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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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하시중

임견미

최영

이성계

武愍公 崔瑩
무민공 최영

우심 최대명 선생이 그린 국가 표준영정.

시호

무민공(武愍公)

군호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

공신호

진충분의선위좌명정난안사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安社功臣)

대표 직위

문하시중(門下侍中)
팔도 도통사(八道 都統使)

본관

동주 최씨

이름

영(瑩)

아들

최담

영비(寧妃) 최씨

아버지

최원직

어머니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지씨(智氏)

생몰년도

1316년 ~ 1388년

1. 개요
2. 일생
2.1. 공민왕 시기
2.2. 우왕 시기
2.3. 요동 정벌
2.4. 최후
3. 평가
3.1. 충신의 이면
4. 일화
5. 그 외에
5.2. SBS 월화 드라마 신의에서
5.3.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5.4.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6. 관련 문서

1. 개요

奮威光國鬢星星 나라를 빛내기에 평생을 바치니

學語街童盡識名 어린 아이까지도 그 이름 알고

一片壯心應不死 한 조각 장한 마음 죽지 않아서

千秋永與太山橫 천년토록 태산과 함께 남으리라

ㅡ 변계량이 최영을 추모한 시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ㅡ 아버지 최원직의 유훈.[1]

고려 말의 장수이자 최후의 명장이며 동시에 고려 그 자체라고 할수있는 인물 고려 최후의 충신으로 문(文)으로는 정몽주가 있다면 무(武)로는 최영이 있었다.

이성계와 함께 고려 말기에 이름을 떨쳤던 명장이었으며, 또한 왜적의 침략과 어지러운 국내 사정으로 인하여 무너져가는 고려 왕조의 대들보이자 수호신, 그리고 한국사 속 대표적인 충신이기도 하였다. 시호무민공(武愍公). 그 행적과 활약상은 로마 제국스틸리코와 비견될 만 하다.[2]

맹활약과 우직한 청백리의 면모 때문에 조선 건국의 걸림돌이란 위치에 있었음에도 조선 시대에 와서도 "명장은 명장이었다"고 평가받았으며 지금까지도 고려 말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손꼽히고 있다.[3] 특히 백성들 사이에서는 마치 삼국지관우처럼 장군신으로 숭배되었다. 지금도 최영이 맹활약을 펼친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해안 지역에 가면 최영을 모신 사당이 많이 남아 있다.

2. 일생

2.1. 공민왕 시기

최영은 관직에 늦게 발을 들인 편이었다. 30대 중반이 되고 나서야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는데, 당시로는 상당히 늦은 나이였다. 고려 연안에 왜구가 출몰하기 시작한 시기와 최영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공민왕의 즉위 직후 고려는 한치 앞도 알기 힘든 엄청난 격변 속에 있었다. 고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왕의 입지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왜구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최영은 젊은 시절부터 양광도[4] 도순문사 휘하에서 당시 쳐들어오던 왜구를 수 차례 격파하면서 그 이름을 알리게 된다. 공민왕 즉위 후부터 두각을 나타내던 그는 공민왕 재위 초반인 1352년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면서 그 공로로 호군에 임명되었고, 곧 대호군으로 승진하였다.

1354년 원나라에서는 한족 반란군인 장사성의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때 공민왕은 최원, 인당, 유탁, 염제신 등 40여명의 장수와 함께 최영에게 중앙의 정예군 2천 명을 주어 보내는데, 최영은 27차례의 전투에서 27차례 전승하였다.

이때 장사성 세력 정벌군의 사령관은 재상인 토크토아였는데 많은 전공을 세운 토크토아의 비참한 최후[5]를 목격한 최영은 장사성 진압전에서 복귀한 후 유탁, 염제신 등과 함께 공민왕에게 원나라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고했다. 이는 강릉대군으로 원나라에서 생활하는 동안 계속해서 원의 쇠퇴 조짐을 감지했던 공민왕의 뜻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왕은 이제 스물 다섯이었고 장수는 서른 아홉이었다. 3년간의 숨죽인 끝에 드디어 공민왕과 고려의 반원 정책에 신호탄이 쏘아올려진 것이다.

공민왕은 반원운동을 일으켜 기씨일파를 숙청하고, 동시에 최영으로 하여금 압록강을 건너가 원의 역참을 공격하게 한다. 최영은 서북면병마사 인당과 함께 서북 지역으로 출진,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격하여 옛 영토를 수복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왜구의 침공은 계속해서 거세졌다. 당대의 왜구 침입은 규모와 피해 면에서 임진왜란에 비견할 정도였는데, 무려 수백 차례를 쳐들어왔다. 이 사투에서 최영은 끝없이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북쪽에는 홍건적이, 나라 전체에는 왜구가 날뛰던 시절이었다. 장수들은 제대로 방어를 하지 못했고, 겁을 먹고 도망쳐온 장수들을 옥에 가두는 사태로 빈번했다. 최영은 동북면체복사로 동북면방어에 참여했으며,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가 되어, 배 400척으로 오예포의 왜구들을 복병으로 격파하였다. 공민왕은 최영으로 하여금 동북면과 서북면에서 각각 왜구를 방어하게 하였으며 나중에는 양광도[6]와 전라도의 체복사로 삼아 감찰 임무까지 한꺼번에 시켜가며 어떻게든 왜구를 막아보려 애썼다. 명장 최영은 왜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고려를 돕지 않았다. 1360년, 홍건적마저 4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한 것이다. 홍건적은 이 1차 침입으로 평양 인근인 서경을 함락시킨다. 침략에 맞서 최영은 이방실 등과 함께 빼앗긴 서경 일대를 탈환하고 달아나는 적들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최영은 평양윤 겸 서북면순문사가 된다. 또한 이후 서북면도순찰사 겸 좌산기상시가 된다.

2년 후인 1362년, 홍건적이 또 한 차례 고려로 쳐들어온다. 이번엔 10만 대군이었다. 조정 대신들과 공민왕은 남쪽으로 피난하기 위해 분주히 준비를 이어나갔고, 그 상황에 최영은 "주상께서는 조금 더 머무리시며 장정들을 모집하여 종사를 지키소서"라고 하며 개경 방어를 강력히 주장했다.[7] 버티면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강경하게 버틴 것이다. 그러나 결국 공민왕안동까지 피난갈 것을 결정하였고 개경까지 함락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이때 최영은 개경 수복전에서 활약하며 큰 공을 세웠다.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싸워 수도 개경을 탈환한 것이다.

홍건적을 물리친 뒤 공민왕은 개경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던 중 개경 인근의 흥왕사에서 김용의 쿠데타가 일어난다. 바로 그 유명한 흥왕사의 변이다. 이 때 밀직사의 자리에 있었던 최영은 개경에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밤새 달려와 진압 반적들을 진압하였으며, 김용은 최영의 손에 죽었다. 최영은 왕을 구출한 공로로 일등공신으로 책봉된다. 이 때부터 최영은 그 초상을 공신각에 걸어두게 된다.

