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회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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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무제기(武帝紀)」

2권 「문제기(文帝紀)」

3권 「명제기(明帝紀)」

조조

조비

조예

4권 「삼소제기(三少帝紀)」

5권 「후비전(后妃傳)」

6권 「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조방

조모

조환

무선황후

문소황후

문덕황후

명도황후

명원황후

동탁

원소

원술

유표

7권 「여포장홍전(呂布臧洪傳)」

8권 「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

여포

장홍

공손찬

도겸

장양

공손도

장연

장수

장로

9권 「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10권 「순욱순유가후전(荀彧荀攸賈詡傳)」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조휴

조진

하후상

순욱

순유

가후

11권 「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원환

장범

양무

국연

전주

왕수

병원

관녕

12권 「최모서하형포사마전(崔毛徐何邢鮑司馬傳)」

최염

모개

서혁

하기

형옹

포훈

사마지

13권 「종요화흠왕랑전(鍾繇華歆王朗傳)」

14권 「정곽동류장류전(程郭董劉蔣劉傳)」

종요

화흠

왕랑

정욱

곽가

동소

유엽

장제

유방

15권 「유사마량장온가전(劉司馬梁張溫賈傳)」

16권 「임소두정창전(任蘇杜鄭倉傳)」

유복

사마랑

양습

장기

온회

가규

임준

소칙

두기

정혼

창자

17권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

18권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藏文呂許典二龐閻傳)」

이전

이통

장패

문빙

여건

허저

전위

방덕

방육

염온

19권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조창

조식

조웅

20권 「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

조앙

조삭

조충

조거

조우

조림

조곤

조현

조간

조표

조정

조림

21권 「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傳)」

22권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왕찬

위기

유이

유소

부하

환계

진군

진교

서선

위진

노육

23권 「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24권 「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화흡

상림

양준

두습

조엄

배잠

한기

최림

고유

손례

왕관

25권 「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26권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27권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신비

양부

고당륭

만총

전예

견초

곽회

서막

호질

왕창

왕기

28권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29권 「방기전(方技傳)」

왕릉

관구검

제갈탄

등애

종회

화타

두기

주건평

주선

관로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오환족

선비족

부여

고구려

읍루

예맥

동옥저

마한

진한

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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鍾會
종회

작위

관내후(關內侯) → 무정후(武亭侯) → 진후(陳侯) → 현후(縣侯)

최종직위

사도(司徒)\

성씨

(鍾)

(會)

사계(士季)

아버지

종요(鍾繇)

어머니

장창포(張昌蒲)

생몰기간

225년 ~ 264년 1월 18일[1]

고향

예주(豫州) 영천군(穎川郡) 장사현(長社縣)

사도 재임기간

263년 12월 19일 ~ 264년 1월 18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하안 살롱의 일원
2.3. 사마씨의 측근으로
2.4. 견제질
2.6. 종회·강유의 난
2.7. 사후
3. 평가
4. 동성애자?
5. 마더 콤플렉스?
6. 기타
7. 미디어 믹스

1. 개요

조위의 인물. 예주 영천 장사 사람. 종요75세에 27세인 장창포와의 사이에서 낳은 작은 아들이다. 자는 사계(士季). 이복형은 종육, 누나는 종부인.

삼국지 후반 인물들이 대부분 전반기보다 큰 관심을 못 받고 있고 산악인이라는 아이덴티티가 있는 등애에 비해서도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후반기 인물들 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네임드 중 한 명으로, 유능한 정치가였고 촉한을 멸망시킨 주역 중 한 명이면서 촉한 부흥에도 참여(혹은 이용당)했다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능력이나 인격면에선 이런저런 논란이 많은 종회지만 하후패가 촉한에 망명할 때 그 시점에선 애송이 취급받던 종회를 고평가하며 촉한의 큰 위협이 될만한 인물로 꼽고 있고, 또한 《세설신어》를 비롯한 이런저런 사서에 종회에 대한 일화가 굉장히 많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위진의 정계에서는 대단한 거물로 여겨졌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종요가 75세때 장창포 사이에 얻은 작은 아들로 장창포가 종회를 임신했을때 종요의 정실노릇을 하던 손씨가 장창포를 낙태시키려 했다고 한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종요는 태후와 당시 황제 조비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자살하겠다고 땡깡을 부려 손씨를 몰아내고 종회의 장창포를 맞아들었다. 다만 이는 종회가 지어낸 뇌피셜이란 설이 있다. 정말 손씨가 그런짓을 시도했다면 종요가 자신의 이혼을 충분히 정당화할 수 있었을텐데 이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다 굳이 황제와 태후까지 나서 이혼을 저지하려 했다는 건 손씨가 별 잘못 없었음을 반증하는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게다가 끝까지 첩실 장창포 때문에 자살소동을 벌인 종요는 두고두고 조정에서 씹혔을 것이다. 종회는 자기 부모의 위신을 위해 없는 손씨의 악행을 지어내며 '우리 엄마는 이렇게 불쌍하고 우리 아빠는 어쩔 수 없이 엄마 정실로 들인거다!' 라고 주장한 것 같다는 주작의 스멜이 강하게 난다는 의견이 있다. 사실 종회가 속좁고 이기적인 인성머리니까 지 엄마아빠 위해 손씨 루머 지어내는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기도 하고, 그리고 여섯 살 때부터 장창포한테 의지하며 살아온 종회는 자기 엄마 이미지가 '손씨 쫒아내고 눌러앉은 첩 출신'으로 굳어지길 원치 않는 마음이 컸을 수도 있다.

다만 종회모전이 쓰인 때가 종육이 죽기 전인데 완전히 거짓을 썼을리는 없고.. 정사에도 그대로 인용된거 보면 나름대로 신빙성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종요가 아무리 그래도 걍 지 멋대로 이혼하지는 않았을테니.

어쨌거나 종회의 어머니 장창포는 자녀의 교육에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종회는 어릴 때부터 열공을 시작했다. 종회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은 것으로 이름이 알려져있었다. 종회의 아버지 종요는 중호군 장제가 "사람의 눈동자를 관찰하면 그 사람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다섯 살인 종회를 장제와 만나보게 했다. 장제는 종회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종회에 대한 일화 중 《세설신어》의 기록으로 연의에도 쓰인 이야기가 하나 있다. 종회가 7세 때 한 살 위인 형 종육과 함께 조비를 알현했는데, 종육은 땀을 비오듯이 흘렸고 종회는 흘리지 않았다. 조비가 그 이유를 물으니, 종육은 '천자의 위엄을 대하니 무섭고 떨리어 땀이 나온다'고 대답했고 종회는 '천자의 위엄을 대하니 무섭고 떨리어 감히 땀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조비가 사망한 226년에 종회는 2세였으므로 그냥 야사일 뿐이지 사실은 아니다.

세설신어에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종육(鍾毓) 형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낮잠이 들었기에 함께 약주(藥酒)를 훔쳐 마셨다.

아버지는 이때 일어나 있었지만 우선 거짓으로 잠든 체하며 그들을 봤다. 종육은 절을 한 후에 마시는데, 종회는 절을 하지 않고 마시는 것이었다. 이윽고 아버지가 일어나서 종육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절을 하였느냐?"

종육이 말하길

"술은 예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기에, 감히 절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종회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절 하지 않았느냐?"

종회가 말하길

"훔치는 것이 애초에 예에 어긋난 일이기에,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설신어에 또 다른 일화가 있는데, 종회는 순제북(순욱[2])의 외삼촌이었지만 사이가 안 좋았다. 순제북은 소유한 비싼 보검 한 자루를 어머니 종부인(종회의 누나)에게 맡겨 두고 있었는데 종회는 글씨를 잘 써서 순제북의 필적을 모방해 종부인에게 편지를 써 보검을 얻고 돌려주지 않았다. 순제북은 고민하다가 종육, 종회 형제가 비싸게 지은 집에 몰래들어가 문당에 돌아가신 종요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종육, 종회 형제가 문에 들어서서 이 그림을 보고 크게 부친 생각이 나서 그 집을 그대로 비워두어 폐가가 되버렸다.

2.2. 하안 살롱의 일원

종회는 어른이 되자 계산과 글씨가 뛰어나고 똑똑해서 조정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

종회는 일찍이 역경에 호체와 재성의 이동이 없는 것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는데, 순욱전 주석 진양추에 따르면 순의가 종회를 꾸짖으며 역경에는 호체가 없다고 하여 유명해졌다.

조상이 집권했을 때는 당시 정시문인으로서 현학의 대가이자 조상의 측근이던 하안과 친밀하게 지냈으며, 요절한 왕필과도 교류했다.왕필전에 따르면 왕필과 종회가 친했는데 종회는 정밀한 사고를 근본으로 논의했지만 매번 왕필의 고상한 식견에 굴복했다. 하안이 성인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다고 여긴 논의가 굉장히 정밀해서 종회 등이 논술했다.

하후현과는 딱히 교분이 없었지만 그가 죽을때 그를 희롱하면서 그와 친해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이렇듯 종회 역시 하안 살롱의 중심 일원 중 하나였는데 하안 살롱의 중심 인물들이 결국에는 사마씨 일가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종회가 사마씨에게 이후 순종했다고 해도 사마씨 입장에선 종회가 '사마씨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는 인물'로 인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처음부터 농후했다. 사마씨가 그의 재능을 보고 쓰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비지니스 관계였다는 것이다.

2.3. 사마씨의 측근으로

고평릉 사변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정변 당시 종회는 중서랑 신분으로 조방, 조상 등을 따라 고평릉에 가 있었다. 이 때문에 유방, 위관, 하후화 등의 집안이 종회의 어머니 장창포에게 찾아와 지금 아들이 난리에 휘말렸는데 걱정되지 않냐고 물었으나, 장창포는 차분하게 조상의 실책과 사마의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한편 종회는 황제 곁에 머무르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며 사태가 신속하게, 큰 피를 보지 않고 해결될 것임을 예측했다.[3]

고평릉 사변 이후 하안이 처형당하자 사마씨에 접근하여 재능을 발휘했다. 이렇게 유연하지만 신의없던 태도는 그의 신망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장창포전에 따르면 종회는 정시 8년, 22살에 상서랑이 된다. 2년 후인 249년 고평릉 사변이 터지고 같은해 사마사는 장평향후+위장군+무군대장군 작위를 받았으며 그동안 조정에선 큰 반발이 없었던 걸로 보아 전반적으로는 사마사의 위세에 수그리는 방향으로 간 듯하다.

