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중국의 제1급 행정구역

화베이 지방

베이징 시 · 톈진 시 · 허베이 성 · 산시 성 (山西省) · 내몽골 자치구

화둥 지방

상하이 시 · 산둥 성 · 안후이 성 · 장쑤 성 · 장시 성 · 저장 성 · 푸젠 성 · 타이완 성

중난 지방

허난 성 · 후베이 성 · 후난 성 · 광둥 성 · 하이난 성 · 광시 좡 족 자치구 ·
홍콩 특별행정구 · 마카오 특별행정구

둥베이 지방

헤이룽장 성 · 지린 성 · 랴오닝 성

시베이 지방

산시 성 (陕西省) · 간쑤 성 · 칭하이 성 · 닝샤 후이 족 자치구 · 신장 위구르 자치구

시난 지방

충칭 시 · 구이저우 성 · 쓰촨 성 · 윈난 성 · 티베트 자치구

티베트 (중국)

བོད་ / Bod [1]

영어: Tibet

중국어: 西藏 (Xīzàng), 藏 (Zàng)

1. 개요
2. 명칭
3. 면적 및 인구
4. 지리 및 기후
5. 행정 구역
6. 역사
6.1. 토번 제국
6.2. 역대 찬보(贊普)
6.3. 분열시대 및 몽골(원)의 통치, 티베트 통일
6.4. 만주(청)의 통치
6.5. 티베트 독립시기
6.6.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7.1. 판첸 라마 문제
7.3. 티베트를 보는 중국인들의 인식
7.4. 티베트의 역사와 현실을 아는 방법
8. 티베트로 가는 길
8.2. 칭짱도로
8.3. 쓰촨성 - 티베트 도로
8.4. 신장 위구르 자치구 - 티베트 도로
9. 대중문화에서의 티베트
10. 출신인물

1. 개요

티베트 전도. 현재 칭하이성으로 편입된 암도(Amdo, a mdo)와 쓰촨성으로 편입된 캄(Kham, khams) 지방이 포함된 대티베트라고 불리는 지도이다. 현 티베트 자치구 지역은 위짱(Ü-Tsang, dbus gtsang) 지방이라고[2] 부른다.

Tibet Travel Video Guide

중국 서남부 티베트 고원에 위치한 시짱 짱족 자치구 혹은 거기서 사는 토착 민족인 티베트족을 일컫는 말. 범위를 확장하여 티베트 고원 전체나 티베트인들의 거주지 전체를 일컫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이 민족을 짱족(藏族)이라고 한다.

2. 명칭

중국에서는 티베트 지역을 시짱 짱족 자치구(西藏藏族自治區, 시짱 짱주 쯔주취, 서장 장족 자치구), 시짱 자치구(西藏自治區, 시짱 쯔즈취, 서장 자치구)라 칭하고 있다. '시짱'라고 불리는 이유는 시짱 자치구가 있는 지역이 전통적인 티베트의 영역의 서쪽 일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칭하이 성에 편입된 암도 지방과 쓰촨 성에 편입된 캄 지방에도 다수의 티베트인들이 살고 있고 전통적으로도 티베트의 영역이었으며 이 지방에도 티베트 자치 지역이 몇 개 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시짱=티베트(지역명으로써)'는 아니다. 티베트족이 거주하는 지역 전체는 대티베트(대서장)라 일컫는다.

중국 외에서는 이 '시짱 자치구'에 대해 '시짱'보다는 이에 대응되는 '티베트'를 사용하고 한국에서도 대체로 티베트나 간혹 한역인 토번을 사용한다.(외국에서 동투르키스탄이나 위구르, 회골이라 칭하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비슷)

14세기까지는 과거 이 지역 왕조인 토번(吐蕃, 투베트, 투보트)으로 통칭되었다. 토번의 고유발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특히 번(蕃, 番) 자의 발음을 놓고 말이 많은데, 중국에서는 '번'에 해당하는 판(fan)과 보(bo)의 두 발음이 대립하고 있다. 토번이 역사서에 기록될 당시(수나라 무렵) 중국어의 발음을 재구한 학자들은 퉈퐈, 퉈피원, 퉈편 등으로 발음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이 중 뒤에 ㄴ받침이 붙은 쪽이 보편적으로 쓰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번' 쪽을 좀더 밀고 있다는 얘기. 이 '번(蕃)' 자가 티베트를 나타내는 고유어 뵈(Bod)를 음차한 것인지, 혹은 단순히 글자 뜻 그대로 오랑캐라는 의미를 나타낸 것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두 목적 모두 있다고 여기고 있다. 티베트 망명 정부에서는 아예 이러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 한자표기를 도박(圖博, Tǔbó)로 하고 있다.도박국?

고대 튀르크 및 소그드어로 기록된 문헌에는 이 지역을 튀퓟(Tüpüt)으로 부르고 있다. 이 명칭은 티베트 북부 지역을 나타내는 티베트어 tu phod 이나 stod pod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꽤 유력한 가설 중 하나로 취급받고 있다.[3] 이 발음이 아랍 세계로 전해진 뒤 영어권에서 Thibet이라고 불리다가, 현재 영문명칭인 Tibet으로 정착됐다.

3. 면적 및 인구

시짱 자치구만 따진다면 티베트의 면적은 1,228,400km²로 남한 면적 12배 정도의 크기에 인구는 300만 명 정도지만, 시짱 자치구 이외의 중국 내 티베트인 자치 지역까지 합하면[4] 면적 약 220만km²에 인구 800만 명에 달한다.

4. 지리 및 기후

이 시짱자치구는 서북쪽으로는 신장위구르자치구, 둥북쪽에는 칭하이 성, 동쪽에는 쓰촨성, 동남쪽에는 윈난성, 미얀마, 남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 너머 인도 공화국, 부탄, 네팔 등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티베트 고원은 평균 고도가 4,900m에 달해 세계 최고의 고원 지대, 고산지대이다. 당장 중심도시 라싸만 해도 해발고도가 무려 3,400m를 넘어 3,650m 가량 된다.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와 거의 비슷한 해발고도.[5] 수도라싸(Lhasa, 拉薩, '하싸'라고도 발음함).

이곳에 사는 유명한 동물로 티베트모래여우티베트토끼[6]가 있다. 그리고 티벳궁녀 포탈라궁도 유명하다.

5. 행정 구역

티베트 자치구
བོད་རང་སྐྱོང་ལྗོངས།[7] (티베트어)
西藏自治区[8] (중국어)

행정 구역

(티베트어)

(중국어)

면적(km²)

인구(`10)

민족 구성(`10)

1

응아리 지구
(아리 지구)

མངའ་རིས་
Ngari

阿里
Ālǐ

296,822

95,465

티베트인 91.7%
한족 7.7%

2

낙추 지구
(나취 지구)

ནག་ཆུ་
Nagqu

那曲
Nàqū

391,816

462,382

티베트인 96.8%
한족 2.8%

3

참도 시
(창두 시)

ཆབ་མདོ་
Qamdo

昌都
Chāngdū

108,872

657,505

티베트인 95.5%
한족 3.4%

4

시가쩨 시
(르카쩌 시)

གཞིས་ཀ་རྩེ་གྲོང་
Xigazê

日喀则
Rìkāzé

182,066

703,292

티베트인 95.5%
한족 3.7%

5

라사 시
(라싸 시)

ལྷ་ས་གྲོང་
Lhasa

拉萨
Lāsà

29,538

559,423

티베트인 76.7%
한족 21.6%

6

로카 시
(산난 시)

ལྷོ་ཁ་གྲོང་
Lhokha

山南
Shānnán

79,287

328,990

티베트인 93.7%
한족 5.6%

7

닝치 시
(린즈 시)

ཉིང་ཁྲི་གྲོང་
Nyingchi

林芝
Línzhī

113,964

195,109

티베트인 74.1%
한족 17.3%

현재 중국의 티베트 자치구역은 위의 표에 나온 5개 지급시와 2개 지구로 이루어져 있다. 엄밀히 말하면 현 티베트 자치구 지역은 티베트 내에서는 위짱 지방과 캄 지방의 일부(참도)만을 포함하고 있으며, 넓은 의미의 티베트는 칭하이 성 대부분 지역과 간쑤 성, 쓰촨 성, 윈난 성 일부 지역을 포함한다.