이후 1년은 왜구와의 끝없는 전쟁이었다. 213척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왜구가 고려 수안현을 공격한 것이다. 한편 그 이듬해인 1364년, 원나라에서는 덕흥군과 최유가 기황후의 후원을 받고 2만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온다. 최영은 이를 격파하는 데 나서야 했다. 최영은 압록강을 건너온 적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지만, 북방과 싸우는 동안 왜구는 엄청난 기세로 침공해오기 시작한다. 200여쳑의 함선을 이끌고 갈도로 쳐들어온다. 무능한 장수들은 방어전에서 대패를 당하였고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은 쑥대밭이 된다. 그러나 최영은 연주에 칩입한 원나라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와도 싸워야 했다. 최영은 박백야대를 격퇴하고 곧바로 이듬해 교동, 강화에 출몰한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동서강도지휘사가 되어 동강에 나가 지켰다.

대전란의 시대에 최영은 단 1년도 쉬지않고 고려 전역을 누비며 최전방에서 피 튀기는 전투를 계속해서 치러야 했는데, 이성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거의 혼자서 모든 기록적 대전투를 치른 거나 마찬가지였다. 고려 말, 최영이 있는 전선은 방어가 되었고, 없는 전선은 무너졌다. 최영의 자리는 대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365년 등용된 신돈의 모함으로 최영은 처음으로 계림윤으로 좌천당해 임지로 떠나게 된다. 이유는 앞서 나온 동강의 방어전에서 왜구들이 고려 세조 왕륭의 영정을 훔쳐간 사건 때문이었다. 최영은 "내가 죄를 지었음에도 왕이 나를 계림윤으로 임명했으니 이도 왕의 은혜이다." 라며 탄식하였고 이후 임지로 떠나는데, 신돈의 모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최영이 이구수, 양백익, 석문성, 박춘과 함께 내신 김수만과 결탁하여 상하를 이간하는 불충을 저질렀다고 고한 것이다. 당시 노국공주를 잃고 실의에 빠진 공민왕은 이때도 또 신돈의 손을 들어주었다. 신돈의 일파인 이득림이 직접 최영을 국문하였고, 이 일로 최영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가산을 몰수 당한 채 6년 간의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6년 후, 최영은 신돈이 처형되자 찬성사로 돌아온다. 다시 전함을 만들었으며 공민왕과 수군 양성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당시 고려의 여론을 살펴보면, '적은 선박의 운항에 능하니 어차피 해전으로는 답이 없다. 어차피 질건데 함선을 건조하면 백성들은 안 그래도 더 힘든데 더 힘들어진다' 였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고, 수군 양성은 유일한 데다가 가장 급한 대항책이었다.[8] 이 무렵 최영은 계속해서 함선 건조에 관심을 보였는데, 심지어 전선 2,000척 건조 계획이라는 엄청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당연히 백성들의 반발로 인해 계획은 철폐되었다.[9]

공민왕이 시해될 무렵 최영은 탐라정벌에 나서 있었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10]을 평정하러 떠난 것이다. 야사에는 최영이 갈대씨를 연에 묶어 날려보내 심은 후 몇 개월을 기다렸다가 그 갈대가 무성히 자라자 이를 이용해 화공법을 써서 반란군을 토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실제로는 목호의 난은 1374년 8월 28일 제주에 도착해 9월 22일 평정을 완료하고 제주도를 떠났을 정도로 단기전이었으니 야사는 야사일 뿐.

살아생전 계속 뒤숭숭한 반역 사건에 시달리던 공민왕은 결국 44세의 나이에 홍륜의 손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최영은 저 먼 타지의 전장에서 군주의 죽음을 전해듣는다.

2.2. 우왕 시기

공민왕 사후 우왕이 즉위 후에도 고려군의 대들보 같은 존재로 계속해서 활약하였다. 1376년 왜구가 충청도 일대에서 기승을 부리자 노구를 이끌고 출전을 자원, 홍산(부여)에서 직접 선봉에 서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를 홍산대첩이라 하여 이성계황산대첩, 박위의 대마도 정벌, 최무선진포대첩, 정지관음포 전투 등과 함께 이 시대의 중요한 전투로 꼽힌다. 이 때 최영은 총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선두에서 노구를 이끌고 전투를 지휘했는데 왜구의 화살을 입술에 맞았다. 최영은 당황하지 않고 바로 그 화살을 뽑아서 자기를 쏜 왜구를 쏴 죽였다. 이 용맹한 모습은 고려군의 사기를 진작시킬 뿐 아니라 당시 왜구들의 두려움을 사 "고려에서 두려워할 것은 머리가 허옇게 센 최만호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전쟁으로 최영은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또한 왜구만이 아니라 타국에도 명성이 떨쳐져 최영이 죽으면 최영 개인이 죽는 수준이 아니라 국가의 위신 자체도 직결된다고 하였다. 최영이 죽으면 국가가 위태로워질수도 있다고 말하며 이때문에 전장에 함부로 나서는 것도 자제해야 할 정도라고 하니[11] 이쯤 되면 진정한 고려의 최종보스이자 수호신.[12]

이후 조정에서 요직을 겸직하게 되면서 이인임과 함께 우왕을 보좌하게 된다. 그는 충직함과 청렴함, 용맹함과 준엄함을 모두 갖춘 이견 없는 용장이자 충의지사였으나, 이인임이 장악한 정권 하에서 그는 다소 불안정한 정치 행보를 보였다. 특히 이인임지윤 일파, 양백연 일파, 경복흥 일파, 목인길 일파 등 반대파를 차례로 숙청하는 과정에 최영은 항상 자신의 무력을 동원했다. 이를 통해 최영의 지위는 더 견고해진다.[13]

비록 이인임이 우왕에게 양아버지 대접과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고, 또 이인임의 의지가 항상 우왕의 어명형태로 내려왔다곤 하나 이인임권모술수를 마다않는 권신이자 간신이었다. 그러나 충신이라는 최영은 정치적으로는 이인임의 행동에 이견이 거의 없었다.

물론 이는 최영이 공민왕대부터 왕을 섬기는 방식 그대로였다. 그는 충신이었고 군왕의 명령에는 어떤 토도 달지 않는 칼날같은 무인이었다. 최영은 공민왕이 불안정한 시기 모함을 믿고 벌을 내렸을 때도 마다않고 국문 받고 귀양을 떠났으며, 적은 군사로 위험한 전장에 내보낼 때도 군말없이 최전선에 나가 피 튀기는 전쟁을 하던 빳빳한 무인이었다. 최영은 핑계도 변명도 없이 모든 명령을 충성으로만 수행하는 무장이었다. 심지어 모든 전투를 승전으로 이끈 그였다. 그의 강직함은 현명한 왕 아래서는 그를 난세의 명장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둔한 왕은 그를 술수에도 사용하였다.

최영은 명령에는 이의없이 따랐으나 대신 우왕의 난행은 간언하곤 했다. 이 중엔 충혜왕충숙왕의 사례를 비교해서 심각성을 강조하는 간언도 있다.[14] 공민왕 때도 간언을 하다 유배를 간 적이 있던 최영이었다. 왜구의 침입이 갈수록 심해지므로 도성을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굳게 지킬 것을 주장하고 반대하였으며, 교동과 강화 일대의 사전을 혁파하여 군자에 충당하게 하였다.

여태까지처럼 직접 나이든 몸으로 최전방에 나가 왜구를 막다 병에 걸리기도 하는 등, 계속해서 몸을 아끼지 않았는데 무반의 몸으로 수시중, 영삼사사 등 정계의 자리도 함께 겸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큰 전투에는 계속 최영이 나가 왜구를 격퇴하여야 했다.

