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농장

1. 설명
2. 기원
3. 트로츠키의 비판
4. 말로
5. 기타

1. 설명

위대하신 스탈린 동지의 4개년 계획과 동시에, 소련에서는 급속히 집단농장 계획이 추진되었다. 당 간부가 이바노비치의 집에 찾아와 집단농장에 가입하라고 압박했다. 이바노비치는 결국 가입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 간부는 이것을 다짐하기 위해 물었다.

"이바노비치 동무, 를 집단농장에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럼요."

"도?"

"물론이죠."

"그리고 염소는?"

"아니요, 염소만은 안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소와 말까지 바친다면서 염소는 왜 안 된다는 건가?"

"저한테는 염소밖에 없으니까요."

공산주의 유머

팔자가 기가 막혀 졸지에 주인이 되어버린 소들은 제 일 하는데 몸을 아끼느냐는 채찍질에 점점 수동적인 노예가 되어가고 있었다.

최인훈광장

농지의 소유권을 공용, 혹은 국가로 놓고, 수익을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는 시스템을 가진 농장. 주로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이루어졌다. 언뜻 보면 형편이 어려운 소작농을 구제해 줄 것으로 보이는 제도지만... 현실은 시궁창. 지주가 당으로 바뀌기만 했을 뿐, 농노제와 별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였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소유해야 한다는 이론을 펼쳤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잉여생산량의 모순은 사회계급의 차별화를 낳고 그것은 곧 계급투쟁으로 이어지기에 사유재산은 없어져야 할 만악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집단농장은 개인의 사유재산을 없애자는 공산주의의 기본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정책이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847년에 '공산주의의 원리'에서도 밝혔듯이 사적 소유의 철폐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며, 또한 충분한 물질적 토대가[1] 갖추어진 후에야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까지 사회주의자들의 공통적 입장이었다. 무턱대고 사적 소유를 억지로 없애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괜히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22년부터 신경제정책을 실시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규모 농업에 필요한 기계를 제공해줄 공업의 능력'[2]이라는, 농업 집산화에 필요한 물질적 조건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관료집단의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억지로, 그리고 강압적으로 농업 집산화 정책을 밀어붙인 결과가 역사 속에서 나타난 집단농장인데, 당연하게도 이는 성공하지 못했다. 공산주의 이론을 공업에 국한시키지 않고 아직도 낙후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의 농업에까지 확대하고, 또 그것을 실제로, 그것도 농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압적으로 구현함으로써 토지의 소유권을 정부와 당이 독점하고 농민들을 철저한 예속 상태에 놓는 집단농장이라는 악습이 발생했다.

러시아의 혁명조직이 나폴레옹 전쟁 때 유럽의 자영농을 보면서 혁명을 꿈꿔왔던 것을 생각해보자면 참 아이러니다. 기껏 이뤄 놓은 혁명을 스탈린 관료집단이 말아먹으면서 러시아 인민들은 여전히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농업 생산량은 어느 정도 발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소련에서는 콜호스(집단농장), 소프호스(국영농장), 중국에서는 인민공사(人民公社)라고 불렸다.

2. 기원

볼셰비키러시아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이후, 지주들의 토지를 무상몰수해서 실제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하는 농지개혁을 단행하였다. 자기 땅을 가지게 된 농민들은 열렬하게 환영하였고, 많은 자영농들이 탄생했다.

그런데 뒤이은 적백내전 과정에서 발생한 초인플레이션에 맞서, 소련 정부는 강압적으로 전시공산주의체제를 성립시키고 물자를 강제징발했다. 즉 지주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빈농들에게 땅을 나눠줬는데, 경제가 어렵다며 바로 얼마 전 땅을 나눠줬던 빈농들에게 총구를 돌려 물자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던 것이다. 착한 볼셰비키들이 농부들에게 땅을 주었는데 나쁜 공산당이 와서 총칼로 다시 뺏어갔다는 뼈있는 농담[3]은 이런 현실을 묘사한 것이다.

그 결과는 가공할 1921년 대기근과 경제난이었고, 콜착을 위시로 하는 반혁명 백군이 붕괴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내부사정이 나아지기는 커녕 농민들과 병사들의 원망만 드높아지면서 급기야는 1917년 혁명의 가장 중요한 지지세력이었던 수병들이 봉기를 하기에 이르르자, 레닌은 '이건 아니구나' 싶었던지 정책의 대전환을 시도했으니, 바로 신경제정책이다.

