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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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전쟁

전개

탕산회의

편견회의

호남 사건

"제군들도 알다시피 제국주의자들은 아시아 또는 중국에서 언제라도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정세이다. 그들끼리의 이해관계는 항상 충돌하고 있다. 특히 일본과 영국, 미국 및 일본과 소련과의 사이에서 충돌하는 바가 두드러지고 있다. 충돌의 초점은 반드시 중국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곳도 역시 중국일 것이다. 만일 중국이 지금 노력분투하지 않고 일치단결하지 않으면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 그대로 중국 망국의 날이 된다. 국내에 전혀 준비가 없으면 그때는 이미 독립의 능력이 없어 남의 지도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국가는 멸망한다. 우리는 지금 제국주의의 충돌 지점과 시기를 상세히 관찰하고 그 시기가 오기 전에, 즉 국제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국방상 확고한 방비를 완료하고 다른 견제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국가는 멸망하지 않을 뿐더러 그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을 완성할 수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기는 우리나라의 흥망의 관건이다. 그러면 그 시기는 언제 도래하는가? 이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멀어도 15년 이상이나 훗날이 될 수는 없다. 가깝게는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다. 그들은 목하 준비도 없고 기회도 없기 때문에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이 시간적 여유는 잘 이용하여 충분히 준비하고 기회의 도래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1929년 7월 9일 베이핑 육군대학에서 실시한 장제스의 강연 <중국의 전도와 군인의 책임>

1. 개요
2. 배경
2.1. 국방개혁의 필요성
3. 전개
3.1. 오중전회
3.1.1. 정치분회 폐지
3.1.2. 정리군사안의 통과
3.2. 국민정부의 조직
3.3. 편견회의
3.3.1. 준비와 개막
3.3.2. 구성과 조직
3.3.3. 전개와 결말
3.4. 상무위원회의 활동
4. 결말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1. 개요

국민혁명 성공 이후 1928년부터 수백만에 달하는 중국의 군대를 감축하여 정예화하는 한편 남는 비용으로 경제개발과 교육투자를 하기 위해 열렸던 회의. 표면적인 합의를 도출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결국 군벌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반장전쟁중원대전이라는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내전으로 번지게 된다.

2. 배경

1928년 시점의 중화민국의 세력도[1]

2.1. 국방개혁의 필요성

"우리의 현재 군비는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 총액 3억원에 달한다. 실제는 다시 각 지방의 군대가 징수하는 것도 있고 이 밖에 어느 정도 액수가 사용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3억원만 해도 이미 어쩔 도리가 없는 액수이다. 군비가 전 국가수입의 80% 이상을 차지하면 그 국가는 반드시 파산한다. 만일 90%에 달하면 멸망한 것과 같다. 현재 우리 군비의 총액은 이미 80%를 초과하고 있다. 우리 국가는 건설을 할 수 없고 경제적 기초도 전혀 없다. 민생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이와 같은 국가는 완전히 멸망한 것과 같다. 우리는 지금 국가지출의 최대 부문인 군비를 해결해야만 국가경제를 안정시킬 수가 있다. 경제가 안정된 후 정치와 사회도 비로소 궤도에 오르는 것이다."

1928년 12월, 장제스 <북벌 성공 후의 가장 긴요한 공작>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 끝에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연합군은 베이징과 톈진을 점령했고 안국군 대원수 장쭤린이 만주로 퇴각하다 황고둔 사건으로 사망하면서 북벌은 국민당의 승리로 사실상 끝난 상태였다..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도 고민 끝에 국민정부 휘하에 복속되길 선택하면서 표면적인 중국 통일이 완성되었다.

북벌 직후 국민당 산하에는 84개군, 300여개 사단, 160~200만 대군이 있었는데 장제스 휘하에 50만, 펑위샹 휘하에 42만, 옌시산 휘하에 30만, 리쭝런 휘하에 30만, 광동파 리지천 휘하에 15만, 사천파와 운남파가 20만, 동북군 휘하가 16만 정도 되었다. 장제스는 개별적인 군벌들과는 세력상 우세에 있었으나 여러 군벌들이 힘을 합칠 경우에는 손쉽게 열세에 놓일 터였다. 당장 펑위샹과 옌시산만 힘을 합쳐도 장제스를 압도했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군벌들 산하의 병력을 감축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장제스의 의도는 북벌 와중인 1928년 5월에 처음으로 표면화되었다. 북벌군이 석가장을 점령하고 베이징으로 전진하던 중 장제스는 절강성에 공장을 건설하여 5만명의 전직군인을 노동자로 흡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군대 감축의 계획을 드러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지나치게 많은 숫자의 군대를 줄여 병력을 정예화하고 경제개발과 교육에 투자해야 한다는 경제적인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2]