우왕 14년. 무진년 정월. 최영은 임견미, 염흥방과 그 일파를 드디어 숙청한다. 이인임의 일파를 정리한 것이다.[15] 참고로 임견미는 최영이 목호의 난을 토벌하던 당시 부원수로 따라온 이력이 있었다. 더 이전에 홍건적의 침입 때도 함께 공신이 되었던 오래된 무신이자, 최영과 전장에서는 이럭저럭 인연이 자였다. 그러나 우왕 시절 이인임의 일파가 되면서 매관매직 및 토지의 편취와 겸병 등을 일삼게 되었다. 또한 염흥방은 원래는 사대부의 일원, 최영이 홍건적을 격파하고 개경을 탈환하던 장시 지신사로 함께했으며 목호의 난에도 도병마사로 함께 출전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인임에 맞서 직언을 하다 유배를 당하자, 유배에서 풀려난 후 변절하여 오히려 이인임의 자파가 된다. 이 두사람은 이인임의 심복으로 높은 권세를 가지고 백성의 토지와 국유지까지 강점하는 등 비행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인임이 병을 이유로 사퇴한 후에는 도당의 재상이 되어 정계의 핵심이 된다. 우왕은 이인임까지는 끝까지 싸고돌았으나 문제는 그 이후였다. 이인임까지는 어떻게 믿고 따랐으나 왕 역시 일파에 이르러서는 답답증과 정리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이때 조반의 옥사를 계기로 최영도 결단을 내리게 된다. 최영은 왕의 밀령을 받고 이 난행을 타파할 것을 작심하였고, 염흥방, 임견미와 그 일당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이성계를 끌어들였다. 일명 무진피화다. 이로서 이인임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공으로 최영과 이성계는 재상직에 올라 고려 정계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최영을 통한 이성계의 화려한 정치 데뷔이기도 했다. 미래를 생각하면 비극의 시작 이후 우왕은 최영에게 장인어른이 되어줄 것을 애원하여 최영의 딸과 결혼한다. 이 딸이 우왕의 2비인 영비 최씨다. 최영 본인은 본처 딸이 아니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 혼인은 이루어졌다. 우왕으로써는 최영을 든든한 정치적 후견인으로 삼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난행을 간했던 이를 자신의 정치적인 후견인으로 삼고 걸림돌을 제거한 측면에서 보면 청년기의 우왕은 충동적이고 돌발적인 성향만 제외한다면 정치적인 안목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최영은 임금의 장인이 되어 늘그막에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참혹한 말로를 불러올 전조였으니…

2.3. 요동 정벌

중국에서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가고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고려와 명나라는 외교적 분쟁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왕 14년, 명에서 귀국한 설장수가 명 황제의 성지를 전한다. 그 내용인즉 "철령 이북 지역을 모두 명나라 땅으로 귀속시키도록 하라"라는 명령. 북변과 그 일대에 거주하는 고려인, 한인, 여진 등 모든 백성까지도 요동에 귀속시키겠다고 통보를 내린 것이다. 철령위 문제로 고려조정은 발칵 뒤집어졌다. 안 그래도 고려시기 명나라는 기싸움을 위해 미친 갑질을 하는 중이었고, 왜구로 탈탈 털린 고려에 너무 과도한 공물 요구를 해서 조정과 백성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진 터였다. 더구나 최영이 공민왕의 죽음을 지키지 못하게 된 계기인 목호의 난도 명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말을 징발하다가 시작된 일이었다. 고려의 북쪽 영토를 송두리째 앗아가겠다는 명의 주장에, 고려와 명나라는 영토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이에 반발하여 최영은 우왕에게 대대적인 요동 정벌을 진언, 결국 팔도도통사의 자격으로 원정을 총지휘했다. 약 5만 정도의 병사와 2만필의 말이 동원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2차 요동 정벌'[16]이다. 생전 공민왕의 북벌은 쌍성총관부를 포함해 동북면과 서북면을 건너 요동까지 이른 바 있었다. 최영과 선대부터 내려온 강경파 무신들은 요동 정벌을 강력하게 원했다.

최영의 요동정벌의 성공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북변의 사정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가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고 이때 이성계가 사불가론을 들어 반대한 것은 유명한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졌기에 불가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한 요동정벌 성공까지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더 큰 문제는 유지가 가능한가이다. 최영, 이성계라는 걸출한 무장을 가진 데다가 한반도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다수의 전쟁을 치르던 시절이었다. 비록 여력이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장군들의 지략과 무력도 출중하였고, 이제 병사들도 짬바가 있었다. 조선시대 학자들도 주로 '정벌에는 성공하였을 것이나 방어하느라 뼛골이 다 빠지고 쇠락했을걸?'이라고 평가하곤 했다.

고려는 간신히 여러 전란에서 벗어난 상황이었고[17] . 또한 바로 이 해(1388년)에 명나라를 괴롭히던 요동의 군벌 나하추가 20만 병력을 이끌고 명에 항복해 요동의 군벌 세력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뚫기 만만한 상대는 절대 아니었다. 북원도 명나라 장군 남옥이 이끄는 15만 병력에 박살나는 바람에 크게 쇠약해져 있었고, 애초 이 영토분쟁도 명나라 역시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단순히 병력 규모로만 봐도 명의 방어명령이 고려군 3배에 달했기에, 고려군이 아무리 백전의 정예였어도 상당히 고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고려사에 기재된 병력 5만은 1명 단위까지 정확히 기재된 실 병력수이고, 중앙 정예군의 수로만 센 것이며, 당시의 전쟁에서는 가는 길에 병사를 징발해가며 이동하였기 때문에 다소 높게 쳐야 하기는 한다.[18] 또한 당시 동아시아에서 호왈이 일반적인 관습인 걸 감안하면 명군과 나하추의 15만, 20만의 수치 또한 실병력으로 간주해야만 할 이유 역시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최영은 원래 후배 무장인 이성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그를 신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사불가론으로 이성계와 정면으로 충돌한 계기로 관계가 상했다.[19] 최영은 상대적으로 적은 병사로 실력을 보이려면 속도전이 답이라고 생각했으며 시기를 미루자는 주장은 시간을 끈 다음 정벌 무산을 노리는 의도로 해석하여 반대파를 처형하면서까지 요동 공격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런데 반대를 무릅쓰고 무리한 출정을 강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출정하지 않고 우왕과 함께 고려에 남는 이율배반적인 결정을 내렸다. 팔도도통사로서 최영 본인이 직접 출정해 군사를 지휘하려는 것을 우왕이 나서서 극구 말렸다. "선왕이 시해당한 것은 경이 남쪽(탐라)을 정벌하느라 개경을 비워서 선왕 곁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인데, 이제 경이 북쪽으로 가버리면 내 옆은 누가 지켜주느냐"고 땡깡을 피운 것. 이는 목호의 난 당시의 사태가 최영에게도 트라우마로 남았기 때문이다. 최영의 출전이 밀리면서 군사의 지휘권은 이성계와 조민수의 손에 들어간다. 이것이 최영의 결정적인 패착이 되고 만다.

2.4. 최후

신격화된 최영을 묘사한 그린 무신도. 왼쪽은 서울 국사당에 걸려 있다.
참조 링크 글 맨 마지막 무신도 사진 참조.