6. 역사

6.1. 토번 제국

토번왕조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그 원류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정보는 없다. 다만 기원후 4세기경에는 이미 토번의 선조라고 할만 한 정치집단이 등장하여 천천히 중앙 티베트에서 영향력을 확장한 듯 싶다.[9] 토번의 원류가 되는 집단은 라싸 남동의 얄룽(톨기 지방)을 기점으로 근처의 여러 부족을 흡수해 세력을 늘렸다. 약 570년경 남리룬첸이 즉위하여 티베트는 연대고증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토번은 비로소 주변 경쟁세력을 능가하는 국력을 갖추는가 하면 중앙집권화에 대한 준비 역시 시작했다. 그러나 지나친 확장에 대한 반발로 619년[10], 남리룬첸이 독살되고 속국들이 다시 독립되게 만든다. 그러나 그의 아들 송첸감포(재위 630년~650년)가 불과 13세의 나이로 그 모든 것을 평정하고 통일 티베트의 서막을 연다. 633년, 송첸 감포[11]는 스키타이 계열 유목민을 평정하고, 티베트 일대를 통일한 후, 수도를 라싸로 정하고 토번(吐蕃) 왕국을 건설한다.

634년, 송첸감포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물을 교환하고 토번의 남쪽에 위치하는 네팔의 릿체비 왕조에 사자를 보내, 브리쿠티 데비(赤尊公主)를 왕비로 맞이했다. 636년, 당태종에게 당나라의 황녀를 왕비로 맞기 위해 사자를 보냈지만, 토번이 당나라의 속국인 토욕혼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그러자 송첸감포는 20만의 군사를 일으켜서 토욕혼을 정벌하였고, 겸사겸사 백란 등의 강족의 마을도 공략한 후, 송주(현 쓰촨성 쑹판현)를 내놓으라고 당나라에 요구했지만 당나라에 패배했다. 그 후 다시 당태종에게 특사 가르통첸(재임 652~667)을 보내, 금 5,000령을 납폐로서 주었고, 당나라는 토번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641년 문성공주(文成公主)를 보내 왕비로서 맞이하게 한다.

원래 문성공주는 송첸감포의 아들인 공손공첸에게 시집갔으나 아들이 낙마사고로 사망해 유목민의 형사취수제와 정략에 의해 시아버지랑 재혼한다.[12]

여하튼 문성공주와 송첸감포의 결혼은 누가 숙이고 들어갔느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13] 일단 송첸감포는 문성공주가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문성공주가 '자면의 풍습'(얼굴에 적토를 바르는 풍습)을 싫어하자 이를 폐지하는 등 정성으로 대했다. 또한 친당정책을 시작해 당나라와 교역하며 인도에 사신을 파견하는걸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나 송첸감포 사후 양국 관계는 완전히 파탄났다. 사실 이럴 수 밖에 없는 게 당시 토번 왕국의 국력은 극에 달했고, 명신 가르통첸의 개혁과 이로 인해 강화된 가르 가문의 집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성과가 필요했기에, 결국 669년 안서사진을 공격하여 함락해 양국은 마침내 완전히 적대적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자 당나라는 당연히 반격을 가했지만 이미 토번 왕조는 대외적인 제도 정비에 성공하고 군사력 또한 증가되어 큰 성과 또한 얻지 못했다. 그러나 699년 치둑송첸의 대숙청으로 가르친링이 제거되었고 710년 금성공주의 혼인으로 일시적으로 화평이 나오기는 했지만, 715년경부터 당나라가 토번에 대공세를 가해 토번의 영향력을 점차 조금씩 감소시키기 시작했고 고선지의 원정으로 그 성과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고선지 역시 탈라스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당나라의 빈자리는 다시 토번이 차지한다. 당나라는 토번에 매년 공물을 바치며 이들을 달래고자 한다.

8c 후반 토번왕조의 위세가 절정에 달했을 시기. 현재 시짱자치구 영토 4배에 육박한다.

하지만 토번의 정복 활동은 계속되어 왕국의 힘은 8세기 후반 더욱 확장됐다. 토번은 파키스탄 북부와 네팔, 인도 북부와 벵골과 방글라데시는 물론 중국의 간쑤성(甘肅省)과 쓰촨성(四川省) 서부 지방을 점령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해서 거대한 국가로 발돋움 했고, 763년 당이 안녹산의 난으로 혼란에 빠지자 공물을 보내지 않았음을 빌미로 삼아 20만 대군을 몰아 당군과의 수 차례에 걸쳐서 정면 대결을 시도, 여기서도 승리를 거두며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점령했고 자신들이 당의 황제를 마음대로 세울 정도로 기세를 날렸다. 그러나 791년 서역전역에서 위구르에게 패하면서 조금씩 영향력이 줄어들고 800년대 초반부터는 남조왕국에서까지 견제를 받고 결정적으로 아바스 왕조와의 대결에 국력을 소모하고 당, 위구르와의 전쟁에서도 큰 성과를 얻지 못해 결국 당과의 화친을 한다.

결국 토번과 당나라는 820년 협정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함으로서 앞으로의 무력 충돌을 피하기로 한다. 이때의 확정 조약은 티베트의 수도 라싸의 조캉사원[14] 앞에 당번회맹비라는 내용으로 세겨져 지금까지 세워져 있다. 여담이지만 '이 비문이 세워진 날부터 토번인은 토번인의 땅에서, 당나라인은 당나라인의 땅에서 각자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다.' 라고 쓰여 있었고 1950년 대지진으로 국경 지방의 비석이 파괴되기 전까지 이 비문은 그 역할을 훌륭히 이행하였다. [15] 부서지자마자 중국이 침입

토번은 줄곧 당나라와 대립을 반복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대적인 관계만은 아니었다. 송첸감포 본인부터 당나라의 제도와 기술 수용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아내가 당나라 공주이기도 하고… 문성공주는 티베트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서 추앙받고 있으며, 이 시기 율령제와 한자를 비롯한 유교 경전 등 다른 한자문화권과 같은 중국 문화를 받아들였다. 티베트어중국어와 여러 가지로 비슷하다. 두 언어 모두 Sino-Tibet language family, 즉,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한다. 이 어족은 한장어족이라고도 부른다. 티베트어에서 고대 중국어와 비슷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티베트는 나중에 인도 문자 계열을 잇는 티베트 문자를 따로 만들어 활발히 씀으로서 한자, 한문 사용은 정착하지 않았으며 불교도 한역 불경이 아니라, 티베트어로 바로 번역하여 받아들이면서 중국 문화권과는 선을 그었다[16].

토번은 9세기 이후 마지막 왕인 랑데르마가 암살당하면서 실질적으로 붕괴된다. 당시 그는 불교를 매우 강력하게 탄압했는데[17] 이에 반발한 한 승려가 신의 계시를 받고 티베트 전통 종교인 본교 사제처럼 검은칠을 한 흰옷을 입고 역시 검은칠을 한 백마를 타서 당과 토번간의 회맹비를 보던 랑데르마의 미간을 맞추어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헤드샷! 이에 친위대가 쫓아갔으나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검은 칠이 벗겨서 흰 옷을 입은 사람과 흰 말을 탄 사람으로 변해 친위대가 알아보지 못해 성공적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토번은 중앙 귀족들 간에 왕위 쟁탈이 벌어졌고, 왕실 직계의 일부가 서부 티베트인 응아리(아리)로 도망가 구게(Guge)라는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구게 왕국은 17세기까지이어지다가 1635년에 라다크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그러나 막상 본국은 그 국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895년 마지막 찬포 위송이 살해당하면서 멸망했다.

