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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구성
3. 결성
3.1. 이설
4. 활동과정
4.1. 박정희의 비호
4.2. 자리 물려주기
4.3. 소속원 실드
4.4. 야전군 지휘 경험 부족
4.4.1. 폐해
4.5. 하나회 주도권 잡기
5. 12.12 군사반란 당시 핵심 인물
5.1. 주동자
5.4. 육군본부
5.5. 사단
5.6. 공수특전여단
5.7. 청와대
6. 5공, 6공의 지배 세력
7.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및 해체
7.1. 하나회 명단 살포 사건과 그 이후
7.2. 해체의 부작용?
8. 기타
9. 서브컬처에서의 하나회
10. 관련 항목

1. 개요

각하, 군대 내부에도 각하를 추모하는 세력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1][2]

전두환[3]

대한민국 군대, 나아가서 대한민국 국가 자체를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던 비밀 사조직 하나회, 이들의 가입의식은 비밀리에 치뤄졌고, 서약을 위반할 때에는 인격말살까지도 감수한다는 배신방지 조항까지 만들어 조직폭력배와 다름없는 군부 내 패거리를 만들어냈다.

드라마 제5공화국 나레이션 中에서

대한민국 육군 내의 불법 사조직[4]으로, 전두환과 노태우가 중심이 되어 그들의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들과 후배들을 구성원으로 하여 비밀리에 결성되었다. 박정희가 하나회를 키워준 이유는 군부 세력들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을 견제할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삼기 위해서다.[5]

하나회가 처음 결성될 당시만 해도 전두환의 계급은 고작 중령이었으나, 그 하나회의 빽이 대통령 박정희였던 덕분에[6][7] 장군들조차 일개 중령에 불과했던 전두환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하나회의 회장으로서의 전두환에게 딴지를 걸었던 유일한 사례는 전두환이 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을 당시 전두환의 직속상관이였던 사단장 조천성 소장으로, 무기밀매를 근거로 들어 전두환의 진급을 반대한 것 정도에 불과했을 만큼[8] 박정희 정권 당시 대한민국 국군 내부에서 전두환과 그가 통솔하는 하나회는 무소불위의 절대강자들이었다.

하나회는 전두환이 있던 1950년대부터 마지막 하나회 출신인 김현집이 전역한 2016년까지 존속했다고는 하지만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서 하나회 자체를 박살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1993년까지 존재했다.

10.26 사건으로 정국이 혼란함을 틈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흔히 말하는 군부 중 신군부라고 불리는 게 이쪽이다.[9] 훗날 노태우 정부에서도 정권의 주요 세력으로 존속했다가, 민주투사였던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통해서 여당에 합류한 후 대통령이 되자마자 전격 숙청되었다.

이들은 박정희 정권 초창기부터 선배가 끌어주고 후배가 밀어주는 식으로 군의 주요 보직을 하나회 조직원들끼리 대물림하면서 군부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때문에 이때부터 이미 하나회 가입은 곧 출세와 같은 의미였다. 특히 당시 장교들에겐 출세의 지름길이었던 보안사령관특전사령관은 1980년 이후로는 하나회 출신들이 독점적으로 장악했고, 보안사와 특전사는 전두환이 권력을 장악하는 최고의 도구가 되었다. 이들의 위세가 절정에 이른 대한민국 제5공화국에서는 하나회 출신이 아니면 보안사령관이나 육군참모총장 같은 최고 요직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할 정도였다. 1993년에 김영삼이 하나회를 척결하면서 해임된 하나회 출신 장성만 18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나회는 육군 장교, 그것도 정규 육사 출신들만의 클럽이었으므로, 안 그래도 세력이 미약했던 대한민국 해군대한민국 공군, 같은 육군이라도 갑종 장교[10], 육군3사관학교사관후보생, ROTC 장교들은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시기에 더욱 심한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세간에 하나회의 존재가 알려졌을 때 "군 내의 사조직이 무슨 소리야?"라며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2. 구성

12.12 군사정변이 성공하고 권력의 정상에 우뚝 선 군 수뇌부의 인사가 발표된 뒤인 1979년 12월 14일, 쿠데타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맨 아래줄 왼쪽에서 4번째가 노태우, 5번째가 전두환이다.

3. 결성

노태우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회는 사관학교 시절 친목 단체인 오성그룹, 통칭 오성회에서 시작한다. 1951년 11기로 입학한 전두환, 노태우 등은 생도 시절 영남 출신 생도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여기서 만든 친목 단체가 바로 오성회이다. 노태우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사관 생도들의 별명인 추성과 장군 계급장인 별에서 따온 이름으로, 조직원들에게 각각 별 성자를 붙여서 용성 전두환, 관성 노태우, 여성 김복동, 혜성 최성택, 웅성 박병하 이렇게 중2병스러운 네이밍으로 5명의 조직원들에서 따와 오성회라고 불렀다.[11] 그러나 박병하가 유급당해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되자, 이후 다른 육사 11기에서 손영길, 권익현, 정호용이 추가되어서 칠성회가 된다. 다만 최성택의 회고에 따르면 오성회 결성부터 박병하가 아닌 백운택이 오성회 소속이었다고 한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조직원들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이 시기 오성회는 훗날 범죄 조직으로서의 모습보다는 단순 친목 단체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노태우는 오성회가 공개적으로 어울려 다니면서 다른 생도들이 우러러보는 집단이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공개 활동은 믿을 수 있어도 다른 생도들이 부러워 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려운데, 오성회는 생도들이 동경할 만한 요소를 단 하나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은 성적이 좋지 못했고 대신 체육활동에 열심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두환의 경우, 단순히 육사에서 축구에 정신이 팔려 공부를 안해 성적이 나빴던 게 아니라, 1951년 9월 육사 입학 시험부터 1차로 합격을 못하고 예비 후보로 겨우 입학했고, 우수 생도가 하는 소대장 생도를 한 번도 못해본 것은 물론, 졸업 성적이 거의 꼴찌라 성적순으로 부여되는 군번을 낮게 부여 받았다. 다른 멤버 박병하는 아예 성적 미달로 유급당했다. 그나마 노태우 회고록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이 그 중에서 나아서 1학년 때는 200명 중 10위권이었지만, 졸업할 때는 67등까지 떨어져서 남들이 우러러 볼 만큼 성적이 좋은 학생은 아니었고, 때문인지 자기 회고록에서 생도 시절 자랑거리를 럭비똥군기를 무지 잘 부린 것에 대해서만 쓰고 있다. 그렇다고 어디 잘 나가는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그저 그런 친목 단체에 불과했다.

