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전쟁

크림전쟁

날짜

1853년 10월 ~ 1856년 3월 30일

장소

러시아 제국 크림 반도, 캄차카 반도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프랑스 제2제국
영국
오스만 제국
사르데냐 왕국

러시아 제국
불가리아 군단

지휘관

나폴레옹 3세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빅토리아 여왕
윌리엄 윌리엄스 경
조지 해밀턴고든
헨리 존 템플
압뒬메지트 1세
오마르 파샤
카밀로 카보우르

니콜라이 1세
알렉산드르 2세[1]
파벨 나히모프†

병력

프랑스군 30만 명
영국군 10만 명
오스만 제국군 16만 명
사르데냐 왕국군 2만 1천명
총합 60만 명

러시아군 70만 명
불가리아군 4천 명
총합 704,000명

피해 규모

23만 명 사망

522,200명 사망

결과

프랑스, 영국, 오스만 제국 연합군의 승리

기타

파리조약 체결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러시아 제국의 패배
4.1. 러시아: 개혁의 시작
4.2. 오스만 제국
5. 영향
5.1. 러시아 제국: 사방이 적
5.2. 프로이센 왕국: 최대 수혜자
5.3. 오스트리아 제국: 이탈리아의 손실, 가장 큰 피해자
5.4. 사르데냐 왕국: 최대 수혜자2
5.5. 그리스 왕국: 욕심부리다가 피해막심
5.6. 전쟁 기술
6. 여담

1. 개요

2시간 전만 해도 고결하거나, 비열하거나, 가지가지의 꿈과 욕망에 차 있던 사람들이, 몇 백의 사람들이, 이제는 피범벅이 된 굳은 손발을 팽개친 시체가 되어, 능보에, 참호에, 이슬이 촉촉이 내린 꽃이 만발한 골짜기에, 세바스토폴의 장례 교회의 마룻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어제와 그대로였다. 샛별은 사푼 산의 산마루 위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깜박이던 별들은 서서히 하얘져 갔다. 불타오르는 듯한 진홍빛 아침 노을이 동쪽 하늘 한쪽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자줏빛의 긴 구름이 엷은 야청빛 지평선을 따라 흩어져 달려갔다. 모든 것은 어제와 그대로였다. 장대하고 아름다운 태양이, 생기에 찬 온누리에 사랑과 행복을 약속하며, 또다시 둥실 떠올랐다.

- 레프 톨스토이, 세바스토폴 이야기

1853년부터 1856년 3월 30일까지 약 3년간 러시아 제국에 맞서 오스만 제국,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4국 연합국간에 벌어진 전쟁. 전쟁 이름은 전쟁 중후반기 이후의 주전장인 크림 반도에서 따온 것으로, 크림 반도 이외에도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1877~78년의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또 있기 때문에 상호 구분을 위해 제1차 동방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나이팅게일 위인전을 읽은 사람들, 간호학도들이라면 뭔지는 몰라도 이름쯤은 한번 들어봤을 전쟁.

2. 배경

근본적인 배경은 러시아의 지중해 출구 확보 문제였다. 러시아는 1771년 크림 칸국을 정복한 이래 크림 반도를 거점삼아 흑해에서 세력확대에 나섰다(남하정책). 16세기 이래 흑해는 오스만 제국의 바다였는데, 크림 반도를 확보한 러시아는 이 지역에 요새와 항구를 건축하고 해군을 양성하며 본격적인 남하를 시작한 것이다.

동유럽과 캅카스를 놓고 수백년간 충돌해온 앙숙관계인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 와중에 잠시 對프랑스 동맹의 일원으로 손을 잡았지만 나폴레옹 몰락 이후 다시 적대관계로 변했으며, 러시아는 동방정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오스만 제국 치하 동방정교회 교도들에 대한 보호 등을 구실로 오스만과 사사건건 충돌하며 보스포로스, 다르다넬스 양 해협의 통행권 확보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은 나폴레옹 몰락 이후 최대 주적으로 급부상한 러시아의 해양진출을 호락호락 지켜보지 않았다. 영국은 1838년 오스만 제국과 불평등한 통상협정을 맺어 오스만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한 뒤, 오스만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군사·경제·정치·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했다. 결국 1841년, 이집트 문제의 사후처리를 위해 주요 당사국인 오스만과 러시아, 여기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까지 끌어들인 영국이 런던 해협조약을 체결, 오스만 제국의 보스포로스, 다르다넬스 해협 통제권을 국제적으로 공인시켰다.

