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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제국
دولت شاهنشاهی ایران

Keshvar-e Shâhanshâhi-ye Irân

국기

국장

1925 ~ 1979

표어

مرا داد فرمود و خود داور است
(가 나를 심판할 제,
나에게 정의를 행하라 하시리라.)

국가

이란의 황제를 찬양하라

위치

서아시아

수도

테헤란

정치체제

입헌군주제[1]

국가원수

샤한샤[2][3]

주요 황제

레자 샤 팔라비(1925~1941)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1941~1979)

주요 수상

모하메드 모사데크

언어

페르시아어

종교

시아파

민족

페르시아인

주요사건

(1925년 쿠데타)
1935년 건국
1963년 백색혁명 시작
1974년 아시안 게임 개최
1979년 이란 혁명 발발→멸망

통화

리알

성립 이전

카자르 왕조

멸망 이후

이란 이슬람 공화국

1. 개요
2. 역사
2.1. 왕조의 개창
2.2. 팔라비 1세의 통치
2.2.1. 제2차 세계 대전
2.3. 팔라비 2세의 통치
2.3.1. 모사데크 실각
2.3.2. 백색혁명
2.3.3. 민족주의
2.3.4. 외교
2.3.5. 왕조의 붕괴
2.4. 황실의 망명과 현황
3. 평가
3.1. 이슬람 정권과의 비교
4. 기타
5. 역대 군주
6. 국가

[템플릿사진출처]

1. 개요

페르시아어: کشور شاهنشاهی ایران

영어: Imperial State of Iran (영어)

페르시아(이란) 역사상 마지막 왕조. 카자르 왕조의 군인이던 레자 칸이 1925년 의회의 결의로 황위에 올라 레자 샤 팔라비가 되면서 팔라비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 아들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뒤를 이었고, 1979년 2월 11일 이란 혁명으로 퇴위하면서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에서는 2000년대 이전까지는 '팔레비'라는 표기법을 사용했었다.

2. 역사

2.1. 왕조의 개창

1878년 출생하여 젊은 나이에 군인이 된 레자 칸은 1921년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테헤란을 점령하고, 1919년 체결 된 영국-이란 협정을 무시하며 치외법권을 철폐하는 데 성공한다. 레자 칸은 1924년 부터 1925년 이란군 사령관 겸 총리가 된다. 1925년 10월 31일, 레자 칸은 카자르 왕조의 폐지를 의회에서 의결하고 이웃나라 터키처럼 공화국으로 이행하려 하였으나 성직자들과 영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리하여 1925년 12월 12일 이란 국회가 레자 한을 황제로 추대하였으며, 사흘 뒤인 15일 황위에 올라 팔라비 왕조를 열었다.

2.2. 팔라비 1세의 통치

황위에 오른 레자 샤는 국내 개혁에 착수한다. 1926년 사법 개혁, 1927년 국립은행의 창설, 1929년에는 징병제를 제정한다. 미국에서 재정고문관을 초빙하여 재정 개혁을 하였고, 차별 풍조를 없애기 위하여 여성 해방을 결의하고 1936년에는 히잡 금지령을 내리는 한편, 교육 개혁을 실시하여 국가 근대화에 노력했다.

대외적으로 국제연맹에 가맹하였으며,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 제국'으로 통일[5]하고 국왕(king)으로 번역되던 왕호인 황제(emperor)를 의미하는 샤한샤로 격상하였다. 중앙집권을 추진하며 1938년에는 이란 횡단 철도를 완성해서 산업 육성에도 진력했다. 그러나, 국가 근대화를 추진한 것은 지지를 받았으나 정치적으로는 황제 독재가 강했기 때문에 반발을 불러왔다.

2.2.1. 제2차 세계 대전

대영제국의 식민지

괴뢰국가 Puppet State

이라크 왕국

이란 팔라비 왕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레자 샤는 이란의 중립을 선언했지만, 연합국의 통과를 거부하는 한편 국내 독일인을 추방하는 것도 거절했기 때문에 추축국과 협력한다는 의혹을 받았다. 독일이 이란의 유전을 차지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란과 국경을 맡대고 있던 연합국인[6] 영국소련이란을 침공하여 이란에 주둔했다. 레자 샤는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팔라비 2세)에게 양위하고 퇴위하였으며, 모리셔스 섬으로 망명했다. 이후 남아프리카 연방[7]요하네스버그로 망명하여 1944년 67세로 사망했다.

2.3. 팔라비 2세의 통치

2.3.1. 모사데크 실각

1951년, 모하메드 모사데크 총리는 석유국유화를 추진함과 동시에, 이에 반감을 품은 서방국가들로부터 봉쇄를 당하자 소련에 접근했으며, 이 과정에서 모사데크와 갈등을 겪은 팔라비 2세는 로마로 망명했다. 그러나 CIA와 MI6의 지원(아작스 작전)을 받은 근황파 장군들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모사데크 총리는 실각했으며 팔라비 2세는 귀국했다. 이때까지 팔라비 2세는 서방 외교관들로부터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없는' 명목상 국가원수로 여겨졌으나, 아버지 레자 샤가 왕조를 개창한 과정을 보아온 까닭에 그를 둘러싼 자헤디 수상 등 장군들의 반란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플레이보이에서 개혁군주로 자리매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2.3.2. 백색혁명

팔라비 2세는 1957년 창설된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기반으로 반체제 운동을 단속하며 권위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한편으로는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도모하며, 위대한 문명을 국정철학으로 내세우며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는 개발독재 체제를 확립했다.

