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린 드 메디시스

이름

카테리나 마리아 로물라 디 로렌초 데 메디치
(Caterina Maria Romula di Lorenzo de Medici)

출생

1519년 4월 13일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사망

1589년 1월 5일 (69세)
프랑스 왕국 블루아 성

배우자

앙리 2세 (1533년 결혼 / 1559년 사망)

자녀

프랑수아 2세, 엘리자베트, 클로드, 루이, 샤를 9세, 앙리 3세
마르그리트, 프랑수아, 잔, 빅투아르

아버지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 데 메디치

어머니

마들렌 데 라 투르 도베르뉴

1. 개요
2. 유년기
3. 황제교황 사이의 정쟁으로 튄 불똥
4. 왕세자비에서 섭정이 되기까지
5. 왕권 강화를 위한 이간책과 위그노 탄압
6. 발루아 왕가의 멸망
7. 평가
8. 매체에서

1. 개요

프랑스왕비로, 본명은 카테리나 마리아 로물라 디 로렌초 데 메디치(Caterina Maria Romula di Lorenzo de' Medici). 줄여서 카테리나 데 메디치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2. 유년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 가문 출신. 당시 피렌체의 지도자인 로렌초 2세[1]와 프랑스 공주 오베르뉴 마들랭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메디치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였으나, 태어난 지 1달도 되지 않아서 부모가 모두 사망하였다. 아버지가 우르비노 공작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우르비노 여공작이었고, 당시 갓난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 자신이 어떤 남자와 결혼하냐에 따라 당시 모든 국가들이 탐내고 있던 이탈리아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었기에 생애 초기에는 그야말로 금지옥엽이었다.

그러나 카트린을 보호하고 있던 작은할아버지 교황 레오 10세선종하자 메디치 가문의 세력은 일시적으로 위축되었고, 그 와중에 카트린은 우르비노 공작령과 피렌체의 상속인 자격을 잃었다. 지도자를 잃은 메디치 가문이 휘청대고 있는 동안 메디치 가문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신임 교황인 하드리아노 6세가, 우르비노 공작령과 피렌체의 실권을 당시 3살에 불과했던 카트린에게서 몰수하였기 때문이다. 짧은 하드리아노 6세의 치세가 끝난 후 메디치 가문의 일원이며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동생 줄리아노의 서자인 줄리오 데 메디치가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었다.

3. 황제교황 사이의 정쟁으로 튄 불똥

바로 이 신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그녀 인생에서 여러가지로 화근의 씨앗이었다. 그 이전까지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합스부르크간 유대관계는 더없이 돈독했으나, 클레멘스 7세교황치고 나이도 젊고 강단도 아주 강한 교황이었다. 당시 유럽은 마르틴 루터종교개혁이 불길처럼 번지는 상황이었건만, 교황의 소프트웨어는 수백년 전 십자군 전쟁 시기 교권이 유럽을 호령하던 중세적 사고에 묶여있었다.

시대 배경을 간략히 언급하자면, 그의 이전 교황들은 당대의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매우 두터운 관계를 유지했다. 전전대의 레오 10세는 스페인 왕이였던 카를이 황제로 선출되게끔 조력을 아끼지 않았고, 전대의 하드리아노 6세는 다름아닌 카를 황제의 가정교사(…) 출신이었다. 더욱이 카를 5세는 종교개혁 속에서 가톨릭을 수호하기 위해 헌신해왔다. 그런데 이처럼 끈끈한 무드를 클레멘스 7세가 한큐에 날려버렸던 것이다.