한편 1850년대 쿠데타를 통해 제정을 부활시킨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국내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할 속셈으로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 성지관할권, 요컨대 예루살렘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적 권리를 요구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이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이자 러시아는 이전부터 동방정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성지의 관할권을 요구하고 있었던 차에 프랑스의 요구 관철이 러시아의 지금까지의 요구와 정면으로 충돌, 때문에 프랑스는 슬라브 교회의 압력에 대한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요구하게 된다.

영국의 압력으로 일단은 해협 통제권을 포기했지만 러시아는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접한 캅카스발칸 반도 지역에서 계속적으로 국경분쟁을 유도하며 국지적 분쟁을 전면전으로 확대시킬 기회를 엿봤다. 결국 1853년 7월, 러시아가 오스만에 예속된 도나우 강 연안의 공국들을 공격,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일촉즉발의 위기가 터졌다.

오스만 제국은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리즈시절의 위엄을 오래 전에 잃어버리고 유럽의 왕자에서 유럽의 환자로 전락했기 때문에 누구도 러시아의 위협에 정면 도전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남하정책 관철을 용납치 않았던 영국은, 전면적인 참전을 포함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오스만 정부에 강경대응을 권유했다. 또한 오스만 정부도 도나우 강 유역의 속국들을 내주면 수도인 이스탄불까지 코 앞인 터라, 러시아의 계속되는 남하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군사적으로 이를 격퇴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전쟁을 결심했다. 여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교회 및 성지 관할권을 놓고 러시아와 경쟁하던 프랑스 제국도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과 손을 잡았다.

결국 1853년 10월 4일, 오스만 제국러시아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3. 전개

기세등등하게 선전포고한 것은 좋았으나, 골골거리는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나폴레옹을 꺾었다고 자부하며 한껏 기세가 오른 러시아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1853년 11월 30일, 시노페 해전이 일어났다. 소아시아 북부의 항구 도시인 시노페에서 벌어진 이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은 러시아 해군에게 참패, 11척의 함선 중에서 단 1척의 코르벳만이 살아남아 도망쳤다. 뒤이어 캅카스에서 일어난 국지전에서도 오스만군은 러시아군에 참패해서 후퇴해야 했다.

해가 바뀐 1854년, 시노페 해전으로 궤멸한 오스만 해군을 대신하여 영·프 연합 함대가 흑해에 진입, 오스만 제국의 흑해 통상로를 보호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프 양국은 3월 28일,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선전포고하고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이에 당황한 러시아는 공세를 중단하고 방어전으로 전환했다.

같은 해 9월, 영·프·오 3국 연합군 20만이 크림 반도에 상륙했다. 이를 요격하려던 러시아군은 알마 강 전투에서 패했다. 10월 17일, 크림 반도의 핵심 전략요충지인 세바스토폴 요새가 연합군에 포위당했다. 포위된 요새를 구원하기 위한 시도가 곳곳에서 이루어졌으나 모두 연합군에게 격퇴되었으며, 오히려 연합군은 아조프 해 연안에 위치한 러시아군의 다른 요새를 추가적으로 포위 공략하는 등의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1855년 1월에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훗날의 이탈리아 통일에 있어 열강의 지원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러시아에 선전포고, 연합국에 가담하였다. 사르데냐 왕국은 약 1만의 병력을 파병했는데, 연합군 사이에서 비교적 유능한 군대로 평가받았다.응?

1855년 3월 2일 러시아 제국의 차르 니콜라이 1세의 서거로 러시아의 사기가 꺾였고,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가늠자였던 세바스토폴 공방전은 시간이 갈수록 러시아에 불리해졌다. 비록 그러는 동안 발라클라바 경기병대의 돌격같은 개뻘짓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연합군의 압도적 우세에 있었고, 마침내 9월 11일 세바스토폴 요새가 함락되었다.