칠성회는 일명 김태환회로도 불렸다. 복동, 노우, 전두해서 김태환회이다. 그만큼 이 3명의 영향력이 강했는데, 특히 김복동과 전두환은 오성회 시절부터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전두환이 승리하면서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 때문에 칠성회 혹은 일심회 초기 김복동이 잠깐 축출되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오성그룹 혹은 7성회 인간들은 선민사상에 쩔어있었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육사 11기 기수 문제다. 이를 알려면 육사의 역사를 조금 알 필요가 있는데, 육군사관학교는 1949년까지는(훗날 1~9기) 단기 교육만 실시하던 사관학교였다. 그러던 중 1949년에 2년간 교육 과정을 정해서 교육생(훗날 10기)을 받았고, 다음해인 1950년 6월 1일 처음으로 정규 4년제 교육 과정을 받는 교육생을 받아 교육을 실시한다. 그러나 이듬해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져서 육군사관학교는 폐교되고, 아직 교육을 받던 49년 입학생과 50년 입학생은 채병덕의 명령으로 소총병으로 포천에 투입되었다.[12] 하지만 곧 국방부는 전쟁 중이라도 장교 육성은 필요하다고 깨달았고, 이후 아직 살아있던 50년 입학생들을 다시 찾아 육군 종합학교에서 단기 교육을 받게 하는 한편, 51년 10월 31일 진해에서 육군사관학교를 다시 개교하고 새로 4년 교육 과정의 교육생을 모집하는데, 이들이 바로 하나회 일당들이 입학한 11기 교육생들이다.

그리고 이 교육생들이 졸업할 때쯤인 1955년 4월 27일에 육군본부는 참전용사들의 대우를 겸해서 과거에 입학했던 군인들에게 육사 1~10기를 부여한다는 명령을 했다. 그런데 전쟁 중에 후방에서 탱자탱자 놀던 51년 입학생들은 이 조치에 반발했고, 그 중 김성진과 위에서 언급한 오성그룹의 백운택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항의하려다 헌병대에 끌려가는 일이 있었다. 같은 오성그룹의 노태우도 이 일을 두고 회고록에서 어려움과 배고픔을 견디고 간신히 졸업했는데 우리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얘네가 한 끼 굶는 걸 걱정할 때 육사 1~10기는 목숨 걱정부터 해야 하는 참전 군인들이었고, 객관적으로 봐도 3년간 실전 경험을 갖춘 군인들이었다. 이 행동은 미국 같은 나라였으면 군인이기 이전에 사회에서 매장당할 발언이었지만, 51년 입학생 중 유의진 한 명만 퇴학 조치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13]

그렇게 낮은 성적으로 졸업한 칠성회 인간들은 전두환이 주동하여 5.16 군사정변 때 육사생도들의 지지 시위를 조직해서 박정희의 눈에 들었다. 당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자신의 전속 부관 손영길 대위와 함께 찾아온 육사 11기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에게 육사, 정확히는 총동창회인 북극성회를 장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북극성회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11기생 중 생도 시절 성적이 좋았던 장교들이 모인 '청죽회'가 중심이었는데, 5.16 군사정변 때 육사생도들의 지지 시위를 요구할 때 당시 육사교수부에 배속된 청죽회는 이를 거부하였다. 평시에는 당연히 성적이 좋았던 청죽회가 군대의 요직을 차지할 것인데, 박정희 입장에서는 청죽회의 충성심(?)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전두환 같이 비청죽회 동문을 중용할 필요가 있었기에 이런 지시를 한 것.

그리고 전두환 등은 박정희의 명령에 칠성회를 확장시켜서 육사 내부 영남 파벌을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일심회이다. 이 일심회가 바로 하나회의 초기 형태로, 기본은 칠성회를 기본으로 하는 육사 11기 영남 파벌과 육사 14기 영남 파벌[14]을 중심으로 결성된다.

일심회의 뜻은 '태양을 위하고 조국을 위하는 하나 같은 마음'에서 나왔다. 주된 특징으로는

  • 정규 육사 출신을 매 기수 별로 정원제를 유지하여 가입시키되, 약 5% 수준인 10여 명 내외로 한다.
  • 비밀 점조직 방식으로 조직하되, 가입시 조직에 신명을 바쳐 충성하겠다 맹세케 한다.
  • 가입에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동의가 필요하다. 일단 11기 가운데 한 명이 한 기수의 최초 한 명을 추천하고, 그에 대한 철저한 뒷조사를 거쳐서 11기 전체의 동의를 받아서 선발했다. 그 다음은 그 최초의 1명을 시작으로 자기 기수를 추천하고, 추천받은 사람은 역시 11기와 해당 기수 동기 전체의 동의를 받아야 권유 명단에 포함된다.
  • 고위층으로부터 활동비를 지급받거나, 재벌로부터 자금을 수령한다.
  • 회원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진급 및 보직상의 특혜라고 하는데, 당시 육군에서는 인사정체가 심화되어 정규 육사 출신들은 의무복무 기간 5년이 끝나고 장기복무에 들어가게 되면 재기별로 현역 총원의 1/2씩만 상위 계급으로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회 가입은 군부 내에서의 출세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15]

이러한 조건에 맞추어 일심회는 육사 졸업생 중에서 기수별로 10여 명을 선정하여 거의 스토킹에 가까운 설득과 강요로 가입시켰다. 선정 조건은 영남 지역 출신, 성적 우수, 정치색이었다. 성적 우수가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기 때문에 육사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이들은 자의에 관계 없이 거의 강제로 하나회에 가입되기도 했다. 장세동과 같은 非 영남 출신으로 하나회에 가입된 인물들은 대개 육사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기 때문이었다. 가입 후에는 점조직으로 관리하였기 때문에 하나회 회원들도 자기 동기 중에서 누가 하나회 회원인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초급 간부 시절에는 몰라도 하나회가 요직을 독점한 탓에 나중 가면 진급이나 직책으로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했다.

