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왕의 난

八王之亂

중국어: 八王之乱(bāwángzhīluàn)

1. 개요
2. 배경과 원인
3. 전개
3.1. 폭주하는 외척
3.2.1. Season 1: 며느리의 역습
3.2.2. Season 2: 뒤통수, 또 뒤통수
3.2.3. Season 3: 이번에는 의붓아들 살해
3.3. 팔왕의 난 전개
3.4. 하지만 영가의 난
4. 사건 정리
4.1. 타임라인
4.2. 등장인물
5. 기타 창작물에서

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를 불러일으킨 중국 역사상 최악의 병크고대의 막장 드라마

내란을 주도한 종실제왕(宗室諸王)[1]이 모두 8명이라고 해서 '팔왕의 난'이라 일컫지만, 이는 사실 황실의 문제만이 아니라 썩을대로 썩어가던 서진 뿐만 아니라 후한 말기부터 쌓여온 고대 중국의 사회 모순 전반이 터져나온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단순히 황실 안에서의 제위 다툼만이 아니라 극단적인 사회 양극화에 따른 거대문벌에 대한 중소문벌의 공격,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정부의 공격이라는 성격도 동반한 것이었다.[2]

이 사건의 결과 서진의 국가 막장 테크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이어진 영가의 난에서 서진은 최초로 본거지인 중원을 잃고 강남으로 쫓겨난다.

2. 배경과 원인

"근자에 위무제가 법술(法術)을 좋아하니 천하에서 법가사상을 중시하고, 위문제가 통달(通達)을 흠모하니 천하에서 절개 지킴을 천시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기강이 정돈되지 않고 방탕하고 기이한 행동이 조정에 가득차게 되었으니, 마침내 천하에서 다시는 청의(淸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제업을 일으켜 선양을 받고 요순의 교화를 넓히시는데, 청렴하며 예의를 갖춘 신하를 등용하여 풍기를 정돈하지 않으시고 허랑방탕한 인사를 물리쳐 불경한 이들을 징계하지 않으십니다. 신은 이로써 감히 한 말씀 올리나이다."

자치통감》 태시 원년(265), 산기상시 부현의 상소

265년 12월 임술일, 조조의 손자 조환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은 사마염이 내건 국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전란기의 군벌 집단을 기반으로 성장한 위나라가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던 전제적 · 법가적 정책 방향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방 사회가 붕괴되면서 강고한 기득권 집단으로 굳어진 문벌들의 귀족적 · 퇴폐적 사회 풍조를 단속하는 일이었다. 이에 그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후한시대 이래 흐트러진 유교 질서의 회복이었다.

이에 따라 재위 초기 사마염은 여러 측면에서 유교적 예법을 준수하며 관대하고 검소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즉위한 직후부터 사마염이 직접 사마소왕원희의 죽음을 3년간 심상(心喪)하면서 유명무실해져 있던 삼년상을 부활시킨 것은 곧 가족적 윤리와 국가적 충성을 동일시하는 한대 유교의 국가 운영 논리를 복구하려는 시도였다. 이외에도 278년 11월 신사일에 태의사마 정거(程據)가 꿩의 머리털로 만든 치두구라는 가죽옷을 바치자 이를 태워버린 일화가 유명하다.

다만 사마염의 구상은, 의도는 좋았지만 여기까지였다.

2.1. 명분이 없는 취약한 왕조

서진 세조 무제 사마염, 역대제왕도권

가장 큰 문제는 하내사마씨(河內司馬氏)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위법과 탈법으로 찬탈을 저지른 것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사마의무력 쿠데타로 정권을 뒤집었고, 그 아들 사마사는 임의로 외척을 척살하고 황제까지 쫓아냈으며, 사마소는 아예 황제를 시해했다. 조비 역시 헌제를 핍박하여 황제가 되었지만 그래도 헌제에게 위해를 가하진 않았다. 그러나 사마소는 가충을 앞세워 조모를 진짜로 시해하였다. 직접적 실행자인 성제에게 책임을 물리기는 했지만, 성제가 죽기 전 저항하면서 사방에 실상을 다 까발린데다 정작 성제를 사주한 가충은 무사했으므로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었다.

이외에도 중간중간 사마씨 일족에 조금이라도 제동을 거는 세력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무력을 동원해 자근자근 밟아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처럼 억지 수단으로 정권을 찬탈했다면 최소한 수단을 정당화할 목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하내사마씨에게는 애초부터 그런 게 존재하질 않았다. 앞서의 위나라도 같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 정도는 하내사마씨가 훨씬 심각했다. 조씨의 위나라는 적어도 조조가 한나라에 기대어 성장하지 않은 자수성가형 세력으로 한나라의 간판을 유지시켜 주었다는 점, 오히려 헌제가 이미 동탁에게 옹립되어 문제의 소지가 있는 황제였다는 점, 그리고 조조 조비 조예 3대 동안 동탁이 초토화시킨 낙양을 복구하고 황건적의 난으로 널리 초토화된 민생을 재건했다는 점에서 "조씨가 뭘 잘했길래 제위에 오르냐?"라는 질문에 대답 정도는 할 수 있었으나[3], 사마의에게 내치적 업적은 아예 없었고 말 그대로 조씨 정권을 먹튀해서 간판만 바꿔 달아놓은 사마씨 정권에 불과했다.[4] 조조 자체가 서주대학살을 벌이는 등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긴 했지만, 사마의도 공손연이나 조상이나 왕릉에게 저지른 짓을 보면 딱히 나을 바는 없으니. 특히 사마소가 조모에게 한건 답이 없다.

그러다보니 당장 사마염의 재종손인 숙종 명황제부터가 자기 이 위나라를 찬탈하고 진나라를 건국한 과정을 듣고난 후 "그 말대로라면 이전에 있던 우리나라가 망해버린건 당연한 일이고 우리나라도 오래 못가는거 아닌가?"라고 동음이인을 디스[5] 한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비록 이 이야기의 출처가 세설신어기는 하지만, 동시대에 석륵도 "남자라면 조맹덕이나 사마중달 부자처럼 고아와 과부를 속이고 아첨으로 천하를 취할 수는 없다"고 디스한 것을 보면 당대인들의 평가 자체는 그리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사마염이 내세운다는 게 위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유교적 가족주의였지만, 여기에도 엄연히 문제가 존재했다. 정작 사마염 자신이 사마의의 장손이 아니라 차남인 사마소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사마소의 형 사마사가 아들을 두지 못하기는 했지만, 대신 사마염의 동생 사마유가 사마사의 아들로 입적되어 있었고 그의 개인적인 인망도 상당했으므로 사마염에게 강력한 위협이었다. 그렇다고 사마유를 아예 배제해버리자니 또 유교적 가족주의에 어긋나고.

