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妾
1.1. Concubine
1.1.1. 정부, 일부다처제와의 차이
1.1.2. 한반도
1.1.3. 중국
1.1.4. 서양
1.1.5. 기타
1.2. 과거에 여성이 자신을 낮춰부르는 일인칭 대명사
2. 貼
3. 帖

1. 妾

1.1. Concubine

정실부인 외에 데리고 사는, 통상적으로 정실부인보다 신분이 낮은 여자. 소실(小室), 측실(側室), '작은집'으로도 불리는데 동양에서 황제나 왕의 첩인 경우는 대체로 후궁이란 단어를 쓴다. 본부인의 입장에서 남편의 첩은 '시앗'이라 부른다[1]. 정식 부인과 달리 첩은 '혼인한다'기보다 '들인다', '데려온다'는 표현을 쓰며, 첩을 들이는 것을 '축첩'이라 하며, 처와 첩을 합쳐서 처첩이라고 부른다. 속칭 '세컨드'라고 부르지만, 사실 영어로 second wife는 어디까지나 이혼이나 사별 후 2번째로 맞이한 정식 아내로서, 말 그대로 '계처(繼妻)'를 뜻하기에 첩과는 다르다.

본래 첩은 신분사회에서 계급간의 계승권 구분을 위해 존재하는 차별을 위한 구조이다. 철저한 부계사회로서의 첩 제도로 인해 어머니가 다른 아이들이 잔뜩 태어났고, 단지 어머니가 첩 신분이라는 이유만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신분사회의 폐해로 생기는 여러가지 차별을 받는 등 악순환을 일으킨다. 예를 들자면,

  • 첩이 낳은 자식은 본처 자식보다 낮은 신분으로 분류해서 가문을 상속받지 못한다.[2]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했던 홍길동이 이런 경우.
  • (신분사회가 아니더라도) 정략결혼 등의 이유로 처의 신분에 대한 우대 방법의 하나다. 다만, 처의 계급이 더 높다면 정략결혼이라도 감히 첩을 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의 부마 같은 경우는 축첩은 물론이고 재혼까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마눌님 서거하시거든 수절하란 의미.[3]

첩의 자식이 차별당하는지의 유무와 그 정도는 시대와 국가에 따라서 상당한 격차를 보인다. 인구에 따라서 그 정도가 차이가 있다는 의견이 있지만, 오히려 인구가 한국보다 늘 많았던 중국에서는 적서차별이 상당히 느슨했다. 또한 고려조선 두 시대만 비교해도 차별의 정도가 차이가 난다.

1.1.1. 정부, 일부다처제와의 차이

정부나 일부다처제의 두번째 이하 부인와 혼동되기도 하는데 이 둘과 첩은 차이가 있다.

첩이 일부다처제의 둘째 이하 부인과 구별되는 점은, 일부다처제, 특히 이슬람의 일부다처제에서 여러 부인은 법적, 관습적으로 동등한 존재이며 남편으로부터 동등한 대우를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법적, 관습적으로 첩은 정실부인보다 신분이 낮으며, 남편에게 정실부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 수 없고, 가정 내 대소사에 평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없고, 첩의 소생은 서자로서 정실부인의 소생에 비교해서 차별받는다. 즉, 혼인 관계이기는 하되, 처(妻)와는 달리 한 단계 낮은 대우를 받도록 지정된 혼인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다처제 사회보다는 다첩제 사회에서 평균적으로 부인의 수가 많다. 부인의 수를 늘리더라도 남성이 부인이나 그 소생 자식에게 해줘야 할 의무가 적기 때문에 남성의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반면 일부 이슬람 국가 등 모든 부인과 자녀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 다처제 국가에서는 부인의 수에 비례해서 재산 분배나 양육 등 부담이 커지게 되므로 상류층 남성들이라도 부인의 수는 1명 혹은 2명이 대부분이고 3명 이상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예를들어 두 처의 살림집을 동등한 수준으로 구해줘야 하고, 두 집을 동등하게 방문해야 한다. 생활비는 물론이고 선물 같은것도 두 처에게 동등하게 해줘야 한다. 선물로 반지를 요구하고 다른 한명이 코트를 요구하면, 분란을 막기 위해 반지와 코트를 두개씩 사서 둘 다 선물하는 식. 이런 문화 때문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남성은 짝을 구하기가 오히려 일부일처제를 법으로 정한 나라보다 더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다.[4] 왜냐하면 경제력 있는 남성이 결혼적령기의 여성들 여러명과 결혼하니 생활능력이 떨어지는 남성이 결혼할 여성을 구하기가 그만큼 어려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회교권 국가들 중에는 서양식 가족제도와 법제도를 다소 받아들여서 일부일처제를 법으로 정해놓은 나라들도 있긴 하다.

