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추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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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2대 총서기

본명

구상(瞿雙)[1]

한문

瞿秋白

한국식 독음

구추백

영문

Qu Qiubai

웅백(熊伯)

출생

1899년 1월 29일 청나라 강소성 무진현

사망

1935년 6월 18일 중화민국 복건성 장전현

국적

청나라 중화민국

학력

베이징대학

직업

언론인, 정치가

종교

무신론

총서기
재임 기간

2대 1927년 8월 7일 ~ 1928년 7월 11일

1. 개요
2. 생애
2.1. 유년시절~공산주의 입문
2.2. 혁명 활동
2.3. 최후
3. 저서
4. 여담
5. 관련문서
6. 참고문헌

1. 개요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가로 한때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가 되어 공산당을 영도했으나 좌경모험주의자로 비판받고 물러났고 국민당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2. 생애

2.1. 유년시절~공산주의 입문

1899년 강소성 무진현 태생. 명말에서 청말까지 300년 동안 관리를 지낸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아버지는 아편 중독자로 일가를 돌보지 않아 백부가 일가를 이끌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여 그의 백부가 사망하자 구씨 집안은 풍비박산나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가출했고 어머니는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릴 길이 없어 구추백이 중학을 졸업한 후 자살했다. 이후 베이징의 육군부에서 일하는 사촌형의 도움으로 베이징대학에 진학했으나 학비로 어려움을 겪었고 이 때문에 1917년 외교부가 개설한 학비를 면제해주고 러시아 공사관에 유급채용까지 보장해주는 러시아어 학교에 입학했다.

1918년 천두슈, 리다자오 등이 마르크스 연구회를 만들었는데 이때 구추백은 톨스토이 문학에 빠져 있어서 평론가 겸 작가인 정진택과 함께 문학연구회 지도 간부로 활동했다. 1919년 5.4 운동이 일어나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명성을 떨쳤고 1920년 러시아어학교를 졸업, 베이징의 신문 북경진보(北京晨報)에서 2천원의 연봉을 제시하자 8월부터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모스크바에 파견된 구추백은 10월 혁명 이후의 소련을 살펴보는 것이었는데 톨스토이 작품을 번역할 정도의 러시아어 실력을 가졌던 구추백은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1921년 중국 공산청년단 서기 장태뢰가 그를 공산당에 가입시키자 북경진보에서 해고되었다. 이후 극동민족대표대회 및 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에 참석하였다.

1922년 가을, 동방 근로자 대학 중국반에서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60여명의 유학생을 지도했고 귀국해서 당에 공헌해줄 것을 요청하는 천두슈의 요청에 장태뢰와 함께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2.2. 혁명 활동

상하이로 활동 무대를 옮긴 구추백은 1923년 중국 공산당 제3차 전국 대표자대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회에 선출되었다. 같은해 등중하와 함께 상하이 대학을 설립하여 교무장 겸 사회학계 주임이 되었다. 이때 결혼을 했으나 반년도 되지 않아 사별하였다.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형성되자 중국 국민당 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27세의 나이로 후보중앙집행위원에 지명되었다. 구추백은 정객 심정일의 집에서 기거하였는데 심정일의 아들인 화가 심정룡의 아내 양지화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양지화는 심검룡과 이혼하고 구추백과 결혼했는데 심검룡은 이 사실을 공인하는 광고를 <민국일보>에 게재하면서 자신과 구추백의 우정은 변치 않을 것이라 공언하는 대인배의 모습을 보인다. 이후 중국공산당 선전부장 팽술지 문제로 천두슈와 대판 싸웠다.

1927년 4월 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분공에 나선데 이어 1927년 7월 15일 왕징웨이의 우한정부마저 분공을 결정하여 국공결렬이 일어나자 중국 공산당은 난창 폭동을 일으켰지만 처참하게 실패했고 8.7 긴급회의에서 천두슈가 멘셰비키, 기회주의자로 몰려 팽술지와 함께 제거되자 구추백은 30세의 나이로 당 총서기 겸 정치국 주석에 선출되었다.' 구추백은 맹동주의적인 폭동과 파업을 교사했으나 그가 기획한 9월 9일의 추수폭동은 역시 실패했다.[2]

허나 취추바이의 당중앙은 1927년 11월, 상하이에서 임시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 연속혁명론을 주장하며 더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했고 국민당 좌파를 더 이상 칭하지 말고 소비에트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2월 광저우 폭동도 실패로 돌아가고 장태뢰가 사망하는 등 당에 막대한 손실로 돌아왔다. 이 때문에 구추백은 코민테른에서 좌경모험주의자로 비난받았고 1928년의 6전 대회에서 샹중파(향충발), 리리싼(이립삼) 등의 공격을 받았다. 구추백은 총서기 자리를 샹중파에게 넘겨주고 모스크바로 소환되었으며 이후 당 노선은 샹중파-리리싼-저우언라이가 영도하였다. 구추백은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간부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모스크바 대표단 주석 자리를 유지했다. 6전대회에서 구추백이 제출한 <중국혁명과 중국 공산당>은 중요한 문헌자료로 남고 있다.

