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한국의 역사 韓國史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11px;margin-top:-6px;margin-bottom:-7px"

청동기 시대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

원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구한말

일제강점기

군정기

분단

삼국 시대

후삼국 시대

고조선

부여

두막루

발해

고려

조선

대한제국

조선
총독부

소련군정

북한

한사군

고구려

고구려

옥저

신라

태봉

동예

마한

백제

후백제

미군정

대한민국
1 2 3 4 5 6

변한

가야

신라

신라

진한

신라

우산국

주호

탐라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

신라[1]
新羅

B.C. 57년 ~ A.D.935년 (도합 992년)

통일

음력 676년 11월

위치

한반도와 부속 도서
,(대동강 ~ 원산만 이남),

수도

서라벌

소경

중원경
북원경
서원경
남원경
금관경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 수반

(황왕)[2]

국성

경주 김씨[3]

언어

고대 한국어
,신라어, 백제어, 고구려어,

종족

예맥, 한족, 말갈족[4]

종교

불교[5]

통일 이전

신라, 보덕국
,백제(~ 660년), 고구려(~ 668년),

멸망 이후

고려, 후백제

신라의 대항 국가

장안국

2. 시대 구분과 명칭에 대해
5. 화려한 불교 문화
6. 경제와 활발한 대외관계
7. 역대 군주
8. 관련 문서

1. 개요

삼국시대 이후의 신라

문무왕 대로부터 진성여왕에 이르기까지의 약 270여년 간의 신라를 뜻하며, 외부가 안정된 뒤 역량이 내부로 쏠리면서 매우 스펙터클한 역사가 진행된다. 시대는 크게,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던 중대[6]와 귀족간의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진 하대[7]로 분류된다.[8]

기존의 신라와 흐름상의 차이는 없으나, 한국사에서는 흔히 삼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고구려백제가 멸망한 때를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여겨 '통일신라'라 칭하는 경우가 많고, 그 개념이 바로 이 문서이다.

2. 시대 구분과 명칭에 대해

영어

Later Silla / Unified Silla

한자

統一新羅

한국어

통일신라 / 후기신라 / 신라

백제고구려, 신라는 삼국시대에 존재했었던 국호였었다. 백제는 기록에서도 百濟, 伯濟로 표기됐으며 다른 사료에서도 십제(十濟)가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는 高句麗, 高勾麗, 高駒麗, 高句驪(고구려), 高麗(고려), 句麗/句驢(구려) 등으로 사료에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는 서라벌(徐羅筏),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등으로 불렸으며, 같은 국호를 한자로 음차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탈해 이사금 시기에는 계림(鷄林)을 국호로 정하기도 했다. 504년에 지증왕이 신라를 공식적인 국호로 정한 이후 신라는 국호를 바꾸지 않았다.

'통일신라'라는 명칭은 신라 당시에 사용된 이름은 아니고 근현대 사학자들이 676년 이전의 신라와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낸 명칭이다. 삼국사기의 신라 정통 사관의 영향과 현대 남북분단의 대립으로 인해 남쪽이 정통이라는 의미로 이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동로마 제국이 존재하던 당시에는 로마 제국이라 불렸지만, 근세 사학자들이 동서분열 이전의 로마 제국과 구분하기 위해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명칭을 만들어 시대 구분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다만 신라인들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자부했던 것은 사실인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청주시운천동사적비,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 등에서 일통삼한과 같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말하는 당대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 나름의 민족 융합 정책도 추진되었는데, 옛 고구려, 백제 출신 귀족들에게 본국의 지위에 버금가는 신라의 관등을 일률적으로 주었고[9] 옛 3국에 각각 3주씩 행정 구역을 균분한 점이나 역시 수를 균등히 맞춘 중앙군 편제 등 다방면으로 당시 신라의 통합 의식은 파악할 수 있다. 고구려 계승 의식을 천명한 고려왕조의 역사가 김부식, 일연도 고려의 후삼국 제패 이전에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다는 점은 인정했고, 이런 인식은 조선 후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나 실질적으로 신라의 세력권은 대동강 이남 지역에 한정되어[10] 백제는 그렇다 쳐도 고구려와는 통합했다고 보기 힘들며,[11] 정작 북방은 당나라 또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진 발해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신라라는 명칭이 합당한가에 대한 반대론이 조선 후기에도 있긴 했다. 현재는 이 시대를 '발해고'에 나오는 북국이라는 용어에서 비롯된 남북국시대라고도 부르는 편이다. 물론 남국이 군웅할거로 좀 복잡했다.

