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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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3대 국왕
太宗 恭定大王
태종 공정대왕


태종 상상화[1]

묘호

태종(太宗)

시호

조선

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
(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공정(恭定)

출생

1367년 6월 13일

고려 동계 함흥부 귀주동 이성계 사저

사망

1422년 6월 11일 (54년 11개월 18일 / 20,087일)

조선 한성부 연화방 수강궁 별전(別殿)

능묘

헌릉(獻陵)

재위

조선 왕세자[2]

1398년 9월 ~ 1400년 11월 28일

조선 국왕

1400년 11월 28일 ~ 1418년 9월 9일
(17년 9개월 11일 / 6,494일)

조선 태상왕[3]

1418년 9월 9일 ~ 1422년 6월 11일
(3년 9개월 2일 / 1,37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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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全州)

방원(芳遠)

유덕(遺德)

군호

정안공(靖安公)

부모

부친 태조 강헌대왕, 모친 신의왕후

왕비

원경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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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이름과 작위
5. 인물됨과 일화
5.1. 심술의 군주
5.2. 사냥 애호가
5.3. 여성 편력
5.5. 부엉이 공포증
5.6. 관대한 면모
6. 세조와의 비교
7. 태종우
8. 사극에서
9. 기타
10.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의 제3대 국왕이자 제4대 세종대왕의 부왕이다.

조선의 제3대 군주로써 묘호는 태종(太宗)이며, 시호는 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휘는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으로 '덕을 남기다'라는 뜻으로 본인은 덕(德)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았으나 후계자(세종)를 잘 두었다는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적절한 자라고 볼 수도 있다.

자신의 강력한 결단력으로 조선 정치의 질서(대표적으로 자신을 왕으로 지지해 올려준 외척 일가의 세력과 세종의 비 소헌왕후 일가(나중에는 세종이 무죄방면)를 역모로 몰아 숙청를 하여 왕권 강화.)잡았으며 뒤를 이을 세종이 선정(善政)을 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줬다는 평가를 듣는다. 태조 이성계의 5남이자 세종대왕의 아버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으나 권력욕이 강하다는 태조의 판단으로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였고, 계모 신덕왕후의 소생이자 건국에 공이 전혀 없는 막내 이복동생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 직접 난을 일으켜 세자와 정적을 참살(斬殺) 후에 둘째 형이었던 방과를 왕으로 옹립, 권력을 잡았고 이후에는 (사실상 자신의 강압에 의한) 양위를 받아 조선의 3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역대 조선 왕들 중 그의 아버지 못지않게 정말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왕 중 하나.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고의 킬러 본능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정몽주를 죽여 조선 창업에 다른 형, 동생들보다 크게 이바지했고, 정도전, 심효생, 남은, 자신의 형제들을 죽여 왕이 되었고, 처남들인 민씨 형제를 죽여 외척을 쳐냈고, 갖은 구실로 아들 세종의 장인인 심온(소헌왕후의 아버지)까지 죽여 아들조차 왕이 되면, 외척에 휘둘리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했다.

그러나 이방간이나 그 외 불온한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여러 신하들은 살려놓았다. 참 이중적인 왕이다 이방원의 후계자인 세종 이도조선조 최고의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태종이 세종이 걸어갈 길을 사전에 방해 될 것을 잘 닦아놓았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분명 왕조의 초기에 불안정한 정국을 확실하게 휘어잡았고, 세종을 위협할 만한 세력(정적)들을 다 제거해서 세종은 정국 안정에 덜 신경쓸 수 있게 한 것을 보았을 때 맞는 말이다.[4][5]

'용재총화'의 저자인 성현은 태종을 문관으로 패업을 이룬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고, 조선 말엽 미국인 선교사이자 한국사를 많이 연구한 호머 헐버트는 태종을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이끈 인물인 올리버 크롬웰에 비유하기도 했다.

역성혁명의 난을 일으켜 왕이 된 것 치고는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인 편은 아니다. 게다가 보통 이렇게 권력을 위한 숙청에서 자기 편은 건들지 않거나 국가에 해가 없음에도 맘에 안 든다고 없애버리는 일이 역사적으로 많은데, 태종의 경우 오로지 "장기적으로 왕권에 손해가 될까 아닐까" 하나만을 생각하고 객관적(?)으로 숙청하였다.

2. 이름과 작위

태종의 수결(서명).[6]

왕이 되면 피휘 때문에 보통은 이름을 바꾸는데 태종은 승하할 때까지 개명 없이 흔히 쓰이는 꽃다울 방과 멀 원자를 이름으로 계속해서 썼다.[7] 사실 피휘에 대한 규칙을 담고 있는 예기 단궁 하(檀弓 下)편에는 공자의 어머니인 징재의 예를 들면서, 피휘할 이름이 두 글자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그 중 한 글자만 쓰는 것은 허용된다고 했다. 그래도 아버지 이성계는 왕이 되고 '이단'(李旦)으로 이름을 바꾸고, 형인 정종 이방과는 '이경'(李瓊)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니 이방원이 특이한 케이스인 것은 사실이다.[8] 어쨌든 현재에는 본명인 '이방원'으로도 유명하다.

왕자였을 때 받은 작위는 정안군, 정안공(靖安公)이다. 정안대군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정안군 또는 정안공이라고 적혀있다. 태조 시절에는 정안군으로 기록되어 있고, 정종 시절에는 정안공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조선 초기에는 작위 호칭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대군이라는 호칭은 태종이 고려 시대의 공후백자남 오등작을 폐지하면서 등장시킨 것으로 태종 즉위 후의 일이다.

즉 태종은 '정안대군'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은 당대에는 전혀 쓰이지 않은, 엄밀히 따지면 잘못된 호칭. 따라서 당대 기록인 실록에는 당연히 정안대군이라는 표현이 없고 연려실기술처럼 후대에 쓰인 책들에서 즉위 이전의 태종을 언급할 때만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쓴다. 정안대군이라는 표현이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기 이전의 사극이나 소설의 영향.[9] 마찬가지로, 정종 역시 영안대군으로 불렸던 적은 한번도 없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태종(조선)/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태종(조선)/가족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인물됨과 일화

과거 급제자 출신의 정치 10단 군주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권 후기

태종은 역사적으로도 드물지만 조선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 일을 해보았던 사람이다. 요즘에 비유하자면 행시 출신으로 공무원 생활을 좀 해 본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경우.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영의정을 역임한 적이 있긴 하나 이건 이미 계유정난(1453년)이 벌어진 이후에 사실상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자리라 태종이 과거에 급제해서 받은 벼슬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학식이 좀 떨어지던 무인 집안 출신인 전주 이씨 가문에서 최초로 나온 급제자라서 이성계가 눈물나게 좋아했을 정도로 굉장히 머리가 비상한 인물이었다.[10]

태종은 사람을 다루는 '용인술(用人術)'이 뛰어났고 산전수전 다 겪은 끝에 왕위에 올랐던만큼 신하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즐겼던 듯하다. 종종 깜짝 양위 쇼를 벌였다. 조선 시대에 국왕이 손쉽게 일으킬 수 있는 왕권 강화 이벤트가 양위 소동이었다. 이 경우 세자부터 신하들까지 전부 '죽여주시옵소서 전하' 모드가 되기 때문에 왕권은 하늘을 찌른다.[11] 문제는 이를 남발할 경우 반대로 세자의 지지 기반이 약해진다는 것으로, 이런 점에서 최악의 본보기가 양위 소동을 자주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선조(당시 세자 광해군), 영조(당시 세자 사도세자)이다. 이런 정치적 이벤트는 왕권 강화의 일환이자 신하들의 충성도 테스트였을 확률이 높지만, 이런 방식으로 허구한 날 대전 밖에서 "양위는 아니 되옵니다!"나 "역적 누구 누구를 벌하소서!"를 외치는 신하들을 보며 나름의 희열도 느꼈던 듯 하다. 물론 신하들은 대단히 피곤했을 것이다. 다만 충녕대군(훗날 세종)이 후계자로 확정된 후엔 진짜로 양위를 했다.

신하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며 각종 권모술수로 신하들을 쥐락펴락하는 능력은 단연 조선의 역대 임금들 가운데 최강. 후계자인 세종대왕이 방대한 지식과 철저한 논파를 통해 신하들을 정면에서 승복시키고 업무(공무)량을 늘려서(...) 괴롭혔다면, 태종은 순수 정치적 테크닉을 구사하는 경향이 월등히 높았다. 워낙 삶이 다사다난했고 문무를 겸비했으며 여색까지 밝히는 태종은 신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예측할 수 있었으며, 어떤 빌미든 걸어다가 철저하게 괴롭히는 주도면밀함도 있었다. 물론 태종도 신하들을 지식으로 능가하는 분야가 분명 있었고(장원급제자다!) 세종도 훈민정음(언문) 반포 당시 태종 뺨치게 권위적인 어법으로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하옥해 버렸지만 평상시의 스타일은 정 반대였던 것.

또한 외척 및 공신들의 숙청을 진행할 때의 연기력도 매우 탁월했다. 태종이 숙청을 진행할 때의 패턴이 따로 있을 지경. 그리고 이 패턴은 후대의 '조선 국왕들이 두고두고 써먹는 신하 길들이기의 방법' 중 하나가 된다.

  • 태종 본인이 정보를 흘리거나, 최측근을 통해서 숙청 대상을 처벌할 만한 꼬투리들을 일반 신하들에게 흘려낸다. 신하들이 이 정보를 입수하고 '○○란 자에게 죄가 있으니 마땅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 태종은 해당 인사에 대한 정보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놀라는 척 한다. '왕실의 외척', 혹은 '공이 큰 공신이므로 함부로 처벌할 수 없다'라며 처벌에 반대하는 척 한다. 그러면서도 처벌을 반대하는 것은 자신의 본심이 아님을 은근슬쩍 암시한다.
  • 신하들은 여기에 낚여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더 강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태종은 '신하들의 요구가 워낙 강하므로 어쩔 수 없이' 처벌을 한다. 단, '그래도 외척인데/공을 세운 공신인데 더 심한 처벌을 어찌 내리란 말인가?'라고 연기하며 처음엔 가벼운 처벌을 내리도록 한다. 그 와중에도 추가 정보를 흘려내서 신하들이 더 강한 처벌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 신하들은 또 여기에 낚여서 더 강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태종은 단계적으로 조금씩 처벌의 강도를 높여나가지 한번에 처벌을 완료하지 않는다.
  • 태종 자신이 원하는 수준으로 처벌의 강도가 정해질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한다. 이를 통해 '나는 외척과 공신들을 소중하게 대하고 싶지만 신하들의 주장 또한 따라야 하고 법도를 지켜야 하므로 내 본심은 아니나 어쩔 수 없이 처벌을 내림'이라는 명분을 확보한다.
  • 숙청 완료.

