[1] 그가 구상한 전략들과 고안, 입안시킨 여러 시스템과 정책들은 냉전을 거쳐 지금까지 미국의 군사, 정치, 외교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현대 미국의 군사체제는 마셜이 2차대전 당시 구축한 합동참모본부[2]와 그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통합군사령부 체제를 기본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1947년 국무장관 재직시절 마셜플랜을 통해 현대 미국의 개입주의 외교의 시작을 알렸다. 이 공로로 마셜플랜의 수혜자였던 서유럽은 마셜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했다.

2차대전을 빛낸 명장들 중 한명이지만, 야전에서 직접 지휘를 맡는 역할이 아니어서 업적에 비해서는 명성이 높지 못한 인물이다. 심지어 마셜 플랜의 영향으로 군인이 아니라 정치가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야전 지휘관이었던 맥아더, 아이젠하워, 패튼, 브래들리 등과 달리 철저하게 참모로서 활동했고 마셜의 개인적인 성격 역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인물이었기에 그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잘 논의되지는 않는 인물이다.[3] 한국의 경우 다른 지휘관들에 비해 번역된 출판물이 상당히 적고 연구도 잘 이뤄지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패튼과 같이 개성이 강하지도 않았고 군인으로서 패착도 없었고[4] 심지어 사생활마저 흠결이 없고 인품마저 훌륭했다. 그나마 브래들리 원수는 M2 브래들리에 이름이 붙어서 알려지기라도 했지만 마셜 원수는 그런 것도 없다.[5]

그러나 그의 업적은 일선 지휘관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고 그는 그와 비슷한 일을 수행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미군은 물론이고 20세기 이후 현대 전쟁사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꼽히며 독일에서 발전된 근대적 개념의 장군참모와 그 정점에 있는 참모총장으로써 첫손으로 꼽힐 만한 가장 모범적이고 위대한 예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의 전쟁은 그전의 전쟁들과 매우 달라져있었다. 근대적 관료조직, 통신수단의 발달, 철도와 내연기관 등 교통수단의 발달로 전쟁은 점차 거대해졌고 그 전의 여러 전쟁과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펼쳐지며 전선은 전지구적으로 확장되었다. 군의 지휘체계는 지휘관 한 사람의 결정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기업, 의회와 같이 토의와 합의에 의해서 이뤄지게 되었다. 그 속에서 마셜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일선에서의 무용이 아니라 정치인들, 특히 각 국가의 원수들과 씨름하며 태평양과 유럽에 걸친 전선들을 관리하는 육군 최고 책임자로서의 역할이었고 그는 그것을 휼륭히 수행하였다. 마셜에 비해 전술적 능력을 입증한 명장은 여럿 있었지만[6] 전략적 식견과 정치외교적 능력을 모두 갖춘 인물은 오직 그 하나였다.

루스벨트의 마셜에 대한 평가에서 잘 드러난다.

"마셜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커져갔다. 그가 지휘관들 뿐만 아니라 정치인과 타국의 국가 원수들과 일하는데 달인이자 최고 권위자였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마셜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였고 마셜이 간절히 지휘관으로 복무하기를 원함에도 그를 야전지휘관으로 보내지 않았다.

사실 루스벨트는 마셜이 누구보다도 유럽전선의 지휘관이 되길 바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의 위대함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및 유럽전선의 지휘관을 마셜로 임명하겠다고 아이젠하워와 얘기하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과 나 정도라면 남북 전쟁의 마지막 해에 육군참모총장이 누구였는지 알고 있지만,[7]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소. 그랜트 같은 유명한 장군은 알지만, 누가 최고 책임자였는지는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나는 50년 후에 조지 마셜이 누구인지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갈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소. 내가 이러한 이유에서 마셜을 큰 직책(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하려 하오. 나는 마셜 장군이 위대한 군인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자리 매김할 만한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하오.”