분류명을 더 들어보자면, 1000년이나 지속된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왕조이므로 전 삼국 구도가 무너진 시기를 '후기 신라'라는 용어로 말하기도 한다.[12] 그러나 비슷한 예로 장수왕 때에 고구려가 국호를 고려로 바꾸고 '고려'라는 국호의 사용 빈도가 훨씬 높았음에도 이후 왕건이 건국한 왕씨 고려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편의상 고구려라고 통칭하는 중이며, 고조선도 원래 조선이라고 부르는게 맞지만 이성계가 세운 훗날의 조선과의 구별을 위해 그냥 고조선이라고 부르듯[13], 그리고 발해도 당초 진(대진국)이라는 명칭으로 건국했으나 역시 '발해'로 뭉뚱그려 부르고 있듯이 여러가지 편의성 면에서 그냥 '신라'로 용어 통일이 이뤄졌다. 신라 또한 초창기에는 '사로국'이라는 생소한 이름을 가지고 지증왕 때에 들어서야 신라라는 이름과 왕호를 갖추지만 그 전 시기까지도 다 신라로 퉁치고 내물왕이니 눌지왕이니 하며 지증왕 이전의 지도자들까지 왕호를 붙여주기도 하는 실정이다. 다만 676년 이전과는 달리 신라한반도의 지배권을 가져갔으니까 이전보다는 품격을 높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일신라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있다.[14]

3. 정치

통일 직후(신라 중대)에는 신문왕의 대대적인 공신 숙청을 거치며 여러 모로 왕권이 강력했으나, 국가의 재정비 및 절대 왕권 확립 과정에서 귀족들의 반발이 일어나 절대 왕권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고, 이후(신라 하대)에는 너도나도 왕위를 노리고 반란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차츰 혼돈 국면으로 변해간다. 그럼에도 신라는 바로 무너지지 않았는데, 오히려 반란을 진압하고 나서 일부 지역에 면세의 혜택을 줄 만큼 지방까지 행정력을 투사할 역량이 충분했고 200여년 이상 통치를 이어갔다. 신라가 통일 왕조로서 멀쩡히 한반도를 지배한 기간만 떼놓고 따지면 676년 ~ 890년 정도인데, 214년이면 중국 역대 왕조와 비교하면 청나라, 당(통일왕조), 명나라 다음으로 꼽힐,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장수 왕조로,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신라 중대 ~ 하대의 정치가 보편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 마냥 혼란하고 취약하기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후대 고려 초 중기보다 더 지방 통제력이 강한 중앙 집권적 국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15] 그러나 오랜 기간 골품제 등의 고대 국가적 병폐가 쌓인 끝에 9세기 후반에 이르면 일개 지방의 독립 선언도 못 막고 세금도 못 걷는 궁색한 지경에 이르며 그 이후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서기 935년에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가 나라를 바치는 것으로 그 왕조의 문을 닫는다. 이러한 신라 하대의 상황이 제국이 된 이후의 로마와 비슷한 면이 많다.

하지만 국가 체제는 더욱 확고해졌고, 모든 지역의 종교를 국가가 주관하는 등 한민족으로서의 인식이 자리잡혀가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신라 중대의 개혁에 더해 골품제만 없앴더라면 진정으로 한민족으로써의 정체성이 완벽하게 자리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어떤 사회든 신분제가 제대로 개혁되려면 머리 꼭대기부터 한바탕 뒤집어져야 하므로, 골품제는 결국 신화로 기억되는 고대부터 국가를 쭉 유지했던 신라 1000년 역사의 정체성이자 어쩔 수 없는 멍에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16] 무엇보다 당대에는 육두품처럼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계층을 제외한 민중 레벨에선 골품제를 지금처럼 부정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17]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들어서면서 골품제 자체는 사라졌으나, 수세기 후 유교적 질서가 본격적으로 채택되기 전까지는 왕권과 왕실의 권위가 날로 떨어져 신라 시대에 비해 척신 등에게 휘둘리는 부작용이 커진 점도 감수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18]

국가 체제에 대해 더 설명하자면 당시 동아시아 각지에는 나라의 새로운 행정 체계인 율령제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율령제는 신라에도 영향을 주긴 했으나, 견당사를 통해 급격히 중국화한 일본이나 당의 행정 체계를 거의 본뜨다시피 한 북쪽의 발해 등과 비교해볼 때 신라는 당이 성립되기 훨씬 전부터 구축한 통치 체계를 꾸준히 계승하고 있었다. 하대에도 계속된 이 같은 전통의 고수는 신라의 정부 체제가 기존의 갑절 이상 넓어진 영토에서도 충분히 기능할 정도로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끝내 골품제 혁파 등 구습 혁파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렇게 다 좋은데 유독 정치판의 막장급 다툼을 오점으로 평가하며 신라를 폄훼하는 시각도 있다. 특히 김주원, 김헌창, 김범문의 3대 연속 반란고려 무신정권 이전까지 한국 반란사의 한 획을 그었다. 웃긴건 삼국사기에서도 4명의 왕이 반역자라며 정치판을 막장으로 만들었다고 김부식이 혜공왕 시절 때 정치적 상황이나 반란을 깠는데 정작 그 김부식 아들이 병크를 저지르는 바람에 결국 터진게 무신정변이다. 옛날 역사에 대해 까기만하고 고려가 낫다고 칭송하며 현 시대에 대해 이러한 이들이 되풀이된다는 반성이라곤 전혀 안했다는거다. 그 해구 연신의 난이나 간주리의 난도 마구 까고 막판에 고려가 낫다고 했다.그런데 이건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옆나라 당과 일본(헤이안시대)과 비교해도 딱히 큰 차이가 있어보이진 않는 것 같다.[19] 오히려 마지막 결정타인 후삼국시대 개막하는 부분을 제외하면 다음 시대인 고려 초 중기에 비해 정치는 안정적이었던 측면도 있는데, 김헌창의 난 등 수도 외부에서 주도해 일어난 반란이 서라벌을 뒤집어버린 경우는 후삼국시대 이전까지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신라 자체의 역사로 한정지으면 통일신라의 최후반 100여년간은 그 전대와 비교해 집권 귀족 세력간의 권력 다툼에 다소 심하게 치중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거기서 그대로 망하지 않고 재도약을 꾀할 가능성은 내재하고 있었으나 막판의 반란이 너무 대규모라 이겨내질 못했다.