하나회를 영남출신 위주로 꾸린 것은 5.16쿠데타 이후의 파벌싸움과 관계있다.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권내에서 함경도 출신 정일권, 김동하, 박임항평안도 출신 장도영, 백선엽경상도 출신 박정희간의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결국 박정희는 1961년 7월 3일 평안도 출신 장도영 장군을 쿠데타 음모 혐의로 구속하고, 11월에는 함경도 출신 김동하, 박창암도 쿠데타 혐의로 체포하면서 군부 내에서 이북 출신 세력을 완전 제거하고 일인독재를 확립한다. 이런 이북 출신에 대한 일련의 숙청을 당시 군부 내에선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고 불렀다. 48년 남북이 각각의 정부를 수립하고, 50~53년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이북에서 자유를 찾아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 중에서 적지 않은 수가 육사 5기와 군대에 입대하여 파벌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45~50년에 이북은 '겉은 빨갛지만, 속은 하얀 사과'였고, 남쪽은 그에 반대였기에, 53년 휴전 이후에 이북 출신들이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런데 비록 육사 2기였지만 박정희는 남로당 관련 논란으로 한때 사실상 군복을 벗고 있을 때도 있었기에 그 위치가 높지 못하였다. 이는 국가재건최고회의 활동 시기에 국정 주도권을 잡기 위한 권력투쟁을 불러왔다.[16] 또한 위에서 나온 육사 '기수' 문제에서 정기4년제 1기인 11기생들에 대한 장악은 김종필을 필두로 한 육사 8기에 대한 견제가 작용하였다. 전두환은 이 긴박하고 혼란했던 시기에 하나회를 만들어 냈다. 함경도 출신 정일권, 평안도 출신 백선엽 등 몇몇 이북 출신들이 살아남았지만 이후 군내에서 세력화는 하지 못하고 박정희한테 절대 충성하는 부하로 전락한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군을 완전히 휘어잡기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자신의 고향 후배들로 구성된 사조직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3.1. 이설

하나회 결성의 주동자와 시기에 대해 전혀 다른 설들이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유사품으로 하나회는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으로 해체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전에 스스로의 결정으로 해산했는데, 괜히 김영삼이 쇼한 것이라는 하나회 회원들의 많은 인터뷰도 있는데, 이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으니 제외한다.

창설 멤버인 육사 11기 권익현 전 민주정의당 대표는 2015년 월간조선을 통해, "1963년 김종필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4대 의혹 사건으로 여론이 들끓자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당시 박정희 전속 부관) 등과 함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 비판 여론을 전달했다"라고 하였고, 이에 박정희는 "너희(육사 11기)가 뭘 좀 만들어봐라"라고 해서 박의장에게 힘을 주고 싶은 생각에 하나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위의 기사가 나가자 육사 11기이자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과 함께 7성회 멤버였던 손영길은 같은 연월 14일 신동아와 전화통화에서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박 대통령을 만난 적이 없다. 전두환과 내가 함께 박 대통령 내외를 처음 만난 것은 67년 내가 전두환을 30경비대대장 후임으로 추천하면서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하나회는 나라에 충성하는 능력 있는 군인 모임으로 내가 만들었고, 대통령을 경호하는 30대대장이 회장을 할 수 없으니 전두환에게 회장을, 이종구에게 총무를 맡겼던 것"이라고 하였다.

2016년 1월자 신동아의 김충립 전 수경사 보안반장[17]의 육필수기에 의하면 손영길이 1965년 30대대장이 되고 나서 이듬해에 '우수 장교 친목 모임'을 만든 것이 출발점이라고 한다. 이 조직이 67년 전두환이 30대대장이 되면서 군 내 비밀 사조직이 되었다는 것이다.[18]

또 다른 하나회 창설 멤버인 육사 11기 노정기 필리핀 대사는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 등은 예전부터 경쟁 관계여서, 그들의 주장에 대해선 노코멘트하겠다. 확실한 것은 하나회라는 육사 11기 모임은 전두환이 주도한 '5성회', '7성회'에서 출발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모임 명칭을 들어본 적이 없다. 동기생 10여 명이 모여 친목 모임을 했는데, 이후 후배들을 모아 하나회를 조직한 것은 기억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노정기는 7성회 멤버가 아니였으며, 이른바 매 기수 별로 한두 명씩 상징적으로 가입시켰다는 비영남 출신의 대표적이 인물이다. 그 바람에 하나회의 속사정에 대해 잘 모를 수도 있다. '7성회'란 모임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어이 없는 주장은, 어쩌면 그가 하나회 핵심에 전혀 접근하지 못했다는 반증일 수 있다.

전두환이 만들기는 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나서 용도 폐기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육사 20기 안병호의 주장이다. 안병호는 아래 하나회 숙청 항목에서 당시 수방사령관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여기저기 줄 대고 있었다는 그 분이시다.

윤필용 사건의 당사자인 전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박정희를 대리해서 하나회를 직접 관리하던 대부라는 주장도 있다. 윤필용 이외에 서종철 전 국방장관도 하나회의 주요 후원자로 꼽힌다.

4. 활동과정

4.1. 박정희의 비호

1961년 서울대 학생군사교육단 교관으로 근무 중이던 대위 전두환은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박정희의 친위세력을 자처하면서 '육사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조직하였고, 이 공로로 박정희[19]의 비서관으로 보임되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가 군 수뇌부와는 별도로 군 내 자신의 친위세력을 심어둔다는 의미에서 하나회를 방조 혹은 적극적으로 육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윤필용 사건 이전부터 박정희는 전두환, 손영길 등 육사 11기의 준장 진급식에 파티를 열어주고, 별도로 고급 승용차까지 하사하였다. 노태우, 김복동에게는 '하나회'의 최초 명칭인 일심회의 '일심(一心)'이라고 새겨진 지휘봉을 내려주었다. 이는 다른 장성들에게는 하지 않은 대단한 특혜였다. 하나회의 존재가 박정희에게 공식적으로 보고된 이후에도 전두환을 최고 요직 중 하나인 보안사령관에 임명하는 등 계속해서 신임을 보였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박정희가 하나회의 존재를 보고받자 격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실제와 다르다는 게 보편적인 평가다. 당시 박정희에게 충성을 경쟁하던 인간들은 널렸는데, 대통령이 존재 자체에 격노할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면 실제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숙청 이상의 강도로 하나회를 박살냈을 것이고, 핵심 구성원인 전두환, 노태우도 무사하지 못 했을 것이다. 독재 권력을 가진 박정희의 노여움을 산 일개 사조직이 나중에 자신들의 보직을 이용하여 나라를 뒤엎었다는 게 말이 되는지 의문이다.