결론적으로 사마염이 내건 '유교 질서의 회복'은 적극적으로 강조될수록 사마염의 집권 정당성이 약화된다는 아이러니를 안고 있었다. 결국 위에서 본 치두구 사건이 벌어진 278년에 조정 내에서 군기반장 역할을 하던 부현(傅玄)이 사망하고, 280년에는 삼국이 통일되면서 사마염은 유교 질서의 실현이라는 기조를 사실상 포기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마유에 대한 처우인데, 이전까지 유교적 가족주의에 입각해 전대에 비해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받던 사마유가 280년의 삼국통일을 기점으로 급격히 견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사마염은 사마유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지방으로 쫓아낸 뒤 사마유도 산동 지방으로 보내버리는데, 이 과정에서 사마유가 정말로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개념을 안드로메다에 특급소포로 부친다.

2.2. 돈과 권력은 쓰기 나름

"지금 토지는 넓고 사람은 드문데도 부족한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은 사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질검을 숭상하게 하고 싶다면 마땅히 그 사치한 사람을 힐책하여야 하는데, 사치해도 힐책을 받지 아니하게 되니 돌고 돌아서 도리어 고상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서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자치통감》 태강 3년(282), 거기사마 부함의 상소

애당초 법가적 정책을 지양하면서 귀족적 풍조를 잡겠다는 방향 설정 자체도 문제였다. 이는 곧 사치를 금지하지만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법가사상 대신 내세워진 유교적 검약주의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모르겠지만, 기존의 유교사상은 이미 형식만 남아 문벌집단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온정주의로 왜곡된 지 오래였다. 예컨대 선비의 윤리의식을 가늠하는 기준의 하나였던 삼년상 관습이 후한시대에는 명성과 관직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원소가 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구품관인법이 더해진다. 구품관인법의 당초 목적은 여론조사를 통해 '이름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었지만, 평가 기준이 주관적이다보니 여론조사관인 중정(中正)이 뇌물을 받거나 거대문벌들의 눈치를 보고 여론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부터 등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망했어요 중정의 자격과 활동이 엄격하게 관리되었다면 그나마 문제가 덜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관대하신 사마염 황제께서는 중정들에게 사실상의 면책특권을 줘버리고 말았다. 이런 구조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274년부터 283년까지 선조랑[6]을 지낸 산도(山濤)는 정작 인재를 배치할 때에는 언제나 사마염의 눈치부터 봤다. 즉 공석이 생기면 그 자리에 배치할 후보자 명단을 만들어 비공식적으로 사마염에게 제출하고, 사마염이 그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해야 그 사람을 공식적으로 인사에 배치했다. 즉 아무리 재주 있고 평판 있어도 사마염의 눈 밖에 있으면 장외탈락. 때문에 산도는 인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는다고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사마염은 당연히(?) 언제나 산도를 감싸주었다. 사서에서는 이게 무슨 군신간의 의리를 보여주는 미담처럼 포장되었지만 국가 건전성 측면에서는 절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일찍이 호위가 상서가 되었을 때 당시의 정치가 관대한 것을 간언하니, 황제는 "상서랑 이하에게는 내가 가차없이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호위는 "신이 말씀드리는 것이 승 · 랑 · 영 · 사와 같은 하급 관원들이겠습니까? 바로 소신과 같은 직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분위기가 엄숙해지고 법령이 분명해질 것입니다"라 하였다.

《자치통감》태강 원년(280)

게다가 사마염의 관대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서, 문벌들의 각종 범법행위에 대한 사마염의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이미 사마염의 재위 초기인 267년 1월부터 관전을 점탈했다는 죄목으로 함께 고발되었음에도 고관대작인 산도, 사마목, 무해는 그냥 방면되고 일개 현령인 유우만 목이 달아난 일이 있었다. 그 뒤에도 사마사의 인척이자 사마염의 최측근인 양수는 아무리 탈법적으로 재산을 모아도 사마염이 보호해준 덕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빽이 없는 게 죄인 시대.

이러한 문제점들은 결국 사마염의 집권 명분과 이념이 취약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정권의 존립 근거가 귀족의 지지에 의존하다 보니, 황제가 자신의 지지 기반인 귀족에게 감히 손찌검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시기의 귀족은 아래 서술되는 청담사상의 영향과 맞물려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대표적 사례로 황제가 왕개에게 내린 산호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때려 부순 석숭이나, 황제의 원림에 쳐들어가 오얏나무를 다 따먹고 나무까지 베어버린 왕제가 있다. 또한 왕제가 '사람 젖을 먹여서 키운 돼지 고기'를 대접하자 사마염은 몹시 불쾌해 했지만 내색도 못하고 자리를 피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사마염이 기껏 권위를 세운다고 선택한 방법이란 돈지랄하는 귀족보다 더 돈지랄하는 것이었다(...). 에라이

이러한 막장을 자정하려는 움직임이 없던 것은 아니었는데, 두예유의 등 일부 문관들이 구품관인법을 폐지하자고 주장하고 당대 사회의 풍조에 대해 비판을 제기했으나 사마염은 말로만 옳다꾸나 했지 실제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2.3. 미쳐 날뛰는 귀족들

이로써 모든 리미트가 해제된 상태에서 문벌 2세대들은 말 그대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당시 진나라는 온갖 사치와 향락이 난무하는 동양의 소돔과 고모라가 따로 없었다.

당장 사마염의 부마인 왕제부터가 상당히 정신줄을 놓았는데, 어마무지하게 비싼 낙양 한복판의 땅을 사다가 말을 키우는 목장으로 만들고 바닥에는 돈을 가득 깔아두었다. 또 밥을 먹을 때 모든 식기는 귀한 유리그릇을 사용하고 그 위에 사람 젖을 먹인 돼지고기를 담아 내왔다.[7] 세설신어에는 말 그대로 '사람 젖을 먹인 돼지'의 고기를 내왔다고 하고 있지만, 진서에는 '사람 젖으로 찐 고기'를 내왔다고 하고 있는데 일단 먹은[8] 것이든 먹은[9] 것이든 둘 다 먹은 것이니 이렇게 서술한다. 재상 하증은 날마다 1만 전이나 되는 산해진미를 차려놓고서도 젓가락을 댈 것이 없다고 반찬투정을 부렸고, 그 아들인 하소는 아버지보다 한술 더 떠서 날마다 2만 전씩 처먹었다.

