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1세

1.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1.1. 초기 생애
1.3. 기타
1.4. 죽음
2.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

1.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신성 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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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프란츠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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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장인)

카를 7세

프란츠 1세

요제프 2세

1708년 12월 8일 ~ 1765년 8월 18일

신성로마제국프랑스인 황제

로렌 공작(1729~1737), 테셴 공작(1729~1765), 토스카나 대공(1737~1765), 오스트리아 대공(1740~1765), 신성 로마 제국 황제(1745~1765). 기타 칼라브리아 백작, 팔켄슈타인 백작[1] 등의 작위도 있으나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직위가 적다. 그나마도 오스트리아 대공 작위는 오스트리아 여대공인 아내의 부군 자격으로 얻은 타이틀이다.

연애 하나 잘 해서 졸지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까지 된 행운의 사나이. 16명의 자식을 둔 정자 신성 로마 제국과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 황실의 토대가 되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를 연 사람이다. 자기가 주도해서 연 것은 아니지만(…). 아울러 지나친 근친혼으로 악명 높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외부 유전자를 투입해줌으로 숨통을 트이게 한 은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황제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그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버지.

1.1. 초기 생애

리즈 시절 15세 때 모습.

알자스-로렌 지역에 위치한 로렌과 바(Bar) 공작령[2]의 후계자, 프랑수아 에티엥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의 딸로 프랑스 루이 14세의 친조카였다. 혈연상으로는 유럽 양대 강국 프랑스의 루이 15세나 훗날 아내가 되는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와 모두 친척지간이다. 위로 형이 셋이나 있었지만 줄줄이 요절해 로렌 공국 후계자가 된 건 1723년의 일이고, 그 이전에는 취미생활로 어릴 때부터 자연과학에 흥미를 보였으며 독학으로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독해나 작문, 라틴어에는 별 흥미가 없어서 아버지에게 타박을 받았다고. 하지만 당시 왕족으로서는 뛰어난 지능을 지녔음은 틀림 없다.

일반적으로 그의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와의 결혼은 연애결혼으로 알려졌으나 100%는 아니고 아버지 레오폴트 요제프(1679~1729)가 공공연히 프란츠를[3]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장가 보내려고 노력을 많이 해서 프랑스가 긴장하고 경고를 할 정도였다.

로렌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은 조상대부터 끈끈한 사이로 그의 할아버지 로렌 공작 샤를 5세는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활동하며 17세기 후반 투르크와의 전쟁 시절 오스트리아의 장군으로 맹활약한 인연으로 폴란드 왕에게 시집갔다가 나이 스물에 청상과부가 된 페르디난트 3세의 딸[4]과 결혼했다. 프란츠의 로렌 가문은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샤를마뉴의 후손으로, 로렌 지역을 7~800년 동안 지배하며 내려온 제법 뼈대 있는 가문인 데다 모계로 만토바곤차가 가문을 통해 동로마 제국의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피를 물려받기도 했다. 즉, 합스부르크 가문의 배필로 적합할 정도로 적당히 지체가 높고 고귀하면서도 너무 세력이 강하지도 않아 데릴사위감으로는 그야말로 만점이었다. 카를 6세는 페르디난트 3세의 손자이니 프란츠는 배우자인 마리아 테레지아와는 촌수로 8촌지간이 된다.

이런 인연으로 프란츠는 일찍이 빈의 궁정에 보내져 아버지 레오폴트 요제프와 카를 6세의 지지 아래 1723년부터 신랑수업(?)을 받았고, 1729년 아버지 레오폴드 로렌의 사망 후 잠시 귀국, 로렌 가문을 물려받고 아버지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에게 받았던 테셴 공작령[5]의 계승을 승인받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수도 에 다시 방문하면서 삶의 경로가 결정되었다. 10살 연하인 카를 6세의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란츠에게 플래그가 꽂혀버린 것. 이제 빼도박도 못 한다 카를 6세는 당시까지도 아직 아들 낳기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6] 프란츠의 인성이나 지성이 쓸 만하고 가문의 상황도 합이 맞으므로 혹시 모를 사태로 인해 합스부르크가의 계승자가 될지도 모를 맏딸의 배우자로 괜찮다고 판단, 결혼에 찬성했다. 결국 이런저런 혈연과 국제정세와 동맹 등의 사정으로 양가의 승인과 주변 열강의 양해를 얻어[7] 1736년 2월 결혼에 골인했다.

