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妾
1.1. Concubine
1.2. 과거에 여성이 자신을 낮춰부르는 일인칭 대명사
2. 貼
3. 帖

1. 妾

1.1. Concubine

속칭 '세컨드'라고 부르지만, 사실 영어로 second wife는 어디까지나 이혼이나 사별 후 2번째로 맞이한 정식 아내로서, 말 그대로 '계처(繼妻)'를 뜻하기에 첩과는 다르다. 순우리말로 '시앗'이라고 한다

정실부인 외에 데리고 사는, 통상적으로 정실 부인보다 신분이 낮은 여자. 소실(小室), 측실(側室), '작은집'으로도 불리는데 동양에서 왕의 첩인 경우는 대체로 후궁이란 단어를 쓴다. 본부인의 입장에서 남편의 첩은 '시앗'이라 부른다. 정식 부인과 달리 첩은 '혼인한다'기보다 '들인다', '데려온다'는 표현을 쓰며, 첩을 들이는 것을 '축첩'이라 하며, 처와 첩을 합쳐서 처첩이라고 부른다.간혹 남자가 첩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본래 신분사회에서 계급간의 계승권 구분을 위해 존재하는 차별을 위한 구조이다. 문제는 철저한 부계사회로서의 첩 제도로 인해 어머니가 다른 아이들이 잔뜩 태어났고, 단지 어머니가 첩 신분이라는 이유만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신분사회의 폐해로 생기는 여러가지 차별을 받는 등 악순환을 일으키는 제도라는 것. 예를 들자면,

  • 첩이 낳은 자식은 서얼로 분류해서 가문을 상속 받지 못한다.[1]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했던 홍길동을 기억하자.
  • (신분사회가 아니더라도) 정략결혼 등의 이유로 처의 신분에 대한 우대 방법의 하나다. 다만, 처의 계급이 더 높다면 정략결혼이라도 감히 첩을 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의 부마 같은 경우는 축첩은 물론이고 재혼까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마눌님 서거하시거든 수절하란 의미.[2]
  • 첩의 자식이 차별당하는지의 유무와 그 정도는 시대와 국가에 따라서 상당한 격차를 보인다. 인구에 따라서 그 정도가 차이가 있다는 의견이 있지만, 오히려 인구가 한국보다 늘 많았던 중국에서는 적서차별이 상당히 느슨했다. 또한 고려조선 두 시대만 비교해도 차별의 정도가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의 경우 축첩은 조선 시대를 넘어 일제강점기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헌법 제정시 폐지되었다.[3] 그러나 그 후에도 한국전쟁을 겪으며 남자들이 줄었던 것도 있고, 또 원래 관습이란 것이 법이 바뀌었다고 쉽게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서[4] 그 이후에도 첩으로 들어가는 여자들은 있었다.

이 제도가 생긴 이후인 1960년대부터는 일부러 첩을 들인다음 전처에게 이혼을 요구한 뒤 첩에 해당되는 사람과 재혼하는 일이 흔해졌다.

실제로 옛날에 사실은 첩이었던 할머니들이 21세기 초에도 생존한 경우가 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에 알기 어렵지만, 한 마을에서 수십 년을 사는 시골에서는 누가 본처이고 누가 첩이었는지 다들 아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분들 중에는 남편을 사별하고 그 남편의 정처와 같이 의지하며 사는 경우도 왕왕 있다. 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충공깽이겠지만, 옛날은 그런 시대였고 힘든 시대를 같이 살다보니 비록 시앗이긴 해도 정이 든 경우가 있고 서로 노년에 의지하면서 산다고.

그 외에도 가끔 옛날 제적등본이나 족보를 떼보면 자신들은 누구누구가 할머니나 증조모로 알고 있는데 서류에는 다르게 등재된 경우가 많은데, 보통 첩의 자식을 처의 자식으로 올린 경우다.[5][6] 거기다가 첩이 바로 정처의 자매인 경우도 일부 있었다고 한다.[7]

참고로 제적등본에서 첩의 자녀가 정처의 자녀로 등록되어 있을 경우 정정이 가능하다. 굳이 할 필요는 없으나 첩에 해당되는 분이 돌아가시면 재산은 그 분의 조카에게 넘어가므로 첩의 자식 중 한명이 법원에 찾아가 친자확인 후 제적등본을 정정하여 바꿀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제적등본 상 아버지는 같게 나오지만 어머니는 다르게 나온다.