6.2. 역대 찬보(贊普)

  • 찬보는 토번국의 군주 칭호이다.

순서

왕호

재위기간

1

손첸 감포

617- 650

2

망송망첸

650-676

3

치둑송첸

676-704

4

치데축첸

704-755

5

치쏭데짼[18]

755-797

6

무네찬포

797-798

7

치데쏭찬

798-815

8

치축데찬

815-841

9

랑다르마

841-846

6.3. 분열시대 및 몽골(원)의 통치, 티베트 통일

그 후 티베트는 다른 민족들에게 중앙아시아 지역을 빼앗겼으며, 토착종교 뵌교와 외래 종교 불교 간의 대립, 불교 내의 파벌 간 다툼과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조각조각 나뉜 군웅할거 시대를 맞이했다. 그리고 티베트는 분열하여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며 주변 강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전락했다. 이때부터 장족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1239년, 몽골 제국은 티베트를 제압한 뒤 종교 지도자를 대리 통치인으로 선택했고,티베트 불교 샤꺄파(홍모파)의 쌰꺄틴진을 식민 정책의 동반자로 선택하기도 했다. 홍모파의 승려 파스파는 몽골의 파스파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샤머니즘, 경교, 이슬람 등 온갖 종교가 각축을 벌이던 몽골에 티베트 불교를 전파하였다.

몽골 통치가 붕괴된 이후 티베트 문화는 꾸준히 존속되고 몽골에 전파되었으며, 몽골-티베트는 티베트 불교를 믿는 대표적인 지역이 되었다. 마침내 달라이 라마 5세 롭상 갸초(Lobsang Gyatso, 1617~1682) 때 티베트는 다시 황모파 티베트 불교로 통일된다.[19]

6.4. 만주(청)의 통치

청나라는 티베트를 외몽골과 그 주변 국가들인 위구르 등을 억제하기 위한 정치적 이유로 처음 티베트를 스승의 땅으로서 인정하였다. 이 이후로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청나라의 황제는 달라이 라마황제의 스승으로 대우하였으며, 달라이 라마가 황궁을 방문할 때는 5대 달라이 라마는 스승으로서 황제의 아래가 아닌 옆에 앉았으며, 당시 중국 문화권의 국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황제와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이후 티베트와 청은 '스승과 시주자'의 관계로 유지되었으며 청은 '암반'이라는 내정 간섭 기관을 설치, 상당히 장기간 내정간섭을 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최근들어 이 암반 역시 사실상 티베트 내정에 관여한 일이 없었던 것을 증명하는 사료 등이 발굴되어 내정 간섭 기관이라기 보다는 '주 티베트 청 대사관'이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청말민초 청의 세력이 쇠하자 영국은 티베트에 세력을 뻗쳐 티베트의 반청귀족층이랑 합세하여 티베트를 청에게서 분리 독립시키려 하였다. 19세기 청나라티벳외몽골, 위구르에 대해 직접 영유권을 주장하며 서방의 접근을 경계해왔다. 물론 내몽골은 이미 만주족과 일체화되어 있었다.

만주몽골은 티베트와 밀접한 관계였으나 지금 중국이 주장하는 '속국관계'와는 달랐으며, 원과 청은 한족의 나라인 중국이 아니라는 것이 티베트 측의 주장이기도 하다. 반대로 중국측은 원과 청이 중화제국임을 강조하며 티베트를 중국의 고유 영토로 주장한다.

6.5. 티베트 독립시기

여하튼 1912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이 멸망하면서 티베트의 상황은 변화를 맞이한다.

달라이 라마 13세 툽텐 갸초는 청이 멸망하자 세력을 규합해 1913년 수도 라싸에 잔존한 중국군을 몰아내고 자신을 수장으로 한 독립국가 건설에 나섰고 중국과 세계에 "만주족의 나라와 세속적, 영적인 관계가 끝난 것으로 보아 티베트는 명실상부 독립국임을 밝힌다."라고 선언하였으나 당시 국제 사회에서 티베트의 독립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영국은 내외몽골처럼 티베트를 분할하여 외티벳(서티베트)는 중국을 종주국으로 하는 자치국으로, 내티벳(동티베트)는 중국령 티베트(사천 서부 서강, 청해, 운남, 감숙의 티베트지구)로 타협을 권했으며 인도 지역 이권 수호를 위한 방파제로 삼고자 티베트 정부에 무기를 지원해주고 영국 공관을 설치, 공사관을 파견하고 네팔, 영국, 부탄 등과 국가와 국가 간의 지위로서 몇몇 조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영국은 맥마흔 라인으로 영국령 인도제국의 국경을 확정시켰다. 그러나 후에 중국이 이 맥마흔 라인을 중국의 입장에서 원래 중국의 영토인 아루나찰프라데시를 인도에 넘기는 계기라고 생각해 중인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중일전쟁 와중인 1940년 중화민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 14세 텐진 갸초의 즉위식에 사절단을 파견, 1948년 티베트 정부가 강제로 몰아내기 전까지 이들을 불러들이지 않으며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라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영국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중 티베트 지역에 소수의 군대를 파견해 은근히 이들을 괴뢰국처럼 대하고 있었다.

6.6.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하지만 2차대전 종전 후 영국이 인도를 상실하고,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자 상황은 달라졌다.

당시 국제사회의 관심은 한국 전쟁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티베트 문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미국소련의 세력 확대를 막는데에만 열중하고 있었고, 인도를 독립시킨 영국은 더 이상 티베트와 무관해졌기 때문에 이들의 운명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인도와 중국은 당시에는 우호관계였고 파키스탄과의 분쟁으로 제 코가 석자였기 때문에 인도는 굳이 티베트 문제로 중국의 어그로를 끌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전의 국민당 정부와 마찬가지로 공산당 정부는 이 지역의 영유권을 선언했고, 1951년 티베트를 점령했다.

공산당 정부와 달라이 라마 측은 몇 차례의 협상을 해서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임을 인정하지만, 달라이 라마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선에서 타협하게 된다. 이것을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을 위한 17조 협의'라고 한다. 위키백과의 17조 협의 항목

이것으로 이 문제는 일단락 되는 것 같았고, 1950년대에 달라이 라마중국 정치협상회의의 티베트 대표로 베이징에 와서 몇 차례 마오쩌둥과 만나기도 했다. 처음에는 매우 우호적이었고, 달라이 라마는 마오쩌둥이 자신을 아들처럼 대했다고 회고했다.다만 털택동이 달라이라마에게 막판에 무신론을 받아들이라 개드립친게 함정 다만 달라이 라마의 회고록에 의하면 달라이 라마는 마오쩌둥이 자신과 그만큼 친하기에 그런 말을 자신의 면전에서 한 거라 여기고 있는 듯 하다.

1954년 베이징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가운데가 마오쩌둥, 왼쪽이 판첸라마, 오른쪽이 달라이 라마.

그러나 차근차근 토지개혁과 같은 공산화 정책이 시행되자 기득권인 귀족층을 중심으로 반발이 일어나서 이 지역은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1958년에서 중국 전역에서 대약진운동이 야기한 대기근이 발생하자 원래부터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던 티베트의 반중 감정은 폭발하게 되었다. 1959년 이곳에서는 엄청난 혼란을 틈 타 생수 중국봉기가 일어났고, 이 봉기를 중국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달라이 라마인도 공화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많은 티베트인들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 북부, 네팔 등지로 망명을 떠났다.

