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자파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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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프랭크 자파
FRANK ZAPPA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95년

후보자격 연도

1992년

후보선정 연도

1993년, 1994년,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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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자파의 주요 수상 이력

미국 의회도서관 영구 등재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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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등재

프랭크 시나트라, <Songs for Young Lovers> (1954)
마일스 데이비스, <Kind of Blue> (1959)
밥 딜런, <The Freewheelin' Bob Dylan> (1963)

2004년 등재

로버트 존슨, <The Complete Recordings> (1936-1937)
베니 굿맨, <Carnegie Hall Jazz Concert> (1938년 1월 16일)
글렌 굴드, <Goldberg Variations> (1955)
엘라 피츠제럴드,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
델로니어스 몽크, <Brilliant Corners> (1956)
찰스 밍거스, <Mingus Ah Um> (1959)
주디 갈란드, <Judy At Carnegie Hall> (1961)
비틀즈,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
조니 캐시, <At Folsom Prison> (1968)
캐롤 킹, <Tapestry> (1971)
마빈 게이, <What's Going On>
브루스 스프링스틴, <Born to Run> (1975)

2005년 등재

존 콜트레인, <Giant Steps> (1959)
제임스 브라운, <Live at the Apollo> (1963)
비치 보이스, <Pet Sounds> (1966)
존 윌리엄스, <Star Wars> (1977)
퍼블릭 에너미, <Fear of a Black Planet> (1990)
너바나, <Nevermind> (1991)

2006년 등재

뮤지컬 '쇼보트(Show Boat)' 앨범 (1932)
데이브 브루벡, <Time Out> (1959>
비비 킹, <Live at the Regal> (1965)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Are You Experienced> (1967)
프랭크 자파 앤 더 마더스 오브 인벤션, <We’re Only In It For the Money> (1968)
스티비 원더, <Songs in the Key of Life> (1976)
소닉 유스, <Daydream Nation> (1988)

2007년 등재

피트 시거, <We Shall Overcome> (1963)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 니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 <Burnin'> (1973)
사라 본, <Live in Japan> (1973)
폴 사이먼, <Graceland> (1986)

2008년 등재

조니 미첼, <For The Roses> (1972)
허비 핸콕, <Head Hunters> (1973)
마이클 잭슨, <Thriller> (1982)

2009년 등재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57)
더 후, <My Generation> (1966)

2010년 등재

뮤지컬 '집시'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59)
빌 에반스 외, <The Complete Village Vanguard Recordings> (1961년 7월 25일 녹음)
더 밴드, <The Band> (1969)
패티 스미스, <Horses> (1975)
윌리 넬슨, <Red Headed Stranger> (1975)

2011년 등재

캡틴 비프하트, <Trout Mask Replica> (1969)
스틸리 댄, <Aja> (1977)
데 라 소울, <3 Feet High and Rising> (1989)

2012년 등재

부커 T. 앤 더 엠지스, <Green Onions> (1962)
러브, <Forever Changes> (1969)
프린스, <Purple Rain> (1984)

2013년 등재

사이먼 앤 가펑클, <Sounds of Silence> (1966)
핑크 플로이드, <The Dark Side of the Moon> (1973)
라몬즈, <Ramones> (1976)
비지스 외, <Saturday Night Fever> (1977)

2014년 등재

아트 블래키, <A Night at Birdland(Volumes 1 and 2)> (1954)
본 미더, <The First Family> (1962)
린다 론스태드, <Heart Like a Wheel> (1974)
뮤지컬 '스위니 토드'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79)
U2, <The Joshua Tree> (1987)

2015년 등재

조안 바에즈, <Joan Baez> (1960)
더 도어스, <The Doors> (1967)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Stand!> (1969)
라디오헤드, <OK Computer> (1997)
로린 힐,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1998)

2016년 등재

존 콜트레인, <A Love Supreme> (1964)
산타나, <Abraxas> (1970)
메탈리카, <Master of Puppets> (1986)

2017년 등재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People> (1964)
데이빗 보위,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
이글스, <Their Greatest Hits (1971–1975)> (1976)
토킹 헤즈, <Remain in Light> (1980)
N.W.A, <Straight Outta Compton> (1988)

2018년 등재

메를 트래비스, <Folk Songs of the Hills> (1946)
해리 벨라폰테, <Calypso> (1956)
사운드 오브 뮤직 사운드트랙 (1965)
스티브 라이히, 리처드 맥스필드, 폴린 올리베로스, <New Sounds in Electronic Music> (1967)
플리트우드 맥, <Rumours> (1977)
Run-D.M.C., <Raising Hell>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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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Zappa

본명

프랭크 빈센트 자파 (Frank Vincent Zappa)