한편 박정희가 하나회를 적극 지원했다는 설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있다. 박정희가 취임할 당시 총애하던 차지철과 전두환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는데, 차지철은 이를 흔쾌히 응해서 전역하고 정치인이 되었다. 반면에 전두환은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면서 의원직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이게 맞다면 애초에 전두환은 군 내부에서 박정희 친위세력을 만든다는 이유로 전역을 거부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전두환 총애, 이유 있었다.

4.2. 자리 물려주기

윤필용, 유학성, 서종철 등 군 상층부의 지원을 받은 하나회 회원들은 초급장교 시절부터 노골적인 인사특혜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국방부, 육군본부, 특전사, 보안사령부 등 진급이 보장되는 요직들을 옮겨 다녔고, 특히 1960년대 말부터는 육군본부 진급과와 보안사 내사과[20] 실무자를 대물림하면서 자신들의 보직을 챙겼다. 가장 대표적인 대물림 사례가 바로 1공수여단장을 전두환박희도 순서대로 보직한 것.

야전부대 지휘 경력이 필요하면 서울 근교의 제9보병사단이나 제9공수특전여단 등에 잠시 다녀오는 식이었다. 특히 9사단의 경우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실전 부대로, 쿠데타나 대규모 시위 발생시 정치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부대이다. 박정희가 하나회 출신들을 9사단에 집중 배치한 건 단순히 서울과 가까워서만은 아니었다. 이처럼 권력과 밀착된 위치인 대통령경호실, 중앙정보부 파견 근무도 이들의 몫이었다. 정작 하나회 회원들의 에스컬레이터처럼 사용되던 9공수가 12.12 군사반란 당시 하나회의 가장 무서운 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다. 참고로 12.12 군사반란 당시 수도권의 4개 공수특전여단들(1, 3, 5, 9 여단) 중에서 9여단만 여단장이 하나회와는 아무 상관없는 갑종장교 출신이었고 나머지 1, 3, 5여단장은 죄다 하나회 회원이었다.

단적으로 1980년부터 1993년까지의 주요 직책을 보면,

  • 수도방위사령부 30대대장을 역임한 7명 가운데 5명이 하나회
  •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을 역임한 15명 가운데 12명이 하나회
  • 육군본부 주요 직책에서 일한 사람만 15명으로 11기에서 20기 중에서 한 번도 육본에 있어본 적이 없는 기수는 14기와 17기 뿐이다.

4.3. 소속원 실드

  • 이종구: 전방부대 대대장으로 부임시, 소속부대원 10여명이 사상하는 총기사고 발생.
  • 박희도: 1공수여단장 재임시, 무장공비가 박희도 부대 근처를 마음껏 활개치고 다닌 뒤 복귀 성공.[21]
  • 박준병: 20사단장 재임시, 훈련 중 6명 사망, 예하부대에서 월북사건.
  • 최평욱: 사단장 재임시, 예하부대에서 월북 사건 발생.
  • 김진영: 사단장 재임시, 예하부대에서 장병이 신체에 동상 발생 사건 발생.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면 진급은 커녕 아예 군복을 벗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런데 해당 인물들은 아무도 군복을 벗지 않았고 진급하는데 아무 피해도 보지 않았다.

4.4. 야전군 지휘 경험 부족

하나회의 리더 전두환의 군 경력들을 살펴보면, 1사단장으로 근무했던 적을 빼고는 제대로 된 전방부대에서의 근무 경력이 사실상 없다. 다른 하나회 핵심 멤버들도 비슷하다. 대부분 실전부대 근무는 서울 근교의 충정부대[22]에서의 근무 경력 뿐이다.

대표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까지 노태우의 전체 군 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력을 대충만 살펴봐도 대대장 시절, 그리고 8사단 21연대장 시절을 제외하면 전방에서 근무한 적은 하나도 없고, 철저히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근교와 후방에서만 근무했음을 알 수 있다. 육사 출신의 보병 소위라면 반드시 거치는 소대장의 임기를 다 채우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했으며 특히 대위 시절에는 소령 진급의 필수 조건인 중대장 경력이 없다.[26] 육군에서 소령으로 진급하려면 기본적으로 중대장 보직을 2회 맡아야 하고[27], 장성까지 진급하려면 저 두 번의 중대장 중에 한 번은 반드시 전방 사단에서 중대장을 해야 한다. 그런데 중대장 자체를 거치지 않았는데 장성까지 진급한 것은 뭔가 이상한 이력이다.

게다가 연수나 교관직, 구대장직 등의 교육 훈련 기관이나 철원 배치 및 해외 파병 이외에는 모조리 수도권을 벗어난 적이 없고, 보안사, 육군 본부, 청와대 등이 전체 경력에서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4.4.1. 폐해

이러한 야전 경험의 부재는 당시 전투병과 장교라면 의무적이었던 베트남 전쟁 파병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전방부대에서 다양한 훈련과 여러가지 상황을 직접 겪어봐야 경험이 쌓일 텐데 하나회 장교들은 이런 게 전혀 없었다. 후방 사령부에서 펜대만 굴리면서 야전부대 지휘에 관해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실전에 투입되니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베트남 파견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면 1계급 진급과 무공훈장 수여가 관례였다.

그런데 당시 9사단 29연대장으로 1년 근무한 전두환이 귀국하자 훈장 심사에서 그의 상관들이 결사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야전에서 실전 지휘는 엉망이었고, 온갖 볼썽 사나운 행동으로 장병의 사기들을 떨어뜨렸다는 것. 당시 전과를 조작하기 위하여 암시장에서 베트콩 무기를 구입하여 상부에 전리품으로 보고하는가 하면, 식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혼자 온수 샤워를 즐기고 한가롭게 테니스를 치는 등 부적절한 처신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진급과 훈장 수여는 무산되고, 대신 대령임에도 장군(준장) 보직인 제1공수여단장으로 발령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한마디로 야전 군인으로는 무능하고 정치적 감각만 발달한 군 내의 민폐 집단. 노태우 정부 시절 육사 출신 군사평론가가 군부 내 사조직의 병폐를 적나라하게 비판한 칼럼이 있다. 혁신돼야 할 군사문화. 바로 1992년 지만원[28]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이다. 사실 지만원 본인이 육사 22기로 하나회의 위세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군 생활을 했기 때문에 상당히 쌓인 게 많았을 것이다.

일례로 전두환이 1978년에 육군 소장으로서 제1보병사단장에 발령된 나이가 47세. 2013년 기준으로 육군 대령에 진급하는 나이가 46세이며, 소장에 진급하는 나이가 53세 전후임을 감안할 때 말도 안되는 나이에 이 위치에 도달한 것이다.