그러나 이 당시 오스트리아(카를 6세 치하)는 러시아와 연합해 스페인-프랑스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에 로렌 공국은 당연히 전통적인 동맹에다 친인척인 오스트리아 편을 들었다. 그런데 전쟁 중 오스트리아는 라인란트, 로렌 지역 일대 및 나폴리와 시칠리아에서 스페인에게 패배해 이곳들을 뺏겼다.[8] 한편 그 와중에 스페인-프랑스가 밀고 있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스타니스와프 1세)는 그단스크에서 포위되어 러시아의 공세를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고 프랑스가 해상에서 그를 구원하는 데 실패하면서 결국 프로이센으로 탈출하기에 이른다. 이쯤 되자 결국 전쟁의 향방은 안드로메다로 가기 시작했고, 영국과 네덜란드가 상대편인 오스트리아 편에 붙을 것을 우려한 프랑스가 결국 수세에 몰려있던 오스트리아와 평화조약을 맺기로 타협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민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폴란드 국왕으로는 3세)가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고, 오스트리아는 각국이 승인한 국사조칙을 재확인했고 프란츠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을 승인받았으며, 미래의 사위 프란츠가 로렌 대신 토스카나와 파르마를 얻으면서 영토적으로 오스트리아와 연속된 부유한 북부 이탈리아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게는 로렌 지방을, 스페인에게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사르데냐 왕국에게는 롬바르디아의 일부인 노바라와 토르토나를 양도하고 대신 토스카나, 파르마, 피아첸차를 얻었다. 스타니스와프가 로렌의 공작이 되는 대신 폴란드 왕위를 포기하고 아우구스트 3세를 인정했으며 대신 스타니스와프가 왕의 칭호를 유지하는 것까진 허용(…). 리보니아와 쿠를란트-젬갈렌에 대해서는 폴란드의 직접적 지배권이 인정되었으나 폴란드의 봉토로 남았고 이곳은 이후 러시아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놓이게 된다.[9]

그래서 800여년간 내려온 로렌 공작령을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장인[10]에게 반납하고[11] 대신 메디치 가문의 대가 끊어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대공으로 영지를 이전하는 비엔나 협약에 서명하게 되었다.[12] 프랑스 오를레앙 가문 출신인 어머니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으며[13] 프란츠 슈테판 본인도 해당 문서를 앞에 두고 결단을 내리지 못 해 여러 차례(3차례란 얘기가 있다) 펜을 내던진 것을 약혼자 마리아 테레지아가 매번 주워다 주어 결국 마지못해 서명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사실상 갈굼을 당하며(…) 어거지로 조상에게 물려받은 영지이자 고향과 맞바꾼 '꿩 대신 닭' 토스카나에 전혀 애착이 가지 않았던 프란츠는 1739년 딱 한 번 피렌체를 방문한 게 전부이고 대리인을 보내 대신 다스리게 했다. 때문에 그는 토스카나의 수도 피렌체 시민들의 경멸을 받았다.[14]

한편 로렌의 샤를(카를 알렉산더)이라 불린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이 남동생이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져 결혼에 골인하는 바람에 겹사돈 관계가 되어버렸다.[15]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은 20대 때 출산 중 사망,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후손은 프란츠와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만 이어진다.[16]

1.2. 허수아비

1736년,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을 한 프란츠는 공식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 상속자의 부군이 되었지만 궁정 사람들은 프란츠를 그리 존경하지 않았다. 극장에 들어갈 때 궁중법도에 따라 서열 2위의 대우를 받는 등, 어딜 가나 부인의 아랫서열, 하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전하라는 호칭으로 불리지조차 못 했다. 그때만 해도 아들 못 낳는 것은 여자의 잘못이었지만 이 부부는 셋째 아이까지 딸이 태어나자 온 궁정이 프란츠 1세 탓을 했을 정도니… 생물학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거기에 궁중 안팎에 자기 편이 전혀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 프란츠 슈테판은 죽을 때까지 독일어를 배우지 않고 프랑스어만 썼기에 빈의 시민들은 그를 외국인이라며 비난했다.

