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전쟁

스페인어: La Guerra de las Malvinas, Conflicto del Atlántico Sur

영어: Falklands War, Falklands Conflict, Falklands Crisis, South Atlantic War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전운이 감돌다
3.2. 아르헨티나의 선제 공격, 그리고 침공
3.3. 영국의 반응
3.5. 양국의 전략 차이
3.6. 빙하 작전
3.7. 블랙 벅 작전
3.8. 원자력 잠수함 컨커러의 아르헨티나 순양함 격침
3.9. 아르헨티나의 반격 - 셰필드 쇼크
3.10. 영국의 상륙전
3.11. 엑조세의 마지막 발악
4. 영국의 승리
5. 결과
5.1. 포클랜드 전쟁 당시 프랑스 관련 루머와 반박
5.1.1. 관련 문서
6. 대중매체에서
7. 기타
8. 명칭 문제

1. 개요

[1]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영국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발생한 지 3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도 미사일 시대로 대표되는 현대 해전, 공중전의 교과서적 사례로 평가된다.

2. 배경

아르헨티나에 1976년 쿠데타로 세워진 군사정권은 오일 쇼크로 인한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자본과 외채를 대규모로 도입했다.[2] 하지만 1980년 금리 인상으로 이자율이 급상승하고, 기업 채무를 국가에서 갚도록 하는 정책을 펴면서 재정난은 극심해졌다. 이에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재정지출을 대폭 줄이는 정책을 도입하였으나, 외채는 더더욱 불어났고 사회 복지 정책의 실종으로 빈부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졌다. 심각하게 악화된 경제 상황 때문에 국민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1978년 월드컵을 개최하고 해당 대회에서 온갖 무리수를 두어 자국 팀을 우승시킨 것 등이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이로도 부족해 군부에서 전쟁으로 내부적 불만을 무마하고 단결을 꾀하는 안이 대두되었다. 포클랜드 제도의 영국군은 소수[3]여서 기습으로 손쉽게 제압이 가능하다는 점, 영국 해군의 마지막 정규 항공모함아크로열이 퇴역하여 영국이 유사시 장거리 항공작전을 하기 어려워졌다는 점, 무엇보다 영국이 몇 해 전에 IMF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경제력이 나빠진 점 등이 개전 이유로서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 추측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작전 개시 전 포클랜도 제도는 본국으로 통하는 항공편도 없었고, 의료 서비스조차 본국이 아닌 아르헨티나에 의존해야 했다.[4]

3. 전개

3.1. 전운이 감돌다

1982년 3월 아르헨티나의 고철 수집상들이 단순한 고철 수집을 명분으로 포클랜드 제도로 들어왔다. 문제는 이들이 마땅한 해상편이 없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 해군 수송함에 타고 아르헨티나 국기를 올린 채 당시 포클랜드 제도의 일부였던 사우스조지아 섬에 도착했다.[5] 이들은 영국 정부로부터 방치된 포경 공장의 해체권을 얻었다고 주장했지만, 입국 절차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불법 상륙으로 취급되었다. 거기에 아르헨티나 국기를 게양한 상황에서 상륙한 것을 영국의 남극관측대원이 발견하고 이에 항의하고 본국으로 알리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했다.[6] 국방TV의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좀 더 자세하게 나오는데 고철상들에게 항의하러 간 기지 대원들은 의외로 순순히 사과를 받고 술도 얻어먹고 돌아왔는데 섬이라는 특성상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고 '감히 우리 땅에 깃발을 꽂아?'라고 빡친 강경한 주민들이 아르헨티나의 민간 시설을 공격하고 건물벽에다 "대영제국 만세", "까불면 코피 터질 줄 알아라!" 같은 낙서를 하고 떠났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과 아르헨티나군은 각각 수십여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이들이 대치한 것이 최초의 충돌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해군참모총장이던 해군 중장 호르헤 아나야(Jorge Isaac Anaya) 제독을 중심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개전 시점을 8~9월 정도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빠른 전개에 당황했다. 8~9월로 준비하던 이유는 아르헨티나는 엑조세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는 쉬페르 에탕다르를 비롯한 주력 무기의 도입이 완료되는데 비해 영국은 퇴역시킬 예정이던 군함들이 실제로 폐기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겨울이라서 대형함정이 퇴역한 영국 입장에서는 브리튼 섬에서 겨울 바람으로 거칠어진 남대서양을 넘어오는 데 애로사항이 있어 영국이 반격하는 데 훨씬 불리해질 것이라는 나름대로 전략적인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3~4월에 경제난으로 아르헨티나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다급해진 군부 정권이 국내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침공을 서둘렀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관련 다큐

3.2. 아르헨티나의 선제 공격, 그리고 침공

4월 2일아르헨티나 해병대특수부대 소속인 지상군 4,000명이 해군의 지원으로 포클랜드 제도를 기습 침공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현장의 영국군은 고작 영국 해병대 코만도 100여명으로 미미한 충돌이 있었으나 차이가 워낙 커서 이내 항복했다.[7] 이때 포로로 잡힌 해병들의 매우 굴욕적인 사진이[8] 영국인들의 여론에 불을 질렀다. 포클랜드의 총독 렉스 헌트 경은 예복을 차려입고 영국군에게는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지시를 내리고 아르헨티나 사령관에게는 영국 땅을 무단으로 침입하고 있으니 즉각 퇴거할 것을 요구했으나 아르헨티나 군대는 헌트 경을 체포하여 우루과이로 추방했다. 헌트 경은 포클랜드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총독으로 부임했다.

아르헨티나는 무력으로 강경하게 실효점유를 시작하면 영국이 그 살림살이에 엄청난 재정적 소모를 감수하고 지구 반대편의 포클랜드를 수복하러 오기보다는 협상에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십년 전에 일본이 실패한 그 전략을 따라한다 국제사회의 생각도 비슷해서 영국이 외교적인 항의 정도만 하고 말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3.3. 영국의 반응

다만 아르헨티나의 높으신 분들이 고려하지 않은 건 바로 누가 영국을 다스리고 있었냐는 것이다. 철의 여인이라 불릴 만큼 강경한 성향을 가진 마가렛 대처 총리는 즉시 탈환작전을 군에 명령했다. 아무리 쇠퇴하는 영국이라도 더 이상 해외 영토가 잠식되고 대외 영향력이 침해당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국민 여론까지 끓어오르면서 영국은 순식간에 전쟁 분위기에 휩싸였다. 실제로 경제난과 내적 혼란이라는 위기 상황에 영토 손실까지 더해지면 국민 정서와 국가 안정성은 안드로메다로 갈 것이 뻔했다. 특히 외교적으로 지중해의 해군 요충지인 지브롤터같이 아직 많은 영국령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비슷한 무력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선례가 될 것이 명백했으므로[9] 영국 정부 입장에서는 무조건 강경대응하는 것이 당연했다.