달라이 라마 14세와 티베트 내각은 티베트 내에서의 독립운동의 가능성과 달라이 라마 14세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기에 1959년 인도로 망명하여 북인도 히마찰프라데시주(州)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수립, 지금에 이르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처음부터 실시한 정책은 독립을 방지할 목적으로 실시된 민족 말살 정책이었다. 특히 주요 대상이 된 것은 티베트인들을 이끄는 지도자인 승려들이었다. 티베트인 대다수가 신봉하는 티베트불교의 승려들은 승직을 박탈당하고 노동 부대로 강제 편입되었다. 처형된 승려도 많았다. 그래서 수많은 승려들이 강제로 환속당했다. 아예 민중들 앞에서 알몸으로 남녀 승려(비구/비구니) 및 민간인 남녀 간의 성행위를 강제로 시키고 출산을 확인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더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불교 자체를 탄압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항의하는 승려들은 반역자로 간주되어 학살되었다. 이에 수많은 승려들이 탄압을 피하여 인도 공화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티베트에서의 7년>, <쿤둔>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티베트인들은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렵, 벌목, 채광 같은 일들을 금기시하여,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자연 환경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중국은 이곳에서 , 석탄, 우라늄과 같은 천연 자원을 마구잡이로 캐냈다. 또한 표범, 과 같은 짐승들을 남획했는데 이로 인해 개체수가 급감하여, 현재는 중국 정부에서 멸종 위기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는 3,700개에 달하던 사찰 중 라싸 주변과 정치적으로 중요했던 동티베트의 13개 사찰만 남고 모조리 파괴되거나 감옥, 창고와 같은 곳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티베트어로 된 경전이나 불상, 탱화 같은 종교적 성물은 물론 티베트 전통의상, 신발 같은 공예품들은 대부분 압수 또는 소각당했다. 그리고 대부분 외국의 박물관(주로 북아메리카유럽)으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근년부터 중국이 티베트에 은근슬쩍 방사능 폐기물을 몰래 버리는 탓에 티베트인들이 원인 모를 질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는 언급도 보인다. 실제로 중국은 6~70년대 과거 티베트 영토였던 칭하이 성 서부 초원에 원자성(原子城)이라는 커다란 핵 연구소를 지어 놓고 수 차례에 걸쳐 지하 핵실험을 벌인 적 있어[20] 아예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2006년 10월에 벌어졌던 난민 총격 사건이나 2010년 8월에 벌어진 시위자에 대한 총격, 그 외의 여러가지 사건들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과연 죽의 장막 밑에서 진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고는 하나 여러 티베트 인권단체들의 보고에 따르면 중국인민해방군에 의한 약탈 비구승들에 대한 집단강간 등등 수많은 악행이 자행되었고 현재도 진행중이라고 한다.

7. 티베트 독립운동

내용이 길어져서 분리하였다. 티베트 독립운동 문서 참고.

7.1. 판첸 라마 문제

판첸 라마달라이 라마와 같은 겔룩파의 중요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자 티베트의 종교적 서열 2위이다. 대대로 판첸 라마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를 인정하는 역할을 맡아 왔다. 그리고 현재의 달라이 라마 14세 이후의 달라이 라마 15세를 인정하는 역할이 바로 판첸 라마 11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판첸 라마 10세 롭상 틴레이 훈둡 최끼 겔첸(Lobsang Trinley Lhündrub Chökyi Gyaltsen, 1938년생)는 달라이 라마 14세가 티베트를 탈출한 후에도 중국과의 협조 노선을 택해 티베트에 머물렀다. 문화대혁명 때는 그가 주지를 맡고 있었던 티베트 제2도시인 시가체의 타쉬룬포(Tashilhunpo) 사원이 파괴되었으며, 그 당시 투옥되어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이 되어 티베트인의 권리 향상에 힘썼으나, 1989년 1월 28일 티베트 사원 방문 중 급사했다(향년 50세). 중국에 의한 암살설도 있었으나 일단 달라이 라마 14세의 말에 따르면 심장 발작이 사인이라 한다.[21]

판첸 라마 10세 사후에 달라이 라마 14세와 티베트 망명 정부는 환생자를 찾기 시작하여, 1995년 5월 14일, 겐뒨 최끼 니마(Gedhun Choekyi Nyima, 1989년생)라는 6세의 남자 아이를 판첸 라마의 환생자로 인정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환생자 인정을 승인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환생자를 찾았다. 달라이 라마 14세에 의한 신 판첸 라마 인정 포고로부터 3일 뒤, 중국 정부는 겐뒨 최끼 니마와 그의 부모 및 형을 연행해 버리고 대신 6세의 소년 기트 노르브(Qoigyijabu, 1990년 2월 생)를 새로운 판첸 라마로 즉위시켰다. 기트 노르브의 부모는 모두 중국 공산당 당원이다(...).

중국 정부는 겐뒨 최끼 니마와 그 가족의 실종에 대한 의혹을 부정했으나, 1996년 5월 28일에 연행했음을 인정했다. 겐뒨 최끼 니마와 그 가족은 중국령 내에 생존하고 있다는 정보는 있으나 여전히 생사불명이다. 중국 측은 그가 안전한 곳에 편안히 살고 있으며 자신이 판첸 라마와 같은 지위에 오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하지만 글쎄(…)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루머로 판명되었다.

2010년 3월, 중국 측에서 세운 판첸 라마 11세 기트 노르브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으로 정식 데뷔했다. 즉, 정치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중국이 만들어 놓은 판첸 라마이니 만큼, 앞으로는 그가 친중국적인 입장을 대변하게 될 것이다.

7.2. 티베트 독립운동의 현재

2008 베이징 올림픽 직전 벌어진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항쟁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던 티베트 독립운동을 다시 불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봉기에 맞서 중국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무차별 유혈 진압에 나서자 국제 여론은 유례없이 악화되어 올림픽 보이콧 협박까지 받았다. 물론 중국이 그런 협박에 굴할 나라도 아니고, 그들의 보이콧도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올림픽 성화 봉송 과정에서 티베트 지지 시위자들에 의해 성화 봉송 주자들이 습격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어느 성화 봉송 주자가 자신의 옷 소매 속에 티베트 국기(설산사자기)를 숨기고 있다가 성화와 같이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가장 강력한 시위가 있었는데, 티베트 망명자부터 시작해 심지어 프랑스 의회 하원의원들까지 나서 시위에 참여했으며 결국 프랑스 경찰은 성화를 끄고 이들을 교도소로 보내기까지 했다.

한국에서도 티베트 독립 지지자들이 성화가 서울에 도착하던 날 덕수궁 앞에서 시위를 하려 하였으나, 이에 반발하는 재한 중국인들과 오히려 충돌을 일으켜 시위자들은 물론 지나가던 무고한 시민들을 구타하고 돌, 금속너트, 스패너 등을 던져 한때 외교 문제가 될 뻔했다. 이 사건에 대해 경찰공무원은 조치를 취하지 않고 중국인들에게 폭행당하던 시민이 저항하자 오히려 저항하는 시민을 제지하고 폭행하던 중국인을 보호하는 등의 행태를 보여 중국 공안이냐고 욕 먹었고, 정부 역시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국민들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에서도 티베트 독립 지지자들이 적극적으로 시위를 하며, 특히 도쿄에 도착하던 날 고쿄 앞에서 시위를 한 사실이 있다. 일본에서는 다른 국가들과 달리 티베트 지지 시위자들이 별 문제없이 무사히 시위를 마쳤다. 일본인 극우 몇몇 세력은 티베트 독립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하기도 하는데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관점 때문이다. 이를 보고 몇몇 대만의 국민당 지지자들 일부는 일본인들이 타국의 독립운동에 찬성하는 주제에, 자국의 독립운동은 탄압하는 이중잣대를 비난하며, 일본으로 가서 류큐 독립운동 지지 시위를 하자고 하며 기부금까지 모았으나, 모종의 이유로 단체의 사이트가 증발해버렸다.