3. 전개

3.1. 오중전회

3.1.1. 정치분회 폐지

탕산회의 이후 장제스는 장쉐량을 국민정부에 합류시키기 위해 한동안 베이징에 남았다가 8월 1일로 예정된 오중전회 참석을 위해 7월 25일 베이징을 떠나 정저우에서 펑위샹과 잠시 회담한 후 난징으로 돌아왔다. 8월 1일 옌시산을 제외한 모든 집단군 영수들도 차례로 난징에 도착했다. 옌시산은 리쭝런 등의 독촉을 받고 타이위안을 떠나 난징으로 가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타이위안으로 돌아왔다. 결국 중앙집행위원들의 참석이 지지부진하여 8월 1일로 예정되었던 오중전회는 8월 8일에야 개최될 수 있었다. 이는 사중전회에서 출석이 정지된 천궁보 등의 출석 자격을 놓고 논란이 벌어져 광동파 중앙집행위원들이 참석을 유보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천궁보의 불참 선언과[3] 장제스의 설득으로 광동파 위원들이 참석하면서 오중전회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중전회 위원들의 불참을 주장하던 원로들이 대거 상하이로 떠나면서 오중전회를 보이콧 하는 등 여전히 난항이 이어졌다. 장제스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직접 상하이로 가서 이들의 참석을 종용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오중전회 개최 이후에 최대의 문제로 부상한 것은 정치분회 문제였다. 광동 측 중앙집행위원들이 당의 기초를 새로 확립하자는 취지 하에 중앙정치회의의 기능을 한정하며 정치분회를 폐지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광동 측은 장제스가 중앙정치회의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 각 집단군 사령관들이 정치분회를 바탕으로 각 지역의 정치를 장악하는 것에 모두 불만을 품고 둘을 동시에 근절하자고 나선 것이었다.[4] 이에 원로들은 성정부와 중앙정부 사이에 정치분회가 있다면서 헌정 실시 이전까진 정치분회가 필요하다고 반대했다. 펑위샹은 정치분회는 점진적으로 철폐하는 것이 좋다면서 자기에겐 관계없는 일이니 자신의 카이펑 정치분회를 먼저 철폐하라고 짐짓 여유를 부렸으나 이는 전략적인 허세에 불과했다. 리쭝런리지천은 격렬히 반대하며 원로들과 거취를 같이 하였다. 리쭝런은 국민대회 개최를 주장하며 아예 상하이로 가버렸고 리지천은 정치분회의 존폐 문제가 이미 사중전회에서 결정된 문제로 삼전대회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장제스는 표면적으론 중립을 지키며 중재에 나섰지만 폐지하는 것이 낫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사중전회에서 정치분회 존립을 결정하였는데 이를 번복하고 폐지를 주장하기가 그렇다는 문제가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각 집단군의 반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국민당 원로들의 입장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장제스는 광동 중앙집행위원들과 함께 정치분회 폐지를 주장하는 쪽이 됨으로 원로들 및 집단군 사령관들과 마찰을 빚었고[5] 중앙정치회의에 관해서도 후한민, 쑨커 등이 오히려 중앙정치회의 기능 강화를 주장하면서 치열한 대립이 이어졌다. 결국 8월 14일의 5차 회의에서 정치회의 위원을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결정하며 정치회의조례 3,4조를 합병수정하여 정치회의 결의안이 중앙집행위원회를 거치게 하고 장제스, 왕징웨이, 탄옌카이, 후한민,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바이충시, 허잉친 등 45명을 정치회의 위원으로 선정한다는 것으로 일단락했다. 그리고 정치분회에 관해선 1928년 말까지 모두 철폐하며 정치분회의 결의를 해당 최고지방정부로 넘겨 집행하며 정치분회 명의로 인사권을 발동하거나 명령을 발포하는 것을 금지했다. 결과적으로 장제스의 의도가 대부분 관철된 것이다.