물론 육사 10기는 강창성이 40세에 5사단장이 되는 것처럼 전두환보다 진급이 더 빠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육사 11기 이전의 장교들이 한국전쟁으로 갈려나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생존만 한다면 진급을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처지라서 진급이 빨랐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 때는 주요 한국군 수뇌부가 30대 정일권 장군이 33세에 소장 계급으로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총사령관을 맡고, 유재흥 장군은 29세에 준장 계급으로 7사단장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33세에 대장으로 진급할 정도였고, 이런 빠른 진급은 심각한 인사적체를 불러왔다 5.16 쿠데타의 원인 중 하나가 인사 적체로 인한 육사 8기의 반발이라는 주장도 있다.[출처] 한국전쟁 이후 임관해서 어쩌면 현대 한국군보다 더 심한 인사 적체를 맞은 육사 11기는 당연히 진급 속도가 더 느려야 하는 게 정상인데, 하나회 일당들의 진급 속도는 현대 한국군과는 비교할 수 없고, 전쟁을 겪고 살아남았던 육사 10기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진급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MBC 제5공화국 드라마를 보면 알겠지만, 육군사관학교 10기인 소준열 장군이 소장 계급으로 한직인 육군종합행정학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반면, 후배들인 전두환 장군은 중장 계급으로 보안사령관, 노태우 장군은 소장 계급으로 수경사령관, 정호용 장군도 소장 계급으로 특전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또한 47년에 이등병으로 입대하고, 전쟁 중에 현지임관한 최갑석 장군이 소령 계급으로 포병대대장을 맡고 있을 때 육사 11기들을 신임소대장으로 받았는데, 최 장군과 육사 11기가 74년에 같이 준장으로 진급한다.

4.5. 하나회 주도권 잡기

하나회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육사 시절 공부 대신 공 차기로 시간을 보낸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손영길, 권익현, 정호용 등 칠성회가 주축이 된다.

이들 중에서 손영길은 박정희의 7사단장 시절 최우수 중대장이 되어 눈에 들기 시작하여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의 전속부관이 된다. 이후 손영길이 전두환 대위를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 민정비서로 꽂아 주기도 했고, 63년 쿠데타 음모 사건 때는 손영길 소령의 도움으로 훈방되었다. 63년경 박정희를 찾아갔다가, 박정희에게 육사 내에 사조직을 만들라고 지시 받은 것도 이들 칠성회의 '손영길, 전두환, 권익현, 노태우'였다.

손영길은 청와대 외곽을 경호하는 30대대장으로 4년간 근무하다가 67년 육군대학에 입학하면서 그 후임으로 전두환을 꽂아 주게 된다. 여기에 전두환보다 한 해씩 승진이 늦으면서 전두환이 지나왔던 자리를 그대로 넙죽넙죽 받아 먹으면서 성장한 것이 노태우이다. 즉 1번주자 손영길, 2번주자 전두환, 3번 주자 노태우의 서열이 형성되어 있다. 이런 서열 관계는 부인들끼리도 유지되어, 전두환의 부인인 이순자는 노태우의 부인인 김옥숙을 하급자 대우를 하였다.[30] 몇십 년간 수모를 당하던 김옥숙이 1988년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순자에게 "나는 당신과 다르다. 당신은 체육관 출신 대통령 부인이고 나는 전 국민이 뽑은 직선 대통령 부인이야! 옛날에는 많이 당했지만 지금은 아니야!"라고 한 것은 당시 언론에도 공개된 유명한 일화.

그래도 1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역시 손영길, 전두환, 김복동, 최성택이었는데 이들 4명은 함께 대령으로 특진했고, 73년 1월 1일자로 육사 11기 중 최초로 준장 승진하게 된다. 특히 전두환 vs 손영길 vs 김복동의 경우 육사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막 준장으로 승진한 73년 3월 8일 윤필용 사건으로 수경사 사령관 윤필용이 구속되고, 사건 다음날 참모장 손영길 준장은 15사단 부사단장에 보임되었다가 1주일 후 해임되고, 보안부대원들에게 압송되어 서빙고에 구속되어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전역서를 쓰라"며 멧돼지 통구이 하듯 손발이 묶인 채 모진 고문을 당했다.

윤필용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불경한 말을 했다는 혐의라도 있지, 손영길은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로 2015년 7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이 사건으로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윤필용 사건에 손영길을 엮어 넣은 것이 전두환 준장과 노태우 대령이라는 의혹이 있다(손영길 장군의 증언).

사건 이전에 윤필용이 사석에서 1공수여단장 전두환에게 "박 대통령이 손영길을 참모총장으로 키우라는 당부가 있었으니 너는 더 분발해야겠어"라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육사 11기 중 가장 먼저 참모총장이 되겠다는 포부와 자부심을 갖고 있던 전두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결국 박종규 경호실장 vs 윤필용 수경사령관 vs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라는 거물들의 파워 게임 속에, 박종규계인 전두환 노태우가 그 틈을 타고 자신들의 라이벌인 윤필용계인 손영길을 제거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손영길이 제거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윤필용과 이후락의 관계 회복을 위해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1:1:1 구도에서 1:2로 몰리게 된 박종규는 반전을 꾀하기 위해 윤필용과 그 오른팔인 손영길을 제거한 것이다.

4.6. 윤필용 사건

하나회의 존재가 처음 불거진 것은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었다. 당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윤필용과 가까운 군 내 후배들을 조사하면서 하나회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이 하나회의 존재에 대한 보고를 받고 박정희가 격노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는 실제 사실과 명백하게 다르다. 오히려 박정희에게 하나회 제거를 건의했던 강창성은 제3관구사령부로 좌천되어 권력 핵심에서 완전히 밀려나버렸다.

이후 하나회 소속 장교 중에 희생양으로 손영길 준장만 예편되고, 나머지 하나회 회원들에겐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박정희가 직접 나서서 측근 강창성을 내치고 하나회를 살린 것이다. 이후에도 위에 서술된 것처럼 전두환을 위시한 하나회 장교들은 권력과 밀착된 핵심보직을 옮겨다니면서 승승장구했다.