팔라비 2세는 1963년부터 석유를 수출하여 얻은 외국 자본과,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백색혁명에 착수한다. 국영기업 민영화, 노사간 이익 분배와 노동자 대우 향상, 교육 진흥, 농지개혁과 농촌 개발 등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 문맹률: 즉위 전 문맹률은 95%에 달했지만, 퇴위 후에는 50%까지 감소했다. 테헤란에서 2/3 정도가 글자를 읽고 쓸 수 있었으며, 약 1/3 정도가 문맹이었다고 한다.
  • 농지 개혁: 국토의 60%를 차지하는 황야를 외국 기술자를 초빙하여 녹화하는 한편, 지주의 토지를 매입하여 농민들에게 나눠주려 했다. 하지만 농민들이 관개작업에 필요한 자금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유효하게 활용하지 못하였고,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흘러와 슬럼가가 형성되었다. 농업생산량은 오히려 감소하고 식량을 수입하게 되었다.
  • 해외 유학: 부유층 자녀의 해외 유학을 추진했다. 그러나 유학을 하면서 반제정주의자가 되는 사람이 많았다.[8]
  • 여성 참정권: 여성에게 선거권, 피선거권을 인정했다. 이는 종교학자를 중심으로 비난을 받았다.
  • 히잡, 차도르 착용 금지

1962년 10월 6일 지방선거에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무슬림에게만 국한한 조항을 철폐하고, 바하이교 신도에게도 시민권을 주려고 했으나, 시아파 보수파 등에서는 비난을 받았고 법률의 철회를 강요받았다.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주도하에 1963년 대규모 반제정 폭동이 일어났으나 진압당하고 반체제 인사에 대한 영향력 때문에 추방되었으며, 런던에 가려 했지만 영국 정부에서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라크를 거쳐 프랑스 파리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폭동에 대해 대한민국 언론에서도 "시대착오적인 반동들의 난동"이라고 매우 비난하기도 하였다. # 애초에 시위의 이유가 모스크의 토지 분배 반대와 여성 참정권 반대였으니...

2.3.3. 민족주의

팔라비 2세는 1965년 9월 이란 국회에서 '아리아인의 영광'을 뜻하는 '아리야메헤르(Aryamehr)' 칭호를 받았고[9] 동시에 이란 민족 의식을 고취했다. 그동안 '가난한 나라에 황제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사양해 오던 샤한샤(샤 중의 샤, 왕중왕 즉 황제) 칭호를 1967년 10월 대관식을 올리면서부터 쓰기 시작했다.[10]

팔라비 2세가 1967년 10월 '샤'에서 '샤한샤'로 스스로를 높이는 대관식에서 찍은 사진.

1971년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유적 페르세폴리스에서 이란 건국 2500년 축하 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서는 다수의 국빈이 초청되었으며, 에티오피아 제국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일본 쇼와 덴노의 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이 있었다.[11] 황제국들의 정모 동시에 키루스 2세가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바빌론 유수에서 유대인 등 여러 민족을 해방하고 각각의 고향에 다시 그들의 성전을 재건했다고 기록된 키루스 원통인장의 복제물을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으로서 국제연합에 증정했다.

샤는 이 행사를 기념하여 수도 테헤란에 샤의 영광을 의미하는 "샤야드 타워"을 건설하고, 남쪽 마을에는 부황 팔라비 1세의 무덤을 건설했다. 샤아드 타워는 혁명 이후 자유라는 뜻에서 따온 아자디 타워로 명칭이 바뀌고, 팔라비 1세의 무덤은 흔적도 없이 개발살나서[12] 이슬람 신학교가 됐다.

1975년에는 셀주크 왕조가 만든 자라리력(曆)을 대신하여 이란력(曆)을 도입하고, 기원을 이슬람 사회의 히즈라를 대신하여 키루스 2세가 메디아를 멸망시킨 기원전 550년으로 잡았다.

일련의 사업에 투자된 비용이 1억 달러 이상에 달했으므로, 반체제적인 이슬람 율법 학자를 비롯한 여러 세력에게 낭비라는 비판을 받았다. 뭐 그런데 전성기에는 이 양반 개인 자산만 20억 달러가 넘었던 것 같다. 그래도 페르시아 제국 시절을 영광의 시대로 기억하는 여론은 나쁘지 않았기에, 오히려 이를 악마 같은 우상숭배라고 비난하던 호메이니가 신나게 욕처먹고 만다. 오죽하면 호메이니는 "여러분, 저는 낭비와 팔라비 2세의 자기 정권 우상화를 비난한 거지, 위대한 페르시아 시대를 모욕한 게 아닙니다!"라고 변명해야 했다. 뒤에서는 "그때 내가 뭔깡으로 그딴 개소리를 지껄인 거지?"라며 후회했다 1974년에는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였다.

2.3.4. 외교

1949년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팔라비 2세

팔라비 2세는 스스로도 영어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친 서방 외교를 추진했다. 친 서방 정책으로 이란은 친미 국가였고 미국과도 가까운 관계였다. 미국은 1970년대 중반에 다른 동맹국에 판매한 적이 없는 최첨단 F-14 전투기를 이란 공군에 판매하고, 키드급 구축함과 F-16, F/A-18이 이란에 판매가 확정되었던 상태일 정도로 이란을 최혜국으로 대우하였다.