출생

1940년 12월 21일 , 미국 메릴랜드볼티모어

사망

1993년 12월 4일 (52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엔젤레스

국적

미국

직업

음악가, 작곡가, 프로듀서, 사회운동가, 영화 감독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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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공식 홈페이지

묘소

웨스트 우드 빌리지 메모리얼 공원 묘지

학력

채피 대학교 중퇴 (1959년)

종교

무종교 (무신론)

활동 기간

1955년 ~ 1993년

데뷔

1966년 1집 <Freak Out!>

장르

, 실험음악, 재즈, 클래식, , 아방가르드, 두왑

악기

보컬, 기타, 베이스, 건반 악기, 드럼, 퍼커션

신체

183cm

민족

이탈리아계 미국인

가족

부모

프란시스 자파, 로즈 마리 콜리모어

배우자

케이 셔먼 (1960년 ~ 1964년: 이혼)
게일 자파 (1967년 ~ 1993년: 그의 사망)

자녀

문, 위질, 아멧, 디바 / 2남, 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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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와 신인 시절
2.2. The Mothers of Invention 시절
2.3. The Mothers 시절 1
2.4. The Mothers 시절 2 & 소송 전쟁
2.5. 솔로 활동
2.6. 말년
3. 유명인들의 평가
4. 수상 경력
5. 음악적 특징
6. 사회 참여
7. 사생활
8. 여담

1. 개요

미국음악가이자 작곡가, 프로듀서, 영화감독. 30년이라는 기간 동안, , 재즈, 재즈 퓨전, 아방가르드, , 관현악, 메탈, 일렉트로닉, 구체 음악 등 폭 넓은 장르[2]의 다양한 음악을 작곡했고 60장이 넘는 솔로 앨범을 내놓았다.[3] 또한 장편 영화와 뮤직 비디오를 감독했고, 앨범 커버를 디자인했다. 온갖 장르의 음악을 섭렵하고 찬사와 논쟁을 시도때도 없이 불러일으킨 음악의 본좌로 꼽히며 또한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그리고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만든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이자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으로 평가 받는다.

비평가들과 동료 음악가들로부터 폭넓은 찬사를 받았으며 위의 상술했듯이 매우 생산적이고 다작하는 예술가였다. 특히 유럽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대부분의 경력 동안 독립 예술가로 일했다. 또한 프랭크 자파의 음악적 영향력은 여전히 음악가와 작곡가들에게 주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사후인 현재에도 프랭크 자파의 음악은 음악애호가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2. 생애

2.1. 유년기와 신인 시절

볼티모어의 이탈리아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천식 등의 질환으로 고생했고, 이 때문에 요양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남서부의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주로 그 곳에서 자랐다. 열두 살 때 스네어드럼을 생일 선물로 받으면서 음악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당시 또래들은 전혀 또는 거의 관심이 없던 에드가 바레즈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의 근현대 음악에 강한 관심을 보이는 등 일찍부터 꽤 특이한 성향을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교내 R&B 밴드에서 드럼을 쳤고, 이 때 훗날 캡틴 비프하트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돈 밴 블리엣과 사귀면서 당대 유명 R&B 뮤지션들의 연주에 심취했다. 이 동안 기타도 배웠고, 1959년에는 처음으로 저예산 서부 영화의 OST 작곡과 연주를 담당하기도 했다. 1962년에는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녹음 스튜디오를 운영하던 폴 버프 밑에서 녹음 보조 역할로 일했는데, 버프의 스튜디오에는 당시로서는 최신 장비였던 5트랙 녹음기가 있었고 이 장비를 이용해 오버더빙 등의 녹음 기술을 익혔다.

이듬해인 1963년에는 캡틴 비프하트와 함께 스투츠(Stoots)라는 밴드를 결성했고, 재정난에 빠져 있던 버프의 스튜디오를 인수하고 자신의 이름에서 철자를 딴 스튜디오 Z로 개칭해 운영했다. 이 당시 자파는 밴드 공연과 녹음 활동 외에 독립영화 제작도 시도하고 있었는데, 이게 지역 언론에서 포르노 제작으로 와전되어 보도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경찰이 스튜디오와 자파의 집을 압수 수색했고, 자파는 불법 포르노 제작 혐의로 열흘 동안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풀려난 뒤에도 경찰에서는 압수한 녹음 테이프의 일부만을 돌려주고 나머지는 임의 파기하는 등 추가로 엿을 먹였고, 이 사건 이후 자파는 공권력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2.2. The Mothers of Invention 시절

1964년에는 레이 콜린즈의 주선으로 지역 R&B 밴드인 더 소울 자이언츠(The Soul Giants)에 기타리스트로 가입했는데, 자파는 기타 연주 외에도 밴드의 자작곡 작곡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밴드의 리더로 거듭났다. 이듬해 5월에는 미국의 공휴일인 마더즈 데이에 맞추어 밴드 이름을 더 마더즈(The Mothers)로 개칭했다. 이 밴드는 당시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한 미국 서부의 언더 음악계에서 점차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듬해인 1966년에는 프로듀서 톰 윌슨의 눈에 들어 앨범 녹음 작업도 시작했다.