3.1.2. 정리군사안의 통과

한편 탕산회의에서 결정되지 못한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해 난징에서 군사선후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 때문에 집단군의 영수들이 난징에 초대된 바가 있었으나 옌시산은 칭병하여 오지 않았고 리쭝런은 오중전회에 불만을 품고 상하이로 가버려서 결과적으로 난징에서는 장제스와 개막식 및 정치군사조 심사회의를 감독하러 온 펑위샹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선후회의가 제대로 전개되기란 무리가 있었다. 당시 오중전회에 제시된 군사적 제안은 총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탕산회의의 합의안인 오총사령[6]군사정리안이었고 또 하나는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명의의 군사정리방안이었다. 이중 오총사령군사정리안의 경우에는 대부분 탕산회의의 합의안을 그대로 옮기고 있으나 1장 최고통수권과 중앙군사기관의 경우에는 장제스의 군사정리안을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1장에서도 최고통수권과 중앙군사기관에 대해 갑안과 을안, 두가지의 제안을 하고 있었다. 갑안은 다음과 같다.

  • 군통수권은 국민정부에 직속하며 고급지휘관을 역임한 국민정부위원이 국방회의를 구성, 군통수와 국방상의 주요 문제를 결정케 한다.
  • 국방회의와 별개로 각군 총지휘, 군장 등으로 구성된 군사위원회를 두어 군사업무에 관한 자문 건의를 하며 국방회의 주석이 군사위원회 주석을 겸한다.
  • 국민정부 산하에 군정부를 두어 군정 업무를 맡게 하는 한편 군정부 사하에 참모청, 육군국, 해군국, 항공국, 훈련청 등을 둔다.

을안은 다음과 같았다.

  • 군통수권과 국방회의, 군사위원회 구성은 갑안과 같다.
  • 군정부 아래에 해군청, 항공청만 두고 참모본부와 훈련부를 독립시켜 군정부와 동등한 부서로 둔다.

갑안과 을안의 차이에는 군령권, 군정권을 구분하여 군사권의 독점을 막고 상호견제한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분석된다. 장제스는 갑안을, 펑위샹, 옌시산 등은 을안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의 군사정리방안은 장제스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물건으로 중앙군사계통과 조직, 군권통일방안, 군대편견방안, 편견관병의 처리방안 등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집위안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 최고통수권은 국민정부에 속하게 한다.
  • 국민정부 주석, 군사위원회 주석 및 위원, 기타 유관부처의 부장들이 국방회의를 두어 국방의 기본계획을 토론한다.
  • 군통수와 군정의 시행기구로 5~7인의 위원으로 구성되는 군사위원회를 둔다.
  • 국민정부의 모든 군사상 명령은 군사위원회 주석의 명의로 시행하며 군사위원회 아래에 사무처리를 위해 참모부, 육군부, 해군부, 항공부, 훈령총감부 등을 설치한다.
  • 군사분야의 학식과 덕망 있는 자들을 모아 자문 건의 기구인 군사참의원을 군사위원회에 설치한다.

이 중집위안은 오총사령안 중에서 갑안과 유사한 점이 있었으며 다만 각군 기득권 영수들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인정한 타협적 성격이 있었다. 오총사령안과 중집위안은 8월 8일 정치군사조 심사회의의 심의를 거쳐 논의에 들어갔고 장제스와 허잉친 명의로 군사정리안이 제안되어 군사위원회를 군정부로 바꾸고 편견을 위해 편견위를 설치하도록 했던 것을 취소하여 군정부에서 논의하도록 하는 것 등을 수정하여 통과시켰고 8월 14일 제5차 전체회의에서 위의 안들과 별개의 수정안인 정리군사안이 통과되었다. 정리군사안은 다음과 같았다.

1. 군정과 군령은 반드시 통일되어야 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구시대의 지역 할거의 관습 제도를 일소한다. 중앙군사조직으로는 국민정부 아래에 국방회의를 두고 그와는 별도로 참모부, 훈련총감부, 군사참의회를 국민정부 직속으로 두며 행정원 아래에 군정부를 두고 그 아래 육군성, 해군성, 공병성, 항공성 등의 행정부서를 둔다.

2. 전국의 군대를 최단 시일 내에 편견하되 군비에산이 전체예산의 50%를 초과하지 않도록 하고 군대의 경리도 통일을 기한다.

3. 군사교육을 통일하여 중앙에서 관할하도록 하고 각 지역의 군대가 마음대로 군사교육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4. 재병이 군대정비와 재정 정비에 가장 중요하므로 재병화공을 성실하게 실시해야 한다.