첩이 정부(情婦, mistress)와 구별되는 점은, 정부가 내연 관계의 여자로서 비교적 정조 의무에서 자유로우며, 정부가 낳은 소생은 남자가 별도로 인지하지 않은 한 사생아가 되지만, 첩은 일종의 불평등한 혼인관계로서 남자에게 묶여 있고, 첩의 소생은 특별히 인지하지 않아도 남편의 자식으로 (단 서자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비교적 정조 의무에서 자유로운 정부와 달리, 첩이 외간 남자와 자면 간통으로 취급받았다.[5]첩이 지는 정조의 의무는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것으로서, 주인은 자기 첩에 대해 정조를 요구할 수 있지만 첩은 주인에게 정조를 요구할 수 없다.

1.1.2. 한반도

한국은 전통적으로 일부일처다첩제였으나, 고려 시대의 왕은 여러 명의 왕비를 두었다. 대표적으로 고려 태조 왕건은 부인의 숫자가 29명이었는데 그중 궁궐에서 함께 지내는 왕비는 6명뿐이고 다른 20명 이상의 부인들은 각자의 친정에서 따로 지냈다고 한다. 반대로 왕을 제외하면 일부일처는 당연하고 첩도 금지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일부일처제가 확립되면서 왕도 처, 즉 왕비는 1명만 둘 수 있게 되었고 나머지는 후궁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경우 첩을 두는 이유는 다양했다.

1. 처가 병들거나 집안일을 돌보기 힘들때 이를 대신시키기 위함: 이황의 경우 첫 아내를 사별하고 재혼한 아내가 정신에 이상이 있어서 안주인으로서 행동할수 없어서 첩을 두었고 집안을 잘 돌본 첩에게 감사를 표하며 이후 이 첩의 자식들을 적자로 인정해주고 이후에도 집안에서 적서 차별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2. 관직 사정상 본가에서 떨어져 지낼때 그곳에서 살기 용이하게 하기 위함. 이에 대해 남겨진 조선의 기록중에선 세놓고 사는데 집주인의 갑질이 심해지자 그냥 첩을 둘까 하는 이야기도 있다. 보통 양첩의 경우가 이렇다. 에초에 계집종을 첩으로 두는게 아닌이상 대체로 첩과 본처는 다른 집에서 살았다. 특히 사대부가 부인들이 첩을 들여야 할때 자주 썼던 방식이다.

3. 두말할 필요 없이 여색을 목적으로(...). 후궁처럼 왕실에서 첩을 둘 때는 이를 미화하기 위해 '자손의 번성함'을 이유로 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많은 사대부들이 공식적으로 본처와 여러 명의 첩을 거느렸다.

축첩은 조선 시대를 넘어 일제강점기까지 인정되었다. 사실 일제시대 때 개정된 일본 민법의 영향으로 공식적으로 축첩이 금지되어있도록 "삽입"되어 있었지만 당대 친일파로써 기득권을 쥐고 있던 고위직들부터가 첩을 대놓고 두었기 때문에 당연히 지켜질리는 없었고 실질적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또한 축첩했다고 해서 처벌하는 일이 없었고 불륜을 저질른다 해도 유부녀나 생판 아이들과 불륜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에는 이혼사유로도 인정되지 않았는데 당시 여성들이 간통을 하면 되려 처벌을 받는것은 여전했다. 한반도는 당시 일본제국 기준으로는 법률은 커녕 헌법 적용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일본법률을 유추적용하고 있었다. 그러니 일본 법률과는 완전히 별개로 식민지 조선 권력자들의 협력을 받기 위해서, 첩제도를 사실상 용인하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축첩의 폐지가 여권운동가들의 당시 과제 중 하나였다.