하지만 윌슨이 소속된 음반사인 버브에서는 밴드의 명칭이 욕설인 Motherfucker를 떠올리게 한다는 시덥잖은 이유로 이름을 바꿀 것을 요구했고, 결국 밴드 이름은 좀 더 길어져 더 마더즈 오브 인벤션(The Mothers of Invention)이 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이 밴드의 데뷰 앨범인 Freak Out!을 내놓았는데, 당대 R&B나 로큰롤에 뿌리박고 있으면서도 자파의 똘끼(...)가 유감없이 발휘된 음반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당시 미국 대중음악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대마초에 시험삼아 손을 대기도 했지만,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다고 여겨 포기하고 이후 평생 동안 어떤 마약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4]

1967년에는 동부의 뉴욕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고, 밴드의 2집 앨범인 Absolutely Free를 내놓았다. 이 앨범에서는 1집에서 보여준 똘끼를 그대로 갖고 오면서 오라토리오 풍으로 전체 앨범의 곡들을 묶어서 컨셉트 앨범의 선구자격인 앨범들 중 하나가 된다. 뒤이어 같은 해 낸 첫 솔로 앨범인 Lumpy Gravy에서도 자신의 두 클래식 우상들이었던 바레즈와 스트라빈스키에 대한 오마주를 보여주는 동시에 초기 샘플링이나 오버더빙, 디스토션 등의 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등 당대 대중음악신에서 매우 전위적인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듬해인 1968년에는 밴드의 3집인 We're Only in It for the Money를 발표했는데, 비록 음반사의 징한 간섭 때문에 여러 대목이 검열삭제된 채 발매됐지만 당시 미국 사회 주류의 꽉 막힌 가치관과 본래 취지를 잃고 변질되고 있던 히피 운동 모두를 까버리는 신랄한 가사와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 커버를 대놓고 패러디 하는 등 연이어 충공깽을 선사했다. 이 앨범에서부터 자파는 윌슨 대신 직접 프로듀스도 맡기 시작했고, 이후 발매되는 자파 관련 앨범들은 대부분 셀프 프로듀스로 제작되었다.

한편 같은 해 12월에는 그 동안의 전위적 경향에서 잠시 벗어나 당대 유행하던 두왑이나 서프 뮤직 스타일에 경도한 밴드 4집 Cruising With Ruben & The Jets를 내놓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고, 기존 음반사들의 고루한 운영 정책에 지쳤는지 Bizarre라는 이름의 독립 레이블을 차리고 거기서 밴드의 마지막 앨범이자 그 동안의 자파 앨범 중 가장 난해하기로 소문난 Uncle Meat를 내놓았다. 앨범 발표 후 자파는 밴드를 해산했고[5], 절친 캡틴 비프하트를 비롯한 이런저런 뮤지션들의 앨범을 프로듀스하면서 자신의 두 번째 솔로 앨범인 Hot Rats로 재즈 록 연주에 경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2.3. The Mothers 시절 1

1970년에 자파는 두 번째로 밴드를 결성했고, 밴드 이름은 버브의 요구로 교체되기 이전의 명칭인 더 마더즈를 그대로 갖다썼다. 첫 앨범은 같은 해 마찬가지로 자파의 레이블에서 발매된 Chunga's Revenge였고, 이 앨범에서는 기존의 1기 마더즈 앨범에서 보여준 엄청난 혼란과 짬뽕된 장르의 소용돌이에서 탈피해 좀 더 질서정연하고 절도있는 로큰롤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이듬해에는 자파가 밴드 활동을 하면서 찍은 영상들로 재구성한 영화 200 Motels[6]와 그 OST가 발매되었고, 곧 미국과 유럽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일정 중 12월에 스위스의 몽트뢰 카지노에서 공연하다가 어떤 또라이가 저지른 방화로 인해 비싼 악기와 장비들 뿐 아니라 공연장 전체가 홀랑 타버리는 사건이 터졌고,[7] 며칠 뒤 간신히 장비들을 빌려서 치른 런던 공연에서는 또 한 명의 또라이가 무대에 난입해 공연 중이던 자파를 밀쳐 무대 밑의 오케스트라 피트로 떨어뜨리는 사건이 이어졌다. 이 사고로 자파는 심한 골절상을 입어 한 동안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고, 밴드의 보컬이었던 플로 앤 에디(Flo & Eddie)[8]도 이 때를 전후해 탈퇴하면서 2기 마더즈는 단명하고 말았다.