부대를 이끌고 북진하던 이성계는 위화도 근처까지 진군하였으나 비가 쏟아져 길이 막히게 되자 함께 출전하였던 조민수와 함께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접한 최영은 도성에 몇 없는 병사를 추려서 반격에 나선다. 마지막 한 명까지 닥닥 긁어 모두 요동공략군으로 출진시킨 상황, 개경엔 병사도 변변치 않았고 주어진 시간도 너무 짧았다. 이성계가 이끌던 원정군이던 반란군의 회군 속도가 어마어마하여 더더욱 최영과 우왕이 대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격문을 지속적으로 보내며 회유를 시도하는 한편 어떻게든 병력을 확보해보려고 애를 썼다.

백전노장 최영은 7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민수의 부대를 패퇴시키는 등 최후의 활약을 펼쳤으나, 얼마되지 않는 병력으로 수만 명의 군세를 상대할 수 없는 없는 일이었다. 최영은 끝까지 저항했다. 어떻게든 버티며 이성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퍼지면 왜구를 막느라 각지에 남아있던 방어 병력들이 개경으로 집결할 테고, 그러면 이유야 어쨌든 반란군인 이성계로서는 불리해진다. 이성계가 강행군을 하며 빠르게 회귀한 것도 이러한 점을 조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국 머릿수에 밀려 중과부적으로 개경에 몰리게 되어 체포되고 만다. 이 때 최영을 잡은 이성계는 그에게 "이와 같은 사변(事變)은 내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의를 거스르는 것은 국가가 편안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힘들게 되어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는 까닭에 부득이했던 것입니다.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고려사 우왕(禑王) 14년 6월 )라고 말했다고 한다. 숨어있는 뜻을 살펴보면 "최영 당신에게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니나, 내 야심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라는 변명에 가깝다.

한편 고려사절요에 보면 이러한 기록이 있다. '이인임(李仁任)이 일찍이 말하기를“이판삼사(李判三司)가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라." 하였는데 영이 듣고 매우 노하였으나 감히 말은 못하였다. 이때가 되어 탄식하기를“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다." 하였다.' [20] 곧 믿었던 후배 무장 이성계에 의해 고봉현[21]에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합포로 옮겨졌으며, 창왕 즉위 후 개경으로 압송되어 또 한번 순군옥에서 참혹한 심문을 받고 향년 73세의 나이에 처형되었다.

처형되는 순간에도 낯빛이 전혀 변하지 않은채 태연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그는 유언으로 "만약 내가 평생동안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연려실기술에 실려있는 이야기에 따르면 실제로 최영의 묘에 풀이 나지 않아 그의 묘를 "적분(赤墳)"이라 불렀다고 한다.[22][23] 최영의 묘는 지금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에 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난데다 풀이 심어져 있어 지금은 조금씩 풀이 자라고 있다. 또한 최영의 묘 바로 뒤에는 아버지 최원직의 묘가 있다.

재미있게도 최영 부자의 묘 주변은 조선 왕족들의 묘가 둘러싸고 있다. 최영의 묘와 같은 산에 태종의 4남 성녕대군의 묘와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견의 묘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건너편 산에 경혜공주 내외의 묘와 성종의 서자 이성군의 묘가 있다.

최영이 세상을 떠난 날 백성들은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거리의 아이와 골목의 부녀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개경의 상인들은 모두 가게 문을 닫아 이성계 일파에 대한 무언의 항의를 표시했다. 최영 장군의 시신이 길가에 누워있으니, 그동안 행인들도 모두 최영 장군의 시신을 훼손할까 두려워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무인으로서의 활약도 레전드 급이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날 백성들의 행동만 봐도 그는 단순한 명장이 아닌 고려의 수호신이자 대들보 같은 존재였다.

40년간 외침으로부터 고려를 지켜내고, 왕실의 존립을 위해 한 몸을 바쳤으며, 장군과 재상을 겸했으나 쌀궤는 항상 텅 비어있었고 단 한 번도 뇌물과 청탁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참전한 모든 전투에서 공을 세울 뿐 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24] 그러나 시대의 영웅이었던 최영은 형장에서 처형당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다. 최영의 죽음과 함께 고려의 운명도 끝에 이르고 있었다.

그의 사후 이성계는 본격적으로 왕위 찬탈을 향한 행보를 시작한다.

3. 평가

북한에서 발행한 최영 우표. 고려 우표가 아닌데, 그 이유는 북한이 자신들을 칭할 때 대한민국이 한국이라고 부르듯이 '공화국' 혹은 '조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이 최영이 한 말으로 아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사실 이것은 최영의 부친이 사망하면서 최영에게 남긴 말이다. 최영은 이 말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고 살았고, 이를 통해 저 말은 유명해졌다. 고려사에서도 최영을 청렴강직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현창은 박한 편이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불학무술(不學無術)"이라는 악평도 남기고 있다. 우직한 반면 학술이 없고 편협했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사는 조선시대의 서술이다보니 최영의 전장에서의 활약을 서술함에 있어서도 다소 깎아내리는 면이 있고, 단순무식한 무장으로 몰아가는 면이 있는데, 전략 면에서는 그런 평가를 들을 수가 없는 인물이다. 전투 양상에서는 작전 수립이나 정보 수집을 치밀하게 하고 복병이나 기습책도 자유롭게 구사했다. 대표적 전투인 홍산대첩 때의 과감한 돌격은 왜구의 수가 많지 않았음을 정확히 간파하고 감행한 돌격이었다. 단순무식한 맹장이 아니라 전술적 사고를 겸비한 명장이었다는 소리. 애시당초 돌격 대장은 머리 나쁘면 오래 못한다. 금방 죽을테니까. 위의 폄하는 왕조 개창 이후 전 왕조의 버팀목이었던 최영을 깎아내리기 위한 서술일 가능성이 크다. 최영은 위화도 회군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로, 조선개국의 직접적 단초가 되었던 최영을 너무 높이 평가할 경우 조선 개국의 명분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다만 정치 군인이었던 이성계와 달리 순수한 군인에 가까운 인물이라 정치를 함에 있어선 거침이 없고 철저한 상명하복으로 움직이는 군대의 속성을 그대로 적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일단 일을 시작하면 주변 사람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지윤 제거 때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한번 작정하면 이인임도 못말렸다. 요동 정벌을 추진함에 있어 많은 반대를 모두 무시한채 군사를 일으키고, 정벌에 반대하던 이성계를 기어이 혼자 보내고 퇴각 불가 방침을 내렸다.