거기다 포클랜드 섬이 가치 또한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포클랜드의 지리적 위치는 남극의 전진 기지인 동시에, 파나마 운하가 차단될 경우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대체 항로의 가치를 지녔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중국 산동 반도에 배치되어 있던 독일 동양함대가 본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태평양을 횡단하여 칠레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를 격파하자 영국은 순양전함 2척을 포클랜드로 급파했고 결국 포클랜드 해전에서 독일 함대를 격파했다. 여기에 1970년대 제기된 포클랜드 인근의 석유 자원 매장 가능성은 덤. 독도처럼 섬 자체는 별볼일 없지만 상징성과 해역에서 위치가 가지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영국 의회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군대를 파견하게 된다.

3.4. 제국의 역습

제국의 역습 : 포클랜드 사태.
HMS 허미즈가 남쪽으로 향하다
- 뉴스위크 1982년 4월 19일자 표지.

대처 총리는 즉시 아르헨티나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영국 의회는 여야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전쟁을 승인했고, 4월 5일 해군 대장 존 필드하우스(John Fieldhouse) 제독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해군 기동부대인 Task Force 317.8의 지휘관 소장 존 포스터 우드워드(John Forster Woodward) 제독과 지상군 총지휘관인 해병 소장 제레미 무어(Jeremy Moore) 장군에게 출동을 명했다.

사실 다른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영국 군에서도 원정 거리 등을 이유로 전쟁에 회의적인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 대규모 원정을 위해 좀 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남반구의 4월은 이미 겨울을 앞두던 터라 "정치적인 목적에서라도 포클랜드 탈환은 필요하며, 할 수 있다. 대신 포클랜드로 갈거면 지금 가야 한다"는 제1해군경이었던 해군 대장 헨리 리치 제독[10]의 조언을 받아들여 일단 본토와 지브롤터에 있는 전투함을 싹 긁어모으고 상선까지 징발하여 마침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레미 무어 장군(왼쪽)과 샌디 우드워드 제독(오른쪽)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점령이 길어지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져 재탈환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므로 단기전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기동함대 투입한 것이었다. 아울러 약 한 달 정도 소요되는 항해 기간 동안 외교적 해결을 시도할 경우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압박 수단으로도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대처 총리는 영국에 대한 국제 사회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외교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먼저 아르헨티나의 침공 다음날에 UN 안보리에서 아르헨티나를 침략자로 규정하며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유럽 국가들의 대(對) 아르헨티나 수출 금지 조치를 유도했다. 심지어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국의 동맹이었던 미국의 지지까지 얻어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마가렛 대처 사이의 통화에서 레이건은 본건을 UN에 맡기자고 했지만 대처는 패기롭게도 "알래스카가 침공당하면 그대로 같은 말을 돌려주겠다."고 반응했다[11]는 일화도 있다.

반면 아르헨티나 측도 4월 포클랜드 제도를 점령한 직후 미국에 협조를 요청했었으나 거부당했다. 아르헨티나는 미국이 '자신들이 사회주의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것처럼, 만일 자신들이 지지를 잃고 사회주의 정권이 재집권하게 되면 이는 남미 전체의 공산화로 이어질 것이다'라는 논리로 지지를 이끌어내려했다. 하지만 미국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남미의 반공 쿠데타를 묵인 및 지지했던 터라 남미 정권은 미국과 꽤나 돈독했다.[12] 포클랜드 전쟁 기간만 제외하고.

당초 미국은 영국과 아르헨티나 모두와 동맹이었고 갈등이 전쟁으로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알렉산더 헤이그 당시 국무장관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런던을 오가며 중재했다. 미국은 '아르헨티나 군이 철수한 후, 포클랜드 현지 주민들의 주민 투표로 귀속 국가를 결정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아르헨티나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불만을 돌리려는 침공으로 기껏 병력을 동원해서 '실지를 회복'했는데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철수하면 국민들이 외압에 굴복하는 것으로 여길까 우려했다. 또한 포클랜드 주민 대다수가 영국계여서 주민 투표 자체도 아르헨티나 입장에서 그다지 달갑지 않은 제안이기도 했다. 결국 4월 말 미국도 영국을 공개 지지하면서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를 포함한 제재안을 발표했다. 이로써 영국은 국제 사회, 특히 동맹국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아르헨티나가 저지른 행동이 빼도 박도 못하는 명백한 침략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영국에게도 구린 구석이 있었다면 모든 국가가 영국에 동조하지는 않았을 텐데 너무 심심한 게 탈인 멀쩡히 잘 지내고 있는 섬을 대뜸 무단으로 점령하니 영국이 국제 사회의 지원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북대서양의 영국에서 남대서양의 포클랜드까지의 원정은 거의 지구 반바퀴를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4월 중순에서 하순에 걸쳐 긁어모을 수 있는 선박과 항공기는 모두 동원되었다. 심지어는 호화 여객선 퀸 엘리자베스 2까지 징발하여 병력을 수송했다. 1956년 수에즈 전쟁 이후 오랜만에 본격적인 군사 행동에 나선 것이다.

3.5. 양국의 전략 차이

당시 영국 왕립해군의 기동함대 기함 HMS허미즈가
포클랜드로 출격할 당시를 그린 그림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승리하면 진짜로 섬을 수복한 것이 되어 국가영웅으로서 탄탄대로를 걷게 될 것이라 생각했고 패배하더라도 언론을 통제하여 국민들을 교묘히 속여서 계속 집권할 생각이었다.

반면 영국은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전쟁을 진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가렛 대처 총리가 직접 당시 칠레의 독재자였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찾아가서 영국의 상황과 이 전쟁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피노체트를 설득했다. 그리고 피노체트로부터 칠레 영공에 영국의 항공기를 배치해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아냈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대처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을 돌며 영국은 가만히 있었는데 아르헨티나가 기습 침공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설득하고 다녔다.

그러나 대처의 동분서주에도 불구하고 일본중국은 영국의 주장을 무시했다. 중국은 홍콩 문제가 걸려 있어서,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상실한 쿠릴 열도 등의 부속 도서들에 대해 민감한 처지이다보니 영국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오히려 냉전으로 영국과 대립했던 소련이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을 지지했다.

3.6. 빙하 작전

5월에 접어들자 영국군은 드디어 반격을 개시했다. 첫번째로 SAS를 파견해서 아르헨티나 사령부를 기습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해군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SAS 대원들을 포트 스탠리 빙하에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해군 조종사들은 이 작전에 대해 차라리 폴라리스 미사일을 날리는 게 더 빠를걸요 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SAS 대원들은 기어코 빙하에 도착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끔찍한 날씨 앞에 장사 없었고, 결국 임무를 포기하고 항공모함으로 귀환했다. 이 와중에 3기의 헬리콥터 중 2기가 손실됐지만 전사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 에피소드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 <에어 파이터 - 헬리콥터 워, 영국 특수부대 침투작전>으로 다뤄진 적이 있다.