하나회 제거를 건의했다가 오히려 박정희에게 내쳐졌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12.12 군사 반란으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무려 4회 - 거의 7개월이나 삼청교육대를 들어갔다 나왔다 해야만 했고, 후유증으로 드라마 제5공화국이 방영되는 무렵에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6·25 전쟁에서 훈장을 받은 국가유공자로 본래는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지만, '금고 2년 이상 선고받은 자'는 안장 대상에서 제외하는 규정을 만들면서 80년에 신군부에서 탄압받는 과정에서 4년형을 선고받은 그도 국립묘지 안장이 부결되었다. 이 규정에 따르자면 비록 사면은 받았어도 실형을 선고받은 신군부 인사의 국립묘지 안장을 막을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탄압받은 강창성까지 대상이 된 셈이다.

5. 12.12 군사반란 당시 핵심 인물

이하의 하나회 구성원은 어디까지나 정규 육사로 일컫는 11기 이후로만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당시 국방부 군수 차관보 유학성 중장, 1군단장 황영시 중장,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 등 11기 이전 출신 인사들은 "신군부이자 하나회의 후원자"라고 하면 맞지만, 하나회 회원은 아니다.

5.1. 주동자

육사 11기. 대장 진급 후 예편하여 대한민국 제 11, 12대 대통령[31]당선.
육사 11기. 대장 진급 후 예편하여[32] 내무부 장관 등을 거쳐 전두환 이후 대한민국 제 13대 대통령 당선.[33]

5.2. 보안사

육사 17기. 전두환의 보안사 핵심참모 3인방 중 1인. 준장 진급 후 예편한 뒤, 청와대 보좌관으로서 막강한 파워를 누린 5공화국 초기 정권 최고 실세.
육사 17기. 전두환의 보안사 핵심참모 3인방 중 1인. 허화평과 마찬가지로 준장 진급 후 예편한 뒤, 청와대 보좌관으로서 막강한 파워를 누림.
육사 18기. 전두환의 보안사 핵심참모 3인방 중 1인. 준장 진급 후 예편한 뒤 민정수석, 안기부 차장 등으로 5공화국 내내 전두환의 측근으로 일함.

5.3. 수경사

육사 16기. 전두환의 충복. 대통령경호실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역임한 5공화국 최고 실세.
육사 17기. 육군참모총장 역임.
  • 33헌병대장 중령 최석립[36]
육사 19기. 육군 헌병감 역임.
육사 13기.[38]
  • 헌병단 부단장 중령 신윤희[39]
육사 21기. 육군 헌병감 역임.

5.4. 육군본부

  • 범죄수사단장 대령 우경윤[40]
육사 13기.
  • 헌병감실 기획과장 대령 성환옥[41]
육사 18기.

5.5. 사단

육사 11기. 12.12에 어느 정도 참여했는지에는 이설이 있음. 육군참모총장, 내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국회의원을 역임한 하나회 정권 서열 3위.
육사 12기. 쓰리박(박준병, 박희도, 박세직.). 보안사령관 등 역임 후 대장으로 예편. 전 국회의원.
육사 11기. 83년 군단장 재직 중에 사망하였다.

5.6. 공수특전여단

육사 12기. 쓰리박. 특전사령관, 육군참모총장 역임.
육사 13기.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 역임.
육사 12기. 육군교육사령관, 총무처 장관 역임.

5.7. 청와대

육사 13기. 육군참모차장으로 재직 중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에 연루되어 중장 계급으로 예편하고, 한국도로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육사 15기. 기무사령관, 제3야전군사령관 역임하고 1989년에 전역하였고, 12대 성우회장을 역임하였다.

육사 11기부터 36기까지의 하나회 회원 全 250명의 명단은 2005년 2월 동아일보의 자매지인 <신동아>에서 최초 공개되었다. 이 명단은 전술된 기존의 하나회 명단인 '백승도 명단'의 오류를 바로잡은 하나회 명단의 '완결판'이라 한다. 하나회 회원 연명부 및 관련 자료. 이들 중 김진선, 안병호, 이현부 등은 하나회 회원이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은 인물들이다.

11기 최정택은 '5성회'의 혜성 최성택의 오타이다.

6. 5공, 6공의 지배 세력

하나회는 정권을 장악한 1980년부터 김영삼에 의해 숙청당한 1993년까지 사실상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 세력이었다. 12.12 군사 반란이 터진 뒤부터 하나회 주요 인물들은 승승장구했다. 직책은 당시의 직책으로 기록한다.

