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롭스크 실험국

Павловская опытных станция.
Pavlovsk Experimental Station.

러시아어:Павловская опытных станция

영어:Pavlovsk Experimental Station

1. 개요
2. 역사
2.1. 레닌그라드 공방전 시기 (전반)
2.2. 레닌그라드 공방전 시기 (후반)
2.3. 레닌그라드 공방전 이후
2.4. 새로운 위협
3. 등장 작품
4. 참고 문헌/외부 링크

1. 개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남부의 푸쉬킨-파블롭스크(Pushkin-Pavlovsk)에 위치[1]한 농식물 실험국이자 종자은행. 웹 사이트

모(母)기관은 바빌로프 식물산업 연구소(Vavilov Institute of Plant Industry, Vavilov Research Institute(VRI))이다. 1926년 세계 최초 종자 은행이자, 2015년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큰 종자은행들 중 하나이다. 파블롭스크 실험국이 보유한 약 25만 종의 표본과 6만 종자들의 90%는 다른 종자 은행에는 없는 종자들로, 그 가치가 굉장히 높다. 일례로, 딸기 하나만 1,000종이 넘는 표본을 보유하고 있다.

2. 역사


1977년 니콜라이 바빌로프 기념 우표

1924년 식물학자이자 유전학자인 니콜라이 바빌로프(Nikolay Vavilov)에 의해 바빌로프 연구소가 설립되고 1926년에 파블롭스크 실험국이 만들어졌다. 세계 최초 종자 은행이며, 종자의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한 최초의 사례이다. 하지만 바빌로프는 용불용설과 밀식 농법을 주장하며 소련의 높으신 분들과 긴밀한 커넥션을 갖고 있었던 라이벌 트로핌 리센코에게 끊임없이 견제를 받았고, 1940년 10월 6일 스탈린에게 숙청당했다.

바빌로프는 1941년 7월에 사형 선고까지 받았고 과학자들이 탄원하여 1942년에 20년형으로 감형되었지만, 1943년 1월 26일 향년 56세로 사라토프 감옥에서 굶주림[2]과 질병으로 옥사했다. 당대 소련 최고의 유전학자가 정치적 모략으로 사라지게된 셈. 숙청되기 전까지 니콜라이 바빌로프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모았던 종자 및 표본들은 파블롭스크 실험국에서 보관하였다. 이후 1941년 여름,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시작되면서 시설은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한다.

2.1. 레닌그라드 공방전 시기 (전반)

전쟁이 다가옴을 알고 있었던 시설의 과학자들은 미리 이에 대비하여 종자들을 안전하게 보관하고자 노력하였다. 파블롭스크 실험국이 소장한 표본들은 대체로 '밭 유전은행'(Field Genebank)의 형태로 저장되었는데,[3] 전쟁의 포화에 직접적으로 노출될 경우 보존이 극히 어려웠다. 1941년의 늦은 여름에 아브람 카메라즈(Abraham Y. Kameraz)와 올가 보스크레센스카야(Olga A. Voskresenskaia)를 포함한 일단의 과학자들이 더 늦기 전에 정신없이 감자를 수확하여 보관하고, 시설 내에 흩어져 있던 종자들을 최대한 안전한 곳에 집적시킨 후, 각 표본을 분산 보존시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과학자들은 시설 보호에 사실상 아무런 외부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1941년 여름에 감자를 수확할 때에는 그나마 소련군에게 협조를 요청하여 트럭을 빌릴 수 있었지만,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진행되던 28개월간은 오히려 표본들이 식량으로 징발당하는 것을 걱정해야했다. 비슷한 시기에 소비에트 연방에서 직접 대피시킨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예술작품들과는 달리 당시 기준 약 40만 종에 달하는 식물 종자들 및 씨앗, 뿌리, 그리고 과일 표본들은 방치되었다.[4] 설상가상으로,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이어지면서 굶주린 들쥐들과 시민들도 경계대상이 되었고, 이 때문에 시설에 남아있던 과학자들과 직원들은 실험국을 최대한 요새화하였다.