그리고 갈등의 과정이 오히려 제도의 개혁으로 이어져야 하나 제도의 개혁과는 절대 이어지지 못했다. 당장에 문무왕에서 신문왕으로 이어질 때 많은 반란들이 일어났으나 녹읍이 폐지되고 관료전이 지급되어 대토지화를 차단한다거나 독서 삼품과를 넘어 과거제가 자리잡는다던가 하는 것이 800년대 신라 말에 없었다. 이는 고구려의 5부 귀족과 백제 8성씨 귀족들의 잦은 반란으로 개혁이 안되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자면 고려말 엄청난 정파 갈등 속에 위화도 회군을 시작으로 고려 말은 온갖 폐단을 다 정리하게 되는데 사전 혁파와 과전의 시행과 부곡민 체제 폐지와 군현 체제 정립과 그리고 무과의 도입 등 온갖 제도를 도입했으나 결국 고려는 문을 닫고 조선이 세워진다. 그야말로 정쟁이 있는 곳에 다툼이 있다는게 마냥 옳으면 위와 같은 개혁도 없이 무의미하게 진행되는 후삼국시대와 무신정권과 임오군란도 옹호받아야 한다. 악습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황에서 혼란의 상황만 반복하면 그야말로 자멸일 뿐이다. 세습과 추천이 남발되어 능력이 높다거나 혹은 전공을 세우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하고 의견의 대립을 하면 모를까 한번 자리를 먹기 시작하면 계속 먹거나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계속뽑고 기분에 따라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 혹은 말과 행동을 마구 바꾸는 사람들의 대립과 싸움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대립과 싸움일 뿐이고 파괴일 뿐이다.

본시 800년대 신라의 정치적 혼란에 대한 비판은 삼국사기가 부각시켰는데, 이는 고려가 전조인 신라와 차별화를 두기 위해 기록을 했는데, 이는 김부식이 가장 먼저 비판을 했는데, 이유는 본시 전 왕조의 실정을 부각시키고 그 몰락을 앞당겨야 현 왕조의 정통성을 지키는 셈이다. 이후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800년대 정치적 혼란은 문성왕 시기부터 헌겅왕 시기를 마지막 치세로 두어 지적을 하지 않다가 오히려 후삼국시대가 시작하고 최치원이 등장하기 시작한 900년대를 정치적 대혼란기와 몰락으로 삼았다(...) 이는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좀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고 신라를 재평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 왕조도 고려 왕조의 무신정권 시절을 난신적자가 판치는 대혼란기로 둔거나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현재에는 무신정권 시절보단 원 간섭기 시절을 몰락의 시점으로 본다(....)

당시의 왕과 인물에 대해서는 신라/왕사, 신라/인물 참조. 여담이지만 통일신라 중기 무열왕 직계 국왕들(무열왕 ~ 혜공왕)의 수명들이 하나같이 짧은 편이다. 50대에 사망한 무열왕(59세), 문무왕(56세)를 제외하고 신문왕부터 혜공왕까지의 무열왕 직계 국왕들은 50세를 넘기고 생존한 임금이 없다.

4. 영토


통일 신라 시대의 행정 구역도.