티베트 독립의 가능성, 특히 달라이 라마 14세가 주창하는 비폭력 독립운동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중국의 통치 기간이 점점 길어지고, 국제 사회가 티베트 독립운동을 직접 돕는 등의 공세적인 정책보다는 중국의 현 세력권을 인정하고 대신 팽창을 막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이에 '중도 정책'이라는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자는 정책을 제시했고, 티베트 망명 정부가 이를 망명 티베트인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에 부쳐 보기도 했으나, 아직도 티베트 망명정부 안에서 무장 독립운동 노선과 비폭력 노선 간의 노선 갈등이 크다. 현재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양 측이 갈라설 정도는 아니며 일단은 무장 독립운동 노선이 달라이 라마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간다. 물론 중국 정부는 자치권 확대든 비폭력 노선이든 간에 달라이 라마 14세를 인정할 생각은 전혀 없는 상태.

티베트 불교 카규파의 수장이자 티베트의 서열 3위인 카르마파 라마 17세는 중국의 탄압에 견디다 못해 지난 1999년 14살의 나이에 인도로 망명했는데, 달라이 라마와 함께 지내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가 나이가 많으니만큼, 그의 사후 리더십 공백을 우려하는 망명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 14세가 어서 후계자를 지명하길 바라고 있으며, 현재는 후계자로 카르마파 라마 17세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만 달라이 라마 14세는 자신의 사후 달라이 라마는 더이상 전생치 않고 공화정이 될 것을 천명하였으며 중국 공산당은 무신론인 주제에 달라이 라마의 환생을 이용하여 자파가 조종하는 달라이 라마를 내세우려 하는 상황이다. 그와 별도로 카르마파 라마 17세가 과거의 라마들처럼 실권을 잡지는 못할 전망이며, 해방 이후를 생각한 것일 가능성이 크지만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망명 정부 내에서도 민주화를 추진 중에 있다.

시간이 갈수록 티베트 지역에 대한 한족의 이주정책, 티베트인에 대한 음양으로의 동화, 종교 활동 억압이 강해지고 있고, 티베트와 칭하이 성을 잇는 칭짱철도(靑藏鐵路)가 깔리면서 점점 티베트 고유의 독자성이 퇴색되어 가고 있다. 신장 위구르 지역처럼 한족들이 대거 이주해 와 경제+정치적 주도권을 잡았으며, 대도시권을 위주로 티베트인들의 친중국화, 세속주의 성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국제적으로도 최강대국 미국 역시 중국 내의 독립운동과 같은 민감한 사안에서는 중국의 눈치를 보는 현실이기에 외교적 고립에 처해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변할 가능성이 희박하기에, 반 세기만 지나면 만주족처럼 한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22].

언젠가부터 티베트인들은 승려는 물론이고, 일반인들까지, 심지어 젊은이들과 청소년들까지도 분신자살로 중국의 통치지배에 항거하고 있다.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인들의 영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비폭력을 가르치기에, 무장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분신자살로 항거한다나. 소년부터 아이 엄마까지…끊임없는 티베트인 분신.

7.3. 티베트를 보는 중국인들의 인식

절대 다수의 중국인들은 티베트는 중국 고유의 영토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해명을 굳게 믿고 있다. 따라서 외국에서 티베트 문제를 언급하면 부정적으로 반응한다.[23] 미국유럽 같은 서방 국가들이 중국을 분열시키려는 음흉한 술책을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느 나라나 영토나 소수민족 문제에는 민감하고 중국은 중국 공산당 독재체제이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다. 심지어 일부 극단적 한족우월주의자들은 티베트인 자체를 중국 한족보다 열등한 민족으로 보려는 시각도 존재한다.

티베트계들이 따로 살던 주변의 부탄이나 시킴이나 라다크, 같은 작은 왕조들은 대대로 티베트를 큰 형님 나라로 조공을 바치며 섬겨 왔다. 그 티베트가 중국에 병탄되자 이에 대항한 인도에 편입되었다. 이는 이 지역 주민들이 중국의 통치를 우려해 그나마 중국보다는 자치를 보장해주는 인도로 스스로 굽혀 들어간 탓도 컸으며, 실제로 인도에 흡수된 이 지역 주민들은 티베트인들보다는 실질적인 자치권을 누리고 있다. 특히 부탄중국 식당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중국인 입국도 딴지를 거는 나라로 국제연합 회원국 중에서 중국, 대만 양쪽 모두 외교관계가 없는 유일한 나라이며 인도에 국방도 맡기면서 골수 친인도 국가가 되어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티베트계 왕국의 인도 공화국 편입을 비난하고, 그 중 하나인 아루나찰프라데시 주가[24] 중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무튼 이러한 문제로 티베트 독립에 찬성한다고 하면 중국 사회에서 매장당할 수 있다. 티베트에 조금이라도 동정적인 발언을 했는데 욕을 먹는 경우도 있다. 한 예로 2008년, 미국에 유학 중인 중국인 여대생이 "나는 티베트 독립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티베트에는 여전히 가난에 시달리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복지와 인권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라는 지극히 온건한 말을 했다가 수많은 중국인 네티즌들로부터 인신공격을 당했다. 공포에 질린 중국인 여대생은 이사를 가야만 했다. 당시 중국인 네티즌들이 그녀를 비난했던 반응의 요지는 "티베트는 중국 공산당에서 원조를 많이 해주어서 풍족한 지역이 되었는데, 뭘 또 도우란 말이냐?" 였다. 사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티베트는 중국에서 풍족한 지역 중 하나였다. 당시 중국 자체가 세계 최빈국이었던데다, 마오쩌둥의 온갖 에 휘말리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변방이자 늦게 병탄되었던 티베트는 그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 물론 지금은 윈난 성(?)과 간쑤, 구이저우 등과 더불어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이며 앞에 거론한 지역들보다도 상당히 가난하다. 지역 총생산은 중국 최하로, 원래 티베트의 암도 지역이었던 칭하이 성의 절반도 안되고 윈난 성의 10분의 1도 안된다.

딴지일보에서 인터뷰한 어느 중국인 공무원은 놀랍게도 티베트 독립을 찬성한다는 말을 했다.[25] 중국에도 티베트 독립에 대해서 긍정적인 사람이 극소수이지만 있기는 있다. 단,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는 공개적으로 표출되지 못한다. 2008년 경, 중국 정부는 반국가분열법을 제정해서 "'대만과 티베트와 위구르는 중국 고유의 영토이며, 이를 부정하는 자는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더욱 강경하게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코짜장 중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도 티베트 독립에 대해서 언급했다가 중국 정부에 의해서 강제 추방이나 입국 금지 같은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외국에 있는 중국인도 티베트에 관한 의견을 무심코 내뱉었다가 같은 중국인들에게 욕을 들을 수 있는지라 쉽사리 얘기를 꺼내기가 어렵다.