당연히 부하와 백성들에게도 엄격했다. 웬만한 장수들은 군령을 어기면 목이 달아났고, 공민왕 때 6도의 군사를 다스리며 대대적으로 배를 만들고 고려 최초의 대량 수군을 양성하는 만드는 과정에서 70세 이상 된 자에게도 등급에 따라 곡식을 징발하는 바람에 집을 부수고 도망가는 백성이 50% ~ 60%에 이르렀으며 원성이 많았던 일도 있었다.#[25] 다만 최영은 이 수군을 만들어 왜구를 방어하고 나서야 백성들이 도륙 당하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며 물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런 엄격함은 그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고 사욕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백성들은 그를 두려워 하면서도 한편으론 국가의 수호신으로 존경해 마지 않았다. 실제로 휘하의 군인이 죄를 지으면 군법을 엄격하게 지켜 효수하거나 팔을 잘라 조리돌림 하기도 했으며, 최영의 조카 사위가 살인죄를 지었을 때 그의 인척임을 감안해 죄를 경감해주려고 하자 법대로 하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이성계와 대립하였고 조선에서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 신돈의 혈육으로 주장하면서 반역열전에 기술하는등 철저히 폄하된 우왕의 충신이기도 했기에 조선 왕조 때 평가 절하를 당할 법도 한데 후대까지 고려하면 의외로 크게 폄하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세종실록에 보면 최영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는 신하에 대해서 세종대왕이 옹호한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 50권, 세종 12년 11월 23일 경신 1번째기사)왕씨가 아닌 우왕을 세워서 섬겼다면서 비판하는 신하에 대해서 세종대왕은 후에 태조가 왕이 될 수 있도록 미리 떡밥 깔아준게 아닐까 하는 어조의 반론을 한다. 물론 신하들은 "그땐 태조께서 왕위에 오르실 낌새도 없었는데요."라고 단칼에 잘라버리지만. 정몽주가 조선 왕조의 창립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절은 조선왕조에서 높이 숭상되었던 것과 비슷한 사례. 조선 초기에는 최영의 언급 자체도 상당히 경계했지만 후대 왕들은 최영, 정몽주를 통해 고려 말의 부패와 망국의 상황을 더욱 극화하여 역으로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는 한편, 신하들이 최영과 정몽주가 고려에 충성했듯이 조선에 충성하길 바랐다.

덧붙여 말로만 지휘하는게 아니라 직접 최전선에 뛰어드는 지라 최영은 상처도 많이 입었다. 그런 상처를 입으면서도 분투해서 승리를 거두었고 말만 있는게 아니라 실제로 강직하고 두려움 없는 무장이었다. 홍산 대첩 때도 그렇고 그전에 홍건적과 싸울 때도 창으로 여러번 상처를 입었는데도 싸워 그 전투를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고 명성과 높은 평가는 자국에 한정된게 아니라 타국에도 적용되어 최영이 죽으면 무장 하나 죽는게 아니라 고려 전체에 직결된다고 한적도 있었다고 한다. 최영 열전에서 최영의 명성과 용맹이 근방에도 알려져서 최영이 지금 죽으면 개인이 죽는 정도가 아니라 국가의 위신이 위태로워진다고 언급했다. 즉, 살아있는 것만으로 억제력 역할도 하고 있었는듯 하다.

3.1. 충신의 이면

매관매직이 성행할 무렵 어떤 사람이 벼슬 자리 구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자 "몰라서 묻나? 상공(商工)을 배우면 간단하네!"라고 독설을 날렸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최영 본인은 우왕 당시 권문세족의 대표였던 이인임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사실 이인임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이유는 애당초 최영의 가문인 동주(철원) 최씨가 권문세족이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26][27]

실제로 정치적인 모습을 들여다보면 최영이인임의 편에 서서 활동한 경우도 상당히 많다. 특히 공민왕 사후에 혼란했던 정치판에서의 모습을 보면 이인임과의 정치적 파트너로써의 모습도 강하다. 예를 들어 이인임이 역모사건의 처벌로 우왕의 유모 장씨를 죽이려 하자, 이를 알게된 우왕이 "장씨는 자신의 어머니와 같다"며 살려달라며 매달렸으나 최영마저 거절, 이에 우왕에게 "그대는 누구의 신하인가!"라는 일갈을 듣기도 했다.

물론 최영이인임도 공민왕 밑에서 함께 출세한 인물들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전우애가 생길 만한 상황이기는 했다. 사실 이인임은 오늘날에는 권문세족의 대표로 일컬어지지만 그의 집안은 철원 최씨에 비견할 정도로 세도가 강한 일족이라는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28] 오히려 조부대에 명신을 배출하며 늦되게 출세한 집안으로, 최영과 권문세족으로 교류가 있었으리란 추측은 큰 근거가 없다. "둘 다 권문세족이라 친했나?" 라는 말은 후대에 보기에 왜 최영같은 충신이 이인임같은 권신이자 간신과 성격도 다른데 뜻을 같이 했는지 워낙 이해가 안 되고 아무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서 억지로 따라붙은 말에 가깝다.[29]

오히려 두 사람의 거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총체적 난국이었던 공민왕 시절에 크게 중용되었다는 점이다. 현재는 다소 축소된 면이 있지만, 홍건적과 왜구의 수백 차례 침공에다가 내부적으로도 끝없는 국왕 시해 시도로 인해 공민왕 시절은 그야말로 막장급 최고 난이도를 달리던 시절이었다. 어떤 왕이 즉위했어도 그것보다 잘해내긴 어려웠을 정도였다. 실제로 이전 왕들과 이후 왕들의 실력만 봐도 알 만하다(...) 그 시절 외침을 막느라 죽어난 게 최영이고, 내부에서 감정기복 심한 왕과 신하들 사이의 중재며 개혁정치와 외교까지 한꺼번에 도운게 이인임이다. 우왕 대에 막장을 달린 것과 달리 공민왕 시절의 이인임은 아직 타락하기 전이었고, 실제로 왕과 다른 신료들의 입에서 충신 소리가 나올 만큼 제대로 일했기 때문.

특이한 건 공민왕 대에 일했던 신하들이 우왕 대까지 대부분 뜻이 잘 맞아떨어졌다는 점인데, 상황을 보면 공민왕 시절엔 신하들 사이에 전우애가 쌓이지 않기도 어려운 상황이긴 했다. 애초 홍건적이며 왜구며 전쟁이 너무 쉴틈없이 있어서 어제는 옆에 있던 사람이 내일은 전사해 없어질 수도 있고, 원명교체기인지라 어느 나라에 사신으로 가도 다 유배당해 죽기 일쑤였다. 문관무관 구별없이 대부분 왜구와의 전투에 휘말렸다. 왜구가 하도 여기저기에 출물해서 생긴일로 생긴 일이라 전투는 아니었다지만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녹봉도 제대로 나오지 않던 무렵이었으므로 심지어 목숨을 건 무료 봉사였던 셈. 그런 와중에 반복되는 시해 시도로 인해 공민왕은 의심까지 많은 상태였다. 공민왕은 의심이 들면 그 즉시 신하를 숙청하기를 반복했다. 최영은 그 시절을 살며 전장에서 늙어온 사람이었다. 단 이전버전과의 달리 문관이 왜구토벌전에 참가했다느니, 문관이 칼잡고 왜구와 접전을 벌였다느니 같은 소리는 문관미화의 헛소리이다. 실제로 그런 문관들은 그런 일을 벌인 적이 없다.기병 10기 이끌고 돌격한 남은의 예가 괜히 특이한 게 아니며 그나마 남은도 직접 칼을 잡았다는 언급은 없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최영은 확실히 젊고 어린 신진 관료들보다는 항상 구신들을 신뢰했다. 특히 함께 전쟁에 나갔던 사람들만 신뢰하고 심지어 더 높게 치는 경향도 보인다. 목숨도 안 걸어본 놈들이 뭘 알겠냐 실제로 최영이 수군을 양성하려고 했을 때 일부 문신들은 "어차피 질 거 배를 왜 만드느냐", "그럼 백성만 힘들다. 가만히 있자" 따위로 투덜거렸으며, 개경을 방어해야 한다고 했을 땐 "그런 거 모르겠고 도성도 내주고 피난을 가자"고 했다. 친원정권 당시 등용되었던 공민왕 초기 관료층들은 항상 무기력했고, 최영은 전쟁에 나가보지도 않고 나라 사정도 모른 채 백성을 들먹이며 보신에 급급한 문신 관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 격전지마다 직접 고집을 부려서 출전해야 했다. 이를 보면 최영의 선택도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우왕 대의 젊은 신진사대부 계층과 맞서게 된 상황에서도 최영의 태도가 변하지 않았단 점이다. 최영은 평생 완고하게 살며 나라를 지켜온 사람이었고, 이런 완고함은 크고 작은 전투가 파도처럼 연이어 몰려들었던 공민왕 시기엔 도움이 되었지만 큰 전투가 다소 소강되고 치열한 외교전의 시대로 넘어간 우왕 시기엔 본의는 아니지만 권신의 편을 들게 되기도 하였다.