위에서 말한 양수는 겨울에 술을 빚어 발효시키면서 사람들에게 번갈아가며 항아리를 품고 있게 시키고, 술을 데울 때에는 반드시 짐승 모양으로 빚은 숯을 사용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명한 일화는 양수와 어깨를 나란히하던 갑부인 왕개석숭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돈지랄 레이스를 벌인 것. 왕개가 엿기름으로 솥을 닦으면 석숭은 밀랍을 땔감으로 쓰고, 왕개가 명주로 40리에 장막을 치면 석숭은 비단으로 50리에 장막을 치고, 석숭이 산초로 집을 칠하면 왕개는 주사로 집을 칠했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산도와 왕융, 남조 전축분의 죽림칠현도

다만 사회가 이런 멍멍이판이 된 것은 400년 동안 윤리도덕이 주입되던 경향에 대한 반동이라는 측면도 있다. 자신의 진심을 억누르고 윤리도덕을 강조하다 보니 '그래서 이 사람의 진심이 뭔데?'라는 질문이 떠올랐고, 그 결과 형식적인 윤리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진심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바로 청담사상의 발생이었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정권 아래에서 청담사상의 '진심'이라는 테마는 귀족들이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해 윤리도덕을 짓밟는 자기합리화로 변질되었다. 대표적으로 왕융은 청담사상을 주도하던 죽림칠현의 일원이면서도 명성과 달리 조카의 결혼식 때 홑옷 한 벌만 선물로 주었다가 그마저도 나중에 다시 달라고 하는 등 줬다 뺏기 쪼잔한 모습을 드러냈다. 반대로 정권에 영합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줄줄이 목이 달아나고 결국 허무주의신비주의, 중2병 사조로 흘러가게 된다. 덧붙여 외모지상주의도 극심했다.

2.4. 쇠수저라도 사치가 하고싶어!

그나저나 그 많은 돈은 다 어디서 나왔을까? 사실 문벌들이 제 아무리 사치와 향락의 끝을 달리더라도 그만큼 경제가 활성화되었다면 그리 상관 없을지도 모른다.[10] 그렇다면 오히려 그렇게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의 사회 경제가 고도로 발달하고 있었다는 징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11] 예컨대 낙양지귀의 고사를 만든 좌사의 삼도부에서는 극도로 성대하고 화려한 서진 사회의 단면을 찾아볼 수 있...을 리가 있나.

서진시대의 이상기후 빈도

이 시기 중국은 소빙기가 의심되는 자연재해에 시달리고 있었다. 태양의 흑점 활동부터가 중국 역대 어느 왕조보다도 자주 관측되었으며, 특히 271년부터 5년간은 아예 해마다 일식이 일어났다. 농업도 이상기후로 몸살을 앓았다. 계절풍이 위축되면서 화북에는 가뭄이, 강남에는 홍수가 일어나는 일이 잦아졌다. 초여름에 서리가 내려 싹을 틔운 보리가 다 죽어버렸고, 한여름에 우박이 쏟아져 익어가는 곡식들을 망가뜨리기도 했다.[12]

이러한 상황 속에서 농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활로는 많지 않다. 사채를 쓰거나, 식객이 되거나. 여기에서의 식객이란 간단히 말해 중세 유럽에서의 농노를 생각하면 된다. 객 중에서도 고용인인 용객(傭客)이나 소작인인 전객(佃客)은 사회적으로 비천하게 취급받긴 해도 자신의 가계를 가지고 자기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분상으로 양인에 속하지만, 식객 즉 의식객(衣食客)은 주인에게 가계를 의존하여 의식을 제공받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노비에 가까운 상태였다. 이들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따라서 노동에 종사해야 되었고, 의식객에서 벗어나려면 그때까지의 부양비를 배상해야 되었다.[13]

결국 생업을 잃은 농민들은 개인의 비정상적인 권력과 부에 기생하는 존재가 되고, 얼마나 탈법을 용서받을 수 있는지에 따라 부와 권력의 자기확증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말해, 개인이 소유하는 노비와 사병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난 것이다. 반대로 노비와 사병들은 떠나봤자 영위할 만한 생업이 없기에 그 주인의 눈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진서 외척전에는 양수가 원리원칙 없이 마음대로 사람을 선발했지만, 부하들이 양수의 눈에 들기 위해서 목숨을 내던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회가 무너지고 군벌들이 일어나는 건 시간 문제였던 것.

돈을 모으는 방법 자체도 상당히 악질적이었다. 석숭은 형주자사로 지내면서 지나가는 사신이나 상인을 겁박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약탈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상인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양수는 국가 관청에까지 사채를 씌울 정도였으며, 오오 그거슨 시대를 앞서간 국채 왕융은 장원과 상업을 경영하던 거대 자본이었는데도 종자가 아까워서 씨에 구멍을 뚫어서 팔았다. 상황이 이 정도면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뇌물수수와 부정부패는 애교일 정도.[14]

분쟁은 돈이 아니면 이기지 못하고, 관직은 돈이 아니면 트이지 못하고, 원수는 돈이 아니면 풀지 못하고, 명성은 돈이 아니면 떨치지 못한다. 붉은 옷을 입고 요직을 담당한 낙양의 사족들이 나 가형(家兄)을 좋아하는 것이 모두 끝이 없어서, 나의 손을 잡고 시종 나를 안고 있으니, 무릇 지금 사람들은 오직 돈만 알 뿐이다.

《자치통감》 원강 9년(299), 노포의 전신론(錢神論)

이렇게 경제 기반이 붕괴되어가는 마당에 정권을 잡은 소수의 거대문벌에게 극단적으로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은 반대로 이러한 주류 카르텔에서 소외된 중소문벌들의 불만과 위기감이 축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장 팔왕의 난에서 막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손수이함, 장방이 모두 중앙의 문벌 사회에서 멸시받던 중소문벌 출신의 인물들이었다. 나도...나도 돈지랄 할 거야!

2.5. 황족의 지방 할거

황제는 위나라가 고립되었던 폐단을 경계하였으므로 종친을 크게 책봉하고 직임을 주었다. 또한 여러 왕들에게 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봉국 안에서 장리(長吏)를 선발하도록 명령하였다. 위장군 제왕 유 혼자만이 조널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모두 위에서 임명해줄 것을 청하였다.

《자치통감》 태시 원년(265)

더욱이 사마염은 또 다른 문제도 쌓아놓았다. 앞서 위나라는 후한의 혼란을 교훈삼아 황족, 외척, 환관을 강박적으로 배제하고 오로지 측근들을 위주로 국정을 운영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측근들이 언제나 서로를 견제하고 균형이 유지되도록 안배하지 않으면 아차하는 순간 황권이 그대로 삼켜질 수 있었고, 실제로 이러한 가능성은 사마의 일파가 측근 세력 전체를 발아래 두는 순간 그대로 실현되었다.