물론 아예 반발이 없던 건 아니기에 251년 왕릉의 난이 일어나지만 이마저도 진압되면서 결과적으로는 조씨 황가의 위세가 땅에 떨어지게 된다. 동시에 사마의가 죽으면서 전권은 사마사가 거의 다 물려받다시피 했었기 때문에 종회가 사마사에게 붙은 건 정치흐름을 읽고 판단한 실리적인 이유였을듯. 세어에서는 종회는 우송이 상소를 짓는걸 도왔고 종회가 표문 초안을 몇글자만 수정해서 더 멋있게 만들자 사마사가 그 상소를 종회가 한 걸 알자 종회와 긴 시간 대화를 나누고 그의 재능을 감탄했다고 소설틱하게 기록했지만 배송지는 '종회는 명공의 아들로 명성이 일직부터 현저하였으며 약관에 등조하여 이미 현달한 지위를 역임하였는데 표문 글 몇자 수정한걸로 그제서야 사마사가 뒷북치며 종회의 능력을 알게 되었겠냐, 말이 안 된다' 고 일축했다.

따라서 사마사를 필두로 한 사마씨의 위세에 편승하고자 종회는 사마사에게 줄을 섰으며, 사마사도 명성 높은 종회를 필요에 의해 가까이 한 것으로 보인다. 둘 간에 인간적 감정이 있었을지라도 기본적인 이유는 비지니스적 측면이었을 것이다.

한진춘추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당초 하후패가 촉에 항복하였을 때 강유가 물어 말했다.

"사마의가 이미 그곳의 정권을 얻었으니 응당 다시 정벌하고자 하는 뜻이 있는가?"

하후패가 말했다.

"그 쪽은 가문을 경영하고 세우느라 바깥일에 신경쓸 수 없습니다. 종사계(종회)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됨이 비록 어려도 끝내 오, 촉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다만 비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를 쓸 수 없습니다."

15년 후에 종회는 마침내 촉을 멸망 시켰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패가 종회와 더불어 등애도 언급하는 것으로 각색했다.

허윤전에 따르면 허윤이 죽자 사마사가 종회를 시켜 허윤의 아들들을 살피게했는데 완씨의 대처로 허윤의 아들들은 무사했다.

조모전 주석 위씨춘추에 따르면 사마사는 조모가 즉위하자 종회에게 그에 대해 물었다.

사마사가 사사로이 물었다.

"임금(조모)은 어떤 군주였는가?"

종회가 대답했다.

"재능은 진사왕(조식)과 같고, 무용은 태조(조조)와 비슷합니다."

사마사가 말했다.

"만약 경의 말과 같으면 사직의 복이다."

조모전 주석 진제공찬에 따르면 조모는 항상 사마망, 왕침, 배수, 종회 등과 모여 토론회를 가졌다.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키자 부하와 함께 사마사에게 친정을 권하였고 종군하여 기밀 사무를 담당하였다. 사실 여기서 종회가 딱히 기밀 사무 외엔 한 건 없고 부하전에 따르면 관구검과 문흠을 격파시킨 것은 부하의 책모가 있었다. 문흠과 관구검의 난을 진압하려던 사마사가 죽고 사마소가 그 뒤를 이어 군을 통솔했는데, 낙양의 조모는 군을 수도 밖에 두고 궁으로 입궐하는 것을 명령하였으나, 종회는 부하와 상의해 부하로 하여금 표를 올리도록 하고 사마소와 함께 낙양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조모는 사마소에게 사마사가 가졌던 모든 직위를 그대로 물려주게 된다. 종회는 황문시랑으로 승진하고 무정후로 봉해져 식읍 3백 호를 받았다. 종회는 이로부터 스스로 오만한 기색이 있었으므로, 부하는 그에게 충고했다.

그대의 뜻은 원대하지만, 공업을 세우는 것은 어렵습니다.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냉정한 평가를 내리길 좋아했던 부하는 유독 종회만 보면 오만한 종회에게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는데 이를 보면 정말로 부하가 종회를 친근하게 여겼던 것 같다.

이쯤 종회의 어머니 장창포가 죽어 상을 치루었고, 위씨춘추에 따르면 종회가 어머니를 위해 종회모전을 지었다. 257년, 제갈탄이 사공이 되자 당시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서 상을 치르고 있던 종회는 제갈탄이 반역할 것이라 추측하고 사마소에게 제갈탄의 임명을 취소하라 아뢰었지만, 사마소는 이미 제갈탄의 임명이 끝났으니 돌이킬 수 없었다.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켜 양주자사 악침을 죽이고 오나라에 구원을 청하자, 오에서는 장수 전역, 전단, 당자, 왕조 등과 병사 3만 명을 보냈다. 그러나 이때 건업에서는 전씨 가문 내에서 싸움이 일어나 서로 소송을 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어 전역의 형의 아들 전휘전의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마소에게 투항한다. 종회는 이것을 이용해 전휘와 전의가 보낸 것처럼 서신을 꾸며 손침이 수춘에서 이기지 못한 것에 크게 화가 나서 전씨 일가를 모조리 죽이려한다면서 성 안의 전씨 일가도 항복해 화를 면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자 그 편지에 속아 전역은 조카 전정 형제 다섯 명과 함께 병사 수천 명을 이끌고 동문으로 나와 사마소에게 투항했다. 그들 모두 작위에 봉해지고 총애를 받자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수춘성을 함락시키는데 종회의 계책이 큰 몫을 해 사례교위가 되었으며 사마소는 날이 갈수록 종회를 더욱 후하게 대접하고 중요시했다.

2.4. 견제질

종회는 당시 비록 지방 관리였지만 정치적으로 크게 관여했다.

배수양호를 견제하면서 사마소의 신임을 얻고자 하였고, 죽림칠현으로 꼽히던 완적이나 혜강을 모해하고자 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현학(玄學)에도 관심이 많으면서 죽림칠현의 필두이자 당시 현학의 권위자였던 명사 혜강과 친교를 쌓고자 했다. 부하전에 따르면 종회는 부하의 관점을 종합하여 사본론(四本論)을 지었고, 《세설신어》에 따르면 사본론의 집필을 끝내고 혜강에게 보여주려고 했다가 그의 비판이 두려워 품 속에서 감히 꺼내지 못하고 창문 밖까지 던져 놓고 곧장 돌아서서 도망갔다고 한다.

나중에 사마씨에 붙어 출세한 다음에는 뛰어난 명사들의 행렬을 거느린 채 호화로운 복장으로 혜강을 찾았으나 혜강은 철 단련에만 열중하고 종회를 한참 무시한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종회가 떠나려하자

혜강이 종회에게 물었다.

"무엇을 듣고 왔으며 무엇을 보고 가시는가?"

종회가 말했다.

"들은 바가 있어 왔고 본 바가 있어 갑니다."

종회는 그를 깊이 원망하였다.

위 제후 왕실의 사위이기도 하면서 사마씨 일족의 전횡을 미워하던 혜강으로서는 사마씨에 붙은 종회를 좋아할 수 없었으며, 결국 혜강은 찾아온 종회를 푸대접해 돌려보냈다가 이에 앙심을 품은 종회는 혜강을 죽이고자 노려 사마소를 설득해 혜강을 사형에 처하게 한다. 이때 한 말이 걸작인데 "혜강은 와룡이니, 놔둬서는 안됩니다." 당장 사마소의 아버지누구랑 대적했나를 생각해보면 이보다 탁월한 모함의 한마디도 없었을 것이다. 사마의도 제갈량을 높이 평가한바 있지만 개인적인 평가였다. 제갈량이 공적으로도 국적을 초월해 위인으로 대접받는건 촉한이 사라진 사마염 시대 이후의 일이었다. 촉과 수시로 교전을 벌이던 이 때 제갈량은 당연히 '대마왕' 취급이었다.

이때 혜강의 명성에 흠을 내는 음모를 꾸며 이를 구실로 삼았으며, 혜강이 사망하고 결국 죽림칠현은 완적처럼 현실도피적 음주, 상수처럼 그럭저럭 관리로서의 삶, 왕융처럼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경우, 산도의 경우처럼 고관을 지내는 등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사마씨에 저항하는 세력이 남지 않게 되었다.

어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종사계(종회)가 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젊었을 때 글을 한 장 썼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완보병(완적)의 글이라고 하면서 글자마다 모두 뜻이 살아 있다고 하더니, 그것이 내가 쓴 것임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더군."

세설신어에 따르면 종회가 왕융,배해를 평한 기록이 있다.

종사계(종회)가 왕안풍(왕융)을 이렇게 평하였다.

"아융(왕융)은 남의 속마음을 분명하게 알아낸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다.

"배령공(배해)은 종일토록 현담을 해도 다함이 없다."

그때 마침 이부랑의 자리가 결원이 생기자 사마소가 종회에게 어떤 인물이 적임이냐고 묻자, 종회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배해는 맑고 사리에 정통하고, 왕융은 대범하면서도 요령이 있다하여 둘 다 적임자입니다.'

이에 사마소는 배해와 왕융을 등용하였다.

문명왕황후열전에 따르면 왕원희는 사마소에게 종회를 중용하지 말하고 조언했고, 양호열전에 따르면 종회가 총애를 받으면서 양호를 시기해서 양호가 그를 아주 두려워했다.

혹자들이 말하길 종회의 이복형 종육은 사마소에게 은밀하게 "종회는 책략(술수)에 의지하여 보증하기 어려우므로 중요한 직책에 위임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고, 한진춘추에 따르면 사마소는 그 충량을 가상하게 여겨 웃으며 종육에게 "만약 경의 말과 같다면 (종회가 반란하더라도 그 죄가) 반드시 종족에게 미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답했다. 종육은 이 말을 했던 덕분에 나중에 종회가 반란을 일으켰어도 연좌제에서 용서되었다.

종육이 일찍이 사마소더러 '내 동생 종회는 믿을 수 없는 인간이다'라고 경고했기에 사마소가 그 경고를 기억하고 용서한 것이라는 말인데, 이는 설령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혹자들이 말한 것이라고 해도 '종회는 친형 종육마저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말했다'고 할 정도로 종회에 대한 인식이 세간에 어떻게 퍼져 있었는가에 대한 증언이다. 즉, '종회는 친형 종육 조차도 믿을 수 없었다고 했던 인물이며, 반란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라는 인식이 세간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2.5. 촉한 정벌군

사마소는 촉한강유가 자주 출병하여 전쟁을 벌이고 이 당시 유선이 암약한 정치를 펼쳐 촉의 국력이 쇠약했으리라 추측하고 촉을 멸망시키려했다. 대촉 전선을 담당하던 등애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촉한의 방어선은 아직 튼튼하다며 반대했지만, 유일하게 종회는 사마소와 같은 생각을 하여 촉의 지형을 조사하고 계획을 세웠다.

