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콜럼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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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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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스미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다.
미국 역사를 총망라해서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개척자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헨리 허드슨

아메리고 베스푸치

존 스미스

조반니 다 베라차노

존 뮤어

메리 웨더 루이스
윌리엄 클라크

새커거위아

키트 카슨

존 웨슬리 파월

닐 암스트롱

혁명가 & 저항가들

마틴 루터 킹

로버트 E. 리

토마스 페인

존 브라운

프레드릭 더글러스

수전 B. 앤서니

W. E. B. 두 보이스

테쿰세

타탕카 이오타케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말콤 엑스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율리시스 S. 그랜트

우드로 윌슨

에이브러햄 링컨

제임스 매디슨

앤드루 잭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부시

첫 여성들

포카혼타스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

힐러리 클린턴

마사 워싱턴

오프라 윈프리

헬렌 켈러

소저너 트루스

제인 애덤스

이디스 워튼

베티 데이비스

사라 페일린

범법자들

베네딕트 아놀드

제시 제임스

존 윌크스 부스

알 카포네

빌리 더 키드

윌리엄 M. 트위드

찰스 맨슨

와일드 빌 히콕

리 하비 오즈월드

러키 루치아노

존 딜린저

예술가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앤디 워홀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잭슨 폴록

존 제임스 오듀본

조지아 오키프

토머스 에이킨스

토마스 내스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안셀 애덤스

종교인들

조셉 스미스 주니어

윌리엄 펜

브리검 영

로저 윌리엄스

앤 허치슨

조너선 에드워즈

L. 론 허버드

엘런 화이트

코튼 매더

매리 베이커 에디

빌리 그레이엄

팝 아이콘들

마크 트웨인

엘비스 프레슬리

마돈나

밥 딜런

마이클 잭슨

찰리 채플린

지미 헨드릭스

마릴린 먼로

프랭크 시나트라

루이 암스트롱

메리 픽포드

제국-건설자들

앤드루 카네기

헨리 포드

존 데이비슨 록펠러

존 피어폰트 모건

월트 디즈니

토머스 에디슨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하워드 휴즈

빌 게이츠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

스티브 잡스

운동선수들

베이브 루스

무하마드 알리

재키 로빈슨

제임스 네이스미스

아놀드 슈워제네거

타이 콥

마이클 조던

헐크 호건

짐 도프

세크리테어리엇

빌리 진 킹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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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pher Columbus


[1]

본명

이탈리아어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Cristoforo Colombo)

스페인어

크리스토발 콜론(Cristóbal Colón)

영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출생

1450년 10월 31일, 이탈리아 제노바

사망

1506년 5월 20일 (55세), 스페인 바야돌리드

국적

이탈리아

직업

항해사, 탐험가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배우자

필리파 모니스 페레스트렐로

서명

1. 소개
2. 신항로 개척과정
2.1.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최초 발견자인가?
2.2. 콜럼버스는 지구 구형론의 선구자였는가?
3. 원주민 탄압 및 학살
4. 몰락과 죽음
6. 의의
7. 기타
8. 창작물
8.1. 영화
8.2. 게임

1. 소개

스페인에서 활동한, 탐험가, 항해가. 이탈리아 출신의 항해사이자 스페인콩키스타도르. 1980년대 위인전에는 그냥 콜롬부스라고 나온다.

흔히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로 알려져 있지만, 아메리카에는 당연히 원주민 문명이 존재했으므로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건 지극히 유럽인 입장에서의 시각일 뿐이다. 또한 유럽인 중에서는 북유럽의 바이킹이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의 지속적 교류의 물꼬를 튼 유럽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또한 유럽인들에게는 영웅이자 대탐험가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는 재앙이었기 때문에 원주민 중심의 역사 인식이 보급된 1960년대 이후로는 그에 대한 평가가 크게 추락했다.[2]

어린 시절의 행적은 불분명해서 태어난 연도도 자세한 기록이 없다. 1451년생으로 보통 많이 알려졌지만 1447년생이라는 주장도 많다. 오늘날의 이탈리아 지역인 제노바 공화국 출신이면서, 스페인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그래서 이탈리아어로는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 스페인어로는 크리스토발 콜론(Cristóbal Colón)이다, 유럽인들 기준으로는 영웅 중의 영웅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이라서 그런지 유럽 언어로는 이 인물을 표기할 때에는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식이 아닌 자국어 식으로 표기하는 것이 관례이다. 하여간 한국에서는 영어식 발음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로 소개가 되어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공식 표기법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콜럼버스에서 파생된 Columbia의 공식 표기법은 컬럼비아다. 영어 발음에 의해 외래어 표기법으로 정확히 표기하자면, Columbus도 컬럼버스라고 표기해야 되겠지만, 관용을 존중해 콜럼버스가 표준 표기가 되었다. 하지만 Columbia의 표준 표기는 컬럼비아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컬럼버스라고 하고, 콜럼비아라고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으며 자주 틀리는 외래어의 하나.

2. 신항로 개척과정

우리가 자주 읽는 위인전에 의하면 콜럼버스는 동생인 바르톨로메오 콜롬버스와 지도 제작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동방견문록을 읽고 기존의 관념과는 다르게[3] 지구는 둥글고 세상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바다 서쪽 끝에는 낭떠러지가 아닌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지구는 둥글테니까 서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면 언젠가는 세계를 한바퀴 돌아서 중국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믿었으며, 지중해를 점거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을 거치지 않고 교역과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을 세우고 스폰서를 구하며 포르투갈, 영국,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국가들의 지도자에게 지원 요청을 하지만 대부분 거절당했다.

이는 콜럼버스의 이론이 완전히 틀린 이론이라 거리 계산이 터무니없이 어긋났고 콜럼버스의 요구조건이 꽤나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땅에서 나오는 보물 10% 및 그 섬들의 총독 자리를 평생 보장할 것 외에도 꽤나 많이 요구했다. 동시대에 살던 마젤란의 요구가 보물 5% 양도 및 기록에 대한 저작권 요청에 그친 것에 견줘보면 날강도 수준이다.