카를 6세가 죽은 1740년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명목상으로 공동통치했으나, 이것은 남편의 체면을 고려한 의전상의 명목이고 사실은 실권자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허수아비 신세였다. 중요한 건 아내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전부 결정했다. 뭐, 사실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도 아닌 외지인을 공동 통치자라고 불러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부부간에 트러블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자리를 이어받고 상속령을 승계했지만 주변국들이 여성 승계를 트집잡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터지고 오스트리아와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는 위기를 겪었다. 카를 6세 생전 국사조칙을 승인했던 나라들이 일제히 뒤통수를 쳤던 것. 먼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대왕)은 국사조칙 승인을 대가로 슐레지엔을 내놓으라고 진상 강짜를 부렸다. 프란츠 1세는 카를 6세가 물려준 허약한 병력으로는 전쟁을 이기기 어려우므로 일단 프로이센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경험이 부족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반대했다.[17] 그 후로도 막후에서 꾸준히 교섭을 시도해보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꾸준히 프란츠를 압박했다. 방문이나 커튼 뒤에서 회담을 엿듣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프란츠가 양보할 것 같은 기색을 보이면 강아지 부르듯이 남편에게 신호를 보냈다고. 결국 이 사건 이후 절대로 내정에 간섭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드러워서 안 한다 안 해 이런 데서 보이듯 프란츠도 국사에 재능이 없었다고 보긴 어렵다.[18]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1년 6월부터 헝가리 여왕에 즉위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의회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연설에 감동 먹은 것과 별개로 남편과의 공동왕위는 인정하지 않았고, 그가 왕비도 아니라는 이유(…)로 아내의 대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마차 안에 앉아 아내의 대관식을 지켜봤다고 한다. 토스카나 대공으로서 외국 군주의 자격으로 참석하면 여왕의 부군 정도는 아니어도 외국 군주의 예우를 받을 수 있었는데 굳이 쿨하게 넘긴 걸 보면 애초에 오스트리아고 토스카나고 별 관심도 없는 터에 헝가리 정도는 더 관심이 없었던 것도 같다. 프란츠 1세는 이후 헝가리 의회에도 당연히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19]

한편 당시 돌아가는 상황은 오스트리아나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헝가리를 제외한 제국의 나머지 지역들은 왕권 승계가 혼란해진 틈을 타 제국을 이탈하려 했던 것이다. 보헤미아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에게 보헤미아 국왕[20] 자리를 조공으로 바치고 충성을 맹세한 데다 합스부르크 영지의 독일인 귀족들도 대거 이탈해 바이에른에 붙어버리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심지어 카를 알브레히트는 프랑스의 도움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로 즉위하기에 이른다.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는 일단 남편이 원래 하자고 했던 대로 일단 프로이센과 타협해 한 숨 돌리는 동시에 바이에른을 집중적으로 조지면서 복수를 시작한다. 3년 후 1745년 카를 7세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의 후계자와 프리드리히 2세의 동의로 프란츠 슈테판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로 옹립하는 데 결국 성공했다.[21]