결국 축첩은 1948년 대한민국 헌법 제정으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한국전쟁을 겪으며 남자들이 줄었던 것도 있고, 또 원래 관습이란 것이 법이 바뀌었다고 쉽게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서 그 이후에도 1960년대까지도 첩으로 들어가는 여자들은 있었고, 이 제도가 생긴 이후인 1960년대부터는 일부러 첩을 들인 다음 전처에게 이혼을 요구한 뒤 첩에 해당되는 사람과 재혼하는 일이 흔해졌다. 이혼소송 시 유책배우자는 이혼을 요구할 권한이 없도록 한 유책주의를 채택한 이유가 바로 이 축출이혼을 막기 위해서였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극도로 제한된 1960년대에 축출 이혼당한 본처들은 생계가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편법으로 인해, 전 배우자와 사별했거나 이혼한 후 재혼한 경우, 재혼 상대가 으로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공식적으로 축첩 관습이 사라지면서 후처가 첩 비슷하게 포지셔닝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는 전처가 아들을 낳고 후처가 딸을 낳은 경우인데, 남아선호 사상으로 인해 전처의 발언권이 커지기 때문.

축첩 관습이 사라진 것은 1960년대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이다. 박정희 정부는 구악타파라는 명목으로 공무원, 경찰 중 축첩자에게 파면 등의 중징계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실효를 거두면서 1960년대 이후로는 축첩이 범죄라는 인식이 지배적인것이 되면서 비로소 사라졌다.

축첩 관습과 1960년대 축첩 단속은 오늘날에도 공무원 징계 사유에 '축첩'이 있는 것으로 그 유산을 남기고 있다. 21세기까지도 공무원 징계사유 중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저 축첩(…)인데 오늘날에는 진짜 축첩을 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대부분은 혼외의 정부를 둔 공무원을 축첩으로 징계하는 것이다. 굳이 축첩이라는 케케묵은 표현이 징계사유로 올라가는 건, 해당 징계 사유가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6]

대한민국에서 첩 계약은 선량한 풍속에 위배되는 계약으로 간주되어 무효이다. 실질적으로야 어떻든 법적으로 첩이라는 포지션은 현대 한국에선 있을 수 없다는 것. 재벌과 같은 이들은 암암리에 첩을 들이지만 이 '첩'들은 공식적 지위가 없으므로 첩보다는 정부에 가깝다. 불륜이기에 정식으로 결혼한 총수 부인의 입장에서는 언짢은 일이지만, 구세대 사람들이 그랬듯이 단념하거나, 혹은 배우자 우선 상속분 유산을 남편의 사망 후 챙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참고 사는 경우도 있다.[7] 이런 식의 정부 혹은 첩의 대표적인 예로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정부인 서미경이 있다. 첩보단 정부에 가깝기 때문에 공식적으론 정조의 의무가 없고 정조의 의무가 있는 첩처럼 독점하기 위해선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필요하다. 돈의 양은 남자의 재산에 좌우되는데 그냥 돈 좀 있는 사람의 경우 적당히 오피스텔 방주고 차주고 명품 두를정도면 충분하지만 신격호 정도 되는 재산을 가졌다면 기업 계열사 하나를 줄 각오가 필요하다. 실제로 서미경은 롯데홀딩스 지분을 신격호의 친자식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시대가 바뀌어 재벌그룹 2세, 3세 남편이 이런 짓을 할 경우 아내는 위자료를 받고 이혼해서 갈라지기도 하는 것 같다.[8]

첩의 존재는 상속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생물학적으로 친자식인 것이 증명된다면, 법이 정한 한도 내에서 자기 몫을 받아갈 수 있다. 정주영의 혼외자식들이 많이 그랬다.

옛날에 첩이었던 할머니들이 21세기 초에도 생존한 경우가 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에 알기 어렵지만, 한 마을에서 수십 년을 사는 시골에서는 누가 본처이고 누가 첩이었는지 다들 아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분들 중에는 남편을 사별하고 그 남편의 정처와 같이 의지하며 사는 경우도 왕왕 있다. 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충공깽이겠지만, 옛날은 그런 시대였고 힘든 시대를 같이 살다보니 비록 시앗이긴 해도 정이 든 경우가 있고 서로 노년에 의지하면서 산다고. 한편 2018년에도 남편 사후 첩이 함께 살던 정처를 둔기로 때려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가끔 옛날 제적등본이나 족보를 떼보면 자신들은 누구누구가 할머니나 증조모로 알고 있는데 서류에는 다르게 등재된 경우가 많은데, 보통 첩의 자식을 처의 자식으로 올린 경우다. 이건 첩의 자식들이나 정처의 자식들 입장에서는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며, 재산 분란의 씨앗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호적상으로는 혼인한 적도 없고 자식도 없는 걸로 되어 있기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 계층 등으로 지정되어 혜택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는 재산이 있고 자식의 부양을 받으면서도 편법으로 돈을 타내는 부정수급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상당하다. 첩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남편의 집안이 부유했던 경우는 오히려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적에 친자식이 올라가 있지 않다는 것은, 복지혜택에서 오히려 큰 장애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분명히 친어머니지만 서류상으로는 남남이므로 장례비 보조를 받을 수도 없고, 의료비 지원에서도 실제 부양인인 친자식이 있지만 그 관계가 서류상 입증이 안 되어 자식이 지원을 받기도 어렵다.