마셜의 첫 참모총장 임기는 43년 9월 1일에 끝이 났고 아이젠하워와 자리를 바꿔 유럽전선 지휘관이 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리히 제독을 중심으로 킹 제독, 아놀드 원수까지 최고사령부 인원들이 다 루스벨트를 뜯어말렸고 루스벨트도 고민 끝에 마셜을 참모총장으로 유임시키게 된다. 루스벨트는 마셜이 유럽전선의 지휘관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마셜의 유임 후에도 마셜을 지휘관으로, 아이젠하워를 참모총장으로 앉히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루스벨트는 아이젠하워가 마셜을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테헤란 회담을 마치고 12월 4일 카이로로 돌아온 루스벨트와 마셜은 점심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루스벨트는 마셜이 자신에게 사령관직을 요구하기를 바라면서도 그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기를 바랬고 그는 자신의 의도를 완곡해서 얘기하였다. 그 의도를 파악한 마셜은 정중하면서도 분명하게 얘기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각하께서 고민하셔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저의 입장이나 의사가 아니라 국가의 이익입니다.

루스벨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마셜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당신이 워싱턴 밖으로 나간다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소."("I didn't feel I could sleep at ease if you were out of Washington.")[8]

이후 루스벨트는 아이젠하워를 지휘관으로 확정한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펜실베이니아주 유니온 타운시에서 태어났다. 1901년버지니아군사대학을 졸업하고 임관했으며 필리핀을 거쳐서 1917년에는 소령이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1보병사단의 작전 및 교련 담당 참모로서 프랑스에 파견되어 1918년에는 유럽 파견군 최고사령부에 근무하며 작전계획 담당 참모로 활약했고, 이후 1919년에는 대령[9]으로 승진, 유럽 파견군 총사령관 존 퍼싱 대장[10]부관이 되었다.

2.2.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정규 소령으로 복귀했다.[11] 전간기[12]에는 육군성에서 근무했으며, 주로 교련 프로그램의 입안에 종사했다.[13] 또한 국방대학의 교관으로 복무할 때는 3년 동안 국민당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어 1차 국공내전을 직접체험하기도 했다. 이때가 중국이 혼란스러운 시기였는데 안타깝게도 마셜은 이후로도 중국에 대한 시각이 이때의 부정적인 경험에서 일신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 마셜은 훗날 중일전쟁 당시 참모장으로 비슷한 시각을 가진 스틸웰을 참모장으로 추천해서 보냈는데, 그 결과는 참담했다... 1923년에는 중령, 1933년에는 대령이 되었고 참모총장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라이벌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의 후잡질 때문에 좌천당했다. 이후 1935년 맥아더가 물러나기가 무섭게 1936년준장으로 승진하면서 30여 년 만에 을 달았다.

2.3.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39년에는 소장이 되었고, 9월 1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제15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지명됐다. 참모총장이 되며 임시 대장으로 승진우왕 굳, 유럽 반격계획(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입안, 지도했고, 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며 연합군이 전쟁에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14]. 1943년에는,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에도 선정되어 명성의 절정을 달렸으며, 1944년 12월 드디어 원수가 되었다. 2차대전 시기 육군 원수 중에서 웨스트포인트 출신이 아닌 인물은 마셜이 유일하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남서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나 태평양 함대 사령관인 체스터 니미츠 원수와는 달리, 소련이 일본을 치게 해야한다는 주장을 펴서 결국 소련군을 대일 전선에 끌어들였다. 1945년 8월 9일부로 말이다[15]. 전쟁이 끝난 후, 육군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 났다.(육군 원수).

2.4. 전후

1945년 12월에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중국 전권특사로 임명되어 국공내전에 개입하였으나 국공 양당의 갈등으로 성과를 크게 거두지 못하고 귀국한다. 본인이 원하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트루먼의 요청으로 중재에 나섰으나 근본적으로 트루먼 대통령이 요청한 국공 연합정부의 설립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성과를 보기 어려웠고 결국 몇 년간 지지부진한 협상을 이어나가다 별 성과 없이 귀국한다.[16]

마셜은 귀국하자마자 1947년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국무장관으로 취임한다. 1946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양원을 모두 장악하였으나 상원은 만장일치로 마셜을 국무장관으로 추대했다. 1947년의 상황은 심각했다. 유럽에서는 소련의 위협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중국의 일이 완전히 일단락 된 것은 아니었으나 마셜의 관심은 유럽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첫 방아쇠는 그리스와 터키였다.

그리스와 터키는 소련이 지중해로 진출하는 관문이었다. 특히 영국에게 동지중해는 키프로스와 수에즈 운하 등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었고 그 동안 공산화를 막기 위해 그리스에 군사적 지원을 포함한 여러 지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후 상황이 좋지 못했던 영국은 이러한 지원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그리스가 공산화된다면 그 영향으로 터키도 공산화 될 것이었고 그렇게 된다면 동지중해는 소련의 손아귀에 들 것 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이를 막아야하는 상황이었다.

