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토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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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土协定

Chin–Doihara Agreement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일본의 위협
3.2. 중국의 대응
4. 결과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개요

1935년 6월 27일 차하얼 정부주석 대리 친더춘과 관동군 대표인 봉천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 사이에서 체결된 비공식 합의. 하매 협정과 마찬가지로 폭주하는 일본군의 만행이었으며 정식 협정이 아니었다.

친더춘-도이하라 협정이라고도 한다.

2. 배경

1931년 만주사변, 1933년 열하사변을 통해 동북삼성과 열하성을 병탄한 일본 제국은 이번에는 화북 5성의 괴뢰화를 노리며 화북 분리공작을 취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 기자 2명이 암살당한 하북 사건과 손영근의 동북의용군이 난주에 주둔한 사건을 빌미로 일본군은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 대리 위원장 허잉친을 위협해 6월 10일 하북성의 중국 국민당 당부와 중국군을 퇴거시키는 하매 협정을 체결했다. 이 하매 협정의 체결은 화북주둔군의 주도였는데 한편 관동군은 차하얼 성에서 비슷한 공작을 취하고 있었다.

1935년 6월 5일, 장북에 잠입한 일본군 특무기관원 4명이 장자커우 지역의 불법 측량을 하던 중 차하얼 성 주석 쑹저위안의 제29군 병사들과 조우했다. 29군 병사들이 통행증을 요구했으나 이들은 제시하지 못해 중국군에게 체포되었다. 이를 장북 사건이라고 하는데 일본과의 충돌을 원치 않았던 쑹저위안의 지시로 29군은 이들을 8시간 만에 석방했지만 관동군의 도이하라 겐지는 이를 일본군인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하면서 확대를 꾀했다.

3. 전개

3.1. 일본의 위협

6월 10일, 도이하라는 중국 측이 이유 없이 일본인들을 구타하고 모욕했다고 주장하며 장가구의 특무기관장 마쓰이 중좌에게 지시하여 사건의 직접 책임자를 처벌하고 쑹저위안의 사죄를 5일 안에 받아낼 것을 중국 측에 요구했다. 국민정부는 하매 협정의 전례를 볼 때, 일본군이 다시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 것이라 여겨 선수를 치기 위해 일본 측에서 쑹저위안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점을 노려 쑹저위안을 차하얼 주석에서 해임하고 민정청장 친더춘을 차하얼 주석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도이하라는 전투기를 출격시켜 베이핑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한편 근성있게도 이번에는 친더춘에게 면회를 요구했다. 친더춘이 계속 면회를 거부하자 6월 23일 심야, 도이하라는 개인 자격으로 친더춘의 집에 방문하여 29군의 철수, 배일기관 해산 등 5항의 요구사항과 차하얼 성에서 일본 특무기관의 활동 원조에 대한 6항의 요망사항을 전달했다. 도이히라는 노골적으로 무력 사용을 암시하며 친더춘을 위협했다.

"친더춘 장군, 당신은 외교의 뒷배경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분노한 친더춘은 이렇게 맞받아쳤다.

"그렇다면 군대를 파견해 차하얼을 점령하면 되지 않소? 29군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것이오."

친더춘은 크게 분노하였지만 일단 분을 참고 정부에 도이하라와의 회견에 대해 보고했다.

3.2. 중국의 대응

친더춘의 보고를 받은 국민정부는 만약 교섭을 거부할 시에 일본군이 자유행동을 취해 차하얼 성을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친더춘에게 교섭에 응할 것을 지시했다. 친더춘은 베이핑에서 도이하라와 담판하여 6월 27일 다음과 같은 합의를 교환했다.

  • 2. 차하얼 동쪽에 비무장기구를 성립시키고 29군을 해당 기관에서 철수.
  • 3. 일본에 대하여 사과하고 일본인의 차하얼 구역 안에서 자유여행하도록 허용.
  • 4. 쑹저위안의 성 주석 직 취소.
  • 5. 반일조직, 반일활동 금지.

물론 이는 일본 측 요구를 받아적은 문장을 일본 측에 제시한 것에 불과하여 전혀 정식 협정이 아니었지만 일본군이 무력으로 위협하는 판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차하얼 동쪽에 비무장지대가 성립되어 차하얼 성 보안대가 치안을 맡았는데 이는 관동군의 괴뢰 조직이었다. 일선 지휘관들의 폭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이를 하매 협정 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제어하지 않았다. 6월 27일 외무성 회의에서 시게미쓰 마모루는 "중국에 대해 한꺼번에 모든 것을 요구하기 보다는 순차적으로 위협하면서 질질 끌고 나갈 필요가 있다."라고 발언하는 판이었다.

4. 결과

쑹저위안의 29군은 베이핑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주둔하게 되었는데 일본이 허잉친이나 우학충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위협만 한것과 달리 쑹저위안에 대해서는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하북의 군정대권을 장악하는 것을 용인하여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 일본에 대해 다시 한번 양보한 국민정부에 대해서 불만이 고조되어 장쉐량은 동북대학 대리교장 왕탁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국민은 그 전에 나를 부저항이라고 욕하였다. 지금 나는 영수에게 내 과업을 변경해 주기를, 그리하여 초비가 아니라 항일을 하게 해주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초비에 대한 희생은 항일에 의한 희생보다 가치가 없는 것이다. 9.18 이후 우리들은 국제연맹이나 그 밖의 평화 기구를 잘못 믿고 조금씩 양보하면서, 정의가 강권을 제재하리라는, 외국의 도움에 기대하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환상이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드이 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 스스로 죽음 속에서 삶을 찾는 것이다. 정부는 전 국민을 동원하여 일본과 생사를 결판짓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11월 1일, 일본에 대한 유화정책의 중심인 행정원장 겸 외교부장 왕징웨이에 대한 암살 시도가 벌어졌고 장쉐량은 1936년 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에게 2차 국공합작을 강요하였다.

일본군은 계속 도발, 1935년에 기동사변을 일으켰으며 1936년에는 수동사변을 일으켰다. 이후 29군은 1937년 7월 7일 무타구치 렌야의 일본군과 충돌하여 루거우차오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는 중일전쟁으로 번졌다.

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일본군사사 상, 후지와라 아키라, 제이앤씨.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
  •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삼인.
  •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가토 요코, 어문학사.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6.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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