신경제정책의 핵심은 강제징발의 중단과 사기업의 인정이었다. 곧바로 농장은 잉여생산물을 시장에 공급하기 시작했고, 전시공산주의가 야기한 대기근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유재산과 상거래를 인정하기 시작하고 부의 축적이 일어나니 자연히 중간상인과 부농이 발생했고, 빈부의 격차가 생기기 시작했으며, 소련은 공산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볼셰비키들의 대의와는 전혀 딴판인 나라가 되고 말았다.

신경제정책의 추진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레닌이라 그 누구도 제동을 걸기 쉽지는 않았다. 물론 레닌도 이것을 갖다가 소련을 아예 자본주의 국가로 만들어 버리려고 추진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레닌은 러시아의 경제적 수준이 아직 사회주의로 이행할 만큼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만큼 영국, 프랑스, 독일[4]을 포함한 충분한 생산력을 확보한 서유럽 국가들로 혁명을 확산시켜서 이들 국가가 지닌 빵빵한 생산력의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혁명의 확대가 어려워진 상황이었기에 임시방편으로 러시아 사회의 경제적 생산력을 끌어올리고자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도입한 것이다. 즉 이러한 신경제정책은 적절한 타이밍에 혁명이 서유럽으로 확산되어 본격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해진다면 모두 폐기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레닌 사후 트로츠키 같은 공산당 좌파는 이런 상황을 더 용납할 수가 없다며 신경제정책에 제동을 걸어 부농들과 중간상을 쥐어짜고 농장을 집산화하는 한편 중공업을 최우선적으로 개발하도록 주장하였다. 과거 전시공산주의를 이끌었던 부하린과 우파는 중공업 개발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농업과 경공업의 발전속도에 안정적으로 페이스를 맞춰서 개발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입장이었고, 따라서 농민들이 부유해지는게 농업 내지는 공업발전에 가속이 되었으면 되었지 적어도 해가 될 일은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이런 입장의 차이는 농민에 대한 공산당 좌파와 공산당 우파의 입장차에서 비롯된 것인데, 공산당 좌파는 공업노동자들이 혁명의 주도세력이라며 신경제정책으로 농촌이 급속히 회복하고 부가 집적되는 것에 대해 잠재적인 반혁명세력의 성장으로 경계하였으나, 공산당 우파는 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공산정권을 지속하려면 농민과 계속 연대하여야만 한다고 주장했고 오히려 공산정권이 농업 경제를 활성화시키면 부농들도 반혁명에 대한 생각을 저버리고 공산주의화에 적극 협조할 것이란 주장까지 하였다. 스탈린의 지지를 등에 업은 공산당 우파는 결국 1927년을 기점으로 공산당 좌파 등을 사실상 매장하기에 이르렀고, 신경제정책은 잠시 더 지속되었다.

그런데 1928년 초 스탈린은 서기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해서 부농탄압을 주도하면서 공산당 우파의 등에 칼을 꽂아넣었다. 말이 부농이지 사실상 신경제정책을 결딴내겠다는 의도였고, 옛 공산당 좌파가 주장했던 급속한 중공업 발전과 농업집산화라는 기치를 들면서 졸지에 트로츠키의 동조까지 받기에 이르른다. 과거 공산당 좌파가 당내 민주주의의 회복을 요구하자 당을 분열시킨다며 이들을 내쳐버렸던 공산당 우파는 이제 스탈린에게 똑같은 논리로 지탄받고 몰락하였으니, 공산당 좌파와 공산당 우파를 모두 박살낸 스탈린은 이윽고 '농업의 집산화'라는 명분을 내건 협동농장을 통해 농민들에게서 농지의 소유권과 자율적인 경작권을 박탈하고 국가와 당 소유의 소작농으로 전락시켜 자율과 지도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농노 제도로 회귀했다.

스탈린의 귀신같은 통수에는 단순히 정치적인 음모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도 큰 몫을 차지하였으니, 자작농에 기반한 농업으로는 당시 급격히 성장하던 도시노동자층에게 식량을 충분하게 공급하기 어려웠고, 나치의 출현 등으로 전쟁위기가 가시화되면서 요구된 중공업개발을 위해선 자본의 투입이 필요하였으니 후진적인 소련에서는 이를 완수하려면 농촌을 착취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본 것이었다.