2기 마더즈의 와해 후에는 잔류 멤버들과 세션 뮤지션들로 빅 밴드를 구성해 Waka/Jawaka와 The Grand Wazoo 두 앨범으로 Hot Rats에서 보여준 재즈 록을 확대한 음악을 선보였고, 1972년 9월에 건강을 회복한 뒤에는 이 멤버들로 미국 투어를 한 차례 가지기도 했다.

2.4. The Mothers 시절 2 & 소송 전쟁

1973년에 자파가 세운 첫 독립 레이블인 Bizarre가 해산되자, 자파는 마더즈 1기 이래 자신의 매니저였던 허브 코엔과 공동으로 DiscReet Records라는 두 번째 독립 레이블을 만들었고, 여기서 3기 마더즈를 이끌고 Over-Nite Sensation을 발매했다. 이 앨범에서도 자파는 재즈 록과 R&B, 로큰롤 3대 기조를 유지하면서 물오른 연주력과 작곡 실력을 과시했다. 이듬해에는 솔로 앨범 Apostrophe (')를 내놓았고, 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 10위에 오르는 등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같은 해 마더즈 결성 10주년 기념으로 전미 투어를 가졌고, 1975년 마더즈 명의로 제작한 마지막 앨범인 One Size Fits All을 끝으로 밴드를 최종 해체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캡틴 비프하트와 순회 공연을 가지고 그 실황으로 Bongo Fury라는 라이브 앨범을 발매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76년에 오랜 동업 관계를 맺고 있던 허브 코엔과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자파는 코엔이 공동 레이블의 수익을 삥땅치고 있다고 주장하며 코엔을 고소했고, 코엔도 지지않고 자파를 맞고소하면서 오랜 법정 공방으로 이어졌다. 법원에서는 최종 판결이 있기까지 자파의 녹음 테이프들을 증거물로 동결했고, 자파는 재판이 끝날 때까지 이 테이프들에 손도 대지 못했다.

소송드립 속에서 자파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DiscReet Records 대신 그 배급을 맡고 있던 워너브라더스와 직접 접촉해 LP 네 장짜리 대작 Läther의 발매를 위해 교섭했지만, 워너 측은 자파의 제안을 거절했다. 자파는 다시 경쟁사 머큐리 측에 접근해 앨범 발매 계약을 따냈지만, 이번에는 워너가 자파의 음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딴지를 거는 바람에 또 무산되었다. 빡친 자파는 파사데나의 KROQ 라디오 방송국에서 자신의 소유였던 앨범 마스터 테이프 전부를 방송했는데, 이 방송을 누군가가 녹음해 해적판으로나마 발매해 줬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자파는 이 방송으로 인해 워너와도 법정 공방을 벌여야 했고, 워너 측에서는 Läther 앨범을 1977~79년에 걸쳐 자파의 허가 없이 Zappa in New York, Studio Tan, Sleep Dirt, Orchestral Favorites 네 장의 앨범으로 난도질해 발매했다.[9] 자파는 당연히 이 무단 발매 건에 대해서도 고소미를 먹였고, 1979년에야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2.5. 솔로 활동

코엔 및 워너와 벌인 지루한 소송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79년 가을에 자파는 세 번째 독립 레이블인 Zappa Records를 만들었고, 여기서 자파의 역대 앨범들 중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문제작 Sheik Yerbouti를 내놓았다. 겉보기에는 무슨 아랍 음악 앨범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Shake Your Booty(니 궁디나 흔드셔)를 아랍어 스타일로 패러디한 타이틀이었고, 재즈 록 시대보다 더 직설적인 음악과 가사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수록곡 중 Jewish Princess는 유대인과 여성을 모두 씹어버리는 신랄한 가사로 인해 미국 내 인권 단체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곧이어 핑크 플로이드더 후 스타일의 록 오페라 컨셉으로 Joe's Garage를 내놓았고, 이 앨범에서는 미국의 음반 사전검열 제도에 디스를 거는 등 계속 사회비판적인 내용의 곡들을 삽입했다. 1980년에는 초기 활동기 이래로 오랜 희망사항이었던 개인 스튜디오 Utility Muffin Research Kitchen(약칭 UMRK)를 집에 만들었고, 이후 제작된 거의 모든 자파의 앨범들은 여기서 제작되거나 믹싱/마스터링을 거쳐 발매되었다.

하지만 새로 출범한 Zappa Records도 배급사인 머큐리와 갈등을 빚어 음반 발매가 순탄하지 못했고, 자파는 또다시 새로운 독립 레이블인 Barking Pumpkin을 출범시켜 1978~80년 동안의 실황을 편집한 Tinseltown Rebellion을 발매했다. 1980년에는 통신판매 형식으로 자신의 기타 솔로 위주 연주가 담긴 컴필레이션 앨범인 Shut Up 'n Play Yer Guitar를 발매했고, 이 시리즈는 1988년까지 두 차례 더 발매되었다.