5.1. 심술의 군주

앞서 언급 했듯이 태종 이방원하면 무인의 이미지를 더 많이 떠올리지만 실제 그는 고려 시대의 과거에 급제한 문관, 즉 엘리트 공무원 출신이다. 이런 점에서 유추해볼 때 태종의 성리학 수준은 적어도 신료들과 비등했다 볼 수 있다. 이런 지식과 말꼬리 잡아 물고 늘어지는 치사한 수법, 게다가 여말 시절 관직 생활을 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정계의 여러가지 역학 관계를 모조리 꿰뚫어 보는 능력도 상당했다. 단순히 관직 생활만 한 것이 아니라, 정도전과 함께 아버지 이성계의 정적들을 견제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또한 그 스스로도 대권을 잡기 위해 숱한 피의 숙청과 왕자의 난을 겪으며 단련된(?) 사람이니, 권력관계나 정치에서 보이는 암투에 대해서는 도가 텄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다 이라는 권위와 위상까지 더해지면 신하들은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신하들을 갖고 노는 일화는 실록에도 많이 전하는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별궁 짓는 것을 신하들이 반대하자 '아니 그러면 지금 집도 절도 없는데 나더러 길바닥에서 이슬을 맞으면서 잠을 청하란 것이냐?'라고 버럭 했더니 신하들이 무서워서 우리 전하께서 성군이 되긴 글렀다며 통곡을 하자(!) '그냥 화 좀 내 봤다.'라며 넘어간 적도 있다. 참고로 결국 별궁은 자신이 짓고 싶었던 대로 지었다.
  • 창덕궁에 새로운 정자를 지어 놓고 당시 도승지였던 황희를 통해 신하들에게 새로 지은 정자의 이름에 대해 권근하고 의논했는데, 권근은 '청녕'이란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난 이거보다는 '해온'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든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다른 신하들에게 묻자 그들은 "아이고 최고의 이름입니다 전하"로 일관했다. 그러자 태종 가라사대, "임금이 뭔 말만 하면 신하들은 아부하기만 바쁘구나. 하여간 비위 맞춰주는데는 도들이 텄어. 쯧쯧. 권근이랑 다시 의논해서 결정하라."라고 받아쳤다. 결국 권근도 여기에 동의해서 정자 이름은 자기 뜻대로 해온이라고 지었다.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이 이야기의 출처는 태종실록 1406년 4월 9일자 기록.기사
  • 박자청이라는 신하는 대형 공사의 책임을 자주 맡아 태종의 신임을 받았는데, 어느 날 일꾼들과 현장에 앉아 있다가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이중위가 자기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가자 건방지다며 그를 붙잡아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중위는 형조에 고발하여 형조에서는 박자청을 벌할 것을 청했다. 박자청은 태종에게 폭행 사실을 부인했고 태종도 박자청을 신임했기에 벌을 주고 싶지 않았는지 "박자청은 과인에게 폭행한 사실이 없다고 맹세까지 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신하들이 "이중위도 맞은 게 분명하다고 맹세했습니다?"라고 말하자 태종 왈, "이래서 맹세는 믿을 수 없어. 이런 사소한 일에 일일이 죄를 주면 백성들이 안심하겠는가? 사직과 관련된 게 아니면 용서해야 하노라!" 참고로 사헌부에서도 박자청을 죄줄 걸 청했지만 박자청에게 벌을 내렸다는 기록은 없다. 결국 어물쩍 넘어가 버린 모양. 근데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일이 좀 커지면 이 박자청이란 사람은 임금에게, 그것도 태종 이방원에게 거짓말을 한 기군망상죄 혐의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왕권에 위협이 가지 않는 인물이다 싶으면 어지간한 것은 그냥 넘겼던 임금다운 일이다.
  • 상왕이 된 후 이랑 강원도 평강에 놀러갈 계획을 세우고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등을 불러 "내가 평강에 놀러갔다 오고 싶은데 수행원을 조금만 데려갈 건데 괜찮겠지?"라고 묻자 유정현은 "지금 한창 농사철인데 수행원이 적어도 임금이 두 분이나 가시면 곤란할 듯 합니다."이라며 반대의 뜻을 밝혔고 박은은 가도 좋다고 말했다. 태종은 바로 다음과 같이 말해서 박은을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영의정의 말은 내가 새겨 듣겠다. 그런데 좌의정의 말인들 어찌 망령된 신하라고 하겠는가''[12][13] 박은은 태종의 의중을 잘 읽어서 태종의 비위 맞추기 선수였다. 태종도 박은에게 힘을 실어 줘서 박은의 라이벌 격인 세종의 장인 심온 집안을 박살냈지만, 태종의 말은 박은의 아부를 돌려서 깎아내린 것. 세종 역시 박은을 두고 "아부밖에 모르는 신하"라고 힐난했다. 다만 그 덕분에 박살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 너무 유능했어도 숙청의 칼날을 피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말이다.
  • 역시 상왕이 된 후에 태종이 거처할 궁궐의 이름을 신하들이 수강궁(壽康宮)이라고 지어 올렸다. 목숨 수(壽)편안할 강(康)[14]을 쓴 좋은 의미의 궁궐 이름이었는데 이 궁 이름을 듣고 박은 등을 불러서 "수강궁이라면 옛날 남송 광종이 광증에 걸려 폐위당한 후 감금된 궁의 이름이다. 그런 이름을 왜 이 궁에 붙이는 건가? 이것은 <송감>[15]이라는 역사책에 나오는 얘기다"라고 면박을 주었다. 신하들이 당황하며 궁 이름을 다시 지어 올리겠다고 용서를 빌자 태종은 쿨하게 넘어 갔다.[16] 아버지에게도 공부 안 한다고 면박받고 그 아들에게도 공부 안 한다고 면박받은 조선 초기 신료들이 이쯤 되면 불쌍할 지경.
  • 목인해라는 인물이 공신의 자손이자 왕실 인척이었던 조대림이 역모를 꾀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이 있었다. 조대림은 개국 공신 조준의 아들이자 태종의 사위. 그는 당시 종친 중에서 유일하게 군부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는 태종이 군대를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조대림을 군부에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목인해의 고변 이전에 정보망으로 이미 무고 사건이라는 걸 알았는데, 그걸 뻔히 알면서 내버려 두었다가 역모 고변이 일어나는 시점에 조대림을 본인이 역모로 몰아 구금시킨 다음 맹사성 등에게 암묵적으로 지시를 내려서 조대림에게 곤장을 때리게 했다. 그 다음에 조대림이 무고하다는 걸 본인이 직접 밝힌 다음에 맹사성을 종친을 모함해 왕실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재빨리 가두고 사형선고까지 내렸다. 결국 두고 볼 수 없었던 조정 중신들의 사정 끝에 맹사성을 살려주는 결정을 내리는데 태종은 맹사성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사형장에 끌려갈 때 사면 결정을 내려서 망나니 칼이 목에 닿기 직전에 맹사성을 살려줬다고 한다. 조대림 사건 참고.
  • 즉흥적인 면모도 있었다.
    • 출중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세 장의 과거 시험 답안지 중 하나를 장원으로 뽑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사전에 검사한 시험관들은 셋 모두 수준이 거의 비슷하나 하나는 아주 약간 모자라고, 나머지 둘의 수준이 비등하다고 평가했다. 이에 태종은 답안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내가 집는 게 장원이야!"라며 한 장을 집어 장원 급제를 시켰다. 이 행운의 당첨자(?)가 바로 세종 시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인지다. 다만, 이 일화의 경우 실은 이미 정인지로 합격자를 내정하고서는 쇼맨십으로 저랬다는 분석도 있다.
    • 개성에서 한양으로 다시 돌아올 당시 도성을 다시 바꿀지에 대해서 논의가 오갔는데, 기존의 한양과 하륜이 주장한 무악(현대의 신촌)이 후보로 올랐다. 이에 대해 태종은 동전으로 점을 쳐보겠다고 했고, 종묘에서 점을 친 결과 한양을 도성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다만 이에 대해선 어차피 태종은 한양에 대해 마음이 가 있었으므로, 점을 쳐서 결과가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한양으로 밀고 나갔을 게 뻔하다는 것이 후대의 해석이다.

5.2. 사냥 애호가

정쟁(政爭)에서 참아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몇 년이고 참아가며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했으면서 자기 취미에 관해서는 자제심이 거의 없었던 모양으로 "전하께선 사냥을 너무 다니시니 걱정입니다."라고 간한 기사가 자주 나온다. 상왕이 되고 나서도 사냥을 가려고 은근슬쩍 아들인 세종대왕이 살이 너무 쪘으니 함께 사냥을 나가야겠다며 아들까지 끌어들여서 핑계를 댈 정도.

또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종묘에 나라의 일을 고하기 위해 신도(新都)로 가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사냥이 너무 하고 싶었는지 갑자기 발을 돌려 종묘에 고묘[17] 하기 위한 복장을 다 벗어던지고 신하들 몰래 혼자서! 사냥을 하러 간적도 있었다. 당연히 신하들이 깜짝 놀라 태종에게 쫒아와서 태상왕도 편치 않으시고 종묘에도 일이 있는데 이렇게 사냥하시면 참으로 곤란하다고 잔소리를 해대니 태종도 화가 났는지 아니 임금이 사냥하는 법이 없냐? 왜 이렇게 잔소리야라며 버럭 화를 낸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왕조 시대 왕의 사냥은 많은 이들을 피곤하게 했다. 왕을 수행할 수행원들은 물론이고, 사냥 가는 지역 수령은 임금이 자기 관내에 들어오니 당연히 초긴장 상태. 더욱이 그 지역 주민들은 왕의 사냥 준비를 도맡아 해야 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게다가 많은 군사들이 동원되어 몰이꾼 역할을 했으므로 여기에도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사냥터를 확보하기 위해 농지를 싹 갈아엎느라 한해 농사를 망치는 것은 기본.[18]

하여튼 이런 간언에 응수하는 것도 정말 고단수의 면모를 보여준다. 어떤 때에는 "내가 과거에는 붙었어도 원래 무인 집안 사람이라 가끔 몸을 움직여줘야 기가 잘 돈다"는 핑계를 대고, 어떤 때에는 "내가 원래 대궐에서 자란 사람이 아닌데, 매 사냥은 잠저에서 살 때부터 즐겨하던 것"이라는 핑계를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사간 대부 윤사영이 "3일 전에 우박도 내리고 분위기도 안 좋아서 반성부터 하셔야 되는데 전하는 왜 사냥으로 즐거움만 추구하시느냐"고 따지자, 태종은 "그래도 한 번 해볼 건데 그대들이 날 강제로 못 하게 할 것이냐"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태종실록》 권12 6년 9월 25일 신사 1번째 기사

그런가 하면 <대학연의>를 펴들고 "이 책에서도 사냥을 권장하고 있는데 왜들 지랄임?"이라고 온갖 핑계를 다 대서 결국 실컷 즐기고 돌아오곤 했다. 《태종실록》 권6 3년 10월 1일 을사 1번째 기사 그런데 일반 행정에서 자기 의견을 관철할 필요가 있을 때나, 자기가 좀 배운 사람이라는 티를 낼 때에는 앞서 보인 모습과는 반대로 "내가 무인 집안이긴 해도 과거 급제자 출신이라서…."라는 식이다. 이쯤 되면 도저히 말로는 이길 수가 없다.

다만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들을 두려워하여 사냥을 가도 "지금 나 사냥 온 거 사관들이 아는가 모르는가?"고 끊임없이 물어봤다고. 한 번은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부끄러운 것이 더 신경쓰였는지 "사관한테 내가 낙마했단 얘기하지 마라."라고 지시를 내렸다.

...라고 실록에 적혀있다. 즉 낙마한 사실과 그 얘기 하지 말랬단 사실까지 고스란히 사관이 듣고 사초에 적어 실록으로까지 편찬된 것이다. 그야말로 철혈 군주의 굴욕. 이 기록은 결국 태종실록 태종 4년(1404년) 2월 8일자 기사#에 남아 있다. 조선 왕조 실록과 사관의 위대함을 언급할 때 제일 많이 인용되는 기록 중 하나[19].

5.3. 여성 편력

이미 즉위 다음달부터 조선왕조실록에 아내의 투기를 피해서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없어 경연청으로 열흘 동안이나 도망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종실록》 권6 2년 12월 19일 기유 3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ba_10212019_003[20]

여자에 관해서는 그의 가족관계를 보면 잘 나타나지만 한 번은 김우와 황상이라는 무관이 한 기생을 두고 싸우는 폭력사태가 벌어지자 황상과 김우의 수하 양춘무 등 4명을 벌줬는데[21] 그래놓고 그 기생은 자기가 데려갔다[22] 이것과 비슷한 일화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에도 나온다. 다만 거기서는 그게 화가 되어 신하들이 역모를 꾸며 결국 나라가 망한다.

'영웅호색'이라는 말에 부합되는 인물이었던 만큼 사냥과 여자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자녀 많은 조선 군주 랭킹 1위가 태종. 슬하에 세종을 포함하여 12남 17녀(29명). 참고로 2위가 성종의 16남 12녀(28명), 다음이 선조의 14남 11녀(25명), 4위로 정종의 15남 8녀(23명)이다. 정종과 태종 두 형제의 소생 수만 해도 50명을 넘는다. 흠좀무.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후궁들을 들였는데, 그 중 신순궁주는 본인이 직접 유배 보낸 이직의 차녀였다[23]. 이직의 장녀는 원경왕후의 남동생인 민무휼의 부인이었으니, 한마디로 자기 처남댁의 동복 자매를 첩으로 들인 것. 또한 신순궁주는 당시 한 번 결혼을 했던 과부였고, 같은 시기에 후궁으로 들인 혜순궁주 또한 과부였으니, 이를 통해 여성의 재가를 금기시 하지 않았던 고려시대의 문화가 아직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간택후궁들도 여럿 들였지만 궁녀 출신 승은후궁도 많았다. 특히 원경왕후의 나인 출신인 효빈 김씨신빈 신씨가 있다.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태종이 총애한 후궁들은 원경왕후의 궁녀였다.

이처럼 여성 편력이 심했으니 자연히 부부관계가 매우 나빴다. 즉위 초기부터 원경왕후 민씨와 피터지는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남편이란 작자가 젊은 궁녀들을 처소로 끌어들였으니. 보통의 내명부 여인이라면 참고 견뎠겠지만, 원경왕후는 조선 역사상 가장 활동력 강하고 다혈질 성향인 왕비였다는 점이 문제.[24] 민씨는 태종에게 바가지를 긁고, 태종 역시 그에 못지않는 성격이라서 똑같이 화내다 보니 부부싸움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참다못한 원경왕후태종의 승은을 입은 궁녀를 벌주자 대노한 태종이 교태전 소속 궁녀와 내관들을 모두 궐 밖으로 내친 일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궁녀와 내관들을 내친 것이지만 원경왕후의 수족을 잘라버린 것이다.

태종은 그 이후에도 여자문제로 원경왕후와 박터지게 싸웠다. 원경왕후는 남편의 외도에 식음을 전폐하며 눈물을 쏟았지만 태종은 보란듯이 신하들에게 후궁의 법제화를 논의케 하였다. 그리고 제후는 9명의 부인을 둔다는 고사를 들며 가례색까지 설치해 9명의 후궁을 들였다. 당연히 원경왕후는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고 이후에도 마찰은 계속되었다. 그나마 마지막 배려인지 당시 태종의 첫 간택후궁이었던 의빈 권씨와의 성대한 혼인식만은 취소하고 단순히 궁궐로 들이는 것만 행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 후궁과 궁녀를 들였다.