현대는 커녕 근대 농업부터가 화학비료의 발명으로 시작한 것이고, 여전히 인류는 멜서스 트랩의 실현에서 벗어난지 백년도 지나지도 않은 상태이다. 우수한 농업 생산력을 명백하게 개나소나 만들 수 있는게 아니란 증거는 사방에 깔려있다. 그걸 해결하기 곤란한데(사실 해결하기 싫어서지만) 공업화를 하겠다면, 결론은 결국 농촌을 탈탈 턴다는 것 말곤 안 나온다.[5] 당장 지금의 한국만 봐도, 기술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땅이 넓지않기 때문에 개개인당 농업 생산량은 그리 많지 않고[6], 이건 두고두고 정치권의 폭탄 돌리기 핵심 요소중 하나로 유지되어오고 있다. 지금에 비하면 훨씬 못한 당시 기술을 고려해도, 생산성이 낮은 땅을 빼도 땅 많은 소련가지고 막무가내로 '공업화 ㄱㄱ'를 외치고, 그 공업화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경공업은 스킵하고 중공업으로 닥돌한 스탈린의 정책은 누가봐도 전쟁 준비였고 실제로도 전쟁 준비였다는 게 함정이었을 뿐. 거기에 집단농장이라는 희대의 쓰레기 정책까지...

결론적으로 스탈린의 기획은 성공하긴 했고, 이로인해 일어난 소련의 강제적 농업집산화는 트랙터 등 현대적인 농업장비가 도입되는데는 크게 공헌하였고, 또 집단농장에서 강탈한 생산된 밀을 수출하여 획득한 자본을 밑천으로 5개년 계획을 일으켜 중공업을 급속하게 발전시키는데도 성공하였고, 이건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생존하는 것을 넘어 승리를 거머쥐게 한 원동력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농민들의 반발속에서 강요한 집단농장은, 권위주의 정권이 늘 그렇듯 그 강요조차도 엉망으로 해서, 농민들의 삶을 박살내다 못해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같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소련의 농업은 완전히 박살나서 이후 두고두고 소련 역대 정권의 발목을 잡는 골칫거리로 남게 된다. 거기에 스탈린이 특정 민족의 환심을 사려고 했을 것이라는 음모론이 나올 정도로 기괴한, 온갖 강제 이주 정책으로 소련은 원래 없던 민족 문제까지 창조해서 떠앉게 되었고, 이 짐덩이는 러시아 연방에도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다.

이런 농업 생산력 떡락 붕괴는 다른 공산 정권에도 그대로 일어났다. 문화대혁명 종결 후인 마오쩌둥이 드디어 축출된 1978년에 중국 공산당이 농부들이 텃밭에서 생산한 농축산물을 시장에 팔 수 있도록 허가하자, 중국의 전체 경작지 면적의 3% 밖에 안되는 텃밭에서 생산된 감자, 채소, 쇠고기, 우유가 전체 생산량의 61%, 29%, 34%, 76% 에 달했다.[7]

게다가 당시 소련은 인프라가 저열한 탓에, 미국 곡물수송선이 발트해에서 밀을 하역하는게 우크라이나나 중앙아시아에서 열차로 밀을 수송하는 것보다 더 싸게 먹혔다. 소련 농사가 잘 풀렸어도 이 가성비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미국 농업 따라갈 수 있는 나라가 존재할 수는 있을까

이 노답스런 집단농장 정책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과를 올린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한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고려인 집단농장이 대표적인 예다. 자세한 건 김병화 문서 참조. 다만 김병화 사망 이후 온갖 해괴한 소련 정부의 요구와 악화된 자연환경이 콜라보를 이루어 이쪽도 결국 붕괴했다.

3. 트로츠키의 비판

레닌과 함께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으나 스탈린에 의해 축출된 레프 트로츠키는 망명지에서 집필한 저작 <배반당한 혁명>에서 한 장을 할애하여, 소련 정부의 집단농장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엄연히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혁명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트로츠키의 입장임에 유의. 즉 집단농장은 같은 사회주의자들로부터도 사회주의 이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은 정책이다.

리코프는 1928년 7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개인 농장을 발전시키는 것은 ‥‥‥ 당의 주요한 과업이다." 그러자 스딸린은 그의 발언을 재청하였다: "개인농장은 이미 효용성을 상실했으며 더 이상 이들을 지원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 당의 노선과 아무 관련도 없다." 이로부터 1년이 채 안되어 당의 노선은 이 발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졌다. "완벽한 집단화"의 먼동이 지평선에 떠오르고 있었다.