이 시기 동안에는 주기적으로 시도해온 클래식 관현악단과의 협연 작업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고, 켄트 나가노가 지휘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자신의 곡들을 관현악 편곡한 앨범 두 장을 1983년과 1987년 두 차례 발매하기도 했다. 비록 자파 자신은 두 앨범의 완성도에 만족하지 못했지만, 이후에도 여러 차례 관현악단과 협연하거나 직접 지휘까지 맡아 하면서 이 방면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관현악단과의 연주나 앨범 작업 외에도 연주와 샘플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당시로는 최신 전자악기인 신클라비어(Synclavier) 연주도 이 시기에 적극적으로 시작했고, 1984년에 당대 본좌급 현대음악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피에르 불레즈 지휘의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과 협연한 앨범인 The Perfect Stranger에서도 신클라비어 연주를 오버더빙했다. 같은 해 활동 20주년을 기념해 월드 투어를 가졌고, 가상 브로드웨이 뮤지컬 컨셉으로 Thing-Fish라는 앨범을 발매하거나 자신과 이름이 비슷한 18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프란체스코 자파의 작품들을 신클라비어로 연주한 음반을 내놓는 등 온갖 형태와 장르의 음악에 도전했다.

1985년에는 당시 갓 설립된 PMRC(Parents Music Resource Center)의 음반 사전 심의 제도[10]에 반대해 의회의 공청회에서 해당 단체의 간부들과 설전을 벌였고, 이 당시의 논쟁 녹음을 샘플링해 Frank Zappa Meets The Mothers Of Prevention이라는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자신의 밴드 마더즈의 이름을 셀프 패러디한 앨범이기도 했는데, 비록 시전 심의제의 폐지라는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이 아직 여전한 반골 정신을 지니고 있음을 어필했다.

2.6. 말년

1988년에 자파는 생애 마지막이 된 대규모 순회 공연을 개최했는데, 비록 이 공연은 중간에 자파와 밴드 멤버들 사이의 불화로 중단되기는 했지만 Broadway The Hard Way라는 걸출한 라이브 앨범으로 만들어졌다. 이 앨범에서도 자파는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제시 잭슨 같은 거물급 정치인, 텔레비전 개신교 선교사 짐 바커와 팻 로버트슨, 심지어 마이클 잭슨까지 까버리는 전방위 디스를 걸어 화제가 되었다.

이어 이듬해인 1989년에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고, 자서전 The Real Frank Zappa Book을 출간했다. 하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자파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고, 1990년에 전립선암 선고를 받은 뒤에는 공연 활동을 줄이고 자택에서 작곡과 기존 실황녹음들의 편집과 재발매 등의 작업에 주력했다.

특히 이 마지막 시기에는 존 케이지칼하인츠 슈톡하우젠 등 현대음악계의 끗빨날리던 작곡가들과 함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고, 1992년에는 편곡자 알리 아스킨의 도움으로 독일의 현대음악 전문 공연 단체인 앙상블 모데른과 자신의 작품으로 구성한 콘서트를 준비했다. 9월 17일부터 28일까지 프랑크푸르트베를린, 에서 가진 마지막 공식 콘서트들의 실황이 편집되었고, The Yellow Shark라는 이름으로 자파 생전에 나온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공연 이후에는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 칩거하면서 투병하다가 1993년 12월 4일에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52세로 세상을 떴다. 유해는 사망 다음날 간단한 가족장을 치른 뒤 웨스트우드 빌리지 추모공원 묘지에 무기명으로 안장되었다.

3. 유명인들의 평가

"1960년대 반문화의 최고 천재는 로스엔젤레스 작곡가인 프랭크 자파였다. 자파는 훌륭하고 다작인 작곡가 그 이상이다. 그는 새로운 종류의 작곡가로,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는 장벽을 알고 있는 작곡가였다. 그는 락과 팝, 리듬 앤 블루스와 재즈와 클래식 음악을 결합시켰다. 그리고 조화로운 규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전통이 아닌, 자신에게 이치에 맞는 어떤 것이든 연주했다. 자파는 콘셉트 앨범을 공동 발매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스튜디오를 악기로 사용한 최초의 록 뮤지션이었다. 그는 밴드나 오케스트라를 악기의 앙상블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포스트모던정맥에서, 자파는 기존의 음악에 영감을 주는 음악 조각들을 이용하여 음악을 작곡했다: 그의 작곡 단위는 "소리"가 아니라 듣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조직화된 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TV 광고, 뮤직홀, 클래식 발레, 재즈 즉흥연주, 불협화음을 구별하지 않았다. 살아있는 음악 백과사전인 자파는 이 모든 장르에서 뛰어나게 했다. 그는 어떤곳에서도 거인이 될 수 있었다."