신헌영전에 따르면 신헌영은 양호에게서 종회가 서쪽으로 출정한다는 소리를 듣자 그가 반역을 일으킬거라 예측했고 종군하는 아들 양수에게 처신을 조언했다. 정사 삼국지 종회전과 자치통감에 따르면 종회가 촉을 공격하자 소제가 사마소에게 "종회는 홀몸이라 중임을 맡겨선 안된다"고 했는데 자치통감 주석에 따르면 이는 종회에게 자제가 없어서 출병하는 장수에 대한 위나라의 인질제도가 통하지 않는 인물이므로 위험하다는 의미였다. 종회가 충성심이 깊은 인물이었다면 이런 조언이 나오지 않았을테지만 이런 말이 나온거 자체가 그만큼 종회는 충심을 보장할 수 없는 인물이란 뜻이다. 진서 문제본기에서는 대놓고 "종회는 믿기 어려운 사람이니 그로 하여금 출병하게 해서는 안됩니다."라고 소제가 말한 것으로 나온다. 어쨌거나 정사 삼국지, 진서, 자치통감 모두 사마소는 소제에게 "종회만이 촉을 공격하자는 의견이 나와 맞았고, 그래서 종회는 촉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며 반란을 하더라도 촉나라 사람들, 집에 돌아가자고 하는 위군 사이에서 반란을 성공시킬 능력이 없네"라 답했다. 그리고 소제에게는 이 말을 한 것을 함구하라 명한다.

263년, 위는 촉한 정벌에 나선다. 옹주자사 제갈서와 정서장군 등애가 각각 3만의 병력을 이끌었고 종회는 진서장군이 되어 10만을 이끌고 촉한을 공격했다. 등애가 강유와 교전하며 그를 묶어두고, 제갈서가 강유의 퇴로를 차단하며, 종회가 한중을 점령하고 촉으로 진격하는 것이 위군의 전략이었다.

우선 아문장 허의에게 앞쪽에서 길을 닦아 열도록 하고 종회에게는 뒤쪽에서 따라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랑이 파괴되어 말의 발이 빠졌으므로 허의가 죽게 되었다. 허의는 허저의 아들로, 왕실에 공훈이 있었지만, 용서받지는 못했다. 군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은 자가 없었다.

종회는 한중에 도착하자 한성, 낙성, 황금성, 양안관구를 공격했고 그 중 양안관구가 장서의 배신으로 함락되자 거기를 점령하고 많은 곡식을 얻었다. 또 양안관구의 촉한 사람들에게 유비가 조조를 배신해 다른 쪽에 섰고 제갈공명은 진천을 넘보고 강백약은 농우로 자주 군사를 내어 우리가 지배하는 저족과 강족을 침범했는데 변경을 소란하게 하고 편안한 날이 없었다. 이것은 촉도 편안하지 못하게 하므로 귀순하면 위나라 조정이 잘 대해줄 것이며 귀순하지 않고 병사를 내면 후회해도 소용없다며 정촉의 정당성을 설파하기도 했다. 장완전에 따르면 한성을 수비하던 장완의 아들 장빈에게 편지를 보내 죽은 아버지 장완에게 경의를 표하고 산소를 정비하겠다고 했는데, 장빈은 선친의 묘가 부현(涪縣)에 있으니 서쪽으로 진군하거든 찾아가서 해달라고 했다. 부현은 종회가 검각을 뚫지 못하는 한 갈 수 없는 게 실상이었고, 장빈도 나중에 유선이 등애에게 투항할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또 촉 정벌 도중 서쪽 양안구로 가 사람을 보내 제갈량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이렇게 양안관구가 함락되고 종회가 검각으로 치달아 위군의 전략은 거의 완벽하게 성공하는 듯했으나, 강유의 페이크에 속은 제갈서가 길을 터준 사이 강유는 재빠른 기동으로 퇴각에 성공한다. 종회는 뒤늦게 강유 등이 지키는 검각에 이르렀다. 한편 강유를 포위하는데 실패한 등애는 곧바로 음평을 넘어 촉의 내지로 들어가려 하였고 제갈서는 종회와 합류하기 위해 백수로 향한다.

종회는 등애의 계획에 일단 동의했는지 먼저 강유가 도착했었던 백수에 뒤늦게 도착해 제갈서와 합류한 후 장군 전장등을 파견하여 검각 서쪽으로부터 쫒아서 곧바로 강유관으로 나아가게 했다. 전장은 백 리를 이르지 못했는데도 촉한군의 복병 세 진영(三校)을 만나 격파해야 했는데, 한대의 백 리가 41킬로미터를 좀 넘는 정도이므로 전장은 백수에서 출발하고 나서 그곳에서 불과 3~40킬로미터 이내에 있던 촉한군의 복병 진영들과 마주쳐야 했다. 전장은 곧이어 등애와 합류했고 등애는 전장을 선봉으로 삼고 먼 거리를 몰아 앞으로 전진하게 했다. 다만 후일 검각에서 식량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퇴각해 등애가 어찌되던 말던 제장들과 귀환할 것을 논의했던 것으로 보아 종회는 등애를 일종의 버림패로 생각했던 듯 하다.

이렇게 전장이 복병을 만난 곳은 백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며 강유관에서는 좀 멀리 떨어진 곳이다. 거기다 세워진 목적 자체가 음평고도(陰平古道) 마천령(摩天嶺)을 넘는 북쪽에서의 침입을 대비해야 하는 것인 강유관이 서쪽에서 오는 병사들을 고려해서 백수 근처까지 복병을 두었다고 보기도 어려우니 다른 촉한군이 병력을 매복시켰다고 봐야 하고 중간에 백수를 거친 병력을 지휘하는 장군이 근처에 복병을 두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종회가 백수에 도착해 전장을 파견하기 전, 먼저 거기에 도착한 촉한의 장군이 있었으니, 바로 강유였다. 강유는 답중에서 돌아와 음평에 도착하여 요화와 함께 병사들을 모아 합쳐서 관성으로 가려고 했으며 미쳐 도착하기 전에 관성이 이미 격파되었다는 것을 듣고 물러나 백수로 갔고, 이후 장익, 요화 등과 공동으로 검각을 지키며 종회에게 대항했다. 종회보다 먼저 백수, 검각으로 후퇴하는데 성공해 이제부턴 검각을 방어해야 하는 강유 입장에선 만약 종회가 검각 서쪽으로 우회병력을 보내 돌파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이를 막고 적병의 움직임을 탐지해 본대에 경고를 해줄 병력이 필요했을 것이고, 따라서 백수에 있었을때 따로 병사들을 파견해 촉한군의 복병진영을 구축하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종회전에 따르면 전장을 등애에게 보낸 이후 종회는 제갈서와 함께 검각으로 향했다. 강유전에 따르면 검각에서 맞닥들인 강유에게 종회가 서신을 보내 말했다. "공후(강유)는 문무의 덕을 갖추고 세속을 초월함의 지략을 품고 공을 세워 파, 한을 구제하여 중국에까지 명성을 드날렸으니 멀고 가까운 이들 중 그대의 명성에 귀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소." 강유는 서신에 답하지 않고 수비에 열중했다. 종회는 강유와 교전을 치르는 와중에도 휘하 군대를 장악하려고 휘하 사령관 중 한사람이던 제갈서가 두려워 하며 전진하지 않는다는 상소를 몰래 올려 병권을 박탈하고 죄인용 수레에 실어 내보냈고 군권을 모두 자신에게 귀속시켜 자신의 군권을 강화하는 등 야심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그러나 종회는 강유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인해 별 성과를 얻지 못한다.

어쨌거나 촉 내지로 위군을 들이지 않았고 양안관구 외에 함락된 한중의 중요 요충지가 없는데다가 검각은 본래도 천혜의 요새, 강유의 군대가 살아남아 험요지를 벌려 지키고 있자 종회는 강유를 포위하는데 실패한 후 검각에 도착한 제갈서의 합류로 10만이 훌쩍 넘는 대군을 가지게 되고도 검각에서 발이 묶여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고 만다. 본래 강유의 계획은 한중을 위군을 가두는 일종의 거대한 덫으로 반드는 것이다. 그 덫, 함정 안에 가두어진 위군은 진령산맥을 넘어 보급하기에 애로사항이 무지막지하게 꽃핀다. 당초 계획대로 검각을 뚫지 못한 이상 위군은 강유의 계획인 양안관구에서 한중까지 갇힌 꼴에서 검각과 한중 사이에 갇히는 꼴이 되는, 좀 더 넓어진 함정에 가두어진 것에 불과했다. 이렇게 된 이상 종회의 선택은 검각을 어떻게든 뚫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종회가 강유에게 회유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지만 당연히 묵살. 이에 제갈서의 군대도 등애를 무시하고 지원을 오지만 그런다고 검각이 뚫리지는 않았다. 제갈서가 본국으로 소환된 것은 물론 종회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서지만 강유 하나를 막지 못하고 뚫려 계획을 다 망쳤던 것에다가 오히려 궁지에 몰린 상황에 대한 화풀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휘권이 일원화되었다 하더라도 종회+제갈서의 10여만 이상의 대군 전체가 꼼짝없이 한중과 검각 사이에서 겨울철 추운 날씨에 갇혀 얼어죽고 굶어죽을 판인 상황이 변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위나라군의 막대한 대군은 오히려 약점으로 작용한다. 적국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서 있는데, 본국에서 보급하기는 어렵고, 현지에서 먹을 것을 구하려 해도 식량은 다 촉한의 요충지에서 거두어갔다. 그냥 양안관구가 함락되어서 거기의 식량이라도 얻었으니 망정이지 양안관구조차 뚫지 못했다면 진짜로 한중에서 굶어 죽을 판이었다. 거기에 제갈서의 3만의 병력이 더 추가되니 군량 소모가 더욱 심해졌다. 워낙에 대군인지라 보급에 한계가 있고 그냥 검각만 보고 내달린 탓에 제압하지 못한 한중 촉군 때문에 뒷통수는 간지럽고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이렇게 되면 오래 죽치고 있는 것도 불가능한데, 만약 여기서 물러난다면 다 합쳐서 16만(18만) 대군을 이끌었던 종회는 배고픔과 추위에 허약해진 군대를 이끌고 퇴각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데 뒤에서는 검각에서 강유가 이끄는, 든든히 먹고 치고 나올 촉한 주력군의 공격과 추격을 받을 수 밖에 없고, 한중에 도착하면 한성과 낙성, 황금성에서 축적해 놓은 식량을 먹어가며 수비하면서 원기 왕성한 한중 촉군 1만명 이상이 일제히 나와, 굶으면서 퇴각하는 위군을 추격중인 촉군 주력군과 합세하여 협격을 하게 됨은 뻔한 이치였다. 좀 꼬이긴 했어도 당초 강유의 한중 방어선 계획이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30여년전, 조진, 사마의, 장합이 그랬고 20여년전 하후현조상이 그랬듯이 길고 험난한 보급선은 위군이 촉으로 공격해 들어올때 가장 큰 문제였다. 문제는 그보다 더 깊숙히 들어온 상태에서 검각이 막힌 이상 종회는 선배들보다 더 많은 병력과 더 길어진 보급선 때문에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서 겨울이라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지도 못하고 후퇴해야 한다는 것이다.[4] 이렇게 종회는 나아가 검각을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고 양안관구에서 얻은 곡식도 다 떨어졌는지 적지 한복판까지 들어와 멀리서 군량을 운반해야 하는, 보급선이 너무 길어진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고 만다.(강유전, 화양국지) 자치통감에는 아예 대놓고 이 당시 종회가 이끄는 10만 이상의 위군 주력 병사들이 먹을게 부족하고, 식량이 다했다고 나온다(軍食乏). 종회는 검각에서 이길수 없게 되고 곡량을 멀리서 옮겨야 하니 병사들이 굶기 시작하자 병사들을 인솔하여 물러난 후 최대한 피해를 덜 입기 위해서 검각에서 퇴각하는 계획을 제장들과 논의하기 시작했다.