대한민국과도 관계가 양호했으며, 1977년에 테헤란로라는 도로명이 이 때 지어졌다. 의외로 사우디아라비아와도 관계가 양호하였으며 # 특히 팔라비 2세가 파이살 사우디 국왕에게 보낸 편지 중에 '나의 형제'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서구화를 권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에 파이살 국왕은 공감했으나 사우디 건국이념상 와하비즘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터라 팔라비 2세가 권한 서구화를 하지못했고 답장에서 급진적 근대화가 이슬람 문화와 충돌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보이기도 하였다.

2.3.5. 왕조의 붕괴

이때까지만 해도 개명군주로서 팔라비 2세의 앞길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에 들어 오일 쇼크가 가라앉고 유가가 안정되자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겼으며, 경제 발전으로 빈부격차가 확대된 데다 결정적으로 팔라비의 친미 세속주의 정책에 대한 반발 때문에 이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왔다. 결국 이슬람 원리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등이 모여서 파업과 시위가 빈발했다. 설상가상으로 1974년에 이미 프랑스 의료진에게서 암 선고를 받은 팔라비 2세는 건강 문제 때문에 급변하는 시국에 대해 적절한 대응이 어려웠다.아예 1978년 봄부터는 공식 석상에 나서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으며, 헝가리와 불가리아 순방도 취소되었다. 암의 진행을 늦추려고 프랑스 의료진이 처방한 항암제는 우울감과 사고력 저하를 불러일으켜, 격변기에 대한 상황 대응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국가지도자의 건강이 중요한 이유

결국 1978년 초부터 발생하던 반제정 시위는 1978년 8월 19일 아바단에서 일어난 렉스 극장 방화사건[13], 9월 8일 검은 금요일 사태로 88명의 사망자가 나와 시위는 더 악화되었다. 팔라비 2세는 골람레자 아자리 장군을 수상에 임명하여 군사정권으로 사태를 마무리하는 한편 시위대를 달래기 위해 여러 개혁조치를 약속했으나, 시위가 악화되던 와중에 1979년 1월 6일 서방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이 과달루프 합의로 이란 사태 불개입과 팔라비 2세의 퇴진을 종용하여 사실상 팔라비 왕조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결국 1979년 1월 16일 암으로 죽어가던 팔라비 2세는 "나는 지쳤다."며 치료를 핑계로 망명하게 된다.[14]

호메이니는 2월 1일에 15년 만에 귀국을 완수하여, 이슬람 혁명위원회를 조직했다. 팔라비 2세가 임명한 마지막 총리인 샤푸르 바크티야르는 호메이니와 차기 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호메이니는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고 무조건적인 사퇴와 정권 이양을 요구했다. 이에 불응한 바크티야르 정권과, 샤에게 충성을 맹세한 친위대 및 이란 육군 공수부대와 내무부 보안군이 호메이니 지지를 포명한 육군 내부의 불평분자와 전투를 벌이다가 2월 11일에 제압되었다. 총리와 친위대 대장들이 체포되어 2월 13일 공식적으로 총리가 사임함으로써 완전히 이슬람 혁명 위원회가 이란을 장악하고 이들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면서 이란 혁명은 종료된다.

2.4. 황실의 망명과 현황

팔라비 2세와 그 측근은 망명 직후에는 이집트로 갔는데, 거기서도 별로 환영받지 못해 나가야 했다.[15] 그 뒤 모로코, 바하마, 멕시코 등을 전전했다. 팔라비 2세는 이후 암 치료를 명목으로 파라 황후 등과 미국으로 옮겨갔지만, 미국이 그 입국을 인정한 것에 반발하여 1979년 11월 4일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팔라비의 송환을 요구하는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때문에 12월 5일 미국을 떠나 파나마로 갔으며, 1980년 7월 27일에 다시 이집트의 사다트 정부가 망명을 받아주기로 해서 카이로망명하여 사다트 대통령의 배려로 무사할 수 있었지만 결국 실의 속에서 1980년 지병인 췌장암이 악화되어 카이로에서 사망했다.[16]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알 리파이 사원에 대리석으로 꾸며진 묘지가 있다.

1980년 팔라비 2세의 장례식. 사다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서 위문하였다.

마지막 황태자였던 레자 팔라비는 이후 미국 메릴랜드 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세 딸을 두고 있다.

이란 혁명으로 축출되었던 레자 팔라비 황태자 등, 해외로 망명한 팔라비 가문 측 인사들은 미국에서 망명 단체를[17] 수립하여 '현 이란 신정 체제 정부 타도'를 주장하고 있다. 다만 나무위키 내에 퍼진 서술과는 달리 레자 팔라비는 군주제 복고 여부는 이란 국민들이 선택할 거라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현재 이란 내에서도 현 이슬람 공화국 정부에 대한 지배가 강고한데다가, 현 이란 정부 내의 이슬람주의 정치가와 개혁주의 정치가 모두 팔라비 왕조를 적대한다.[18] 팔라비 왕조 시기 이란과 동맹관계였던 서방 세계 국가들도 1979년 1월 과달루프 합의로 팔라비 왕조에 배신을 날린데다가, 최근 이란 핵 협상 타결로 이란 혁명으로 수립된 현 이란 정부와의 화해를 모색하고 있어서 복고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많다.[19]

