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국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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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수정당

통일국민당

(창준위)

통일국민당

신민당

새한당

(창준위)

1. 개요
2. 창당과 총선 돌풍
3. 원조 제3정당
4. '현대' 정당
5. 14대 대선
6. 의외의 정책들
7. 대선 후
8. 의의
9. 역대 선거결과
10. 관련 문서

1. 개요

1992년에 정주영이 창당했던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약칭은 국민당.

2. 창당과 총선 돌풍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정주영대통령 출마를 결심함에 따라 1992년 1월 창당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같은 해 2월 김동길이 창당을 추진하던 새한당을 흡수하여 정식으로 창당되었다.

창당 한 달만에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지역구 24명, 전국구 7명 등 31명의 당선자를 내었으며,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했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엄청난 충격. 일이 망하려면 처음엔 대박을 치죠

3. 원조 제3정당

국민당은 3당 합당 이후 계파 싸움이 치열하던 민자당 + 민주당에서 공천 탈락한 인사들을 대거 이삭줍기입당[1][2]시켜 反YS, 非DJ 정서가 컸던 TK 지역, 강원도,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충청 지역 등을 파고드는데 성공했다.

또한 경제 정책은 뒷전이고 당파 싸움만 계속 일삼던 민자당이 아닌 새로운 보수정당을 원하는 일부 보수, 중도성향 및 부동층 유권자들에게도 인기가 있었으며 특히 중산층 이상 부유층에게도 민자당 대신 대안이 되었다. 실제로 총선과 대선에서 강남3구를 비롯한 고가 아파트, 특히 40평대 이상 대형 평수 아파트가 위치한 부촌에서 높은 득표율을 올렸다. 세상에 재벌 해체 공약은 못 봤나[3] 서울 부유층 지역 국민당에 몰표. 특히 재벌출신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공약을 내세우고, 최불암(최영한이라는 본명으로 출마), 강부자, 이주일(구리시 지역구 의원)과 같은 인지도 높은 연예인들을 영입하기도 했다.

4. '현대' 정당

현대그룹의 막강한 자금력과 촘촘한 조직책을 이용하여 대선을 앞두고는 당원 천만명 이상을 달성 당연히 허수 하는 등 의욕적으로 선거에 임했으며 특히 현대차, 현대중공업 공장이 있는 울산 동구 일대를 비롯, 당시 현대전자 공장이 있던 이천 일부에서는 사원들의 위장 전입을 시킨 의혹이 터지기도 했다.[4] 현대 계열사 임직원들을 대거 동원하여 유권자들에게 금품 제공 및 당원 가입을 유도한 사례는 매우 흔하게 나왔으며 심지어는 초원복집 사건 당시 녹취록에서도 나왔다. 그만큼 집권 여당에게도 쇼미더머니 뽑아 선거하는 정주영과 국민당이 나름대로 위협적인 존재였다는 반증이었을 정도. 당초 정주영의 정계진출에 회의적 시각을 보내던 많은 현대그룹 임원들도 총선의 성공 뒤에는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물론 아닌 분도 있지만

5. 14대 대선

정주영은 이를 바탕으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1992년 가을에는 민주자유당 내에서 반 김영삼 계열이었던 김복동, 박철언, 이종찬, 장경우 등 민정계 인사 일부가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통일국민당에 입당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투표 결과 천만명'의 당원을 가지고도 400만도 안되는 16.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3위에 그쳤다. 정주영은 울산에서도 현대표가 거의 나오지 않은 것을 보고[5] 가히 당황했다고. 게다가 선거 며칠 앞두고 터진 초원복집 사건의 역풍을 맞아 보수층이 전부 김영삼으로 결집하는 바람에 현대 일가(임직원 + 가족)의 표만 받고 중도층 표만 받으면 이길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착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초원복집 사건이 최대 반향을 일으킨 부산, 경남에서는 6%~10%대 득표율을 올려 대패했고 대구광역시, 경북, 강원도에서마저 김영삼에 이어 2위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참고로 이 선거는 언론사와 전문업체의 과학적 여론조사가 없던 마지막 선거이기도 했다.[6][7]

6. 의외의 정책들

재벌 회장 치고는 놀라운 공세적인 통일정책[8]과 반값 아파트 등의 파격적인 정책, 여성표 획득을 위한 여성정책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었다.

당시 통일국민당이 내건 정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반값 아파트, 국가보안법 폐지[9], 대학 입학정원 폐지 및 졸업자격제 도입 및 사학 육성, 경부고속도로 복층화, 국민학교·중학교 전면 무료급식(!!!) 무려 18년을 앞서나갔다 ㅎㄷㄷ[10], 재벌 해체(!?!?!?)[11] 등등. 금연 공약북유럽 정치인이 한국에 귀화해서 선거 나오신건가?[12] 경부고속도로 복층화와 사학 육성을 제외하면 십여년 후의 진보정당들보다도 훨씬 공세적이고 파격적이다.[13]

7. 대선 후

상징동물은 호랑이였다. 당시 민자당의 상징동물은 , 민주당은 토끼였다. 슬로건은 "경제 대통령, 통일 대통령". 결과적으로는 토끼, 호랑이 같은 정치인이 아닌 곰 정치인이 선택된 꼴이 되었다.