축첩과 혼동하기 쉬운 개념으로 일부다처제, 정부(情婦) 등이 있다. 덤으로, 21세기까지도 공무원 징계사유 중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저 축첩(…)이다. 다만, 진짜 조선시대 같은 의미의 축첩이라기보다는 '혼외의 정부를 두었다'는 개념에 가깝다. 굳이 축첩이라는 케케묵은 표현이 징계사유로 올라가는 건, 해당 징계 사유가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땐 공무원 중에서 축첩자가 상당히 많았다.

서양 같은 경우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일부일처제가 자리잡았으나, 첩을 들이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특히 왕 같은 경우는 아예 공식적으로 무슨 백작부인이니 하는 작위를 주고 후궁으로 삼았다. 루이 15세의 첩인 퐁파두르 후작부인이나 뒤바리 백작부인 같은 경우가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신기하게도 유럽 궁정에서는 유부녀인 여성을 애인으로 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새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불륜의 변명거리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8] 하지만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해진 건 아니므로 미혼 여성을 정부로 두는 왕도 적지 않다.[9] 20세기 초반까지의 유럽 귀족들이 나오는 매체나 역사에서 '애인' '정부' '첩' 등은 거의 빠지지 않는다.

첩에 관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첩을 들이는 것이 합법적 또는 용인되었던 시기에 능력있는 남자가 첩을 들이지 않으면 지역사회에서 남자의 부인이 평이 매우 안 좋아졌다. 그렇기에 조선의 양반집의 경우 일부러 첩을 들이는 경우도 있었으며, 프랑스의 경우 첩을 들이지 않았던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비판받던 이유 중 한 가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여권이 신장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첩이 일부다처제의 둘째 이하 부인과 구별되는 점은, 일부다처제, 특히 이슬람의 일부다처제에서 여러 부인은 법적, 관습적으로 동등한 존재이며 남편으로부터 동등한 대우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법적, 관습적으로 첩은 정실부인보다 신분이 낮으며, 남편에게 정실부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 수 없고, 가정 내 대소사에 평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없고, 첩의 소생은 서자로서 정실부인의 소생에 비교해서 차별받는다. 즉, 혼인 관계이기는 하되, 처(妻)와는 달리 한 단계 낮은 대우를 받도록 지정된 혼인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다처제 사회보다는 다첩제 사회에서 평균적으로 부인의 수가 많다. 부인의 수를 늘리더라도 남성이 부인이나 그 소생 자식에게 해줘야 할 의무가 적기 때문에 남성의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반면 일부 이슬람 국가 등 모든 부인과 자녀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 다처제 국가에서는 부인의 수에 비례해서 재산 분배나 양육 등 부담이 커지게 되므로 상류층 남성들이라도 부인의 수는 1명 혹은 2명이 대부분이고 3명 이상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10]

우리나라의 경우 전통적으로 일부일처다첩제였으나, 고려 시대에는 왕은 여러 명의 왕비를 두었고[11], 반대로 왕을 제외하면 일부일처는 당연하고 첩도 금지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일부일처제가 확립되면서 왕도 처, 즉 왕비는 1명만 둘 수 있게 되었고 나머지는 후궁이 되었다.

중국의 경우는 신분에 따라서 처첩을 둘 수 있는 숫자가 달랐다. 황제나 제후가 되면 일부다처다첩이 가능했고[12], 고위 관료인 경대부는 일부일처다첩, 하급귀족인 사[13]는 일부일처에 2첩 정도, 그 이하는 일부일처였다. 예를 들어서 중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구운몽에서 주인공 양소유는 2처 6첩을 둔다. 2명이 서로 평등한 정처고, 나머지 기생, 양민, 비녀(婢女) 등 신분 낮은 듣보잡(…) 여자들을 첩으로 두어 차별하는 것. 이는 양소유가 제후급 위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영웅은 삼처사첩을 마다하지 않는다' 운운하는데, 여기서 영웅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한반도의 왕과 같은 수준인 제후를 의미하는 것이다.