1947년 2월 27일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미국의 원조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회의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열렸고 마셜은 이 위기를 연속적 위협 중 첫번째 위기[17]라고 표현했다. 본래 마셜은 소련의 영역 확장에 대해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여왔고[18] 이번에도 마찬가지 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3월 21일에 의회에서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미국의 재정지원을 제안한다. 트루먼 독트린의 시작이었다.

마셜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유럽에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졌다. 전후 개최된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독일의 전후처리에 대해 논의된 내용은 재무장관이었던 헨리 모겐소에 의해 주장된 모겐소 플랜으로 이 계획은 독일을 자급자족 농업국가로 만드는 계획이었다. 트루먼과 마셜은 모겐소 플랜이 베르사유 조약의 실패를 되풀이 하는 것일 뿐이며 유럽에서의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강화시킬 것이라 믿었다. 마셜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공산주의를 전파를 봉쇄해야 한다는 조지.F.케넌의 전략, 이른바 봉쇄정책의 입안을 주도했다. 마셜은 유럽이 공산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제적 복구가 필수적이라 여겼고 이를 위해서는 독일의 강력한 산업, 경제적 영향력을 활용해야 한다고 여겼다. 독일이 주저앉아 있는 한 유럽은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었다. 마셜은 다른 나라들의 독일에 대한 복수심을 이해하면서도 유럽이 공산주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독일을 다시 일으켜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국가들의 협력을 이끌어낼 방안이 필요했다.

1947년 4월 10일~ 4월 24일, 마셜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외무장관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는 표면상으로는 유럽의 재건과 부흥을 위한 회의였으나 마셜은 스탈린의 의도를 명확히 알아챌 수 있었다. 소련은 유럽의 부흥을 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재건을 악화시키고 지연시키길 원했다. 스탈린은 유럽의 상황을 더 악화시킨 후 한꺼번에 소련으로 흡수할 계획이었다. 마셜은 유럽부흥 계획을 서둘렀다. 이 유럽 부흥계획은 초기 트루먼 계획이라 제안되었으나 공화당의 반발을 우려한 트루먼은 마셜 플랜이라는 이름을 붙일 것을 지시했다. 마셜 플랜은 1948년 3월 31일 미국 하원을 통과하였다.

마셜 플랜의 발표 이후 소련과의 대립은 첨예해졌다. 소련은 베를린 봉쇄를 감행했다. 마셜은 평화적 해법을 원하면서도 현실주의자 답게 마셜은 군사적 수단을 포함한 모든 수단의 사용을 검토했다. 군사적 해법은 3차대전을 의미했다. 일단 마셜은 종전 후 급속도로 이뤄지던 동원해제를 중단시켰다. 그럼에도 미군은 재래식 병력의 격감이 심각하였기에 핵무기의 사용을 준비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트루먼은 대규모 공수를 통해 베를린에 생필품을 공급하자는 의견을 제안했고 마셜이에 동의한다. 그렇게 이뤄진 베를린 공수는 당시 새롭게 설립된 미국 공군의 역량을 극한까지 보여주었다.

1949년 1월 20일 마셜은 트루먼의 첫번째 임기 종료 후 딘 애치슨에게 국무장관 직을 인계한 뒤 은퇴하였다. 건강 상태가 심각하여 48년 말에 오른쪽 신장을 제거하였고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령(69세)이었던 탓에[19] 은퇴하고 아내와 버지니아주에 정착했다. 공직에서는 은퇴하였으나 체력적으로 부담이 없는 팬암의 이사, 전쟁기념회 위원으로 재직하였다. 1949년 4월에는 나토 협정식에 참석하였고 트루먼의 제안으로 1949년 9월 부터 미국 적십자 총재로 근무하였다

1950년 9월 트루먼 대통령의 요청으로 국방장관으로 공직에 복귀하였다. 문민통제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나 마셜은 특례로서 인정되었다. 특례에서 알 수 있듯이 국방부의 상황은 은퇴한 노인을 불러와야 할 정도로 심각하였다.