반면 원래 조공이었던 등애는 치중까지 합쳐도 겨우 2만명도 되지 않은 병력을 이끌고 음평 산길을 타고 전장등의 군대와 합류한 뒤 한의 덕양을 통해 부성으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강유관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강유관의 수문장인 마막이 말 그대로 사지(死地)를 지나 제대로 된 보급도 없이 지치고 다친 등애의 선두진영이 강유관 앞에 도착하고 그냥 항복해 버리면서 등애는 병력이 비전투손실과 보급부족으로 1만명만이 남은 상태에서 당초 목표대로 부성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종회는 곧 부까지 진군하여 호열, 전속, 방회 등을 파견하여 강유를 추격하도록 했다. 유선은 등애에게로 가서 투항하면서, 마지막으로 오성현까지 가면서 저항하던 강유는 등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종회에게 투항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강유는 광한군 처현까지 와서 병사들에게 모두 병기를 버리라고 명령하고, 부절과 전거를 호열에게 보내고, 동쪽 길로부터 종회에게로 가서 투항했다. 강유전 주석 진기에 따르면 종회가 항복하러 온 강유에게 말했다. "항복하러 오는 것이 어찌 이토록 늦었소?" 강유가 정색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 사람을 오늘 보는 것만도 빠른 것입니다!" 종회가 그말을 듣고 그를 매우 높게 여겼다.

종회는 군율을 정돈하고 촉의 관료들과 교분을 맺어 강유와 친해졌다. 강유전에 따르면 종회는 강유와 함께 밖으로 나갈 때는 같은 수레를 타고 좌정할 때는 같은 자리에 앉을 정도였고, 두예에게 "백약(강유)을 중원의 명사에 비교하자면 공휴(제갈탄)나 태초(하후현)가 그보다 더 낫지는 못할 것이오."라 말했다.

장완전에 따르면 유선이 등애에게 투항한 후 장무(장완의 아들)가 종회에게 가자 잘 대해주었다. 방덕전 주석 촉기에 따르면 종회는 촉을 평정한 때에 전후에 북과 피리를 울리고 방덕의 유체를 맞이하여 조문하고 업에 보내 장례케 하였는데, 방덕의 묘 안의 머리와 몸이 마치 산 사람 같았다. 그러나 방덕의 유체가 촉에 있었다는 말은 배송지가 말이 안된다고 부정했다.

막상 자기가 주공으로서 얻었어야 할 촉한 멸망의 공을 등애가 가져가자 종회는 자신의 공이 많았다면서 장황한 상소를 써댔고 결국 종회는 촉을 완전히 멸망시킨 공으로  삼공의 하나인 사도에 봉해진다. 등애는 태위, 그의 두 아들은 정후에 봉해졌다. 향후 일으킬 반란을 생각하면 일단 자신이 사마소를 폐하라는 태후의 명을 받았다는게 납득이 갈 정도로 지위가 높아져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2.6. 종회·강유의 난

그래서 사도를 받는 여기서 그냥 끝내면 좋았겠지만 종회는 은밀히 사마소에게 역심을 품고 있었고 촉정 당시부터 촉한의 인사들과 교분을 쌓으려 했는데 강유는 촉을 부흥시키려 했기 때문에 종회가 역심을 품고 있는 점을 파악하고 그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해 종회에게 사마소가 당신을 팽할것이라고 말한 후 반란을 암시하는 말을 흘렸고, 종회가 이로 말미암아 우정과 교분, 환대하는 마음이 깊어졌다고 한다. 한진춘추의 기록은 이렇고 여기에 더해서 종회가 그로 말미암아 같은 수레를 타고 같은 자리에 앉게 했다고 자치통감은 기록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종회가 강유를 좋아했던지 검각 농성 당시에 그에게 편지를 보낸적도 있었고 항복한 강유의 태도를 보고 높게 사기도 했고, 중원 최고의 명사들인 하후현제갈탄보다도 높이 평가했다.[5]

사실 종회가 그런 생각을 품을 만한 이유가 있던것이 사마소는 그전까지 반역하려 한다는 말이 없었고 아무 죄없던 등애가 죽자 반역자로 몰아 그의 일족을 죽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오로지 촉정의 공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신 왕조를 건설할 야심을 품고 있었고 사마소의 계획을 홀로 돕던 종회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촉정에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을 사마소가 가만히 놔둘 인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반역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는 얘기가 그전부터 전혀 없었던 등애와는 달리 사마소의 부인 왕원희, 소제, 가충, 그리고 혹자가 전하는 말이긴 하지만 친형 종육 등 사마소 주변 인물들이 종회의 야심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고, 친형조차 종회는 못 믿을 인물이라고 했다는 말이 혹자들에 의해 세간에 널리 퍼져있는 것을 종회가 듣지 못했을리 없다. 그만큼 그의 처신이 이렇게 한결같이 부정적일 수 있을 정도로 권력지향의 냄새를 풀풀 풍기며 좋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사의 최고 참모이자 생전에 종회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부하도 종회가 오만해지자 '니 야심이 많은 건 알겠는데, 그걸 이루긴 어려우니 신중해져라'라고 대놓고 종회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충고했을 정도면 말 다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사마소가 종회의 커리어를 만들어 주고 그를 중용했다고 해도 이렇게 사방에서 사마소의 아내부터 시작해서 주변인들과 (카더라 통신일 수도 있다지만) 종회의 형 종육조차도 사마소에게 '종회는 의심스럽다'고 해댄다는 소리가 들리는데 원래 하안 일파였다가 사마씨에게 전향한 종회에 대해서 사마소가 의심을 안 품는다고 종회가 믿을 수 있었을까? 결정적으로 사마소 자신도 안 그런척 했지만 종회가 등애를 모함하자 바로 종회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대놓고 드러내 대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향했다. 즉, 사마소는 종회를 겉으로 후대했지만 어느정도는 의심하고 있었으나 겉으로만 안 그런척 한것 뿐이고 그 막무가내인 사마소의 측근 가충조차 종회가 의심스럽지 않느냐며 사마소에게 물었을 정도였는데 종회가 사마소와 가까이 있으면서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종회는 그 식견없는 가충만도 못한 지력을 가진 인물이란 뜻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마당에 촉정이 끝나고 자신의 필요성은 없어지는데 공은 지나치게 높아져 등애처럼 사소한 잘못으로 팽당하기 전에 사마소를 먼저 친다고 생각했다면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아마도 종회 스스로가 등애를 모함하면서 이게 사마소에게 바로 먹히는걸 보고 거의 확신했을 것이다. 강유가 종회에게 반란을 부추긴것도 바로 이런 식의 불안감을 정확하게 핀포인트로 찌른 것이었기도 하고 말이다.

사마소가 그럼에도 종회에게 촉정군 사령관을 맡긴건 이 대전략을 가장 잘 이해하는게 종회였고 설마하니 촉한 현지 사람이 종회의 반란에 동참할 리는 없을테고, 위군들도 다 촉정 끝나면 집에 돌아가고 싶어하고 인망없는 종회를 따르지 않을 것이니 반란을 해봤자 스스로 멸족될 것이라는 판단하에서였는데 아무리 사마소라도 능력은 높이 사서 꽤 후대해 주기도 했는데 종회가 위군을 자신의 측근으로 장악할 수 있다고 믿어 반란을 저지르고 거기에 촉한 현지인인 강유가 촉한부흥을 위해 종회에게 동참하는 척하며 이용하다가 뒷통수치고 위군을 다 죽이려 했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종회는 반란을 저질렀고 결국 멸족되었으니 결과는 사마소의 예상범위긴 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종회는 결국 등애가 황제의 명을 가지고 전횡하자 위관과 함께 등애가 반란할 조짐이 있다고 고해바쳤다고 한다.[6] 또 등애전에 따르면 종회, 호열, 사찬 등은 모두 등애의 행동은 반역에 해당되고 변란의 징조가 있다고 아뢰었다. 아무리 종회가 모함했다고 해도 당연히 모반의 의도가 없던 호열, 사찬, 위관까지 종회의 의견에 동참할 정도였다면 등애의 전횡은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던 모양인데, 사마소는 등애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고 걱정하고 종회에게 명령을 내려서 함께 성도로 진군하도록 하고, 감군 위관에게 종회 앞에서 진군하도록 했으며, 사마소의 친필로 쓴 명령서를 갖고 등애의 군대를 설득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종회는 위관을 등애의 군사들에게 죽게 하고 그 죄를 등애에게 덮에 씌우려는 수작을 부렸지만 위관이 먼저 눈치채 일단 일을 진행하면서[7]밤새 달려 성도에 도착해 등애가 통솔하는 제장들을 설득, 등애가 일어날 때는 모두 위관에게 동조했으므로 위관은 무사할 수 있었다. 아침이 되자 등애가 인솔하는 모든 제장들과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곧 등애를 체포하여 죄인용 수레 안에 들어가게 했다. 종회가 꺼렸던 것은 오직 등애뿐이었는데, 등애가 이미 붙잡혔으므로[8] 종회는 즉시 성도에 도착하여 독자적으로 대군을 통솔하여 그 위세는 서쪽 변방 지역을 진동시켰다.