핵심 전선인 크림 반도에서의 결정적 승리로 전세는 연합군에게 완전히 기울었다. 여기에 영국은 그 특유의 전방위적 공격을 단행했다. 태평양 방면에서는 캄차카 반도의 요충지인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2차에 걸쳐 공격해 점령했다.[2]

아울러 발트 해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최초로 영국 함대가 작전을 개시해 핀란드 남부 해안과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요새들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고, 요새들은 포격에 무참히 박살났다. 러시아 함대는 대응은커녕 제대로 요격조차 하지 못하고 영국 함대의 페테르부르크 진입만 겨우 저지했으며 백해에서도 영국 함대가 출몰해 아르항겔스크 등을 포격했다. 자국령의 주요 항만에 가해지는 영국의 전방위 공세에 러시아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3]

1856년이 되자 러시아는 전쟁 수행 의지를 상실했다. 병력 손실은 급격하게 늘어 갔고, 국가 재정도 나빠졌으며 전세 악화에 따른 민심 이반도 심각했다. 연합군이 크림 반도를 넘어 우크라이나 지방까지 밀고 올 가능성이 있었으며, 수도 일대의 해상 물류는 영국 해군의 봉쇄로 마비당했다. 여기에 오스트리아가 공개적으로 참전 위협을 했고, 프로이센스웨덴도 이에 동조할 조짐을 보이자 더이상의 전쟁 수행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3월 30일, 파리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끝났다.

4. 결과: 러시아 제국의 패배

인명 피해가 유달리 큰 전쟁이었는데, 러시아만 해도 최소 14만에서 최대 50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으며, 오스만 투르크가 10만 ~ 17만, 프랑스가 10만, 영국이 2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사상자의 차이는 병력 투입 수준에 비례하는 편으로 사상률은 전반적으로 비슷했으나,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 차이가 커서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영국은 병사자가 1만 6천 명 정도였던 반면, 프랑스는 최대 6만 명에 달하는 병사자가 발생했다. 물론 프랑스군이 30만, 영국군이 10만이었다는 것과 규모가 클수록 전염병 확산이 쉽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이런 대규모 인명 피해로 유럽은 큰 충격에 빠졌다. 유럽이 겪은 최근의 전쟁 중 이 정도 인명 피해를 낸 것은 나폴레옹 전쟁뿐이었는데, 크림 전쟁은 단기간에 60만이 넘는 피해를 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피해를 전염병 때문이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왜냐하면 전사자보다 크림 열병을 비롯한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자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병사자가 많았다는 것을 감안해도 크림 전쟁부터 사상자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크림 전쟁 종전 후 5년 뒤,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벌어지는데, 여기서도 막대한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이때도 유럽 지도자들은 '무식한 양키들이니 저렇게 죽어나가지'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기관총의 보급이 늘어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상자의 개념은 확 달라지게 된다. 높으신 분들의 당황스러움은 덤.

4.1. 러시아: 개혁의 시작

패전한 러시아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엄청난 양보를 해야 했다. 국경은 전쟁 이전으로 강제 조정당했으며 흑해 함대를 해산하고 흑해 연안의 요새들도 철거해야 했다. 몰도바왈라키아 공국[4]에 대해 영유권은 영구히 포기하고, 이 지역은 세르비아와 함께 오스만에 형식상 예속된 자치령이 되었다. 또한 러시아는 도나우 강 유역의 자유 통행권도 인접국에게 내주고[5] 오스만 제국 내부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권리도 포기했다. 이런 굴욕적인 결과는 표트르 대제 이래로 패배를 모른다고 자부하는 러시아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개전 초기에는 자신만만하던 니콜라이 1세는 패전으로 인해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실의에 빠졌다. 그의 강철 같은 의지는 완전히 꺾여버렸으며 황태자가 연합국과 치욕적인 협상에 임하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다. 심신이 쇠약해지던 니콜라이 1세는 결국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나마 러시아는 제2차 중·영 전쟁에서 고전하던 청나라압박하는데 성공해 1860년, 연해주와 북만주를 포함한 300만 평방 킬로미터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영토를 손에 넣고 동해를 거쳐 남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데 성공함으로서 크림 전쟁의 패배로 인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패전으로 러시아에 불리했던 여러 조항들은 1871년에 런던 의정서를 체결함으로써 대부분 무력화되고 러시아는 프로이센의 지지를 받아 거의 15년 만에 크림 전쟁의 상처를 씻어내고 흑해 함대를 재건할 수 있었다.[6] 그리고 러시아는 크림 전쟁 후 20여 년 만에 러시아-튀르크 전쟁(일명 제2차 동방전쟁)에서 압승하여 크림 전쟁 때의 복수를 하고 염원하던 발칸으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압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군사 개입 위협과 외교적 균형을 목표로 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노련한 외교술로 인해 러시아는 베를린 회의에서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얻어낸 권리의 상당수를 포기해야 했고, 이때부터 러시아는 증오의 화살을 독일에 돌리게 된다. 다만, 그 복수를 하는 데는 67년이 더 걸렸다.