도시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즉시 쿨락의 곡물을 빼앗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은 오직 강제력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쿨락 뿐 아니라 중농의 비축된 곡물을 강탈하는 행위는 공식적으로 "특별조치"라고 불렸다. 이 말은 내일이면 만사가 과거처럼 평온해질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농민은 이렇게 겉만 번지르르한 말을 믿지 않았다. 이들은 옳았다. 곡물을 강제로 징발 당하자 쿨락은 식량 증산의 동기를 가질 수 없었다. 고용 농업노동자들과 빈농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농업은 다시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와 함께 국가의 존립이 다시 위태로워졌다. 이 상황에서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총노선"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농민의 개별 영농을 여전히 주로 강조하면서도 스딸린과 몰로토프는 소비에트농장과 집단농장이 더욱 빨리 확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급한 식량 확보 문제 때문에 노동자 무장대가 농촌에 파견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에 개별 영농에 대한 시책은 공중에 붕 떠 버렸다. 결국 집단화로 "퇴행"하는 것이 필요했다. 곡물 징발을 위한 일시적 "특별조치"는 예상 밖으로 "쿨락 계급을 일소"하는 시책으로 발전했다. 식량배급보다 횟수가 더 빈번한 정부의 모순적 지시들은 정부가 농민문제에 대해 5개년 계획은 고사하고 5개월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증명했다. 식량위기에 의해 강요된 새로운 계획에 의하면 5년 후에 집단농장은 농민 토지의 70%를 차지하기로 계획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농업집단화 작업이 농민의 1%에게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새로운 계획의 규모는 엄청났다. 그러나 5개년 계획의 중간지점에서 집단화는 애초의 목표를 훨씬 밑돌았다. 1929년 11월 스딸린은 자신의 정책적 동요를 청산하면서 개별 영농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전국의 촌락, 군, 주에까지 전부" 집단농장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야코블레프는 집단농장은 상당히 오랜 기간 "농민 개인소유라는 바다에 떠 있는 섬"에 불과할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던 그가 이제 농업인민위원이 되어 "쿨락 계급을 일소"하고 "가능한 한 일찍" 집단화를 완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25년 집단농장의 비율은 1.7%에서 3.9%로 증가했다. 그리고 1930년에는 23.6%, 1931년에는 52.7% 1932년에는 61.5%로 증가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농업 집단화가 전체적으로 노골적인 강제력에 의해서 달성되었다고 허튼 소리를 늘어놓는다. 현재 이 주장을 반복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과거에 농민은 토지를 소유하기 위한 투쟁에서 한때는 지주에 대해서 봉기를 일으켰고 또 한때는 미경작 지역에 농장을 일구었다. 그리고 또 어떤 때에는 좁은 토지를 소유한 고통의 대가로 하늘 나라를 약속한 온갖 종파들에게 서둘러 귀의하였다. 대농장을 몰수하고 토지를 잘게 쪼갠 후에 이제 다시 이 조그만 땅뙈기를 커다란 농지로 통합하는 것은 농민, 농업, 사회 전체에게 생사가 걸린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 일반적인 역사적 고찰에 의해 농민문제가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집단화 성공의 진정한 가능성은 농촌 위기의 깊이나 정부의 행정적 열정이 아니라 생산자원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 즉 대규모 농업에 필요한 기계를 제공해줄 공업의 능력에 달린 문제이다. 이 물질적 조건을 당시 소련은 구비하지 못했다. 집단농장은 주로 소농경영에만 적합한 농기구로 갖추어졌다.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급히 추진된 집단화는 경제적 모험주의였다.

농업집단화 정책의 강제적인 성격은 1923∼28년 정책의 결과를 하루빨리 청산하고 새로운 정책을 통해 어느 정도의 위안을 찾으려는 필요에 의해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화는 좀더 합리적 속도와 좀더 치밀한 형태로 진행될 수도 있었고 실제 그랬어야 했다. 권력과 산업을 한 손에 장악한 관료집단은 나라 전체를 재앙의 근처까지 인도하지 않고도 집단화 과정을 진척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나라의 물질적 ·도덕적 자원에 더욱 조응하는 속도를 채택할 수도 있었다.