미국방부는 마셜의 제안으로 1947년 창설되었는데 일원화된 체계로 전쟁을 수행해야한다는 2차대전의 전훈아래 각각 독립되어 있던 해군과 육군을 통합하고 공군을 신설하여 산하에 두었다. 전후 극심한 군비감축 속에서 각군들의 대립은 첨예했고 특히 해군은 존폐 위기에 몰려 제독들의 반란이라는 사태까지 일어날 정도 였다. 결국 초대 국방부 장관이었던 포레스털은 자살까지 하고 만다. 포레스털의 뒤를 이은 2대 국방부장관이었던 루이스 존슨은 해군과의 갈등을 제대로 봉합하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연합군의 지휘권을 맡기고 남한을 방어하라 지시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계속해서 확전을 요구하며 트루먼을 비난했다. 그 와중에 국방부장관이었던 루이스 존슨은 맥아더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맥아더와 트루먼이 단절되는 사태까지 이어졌다. 결국 존슨 장관은 트루먼의 요구로 사임했고 마셜이 불려왔다.

마셜의 인준은 순탄치 만은 않았다. 마셜은 중국에서의 실패 때문에 공화당으로 부터 비판을 듣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그 조지프 매카시가 활개치던 매카시즘의 시대였다. 매카시는 마셜이 공화당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한 것이라 비난했다. 당연히 마셜은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을 국방부장관 후보자로 지명함에 따라 트루먼이 지게 될 비난을 걱정했다. 트루먼에게 마셜은 이렇게 얘기한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만 저에게 말하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것들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를 임명하는 것이 당신과 행정부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트루먼은 이러한 마셜의 성품에 압도되어 아내인 베스 트루먼에게 보내는 편지에 "당신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나요? 나는 못해요. 마셜은 위대한 사람들 중 한명입니다."[20] 라 적었다.

트루먼이 마셜을 국방부장관 후보로 지명하자 마셜이 우려한대로 공화당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매카시는 마셜의 중국에서의 실패를 물고 늘어지며 '살아있는 거짓말쟁이', '배반자를 위한 대표자'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공화당 내부에서도 레버렛 솔톤스톨과 같은 상원의원들이 마셜을 지지했으며 인준 투표에서 57대 11로 인준되었다. 마셜은 국무장관과 국방장관[21]을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고 이는 2019년 현재까지 유일한 기록이다.

마셜은 1950년 9월 21일 국방장관으로 취임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던 트루먼과 지속적인 확전을 원하는 맥아더의 갈등은 점점 심해져갔고 맥아더는 트루먼을 비난하는 편지를 공화당의 의회 대변인인 조셉 마틴에게 보냈고 이 의견은 급속이 여론화되었다. 트루먼은 지속적으로 중공과의 휴전협상을 시도하였으나 맥아더는 독자적으로 중공군에게 최후통첩을 보내는 등 트루먼의 노력들을 망가뜨렸고 이에 화가 난 트루먼은 51년 4월 6일, 맥아더의 처리를 놓고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는 마셜[22], 에이버럴 해리만[23], 딘 애치슨[24], 오마 브래들리[25]가 참석했다. 이틀에 걸친 회의 끝에 맥아더의 해임이 결정되었고 트루먼은 최종적으로 합동참모본부의 장군들의 의견을 확인하라 지시했다. 4월 8일 브래들리, 콜린스, 반덴버그 장군을 비롯한 합참의 구성원들과 마셜은 맥아더가 항명을 했다는 것에 만장일치로 동의했고 군사적 관점에서 맥아더를 교체한다는 것에 대해 동의했다. 4월 9일, 맥아더는 교체되었다. 맥아더는 귀국하여 장황하고 드라마틱한 연설을 쏟아냈고 이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트루먼과 마셜은 전쟁영웅을 해임했다는 비난에 휩싸이게 된다.

1951년 6월 14일, 매카시는 상원에서 169쪽에 달하는 연설문을 발표했다. 그 연설문에는 마셜이 소련에 호의적 정책을 폈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중국을 빼앗기도록 획책했다고 말했다. 매카시는 마셜을 '세계정세에서 미국을 약화시키는' 음모의 우두머리라고 매도하며 마셜을 맥베스에 비유했다. 마셜은 어마어마한 정치적 공격을 받았지만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마셜은 자신의 복무 경력이 그의 정당성을 증명해준다 생각했기에 자신의 변호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26] 매카시의 비난과는 별개로 이미 지쳐있었던 마셜은 사임을 고려하고 있었다. 1951년 9월 21일 마셜은 국방장관직을 사임한다. 트루먼은 마셜을 적십자 총재로 재임명할 뜻을 비췄지만 마셜은 사양하였고 전쟁기념위원회의 의원직만을 수락하고 버지니아에서 아내와 생활하였다.