첩이 정부(情婦, mistress)와 구별되는 점은, 정부가 내연 관계의 여자로서 비교적 정조 의무에서 자유로우며, 정부가 낳은 소생은 남자가 별도로 인지하지 않은 한 사생아가 되지만, 첩은 일종의 불평등한 혼인관계로서 남자에게 묶여 있고, 첩의 소생은 특별히 인지하지 않아도 남편의 자식으로 (단 서자로) 인정받는다. 또한 비교적 정조 의무에서 자유로운 정부와 달리, 첩이 외간 남자와 자면 그것은 간통으로 취급받았다.[14]첩이 지는 정조의 의무는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것으로서, 남편은 자기 첩에 대해 정조를 요구할 수 있지만 첩은 남편에 대해 정조를 요구할 수 없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일부다처제와 달리 축첩은 인정하는 동네가 많지 않고, 흔한 오해와 달리 이슬람 국가에서도 2번째 아내가 아닌 본처보다 낮은 첩을 들이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과거 이슬람권에서는 여자 노예라는 이름으로 하렘에 사실상의 첩들을 들였지만[15], 현대 대부분의 순니파 이슬람 국가에서 인정하는 것은 최대 4명까지의 평등한 정처이다. 처첩제에 익숙한 한국의 시각에서는 둘째 이하 부인들을 곧바로 첩으로 간주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상당한 결례이므로 대할 때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부유층이 아닌 다음에야 생활비가 쪼달려서라도 2명 이상과 혼인하는 경우가 잘 없다고 한다. 또한, 이슬람 사회에서 다처제를 인정하는 중요한 이유는 이혼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부인이 배우자로서 만족스럽지 않거나 자식을 낳지 못하더라도 그 부인을 내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이슬람 사회들도 인식의 변화로 두 번째 아내를 들이는 경우보다는 이혼과 재혼이 늘어나고 있으며, 특히 젊은 나이일 수록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리는 남성의 비율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일부일처가 완전히 확립될 지도 모르는 상황.

대한민국에서 첩 계약은 선량한 풍속에 위배되는 계약으로 간주되어 무효이다. 즉, 실질적으로야 어떻든 법적으로 첩이라는 포지션은 현대 한국에선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재벌과 같은 이들은 암암리에 첩[16]을 두고 있는 듯하며, 후에 이것이 상속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친자식인 것이 증명된다면, 법이 정한 한도 내에서 자기 몫을 받아갈 수 있다. 정주영의 혼외자식들이 많이 그랬다.

당연히 이는 불륜이기에 정식으로 결혼한 총수 부인의 입장에서는 언짢은 일이지만, 그냥 그 시대 어른들이 그랫듯이 단념하거나, 혹은 배우자 우선 상속분 유산을 남편의 사망 후 챙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참고 사는 경우도 있다.[17] 다만, 재벌그룹 2세, 3세부터는 마인드가 좀 다른지라 남편이 이런 짓을 할 경우 위자료를 받고 이혼해서 갈라지기도 하는 것 같다.

조선시대의 경우 첩을 두는 이유는 다양했다.

1. 처가 병들거나 집안일을 돌보기 힘들때 이를 대신시키기 위함: 이황의 경우 첫 아내를 사별하고 재혼한 아내가 정신에 이상이 있어서 안주인으로서 행동할수 없어서 첩을 두었고 집안을 잘 돌본 첩에게 감사를 표하며 이후 이 첩의 자식들을 적자로 인정해주고 이후에도 집안에서 적서 차별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2. 관직 사정상 본가에서 떨어져 지낼때 그곳에서 살기 용이하게 하기 위함. 이에 대해 남겨진 조선의 기록중에선 세놓고 사는데 집주인의 갑질이 심해지자 그냥 첩을 둘까 하는 이야기도 있다. 보통 양첩의 경우가 이렇다. 에초에 계집종을 첩으로 두는게 아닌이상 대체로 첩과 본처는 다른 집에서 살았다. 특히 사대부가 부인들이 첩을 들여야 할때 자주 썼던 방식이다.