파룬궁 회원들과 대만에서는 적의 적은 우리편이니 같은 편이라는 입장으로써 때때로 해외에서 티베트 독립운동가들과 파룬궁 회원 및 대만 지지자들이 연합하여 시위를 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티베트 지역의 자치 확대나 인권 등의 개선이라면 몰라도 독립 그 자체에는 긍정적이지 않다. 파룬궁들은 장쩌민 관련 기사를 낼 때 친일파 집안이라네, 소련군 간첩 경력이 있었다네, 파룬궁 탄압했네, 천안문 사태를 주도했네, 땅 팔아먹었네 뭐네 하면서 선전하면서도 장쩌민의 티베트 탄압 관련 기사는 거의 내지 않는다. 대만 역시 티베트 지역을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에 반대할 뿐, 중국의 분열은 바라지 않는다. ## 반면 대만 내의 타이완 독립운동 지지자들은 티베트의 독립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중국은 이에 대해 자신들은 다민족 국가로써, 개별 민족들의 독립 요구를 다 받아줄 경우 나라가 쪼개어져서 더 이상 중국이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사실 당장 티베트도 그렇고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도 독립 요구가 거세다. 중국 입장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위해 소수민족의 독립요구를 억누르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실제로 유고슬라비아소련 해체의 사례를 보듯이 한 지역의 이탈은 도미노효과 국가 전체의 해체를 초래할 위험이 있으며 또한 불가분의 다민족 통일국가 및 중화민족의 일체를 국시로 삼고 있는 중국에 어떠한 지역 및 소수민족의 분리주의 독립운동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중국은 청나라 멸망 이후 사실상의 국가분열 상태를 겪고 이로 인해 열강의 이권 잠식이나 일본과의 전쟁에서도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등의 국가적 굴욕을 겪고 인민들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으며, 그럼에도 진짜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은 것은 '겉으로나마 분열되지 않은 통일 국가'(대륙 중화민국)가 있어서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많은 중국인들은 소수민족의 독립 운동에 대해 강경하게 대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냉정하게 말해서 중국이 참여한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국가적 타격을 받거나, 혹은 중국공산당이 극적으로 무너져내리며 소련붕괴를 답습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여타의 방법으로 티베트가 독립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26]. 또한 혼란을 틈 타 독립에 성공하더라도 이미 티베트나 위구르 등지를 자국 영토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한족들이 버티고 있는 한 강력한 외세우방 없이는 독립을 유지하기 힘들텐데, 인근에 그만한 자구권을 가진 국가는 아직 없으며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게 인도 계열이지만 현재의 인도와는 정치형태도, 종교도, 문화권으로도 큰 관련이 없는 티베트다보니 상황은 더욱 암울하다.

그러나, 이건 티베트와 인도 공화국 간의 문제를 너무 수박 겉핥기로만 보는 것이다. 당장 티베트 망명정부 부터가 인도 영토에 위치해 있으며, 티베트계 국가들 중 유일한 독립국인 부탄 또한 인도를 자국의 혈맹이라고 주장하면서 자발적으로 인도의 보호국이 되는 등, 티베트와 인도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가까워져가고 있다. 이미 티베트 문화권인 시킴 또한 중국으로의 병탄을 두려워해서 인도에 자발적으로 합병된 상황에서 인도인들은 티베트를 좋게 보고 있으며, 인도 내의 극심한 반중 감정때문에라도 티베트를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시각이 강하다[27]. 더구나 이런 관계로 인해, 독립 후에 자체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기가 어려울 티베트를 돕는다는 명분 아래 티베트 또한 부탄처럼 인도의 보호령으로 삼을 가능성이 매우 큰데, 위의 중국이 노리는 신 실크로드 경제권의 차단 때문에도 그렇고, 인도가 중국의 영향력에 제약을 걸기 위해선 티베트가 반드시 필요하다. 미국을 상대하기 위해 중국과 밀월 관계를 맞으면서도 내심 중국의 초강대국화를 저지하려는 러시아도 마침 자신들의 전통적인 우방국인 인도가 대중국 견제의 선봉장 겸 새로운 대미(對美) 동맹의 상대가 되는 것을 매우 반길 터이므로, 중국이 독립한 티베트를 다시 병탄하려는 시도를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티베트 입장에서는 일단 독립할 수만 있으면, 적어도 대외적인 문제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28].

하지만 위구르와 티베트를 빼고 대부분의 중국 소수민족들은 대부분 민족적, 언어적으로 중국에 한족화되었고, 역사적으로도 오랜 기간 중국 치하에서 한족에 동화되었으며 정치 경제적으로 (티베트, 위구르조차도 상당히) 중국과 일체화되어 있으며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또 이들은 티베트와 달리 거주하는 영토 면적들도 작고 독립하려는 의지가 없는데다가, 중국에 충성도와 지지도가 높다보니, 티베트와 위구르의 독립이 중국이 소련이나 유고슬라비아처럼 공중 분해로 이어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29].

7.4. 티베트의 역사와 현실을 아는 방법

국내에도 출판된 저서인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과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 그리고 《가둘 수 없는 영혼》을 참고하기 바란다. 특히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은 풍부한 자료와 정확한 출처까지 갖춘 명저이다.[30]

현대사는 아니지만 2011년 《티베트, 1만년의 이야기》가 우리나라에 번역되었는데 중국에서 편찬된 책이 맞나 싶을 정도로 티베트에 대해서 중립적인 시각을 취하고 독립성을 인정한다. 다만 인민해방군의 '1950년 티베트 평화적 해방'을 기준으로 이야기를 끝냈다는 점이 호불호. 내용도 탄탄하니 읽어볼 것을 추천.

만일 티베트 역사 전반을 좀 더 쉽게 알고 싶다면 한국인이 쓴《티베트 비밀역사》를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문체가 읽기 편하고 저자가 중국에서 공부한 덕에 한국 내에서 접하기 힘든 중국이나 대만 쪽 사료를 많이 인용하여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도 알 수 있다. 단 저자 자신의 의견도 간간히 들어가 있으니 다른 티베트 관련 책도 읽으면서 교차검증하는 것이 좋다. 한편 티베트의 문화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티벳의 문화》을 읽어볼 것. 티베트 굴지의 명서로서 아직도 세계적인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으며 근대 티베트를 '직접 조사'해서 쓴 책이기에 신빙성 또한 높은 편.

당시 티베트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여 체포, 복역 중이던 승려 팔덴 갸초의 저서 《가둘 수 없는 영혼》[31]에 따르면, 당시 감옥 안에서조차 수감자들이 가지고 있던 염주, 불경과 같은 종교적인 물건을 비롯, 심지어는 유목민들이 쓰던 가죽 주머니마저 구시대의 물건이라 하여 소각했으며, 문화대혁명 당시의 티베트인들의 인권은 거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32]

티베트인들의 대중국 무장 항쟁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국내에도 번역된 《티벳전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또한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에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지원을 받는 티벳하우스 코리아홈페이지 주소. 가 있고, 이곳에서 운영하는 삼학사원(랍숨섀둡링)의 주지스님은 티베트에서 파견된 스님이다. 부산에도 티베트 스님이 주지로 있는 광성사가 있으며 한국에 오신 티베트 스님들은 모두 다람살라의 달라이라마로부터 수계를 받아 오기에 이곳을 방문하면 좀 더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8. 티베트로 가는 길

티베트로 가는 여행 경로는 거얼무에서 라싸로 들어가는 청장공로(칭짱도로)나 철도(칭짱철도), 비행기만을 이용하게 되어 있다. 티베트의 경우 반드시 중국 비자 외에도 티베트 입경 허가서가 필요하며, 라싸나 시가체 등 개방지역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추가로 공안이나 군에서 발급하는 여행 허가서가 필요하다. 개별 관광은 사실상 금지되어 있으며, 현지 차량 및 차량기사, 가이드를 동반한 관광, 다시 말하자면 사실상 단체 관광만이 가능하다. 또한 상황에 따라 외국인의 티베트 출입 자체가 금지되는 경우도 잦다. 대한민국 외교부에서는 여행 자제로 명시하고 있지만, 라싸를 제외한 티베트의 모든 지역은 사실상 여행 금지다.

8.1. 칭짱철도

2006년에 라싸까지 개통한 전 세계에서 제일 높은 지역을 다니는 철도. 탕구라 고개(Tanggula) 일대 구간은 해발 5,072m으로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철도 구간이다. 탕구라 역은 해발 5,068m.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추전역이 850m인 거 생각하면 6배 가량 더 높은 셈이다. 당장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백두산이 3,000m를 넘지 못 한다.