― 피에로 스카루피 (음악 비평가)


"비틀즈에서 브라이언 윌슨에 이르기까지 천재로 인식된 모든 사람이 경계의 시선으로 프랭크 자파를 진정한 천재로 인식했다."

앨리스 쿠퍼


"현대 대중음악에 나온 가장 중요한 작곡가."

― 기타 플레이어 紙


"프랭크 자파는 사실상 모든 종류의 음악에 손을 댔다. 그리고 풍자적인 로커, 재즈-락 퓨전주의자, 기타의 거장, 일렉트로닉 마법사, 또는 오케스트라 혁신자로 변신한 그의 천재성은 부인할 수 없었다."

롤링 스톤 앨범 가이드, 2004


"저는 프랭크가 실제로 새로운 음악 천년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프랭크가 하는 모든 것을 존경합니다. 그는 아름답고 아름다운 일을 했습니다."

― 니콜라스 슬로님스키 (작곡가 겸 음악학자)


"프랭크는 천재입니다. 그것은 내가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는 음악적으로 매우 박식합니다. 나는 일반 대중들이 그것을 알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 켄트 나가노 (지휘자)


"그는 록과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 모두 속했고 그의 두 종류의 작품 모두 살아남았기 때문에 예외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피에르 불레즈


"프랭크 자파는 록앤롤의 가장 예리한 음악적 사고방식이며 가장 빈틈없는 사회 비평가였다. 그는 당대 가장 다작의 작곡가였으며, 록, 재즈, 클래식, 아방가르드 음악, 심지어 새로운 음악 등 장르를 거침없이 연주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인 프랭크 자파는 아마도 그의 세대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스타일리쉬한 대담한 음악가였을 것이다."

인디펜던트


4. 수상 경력

  •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1995)
  • 그래미상 평생공로 부문 (1997)

5. 음악적 특징

어릴 적부터 R&B나 로큰롤에 심취하면서 동시에 근현대음악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진 덕에 초기부터 전위적인 면모로 주목받았는데, 특히 녹음 편집 기술에 관한 지대한 탐구는 이후 여러 걸작 스튜디오 앨범의 제작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주로 연주한 악기는 기타와 신클라비어였지만, 어릴 적부터 드럼도 연주했고 솔로 앨범에서는 이따금 베이스 기타나 보컬도 직접 맡는 등 악기 연주 실력도 발군이었다.

마더즈 시절이나 그 이후 세션 밴드를 만들면서 작업한 여러 뮤지션들도 이후 거물급으로 대우받으며 활동하고 있고, 특히 활동 후반기 기타리스트 스티브 바이를 발굴해 프로로 데뷰시킨 것이 유명하다. 록이든 재즈든 만년의 전위적 현대음악이든 가리지 않고 손을 대는 음악적 식탐 덕에 이들 장르의 음악인들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념 등을 가리지 않고 사회의 치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가사나 앨범의 컨셉화 등도 자파 음악의 필수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중기의 재즈 록이나 로큰롤 시기를 전후한 전기/후기 작품들은 꽤 난해한 편이라 대중적인 인지도는 생각보다 높다고 할 수 없는데, 한국에도 기껏해야 장국영양조위가 주연한 홍콩 영화 해피 투게더에 삽입된 몇 곡 정도만 아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물론 자파 음악에서 대중성도 어느 정도 한몫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가 평생 동안 추구한 음악적 진보에 대한 이해 없이 이 몇 곡만 듣고 자파 팬이라고 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보통 입문작으로 언급되는 앨범은 [Bongo Fury], [One Size Fits All], [Hot Rats]가 있다.

자파 생전 말기와 사후에는 음반 배급사들이나 이런저런 어른의 사정으로 발표되지 못하거나 검열 혹은 축소되어 나온 앨범들의 완전판이 재발매되는 등 꾸준히 음반 발매가 이루어지고 있고, 특히 라이브 앨범들의 경우 스튜디오 녹음으로도 나오지 않은 곡들을 많이 담고 있어서 주목받고 있다.

여담으로, 딥 퍼플의 명곡 "Smoke on the water"는 프랭크 자파의 공연에서 불이 나는 것을 보고 가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사에 "Frank Zappa and the Mothers"가 있다. 그리고, 딥 퍼플의 Smoke on the water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2년 아폴로 16호가 달에 머물고 있을 무렵 발표한 명반 중의 하나로 수록되어 있다.

