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

(1921~1993)

사목표어는 Fiat Lux (빛이 있으라)이다. 푸른색(위의 횡선 부분)은 하늘과 천국을 뜻하며, 검은색(아래 검은 부분)은 세상의 어두움을 뜻하고, 황금색(문장 외곽, 십자형, 삼각형, 원형을 두른 테두리)은 빛을 표시하며, 빨간색(종선부분, 삼각형, 십자형, 원형)은 천주의 사랑을 표시한다. 위 부분의 ▽은 삼위일체이신 천주를 상징하고, 아래 부분의 ○은 세상을 상징하며, ▽과 ○을 연결하는 +는 그리스도의 +로써 세상을 천주께 연결하는 상징이다.

1. 개요
2. 월남 사제
4. 반유신 활동
5. 1980년대 행적
6. 선종 이후
7. 기타
8. 둘러보기

1. 개요

대한민국천주교 성직자이자, 민주화 운동가. 세례명다니엘.

2. 월남 사제

원래 고향은 평안남도 중화군[1]으로, 여기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아버지 지태린과 어머니 김태길은 원래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지만 나이가 들어 입교했다. 그래서 지학순이 사제가 되겠다고 하자 거세게 반대했다. 간신히 서울 소신학교에 입학했지만, 결핵으로 곧 휴학하게 된다. 휴학하는 동안 지학순은 중화군청, 두만강 세관에서 일했다. 건강을 회복한 1943년, 함경남도 원산시 덕원신학교로 편입했다.

해방 이후 북한 공산당 정권에 의해 신학교가 폐쇄되고 함흥교구평양교구가 잇따라 와해되자 월남을 시도한다.[2] 그러나 도중에 체포되었는데, 다행히 사형당하지는 않고 황해도 해주시의 감옥에 수감되는 정도로 끝났다.[3]

그리고 1950년 1월에 윤공희와 함께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며, 서울 성신대학에 입학하였다.[4] 그러나 이 때 가족들과 헤어지게 되면서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5][6]

그 해 6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지학순은 서울교구의 다른 신부, 신학생들과 부산으로 피난한다. 미군 부대에서 잠시 일하다 입대해 미군 2사단에서 근무한다. 그리고 1952년 결핵이 재발해 제대했고, 제대 후에 다시 신학생으로 돌아와 1952년 노기남 바오로 주교의 주례로 사제서품을 받고 사제가 되었다.

3. 천주교 원주교구

사제 서품 후 첫 임지는 부산의 반공포로수용소였다. 이때도 윤공희 신부와 함께 근무한다. 잠시 청주교구에서 보좌신부로 있다가, 윤공희 신부와 함께 이탈리아 로마유학 간다.[7] 프로파간다 대학에서 교회법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청주교구와 가톨릭대학교, 부산교구 등에서 활동한다.

1965년 원주교구가 창설되자,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주교 서품을 받았고, 원주로 돌아와 교구장으로서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교 서품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고 평신도 운동을 활성화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한다. 이때 평신도로서 장일순, 이창복 등이 지학순을 돕는다. 배론성지를 조성하고 진광고등학교를 설립한 것도 지학순의 업적이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 군종교구의 전신인 가톨릭 군종단의 총재를 맡기도 했다.

1970년, 어머니의 병원비와 동생의 학비 때문에 차비를 조금씩 빼돌린 어느 버스 안내양이 "죄책감 때문에 성당을 못 나간다"며 지학순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에게 지학순은 죄가 아니라며 성당에 나오라고 말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안내양이 생활을 위해 돈을 훔치는 건 종교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지였다. 이야기가 알려지자 지학순은 MBC에서 “삥땅은 죄가 아니다”라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4. 반유신 활동

이른바 유신헌법은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 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다.

천주교 원주교구장으로 임명되기 직전이 그 유명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던 무렵이었고, 그 모습을 직접 본 영향인지, 혹은 당시 40대 중반의 젊은 주교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학순 주교는 열정적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대표적인 것이 원주교구가 40%의 지분을 후원하면서 창설된 원주문화방송이며, 김지하장일순의 후원자도 지학순이었다. 그러나 원주문화방송은 60%의 지분을 가진 5.16장학회의 부패로 인해 운영이 엉망이 되었고[8], 분개한 지학순 주교는 1971년 사회정의 실현과 부정부패 고발을 선언하며, 원주문화방송의 운영을 규탄하기에 이른다. 한국 천주교가 처음으로 사회 운동에 개입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지학순 주교의 활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2년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이사장이 되었고,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도 맡아 활동하며 유신 정부와 싸우기 시작했다. 박형규, 김지하, 조화순 등 반정부 인사를 자주 원주로 불러 시국을 논의했다.