그러다 마침내 이사벨 1세의 후원으로 탐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여왕도 권력이 꽤 있었음에도[4] 콜럼버스의 요구가 워낙 까다로워 여왕 자신이 아끼던 보석까지 팔아가면서 개별적으로 후원해줘야 했다고 한다. 또한 이사벨 1세는 자신의 왕관을 톨레도 대주교에게 팔았으며 그 왕관은 현재 톨레도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1492년 8월 3일 스페인 카디스를 떠나 3달뒤인 10월 12일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상륙한다.

이사벨 1세의 신대륙 개척 지원에 대해선 세간에 알려진대로 '여왕이 콜럼버스에게 개인적 흥미를 느껴 지원했다'라는 설보다는 다른 설이 좀 더 설득력 있다. 레콘키스타 이후 스페인은 지중해 무역이 오스만 투르크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득세로 인해 설 자리가 그닥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했고 또한 옆나라 포르투갈이 항해왕 엔리케를 필두로 서아프리카 지역을 탐사 및 개발해서 막대한 이득을 챙기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5] 따라서 여왕은 신항로 개척이 나라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꺼라 내다보았고 이 때문에 콜럼버스의 탐험계획과 요구를 살라망카 대학을 포함한 스페인 학자층, 그리고 정부부처가 격렬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했던 것이다.

다만 여왕이 남편인 페르난도 2세와는 무관하게 개별적으로 밀었던 탐험이라 후에 신대륙에서 막대한 이득이 스페인으로 몰려왔을때 덕을 보는 쪽은 카스티야 뿐이었고 동시에 지중해 무역을 업으로 삼던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은 피박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지못미 카탈루냐...

2.1.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최초 발견자인가?

콜럼버스가 도달한 시점에 아메리카 대륙은 이미 원주민들이 바글대는 곳이었다. 따라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니 뭐니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10,000여 년 이전에 건너간 원주민들이 첫 발견자들이겠다.

유럽인 기준으로도 콜럼버스는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자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아메리카 대륙을 찾은 사람들은 콜롬버스 전에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바이킹은 L'Anse aux Meadows 유적의 존재로 아메리카 발견이 이미 입증되었고[6] 아일랜드 사람들이 아이슬란드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현 캐나다 동부)에 갔다거나, 프랑스의 노르망디 어부들 사이에서 캐나다의 래브라도 반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으며 , 바스크인들이 어업, 포경을 목적으로 북미 쪽 바다로 가거나 해안지역에 정착하기도 했고 심지어 콜럼버스조차도 자신의 항해일지에서 이름모를(일지일부가 소실되었다) 이에로 섬 출신의 사람이 카나리아 제도 서쪽에서 육지를 보았다고 진술했고 같은 일지에 1484년에 있었던 일을 인용하면서 마데이라 섬의 주민이 포르투갈의 국왕을 찾아가서 자신이 본 육지를 언급하면서 지원을 요청했다고 일지에 쓰고 있다.[7]

2.2. 콜럼버스는 지구 구형론의 선구자였는가?

위인전에선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한 줄 알고 콜럼버스의 탐험에 반대했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런 잘못된 역사적 인식들을 '플랫 에러'라고 한다.

사실 이건 19세기 소설가 워싱턴 어빙의 소설의 묘사일 뿐이다.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고대 그리스 시절에 발견된 사실이었고 이미 콜럼버스의 시대에서 1700년도 더 전에 지구가 둥글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방법으로 지구 둘레의 계산까지 구한 기록이 있다. 물론 측정의 오차야 어느 정도 있었지만, 이는 당시 학문과 기술의 미시적인 문제이지 대략적인 지구의 크기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갈릴레오 갈릴레이 일화도 천동설에 대한 논쟁이었지 지구 평면설과는 거리가 멀다. 지구 구형론에 대해서는 중세 시대 종교인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과 알마게스트의 주장을 토대로 하여 사실로 믿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원양 항해기술 자체가 지구가 둥글다는 전제 하에 발전한 것이었고, 바다를 끼고 사는 뱃사람들에게 있어선 상식이나 다를 바 없는 사실이 바로 '지구는 둥글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탐험을 거부한 이유는 콜럼버스의 매우매우 심각하게 틀린 거리 계산법 때문이다. 직선으로만 15,000km[8] 정도를 틀렸는데, 유럽에서 아시아, 즉 일본중국까지의 거리인 19,600 km를 3,700 km로 줄여버렸다. 콜럼버스의 계산대로라면 미국이 있어야 할 위치에 인도나 일본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신념으로 항해를 마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완벽히 빗나간 계산을 가지고 항해를 한 것이다. 때문에 콜럼버스 이전에도 아시아 탐험대를 여러 번 조직해봤던 포르투갈이나 잉글랜드, 제노바 정부 입장에서는 어디서 굴러온 이상한 놈이 맞지도 않은 이론을 들먹이면서 대규모 투자를 해달라고 징징대는 모습이 기가 차서 그를 사기꾼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1차 탐험대 선원들도 정규 선원들이 아닌 죄수들로 구성된 이유도 상식선에서 이런 어처구니 항해를 했다가는 대서양에서 플라잉 카스티야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를 반대한 사람들은 당시로서도 지금[9]으로서도 매우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모르던 당시 상식선에서 사람들은 콜럼버스 일당이 대서양 방향으로 가다가 나중의 행패를 생각해 보면 정말 다행히도 인도에 가기는커녕 조선이나 일본까지도 못 가고 말라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당시 선박 규모와 항해 기술력으로는 사실이었다. 만약 아메리카 대륙이 하와이이스터 섬 정도의 위치에 있었더라면 콜럼버스 선단은 굶주림과 괴혈병으로 전멸하거나 선상반란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일주 선단도 훨씬 더 큰 규모의 선단으로 콜럼버스의 가설보다 훨신 짧은 항해를 했음에도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수십 명의 사람들만 간신히 살아 돌아온 것을 생각한다면 콜럼버스가 얼마나 허황된 꿈을 가지고 항해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를 두고 콜럼버스가 투자를 위해서 사기를 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1차 원정대에 자신도 동행했고 언급했다시피 콜럼버스 본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당도한 곳을 인도로 믿은 걸로 보아 사기를 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자신이 발견한 곳이 인도 본토는 아니었을 것 정도는 인지했을 거란 주장이 많다. 인도랑 무역을 얼마나 오래 했는데 설마 몰랐을까 이는 당시 유럽인들의 인식도 그러했는데, 허나 그렇다 해도 기껏해야 아시아의 동북부 지역 정도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고 아시아도 유럽도 아닌 전혀 별개의 대륙이라는 사실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이탈리아 항해사인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메리카 대륙을 아시아가 아닌 신대륙으로 선포할 때까지 사실로 받아들여졌다.[10] 이 대륙의 이름은 콜럼버스가 아닌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딴 아메리카라고 이름지어졌는데, 당대 유행한 어느 책에서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신대륙의 발견자라는 헛소문이 돌았고, 당대의 지도학자가 그 책에 낚여서 대륙이름에 이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이것도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닌 리처드 아메리크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근거는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메리카에 오기 2년 전에 이미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지명이 문헌에 나오고 당시 지명은 사람의 이름이 아닌 성에 따라서 짓는다는 것.