3.7. 블랙 벅 작전

다음으로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의 비행장을 쓰지 못하도록 활주로에 폭격을 가하는 "블랙 벅 작전(Operation Black Buck)"을 시행했다. 1단계로 아브로 벌컨 폭격기가, 2단계로 함재기 시해리어가 동원되고, 3단계로 함포사격이 대미를 장식했다. 특기할 만한 일은 1단계에서 대서양 어센션 섬에서 발진한 벌컨 폭격기가 몇 차례나 공중 급유를 받아가며 왕복 7천km를 날아갔다는 점이다.[13] 이 기록은 걸프 전쟁에서 미군 B-52가 미국 본토 - 이라크 - 영국 주둔 미 공군 기지를 날아가기 전까지는 세계 기록이었다.[14]

구체적인 목표는 활주로를 일시적으로 파괴하기 위해 활주로 중앙을 폭격하는 것이었다.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아예 폭격 코스를 활주로와 비스듬한 방향으로 잡았으며 교차점에서 21발 중 적어도 1발은 확실하게 명중하도록 계획하였다. 투하한 폭탄들은 대부분 빗나가거나 활주로 가장자리에 떨어졌지만 1발이 명중했다. 그린 구스 비행장과는 달리 포트 스탠리 비행장은 경미한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아르헨티나는 초음속 제트 전투기인 미라주본토에서 출격할 수밖에 없는, 아주 불리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아르헨티나 전투기들은 전투 공역에 진입해도 작전 가능 시간이 5분 이내였으며 그나마 애프터버너를 점화하여 속도 이점을 살릴 수 없게 되었다.[15] 즉 빈약한 무장에다[16] 속도 이점도 살리지 못하는 전술적으로 열세에 처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폭격을 가하여 영국 함선을 격침시킨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은 그야말로 능력자들이다. FAS의 지휘관은 베테랑 조종사 출신의 장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사실 5월 1일에도 아르헨티나 공군과 해군 비행단은 영국 함정을 폭격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P-2 넵튠이 날아다녔기 때문에 그나마 영국 해군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중고도[17]에서 실시한 그 날 공격은 영국 함대의 방공망에 걸려 피해가 막심했다. 그 후로는 저공 침투[18] 전술을 기본으로 삼는데 이 때문에 불발탄이 많이 생겨 제대로 피해를 주지 못했다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자유 낙하 폭탄들은 보통 500~1000파운드(227~454kg)의 무게다. 이런 쇳덩이들이 400kts(740km/h)속도로 날아들어오는 것이다. 포탄만큼은 아니라도 상당한 피해를 주며 호위함 같은 경우는 명중했다 하면 침몰 직전까지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3.8. 원자력 잠수함 컨커러의 아르헨티나 순양함 격침

5월 2일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초로 극적인 해상 교전상황이 발생하였다. 영국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 HMS 컨커러(Conqueror)가 아르헨티나 해군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General Belgrano)를 MK 8 어뢰로 격침시킨 것이다.

영국 해군의 HMS 컨커러는 처칠급 원자력 잠수함의 3번함으로 1969년 진수되고 1971년 취역하였다.

영국 해군의 처칠급 원자력 잠수함 컨커러(HMS Conqueror)

아르헨티나 해군의 헤네랄 벨그라노는 미국의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5번함인 USS 피닉스(CL-46)였는데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과 남미 국가간의 '상호 방어 지원 프로그램'(Mutual Defense Assistance Program)에 따라 넘겨진 군함들 중 하나이다.[19]

ARA General Belgrano underway, 아르헨티나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

컨커러는 1982년 4월 30일 포클랜드 섬 남서쪽 바다를 초계하던 중 헤네랄 벨그라노를 발견하고 접촉을 유지한다. 당시 아르헨티나 유일의 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Veinticinco de Mayo)가 포클랜드 섬 북쪽에서 접근하고 있었으므로 영국 함대는 남북으로 협공당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영국 기동부대 사령관 우드워드 제독은 영국 정부에 헤네랄 벨그라노 격침 허가를 요청한다. 그런데 아르헨티나 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는 기상 문제로 공격을 하지 않고 철수했다. 캐터펄트 출력이 약한 경항모였기 때문에 영국 기동부대를 공격하기에 충분한 연료와 무장을 탑재한 A-4 스카이호크 공격기를 이륙시키려면 일정 풍속의 바람을 받으며 전속력으로 질주해야 했다. 그러나 공격 예정일에 거의 바람이 불지 않아서 스카이호크를 띄울 수 없었다. 이에 헤네랄 벨그라노도 공격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함수를 돌려 영국이 선포한 완전봉쇄구역(Total Exclusion Zone)을 벗어났다. 이로 인해 나중에 헤네랄 벨그라노 격침이 정당한 교전행위였는가에 대해 약간의 국제적 논란이 일었다.

영화 '철의 여인(The Iron Lady)'에서 헤네랄 벨그라노에 대한 공격을 허가할 때를 묘사한 영상. 앞서 언급한 봉쇄구역 이탈 문제 때문에 허가 여부를 두고 고민한다.

어쨌든 영국 본국 정부로부터 격침 허가가 내려오자 컨커러는 5월 2일 헤네랄 벨그라노를 향해 총 3발의 MK 8 어뢰를 발사했고 2발이 명중하여 폭발했다. 함체 피해가 컸기 때문에 헤네랄 벨그라노는 불과 20분만에 함수가 꺾이고 대량의 해수가 들어차 침몰했다. 문제는 어뢰가 폭발하면서 함선의 전기계통이 모두 고장나는 바람에 통신으로 구조요청을 할 수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침몰 현장은 기상이 안 좋아 가시성이 매우 떨어지는 상태였다. 때문에 당시 헤네랄 벨그라노에는 호위 구축함 2척 ARA Bouchard 및 ARA Piedra Buena이[20] 붙어 있었으나 열악한 기상에 구조 신호도 받지 못한 호위 구축함들이 어이없게도 순양함이 침몰한 사실을 몇 시간 동안이나 몰랐다. 결과적으로 323명의 승조원이 전사했으며 이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군 전사자의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춥고 거친 해상 상황에도 불구하고 함장 헥토르 본조(Héctor Bonzo) 대령을 포함한 나머지 700여명의 승조원은 다행히 무사히 구조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해군의 디젤잠수함 ARA 산 루이스(San Luis)를 제외한 모든 아르헨티나 해군은 항구로 철수했으며 이후 포클랜드 전쟁 동안 다시 해상으로 나오지 않았다.