5. 국방에 있어 해공군의 건설과 군항, 요새의 건설이 모두 중요하므로 국방계획에서 해공군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 정리군사안은 오총사령안 을안과 흡사한 것으로 군령기관과 군정기관의 구분이 담겨 있어 결과적으로 군령권과 군정권의 통합을 통한 군사권 장악을 시도했던 장제스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장제스는 오중전회의 폐회식 이후 상하이로 가서 국민정부와 펑위샹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신병 치료를 핑계대며 9월 중순까지 난징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는 국민당 원로들의 포섭과 오원제 및 중앙군사조직 인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제스가 상하이로 떠나자 리지천도 상하이를 거쳐 항저우로 떠나 버렸고 장제스의 복귀를 촉구하던 펑위샹도 장제스가 돌아오지 않자 8월 24일 허난으로 돌아갔다. 펑위샹은 떠나기 전인 8월 22일 장제스, 리쭝런, 리지천 등에게 허난의 일이 바빠서 갈 뿐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해명했지만 핑계로 보인다. 펑위샹은 8월 23일 일기에서 이제 회의에서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음이 오해를 피하는 길이라고 썼다. 결국 편견의 구체적 방안을 위한 군사선후회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3.2. 국민정부의 조직

9월 2일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당내에 심각한 분규는 없지만 분규의 해결은 삼대전회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다소 모순적인 담화를 발표하면서 혁명의 성공이 내부의 단결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장제스의 원로 포섭과 오완제 체제 실시가 난항을 겪고 있다는 증거였고 이러한 난항은 유럽 외유를 떠났던 후한민이 복귀하면서 해결되었다. 담화 다음날인 9월 3일 상하이로 돌아온 후한민은 정치분회 철폐 등에서 장제스를 지원하고 있었고 8월 28일 광동파가 그에게 광저우정분회를 이끌어달라는 요청을 해도 분치합작에 반대함으로 이를 거절하고 장제스 지원에 나섰다. 따라서 원로파 포섭과 군사영수들과의 회동이 다시 순조롭게 진행, 9월 7일 장제스가 고향인 시커우를 방문하기 위해 상하이를 떠날 즈음에 행정원, 입법원, 사법원, 고시원, 감찰원으로 구성된 오원제와 인선의 윤곽이 정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언론에 국민정부의 인선에 대한 추정 기사가 여럿 실리고 있었고 9월 10일 후한민과 장제스가 펑위샹과 옌시산에게 난징으로 올 것을 촉구하며 보낸 전보에도 인선안이 담겨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펑위샹은 10월 13일 난징으로 왔으나 옌시산은 여러 독촉에도 불구하고 12월 중순까지 난징으로 오지 않았다.

9월 18일 장제스는 후한민, 리쭝런, 리지천, 쑹쯔원과 원로파들을 거느리고 난징으로 돌아왔다. 9월 20일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168차 회의는 후한민과 쑨커를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추대하고 국민정부조직법 심의를 위한 심의회를 조직하여 심의에 들어갔다. 또한 난징 교외의 탕산에서 다시 협상에 들어가 10월 3일 중화민국국민정부조직법 등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정작 이 국민정부조직법에는 군사적인 내용은 없었다. 10월 8일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회의에선 원로파의 제의로 장제스, 탄옌카이, 후한민, 펑위샹, 쑨커, 천리푸, 허잉친, 리쭝런, 옌시산, 린썬, 장쉐량 등 15인을 국민정부위원으로 선출하고 국민정부 주석에 장제스, 행정원장에 탄옌카이, 입법원장에 후한민 등을 임명했고 18일 회의에서 행정원 부원장에 펑위샹, 입법원 부원장에 린썬, 고시원 부원장에 쑨커, 감찰원 부원장 천리푸 등을 임명, 리지천을 참모총장에 허잉친을 훈련총감에 리쭝런을 군사참의원 주석으로, 옌시산을 내정부장으로, 펑위샹을 군정부장으로 임명했다. 적어도 모양새로는 권력 배분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선에는 여러 마찰이 이어졌는데 당장 옌시산만 해도 내정부장 취임을 거부하고 측근을 보내 대신 취임하게 했으며 리쭝런의 경우에는 자신이 펑위샹의 군정부장 취임을 불만스럽게 여긴단 보도에 장황하게 해명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각군 영수들의 권력 분배와 난징 국민정부 참여를 이끌어내면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10월 21일부터 중앙군사조직의 개편에 따른 실무기구 개편작업이 10월 21일 군사위원회 회의에서 시작되어 11월 2일 끝났다. 회의 결과 참모청과 총사령부 참모처가 통합되어 참모부로 개편되고 군사위원회 정훈부를 훈련총감부에 귀속시키며 군사위원회와 군정청 휘하의 경리, 군무, 군의, 항공 각 부설르 통합 개조하여 군정부 아래에 육군부, 경리부, 항공부 등의 기구로 만들고 해군총사령부를 군벙부 해군부로 개조하며 기존 군사위원회, 총사령부는 철폐하기로 했다.