이후 유럽을 방문하여 안치오에서 전사한 그의 의붓아들의 묘소에 다녀오거나 처칠과 만나기도 하였다. 마셜이 유럽에서 돌아왔을 때 미국은 한창 대선 중이었다. 공화당과 민주당 양 측 후보 모두 마셜과 절친한 인물로 공화당 후보는 아이젠하워, 민주당 후보는 애들라이 스티븐슨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던 매카시즘적 분위기 때문에 아이젠하워는 선거운동 중 매카시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없었고 이에 트루먼은 아이젠하워가 전우를 저버렸다며 혹평할 정도였다. 마셜은 어떠한 공개적 발언도 하지 않았고 자신의 대녀인 로즈에게 사적인 자리에서 '아이젠하워는 타협을 강요받았을 것이다'라 얘기했다.

1953년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마셜을 백악관으로 초대해 자신의 행동을 사과했다. 이어 1953년 4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에 미국 특별 사절단으로 임명했다. 마셜은 영국을 방문해 2차대전의 동료들과 재회했고 처칠과는 하루 종일 승마경주를 하기도 했다.

1953년 12월 마셜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노르웨이 오슬로로 갔다.[27]마셜은 2019년 현재까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유일한 군인으로 남아있다. 이 때 처칠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사실 처칠은 노벨문학상보다 평화상을 원했고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실망하여 담배를 피러갔다는 일화가 있다. 그래서인지 처칠과 절친했던 마셜은 시상식 때 처칠을 언급하기도 했다.[28]

오슬로에 가기 전부터 쇠약하던 그는 1956년과 1957년에 걸쳐 회고록을 집필하였는데 이 회고록들은 마셜 연구의 시작점이 되고 있다. 1959년 1월 24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는 동년 2월 18일 다시 한번 쓰러졌고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했다. 아이젠하워는 마셜을 세 번이나 방문했고 한 번은 처칠도 함께였다. 처칠은 눈물을 머금고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마셜을 지켜보다 돌아갔다. 1959년 10월 16일 저녁 6시에 세상을 떠났다. 마셜은 워싱턴 국립 대성당의 베들레헴 예배당에 안치되었고 다음날 영결 예배를 위해 버지니아 포트마이어 기지의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영결식은 초대받은 소수만 참석했으며 개인장례식은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거행되었다.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르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보좌관들과 비서들, 월터 비들 스미스와 해롤드 스타크 제독, 오마 브래들리를 비롯한 전우들이 그의 관을 따랐다. 마셜은 사별한 그의 첫 아내 옆에 안장되었다. 2번째 아내였던 캐서린 마셜은 1979년에 세상을 떠났다.

2.5. 군인으로서 업적

1939년 2차대전 발발 당시 17만 5000명의 조악한 숫자에 소총이 없어 모형총으로 훈련 중이던 군기 바닥의 군대를 단 6년 만에 830만이라는 잘 훈련된 군대와 12만 9천여 대의 항공기, 4천여 척의 함정, 2천 5백만여 대의 차량, 1억 2천만여 정의 소총,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핵무기 2발을 보유. 전 세계 6만 마일에 걸쳐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병참 밎 보급 시스템[29]을 구축해낸 주역. 괜히 처칠로부터 '승리의 설계자'라는 찬사를 들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성과는 미 의회의 엄청난 반대를 이겨가며 그가 만들어낸 결과들이다. 물론 미국의 인적 자원과 공업 생산력 등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이미 전쟁 전 부터 뛰어났다. 하지만, 그 수행 능력을 통해 만들어낸 병력과 물자를 종류와 양에 맞게 적재 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이 있어야 제대로 효율성을 낼 수 있다. 그리고 마셜은 이를 해냈다.