첩이 바로 정처의 자매인 경우도 일부 있었다고 한다. 김춘추에게 시집간 문희, 보희 자매나 청나라 광서제후궁인 진비와 근비가 자매지간이었고 그 외에도 역사상 자매나 고모-조카가 한 남편에게 시집가는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를 잉첩이라 하는데, 당시 왕을 비롯한 귀족의 경우 결혼은 가문과 가문, 국가와 국가간 결속력을 다지는 중요한 외교적 장치였으며 그 결실인 자식을 보는것 또한 중요했다. 자매가 한 가문에 시집을 갔는데 언니가 자식을 낳지 못하거나 출산중 죽었다면 동생은 결속력 유지에 있어 귀중한 보험이 된다. 또한 한 여성이 낳는 자식의 수보단 둘이 낳는 자식의 수가 확률적으로 더 높을 수밖에 없고 결국 이는 외교적으로도 발언권을 높이거나 내정간섭 등을 하는데에 있어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다.게다가 자식들의 입장에서도 생모가 죽었을 경우에 이모라는 보호자 슬하에서 자라는 것이 생판 남인 새어머니의 밑에서 자라는 것보다 생존률이 높을 것이다.

제적등본에서 첩의 자녀가 정처의 자녀로 등록되어 있을 경우 정정이 가능하다. 굳이 할 필요는 없으나 첩에 해당되는 사람이 돌아가시면 재산은 그 사람의 조카에게 넘어가므로 첩의 자식 중 한 명이 법원에 찾아가 친자확인 후 제적등본을 정정하여 바꿀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제적등본상 아버지는 같게 나오지만 어머니는 다르게 나온다.

첩은 처보다 신분이 낮으므로 죽어서 선산에 묻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1.1.3. 중국

중국의 경우는 신분에 따라서 처첩을 둘 수 있는 숫자가 달랐다. 황제나 제후가 되면 일부다처다첩이 가능했다.[9] 고위 관료인 경대부는 일부일처다첩, 하급귀족인 사[10]는 일부일처에 2첩 정도, 그 이하는 일부일처였다. 예를 들어서 중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구운몽에서 주인공 양소유는 2처 6첩을 둔다. 2명이 서로 평등한 정처고, 나머지 기생, 양민, 비녀(婢女) 등 신분 낮은 듣보잡(…) 여자들을 첩으로 두어 차별하는 것. 이는 양소유가 제후급 위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영웅은 삼처사첩을 마다하지 않는다' 운운하는데, 여기서 영웅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한반도의 왕과 같은 수준인 제후를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의 축첩행위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 '얼나이'(二奶)[11]라고 불리는 부유층 및 관리들의 축첩 행위가 심각하다고 한다. 물론 축첩행위가 불법이므로 법적 해석을 따르면 여러 명의 정부를 두는 식인데, 쉬치야오 장쑤성 건설청장을 지냈던 한 관리가 첩만 146명을 거느렸다고 하니....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당연히 사회적인 인식이 좋을리가 없고, 들키면 공무원직에서 짤리기는 하지만 징계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첩의 집을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같은 해외에 두어서 불륜을 하는 경우가 흔하고, 얼나이 일을 하면 거금을 받거나 고위직과 연줄이 생기기 때문에 의외로 얼나이가 되려는 수요가 있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축첩 행위가 일종의 권력자의 상징처럼 여겨진다고 한다.