카리브해를 한때 서인도 제도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역시 콜럼버스의 인도 항해를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여기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죽일려고 마음을 먹었을수도 있다..

3. 원주민 탄압 및 학살

문제의 2차 원정에서부터 콜럼버스의 탐욕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11] 우선 그는 1차 원정에서 돌아올 때 선원 30명 가량을 아이티에 남겨두고 스페인으로 돌아와 이사벨라 여왕에게 이번 원정에서는 엄청난 수의 노예와 금을 얻을 수 있다며 1차 원정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원조를 받아낸다.[12]

이렇게 2차 원정이 시작되었으나 막상 다시 아이티로 돌아와 보니 일전에 남겨놓은 30명 가량의 선원들은 병으로 죽거나 원주민들에 의해 죽어 있었다. 남겨진 선원들 중 살아남은 사람이 없어서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다만 이후 온 탐험가들이 생활하는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선원들이 한 사람당 최고 5명씩 원주민 여자를 거느린다거나 금을 찾기 위해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리다가 원주민들과 충돌해서 전멸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이 있다.

이후 콜럼버스는 안전을 위해서 호전적인 부족 뿐만 아니라 보통 원주민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한 마을에서는 700명 가량을 자비도 없이 모두 생포해 창칼로 찔러 죽였다. 그 후로도 학살은 계속 이어졌다.[13] 3, 4차 원정이 계속될수록 콜럼버스의 후계자들은 점점 더 잔인해져선 마스티프라고 하는 맹수사냥용 대형견을 데리고 와서 원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노예로 팔리거나 14세 이상의 원주민들은 석 달마다 콜럼버스가 제시하는 금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을 시 손이 잘리는 형벌을 받고 과다출혈로 죽어갔으며, 9살의 소녀부터 35세의 성인 여성들까지 강제로 은화 한두닢에 매춘부로 만들었다.

콜럼버스가 오기 전까지 30만명이었던 아이티 섬의 인구는 2년만에 10만 명이 죽고 나중에는 결국 500명 밖에 남지 않아 처음에는 원주민 노예들을 수출하다가 나중엔 흑인 노예들을 수입해 왔다. 하지만 흑인 노예들도 원주민 노예들처럼 얼마 안 가긴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위에서 서술되었듯이 콜럼버스 자신은 그 땅이 중국의 남서부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중국 황제나 황금 광산을 찾았지만 나올 턱이 없었다만약 진짜 중국이었는데 중국 황제가 자신의 국민들이 학살당하는것을 알면 좋아할까?.[14] 그리고 이 당대 중화대륙의 천자양반께서 바로.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73205&cid=820&categoryId=1944

http://en.wikipedia.org/wiki/Black_legend

다른 스페인 관리들이 본국에 이 학살을 알렸지만 당연하게도 본국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백인들의 눈에 원주민이나 흑인들은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았다.[15] 이후 콜럼버스는 죄수선에 실려서 소환되었다. 원주민 학살도 있지만 실은 그렇게 사망자를 많이 내고도 황금을 전혀 건지지 못했다는 점이 더 문제가되었다.

더구나 별로 건져온 것도 없는 주제에 자기가 정복한 땅의 총독 자리와 지도자 자리를 요구했으며, 해군 제독이라는 지위를 주장하면서 이것을 자식들에게 세습시켜 달라고까지 요구했고, 사업에서 얻은 이득의 1/10은 자신의 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주는 것도 없이 얻어만 먹으려는 심보였으니 그야말로 버틸 재간이 없었다.[16] 그 외에도 부하 선원이 발견한 섬을 자기가 발견한 것으로 협박을 해서 거짓 보고한 적이 많다. 그리고 그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왔던 원주민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노예 시장에 팔아넘긴 기록도 있다.