아이젠하워, 맥아더, 브래들리, 패튼, 몽고메리 등의 연합군 명장들이 거두는 승리에는 마셜이 구축한 전략과 병참/보급 시스템이 뒷받침이 되었으며[30] 그가 쌓아온 시스템은 현대의 미군에게 아직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또한 아이젠하워, 브래들리를 발굴, 패튼이 사고쳐도 계속 돌격대장(?)질 할 수 있게 한 양반. 지휘 체계 일원화하는등 수없이 많은 업적을 쌓은 인물임에도 직접 전장에서 싸운 이력이 없어 정작 졸병대장이라 불린 브래들리한테도 밀리는 겸손함을 보였다. 비슷한 포지션으로 해군의 윌리엄 D. 리히, 어니스트 J. 킹, 육군항공대[31]의 헨리 아놀드가 있는데 마셜을 포함한 이 4인방은 2차대전기 합동참모회의를 주관하고 루스벨트를 보좌하며 실질적으로 전쟁을 주도했다. 직접적인 작전 지휘를 담당했던 킹 제독과 아놀드 장군, 최고 사령부 참모총장[32]으로 각 군대의 조율과 중재를 맡았던 리히 제독과 함께 병참, 군비 증강, 인사를 맡았다.

그의 업적을 찬찬히 뜯어보면 군비증강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의회를 설득하여 기하급수적인 군비증강과 전시경제체제로의 전환, 총력전 체제로 순식간에 전환했다.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2년까지 총력전체제로 전환에 성공했는데 정작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독일은 43년에서야 총력전체제로 전환했으니... 인사 부분을 보면 아이젠하워를 비롯하여 패튼, 브래들리, 공군원수에 오르는 헨리 아놀드가 있고, 리히 제독을 최고사령부 참모총장으로 추천한 것 역시 그의 업적.

2.6. 정치가

1947년, 국무장관으로 취임. 이 해 6월 5일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강연에서 나중에 「마셜 플랜」으로 알려지는 유럽 부흥계획을 발표했으며(11월 실행), 대 중국정책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49년에는 국무장관에서 물러나서 미국 적십자사 총재로 취임했으나 이듬해에는 트루먼의 요청으로 다시 국방장관이 되었다. 문민통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에서는 군인 출신의 경우는 예비역으로 10년 이상 되어야 국방장관으로 임명이 가능하지만, 이러한 사례에서 非 문민 출신(특히 장성급 장교를 기준으로 보면)은 2017년에 제임스 매티스가 국방장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는 오직 마셜이 유일한 특례로 임명되었다. 다만 원수 계급이 종신직이라는 점과 당시 해군과 공군이 예산과 항공전력, 핵무기 등의 문제로 으르렁대던 시기[33]라 이들을 통솔할 리더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특례가 인정된 것이었다. 이때 국무장관이 바로 애치슨 라인을 선포한 딘 애치슨이었다. 당연히 6.25 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 행정부는 국내외에서 호된 비판을 받았고, 트루먼 대통령은 마셜을 국방장관에 기용하는 것으로 이에 대응했다. 그러나 다음 해 건강상의 이유로 국무장관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3. 개인사 및 기타

군인으로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성격도 강직해서 다른 각료들에게도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다.본래 미국을 비롯한 서양 문화권에서 상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사적인 친분을 의미한다. 즉 철저하게 자신을 공적으로 대하라는 뜻이다. 오죽하면 "조지라고 불러도 되겠소?"라고 묻는 트루먼 대통령한테 "아닙니다, 각하. 마셜 장군으로 불러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전해져 올 정도...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 첫 자리에서는 대놓고 '저는 각하의 말에 한 마디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라고 쏘아붙이거나 대민업무를 수행하던 부하가 사무실에서 불만을 토하자 즉석에서 전역(...) 시켜버리기도 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한다는 신념 때문에 투표도 하지 않았고 백악관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사적인 초대도 일체 받지 않았으며 심지어 대통령의 농담에도 웃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다만 어니스트 킹 제독처럼 사적으로도 성격이 극악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온후한 편이었다고 한다. 다만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원칙주의자였을뿐.

이런 면모 때문인지 동갑(1880년생)이면서 참전 동기, 최종 계급, 심지어 키(둘다 183cm)까지 같은 맥아더와 비교 대상으로 오르곤 하는데 성격은 정반대. 맥아더와 비슷한 성격에 짬은 딸리던 패튼은 '마셜 장군과 대화하느니 독일군 기갑사단을 상대하는게 쉽겠다' 라 할 정도 였다. 그럼에도 패튼의 능력을 높이 산 마셜은 아이젠하워의 패튼 해임 건의를 반려했다. 패튼의 사례와는 반대로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반기를 들자 맥아더를 해임, 전역시키는 등 철저할 정도로 능력주의적 모습을 보였다. 마셜의 부하들이었던 아이젠하워, 브래들리 등은 마셜에게 절대적인 존경을 보냈다.