고구려 영토를 상실했다는 이유로 폄하되는 느낌도 있지만 사실 이건 '상실'이라고만 보기 어려운 것이, 애당초 고구려 영토는 발해가 고스란히 계승[20]해 간 데다 농경을 중심으로 했던 신라는 척박한 대동강 이북의 땅이 그다지 필요 없었고 결정적으로 신라의 주 타겟은 백제였다.[21][22] 즉 백제와는 역사 내내 애증(?)으로 엮인 관계였으나[23] 고구려에 대해서는 좀 심하게 보태 중국(즉 평범한 관계의 다른 나라)이나 마찬가지로 보았다.[24] 게다가 고구려는 당, 신라는 백제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남북간에 대규모 충돌을 벌일만한 여력도 없었다. 백제와의 전쟁에서는 백성들을 거의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전쟁을 벌였지만 백제 멸망 후의 고구려와의 전쟁에는 매우 소극적으로 나선 것도 한 예다.[25]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킨 직접적인 주체는 당이다. 실제로도 백제 멸망 후에 백제의 유민들은 신라의 통치에 격렬한 저항을 했고 그 대가로 대우가 훨씬 박해졌지만 고구려의 유민들은 오히려 신라군과 연합하여 당의 안동도호부와 전쟁을 치뤘다.[26]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와 연합하여 싸우게 된 것은 정치적 이유도 있지만 애시당초 삼국 시대 당시 서로간의 쌓인 온갖 감정이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백제에 비해서 고구려와의 분쟁이 훨신 적은 편이었고[27] 의외로 김춘추도 고구려를 중국 당나라보다 협력 대상 우선 순위를 높게 생각했을 정도지만[28]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매우 달랐다. 백제의 경우는 고구려와도 마찬가지지만 왕이 노비 출신 무사에게 이 잘리고 잘린 머리궁궐 계단 아래 가매장당하는 막장을 보았다.[29] 백제 입장에서는 고구려의 약화를 틈타 왕실의 숙원이던 한성 지역 수복을 이루는 듯 하였으나, 충청도 지역 기반 귀족 세력의 비협조와 역량 부족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한강 유역을 고구려로부터 신라 진흥왕에게 갖다 바친 격이 되니 복장이 터졌을 것이다. 이에 반해 신라 입장에서는 숙원인 소백산맥 이남 지금의 경상도 지역 통합을 위해 가야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이를 방해하기 위해 사사건건 군대를 가야에 파견하는 등 방해 공작을 펴온 백제와 성왕이 눈엣가시였을 수 밖에 없다. 또한, 신라에서는 백제군이 서라벌 바로 근처까지 쳐들어 올 정도로 징하게 싸웠을 뿐 아니라 무열왕 김춘추의 딸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30] 이 증오가 얼마나 깊었냐면, 훗날 백제 의자왕이 항복하는 자리에서 나중에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이 왕자 부여융에게 매섭게 채찍질하고 을 뱉는 일이 있었다.[31] 사회 상층부에 쌓인 미움과 증오가 이런 정도니, 실제로 전쟁을 수행하며 서로 약탈, 겁간하고 싸워 죽여야 했던 하층부 평민들끼리도 증오심이 매우 높았을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새로이 편입한 구 고구려령에 대해서는 9주 5소경 중 고구려 멸망 전의 영토를 삭주(朔州), 명주(溟州)로, 고구려 멸망 후의 영토를 한주(漢州)로 이름하여 복속시켰다.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의 경우 초기에는 당이 안동도호부를 세워 차지하다가 나당전쟁 때 신라가 고구려 유민과 함께 축출시켜 편입하기도 했고, 뒤에는 발해의 관할로 들어간 듯 한데, 그럼에도 이들 남북국에서 평양 일원은 국경으로 밀려난 변방이 되어 중요성이 퇴색되었다. 발해는 평양이 폐허가 될 때까지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고, 신라도 옛 고구려의 수도인 이 지역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자 2정을 설치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수도 경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계가 있어 이 지역의 중요성을 재인식한 고려 때까지는 말갈족 등 이민족들이 기승을 부렸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최근에는 황해도의 재건 및 평안남도 지역으로의 진출 등이 패강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설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이전까지 발해가 점령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평양 지역이 실제로는 고구려 멸망 당시 황폐화되었고, 신라대동강 이남 지역의 개발을 통해 서서히 평양 방향으로 영향을 넓혀나갔다는 주장. 특히 이러한 개발의 중심이 되는 예성강 ~ 대동강 구간은 고려 태조 왕건의 근거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32]

5. 화려한 불교 문화

불교 문화가 크게 번성했다. 뒤를 계승한 고려가 불교 문화에 있어서 규모나 질적인 수준에 있어서 오히려 통일신라에 비해 뒤떨어지는 부분이 있을 정도다.[33] 특히 신라 시대가 다른 한국사의 시대와 비교되는 것이 불상의 완성도인데, 석굴암 본존의 조형미나 크기는 한국 불상의 정점에 있다고 봐도 된다. 불국사석굴암 등 신라와 한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불교 유산들과 명승 고찰이 대부분 통일신라 시기에 완성되었다. 물론 고려도 신라 못지 않은 불교 국가여서 왕자가 승려가 되는 것이 비일비재했을 뿐더러 이 시기에도 흥왕사 보제사 같은 거찰이 많이 세워졌고, 기존에 있던 황룡사 같은 신라 거찰들도 후기에 외적이 침입하기 전까지는 관리를 받으며 잘 번성했다. 그러나 신라와 달리 교종선종의 대립 탓에 신라처럼 수도의 왕실이 불교계를 적극적으로 선도하는 입장은 못 되었고, 호족 등 지방 세력의 지분이 커서 파주 용미리 불상, 은진 미륵 등 토속적 형식의 불상이 많이 만들어졌고, 신라의 사실적인 불상과 비교당하는 측면이 있다. 다만 고려가 통일신라보다 역사가 2세기 더 길었던 만큼 남아있는 유물의 양은 고려가 더 많다.