유명한 예가 야사에도 자주 등장하는 효빈 김씨와 관련된 이야기다. 효빈 김씨는 본래 원경왕후의 친정에서 거느리던 노비였는데, 미모가 상당해서 태종이 그녀와 동침해 태종의 아이를 임신했다.[25] 그러자 원경왕후는 친정에 일러 김씨를 학대하게 했다. 실록의 표현에 따르면, 한겨울인 음력 12월에 만삭인 김씨를 문바깥에 방치하고,[26] 아기를 낳은 뒤에도 난방이 되지 않는 방에 방치했다. 몇몇 노비가 동정심에 이불 등을 가져다 줘서 김씨는 간신히 아기를 낳아 살릴 수 있었다.[27] 이 아기가 태종의 서장자인 경녕군 이비이다. 태종은 차마 왕비가 투기 때문에 이런 짓을 직접 저질렀다고 공표하기는 곤란해서[28], 민무휼과 민무회가 이런 학대를 멋대로 행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웠다. 물론 이에 대해 원경왕후가 항의한 것은 뻔하다.

계속되는 아내의 바가지에 지친 태종은 침소를 경연하는 곳으로 옮겨버리고 원경왕후 대신 궐 안의 살림을 대신할 규수를 찾아보라고 명을 내린다. 내명부를 다스리는 권한을 원경왕후에게서 빼앗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당연히 원경왕후는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고, 태종의 결정엔 절대로 간섭하지 않던 형인 상왕 정종마저 나서서 "나는 아들이 없어도 젊은 날의 정으로 사네. 주상은 아들도 많으면서 왜 또 장가를 들려 하는가?" 하며 만류했다.[29] 위에도 언급하였듯이 결국 가례색까지 설치했던 후궁간택은 정종의 만류로 없던 일이 되기는 하였으나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간택후궁과 승은후궁도 여럿 들이는 등 여자문제로 정처인 원경왕후의 속을 꽤나 썩였다.

하지만 이렇게 투닥거렸음에도 불구하고 태종과 원경왕후와의 자식은 4남 4녀(+4명[30])[31]로 매우 많다. 특히 태종은 원경왕후 사이에서 낳은 4명의 아들들을 매우 아꼈는데, 특히 성녕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 둘 다 너무나도 사랑해서, 12살에 결혼했음에도 궐 밖으로 보내긴커녕 죽을 때까지 궐 안에서 "어이구 내 새끼" 하며 키웠다.[32] 젊은 시절 자기 아들들 셋을 모두 잃은 과거 때문인지 태종은 원경왕후의 아들들에게는 대단한 아들바보였고 원경왕후와 아들 문제에 한해서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했다.

여담으로 이런 여성 편력은 과도한 외척의 권력 남용을 견제한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위에 나와있듯 태종은 공신들이 잘못할 땐 벌을 주더라도 외처로 보내는 정도로 끝냈지만, 외척들에겐 정말 심할 정도로 자비가 없어서 민제 일가 및 심온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고생 +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33] 이런 사람이니 중전에 대한 견제 목적[34]으로 여자를 밝히는 정치적 고단수가 숨어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그냥 여자가 좋아서인 거 같은데

5.4. 아들바보

철혈군주이며 온 천하를 호령했던 그에게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자식이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社稷)의 복(福)이 된다.’고 하였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자질(姿質)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개좌(開坐)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35]. 충녕대군(忠寧大君)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36].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치체(治體)를 알아서 매양 큰 일에 헌의(獻議)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생각 밖에서 나왔다. 만약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신채(身彩, 몸을 꾸밈)와 언어 동작(言語動作)이 두루 예(禮)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無益)하나, 그러나,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37].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壯大)한 놈이 있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不可)하다[38]. 충녕대군이 대위(大位, 임금으로서의 큰 자리)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유정현 등이, “신 등이 이른바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택현, 擇賢)도 또한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여, 의논이 이미 정하여지자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었다.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년) 6월 3일

이러한 철혈 군주의 이미지와는 달리 자신의 아들 앞에서는 매우 약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기록이 의외로 꽤 많다. 정작 애엄마인 원경왕후와는 상기했듯 여성 편력 문제로 감질나게 싸웠지만 아들들과는 말썽이 전혀 없었다. 특히 현대 세대의 증조할아버지 세대만 해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엄한 게 당연했던 걸 감안하면 오늘날의 시각이 아닌 당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분명히 아들바보가 맞다. 양녕대군의 수없는 망나니 짓도 끝까지 참으려고 했으며, 결국 양녕을 폐세자시킨 후에도 당시 태종과 사이가 매우 안 좋았던 중전의 핑계를 대며 양녕을 자신의 곁에 두며 가능한 보호하려고 했었다. 위의 기사에서 보듯이, 양녕을 폐하고도 목이 메도록 울었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세자시킨 것에서는 자식의 목숨도 포기하는 냉혈 군주의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정몽주나 정도전을 죽일 때처럼 많은 피를 흘리며 어렵게 새 나라를 건국하고 교통정리를 한 입장에서는 종묘사직을 위해 폐세자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이미 의정부, 육부, 사간원 등 모든 부서의 관료들이 연합하여 세자를 쫒아내라고 상소한 상황이라 무시할 수가 없었다.[39] 위의 기사 전문을 보면 점을 쳐보겠다 했다가, 왕비에게 의견을 구하는 등, 역시 굉장히 주저하고 있었음이 담담한 실록의 서술에서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역사의 뒷이야기를 아는 우리들은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는데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한 것은 당시 기준으로 사실상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왕조국가에서 한번 후계자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은 차기 왕에게 있어서 위험 요소 1순위이며, 만약 세종의 치세가 좋지 못하다면 거기에 반발하여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 세력이 양녕대군을 추대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명분도 혈통도 멀쩡하니 양녕대군을 구심점으로 사람이 뭉치기도 쉬울 테고 설령 다른 사람의 뜻이 없더라도 폐세자가 된 양녕대군 스스로가 앙심을 품고 반란세력의 수괴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태종과 주변 사람들이 살아왔던 여말선초 시기에 우왕, 창왕, 공양왕 그리고 1차 왕자의 난에서 희생된 이방석까지 왕의 자리에 있었거나 후계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실권을 잃거나 폐해지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봐왔을 것이다. 따라서 태종이 죽은 후 세종이 양녕대군을 숙청하는 것은 당시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매우 당연하고 바람직한(?) 시나리오였기 때문에 태종 입장에서는 아들을 죽이겠다는 선고나 다름없었던 것. 실제로 태종은 양녕대군이 종묘사직에 해가 된다면 죽여도 좋다라는 유언을 남겼고, 세종 때에도 양녕대군을 처형하라는 상소가 수없이 이어졌다. 물론 세종은 양녕대군을 죽이지 않고 끝까지 곁에 두어 모두의 예상을 빗나가게 했다.

양녕대군이 사라졌다가 돌아왔을 때 그를 꾸짖는 모습은 냉혹한 철혈 군주였던 그 역시 평범한 아버지였음을 보여준다.

양녕이 어둘 녘에 성안에 들어와 스스로 부끄러워서 옷소매로 낯을 가리고 수강궁에 나아가니, 상왕은 보고 슬픔과 기쁨에 잠겨 순순히 훈계하며, 또 이르기를, "네가 도망했을 적에, 주상이 듣고 음식을 전폐하며 서러운 눈물이 그치지 아니했다. 너는 어찌 이 모양이냐. 너의 소행이 너무도 패악하나 나는 특히 부자의 정으로써 가련하게 여기는 것이다."고 하였다. -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2월 1일

요즘식으로 말하면 방탕한 아들 보고 '이놈아. 니놈 가출했을 때. 네 동생은 밥도 안먹고 울기만 했는데(동생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냐),[40]아빠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네놈이 이렇게 막나가도 네놈 인생이 어찌될지 걱정하는 사람은 아빠밖에 없다!.'라고 탄식하는 여느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모습. 그래 놓고 이 말을 한 이틀 뒤에 양녕에게 "내가 눈물을 흘린 것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에 부끄러웠기 때문이다"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양녕대군이 세자 시절, 기생 봉지련과 정을 통하는 게 들통나서 봉지련이 쫓겨나자 식음을 전폐한 일이 있다.[41] 잘못을 하고도 오히려 떼를 쓰니단식 투쟁했다. 만약에 아버지가 군인 출신인 할아버지 같았다면 도끼자루 들고 두드려 팼겠지만, 아들에게 한없이 약한 태종은 굶은 아들 밥 먹이라고 봉지련도 풀어주고 비단과 고기까지 내려가며 아들을 달래기도 했다.

1회 면피용이나 다름없던 양녕대군의 반성을 알면서도 매번 믿으려 애썼고, 하도 공부를 안 하려는 양녕대군을 대전 옆에 두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감시하라는 신하들의 주청에도 그러면 오히려 부자 간의 사이만 나빠진다며 끝까지 아들을 배려해주었다.

그렇다고 양녕대군만 편애한건 아니다. 효령대군이 불교에 심취하자 신료와 유학자가 "왕자가 불교에 심취하는 건 좋지 않다."라고 토를 달자 태종은 오히려 "내 아들의 취미 생활인데 그거 가지고 질책하라는 거냐?"라고 신료들의 말을 씹었고, 효령이 원하는대로 불교에 심취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방해하지도 않았다. 숭유억불의 군주가 아들을 위해서라면 이례적인 예외를 두었다.

거기다 워낙 고기를 좋아하던 세종대왕이 큰아버지인 상왕 정종의 상중에 고기를 잠시 끊자 "주상이 고기반찬 없이 식사를 하시다니!"라고 기뻐했다는 기록도 있다.[42] 또한 유언으로 '내 상중에는 고기 반찬 드시게 해라'라는 말까지 남길 정도. 그 뿐만 아니고 한창 신덕왕후의 압박으로 입지가 위태로울 때 위의 세 아들은 잃고 넷째 양녕은 외가에 보내고 다섯째 효령은 다른 집에 맡기고 슬하에 남은 거라곤 갓 태어난 충녕대군뿐이라 애지중지하며 길렀다고 한다.

형제들과 꽤 터울을 두고 태어난, 적자 중 막내성녕대군의 경우는 몸이 약한 것도 있어서 그랬는지 결혼한 왕자(세자 제외)는 모두 궁궐을 나가서 살아야 한다는 법도를 깨고 결혼시킨 후에도 옆에서 끼고 살았다. 병약했던 이 아들이 병을 앓다가 결국 14살에 요절했을 때는 그야말로 낙심천만이었던 듯. 참고로 양녕대군은 막내동생이 요절해서 부모형제가 모두 슬퍼할 때 사냥하고 놀러다니고 술을 마셔댔다. 여기에는 태종도 인내심이 바닥나서 노발대발해 양녕에게 "사람의 마음이 없다."라고 했고 앙녕의 스승까지 "부모도 못 가르치는 걸 스승이 가르칠 수는 없겠지만 벌하지 않을 수도 없다."라고 책임을 물어 벌했다.

태종은 조선의 국시인 숭유억불 정책을 매우 철저하게 시행했고 심지어는 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자식들과 사위를 애도하기 위해 태조가 드리는 불공에 대해서도 잔소리를 할 정도로 불교를 혐오했는데 정작 성녕대군이 죽고 나서는 대자사(大慈寺)라는 절을 세웠다. 그것도 처음에는 한양 안에다가 절을 지으려 했다!!![43] 태종은 이 대자사를 대군의 무덤을 살피는 원찰로 삼았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여 부지와 절에 딸린 전답이 수만평이었고 그 규모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조선 최대규모였다고 할 정도. 아직도 그 사적지에는 당시 토기 파편이 어마어마하게 나온다. 죽은 성녕대군의 부인에게도 변한국대부인이라는 작호를 주고 후하게 대접했다. 다른 대군부인이 부부인 작호를 받은 것과 차이가 있다.

이후에도 성녕대군의 처갓집 사람들을 보면 아들 생각이 난다면서 슬퍼했고 거처를 옮기려고 했을 때도 지나가는 길에 성녕대군의 집이 있어서 울까봐 못가겠다고 중지한 적도 있다. 죽을 때도 세종에게 성녕대군의 처갓집 사람들을 공신의 예로 대우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 덕에 태종과 세종 시절에 그 집안 사람들은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심지어는 14살에 죽은 성녕대군이 제삿밥 못 먹을 것을 걱정해서 양자를 들여서 후사를 이으려고 시도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세종대왕 이후에 자신의 아들을 성녕대군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태종은 양녕 위로 아들이 셋이 더 있었는데 모두 어린 시절에 죽어버렸던 기억 때문인지 자식들에게 무르게 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태종 자신이 형제들에게 칼끝을 겨누고 피바람을 불러 일으킨 왕자의 난 중심에 있었기에 자기 아들들에게는 이러한 형제간의 피바람이 없기를 기원했기에 이런 태도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양녕을 폐세자하는 데 심각한 고민을 하는 것은 더더욱. 첫째인 양녕을 폐세자 시켜버리고 셋째를 국본으로 세우고 왕위를 잇게 한다면? 필시 양녕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왕자의 난의 주인공이었던 태종이니 만큼 필히 이 부분에 걱정을 했을 듯. 이 때문인지 아들 문제에 한해서는 평소 부부싸움을 벌이던 원경왕후와 뜻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원경왕후는 세자를 폐위시키고 바꾸면 자신들같은 일이 또 벌어질 거라면서 끝까지 반대했다.