6. 사회 참여

활동 초기부터 메이저 음반사들과 수시로 티격태격한 에피소드에서 보듯이 주류 업계나 정치권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특히 음악에 대한 사전검열에 찬성하는 단체나 신자유주의 계열 성향의 정치인들은 수시로 씹었다. 아예 이들의 연설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연출해 한 곡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고, 덕분에 명성에 걸맞지 않게 생전에 주류 음악계로부터 받은 상은 거의 없었다. 자파 자신도 1987년에 그래미상 록 연주 부문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상을 거부한다고 발표해 엿을 먹이는 등 평생 동안 반골 성향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름과는 다르게좌파 등 특정 계파에 경도되는 성향은 아니었고, 일 안하고 빈둥대는 게으른 실업자라든가 돈을 벌 생각은 않고 물쓰듯 하는 된장녀, 텔레비전에서 시도때도 없이 설교하는 개신교 목사, 약쟁이로 타락한 히피, SM 행위에 탐닉하는 동성애자 커플, 선민사상에 빠진 근본주의 유대인, 이익 창출에 집착해 환경 파괴에 거리낌이 없는 대기업 간부 등 자기 마음에 안드는 인물들은 닭치고 까는 스타일이라 사방팔방에서 어그로를 끌었다. 이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 공연에서는 일부러 작정하고 들어온 안티들이 무대에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소란을 피워 공연이 중단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런 사회참여 성향은 말년에 정치계에 입문하려는 시도로까지 이어졌는데, 1991년에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다가 건강 악화로 포기하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깔거 다 까는 사람을 누가 뽑아주려나 싶겠지만 자파의 이러한 행보는 뚜렷한 기준 없이 무턱대고 까는게 능사가 아니라는 반면교사가 되기도 한다. 다만 평생 음악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고심했고, 둘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음을 역설했기 때문에 음악사회학 영역에서는 극단적인 디스 성향에도 불구하고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

7. 사생활

자파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60년에 케이 셔먼과 처음 결혼했지만 불과 3년 만인 1963년에 이혼했다. 3년 뒤 초기 마더즈 시절 로스앤젤레스의 나이트클럽 위스키 어 고고에서 공연하다가 클럽에서 비서로 알하던 애들레이드 게일 슬로트먼과 눈이 맞아 바로 사귀기 시작했고, 게일은 1967년 9월에 임신한 상태로 자파와 속도위반 결혼을 했다. 첫 결혼 때와 달리 이 두 번째 결혼은 행복한 편이었다고 한다.

결혼 직후 장녀 문 유닛이 태어났고[11], 이후 장남 드위질(1969), 차남 아멧(1974), 차녀 디바(1979)까지 네 아이를 두었다. 이 아이들도 훗날 작가, 배우, 비즈니스맨 등으로 성장했고, 특히 장남 드위질은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8. 여담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의 또 다른 거물인 벨벳 언더그라운드루 리드와 프랭크 자파는 서로를 깎아내리고 비방하는 상호 디스전을 여러 차례 벌였을 정도로 서로를 싫어했다.[12] 루 리드는 각종 인터뷰에서 질문받거나 언급된 모든 뮤지션을 다 깠을 정도로 워낙 험담가로 악명이 자자한 사람이었고, 자파 역시 성깔이 보통이 아니었으니 서로 지지 않고 디스전을 이어갔던 것. 심지어 자파는 종종 공연에서 벨벳을 세계 최악의 록 밴드라고 지칭하기에 이르렀다. ....근데 진짜 최악의 밴드는 즐겨듣는다는 게 아이러니 그러나 자파가 사망하자 루 리드는 너무 심한 폭언을 했던 것을 후회했고[13], 고인과의 화해의 의미에서 자파가 사후에 받게된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행사에서 루 리드가 나와서 소개하기도 했다.

생전에 영국의 록 밴드 의 노래를 즐겨 듣고, <It>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호감을 표한 적이 있었다.

인터뷰어:"지난 10년간 록 음악 중에 자파 씨가 놀라워한 인물이 있었나요? 예를 들면, 헨드릭스 같은?"

자파:"아니요, 헨드릭스는 저에게 그닥 큰 감명을 주지 않았습니다만, 그 중 몇 곡은 조금 좋더군요. 사실, 저는 헨드릭스보다는 ''의 앨범에서 더 많은 감명을 받고 놀랍니다."

인:"음악에서 말인가요?"

자:"앨범 제작에서입니다. 굉장히 좋은 작품이죠. 그들이 앨범에서 선보이는 혼합 등의 것들은 사실 굉장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그 앨범이 영국스러운 음악(사운드)라고 생각하시나요?"

자:"만일 누군가가 제게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이 앨범을 들려줬다면, 아마 영국 앨범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왜 그리 말할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그런 소리가 담겨 있어요."