6. 경제와 활발한 대외관계

중국의 저쪽, 깐수의 맞은 편에 산이 많고 왕이 많은 한 나라가 있는데, 신라라고 불린다. 그곳에는 이 풍부하다. 그곳에 간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한다.

- 페르시아인 이븐 쿠르다드비, <도로와 왕국 총람>

중국 해안의 맞은편은 신라와 그 부속 도서들을 제외하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라크인과 기타 외국인들이 정착하여 그곳을 조국으로 삼았다. 그들은 깨끗한 물, 비옥한 토지, 이익과 수입의 증대, 광물질과 보석류의 풍부함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곳을 떠난 자는 극소수다.

- 이라크인 마수디, <황금 초원과 보석 광산>

신라는 유쾌한 나라다. 중국의 가장 끝자리에 위치한다. 공기가 맑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길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이 난다고 한다. 전염병과 다른 병은 물론 드물고 파리와 야생동물 또한 거의 없다. 다른 지역의 어떤 환자도 이곳에 오면 치유된다. 모함마드 자카리야 라지는 "누구나 이 땅에 들어가면 살기 좋으므로 정착해 떠나려 하지 않는데 그건 자원과 금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하나님(알라)만이 그 진실을 안다.

- 자카리야 카즈위니, <나라들이 남긴 발자취>

기타 중근동 문헌들의 신라 관련 기록들[34]

세계와의 무역도 비교적 활발했으며[35] 장보고한중일을 연결하는 허브 기지로서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일대에 청해진을 건설하여 해상을 장악한 시기도 이 때. 진정 아시아이탈리아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장보고나 신라삼최, 혜초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유학 등 국제 인적 교류도 상당히 활발했다. 게다가 당시 주변의 국제 정세가 당, 일본, 발해로 정립되어 자리잡고 있던데다 신라 자체의 군사력도 상당했었기에 200여년 동안 외적의 침입도 흔치 않았다. 사실 당과 일본 모두 삼국 통일 전후 혼란기에는 한반도로 병력을 보내 집적거리긴 했지만 이내 역관광당했고, 통일 뒤 통일신라가 완전한 안정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국가적인 공격 기도를 멈췄다. 특히 일본의 경우 사이메이 덴노 ~ 덴지 덴노의 시기에 멸망한 백제를 돕겠답시고 대규모 군사를 내어 한반도로 보냈다가 싹 날려먹는 병크로 나라가 뒤집힐 지경이었고(…), 이후 8세기에도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이 추진됐으나 발해의 도움을 얻는 데 실패하면서 끝끝내 당시 최강 국력을 자랑하던 통일 직후의 전성기 신라를 건드리지는 못했다. 아마도 실행했다면 사이메이 덴노 시즌 2 확정[36]. 오히려 신라에서 일본을 정벌하러 올까 봐 두려워했다는 당대 정황도 나타나고 있다.

내륙에 신라인의 거점인 신라방이 구축된 시기도 바로 이 때. 그 외에도 신라관, 신라촌, 신라원, 신라소라 이름 붙은 이 시기의 대당 거점이 꽤 많이 있었다. 이는 당대 신라의 진취성과 개방성을 모두 보여주는 사례. 뿐만 아니라 국수주의로 돌아선 헤이안 시대 일본에조차도 견신라사(遣新羅使)가 오가면서 교류가 꽤 있었기에 통일신라의 영향을 받은 문화재가 꽤 많으며[37] 심지어 적성국으로 출발한 발해와도 후대에 교역을 트면서 <상경 → 동경 → 남경> 루트를 거쳐 금성까지 연결하는 <신라도>라는 무역로가 개척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당대 가탐의 저서에 따르면 발해의 동경이 있었던 책성부[38]에서 신라 북쪽 천정군[39]까지의 사이에 39개의 역(驛)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융성하여 당시 기록에 따르면 수도 금성(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에서는 비가 오는 날 가가호호의 처마 밑만 따라 걸어도 비 한방울도 맞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고 할 정도. 말기인 헌강왕 때에 이르면 도성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으로 밥을 지었다고 한다. 하긴 그만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었으니 문화적 성취가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다만 모두 수도의 융성함을 드러내는 기록이다 보니 여타 지방의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위의 기록에서 보았듯, 세계사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당대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조차도 신라에 와 보고는 고향보다 더 살기 좋아서 영구 정착, 아예 눌러앉으려 했다고 그들의 지리서에 기록했다. 기록들에서 일관적으로 서술된 내용에 따르면 실제로 정착한 무슬림도 적지 않았던 모양. 삼국유사에 용왕의 아들로 나오는 처용이 사실은 아랍에서 온 인물이었다는 정수일 선생의 설이 유명하다. 이외에 중세 이란의 서사시 쿠시나메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후 신라로 망명한 페르시아의 왕자와 그의 혼혈 아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내용으로, 현대에 한국에도 알려져서 공연 등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7. 역대 군주

신라/왕사 문서 참조.

