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로스/역사

서아시아의 역사

레바논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아랍에미리트

예멘

오만

요르단

이라크

이란

이스라엘

카타르

쿠웨이트

키프로스

터키

팔레스타인

1. 개요
2. 전근대
3. 에노시스(Ένωσις) 운동
4. 키프로스 동란, 그리고 분열
4.1. 통일을 위한 노력
5. 관련 항목

1. 개요

키프로스의 역사에 대한 문서이다.

키프로스 섬의 역사
Ιστορία της Κύπρου, Kıbrıs Tarihi

{{{#!folding 【펼치기·접기】

상고대

고대 : 오리엔트 제국

헬레니즘 & 팍스로마나

F

미케네 인

페니키아 인

아시리아 제국

아마시스 26왕조

아케메네스 제국

이오니아 반란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 제국

알렉산드로스 - 마케도니아 제국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로마 - 공화정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N

S

L

P

비잔틴 vs 아랍

중세

십자군 & 베네치아

오스만

근현대

F

비잔틴 제국

정통 칼리프 - 라쉬둔 왕조

비잔틴 제국

우마이야 왕조

중립 - 비무장지대

비잔틴 제국

리처드 - 3차 십자군

템플러 - 성전기사단

키프로스 왕국 - 뤼지냥 가문

베네치아 공화국

오스만 제국 - 셀림 2세

오스만 제국

대영 제국

키프로스 공화국

북 키프로스

N

S

남 키프로스

L

P

※ F는 파마구스타, N은 니코시아, S는 살라미스(라르나카), L은 리마솔, P는 파포스

}}}

2. 전근대

이 섬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어 기원전 9000년무렵에 아나톨리아에서 사람이 넘어가 석기시대 문화를 꽃피웠으며, 심지어 원시적인 도시유적까지 발굴되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에는 독자적인 문자도 가지고 있었으며, 이후 그리스인들이 넘어오면서 그리스 문명의 초기인 미케네 문명과도 관계를 맺고, 고대 그리스 및 성경에도 배경지역으로 등장한다. 대체적으로 그리스-비잔틴 문화권이었으나, 수많은 외침을 겪었는데, 가령 아시리아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은 적도 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에는 이집트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며, 로마 제국 시절에는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에게 결혼 선물로 이 섬을 떼다 주기도 했다.(…) 이후 다시 로마 제국으로 복귀했다가,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면서 동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그 후 7세기 경 이슬람 제국의 발흥으로 동로마는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시리아 등을 상실했고 키프로스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650년 경 이슬람의 침입을 받았다. 그러다가 688년 동로마와 이슬람이 키프로스를 300년 간 공동으로 지배한다는 내용의 전례 없는 조약을 체결한다. 이 뒤로 허구헌날 치고 박고 싸우는 두 세력이지만(특히 717-718년의 콘스탄티노플 포위전) 이 조약만큼은 이상하게도 잘 지켜졌다. 조약 체결 직후 동로마가 섬 대부분의 지배권을 얻었으나 조약은 파기되지 않고 그대로 지켜졌으며 동로마가 섬을 완전히 손에 넣은 건 약속된 300년의 기한이 거의 지난 965년에 이르러서였다.

십자군 전쟁 도중 비잔티움 제국의 정치적 혼란 때문에 키프로스의 지배자인 이사키오스 앙겔로스가 독립을 선포하게 되는데, 이사키오스는 키프로스에 포류한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부하들을 포로로 잡고 물자를 약탈했으며 리처드의 누이까지 포로로 사로잡으려 해서 리처드 1세를 극도로 분노하게 했다. 리처드 1세가 포로와 물자 반환을 요구해도 이사키오스가 듣지 않자 리처드 1세는 간단하게 키프로스를 정복하여 잉글랜드령으로 삼았다. 행패를 부리던 이사키오스는 쇠고랑을 차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하여 은고랑을 차고 끌려갔고 이후 키프로스는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다가 몬페라토의 콘라드와 기 드 뤼지냥이 예루살렘 왕국 왕위를 놓고 다투던 중에 몬페라토의 콘라드의 지원을 받기 위해 리처드 1세가 뤼지냥의 왕위를 빼앗아 콘라드에게 주는 과정에서 이에 대한 보상으로 뤼지냥에게 주어졌다. 이후 뤼지냥 왕가는 키프로스 왕국을 세워 200년 간 키프로스를 지배했는데 키프로스 왕국은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차차 종속되다가 1489년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베네치아에 합병된다. 1571년에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아 다시 오스만령이 된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터키계가 이주, 현재는 터키계와 그리스계가 남한북한마냥 남북으로 갈라서서 대립하고 있다. 수도 니코시아(현지어로는 그리스어나 터키어나 둘다 레프코샤 - Λεφκοσια, Lefkoşa로 불린다.)마저도 분단 상태다.