레프 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1936. 링크[8]

한 줄 요약: 저런 식으로 하니까 망하지

사회주의 이론에 따라 농업에 대한 집산화 조치는 언젠가는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입장에는 트로츠키도 동의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계화 영농이 이루어지고 생산이 대규모화되어, 농업 생산이 마치 공업 생산처럼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단계에 접어들 만큼 물질적 토대가 갖추어졌을 때, 강압적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농민들의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하면서 더 효율적인 농업 생산을 위해 집산화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하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데, 스탈린 관료집단은 물질적 토대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농업 집산화를 강행했다는 것이 집단농장 정책에 대한 트로츠키의 비판의 핵심이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작은 농지를 개인이 재래식 농기구를 가지고 경영하는 수준의 농업 발전 단계에서는 집산화가 무의미하다. 그런 상황에서는 토지의 경작권을 존중함으로써 생산에 대한 동기부여를 충분히 주고 그렇게 생산된 농산물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입하여 도시 노동자들에게 공급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농산물을 공급받는 도시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트랙터, 경운기, 콤바인 같은 농기계들과 높은 농업 생산성을 위해 필요한 농약이나 화학비료나 생장조절제 같은 화학약품, 또 멀칭용 비닐이나 비닐하우스 자재 같은 농자재들이 농촌에 충분히 공급될 수 있는 단계가 되었을 때 어디까지나 경제적 필요에 의해서 집산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도 강제로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농민들에게 집산화의 필요성을 설득해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낸 후에 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농업 기술들을 적용하여 대규모 영농을 벌이기 위해서는 개인이 아니라 집산화된 형태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트랙터를 집집마다 1대씩 가지고서 손바닥만한 땅을 갈기 위해 엄청난 기름값을 퍼부어 가면서 트랙터를 굴리는 것은 낭비의 극치일 뿐이다. 그렇기에 농업 기술이 발전하여 마치 농업이 공업처럼 대규모의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성장했을 때, 그 때 가서 트랙터 1대를 갖다가 공동으로 굴리고 영농 계획도 집단으로 세워서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등, 어디까지나 필요와 효율성의 차원에서 농업 집산화를 실시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농업 집산화를 실시하지 않는 것이 낭비가 되는 순간 시행해야 한다.

하지만 스탈린 관료집단은 농업 기술과 농업 생산의 수준이 집산화가 필요할 만큼 발전하지도 않았는데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억지로 농업 집산화를 실시하였다. 특히 집산화가 가능할 수준까지 발전하지도 않았는데 무리하게 시행했다. 이것이 트로츠키가, 소련 정부가 무리하게 강행한 집단농장 정책을 비판한 가장 큰 이유이다.

즉 집단농장 정책은 같은 사회주의자들로부터도 사회주의 이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은 정책이다. 흔히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사회주의는 '사적 소유의 철폐'를 언제 어디서나 실현해야 할 절대적인 과제로 물신화하지 않는다. 충분한 생산력이 갖추어지고 생산 활동이 사회화됨에 따라, 사적 소유라는 소유 구조가 더 이상 사회화된 생산이라는 내용물에 맞지 않는 껍질이 되어 버렸을 때, 그 때 가서 경제적 필요에 의해 사적 소유를 철폐해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의 입장이었다. 당장 앞 문장만 해도 레닌의 <제국주의론> 맨 끝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실제로 레닌은 제국주의론 다음에 나온 저작인 <국가와 혁명>에서도 사회주의 사회의 초기 단계에서는 충분한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생산의 동기부여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본주의적 요소와 국가기구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하루아침에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본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요소가 혼재(混在)하는 그 중간 단계, 즉 이행기를 거쳐야 한다는 이야기다. 트로츠키 역시 거기에 동의했다.

거대한 변화의 과정들은 이에 걸맞는 규모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회주의 사회가 성경에 나오는 낙원과 같을지는 모르겠다.[9]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소련이 아직도 사회주의를 성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련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전환되는 이행기를 경과하고 있으며 온갖 모순들을 가득 가지고 있다. 또한 과거의 후진성을 물려받아 짓눌려 있으며 더욱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적대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 10월 혁명은 새로운 사회의 원칙들을 천명했다. 소비에트 공화국은 이 새로운 사회 실현의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에디슨이 맨 처음 만든 전구는 성능이 형편없었다. 우리는 미래를 조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 레프 트로츠키, <10월 혁명을 옹호하며>, 1932. 링크

그런데 스탈린 시기의 소련에서는 관료집단의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이러한 사회주의 이론과 원칙을 싹 다 무시하고, 농업 기술의 충분한 발전이라는 물질적 토대도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무리해서 '사적 소유의 철폐'라는 구호를 물신화하여 집산화 정책을 추진한 결과, 결과만 놓고 보면 혁명 이전의 농노제로 되돌아간 것이나 다름이 없는 황당한 상황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사실 스탈린주의의 가장 큰 삽질은 무소불위의 철권통치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이 정립한 사회주의 이론과 원칙을 무시하거나 멋대로 뜯어고쳐서는 본인들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억지로 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즉 집단농장 정책의 실패는 스탈린이 멋대로 뜯어고친 1국 사회주의 이론이 순 엉터리였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할 수 있다.