1.1.4. 서양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동양보다 엄격한 일부일처제가 자리잡았다. 서양 남자들이라고 바람 안 핀 건 아니지만 첩보다는 정부를 두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첩 혹은 공식 정부라 할 만한 존재는 있었다. 특히 왕 같은 경우는 아예 공식적으로 무슨 백작부인이니 하는 작위를 주고 후궁으로 삼았다. 다만 동양과 달리 공식 정부라 하더라도 공식 정부와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은 공식적으로는 서자 취급도 받지 못하는 사생아이다. 루이 15세의 첩인 퐁파두르 후작부인이나 뒤바리 백작부인 같은 경우가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신기하게도 유럽 궁정에서는 유부녀인 여성을 애인으로 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새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불륜의 변명거리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왕과 사이에서 유부녀가 아이를 낳았을 때, 본 남편이 "내 아이요."라고 인정하여 왕과 아내의 불륜에 실드를 칠 수 있단 이야기다. 물론 눈가리고 아웅이기는 하지만, 그 대가로 남편은 대개 막대한 금전적 보상이나 높은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해진 건 아니므로 미혼 여성을 정부로 두는 왕도 적지 않고, 유부녀라고 해도 눈가리고 아웅을 위해 법률상으로만 결혼한 경우도 많았다. 20세기 초반까지의 유럽 귀족들이 나오는 매체나 역사에서 '애인' '정부' '첩' 등은 거의 빠지지 않는다.

1.1.5. 기타

첩에 관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첩을 들이는 것이 합법적이거나 용인되었던 시기에 신분 높고 경제적 능력있는 남자가 첩을 들이지 않으면 지역사회에서 남자의 부인에게 그 '책임'을 물어서 '드세다', '투기가 심하다' 등 매우 나쁜 평가를 내렸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조선의 양반집의 경우 본부인이 나서서 일부러 첩을 들이는 놀라운 경우도 있었으며, 프랑스의 경우 첩을 들이지 않았던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비판받던 이유 중 한 가지가 되었다. 조선 왕실에서 왕비가 첩인 후궁을 들이라고 국왕에게 먼저 조언한 사례도 있다. 이런 상황은 여권이 신장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일부다처제와 달리 축첩은 인정하는 동네가 많지 않고, 흔한 오해와 달리 이슬람 국가에서도 2번째 아내가 아닌 본처보다 낮은 첩을 들이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과거 이슬람권에서는 여자 노예라는 이름으로 하렘에 사실상의 첩들을 들였지만[12], 현대 대부분의 순니파 이슬람 국가에서 인정하는 것은 최대 4명까지의 평등한 정처이다. 처첩제에 익숙한 한국의 시각에서는 둘째 이하 부인들을 곧바로 첩으로 간주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상당한 결례이므로 대할 때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부유층이 아닌 다음에야 생활비가 쪼달려서라도 2명 이상과 혼인하는 경우가 잘 없다고 한다. 또한 이슬람 사회에서 다처제를 인정하는 중요한 이유는 이혼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13] 부인이 배우자로서 만족스럽지 않거나 자식을 낳지 못하더라도 그 부인을 내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이슬람 사회들도 인식의 변화로 두 번째 아내를 들이는 경우보다는 이혼과 재혼이 늘어나고 있으며, 특히 젊은 나이일 수록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리는 남성의 비율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일부일처가 완전히 확립될 지도 모르는 상황. 물론 대다수 가정에서는 일부일처를 지키고 있다.

간혹 남자가 첩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1.2. 과거에 여성이 자신을 낮춰부르는 일인칭 대명사

첩(妾)은 궁중이나 민간에서 여성이 자신을 낮춰 부르던 말이다.

첩(妾)은 원래 여자 노비를 가르키는 말이었다. 높은 신분의 여성 또한 군주 앞에서 자기를 첩으로 지칭하며 낮춰불렀다. 첩의 반대말은 남자 노비를 뜻하는 신(臣)이다. 그래서 신첩(臣妾)은 남자 백성과 여성 백성을 합친 신하를 강조하는 백성을 뜻하는 말이었다. 신민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조선왕조실록부터 구한말의 기록까지 실제적으로 신첩은 이러한 뜻으로 쓰였다. # 조선왕조실록에서 ‘신첩’을 검색해보면 태조~순종 때까지 일관되게 신민, 신하의 뜻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관들(남자)인 ‘우리 신첩이~’(저희 백성은, 저희 신민은~)이라며 자칭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왕비나 후궁이 중국 사극에서 군주 이상에게 신첩을 쓰고, 한국 사극에서는 군주에게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극에서 쓰이는 법칙 중 하나일 뿐이다. 신첩은 사극에서 쓰는 것처럼 일상에서 쓰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에서 첩, 소첩, 첩신(妾身) 등이 주로 쓰였다. 예를 들면 고려시대의 기록인 동국이상국집에서 왕족 여성이 군주 이상(태후, 왕후, 왕)에게 첩으로 자신을 지칭한다. 출처

첩인 여자들만 자신을 소첩이라고 낮춰부르지 않는다. 정실 왕비(왕후)인 인현왕후숙종과 연애 편지로 밀당을 할 때, 자신을 소첩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는 중국에서도 그러하다. 현대 대한민국에선 이런 호칭을 쓰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무협지에서도 종종 이런 표현을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쓰는 1인칭인 와라와를 첩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풍적인 여성의 1인칭이라는 분위기만 놓고 보면 그럴싸 하지만, 저 단어가 자신을 낮춰 부르는 표현이 아니다보니 의미로 놓고 보면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2. 貼

한약재를 포장하는 봉지를 세는 단위이다.