분단된 레프코샤 도심의 지도, 베네치아 지배시절에 세워진 성벽 안의 시가지도 반으로 동강났다.

1878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베를린 회의에서 오스만 제국을 지지해주는 대가로 영국이 실효지배하게 된다.[1] 그나마 세금의 일부라도 계속 오스만 제국에게 바치도록 되었지만, 영국이 이를 크림 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이 갚지 못한 부채를 갚는 명목으로 거부함으로, 문서상으로만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어버린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때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 편으로 참전하자 정식적으로 합병된다.

터키 독립전쟁 당시에는 터키군이 이 지역을 재정복하려 하다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대국민의회에서 영국과 협상을 벌여 이 지역을 포기하기로 타협했다. 당시에 아타튀르크는 키프로스가 독립할 경우 당시 터키 본토에서처럼 그리스인과 터키인 사이의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예상했기 때문.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60년 독립하게 되었다. 초대 대통령이자 정교회 사제이기도 한 마카리오스 3세 대주교(1913~1977)는 터키계들에게 관대하게 대우하면서 키프로스란 한 나라에서 이슬람인 자치구역을 허용하고 언어나 여러가지로 이 구역에선 자유롭게 마음껏 행사하도록 조치했던 것. 덕분에 터키계나 터키에선 이를 받아들여 독립 초기에는 소소한 갈등이 있을지언정 꽤 평화롭게 지냈다.[2]

하지만, 그리스계 강경파들의 반발로 쿠데타가 벌어져 마카리오스가 축출되면서 터키인들 추방을 요구하게 되자 분노한 터키가 군대를 보내 그리스계 구역을 폭격하면서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진다.

3. 에노시스(Ένωσις) 운동

키프로스에서 이토록 그리스인과 터키인 사이의 첨예한 대립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으로는 '에노시스' 운동을 들 수 있다. 에노시스(Ένωσις)란 그리스어로 '하나되기', 즉 '통합'을 뜻하는 단어인데, 결국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인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구심점을 만들자는 사상이다. 1898년에 크레타크레타 정부(Η Κρητηκη Πολιτεία)로 독립했을 때에도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두개의 국가는 있을 수 없다며 크레타 정부와 그리스 왕국의 합병을 주장했으며 결국 크레타 정부는 그리스에 합병되는 식으로 사라졌다.[3] 키프로스에서도 에노시스 운동은 뜨겁게 불타올랐는데, 특히 1923년 터키 독립전쟁 이후 터키가 키프로스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기로 영국과 합의한 이후 키프로스의 그리스계 민족주의자들이 "키프로스는 그리스다." 를 외치며 섬 전체에서 파업과 강력한 투쟁을 행했다. 또한 에노시스 운동을 최초로 주장했던 그리스 최초의 대통령이었던 요안니스 안도니오스 카포디스트리아스(Ιωάννης Αντώνιος Καποδίστριας - 1776~1831)부터가 조상이 키프로스인이었다는 것도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에게 강력한 명분이 되었다. 키프로스 가문 출신이 그리스 대통령까지 되었으니 키프로스는 곧 그리스라는 것.

그리스 국기를 걸고 시위하는 키프로스인들 (1930년, 현수막에 쓰여있는 글자는 "통합 만세!" 라는 뜻이다.)

한편 영국 식민당국에서는 이러한 키프로스인들의 움직임이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모국인 그리스가 버티고 있는데다가 영국으로썬 키프로스를 딱히 짓누를 만한 구실도 없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의 그리스로의 병합요구는 더욱 더 거세졌다. 1950년 1월 15일부터 22일까지 있었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5.7%가 독립이 아닌 그리스 왕국으로의 병합을 원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에노시스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의 요구사항이었으며 섬에 거주하는 터키계 주민들은 그딴거 없었다. 애초에 터키계 주민들은 아타튀르크가 키프로스를 포기하겠다고 영국과 협상한 순간 스스로 모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꼈으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영국 식민당국과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터키계 주민들은 터키 독립전쟁 이후 그리스에 거주하던 터키인들이 재산을 모조리 압류당하고 터키로 추방당한 것을 보았고, 그 이전에 크레타가 독립했을 때도 섬에 거주하던 터키인들은 모조리 추방당했다. 때문에 터키계 주민들은 "우린 어찌 살란 말이냐!" 를 외치며 그리스계와 적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 식민당국은 "키프로스는 그리스인만 사는것도 아니고, 터키인이랑 라틴인[4]들도 사는 나라다. 그러니까 통합은 안됨. ㅇㅇ" 하면서 키프로스를 독립시켰다.라고 쓰고 손떼기라고 읽는다.