독일군의 끊임없는 레닌그라드 도심 포격으로 실험국의 창문들은 항상 깨졌고, 이에 과학자들은 나무 판자로 틈새를 막아서 냉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공방전이 지속되며 자원 고갈이 심화되었고, 땔감이나 석탄이 없어서 건물은 항상 춥고 습하며 어두웠다. 불행 중 다행으로 파블롭스크 실험국 시설이 독일 영사관과 히틀러가 레닌그라드 점령 이후 승전 연회를 열 계획이었던 아스토리아 호텔 근처에 위치하여서 직접적인 포격의 대상이 될 일은 없었다.

바빌로프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모은 종자와 표본은 16개의 방을 가득 채울 정도였으며, 그 누구도 이러한 보관실에 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열쇠는 시설의 책임자중 한 명인 코르돈(R.Y. Kordon)이 금고에 보관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종자들의 상태를 확인하였다. 혹시라도 홀로 들어갔을 때 유혹을 이기지 못할 것을 미리 예방한 조치였다.

겨울이 지속되면서 온도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갔고, 감자 종자의 경우 냉해로 인해 얼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시설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박스, 종이, 부서진 건물의 잔해 등 태울 수 있는 모든 걸 태워서 감자를 비롯한 종자들을 보호했고, 굶주린 시민들이 시설을 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24시간 불침번을 돌아가면서 저장고를 지켜냈다. 추운 날씨는 종자 보관에는 문제를 일으켰으나, 라도가 호수가 얼어붙으며 생긴 '생명의 길'을 통해 우랄 산맥에 있는 저장고로 표본들을 대피시키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우랄 산맥으로 건너간 표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안전하게 보관되었으며 전후 다시 파블롭스크 실험국으로 돌아왔다.

2.2. 레닌그라드 공방전 시기 (후반)

동장군과 함께 찾아온 손님은 다름아닌 죽음이었다. 도시에서는 이미 수만 명이 아사하고 있었으며 실험국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파블롭스크 실험국에 있던 과학자들.

  • 이름 불명
  • 바딤 S. 레호비치 박사(Vadim S. Lehovich Ph.D.)
  • 이름이 잘 안보이나 올가 A. 보스크레센스카야(Olga A. Voskresenskaia) 추정. 아사. 덩이줄기 식물 담당.
  • 아브람 Y. 카메라즈 (Abraham Y. Kameraz): 아사. 덩이줄기 식물 담당.
  • 게오르기 K. 크리에르 박사(Georgy K. Kriyer Ph.D.): 아사. 의학 식물 담당.
  • 알렉산드르 스추킨: 아사. 땅콩 담당.
  • 드미트리 S. 이바노프 (Dmitry S. Ivanov): 아사. 벼 품종 담당.
  • 릴리야 M. 로디나 (Liliya M. Rodina): 아사. 귀리 종자 담당.
  • 옐레나 S. 킬프 (Yelena S. Kilp)
  • 게오르기 V. 게인츠 (George V. Geints)
  • 니콜라이 R. 이바노프 박사(Nickolay R. Ivanov Ph.D.): ~1978. 실험국의 수장이었고 종전 이후까지 생존했다. 바빌로프 명예 복권 이후 제정된 바빌로프 상을 수상했다.

1942년 1월, 땅콩 전문가였던 알렉산드르 G. 스추킨(Alexander G. Stchukin)이 자신의 책상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의학 식물 담당이었던 게오르기 K. 크리에르(Georgy K. Kriyer), 품종 담당이던 드미트리 S. 이바노프(Dmitry S. Ivanov), 귀리 종자를 책임지던 릴리야 M. 로디나(Liliya M. Rodina)도 이어서 아사했다. 드미트리 이바노프의 경우 자신이 주머니를 하나라도 잘못 건드리면 조국의 농수산업계의 영구적 손실이 올것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방에 있던 벼 품종이 담겨있는 수천에 달하는 주머니들을, 굶어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건드리지 않은채 발견되었다. 앞서 나온 덩이줄기[5] 담당이던 아브라함 카메라즈(Abraham Y. Kameraz)와 올가 보스크레센스카야(Olga A. Voskresenskaia)도 결국 굶어 죽었다. 이 밖에도 M. 스테헤글로프(M. Steheglov), G. 코발렙스키(G. Kovalevsky), N. 레온티옙스키(N. Leontjevsky), A. 말리기나(A. Malygina), A. 코르준(A. Korzun) 등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둘 씩 쓰러졌으며, 이들 모두가 자신들이 지키던 종자에 손을 대기를 거부하고 고통과 싸우다가 죽음을 택했다. 인간의 3대 욕구중 하나인 식욕을 죽는 순간까지 버틴 그들은 분명 영웅이다.