3.3. 편견회의

3.3.1. 준비와 개막

"개회에 즈음하여 나는 일본의 유신 역사 중에서 조슈, 사쓰마, 도사, 히젠의 네 웅번이 당시 스스로 처리한 길, 그들의 군제개혁의 경과와 그들의 개혁정신을 상세히 말하여 우리 군사 동지의 참고로 삼고자 한다. 일본은 우리 중국에 대하여 침략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말할 때마다 분개를 참을 수 없다. 특히 제남 사건 발생 후에는 온 나라가 일본을 원수로 삼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분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일본이 왜 중국을 침략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

그 이유는 일본이 유신 초에 건전하고 온고한 통일정부를 조직하고 현대적인 국가의 완성에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하겠는가. 첫째는 통일이요, 둘째는 집중이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조슈, 사쓰마, 도사, 히젠 등 제번의 중견은 연합군을 조직하여 악전고투 끝에 드디어 막부를 넘어뜨렸다. 이것은 우리 각 집단군이 일치 협력하여 극악한 북양파를 타도한 일과 흡사하다. 막부 타도 성공 후 일본의 역사의 선례를 보면 조슈, 사쓰마 두 번이 도쿠가와를 대신하여 흥륭해야 할 것이었으나 죠슈 번사 기도 다카요시, 번주 모리 다카치카, 사쓰마 번사 오쿠보 도시미치,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 등은 대의를 분별하고 결연히 대정을 봉환하여 중앙에 귀명했다. 막부 타도가 성취되고 폐번이 이루어지고 전국통일이 완성되었어도 일본조정에는 여전히 한 병졸도 없었다. 번의 장병은 모두 번주와 군신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유신의 제걸은 이때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했다. 번병을 국군으로 개편한 것이다. 첫째로 각 변의 병력을 제한하고 둘째로 수도방위에 친병을 두었다. 셋째로 번의 경계를 제거한 후 혼합, 개편하고 진대를 나누어 설치하여 집중훈련을 실시했다. 이리하여 차츰 국군의 기초를 확립하고 반동 세력을 진압하여 전국통일이 명실상부하게 갖추어지고 나서 중앙정부는 비로소 일체의 정치개선에 착수했다. 이 같은 실적은 우리가 충분히 모방할 만하다.

(...)

일본의 군인은 60년 전에 봉건제도를 타파했다. 중국의 군인은 반대로 봉건사상을 팽배시키고 병을 가지고 있는 자는 모두 사병을 늘리고 지반을 확장하려 했다. 한 성의 지반을 얻으면 다시 수개 성에서 할거하려 하고 수개 성을 차지하면 이번에는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중앙을 장악하려고 했다. 중앙을 장악한 뒤에는 자기 일파의 세력을 확장하고 타파에 대해서는 무력으로써 배제하려고 했다. 이것은 북양군벌의 노조 위안스카이를 선례로 하여 돤치루이, 우페이푸가 의발을 이어받아 실행해온 일이다. 따라서 정변이 있을 때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세력권 분배에 열을 올리는 일이었다. 중화민국을 사유재산으로 하여 분할한 것이다. 일본의 조슈, 사쓰마, 도사, 히젠의 제번은 막부 타도 후, 그 공로에 눌러앉이 않았고 다시 막부를 설치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반대로 선조 이래의 봉토를 정부에 봉환했던 것이다. 그들은 새 지식을 추구하고 시류에 잘 부응하고 완전히 국가와 일체가 되어 공존공영을 꾀했다. 우리는 일본의 웅번을 거울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1929년 1월 1일, 장제스

이후 무산되어버린 군사선후회의를 위해 국민정부 인선이 마무리된 10월 말에서 11월 초부터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옌시산에게 1929년 초에 열릴 편견회의 참석을 독려했으며 11월 4일 장제스, 펑위샹, 허잉친이 옌시산과 장쉐량에게 난징에 올 것을 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이후 11월 중순, 국민정부는 군사회의를 12월 초에 소집하기로 공식 결정했다. 이때 국민정부는 군사회의에서 각집단군의 취소, 각집단 별 군대 현황 보고, 전국군사비 확정과 예산의 실행 방안, 개편 후 군대 배치 문제 등을 논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옌시산과 리쭝런의 불참과 준비작업의 미비가 겹치므로 연말 개최로 연기되었다. 이후 12월 12일 옌시산이 드디어 난징에 도착하였으나 리지천과 리쭝런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고 회의를 위한 사전 조정 기간에도 시간이 소요되어 회의는 1929년 1월 1일에야 시작될 수 있었다.