아들에게 극진했던 것 때문이었는지 이후 세종은 국가 정책을 결정할 때도 태종 시기의 예를 들고 아버지께선 이랬을 것인가 하는 대목도 많이 보이고, 실록이 완성되었을 때는 실록을 보고 싶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희한하게도 더 선대인 태조가 아니라 무려 2번이나 태종실록을 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둘 다 주변의 반대로 보는 것을 단념하게 되긴 하지만. 이는 정치적인 선례를 참고하려는 공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화기애애했던 부자관계를 생각해보면 사적으로는 아빠와 함께 했던 일들이 적힌 기록들을 보고 추억할 목적으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오죽하면 두 번째 시도 이후 이틀만에 갑자기 태종이 태조실록을 본 적이 있는지를 주변에 묻고 없다고 하니 그냥 넘어갔는데, 아무래도 선례가 있으면 자신도 태종실록을 볼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으로 여겼거나 그냥 보고싶은 미련이 남아 한 말인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연산군사례와 함께 실록을 왕이 보는 것은 윤리적으로 어긋난다는 선례(물론 후자는 반면교사)로 남게 되어 조선왕조실록 편찬이 왕권으로부터 보호받게 되는 원인이 되어준다.

5.5. 부엉이 공포증

냉혹한 군주라는 이미지가 강한 태종이지만 의외로 부엉이를 몹시 싫어하고 심지어는 두려워하기까지 했다[44]. 부엉이 그래봬도 맹금류인데

태종 6년 8월 5일에 부엉이가 경복궁의 누각과 침전에서 울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며칠 뒤인 8월 13일에는 부엉이가 경복궁 근정전에서 울었고, 그 다음날인 8월 14일에는 경복궁 침전에서 울었으며 그 다음날인 8월 15일에는 침전과 근정전에서 울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었다. 8월 18일에는 창덕궁 서쪽 액정에서, 8월 19일에는 전농시의 제기고에서 부엉이가 울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연달아 부엉이가 나타나자 태종은 대단히 불안해했는데 9월 1일에 양녕대군에게 양위할 뜻을 내비쳐서 파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양위 소동은 태종의 술수이기도 했으나 어쨌든 부엉이 때문에 신경이 거슬렸던 건 분명한 듯 하다. 부엉이 때문에 성밖으로 이어[45]하려고 하자 대간에서 상소를 올려서 이를 반대했는데 태종은 이 상소에 대해서 이런 비답을 내렸다.

“몸을 삼가고 행실을 닦는 것이 비록 고론(高論)은 되지만, 내가 옛글을 보았더니 이어(移御)하였다는 글도 없지 않았다. 오늘날 야조(野鳥)가 집으로 들어오고, 또 지붕 위에서 우니, 술자(術者)가 말하기를, ‘다른 곳으로 피하여야 합니다.’ 하고, 또 근일에 태백성(太白星)[46]이 대낮에 나타나고, 다시 헌원성(軒轅星)을[47] 범(犯)하게 되어, 내 마지못해 이렇게 하는 것이니, 그대들은 많은 말을 하지 말라.”

이어를 논할 정도로 부엉이가 파문을 일으킨 가운데 9월 3일에도 부엉이가 근정전에서 울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부엉이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 된 태종은 여기저기로 이어를 하기도 하고 궁궐 수비대에게 잡귀를 쫓는 방상씨탈을 쓰고 경계 근무를 서게 했는가 하면 부엉이를 쫓으려고 한밤중에 궁 전체에 불을 환하게 밝히도록 명했을 정도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엉이는 불길한 새로 여겨지긴 했지만 태종의 반응은 거의 노이로제 수준인데,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태종이 신덕왕후 강씨의 원혼이 부엉이로 나타났다고 여겨서 부엉이를 질색하고 무서워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부엉이를 밀본의 수장인 정도전의 환생으로 여겨 태종이 질색했다고 묘사되었다. 정도전이 태종의 최대 걸림돌로 나왔기 때문에 이를 부각시키는 극중 장치로 보인다. 동시에 밀본의 조직원이 암살을 행할때 부엉이 울음소리가 나오는 피리를 썼다.

5.6. 관대한 면모

외척이나 공신들을 냉정하게 때려잡던 모습과는 달리, 일반 백성들에게는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철저하게 왕권에 위협이 될 자들만 숙청하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관대한 모습을 보인다. 아니, 앞에 링크되어 있는 홍무제보다 훨씬 백성들에게 관대하게 행동했다.[48]

  • 아이들이 혜정교 거리에서 공에다 주상(=태종), 효령군, 충녕군 등의 이름을 붙이고 차면서 놀다 잡혀온 일이 있었다. 일반인 이름 가지고 저래도 욕먹을 일인데, 저 시절은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 피휘도 하던 시절이었고, 특히 혜정교는 오늘날 광화문 교보문고가 있는 곳, 즉 궁궐 코앞에서 이런 놀이를 한 것이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갓 건국된 조선 왕조 입장에서는 애들이고 나발이고 개발살을 냈어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태종은 애들이 뭘 알고 그랬겠냐? 요사한 말을 처벌하는 법도는 요런 데 적용하는 거 아니다. 라고 직접 사태를 무마했고, 다시는 이 일을 논하지 말라고 어명을 내려 뒷말이 나올 여지도 차단했다. 태종 25권, 13년(1413년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2월 30일(기묘) 1번째 기사 현대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전근대 시대의 전제군주가 저 정도의 아량을 발휘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 '조서[49]'라는 관리가 친구를 궐에 데려와 숙직실에서 같이 잔 일이 있는데, 친구가 아침에 나가려다 길을 잃고 헤메던 중 태종의 침전에 들어가 버렸다. 고관대작이라도 왕의 침전에 허락없이 들어가는건 매우 무례한 일이고, 암살의 위험도 있기에 큰 벌을 받을만한 일이다.[50] 뜬금없이 외부인이 나타나서 궁인들이 기겁하고, 이 사람도 당황하여 '나가려 했다'고 변명했는데, 태종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니 괜찮다'라고 하고, '남들이 알면 법대로 처벌하자고 할테니 이 일은 알리지 말고, 넌 빨리 가라.' 하며 내보냈다.
  • 시골에서 상경한 '손귀생'이라는 사람이 창덕궁을 봤는데, 난생 처음 보는 크고 아름다운 건물에 감탄하여 멋도 모르고 들어와 돌아다니며 구경하다 광연루에서 붙잡혔다. 순금사에서는 곤장 80대를 선고했는데, 곤장 80대면 사실상 때려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태종은 모르고 한 일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며 방면했다. 태종 17권, 9년(1409년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4월 18일(경인) 2번째 기사 여담으로 이 때 태종이 앞서 있었던 조서 친구의 이야기를 직접 하면서 사면의 근거로 제시했다.
  • 1403년 5월 5일에 경상도 조운선(물길을 통해 조세를 한양으로 운반하는 배)가 무려 34척이나 침몰해 사람이 많이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해당 실록 기사) 실록을 보면 사망자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고 신하들이 천여 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걸 보면 엄청난 대형 참사였다. 이때 생존자 한 명이 도망가다가 붙잡혔는데, 머리를 깎고 이 조운을 운반하는 힘든 일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는 말을 했다. 이를 듣고 태종은 이렇게 탄식했다.
>책임은 내게 있다(責乃在予). 만인(萬人)을 몰아서 사지(死地)에 나가게 한 것이 아닌가? 닷샛날은 음양(陰陽)에 수사일(受死日)이고, 또 바람 기운이 대단히 심하여 행선(行船)할 날이 아닌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실로 백성을 몰아서 사지(死地)로 나가게 한 것이다.그리고 "쌀은 아까울 것이 없지만 사람 죽은 것이 대단히 불쌍하구나.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라고 탄식하면서 조운하는 작업이 힘들어서 도망치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 신하가 "그렇다고 조세를 육로로 옮기면 어려움이 심합니다"라고 발언하자 태종은 "육로로 운반하면 소나 말이 수고를 할 뿐이지, 적어도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51] 이 일은 세월호 참사 이후 이어지는 2016년의 정국을 비판하는 JTBC 뉴스룸앵커 브리핑에 인용되기도 했다.
  • 자신이 직접 죽인 정도전도 그 과정과 결과를 감안할 때 의외로 사후 처분은 관대했다. 이런 정치 숙청을 단행할 때는 역모 혐의를 적용해서 말 그대로 가문과 명예를 박살내고 다시는 복권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매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태종은 정도전 본인에게만 '종친모해죄'라는 다소 어정쩡한 죄목을 붙이고 명예를 추탈해을 뿐, 정도전의 부인 및 자녀들은 잠시 노비로 전락했다가 몇 년 뒤에 곧 복권시켜서 정상적으로 벼슬살이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52] 이후에도 정도전의 후손들은 별다른 연좌제의 피해를 입지 않고 일반적인 사대부 집안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성종, 연산군 때 정문형이라는 정도전의 증손자는 정승이 되기도 했을 정도 물론 국가공인 역적(?)이었기에 선조 때 최영경은 호가 삼봉이란 이유로 잡히기도 했고 광해군 때 허균을 고발한 기자헌의 아들은 그 사유 중 하나로 정도전을 현인이라 칭했다는 것을 들었다.

6. 세조와의 비교

손자 세조
행적은 비슷하나 평가는 서로 갈린다.

본인보다 정치적인 상관이었던 혈육을 죽인 점,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6조 직계제를 시행해 의정부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는 공통점 때문에 태종은 손자 세조와 자주 비교된다.

그러나 태종이 제거한 이방석의 경우 태조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는 하나 둘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가 첫째 부인의 장성한 형들을 제치고 후계자가 된 모양새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책봉 당시에도 잡음이 많았다. 수백 년이 지난 현재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구설수에 오르는데[53] 한 개의 대기업조차 그래서는 아니 되거늘 한 나라의 왕조는 오죽할까? 하물며 유교적 가치를 건국 이념으로 세운 조선에서는 어떠했겠는가. 심지어 당시는 건국 초기라 정통성 면에서 잡음이 나올 가능성을 최대한 줄여도 모자랄 때였다. 이 때문에 적어도 명분면에서는 납득할 만하다는 평이 많다.

반면 세조가 축출한 단종은 조선 역사상 유일한 원손 - 세손 - 세자 - 국왕 테크를 타서 최강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약점이라면 나이가 너무 어린 것밖에 없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게 세조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 이 부족한 명분 문제는 세조 당대 뿐만이 아니라 두고두고 조선 왕실의 발목을 잡았다.

단, 이미 언급된 것과 같이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단순한 두 번째 부인이 아니라 정식으로 왕비로 책봉된 당시까지도 살아있던 국모였다. 또한 이방번이 세자가 되지 못한 점은 혼인 관계 탓도 있었다. 이방번은 정양군 왕우의 딸과 혼인을 했는데 만약 이방번이 세자가 되면 이성계는 왕씨 가문과 사돈을 맺은 격이 되기 때문에 신료들이 반대를 했다. 즉, 이방석은 이성계가 유별나게 아껴서 세자가 된 것이 아니다. 왕후의 아들 중 가장 결격 사유가 적으면서도 나이로도 많은 편에 속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이방석 문서 참조.

왕이 된 다음의 행보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자신이 조직의 보스이고 두 차례나 되는 왕자의 난을 통해 반대파들을 쓸어버린 태종은 기본적으로 가진 월등한 능력과 힘, 공적(그 자신이 왕조 메이커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증명이 되었다.)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중앙집권과 왕권강화를 추구했고 공신들도 너무 크기 전에 적당히 권력에서 멀어지게 하였고 어떨 때는 숙청도 적절히 하여 세종이 다스릴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세조는 그 자신이 조직의 보스이기보다는 대표였을 뿐이고 당장 계유정난을 통해 집권하는 통에 사방이 적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라 자신을 따르는 공신들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는 차이가 있었다. 당장 옆에 단종을 복위시킨답시고 사육신, 생육신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밖에서는 이징옥의 난이나 이시애의 난 같은 것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이시애의 난은 중앙집권화로 인한 권력 상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토호의 난이지만 이징옥의 난은 아예 자신을 대금 황제라고 칭하며 독립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했다.

태종이 간관과 사관의 행동에 크게 제재를 가하지 않은 것은 굳이 크게 손을 안대어도 왕권이 단단했기 때문이고 세조는 이렇게 안하면 반대파들이 자신을 허수아비로 뜯어먹거나 세조 자신이 했던 것처럼 아예 폐위를 시킬지도 모르므로 억제와 제재를 가할 수밖엔 없었다. 경연을 폐지한 것도 그 중 하나.[54] 당장 옆에서는 사육신, 밖에서는 이시애의 난 같은 게 벌어지는데 경계를 안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 태종은 이미 반대파들을 쓸어낼 대로 쓸어내버린 다음이라 거기서 더 쓸어낼 필요도 없고 어지간히 공격받아도 그걸 빌미로 자신을 끌어내릴 반란 분자도 없었기에 굳이 쓸어낼 필요도 없어서 간관은 물론 사관들에게 스토킹에 가까운 간섭을 받고, 본인도 간관과 사관을 혐오하는 성향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사관의 언론 활동을 통한 대신 견제를 목적으로 사관들을 인정하고 대신들로부터 보호해 준 것이다.[55]

그러나 세조는 전조 말부터 난세를 다 끝내고 집권한 태종과 다르게 아예 난세 한복판에 자신이 서 있게 된 상태에서 집권을 했다. 당장 과전법이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신하들의 토지겸병, 세종 말기부터 이어져 온 신권강화와 왕권추락으로 인해 단종시기부터는 김종서, 황보인 등이 정도전이 꿈꿔왔던 재상 정치를 하게 된 것을 보고 자신이 계유정난을 통해 집권한 것이다. 그러니 자기를 따르는 공신들을 제외하면 전부 잠재적인 적이나 다름이 없었고 실제로도 사육신과 생육신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옆에서 단종 복위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한편 전조 말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정예병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라져 갔다. 팽배수와 중기병의 비율이 낮아진 것은 조선중기의 군사력이 약해진 이유였는데,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고려 공양왕시기 과전법을 실시하여 이전까지 개인에게 분급되었던 수조권을 모두 국가에서 회수하여 관료들에게 관품에 따라 18등급으로 수조권을 분급하여 경제적 기반을 보장해 주었다. 다만 이러한 조치는 수조권에 한한 것으로 본래부터 개인이 소유한 토지는 재분배 대상이 아니었으며 대상도 전국단위에서 경기로만 한정하였다.