4. 말로

결국, 이 집단농장 계획은 여러가지 이유로 처참한 결말을 맞았다.

  • 관료집단이 농장의 소유와 운영을 독점하는 관계로 농민들은 시키는 일만 지리하게 해야만 했고 이에 따라 생산성이 극단적으로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관료집단은 아래에서 서술하듯 전문성이 개판이었고, 따라서 무수한 삽질과 병크를 터트려 결과적으로 비효율을 초래했다. 그러나 관료집단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는 정책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잘못된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야 하는 이념적 딜레마에 봉착하면서 자작농을 소부르주아로 보고 부정했기 때문에 이념에 발목을 붙들려서 집단농장을 해체할 수 없었다.
  • 중앙의 정책 실패. 인류 역사의 신묘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자화자찬하던 소련, 중국의 지도부는 전부 다 얄팍한 유사과학에 속아넘어가거나 권위적인 최고 지도자의 사소한 실수를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에 처참한 정책 실패를 겪게 되었다.
  • 이런 이유로 자신의 노력을 보상받길 원하는[10] 농민들은 집단농장을 철저히 거부하였지만 이에 대해 소련은 자국민을 상대로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반동으로 몰아 학살하였는데, 이는 소비에트정권의 권위에 크나큰 오점으로 계속 작용하였다.
  • '집단농장은 트로츠키가 말했던 것처럼 '발전된 농업 기술과 대규모로 조직화된 농업 생산'이라는 물질적 토대 하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낙후된 농업 기술과 소규모로 분산된 농업 생산이라는 물질적 조건에서는 오히려 지독한 비효율과 낭비, 그리고 농민들에 대한 동기부여의 상실로 이어질 뿐이다.

소련에서는 유사농학자 트로핌 리센코의 말도 안되는 농학 이론을 도입했다가 농사를 대차게 말아먹어 각지에서 폭동이 발생했고, 결국 그 당시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까지 그 여파로 권력을 잃었다.

우크라이나에서도 스탈린 집권 시기에 집단농장화를 추진했고 이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모조리 학살했는데,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라는, 문명사회에서는 볼 수 없으리라 믿던 대기근이 발생하고말았다.

중국대약진 운동을 펼치면서 리센코 식의 엉터리 이론을 도입해 농지에 작물을 빽빽하게 심는 밀식 농법을 추진했다가 참담한 실패를 겪었고, 거기에 마오쩌둥이 시전한 저 새는 해로운 새다 스킬까지 겹치는 바람에 소련을 능가하는 대재앙급 기근으로 3,000~5,000만 단위의 사람들이 굶어죽는 헬게이트를 열었다.

탄자니아의 공산주의자 대통령 줄리에스 니에레레는 대약진운동으로 거덜나는 중국의 실상과 다르게 중국의 거짓 선전에 대해 고무되어 나라 전국토를 집단농장화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자신의 사유재산을 빼앗기게 된 농민들은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군대를 투입한 유혈 진압 끝에 탄자니아의 농민 90%가 집단농장에 소속된 농노가 되어버리고 말았고, 후에 도시민들 상당수를 농촌으로 하방시키기까지도 했지만 이후로 탄자니아는 생산성 저하와 연속되는 가뭄, 오일쇼크와 상품작물가격의 하락으로 식량자급은 커녕 대량의 식량을 수입하는 식량수입국이 되었고, 탄자니아의 경제성장은 1980년대까지도 답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11]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줄리에스 니에레레는 일이 잘못되자 즉각 철회하고 반성하고 거기에 하도 데였는지 후임자에게도 나처럼 경제 말아먹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12]