그러나 극소수의 의견이지만 미국 내의 일부 강경, 보수파 외교 인사들 사이에선(출처필요) 카터 행정부 시절 맺어진 과달루프 합의를 파기하고[20] 현 이란 정부를 무력 선제 공격으로 무너뜨려 해외 망명 중인 레자 팔라비 황태자를 다시 황위에 올려 팔라비 왕조를 재집권시키거나, 또는 팔라비 왕조를 복고시키되 과거 팔라비 2세가 저지른 과오와 실정들을 고려해 차기 이란 팔라비 3세에게 군주의 지위를 부여하는 대신 정치적 실권을 박탈하고, 총리가 실질권력을 행사하는 의원내각제 형태의 입헌군주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가끔씩 나오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이나 서방 내 외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민심을 잃고 혁명으로 몰락해 이란 국내의 지지기반조차 없는 팔라비 왕조의 복고와 재집권은 이란과 중동 지역 정세를 혼란과 분열에 빠트릴 위험성이 높다며 차라리 정치적 동력조차 상실해버린 팔라비 왕조의 복고 대신 대통령이나 총리가 수반이 되는 친미/친서방 성향의 세속주의 공화국 정부로의 정권 교체를 추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하고 있어(출처필요) 미국이나 서방 정치, 외교계에서 팔라비 왕조 복고 주장은 그리 큰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미국이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미국에 망명 중인 팔라비 가문 일족들을 이란 현 정부에게 인도하지 않고 끝까지 보호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미국이 팔라비 가문을 현 이란 정부에 대한 대항카드로서 확보는 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3. 평가

나는 역사 시간에, 샤는 이란의 좌파들을 억누르고 이란의 석유에 미국이 안전하게 접근하도록 하기 위해 CIA가 세운 열등한 독재자라고, 그는 사치스럽고 변덕스러웠다고, 그의 비밀경찰 SAVAK는 비난받지 않고 고문하고 감시했다고 배웠다. 이것들 중 대부분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1953년, 적어도 CIA가 영향을 끼친 쿠데타에 의해 확실히 이익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독재자였다(그가 선의의 독재자였는지 폭군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하더라도). 하지만 나는 샤와 그의 정부에 대해 모순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샤 통치 시기에 나의 할머니는 참정권을 얻었고, 폭력적인 아편 중독자 남편에게서 이혼할 권리를 얻었다. 나의 친척들은 그의 토지개혁과 산업적 이익을 나누는 프로그램으로부터 혜택을 입었다. 나의 아버지는 샤의 문맹퇴치부대(literacy corps)로부터 읽는 것을 배웠고, 정부가 제공한 음식과 교과서를 받았다.

- 익명인, "Why Iranians are lapping up Shah memorabilia" (2015년 6월 17일 가디언 지)

팔라비 왕조는 토지개혁, 여성의 참정권 보장, 일부일처제, 문맹 퇴치, 무상 의무교육 등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통해 이란의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다. 외세와 결탁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이란 정도 규모의 국가에서 외국과 단절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친서방 노선을 통해 이란은 상당한 이익과 이권을 보장받았다. 물론 석유 분야에 의존한다는 경제적 한계는 있었지만 아무 기반 없는 개발도상국에게 쓸 만한 자원이 있다면 써먹어야 한다. 당장에 그런 게 없어서 경제적으로 발전조차 못 하는 국가들도 많이 있다. 신정 체제가 들어선 이후에도 팔라비 왕조의 개혁조치를 전부 뒤엎지는 못했으며, 국가 자체가 팔라비 왕조의 유산 위에 얹어사는 수준이다. 한 예로 이란이 중동에서 높은 여성 대학진학률을 보이는 것도 신정 체제가 잘나서가 아니다.

허나 정권 유지 및 민심 문제에서는 문제가 많았다. 이란은 원래부터 문명국이고 또한 그 동안 펼친 친미, 친서방정책으로 인해 적어도 도시 중상류층 국민들의 사고방식은 고도로 서구화되었기에 무조건적이며 강압적인 정치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또한 국민들은 반서방적 정서가 강하였고, 외부에서도 한창 반서방, 페르시아 민족주의, 이슬람주의가 서로 맞물려서 횡행하는 시절이었다. 심지어 백주대낮에 수상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하는 일조차 있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21] 더군다나 팔라비식 세속주의는 이슬람 교리 특유의 여러 폐단을 보완하는 장점이 있었지만, 몇몇 면에서는 서방의 기준으로 봐도 과격한 면이 있었다.

다만 히잡을 자유화시킨 게 아니라 금지시킨 면에선 히잡, 차도르를 강제로 입히는 호메이니, 하메네이와 강제로 벗기는 팔라비나 대동소이했다는 서술은 좀 사실과 다른데, 히잡 금지령(Kashf-e hijab)을 내린 것은 무신론자에 가까웠던 선대 레자 샤(1936년)였고, 팔라비 2세는 히잡을 좀 안 좋게 보긴 했어도 칼같이 금지하진 않았다. 1960, 70년대 이란의 서구적 복식이 하도 주목받아서 그렇지 당대 영상을 보면 검은 차도르를 쓰고 길을 다니는 여성도 꽤 보인다.