영국 원자력 잠수함 컨커러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前 미국 경순양함 피닉스(CL-46)). 1982년 5월 2일

침몰한 헤네랄 벨그라노는 진주만 공습때도 현장에 있었지만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고 2차 세계 대전 중 태평양을 종횡무진 누비며 큰 활약을 한 네임드 순양함이다. 잘 나가던 시절에는 맥아더 장군의 기함으로도 뛰었고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서 종군성장 11개를 수상할 정도로 유명했고 큰 손실없이 종전을 맞이했지만 수십년 뒤 뜻밖의 장소에서 다른 이름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원자력 잠수함의 실전 격침 첫 사례 정도로 보이는 이 교전의 의의는 생각보다 크다. 아르헨티나의 해군 가용 전력 대부분이 투입되어[21] 포클랜드 북쪽과 남쪽에서 각각 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와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로 포클랜드 해역의 영국 항모기동부대를 협공하려던 시도가 취소된 후 철수하던 벨그라노가 격침당하자 아르헨티나 해군은 더이상 바다에 나올 생각을 하지 않게 됐고, 제해권과 제공권은 영국이 가져갔다.[22] 이로써 영국은 사실상 이렇다 할 방해 없이 포클랜드 섬을 공략하게 되었으며[23] 아르헨티나 입장에서는 전투기들 항속 거리 끝자락에 위치한 영국 해군에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포클랜드 전쟁 전체의 승패를 결정지었다고 할 정도다. 사실 대잠 전력, 장거리 전폭기, 정찰기 편대 등 해상전의 필수 요소조차 없는, 시작부터 진 싸움이었다.

이 직후에 전쟁 중인데도 영국 의회에서 컨커러의 함장을 소환하여 비인도적 행위가 아닌가 하는 청문회를 여는 해프닝이 있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전쟁이니 만큼 영국 내에서도 매사 명분에 대한 강한 목소리가 있었다는 예증이다. 국회의원들은 함장에게 '왜 경고사격을 하지 않았는가' ??? : 빈 라덴을 잡기 전날 주민들에게 소음이 날 거라는 불편 안내방송을 왜 하지 않았지? 에 대해 추궁하였으나, '타이거피시 어뢰의 가격이 얼마나 하는지 아는가' 라는 논리에 침묵했다.[24] 결과적으로 2003년에 벨그라노의 함장이었던 본조 대령이 "헤네랄 벨그라노는 발견하는 모든 영국 군함을 격침시킬 것"을 명령받았던 전투 항행 중이었으므로 HMS 컨커러의 헤네랄 벨그라노 격침은 정당한 교전행위였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논란은 종식되었다. 본조 대령은 1983년에 대령으로 예편했고, 2009년에 76세로 사망했다.

컨커러의 헤네랄 벨그라노 격침은 2020년 현재까지도 교전 상황에서 원자력 잠수함이 어뢰로 군함을 격침시킨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

3.9. 아르헨티나의 반격 - 셰필드 쇼크

HMS Sheffield, 영국 구축함 HMS 셰필드(Sheffield) 함

5월 4일 아르헨티나 해군의 반격은 해전에서 셰필드 쇼크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아르헨티나군 해군 항공대 소속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가 엑조세 미사일로 영국 해군의 42형 구축함 HMS 셰필드를 격침시킨 것이다.

당시 아르헨티나 해군 전투기는 2대씩 짝을 지어 공격했는데, 공교롭게도 셰필드의 대공 레이더가 두 전투기를 1대로 인식하는 치명적인 버그가 생겼다. 그러다 2대가 모두 레이더에 감지되자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셰필드의 전투 통제 시스템에 오류가 생겼고, 쉬페르 에탕다르는 어떠한 대공 공격도 받지 않는 '거의 훈련 상황' 속에서 엑조세를 셰필드에 명중시켰다.

또한 영국 해군은 이 과정을 좀 더 면밀하게 조사한 끝에...

  • 영국 해군도 사용하던 엑조세를 셰필드의 컴퓨터가 적성 장비로 인식하지 않았다.
  • 우연히도 함장 이하 주요 승조원들이 CIC(전투정보통제실, 그러니까 지휘소)에 없었다.
  • ECM 장비인 UAA-1의 위성 통신 장비 신호가 쉬페르 에탕다르에 탑재된 레이더와 유사했다. 그래서 위성 통신을 하는데 전투기 접근 중이라는 오보가 끊이질 않았기에 쉬페르 에탕다르가 실제로 접근했는 데도 대공전 통제함 인빈시블이 동료함의 경고를 통신 장치 사용에 따른 오보로 판정했다.
  • 저공 비행하는 쉬페르 에탕다르 2기를 레이더가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등의 보고를 내놓았다. 정말 안 좋은 상황들이 극적일 정도로 완벽하게 겹친 것이다.

이 때 셰필드를 격침시켰던 엑조세는 불발탄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2010년대 영국에서 최신 분석기법을 활용한 결과 탄두가 기폭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탄두 기폭으로 셰필드의 주요 기능이 마비된 이후 로켓 모터에 남은 연료에 불길이 옮겨붙으며 셰필드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사일이 전투 통제실에 직격하는 바람에 셰필드의 데미지 컨트롤이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린 바람에 화재진압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셰필드는 후에 영국으로 예인 중에 피탄된 곳이 침수되어 6일 뒤인 5월 10일에 최종 침몰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아르헨티나는 셰필드의 침몰 사실을 영국 언론의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거리 정찰이 가능한 기종들은 전쟁 초반부에 전부 쓰지도 못하는 꼴이 나 버렸고[25], 장거리 레이더 또한 작동 불가 상황이라 믿을 건 실전에 투입되었던 조종사들의 증언이었는데, 이는 예로부터 신뢰도가 그다지 높지 못했다. 일단 불이 붙으면 격침이라는 식으로 잘못 알 수도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쉬페르 에탕다르 조종사들은 발사 직후 방공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로 도주해서 피탄 결과를 정확히 알 방도가 없었다.

사실,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 전쟁 전체에 걸쳐 이렇게 부족한 면모를 많이 보였던 이유는 군대 조직 자체가 남미 패권 다툼을 위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즉, 고속 장거리 전폭기도 없었고 재급유기도 단 2대였던 이유는 국경 지역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분쟁을 대비해 시스템을 구축해두었기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가 보유하고 있던 쉬페르 에탕다르와 엑조세는 각각 5기와 5발뿐이었다. 항공모함을 격침시키는 대박이 나지 않는 이상 전황 자체를 뒤집기에는 턱없이 적었다. 물론 영국군이 상륙한 5월 중순 이후부터는 항공모함을 격침시켰다고 해도 털렸을 것이다. 지상군은 장비도 부족하고 예비군보다 못한 수준이며, 아르헨티나 해군은 항구에 짱박혀 있었다. 아르헨티나 공군 및 해군 항공대는 전쟁 전에 자국의 42식 구축함을 이용해 가상전을 벌여보았으나 50%정도만 생환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조금 어려움에 처했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해상전을 벌였으니 그 결과는 안 봐도 뻔한 것이었다.

이후 셰필드 격침 전과를 기록한 엑조세는 옛 소련스틱스중국실크웜 못지않은 대함 공격 수단으로 각광을 받는다. 이 사건은 대함 미사일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어, '셰필드 쇼크' 혹은 '엑조세 쇼크'라 불리며 이후 군함 건조에서 방공 능력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쉬페르 에탕다르

피격당한 셰필드

참고로 침몰할 때 승조원들이 몬티 파이톤과 브라이언의 삶에서 나온 곡 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 of Life를 불렀다고 하는데 가사의 뜻을 보면 참 묘하다.