클레멘스 7세는 커질대로 커진 황제권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신성 로마의 적국이자 주변국들과 동맹을 맺고 황제와 적대관계로 돌변했다. 제국의 앙숙인 프랑스, 베네치아와 손을 잡은 것이다. 제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 초기 내내 교황은 프랑스에 호응하여 카를 5세의 뚜껑을 열리게 만들었으며, 가장 결정타는 영국까지 끌어들여 제국을 사방에서 포위해버린 코냑 동맹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행위는 카를 5세의 분노를 유발했고, 결국 1527년에 온 로마가 쑥대밭이 되는 대사건(사코 디 로마)이 터진다. 로마가 제국군에 점령당한 반년간 산탄첼로에 피신해 유폐되다시피 한 교황의 권위는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이처럼 상황이 수습 불가 지경에 이르자 교황은 카를 5세에게 굴욕적인 GG를 선언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한편 황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제스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배상금을 메꾸고 로마를 재건하며 카를 5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스스로 출신지인 피렌체를 공격했다(…).

자기들을 코냑 동맹에 끌어들인 교황 자신이, 그것도 메디치 가문 사람이 적으로 돌변하자 피렌체 사람들은 당연히 경악했고 패닉에 빠졌다. 물론 피렌체도 제국에 개겨보긴 했지만 이탈리아 대부분이 카를 5세 수중에 떨어진 판에 피렌체라고 예외일 리가 없었다.

이런 사태를 맞고 분노한 피렌체 시민들에 의해 메디치의 카트린은 거의 죽을 위기에 처했고, 신변의 안전을 위해 베네딕토회 수녀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런 불똥이 옮겨붙은 그녀는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오베르뉴를 뺀 땅과 작위를 대부분 잃고 몰락했다. 그 결과 그녀는 태어났을 때에 비해 대외적 가치가 크게 폭락했으나, 그나마 메디치 가문의 재산은 아직 남아 있었기에 아직 클레멘스 7세 교황의 중요한 결혼동맹용 말로 남아있었다.

결국 그녀는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서 계속 줄타기를 하고 있던 클레멘스 7세의 중매로 프랑수아 1세의 아들인 프랑스 제2왕자 오를레앙 공작 앙리와 결혼하게 되었고, 오를레앙 공작부인이 되었다. 이 때 카트린과의 결혼에 대해 프랑스에서 큰 반대가 있었는데, 메디치 가문은 당시 벼락출세한 가문으로 여겨져 귀천상혼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프랑수아 1세는 카트린은 평생 오를레앙 공작부인일 것이며, 왕비가 될 일이 없을 것이라고 귀족들을 안심시키고 카트린과 오를레앙 공작을 결혼시켰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의 형인 제1왕자 프랑수아가 파비아 전투 때 카를 5세에게 포로로 잡혀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나자마자 오래 안 가 죽었으므로, 이 앙리 왕자가 프랑수아 1세의 뒤를 잇는 앙리 2세로서 프랑스 왕좌에 오른다. 그렇기에 프랑수아 1세가 평생 '오를레앙 공작부인'일 것이라고 장담했던 카트린이 프랑스의 왕비가 된 것이다.

만약 교황이 이 결혼의 중매만 서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프랑스 발루아 왕가에 여생을 다 바칠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프랑스의 역사도 완전히 뒤집혔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발루아 왕가가 아닌 합스부르크로 시집갔더라면 프랑스가 아니라 세계사 차원에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있다. 결과적으로 클레멘스 7세는 그녀의 인생과 프랑스의 운명, 나아가 유럽의 운명까지도 뒤바꿔놓고 만 것이다.

카트린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카트린은 앙리 2세를 지극히 사랑했으나, 앙리 2세는 카트린과의 관계를 단지 자신의 의무로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앙리 2세는 카트린과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세 연상인 디안 드 푸아티에 후작부인이라는 애인이 생겼기 때문이다.