그는 스스로 공명이 세상을 덮는 것은 다름 사람 밑에서는 다시는 있을 수 없고, 게다가 용맹한 장수와 정예 병사들이 모두 자기 수하에 있다고 말하고 곧 모반을 계획했다. 그는 강유 등으로 하여금 모두 촉나라 명사를 인솔하여 야곡을 나가도록 하고, 종회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뒤를 따르려고 했다. 장안에 도착한 후 종회는 기병은 육지로 행군하도록 하고, 보병은 수로로 흘러내려와 위수로부터 황하로 들어가도록 하여, 닷새만에 맹진에 도착하게 하여 기병과 낙양에서 합쳐 하루아침에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종회가 등애를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자 사마소는 서촉으로 가려했는데, 소제가 "종회의 군사가 등애보다 대 여섯배 많으니 그냥 종회에게 등애를 체포하도록 명령만 내리시면 되지 직접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라 말하자 사마소는 "그대는 지난번에 (종회는 홀몸이라 인질이 없으니 중요한 일을 맡기기엔 위험하다) 한 말을 잊었소? (종회를 의심했으면서) 그런데 나보고 출병하지 말라 하는 것이오?[9]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사실을 퍼뜨리지 마시오! 나는 스스로 마땅히 신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하니 다른 사람이 나에게 책임을 지게해서는 안될뿐이지 내가 어찌 다른 사람에게 먼저 의심을 품겠소?[10][11]내가 장안에 도착하면 내 스스로 처리 될 것이오."라 답했다. 종회전에 따르면 이 일이 일어나기 얼마 전 가호군(가충)이 사마소에게 "종회가 자못 의심스럽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사마소는 "지금 그대를 파견해 일을 시키는데 그대 또한 의심할 수 있겠소?"라 답하자 가충은 아무 말 못했다. 사마소가 종회를 의심하지 않은 것은 당연히 아니고, 그냥 가충더러 입 다물고 있으라는 의미에서 한 소리로 봐야 할 것이다(...). 소제에게도 종회가 의심스럽다는 말을 밖으로 퍼뜨리지 말라고 당부한 사마소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진서 순욱전을 보면 사마소는 결국 종회의 반란 소식을 전해듣고 자기가 종회를 후대해 준것도 있는데 설마하니 촉땅에서 자기 뒤통수를 칠까 하고 미처 믿지 않았기도 하던 모양이다. 결국엔 의심대로 되어 버렸지만.

하여간 유일한 꺼림거리 등애가 없어지니 살판난 종회는 강유와 모반 작전을 구상하나, 종회가 받은 사마소의 편지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등애가 혹시 부름을 받고 나가지 않을까 걱정이오. 지금 중호군 가충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만 명을 이끌고 여곡으로 들어가서 (한중) 낙성에 주둔시키도록 하겠소. 나는 10만 명을 인솔하여 장안에 주둔하겠소. 가까운 시일에 만납시다.

사마소가 이렇게 통보하자 종회는 사마소가 자신의 역심을 눈치챈 것을 알아채고 매우 당황하여 서둘러 위군을 장악해야 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사실 신헌영을 비롯해 이미 그의 행동에게 역심을 읽은 사람은 많았고 사마소의 부인 왕원희를 비롯해 사마소에게 그의 야심을 간언한 이도 많았으며 사마소 자신도 종회의 재주만 높게 샀을 뿐이지 그가 언젠가는 배반하리라는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만큼 그가 위나라에서 부터 그런 쪽으로 야심을 풀풀 풍기던 인물이라는 점은 사실인 듯하다. 결국 종회는 속전속결을 단행하고 측근에게 잘되면 천하(天下)를 얻을 것이오, 못 돼도 서촉(西蜀)으로 물러나 지킨다면 유비(劉備)처럼 될 것이외다라 말한다.[12]

이에 종회는 264년 정월 15일에 성도에 도착했다. 그 다음날인 16일, 종회는 호군, 군수, 아문가독 이상 및 촉한의 옛날 관리들을 모두 초청하여 촉한 조당에서 태후의 상을 당했음을 발표하였다. 종회는 태후(명원황후)가 남긴 조서를 거짓으로 만들어 종회에게 병사를 일으켜 사마소를 폐하도록 했다고 하고, 위조된 조서를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전부 보여주고 아랫사람에게 의논을 끝내게 한 뒤 목판에 쓴 증서로 관직을 임명하였으며, 또 신임하는 사람들을 파견하여 각 군대를 대신 관리하도록 하여 반란군을 조성한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종회는 청하여서 왔던 여러관리들, 그러니까 호열 등 위나라 제장들을 다 익주 관서에 가두고 성문과 궁문을 모두 닫고 병사들에게 엄하게 포위하여 지키도록 했다. 종회는 위관이 몹시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자 그 말을 믿고 위관을 풀어주었고 위관은 관사에 갔으며 종회는 의심하지 않았다.[13] 한편 강유전 주석 화양국지와 자치통감에 따르면 강유는 종회에게 먼저 북쪽에서 온 위나라 장수들을 죽이도록 가르쳤고, 그 뒤 종회를 천천히 죽이고 위나라 병사들을 파묻어 버릴것을 계획해 최종적으로는 한나라를 다시 세울 계획을 짜고 은밀히 유선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원컨대 폐하께서 며칠 동안만 모욕을 참으시면 신이 사직이 위태로우나 다시 안전하게 하고 해와 달이 빛을 읽었으나 다시 밝게 빛나도록 하겠습니다."

종회전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종회에게 "아문기독 이상을 전부 죽여야 합니다."라 말하나 종회는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강유전을 보면 위장들을 죽이고 위군을 습격하는 이런 일을 옆에서 조언한게 강유라는 뉘앙스가 보이며 자치통감에선 위나라의 제장들을 죽이라고 말한 사람이 강유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시기 그는 일을 결단하지 못하고 망설이면서 스스로 화를 재촉하였다.

한편 종회의 측근 구건은 호열이 혼자 구금된 것을 불쌍히 여기고 종회를 만나서 친병을 안으로 들여보내 음식을 나르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각 아문의 병사 또한 그 예에 따라 한 명씩 드나들었다. 구건은 본래 호열의 부하였는데, 호열이 그를 사마소에게 추천하였고, 종회는 사마소에게 구건이 자기를 따르게 해달라고 정하여 그를 매우 신임하고 아꼈다. 상식적으로 위장들을 모두 감금한 상태에서 위관만 풀어주는것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고, 호열을 감금한 시점에서 호열이 추천한 구건 역시 의심이 대상이 되어 구금되어야 하건만, 사마소의 편지를 받고 난 후 매우 당황한 이 때의 종회는 이미 그럴 만한 정신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열의 친병들이 감금된 호열에게 드나들게 되자 호열은 그의 친병에게 말하여 아들(호연)에게 종회가 위나라 장수들을 다 죽이려한다는 편지를 보냈고, 각 아문의 친병 또한 모두 이와 같은 말을 하였으며, 하룻밤 사이에 서로 말을 전하여 전원에게 알려졌다.

지금까지 종회는 거짓으로 죽은 곽태후(명원황후)가 남긴 조서를 만들어 반란을 일으키고 반대하는 부하 장수를 모두 감금하는데 까진 성공했지만, 그 이상은 본인의 결단력 문제로 진행시키지 못했다. 그 사이, 18일 정오가 되자 감금당한 호열의 병사와 아들 호연이 군사를 이끌고 아버지를 구하러 쳐들어왔다. 여러 위군들도 지휘관 없이 바로 따라서 쳐들어 왔다. 종회는 놀라고 당혹해하면서 강유에게 말했다. "이 병사들이 와서 나쁜 행동을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오?" 강유가 말했다. "오직 마땅히 공격할 뿐이오!" 종회는 그제서야 병사를 파견하여 어지러이 싸웠다. 감금되었던 위나라의 제장들은 그제서야 죽이려 드는 종회의 공격을 막고 모두 탈출해 병사들과 합류해 싸웠다. 강유는 종회의 의병을 이끌고 싸워 대여섯 명을 직접 죽였다. 병사들은 강유와 결투하여 죽이고 다투어 달려가서 종회를 죽였다. 종회는 당시 마흔 살이었고, 수백 명의 장수들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종회의 모함으로 호송되던 등애 역시 후환을 두려워한 위관과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전속에게 아들과 함께 살해당하고 일족이 화를 입었다.

사실 이 대목에서 종회의 행동은 많은 의문점을 남긴다. 강유에게 푹 빠져서 군권이고 뭐고 다 돌려주고 강유의 제안대로 위장들을 죄다 죽이려는 모습은 강유에 대한 신뢰가 커서라고 퉁치기엔 지나친 부분이다. 위군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서조차 종회는 스스로 뭔가 하려는 모습 대신 놀라서 강유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매달리기만 했다. 오죽했으면 배송지가 '종회는 위장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버리고 강유에게 대군을 주어 선봉으로 삼고자 하였다. 만약 위장들이 모두 죽고 병사가 강유의 손에 주어졌다면 종회를 죽이고 촉을 회복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라고까지 평했으니... 한편 삼국지집해의 지은이인 노필(盧弼)은 , "종회가 강유를 임용한 것은 그가 사마씨(司馬氏)의 일당이 아닌데다 망국의 장수로서 그 재주가 또한 임용할만 했기 때문이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사마소가 이끈 대군이 장안에 도착했을 때 종회의 난은 과연 실패로 끝나 종회는 이미 죽었고, 모든 것이 사마소가 예상했던 것과 같았다. 위군의 폭주는 위관이 여러 장수들의 부서를 나누면서 수일내에 안정되었다.

2.7. 사후

종회는 원래 형 종육의 아들들을 키웠는데 형의 아들인 종옹은 종회의 반란을 수행하다가 함께 죽었다. 결국 종회는 반역을 저질렀기에 일가가 모두 죽어야 했고 형의 아들 종의종준, 종천 등은 하옥되었으며 당연히 참수되어야만 했다. 사마소는 형식상으로 황제 조환에게 이를 상주했고 조환은 조서를 내렸다.