개인적인 인품이 매우 훌륭하여 부하들은 물론이고 각국의 정상들, 그 중에서 악명 높은 스탈린마저도 극찬을 할 정도였다. 심지어 오슨 웰스[34]는 몇 번 만난 적도 없음에도 그를 자신이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꼽았다.[35]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4형제 중 홀로 살아남은(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제임스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미션을 최종 승인하는 육군참모총장으로 나온다. 배우는 하브 프레스넬.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소재한 NASA의 조지 C. 마셜 우주센터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이곳은 관제센터인 휴스턴 LBJ 우주센터와 발사장인 케이프 커내버럴 케네디 우주센터만큼은 아니지만 로켓 제작과 테스트를 실시하는 곳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굉장한 인지도를 갖고 있으며 지역의 쏠쏠한 관광자원으로도 기능하고 있다.


  1. [1] 국방장관과 국무장관을 모두 거친 인물은 2019년 현재까지 그가 유일하다.
  2. [2] 2차대전기 미국 최고사령부
  3. [3] 미해군이나 공군도 마찬가지인데 해군참모총장으로서 해군을 총지휘했던 어니스트 킹체스터 니미츠레이먼드 스프루언스와 같은 휘하 일선 지휘관들에 묻혀버렸고 전후 공군으로 재편되는 육군항공대 사령관인 '헵' 헨리 아놀드 원수의 경우에는 단명한데다 결정적으로 마셜의 부하였다. 2차 대전기에는 공군이 없고 '육군' 항공대뿐이었는데 당연히 최고 책임자는 마셜이었다.
  4. [4] 아예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실패했던 일들은 진주만, 중국과 같이 불가항력이었던 것들이 제일 컸다. 또 육군의 인선을 책임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인사상의 실수도 몇 번 있었다. 가령 마셜이 다른 술꾼과 착각해서 계속 진급이 막혔던 제임스 밴 플리트가 있다. 물론 마셜도 본인의 실수를 깨닫고 나서 기회가 될때마다 진급시켜주기는 했지만...
  5. [5] 그나마 마셜 플랜 덕분에 이름이야 어느정도 알려져 있다지만 이건 군인이 아닌 정치인으로서의 업적이니....
  6. [6] 그러나 마셜의 전술적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증명하기 어려울 뿐이다. 1차대전 참전기에도 참모 업무만을 수행했기에 야전지휘관으로 활동했던 적이 없었고 퇴역할 때까지 야전지휘관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다만 훈련시에 지휘관 등으로 여러번 선임되었고 항상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보병학교 부교장으로 근무할 당시 베닝혁명이라 불리는 기갑, 항공, 기동전 교리의 도입을 주도하였고 그의 밑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던 인물들은 2차대전기에 핵심 지휘관으로 근무했다. 대표적 인물이 오마르 브래들리
  7. [7] 남북 전쟁의 마지막 해의 육군참모총장(육군총사령관)은 율리시스 그랜트였다, 루즈벨트가 잘못 알고 있었던 듯, 북군을 지휘했던 지금의 국방장관에 해당되는 전쟁장관은 에드윈 스탠튼이었다. 대남 강경파였던 그를 링컨의 후임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 무리하게 잘랐다가 탄핵소추의 위기에 몰린다...
  8. [8] Buell, Thomas B.; John H. Bradley. The Second World War: Europe and the Mediterranean. p. 258
  9. [9] 직위 진급
  10. [10] M26 중전차에 이름이 붙은 그 사람 맞다. 조지 S. 패튼 장군의 은사이기도 하다.
  11. [11] 전쟁 시기에는 전시 임관도 많았고 장교의 수도 부족했기에 승진이 빨랐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방대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기에 군축을 단행하게 되는데 많은 장교들을 예편시키거나 전쟁 이전의 계급으로 강등시켜서 수요를 맞추는 것이 보통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계급 특진 참고.
  12. [12] 프랑스의 포슈 장군이 말한 20년간의 평화. 1차 세계대전 종전일부터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날까지(1918년~1939년)를 가리킨다. 또 다른 말로는 해군 휴일.
  13. [13] 이 때의 경험이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군을 빠른 시간 안에 재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4. [14] 아이젠하워는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연합군 전체를 지휘하는 자리에 있었다. 스포츠로 바꿔보면 감독(아이젠하워)과 단장(마셜) 같은 사이.