3.10. 영국의 상륙전

영국 지상군 상황

5월 21일 영국군이 동포클랜드 서북쪽의 산 카를로스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지상전이 시작되었다. 포클랜드 제도 최대 도시이자 총독부가 있는 동쪽 끝의 항구 도시 포트 스탠리를 목표로 영국 해병대 제3코만도 여단[26]과 영국 육군 제5보병여단[27]이 투입되었다. 엑조세를 피해 산세가 제법 있는 곳에 상륙을 계획했으나 바로 그 자연 방벽 때문에 저공 비행하는 FAS 전투기들을 발견하지 못해 5척이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물론 상륙 작전은 잘 끝났기에 전황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덤으로 게릴라 때려잡는 데나 유용하고 현대전에서는 무력한 푸카라나 에르마치는 레이피어나 블로우파이프같은 휴대용 대공 미사일에 제압당했다.

5월 25일에 아르헨티나군은 다시 한번 쉬페르 에탕다르를 동원하여 영국 함대 본진에 2발의 엑조세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번에는 영국군이 제대로 탐지하고 즉시 대응에 나서 본진은 타격을 입지 않았으나 1발이 수송선 아틀란틱 컨베이어[28]에 명중했다. 결국 적재되어 있던 에섹스 및 치누크 헬리콥터와 함께 5월 30일 격침되면서 헬리콥터를 이용한 대규모 상륙작전이 힘들어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군은 훨씬 심각한 보급난을 겪고 있었으며 사우스 조지아 섬에 있던 아르헨티나 해군 부대가 같은 날 항복했다.

영국 해군 프리깃 HMS 플리머스(Plymouth)의 사관실에서 함장 데이비드 펜트리스(David Pentreath) 대령과 부하 장교들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사우스 조지아 섬 주둔 아르헨티나 해군 지휘관 알프레도 아스티스(Alfredo Astiz) 정보 소령. 아스티스 소령은 전후 중령까지 진급했으나, 1995년에 군부 독재 시절 부에노스 아이레스해군 기관부사관학교(Escuela Superior de Mecánica de la Armada, ESMA)에서 반정부 시위대 5,000여명을 학살한 혐의로 불명예 전역하고 췌장암으로 투병하던 중 65세로 숨졌다.

5월 28일 섬 중앙의 좁은 길목인 구스 그린(Goose Green)에서 영국군은 진격로의 안전을 위해 측면을 위협하는 아르헨티나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영국군 피해는 전사 17명, 부상 31명인 반면 아르헨티나군 피해는 전사 250명, 부상자 121명에 1,400명이 투항했다. 영국은 SAS구르카까지 준비했지만 전투에서 패하고 지친 아르헨티나 육군들은 구르카병들이 온다는 소문에 그들이 투입되기도 항복했다고 한다. 사실 아르헨티나 육군 병사들은 대부분 징집병으로 영국 해병에 비해 전문성이 떨어졌다. 덕분에 상태가 멀쩡한 아르헨티나 육군 포로들이 가득한 사진이 남았다.

제해권을 영국이 장악한 이상 추가 지원이 없는 아르헨티나군은 결국 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르헨티나군은 높게 쳐야 3,000명 인구의 포클랜드에 대부분 보병인 지상군만 10,000명 가량 투입했다. 그 덕분에 안 그래도 빈약한 해상 수송 능력으로 전차나 야포 같은 중장비와 공병 전문가 등은 거의 없었으며, 개인 화기조차 탄약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서경석 퇴역 장군이 집필한 <전투감각>을 보면 보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 사례로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군의 방한 장비가 부족한 것을 꼽고 있다. 포클랜드 전쟁이 아르헨티나의 선공으로 시작했으며 겨울에 치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군 수송부대 조종사들은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영국군이 포클랜드 섬 주변의 제공권을 장악했던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보급 및 부상자 후송 임무를 수행했다. 제공권이 없어 한밤중에 악천후를 뚫고 호위기도 없이 수행한 조종사들은 영웅 칭호를 받아 마땅하다. 실제로 아르헨티나군의 C-130이 초계 중이던 해리어에게 격추되기도 했다.

3.11. 엑조세의 마지막 발악

5월 30일 아르헨티나군은 마지막 엑조세 미사일 1발을 발사하고는 "이번에 발사한 엑조세가 인빈시블에 명중했다!"라고 발표했다. 영국은 즉시 아르헨티나군의 주장을 일축했으나, 그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아서 한동안 아르헨티나 측의 발표대로 인빈시블이 손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 마지막 엑조세는 함대 방공망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아르헨티나 측은 이미 항행 불능으로 그냥 떠있던 아틀랜틱 컨베이어를 인빈시블로 오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아르헨티나군도 모르던 첫 엑조세 공격의 성공을 보도했던 영국 언론은 이번엔 침묵했다.

마지막 공격 당시에 시킹 헬리콥터 조종사로 근무 중이던 엘리자베스 2세의 둘째 아들 앤드루 왕자인빈시블의 갑판 위에 있었다고 한다. 진짜로 공격에 성공했다면 앤드루 왕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며, 전쟁은 대번에 격화되었을 것이다.

4. 영국의 승리

포클랜드 제도에 다시 유니언 잭을 게양하는 영국군

5월 31일 영국군은 켄트 산에서 포트 스탠리를 포위할 준비를 갖추었다. UN은 아르헨티나군에게 포클랜드에서 철수할 것을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동안 자신들을 남미가 아닌 서방 백인 국가로 생각했던 아르헨티나는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전세가 기울자 다른 중남미 국가들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들은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제도 침공을 비난하거나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르헨티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칠레는 아예 영국에 영공을 통과하는 것까지 허용했다. 평화 협상을 중재하는데 실패하고 아르헨티나로 돌아선 페루만이 아르헨티나를 지지했으나 이미 전세는 뒤집을 수 없었다.

6월 8일 영국군 기동 부대가 항공 호위가 부실한 상태로 상륙 작전을 펼치다가 상륙함(LSL) 2척이 A-4 공격기에 의하여 피해를 입었다. 당시 방공 미사일 레이피어가 5여단 본부대 호위로 빠져있던 데다가 작전 중인 해리어들도 아르헨티나 공군의 산발적인 일격이탈 때문에 지쳐서 제대로 저지하지 못했다. 거기에 상륙함 자체가 현대적인 LSD나 LPD 같은 게 아니라 LST에 가까웠다. 이후 영국측의 상륙 전술이 초수평선 상륙 작전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아르헨티나군은 급히 차출한 민항기로 이루어진 미끼 부대로 해리어들을 농락하기도 했다. 영국제 B-108 캔버라를 민항기를 캔버라 폭격기로 오인하게 한 것이다. 실제로 피로도를 쌓는 효과가 꽤 있어서 저공 침투하는 A-4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포클랜드판 볼로 작전 이후 이 A-4들은 영국군 해리어의 AIM-9L 미사일을 맞고 격추당했다.