4. 왕세자비에서 섭정이 되기까지

프랑수아 왕세자의 사후 앙리 2세가 왕세자가 됨에 따라 카트린 또한 왕세자비의 지위에 올랐으나, 남편은 19세 연상인 디안 드 푸아티에라는 애인을 두고 있었고 자연히 실세는 카트린이 아닌 푸아티에가 되었다. 수많은 궁정 사람들은 물론 푸아티에에게도 갖은 모욕과 멸시를 받고, 결혼한지 9년 간 아이를 갖지 못하자 푸아티에는 카트린의 이혼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카트린과는 6촌 관계이기도 했던 푸아티에 후작부인 역시 그다지 높은 가문 출신이 아니라 벼락출세한 여자였는데, 문제는 처음 카트린과 앙리의 결혼에 강력하게 찬성한 건 당시 앙리와 애인도 아니었던 푸아티에 부인이었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시집온 외국의 궁정에서 카트린의 편이었던 인물은 시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와 시누이인 마르그리트 공주밖에 없었다고 한다. 프랑수아 1세는 하나뿐인 며느리를 매우 예뻐하였고, 카트린이 궁정에서 무시당하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다. 덕분에 그가 살아있을 때는 카트린도 큰 모욕을 받지는 않았지만, 앙리 2세의 치세가 되고 나서 권력의 중심이 푸아티에 부인이 됨에 따라 온갖 수모를 당했다. 그녀는 이후로도 줄곧 '이탈리아 장사꾼 딸내미'와 같은 심한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2] 모성애가 극진한 인물이었지만 어렵게 얻은 아이들조차 푸아티에 후작부인이 데려가 버리는 바람에 양육하는 것은 고사하고 마음대로 볼 수조차 없는 처량한 신세에 놓였다. 게다가 푸아티에 후작부인은 1548년에 발렌티누아 여공작, 1553년에 에탕프 여공작 작위까지 수여받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앙리 2세가가 죽고, 아들 프랑수아 2세를 섭정하게 되면서 그녀는 복수의 화신이 되어 궁정을 피로 물들일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그녀의 복수는 단지 푸아티에 후작부인에게서 슈농소 성[3] 하나만을 반환토록 하는 매우 관대한 처분으로 끝났다. 사실 디안도 멍청하진 않아서, 자신의 유일한 권력의 기반인 앙리 2세가 죽으면 카트린에게 권력이 집중될 것을 미리 파악해 놨기 때문에 사고 직후 비굴할 정도로 카트린에게 저자세로 나갔다. 거기다 디안 또한 프랑수아 1세의 애첩인 에탕프 공작부인과 원수지간이었는데, 프랑수아 1세가 죽고 나서 그녀에게 아무런 복수도 하지 않긴 했다. 그런 과거가 있다 해도 당대인들은 카트린을 악랄하게 핍박했던 푸아티에 부인이 사형당하고 기즈 가문의 입지도 그만큼 줄어들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렇게 푸아티에 부인은 정치에서는 배제되었으나 막대한 재산을 보전하며 조용히 은거하였고, 카트린은 점차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강화시켰다.

5. 왕권 강화를 위한 이간책과 위그노 탄압

1559년 7월 앙리 2세가 마상 창시합 도중 죽은 후[4]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세 차례에 걸쳐 (프랑수아 2세 (1559-1560), 샤를 9세 (1560-1574), 앙리 3세 (1574-1589)) 왕의 그림자 뒤에서 프랑스 정치를 주름잡는 실세가 된다. 그리고 이 과부가 다스리는 30년은 프랑스의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 중 하나로 기억된다.

어렵게 섭정 왕태후 지위를 얻었으나, 당시 프랑스신/구교간의 갈등으로 내전 상태였고, 어린 아들 프랑수아 2세의 왕권도 기즈 가문[5]에 의해 흔들리는 처지였다. 프랑수아 2세의 아내이자 스코틀랜드메리 여왕의 외가 역시 기즈 가문인지라 그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카트린은 발루아 왕조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신교도들과 구교도간의 갈등을 적극 이용했다. 프랑수아 2세 즉위 당시 벌어진 위그노(개신교)들의 국왕 납치 시도 사건의 주모자격인 콩데 공작을 사면해 가톨릭의 대표인 기즈 가문을 견제하게 하였다.