전후의 러시아는 패전 원인을 분석해 근본적인 국가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 해방령을 비롯한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개혁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귀족 지주들을 비롯한 기득권의 저항도 거세었다.

그리고 개혁 군주로 알려진 알렉산드르 2세는 개혁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지 못했고, 내부적으로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도 심했다. 그리고 1866년 이후, 차르가 보수화되면서 개혁이 크게 후퇴했으며 농노 해방령은 불공평하게 토지를 분배하고 농민들에게 막대한 토지 상환금을 안겼다. 개혁의 후퇴와 농노 해방령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높은 상황에서 제2차 동방전쟁의 승전으로 얻어낸 대가마저 비스마르크에게 농락당해 날려버리자, 정부의 무능에 대한 러시아 지식인들의 불만이 급증하고 차르 체제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에 기반한 반정부 세력이 급성장하고, 알렉산드로 2세도 무정부주의자의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4.2.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은 승리에 도움을 준 연합국의 요구에 따라 자국 내 기독교도들에 대한 보호 강화 및 권리증진을 약속했고 그 외에 갖가지 특혜를 주었다. 그러나 전투에서는 갖가지 추태를 보이며 더이상 그 옛날의 오스만이 아님을 재확인시켰다. 이후, 오스만은 여러 차례의 개혁을 통해 나름대로 살아남으려는 노력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알려졌으나?!

20세기 이후, 서구 역사학자들의 재평가로 튀르크군이 당대의 인식처럼 무능하지 않았다는 점이 드러났다. 발라클라바 전투의 경우, 앞서 대포가 탈취된 사건만 해도 영국군은 튀르크군이 러시아군의 공세가 시작함과 동시에 붕괴했다고 비난했지만, 당대의 기록과 유물 측정이 알려주는 진실은 튀르크군이 최소한 3시간 이상 외부의 도움 없이 버텨냈고, 자만하던 영국군이 정보 부족으로 전선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음에도 늦게 합류했던 것이었다. 즉, 분전하던 튀르크군이 물자 부족과 장시간의 전투로 밀리고 있던 상황에서 때마침 도착한 영국군이 오스만군이 고전하는 것만 보고 이들을 비난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영국군은 튀르크군을 신뢰하지 못해서 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제외하면 튀르크군을 전력에 투입하지 않고 노동 부대로만 이용했다. 이러한 행보는 영국군에게 더 큰 피해를 입혔는데, 1783년까지 크림 칸국을 봉신으로 두어 크림 반도에 대한 각종 정보를 확보하고 있던 튀르크군이[7] 자신들을 비난한 영국군에게 이를 갈며 "그래? 비겁하고 무능한 우리는 후방에서 일이나 할 테니 잘난 네놈들이나 알아서 싸우다 죽어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영국군에게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서 후대 영국 역사학자들은 영국군의 큰 피해는 같은 연합군이었던 오스만 제국군을 무시하고 무모한 전술을 구사한 자업자득이라고 평가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생각보다 잘 싸우고 활약했으나, 연합군은 이들이 밀리는 것만 보고 무시했다가 자기들 피해만 더 키웠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위의 얘기는 당시 서구인들이 가졌던 문화적 인종적 편견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반론일 뿐이지,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이 쓸 만하다는 반론이 될 수는 없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악조건을 버티는 오스만 제국 병사의 역량과, 국가와 군대의 역량은 엄연하게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 당시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환자가 맞았다. 러시아와의 전쟁은 둘째치고,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속주를 다스리던 무하마드 알리가 이집트 왕 되겠다고 오스만 제국 황제 마흐무트 2세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려 할 정도였고 이 위기도 러시아와 서방의 도움으로 넘어갔으니 말이다.