토지를 개혁했지만 근본적으로 화폐경제체제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토지중심 경제체제이므로 힘있고 권력있는 자들은 과전법으로 받은 토지를 국가에게 돌려주지 않고 수신전, 휼양전 같은 예외적으로 일부 토지를 한시적으로 가질 수 있는 제도를 이용, 편법으로 상속을 하였고 이로인해 토지겸병이 점점 심해지게 되었다. 1/10 과세 원칙을 정하여 1결당 최대 2석(石)까지만 수취하도록 했던 것도 지키지 않고, 수조권만 주었는데 아예 토지를 소유해 버리는 건 덤.

문제는 그저 토지문제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관료들에게 땅을 지급해 줘야 할 땅이 모자르니 점점 그 대상이 확대되었고 결국에는 기존체제로는 정규군의 병력 수요조차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까닭은 기본적으로 세조 이전의 조선의 군사체계는 양인개병제가 아니라 엄연히 말하면 전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세병제에 가까워서 지정된 군호에서 병사들을 차출해 병력 수요를 채웠는데 군호로 지정된 사람들이 장비와 보수 마련자금의 재원인 곡식을 재배할 만한 땅을 관료들에게 지급하면서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세종 말기와 문종시기를 지나며 심화되었다.

이렇게 되면 왕권은 떨어지고 신하들의 세력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세병제의 장점은 팽배수와 중기병 같은 훈련만으로는 기르기 힘든 병종들을 비교적 수월하게 수급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러면 병력 수급이 점점 힘들어진다. 물론 근접전을 수행할 장검류나 장도류들을 든 도수가 있지만 이들은 기존 오위체계 내에서도 팽배수를 지원하도록 되어있지 이들이 도펠죌트너처럼 일선에서 싸우는 역할이 아니었다. 창병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근접전 무기가 아니라 조준하고 찌르고 활이나 쇠뇌를 휘두르듯이 휘둘러 근접한 적에 저항하는 비소모성 원거리 무기에 가까워서 이들에게 근접전을 맡길 수도 없었다.

창병들의 육성도 쉬운 게 아닌 게 굳이 창병 문서로 갈 필요도 없이 세조 이후 조선 후기인 1625년에 경기도 속오군에 화포수(火砲手) 3000명, 장창수(長槍手) 1000명, 대검수(大劍手) 1000명씩을 조직하기 위해 무기를 조달하려고 했지만 10년 뒤인 1635년에도 창대로 쓸 목재 조달이 되질 않았다. 조총(조선군에서는 조총병이 화포까지 맡은 듯 하다고)들이나 장검들은 어떻게 조달이 되었는지 별 큰 언급이 안되었지만 창은 전혀 그렇지 못했는데, 대놓고 구굉이 장창 1000개를 만드려고 하는데 자루가 없어서 자루로 쓸 만한 나무를 구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 경기도의 참나무는 너무 무거워 들 수도 없어서 가시나무나 종가시 나무를 써야하는데 그럴만한 나무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식물의 특성상, 같은 품종이라 해도 자라는 환경에 영향을 받아서 좋은 목재가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게 더 문제. 창을 제대로 만들 경우 창대로 쓸 재료의 문제(아무 나무나 쓸 수 없다)와 제작 난이도 문제(가운데에 심에 쓸 목재와 주변부에 결합할 부품 등)로 인해 후대에 등장할 총보다도 비쌌다. 조선기준 조총가격이 3.5석일 때 창대가격만 2석이었다.

그리고 창병도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이, 공격력을 가진 질량 벽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절대 진형을 흐트리면 안되었다. 즉 피할 수 있는 화살이나 투창, 단검들을 맞고 죽을지언정 절대 진형을 흩뜨려서는 안되었다. 타 병종과 달리 창병은 진형을 흩뜨리는 순간 그 존재가치가 거의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 기예로 잔뜩 창술을 익힐 수 있겠지만 전장터에서 창이 요구하는 포지션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었고 개인 기예로 익혀봤자 어지간해서는 다른 무기들에게 취약했다. 오죽하면 일본에서도 칼이 없으면 봉을 들고 봉이 없으면 주먹으로 싸우라 했다. 무로마치 시대의 부상 주요 원인 보병이 기병에 상대 할 때의 팁

실제로 조선 선조도 피난 중 명군에게서 장창을 받아보고 장창을 만드려고 하는데 장창으로 만들 목재 재료가 부족하다(구득할 방법이 없다)는 보고를 받고 대나무 대를 이용한 창을 쓰라할 정도였고 인조도 조선에서는 창이 요긴한데 우리나라에서는 대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일이 매우 형편없다. 각별히 정밀하게 만들어 정벌하는 데 쓰는 것으로 삼으라는 말을 할 정도.

이전 정권을 규탄하며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세조도 이 문제는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현직 관료에게만 수조지를 분급하도록 하고, 사망한 관리의 아내나 자녀에게 수조지를 상속하던 규정을 폐지하는 직전법을 실시했지만 국가가 지는 부담이 가중되는 속도만 늦춰졌을 뿐이다. 토지 수조권 분급의 원칙에 근거하였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서 손을 더 대었다가는 가뜩이나 전조 말기부터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느라 권력을 빼앗긴 각지의 토호들의 불만이 높아진 상황에서 중앙관료들까지 합세하면 이징옥의 난[56]이나 이시애의 난 같은 것이 어디서 얼마나 다시 발생할지는 아무도 몰랐으며 당장 단종 복위 운동이랍시고 사육신과 생육신이 벌어지는 판에 계유정난같은 일이 다시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4군 6진 같은 새로 영토를 확장한 지역에 전가 사변같은 북방 사민 정책을 시행하고 원주민들의 지지도를 올리기 위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지 않고 그 지역의 토호를 토관으로 임명했으므로 이들에게 중앙정부의 힘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병력의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진북정, 정해서정 같은 원정을 자주 하다보니 병력의 수요는 점점 늘어났다. 결국 보법을 실행해 이전시기 군호지정 같은 것이 아닌 양인개병제로 바꾸어서 3명 단위로 묶어 1명은 정군, 나머지 2명은 보인으로 돌아가면서 군 복무를 하도록 해 정규군의 수를 15만 정도로 불렸다. 인사고과에서 활을 중요시하기 시작한 것도 덤. 이렇게 하면 숙련도는 개나 주는 꼴이 되어버리므로 숙련도가 중요한 팽배수와 중기병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즉 3차 포에니 전쟁 이후의 로마나 3세기부터의 로마처럼 재원은 부족해지고 반란 등으로 병력수요는 이전시기보다 더 늘어났으므로 임시 방편으로 돌려막기를 추구한 것이 세조의 정책이다.

게다가 계유정난에 가담한 공신들에 의해 훈구파가 형성되고 세조 이후 성종이 들어오면서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된 사림파들이 기득권층으로 변질되어 이로 인해 양인이 감소하여 군인층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팽배수들이 각종 역사에 동원되면서 점차 양인들 사이에서 기피되고 천인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신량역천으로 변질되어 팽배수들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이외에 세조도 6조 직계제 말고도 나름대로의 업적이 있다. 식읍을 폐지했다는 것과 향, 소, 부곡민 문제를 다 마무리 지었다는 점, 그리고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과전법을[57] 직전법으로 바꿨다는 점에서는 업적이 있다. 그리고 간경도감을 설치해 불경을 간행했으며 원각사와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만들어 수험생들을 열받게 하는 업적을 세웠다. 그리고 원상제라는, 재상들이 승정원에 항상 출근해 세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게 하는 일종의 대리 서무제를 실시하기도 했고 상평창을 부활시켰으며 팔방통보라는 전폐(화살촉 화폐)를 유통시키려 시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세조는 중앙집권제의 확립을 마무리 지어서 이시애의 난이라는 부작용이 있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 시기에 들어 조선은 전국에 수령을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유교정치의 근간을 이룰 율령인 경국대전의 편찬을 개시했다. 그리고 규장각이라는, 왕을 위한 싱크탱크겸 재교육 기관을 만들기도 했다. 이 규장각의 경우 사림이 얼마나 싫어했는지 세조가 죽자마자 폐지되었으며 정조가 다시 만들기 전까지 재건되지 않았다. 총통위가 사라졌지만 일부에서 말하듯이 화약무기를 억압하는 것이 아닌 각 부대가 알아서 사용하게 하는 것. 집현전이 없어졌다고 해서 집현전의 기능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총통위를 없앴다고 해서 화약무기 사용을 안한 것이 아니다.

즉, 그 나름대로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그 자신의 여력의 한계로 못한 것이다.

7. 태종우

야사에 의하면 태종이 승하한 날인 음력 5월 초열흘날(10일)에 비가 내려 이를 '태종우(太宗雨)'라 불렀다고 한다. 용의 눈물이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다.

태종이 만년에 노쇠하여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에 날씨가 오래 가물어서 내외의 거의 모든 산천에 두루 기우제를 올릴 정도였다. 상이 이를 근심하여 이르기를, “날씨가 이와 같이 가무니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산단 말인가. 내가 마땅히 하늘에 올라가서 이를 고하여 즉시 단비를 내리게 하겠다.” 하였는데, 과연 이튿날 상이 승하하고 이어서 경기 일원에 큰비가 와서 마침내 풍년이 들었다. 이후로 매년 이날에 비가 오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일러 태종우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기록인 임하필기.출처:한국고전종합DB

조선 전기의 문신 이행(李荇 : 1478년 ~ 1534년)(성종 대의 사람)의 시문집인 용재집에 이미 "태종우를 갈망한 지도 오래건만 / 久望太宗雨"이라는 문장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된 전설로 보인다. 인조 때의 기재잡기(박동량의 책)에도 "5월 10일에 내리는 비를 사람들이 태종우(太宗雨)라 하는데, 이백 년 동안에 금년에 처음으로 비가 내리지 않아 식자들이 은근히 걱정하였다."라는 문장이 있다. 그리고 이때의 연도가 태종이 세상을 떠난지 172년이 지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였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정유년 일기 음력 5월 10일)에도 '오늘은 태종의 기일이다. 이 날에는 날마다 비가 내린다고 하던데...'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 때 이순신 장군이 이 비를 '태종우'라는 명칭으로 인식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치는 않다.

경종, 영조 때에는 조선왕조실록에도 태종우 전설이 나오고, 영조 40년 갑신(1764년) 5월 10일에 비가 내리자 영조가 "이는 선조들이 주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대의 왕실도 이미 태종우를 정설로 받아들인 듯 하다.

고종 때는 태조우(太祖雨)까지 생겨났다.

“지난해 오늘 과연 단비가 쏟아졌었다. 5월 24일(이성계의 기일)에 내리는 비를 ‘태조우(太祖雨)’라고 하고 10일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한다. 이는 전해 내려오는 말이다. 하늘을 오르내리시는 성조(聖祖)의 영령들께서 백성들의 일을 안타까이 염려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저승에서 감응하는 것이다.”승정원일기, 고종 10년 계유(1873년, 동치 12) 5월 24일 (신축)

출처:한국고전종합DB

사극 용의 눈물 마지막 장면에서 태종이 기우제를 지내는 장면은 바로 이 태종우 전설을 토대로 각색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매년 음력 5월 초열흘 즈음이 되면 인터넷 뉴스 등지에서 꼭 태종우 관련 뉴스나 칼럼 등이 올라온다.

그런데 실제로는 태종이 죽을 때쯤, 1422년의 기록을 뒤져보면 다른 해에 비해서 비가 많이 왔다고 한다.#KBS <과학의 향기> 2005년 11월 19일에 방송한 태종의 비와 세종의 햇무리를 참고하라. 관련 기사

기상청 자료를 토대로 1960년부터 2015년까지 음력 5월 10일의 강수 여부를 조사한 결과, 총 56년 중 비가 온 날은 30번[58]뿐(??)이다. 대한민국의 6월 평균 강수 일수는 10일[59]이므로, 기댓값인 18.7번보다는 11번이나 비가 더 온 셈이지만... 그저 전설은 전설일 뿐이니 웃고 넘기자.[60] 연도별 음력 5월 10일 강수 현황은 다음과 같다.