1930년 대표 자리에서 해임된 이후 중국으로 귀국했다. 대공황에 고무된 리리싼 등이 리리싼 노선을 전개, 1930년 7월 무리하게 창사 폭동을 주도했다가 몰락했고 리리싼을 불신하게 된 코민테른에서 1931년 파벨 미프가 파견되어 샹중파는 총서기 자리를 진소우에게 넘겨주었고 구추백도 조화주의자로 몰려 리리싼과 함께 덤터기로 처벌되었고 왕밍이 당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당에서 나와 좌익작가연맹에서 활동하며 문예대중화론을 주장했다. 이후 상하이에서 번역가, 문필가로 활동했다. 국민당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1934년 2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으로 이주해서 교육부장, 선전부장을 맡았다.

2.3. 최후

1933년 10월 국민당의 제5차 초공작전이 발동되자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국민당의 토치카 전술과 화력에 밀려 멸망의 위기에 몰렸다. 이 때문에 주력홍군은 1934년 10월 대장정의 길에 올랐으나 폐병을 앓던 구추백은 대장정을 따라가지 않고 잔류하였다. 구추백의 폐병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자 공산당은 구추백을 상하이의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결정했고, 이에 구추백은 양백대의 임신한 부인 장량, 중앙위원인 60세의 하숙형, 여전사 2명과 함께 복건성 용암지방으로 피난했다.

하지만 장정현 수구에서 토벌군에게 체포되어 창팅 감옥에 수감되었다. 하숙형은 토벌군에게 저항하다가[3] 현장에서 총살되었고, 체포된 구추백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가명을 둘러대며 자신이 의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창팅 감옥에 구추백이 수감 중이라던 제보가 들어왔고, 체포된 포로들을 족쳐서 구추백의 정체를 밝혀냈다. 이후 전향을 거부해[4] 1935년 6월 18일 장제스는 구추백을 처형하라고 지시했고, 중산공원에서 맹동주의를 실현한 죄목으로 총살당했다.

사형 집행일에 특무대장 요상광이 구추백의 마지막 사진을 찍은 다음에 유언을 묻자 탈고되지 않은 시가 있으니 쓰게 해달라고 종이와 붓을 요청했다. 요상광이 지필묵을 내주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어젯밤 꿈속에서 산길을 걷고 있노라니 막 노을이 지려는 가운데 한기가 엄습해왔다. 문득 당나라의 시, <석양명멸난상중>의 한 구절이 떠올라 거기에서 인용, 시를 한 수 지었다.'

석양이 난산에 명멸하니

낙엽지는 소리, 샘물 흐르는 소리가 제각기 다르구나.

외롭게 견디어온 10년의 세월

마음 닿지 않아 모든 인연이 허망하여라.

이후 마지막으로 소주 한 잔을 마신 다음에 미소를 지으며 러시아어로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다가 38세의 나이로 절명했다. 그가 죽은 지 5년이 지난 1938년, 대숙청 와중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스탈린의 중국 공산당 숙청 계획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해당 계획이 실행에 옮겨진 적은 없지만...

사망한 지 30년이나 지난 문화대혁명 시기에 공산당을 탈당한 전적 때문에 배반자로 몰려 홍위병들이 몰려와 그의 무덤을 파헤쳤다. 그러나 문혁의 광풍이 지나간 1980년, 여러 인사들과 함께 복권되었다.

3. 저서

  • <아향기정(餓鄕紀程)>(1921)
  • <적도심사(赤都心史)>(1924)
  • <다여적화(多餘的話)>
  • <중국 혁명과 중국 공산당>(1928)

4. 여담

  • 홍군 지휘관 항영의 아내인 장량(張亮)이 당시에 구추백을 호위하던 여전사 중 한명이었는데, 장량은 체포 3년 후 보석으로 석방되어 홍군에 합류했다. 하지만 항영은 장량이 구추백을 국민당에 팔았다고 의심하여 장량을 처형했다.
  • 그의 고향 강소성 상주에 그를 기념하는 구추백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1982년 3월 25일에 설립되었다가 구추백 사망 50주년을 맞이한 1985년 6월 18일 정식 개관했다.

5. 관련문서

6. 참고문헌


  1. [1] 추백은 필명.
  2. [2] 다만 호남에서의 폭동 지휘를 맡았던 마오쩌둥의 패잔병들이 정강산을 점거하고 정강산 투쟁을 전개하며 해방구를 건설하는 결과를 낳긴 했다.
  3. [3] 혹은 달아나다가.
  4. [4] 중국 공산당은 탈당하였다.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책 몇 권 읽은 것을 가지고 10여년을 허송세월하였다." "나같은 문인은 절대로 무산계급의 전사가 될 수 없다."고 자책하였다. 다만 공산주의 신념 자체는 아주 버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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