  15. [15] 이때 일본에서는 "소련한테 전쟁 물자 좀 얻어봅시다. 이왕이면 내분도 일으켜보고. 안되면 소련한테 평화 회담을 주선해달라고 합시다"라고 제안했다. 물론 외교 담당자들의 반응은 "나치하고 편먹었던 우리가 소련한테 물자를 받는다고요? 거기에다 미국하고 소련을 이간질 시키겠다고? 머리에 총 맞았소?"총 안 맞아도 이미 정신이 나간 상태였지
  16. [16] 최근엔 국민당의 초반 공세를 중재로 중단시킨 것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에 일정부분 기여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에 대해선 중일전쟁 당시 추천하여 임명된 참모장인 스틸웰에 대해서도 참고하면 좋다. 다만 마셜은 1924년~1927년까지 중국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상황에 대해 해박했기에 장제스에 대하여 상당히 날선 비판을 많이 남겼다. 때문에 마셜은 장제스가 공산당을 이길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영구적 휴전이 최선의 방식이라 생각했다.
  17. [17] "우리는 소련이 유럽과 중동, 그리고 아시아까지 자신들의 지배 영역을 확장하려는 연속적인 위협 중 첫 번째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 [18] 원자폭탄의 사용을 건의한 핵심적인 이유가 바로 빠른 종전을 통해 소련의 개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19. [19] 45년에 죽은 루스벨트보다도 2살 많았다. 그나마 젊었을 적부터 테니스, 승마 등을 즐겨하는 등 꽤나 관리를 잘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과로와 업무량에도 불구하고 꽤 장수한 편이다.
  20. [20] Cray, Ed. General of the army: George C. Marshall, Soldier and Stateman. New York: W. W. Norton, 1990, p.685.
  21. [21] 국방부의 전신인 육군성, 해군성을 포함하여
  22. [22] 국방장관
  23. [23] 2차대전기 루스벨트의 조언자
  24. [24] 국무장관
  25. [25] 합참의장
  26. [26] 마셜에 대한 공격은 결국 매카시의 자충수가 되고 만다. 마셜에 대한 군부의 지지는 확고하다 못해 절대적이었고 2차대전기 동안 육군의 최고책임자였던 마셜에 대한 비난은 마셜의 명령을 이행한 육군의 고위장성들, 대표적으로 아이젠하워에 대한 비난으로도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매카시는1954년에는 공화당 내부에서도 찍혀서 박살나고 만다.
  27. [27] 이 때 소련이 수상에 반대했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매카시와 같은 마셜을 비난하던 반공주의자들이 한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28. [28] https://www.nobelprize.org/prizes/peace/1953/marshall/lecture/
  29. [29] 나치독일이 독소전쟁기간 내내 광활한 러시아 영토로 인해 병참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것과는 극명하게 비교된다. 미국은 우월한 병참능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독일과 태평양의 일본을 상대로 동시에 전 세계의 곳곳에서 양면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히틀러가 꺼려했던 양면전쟁을 미국은 거뜬히 해냈다.
  30. [30] 그는 직접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 하려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태평양 전쟁이 난 상황에서 이 모든 상황을 조율 할 수 있는 전략적 안목을 가진 장군은 마셜밖에 없다며 지휘를 말리기도 했다. 오오
  31. [31] 당시 이미 육군에서 반독립하여 실질적인 공군이었다.
  32. [32] 최고 사령부는 합참의 전신. 리히 제독은 지금으로 치면 합참의장.
  33. [33] 해군 측의 인물이었던 제임스 포레스탈 초대 국방장관이 자살을 했고, 해군청장과 해군참모총장 휘하 수많은 제독들이 사표를 내거나 좌천, 불명예 제대를 각오하며 국방부에 항명하였다. 후세는 이를 제독들의 반란이라 기록하고 있다.
  34. [34] 루스벨트의 선거운동에 참가했다
  35. [35] https://www.youtube.com/watch?v=We4rXniTo9I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281.52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