헌데도 팔라비 2세는 모사데크 총리에게 데인 게 트라우마라도 되었는지 무조건 강경 일변도로 나갔고 오일쇼크와 빈부격차, 경제문제가 겹쳐서 위기상황인데도 변하지 않아 팔라비 왕조 말기에는 무력사용을 동반한 강경대응 -> 시위대 및 반정부세력의 강경화 -> 더 큰 무력사용의 악순환을 형성하며 유혈진압으로 팔라비 왕조의 권력 기반을 거덜내었다. 그나마 그렇게 할 거라면 효과적으로 했어야 했는데 제대로 찍어누르지도 못하였다. 또한 팔라비 왕조가 추진한 토지개혁으로 소작농의 90%가 자작농이 되었고, 여성 참정권 도입으로 인해 이란 내 소수민족 출신의 여성 의회의원이 배출되는 등의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닌데 치적 홍보나 프로파간다를 제대로 하지 못해 지지세력을 제대로 결집하지도 못했으며, 입헌군주국이면서도 자기가 무소불위의 힘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절대군주제 마냥 국가를 이끌려 했으니... 이러니 도저히 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결국 망했어요.

팔라비 왕조가 영리하고 힘이 좀 더 있더라면, 또는 몇십 년을 더 유지해 몇백 년 전 유럽이 한 정교분리를 어느 정도 확립했더라면[22], 아니 최소한 호메이니의 생물학적 수명이 10수 년만 더 짧았다면[23] 어떤 불안정하더라도 터키, 레바논처럼 근대화되고 세속적인 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었거나 혹은 오만이나 요르단, 모로코 같은 현존하는 아랍권 군주국들처럼 부의 분배 등 국민들의 민의 문제를 해결하여 내부의 불만 요소들을 어느 정도 잠재워 팔라비 왕조의 권력 기반을 더욱 더 강화했거나, 보수적 사회 분위기를 크게 훼손하지 않은 채 점진적인 개혁 정책을 펼쳤더라면 몰락하지 않고 제정을 유지하였을 가능성도 있었으나 일단 사회면에서는 1960년대의 백색혁명으로 급격한 탈종교화와 서구화를 추진하려 하면서 이슬람 보수 세력들의 반발을 샀고, 황권이 불안한데도 절대군주정으로 끌고가려는 등 있는 의회를 제대로 제압도, 활동도 못했으므로 좌파 세력(투데당 등), 공화주의 세력을 적으로 돌렸다. 결국 제정은 혁명으로 전복되었고 이후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공화정 체제로 새출발하였다.

3.1. 이슬람 정권과의 비교

군주제를 혁명으로 무너뜨리고 이슬람 공화국이 된 오늘날의 이란도 정치 탄압이나 인권 탄압에서는 악랄해서 팔라비 왕조를 비판할 처지가 못 된다.[* 1980년대, 호메이니의 후계자로 유력했던 당시 부통령 후세인-알리 몬테자리가 "[샤는 호메이니가 한 것의 10%도 죽이지 않았다"고 발언했다가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혁명 초기에는 이슬람 세력이 헤게모니를 쥐려는 상황에서 이에 반대하는 공화주의-세속주의 세력 등을 탄압했다. 물론 이후에도 총칼과 법 등을 통해 반대파를 억눌렀다. 이란-이라크 전쟁 덕분에(...) 그나마 완화된 것이 이 정도. 거기에 팔라비 왕조 시절과 다르게 이슬람 율법에 따른 신정 정치를 모토로 삼은 탓에 간통죄에 대한 투석형이라든지 동성애에 대한 교수형 등 팔라비 왕조 시절에는 없었던 억압도 생겨났고[24] 이전부터 있던 명예살인같은 문제도 해결되지 못했다.[25] 거기에 이젠 본격적으로 반서방 행보를 보인 것까지 합쳐져 이란은 많은 면에서 정체되었고 일부 면에서는 퇴보했다.

그래도 이들은 혁명 후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교적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이유는 먼저 (그들 나름의) 실용주의를 보인 것인데, 당장 살아남기 위해 이후 외국과의 충돌을 위해서이긴 하지만, 전쟁 수행 및 이후의 군사력 구축을 위해 구 제정 이란군 인사들을 사면했고 그들이 싫어하는 서구의 군사기술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인들에게서 전쟁수행 자금을 받는 대신 그들을 정치적인 면에서 상당히 풀어주었다. 또한 팔라비 왕조 시절에 추진한 개혁정책 중 눈감아 주거나 필요한 것들은 수용했다. 그 예 중 하나가 여성의 대학진학 확대와 무기 국산화. 특히 이란의 군사력은 팔라비 왕조의 유산을 전용하고 거기에 기반해 그들 나름대로 노력해서 만든 것의 결과물이다. 팔라비 왕조 시절 구축한 인프라의 힘이 절대적인 분야. 물론 신정 체제가 들어선 이후 그 전에 비해 발전이 정체되었다.

한편 권력을 더 확실히 틀어쥐기 위해 호메이니->하메네이와 신정위원회의 권한이 훨씬 우월하고 그들이 윗선에 존재하며[26] 근본주의자 측은 이것과 혁명수비대[27]로 반대파가 득세하더라도 대처할 만한 무력과 권력을 마련해두었다. 이란혁명수비대가 반 이슬람세력이 선거에서 이기면 좌시하지 않겠다 나서며 부정선거와 부정선거 의혹이 나오는 등 지지세력이 정권을 잡도록 유도하는 변형되고 기형된 체제지만 공화주의자들을 포용하기 위해 공화정 체제를 만들었고 정권이 안정된 이후에는 반대파 정치인에게 견제와 훼방을 놓을지언정 체제에 위험이 가지 않으면 어느 정도 눈을 감아주었다. 그러면서 팔라비 왕조 전복 당시 샤를 지지하며 저항한 것이 그저 황실 친위대와 공수부대밖에 없었던 것을 반면교사 삼아 이란혁명수비대 같은 것을 통해 군사력을 갖추어 정권 유지의 근간으로 삼았다. 실제로 2019년 11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자 혁명수비대와 보안군을 동원해 시위대 200명 이상을 학살하는 등 무력기반이 튼튼하여 더욱 과감하다. 그리고 해외에 망명중이던 샤푸르 바크티아르 전 총리 등 반체제 인사들까지 직접 제거하여 구심점이 될 인물들의 싹을 없앴다.