위나라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사마염은 즉위 직후부터 황족의 권력을 비약적으로 강화시켰다. 책봉된 황족에게 휘하 관속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을 주었고, 277년부터는 최대 5천에 달하는 군대도 공식적으로 허용해 주었다. 280년에 삼국을 통일하고 나서는 지방의 행정권(자사)과 군정권(도독)을 분리시키고 그렇게 분리된 군정권까지 황족에게 나눠주었으니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즉 황통을 지닌 사람이 인사권과 군사권까지 가지고 지방에 할거한 형국이었다. 서진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89년 말 종실왕 배치도 및 주요 종실왕

그래도 사마염 생전에는 중앙의 거대문벌이 일방적으로 지방을 압도하고 있었고, 양호, 두예, 장화, 호분과 같은 측근들이 지방의 군정권을 분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황족을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마염이 죽고 뒤이어 즉위한 것이 백치 황제 사마충이었고, 이를 틈타 실권을 장악한 외척 세력이 멍청하게도 황족을 중앙에서 쫓아내는 정치적 도구로 군정권을 사용하면서 지방의 군정권은 오롯이 황족들이 나눠먹게 되었다. 여기에 불만과 위기감에 싸인 중소문벌들이 유리천장을 넘어서기 위한 방법으로 독자적 인사권을 지닌 황족들에게 붙으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 모든 개막장인 상황에서도 중앙 정부의 정책과 군대만 건전하게 유지되고 있다면 나라가 쪼개지던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황족 가운데 하나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해도 문제와 대안이 불분명한 이상 다른 황족이 한꺼번에 여기에 동조하기는 쉽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중앙 정부의 토벌군으로 각개격파까지도 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놈의 지긋지긋한 외척.

이에 대해 조선의 학자 홍대용은 신랄한 촌평을 남겼다.

진주(晉主, 사마염)는 조씨(曹氏)가 고립되던 것을 거울삼아 종실(宗室)을 다량으로 봉(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서로 해치어서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다가 요행히 보존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종실을 봉해야 하겠는가? 봉하지 않아야 하겠는가? 말하자면, 봉하여도 또한 가할 것이고, 봉하지 않아도 또한 가할 것이다. 위(魏) 나라가 멸망하게 됨은 고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진 나라가 혼란하게 됨은 종실에 연유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덕을 잃지 않으면 종실을 봉하지 않아도 고립되지 않을 것이고, 봉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호위(護衛)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까닭은 생각하지 않고, 구구하게 봉하고 봉하지 않는 것 만을 용심(用心)한다면 나는 동쪽에서 멸망하고 서쪽에서 생겨남을 볼 것이다.

홍대용 《담헌서》

3. 전개

3.1. 폭주하는 외척

12월에 황후의 아버지인 진군장군 양준을 거기장군으로 삼고, 임진후로 책봉하였다. 상서 저략과 곽혁이 양준은 그릇이 작아 국가의 중책을 맡기에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황제가 따르지 않았다. 양준이 교만해져 남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우쭐거리니, 호분이 양준에게 말하였다.

"경은 딸을 믿고 더욱 거만하게 구는구려! 앞 시대의 일들을 두루 살펴보면, 천자의 집안과 혼사를 맺고 집안이 멸망하지 않은 일이 없었소. 단지 이르거나 늦거나 했을 따름이오."

《자치통감》 함녕 2년(276)

사마염은 황제로 즉위하기 전 양병의 딸 양염(楊艶)과 혼인하였고, 즉위한 뒤 양염이 병사하자 양준의 딸 양지(楊芷)를 황후로 간택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양염과 양지가 사촌자매 사이이니, 2연속으로 황후를 배출한 양준 일가가 외척으로서 강력한 권력을 누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홍농 양씨 자체도 당시 낙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명문 집안이었다. 후한 안제 때 이래로 양진, 양병, 양사, 양표 4대가 모두 재상의 반열에 올랐고, 양표의 아들이 계륵의 고사로 잘 알려진 양수다. 다만 양병과 양준 일가는 이와 별도로 양진으로부터 양봉, 양부, 양중으로 갈라진 방계였지만 그럼에도 진서 외척전에서 계통을 구분하지 않고 '사세삼공(四世三公)'이라 ? 일컬어질 만큼 그 후광 자체는 업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 시대의 조위는 외척에 대해 거의 노이로제 수준의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당장 조조부터가 전처 정씨와 이혼한 뒤 배후 세력이 없는 기녀 출신의 무선황후 변씨를 정실로 삼았으며, 변씨의 동생 변병에게도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다. 조비는 명문가 출신의 문소황후 진씨를 황후로 삼았지만 이내 자결시키고, 뒤이은 문덕황후 곽여왕의 가족들에게도 권력은 주지 않았다. 조예까지도 명도황후 모씨를 죽이고 명원황후 곽씨로 황후를 바꾸었지만, 정작 조예가 아들을 두지 못하고 바로 이듬해 죽으면서 위나라의 후계구도는 막장으로...

이 때문인지 유교적 가족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사마염으로서는 외척을 통제할 명분도 의지도 없었다.

더욱이 사마염이 삼국을 통일한 뒤 정무에 마음을 두지 않고 주색만을 탐하자, 온갖 청탁과 뇌물이 양준, 양요, 양제 삼형제에게로 밀려들었다.[15] 그러자 이전까지만 해도 숙청을 두려워하며 면벌부까지 미리 받아놓았던 양준 삼형제는 점차 긴장이 느슨해지며 막후의 제왕으로 군림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삼양(三楊)이라 불렀다.

289년 말, 방탕하게 놀아나던 사마염이 드디어 골병이 들면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양준은 이를 기회로 자신을 위협할 만한 세력을 중앙에서 쳐내기 시작했는데, 황실의 가장 큰어른인 사마량[16]에게 예주의 군사 지휘를 맡겨 허창으로 보내고 다른 황족도 각기 왕으로 책봉해 전국에 흩어놓았다. 다시 이듬해에는 위관의 아들 위선이 술주정이 심하다며 헐뜯어서 그에게 시집간 번창공주의 혼인을 파기하도록 여론을 몰아 위관이 관직을 내놓고 버로우를 타게 만들었다.

이때 골골거리다 잠시 정신을 차린 사마염이 주위가 죄다 양준의 사람들로 바뀐 것을 보고 놀라서 사마량에게 떠나지 말고 양준과 함께 섭정하라는 유조를 내렸지만, 중간에 양준이 유조를 빌려가서 배째라며 안 돌려줬다. 뭐 이런 미친 전개가! 이내 다시 사마염의 병세가 악화되자, 이에 황후 양지가 사마염의 형식적 동의를 얻어 양준에게 섭정을 맡기는 조서를 내렸다. 결국 사마염은 "여남왕은 아직 안 왔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혼수상태에 빠져 290년 4월 기유일에 붕어하였다.