실험국을 방문한 것은 물론 기아뿐만은 아니었다. 병마와 싸우다 스러진 이들도, 포탄에 의해 사망한 이들도 있었다. 식물표본실 관리자였던 예브게니 불프(E. V. Wulff)는 파편에 맞아 과다출혈로 사망했고, 바빌로프의 현장일지 관리자였던 예브게니 글레이베르(E. I. Gleiber)는 귀중한 문서가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 손에 넘어갈까 두려워 끝까지 문서실을 지키다 죽었다.

2.3. 레닌그라드 공방전 이후

1944년 1월, 레닌그라드의 포위가 풀릴 때까지 실험국에서 종자를 지키며 죽어간 사람들은 8명부터 30명까지 출처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6] 이들이 죽어가면서 지켜낸 종자들은 전쟁 후 세계의 채소와 과일의 품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러시아가 세계 최대의 공급자인 블랙 커런트(Black Currant)[7]의 경우, 약 60%에 달하는 품종들이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종자들을 이용하여 개량한 것이다. 참고로 이 블랙 커런트만으로 러시아는 연간 미화 4억 달러에 달하는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실험국이 독일에 의해 파괴되었거나 굶주린 인민들에 의해 약탈당했거나 했다면 트로핌 리센코의 삽질로 망해버린 소련의 농업이 완전히 회생 불가능으로 망가졌을 것이고 실험국이 지켜낸 종자가 있었어도 미국에게 식량 수입이 끊기면 식량 공급에 엄청난 문제가 생겼던 소련인데 실험국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알수 없다.

2.4. 새로운 위협

2010년에 들어서면서 부동산 개발자에게 파블롭스크 실험국이 위치한 대지가 매각되면서 그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부동산 개발자는 파블롭스크 시설을 철거하고 고급 주택을 짓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계획이 실행될 경우 실험국이 소장한 표본의 많은 양이 소실될 전망이었다. 표본을 다른 곳으로 이관이나 운송하기도 곤란하였는데, 이는 어마어마한 양의 표본을 턱없이 짧은 공시일내로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2010년 8월 당시 대통령이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트위터로 해당 사안이 검토 중에 있음을 알렸으며, 많은 과학자들이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결국 2012년 4월 러시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보관소를 보존하기로 하였고 사적 이익을 위한 개발을 중지시켰다.

3. 등장 작품

  • 엘리즈 블랙웰(Elise Blackwell)이 집필한 소설 굶주림(Hunger)은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파블롭스크 실험국에 있던 과학자들을 다루고 있다.
  • 디셈버리스츠(The Decemberists)의 2006년 발매 앨범 The Crane Wife의 When the War Came은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의 파블롭스크를 다루는 가사를 담고 있다.

4. 참고 문헌/외부 링크


  1. [1] 북위 59.7143°, 동경 30.4236°.
  2. [2] 식물육종학자의 임무가 식량의 안정적 생산으로 배고픔을 없애는 것인걸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하고도 비극적인 최후인셈
  3. [3] 이는 실험국 대부분의 표본들이 씨앗에서 발아 시 동일한 특질을 가진 고정형으로 발아하지 않는 문제에서 기인했다. 이러한 종자들은 밭에서 기르면서 고정적인 형질을 계속해서 보전해야한다.
  4. [4] 바빌로프가 숙청당한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바빌로프의 영향이 남아있던 시설이 의도적으로 배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5. [5] 뿌리에 영양분을 저장하는 식물들. 감자, 고구마, 토란 등이 있다.
  6. [6]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2011년 7월호에서 9명이 굶어죽었다고 하고, 허핑턴포스트는 2010년 8월 18일자 기사에서 30명에 달하는 과학자들과 시설 직원들이 주로 겨울의 기아로 인해 죽었다고 한다. 다이버시티에 1991년에 기고된 글에서는 이름이 나온 사람은 11명이나 그 이상이라고 한다.
  7. [7] 까치밥나무과의 관목으로 베리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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