6월 11일 영국군 최후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이때 영국군은 개방된 칠레 영공을[29] 마음대로 날아다니면서 작전을 수행했다. 아르헨티나군은 포트 스탠리의 마지막 방어선인 롱돈(Longdon) 산에서 의외로 분투했으나 이미 전세는 기울었고, 롱돈 방어선이 뚫린 뒤 14일 포트 스탠리에서 아르헨티나군이 백기를 들었다.

5. 결과

1982년 7월 21일 영국남부 포츠머스 항으로 개선하는 원정 기동 함대 기함 HMS 허미스

포클랜드 전쟁의 전사자는 영국 측에서 258명, 아르헨티나 측에서 649명이 발생했다. 이후 21세기까지 양측 참전 용사 중 자살자의 수가 전사자를 넘었다는 말도 있지만 영국 국방부에 따르면포클랜드 참전 군인의 7%, 즉 95명이 자살과 관련된 죽음을 맞았다.

이 전쟁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6월 11일 마지막 공세 때 영국군의 오폭으로 사망한 포클랜드의 영국인 주민 3명이다. 그 외에도 아르헨티나 해군에 동원당한 민간인 선원 16명이 사망하였다.

불만 여론을 무마하려 전쟁을 일으킨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패전 후에도 승전했다고 거짓말까지 했지만 월드컵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단에게 들통났다. 이에 전국민적인 분노가 솟아오르자 갈티에리는 레이날도 비뇨네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비뇨네 역시 이듬해인 1983년 여러 반정부 세력의 공격을 받아 몰락했다. 이로써 1976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반인륜적인 전횡으로 국가를 공포로 몰아넣은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후 아르헨티나에는 라울 알폰신을 대통령으로 삼은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더불어 포클랜드 전쟁의 패배로 군사력에 큰 타격을 입은 아르헨티나는 중남미의 군사 강국 지위를 상실했고 연이은 경제난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군사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막대한 전비를 쓰고 사상자도 꽤 나온 포클랜드 전쟁을 미국베트남 전쟁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피해 규모도 비교 불가능한 수준인 데다 승전으로 끝나 보수당 정권을 연장시킨 포클랜드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대응시키는 것은 무리다. 게다가 명분도 실리도 없이 손해만 본 베트남 전쟁과 달리 포클랜드 전쟁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영국이 반드시 무력대응에 나설 필요가 있었고 어쨌든 목표를 달성하며 승전했다.

전쟁 이전 70년대 영국의 경제는 오일 쇼크로 연평균 20% 이상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영국병으로 낮은 생산성과 평균 10.1%의 실업률로 재정이 악화되어 연간 2.8%의 저성장을 기록하며 1인당 GDP가 세계 18위까지 떨어졌었다. 반면 1980~1990년대 이후부터 경제가 다시 살아나 2016년 기준으로 세계 13위에 올랐다. 즉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지며 여러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어도, 영국의 경제 규모는 IMF 금융지원을 받던 1970년대보다는[30] 포클랜드 전쟁 이후에 훨씬 발전했다. 예를 들어 1970년대까지 말 그대로 파탄났던 영국의 농업은 1980년대 이후로는 성공적으로 기계화되어 2000년에는 2%의 노동력만으로 국내 필요량의 60% 정도를 생산했다. 물론 전쟁으로 인해 영국 경제가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국이 전쟁하다가 경제를 말아먹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편 포클랜드 전쟁이 신자유주의가 전세계를 휩쓰는 방아쇠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만으로는 전세계의 신자유주의화가 어려웠으나 마가렛 대처가 승전에 힘입어 재집권한 덕분에 수월히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전쟁 발발 직전인 1982년 영국의 실업률은 10%에 실업자 수는 300만명에 달했으며, 특히 영국 북부에선 5명 중 1명이 실업자였다. 비록 노동당이 집권하던 시기의 실정이 누적된 결과였지만 경제파탄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모조리 현직 총리인 대처에게 쏠렸다. 집권 3년차 타임지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처는 체임벌린[31] 더불어 가장 무능한 수상이라고 평가되었으며 보수당 내각의 지지율은 10%대에 머무는 등 당시 영국 정권은 매우 위태로웠다. 바로 그 때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재집권한 대처는 이후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대처 내각의 감세, 규제 완화, 정부 지출 축소, 공기업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적 경제 조치들은 영국 경제의 회복에 크게 공헌했다. 비슷하게 경제 위기를 겪고 있던 나라들이 대처의 경제 정책을 자국의 실정에 맞추어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내내 이어지던 경제 호황에 크게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이전보다 경제적 양극화를 더욱 강화하고 2007-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발생에 일조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양립한다.

5.1. 포클랜드 전쟁 당시 프랑스 관련 루머와 반박

  • 아르헨티나에 엑조세와 쉬페르 에탕다르 조합을 판매한 프랑스가, 영국에 엑조세의 정보를 넘겨줬다!
프랑스는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기습하자 즉각 주문받았던 엑조세와 쉬페르 에탕다르의 인도를 중지했으며, 영국에도 정보를 알려주지 않음으로서 동맹국과 고객 양쪽의 의리를 모두 지켰다. 무엇보다 영국은 이미 70년대부터 엑조세를 도입해 운용 중이었으므로 정보를 더 얻을 필요가 없었다. 한마디로 논할 가치가 없는 까내리기만을 위한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오히려 주문한 물품을 다 받지도 못했는데 단 5발의 대함 미사일만으로 급하게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 쪽이 이상한 것이다.안티들 중에는 위 떡밥이 논파되면 어쨌든 고객에게 물건을 넘기지 않은 것은 배신이다! 프랑스는 나쁜 나라다!라고 비난하는 2페이즈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는 프랑스의 독단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내린 조치로, 독일 역시 아르헨티나에 구축함의 인도를 전쟁 동안 보류했다.그래도 포기를 모르는 극렬 프랑스 안티들은 위 두 가지가 모두 반박당해도 전쟁 중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쟁 끝났으면 주문한 물건은 줘야지요? 돈만 먹고 모른 척한 프랑스 나쁜 놈!이라며 마지막까지 반격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끝나자 약속을 지켜 주문한 물건을 정확히 넘겨줬다.
  • 프랑스가 공군 합동 훈련을 통해 영국에게 아르헨티나의 주력기인 미라지의 비행 성능과 기타 정보를 넘겨줬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포클랜드 전쟁 이전부터 정기적으로 합동 훈련을 했으며, 이 때 프랑스 공군은 당연히 미라지로 훈련에 임했다. 그리고 그 훈련에 참가했던 영국 조종사들은 포클랜드에는 가지도 않았다. 다만 뉴질랜드 공군이 미국A-4 스카이호크 공격기 정보를 제공했을 뿐이며 아르헨티나군이 사용하던 모델인 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배치된 지 30년이 지났고 수출까지 하는 기종의 정보가 넘어갔다고 전쟁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이 비정상이다.