호찌민이 통치하는 베트남에서도 집단농장화를 추진하려다가 이를 반대한 베트남 농민들의 대규모 반란에서 5~10만 명이 사망하게되며, 정작 시행하여서도 잉여생산량이 급감하여 각처에 기근과 폭동이 번져 군대로 유혈사태를 진압하기에 급급했다. 이로 호찌민은 이 사건에 대해 본인도 민주주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며 자아비판을 하기까지 하였다. 어쨌든 이보다는 완화된 방식으로 어찌어찌 집산화가 완료되었기는 했는데 일단 북베트남에서는 일단 식량자급도 이루워내며 일단 그런대로 굴러갈수있었지만, 통일후 남베트남에도 비슷한 방식의 집산화를 적용하려다가 남베트남 농민들이 적은 수입때문에 태업을 해서 생산량은 떨어졌고 그나마도 생산된 작물의 태반을 암시장에 팔아넘겼기 때문에 경제난이 심해졌다. 결국 베트남 정부에서도 백기를 들고 도이머이정책 도입으로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8월 종파사건으로 정적을 숙청하고 집단농장화를 추진함과 동시에 스탈린식 중공업을 양성하였는데, 이는 경제와 군사력건설 병진노선으로 표방되는 북한 군국주의의 핵심사업이 되었다. 사실 농업 집산화 자체에 대한 불만은 빠른 전후복구와 경제성장 덕택에 의외로 크지는 않았다고 하며, 오히려 선진화된 농업기술이 재빠르게 도입될수있어서 의외로 1970년대까지는 꽤 효력을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는 짐이 되기 시작했고, 경제성장이 둔화되면서 생산성이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결정적으로 1990년부터 소련으로부터 석유를 저가로 수입할수없게 되면서 연료부족이 심해지면서 생산성은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북한에서는 2000년대까지는 집단농장이 유지되고있었지만 김정은 집권기부터는 농업개혁을 단행하면서 사실상 반 자영농화가 진행되었다. 김일성은 경제건설을 희생하면서까지 선군정치를 폈는데, 이로 인민들은 애국심을 빙자하여 쌀을 강제로 당에게 수탈당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했다.

헝가리에서는 1956년 집단농장의 비효율성으로 인해 발생한 기근과 식량난에 대해 소련과 친소 정권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헝가리 혁명이 발생하였는데, 임레 너지가 집권하면서 중립화 선언을 하려고하자 소련에서는 이를 자신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하고 무력을 동원하여 유혈진압을 펼쳐 친소 정권을 다시 세우게된다. 다만 새로히 들어선 카다르 야노시 정부도 농업집산화의 문제점은 잘 알고있었던지라 이후로 시장경제적인 요소를 도입해서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기는 했다.

캄보디아에서 집단농장은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출현하게 되었다. 샬롯 샤(폴 포트의 본명)의 크메르 루주 정권은 도시에 사는 이들은 다 타락한 문명에 오염된 부르주아지라 지목하고 모든 지식인과 사업가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는데, 이뿐만 아니라 도시에 사는 사람을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시키고 종이돈은 가치가 바닥을 찍을 때까지 찍어내었으며, 도시의 모든 인프라를 파괴하고 마오주의의 농상주의정책을 밀어붙인 끝에 희생자는 300만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집단농장을 정치범 수용소로도 활용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수많은 지식인들이 '하방'이라는 이름 아래 시골 집단농장들로 강제 이주당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이 때문에 집단농장 근로자들의 노예화는 점점 더 심각해졌으며, 쓸데없이 많은 인구가 집단농장에 몰려서 일손이 남아도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5. 기타

사회주의 국가에서만 있지만 않았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이러한 집단농장이 있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보험사인 스테이트 팜(국영 농장) 미국캐나다재세례파 교인들인 후터라이트 집단의 커뮤널 팜(공동체 농장/집단농장)과 같이 종교적인 동기를 통해 형성된 자발적 집단농장이 있고, 본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건국된 이스라엘키부츠가 있다. 이 키부츠는 동구권의 공산주의 집단농장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서구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협동조합 운동에 가깝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 하는 사람이 나날이 줄어서 외국인 자원봉사자로 버티는 수준이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이 인종차별이 쩔어서 백인 외국인은 좋은 대우 해주고 비 백인 외국인을 백인보다 나쁜 대우를 한다. 게다가 동양인 여성을 엘로우 캡으로 보며 성추행이나 강간사건을 일으키는 일이 허다하다.

2018년 결국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내에서 주거하는 흑인(유대인)들을 모조리 추방시키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들은 대다수가 키부츠근로자들이다.

그리고 모든 공산주의 국가에서 농업 집단화가 이루어진 건 아니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폴란드가 있다. 본래 1940년대 후반과 50년대 전반에 걸쳐서 농업집단화가 이루어졌지만 1956년에 고무우카가 집권하면서 농업 집산화가 중단되어버렸다.