그러는 동안 워낙 병약했던 프랑수아 2세는 즉위 16개월만에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메리 스튜어트는 왕권을 찾아 스코틀랜드로 떠났고, 카트린은 장남의 뒤를 이어 즉위한 차남 샤를 9세를 섭정하게 된다. 카트린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이반하여 자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하는 샤를 9세를 설득하고, 개신교도라면 이를 가는 기즈 가문과 연합하여 샤를 9세와 협력관계이던 개신교도[6]들의 암살계획을 방조하게 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카트린이 연루되었든 그렇지 않든 이 암살로 인해 촉발된 일이 바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라고 불리게 되는 대사건이다. 다만 카트린 자신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제외하면, 화합의 아이콘이 될 미셸 드 로스피탈을 수상으로 임명하고 자기 딸위그노인 앙리 나바르(훗날 앙리 4세)를 혼인시켰을 정도로 위그노와 가톨릭의 화합을 꿈꾼 인물이었다.

그녀가 가장 아낀 아들은 앙리 3세였다. 외모도 뛰어난 데다가 어릴 때는 상당히 총명하여 그녀가 가장 기대한 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즉위한 후 그는 총신들과 놀아재끼기에 바빴고, 어머니인 카트린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 중 가장 결정판이라 할 만한 것은 앙리 3세의 기즈 공작 암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카트린이 암살 전에 이걸 인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6. 발루아 왕가의 멸망

앙리 3세는 어머니와 정치적 노선으로 인해 갈등을 빚었고, 결국 1588년 어머니의 조언자들을 모두 해고했다. 앙리 3세는 카트린을 왕들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국가의 어머니라고 높여불렀으나 단지 그 뿐이었고, 당시 이미 심한 폐렴에 걸려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있던 카트린은 모든 정사에서 배제되었다. 이후 앙리 3세의 행보는 그를 결국 파멸에 이르게 했다. 앙리 3세는 기즈 공작을 대놓고 적대시하기 시작했는데, 기즈 공작은 프랑스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이자 그야말로 핵심이었기 때문에 앙리 3세는 자신의 세력 기반에서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거기다 앙리 3세는 정치적 동맹자로 이전까지 자신을 충실히 지지하던 기즈 가문이 아니라 개신교 측인 나바르의 앙리를 선택했는데, 이 역시도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기는 했지만 종교적 관대함만은 어머니와 닮았던 앙리 3세는 나바르의 앙리와 가까워진 이후 위그노파와 화해를 추진하는 정책을 펴려 했다. 큰 모욕을 받았다고 여긴 가톨릭파의 보스 격인 기즈 가문의 두 형제(기즈 공과 추기경)는 이에 스페인펠리페 2세의 지원을 받아 아예 앙리 3세를 축출해버리고자 했는데, 강력한 신하들을 왕권으로 견제할 수단이 없었던 앙리 3세는 1588년 12월 23일 기즈 형제 둘을 전부 다 암살하는 막장스러운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카트린의 병세는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1589년 1월 3일 그녀는 오랜 친구 부르봉 추기경[7]을 방문하여 "아, 그 가련한 아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오. 그는 자신의 모든 걸 무너트려 폐허로 만들고 있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1월 5일, 카트린은 쓸쓸하게 블루아 성에서 사망했다. 평생을 발루아 왕조와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바친 삶이었으나 결국 그녀는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한 채 모두에게서 잊혀진 채로 임종을 맞게 되었다.

죽어서도 카트린에 대한 취급은 매우 비참했다. 그녀의 시신은 약식 장례를 치른 후 블루아 성당 바닥에 묘비도 없이 묻혀 있었다. 이렇게 모두에게서 잊혀져 버린 카트린은 훗날 자신의 자식도, 사위도 아닌 의붓딸에 의해 비로소 안식을 찾게 된다. 앙리 2세의 서녀였던 디안 드 프랑스가 "앙리 2세의 부인인 카트린이 죽어서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건 너무나도 부당하다"고 나선 것. 결국 디안에 의해 카트린은 생 드니 성당의 왕실 묘역으로 이장되어 앙리 2세 곁에 잠들게 되었다.