결국 우왕이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하는 동안 최영은 권력을 쥐게된 이인임과 함께 나라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30] 실제로 젊은 사대부들보다는 변질된 이인임일지라도, 함께 일해온 짬이 있는 이인임 쪽이 최영을 다루는 법을 훨씬 잘 알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훗날 최영이 이인임 일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이인임만 그냥 살려준 것도 두고두고 까이는 부분이다. 이인임을 죽이자는 이성계와 사대부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사사로운 정으로써 귀양으로 마무리 지은 것은 두고두고 비판받는 부분.[31] 심지어 작은 죄에도 엄격하던 최영이 그랬다는 점에서 비판이 더했다. 더구나 다른 연루자들은 식솔까지 다 처형한 끝이었다. 그러나 최영은 끝까지 "이인임은 국가를 안정시켜온 사람이며 허물보다는 공이 큽니다"라고 주장하며 감쌌다.[32]

허나 정치인의 타락이고 뭐고 이전에, 실제 무너져가는 고려 조정을 이인임이 틀어쥐고, 특유의 수완으로 많은 권신들의 하극상을 억제해온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최영의 행동은 이인임에 대한 사사로운 정이라기 보단 자신의 주군인 고려조정의 존속에 대한 정략적이고 기술적인 결론에서 기인된 부분이 크다. 이 시기의 정치시국을 고려한다면 선악 도덕론으로 판단할 수 없기에 이를 최영의 '잘못'이라고만 여길 수는 없는 일이다.

젊을 때 신돈과의 사이는 굉장히 안 좋았는데, 애초에 공민왕이 갑자기 듣보잡이었던 신돈을 등용하는 것부터 매우 싫어했다. 이 때문에 드라마 신돈에선 최영은 정적이자 정치군인으로 등장한다. 반면 이성계의 경우는 정치군인이 아닌 야전형 군인으로 나온다. 최영이 일반 열전에 오르면서 결국 신돈이 일반 열전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고 유숙의 숙청으로 인하여 신돈은 반역 열전으로 떨어지게 된다.[33] 최영이 위화도회군과 더불어서 가장 큰 정치적 위기를 겪은 것도 신돈과의 갈등인데, 당시 신돈을 중용하는 것과 신돈이 추진한 개혁에 반대하다 귀양간 사람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최영 역시 전투에서 영정을 도둑맞은 걸 빌미로 신돈에게 모함당해 유배당했는데, 군말없이 갔다고 한다.

정치적인 모습과는 별개로 개인은 부귀영화를 누린 적이 없지만, 다른 구신들의 타락은 잡지 않았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만 최영 본인은 욕심이 없었는데, 개별적으로 손님이 집에 오면 종일 밥을 주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아무래도 그의 집에 온 게 귀족들이라든지 높으신 분들인데 배고프다고 투덜거릴 수도 없으니 그냥 굶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채소와 간략한 반찬을 대령한 밥을 내줬는데 배가 고픈 손들이 허겁지겁 먹으면서 맛이 좋다고 하면 최영은 웃으면서 "이것도 병법이 아니겠소?" 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4. 일화

  • 내려오는 전래 이야기로 말을 타고 장군의 사당 근처를 지나가면 갑자기 돌풍이 불어 지나가던 사람은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고 한다. 참고로 왕릉 등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서 가야 한다. 그런데 마침 그 근처에 정종릉과 신의왕후릉이 있어 지나던 숙종의 가마가 심한 비바람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숙종이 "네놈이 똑똑했으면 왜 고려가 망했겠냐? 바보짓하지 말고 꺼져!"라고 일갈하자 비바람이 잠잠해졌다고 한다. 수십 년 후 영조 때에도 같은 일이 있어 영조가 소리치길, "고려도 500년이나 해먹었으면 됐지, 무엇이 부족해서 깽판이냐? 가버렷!!"이라고 일갈해 되려 최영 귀신이 데꿀멍했다고 한다. 숙종과 영조 부자 간이 모두 한 성깔 하는 것으로 유명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럴 듯한 야사. 더군다나 그 둘 때는 왕권도 꽤나 강했다. 그리고 조선도 500년 해먹고 망했다.

반면 조선조 말 고종 때에는 좀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고종이 가마를 타고 지나가자 비바람이 불었고, 원래 허약했던 고종은 근처의 연못으로 빠져버렸다. 이때 이항의라는 선부관(호위무사)이 달려들어 고종을 구해냈는데, 하필이면 잡은 곳이 상투였다.[34] 참고로 이 선전관은 출처에 따르면 효령대군파 종친에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여기에 일화들이 소개되어있다.
  • 왜구 정벌을 위한 항해 도중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와 한반도의 중간에 위치한 추자도에 한동안 정박한 일이 있다. 추자 올레길 코스 상에 최영 장군 사당이 있고, 요즘도 매년 성대하게 제사를 올려 최영 장군의 은덕에 감사하는 한편 지역의 발전과 풍어를 기원하고 있다. 그런데 추자도의 경우 신격화 된 이유가 다른 지역과 달리 왜구의 노략질을 막아주어서가 아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서. 이전까지 준 원시 생활을 하던 추자도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긴 최영 장군이 그물을 엮어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고 원시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실제로 추자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최영 장군 사당이며, 이 사당은 추자 주민들에게 중요한(혹은 신성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여기서 허튼 짓 하다간 송장 치울지도 모른다. 교회도 있고 성당도 있지만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다. 2014년 2월 정도전(드라마)에서 이 사당이 소개되었다.