현대에 와서 많은 혼란을 빚는 단위이기도 한데, 1첩이 1회 복용분이며, 2첩이 3회 복용분으로 1일분이 된다. 이렇게 되는 까닭은 먼저 1첩을 달여 1회 복용하고, 또 1첩을 달여 1회 복용한 후, 이미 전탕한 2첩을 합쳐(초탕시 약 성분이 절반 가량 추출되었다고 간주) 재탕하여 1회분이 나오기 때문이다.

1제는 20첩으로 10일분(총 30회)이다.

3. 帖

책. 사진첩이나 수첩의 첩이 이 한자를 쓴다.


  1. [1] 이런 오래된 표현이 잘 남아있는 속담중에는 '시앗 싸움에 요강장수'나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같은 표현이 있다.
  2. [2] 대개 첩은 여자의 신분이 낮은 경우이다.
  3. [3] 부마여서 피해 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박영효. 12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했는데 겨우 몇달 만에 아내인 영혜옹주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12살짜리 홀아비평생 첩밖에 둘 수 없었고, 자식들도 모두 서자로 호적에 올랐다. 그나마 광복 이후 적서차별이 없어진 게 다행.
  4. [4] 허영만 작가가 그린 경마를 주제로 한 어떤 만화에서 주인공이 부하직원 한명이 자기 같은 사람은 중동 같은 곳에 태어났어야 한다는 말을 하자, '거기는 자네 같은 무능한 남자는 짝을 구하기가 더 어려워서 평생 혼자 살아야 한다네, 그나마 일부일처제 국가라서 자네에게 기회라도 있는 거야' 하고 코웃음을 치며 비웃는 장면도 나온다.
  5. [5]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자기 첩이 바람피우는 현장을 덮쳐서 첩을 죽였다면, 남편은 무죄방면이다. 그러나 첩이 아닌 정부(혹은 애인)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덮쳐서 자기 정부를 죽였다면, 남자는 짤없이 살인죄로 처벌받았다. 단, 목격한 당일에 죽인 경우에 한해서이며, 그날이 지나서 죽인 경우는 살인죄가 적용되었다.
  6. [6] 1972년 대법원 판례에 처음으로 축첩이 공무원 해임사유가 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7. [7] 이건희 회장이 외도 의혹이 좀 있고, 아내 홍라희와 사이가 나쁜데도 아내가 이혼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8. [8] SK 그룹회장 최태원이 이혼소송 벌이고 있는 거 보면 알 수 있다. 재벌 1세 회장들은 어떻게보면 당당하게(?) 불륜을 저지르고 자손을 두었지만 적어도 그 후손들은 딴 여자 생기면 기존 배우자와 헤어지기 위해서 이혼절차라도 받으니 본인들의 인식도, 사회의 인식도 변하고는 있는 것이다.
  9. [9] 예를 들면 기황후는 제2황후, 즉 둘째 부인이지만 정처에 해당된다. 첩이 아니다.
  10. [10] 선비 사이지만, 굳이 선비라는 의미가 아니라, 신사층이라고 하는 특권계층이다.
  11. [11] 얼(二)은 2, 나이(奶)는 여성의 가슴을 뜻하며 합하면 두번째 가슴....
  12. [12] 사실 이것도 이슬람권 전체에 보편화된 풍습은 아니고, 오직 튀르크 문화권에서만 발견되는 풍습이다. 그것도 왕이나 대영주 정도나 할 수 있던 일이었고, 애초에 하렘제도의 시작은 성적쾌락이 아니라 공평한 경쟁(?)을 통한 유능한 자식의 계승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 참고로 유대교를 믿었던 하자르 칸국 조차도 하렘제도를 운용하고 있었다.
  13. [13] 다만 쿠란에는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으면 이혼할 수 있다고 적혀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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