총 2,200km 가량 되는 구간 중 960km 가량은 영구동토를 가로질러서 질주한다. 티베트의 광활한 대지를 가로지르는 열차의 모습은 포풍간지. 워낙 고고도로 다니다 보니 이 구간에서 운행하는 디젤 기관차도 고고도 대비 특수장치가 적용되어 있으며[33] 객실에는 산소마스크가 준비되어 있다. 해발 4,000m 이상부터는 제한속도 80km/h로 간다. 이처럼 티벳은 워낙 고고도에 위치하기 때문에 여행 전 운동으로 어느 정도 몸을 건강하게 만들고 가는 것이 좋다. 자칫하면 정말 고산증으로 죽을 수도 있다.여행가다 사람잡을 기세

이 철도와 병행하는 칭짱도로가 같이 개통되어서 티베트로의 물자 수송은 정말 쉬워졌지만, 티베트에서 유혈사태 발생시 인민군의 개입이 좀 더 수월해졌다.[34] 그래서 티베트 현지에서 칭짱철도 건설 반대운동이 심했으며, 달라이 라마칭짱철도의 완공이 티베트에 '문화적 대학살'을 초래할 것이라며 비난했다.

8.2. 칭짱도로

위의 칭짱철도와 병행 운행한다.

철도보다 조금 더 고도한계가 높은데, 철도는 탕구라 고개를 5,000m에 턱걸이로 넘어 버리지만 도로는 5,200m까지 올라간다. 물론 이 도로에서도 삼보일배하며 라싸포탈라궁으로 가는 사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8.3. 쓰촨성 - 티베트 도로

미지의 도로. 쓰촨성 청두에서 서쪽으로 산을 타고 올라가서 라싸에 이르는 도로인데, 극악의 험난함을 자랑한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화물차도 제법 다니는 모양. KBS차마고도에 한 번 출연했었다. 삼보일배하면서 라싸로 가는 순례객들을 볼 수 있는 여러 도로 중 하나다.

8.4. 신장 위구르 자치구 - 티베트 도로

쿤룬 산맥을 지나는 2개의 도로중 서쪽의 것인 219번 국도가 아크사이친을 통해 신장의 예청과 티베트의 라체를 잇고, 동쪽의 109번 국도가 라싸와 거얼무 사이를 잇는다. 도로는 2개밖에 없다.

9. 대중문화에서의 티베트

맥스 브룩스좀비 아포칼립스 소설 세계대전Z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벌어진 좀비와의 전쟁 이후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티베트 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된다.[35]

티베트를 배경으로 다룬 작품으로는 브래드 피트 주연의 <티벳에서의 7년>과 달라이 라마의 일대기를 다룬 <쿤둔>이라는 영화가 있다. KBS에서 방영됐었던 다큐멘터리 차마고도도 티베트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2010년에는 달라이 라마의 하루를 직접 촬영한 <선라이즈 선셋>이란 다큐멘터리가 개봉했다.

<데프콘 한중전쟁>에서 나오는 티베트는 한국미국, 러시아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비밀리에 지원하는 바람에 반중 독립전쟁이 터진다. 무장한 시위대가 체게바라식 전술로 무장경찰부대를 사격으로 사살해버리는 장면은 정말 작중의 절정. 중국의 진압부대를 체게바라식 전법으로 패퇴시키는 등 잘 싸우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엔 한국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에 따라 어느 틈에 중국에서 독립한다!

2004년 중국에서는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이 1930~40년대의 티베트, 신장, 만주독립국으로 묘사한 것이 역사왜곡이라는 이유로 발매금지되었다. 정작 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으로 나오는데도 이랬다. 어지간히 상급자가 아니면 시도도 해 보지 말 것. 서구 국가들에 비해 산업 생산력이나 맨파워, 인프라 등 모든 면에서 개판 오분전 수준이다. 각 부대의 사령관들 중에 승려들이 있는 것이 인상적.깨알같은 고증

가면라이더 블레이드에서는 1만년전 배틀 파이트에서 패배한 언데드들이 봉인된 라우즈 카드와 인류 기반사가 들어있는 보드 스톤이 티베트의 동굴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며, 카라스마 케이텐노지 히로시의 위협을 피해 티베트로 피신해서 라우즈 업소버를 개발한다.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는 중앙아시아 국가로 등장한다. 시작 년도인 1444년 시점에서는 우창(U-Tsang)과 캄(Kham) 두 지방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이들 국가로 시작해서 조건에 맞는 프로빈스를 점령하면 티벳 성립 디시전을 통해 통일 티벳 왕국을 설립할 수 있다.

위의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와 같은 회사에서 만들어진 게임인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Jade Dragon DLC 이후부터 티베트가 등장하는데, 문제는 티베트가 처음부터 제국으로 등장하는 데다[36], 티베트 지역 프로빈스들이 홀딩 수가 꽤 되는 등으로 나름 꿀인지라, 인도든, 몽골이든, 중앙아시아든 어느 곳에로 진출하기도 매우 좋다. 오오 갓베트 오오[37]

2012에서는 인류 최후의 보루 지역으로 나온다. 그 근처에 있는 초밍계곡에 방주를 만들고 있었던 것.

바람의 왕국이라는 라이트노벨 작품도 있다. 문성공주인 취란과 손쳄감포의 아들인 리짐과의 로맨스라고는 하는데, 문성공주 연대기 같은 작품이다. 작가는 모리 시우코. 한국에는 학산문화사에서 나왔으며, 현재 한국에서 출간된 권은 12권까지, 그외에는 연재를 하지 않는지 책이 나오지 않는다.