게다가 개혁을 하긴 했지만 눈가리고 아웅인 데다 시골 지방에는 여전히 비무슬림에 대한 차별이 만연해서 다민족간 결속력이 거의 제로였기 때문에, 강대국이 마음만 먹으면 종교나 인종 문제로 광범위한 반란을 선동해서 전쟁 수행 능력을 손쉽게 깍아먹을 수도 있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 정부는 수입의 일부를 수입 관세에 의존했는데, 이것도 영국이 '자유무역이 킹왕짱' 외치면서 관세를 내리도록 부추긴 바람에 타격을 받았다. 정부에 돈이 없으면 상비군 유지에도 타격이 가는 건 너무나도 당연할 일. 따라서 크림 전쟁만 해도, 시노프 해전에서는 러시아의 압승이었고, 육전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최후 통첩 등으로 후방이 불안해진 러시아가 전력을 투입하지 않았음에도 영국군과 프랑스군 상륙 전까지는 오스만 제국 상대로 선전하고 있었다. 서방국가들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가 무난하게 승리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5. 영향

5.1. 러시아 제국: 사방이 적

당시 러시아로선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단 그리스를 제외하고 러시아를 지지해주는 나라가 없었다. 1849년 혁명 때, 대군을 투입해서 혁명을 대신 진압해준 오스트리아는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러시아의 도나우 강 연안 점령을 발칸 반도에서의 권리 침해로 생각하고 강력하게 반발하여 참전의사까지 보였다.[8] 러시아는 전면전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이 지역을 포기함으로써 간신히 무마시켰다. 결국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가 점령했다.[9]

여기에 프로이센 왕국도 러시아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 1850년 올뮈츠 협약에서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중립이지만 내심으로는 러시아의 패배를 원했다.

전후 러시아는 유럽 전역에 팽배한 반러주의와 맞서야 했으며, 외교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외교적 성과는 적었고 각국과의 관계 개선은 지지부진했다. 크림 전쟁이 끝난 지 7년이 지난 1863년에 알벤스레벤 협정을 체결해 프로이센과 화해하는 데 성공하면서 러시아는 겨우 외교적 고립을 타개할 수 있었다.

5.2. 프로이센 왕국: 최대 수혜자

크림 전쟁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는 프로이센으로 평가받는다. 끝까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 막대한 전비를 부담할 필요가 없었고, 훗날 독일 통일 중에 크림 전쟁 때 중립을 고수하고 폴란드 반란 진압을 도와준 것으로 러시아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전쟁으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사이가 극도로 악화된 점도 프로이센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5.3. 오스트리아 제국: 이탈리아의 손실, 가장 큰 피해자

반면 오스트리아는 부올 백작 Count Karl Ferdinand von Buol 이 중립을 깨고 프랑스를 편들어 줘야지만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지역의 영토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프 연합군이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을 포위하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내면서 몰다비아(몰도바)와 왈라키아 공국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충수였다. 프랑스는 왈라키아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이후 샤르데냐 왕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사르데냐 왕국과 연합해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영토를 빼앗았다. 결과적으로 참전하지 않은 오스트리아는 스스로의 손으로 빈 체제신성 동맹을 깨뜨렸고, 이탈리아 왕국독일 제국 탄생의 산파가 되었다.

5.4. 사르데냐 왕국: 최대 수혜자2

또 하나의 승자는 사르데냐 왕국이었다. 1848~49년의 혁명 기간 중 사르데냐 왕국은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분투했지만 오스트리아군에 패배하여 국왕이 퇴위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 때문에 사르데냐 왕국의 재상 카보우르는 다른 열강을 끌어들여 통일을 이룬다는 전략을 채택하고 국제 사회에서 자국의 이름을 각인시키기 위해 일부러 참전했다.