출처

이 외에도, 다른 인터뷰에서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의 기타 연주도 극찬하였다.

"최근 들었던 기타리스트들의 연주 중에서 마음에 드는 연주자는 몇 명 없었습니다. 전 퀸의 브라이언 메이가 좋더군요.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됩니다."

출처

이에 브라이언 메이 또한 프랭크 자파와의 일화를 꺼냈다

"저는 정말로 위대한 록 뮤지션이자,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창작자 프랭크 자파 씨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 분을 만났을 땐, 그 분은 이미 몸이 굉장히 안 좋으셨죠.(저는 그 분의 아드님-드위질 자파-과 LA에서 작업 중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이 무대에서 선보이시는 음악 속 수많은 즉흥 연주의 기술과 자신감을 존경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분이 말씀하시길, "자신감? 그건 무슨 소리요?" 저는 제가 연주할 때 항상 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고 말씀드렸어요. 그 분이 대답하셨습니다. "어떻게 실수를 할 수가 있단 말이오?? 당신의 솔로 연주이고, 당신의 기타이며, 당신이 스스로 작곡한 곡을 연주하는 것인데, 누가 감히 당신을 보고 실수한다 말할 수 있겠소?"


  1. [1]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주길.
  2. [2] 롤링 스톤은 그를 ‘록 음악, 재즈, 그리고 클래식 음악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 버리는 것을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3. [3] 사후에도 계속해서 앨범이 나오고 있는데 무려 40장이 나왔다. 사망한지 20년이 넘었음에도 줄기차게 미공개곡을 담은 앨범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사망한지 25년이 지난 2018년에도 앨범이 나왔다! 지금까지의 스튜디오 앨범만 해도 111장아니 얼마나 많은 곡을 사장시켰으면 죽은지 25년 지난 지금도 앨범이 나올까
  4. [4] 이 때의 경험이 워낙 충격적이었는지 뮤지션들의 마약 사용을 단호하게 반대했고, 자기 밴드 소속 기타리스트가 마약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자 가차없이 해고하기까지 했다.
  5. [5] 자신이 존경하던 재즈 뮤지션이 음반사에 돈을 구걸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을 해서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6. [6] 비틀즈의 드러머 링고 스타가 자파처럼 분장하고 나온다. 더 후의 드러머인 키스 문도 출연했고, 자파 본인과 밴드도 따로 등장.
  7. [7] 이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곡이 딥 퍼플의 레전설 넘버인 Smoke on the Water다. 실은 딥 퍼플도 녹음을 하기 위해 몽트뢰에 있던 중 마침 자파가 공연을 와서 구경했던 것이었다.
  8. [8] Happy Together로 유명한 터틀즈의 보컬 'Howard Kaylan'과 'Mark Volman'이 따로 독립을 하여 만든 보컬 듀오.
  9. [9] 결국 Läther는 자파 사후인 1996년에야 완전한 형태로 발매되었다.
  10. [10] 힙합이나 메탈 앨범에 심심하면 붙는 Warning: Parental Advisory 스티커가 바로 이 단체의 작품이다. 나중에 자율 심의로 붙이는 걸로 바뀌지만...
  11. [11] 문 유닛은 1982년에 아버지의 앨범 Ship Arriving Too Late to Save a Drowning Witch(스티브 바이가 이 앨범에 세션으로 참여했다.)의 수록곡 Valley Girl을 공동작곡하고 보컬까지 맡았다. 이 곡은 자파의 곡으로써는 이례적으로 빌보드 차트에서 상위권까지 올랐다. 아버지 프랭크는 이건 자기가 아니라 딸내미 목소리 때문에 히트한 거라고 냉담하게 언급했지만...
  12. [12] 이렇게 서로 물고 뜯는 데에는 1966년에 이 둘의 밴드였던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마더즈 오브 인벤션이 데뷔 앨범을 위해 버브 사와 음반 계약을 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 마더즈의 경우는 먼저 계약을 한 뒤 완성 직후에 데뷔 앨범이 출시된 반면, 벨벳은 이 듣는 사람만 듣는(...) 음반을 연속해서 발매하면 재정이 악화될 것이라는 버브 경영진의 판단 때문이었는지 마스터 테이프를 완성을 했는 데도 6개월씩이나 미루고서야 발매가 되었다. 이런 선점 효과 때문에 자파의 음반은 벨벳 음반보다 상대적으로 차트 성적과(둘 다 100위권 밖이었지만(...) 순위는 마더즈의 Freak Out!이 더 높았다.) 라디오 방송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 리드는 버브 사가 프랭크 자파에게 투자하느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벨벳의 데뷔 공연 오프닝 밴드 또한 하필이면 마더즈였다!
  13. [13] 루 리드도 늙은 후에는 전보다 성격이 유해진 탓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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