그런 결과는 1974년 바티칸에서 귀국하는 길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는 것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된 것은 김지하에게 준 돈 때문으로 유신정권은 이를 민청학련의 자금으로 쓰였기 때문에 지학순 주교를 민청학련의 배후자로 몰았다. 중앙정보부로 연행된 지학순은 "김지하에게 돈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과는 무관한 돈"이라고 주장했다.

지학순이 연행되자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석방을 위해 박정희와 면담했고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는 신부들과 시국기도회를 열었다. 덕분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체포된 후 하루만에 석방되었지만, 명동성당 뒤편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 본원에 연금되었다. 얼마 후 동생 집으로 옮겼다가 명동성모병원[9]에 입원한다. 곧 비상군법회의에서 출두명령을 내리자, 지학순은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하며, 공개적으로 유신정권에 저항하기에 이른다.

1975년 석방 시기의 모습. 이때가 리즈시절. 같은 리즈 시절을 보내던 모 인물의 모습도 보인다.

양심선언 직후 지학순은 다시 중앙정보부로 연행된다. 이어진 재판에서 지학순은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된다. 이때 지학순 석방을 요구하며 결성된 단체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다. 이 사제단이 민주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셈이었다. 정의구현사제단뿐 아니라 가톨릭 전체에서도 지학순의 석방을 위한 움직임이 일었다. 명동성당에서 시국미사를 봉헌하고 지학순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미사에는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벨기에 대사도 참례했다. 바티칸도 유감을 표명했다. 김수환, 윤공희, 김재덕, 두봉, 나길모, 황민성 주교 등 다른 고위성직자들도 지학순 석방에 힘을 모았다. 외교 마찰 및 가톨릭계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박정희 정권은 지학순을 1975년에 석방한다.[10] 석방 직후 지학순은 바티칸을 방문했는데, 성직자의 현실 참여를 바라보는 바티칸의 입장은 긍정과 부정이 엇갈렸다. 하지만 바오로 6세는 "너는 착한 목자다"며 지학순을 격려했다.

석방 이후에도 지학순은 민주화운동을 계속했다. 김지하가 반공법 위반으로 수감되자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원주교구의 신현봉 신부 등이 구속되자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를 지내며 동일방직 똥물 사건 등 유신정권의 폭압적 노동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5. 1980년대 행적

민주화 운동가로서 지학순 주교의 명망은 신군부의 5공정권이 등장한 후에도 여전했다.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의 주동자들도 원주로 도피해서 지학순 주교를 만나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런데 5공화국 시절의 지학순 주교는 민주화 운동사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70년대 그렇게 열렬하게 유신독재와 맞섰던 지학순 주교는 비록 적극적으로 5공과 협력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5공에 대한 태도는 확실히 유신 정권과는 달랐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유신 때 박정희와 정면으로 맞섰지만, 5공 전두환 정권에서의 태도가 묘하게 유화적이거나 협조적이었던 네 사람, 즉 윤보선 전 대통령, 천관우, 지학순 주교, 강원용 목사를 가리켜 윤천지강이라 부르게 된다.

지학순 주교가 5공 시절에 민주화 운동에서 다소간 멀어지게 된 원인은 여럿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가장 큰 것은 그의 건강. 당뇨로 인해 1980년대 내내 고생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전면에 나서 활동하기 힘들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의 반공주의 성향이다. 5.18 광주학살을 겪으면서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진영이 과거보다 훨씬 더 왼쪽으로 좌경화, 급진화했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리고 반독재민주화 투쟁진영을 좌파로 볼 수도 없고, 좌-우파가 복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파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북한과 공산주의 세계는 전체주의 독재사회로 타파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유신 치하에서도 <내가 겪은 공산주의>라는 저서를 낼 정도로, 아니 애당초 공산당을 피해 남쪽으로 온 지학순 주교의 과거를 감안한다면,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거리가 멀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11]

마지막으로 그의 관심사가 달라진 점인데, 1985년 9월 남북 고향방문단 상호 방문(이산가족 상봉)이었다.

"평양을 방문한 50명의 이산가족 중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장을 지낸 지학순 주교가 포함돼 있었다. 그는 1950년 1월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북한을 탈출한 이후 35년 만에, 북한에 살고 있던 누이동생을 만났다. 6남매 중 넷째와 다섯째로 특히 정이 깊었던 두 남매는 예순을 넘겨 다시 만나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두 남매 사이에 대화가 진행되면서, 누이동생은 안내원의 눈치를 보더니 성직자인 오빠를 향해 엉뚱한 말을 쏟아냈다. “우리는 살아서 천당 가는데, 오빠는 죽어서 천당을 간다니 돌았구만요. 이곳이 천당인데 천당을 어디에서 찾겠다는 거야요?” 오빠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여동생의 처지를 헤아렸지만, 또 한 번 마음으로 울 수밖에 없었다. 이 일화는 이산가족 문제를 순수한 인도주의적 차원이 아닌, 체제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정치적 사안으로 간주하는 북한 정권의 속셈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북한은 상봉에 내보낼 북측 가족에게 철저한 사상교육을 시키고, 상봉 이후에도 심적 동요를 막는 데 주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방일보 정훈자료

이 방문 이후 충격을 받아 지병인 당뇨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후로는 사회운동 대신에 사회복지나 장애인 운동으로 더 관심을 두게 된다.