8. 관련 문서


  1. [1] 통일신라라는 명칭은 후대에 구분을 위에 붙인 것이며, 국호는 그대로 신라였다. 하술 참조.
  2. [2] '황왕' 이라는 군주 칭호는 사서에는 안 나오고 오직 신라의 금석문에서만 나온다. 황제와 왕의 복합어로 외왕내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영어로 직역하면 'Emperor King'.
  3. [3] 신라 왕조 초기에는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돌아가면서 왕을 했지만 통일신라기에는 경주 김씨의 독점 세습이 고착화되었다. 후삼국으로 다시 쪼개진 뒤 박씨가 다시 왕에 오르기도 했다.
  4. [4] 고구려 멸망 후에 다수 유입
  5. [5] 비록 불교 이외의 다른 신앙을 탄압하지는 않았지만 국교는 불교였다. 애초에 불교 문화재의 양과 질을 비교하면 어떤 시대도, 심지어 현대까지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
  6. [6] 무열왕계가 왕위를 이었던 시대. 혜공왕까지 이에 해당된다.
  7. [7]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
  8. [8] 신라를 상, 중, 하대로 나누는건 삼국사기 기준이다. 삼국유사는 상중하고로 나눈다.
  9. [9] 신문왕 6년(서기 686년)에 고구려 사람들에게 중앙의 관위를 주었는데 고구려의 관품에 준하였다. 일길찬은 고구려의 주부(主簿), 사찬은 고구려의 대상(大相), 급찬은 고구려의 위두대형(位頭大兄)과 종대상(從大相), 나마는 고구려의 소상(小相)과 적상(狄相), 대사는 고구려의 소형(小兄), 사지는 고구려의 제형(諸兄), 길차는 고구려의 선인(先人), 오지는 고구려의 자위(自位)에 준하도록 하였다. ... 문무왕 13년(서기 673년)에 백제에서 온 사람들에게 내외의 관직을 주었는데 관등은 백제의 관직에 준하였다. 중앙 관직으로서 대나마는 백제의 달솔(達率), 나마는 백제의 은솔(恩率), 대사는 백제의 덕솔(德率), 사지는 백제의 한솔(扞率), 당은 백제의 나솔(奈率), 대오는 백제의 장덕(將德)에 준하였다. 외관으로서 귀간(貴干)은 백제의 달솔, 선간(選干)은 백제의 은솔, 상간(上干)은 백제의 덕솔, 간(干)은 백제의 한솔, 일벌(一伐)은 백제의 나솔, 일척(一尺)은 백제의 장덕에 준하였다. - 삼국사기 권40, 잡지9, 직관 하 신라 외관
  10. [10] 굉장히 작은 영토를 가진 것처럼 표현되곤 하는데, 신라 자체가 원래 영남 쪽의 소국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괄목한 것이다. 게다가 대동강 이남임을 따지고 보면 대동강 근처도 못가는 대한민국의 '실질적' 영토보다도 컸던 것이다!
  11. [11] 이 때문에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룬 적이 없고 정신승리만 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고려 역시 옛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를 온전히 거두지 못했던 건 마찬가지라 현대인 기준의 영토적 관점에서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경우 고려 역시 같은 이유로 불완전한 통일이 된다. 요동과 한반도를 동시에 아울러야 통일이라면 한국사에 완전한 통일 왕조는 예나 지금이나 한 번도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고구려의 주무대이자 영토가 만주나 요동이었더라도 지금의 우리가 거기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구려 땅은 고구려 땅이었을 뿐이고, 한국 땅은 한국 땅일 뿐이다.
  12. [12] 이 명칭은 그렇다면 왜 통일 이전의 신라를 '전기 신라'로 부르지 않느냐는 반박이 나올 수 있고 보통 '후'를 붙이는 다른 사례와 달리 왕조의 연속성에 끊김이 없다. 실제로 북한에서 발행된 조선통사, 조선전사, 조선단대사 에서는 '후기 신라와 발해'로 장이 구성되기도 한다.
  13. [13] 이성계가 세운 조선을 후조선이라 부르자는 주장도 재야사학 등지에서 나오고 있지만,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 가진 정보량, 현재 대한민국과의 연결성 등이 고대 조선과 비교하는게 무의미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사실상 받아들여지는건 힘든 주장이다.
  14. [14] 이러한 주장의 밑바탕에는 발해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고, 신라가 한반도 전체를 통치한게 아니라 반박당할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의 북쪽 경계선(압록강, 두만강)이란 것도 인위적으로 형성된 인문학적 인식이라 후대의 기준으로 논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발해사 연구자들의 경우 한규철은 신라가 당병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부터 발해가 개국되는 698년까지 30년이라는 좁은 시간에 한정해 통일신라라는 국호를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 시간 동안에 한반도와 요동 일대에 신라 외에 통일된 왕조가 없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라고 한다.(출처 : 발해의 대외관계사)