샤르데냐는 파리 강화 조약에서 당장 눈에 띄는 이익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카보우르의 예측대로 사르데냐의 참전은 훗날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각국의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영국이 사르데냐의 참전을 환영했다. 크림 반도에 투입한 자국 병력이 프랑스군보다 적어서 동방에서의 영향력 강화를 시도하는 프랑스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859년에 이탈리아 통일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중립을 지킨 반면, 프랑스는 사르데냐와 연합했다.

5.5. 그리스 왕국: 욕심부리다가 피해막심

한편, 그리스는 고토 수복을 부르짖으며 러시아와 연합해 오스만 제국을 침공했으나, 연합국인 오스만 제국를 공격한 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분노를 일으켰다. 영·프 연합군은 그리스의 항구 도시들에 포격을 가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피해를 견디지 못한 그리스는 양국에게 애원하다시피하며 강화를 요청했다. 영·프 양국은 그리스에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하고 그리스가 보유한 일부 도서 지역에서의 함대 주둔권과 해군 기지 건설권을 받아내어 지중해 동부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러시아를 견제했다. 고토 수복을 외치다가 연합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은 그리스는 국민 여론이 폭발해서 국왕이었던 오콘이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퇴위해야 했다.

5.6. 전쟁 기술

1853년 11월 30일에 일어난 시노페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은 당시까지 실전에 투입된 적이 없는 '터지는 포탄', 즉, 작렬탄을 처음 사용했다. 기존의 철로 만든 단순한 포탄의 발사 원리는, 적절한 양의 화약을 포탄과 함께 밀어넣고 난 뒤, 그 포탄을 발사하여 순수 운동 에너지로만 적을 피격하는 포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함선 내 화약을 보관하는 장소를 운 좋게 피격하지 않는 이상, 함선 자체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없었으며, 함선이 침몰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1822년 프랑스에서 이론으로 발명된 '폭발하는 포탄' 기술은 1824년 프랑스 및 다른 나라에서도 정식 교리로 채택되었으나 실전에 투입된 적이 없었던 기술이었다. 이 신기술을 등에 업은 러시아 제국 함대는 오스만 제국 함대 11대 중 10대를 대파하여 침몰시켰으며 이러한 성과는 기존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해전을 계기로 포탄의 개념이 완전히 뒤바뀌고, 목재 범선의 시대는 막을 내렸으며 철갑함이 주류가 된다. 참고