  • 2012년 6월 29일 : 중부 지방에 몇달동안 극심한 가뭄이 지속되다가 오랜만에 이 날에 단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었다.
  • 2013년 6월 18일 : 비가 내렸다.
  • 2014년 6월 7일 : 비가 오지 않았다.
  • 2015년 6월 25일 : 소양강댐까지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가뭄이 심각한 상황에서 6.25 전쟁 발발인인 6월 25일에 중부 지방에 비가 내렸다.(물론 남부 지방은 그 전날 비가 내렸다)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유행과 가뭄이라는 쌍연타를 맞고 휘청인 대한민국을 어엿비 녀겨 하늘나라로 간 태종이 비를 내린 듯 하다...
  • 2016년 6월 14일 : 비가 내렸다.
  • 2017년 6월 4일 : 비가 오지 않았으나, 윤달이 끼는 바람에 윤달로 음력 5월 10일이 되는 7월 3일에는 장마가 시작되면서 강원, 충청, 경북 일대에 호우 특보가 내려졌고 제주도 남쪽 해상에서는 태풍 난마돌까지 북상을 하다 결국은 일본으로 가서 소멸했다. 무리수를 두자면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태종이 윤달로나마 비를 뿌리고 간 셈이다.
  • 2018년 6월 23일: 비가 오지 않았으나, 이틀 후인 25일 밤부터 전국에 장마가 시작되었다. 월드컵 보느라 타이밍을 놓치신 전하 그리고 조선은... 16강 탈락으로 전하께서 화가 엄청 나신듯...아니면 마지막에 독일을 꺾어서 기쁨의 대성통곡을 하셨거나(...)
  • 2019년 6월 12일: 비가 오지 않았다.
  • 이 태종우는 80년대 MBC 어린이 드라마였던 '댕기동자'에서도 언급되기도 한다. 주인공 댕기동자가 햇빛이 쨍쨍한 날 우산을 들고 등교하며 "오늘은 비가 올 것이니라..."고 하자 반 친구들이 일기예보에서도 비가 안 온댔는데 뭔 소리냐면서 무시했지만, 댕기동자가 태종우의 유래를 반친구들에게 알려주며,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예고에도 없는 비가 내리면서 결국 댕기동자를 제외한 나머지 반 친구들은 비를 쫄딱 맞으며 하교를 해야 했었다는 에피소드로, 이 에피소드를 통해 태종우를 처음 알게 된 당시 국딩들이 많았다.
  • 재밌는 것은 중국에도 태종우와 비슷하게, 특정한 날에 항상 비가 온다라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흑룡강을 다스리는 흑룡이 있는데 이 용은 원래 산동성 지방에 나고 자랐기 때문에 흑룡강을 건너는 사람이 산동성 사람이면 절대 침몰시키지 않았고 매년 음력 5월 13일이면 산동성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묘에 참배를 하였기 때문에 산동성에는 이 날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산동성이 한국과 매우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뭔가 지역적인 기후현상이었을 가능성도 있을 듯하다. (출처 : 도교의 신들, 마노 다카야 저, 들녁, p.214)

8. 사극에서

아마도 훗날 세종이 조선조 최고의 성군이 된 것은 태종의 이러한 철저한 정지 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 볼 때 태종이 한 일이 어찌 세종보다 가볍다 할 수 있겠는가!

용의 눈물 마지막 회 나레이션 中

여말선초라는 시대적 격변기에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 간 인물이며, 조선 왕조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하고 인상적인 행보를 보인 군주라 사극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다. 특히 여말선초 중 조선 건국 편에서는 주인공으로 나오는 확률이 높고 조연이더라도 주연급이라도 해도 좋을 정도의 비중을 할애받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태종을 가장 잘 표현한 드라마로는 1996년부터 방영된 용의 눈물에서 유동근이 연기한 이방원이 꼽히고 있다. 사실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 자체가 원작[61]에서 태종 부분을 들어내서 만든 것이니 진주인공이다. 애초에 용의 눈물이라는 제목 자체가 태종을 말하는 것이다. 김무생이 연기한 첫 부분 주인공인 이성계 파트부터 조용하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를 잘 표현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후반부에 와서는 그야말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고증에 정말 많은 신경을 써서, 아버지 이성계와의 갈등은 정말이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과 매우 유사하였다.

나중에 이성계가 조사의의 난에서 패배한 후 궁으로 돌아오자 그 앞에서 "아바마마! 소자의 춤을 보시옵소서!"라며 어린애처럼 춤을 추다가 아버지 품에 안기며 화해하는 장면은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링크 이후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를 떠올리며 용상 앞에서 "아바마마! 소자가 잘못했사옵니다!" 하며 오열한 연기도 일품이다. 또한 "모든 악업은 내가 지고 갈 터이니 주상께선 성군이 되시오."라는 불후의 명대사를 남겼는데 이것이 태종의 성격과 군주관을 잘 나타내는 명언이 되고 있다.링크 이 말은 실제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신왕으로 즉위한 세종에게 한 말이기도 하다.

게다가 태조 이성계의 죽음 이후 자신의 집권기의 내용 또한 볼만하다. 이숙번을 쥐락펴락하는 모습, 가만히 지켜보다가 양위 소동을 일으켜 민씨 형제를 촘촘한 그물망 속으로 빠뜨리는 모습 등에서는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을 정확히 반영한 노회한 책략가의 모습 그 자체. 이숙번이 민씨 형제를 경계하라고 진언하니 되려 이숙번더러 '사람이 변했다, 제 몸 보신을 위해 남을 헐뜯는 법도 배웠는가'라며 힐난하곤 듣는 척도 안하더니, 그 이후엔 아주 천연덕스럽게 민씨 형제를 장남과 차남, 그 뒤에는 삼남과 사남까지 사지로 밀어넣는다. 이 과정에서 원경왕후 민씨와 엄청난 갈등을 벌이면서도 태연하게 이숙번을 방패로 내세우는 장면에서는 소름이 끼칠 지경. 정작 이숙번은 민씨 형제의 세력을 가볍게 견제하고 위축시킬 생각이었을 뿐인데 태종이 막상 강경하게 박살을 내려고 하자 당황한다. 그래서 이숙번은 민씨 형제를 추궁하라는 태종의 명을 사양하는데, 태종은 그런 그를 보며 또 사람이 변했다면서 핀잔을 준다. 표적이 된 자들은 철저히 몰아붙이는 것도 모자라서 그 반대편에 있는 신하들조차 오들오들 떨게 만드는 모습이 백미.

여기서 끝이 아니다. 양녕의 폐세자 이후 새로 세자로 책봉된 충녕대군에게 정말로 양위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표면적으로는 군왕의 자리에 앉혀두고 태종 자신은 군권만 쥔 채로 군왕의 수업을 직접 시키고자 한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설득시킨다. 정작 양위 전날에는 군권을 쥔 상태로 왕실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남아있는 인척이 또 누가 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충녕대군의 장인인 심온과 그 파벌을 지목한다. 그리고 보위를 넘겨준 직후에 바로 그 일파를 깡그리 소탕하는 기염을 선보인다. 작중 원경왕후는 '야차나 귀신 그 자체다'라는 폭언을 퍼부을 정도.

한편으로는 이렇듯 노련하고 냉정한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아들 양녕을 눈물겹게 위하는 아버지로서의 면모도 유감없이 묘사되었다. 양녕이 엇나가기 시작하자 무섭게 호통을 치거나 매를 들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네가 원한다면 당장 내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다며 빌기도 하며, 경회루가 완공되고 양녕이 현판을 쓰는 장면에서는 정말로 그 야차나 귀신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호들갑을 떨며 관료들에게 아들을 자랑하는 아버지로서의 모습도 보였다. 이후 충녕대군의 사저로 잠행을 나왔을 때 '나는 재목이 아니니 일부러 미친 척을 하며 충녕에게 세자위를 넘기련다' 라는 양녕의 본심을 엿듣게 되자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땅바닥에 주저앉아 이것이 지난 죄업에 대한 벌이냐고 독백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폐세자하라는 어명을 받든 도승지가 대전에서 나가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엉엉 울기도 했다.[62]

요컨대 위의 문단 이름을 빌려오면 교묘한 정치술을 발휘하여 신하들을 가차없이 숙청해버리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의)심술의 군주' 로서의 면은 물론 술자리를 벌이거나 사냥을 나가는 모습을 종종 묘사함으로써 '사냥 애호가' 로서의 모습도 묘사되었으며 후궁 문제로 원경왕후와 지지고 볶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여성 편력' 도 그려졌고, 양녕과의 관계에서 '아들 바보' 였던 측면도 충분히 소개되었다. 그나마 나오지 않은 것은 '부엉이 공포증' 과 '관대한 면모'[63] 정도.

대왕 세종에서는 김영철이 배역을 맡았는데, 이 드라마에선 주인공이 세종이었으므로 용의 눈물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포스가 비교적 누그러지고 '세종의 아버지'라는 쪽에 초점을 맞춰 그려졌다. 그 때문에 신하들을 머리 위에서 농락하던 태종의 포스가 많이 사라졌다고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신하들을 찍어누르기는 고사하고 상왕 정종에게도 기고 원경왕후에게 치이고 조선의 국체를 부정하는 아들에게 까이고 실록에선 태종에게 꼼짝도 못하던 하륜을 위시한 신하들은 태종을 기망하고... 그 중 백미는 양위 후 병조판서 조말생의 계략에 빠져 군권을 빼앗기고 충격에 쓰러지는 장면으로 가뜩이나 가상의 내용으로 말이 많았던 작중에서도 손꼽히는 왜곡이다. 또한 관료들이나 백성들로부터 폭정이니 폭압이니 압제니 하는 소리가 거의 매 화 튀어나오는데, 숙청을 당한 외척들이나 신하들 입장에서는 그랬겠지만 제 3자의 시선에서도 그런 것으로 그리니 왕위가 무사히 세종에게 넘어간 것 자체가 신기할 지경.

그나마 외롭게 지존의 자리를 지켜가는 군왕의 모습 자체는 잘 표현되었고 상왕 등극 이후엔 대마도 정벌을 단호하게 추진하는 등 그나마 원래 태종에 가깝게 나온다. 일단 노련한 대배우답게 작중 연기는 아주 훌륭했다. 원경왕후가 세상을 떠난지 얼마 안 되어 본인도 손자 문종이 활쏘기 연습을 하는 걸 지켜보며 몇 마디 충고를 해주곤[64]문종이 관중[65]을 하는 걸 지켜보고 조용히 숨을 거둔다. 세종은 그 모습을 보곤 조용히 속으로 읊는다. '그동안... 참으로 고단하셨습니다, 아버지... 이제... 편히 쉬십시오....'

뿌리깊은 나무에선 백윤식이 태종을 맡았는데, 초반부터 세종과 다른 정치 노선으로 대립하는 포지션을 취한다. 태종과 세종간의 관계에 주목한 점이 특이점. 세종의 아버지라기보다는 세종에게 군주로서의 도를 가르치는 '세종의 스승'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한 편. 죽기 직전에 자신과는 다른 왕도를 걸으려는 세종에게 "이놈, 해내거라! 해내! 그래야 너를 왕위에 올린 것이 나의 제일 큰 업적으로 남을 것이니!"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대풍수에서는 청소년기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최태준이 분했다. 첫 등장이 좀 꼴사나운데 주인공 목지상이 건물을 짓지 말라고 했던 곳에 무리하게 공사를 한 데다가 인부 하나 다치는 것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의 태도로 나오다가 목지상에게 싸닥션을 맞는다. 그러다가 목지상에게 자기가 누군지 아느냐고 찌질대다가 결국 뒤에서 나타난 아버지에게 펀치를 맞는 것이 첫 등장. 흔히 노회하고 카리스마 있는 정치가의 모습으로 조명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대풍수에서의 등장은 이례적인 등장이다. 그래도 명나라에 인질로 잡혀있어도 담대한 모습을 보였고 이성계의 부장과도 팔씨름을 이길 때까지 해서 왼손으로 해서라도 이겨버리며, 이성계도 무학대사를 불러 아들들 중 처음으로 방원의 관상을 보게 하는 것을 보면 이성계가 아끼는 비범한 아들이긴 하다. 계모 강씨 부인과의 미묘한 알력도 묘사되고 있다.

정도전에서는 안재모가 배역을 맡아 연기했다. 용의 눈물에서 안재모가 세종 역을 맡아 태종 역의 유동근과 부자지간을 연기한 것을 감안할 때, 정도전에서 태조 이성계 역을 맡은 유동근과 함께 가히 최강의 배우개그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야인시대에서 안재모의 미래 모습을 연기한 김영철이 대왕 세종에서 태종 역을 맡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태종이 김두한으로 환생한다는 배우개그도 가능하다. 자세한 것은 이방원(정도전) 항목 참고.

2015년 개봉한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는 장혁이 분했다.