콜럼버스가 저지른 짓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꽤나 사악한 짓이었다. 오히려 학살자로 널리 알려진 에르난 코르테스가 훨씬 더 온건하게 통치를 했다. 비록 아즈텍 제국 때문이지만 자신에게 호의적인 원주민들은 확실히 보호했고 의도적인 학살도 많지 않었다. 그리고 적어도 코르테스는 충성을 맹세한 원주민을 보호하고 같은 스페인 백성이자 동족이라고 생각해 약속은 받아준 사람이고, 덕분에 (아즈텍에 대한 원한도 있었지만) 틀락스칼텍의 경우처럼 슬픔의 밤때 크게 진 코르테즈를 끝까지 지지한 원주민 세력도 나온다. 그리고 코르테스는 아즈텍의 인육공양을 막으려고 사재를 털어서 자기네 나라에서 돼지 60여 마리를 사다가 아즈텍에 선물하기까지 했다. 돼지라는 동물은 번식력이 끝장나게 좋아서 불과 60마리에 불과했던 코르테스의 선물이 단 3년 만에 3만 마리까지 불어났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그런 건 없었다. 야만인과 약속은 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결국 이런 콜럼버스에 견디지 못한 몇몇 부하들조차도 제 아무리 야만인이니 뭐니 해도 최소한 약속은 지켜야 하냐며 반발했고 심지어 그에게 덤벼들기까지 했다. 게다가, 몇몇 부하는 원주민들이랑 친해지기도 하고 원주민 여성과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낳으며 가정을 얻고 원주민들과 섞여 잘 지내던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콜럼버스는 이들 앞에서도 원주민들을 탄압하기 이르러, 1504년 1월에는 부하 일부와 원주민들이 손잡고 콜럼버스를 죽이려 들었는데 잠자다가 속옷 차림(...)으로 달아나 다른 스페인 주둔군에게 보호를 받아 살았다. 그 꼴을 본 스페인 군인들도 웃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리하자면 콜럼버스는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멀쩡히 살고 있는 옛 대륙을 침략,학살한 것이다.[17]

4. 몰락과 죽음

이후 간신히 탐험에 나섰지만 그의 후원자이던 이사벨 1세가 죽자마자 몰락하게 된다. 당연히 무수한 빚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결국 겨우 몇 해 사이에 그야말로 몰락하여 아들 디에고와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게 된다. 병명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으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콜럼버스의 시신 일부가 있다고 전해지는[18] 도미니카 공화국에선 당당하게 그가 매독으로 죽었다고 설명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이곳을 찾은 매독 연구 관련 책자 지은이에게 현지 길라잡이도 "그가 매독으로 죽었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그나마 이게 하느님이 내리신 작은 벌입니다."라고 조롱했다.

앞서 말했듯이 제3회 항해(1498∼1500)에서는 트리니다드 섬과 오리노코 강을 발견하였으나,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화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고 가장 힘든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1504년에 이사벨이 죽은 뒤 그의 지위는 더욱 하락하였으며, 그의 직책의 세습까지도 인정되지 않았다.[19] 심지어는 20세기 학자들조차 그를 학살자라고 비판했다. 만일 시튼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창작물이 나오면 아마 후손 놈한테 두들겨 맞아죽을 게 뻔하다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세상을 떠난 후 그곳에 묻혔던 콜럼버스의 유해는 1542년 대서양 건너편 산토도밍고로 이장되었고, 1795년 프랑스가 히스파뇰라 섬을 점령하자 아바나로 이장되었으며,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쿠바가 독립하자 다시 스페인으로 옮겨져 세비야 대성당의 남쪽 익랑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언인 '죽어도 스페인 땅 안 밟겠다, 마음대로 하셔!'를 고려하여 그의 은 현재 4명의 동상[20]에 의해 지면으로부터 붕 떠서 받들려 있다. 스페인이 이러한 무리수까지 두면서 그의 시신을 운구한 이유는 비록 그의 행적에 대한 여러 논란,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가 스페인의 황금기를 개척한 공로자였기 때문.

5. 콜럼버스의 교환

콜럼버스와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와 유럽의 동식물, 문화전파를 콜럼버스의 교환(Columbian Exchange)이라고 부른다.

결과적으로 유럽에서는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생산성 높은 작물들로 인구가 늘어난 반면, 아메리카에서는 유럽에서 가져온 전염병으로 원주민의 대다수가 사망했다.[21] 그리고 유럽입장에서는 정말 운좋게도, 아메리카 원주민은 치명적인 공기 전염병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22] 만약 그랬었다면 유럽 사람들도 아메리카 원주민같이 몰살당했을 것이다.

미대륙의 일부 토착민 출신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악마가 전한 작물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는데, 위와 같은 배경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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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아메리카

아메리카→유럽

동물

고양이, 낙타, , , 당나귀, 염소, 꿀벌, , 페릿, 거위, 토끼, 돼지, , 비둘기, 호로새, 물소

알파카, 밍크, 기니피그, 칠면조, 야마, 머스크오리, 연지벌레[23]

식물

아몬드, 사과, 살구, 아티초크, 아스파라거스, 바나나, 보리, 비트, 빌베리, 비터멜론, 후추, 브로콜리, 양배추, 케일, 콜리플라워, 방울다다기양배추, 오렌지색 메론, 카람볼라, 카다멈, 당근, 시나몬, 정향, 커피, 오렌지, 레몬, 오이, 대추야자, 아마, 무화과, 마늘, 아메리카머루, 헤이즐넛, 대마초, 키위, 상추, 망고, 기장, 귀리, 오크라, 넛메그, 올리브, 양파, 복숭아, 양귀비(아편), 완두콩, , , 피스타치오, 루바브, , 호밀, 대두, 사탕수수, 토란, , 순무, , 호두, 수박, 양조용 포도, , 목화, , 회전초, 녹두, 콜라나무

악키[24], 용설란, 선인장, 아마란스, 애로루트, 아보카도, 강낭콩, 검은나무딸기[25], 고추, 피망, 블루베리, 치클, 캐슈넛, 치아시드, 번련지, 체리모야, 커스타드 애플, 크랜베리, 코카나무, 카카오, 구아바, 허클베리, 해바라기, 돼지감자, 옥수수, 지카마, 카사바, 파파야, 패션프루트[26], 땅콩, 피칸, 파인애플, 감자, 호박, 퀴노아, 고무나무, 사포딜라, 딸기[27], 고구마, 담배, 토마토, 바닐라, 야생쌀[28], 마떼, 실유카, 주키니