6. 여담

  • 이름 때문에 '크림(Cream) 때문에 전쟁을 한 건가?' 하는 오해를 사곤 한다.
  • 이 전쟁은 러시아, 연합군 할 것 없이 무능한 지휘관들이 넘친 전쟁으로 악명이 높다. 영국 언론은 이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을 올빼미로 묘사하며 머리가 텅텅 비었다고 조롱했다.[10]
  • 다만, 무능한 지휘관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군의 경우, 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지휘한 코르닐로프, 나히모프, 이스토민 등은 매우 유능한 지휘관으로 평가받으며 크림 전쟁으로 로리스-멜리코프, 토틀레벤 같은 유능한 장군들이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군도 당대 오스만 군부의 전설인 오마르 파샤가 이끄는 루멜리아 군단은 각국으로부터 유럽의 정규군과 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나디르 파샤, 이스칸디르 파샤 같은 유능한 지휘관들이 여러 전선에서 활약했다.
  • 발라클라바 전투는 전장에서의 의사 소통 및 명령 체계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대표적 사례로 이후 전쟁사 및 부대 지휘 체계 교육에 꼬박꼬박 등장하게 된다. 이 전투는 또한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함께 싸운 대표적인 전투이기도 하다. 전쟁 중 추위를 견디기 위해 방한의류인 발라클라바가 발명되었다.
  • 전쟁 중과 그 후, 영국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부각되었다. 나이팅게일은 야전 병원 및 군의료 체계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고, 근대적인 야전 병원 체계가 구축되었다. 이전까지 야전 병원은 현대 기준으로 보면 이게 병원이냐 화장실이냐?라는 말이 나올 법했다. 전장에서 치료를 받은 부상자보다 야전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부상자의 사망률이 더 높아서 '병원증'(hospitalism)이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였다. 그 정도로 야전 병원의 상태가 열악했다는 이야기.
  • 연합군에서 활약한 간호사는 또 있다. 메리 시콜(1805~1881)이 그 주인공. 자메이카 출신의 크리올로서 호텔 운영과 무역업에 종사하던 여성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자메이카 전통 의술을 써서 전염병을 치료하고 군의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크림 전쟁이 일어나자 간호사로 가려고 했으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탈락했다. 그러자 개인 자격으로 크림 반도로 와서 전선에 치료소를 짓고 사비로 병사들을 치료했다. 연합군뿐만 아니라 적군이었던 러시아군도 치료했으며 전후에 이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터키, 프랑스 3개국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하지만 크림전쟁 종전 이후 묻혔고 오랫동안 찬양되어 오던 나이팅게일과 달리 피부색으로 차별받아 알려지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와서야 재평가되면서 알려졌다.
  • 러시아군에서도 유명 간호사로 다샤 세바스토폴스카야(Даша Севасто́польская 1836~1892[11])가 있었다. 세바스토폴 해군 기지에서 바느질과 세탁일을 하던 다샤 세바스토폴스카야는 크림 전쟁이 일어나자 세바스토폴의 주민들과[12] 함께 간호소를 세워 병사들을 치료하고 러시아군 최초의 간호사가 되어 전선에서 활약했다. 의학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지만, 다샤는 최선을 다해 부상자들을 간호하고 위로했으며 그녀는 세바스토폴이 가장 어두웠던 시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주었다. 전쟁이 끝난 뒤, 다샤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알렉산드르 2세로부터 훈장과 상금을 받고 세바스토폴의 병원에서 일하며 여생을 보냈다.
  • 미국 장군 조지 매클렐런(1826~1885)은 관전무관으로 참가했다. 이때는 매클렐런이 엄청 유능하게 느껴질 때라...[13]
  • 이 전쟁에 참전한 사람 중 영국의 장군이자 제7대 카디건 백작 제임스 브루드넬은 평소에 단추 달린 스웨터를 즐겨 입었는데, 이것이 가디건의 유래다.
  • 전쟁이 터지기 20여 년 전에 독립한 그리스는 오스만에 대한 적대감 및 아직 오스만령인 그리스 영토 회복을 위해 친러시아 정책을 펼치며 나서려 했으나 자국의 독립을 도와준 영국과 프랑스에게 패배. 영프: 배은망덕한 그리스넘들. 머 지금 하는 짓을 보면 종족특성인가 봄
  • 역사상 최초로 사진이 촬영된 전쟁이다. 다만 사진 기술이 좋지 못해서 사진 1장을 찍으려면 20분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해서 움직이는 전투 동작 같은 것은 찍을 수 없었고 전투전의 군복을 착용한 병사들이나, 전투가 끝난 후 현장을 찍은 정도지만 그것만으로도 머나먼 고국에서 전쟁을 접하는 이들로 하여금 전쟁을 실감할 수 있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1855년 전장에서 휴식하는 병사들을 담은 영국군 선전사진오스만 제국군 보병대
  • 세계 최초로 종군 기자가 활약한 전쟁이기도 하다. 윌리엄 하워드 러셀(1820~1907)이란 영국 기자가 바로 그 인물로 나이팅게일도 그의 취재로 알려지게 된다.