이제 카트린이 역사에서 퇴장한 이후 남은 그녀의 마지막 아들인 앙리 3세로 다시 돌아가자면, 기즈 공작의 암살 이후 앙리 3세는 어찌되었든 자신의 세력 기반이었던 가톨릭 측에서 그야말로 원수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가톨릭 측이 주류인 수도 빠리에서 폭동이 일어나 앙리 3세는 도망을 쳤는데, 도망간 곳이 나바르 국왕 앙리가 이끄는 군대가 있던 곳...

나바르의 앙리는 일단은 앙리 3세와의 친분도 있었고, 그가 자신을 프랑스의 차기 국왕으로 인정하였기에 기꺼이 프랑스의 왕으로서 대우해줬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앙리 3세 또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카트린이 사망하고 8개월이 지나 암살당한 기즈 형제의 원한을 갚는답시고 광신적인 가톨릭 수도자가 앙리 3세를 면전에서 칼로 찔러 죽이는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백년전쟁을 걸쳐가며 프랑스의 왕좌를 지켰고, 한때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도 노리던 발루아 가문은 초라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결국 마지막으로 승리한 사람은 발루아 가문도, 기즈 가문도 아닌 카트린의 평생의 적이었던 부르봉 가문의 앙리였다. 카트린, 기즈 가문, 앙리 3세와 같은 앞선 역사의 주역들이 모두 몰락하고 가톨릭 세력이 허무하게 무너져내린 후, 나바르의 앙리는 자신의 영지 나바르로 돌아가 한동안 힘을 기르다가 영국을 위시한 각국의 개신교 군대의 도움을 받아 파리로 진격하고 파리를 포위하였다.

그러던 중 파리 시는 앙리 4세를 왕으로 받아들이되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그는 즉시 가톨릭으로 회심[8]한 뒤에 즉위하고 부르봉 왕조를 창시한다. 이 때 앙리 4세가 한 유명한 말이 바로 "빠리미사를 드릴 자격이 있지!"

7. 평가

프랑스 발루아 왕조 앙리 2세왕비. 프랑스 전역을 휩쓴 위그노 전쟁 당시, 파리에서 수천 명의 위그노 들을 학살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으나, 20세기부터의 시각으로는 학계에서 일관적으로 부정되고 있는 편[9]이다. 카트린이 학살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가장 큰 원인은 훗날의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국민에게 인기가 없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학계의 시선과는 다르게 일반인들에게는 그냥 학살자로만 알려져 있는 편.

남편의 사후 쇠약해진 왕권을 되살리기 위해 비인도적인 짓을 많이 저지른, 권력에 눈이 멀어 피도 눈물도 없었던 여인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사건으로 인해 덮어씌워진 이미지이다. 이 문서의 개요와 본문만 해도 여러 번 학살의 주범이라는 식으로 수정된 적이 많다. 카트린은 평생 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의 갈등을 봉합하려 한 중재자로 살았으며 아들들의 왕권과 발루아 왕조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녀의 정책은 비록 기만적이었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피와 음모로 얼룩지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듯 카트린의 정책과 궁극적인 목표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화합을 바탕으로 그 위에 발루아 왕조가 종파를 초월한 왕조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카트린의 정책은 실패하였는데, 첫 번째 이유는 자식들이 영 칠칠치 못한 데다가 자손도 남기지 못했던 탓이요, 두 번째 이유는 그녀 자신이 종교 갈등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에 있었다. 피렌체 출신의 카트린은 평생 종교적 열정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철저히 실리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가톨릭 세력은 강했고 위그노 진영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그녀가 제시한 가톨릭개신교가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청사진은 본질적으로 실리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 즉, 당시의 프랑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카트린은 이 두 세력을 이용해 권력 기반으로 삼고자 평생을 노력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이 종교 갈등이 그나마 봉합된 것은 결국 프랑스 전역이 황폐화된 이후 앙리 4세의 치세에 이르러서였다.