병균

수두, 페스트, 콜레라, 감기, 디프테리아, 인플루엔자, 한센병, 말라리아, 홍역, 성홍열, 장티푸스, 천연두, 발진티푸스, 백일해, 황열, 매종(pian, 혹은 Yaws)[29]

베젤(= 풍토성 매독), 열대성 백반피부염, 샤가스병, 매독, 필록세라

한편 해외의 일부 네티즌들은 만약에 빈란드로 떠난 바이킹들이 정착에 성공해서 지금보다 약 500년 일찍 교류가 이루어진다면 하는 가정에 대한 대체역사적인 상상을 제기한 적도 있다. #[30]

6. 의의

"콜럼버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목적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닻을 올렸다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

비록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인류 최초 '발견자'도, '유럽인 최초 발견자'도 아니지만, 이것이 콜럼버스의 항해의 역사적 가치를 낮추지는 않는다. 처음으로 아메리카 원주민수탈관계를 맺고 유럽-아메리카 교류의 물꼬를 튼 사람이 콜럼버스다.[31] 위의 상륙은 모두 일회성에 그쳤지만, 그는 첫 상륙 이후로도 그 후에도 4번의 항해를 했다. 이를 증명하듯 한동안 유럽인 위주로 사회가 작동되던 아메리카 대륙, 특히 미국에는 콜럼버스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다. 미국을 시적으로 표현할 때에는 아메리카 대신 콜럼버스에서 여성형 어미를 붙인 컬럼비아(Columbia)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는 미국 수도 워싱턴의 공식 명칭인 컬럼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 D.C.)에서 쓰이고, 캐나다브리티시 컬럼비아를 비롯, 수많은 지명에서 컬럼비아라는 말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오하이오 주 내에도 콜럼버스라는 도시가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콜럼버스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다. 콜롬비아 공화국이 이러한 지명의 사례로 가장 유명하고, 콜럼버스의 스페인식 이름인 콜론이라는 지명도 파나마 등 여러 나라에 있다.

콜럼버스의 이 항해는 세계패권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설탕 때문이었다. 서인도제도에서 가져온 설탕은 이 발견 이후 영국의 황실부터 일반 노동자 계층까지 사용하는 최고의 사치품이 되고, 은은 그 당시 명나라가 조세를 은으로 하게 되면서 중국의 은 수요가 늘어났는데 이 때 스페인이 포토시 언덕에서 채굴한 은을 교역에 사용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된다. 스페인은 설탕과 은을 교역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그 부를 군사력에 투자하여 교역로를 지키는 강한 해군을 양성할 수 있었다. 즉 콜럼버스의 잘못된 계산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10월 12일 그의 아메리카 '발견'을 기념해 남북 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기념일로 지정되어 있고, 일부 나라에서는 공휴일이다. 미국에서는 매년 10월 둘째 주 월요일을 콜럼버스 데이라 하며 기념한다. 기념일이나, 쉬어도 되고 안 쉬어도 되는 기념일로 지역에 따라 공휴일이기도 하고 그냥 기념일이기도 하다. 웬만한 직장/학교는 이 날 안 쉬는 지역에서 만약 이 날 쉬는 곳이 있으면 '우리 직장/학교는 널널합니다 ^^'라 말하는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일부 지역은 공휴일이므로 직장/학교도 다 쉬게 되어 있다.

그러나 아메리카 원주민의 근현대사 인식이 알려진 이후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급속히 추락했다. 원주민에게 콜럼버스는 원주민 수천 명을 학살하고 노예로 팔아치웠으며, 각종 재물을 약탈해간 인간쓰레기, 천하의 개쌍놈이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그의 탐험 이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몰려들어 원주민에 대한 핍박, 학살, 탄압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하와이, 알래스카, 사우스 다코타, 그리고 오레건 에서는 콜럼버스 데이가 없는데, 하와이와 알래스카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과 관계가 없는 지역이고, 사우스다코타는 이름의 유래에서 보듯 원주민이 많은 지역이라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이며, 오레건은 바로 윗동내이자 같은 북서부 경제권역을 구성하는 워싱턴 주 시애틀과 비슷한 시기에 콜럼버스 데이 기념을 중단했다. 워싱턴 주의 중심도시 시애틀은 그 어원 때문에라도 쉬지 않고, 주 전체는 아니더라도 시애틀과 그 주변 카운티에서 기념을 중단하였으며, 주 공휴일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다. 그 외에도 아이오와네바다에서도 공식적으로 그런 날이 있다는 걸 알리기는 하나, 쉬거나 기념하지는 않는다.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는 이 날을 "종족의 날(dia de la raza)"이라고 하는데,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이 처음 만난 것을 성대하게 기념하는 것으로 여러 나라에서 공휴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왜 그런 개쌍놈을 기념하느냐며 학을 떼기도 한다.

최근 들어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의 날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스페인에서는 콜럼버스가 미 대륙에 도착한 10월 12일Fiesta Nacional이라는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잘도 이런 미친 짓을! 1935년부터 국경일로 기념되기 시작했으며, 1987년 이전까지는 그 명칭이 인종의 날(Día de la Hispanidad)이었다고 한다. 독립선언일이나 정부수립일, 혁명일을 국경일로 정한 주변 국가들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날이 되면 마드리드 시가에서는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열병식이 거행된다.

7. 기타

아들이 둘 있었는데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디에고는 아버지의 직책을 명칭만 이었지만 손자인 루이스는 스페인 국왕 카를 5세[32] 로부터 베라과 지역[33]을 봉토로 받음으로써 1대 베라과 공작(Ducado de Veragua)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베라과 공작위를 이어 현대까지 내려오고 있다. 조상이 조상인지라 이쪽에서는 해군이나 해운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나온다고 하는데, 17대 공작 크리스토발 콜론 데 카르바할 이 마로또 (1925~86)는 해군 중장까지 지냈는데 ETA의 테러로 암살당했다. 현직인 18대 공작(1949~)도 해군 중장을 지냈었다.