10. 출신인물


  1. [1] 티베트어 표기를 그대로 옮기면 bod지만, 실제로는 앞에 오는 b가 유기음화되고 뒤에 오는 od가 외 /ø/처럼 발음되어 [pʰøʔ˨˧˨] 처럼 발음된다. 따라서 발음에 따른 표기는 Bhö, Bö, Phö, Poi 등 여러 표기가 존재한다.
  2. [2] 더 세세히 나누자면 앞의 '위'는 라사를 위시한 티베트 중부, '짱'은 시가체를 위시한 티베트 서부를 말하며, 짱보다 더 서쪽에 있는 응아리(Ngari, mnga' ris)와 북부 고지대인 장탕(Changthang, byang thang) 지역을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여담으로 티베트 자치구 동쪽에 위치한 참도 지역은 위짱이 아닌 캄 지역에 속한다.
  3. [3] 이 명칭이 고원을 뜻하는 튀르크어 Töbäd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4. [4] 칭하이 성의 대부분과 쓰촨 성 서부(구 시캉 성), 윈난 성간쑤 성 일부 지역에 걸쳐 있다.
  5. [5] 정확하게는 라파스보다는 약간 낮은 해발고도이다. 볼리비아의 별명 중에 남아메리카의 티베트라는 별명이 있다.
  6. [6] 인터넷에 떠도는 기묘한 표정의 토끼 비슷하게 생긴 동물이 아닌 비스카차다.
  7. [7] Pö Ranggyong Jong; 뵈 랑꾱 종
  8. [8] Xīzàng Zìzhìqū; 시짱 쯔즈취
  9. [9] 사실 꽤나 늦은 출발이다. 왜냐하면 이미 서부 일대에는 샹슝국도 있고 탕구라산맥 동부에는 숨파와 같은 부족연맹국가가 이미 등장했기 때문이다.
  10. [10] 630년 즉위설도 있다
  11. [11] '송첸감포 왕' 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토번의 군주는 찬포(贊普)라는 고유명칭을 쓰기 때문.
  12. [12] 사실 문성공주 자체의 혼인은 당시 당나라에게 있어 큰 사건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누구와 어떤 관계인지도 관련이 없을 정도. 안시성에서 토산을 쌓은 것으로 유명한 강하왕 이도종의 종녀(宗女)라는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13. [13] 사실 당태종공주를 시집 보낸 건 토번이 3번째이다. 문제는 앞선 2번은 당나라가 상위의 입장에서 보냈기 때문에 이것도 당나라 우위의 결혼일 가능성도 있다.
  14. [14] 대조사(大照寺)라고도 한다. 문성공주가 세웠다.
  15. [15] 다행히 라싸 지방의 당번회맹비는 아직 무사하고 조사도 가능하다.
  16. [16] 그러나 극소수의 중국계 불교 서적이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는데 그중에는 신라인으로 당에서 끝발을 날린 고승 원측(613~696)의 책도 있다. 참고로 이 책은 중국, 한국에서는 이미 소실되었고 티베트어본만 남아있다! 한국과 중국의 불교학자들이 역으로 이 책을 번역하는 상황.
  17. [17] 승려 강제 결혼, 강제 사냥, 사원 및 불경 화형식(…)
  18. [18] 한자로는 적송덕찬
  19. [19] 이때 티베트 황모파의 티베트 통일 정복을 피해 탈출한 종파들의 지역이 부탄, 시킴, , 라다크 티베트 외 티베트족 지역이다.
  20. [20] 현재 그 원자성 폐허 일부는 관광 상품으로 개발되어 있다(...)
  21. [21] 어린이 과학잡지 과학소년 1995년 10월호에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에 대한 기사가 나온 적이 있는데 어린이들이 읽기에는 어려운 내용의 기사이긴 하지만 판첸 라마 10세(본 기사에서는 그냥 판첸 라마)에 대해서 마치 중국에 협조해서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민중들을 매몰차게 배신하고 중국 정부를 충실하게 쭉 따르고 꼭두각시 역할을 이행하고 있는 것처럼, 기사가 쓰여진 1995년 당시에도 여전히 살아 있으며 달라이 라마가 대인배적으로 그를 인정한 것처럼 묘사해놨다(...).고인드립 쩌네 참고로 이 기사를 쓴 이억주 기자(훗날 과학소년 편집장이 되고 과학소년의 경쟁잡지인 어린이 과학동아의 창간인이기도 하다)는 과학잡지 기자니깐 당연하지만 물리학 전공을 한 분(...). 물론 편집장이 되었을 때는 '미스터 리의 미스터리 세계'라는 개인 코너를 통해 세계 불가사의 문명들에 대해 쓰는 등 역사 등 인문학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듯 하나 티베트에 대해서는 그 당시에 막연하게 기사를 쓴 듯 하다.
  22. [22] 그래도 민족주의라는 것은 모르는 얘기다. 당장 일제 강점기 35년의 한국이나, 중국의 반세기 남짓한 티베트 점령기간이 우스워 보일 정도인 800년에 달하는(!) 영국의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가 문화적, 언어적으로 완전히 영국에 동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주권국가로 탄생했고, 400년 넘게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발칸반도의 불가리아그리스가 마침내 오스만 제국의 통치로부터 분리 독립했을 정도로 확고하게 유지되는 것이 민족주의다. 설령 티베트가 완전히 한족에 동화되고 세속주의화되어도 아일랜드나 불가리아, 그리스처럼 중국으로의 복속을 거부할 여지는 크며, 실제로도 한족화가 얼마나 진행되었느냐와는 별개로 티베트 현지에서의 중국 공산당에 대한 증오와 반감은 엄청나다. 만주족이야 청나라 때까지 자기들이 중국의 지배자였던 터라, 중국을 자신들의 모국으로 여겼기 때문에 구태여 독립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던지라, 티베트 문제와는 논점이 완전히 다르다.
  23. [23] 한국으로 따지면 독도 보다는 제주도의 인식에 가깝다. 생 억지를 부려야 하지만 어쨌건 분쟁이 가능한 독도와는 달리 아예 분쟁이 있을 수 없는 영토 정도.
  24. [24] 정확하게는 아루나찰프라데시 주의 영토 중에서 티베트 문화권인 지역에 대해서만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5. [25] 지금은 그 기사가 삭제됐다.
  26. [26] 다만, 제3차 세계 대전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제외하더라도, 그냥 공산당의 붕괴로 인해 중국에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서는 수준에서 그치더라도, 티베트 및 위구르에 대한 처우 문제는 지금보다는 훨씬 온건해질 가능성이 높다. 민주화된 중국 정부가 티베트나 위구르의 독립을 인정해줄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독립국에 준하는 상당 수준의 자치를 인정해줄 가능성도 높다. 가령 중국 내 자치 공화국 정도의 지위를 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다. 티베트나 위구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독립 의지가 낮은 홍콩이나 마카오 역시 이와 같은 지위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 공산당의 일당독재 체제만 없어져도 이들에게는 더이상 한족으로의 강제적인 동화를 걱정을 할 필요가 사라지니 일단은 한시름 놓는 셈이다.
  27. [27] 사실 현대사의 일을 논할 필요도 없이 티베트는 원래 전통적으로 언어적으로는 매우 가까운 중국 이외에도 인도 아대륙 지역 국가들과 가깝게 지냈다. 전근대 시대부터 차마고도라고 불리우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는 교역로를 따라 인도 문화권 지역과 교류해왔다. 특히 티베트와는 사촌지간되는 나라인 부탄중국에 대한 반발과 증오로 인해 인도 공화국과 더더욱 관계가 깊어지고 있는 중이다.
  28. [28] 물론 이런 경우라면, 인도 공화국친러가 아닌 친미 국가가 된다고해도 상황은 똑같다. 러시아든, 인도든, 중국이든 그 어느 누구를 견제하기에도 좋은 위치에 있는 나라가 바로 티베트다. 중국이 티베트의 독립을 자꾸만 훼방놓으려는 진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29. [29] 당장 동티모르의 독립을 두고 이를 인정하면 자국이 공중분해 될 것이라며 징징거리던 인도네시아조차도 정작 진짜로 동티모르가 독립한 이후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인도 역시 이슬람교 신자가 많은 동벵골서펀자브카라코람 산맥 인접 지역이 싸그리 파키스탄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는데도 남부의 하이데라바드 지역이 파키스탄에 가입하겠다고 반기를 들었다가 진압당한 일 말고는 내부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 즉, 중국이 자국이 유고슬라비아처럼 될거라면서 티베트나 위구르의 독립을 가로막는 것에는 당위성이 없다.
  30. [30] 단, 이 책의 경우 자료와 출처의 정확성과는 별개로 국내 번역본의 경우 1990년에 출판된 제3판에 기초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천안문 사태 직후 쓰인 책인 만큼 중국의 인권이나 경제 상황에 대한 묘사가 시대에 뒤떨어져 있어 중국과 티베트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면 또 모르지만.
  31. [31] 꿈꾸는 돌, 정희재 역.
  32. [32] 이 책을 보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정도로 매우 잔인한 고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 책 외에도 궁리 출판사에서 나온 아마아데 저 《그래도 내 마음은 티베트에 사네》가 있다. 하지만 번역 수준이(…)
  33. [33] 2006년에야 철도가 개통된 이유 또한 기술적 문제로 객차마다 고고도 대비 특수장치를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34. [34] 1988년 티베트 소요사태 당시, 도로사정이 나빠서 인근 칭하이성과 쓰촨성 주둔 군대를 동원하지 못하자, 수천 km 밖의 난징군구에 주둔중인 공수부대를 투입해야 했다.
  35. [35] 인민공화국이라해서 무조건 사회주의 국가가 된다하면 오산이다. 인민공화국 문서 참고.
  36. [36] 심지어 시나리오 시작 시점부터 제국인 몇 안되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비잔티움 제국과 869년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 뿐이다.
  37. [37] 다만, 플레이하기에는 한족 문화권 캐릭터가 더 좋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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