비록 종회의 죄는 크지만 아버지 종요는 세 조씨(조조, 조비, 조예)의 시대에 최고의 직위인 태사에 임명되었다. 또 그의 형 종육은 국사를 처리하는데 공적이 있었고 무엇보다 종육이 살아있을때 동생 종회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으니 중용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어서[14] 그걸 보아 종준과 종천은 용서하고 관직과 작위를 그대로 하게 했다. 그러나 종회를 따라 수행했던 종의와 종웅의 자손은 멸족되었다.

이것은 공손강의 아들 공손황공손연의 이야기와 매우 비슷한데 결과는 정반대다. 공손강이 죽은 후에 공손강의 아우이자 공손연의 숙부였던 공손공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무능한 데다가 고자이기까지 한 공손공을 밀어내고 공손연이 찬탈했는데, 공손연의 형이었던 공손황은 당시 공손공에 의해 221년부터 낙양에 인질로 있었다. 공손황은 공손연이 장차 공손씨 일가를 망칠 것을 예감하고 당시 조예에게 공손연이 모반을 꾀하고 있으니 처리하라고 상주했지만 묵살당했다. 결국 237년 공손연이 난을 일으켰고 조예는 고유의 상소에도 불과하고 공손황과 그 일가를 죽였다. 결국 공손연도 토벌되어 멸족당함으로써 공손황의 예감은 적중했다. 다만 공손씨 일가는 종회 일가와는 다르게 사실상의 독립 국가였으므로, 타 세력 볼모의 특성 상 할 수 없이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 안 그러면 타세력이나 이민족들로부터 볼모를 잡는 행위가 무용해지니 일종의 본보기인 셈.

한진춘추에 따르면 종회의 공조 상웅이 종회를 거두어 장사 지내주자 사마소가 상웅을 불러 책망했는데 상웅이 옳은 말을 하자 도로 보내주었다.

종회가 죽은 이후, 종회의 집에서 도론(道論)이라는 서적 20편을 얻었는데, 실제로는 형명가의 저작이었고 글이 종회가 쓴 것과 비슷했다.

장화열전에 따르면 풍담사마염에게 "사마소가 한계가 있는 종회를 우대해서 종회가 반란을 일으킬 마음을 품었다."고 말했다.

수신기에 따르면 상제가 세 장군 조공명, 종사계(종회) 등으로써 각자 귀신들을 감독하여 사람들을 잡아가도록 하였다.[15]

3. 평가

인격 면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군권을 독차지하기 의해 전우 제갈서를 모함하고 승장이면서 패장 강유에게 이용당해 반란을 일으켜 전우인 등애[16]를 모함하거나 죽림칠현 중 한 명이었던 혜강을 죽이고,[17] 허저의 아들 허의조차도 길을 닦던 도중 교량이 파괴되어 말이 빠지는 실수했다는 이유로 죽여버리는 일련의 행동을 볼 때 인격적으로 절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허저 정도면 장악우장서 다음가는 위나라의 공신급 장수이다. 이 역시 원인이 되어 종회와 척을 진 부하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종회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너도 나도 종회를 죽이겠다고 들이닥쳤고 종회 휘하에 병사들 마저 대부분 이반해 버렸으니 평소 그의 인망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종회와 강유의 난 항목에서도 설명했지만 당대에는 종회를 그냥 언젠가 반란을 일으킬 자, 못해도 믿을 수 없는 자라는 평가가 팽배했다. 종회를 본 모든 사람이 일관성 있게 종회는 질투심 강하고, 날카롭고, 의리 없고, 이득에 밝으며 스스로의 책략에 지나치게 의존해 보증할 수 없고, 신하로 머물 사람이 아니고, 야망만 큰 사내라고 말하고 있다. 다만 사마소가 종회의 반란을 유도했다는 얘기는 결과론적인 얘기고 사마소도 '에이 설마 아무리 종회라고 해도 내가 후대한 것도 있고 촉한 사람들이나 위군들이 호응 안해주는데 반란 일으키겠어?'라고 생각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장담했다. 종회가 강유에게 홀랑 넘어가서 진짜로 반란을 일으켜서 문제였지만(...), 그래서인지 진서 순욱전에 따르면 종회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얘기를 실제로 들었을때 아직 심문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마소는 자기가 종회를 특히 후하게 대해 준게 있어 반란이 진짜 일어났는지 아직 믿지 않는 반응도 보였다. 물론 종회가 그냥 반란 일으키지 않고 돌아왔다고 해도 사마소가 종회가 진짜로 반란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자 장안으로 향한 것을 봤을때 무사했으리라는 장담은 힘들다.

또, 종회는 사람을 사귈때 그 사람의 명성과 지적 수준을 중시했고 자기 기준에서 천하고 멍청한 사람들을 무시했다. 이러니 휘하 병사들이나 군관들에게 호감을 샀을리가 없는 것이다. 실제 역사 속 종회는 사교성이 좋은 사람보다 혜강이나 하후현 등 오히려 뻣뻣하고 대쪽같은 성격의 소유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편이었다. 따라서 강유가 강직하지 않으며 신분이 낮고 말이 조금이라도 안 통했다면 아마 강유를 개무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도 강유는 정현의 학문을 좋아했고 종회는 현학에 더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짧은 시기에서나 종회가 강유에 호감을 느꼈지 이런 쪽에서 지적 갈증을 느끼던 종회에게 있어서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강유에게 관심이 식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능력 면에서도 문제가 좀 있는데 종회는 커리어 내내 참모 역만 맡았지 장군으로서의 역할을 맡은 것은 총사령관이었던 촉한 정벌 때 밖에 없었다. 그가 장자방이라고 불렸던건 그의 형 종육이 평가했듯이 모책이나 술수에 능했고 남을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아넣기 잘했기 때문, 즉 정치질에 능했기 때문이지 실제 사령관으로서 군사를 다루는데 능숙했기 때문이 전혀 아니다. 촉한 정벌 당시 약해질때로 약해진 등애군을 잡고 원준의 말처럼 역시 보급이 되지않아 약해진 군대를 이끌던 종회가 제대로 강유와 승부를 냈다면 촉한의 촉군태수를 지냈던 왕숭의 평가처럼 역전의 용사인 강유가 승리할 가능성도 상당히 높았다. 왕숭도 종회의 재능을 장자방으로 불렸다 평가했지만 그건 오히려 노련한 장수 강유에겐 이길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는 소리도 된다.

또 종회는 군사령관으로서의 경험이 거의 없었고 주로 낸 책략들도 이간계, 정치질, 모함질이지 모사로서 거시적인 큰 계획이나 군사를 이끌거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작전을 수립한 적은 촉한 정벌전 전에는 전혀 없다시피 했고, 이것도 참모로서 계획한 것이지 실제 군사령관으로서 계획을 받아들이고 같이 짠 건 사마소다. 그나마도 유선이 강유 말을 제대로 들었으면 막힐 가능성이 높았고 유선이 강유의 말을 듣지 않았음에도 강유의 분전으로 계획 자체가 망할뻔한걸 등애가 겨우 살려낸 것이다. 때문에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계획, 명분이나 일처리도 허접하기 그지 없었다. 막상 군을 이끌고 장안과 낙양을 치겠다는 계획도 만약을 대비한 사마소가 장안으로 출정하자 바로 포기해버렸고 강유야 구 촉한군의 지휘권을 돌려받고 위장들 다 죽이면 종회도 죽일거였으니까 어차피 자기 계획이 성공하면 실행되지도 않을 종회의 개판 계획도 그냥 넘어가 줬을 것이다.[18] 그리고 지금까지 사마소에게 잘 붙어먹으면서 권력을 휘둘렸던 작자가 하루 아침에 사마소의 전횡을 비판하며 반역을 하는데 대체 누가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고 따르겠는가. 반란씩이나 되는 큰일을 도모하는데 정작 명분이 없는 게 문제였다. 그런 주제에 결단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상술했듯이 장군으로서 부하들한테 인심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주변(특히 강유)에서 위장들을 가둔 이상 어서 죽이라고 한 것이 아마 종회에겐 거의 유일무이한 찬스였을텐데 종회가 망설이며 우물거릴 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고 그 사이 위의 제장들이 다 갇혔다는 소식은 위군 전체에게 퍼진 뒤였다.

더군다나 자신이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 전에 관구검제갈탄의 난이라는 좋은 반면교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로부터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햇다. 대신 자신이 후대의 반면교사의 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둘과 비교하기도 실례인 것이, 관구검은 최소한 해당 지역에서 어느 정도 인망이 있었고 명분은 나름 확실했으며, 사마의 사후인 시점이라 아직까지 사마사의 능력이 검증된 것은 아니었다. 즉 타이밍도 나쁘지 않았다는 것. 제갈탄은 본인 스스로가 관구검의 반란을 반면교사 삼아서 인심 확보에 더욱 주력했으며, 명분은 당연히 뚜렷하게 갖췄고, 마찬가지로 사마사가 죽고 난 이후라 타이밍도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제갈탄에게는 문앙이라는 인간흉기와 동맹인 동오가 있어서 승부를 걸어볼만했다. 근데 종회는 반란을 꿈꾸면서 인망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고 명분이 아예 없는 수준이었는데다, 자기가 활용할 장수라고는 항장 출신인 강유 밖에 없었다. 거기다 이 당시는 사마소와 중앙군이 건재하고 각 군의 장수들마저 병권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데도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등애를 견제하는 건 좋았지만 지나치게 견제하는 바람에 사마소의 의심을 샀고[19] 위관의 경우 알면서도 막지 못했으며 반란을 일으킨 자신에게 찬동하지 않는 위의 장수들을 가두는 병크까지 저지른다. 당연한 거 아닌가 싶겠지만 한두명도 아니고 거의 대부분의 장수가 찬동하지 않았는데 그들 모두를 가둬 그 부하들을 모조리 적으로 만든데다 임시방편으로 가두기만 했을 뿐 병권을 빼앗은 것도 아니고, 죽여서 후환을 없앤 것도 아니었다. 결국 이런 허술한 일처리 때문에 반란이 성공하기는 커녕 오히려 역풍을 맞아 본인의 목숨을 잃은 것은 물론, 강유의 일족은 몰살당하고 수백명의 장수가 살해당하는 성도대학살이 벌어진다.