조위~서진시대의 낙양성 평면도

이로써 사마염의 뒤를 이어 사마충이 즉위하자, 양준은 사마염의 빈전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황궁의 정전인 태극전에 들어앉아 살면서 그야말로 황제나 다름없이 행동했다. 사마염의 후궁들이 왔는데 태극전 밖으로 나와보지도 않는다거나, 근위대인 호분을 100명이나 거느리고 다니는 등. 진서 직관지에 따르면 재상급이 개인적으로 거느릴 수 있는 호분도 20명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사마량은 양준이 두려워 황궁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대사마문 밖에서 통곡하며 국상이라도 치른 다음에 떠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양준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마량이 내란을 꾸민다고 아득바득 몰아세워서 기어이 그가 허창으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이제 양준은 제국의 행정집행권에서 생사여탈권까지 모든 기능을 망라하는 막대한 권력을 거머쥐었다. 양씨의 집권 추세가 계속 이어졌더라면 머지않아 사마진은 양씨에게 찬탈당하였을 것이라는 예상도 있을 정도. 하지만 사람들에게 외척데자뷔를 일으키는 양준의 집권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이에 양준은 관직과 작위를 뿌려서라도 유력 문벌들의 환심을 사려 했지만 근저에서 불만이 비등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양준이 쥔 불안한 권력을 매의 눈으로 노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사마충의 황후 가남풍이었다.

3.2. 황후의 유혹

3.2.1. Season 1: 며느리의 역습

사실 가남풍이 처음부터 양준과 정적은 아니었다. 애당초 가남풍이 태자비가 되었던 것부터가 무원왕후 양염(양준의 조카딸)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양염의 사후 새로 들어온 무도황후 양지(양준의 딸)는 가남풍의 포악한 행동을 엄격히 훈계하기 시작했고, 이에 가남풍이 불만을 품으면서 마침내 둘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시월드가 열리고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한편 이 즈음 양준도 양준대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전도유망한 황족을 중앙에서 밀어낼 정치적 수단으로 각지의 군정권을 황족에게 분배했지만, 이렇게 방출당한 황족이 오히려 지방의 군정권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초은왕이 지휘하는 형주군과 회남충장왕이 지휘하는 양주군은 과거 손오가 있던 지역으로서 외지인데다 장강을 끼고 있으며 독자적인 성격까지 강하여 자칫하다가는 제2의 오초칠국의 난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충분히 안고 있었다.

그러던 중 291년 초에 갑자기 두 사람이 낙양에 올라오고 싶다는 요청을 하자, 양준은 이를 얼씨구나 받아들였지만...이 모든 것은 가남풍의 설계였다. 초은왕과 회남충장왕이 낙양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가남풍은 한밤중에 기습적으로 양준을 역적으로 선포했고, 초은왕은 동안공과 함께 황궁을 봉쇄하고 양준 일파를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에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낀 양준은 자신이 머물고 있던 무고 남쪽의 저택[17]에서 측근들과 대책을 의논했다. 이때 그의 비서실장 격인 태부주부 주진이 황궁 동쪽의 운룡문에 불을 질러 적들을 위압하고, 사건을 조사하여 주모자를 색출한 뒤, 동궁에서 군대를 모아 황태자를 받들고 만춘문으로 들어가자고 헌책했지만, 여태 상황파악이 안 된 양준은 아래와 같은 소심한 이유로 이 방법을 기각해버렸다.

"운룡문은 위나라 명제가 만든 것이고, 그 노력과 비용이 아주 많이 든 것인데 어찌 그것에 불을 지른단 말이오!"

《자치통감》 양준 열전

결국 궁중을 장악한 사마위 등의 군대는 양준의 집을 포위했다. 이 시기 귀족들의 저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요새나 마찬가지여서 양준은 그 안에 틀어박혀서 항전하려 들었지만, 사마위와 사마요는 누각 위로 궁노수들을 올려보내 저택 안으로 화살을 퍼부었고, 결국 화공으로 저택이 함락되자 양준은 마구간으로 달아나다가 일개 군사에게 죽임당했다. 이때는 앞서 사마염에게 받아놓았던 면벌부도 무용지물이었다. 덧붙여서 이때 문앙도 원한을 품고 있던 제갈탄의 외손자인 동안공 사마요에게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삼국시대의 저택 모양 부장품

양준이 이 모양이 되었으니, 그 딸인 태후 양지도 궁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양준이 저택에서 포위당해 있을 때 양지는 '태부(양준)을 구해주는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는 편지를 궁 밖으로 쏘아보냈는데 이것을 빌미로 며느리 가남풍은 사사건건 자신에게 간섭하던 시어머니 양지를 이제는 역적이 된 양준과 한패로 몰아서 폐위시키고 낙양성 외곽의 금용성에 가두었다. 조예: 그러라고 만든 금용성이 아닐텐데

이에 양지는 양준의 아내, 즉 자신의 어머니인 방씨만은 살려달라고 가남풍에게 데꿀멍거리며 매달렸지만 가남풍은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결국 방씨는 역적의 아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상심한 양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단식으로 목숨을 끊었다.[18]

3.2.2. Season 2: 뒤통수, 또 뒤통수

이렇게 가남풍은 사마위 및 사마요를 움직여 궁중에서 외척 세력을 흔적도 없이 쓸어버렸다. 따라서 이 정변의 가장 큰 공로자는 단연 사마위와 사마요였지만, 가남풍은 의도적으로 사마위를 배제하고 사마량과 위관을 다시 중용했다. 이에 사마위가 불만을 품자 가남풍은 다시 사마위에게 밀사를 보내 황제의 명이니 사마량과 위관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안그래도 부글부글 끓고 있던 초왕 사마위는 한달음에 사마량과 위관을 제거해 버린다. 사마위는 스스로 공을 세웠다고 떠들고 다녔고 특히 각각 황실의 큰어른, 명망 높은 노신으로서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신임을 받고 있던 두 사람이었기 때문에 범인을 색출하자는 여론이 높아졌다. 결국 가남풍은 여론을 반영하고 토사구팽으로 사마위를 처형했다.

간단히 말해 가남풍이 초왕 사마위를 이용해 정적들을 전부 제거하고 초왕 사마위까지 제거했다. 당연히 권력은 가남풍 손으로… 계획대로. 사실 사마유 독살사건도 가남풍이 한 짓이라는 설도 있다.