한편 콜럼버스의 다른 아들 하나는 첫 부인 사후 내연녀와의 관계에서 나왔는데, 이사벨라 여왕의 시동으로 들어가 궁정 신하로 출세하게 된다. 다만 아버지와 달리 그냥 관리로 살았다. 참고로 책벌레였던 탓에 이 사람이 가진 도서 컬렉션은 지금도 스페인에서 알아준다고 하며 콜럼버스의 전기를 최초로 쓴 사람이기도 하다.[34]

달걀의 아래쪽 껍데기를 살짝 깨뜨린 다음 똑바로 세워, 신항로 개척이 불가능할 것이라던 사람들을 데꿀멍시켜버린 일화로 유명하지만 사실 달걀을 세운 것은 콜럼버스가 아닌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라는 이탈리아의 건축가다.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설계를 공개했던 당시 일어난 일이라는 것.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명확치 않으나 콜럼버스의 달걀을 세운 일화가 와전되어 만들어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 소프라노소 시즌3에서 이탈리아인들이 콜럼버스에 대해 갖는 감정이 어떤 것일지 알 수가 있다.

세계적인 물류기업인 DHL에서는 업계 최초로 해외발 미국행 항공 특송 서비스를 시작했다는 자사의 기록을 홍보하기 위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을 테마로 재밌는 광고를 만들었다. 대략적인 내용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고 기뻐했는데, 이미 DHL 배달원이 콜럼버스를 한참 기다리고 있었으며 한국에서 온 물건인데 확인해 달라고 콜럼버스에게 서명을 부탁했다. 마지막에 콜럼버스가 DHL이 전달해 준 물건이 뭔지 박스에서 꺼내보니 다름아닌 모터보트 엔진(...) 이 CF는 원래 1998년에 호주에서 제작된 CF를 1년 뒤인 1999년 당시 DHL의 한국 대리점 역할을 했던 일양 익스프레스에서 수입하여 우리말 더빙과 자막 편집만 거쳐 그대로 방영한 것으로, 원판 CF에서는 배달원이 싱가포르에서 온 물건이라고 말했다. 참고로 한국판 CF에서 배달원의 목소리 더빙을 맡은 성우강수진이다.

그래도 바르셀로나에서는 영웅시되는 모양이다. 다만 본문상단에도 적혀 있지만, 콜럼버스의 행적은 카탈루냐에 이득이 가는 결과물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카탈루냐가 스페인에 흡수합병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면 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를 밀어주는건 아무래도...

외계인의 지구방문(혹은 침공)이 주제로 나올때 흔히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사건을 많이 빗대어 말한다. 그 예로 스티븐 호킹은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외계인은 콜럼버스, 지구인은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주로 진출할 기술력이 아직 부족해서 망정이지 그럴 힘이 있었다면 인간들은 진작에 온 우주를 누비면서 깽판을 쳤을 것이다

신대륙을 밟을 당시의 육성 기록이 전해진다 카더라

8. 창작물

8.1. 영화

적어도 세 편의 영화화가 이뤄졌다.

가장 걸작은 프레드릭 마치가 주연한 1949년 영화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40년대 말 영화치고는 남미 원주민들의 학살 등의 이야기도 중립적으로 다루고 있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흥행은 그리 안 좋았는데 20만~30만 파운드로 만들어 12만 1천 파운드를 벌어들였다.

1992년, 그의 미국 대륙 서구권 발견 50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영화가 두 편이 있는데 하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er Columbus : The Discovery)가 먼저 개봉했다.

유어 아이스 온리부터 살인 면허까지 다섯 편의 007 시리즈를 연출한 존 글렌이 감독을 맡고, 그리스계 프랑스 배우인 조르주 코라파스가 콜럼버스로 나오고 인디아나 존스가 될 했던 톰 셀릭(그는 이걸로 골든 라즈베리 최악의 남우조연상을 받았다...)이 페르난도 왕, 레이첼 워드가 이사벨라 1세 여왕으로 나오고 말론 브란도가 종교재판관 토르케마다 추기경으로 나왔다. 그밖에 캐서린 제타 존스가 콜럼버스의 두번째 아내로, 베니치오 델 토로도 나왔으며 슈퍼맨 시리즈를 제작했던 살카인드 부자가 제작을 맡았다. 워너브라더스가 배급을 맡은 이 영화는 1992년 8월 21일에 미국에서 개봉했는데 4500만 달러를 들여 만들어 전세계에서 8500만 달러를 벌어 흥행은 실패했으나 같은 시기 개봉한 경쟁작인 1492 콜럼버스보단 약간 더 흥행은 했다...이걸로 위안을 한국에서는 개봉도 못하고 비디오로만 먼저 나왔으며 나중에 공중파로 더빙 방영했다.

또하나는 당시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작품으로 리들리 스콧이 감독,공동 제작하고 제라르 드파르디외(콜럼버스 역)와 시고니 위버(이사벨라 여왕 역)가 출연한 《1492 콜럼버스》(원제 : 1492 Conquest of paradise)이다. 1992년 10월 9일에 북미 개봉을 했는데 고증오류도 적지 않지만[35] 원주민에 대한 착취와 학대 등의 어두운 측면도 다루어 균형잡힌 시각을 유지하려 애썼다는 점에서 꽤 볼만한 작품. 다만 영화 내에서 콜럼버스 개인에 대해서는 무척 호의적이고 역사와 안맞는(원주민들에게 너그러운 유화책을 편다던가... 대신 동행한 에스파냐 귀족들이 착취와 학대를 저지르고 콜럼버스와도 충돌하는 것으로나타난다.)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은 주의할 점이다. 4700만 달러를 들여 만들었으나 전세계 흥행 다 합쳐서도 7천만 달러를 겨우 넘겨 본전치기조차 실패했다.

한국에서는 영웅인가? 약탈자인가? 라는 문구를 달고 199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봉했으나 서울관객 33,700여명에 그쳐 아카데미상 독점이 물건너갔다한국에서도 망했다. 여하튼 92년작 두 영화 모두 흥행은 실패하고 지금은 잊혀졌다.