  • 황영시
    • 육사 10기, 12.12 참여
    • 육군참모차장 - 3군사령관 - 육군참모총장(최종계급 : 대장) - 감사원장
    • 직접적인 하나회 멤버가 아니라 하나회를 후원한 인물이다. 하나회는 4년제 정규 육사 장교(전두환, 노태우의 육사 11기가 첫 기수)들의 사조직이기 때문이다.
    • 반란 직후 신군부 세력이 참모총장으로 추천했으나 최규하 대통령이 반대하여 일단 참모차장을 거친 뒤 참모총장이 되었다.
  • 유학성
    • 육사 정훈 1기, 12.12 참여
    • 3군사령관(최종계급 : 대장) - 중앙정보부장 - 국가안전기획부장 - 국회의원
    • 황영시와 마찬가지 이유로 하나회 멤버가 아닌 하나회 후원자다.
    • 한직인 군수차관보에 있었으나 반란에 참여하여 대장 계급장과 안기부장 자리까지 얻어낸다. 다만,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에 대한 대처가 미흡했다는 이유로 안기부장 자리에서 잘리고 권력 밖으로 밀려났으며, 1997년에 사망해서 법의 심판을 피했다.
  • 차규헌
    • 육사 8기, 12.12 참여
    • 황영시, 유학성과 마찬가지로 하나회의 후원자다.
    • 육사교장 - 육군참모차장 - 2군사령관(최종계급 : 대장) - 교통부 장관
    • 반란 직후 신군부 세력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추천했으나 최규하 대통령이 반대했고, 다른 자리를 채워 넣은 후라 마땅히 영전할 자리가 없어 일단 한직인 육사 교장으로 영전했다.
  • 전두환
    • 육사 11기, 12.12 주모자
    • 하나회 회장, 국군보안사령관 - 중앙정보부장 겸임(최종계급 : 대장) - 제11·12대 대통령
  • 노태우
    • 육사 11기, 12.12 병력동원
    • 수도경비사령관 - 국군보안사령관(최종계급 : 대장) -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 내무부 장관 - 민주정의당 총재 - 제13대 대통령
    • 본인은 참모총장이 되고 싶어했으나, 2인자인 노태우가 참모총장이 될 경우 지나친 파워를 갖게 되는 것이 부담스러워한 전두환계에 의해 대장 계급장만 달고 예편한 뒤 입각했다.
  • 정호용
    • 육사 11기, 12.12 간접참여
    • 특전사령관 - 3군사령관 - 육군참모총장(최종계급 : 대장) - 국방부 장관 - 국회의원
    • 하나회 서열 3위로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가 군을 떠나 정규 육사 첫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 박희도
    • 육사 12기, 12.12 병력동원
    • 특전사령관 - 3군사령관 - 육군참모총장(최종계급 : 대장)
    • 육사 12기 박세직, 박준병, 박희도는 하나회 내 '쓰리박'으로 불렸는데 박세직, 박준병과 달리 박희도는 1년 진급이 늦는 후발주자였다. 그러나 12.12 당시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며 1등 공신이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다른 둘을 제치고 참모총장이 되었다.
  • 박준병
    • 육사 12기, 12.12 병력동원
    • 국군보안사령관(최종계급 : 대장) - 국회의원
  • 박세직
    • 육사 12기
    • 수도방위사령관 - 소장 전역(박세직 사건) - 총무처·체육부 장관 - 서울아시안게임·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 국가안전기획부장 - 서울시장 - 국회의원 - 2002월드컵 조직위원장 - 재향군인회 회장
    • 육사 12기 쓰리박 중 박준병과 더불어 선두주자였으나 수방사령관 시절 권력 과시 및 2인자 자칭 혐의로 숙청당했다. 사실 혐의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전두환은 이 기회에 하나회라도 자신에게 도전하면 끝장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예편 후 전두환에게 용서받고 1988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는 등 정계에서 다시 중용되었다.
  • 장기오
    • 육사 12기, 12.12 병력동원
    • 수도군단장 - 교육사령관(최종계급 : 중장) - 총무처 장관
    • 12.12 당시 5공수 여단장으로 1공수 박희도, 3공수 최세창과 함께 실병력을 동원해 참여했으나 육본, 국방부를 점령한 박희도, 특전사를 점령한 최세창과 달리 예비부대로 대기만 했던 탓인지 대장 계급을 달지 못했다.
  • 안필준
    • 육사 12기
    • 보안사령관 - 1군사령관(최종계급 : 대장) - 보건사회부 장관
  • 최세창
    • 육사 13기, 12.12 병력동원
    • 육군참모차장 - 3군사령관 - 합참의장(최종계급 : 대장) - 국방부 장관
    • 13기 선두 주자였으나 전두환의 막대한 신임을 받았던 선배 박희도의 임기가 1년 연장되어 총장이 되지 못하고 당시에는 명예직이었던 합참의장을 역임했다. 때문에 13기는 육참총장을 배출하지 못해 12기와 14기에 끼인 기수라는 평을 받는다.
  • 정동호
    • 육사 13기, 12.12 병력동원
    • 대통령 경호실장 - 육군참모차장(최종계급 : 중장) - 국회의원
    • 12.12 당시 경호실장 직무대리임에도 병력을 불법 동원해 최규하 대통령을 사실상 연금한 인물. 최세창과 더불어 차기 참모총장 후보였으나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의 책임을 지고 예편했다.
  • 정진태
    • 육사 13기, 한미연합사부사령관(최종계급 : 대장)
  • 이종구
    • 육사 14기, 하나회 총무
    • 수방사령관 - 보안사령관 - 2군사령관 - 육군참모총장(최종계급 : 대장) - 국방부 장관
    • 하나회의 황태자로 불리며 한국 군 역사상 제일의 화려한 출세 가도를 자랑한다. 자랑할 만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 안무혁
    • 육사 14기
    • 준장 전역 - 국세청장 - 안기부장 - 국회의원
    • 5공화국 초기 정치권에 차출되었다.
  • 이춘구
    • 육사 14기
    • 준장 전역 -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대표 - 내무부 장관 - 신한국당 대표
    • 5공화국 초기 정치권에 차출되었다.
  • 이진삼
    • 육사 15기
    • 육군참모차장 - 1군사령관 - 육군참모총장(최종계급 : 대장) - 장관 - 국회의원
    • 6공화국에서 승승장구한 노태우계 9-9 군맥의 수장이다. 이 외에도 각종 사고로 유명하다. 별명이 하사이니 말 다했다.
    • 이진삼은, 장관직 퇴임 이후에 법의 심판을 받은 적이 없으며, 2008년'에 충남 부여-청양 지역구에서 자유선진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회에 나올 때 군번줄을 안 찬다고 쓸데없이 천안함 진상규명 때 어그로를 끌었으며, 워낙 인물에 대한 평가가 나빴던지라, 19대 총선을 앞두고 유일하게 선진당 공천심사에서 잘렸다.
  • 고명승
    • 육사 15기, 12.12 직접가담
    • 수도방위사령관 - 보안사령관 - 3군사령관(최종계급 : 대장)
    • 전두환의 직계로 5공화국에서 승승장구한 15기 선두주자였으나, 노태우 정권에서는 견제를 받아 참모총장이 되지 못하고 전역해야 했다.
  • 나중배
    • 육사 15기
    • 한미연합사부사령관(최종계급 : 대장) - 주 사우디아라비아 대사
  • 민병돈
    • 육사 15기
    • 특전사령관 - 육사교장(최종계급 : 중장)
    • 하나회임에도 6월 항쟁 때 전두환의 군 출동 명령에 항명하고 노태우에게는 육사 졸업식 때 그의 북방정책에 노골적으로 항의해 전역당한 기이한 인물이다. 하나회 중에선 그나마 양심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 장세동
    • 육사 16기, 12.12 직접가담
    • 경호실장(최종계급 : 중장) - 안기부장
    • 한 때 노태우 대신 후계자로도 거론되었던 전두환의 최고 심복으로 5공화국 최고 실세였다.
    • 이후 16대 대선에 출마했으나, 전두환이 "나이를 먹으니 장세동도 내 말을 안 듣는다"라는 말과 같이 지원을 안해줘서 하루 전 날에 후보 사퇴했다. 워낙 이미지가 나빠서 김길수(불심으로 대동단결)에게도 패배했을 확률이 높다.
  • 신말업
    • 육사 16기
    • 육군참모차장 - 3군사령관(최종계급 : 대장)
  • 이필섭
    • 육사 16기, 12.12 직접가담
    • 육사교장 - 2군사령관 - 합참의장(최종계급 : 대장)
  • 송응섭
    • 육사 16기, 하나회 멤버는 아니지만 12.12 직접가담
    • 합참차장(최종계급 : 대장)
  • 김진영
    • 육사 17기, 12.12 직접가담
    • 수방사령관 - 한미연합사부사령관 - 육군참모총장(최종계급 : 대장) - 하나회 숙청으로 강제 전역
    • 육사 17기 대표화랑 출신으로 하나회 내 전두환 직계이며 12.12에서 공을 세워 기반이 두터운 데다 실력도 있었기 때문에 자타가 공인하던 차기 참모총장이었다. 노태우 정권의 정책에 반발하여 교육사령관으로 좌천당했으나 끝내 부활하여 참모총장에 올랐다.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때 육군참모총장에서 경질되어 첫 빠따로 군에서 쫓겨났다 전역당했다. 같이 경질당한 기무사령관인 서완수는 하나회 후배다.
  • 허화평
    • 육사 17기, 12.12 직접가담
    • 준장 전역 - 대통령 보좌관, 정무수석 - 국회의원
    • 12.12 당시 전두환의 비서실장으로 12.12 쿠데타 당시 배후 공작을 진두 지휘해 진압군을 교란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5공화국 초기 허삼수, 허문도와 '3허'로 불리며 정권 최고 실세였다. 그러나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고 장영자 사건 당시 대통령 친인척 처벌을 주장하다 전두환의 눈 밖에 나서 청와대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갔다. 이후 계속해서 15대 이후 총선에 출마했지만 16, 17대 모두 크게 져서 아예 정계은퇴했다.
  • 허삼수
    • 육사 17기, 12.12 직접가담
    • 준장 전역 - 사정수석 - 국회의원
    • 허화평, 이학봉과 함께 12.12 당시 전두환의 보안사 3인방 중 1명. 정권 초기 허화평, 허문도와 '3허'로 불린 정권 실세였다. 허화평과 마찬가지로 미국으로 쫓겨났다.
  • 안현태
    • 육사 17기
    • 소장 전역 - 경호실장 - 국가원로자문회의 사무총장 (장관급)
    • 장세동과 같이 전두환의 충복 중 하나로 꼽힌다.
  • 이현우
    • 육사 17기
    • 중장 전역 - 경호실장 - 안전기획부장
    • 동기인 안현태가 전두환의 경호실장을 맡았다면 이 쪽은 노태우의 경호실장.
  • 이문석
    • 육사 17기
    • 특전사령관 - 육군참모차장 - 1군사령관(최종계급 : 대장) - 장관
  • 반준석
    • 육사 18기
    • 육사 생도대장 - 56사단장 - 육군본부 동원참모
    • 소장 전역
  • 이학봉
    • 육사 18기, 12.12 직접가담
    • 준장 전역 - 민정수석 - 안전기획부 2차장 - 국회의원
    • 허화평, 허삼수와 함께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시절 핵심 참모 3인방이었다. 주특기는 공작과 수사. 전두환의 심기를 거슬러 불화를 겪었던 허화평, 허삼수와 달리 계속 충복으로 남았다.
  • 구창회
    • 육사 18기, 12.12 직접가담
    • 수방사령관 - 기무사령관 - 3군사령관(최종계급 : 대장) - 하나회 숙청으로 강제 전역
    • 12.12 당시 9사단장 노태우의 참모장(대령)으로 노태우의 명령으로 최전방 병력을 서울로 출동시켰다. 반란 때문에 최전방 병력을 지휘관의 허락도 없이 빼내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경악한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이 이를 확인하는 전화를 걸자 그런 일 절대 없다고 뻥쳤다. 노태우 직계로써 6공화국에서 요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는데, 숙청당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가 차기 참모총장이 되었을 것이다.
  • 조남풍
    • 육사 18기
    • 기무사령관 - 교육사령관 - 1군사령관(최종계급 : 대장) - 하나회 숙청으로 강제 전역
    • 박근혜 정부에서 재향군인회장을 맡았다가 방산비리 혐의로 2015년 구속되었다.
  • 김재창
    • 육사 18기
    • 합참차장 -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최종계급 : 대장) - 하나회 숙청으로 강제 전역
  • 김진선
    • 육사 19기
    • 수방사령관 - 육군참모차장 - 2군사령관(최종계급 : 대장) - 하나회 숙청으로 강제 전역. 위에서 언급했듯이 하나회였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 서완수
    • 육사 19기
    • 기무사령관(최종계급 : 중장) -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고 얼마 못 돼서 하나회 숙청으로 강제 전역