제갈탄의 난을 제압할 때 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똑똑해 보였고 사마소가 신뢰했던 점이나 세실신어 등에 그가 똑똑했다는 평가가 곳곳에 나오는 만큼 명성이나 능력이 대단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 까보니 제갈각의 오만함과 자기 과신 및 막장 처세, 마속의 아집과 지휘능력부재, 위연의 불량한 성격과 무모함, 양의의 충성심 결핍이라는 단점이란 단점은 죄다 합쳐놓은 인간이었다.

그래도 제갈각은 최소한 권력자에 오르기 전까지는 처세를 잘한데다, 독단적으로 실행한 일이 많긴 했지만 성공한 일도 많아서 종회랑은 비교가 안 된다. 명문가의 자제라거나 병크를 저질러서 일족이 몰살당했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마속의 경우 실책을 저질러서 전쟁을 하나 말아먹었지만, 자기 고집으로 명분 없는 반란을 일으키거나 학살전을 초래하진 않았으니 종회보단 나은 점이 분명히 있다. 물론 둘 다 제갈탄의 반란, 남중정벌에 참가해 권력자의 신임을 얻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병신짓만 저지른 점은 비슷하다. 위연의 경우 성격은 영 아니었지만 실력은 확실했고, 양의 역시 성격적 결함이 있었지만 진짜로 촉한을 배신하지는 않았다.

물론 아무 것도 안한 건 아니라 강유를 우대했고 성도 입성 후에도 촉한 출신의 관리들과 친하게 지내는 등 최소한의 관리는 했지만, 애초에 자기 수하도 관리 못하는데 이래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가끔 고도의 촉까들은 성도대학살과 강유의 몰락을 순전히 강유 탓으로만 돌리는데 잘 생각해보면 강유의 불운은 종회랑 손을 잡은 거였다. 그리고 강유의 목적이 촉한의 부흥인 이상 좋건 싫건 야심가 종회와 손을 잡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미 성도 및 전 촉 지역이 점령당하고 촉장들은 군권을 잃어버리고 유선도 위군의 수중에 넘어간 상황에서 강유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포기하고 은퇴해 조용히 여생을 마치던가, 아니면 빠른 시일 내에 위나라 세력을 이용해 내분을 일으켜 촉의 부활을 시도하는 도박 뿐이었다. 사실 시간을 오래 끌 수도 없었다. 오래 끌면 국력이 넘사벽인 위 정부에 의해 촉 영토 전체가 완전히 통제되고 유선을 비롯한 황족들은 위로 갈 테니까. 실제로 촉정벌 이후 등애는 촉의 병사들과 촉이 힘들게 쌓아놓은 재산들을 고스란히 위나라 것으로 이용해 동오를 칠 궁리를 시작했으며 성도반란 이후 촉의 구신들과 황족들은 낙양으로 끌려 가고 남아있던 촉장들은 진나라 장수로서 서촉을 다스리는 처지가 된다.

여기서 만일 종회가 명분, 인망 관리, 결단력 등 뭐 하나라도 제대로 갖췄다면 성도를 점령하고 위와 대치하면서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강유는 촉한의 부흥을, 종회는 자기 나라를 세우는 것을 염두했으므로 각자의 목적이 달랐으니 암투는 감수해야겠지만. 다만 종회가 자립하는 경우에도 소수의 촉한 정벌군의 병력만 가지고 위나라 본토의 사마씨랑 촉한 현지인 간에 고립되는 상황이니 위나라 정벌군에 토벌당하거나 강유가 통수쳐서 촉한 부흥을 시키는 와중에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다분하였을 것이다.

4. 동성애자?

소수의 마니아 중심으로 반 장난식의 게이설이 제기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걍 설이라고 치부하기엔 상당한 근거를 갖춘 견해인데, 일단 중년의 나이에 처자를 뒀다는 기록이 일절 없다. 종회는 역모죄로 죽었으니 보통 같으면 '삼족을 멸했다'는 일반인에게도 상당히 친숙한 서술이 뒤에 붙어야 한다. 그러나 종회의 경우, 맡아 기르던 조카들에 대한 처분만이 거론될 뿐이다. 서술이 아예 없으면 그냥 일족을 멸했는데 안 적었구나 할 법한데, 조카들에 대한 처분은 적어두었으면서도 처자에 대한 기록이 없다. 또 무엇보다 소제가 사마소에게 종회에게 10만 대군을 주는것을 말리는 기록이 종회전에 있는데, 종회는 '홀몸'이니 중임을 맡길수 없다고 만류한다. 당대 위나라의 법률은 출정하는 장수의 가족을 인질로 삼는 것이 법이었는데, 종회는 그런게 없으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종회는 진짜로 '자식'과 '처가'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는 21세기 현재보다 결혼 연령이 훨씬 낮았고 지체 높은 집안 자식이라 혼담도 많이 들어왔을 게 분명한지라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다.[20]

종회가 꽃미남이면서 여장 취향을 가진 하안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세설신어에 따르면, 당시 종회는 옥에 갇힌 하후현에게 狎하려 했다고 한다. 狎는 허물없이 친하게 지낸다는 뜻이지만 희롱한다는 뜻도 있다. 원래 하후현과 아무 교분도 없고 16세나 연하였던 종회가, 이제 사형을 눈 앞에 둔 그를 상대로 갑자기 집적거렸다는 이야기. 하후현은 "내가 비록 형장의 길로 가는 사람이지만, 그대의 말을 들어줄 수가 없다."고 종회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만약 순수하게 하후현을 존경해서 교분을 갖고자 한 것이라면 "내가 비록 죽을 사람이지만" 이라는 표현으로 거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희롱했다는 의미 쪽이 문맥에 맞는다. 여담으로 이때 하후현의 심문을 담당한 정위가 종회의 형 종육. 종육은 죽음 앞에 의연한 하후현의 모습에 울며 조서를 꾸몄다. 하후현 시점에서 보면 죽는 마당에 형은 눈물 쏟으며 조서 쓰고 생전 처음보는 동생은 난데없이 추파를 던지는 요상한 그림이 나온다.

촉 정벌 이후 반란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어처구니없는 행보도 강유한테 반해서 그랬다고 하면 말이 되긴 한다.[21][22]

그런데 이때 무렵 강유는 60대 노인이라 종회와 최소 20년은 나이 차이가 난다. 그리고 하후현도 종회에게는 상당히 연상이라는 것. 그리고 종회는 6살 때(230년) 아버지를 잃었다. 무의식 중에 아버지의 빈 자리를 채워 줄 다른 남자를 갈구한 것일지도?(...) 실제로 오지콘 항목을 보면, 그 성향의 사람들 중에는 아버지가 없었거나, 있었어도 아버지가 제구실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버지의 면모를 가진 연상의 남자에게 끌리는 사례가 있다고 한다.

물론 단순히 인성이 덜되고 성격이 더러워서 결혼을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후현을 희롱했다는 것도 출처가 세설신어라서 신빙성이 높지는 않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당시에도 이미 종회가 게이였다는 소문이 퍼져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일 수도 있다. 2010년대에도 부유하고 잘생긴 유명인사가 여자에 관심을 안보이면 동성애 스캔들이 도는데 권세 있으면 여자를 마음대로 취할 수 있었던 그 시절 중국에서야.

5. 마더 콤플렉스?

종회의 저서로 자신의 어머니 장창포에 대한 기록을 담은 《종회모전》이 있는데, 여기에 보면 4세에 효경, 7세에 논어를 가르치는 등 현대의 강남엄마 치맛바람 부럽지 않을 정도로 극성스런 교육을 받았으며 성인이 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또 종회도 그런 어머니를 많이 따랐다는 내용이 상당히 자세히 나온다. 이를 통해 어머니의 그늘이 종회의 생 전반을 뒤덮고 있었고 마더 콤플렉스 증상이 있었다는 추측까지 무리없이 가능한데, 이 때문에 여성과 만나는데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다.

이런 설을 채용한 것이 시미즈 아키의 괴력란신 쿠완 4권에 수록된 단편 종회전. 여기서의 종회는 종요의 총애를 얻기위해 자신을 이용하기만 하고 한 번도 사랑해주지 않은 어머니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여성을 혐오하면서도 한편으론 자랑스런 아들이 되어 그런 어머니에게 사랑받기를 평생 갈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6. 기타

세어에 따르면 맹달을 상서였던 종요가 신성태수로 부임하는 주태한테 넌 미천한 출신이 뭐가 그리 출세를 빨리 하냐고 농담을 걸었다. 사마의가 신성태수로 부임하는 주태를 놀리라고 시킨거긴 하고 주태도 재치있게 '그러는 넌 아버지가 쩔면서 승진은 왜 못하냐?' 로 받아친다. 여기서는 상서 종요라고 나와 있으나 종요는 이미 죽었고 태평어람에는 종육이라고 나와 있다. 일반적으로는 종육의 일화로 보지만, 종회의 일화로 보는 축도 있다.