편견회의의 개막식에서 채택된 편견위원회개회선언은 오중전회에서 통과된 정리군사안에 근거, 군제, 군대수, 군비, 군구 확정 등 조례에서 규정한 직무 수행을 위해 4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이는 다음과 같다.

1.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기울지 않고 국가의 실제적인 군사적 수요와 국가재정의 부담 능력을 고려하여 공평한 편견의 기준을 정해야 한다.

2. 각 집단군에서는 군대수와 군장비에 대하여 성실하게 공개하고 이것을 표준으로 하여 엄격한 점검과 검사를 시행하여야 한다.

3. 재병운동을 구호로 내걸고 국가재정을 낭비하거나 개인적 축재를 해서는 안된다.

4. 군벌들의 구습을 일소하여 중도에서 흐지부지하게 되지 않도록 철저한 편견을 해야 한다.

이날 장제스도 담화를 발표, 편견회의가 탕산회의에서 영수들이 합의서명하여 제안한 군사정리안을 오중전회가 받아들여 다시 영수들에게 시행하도록 위탁한 것이니 군사정리, 군대편견, 편견군대의 안직 등에 있어 공동협의하여 일인독재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각 집단군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발언으로 보인다.

3.3.2. 구성과 조직

1928년 12월 3일 성립된 편견위원주비회에서 기초하여, 19일 중앙정치회의에서 통과되고 21일 국민정부가 공포한 군사편견위원회정열에 따르면 편견회의의 구성과 조직은 다음과 같다.

  • 제3조: 편견회의는 각집단군총사령, 해군총사령, 참모총장, 군정부장, 훈련총감, 군사참의원 원장, 행정원장, 내정부장, 재정부장, 교통부장,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추천하는 중집위원 5~7명으로 구성하며 위원장은 육해공군총사령이 겸임한다.
  • 제1집단군 총사령, 국민정부 주석, 육해공총사령 장제스, 제2집단군총사령, 군정부장 펑위샹, 제3집단군총사령 옌시산, 제4집단군총사령, 군사참의원 원장 리쭝런, 제8로군 총지휘, 참모총장 리지천, 훈련총감 허잉친, 룽윈, 바이충시, 행정원장 탄예카이, 재정부장 쑹쯔원, 철도부장 쑨커 등 23인을 편견위원으로 임명한다. 그 외에 각부 주석, 부주석, 국민정부 유관부처 부장, 편견회의에서 지명한 자문위원 등 표결권이 없는 열석 위원이 26명으로 총 참석자근 49명이다.
  • 편견위원회에서 다룰 사항으로 제2조에 의거하여 1. 총 병력수, 편제, 군사예산, 2. 군구의 획분, 3. 군비, 4. 편견 기준, 5. 현존부대의 접수 절차, 6. 군관의 임면, 배치 방안, 7. 편견을 위한 군대의 점검, 교열 방안, 7, 편견관병의 정착 방안, 9, 편견 경비에 대한 결정 등이 규정되었다.

3.3.3. 전개와 결말

"군벌의 악습은 이미 습성이 되어 있다. 이것을 제거하기는 어렵다. 나는 지금 내외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그것을 생각하면 실로 고민이 크다."

1929년 1월 5일 장제스의 일기.

1월 1일 개막식 이후 1월 5일 1차 대회를 시작으로 1월 26일 폐막까지 5차에 걸친 대회가 열렸다. 1월 5일 1차 대회에서 허잉친이 주비회의 경과 보고 후 회의규칙을 통과시키고 이에 따라 국방, 편제, 경리 등 5개 위원회를 두고 각각 리지천,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 허잉친을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심사위원회를 구성했다. 1월 8일의 2차 회의에선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이 도출합 합의에 따라 각 집단군 총사령들이 각 집단군 소속 병력, 군비 상황을 직접 보고하고 편견회의 비서처를 구성했다. 그리고 편견회조례에 상무위원회를 두는 조항으로 첨가하기로 결의했다. 11월 3일의 3차 대회에서는 쑹쯔원이 <군비총수의 확정과 재정통일을 실행하기 위한 방안제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는데 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 중앙에 속하는 세수에 관해서는 반드시 중앙에 귀속시킨다.

2. 재정분야의 인사와 행정을 지방에서 간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3. 현재 각군의 경비로 지급되고 있는 각 철로의 수입도 모두 재정부로 귀속시킨다.