2015년 10월 5일부터 2016년 3월 22일까지 방영한 SBS 월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유아인이 맡았다. 자세한 것은 이방원(육룡이 나르샤) 항목 참조.[66]

2016년 1월에 방영한 장영실에서는 대왕 세종에서 태종을 맡았던 김영철이 다시 태종을 맡게 됨으로서, 김영철은 처음으로 두 번이나 태종을 맡게 된 배우가 되었다. [67] 대왕 세종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조선의 왕권을 다지기 위해 힘쓰는 카리스마 철혈 군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9. 기타

  • 태종 이방원이 권력을 잡기 위해 어린 동생들을 죽이고, 형과 싸웠는데 천하의 이성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킬방원 태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상왕의 신분으로 전국 곳곳을 떠돌아다니던 이성계는 본래 자신의 토착적 기반이었던 함흥 지역에서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킨다. 실록에는 '조사의의 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조사의라는 사람은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라고 하며, 봉기의 명분도 신덕왕후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가 개경의 권문 출신으로 함흥에는 그냥 가볼 일도 거의 없었을 것임을 생각하면 조사의의 난의 실제 주동자는 이성계였을 가능성이 크다. 초기의 조사의의 난은 정치적 명분에 힘을 실어주는 태상왕의 존재 + 강력한 함흥의 군세를 바탕으로 꽤나 맹위를 떨쳤다. 결국 태종은 한양 수비를 신하들에게 맡기고 친아버지를 상대로 친정(親征)에 나서는 조선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막장 행각을 벌인다. 그리고 이 전투는 조선 국왕이 '친정'한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다. 이후에는 국왕이 직접 전장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이성계는 조선 왕조의 개창자이기 이전에 평생동안 출전한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던 불패의 명장이었으나, 이때 아들 이방원과 벌인 부자간의 전투에서만은 이기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는 아마 이성계의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임과 동시에, 가장 쓰라린 패배였을 것이다. 물론 태조든 태종이든 부자간의 싸움에서 누가 이겼더라도 뒷맛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성계는 사실상 지지를 잃고 아들에게 투항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동정 여론도 알아서 거둬졌다. 그래도 태종이 아버지를 강제로 끌고오는 건 차마 할 수 없어서 계속 설득을 하고, 이성계는 체면상 안 가겠다고 좀 거부해 보는데, 이때를 배경으로 해서 나온 이야기가 바로 함흥차사다. 형제, 사위, 동지들까지 다 죽여버린 후레자식 같은 아들 놈에게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덤볐다가 그나마도 패배하고, 허수아비 같은 처량한 신세였던 이성계가 함흥차사 이야기에서는 절대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포지션인 것이 흥미롭다. 함흥차사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위키피디아에 있으니 참고.

이런 면에서 묘하게 당태종과 겹친다. 실제로 조선 태종과 당 태종 둘 다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고 도덕적으로는 패륜아라고 욕을 먹지만 두 군주 모두 유능해서 나라의 기초를 단단히 하며 당대의 백성들에게는 최고의 성군이라고 칭송 받았으며, 인재들이 앞을 다투어 재야에서 쏟아져 나왔었다. 또한 창업 군주와 수성 군주의 사이에 낀 애매한 위치이며, 묘호도 같다. 심지어 자식들의 싸움이 일어날까봐 유능하고 성격 좋은 자식을 골라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조선 태종은 젊었을 때 문관이었는데, 당 태종은 젊었을 때 무관의 기질이 더 우세했다. 또한 조선 태종의 후계자는 너무나 유능해서 후대 사람들에게도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지만,[68] 당 태종의 후계자는 전쟁을 많이 벌여 성공했긴 했으나, 부인에게 권력을 쥐어주어 사후에 왕조가 찬탈당하게 되는 경위를 제공한다. 그리고 조선 태종은 아버지를 즉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당 태종은 그냥 아버지를 즉위시켰다. 이 둘은 국가의 기틀을 만들고 탁월한 정치인 명군이며 군사력을 강화하고 사냥을 좋아하였다. 이 때문에 신화들이 강하게 반발했으며 간언을 잘 가납했고 반려자가 조력자였다. 또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며 둘 다 50대 나이에 사망하였다. 이외에도 둘 다 후계자 문제 때문에 고생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 고려의 왕족인 개성 왕씨 일족을 보호하기 시작한 무렵도 태종부터였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정적이 아닌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 인물이었던 듯. 당시 왕씨의 후손 한 명이 체포되었는데 신하들은 당연히 그를 죽여야 한다고 나섰다. 이때 태종이 "역사책을 살펴보니 역성혁명을 하고서도 전조(前朝)의 후손들을 완전히 멸망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니다. 앞으로 나는 왕씨의 후예를 보전하겠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조치를 뒤집는 발언이어서 신하들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태종은 "이씨가 도(道)가 있으면 백 명의 왕씨가 있다 하더라도 무얼 걱정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이씨가 도를 잃으면 왕씨가 아니라도 천명(天命)을 받아 일어나는 자가 없겠는가?"라고 하며 그를 살려주었다. 이후 태종은 "예전에 태조가 왕씨를 제거한 것은 실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말로 아버지와의 의견 충돌을 무마했지만, 이건 아버지를 차마 대놓고 나쁜 사람 취급할 수가 없어서 적당히 돌려말한 거다.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태종실록 13년 11월 26일자 기사

이후에 왕씨의 후손을 주살하라는 대신들의 벌떼같은 청이 있었는데 태종은 "혁명(革命)한 뒤에도 오히려 전대의 후예(後裔)가 살아 있을까봐 두려워하여 모조리 죽여서 유종(遺種)을 없애는 것은, 용렬한 군주(君主)가 하는 짓이다. 내가 어찌 차마 하겠는가? 경 등은 나의 아름다운 뜻을 따르려 하지 않고 어찌 이처럼 번거롭게 구는가? 왕씨(王氏)의 유종(遺種)은 죄가 없는데 죽이는 것은 내 마음으로는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미 결정되었으니 다시 진언(進言)하지 말라"라고 씹었다. 다만 태종이 즉위한 것은 1400년이고 이러한 조치를 내린 것은 즉위 기간의 절반을 넘긴 1413년이었다.태종실록 13년 12월 1일자 기사 또한 이후로도 왕씨 탄압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문종대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사라졌다. 이 때에는 왕씨인 왕우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이 "쟤 왕씨래요."라고 고발했는데 나라에선 "어이구 왕씨네요? 너님 벼슬 받으세요."라는 식으로 벼슬에도 앉혀 주고 문종~성종 시기 의전상 예우를 받기까지 했다.
  • 야사 중에는 메뚜기떼가 창궐하자 몇 마리를 잡아오게 한 후 가장 큰 놈을 골라 네놈이 백성의 곡식을 갉아 먹는다니 차라리 내 오장육부나 갉아먹어라!!!라고 대성일갈을 내지르면서[69] 먹은 뒤 메뚜기 떼가 사라졌다고 한다. 중국 당 태종에게도 같은 일화가 있으며 야사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어느 쪽이든 성군의 면모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손인 정조도 아버지 사도 세자 무덤과 관련한 비슷한 일화[70]가 있다.
  • 일부에서 나오는, 신권(臣權) 중심 정치 질서를 세우려던 정도전을 죽이고 전제군주제를 세워 조선의 정치 선진화를 늦췄다는 비판은 무리한 이론이다. 애초에 정도전의 신권주의는 일단 이론적으로는 군사부일체 즉 임금과 신하는 어버이와 자식 사이와 같다는 유교식 서열론에 비추어볼 때 유교에 역행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사문난적의 내용이다. 정도전 본인도 자기 손으로 만든 유교 국가 조선에서 자식이 아버지를 제치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반유교적 발상이 정말 완벽히 통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재상으로서 정도전의 권력이 가장 강력했을 때에도 당시 임금이던 태조 이성계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자기 주관대로 다 밀어붙여서 했으니 전제군주제 운운하려거든 이방원을 탓하기 전에 한양 천도나 세자 책봉 같은 국가 중대사를 자기 맘대로 처리한 태조 이성계부터 탓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전제군주제란 것은 기본적으로 군주에게 걸리는 제도적 제약이 거의 없음을 일컫는 것인데, 강력한 왕권을 가졌음에도 자신을 견제할 수 있는 사관과 간관이라는 시스템을 확실히 정비해서 제동을 걸 수 있도록 한 임금이 바로 태종 이방원이다. 군주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되 폭주하지 않도록 신하들이 견제할 수 있는 제도를 확립한 왕을 가지고 권력이 강력했다는 이유로 전제군주제 운운하는 것은 우를 범하는 것이고 언어도단이다. 더구나 그것을 기초로 하여 다음 세종 대에서 역사상 군권과 신권이 최상의 조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리고 정치 체제는 상대적인 것이지 그 안에 우열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왕권주의가 강력해서 폭군이 등장했다는 낭설에는 신권이 강한 귀족 국가였던 고려의 충혜왕이라는 훌륭한 반박 증거를 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지 못했다면 세종대왕이 뛰어난 업적을 남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
  • 임금의 모든 행적을 기록하여 실록으로 만드는 사관들을 매우 싫어했다. 말에서 낙마한 뒤 사관들에게 비밀로 하라 했지만 당연히 사관들은 기록, 게다가 민인생이란 사관은 '내가 쉬는 편전에 들어오지 말라' 하는데도 기어들어왔다가 잡혔을 정도였다고.
  • 한반도에서 코끼리를 처음 길들여본 왕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를 선물받았으나 코끼리가 사람을 죽이자 다시 일본으로 되돌려보내려 했지만 선물받은 개체이다보니 섬으로 유배했다. 발단은 이렇다. 코끼리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조선 전체는 이 처음보는 짐승에 놀라 서둘러 구경을 오고 난리법석이었다.[71] 그런데 문제는 전직 공조판서인 이우가 이 코끼리를 보고 대놓고 놀려대다 침까지 뱉는 바람에 노한 코끼리가 화를 내며 그를 밟아 죽였다.

이에 놀란 태종은 처음엔 코끼리를 살처분하라고 했지만 일본에서 준 것이라 교역상 누가 끼칠 걸 우려하여 결국 외딴 섬으로 귀양을 보내라 했다.

그러나 코끼리가 섬에 온 뒤부터 미역과 풀 등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슬피 울기만 하여 뼈와 가죽이 남을 정도로 말라버려 태종이 1년만에 귀양을 풀라고 얘기했으나 워낙 많이 먹어대는 터라 결국에 전국에 돌아가며 사육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이후 세종의 집권기에서야 관찰사의 상소로 다시 섬으로 가나 목장지역으로 가게 되고 이후에 실록 내에서 코끼리의 기록은 끊긴다.