5. 그 외에

  • 조선 초기의 명재상인 맹사성은 바로 최영의 손녀와 혼인했다. 즉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사위. 최영이 맹사성의 고향인 아산 근교에서 산 적이 있었는데 최영의 이웃이 바로 맹사성 일가의 집이었다고 한다. 이 무렵에 최씨 가문과 맹씨 가문이 인연을 맺었다고 전해지며, 아산에 오늘날에도 맹사성 고택이 남아 있는데 이 집은 본래 최영이 살던 집이었다고 하며 최영이 죽은 후 아버지 맹희도에게 소유권이 넘어가서 맹사성의 집이 되었다고 전한다.
  • 충무공이순신급 6번함인 KDX-2 DDH-981은 최영의 이름을 따서 최영함으로 명명되었다. 참고로 해군은 구축함 이상급 전함이나 잠수함을 진수할 때 위용이 뛰어난 장수나 업적이 큰 제왕의 이름을 따서 함정의 이름을 명명하는데, 최영함은 있지만 이성계함은 없다는 데에서 우리는 두 장수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KDX-1은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양만춘. KDX-2는 충무공이순신, 문무왕, 대조영, 왕건, 강감찬, 최영. KDX-3은 세종대왕, 율곡 이이, 서애 류성룡. 이성계 등은 무용이나 업적 면에서는 충분히 함정 이름으로 붙을만 하지만 역성혁명을 통해 새 왕조를 열었다는 역사적 평가 때문에 함정 이름으로 쓰는 것은 보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배가 그 유명한 아덴만 여명 작전 당시 청해 부대의 기함이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 코에이원조비사 정발판에서 등장한다. 근데 고증 오류로 고려 중기인데도 등장한다. 주인공인 징기스칸, 라이벌인 이성계와 함께 전투A, 지휘A를 자랑하는 먼치킨 무장. 징기스칸 4 PK에서는 생존해 있을 시기인데도 이성계만 등장하고 최영은 등장하지 않는다.
  • 1980년대 KBS 사극인 개국에서는 신구 씨가 열연했다.주제가 주제인터라 약간 아둔하면서 우왕이 신돈의 씨임을 알고도 그냥 방치하는 병크를 저지르고 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명연기를 보여주었다. 역시 1980년대 사극인 조선왕조 500년 추동궁 마마에서는 역시 원로배우인 김길호가 맡았다.
  • 용의 눈물에서는 원로 배우 김성옥[35]이 열연하여, 위화도 회군 크리로 대망의 첫화에서 붙잡히고, 2회에 참형을 당하여 사망... 김성옥은 손숙의 남편이자 연극배우 출신으로 용의 눈물 PD인 고 김재형이 각고의 설득 끝에 데려온 특별 출연자였다. 1997년 방영 당시 특별 출연 1회만에 엄청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특히 이성계 역할을 맡은 김무생과 대면하는 신은 명장면으로 꼽힌다. 작품 초반에 사망한 인물이니 이후 나오지 않다가 이성계가 사망하는 에피소드에서 임종 직전 이성계가 꾼 꿈에 나타나 껄껄 웃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원래 조사의의 난까지만 그릴 예정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2회 만에 퇴장한 배우를 다시 모셔온 셈.
  • 급기야 퓨전사극 신의에서 주인공으로 로맨스를 펼치기도 한다! 29세 젊은 시절의 최영 장군을 꽃보다 남자(KBS)로 스타덤에 오른 이민호가 맡아 현대에서 과거로 떨어진 여성 외과의사 유은수[36] (김희선)과 로맨스를 펼친다. 오오 진화하는 한국의 사극. 참고로 실제 최영 장군의 부인이 삼한국대부인 문화 유씨, 즉, 유씨 성이었다. 이 드라마 속에서의 모습은 최영(신의) 항목을 참고할 것.
  • 퓨전사극 대풍수에도 등장한다. 이 드라마에서의 최영은 철저히 이성계 편이다. 심지어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자신이 처형 당할 때에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괜찮다고 오히려 이성계를 위로한다. 배우는 손병호.

5.1. 신돈(드라마)에서

배우는 최상훈.

어디까지나 작품의 주연이 신돈인 만큼, 신돈의 정적이었던 최영은 비교적 악역으로 그려진다.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면서 처음 등장하였으며, 계속되는 전쟁에서 승전하면서 고려 군부의 중축에 자리하게 된다. 신돈에게 호의를 가진 적도 있었으나, 신돈이 추구하는 정치 형태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알자 방향을 선회해 버렸고, 신돈 또한 그런 최영을 견제하여 군권을 빼앗는 등 압박해온다.

꽤나 평이 안 좋은 이 드라마에서 최영의 캐릭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다음 부분인데, 신돈이 처형된 후, 패닉 상태에 빠진 공민왕과의 독대를 통해 군권을 반 강제적으로 얻어내는 장면을 통해 그제껏 역사에서 나온 독선적인 충신 최영이 아닌 권력의 맛을 알게 된 정치 군인 최영을 그려냈기 때문이다.[37] 워낙 유명한 인물인 만큼 최영은 각종 서브컬쳐에서 자주 등장하지만, 이렇게 최영을 묘사한 창작물은 이 드라마가 유일다. 용의 눈물이나 정도전만 해도 최영을 '이상에 불타는 독선적인 충신'으로 그렸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쪽이 이례적인 케이스. 역으로 이성계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국왕에 대한 충성으로 움직이는 군인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이방인인 자신이 고려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후에 SBS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치 군인으로서의 면모가 강조된 최영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더 이상 유일한 작품은 아니다.

특히 공민왕에게서 군권을 얻어낸 후 이성계와의 대화가 꽤나 인상적이다.

이성계: 경하드립니다. 찬성사 대감! 이제야 고려군이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났습니다!
최영: (웃으며) 잘해보세.

훗날 두 사람의 결말을 생각해 본다면 꽤나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여담으로 최영 역의 최상훈과 이성계 역의 이진우는 신돈 바로 전에 방영된 제5공화국에서도 정치적 대립 관계(김동영 - 허화평)였다.

5.2. SBS 월화 드라마 신의에서

최영(신의) 문서 참조.

5.3.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원래는 임동진이 캐스팅되었으나 배우 본인의 고사로 태조 왕건에서 후백제견훤을 맡은 서인석이 캐스팅되었다. 연기력은 두말할 것도 없는 중견 배우이지만 왕건에서 맡은 견훤의 임팩트가 너무나 컸기에 그 뒤에도 여러 사극을 맡아서 호연을 펼쳤으나 견훤의 그림자가 쉽게 안지워지는 역효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과연 견훤의 그늘을 이번에야말로 벗어날 수 있을지가 나름 관건이었는데 오랜 세월 전우로서 함께 해온 이성계와의 두터운 정리, 무인으로서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정몽주와의 대담에서 보여준 신념과 신념의 충돌, 온 백성의 추앙을 받는 고려의 수호신다운 카리스마가 어우러져 평생을 외롭게 고려를 지탱해온 늙은 무장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내면서 역사 속 최영을 가장 잘 표현했다는 평이 많다.

자세한 설명은 최영(정도전) 참고.

5.4.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배우는 전국환.

기존의 충신 이미지와는 다르게 정치 군인으로서의 면모가 강조된 최영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이는 상기한 드라마 신돈에서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역시 실존 인물이 실존 인물인 만큼 간신으로 묘사되지는 않고, 애민의 마음과 사사로운 욕심 없이 오로지 국가를 위한 충성심만으로 움직이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그 엇나간 충성심으로 인해서 결국 자멸하고 만다. 참고로 이 드라마에서 최영의 이미지는 영락없이 이 시대로부터 몇년 전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동일 배우가 맡았던 인물인 연철과 비슷하다......