뭐 그렇다고 민주화 운동에 아예 관심을 끊었다거나 전두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것도 아니다. 5.18 민주화운동 직후 윤공희와 함께 선처를 호소하기도 했다.[12] 원주교구 관내에서 일어난 사북사건을 원만히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자 김수환 추기경 등과 추모 미사를 집전하고 국민추도회에 참여했다.

6. 선종 이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뇨로 인해 1980년대 후반부터는 사실상 대외 활동이 줄어들게 되었고, 1993년 선종하였다. 묘소는 충북 제천시 소재 배론 성지 내에 있다.

지학순 주교의 뜻을 기리는 사람들이 만든 단체가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인데, 매년 꾸준히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시상하는 등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7. 기타

지학순과 가까웠던 김지하가 지학순을 소재로 <축복>이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8. 둘러보기

역대 천주교 원주교구장

교구 신설

초대 지학순 다니엘 주교

2대 김지석 야고보 주교


  1. [1] 현재 황해북도 중화군.
  2. [2] 후에 광주대교구장을 지내는 윤공희 빅토리노와 수원교구장이 되는 김남수 안젤로도 이때 덕원신학교 한 학년 선배였다. 지학순이 종종 고집 때문에 말썽을 피우자 교장이 퇴학을 검토할 때가 있었다. 이때 교장을 설득한 사람이 김남수다. 후에 두 사람은 각각 한국 가톨릭의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다.
  3. [3] 이때 여자만 있는 감방에 수감되는 등 조롱을 받았다고 한다.
  4. [4]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과 동기가 된다.
  5. [5] 남동생 지학삼만 1.4 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해 국군에 입대했다가, 발목 부상으로 군 병원에 입원한 지학순과 상봉하게 된다.
  6. [6] 후에 주교가 되고 나서야 1985년 9월 20일부터 4일간 진행된 처음으로 열린 이산가족 상봉때 서울-평양 교환방문 때 평양에 가 4살 아래인 여동생 지용화 씨를 만났다. 여동생이 "북쪽이 천국인데 왜 오빠는 죽어서 천국을 찾느냐"라고 말을 하자, 지 주교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9월22일 아침 6시 10분에 방문단 숙소로 사용 중인 고려호텔 3층에 있는 제1영화관에서 지학순 주교가 집전하는 공식적인 미사가 북한에서 봉헌되었다. 마침 이날은 한국 103위 순교성인의 시성 1주년으로, 대축일로 봉헌되었다. 미사 집전 중에 지 주교가 순교자들의 희생과 관련한 기도를 바치다가 감정에 복받쳐 울음을 터뜨리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통곡을 하느라 약 2분 동안 미사가 지연되었다고 한다.
  7. [7] 유학 도중 지학순을 평생 괴롭혔던 당뇨병을 얻는다.
  8. [8] 방송장비를 구매한다는 명목으로 천주교 원주교구에 바가지를 씌웠고 공금을 횡령했다. 탈세도 서슴지 않았다. 원주교구가 감사를 요구하자, 5.16장학회은 자기네 지분을 다른 종교에 넘기겠다며 되레 지학순 측을 협박한다. 지학순은 5.16장학회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박정희에게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9. [9]여의도성모병원. 명동성당 앞에 있다가 1986년 여의도로 옮겨졌다. 병원이던 건물은 현재 가톨릭회관으로 쓰이고 있다.
  10. [10] 물론 박정희 정권이 지학순을 순순히 풀어준 건 아니다. 치졸한 방법으로 지학순에게 복수했다. 외국인 신부 추방이 대표적이다. 외국인 신부의 비자를 2달마다 갱신하도록 입장을 바꿨다. 이 탓에 원주교구의 2인자인 총대리 정 레오 신부도 체류 허가를 받지 못해 추방 당했다.
  11. [11] 사실 고령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반공성향은 윤천지강 4인 모두에게 해당된다. 이들이 1980년대 공통적으로 민주화 운동 일선에서 멀어진 건 어떻게 보면 필연이다.
  12. [12] 전두환제1사단장이던 당시 군종장교였던 정인준 신부가 가교 역할을 했다. 처음에 전두환은 정인준을 '지학순 꼬붕'이라며 마음에 안 들어했지만 나중에는 보안사령관으로 진급하자 군종실을 신설해 정인준을 데려갈 정도로 정인준을 아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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