아르헨티나는 자력으로 엑조세를 운용하지 못했다. 기술적으로 매우 진보된 물건이라 그동안 A-4 스카이호크와 비유도 폭장만 사용하던 아르헨티나는 상당한 기술 장벽으로 슈페르 에탕다르에 설치된 발사대 자체도 제대로 튜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다소에서 파견한 기술진들이 포클랜드 전쟁 시에도 그대로 남아서 셋업을 도와주고 있었다.

다만 당시 프랑스의 방산업체 관계자가 발언한 포클랜드 전쟁에 관한 충격적인 내용이 논란이 되었다.

>우리 프랑스의 미사일에 희생되는 것이 영국군의 함정이든 아르헨티나군의 함정이든 그것은 프랑스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우리 프랑스의 관심은 단지 이 11만 파운드짜리 값비싼 미사일이 가급적 많은 함정을 격침시킨다면 프랑스 국민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해주게 되는 것이다.>>> - 토크멘터리 전쟁사 제 134부 영국vs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전쟁II 일본 군사잡지 하비재팬으로부터 재인용

하지만 원래 방산업체라는 곳이 그렇게 전쟁으로 무기 파는 곳인데 이를 비판하면 모든 방산업체와 군대가 존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프랑스는 2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으로 거의 모든 인프라가 박살나 있었다. 모든 게 풍족하던 유럽 내에서도 특히 풍족했던 'La Grande Nation'[32]은 이미 개발살나 역사책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 경제를 단기간에 부양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물색하다 방산업체를 대대적으로 밀어주고 있었다. 즉 저 발언은 방위산업의 본질과 당시 프랑스인들의 솔직한 마음을 대변해준 것이기도 하며 실제로도 이후 엑조세 미사일을 비롯한 프랑스제 무기들이 대박을 쳐서 경제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다만 이전에도 미라주 III 등이 중동전을 포함한 여러 국제 분쟁에서 좋은 전과를 올려 잘 판매되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다시 조명되는 정도였다.

5.1.1. 관련 문서

6. 대중매체에서

7. 기타

  • 과거에는 예비군 정신교육의 단골 소재였다. 아르헨티나가 무리하게 영국하고 싸우다가 참패해서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직면해 대국민 혼란이 일어난 대신, 승전국인 영국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
  • 포클랜드 전쟁 때 영국 언론의 무분별한 전황 보도가 아르헨티나의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되자 언론에서 자체적으로 통제한 것을 다루는 정훈 교육 자료도 있다. 즉 전시에 국민의 알 권리가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지 고민해보자는 내용이다. 당시 BBC는 언론의 중립을 유지하면서 '아군'이 아닌 '영국군'이라고 불렀으며, 알 권리만을 지나치게 추구하여 군사 작전을 실황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영국군은 종전 후 BBC를 고소했다.
  •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했던 에이스인 피에르 클로스테르망은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을 교육했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를 지지했다가 영국 국민들에게 배신자라고 욕먹었다.
  • 마가렛 대처는 영국군 전사자 258명의 가족들에게 일일이 추도편지를 작성하였다. 일과시간은 물론이고 본인의 휴가도 반납해 가며 희생자 각자의 개인사와 전사자의 죽기 전 상황을 상세히 적은 정성들인 편지였다.
  • 탑기어 시즌 21 에피소드 8~9는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무대로 펼쳐졌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의 티에라 델 푸에고의 우수아이아라는 곳에서 나가라고 강요받았다. 제러미 클락슨이 탄 포르쉐의 번호판이 포클랜드 전쟁을 기반으로 놀리려고 일부러 만들어진 가짜 번호판이라 우기는데 칠레 국경으로 떠날 때 아르헨티나 우익들이 위협 운전을 한 것은 물론 계란부터 시작해서 돌까지 던져대 차 유리가 깨지는 등 여러 일화가 있었다.
  • 아르헨티나 군부에서는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이 영국을 돕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는데 이는 완벽하게 빗나갔다. 호주와 캐나다는 영국에 여러 군사적 지원을 제안했으며, 뉴질랜드의 경우 아르헨티나군의 장비 정보를 넘기는 것은 물론 아예 군함을 보내겠다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전쟁 발발 후 인도양에 배치된 영국 해군이 포클랜드 전장으로 출동해 전력 공백이 생기자 이를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이 메워줬다. 동시에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호주, 뉴질랜드는 아르헨티나와 수교를 끊거나 경제 제재를 가하는 외교적 경제적 압박도 병행했다. 이 때문에 포클랜드 전쟁을 영연방과의 충돌로 해석하기도 한다.
  • SA80 소총에도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북아일랜드 분쟁에서 영국은 L1A1을 대체할 새로운 돌격소총을 개발할 필요를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IMF 경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이미 대처 내각이 예산을 삭감한 데 더해 포클랜드 전쟁까지 치르자 영국 국방부는 말 그대로 주머니가 텅텅 빈 상황에서 SA80을 개발하게 된다. 거기에 없는 돈을 마련한다고 국립 조병창을 민영화하여 상당수가 해체되거나 대량 해고로 대규모 축소될 상황이었다. SA80의 개발회사인 로열 오도넌스(구 엔필드 조병창)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 리가 없었다. 결국 개발진들은 SA80의 아버지뻘인 XL64E5를 5.56mm NATO 탄을 쓸 수 있도록 한 XL70E3을 내놨지만 조악한 재료로 안전성이나 신뢰성이 극악이었다. 다행히 현재는 HK에서 개수한 L85A2로 개조되면서 나아졌다.
  • 영국 해군이 아르헨티나 공군의 A-4 제트전투기를 보포스 포로 격추하면서 컴퓨터로 작동하는 사격통제장치가 있다면 여전히 강력하다는 것이 검증되었다. 대공포로 사용하던 보포스 40mm 포가 중소형 전투함에서 여전히 주력으로 운용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후 전함들은 100mm 이상급의 거대주포보다는 대공포나 부포로 쓰이던 40mm, 75mm 급을 주포로 채용하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부포 자리에 어뢰와 대함미사일을 배치하는 양상을 띄게 되었다. 또한 주로 방공함에 장비되던 다양한 미사일 방어 체계들이 함의 체급에 상관없이 기본 사양으로 탑재되기 시작했다.