3.2.3. Season 3: 이번에는 의붓아들 살해

이후 가남풍이 전횡을 저지르자 각지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마씨들의 불만은 날로 높아진다. 여기서 가남풍이 실책을 저지르는데 혜제 사마충의 아들 황태자였던 사마휼은 가남풍의 소생이 아닌데다 똑똑해서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될까 봐 지나치게 견제하여 죽이려 했다. 사마위는 일단 지은 죄가 있었으므로 문제가 안됐지만 가남풍이 다른 사마씨도 죽이려 든다는 것이 알려지자 지방 각지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마씨들이 분개하였는데 이 중 조왕 사마륜[19]이 가장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사마륜은 다른 꿍꿍이가 있었기 때문에 정작 사마휼을 구하려 들지는 않았고 결국 사마휼은 가남풍이 보낸 손려가 건넨 독약을 거절했다가 결국 약 찧는 절구에 맞아 죽게 된다.

3.3. 팔왕의 난 전개

조왕 사마륜은 드디어 속셈을 드러내어 제왕 사마경과 함께 낙양으로 진군해서 가남풍과 그 일족 및 장화를 멸족하고 권력을 잡는다. 그런데 혜제 사마충을 뒤로 몰아내고 사마휼의 아들 사마장을 죽였다. 게다가 사마장의 형 사마반과 동생 사마상은 요절하여 사마충과 사마휼의 대는 확실히 끊긴다. 조왕 사마륜은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지만 제왕 사마경 - 장사왕 사마예 - 성도왕 사마영 - 하간왕 사마옹이 연합하여 축출당하고 살해당한다.

권력을 잡은 제왕 사마경은 사마륜과 똑같이 자기가 다 해먹으려다가 사마륜이 죽은 것처럼 사마예, 사마영, 사마옹의 손에 살해된다.

그리고 장사왕 사마예는 애가 멍청한건지 욕심이 큰 건지(...) 앞에서 둘이나 그렇게 당한 걸 보고서 똑같이 해먹으려다가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의 손에 살해당한다.[20] 또한 이 시기부터 지방 주둔군 외에도 국경 주둔군이나 이민족까지 동원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다. 따라서 이 때부터 사실상 서진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이미 옛 촉한의 땅인 익주에서 가씨의 일파 조흠, 그리고 저족의 유민 출신 이특성한을 세워 분리 독립하였으며 병주에선 사마영에게 벗어난 흉노의 유연한나라를 세워 자립하였고 유주에서는 모용씨를 위시한 선비족이 대거 침투하고 있었다. 또한 형주에서 유민들이 몰려들어 장창의 난, 양주에선 진민의 난을 일으킨다. 이것은 사마염이 천하통일 후 지방 주둔군을 감축하여 지방의 통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한 사태가 심화된 현상이었으며, 결국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진의 멸망의 시작이 된다. 참고로 이 시점에 이르면 이제 18명에 달하던 사마염의 아들들[21]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사마영, 사마치, 사마안 고작 셋 뿐이었다(...). 물론 고대 특유의 높은 영아 사망률 탓에 아들들 중 7명은 8세 이전에 요절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나머지는 다 서로 죽이는 바람에 죽은 거니(...).

중앙에서 이 난리가 일어나고 있으니까 예장왕 사마치와 동해왕 사마월이 군대를 이끌고 성도왕 사마영의 본거지인 업성으로 진군한다. 비록 첫 거사는 실패하고 사마월은 봉국으로 패퇴했지만, 동해왕파인 유주자사 왕준(王浚)과 병주자사 사마등(司馬騰)이 탁발부를 비롯한 여러 선비족을 거느리고 사마월을 밀어주면서 다시 대립구조가 서게 되었다.

  •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 + 장방 ← 흉노족
  • 동해왕 사마월, 예장왕 사마치 + 유주자사 왕준, 병주자사 사마등 ← 선비족

이에 성도왕 사마영은 유연의 흉노족을 끌어들여 자신의 본거지인 업을 지키지만, 정작 사마영 자신이 지레 겁먹고 낙양으로 튀어버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막장으로 치닫는 중원의 형편을 생생히 목격한 유연은 업을 빠져나온 뒤 흉노족을 끌어모아 독립을 선언하고 한(漢)나라를 세워 병주자사 사마등과 대립하면서 영가의 난의 씨앗이 뿌려진다.

혜제도 무사하지는 못해서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었고, 다른 신하들이 모조리 도망가고 혜소 한 사람만이 그를 지키다가 죽임을 당했다. 이 때 피가 혜제의 옷에 튀었는데, 이후 아랫사람들이 핏자국을 닦아내려 하자 혜제는 '충신의 피이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혜제를 끼고 낙양의 장방에게로 달아났던 성도왕 사마영은 다시 장안으로 옮겨갔다가 장방이 살해되고 본진 하북으로 도망치려다 하간왕 사마옹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사마옹은 예장왕 사마치에게 황태제의 자리를 양보하고 사마월을 자신과 동격으로 올려놓는 등 타협의 제스처를 보이지만, 사마치와 사마월은 장안을 함락한 뒤 낙양으로 환도하고 사마옹은 죽여버렸다. 이와 동시에 혜제가 사망하면서 둘은 합의를 통해 예장왕 사마치가 황제에 위에 올라 회제가 되고, 동해왕 사마월은 권력을 잡고 회제 사마치를 바지사장으로 삼고 돕기로 하여 일단 6년에 걸친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은 일단락된다. 여기까지가 팔왕의 난이다. 여기서 진정되었더라면 그나마 황실의 내분으로 수습할뻔하였으나...

3.4. 하지만 영가의 난

하지만 팔왕의 난은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혼란기의 서막에 불과한 이벤트였다.

이미 내전을 틈타 자립한 이민족이 이미 진나라 내부에 일대 세력을 이룬 상태였던 것이다.막장극을 보고는 "진나라 놈들 별거 아니구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이민족들이 사방에서 발호하기 시작했고, 흉노를 규합한 유연의 아들 유총이 남하하면서 그 부하 석륵, 왕미, 유요 등이 화북 각지를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서진의 지방 통치는 와해되었기에 실권자인 동해왕 사마월이 중요 지점에 자신의 친인척을 파견해서 거점을 장악하게 하는 등 고군분투했지만 사마월은 암중 집권자로써 궁궐에 들어가 회제의 측근을 살해하는 등 전횡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 와중에 회제가 연주자사 구희에게 밀조를 보내 통수를 치려하자 동해왕 사마월은 분사했다.