'1492 콜럼버스' OST.

다만 반젤리스가 작곡한 OST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음악은 의외로 거대한 건축물 등을 보도할 때 배경음악으로도 많이 쓰이는데, 가끔 몇몇 다큐멘터리나 뉴스 등에서 바다나 큰 강 등에 송전탑이 줄줄히 늘어선 송전선로나 큰 철탑 등을 건설한 소식을 보도하면서 그 위용을 보여주는 씬에서 많이 사용하는 배경음악이 바로 이 음악이다(...). 그래서 큰 송전탑이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이 나오면 자연스레 이 음악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필립 글래스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기를 '항해' 제하의 오페라로 작곡했다.

유비소프트의 동명의 게임을 원작으로한 영화 어쌔신 크리드에선 어쌔신 크리드 2: 디스커버리 이후 행적이 등장한다. 스페인 암살단의 암살자 아귈라가 선악과를 손에 얻고 난 후 신대륙으로 출항할 준비를 하던 그를 찾아와 선악과를 숨겨달라 부탁하며 무덤까지 가져가달라 한다. 에지오의 도움을 받은 이후 암살단의 협력자가 된 콜럼버스는 이를 받아들여 숨긴 뒤 자신이 죽을때 무덤으로 같이 가져간다.

8.2. 게임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게임인 어쌔신 크리드 2: 디스커버리에서 출연한다.

새로운 항로 개척을 위한 자금을 구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왔다가 로드리고 보르지아의 함정에 빠져 잡힐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에지오의 도움으로 탈출하고 같이 스페인으로 떠난다. 에지오의 도움으로 이사벨 1세의 협력을 얻게 된 그는 항해를 준비하며 암살단의 협력자로 남는다. 이후 행적은 위 영화 항목에 서술.

에로게 영웅전희에서는 모에화되어 USA의 수장으로 등장하며, 플레이어와 세력이 인접하면 80.000골드와 자신의 영토를 교환하자는 이벤트를 볼 수 있다. 이 때 제안에 따라 영토를 구입하거나 제안을 거절한 후 USA를 멸망시키면 동료로 영입할 수 있다.

대항해시대 5에서는 라몬의 해도에 감춰진 비밀을 해명하기 위해 항해한 주인공 일행이 제노바에서 프랑스 서해안의 해도 2를 얻기 위해 찾아오자 자신을 박대한 포르투갈 소속 사람이라는 이유로 매몰차게 쫓아내면서 국적을 바꾸라고 했으며, 주인공 일행이 쥬피톨 에르난데스에게서 받은 잉글랜드 국적 증명서를 가져오자 주인공 일행에게 해도를 건네준다.

주인공 일행이 메르카토르로부터 라몬이 카보베르데에서 서쪽으로 향했다는 것을 듣고 신대륙으로 향했다고 생각해 콜럼버스를 찾아가는데, 주인공 일행이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하자 콜럼버스는 자신이 찾은 것은 인도라면서 화내면서 주인공 일행이 이야기를 제대로 하기 전에 쫓아낸다. 주인공 일행이 토스카넬리에게서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대해 언급한 것에 대해 기분 나쁜 이유를 들은 후에는 니나의 설득으로 주인공 일행과 항해를 하면서 파리, 이스탄불, 케이프타운, 누비아 거점 등을 다녔다.

Fate/Grand Order에서는 1.5부 2막에서 라이더로 나오는데, 가감없는 악당으로 나오고 고증에도 충실하며 성능카오게이도 나름대로 괜찮아서 호평을 받는다.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4에서는 이벤트에 의해 2/2/6/0의 탐험가로 등장한다.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올랜덤 인물전에서는 F급 영웅으로 등장한다. 오버로드라서 F급 영웅 중에서는 가장 쓸만하지만 워낙 약해서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