8. 명칭 문제

한국에서는 당시 서방의 보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포클랜드 전쟁이라고 칭하나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제도라고 불리기에 포클랜드 전쟁/분쟁에서 아르헨티나 편을 드는 나라들에서는 말비나스 전쟁이라 하고 있다. 실제로 영국이 이겨서 포클랜드 제도는 포클랜드 제도로 남게 되었고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기에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인과 대화할 때 등에는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34]

중국의 경우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에서 공식적으로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으며, 때문에 포클랜드 전쟁을 '마도 전쟁'(马岛战争)으로 표기한다. 그리고 홍콩마카오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기반을 완성한 요즘에는 이 전쟁을 아르헨티나가 고유 영토를 되찾기 위한 정당한 전쟁이었다고 말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 정당성=중국이 홍콩과 마카오를 가져간 정당성"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


  1. [1] 다만 섬네일에 오류가 있는데, 포클랜드 전쟁 당시 양측 모두 FAL(정확히 아르헨티나는 복제품, 영국은 자체 라이센스 생산품)을 사용하였다.
  2. [2] 사실 칠레 피노체트 정권이 시행한 것을 그대로 도입한 신자유주의의 원조격 정책이다. 차이점이라면 칠레는 무분별한 외채와 외자 도입에 이자율 상승이 겹치면서 경제가 파탄날 뻔했지만 구조조정에 성공하면서 일단 한숨 돌렸고 군부가 물러는 났어도 일정 수준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반면에 아르헨티나 군부는 구조조정에 실패한 와중에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면서 철저하게 패망했다는 점이다.
  3. [3] 주민 1500명과 60만 마리의 양떼가 사는 곳에 영국 해병대 50명이 주둔하고있었다.
  4. [4] 당시 영국은 무상 의료 서비스를 하고 있었지만,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이 펼친 임금 삭감 정책 덕택에 아르헨티나의 의료비용이 외국인들 기준으로는 획기적으로 낮아져 본국 운수비용을 감안하면 큰 차이가 없었다.
  5. [5] 현재는 별개의 속령으로 분류되어 있다.
  6. [6] 위키피디아의 사우스 조지아 침략 항목 참고.
  7. [7] 어떤 부대는 총독의 항복 명령에도 불응하고 다른 곳에서 전투를 이어나가다가 제압당했다고도 한다.
  8. [8] 보통 한 곳에 서 있게 하거나 앉혀두는데 범죄자처럼 엎드리게 해놨다.
  9. [9] 특히 홍콩과 같이 경제적으로 발전한 곳이면서 사방이 인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10. [10] 말레이 해전에서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 함장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존 리치 대령의 아들이다.
  11. [11] 진주만 공습 당시 미국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자국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온 반응일 수밖에 없다. 아르헨티나의 친미적 성향도 레이건의 이런 반응을 이끌었지만 미국 입장에서 아르헨티나와 영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아무리 이빨이 빠진 사자라 하더라도 당연히 영국이다.
  12. [12] 이 당시 아르헨티나군 사진을 보면 미국 장비가 많다.
  13. [13] 링크1 링크2
  14. [14] 미군은 전선에 가까운 해외 기지를 이용할 수 있어서 초장거리 비행이 필요없었다. 다만 보안상의 문제로 1999년 유고 공습과 2001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B-2 스피릿이 아예 미 본토에서 목표지역 사이를 논스톱 왕복비행하기도 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는 인도양 디에고 가르시아 섬의 기지를 이용하여 그나마 비행거리를 줄일 수 있었다.
  15. [15] 연료가 부족하여 본국으로 귀환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포트 스탠리 비행장은 활주로가 짧아 미라지가 이착륙하기에는 무리인 곳이다. 그래도 미라지 1대가 연료 부족으로 비상 착륙을 시도했으나 새벽부터 영국군의 공습과 해상포격에 시달렸던 대공포 사수들이 오사로 격추시켰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전쟁 기간 중 해리어 4대를 격추했다.
  16. [16] 영국의 해리어는 아르헨티나가 쓰던 Matra 530과 Shafrir-2와는 비교불가인 AIM-9L을 사용했다.
  17. [17] 15,000 피트 이상, 3만 피트 이하
  18. [18] 고도 약 100피트
  19. [19]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총 7척 중 피닉스를 포함하여 무려 5척을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에 공여 또는 매각했다.
  20. [20] 이 두 척 또한 미국에서 공여받은 구축함이다. ARA Bouchard는 미국의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USS Borie(DD-704)였으며 1972년 아르헨티나 해군으로 재취역했다. ARA Piedra Buena도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USS Collett(DD-730)였으며 1977년 재취역했다. 두 척 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에 모두 참전한 역전의 노장이었다.
  21. [21] 정확히 말해서 제대로 된 작전 계획이나 규칙없이 투입되어 있었다는 게 포인트다. 대잠 전력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 전쟁 전인 4월에도 공중 수송이 대부분이었다.
  22. [22] 항공모함조차 항구에 짱박혀버리자 함재기들도 본토 기지에서 출격하게 되어 간당간당한 항속거리 내에서 작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함재기들이야 전부 A-4이었으나 영국도 미사일을 제외하면 해리어 또한 공중전에 유용한 기종은 아니었다.
  23. [23] 게다가 첫 날 이후로 최첨단 레이더 시스템까지 망가져 영국 해군 함정들이 포격 거리로 접근하기 전까지 알아챌 수도 없었다.
  24. [24] 격침시킨 어뢰는 타이거피시가 아닌 MK 8 어뢰였으나 경고사격 + 실사격 2발을 쏘기 위해서는 타이거피시 어뢰를 어쨌든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던 영국에서 먹히는 발언이었다.
  25. [25] 사실 이 기종들도 노후화되어 정확도에 문제가 좀 있었다.
  26. [26] 제40, 42, 45 해병 코만도, 육군 낙하산 연대 제2, 3대대 증원, 해병대 SBS 제2, 3, 6분대 증원, 육군 SAS D, G중대 증원
  27. [27] Scots Guards 연대 2대대, Welsh Guards 연대 1대대, 제7에든버러 공작의 구르카 연대 1대대
  28. [28] 수송선 전방에 수직이착륙을 위해 방염처리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아틀란틱 컨베이어를 항공모함이라고도 하는데 사실 2척의 항공모함에게 헬리콥터와 해리어를 전달하는 것이 임무이다. 컨테이너선에서 해리어를 운용한다는 사실이 워낙 놀랍다보니 항공모함이라고도 하지만 정확히 이야기하면 항공기 수송함이다.
  29. [29] 흔히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동서로 나뉘어있다고 인식하므로 의아해 할 수 있으나, 칠레 남단을 보면 푸에고 섬 근해에서 대서양 방향으로 열려있는 해안선이 확보되어 있다. 때문에 영국군 전폭기들이 이쪽을 돌아다니려면 칠레의 허가가 필요했다.
  30. [30] 정확히는 1976년
  31. [31] 히틀러를 막는 데 실패하여 2차대전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했다
  32. [32] 라 그랑드 나시옹, '위대한 조국'은 프랑스인들이 자국을 부르는 별명으로 유럽이 세계를 주도하던 당시 특히 앞서나가던 자부심을 드러낸다. 프랑스가 강대국의 지위에서 내려오고 자국 내외의 문제로 휘청이는 현대에도 꾸준히 쓰이며 프랑스인들의 애국심과 자국에 대한 자긍심을 보여주는 단어이다.
  33. [33] 설정상 주인공 히라가 다이치 키튼은 포클랜드전 참전용사
  34. [34] 그런데 요즘에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조차도 포클랜드 제도가 영국 영토라는 것을 사실상 인정하거나 그냥 영국 땅으로 인정하고 영국과 관계 개선을 하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제 "말비나스는 아르헨티나 땅이다!" 라고 소리지르면, 전쟁 때 진심으로 그렇게 외쳤던 사람들에 대한 야유의 의미가 더 강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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