4. 각성의 주둔군대(성방군)의 경비도 모두 군비에 포함시켜 각성에서 중앙의 세수를 사용하는 구실이 되어선 안된다.

5. 군비총액이 확정된 이후에는 군비를 관리하는 방안과 각군에 군비를 지급하는 방안을 편견회의에서 정하여 각 군사기관들이 모두 따를 수 있도록 만든다.

17일의 4차 대회는 3차 대회에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17개 조문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 전국 군대 총수는 보병 65개 사단, 기병 8개 여단, 포병 16개 단, 공병 6개 단 등 총 80만명으로 하되 각 편견구와 중앙 직할의 편류부대가 11개 사단을 넘지 않도록 한다.

2. 군비는 전국총예산의 45% 이내로 하여 매년 1억 9200만원을 넘지 않도록 한다.

3. 현재의 4개 집단군의 관할 지역을 4개 편견구로 하고 동삼성 지역을 제5편견구, 사천 신강 운남 귀주 지역을 제6편견구로 나누되 나머지 중앙에 속하는 각군과 해군은 중앙에서 직접 편견한다.

4. 각 편견구를 설치하는대로 현재의 국민혁명군총사령부, 각집단군 총사령부 등 전투편제는 모두 취소하고 편견 기간 내에는 지휘관의 임명이나 군대의 파견은 편견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5. 각 편견구 소속 부대의 군비는 편견위에 보고한 후 재정부와 편견회의 경리부와 협의하여 힌지의 재원에서 지급하되 편견구가 성립된 이후 각사단의 군비는 편견회의 경리부와 각 편견구 경리분처에서 관리한다.

6. 점검을 위해 중앙에서 파견하는 점검조와 해당지역 집단군의 군관들로 함께 구성하는 점검조에서 점검과 검열을 시행한다.

7. 각 편견구의 편견업무를 관장할 기관은 위원제로 운영하되 편견구 소속 부대의 고급 군관 중에서 2~5명을 선발하고 국민정부에서 파견하는 1인, 중앙당부에서 파견하는 1인과 함께 구성한다.

8. 편견관병에 대한 정착 방법으로 각성에서 경찰, 보안대를 편성하거나 기타 여러가지 방안을 강구한다.

이에 관하여 원래 60~80개 사단 70~80만명의 규모는 위에서 보듯이 65개 사단 80만으로 확정되었고 원래 초안에 거론된 중앙편견구는 취소되었다. 그리고 편견 기준은 탕산회의에서 그렇듯이 문제가 되어 펑위샹은 전공, 무기가 있는 부대는 재편하고 없는 부대만 해산하자고 하여 1,2 집간군을 12개 사단으로 개편하고 3,4집단군을 8개 사단으로 편견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옌시산은 규모에 따른 일률적 편견을 주장하며 1,2집단군을 10개 사단으로, 3,4집단군을 8개 사단으로 편견하며 나머지는 6~8개 사단으로 개편하고 기타 군대는 중앙에 맡기자고 하며 펑위샹과 대립했다. 장제스는 조정자 역할을 맡으면서 옌시산을 지지했고 본회의에 상정 결과 옌시산의 안이 다수의 지지를 받아 일부 수정 끝에 통과되었다.

22일 5차 대회에서 편견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리지천, 장쉐량, 허잉친, 탄옌카이, 쑹쯔원 등 11인이 선출되었고 집행부의 주석으로 리지천, 리쭝런, 펑위샹, 옌시산 4인을 선출했다. 그리고 난징, 카이펑, 타이위안[7], 한커우, 선양에 1~5 편견구를 설치했고 주석과 부주석을 포함 각각 9인 위원이 운영하게 했다. 그리고 25일에 열린 6차 대회에서 육군군관학교조직요강안을 통과시켜 육군군관학교의 운영을 위원제로 실생하기로 했고 그 위원으로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지천, 허잉친 등을 선정했다. 1월 26일 페막식에서 미해결된 문제들은 상무위원회에서 처리한다는 것과 2월 2일까지 상무위원회를 정식으로 발족시킨다는 것을 정하였다.