팔라비 왕조보다 폭압적이면 더 폭압적이지 딱히 나을 것도 없는 이슬람 정권이지만 저렇게 정권을 유지하는 방식 자체가 훨씬 더 영악하기 때문에 유지가 되는 것이다. 물론 국민들이 원하는 반서방 이슬람주의 정책은 기본 밑바탕에 깔고 간다. 1999년과 2009년, 2011년에 이란 내에서도 세 차례 있었으나 대부분 진압, 토벌되었다. 여러 경제 제재를 받음에도 이란에서 의미있는 반정부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정권을 잡고 있는 종교근본주의자들을 많은 이란 국민들이 정권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2014년 다에시가 떠오르자 중동에서 비교적 혼란이 적고 안정되어 있었으므로 이라크에 간섭할 수 있었다. 미국이 이란체제를 눈엣가시처럼 무너뜨리려고는 하지만, 이라크 전쟁이라는 부시의 삽질 때문에 미국의 중동에 대한 대규모 간섭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고, 사우디는 오늘날 다에시의 탄생에 알게모르게 기여했기 때문에, 미국도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인정하고 이란을 파트너로 인정하며 대 다에시 전선에 동참(사실상 묵인)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핵 협상도 거의 타결되었...는 줄 알았는데, 45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핵 협상도 최악이라면서 파기하고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부활하여 강화, "미국, 이스라엘, 아랍" vs "이란" 구도가 첨예해졌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이란이 시아파 벨트인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에 깊숙히 개입했던 것이 독이 되고 말았다. 미국과 서방이 부활시킨 각종 제재와 유가 하락으로 경제는 극악으로 추락했는데 저 국가들에 과도한 개입을 하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28] 반정부 시위도 이란에서 2017-2018 이란 시위를 시작으로 잊을 만하면 터지고 있으며, 급기야 2019년 11월에는 시위대 수백 명을 학살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에 연금중인 (신정 체제 내) 개혁파 지도자 무사비는 1978년의 '검은 금요일'을 상기시키며 하메네이가 쫓겨난 팔레비 국왕과 같은 짓을 했다고 비난했다.[29] 2019년 12월, 혁명수비대 간부 자바니는 이번 학살이 하메네이의 명령이었으며,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시위"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다고 거듭 말했다.

2010년대 후반 이후의 시위에서 주목할 점은 2009년의 '녹색 운동' 시위 때의 이슬람 체제 내 온건 개혁이 아니라 이슬람 신정 체제 자체를 거부하는 목소리를 내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독재자에게 죽음을!" "하메네이에게 죽음을!" 같은 구호가 대표적. 그리고 시위 구호 중에 "레자 샤, 신께서 당신의 영혼을 보호하길!" "오오 이란의 샤여, 이란으로 돌아오라!" 같은 것도 관찰되고 있다. 이에 대해 2017-2018 이란 시위 당시 이란 현 정권에 우호적인 러시아의 관영 매체 스푸트니크는 지역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이란 8,100만 인구 중에 이슬람 혁명 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2/3을 차지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샤의 이름을 외친다는 사실이 놀라우며, '사람들이 그저 이란인이던' 세속주의적인 이란으로 시계를 되돌리고 싶은 열망"이며, "이 시위는 단지 테헤란의 밀레니얼 세대뿐 아니라 마슈하드, 이스파한, 콤 (같은 지방도시)에서도 있었다"고 보도하였다.[30]

이란 사법 당국도 2019년 11월 유혈시위의 배후가 "반(反)이란주의자, 미국이 후원하는 테러단체, 분리주의자들"과 함께 (혁명 이후 그렇게 솎아 낼 대로 솎아 냈는데, 아마도 근 40년 만에 처음으로) "왕당파"를 지목했다.#

그러므로 아직도 팔라비 왕조에 대한 평가는 이란 내에서조차 현재진행형이라 볼 수밖에 없다.

이란으로의 귀국 또는 방문 가능성에 대해 서술한 문단이 있었는데, 이란의 사례는 일부 서방 국가들(프랑스, 이탈리아)이 구왕조 왕족들에 대해 수십년간 입국을 금지했다가 풀어준 경우, 또는 터키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인근 이슬람 국가보다는 공산당이 집권중이던 당시의 동구권 국가들과 비교하는 것이 옳다. 이란 신정 체제가 정치적이 아니라 <이념적으로> 적대시하는 팔라비 왕조의 입국을 허용하는 것은 소련로마노프 왕조의 입국을 허용하는 것과 똑같은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이기에, 신정이 무너지기 전에는 팔라비 황족들이 결코 이란에 입국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31] 그리고 팔라비 왕조는 이란에서 이제 용서하고 귀국을 허용해줘야 한다는 국내 여론이 거의 없거나 낮다는데 그럴 수밖에 없다. 대놓고 말하면 바로 비밀경찰에 잡혀가거나 외국에 망명을 신청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신정이 무너진다고 해서 팔라비 왕조가 자동 부활하는 것은 아니지만, [32] 체제 내 개혁파들에 의한 점진적 개혁개방이 아니라, 이슬람 원리주의를 청산하고 세속주의 공화제로 전환한다면 서구화와 정교분리를 지향할 것이 분명하기에 알바니아조구 1세 정도의 평가는 받을 것이다.[33]