이렇게까지 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다시 되찾은 것은 이 자리가 동남쪽에 치우친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일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필수적인 자리였기 때문이다. 프로이센 같은 영방내 강대국도 어쨌든 명목상으로는 황제의 신하이기도 하고, 다른 선제후들은 권력이 강하니 내버려두더라도 제국내 수많은 교회령과 기사령, 제국도시에 대해 황제로서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었다. 나머지 소국들도 마찬가지였고. 아울러 교회나 교황에 대한 영향력에서 '황제'로서와 그냥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수장'으로서 발휘하는 힘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프란츠는 1744년 프랑스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전쟁에 참가하려 했으나 아내의 제지로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대신 동생이자 동서지간이 되는 카를(샤를) 알렉산더가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믿었던 동생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연신 털렸다. 안습. 그래도 아내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과 남편의 동생, 그리고 자신의 동생의 체통을 고려해 계속 묻지 마 기용을 해줬다. 카를(샤를)은 절치부심해서 뒤이은 1756년 7년 전쟁에서는 몇 번 정도 프로이센군을 격파하지만, 또 결정적일 때 호구잡히면서 결국 스스로 사임하는 안습함을 보여주었다.

안습한 허수아비 생애 때문에 얄짤없는 데릴사위로 보이지만 이 사람은 그래도 자기 가문도 명목상으로는 물려줬다. 결혼하면서 자신의 가문인 로트링겐(로렌의 독어식 표현)과 부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합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이 성립했기 때문.

현대에 와서는 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라인이 합스부르크 가문에게도 로렌 가문에게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혈통이지만 유럽 최고 가문 중 하나로서 합스부르크의 위상이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후손들은 로렌보다는 합스부르크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 후계자들이 프랑스 쪽보다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점에서도 그렇고… 때문에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의 오스트리아 황실에 대한 서술을 보면 적어도 일반인 쪽에서는 압도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라고 칭한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대계 미국인 프레더릭 모턴이 쓴 글을 봐도 합스부르크 가문이라고 일방적으로 칭한다. 로렌 가문 지못미 본래 유럽의 왕가는 영주로부터 비롯된지라 지배하는 지역에 따라 성이 붙는데, 명목상의 로렌 공작 작위는 루이 15세 장인에게 넘어갔다가 프랑스에 합병되면서 없어졌고 로렌 지방은 프랑스에 뺏겼기에 굳이 '로렌'이라는 이름을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쨌든 양자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친가와 처가나 입적 가문의 성을 같이 붙여 쓰는 게 유럽의 전통이라[22] 정식으로 칭하자면 합스부르크-로트링겐으로 부르는 게 맞다.

1.3. 기타

그래도 가정에서는 아내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금슬이 좋아[23] 슬하에 자식이 무려 16명이나 되었다. 정자왕 자식들에 대한 내용은 마리아 테레지아 항목 참조. 자식들 세부 내용을 아내 항목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프란츠 1세가 얼마나 듣보인지 알 수 있다 엄격하고 깐깐한 마리아 테레지아와 달리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였으나 아이들의 어리광만 받아주고 교육이나 장래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여러 가지 이유로 아내, 다른 남매들과 어울리지 못 하고 겉도는 차녀(장녀가 3살 때 죽었으므로 사실상 장녀)의 총명함과 성실함을 거의 유일하게 알아주었으며 무척이나 아껴서 자신이 죽기 전까지 차녀가 궁전에서 추방되는 것을 막으며 보호해주었다.[24]

경제에도 일가견이 있어 7년 전쟁 이후 피폐해진 오스트리아의 재정[25]을 부유하게 했다. 그야말로 천재적인 장사 수완을 발휘했는데, 7년 전쟁 당시에는 적국이었던 프로이센에게 말사료, 식량 등의 보급물자를 엄청난 가격에 팔아 막대한 폭리를 취했고 근데 이거 이적행위 아닌가? 한편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 영지내에서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고[26] 환전과 송금, 융자, 예금 등의 업무를 맡는 기관을 설립해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기도 했다. 이 당시 그가 벌어놓은 재산이 얼마나 대단한 규모였냐면, 다른 나라들은 국가 예산 중 왕실 예산을 편성했으나[27] 오스트리아 황실은 별도의 왕실 예산이 없었는데도 후대의 자손들이 그가 쌓아놓은 재산의 이자만으로 지내고도 돈이 남았다고. 7년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를 발행했을 때 프란츠 슈테판이 보증을 서서 국채 발행에 성공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자연과학과 문화에도 관심이 많아 쇤부른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28]하고 곤충과 광석 컬렉션을 완성시키기도 했다. 당시 자연과학과 식물, 동물 연구를 하는 것은 학자나 지성인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1.4. 죽음