전대소(錢大昭)는 진경운(陳景雲)이 이르길, '사마의가 주태를 탁용하여 신성(新城)을 맡긴 것은 응당 어린 황제를 보좌하며 조정을 관리할 때(정시正始 연간을 말함)일 것인데 (그때) 종요는 이미 죽은지 오래 되었다'고 말하였다. 태평어람에서는 종육(鍾毓)으로 적었으나 또한 잘못되었다. 종육은 정원(正元) 연간에 상서가 되었으며, 주태가 신성군을 맡았을 때에 종육이 이미 일찍이 팔좌[23]에 올랐다면 굴체(屈滯, 오래도록 하위직에 머뭄.)하였다고 놀릴 수 없다. 응당 상서랑(尙書郞) 종회가 맞을 것이다. 종회는 정시(正始) 연간에 상서랑이 되었는데 상서랑은 자질과 명위가 아직 얕으므로 하사(下士)에 머문다는 이유로 주태가 되받아치며 배척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7.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종회/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1] 양력으로는 동년 3월 3일
  2. [2] 조조가 자신의 장자방이라 칭한 것으로 유명한 그 순욱과는 동명이인이며, 같은 집안 사람이다.
  3. [3] 이건 종회 본인이 저술한 종회모전에서 나온 기록으로 종회 스스로는 '우리 엄마가 이렇게 잘났어'라며 기록해 놓은 모양이다(...).
  4. [4] 조진의 촉정은 여름, 낙곡대전은 봄~여름 사이였다.
  5. [5] 거기에 종회는 촉을 정벌할 때 제갈량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며 그에게 경외를 표했다는 기록까지 있는 걸로 보아, 종회는 아무래도 한 세대 전 자신의 나라를 위협한 최대의 국적과 그의 후계자격인 강유에 대해 여러가지로 의식하고 있었던듯.
  6. [6] 세어에 따르면 종회가 다른 사람의 글씨체 모방을 잘해서 검각에서 등애에게 오고가는 편지를 가로채 등애의 편지는 불손하고 교만하게 만들고, 사마소의 답서도 손을 댔다. 이후 등애가 모반할 조짐이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
  7. [7] 위관은 감군, 즉 부대의 감독관이었다. 그러므로 위관에게 등애를 체포하게 한 것은 직분상 맞는 일이었으므로 위관도 이를 거절하지 못했다.
  8. [8] 종회의 난이 진압된 후에 등애는 누명을 벗고 풀려나는 듯했으나, 평소에 등애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위관전속에 의해 살해당한다.
  9. [9] 그러니까 '예전 그대의 말대로 종회가 반란을 일으켰을지도 모르는데 인질도 없는 종회의 뭘 믿고 종회가 등애를 체포하여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게 놔두라는 것인가?'라는 뜻이다.
  10. [10] 즉, 나는 종회가 내게 불충하기 전에 내가 먼저 종회를 의심하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예전 니 말대로 종회를 의심하고 있었기에 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난 이미지메이킹을 해야겠으니 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다.
  11. [11] 물론 사마소가 그렇다고 등애의 결백을 밝혀주기 위해서 가는것도 아니었다. 촉정의 공은 오로지 사마소의 것이 되어야 했고 등애는 이미 사마소에게 불충분자로 찍혀 있었으니 종회가 만약 불충을 드러내면, 그와 함께 처리하려 했을것이다. 이미 결론은 정해놓았기 때문에 종회가 죽고 등애의 결백이 밝혀졌어도 등애를 죽게 한 위관에게 오히려 상을 내리고 사실상 등애를 역적 취급해 그의 일족을 멸한것이다.
  12. [12] 이 발언은 혜강에 대한 와룡발언, 제갈량 사당-장완 묘 참배 등과 함께, 종회가 유비와 제갈량이 세운 촉한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이라고 평가받는다, 실제로 적국의 수괴(?) 제갈량의 사당에 굳이 참배를 하고 그 묘를 함부로 건들지 못하게 하며 제갈량의 후계자인 장완의 아들한테 장빈에게 편지 보내서는 '나도 제갈첨이나 당신처럼 같은 천지의 기를 받았다, 우리는 사실상 동류'라는 드립을 치는가 하면 강유에게는 끝없이 구애(?)의 메시지를 보냈다. 만약 종회가 강유를 제갈량의 총애를 받던 후계자 위치로 보아서 '강유=제갈량'의 보좌를 받는 나는 유비와도 같다'라는 생각을 했다면 이 '나도 유비처럼 될 것이다' 발언이나 강유에 대한 이상할 정도의 신뢰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13. [13] 이건 자치통감의 기록이고 진서 위관열전의 기록은 좀 다른데, 종회는 위관을 머무르게 하고자 널빤지에 글을 써 위관에게 호열 등을 죽이려 한다고 했다고 한다. 위관은 허락하지 않았고 서로 두 마음을 품었는지 종회와 위관은 의심했다. 이후 위관은 측간으로 가 호열의 옛 급사를 만나고, 그로 하여금 삼군에게 널리 말하게 하여 말로 종회를 배반했다. 바깥의 여러 군사가 몰래 종회를 치고자 했지만, 위관은 나갈 수 없어 감히 일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후 위관과 종회가 신경전을 벌였고 위관은 종회에게 어지럼증이 있다 말하고 친히 의원에게 이를 보였다. 모두가 위관이 일어날 수 없다 말하자 종회는 거리낌이 없어졌다. 날이 저물어 문이 닫히자 위관은 격문을 지어 여러 군사에게 널리 알렸다. 여러 군사는 의로움을 부르짖으며 아침해가 뜰 때 모두 종회를 공격했다라고 한다. 즉, 종회의 난을 진압한게 호열, 구건이 호연에게 알려서 정오에 종회를 진압한게 아니라 위관이 격문을 돌려 아침에 그랬다는 것이다. 이는 정사 삼국지 종회전과는 완전히 다른 소리인데 자치통감은 진서 위관열전의 이 기록을 신빙성 없는 기록이라고 여겼는지 위관이 아팠다는 기록 외에는 종회의 반란을 서술할 때 삼국지 종회전 기록과 강유전 기록을 채택하고 진서의 기록을 채택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종회가 호열 등을 죽이려 했다는 소식을 이미 알렸는데도 위나라 군사들이 위관이 없어 종회를 치지 못한다는게 말이 되지 않는다. 거기에 한참 위군이 그렇게 어물쩡거리기만 하면서 위관의 지휘를 받지 못해 공격할 수 없다고 하다가 위관의 격문만 받아보고, 위관의 지휘를 받지도 않으면서, 그제서야 종회를 쳤다는 것은 완전히 모순이며, 결과적으로 이 서술은 종회 토벌의 공을 위관에게 공을 몰아주려는 냄새가 강하게 나는 것이다. 자치통감은 등애를 체포하는 과정이나 위관이 등애를 죽이게 된 동기 자체는 진서 위관열전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이 대목만 신빙성이 없다고 본 듯 하고 다른 자료 등을 인용해 위관이 병을 가장해 관사에 갔고 종회는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기록한 듯 하다.
  14. [14] 종육이 사마소에게 "종회는 책략에 의지하여 보증하기 어려우므로 중요한 직책을 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는 썰인데 사서의 원문부터 어떤 사람이 말하길 종회의 형 종육은~ 라고 카더라 통신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종육이 진짜 저 말을 했는지부터 사실확인이 어렵긴 하다.
  15. [15] 즉 죽은 뒤 저승사자가 되었다고 민간에 알려진 종회.
  16. [16] 그러나 등애 역시 진서 당빈 열전에 따르면 그가 맡고 있던 농우에서는 워낙 등애가 강제노역을 좋아하고 인성질을 많이 한 지라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물론 한편으로는 단작 같이 등애의 문생이거나 그에게 투탁한 관리들은 등애의 복권을 원했다고 하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에 감동받은 사람이 있기도 했다.
  17. [17] 《세설신어》에선 원래 종회가 혜강을 흠모하고 친교를 맺고 싶어했으나 혜강쪽에서 그를 무시하고 매몰차게 대하자 앙심을 품었다고 적고있다.
  18. [18] 강유 입장에선 종회의 계획이 진짜로 성공하면 오히려 곤란하니까 이런 계획을 묵인하거나 잘못된 계책이 되도록 유인했을 수도 있다. 종회가 강유에게 조언을 받았다고 해도 어차피 종회는 군사를 제대로 다루어 본 적이 없고 역전의 노장 강유를 지나치게 신뢰했으므로 강유가 종회의 계획을 일부러 잘못되도록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유도해도 뭣도 모르고 믿고 넘어갔을 것이고.
  19. [19] 하지만 이는 의심이 많은 사마소의 성격에서 기인했다. 실제로 사마소는 이후 등애가 무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도 등애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아 끝끝내 등애를 복권시켜주지 않았다.
  20. [20] 그러나 정사 삼국지 종회전에서 종회가 촉을 멸망시킨 후 치하하는 조서 내용을 보면 종회에게 식읍 1만호를 더함과 더불어 아들 2명을 정후로 봉하고 각기 식읍 1000호씩을 주었다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처와 처가는 둘째 치고 자식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정말로 종회의 친자들이 있었다면 왜 조카들만 연좌돼 처벌받고 자식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기에 정후로 봉했다는 기록에서 거론된 아들들이 실은 종회가 맡아 기르던 조카들을 일컫는 것 아니냐는 설 또한 존재한다. 후사를 굉장히 중요시 하던 시대였으니 어쩌면 조카들을 양자로 입적해 기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저렇게 기록상의 혼동이 발생한 것 일수도 있다.
  21. [21] 백약을 중원의 명사에 비교하자면 공휴나 태초도 그보다 더 뛰어나진 않을 것."이라는 종회의 평가는 발언자는 물론 논하는 대상,대조군 두 명,심지어 들어주는 사람(두예)까지 삼국시대 말기의 슈퍼스타들이라 유명한 발언이다. 다만 제갈탄과 하후현(그리고 강유)가 각각 유명한 포인트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왜 저들을 나란히? 싶은 반응이 나올 수도 있는데. 사실 하후현에 비해 좀 묻히는 감이 있다 뿐이지 제갈탄도 나름 당대의 손꼽히는 셀럽이었다. 하후현의 최고 간지 일화가 사실 제갈탄의 일화였다는 기록도 존재하고. 한편으로 제갈탄/하후현 두사람이 반사마씨 세력이었기 때문에 하필 이들을 들먹인게 종회의 역심과 관련있다는 해석도 있는데, 하후현이야 뭐 종회 본인도 확실히 껄덕대긴 했다만 제갈탄은 종회 자신이 기책을 내가며 진압에 앞장섰던 입장이라 미묘. 물론 종회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훨씬 간단한 접근법도 있다. 바로 얼평(...)이었다는 것. 하후현이야 말할 필요가 없는 자체발광 미남이었고. 제갈탄 역시 그의 사위였던 왕광이 아내에게 '장인 어른은 그렇게 잘생겼는데 자기는 왜 이 모양임'이란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 역으로 털렸다는 일화가 있는데,아내 얼굴에 대해 장모님도 아니고 장인어른을 들먹인걸 보면 확실히 한 얼굴했던 모양. 결국 종회의 발언은 강유가 하후현 못지 않게 낭랑하고 제갈탄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기품있는 얼굴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는 것(...).
  22. [22] 다만 말하는 대상이 두예라는 점에서 이 시점에서 군사 분야는 물론 이렇다할 능력을 드러낸 바 없는 그를 종회가 눈여겨 봤다는 부분이 흥미로운데... 하안 살롱 붕괴 후 왕필, 하후현, 부하까지 연달아 죽어버려 지적/철학적 교류에 대한 갈증이 심각했던 종회가 훗날의 좌전벽이자 경전 연구에 있어 큰 족적을 남길 인재인 두예를 눈여겨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만약 이 관점에서 접근할 경우, 문제의 발언과 얽힌 인물 중 종회, 두예, 강유 모두가 무장이지만 경서에 꽤 통달해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제갈탄이 애매하지만), 종회가 한 것이 얼평(...)이 아니라 이런 '인텔리' 적인 동질감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23. [23] 당시 상서령, 상서좌복야, 우복야, 5조상서의 합칭. 당시 팔좌는 청요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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