사마월의 뒤를 이어 대권을 잡은 태위 왕연은 낙양에서 탈출하기 위해 사마월의 장례를 위해 동해로 간다는 핑계로 낙양을 떠났다. 한마디로 말해 황제를 버린 셈이다. 그런데 피난민들과 낙양 주둔군이 대거 그의 도망에 합류하여 무려 10만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미 낙양 주변은 흉노의 놀이터가 된지 오래라 해당 지역을 담당하는 석륵이 왕연 일행을 중간에 기습했고 이들은 사로잡히거나 모두 죽었다. 사로잡힌 왕연 등도 결국 밤에 일부러 무너뜨린 담장에 깔려 죽었다. 문제는 그나마 없는 낙양 주둔군이 엄청나게 괴멸되었으며 지방 주둔군은 사마염의 감축과 여태까지 팔왕의 난으로 인한 소모로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지방을 장악한 군벌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도 자기 코가 석자인 경우가 많은데다가 굳이 수도인 낙양을 구원할 이유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군대 없는 국가가 돼버린 꼴이다.

이 어처구니 없는 팀킬로 낙양은 유총이 보낸 유요, 석륵, 왕미, 호연안 등의 흉노족 군대의 공격으로 무너졌고 동탁이 파괴한지 100여년 만에 또 다시 파괴되어 폐허가 된다. 사마치는 체포되어 유총에게 끌려가서 최후를 맞았으며, 뒤를 이은 민제 사마업도 사마치와 같은 운명을 맞으면서 결국 서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 흉노의 침입을 '영가의 난'이라 한다.

이 후 화북 지방은 여러 민족이 난립하는 혼란기가 도래하고 장강 이남은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을 거치면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진 황족이자 낭야왕 사마예[22]가 과거 손오 지역을 근거로 하여 여명을 잇게 되는데 역사는 이를 동진이라고 칭한다.시즌 2

4. 사건 정리

4.1. 타임라인

  • 291년
양준 VS 사마위 + 가남풍사마량 + 위관 VS 사마위 + 가남풍사마위 VS 가남풍
  • 300년
가남풍 VS 사마륜 + 사마경사마륜 VS 사마윤[23]
  • 301년
사마륜 VS 사마경 + 사마예 + 사마영 + 사마옹
  • 302년
사마경 VS 사마예 + 사마영 + 사마옹
  • 304년
사마예 VS 사마영 + 사마옹
  • 306년
사마영 + 사마옹 VS 사마치 + 사마월

그러니까, 291년 이래로 대략 한 놈이 나댐 → 나머지가 합동으로 조짐 → 그 가운데 한 놈이 나댐 → 나머지가 합동으로 조짐 → 그 가운데 한 놈이 나댐 → 나머지가 합동으로 조짐루프물 테크를 탄 걸 알 수 있다(...).[24]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역사의 교훈.

4.2. 등장인물

양진(震)

양병(秉)

양사(賜)

양표(彪)

양수(修)[25]

양효(嚻)

양봉(奉)

양부(敷)

양중(衆)

양병(炳)

양염(艶)

양준(駿)

양지(芷)

양요(珧)

양제(濟)

8왕의 봉토. 하지만 성도왕이나 하간왕처럼 분봉지와 실제 병력을 가지고 지배한 거점이 다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큰 의미는 없다. 책봉된다고 반드시 부임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 팔왕의 병력은 작위가 아니라 무관직에서 비롯하였기 때문이다. 하간왕이지만 진서장군으로 관중의 병력을 가진 하간왕이 그런 예. # 출처

일련의 사건을 주도한 종실왕과 그 활약상은 다음과 같다.

  • 여남문성왕(汝南文成王) 사마량(司馬亮)
    • 선제 사마의의 5남, 무제 사마염의 숙부.
    • 황실의 가장 큰 어른으로 양준이 죽은 뒤 자동으로 정권을 인수받았다가 사마위에게 살해되었다. 사실 이 사람은 난을 일으킨 게 아니라 모살당한 것이므로 팔왕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 초은왕(楚隱王) 사마위(司馬瑋)
    • 무제 사마염의 5남.
    • 여남왕을 주살했지만 그 자신도 가남풍에게 주살당했다.
  •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 선제 사마의의 9남, 무제 사마염의 숙부.
    • 가남풍을 주살했지만 결국 황제에 올랐다가 사마경 등에게 주살당했다.
  • 회남군왕(淮南郡王) 사마윤(司馬允)
    • 무제 사마염의 9남.
    • 거점은 회남. 집권하고 전횡을 부린 사마륜에게 항거했다가 패사하였다. 사마윤은 소위 팔왕에는 들질 않는다.
  • 제무민왕(齊武閔王) 사마경(司馬冏)
    • 제헌왕 사마유의 아들, 무제 사마염의 조카.
    • 거점은 허창(許昌)으로 조왕을 주살했다.
  • 장사려왕(長沙厲王) 사마예(司馬乂)
    • 무제 사마염의 16남.
    • 거점은 낙양(洛陽)으로 조왕과 제왕을 주살했다.
  •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 무제 사마염의 6남.
    • 거점은 업(鄴). 조왕, 제왕, 장사왕을 순서대로 주살했다.
  •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 사마방의 3남 안평헌왕 사마부의 손자, 태원열왕 사마괴의 장남, 무제 사마염의 6촌.
    • 거점은 장안(長安). 역시 조왕, 제왕, 장사왕을 순서대로 주살했다.
  • 동해효헌왕(東海孝獻王) 사마월(司馬越)
    • 사마방의 4남 사마욱의 손자, 고밀문헌왕 사마태의 차남, 무제 사마염의 6촌.
    • 성도왕과 하간왕을 주살했다.
  • 팔왕에 들어간 여남왕 사마량보다는 예장왕 사마치가 팔왕에 들어가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평이 있다. 단지 사마치가 사마월의 대리로 즉 3대 황제 회제가 되었으므로 황제의 예후상 팔왕에서 빠진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역사서에서 지목하는 여남왕 사마량은 단지 초왕 사마위에게 살해당했을 뿐이지만 사마치는 사마월과 함께 팔왕의 난에 가담하여 성도왕과 하간왕을 주살한 인물이다. 사마치가 황제로 즉위하여 공식적으로는 팔왕의 하나로 분류하지 않는다고 하나 그의 행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일부 역사서에서도 그가 팔왕의 난을 일으킨 인물 중 하나임을 명시하고 있다.

아래는 팔왕의 난과 관련된 주요 인물의 간단한 계보도. 추존 황제 및 황제는 굵게 쓰고 8왕은 작위를 빨갛게 썼다.