3. 두말할 필요 없이 여색을 목적으로(...). 후궁처럼 왕실에서 첩을 둘 때는 이를 미화하기 위해 '자손의 번성함'을 이유로 하기도 했다.

현대 중국에서 '얼나이'(二奶)[18] 라고 불리는 부유층 및 관리들의 축첩 행위가 심각하다고 한다. 쉬치야오 장쑤성 건설청장을 지냈던 한 관리가 첩만 146명을 거느렸다고 하니....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1.2. 과거에 여성이 자신을 낮춰부르는 일인칭 대명사

첩(妾)은 궁중이나 민간에서 여성이 자신을 낮춰 부르던 말이다.

첩(妾)은 원래 여자 노비를 가르키는 말이었다. 높은 신분의 여성 또한 군주 앞에서 자기를 첩으로 지칭하며 낮춰불렀다. 첩의 반대말은 남자 노비를 뜻하는 신(臣)이다. 그래서 신첩(臣妾)은 남자 백성과 여성 백성을 합친 신하를 강조하는 백성을 뜻하는 말이었다. 신민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조선왕조실록부터 구한말의 기록까지 실제적으로 신첩은 이러한 뜻으로 쓰였다. # 조선왕조실록에서 ‘신첩’을 검색해보면 태조~순종 때까지 일관되게 신민, 신하의 뜻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관들(남자)인 ‘우리 신첩이~’(저희 백성은, 저희 신민은~)이라며 자칭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왕비나 후궁이 중국 사극에서 군주 이상에게 신첩을 쓰고, 한국 사극에서는 군주에게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극에서 쓰이는 법칙 중 하나일 뿐이다. 신첩은 사극에서 쓰는 것처럼 일상에서 쓰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에서 첩, 소첩, 첩신(妾身) 등이 주로 쓰였다. 예를 들면 고려시대의 기록인 동국이상국집에서 왕족 여성이 군주 이상(태후, 왕후, 왕)에게 첩으로 자신을 지칭한다. 출처

첩인 여자들만 자신을 소첩이라고 낮춰부르지 않는다. 정실 왕비(왕후)인 인현왕후숙종과 연애 편지로 밀당을 할 때, 자신을 소첩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는 중국에서도 그러하다. 현대 대한민국에선 이런 호칭을 쓰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무협지에서도 종종 이런 표현을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쓰는 1인칭인 와라와를 첩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풍적인 여성의 1인칭이라는 분위기만 놓고 보면 그럴싸 하지만, 저 단어가 자신을 낮춰 부르는 표현이 아니다보니 의미로 놓고 보면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2. 貼

한약 봉지를 세는 단위.

현대에 와서 많은 혼란을 빚는 단위이기도 한데, 2첩[19]이 1일분, 1제는 20첩으로 10일분이다.

3. 帖

책. 사진첩이나 수첩의 첩이 이 한자를 쓴다.