4. 키프로스 동란, 그리고 분열

1960년대 이후 섬 전체에 흩어져서 그리스인들과 사이 좋게 지내던 터키계 주민들은 점차 게토화되기 시작했다. 기름진 농경지가 많은 섬 북쪽 지역에서 쫓겨나 키프로스 정부가 지정해주는 곳으로 옮겨 살게 된 건데 터키계 주민들은 죄다 구릉 지대나 고원 지대로 옮겨져 버린 것. 당시 터키에서는 키프로스의 터키계 주민들이 핍박받는 것이 대대적으로 언론을 탔으며 이런 일화도 자주 벌어졌다. 터키 동남쪽에 위치한 메르신 항구에서 한 연사가 연설을 했는데 연설을 끝맺으면서, "자, 키프로스의 동포들이 저 사악한 그리스놈들에게 핍박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당장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끝내 버립시다!" 라고 말하자 흥분한 청중들이 바닷가로 몰려가 멀리 불빛이 보이는 키프로스를 향해 헤엄을 치기 시작한 것.(...) 물론 키프로스에서 터키까지는 상당히 먼 바다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중간에 다들 지쳐서 돌아가야 했다지만, 이런 해프닝도 벌어질 정도로 두 민족의 갈등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결국 분열한 상황에서 본국 그리스 군사정권이 독재화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을 돌리고자 그리고 키프로스를 합병하고자 1974년 7월 13일, 대대적으로 군대를 보내어 마카리오스 대통령을 그리스 민족주의를 침해한다는 죄로 축출하고 니코스 삼프손(Νίκος Σαμψών - 1935~2001)을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앉혀놓았다. 이에 터키는 터키계 보호라는 명분으로 7월 20일 파병을 시작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터키군이 속전속결로 쳐들어오면서 당황한 키프로스군이 아군인 그리스로부터 들어오던 수송기를 오발로 격추시켜 버리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로 키프로스군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했다. 터키는 영국군이 파병한 아야 나파 지역을 제외한 곳을 재빠르게 장악했다. 이 와중에 3600명에 달하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으며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은 약 6백명 정도가 사망 및 행방불명되었다.

이전에 터키군의 침공을 두고 그리스나 키프로스 측은 터키군 따위는 자발적인 시민군으로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으나 헛소리였다. 정작 그 시민군은 터키군의 초반 폭격으로 500명이 넘는 사망자가 생기자 당황하여 달아나는데 급급했다. 무장과 병력 수, 모든 것에서 불리한 일개 시민군이 터키군을 막을 순 없었다. 부랴부랴 미국과 유럽이 중재하여 터키군이 일부 물러났으나 불과 한달도 안돼 키프로스는 1974년 8월 중순, 완전히 동강났다.

더불어 이 패배로 그리스 군부 독재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남키프로스는 뒤늦게 마카리오스를 다시 대통령으로 앉히고 그는 북키프로스로 가서 다시 키프로스 통일화와 같이 종전처럼 사이좋게 지내길 요청하지만... 이젠 전쟁으로 입은 피해로 그런 평화의 길은 사라진 다음이었다. 결국 마카리오스는 안타깝게 과거를 그리워하며 세상을 떠난다. 이윽고 1983년에는 북쪽이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고 분리독립을 선언하지만.. 터키 이외에는 인정하는 나라가 없었다.

이리하여 양국의 민족주의와 같이 전쟁으로 인한 원한 관계가 섞여서 그야말로 원수가 되었다. 쉽게 설명하면 한국일본사람들이 제주도쓰시마 섬 같은 곳에서 세운 독립국가. 국기는 터키와 그리스의 화해를 희망하는 뜻으로 의 지도와 올리브잎이 그려져 있으나 아직도 양측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로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 터라 북쪽에서는 터키 국기와 유사한 독자적인 국기를 사용한다(…) 심지어 국가도 남쪽에서는 그리스 국가를, 북쪽에서는 터키 국가를 부른다.

2006년 이스라엘레바논으로 쳐들어 오자 터키는 레바논에 거주하던 이슬람인들이나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바로 북키프로스로 대피시켜 정착하게 했다. 덕분에 북키프로스에선 아랍계 및 다양한 이슬람 거주민들이 대거 늘어났으며 이들 거주 문제 및 여러가지로 아랍 연맹에서 키프로스를 신경 쓰게 하였기에 그리스는 아랍 연맹을 키프로스 문제에 끼어들게 하는 꼼수라고 비난했으나 터키는 그러면 아랍 연맹과 우호 관계인 그리스는 왜 레바논 피난민에 대하여 모른 척하여 자초했냐는 비난을 했다.