  15. [15] 고려 시대, 특히 고려 초기는 태조 왕건의 역대급 포용책으로 인해 지역별로 정치 분파가 생성 대립하는 성향이 강했고, 지방에서 달려온 세력에 의해 수도의 정치가 뒤집어지는 일이 매우 잦았다.
  16. [16] 요컨대 고구려나 백제가 통일했더라 손 쳐도 이런 신분 질서가 완화되길 기대할 순 없다는 이야기. 고려 초에 신분 질서가 완화된 것은 이전 시대까지는 별볼일없는 신분이었던 호족 출신이 새 왕조를 개창했기 때문이다.
  17. [17] 그리고 뒤이은 고려 시대만 해도 고려사에서 가장 신분제가 틀에 박힌 문벌귀족 시절이 백성에게는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다. 그 이후 개나 소나 권력을 잡는 무신정권부터는 나라가 개막장화된다. 그리고 신라 말기 때의 막장스러운 상황에서는 그런 거 없고 민중 봉기가 일어나는 등 반 신라 세력이 급속도로 증가한다. 그런데 문벌 귀족 시대가 진짜로 백성들에게 가장 나은 시대였는지는 불분명한데, 왜냐하면 단지 시기적으로 가장 유리했던 시기(국초 + 대외적 혼란) 아니냐라는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이 그나마 가장 낫게 평가한 시대라서 훨씬 고평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고려사를 기록한 사람들 입장에서 무인들이 활동하던 시대나, 자신들이 비판하고 나선 친원파의 시대를 좋게 평가해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즉, 신분제의 고고화가 백성들이 살기 좋았다는 것은 근거가 한참 부족하다. 오히려 역으로 국가의 상황이 좋았기 때문에 기존의 제도인 신분제가 동요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합당한 설명이다.
  18. [18] 고려와 달리 신라는 적어도 척신이 권력을 쥐고 흔들진 않았다.
  19. [19] 당쟁 등을 언급하면서 한국사를 분쟁의 역사로 몰아세우는 것은 일제 식민사관이 즐겨 써먹던 여론몰이 수법 중 하나이나, 정치가 있는 곳에 다툼은 필연이다. 중국만 해도 60여개에 달하는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65년 정도며 진시황 이후의 통일 왕조북송만이 300년을 간신히 넘겼을 뿐이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 천황제를 천년 이상 존속시켰다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귀족 세력과 다이묘(막부)의 정치적 농단을 그저 지켜만 보다가 가끔씩 쫓겨나거나 죽어나가는 마스코트에 불과하였고, 결정적으로 무슨 무슨 막부 하는 세력들 모두가 천황의 명목상 신하이기는 하되 실상은 서로 항쟁하는 독립된 국가나 다름없다. 즉 따지고 들면 통치 체제가 외침과 내란에 맞서 건재하게 유지됨에 있어서 한반도만큼 안정적인 지역은 오히려 찾기 힘들다는 말. 당장 신라 이후 한반도의 국가들이 건국부터 멸망까지 대항했거나 사대했던 국가들만 따져봐도 이는 간단하다. 신라는 수나라당나라, 고려는 북송원나라, 조선은 명나라청나라.
  20. [20] 남북국시대라는 명칭이 최근 학계에서 점차 대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21. [21] 고려는 고토 회복을 노렸지만 주변 상황이 안 따라 줘서 포기하고 조선은 고구려 계승 의식은 있었으나 농사하기 힘든 땅을 무리하게 경영하기보다는 여진족에 대한 간접 지배 방식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신라의 기조를 이어나가갔다.
  22. [22] 신라의 기조를 이어나갔다고 표현했으나 간접 지배는 오히려 고구려 당대에도 성행했다. 유목민족에 대해 간접이든 직접이든 통제의 필요성이 높았던 나라는 영토가 맞닿아있었던 고구려, 발해였다. 다만 그때는 여진족의 전신인 말갈족이 충분히 문명화되지 않았던 상태였기 때문에 간접 지배로도 충분히 제어가 가능했으나 발해 멸망 이후, 즉 동양에서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로는 대부분의 유목민족들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날뛰게 된다. 한국사에서는 대표적인 균형 역전 사례 중 하나가 바로 고려의 동북 9성 개척 중 있었던 갈라수 전투이다. 고려는 전대 왕조였던 고구려가 했던 것처럼 옛 부하들이었던 여진족에 대한 종주권을 확보하려 했으나 무려 회전에서 발려버리고 만다. 이 시대 이후로 그나마 유목민족을 제어했던 농경 국가는 거대 제국이었던 명나라였으나 그마저도 실패해서 결국 청나라에 먹혀버렸다.
  23. [23] 그냥 원수 사이라고 보면 된다.
  24. [24] 당시 시대만 해도 통일 후 골품제에서 신라 >>> 고구려 >>> 백제 순으로 신분 차별하는 나라에 민족적 감정을 대입하여 우리 민족의 영토를 포기하다니!라고 비난하기는 힘들다.
  25. [25] 이건 사실 당이 고구려에 집중하는 동안 백제 지역을 확실하게 지배하려는 전략의 일부였다. 백제 멸망 후 당이 정도로 스팀을 받았겠지만, 최대한 전력의 온존을 꾀하며 고구려 멸망 및 구 백제 지역의 확보를 노린 것이다.
  26. [26] 백제 부흥 운동의 경우에는 나당 연합군으로 아예 깔아뭉개 버렸지만, 고구려 부흥 운동에 대해서는 일부 지원하고, 실패 이후에는 남부 지방 정착 지원이나 신라 귀족 편입 등 대접의 차원이 달랐다.