의전에 관해서 당시 포크도 사용하지 않았던(!) 프랑스 궁정에 올바른 식사 예절과 향수를 도입하고 포크와 향수도 모르는 야만족 프랑스 이탈리아 문물을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이후 부르봉 왕조의 시대에 이르러 유럽의 궁정문화를 주도하게 될 프랑스식 궁정문화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 과자 마카롱을 이 분이 프랑스로 전파한 것이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샌드위치 형태의 마카롱은 먼 훗날 파리의 제과점 라뒤레에서 개량한 것이다.

8. 매체에서

대항해시대 온라인 프랑스 국가 이벤트에 등장하는 프랑스 황태후가 바로 이 인물이다.

영화 여왕 마고에도 등장한다. 권력을 위하여 온갖 악행을 일삼는 역할로 묘사되는데, 자신의 사위인 앙리 나바르의 독살을 기도한다. 그런데 정작 그 독약의 희생자는... 여왕 마고 항목 참조.

게임 창세기전 3에는 이 인물을 오마주한 조연 캐릭터 카트린느 메디시스가 있다.

굽시니스트의 서양 미술사 만화에서는 유페미아 리 브리타니아로 표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의도했는지 눈 가장자리가 붉고 석궁을 들고 "위그노를 죽여요"라는 대사를 하고 있다.

문명 6에서 프랑스의 지도자로 등장. 이름을 이탈리아 식과 프랑스 식을 짬뽕한 카트린 데메디치라는 희한한 번역으로 해놨다. 항목의 설명대로 이탈리아인이고 결국은 실패한 군주이기 때문에 다른 쟁쟁한 후보를 제치고 프랑스의 지도자로 나오는 것에 논란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인들은 학살자에 대한 인식이 정말 안 좋다.


  1. [1] "위대한 로렌초"로 알려진 로렌초 데 메디치의 장남 피에로의 아들.
  2. [2] 앙리 2세 사후에 왕비로 등극한 그녀의 맏며느리 메리 여왕조차 "이탈리아 출신 장사꾼의 딸이 왕족과 대등한 위치에 있을 수는 없다."는 논지의 말을 했다고 하니, 그 모욕의 역사가 얼마나 긴지 알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이 오랫동안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인 지배자라 해도 카트린이 결혼할 당시인 1533년에는 귀족 세계에서는 피렌체 공작 작위를 얻은지 얼마 안 된(1531년) 벼락출세 가문이었다. 원래 프랑스 왕족들은 귀천상혼 법칙에 따라 신분이 낮은 가문의 여자와는 결혼할 수 없었다.
  3. [3] 카트린이 가장 사랑했던 성이었는데, 앙리 2세가 디안을 위해 덜컥 하사하여 카트린에게 굴욕을 주었다.
  4. [4] 이걸 예언했다며 유명해진 인물이 노스트라다무스.
  5. [5] 프랑수아 1세는 왕세자 부부에게 유언으로 "기즈 가문을 조심해라. 그들은 너희의 아이들의 조끼까지, 그리고 너희의 백성들의 셔츠까지 몽땅 벗겨갈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6. [6] 대표적으로 당시 개신교도의 수장이었던 프랑스 해군 제독 콜리니.
  7. [7] 사위인 앙리 드 나바라의 숙부로 신교도인 앙리 드 나바라에 반대해 신성동맹에서 대립 후계자로 내세운 인물로 앙리 3세에 의해 기즈 형제가 암살당할때 왕에 의해 구금되어 있었다.
  8. [8] 회심은 원래 가톨릭이었던 사람이 다른 종교로 오랫동안 개종해 살았다가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와 재개종하는 걸 말한다. 실제로 앙리 4세는 위그노로 자라긴 했으나 어릴 적에는 정말로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9. [9] G.F Young, Denis Crouzet, Jean-Louis Bourgeon, Thierry Wanegffelen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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