그런데 2008년 3월 수도인 니코시아를 반동강내던 분리장막을 33년만에 해체했고 장막이 있던 레드라 거리에 터키계와 그리스계 공무원이 상주하는 가운데 개방되었다. 현재는 남북 키프로스인들이 여권없이 자유롭게 상대방의 지역을 여행할 수 있지만, 분단 이전의 키프로스 국적을 보유한 그리스계, 터키계 키프로스인 당사자 및 자손들에게만 해당되며 그 외에는 - 즉 분단 이후 남북 키프로스로 이주하여 각각의 국적을 취득한 그리스계, 터키계 주민들은 - 외국인으로 간주되어 짤없이 여권을 요구한다. 그리고 양 지역간의 교통도 키프로스 번호판을 단 차량에 한해 자유롭게 통행이 가능하다. 때문에 남쪽으로 출퇴근하는 터키계 키프로스인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서로의 모국어는 다르지만 과거 영국 식민지배를 겪었기 때문에 남쪽이나 북쪽이나 영어가 잘 통하는 편이라 서로 영어로 소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4.1. 통일을 위한 노력

통일협상은 1970년대부터 UN의 중재로 끊임없이 열렸다. 특히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제안한 연방국가案이 2004년에 주민투표에 부쳐졌으나, 북키프로스는 찬성 65%를 기록한 반면 남키프로스에서는 반대 76%로 부결되어 실패하였다.

2010년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키프로스를 방문, 양측을 중재하며 다시 논의가 시작되었다. 2012년 남키프로스가 EU 순회의장국이 됨에 따라 한때 협상이 중단되기도 했다. 2014년 2월 11일 남-북 키프로스 정상회담에 이은 공동선언이 발표되어, 빠른 시일 내에 협상을 실시키로 하였다. 협상이 타결되면 연방제 국가 설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키로 하였다.#

그리고 2015년 5월부터 진행된 통일협상이 순조롭게 이뤄지면서 통일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남키프로스는 경제 위기로 통일 필요성이 커졌고, 북키프로스의 정권교체가 맞물리면서 통일 실현의 기대가 크다. 가장 큰 걸림돌은 재산권과 보상 문제. #

2016년 11월에 스위스에서 닷새 간 정상회담에서 각각 자치권 갖는 연방체제에 원론적 합의을 했지만, 위에서 보듯이 구체적인 안전보장 방안, 관할구역 확정, 분단에 따른 주민 재산권 보상 등이 난제이다.# 특히 키프로스 섬의 36%를 점유한 북키프로스 영토를 28∼29% 대로 줄이는 데는 합의했지만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결과를 얻으려고 치열한 협상이 전개되고 있다. 북측은 29.2%를 제시하고 남측은 28%를 제시했다.

2016년 11월 20일에 평화협상을 했지만, 22일에는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2017년 7월 12일에 키프로스가 터키의 반발을 무릅쓰고 지중해의 천연가스 시추를 강행하자 터키는 군함을 파견했다.#

결국 2017년 12월 통일협상은 결렬되었다.

5. 관련 항목


  1. [1] 1878년에 오스만 제국러시아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끝내는 산 스테파노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러시아의 세력을 견제한 영국, 독일 등이 개입하여 러시아가 오스만에 강요했던 조건들을 일부 완화하거나 폐지했다.
  2. [2] 오스만 제국 시절 키프로스에는 키프로스 원정 당시 원정에 참가했다가 정착한 군인들과 토착민의 후손들이 함께 거주했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의 키프로스 초기에는 중과세에 항의하여 이 원정군과 토착민이 손잡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오스만 제국 시기 내내 키프로스의 무슬림과 정교인들은 마을별로 모여 살았으며, 비록 종교는 다를지언정 평화롭게 공존했다. 결국 무슬림이든 정교회 기독교인이든 모두 피지배자였기 때문인데, 민족주의의 시대 이후 민족의식을 각성한 키프로스의 그리스인들이 그리스 독립전쟁의 영향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이를 진압하면서 양측이 갈등하는 계기가 된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두 민족주의 집단이 키프로스를 각자의 모국으로 합병시키자는 운동을 벌였고 여기서 영국은 방관으로 임하면서 분단의 계기는 여기서부터 싹트게 된다.
  3. [3] 아이러니한 건 당시 크레타 정부의 수반이었던 엘렙세리오스 베니젤로스부터가 오스만 제국 시절 크레타 의회의 의원이었을 때부터 강력한 에노시스 지지자였다는 것.(...)
  4. [4] 극 소수지만 키프로스가 베네치아 지배를 받았던 시절부터 살았던 이탈리아계 가톨릭 신자들을 말한다.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320.41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