  1. [1] 대개 첩은 여자의 신분이 낮은 경우이다.
  2. [2] 부마여서 피해 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박영효. 12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했는데 겨우 몇달만에 아내인 영혜옹주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12살짜리 홀아비평생 첩밖에 둘 수 없었고, 자식들도 모두 서자로 적에 올랐다. 그나마 광복 이후 적서차별이 없어진 게 다행.
  3. [3] 참고로 축첩의 폐지가 여권운동가들의 당시 과제 중 하나였다.
  4. [4] 대한민국 성립 이후에도 축첩 관습은 (불법화에도 불구하고) 이어져 내려왔다. 본격적으로 축첩 개념이 사라지게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정권 당시, 구악타파라는 명목으로 공무원 중 축첩자에게 파면 등의 중징계를 내리게 된 이후로 보는 경우가 많으니 참고할 것.
  5. [5] 당연하지만 이건 첩의 자식들이나 정처의 자식들 입장에서는 결코 기분좋은 일이 아니며, 재산 분란의 씨앗이 된다. 또한 첩의 경우는 죽어서 선산에 묻히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6. [6] 여담이지만 이런 분들의 경우 호적상으로는 혼인한 적도 없고 자식도 없는 걸로 되어 있기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 계층 등으로 지정되어 혜택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는 재산이 있고 자식의 부양을 받으면서도 편법으로 돈을 타내는 부정수급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상당하다. 첩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남편의 집안이 부유했던 경우는 오히려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적에 친자식이 올라가 있지 않다는 것은, 복지혜택에서 오히려 큰 장애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분명히 친어머니지만 서류상으로는 남남이므로 장례비 보조를 받을 수도 없고, 의료비 지원에서도 실제 부양인인 친자식이 있지만 그 관계가 서류상 입증이 안 되어 자식이 지원을 받기도 어렵다.
  7. [7] 김춘추에게 시집간 문희, 보희 자매나 청나라 광서제후궁인 진비와 근비가 자매지간이었고 그 외에도 역사상 자매나 고모-조카가 한 남편에게 시집가는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8. [8] 쉽게 말해서 왕과 사이에서 유부녀가 아이를 낳았을 때, 본 남편이 "내 아이요."라고 인정하여 왕과 아내의 불륜에 쉴드를 칠 수 있단 이야기다. 물론 눈가리고 아웅이기는 하지만. 그 대가로 남편은 대개 막대한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 그리고 어차피 왕의 자식이라 해도 결국 키우는 건 남편이다.
  9. [9] 여남작이나 남작부인이나 baroness다.
  10. [10] 물론, 회교권 국가들 중에는 서양식 가족제도와 법제도를 다소 받아들여서 일부일처제를 법으로 정해놓은 나라들도 있긴 하다.
  11. [11] 대표적으로 고려 태조 왕건은 부인의 숫자가 29명? 이었는데 그중 궁궐에서 함께 지내는 왕비는 6명뿐이고 다른 20명 이상의 부인들은 각자의 친정에서 따로 지냈다고 한다.
  12. [12]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기황후 는 제2황후, 즉 둘째 부인이지만 정처에 해당된다. 첩이 아니다!
  13. [13] 선비 사이지만, 굳이 선비라는 의미가 아니라, 신사층이라고 하는 귀족계층이다.
  14. [14]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남편이 자기 첩이 바람피우는 현장을 덮쳐서 첩을 죽였다면, 남편은 무죄방면이다. 그러나 첩이 아닌 정부(혹은 애인)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덮쳐서 자기 정부를 죽였다면, 남자는 짤없이 살인죄로 처벌받았다. 단, 목격한 당일에 죽인 경우에 한해서이며, 그날이 지나서 죽인 경우는 살인죄가 적용되었다.
  15. [15] 사실 이것도 이슬람권 전체에 보편화된 풍습은 아니고, 오직 튀르크 문화권에서만 발견되는 풍습이다. 그것도 왕이나 대영주 정도나 할 수 있던 일이었고, 애초에 하렘제도의 시작은 성적쾌락이 아니라 공평한 경쟁(?)을 통한 유능한 자식의 계승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 참고로 유대교를 믿었던 하자르 칸국 조차도 하렘제도를 운용하고 있었다.
  16. [16] 엄밀히 말하면 정부에 가깝겠지만. 대표적인 예로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정부인 서미경이 있다.
  17. [17] 이건희 회장이 외도 의혹이 좀 있고, 아내 홍라희와 사이가 나쁜데도 아내가 이혼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18. [18] 얼(二)은 2, 나이(奶)는 여성의 가슴을 뜻하며 합하면 두번째 가슴....
  19. [19] 아침과 저녁에 각 1첩씩을 복용한다. 점심은 복용하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과거에는 점심식사 자체가 흔하지 않았고, 농사 등으로 인해 밖에서 일할 경우 약을 달여먹기 어렵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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