장제스는 폐회식에서 편견회의에서 결정한 것을 성실하게 실행하여 군벌들의 악습을 없애고 혁명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회의 중 불만을 품은 펑위샹이 1월 8일 이후 수일간 불참하는 등 편견의 실행에 난관이 있음이 점쳐지는 상황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3.4. 상무위원회의 활동

편견회의 폐막 이후 합의된 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상무위원회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1월 29일 리지천이 상하이로 떠나고 2월 4일 펑위샹이 타이위안으로 돌아가버리는 등 집단군 영수들이 차례로 난징을 떠나버렸고 2월 2일로 계획되었던 상무위원회 발족은 미루어져 2월 5일에야 1차 회의가 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상무위원회 소속 위원은 장제스, 리쭝런, 허잉친, 탄엔카이, 쑹쯔원 5인 만이 남아 있었다. 이후 2월 8일 2차 회의에선 장제스, 허잉친, 리쭝런 3인이, 2월 15일의 3차 회의에는 허잉친, 탄옌카이 2인만이 출석하고 나머지는 각부 부주석이나 주석 대리들을 비롯한 열석자들만 가득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상무위원회의 활동은 시작부터 크게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1차 회의에선 편견구 성립을 3월 16일로 정하고 3월 15일 이전까지 기존 국민혁명군총사령부, 각 집단군총사령부, 해군총사령부를 철폐하고 각기 병기공장은 4월 1일부터 조업을 중단하기로 결의하였으며 3차 회의에서 주석과 부주석 인선이 완료되었다. 하지만 4집단군 총지휘관인 바이충시가 2월 7일 돌연히 사퇴하고[8] 옌시산과 난징 국민정부의 갈등도 깊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펑위샹이 2월 18일 난징에 전보를 보내 난징의 제2집단군 장교들과 직원들을 모조리 카이펑으로 철수시키고 삼전대회 불참을 표명하며 3월 12일 군정부장 사직 통전을 발표하면서 가장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여기에 호남 사건이 발생함으로 광서파와 중앙의 갈등도 폭발했다.

4. 결말

이후 중국 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허잉친은 제1집단군이 13개 사단, 24만명, 2집단군이 12개 사단 22만명, 3집단군이 12개 사단 20만명, 4집단군이 13개 사단 20만명으로 감축되었다고 했고 장제스가 삼전대회군사보고에서 1집단군이 20만 5천명, 2집단군이 26만 9천명, 3집단군이 22만 6500명, 제4집단군이 13개 사단으로 편견되었다고 했으나 아무런 점검을 거치지 않은 서류상의 보고일 뿐으로 신빙성이 결여된 보고였다. 1929년 8월 편견회의 보고에는 5개 주요 편견구의 군대수가 최소 160만여명이며 여기에 6편견구인 사천, 운남, 귀주를 합쳐 200만이 넘는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3차 전국대표대회는 국군의 최고 통수권이 완전히 국민정부에 속한다고 선포했지만 이는 오로지 말로만 그러할 뿐이었다.

여기에 펑위샹, 장제스의 갈등이 호남사건과 산동접수를 놓고 격화되면서 중국의 불안정이 심화되었고 결국 반장전쟁이라는 초대형 내전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편견회의의 결론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군벌들의 비협조와 불참, 반발 속에 실질적인 편견작업은 행해지지 못하였고 1929년 10월 15일의 36차 상무회의 이후로 오랫동안 편견회의가 열리지도 못하였다. 겨우 열리게 된 37차 회의에서 편견회의의 대폭 감축이 결정되었고 1929년 12월 15일에 열린 38차 상무회의는 편견회의의 해체를 공식 결정했다.

5. 참고문헌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서문당 편집실.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蔣介石의 '第1次 下野'와 復職, 김영신, 중국학보 44권, 한국중국학회.
  • 北伐完成 직후 蔣介石의 中央軍體制 確立 努力과 編遣會議, 배경한, 동양사학연구 48권, 동양사학회.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1. [1] 약간 오류가 있는데, 장쉐량이 관내진출을 한 것은 1930년의 일로 이때는 옌시산이 평진 지역을 지배하고 있을 때이다.
  2. [2] 서문당 중국현대사에 따르면 당시 중국의 수입이 4억 5천만 원인데 이중 외채 상환에 1억원, 군비에 3억원을 쓰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3. [3] 천궁보는 이것이 자신이 2년 동안 정치에 불참하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4. [4] 광동파는 이러한 맥락에서 군구제 실시도 반대했다.
  5. [5] 결국은 정치분회 폐지파가 다수파였다.
  6. [6]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리지천.
  7. [7] 후에 베이핑으로 변경되었다.
  8. [8] 장제스가 그의 사퇴를 만류하는 편지 내용을 볼때 군비 지급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장제스는 그에게 군비 문제에 관해 쑹쯔원에게 간곡히 말해두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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