4. 기타

  • 이란 이슬람 공화국과는 달리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1906년 카자르 왕조 시절 채택된 헌법에서는 양원제를 명시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단원제로 지내다가 1949년 국회의원 선거를 계기로 상원이 활성화되었다.
  • 해외의 망명 이란인들 사이에서는 팔라비 시절의 옛 이란 국기가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는 왕정을 지지한다기보다는 카다피 체제를 부정했던 리비아처럼 현재의 이슬람 신정국가를 부인한다는 의미가 있다.

5. 역대 군주

6. 국가

'Sorude Shahanshahi-ye Iran'. 1933년 채택되었다. 한국어 위키백과를 보면 '이란의 샤한샤를 찬양하라(...)'라고 되어있다. 제목을 영어로 번역하면 'Imperial Salute of Iran'인데, Imperial Salute는 (황제에 대한) 예포를 뜻한다.


  1. [1] 오늘날 요르단이나 모로코 같은 중동 왕국들처럼 실질적으로는 전제군주제에 가까웠다.
  2. [2] '샤 중의 샤'
  3. [3] 계몽사 '학습만화세계사 20권'에는 그냥 '샤'를 '왕 중의 왕'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4. [템플릿사진출처] 4.1 https://ko.wikipedia.org/wiki/%ED%8C%94%EB%9D%BC%EB%B9%84_%EC%99%95%EC%A1%B0#/media/File:State_Flag_of_Iran_(1964-1980).svg,https://ko.wikipedia.org/wiki/%ED%8C%94%EB%9D%BC%EB%B9%84_%EC%99%95%EC%A1%B0#/media/File:Imperial_Coat_of_Arms_of_Iran.svg,https://ko.wikipedia.org/wiki/%ED%8C%94%EB%9D%BC%EB%B9%84_%EC%99%95%EC%A1%B0#/media/File:LocationIran.png
  5. [5] 사실 사산 왕조 때부터 국호는 이란이었지만 서방에서는 '페르시아'로 통용되고 있었다.
  6. [6] 영국은 괴뢰국인 이라크 왕국에 군대를 주둔시켜 군정통치하고 있었고 인도 제국을 식민지로 삼고 있었는데 두 지역 다 이란의 좌우로 국경을 맡대고 있었다. 소련은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남하정책으로 이란의 세력권이던 캅카스 지역과 중앙아시아 칸국들을 전부 뺏어먹고 카스피 해를 사이에 두고 북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즉 그야말로 이란은 포위된 형국이었다.
  7. [7]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된 것은 1961년
  8. [8] 사실 어느 나라든지 해외에 거주하는 재외국민이거나 외국 거주를 오래했던 사람들(유학생 등)은 진보적 성향이 강한 편이다.
  9. [9] 원정팀의 무덤이라는 테헤란의 아자디 경기장의 원래 이름도 아리아메르 경기장이었다.
  10. [10] 1967년에 칭제를 한 게 아니다. 부황 레자 샤도 샤한샤 칭호를 썼었다.
  11. [11] 아키히토 상황의 숙부이다.
  12. [12] 다만 팔라비 1세의 유해는 훼손되지 않고 이집트 카이로로 보내졌다. 하지만 2018년에 팔라비 1세로 추정되는 유해가 이란에서 발굴되어 논란이 되었다. 현재는 다시 매장하였다고 한다.
  13. [13] 최소 420명의 사망자를 냈다. 당시 팔라비 왕조의 비밀경찰 사바크(SAVAK)의 짓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시위가 확대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방화범의 정체는 이슬람주의자 또는 사바크라는 설이 있으며, 범인의 정체는 혁명 후에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영어 위키백과에서는 범인 미상(Unknown)으로 표기한다). 만화 페르세폴리스에서도 이 사건을 잠시 언급한다.
  14. [14]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공격을 받은 세속주의 정권이라는 점에서 현 시리아의 사례와 비슷한데, 러시아라는 확고한 외국 동맹이 지지하는데다 강력한 권력의지가 있어 정권 유지를 하고 있는 현 바샤르 알 아사드 정부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물론 팔라비 왕조에는 결사적 지지 기반이 될 외세의 동맹국가가 없었고(물론 미국과 서방 세계의 여러 국가들이 있긴 했지만 미국과 서방도 막상 이란에서 혁명이 터졌을 당시 팔라비를 지원하지 않고 오히려 버렸다. 이게 서방의 오판임이 드러나는 건 1년도 안 걸렸다.) 시리아 반군에는 호메이니처럼 강력한 반정부 구심점이 없다는 차이점이 있다.
  15. [15] 이집트의 마지막 왕이던 파루크 1세는 여동생 파우지아 시린이 바로 팔라비 1세의 첫 번째 아내였기에 왕위에서 쫓겨난 파루크 1세는 이란으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팔라비 2세가 입국을 거절해서 갈 수 없었다. 이렇게 문전박대를 당하자 파루크 1세는 "그놈이라고 언제나 그 황위를 유지할지 아느냐?"라고 분노했는데 그가 죽고 15년도 안 되어 그 말이 이뤄졌다. 그리고 팔라비 2세가 죽어서 묻힌 곳이 바로 파루크 1세와 똑같은 이집트 카이로의 알-리파이 모스크다.
  16. [16] 계몽사 '학습만화세계사 20권'에는 파나마에서 암으로 죽었다고 잘못 기재되어있다.
  17. [17] National Council of Iran. 망명 정부와는 구분된다.