10. 관련 문서


  1. [1] 말 그대로 상상화다. 실제 생김새는 태조익안대군을 참고하면 어느 정도는 유추해볼 수 있다.
  2. [2] 2대 왕이 자신의 둘째 형인 정종이라서 왕세제가 맞으나 왕세자로 한 이유가 있는데 자세한 것은 후술.
  3. [3] 명나라는 세종 12년에야 태상왕으로의 존숭을 허락했다.
  4. [4] 여기에 더해 이덕일처럼 "태종의 제1업적은 세종"이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종이라는 희대의 성군이 제 뜻을 펼칠 환경을 완벽히 조성해놓았다
  5. [5] 실제로 이렇게 기반을 다져놨음에도 세종의 초기에는 신하들과 세종 간의 알력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세종대왕 항목의 즉위 후 문단 참조.
  6. [6] 이름인 '방원(芳遠)'을 갈겨 쓴 것으로 보인다.
  7. [7] 이 것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중국사 대표 피휘 사례 중 하나인 한나라의 고조 유방이다. 이름이 '邦' 자인데, 건달에서 황제가 된 뒤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아서 이 글자를 갑자기 못 쓰게 되어 버렸고, 그래서 그 때까지 '수도' 라는 뜻으로 쓰이던 '' 자가 나라를 뜻하는 글자로 대신 쓰이게 되었다.
  8. [8] 때문에 피휘는 그냥 무시할 수 밖에 없었다. 꽃다울 방(芳) 자는 8형제가 다 쓰는 돌림자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멀 원(遠)자는 길 가다 발에 채일 만큼 흔한 글자여서 현실적으로 피휘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9. [9]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을 같이 활용한 드라마 용의 눈물에선 정안군, 정안공, 정안대군 3가지 호칭을 모두 들을 수 있다.
  10. [10] 태종이 과거에 급제했을 여말시기에 정몽주, 정도전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공민왕의 정책으로 성균관에서 배출 되었다. 따라서 당시에 과거급제자들은 그 이전시기와는 다르게 우대받고, 존경받던 시기였으며, 이성계는 당시 고관에 있었지만, 지방 군벌출신으로 멸시 받고 있었다. 이방원의 과거급제 홍패가 왔을 때에 그 앞에서 절을 하였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가문의 격을 높여주는 일이였다. 또한 당시 명문가였던 여흥민씨와의 혼인도 이룰 수 있었을 만큼 중차대한 일이였다.
  11. [11] 세자가 양위에 찬성하면 아버지를 제끼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욕심이 원래부터 충만했던 불효자가 되고 신하가 양위에 찬성하거나 순순히 받아들이면 주상 전하의 신하가 아니라 양위에 찬성한 불손한 세자 라인에 탑승한 세자의 신하가 되는 것이다. 둘 중에 한쪽이라도 통촉하여 달라고 외치지 않으면 세자랑 신하가 결탁한 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생전 퇴위 및 양위 문제만 나오면 세자고 신하고 납작 엎드려 "차라리 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 전하" "전하께서 아직 이리 강건하신데 어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를 외치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음 주상에게 찍혀서 횡천가는 선물로 사약을 받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12. [12] 한마디로 "좌의정은 말 하나는 남 비위 맞춰주는 데 선수야.
  13. [13] 세종실록의 1422년 5월 9일 박은의 졸기.
  14. [14] 만수무강에 들어가는 글자들이기도 하다.
  15. [15] 여기서 송감은 중국 송나라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중국의 기본 역사서들인 '흠정 24사' 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송나라 때의 역사서로는 <송사>가 들어간다) 왕이 서연에서 공부해야 하는 역사서 가운데 하나다.
  16. [16] 세종실록 5권, 1년 9월 28일 기사.
  17. [17] 종묘에 참배
  18. [18] 사냥이 필수이자 생존인 국가라면 모를까 조선처럼 농경 국가라면 군주의 사냥은 양날의 검이다.
  19. [19] 참고로 저 당시 실록을 기록하던 사람이 바로 민인생. 근데 이 사람은 거의 스토커 수준이라서 태종이 측근들만 데리러 갔을 때는 몰래 일행인 척 하면서 따라가질 않나, 한 번은 태종이 내려가다가 다리를 헛딛은 적이 있었는데 누가 보지 않았나하고 안심했지만 민인생은 왕궁의 돌다리 아래에서 다 지켜보고 있어 적어놓았고, 태종이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뭔가 인기척이 있어서 놀라 병풍을 치우니 민인생이 있질 않나... 태종 입장에서는 거의 찰거머리 그 자체였다. 참다못해 한 번은 호되게 호통친 적이 있었으나 민인생이 그 대화 자체도 적겠다고 하자 꼬리를 내렸지만, 나중에 보복으로 사관에서 짤리게 만들었다아무리 날뛰는 사관이라도 자리 앉히고 내리게 하는 것은 왕의 몫 압권인 것은 귀양명을 받은 와중에도 마지막으로 사초를 쓰게 해달라 하여 7월 11일, 임금께서 사관 민인생을 귀양보내시다'라고 기어코 기록을 남기고 떠났다는 것이다.태종이 좀 봐줬나보다. 이 이야기는 조선왕조실톡 51화, 책 <조선 백성을 사랑한 바른말쟁이들>(제목을 보면 감이 오겠지만 아동서다) 등에도 실려있다.
  20. [20] 태종이 아니라 정종실록의 기사이기는 한데, 이 해 11월에 태종이 즉위했기 때문에 이 기사에서 가리키는 중궁은 원경왕후가 맞다. 조선 초에는 새 임금이 즉위한 해 12월 기록까지 선왕의 실록에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더불어 이 이야기는 용의 눈물에도 묘사되어 있는데, 태종이 경연청에서 이부자리를 펼치면서 친구이자 지신사였던 박석명과 이야기를 나눈다.
  21. [21] 김우는 2차 왕자의 난 때 활약한 공신이라 벌주지 않았다.
  22. [22] 혜선옹주 홍씨로, 기명 가희아(可喜兒). 드라마 하녀들에서 이채영이 연기한 인물이다.
  23. [23] 이 때문에 이직은 딸을 태종에게 후궁으로 들여서 정가에 복귀하려 하는 거 아니냐며 대간들에게 한소리를 들어야 했다.
  24. [24] 실제로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은 안 돌아오고 이방원의 말만 집으로 찾아오자,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해서 직접 창을 들고 나가 싸우겠다며 달려나가려 한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25. [25] 서모인 신덕왕후가 살아있을 때, 태종이 신덕왕후의 여종과 정을 통했다고도 하니 말 다했다. 다만 이때는 원경왕후도 시계모인 신덕왕후가 싫어서인지, 신덕왕후의 앞에서는 이 여종을 자신이 혼내주겠다고 해놓고, 뒤에서는 몰래 칭찬해주긴 했다.
  26. [26] 말이 12월이지 이게 음력이다. 양력으로는 그야말로 한겨울인 1월이라는 것인데, 이런 행위는 "얼어죽어라!" 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7. [27] ...라지만 이 일은 태종이 일방적으로 밝힌 거라...
  28. [28] 투기, 즉 질투는 당시 사회에서 해서는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였다. 더구나 왕실에서, 그것도 왕비가 투기를 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왕실의 체면이 그야말로 넝마꼴이 되는 것이다. 하물며 왕실의 생활은 그 나라의 생활양식을 대표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인데 왕비가 대놓고 사회의 금기를 행한다면...
  29. [29] 여기에서 말하는 아들은 정실 부인이 낳은 적자를 가리킨다. 정종은 정실 부인 정안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없었고, 전부 다 첩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서자들뿐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태종이 뭘 하든 일절 간섭하지 않던 정종이 국정에 관해 발언한 유일한 사건으로서, 아무리 조용히 지낸다지만 이것만은 동생이 하는 행동이 막장으로 보였나 보다. 사실 내명부의 권한을 뺏는 건 폐비에 준하는 거라 부담이 큰 일이었을뿐더러 좋지 못한 선례도 되었을 것이다.
  30. [30] 태종실록 12년 6월 "중궁이 해산했고 약 덕분에 난산을 하지 않았다"며 상을 내린 기록이 있다. 이때 원경왕후의 나이는 무려 47살...
  31. [31] 태종의 적자 4남 중 막내인 성녕대군은 태종이 즉위한 후에 태어났다.
  32. [32] 원래 왕자공주든 결혼하면 궐 밖으로 나가야 한다. 특히나 신분에 상관없이 왕세자가 아닌 왕자는 10살 이상이 되면 궐 밖에 나가는 게 법도였다. 물론 궐 밖에 나간다고 맘대로 활동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33. [33] 다만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는 세자의 장인이라서 그런지 고위직에서 계속해서 있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허물이 많은 별볼일 없는 인사이기에 그냥 두었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에 비하면 민씨 형제들은 공신에, 제법 능력이 출중하였고, 심온의 아비는 여말에 이성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인물에, 심온 자체도 능력이 출중한 인물이였다. 아마도 뛰어난 외척들이 발호하는 것을 방지하고자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34. [34] 즉, 왕의 총애가 없는 중전은 그냥 끈 떨어진 연에 불과하니 곧 외척의 발호를 견제하는 효과를 본다.
  35. [35] 자기 의견을 개진하거나 표현하는 능력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성격은 신하들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커서, 태종은 왕이 될 자질이 효령에겐 없음을 밝힌 것이다.
  36. [36]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책벌레였다. 심지어 병상에서조차 책을 읽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보다 못해 아버지였던 태종이 처소의 모든 책을 압수해 오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충녕대군은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은 책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충족하였다는 일화까지 있으니...
  37. [37] 이를 토대로 볼 때, 세종은 애주가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보면 사교적인 성격을 가진 술자리에는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38. [38] 위에서 언급한대로 하다 못해 외교사절을 접대함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한 목적으로도 필요한 것이 음주인데 효령은 금주가여서 이에 대한 문제가 있을 것을 언급했던 것.
  39. [39] 그나마 사간원 측은 세자가 죄를 뉘우치면 복위시키라는 여지를 남기긴 했다. 하지만 폐세자와 동시에 충녕이 세자가 되는 것이 태종과 신하들 사이에서도 당연시되는 것으로 보아 단지 태종을 배려한 표현이었을 듯하다.
  40. [40] 그러나 양녕이 가출했다 돌아온 바로 그 달에 세종과 사냥을 나가면서 '진작에 노는 데 엉아도 좀 끼워주고 그랬으면, 이 엉아가 가출을 왜 했겠냐?' 라고 농담이나 해댄 것을 보면 딱히 부끄럽지 않았던 듯하다...세종 1년 2월 28일 기사
  41. [41] 이때 양녕대군은 "아버지도 첩실 여럿 들이고 재미 보시는데 나는 왜 못함?"이라는 취지의 편지를 써서 태종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42. [42] 정종은 세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 승하하였다.
  43. [43] 정확히는 한양 내에 있는 성녕대군의 집(훗날 나이가 차면 나가서 살 집)을 절로 개축하자고 한 것이지만 당연히 신하들은 반대했고 대신에 성녕대군 묘 근처에 암자를 하나 지어서 명복을 빌어주자고 제안한 것을 태종이 받아들인 것이다.
  44. [44] 사실 부엉이란 새 자체가 야행성인 데다 우는 소리마저 섬뜩한 면이 있는지라 태종이 두려움을 느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45. [45] 임금의 이주, 이사
  46. [46] 금성을 가리킴.
  47. [47] 왕이나 여왕을 상징하며 천궁도의 사자자리로 보고있다.
  48. [48] 한 예로 바로 아래에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 이름을 쓴 공을 찬 아이들을 곱게 살려보낸 태종과는 달리 홍무제는 자기 황후를 왕발이라고 놀린 이들을(이는 중국에 있던 전족때문이었다.) 다 잡아죽이려다가 황후인 마씨가 말리고서야 그만두었다.
  49. [49] 개국공신이면서 태종의 최측근 무신인 조영무의 장남. 무신인 아버지와는 달리 과거에 급제한 문신인데 세종실록의 졸기를 보면 사관들에게도 꽤 사람 좋고 능력도 좋은 관료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50. [50] 몰랐다고는 하나 스토커에 가깝게 태종을 따라다니던 민인생이라는 사관이 아닌 이상에야 감히 태종의 침전에 함부로 들어갔다는 것은 "나 죽여주십시오."나 마찬가지이다.
  51. [51] 다만 그래도 어쨌든 조선은 수로로 운반했다. 육로로 운반할 경우 가장 큰 문제는 효율 문제였다. 현대와 같이 고속도로나 도로가 잘 정비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험준한 육로로 운반하면 육로로 운반하는 데 쓰는 마소의 여물은 여물대로 챙겨야 하고 덤으로 사람 먹을 것까지 챙겨야 한다. 그러다보니 종종 옮기는 양보다 비용이 더 컸다. 속도도 수운이 훨씬 빨랐고. 치안 문제는 사실 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외적의 침입이 많았던 한반도 특성상 육로조세를 위해 로마제국처럼 전국적으로 도로망을 갖출시 외적의 침입시 순식간에 수도로 진격하게 되므로 이를 막기 위해 일부러 토목공사를 안한점도 있었다.다만 영남 내륙지역은 문경새재를 넘어서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였다.
  52. [52] 정도전 사망시 두 아들은 아비를 구하려다가 사망했지만, 장남은 임금을 모시고 있어서 살아서 수군이 되었다가 태종 7년에 복직되었고, 세종시기 형조판서까지 지내다가 사망하였다.
  53. [53] 만일 재벌 그룹의 회장이 장성하고 능력이나 인품에도 결격이 없는 형들을 제쳐놓고 막내아들에게 그룹을 물려준다고 가정해보자. 더군다나 그 막내 아들은 열 몇 살짜리 어린아이라면 이게 과연 합당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54. [54] 사실 경연을 좋아한 왕은 얼마 안된다. 웬만한 호학의 군주가 아니고서야 경연은 짜증만 나는 자리이기 때문. 조선 역대 왕들 중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태조는 경연을 조금 느슨하게 하려고 했다가 역관광 당했고, 연산군은 좀 하다가 경연 폐지, 현종은 건강 핑계로 경연을 자주 하지 않았다. 세조의 경우 경연은 폐지했어도 세자의 교육인 서연은 지속했고 성균관 유생과 무신들에게 끊임없이 배울 것을 권했다.
  55. [55] 다만 태종도 공신의 부정부패는 상당히 봐줬고 간관과 사관의 경우 자신이 원한 목적이 아닌 방향에서 너무 나대면 어느 정도는 제어를 시도했다. 그래서 태종 시기에 곤장을 맞거나 유배되는 간관들도 있었다.
  56. [56] 이건 단종때 벌어졌다.
  57. [57] 과전법은 자리에서 물러나면 반납해야 하는데 휼양전, 수신전 명목으로 사실상 세습되는 폐단이 있었다.
  58. [58] 1960년, 1964년, 1967년, 1971년, 1972년, 1976년, 1978년, 1979년,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8년, 1999년, 2001년, 2002년, 2005년, 2007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5년. 날씨 정보는 기상청 서울 지상 관측 자료, 음양력 변환은 한국 천문 연구원 음양력 변환을 참조함.
  59. [59] 참조.
  60. [60] 이러한 야사는 사실인지 아닌지보다는, 조선 사람들의 태종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추정하는 자료로 봐야 한다.
  61. [61] 월탄 박종화의 세종대왕.
  62. [62] 어명을 내릴 때도 목소리가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이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왕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다가 도승지가 나가고 나서야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63. [63] 이마저도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한다거나 정도전과 그 일파를 멸족시키지 않은 등을 소개하면서 살짝 보여주었다.
  64. [64] 문종: 아바마마와 제 뜻이 다를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태종: 반대해야 한다. 그래도 널 향한 네 아비의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65. [65] 과녁 정중앙에 화살을 맞히는 것.
  66. [66] 여기서도 배우 개그가 생기니, 바로 유아인이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숙종을, 2년 후 영화 사도에선 사도세자로 분하는데 이방원과 먼 후손 두 명이 같은 얼굴이라는 배우 개그가 된다.
  67. [67] 김상경 또한 대왕 세종에서 세종을 맡았는데 장영실에서 또 세종을 맡게 됨으로서, 그도 세종을 두 번 맡은 배우가 되었다.
  68. [68] 사실 세종대왕은 태종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 벽체를 쌓고, 내부 정리를 하여 조선이라는 멋진 집을 완성시킨 것이다.
  69. [69] 맹꽁이 서당에도 이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 대성일갈을 들은 메뚜기가 "무식한 말씀 마시오. 메뚜기는 초식 곤충이라 곡식 외엔 안 먹소이다."라고 대꾸했다.
  70. [70] 송충이가 크게 번져 사도 세자 묘의 소나무가 모두 말라죽는 일이 일어났다. 인부들이 잡아온 송충이를 집어 "내 아비가 억울하게 죽어 이 곳에 누워 계신데 그 나무를 갉아먹는단 말이냐."하고 호통을 치고 그 송충이를 씹어 삼켰다. 이후로 무덤 근처에 송충이가 싹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다.
  71. [71] 실록에서는 귀는 파초잎과 같고 눈은 작고 네 다리는 통나무, 코는 누에와 같다고 나온다.
  72. [72] 1408년, 태종 8년.
  73. [73] 1433년, 세종 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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