고조 선황제

세종 경황제

제헌왕

제무민왕

태조 문황제

세조 무황제

효혜황제

민회태자

진헌왕

효민황제[26]

초은왕

장사려왕

회남충장왕

성도왕

오효왕

[27]

효회황제[28]

사마유[29]

여남문성왕

낭야무왕

낭야공왕

중종 원황제[30]

조왕

안평헌왕

태원열왕

하간왕

동무대후

고밀문헌왕

동해효헌왕

사마염을 중심으로 불과 7촌 이내 사람들끼리,[31] 더 편하게 생각하면 사마의의 부친인 사마방의 손자~현손자끼리서로 죽고 죽였으니, 게다가 이 난리가 일반인들끼리도 아닌 국가 지배계층 사이에서, 1~2년 동안도 아니고 장장 15년간이나 계속됐으니 나라가 폭삭 망하는 건 당연지사.[32]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는 것을 엄청난 스케일로 정말 완벽히 실천한 셈이다.

5. 기타 창작물에서

웹툰 삼국전투기의 전투외전 8-2편에서 최훈은 팔왕의 난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 다루었다. 삼국전투기는 삼국시대 정사를 다룬 웹툰인데, 과연 최훈이 280년 삼국시대 종결 후의 이야기인 8왕의 난까지 연재할지 귀추가 주목되었지만, 삼국 통일편에서 이야기가 끝난 것으로 처리되어 5호 16국이 도래되었다고 이야기가 끝났다.


  1. [1] 왕으로 봉해진 황족들.
  2. [2] 중앙에 대한 지방의 대대적인 역습으로 사실상 나라가 결딴났다는 점에서 팔왕의 난은 후한말 18로 제후들의 동탁 토벌전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3. [3] 물론 우려먹기일 뿐이지 이게 무슨 명군급으로 대단한 치세적 업적이라고 하면 곤란하다. 괜히 망탁조의라고 까는게 아니다.
  4. [4] 물론 아주 없는건 아니라서 일단 촉나라를 멸망시킨게 위나라때긴 하지만 이때는 위 멸망 2년전 일로 사실상 진나라 체제와 다를게 없었다. 게다가 그거마저도 등애 공을 가로챈거나 다름없었다.
  5. [5] 한자 획이 조금 다르긴 하다.
  6. [6] 選曹郞. 관리 선발 담당이다.
  7. [7] 한술 더 떠서 이것을 사마염에게 대접하기까지 했다. 사마염은 불쾌해 했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8. [8] 음식 따위를 입을 통하여 배 속에 들여보내다.
  9. [9] 바르는 물질이 배어들거나 고루 퍼지다.
  10. [10] 실제로(?) 제환공과 관이오는 사치를 즐겼는데 그럼에도 별로 까이진 않는다. 그 이유는 제환공 시기가 제나라가 짱짱맨이던 시기라서 그렇다(...) 검소함을 중시한 공자도 관이오에 대해서 "그 양반 없었으면 우린 오랑캐와 뭐가 달랐겠나?" 라고 평가했을 정도
  11. [11] 예를 들자면 만일 옛날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 시대의 우리를 보면 높은 확률로 사치한다고 여길 가능성이 높다. 옛날 사람들중 대다수는 지금 사람들보다 더 많이 먹는건 밥 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쌀밥은 별로 먹지도 못했다. 삼시세끼를 제대로 챙겨먹는다는 개념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할 수 있는건 이전보다 경제가 더 좋아졌기 때문이다.
  12. [12] 실제로 진서 4권, 혜제편을 살펴보면, 우박이나 지진, 서리, 홍수, 가뭄, 기근, 전염병, 태풍과 같은 자연 재해에 관한 기록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13. [13] 이공범, 『위진남북조사』, 2003, 234~235쪽 참조.
  14. [14] 그나마 뇌물의 경우엔 후진국에서는 오히려 경제가 돌아가는 원동력이라도 되는 경우도 있지 이쪽은 노답 그 자체다.
  15. [15] 이는 진서 양준 열전의 "帝自太康以後 天下無事 不復留心萬機 惟耽酒色 始寵後黨 請謁公行"란 표현 그대로다.
  16. [16] 사마의의 3남이자 사마소의 바로 아래 동생. 사마염의 숙부 가운데 가장 연장자.
  17. [17] 공교롭게도 42년 전에 고평릉 사변으로 사마의에게 숙청된 조상의 집이었다.
  18. [18] 안타까운 사실은 시어머니 양지가 겉으로는 며느리 가남풍을 엄히 훈계했지만, 뒤로는 그녀의 안하무인으로 구는 행동을 감싸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
  19. [19] 사마의의 아들이자 사마소의 이복동생으로 백부인 소생이다.
  20. [20] 사마예를 불에 태워 끔살시켰는데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사마예의 죽음을 일컬어 피를 보지 않은 유일한 사마씨라고 개드립을 친다.그냥 죽여
  21. [21] 딸들까지 합하면 25명의 자식을 두었다.
  22. [22] 낭야왕 사마주의 손자
  23. [23] 사실 팔왕의 난 가운데 유일한 방어 성공 케이스지만...그렇기 때문에 묻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다른 왕을 죽인 적이 없는 사마량은 위관과 함께 정권을 장악한 적이 있지만 사마윤은 정권을 장악한 적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패자는 말이 없다
  24. [24] 여담으로 이 전개는 이전의 다른 진나라의 멸망 테크와 비슷한데, 이 두 진나라는 모두 晉이라는 한자를 쓴다. 춘추오패의 진나라는 최후의 생존자인 삼진이 사이좋게 진나라를 셋으로 쪼개 먹는 걸로 끝냈지만.
  25. [25] 우리가 잘 아는 계륵의 주인공 맞다.
  26. [26] 제4대 황제.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무너지고 서진이 망하자 장안에서 등극하지만, 역시 얼마 못가 망한다. 이로써 서진은 완전히 망했다.
  27. [27] 백부 진헌왕의 양자가 됨.
  28. [28] 제3대 황제. 8왕의 난을 수습하고 황제로 즉위하지만, 얼마 못 가서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무너지면서 망한다..
  29. [29] 백부 세종 경황제의 양자가 됨.
  30. [30] 제5대 황제. 낙양이 무너지면서 회제가 잡혀 붕어하고, 장안이 무너지면서 민제까지 잡혀 붕어하자, 건업에서 새로이 황제로 즉위한다. 이것이 동진의 시작.
  31. [31] 7촌이 멀어보이는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손자와 당신 사촌의 아들이 정확히 7촌간이다. 현대 핵가족 사회에서 7촌은 아주 멀게 느껴지지만 친족관계가 밀접했던 고대 사회에서는 매우 가까운 관계이다. 60년대만 해도 7촌은 가까운 관계였다. 애당초 부계혈족 8촌까지는 유복친이라 하여 상복을 입을만큼 가까운 관계로 규정되었으니 고대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32. [32] 이후 정난의 변이라고 명나라에서 4년간 내전을 벌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사직도 온전히 보존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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