이후 정주영은 잠시 선거조작을 주장했으나 김대중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이에 동참하지 않아 물건너가고, 정주영의 대통령선거 낙선 후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세무조사를 받고 대통령선거법 위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정주영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자, 정주영은 1993년 2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자신이 제공하였던 통일국민당 당사마저 폐쇄하였다.하..항복!!

이후 소속 국회의원들이 잇따라 탈당하여 민주자유당에 입당함으로서 (최불암이라든가) 통일국민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하였으며, 잔류파는 1994년 박찬종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다가 1995년 6월 1일에 김종필자유민주연합에 흡수되어 소멸되었다.

8. 의의

삼당합당 이후 재편된 한국 정치는 보수적인 영남민주자유당과 그 후신, 개혁적인 호남민주당계 정당과 그 후신의 대결구도로 펼쳐지는데 그 사이의 제3(보수, 충청)정당으로서 이전의 민주공화당 - 한국국민당 - 신민주공화당자유민주연합 - (국민중심당) - 자유선진당 사이의 맥을 잇는 공화계 정당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그의 아들인 정몽준국민통합21도 그 후신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부자 모두 망했어요 [14]

다만 통일국민당이 얻은 지역구 24/237석 가운데 충청도에서 얻은 것이 6석이라는 점(충남 4/14석, 충북 2/9석- 참고로 경기도 5/31석, 강원 4/14석)에서 충청 정당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호남과 부산, 대전에서 한 석도 얻지 못했고 서울, 경기, 영남에서의 지지가 저조했다는 점을 볼 때 그나마 표를 받은 쪽이 충청, 강원인것도 사실이다 (물론 보수층이나 영남 지역 등에서는 2위 정당이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정주영의 지지기반은 강원도였으나, 역시 1위에는 실패했다. 또 부산지역에서는 비DJ민주화 세력들이 다수 합류했다가 모두 낙선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괜히 통일국민당이 관권 선거와 지역 구도를 무너뜨리려고 폭로했다가 역관광을 당했던(영남과 전국 보수층의 YS 지지 표가 결집했다) 우리가 남이가 폭로 사건(초원복집 사건)으로 유명하다. 이 당의 존재 의의는 이 마법의 언어를 발굴한(?) 것에 있다고 봐야 할지도.(...)그리고 차화준 의원의 틀니 움짤도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정당이 직접 나서서 스트립(...)를 개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92년 11월 28일 충청남도 대천시(현 보령시)에서 열린 전당대회 때, 정주영의 대선지지 연설을 하려던 김용환 의원이 나오기 전 유흥업소 여직원을 동원하여 스트립 댄스를 보여주다가, 특정 부위를 남겨 놓고 벗으려 할 때 유세를 듣던 청중이 그것을 제지하였다.(...) 물론, 통일국민당 측은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

9. 역대 선거결과

  •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 31/299 17.4%
- 역대 지역기반이 없는 신생정당으로서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정당이다.[15]
  •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정주영 16.3% 낙선

10. 관련 문서

한국의 보수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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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에 합당