  • 베릭어폰트위드#[14]라는 마을이 크림 전쟁의 종전협정 서명에서 누락된 관계로 이 마을이 100여 년간 러시아 및 그 후신인 소련과 계속 전쟁을 벌이는 촌극이 벌어졌다. 해당 문서 참고. 그러나 문서 내용처럼 이 사실은 상당한 과장이다.
  • UMA 중 유명한 모스맨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 것이 이 전쟁 중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관련 포스트
  • 영국 헤비메탈 밴드 아이언 메이든의 대표곡 The trooper가 크림 전쟁 당시 영국 기마병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1. [1] 둘이 같이 출전한 것은 아니고 니콜라이 1세의 자리를 알렉산드르 2세가 물려받았다.
  2. [2] 규모는 훨씬 작지만 이곳에서도 러시아군의 영웅적인 항전이 있었는데, 대포 수가 3배나 많은 연합군 함대의 포격을 견뎌내고 상륙하는 1000여명의 연합군을 격퇴했다. 큰 피해를 입은 연합군은 후퇴했지만, 이듬해 본국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시 공격을 당하면 함락 당할 것이 뻔하다는 판단하에 동시베리아 총독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Nikolay Muravyov-Amursky, 후일 아이훈 조약을 주도한 사람)는 도시 전체를 비울 것을 명하였고, 방어군은 눈보라를 틈타 4월 중순 연합군 선박의 감시를 피해 탈출했다. 5월 말 돌아온 연합군 함대는 빈 도시를 점령했다. 비록 도시는 점령당했지만 러시아 해군은 첫 번째 전투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러시아의 첫 철갑선에 페트로파블롭스크란 함명을 붙였고, 이 함명은 이후에도 세바스토폴과 더불어서 러시아 해군, 소련 해군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함명 중 하나가 되었다.#
  3. [3] 이는 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전쟁수행에서의 특징이자 주특기였다. 7년 전쟁 때도 영국은 스페인을 상대로 쿠바, 필리핀, 우루과이, 포르투갈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였다. 당하는 러시아 입장에선 해군 전력도 부족한 데다가 이를 분산시켜야 했으니 속수무책. 제해권을 쥔 나라만이 가능한 전략이었다.
  4. [4]루마니아 지역.
  5. [5] 말이 인접국이지, 사실상 오스트리아를 배려한 조항.
  6. [6]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1863년 폴란드 봉기 당시에 프로이센이 협조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러시아는 독일 통일 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프로이센을 지지했고, 보불전쟁까지 프로이센을 지지해줌으로써 파리 강화 회의의 결정 사항을 무력화하는데 프로이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여기서 영국이 크게 반발했지만, 비스마르크가 수완을 발휘해 영국의 반발을 무마해주었다.
  7. [7] 다만, 크림 반도에 대한 최신 정보는 러시아군이 앞서 있고, 크림 타타르인과 크림 반도의 주민들이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고 러시아를 지지하기도 해서 러시아군이 유리한 측면도 있었다.
  8. [8] 부연하면... 니콜라이 1세는 범기독교 세력 vs. 오스만 제국 구도로 오스만 제국을 분할해 나눠가질 것을 희망했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 편에 서자 할 수 없이 동방정교회를 믿는 범 슬라브인 vs. 오스만 제국 구도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고 이게 전쟁 초기에는 나름의 효과도 있었다. 문제는...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 안에도 타 민족의 지배에 불만가득한 슬라브인(세르비아인) 인구가 다소 있었고, 따라서 이런 러시아의 행보를 오스트리아 제국이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9. [9] 하지만 러시아군이 철수한 뒤, 군사적 공백지나 다름없게 된 땅을 집어먹은 것이라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이 지역은 프랑스의 후원으로 1862년 루마니아가 성립된다.
  10. [10] 그나마 낫다고 평가받은 건 프랑스군이었다.
  11. [11] 영어로는 Dasha from Sevastopol라는 뜻인데 별명이다. 본명은 다리야 라브렌티예브나 미하일로바(Darya Lavrentyevna Mikhailova)이다.
  12. [12] 세바스토폴 방위군의 가족들로, 그들의 아내이자 자매였고 딸들이었다.
  13. [13] 사실 군사적으로 유능했지만 소심한 성격으로 남북전쟁 당시 북군이 압도적으로 앞섰음에도 남군이 더 강하다고 링컨 대통령 명령까지 거부하여 결국 30대 중순 팔팔한 나이로 장군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후임이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율리시스 S. 그랜트인데 둘이 같은 해에 죽었다.
  14. [14] 영국 지명에서 rw를 /r/로 발음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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