  27. [27] 사실 고구려와 신라도 그렇게 사이가 좋기까지 하진 않았다. 멀리 동천왕 대에 고구려군의 침공을 받은 적도 있었고, 내물왕 시기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원군을 요청하여 왜군의 침입을 저지한 뒤 이후 신라 영토에 고구려군이 일방적으로 주둔하는 등 고구려의 간섭을 당한 적이 있었다.(이후 눌지왕 시기에 신라에 있던 고구려군을 모두 몰아냈지만) 게다가 광개토대왕 사후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맞서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전쟁을 치르는 한편 진흥왕 때 한강 유역 차지 이후 한강 유역 일대를 놓고 고구려군에게 한강 유역 일대를 공격받으며 고구려 국경 지대에서 고구려군과 신라군 사이에 전쟁이 매번 벌어질 정도였었다.
  28. [28] 대야성 함락 직후 김춘추가 당이 아닌 고구려부터 간 이유, 물론 이 기대는 백제와 동맹을 맺은 고구려가 고의적으로 무리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 즉 거절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깨진다. 이 과정에서 김춘추는 옥에 갇힌다. 외교관을 구금하는 것은 당시에도 꽤 과한 처사였다.
  29. [29] 일본서기 기록, 성왕관산성 전투 당시 신라 무사 도도(일본서기 기록으로는 고도)에게 참수당했다. 현재 도도의 신분이 정말 종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30. [30] 대야성 전투 당시 성주 김품석의 부인이 김춘추의 장녀 고타소였고, 살아있었다면 당연히 왕녀가 되었을 것이다. 살아서 왕녀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기에, 김춘추의 다른 딸처럼 '공주'나 '부인(신라 시대 왕실 여인에게 붙여진 '부인'이란 호칭은 공주나 왕비와 동일시된다. 가령 진평왕의 왕비는 마야부인으로, 김춘추의 딸이자 김유신의 아내인 지소는 지소부인으로 불린다.)'으로 불리지 않고 '고타소랑'이라 기록된다.
  31. [31] 당시 김법민은 "이전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원통히 죽여 옥중에 파묻은 일이 있다. 그것이 나를 20년 동안 마음을 아프게 하고 머리를 앓게 하더니, 오늘날 네 목숨은 내 손에 있구나."라고 말했다. 매우 절제된 언어로 쓰여진 삼국사기 안에서 피냄새와 증오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한 이런 문장도 드물다.
  32. [32] 일단 왕건의 전임자인 궁예가 자리잡은 곳이 개성이다. 어느 정도의 경제 & 사회적 기반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일. 실제로 궁예가 철원으로 옮기자마자 나라가 풍비박산나고 왕건 집권 후에 철원을 버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33. [33] 물론 고려의 근본은 지방 세력인 호족의 연합 정권이였기 때문에 지방색이 신라에 비해서 강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34. [34] 여담으로 중근동 쪽 문헌에서는 이미 고려 시대로 접어든 중세 11세기까지도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당시 정보나 교통은 현대 같지 않았다 보니 새로운 왕조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거나, 혹은 알면서도 과거부터 이미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표기했던 듯 하다. 사실 조선시대에도 외국에서 '고려'라는 명칭을 쓰는 등의 일이 있었고, 멀리 떨어진 아랍도 아니라 가까운 일본이나 여진족에 심지어 19세기 이양선을 타고 오는 서구 열강까지 고려란 표기를 쓰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일은 꽤 흔했던 듯 하다. 지금도 서양에선 우리를 고려(Korea)라고 부르는 것처럼
  35. [35] 당나라, 발해, 일본은 물론이고 심지어 멀리 아라비아 상인도 왔다. 이는 당이 다른 중국 통일 왕조보다 더 개방적인 성향이었던 탓도 크다. 반대로 조선이 해외 교류가 거의 없었던 것도 명이 폐쇄적인 성향이었기 때문이 큼.
  36. [36] 신라에 대한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이후 당은 주로 서쪽 토번, 일본은 동북방의 아이누족과 대치 국면에 들어갔다. 토번은 송첸캄포 대왕 때 크게 성장하여 안 그래도 한반도 쪽에 신경 쓰느라 바쁜 당을 털어버렸다. 덕분에 신라는 나당전쟁을 승리로 빠르게 당나라 세력을 몰아냈다. 그리고 토번은 당이 막장 테크를 타자 당의 수도인 장안까지 털어버린다.
  37. [37] 헤이안 시대의 경총(經塚)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의 금동불입상이 대표적이다. 덴무 덴노 시절에 제정된 팔색성(야쿠사노가바네)이라는 씨성제가 신라의 골품 제도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38. [38] 지금의 중국 길림성 훈춘.
  39. [39] 지금의 북한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면.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sta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