6. 관련 문서


  1. [1]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때문에 최영이 한 말로 알고 있지만 최원직의 말이다. JAM Live 2019년 1월 9일 방송에 이 문제가 나왔는데, 19%만이 이 문제를 맞추었고 70% 이상이 최영을 선택했다. 유명한 담언이기 때문에 2000년대 솔로부대 슬로건이 여자를 보기를 돌같이 하라였고, 수석(암석) 동호회 슬로건은 "돌을 보기를 금같이 하라"였다.
  2. [2] 스틸리코도 황금 보기를 돌같이 여기며 살았다.
  3. [3] 특히 조선의 경우 전 왕조를 무너뜨렸기에 역으로 고려를 지키려 했던 인물들을 충신으로 받들어세웠다. 정몽주가 그랬으며, 이색도 존중을 받았다. 대신 정도전을 비롯한 역성혁명의 주모자 일부가 역신으로 격하됐다.
  4. [4] 지금의 경기도 남부, 강원도 일부, 충청도 일대를 이르던 고려 시대의 행정 구역 이름이다.
  5. [5] 간신의 모함으로 해임되고 좌천된 후 심지어 유배가는 길에 독살까지 당한다.
  6. [6] 현재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
  7. [7] 고려사절요 27권
  8. [8] 이전에나 이후에나 전쟁에서 방어군의 가장 큰 장점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보급이고 하나는 지형이다. 보급이야 말할 필요가 없으니 빼고 보자면 지형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한반도의 바다는 일본의 바다와 특징이 다른 데다, 일본군은 먼 뱃길을 항해해와야 했기에 연근해의 전투에 상대적으로 덜 적합한 배였기 때문이다. 이는 이후 이순신 장군이 입증한 바 있다.
  9. [9] 다만 이 계획이 그 때 당시로 현실성이 없었다는 것이지, 조선 초에도 꾸준히 전선을 건조하면서 기존에 왜구들과 싸우며 높아진 질에 맞는 양을 건조해야한다는 것은 사관들도 인정은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필요했다는 것이었다.
  10. [10] 원나라 목동(하치)들의 반란, 제주도 땅은 고려에 반환되었으나 그곳의 말농장은 계속 원나라의 것이었고 목장의 목호들은 원 본국에 계속해서 제주도에 만호부를 설치해줄 것을 요구하는 중이었다
  11. [11] 출처 고려사 최영 열전
  12. [12] 실제 이인임도 최영만은 절대 건들지 않았다.
  13. [13] 이 부분은 나중에 조선건국 세력에게 비판의 여지를 남긴다.
  14. [14] 고려사 최영 열전에 나오는 원문은 다음과 같다; “충혜왕께서는 여색을 좋아했으나 반드시 밤에만 즐김으로써 남들의 이목을 피했습니다. 충숙왕께서는 놀러 다니기를 좋아했으나 반드시 농사철을 피해 백성들에게 원망을 사지 않았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절도가 없이 노시다가 말에서 떨어져 몸을 상하였는데, 제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제대로 바로잡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남들을 대하겠습니까?”
  15. [15] 임견미와 염흥방은 당시의 실권자이자 전임 집정대신으로 본디 권문세족의 대부였던 이인임의 일파로, 이어서 정권을 잡았다.
  16. [16] 제1차 요동 정벌공민왕 때 이루어졌으며, 이 당시의 최영은 신돈에 의해 좌천된 상황이었기에 요동 정벌에 참전하지 못했다. 참고로 1차 요동 정벌에 종군한 장수 중 한명이 바로 이성계였고 사령관은 이인임이었다.
  17. [17] 물론 몇년 후인 공양왕 대의 전답 등록수가 조선 후기보다도 많아 경제적으로는 어느정도 나아진것이 사실이나 왜구의 노략등 군사적 방비에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아 대규모로 군사력을 동원하면 무리가 올 상황이기는 했다.
  18. [18] 당시에는 호왈로 10만이라 했다. #
  19. [19] 사실 이성계도 반대하다가 타협할 생각으로 '지금(여름)은 시기가 나쁘니 가을로 잡자.'고 권유했지만 무시됐다.
  20. [20]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자네, 이제 왕이 되려는가?"라고 말하고 나서 하늘을 보며 "이인임 대감, 당신이 옳았소이다!"하며 웃는 장면이 있다.
  21. [21] 고양 시청 늘 푸른 고양 > 고양 소개 > 고양 역사 중세 조선 태종이 고봉현을 고양현으로 개명하였다.
  22. [22] 토성을 쌓을 때처럼 흙을 두들겨 단단하게 만드는 판축 공법으로 무덤을 만들면 풀이 잘 안 난다고 한다. 고인이 뱀을 싫어하면 무덤에 뱀꼬이지 말라고 이런 식으로 무덤을 조성하기도 했다고.
  23. [23] 당연한 얘기지만 최영의 무덤에 풀이 나지 않는 것을 본 후세인들이 창작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24. [24] 고려사 최영 열전
  25. [25] 고려사 <병지> <船軍> 공민왕 23년 정월. 初六道都巡察使崔瑩造船二千欲以六道軍騎船捕倭百姓畏懼破家逃役者十常五六及
  26. [26] 조준, 민제 등도 권문세족 출신이다.
  27. [27] 사실 권문세족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론(異論)이 있다. 권문세족 문서 참조.
  28. [28] 철원 최씨에 대면 성주 이씨는 그냥 유력 호족 집안 출신이다. 의외겠지만 권문세족 목록에도 없다.
  29. [29] 심지어 최영도 이인임도 공민왕과 뜻을 함께 하는 바람에 원래 권문세족 집안이던 자신의 가문엔 해만 되었다(...)
  30. [30] 비록 정치적인 부분에서 충돌하는 부분이 없진 않았으나 최소한 그들의 주장을 강력하게 반박하거나 반발하는 모습은 딱히 없었다.
  31. [31] 여담으로 최영은 처형당할 때 "내가 생전에 탐오를 부린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염흥방, 임견미 등을 죽일 때는 확실히 지나쳤었다."라고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용재총화에 실려 있다.
  32. [32] 그런데 사실 타락하기 전 기준엔 꼭 틀린 말도 아니고 타락했음에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란게 어떤 의미에선 무섭다. 그러나 타락한 후 안정시키고 지킨 공은 막장이 된 고려가 멸망만은 하지 않게 권신들과 탐관오리들의 주체못하는 행동에 스톱퍼와 한계를 두고 크게 군권을 건들지 않게 한거라 그냥 병주고 약주고다.
  33. [33] 유숙은 조선 건국의 주체였던 정도전의 스승이었다. 당연히 그를 살해한 신돈을 곱게볼 리가 없다.
  34. [34] 조선 왕의 몸에는 쇠붙이도 대지 않았으니, 상투를 잡는다는 건 평상시대로라면 당연히 사형감이었다. 하지만 유학에서는 위급상황이라면 예를 어길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가령 《맹자》 〈이루 상〉 17장에서 맹자가 '남녀가 직접 손을 잡지 않는 것은 예(禮)이지만 형수가 물에 빠져서 허우적댈 때 손을 잡아서 구하는 것은 권(權 : 이치에 맞게 잘 저울질하는 것)' 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즉 왕을 구하기 위해 상투를 잡은 것은 권도에 맞는 셈.
  35. [35] 몇 년 후 태조 왕건에서 궁예의 장인 강 장자 역할을 맡는다. 용의 눈물 최영과는 완전 정반대의 캐릭터.
  36. [36] 그런데 한때 캐릭터의 이름은 유은수가 아니라 전은수였는데, 어느 순간 바뀌었다.
  37. [37] 그 이전에도 공민왕의 개혁을 반대하고 공민왕이 충신 정세운을 의심 때문에 죽였다고 불신하는 등, 충신 면모와 거리가 있는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 하지만 딱히 최영이 간신으로 그려지진 않는 것도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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