하나로국민연합

☆: 삼당 합당으로 보수정당에 편입


  1. [1] YS가 당권을 잡은 후 벌어진 선거여서 YS의 민주계 반대 세력인 민정계, 공화계 사람들이 대거 입당했다.
  2. [2] 김한길 같은 인물은 원래 민주당 인사였지만 공천 탈락 후 이 곳에 입당해서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전적이 있다. 김동길의 경우도 1970년대 이후까지만 해도 진보, 개혁인사였지만 정주영과 손을 잡은 이후에는 성향이 바뀐다.
  3. [3] 사실 재벌 해체라고 해도 본격적인 부의 재분배나 경제민주화같은 내용이 아니었던걸 감안하면 정책들이 중산층이나 부유층의 이익과 상충된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4. [4] 그밖에 현대 사원이 몰려사는 곳도 통일국민당 지지세가 높았다. 현대 본사 및 정주영 회장의 자택이 있던 서울 종로구 일대, 사원아파트와 현대 임원들이 모여 사는 지역인 압구정동, 개포동, 광장동 등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줬다.
  5. [5] 울산시 동구에서는 46%를 얻어 1위를 하였으나, 그 외의 지역에서는 모두 김영삼에 뒤진 2위였다. 울산 시가지만을 기준으로 하면 약 30%, 울산군(현 울주군)을 포함하면 약 28%를 득표.
  6. [6] 하지만 당시에도 여론조사 개념이 없던건 아니라서 한국갤럽에서 13대 대선 예측결과(다만 당시엔 예측조사 공표 자체가 선거법 위반인 관계로 발표는 일본방송을 통해서 했다. 현재와 같이 예측조사를 발표하기 시작한건 1995년 지방선거때부터의 일) 1988년 총선을 앞두고 여러 언론사에서 공동으로 여론조사를 발표하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전화조사를 통해 여론조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민주화된 지 얼마 안되었던 시기이다 보니 한계점은 있었다.
  7. [7] 물론 안기부와 집권당은 1987년 대통령 선거부터 해외 전문가들을 불러서 내부 여론조사를 하고 있었다. 이때 이들로부터 조사기법을 전수받아 초보적 수준에서 독자적인 여론조사를 시작한게 현재 새누리당 산하 여의도 연구원의 여론조사팀이다.
  8. [8] 물론 1989년에 북한에 방북했던 일이나 1990년대말 금강산 관광사업, 소떼 방북 등의 대북사업을 펼친 걸 보면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다.
  9. [9] 여담으로 시사저널이 주최한 대통령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정주영 회장이 국가보안법 폐지 공약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는 "현 헌법에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만큼 종북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공산당도 합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가 조중동과 민자당으로부터 매카시즘성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10. [10] 참고로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무상급식은커녕 급식을 하는 학교가 적었던 시절로, 이때는 보수진영은 물론이고 진보진영에서조차도 무상급식 논의가 나오기 전이었다. 이 얘기가 나온 지 6년 뒤인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급식이 전면 실시됐다. 또한, 학교급식에는 국내 농축수산물을 반드시 써야한다라는 논의 정도가 나왔었다. 그만큼 시대를 앞서나갔던 기발한 공약이었던 것. 여담으로 '무상급식'은 '배푼다'는 성격이 강하지만 '무료급식'은 당연한 '권리'라는 성격을 지닌다.
  11. [11] 참고로 당수가 한국 재벌의 아이콘인 정주영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파격 그 자체였다
  12. [12] 이 때는 서유럽이나 북유럽의 선진국 국민들도 일반인이건 엘리트건 레스토랑에 가면 스테이크 먹고 나서 옆에 재떨이놓고 실내에서 담배피우면서 대화하던 시기다.(90년대 중반부터 EC협의로 실내금연개념이 퍼져나간다. 한국은 2000년대 중반 노무현 정권에서부터 퍼져나갔다.) 물론 무상급식이나 무상의료야 서유럽의 교육과 의료개념이 한국과 근본적으로 다르므로(시간차는 있지만 영국 제외한 서유럽은 20세기 중후반에 이미 교육과 의료는 절대평등한 공공재여야만 한다는 사상이 퍼졌다 영국은 의료만 공공재 개념) 진작에 했었지만 유럽도 개념이 완전히 잡히기는 전이었던...
  13. [13] 이 때문에 2004년 여름 전당대회에서 NL주사파들이 민주노동당을 장악하고 나서 연방제통일 같은 뻘짓에만 매달리자 당내외에서 재벌회장보다도 못한 무늬만 진보정당이라는 비아냥이 속출했다.
  14. [14] 참고로 정몽준은 13~17대 의원을 모두 울산광역시 동구(울산)에서 지냈는데, (18대 지역구는 서울 동작구) 14대 의원만 통일국민당으로 출마하고 다른 경우는 대부분 무소속이었다. (13대 때는 민주자유당 창당과 함께 입당,14대 대선 이후 통일국민당이 와해되자 재입당한 뒤 신한국당 창당과 함께 탈당했다.17대 때 자신이 창당한 국민통합21의 의원이었고 말기에 한나라당에 입당했으며 지금의 새누리당 의원.) 반면 현대건설의 어느 사장은 이후 "경제와 정치는 다르다"면서 국민당을 뿌리치고 민자당으로 출마해서 당선이 되었고 이후 서울시장이 되더니... 그렇다. 이후의 가카시다.
  15. [15] 열린우리당을 들 수도 있겠으나 제3세력이었던 국민당과 달리 여당이었고 탄핵 사태로 인해 후광을 받은 점도 고려해야 한다. 또한 20대 총선에서 이름만 보면 친척관계인 국민의당이 지지율에서 38석, 26.7%(제2당)으로 앞섰으나 국민당과 달리 지역기반이 확고했다는 차이가 있으며 국민의 당의 전신격인 안철수의 진심캠프나 새정치연합을 고려하면 완전한 신생정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리고 같은 20대 총선에서 123석, 25.5%(지역구 1당, 비례 제3당)을 얻은 더불어민주당은 지역기반이 없긴 하지만(사실 지역기반을 국민의당에게 뺏겼다.)신생정당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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