1765년 8월 18일, 차남 레오폴트의 결혼식을 축하하러 갔다가 인스브루크에서 뇌졸중으로 급사했다. 아내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궁전에 그를 위한 방을 만들었고 내내 상복만 입으며 남은 평생을 애도하며 지냈다. 허수아비 주제에 여자 문제로 마음고생시키기도 했었지만 그래도 남편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었던지 남편 사후의 여제는 급속하게 망가진다. 나이가 듦과 동시에 스트레스를 식욕으로 풀면서 급속하게 살이 찌기 시작했고 성격도 비관적이고 우울하게 바뀌었다고 한다.

2.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

페르디난트 1세

레오폴트 2세의 아들로 1번 항목의 손자. 사상 최고의 근성남, 가장 증오스러운 사위를 둔 장인 등으로 불린다.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서는 프란츠 2세이며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로는 프란츠 1세이다. 자세한 내용은 프란츠 2세 항목을 참조.


  1. [1] 팔켄슈타인 백작의 이름은 나중에 이 작위를 물려받은 장남 요제프 2세가 가명으로 활용했다.
  2. [2] 로렌은 신성로마제국의 봉신이고, 바 공작령은 프랑스왕국 권역이다. 로렌가문은 신성로마제국 제후이기에 다른 나라 왕족과 동등 혼인이 가능한 동시에 프랑스 궁정에서도 로렌가문 분가인 기즈 가문, 사보이 공작가, 카페 방계 부르봉가문과 더불어 준왕족 취급을 받았다.
  3. [3] 1723년 이전엔 당연히 자신의 상속자 프란츠의 형 레오폴트 클레멘트 로렌(1707-1723)을 밀었다.
  4. [4] 레오폴트 1세의 이복누이이다.
  5. [5] 본래 폴란드 땅이었으나 보헤미아 왕국이 빼앗았다가 보헤미아 왕 자리를 합스부르크가 차지하게 되면서 오스트리아에 속하게 된 땅이다. 프란츠 슈테판의 부친 레오폴드 로렌은 가까운 친척이었던 이탈리아의 몬페라토 공작이 후계자 없이 죽자 그 계승권을 요구했는데, 이 지역의 계승권은 카를 6세가 사보이 공국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동맹의 대가로 이미 약속한 뒤였으므로 대신 자신의 테셴 공작령을 떼어주었다. 어차피 로렌은 합스부르크의 친척이기도 했고. 이후 현대엔 폴란드와 체코가 모두 영유권을 주장해 오늘날의 톄신(체코), 치에쉰(폴란드) 지역으로 나뉘었다.
  6. [6] 국사조칙은 아들을 못 낳을 것을 대비한 보험용이었다. 1713년 자신이 즉위하자마자 공표했는데, 마침 유일한 아들이 태어났으나 요절하고 그 후 맏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났다. 국사조칙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카를 6세 항목을 참조할 것.
  7. [7] 동맹국 영국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유럽의 다른 왕국의 군주와 혼인해 동군연합이 되는 것에 반대했고 프랑스는 로렌 공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이 합쳐지는 걸 밥통 싸들고 반대, 그 결과 한 판 붙는다.
  8. [8] 다행히도 상대편이었던 스페인-프랑스 역시 이탈리아 원정에서 더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
  9. [9] 1738년 빈 조약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메디치 가 토스카나 대공이 생각보다 오래 살아서(?) 1738년에야 사망해서 발효된 것이지 1735년에 빈에서 이미 예비조약으로 조건은 합의되었다.
  10. [10] 폴란드 왕위는 결국 오스트리아-러시아가 지지한 아우구스트 3세가 다시 회복, 유지했다. 그리고 이 아우구스트 3세에게 왕위를 빼앗긴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스타니스와프 1세)가 루이 15세의 장인이다(…).
  11. [11] 하필이면 로렌 지방을 프랑스 왕이 아니라 왕의 장인에게 돌렸느냐 하면,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폴란드 왕위를 포기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위로의 일환(…)이기도 했기 때문. 그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사실상 사위가 장인에게 여생이나 보내란 식으로 준 것이나 다름 없었고, 그의 사후 로렌은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었다.