예외로 몽골에서는 농업진단화가 꽤 효과를 내서 1980년대 말까지도 식량자급이 가능했다고하며 오히려 사유화하니까 자본의 부족으로 생산성이 줄어드는 딜레마에 처하기도 했었다고 한다.[13] 사실 이 경우에는 몽골이라는 나라 자체가 농업이라는것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진 수준이었고 인구의 대부분이 유목민이다보니까 수시로 이동하는것이 당연시되었으며 자영농 계층이 형성되지 못하다보니까 농업집산화로 저항이 일어날 일이 없었고[14] 그래서 집단농장 본래의 의도대로 잘돌아갔다고 하면 되겠다.


  1. [1] 현대 미국 수준으로 물자가 넘쳐서 대부분을 국가가 징수한 후에 남은 부스러기만으로도 생계유지에 충분한 수준을 말한다.
  2. [2] 레프 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1936
  3. [3] 교육수준이 높지 않았던 러시아 농민들은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이렇게 생각했다.
  4. [4] 러시아에서 적백내전이 한창일 때 독일에서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트네히트가 스파르타쿠스단을 만들고 공산혁명을 시도했지만 실패, 살해당했다.
  5. [5] 당연히 예외적 사례가 있지만 그 사례들을 다른 일반적 경우에도 적용하려고 보면 모순점이 반드시 나오게 되어있다.
  6. [6] 다만 좁은 국토면적과 높은 인구밀도에 비하면 농업생산성은 결코 낮지는 않다. 그래도 쌀을 제외한 나머지 작물도 어느정도 생산되고는 있으니까.
  7. [7] 물론 진짜로 제대로 생산력이 있는 '꿀땅'이 정말 드문걸 감안은 해야하고, 중국은 소련처럼 생산성 낮은 땅도 생산성 높은 땅도 많은 나라다. 하지만 그 경작지의 3% 전체가 생산성이 높은 '꿀땅'이 아니란게 함정.
  8. [8] 링크에서 책 전체를 읽어 볼 수 있다. 해당 내용은 제 2장에 나온다.
  9. [9] 스탈린의 경우에는 본인이 정교회 신학생 출신이다 보니 사회주의를 교조화함과 동시에 일정 부분 기독교적 모티프를 차용하여, 사회주의를 일종의 유토피아주의로 곡해한 바 있다. 즉 바이블에서 말하는 낙원을 현실에 건설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목표인 것처럼 선전한 것이다.
  10. [10] 사실 원래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바는 노력에 따른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11. [11] 윗나라인 케냐도 1980년대와 90년대에 경제성장률이 크게 떨어져서 성장세가 꺽였지만 그 케냐 1인당 국민소득의 1/4에도 못미쳤던것이 탄자니아 국민소득이었다 .
  12. [12] 사실 줄리에스 니에레레는 마오쩌둥,김일성과 비교하기엔 미안한 편이긴 하다. 그 역시도 아프리카의 지도자로서 독재자 기질이 있었고 여기서 나온 병크가 크긴 했지만 문맹퇴치,종교의 자유(!),탄자니아를 안전한 나라로 만듦,스스로 퇴진 그것도 평화적 정권이양,잘못에 반성하고 인정하는 태도경제를 파탄내고 문화를 파괴하고 나라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마오쩌둥,답이 없는 김일성을 생각해보면 이쪽은 이 인간들과 비교당하기엔 굴욕 이 인간이 잘못한게 있다면 독재와 경제실패 두가지 뿐이다. 주변국 사정과 비교해보면 현재도 탄자니아 사정은 나은 편이다(...)
  13. [13] 사실 위의 예시로 들어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도 1990년대에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자본금이 될만한 예금이 죄다 휴지조각으로 변하는 바람에(...) 막 개인농이 된 농민들이 영세성을 면치 못해서 소련시절보다도 농업생산성이 떨어졌다.(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농촌지역에서 공산당의 지지율이 더 높은 상황이 벌어진다.) 땅을 팔려고 해도 시골이니 벌수있는 돈이야 뻔했고 구매할 사람은 많지 않았던데다가 정부지원금도 재정부족때문에 밀리기 일쑤였기 때문에 딜레마였던것 그래서 생산성을 제대로 발휘하기 시작한것은 2000년대 들어와서의 일이다.
  14. [14] 물론 대신 풍습개혁이나 문화파괴로 몸살을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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