  1. [1] 콜럼버스의 정식 초상화로 알려진 이 그림은 콜럼버스의 초상화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 일단 당대 기록과 얼굴이 다른 셈. 다만 기록과 대단히 비슷한 류의 초상화는 하나 있긴 하다.
  2. [2] 물론 직접적으로 겪은 중남미쪽이 주로 그렇다는 말이고 유럽이나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까지도 위인전집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물론 위인전집 자체가 꼬꼬마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초점은 주로 그의 도전 정신에 맞춰지며 원주민들에 대한 탄압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3. [3] 후술하지만 사실 당시의 사람들도 아리스토텔레스 덕에 지구가 둥글다고 알고 있었다.
  4. [4] 당시 스페인은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동군연합이었는데, 이사벨 1세는 카스티야 국왕이었다. 카스티야가 아무래도 아라곤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다. 물론 성과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카스티야는 대서양에, 아라곤은 지중해에 접하고 있어서 대항해시대 이후 아라곤은 찬밥신세가 된다.
  5. [5] 당시 포르투갈은 아직 인도 항로를 개척하지 못했다. 콜럼버스의 첫 탐험 이후 1494년에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단이 이를 성공시킨다.
  6. [6] 빈란드 항목 참조.
  7. [7] 출처: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종훈(역), 콜럼버스 항해록, 1492년 8월 9일 일지
  8. [8] 한국베네수엘라콜롬비아의 거리와 비슷하다.
  9. [9] 400여년 후 수에즈 운하 개통으로 스페인에서 인도는 바닷길로도 10,000km 이내로 가까워졌지만, 이미 당시 아프리카 해안선을 따라 돌아가는 것보다도 대서양을 따라 쭉 돌아가는 거리가 거의 2배 가까이 더 멀다(...)
  10. [10] 그러나 아메리고의 항해 중 일부는 논란이 있다.
  11. [11] 1차 원정에서는 콜럼버스가 유럽으로 보낸 기록을 보면 원주민들을 우호적이고 영리하다고 묘사하고 있으나, 2차 원정 때부터는 멍청하고 폭력적인 야만인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12. [12] 1차 원정 때의 선박수는 여왕에게 대여받은 3척과 아는 사람에게 빌린 1척 도합 4척이 전부였다. 하지만 2차 원정 때는 17척으로 원정을 시작했다. 선원들은 1차, 2차 모두 사면을 미끼로 범법자를 모집하기는 했지만 2차는 전직 군인들도 모집함으로써 원주민들을 족칠 전력을 모은다. 실제로 대포, 갑옷 등 무기를 들고 갔다.
  13. [13] 아무리 순진무구한 원주민들이라도 저항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 원주민들은 철의 주조법을 알지도 못했고 로 만든 무기들을 가지고 싸웠으니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덧붙여서, 저항하다가 붙잡힐 시 불태워졌기 때문에 패배에 직면했을 시 독약을 먹고 자살을 했다.
  14. [14] 포르투갈이 처음 명나라와 접촉했을 당시 포르투갈인들은 으레 다른 식민지에 그랬듯 중국에도 거점을 만드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태평양의 군도 국가들과는 달리 동북아 3국은 영토에 매우 민감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인들이 축성 시도를 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쫓아냈다. 만약 콜럼버스가 명나라 땅에서 그런 행패를 부렸다면 무력으로 토벌당했을 것이다. 아메리카와는 달리 동북아시아는 당시 유럽에 무력으로 밀리지는 않았다.
  15. [15] 스페인에서 원주민(인디오)들을 최소한 '인간'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건 콜럼버스 이후 라스 카사스와 같은 사람들에 이르러서였고 흑인이 그 정도의 대접을 받으려면 그보다 좀 더 시간이 흘러야 했다.
  16. [16] 빌 브라이슨은 1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콜럼버스처럼 몰락하려면 대단한 무능과 오만이 필요한데 콜럼버스는 그 두 가지 모두를 갖추고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17. [17] 참고로 콜럼버스의 아들은 노예상인(...)이 되었다고 한다.
  18. [18] 물론 확실한 인정을 받은 건 아니다. 되려 과학적인 조사를 거부하고 있어 의심을 많이 받는다.
  19. [19] 다만 실제적인 직책의 세습은 인정되지 않았지만 명칭은 대대로 가지게 된다.
  20. [20] 관을 들고 있는 앞의 두 사람은 그의 항해를 지지한 두 왕, 뒤에서 고개 숙이고 짊어지고 있는 두 왕은 항해 지원을 거절한 두 왕이다. 옷차림에 상징물이 있기 때문에 알아보기 편하다.
  21. [21] 그나마 메스티소(백인-원주민 혼혈)로 피가 이어진 경우는 많으나 문화적으로는 유럽에 가까운 경우가 대부분이고, 원주민 인구가 많은 곳(볼리비아, 멕시코, 페루)도 19-20세기의 급속한 인구증가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북미나 카리브,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경우는 메소티소의 인구비율도 적어서 원주민의 피가 이어진 경우가 많지 않다.
  22. [22] 매독은 성접촉을 통해 전파된다.
  23. [23] 이 벌레에 추출해서 빨간색 염료와 천연색소로 쓰이고 있으며 고대 잉카시절부터 사용되었다. 현재는 딸기우유등에 첨가해서 사용하고 있다.
  24. [24] ackee. 자메이카 원산의 과일
  25. [25] 블랙베리
  26. [26] 시계초의 일종
  27. [27] 정확히는, 오늘날 우리가 먹는 딸기의 교배친들. 유럽에도 동속이종의 야생 딸기는 존재하였다.
  28. [28] 벼 종류는 아니고, 줄의 한 종류이다.
  29. [29] 열대 피부병
  30. [30] 특히 옥수수 같은 경우를 말하자면 옥수수의 전신이 되는 식물인 테오신테는 오늘날 옥수수와는 다르게 곡식이라고 볼 부분도 거의 없고, 너무 단단한데다 작았는데 오늘날처럼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모양이 변한건 12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만약에 서기 1000년에(10세기 ~ 11세기) 옥수수가 빈란드에 거쳐 유럽으로 일찍 전래되었다면 아마도 미대륙과 다르게 테오신테와 비슷하게 원형에 가까운 보존된 모습으로 유지되지 않을까하는 재밌는 가설도 제기했다.
  31. [31] 제임스 로웬이 쓴 Lies My Teacher Told Me 참조.
  32. [32] 스페인 국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
  33. [33] 현재 파나마의 베라과 지역. 선조의 업적을 주장하며 상당한 영토를 주장하는 콜럼버스의 후손들과 스페인 왕실간의 오랜 갈등을 봉합하기 위하여 일단 명목상 영토인 미정복지를 던져주고 알아서 정복하라고 작위를 내렸다. 1대 공작인 루이스 콜론은 파나마쪽으로 가서 자신의 통치권을 확립하려 했지만 원주민의 반발과 악천후 등으로 실패하고 20년만에 스페인으로 복귀하면서 봉토를 반납하는 대신 작위의 보존과 연금을 받기로 하였다. 참고로 내려진 봉토가 완벽한 정사각형이었다.
  34. [34] 리들리 스콧의 영화에는 콜럼버스는 인정도 못 받다가 이 아들의 전기로 진가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건 오류이다. 적어도 당대에는 연대기 작가들 중에 콜럼버스를 찬양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35. [35] 예를 들자면, 1492년 항해에 나서기 전 콜럼버스 자신이 아프리카 희망봉 경유 인도행 항로 얘기를 언급하는데, 실제로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행 항해가 성공한 건 그로부터 6년 뒤(1498년)이다. 그리고 추가 항해를 준비하던 동안 자신이 "발견"한 "신대륙"이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고 명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지만 (대륙의 이름을 아메리카라고 지어 소개한 책자는 이미 발표되어 있었던 시점이었으나) 이제 막 탐사를 시작한 당시의 시점에서 아메리카라는 지명이 확정되어 보편화되었을지는 의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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