  12. [12] 토스카나는 메디치 가의 혈통이 끊어진 후 스페인 부르봉의 돈 카를로스 왕자가 소유권을 주장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전쟁 중 점령하고 스스로 즉위한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을 그대로 갖는 대신 토스카나의 소유권 주장을 포기하며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오스트리아에 넘겼다.
  13. [13] 어머니와 달리 동생 카를 알렉산더는 야심가에 출세 지향적 성격이라 형의 결혼과 조상 땅 팔아먹는 것을 적극 찬성(?)했다.
  14. [14] 더구나 오스트리아군이 토스카나를 장악하고서 곧바로 피렌체 내의 메디치 가와 관련된 상징들을 떼어놓았기 때문에 민심이 더욱 떠나갔다.
  15. [15] 장인 카를 6세는 로렌 가문과 너무 가까워지는 걸 경계해 이 결혼을 반대했다. 때문에 그들은 카를 6세가 죽은 후에야 결혼할 수 있었다.
  16. [16] 로렌의 샤를(카를 알렉산더)는 7차 투르크 전쟁과 벨기에 총독으로 활약하고 이후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형 빽으로 장군이 된다. 그리고 로트링겐 공작 칭호를 죽을 때까지 사용했는데 그냥 명목상 타이틀이고 실제 로렌 공국은 1766년에 프랑스에 합병되면서 없어진 게 맞다.
  17. [17] 마리아 테레지아 항목에도 나오지만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가 아들을 낳으려고 끝까지 욕심 부려서) 후계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 했던 데다 10대 때부터의 임신으로 인해 국제정세나 군대에 대해 남편만큼 잘 알지는 못 했다.
  18. [18] 다만 마리아 테레지아도 경험이 쌓이면서 각성하기 때문에 이쪽은 주목을 여전히 못 받는다…
  19. [19] 몇 년 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의 권한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요청해 헝가리 의회에서 공동 통치자로 인정받긴 한다.
  20. [20]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자리이기도 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전까지 몇백 년간 독점했다.
  21. [21] 마리아 테레지아가 굳이 자신 대신 허수아비인 남편을 황제의 자리에 앉힌 것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오직 남성밖에 승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프란츠 1세가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먼저 죽자 후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는 바로 아들인 요제프 2세가 이어받았다. 이후 아들이 어머니의 새로운 허수아비가 된 건 안 자랑
  22. [22] 여러 대에 걸쳐서 가문이 합쳐지거나 양자로 가거나 하면 김수한무두루미~처럼 가문명이 엄청나게 길어진다. 성이 길수록 가문의 역사 추정(?)이 가능할 지경.
  23. [23] 사실 바람을 숱하게 많이 피웠다. 허수아비 데릴사위 주제에 무슨 깡으로? 폐위당하고 싶어서 작정했나? 자존심 강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내연녀들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24. [24] 차녀는 거의 모든 형제와 원만하게 지내지 못 했고, 특히 동생 요제프와 그의 아내 이사벨라와는 원수지간이어서 한때는 프란츠마저도 그녀를 외면했었다. 프란츠와 차녀는 그래도 얼마 안 가 화해하고 잘 지냈지만, 남매들간의 관계만은 개선의 여지가 없어서 결국 프란츠가 죽고 요제프가 왕위에 오르자 궁에서 쫓겨났다.
  25. [25] 7년 전쟁 비용으로 국가 수입의 11년치를 꼴아박았다.
  26. [26] 정확하게는 자신의 지위에서 비롯된 신용을 담보로 한 거다.
  27. [27] 예컨대 18세기 프랑스는 국가예산의 3%가 왕실 예산이었다.
  28. [28] 지금도 비엔나 쇤부른 궁전의 정원에 있어서 많은 관광객들이 궁전 내부를 보고 난 후 구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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