  18. [18] 다만 소위 이란의 개혁파와 세속주의자는 전혀 다르다. 개혁파의 대표주자인 현직 대통령인 하산 로하니만 봐도 온건파 성향 이슬람 성직자지, 절대 세속주의자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정통) 이슬람주의 정치가와 개혁(이슬람주의) 정치가라고 봐야 한다. 세속주의자는 지하에서 활동하거나 망명할 수밖에 없다.
  19. [19] 이란 핵합의 4주년, 환호에서 전쟁의 공포로 2015년에서 2019년 사이에 분위가가 180도 바뀌었다.
  20. [20] 정식 조약이 아닌 구두합의에 불과하기에 "파기"씩이나 할 가치가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21. [21] 1951년 알리 라즈마라, 1965년 하산 알리 만수르.
  22. [22] 팔라비 왕조가 이란을 다스리던 같은 시대(1960, 70년대)의 요르단의 후세인 1세 국왕이나 오만의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 술탄처럼 강력한 권력기반과 국민적인 지지를 가졌더라면.
  23. [23] (유투브)이란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의 가상 역사 시나리오에서는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로 호메이니의 조기 사망으로 반정부 세력의 구심점이 없게 되는 것을 들고 있다.
  24. [24] 근본주의자들이 내세운 샤리아는 7세기 시대를 반영한 법인데 시대가 한참 지난 현대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난 변화 같은 것은 무시하고 이것을 적용하겠다는 것. 게다가 이것은 해석 범위가 매우 넓어 악용될 소지가 많다(...).
  25. [25] http://www.landinfo.no/asset/960/1/960_1.pdf http://www.justice.gc.ca/eng/rp-pr/cj-jp/fv-vf/hk-ch/p3.html http://en.wikipedia.org/wiki/Honor_killing#Iran http://www.centerforinquiry.net/isis/islamic_viewpoints/the_lethal_combination_of_tribalism_islam_cultural_relativism http://www.islam-watch.org/SyedKamranMirza/honor_killing.htm
  26. [26] 이란은 이맘 밑에 3부가 존재한다. 즉, 이맘의 의중이 대통령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의미.
  27. [27] 나치 친위대와 비슷하게도 기존 군부를 믿지 못해서 집권세력을 수호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사병이라고 볼 수 있다.
  28. [28] 실제로 반정부 시위 구호도 "No Gaza, No Lebanon!" 등, 외국 개입 반대 구호가 많다. 그리고 피개입국인 이라크에서도 시아파들을 중심으로 2019년에 반이란 시위가 폭발했다.
  29. [29] 무사비와는 달리, 이번 사건을 '1978년'이 아니라 팔레비 왕조가 반정부 봉기를 유혈진압하며 호메이니를 쫓아냈던 '1963년'과 비교하는 시각도 있다.
  30. [30] 물론 이런 구호가 아직 시위의 주류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신정 독재 하에서 최악의 경우 사형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저런 구호를 내지를 정도로 체제에 대한 시위자들의 환멸이 대단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반정부 시위 때마다 정권은 친정부 시위자들을 내세워 맞불을 놓는데, 참가자들의 사진을 보면 대부분 소위 '혁명 세대'인 중노년층틀딱이 많았는데, 반면 청년층과 빈곤층, 여성이 신정 체제를 싫어하며 ## 반정부 시위의 주축이었다. 겉으로는 최고령도자의 두리에 반미이슬람 원리주의로 일심단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청년 실업률이 30%에 육박하는데 이란판 핵심계층의 2,3세들인 아그하자데(Aghazade)의 호화 사치 과시에 대한 젊은이들의 박탈감이 장난이 아니다.
  31. [31] 이전 서술에서 가정한 것처럼 신정 체제 강경파의 거두인 하메네이가 입국을 허용하는 걸 검토할 리가 절대 없다. 그걸 가정해서 서술하는 건 그저 트래픽 낭비에 불과하다.
  32. [32] 경로의존성 때문에 세속주의 공화국으로 전환할 확률이 크다고 한다. 다만 역사적 사례를 볼 때 민주적 공화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는 것보다는 독재국가(1975년 스페인, 1993년 캄보디아)나 혼란투성이 체제(1935년 그리스)에서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는 난이도가 낮긴 하다. 물론 이전 정권들의 성격(설명충 방지를 위해 이에 대해서는 링크를 참조할 것)과 구왕가에 대한 태도들은 제각각이고, 이란과의 비교 대상은 절대 아니지만.
  33. [33] 조구 1세 항목을 보면 그도 독재자였지만 너무 오래 전의 일인데다, 뒤를 이은 엔베르 호자의 독재가 훨씬 무자비했고 결과적으로 유럽의 후진국으로 만들어 상대적으로 조구 1세의 독재에 대한 기억이 희석되었다고 한다.
  34. [34] 팔라비 2세가 망명간 이후에도 그가 임명한 바크티야르 내각 자체는 한동안 유지되었다. 결국 바크티야르 정권이 무너진 것이 2월 11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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