주요 인물들의 커리어에서 보이듯이, 하나회 출신들은 군내 핵심 요직들을 독차지한 것은 물론이고, 군인들이 자주 기용되는 대통령경호실장안기부장을 독점했으며, 군에서 전역한 뒤에도 장관, 국회의원, 공기업 사장 등 고위직을 1자리씩은 꿰차는 등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은 그야말로 하나회의 시대였다.

하나회 인사들은 비하나회 인물들도 대장으로 진급했고 요직에 기용되었다는 반론도 하지만, 그것은 군 내 여론을 의식해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인물들을 요직 중에서도 비교적 힘이 없는 자리들에 기용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갑종 장교 출신으로 첫 대장이 되고 2군사령관, 합참의장, 국방장관을 역임한 오자복은 얼핏 보면 탈계파적인 인사로 보이나 신군부의 정권 장악 과정 당시 국보위 위원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신군부에 협조한 인물이었다. 그가 역임한 2군사령관이나 합참의장은 대장 계급 중에서도 가장 힘이 없는 자리들이었다. 11기 이후의 비하나회 출신 대장인 한철수(12기,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역임했고 예편 후 주 브라질 대사, 서경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했다.), 민경배(14기, 노태우 정부 때 국가보훈처장을 역임했다.), 김동진, 김연각(이상 17기, 김연각은 2군사령관으로 있다가 하나회 숙청 과정에서 동기 김동진이 참모총장이 되자 전역했다.) 등은 요직에는 거의 기용되지 않았다.

실제 군사 정권하에서 정권의 안전장치이자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육군참모총장, 제3야전군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기무사령관, 대통령 경호실장은 100% 하나회가 독점했다. 비하나회 인물은 1명도 기용되지 않았다. 비하나회는 당시에는 명예직이었던 합참의장이나, 수도권을 방위하는 3군사령관에 비해 힘이 적은 1군사령관이나 2군사령관에 하나회와 번갈아가며 기용되곤 했다. 비협조적인 비하나회 장교들은 유능하다 하더라도 좌천과 진급 실패 속에 군복을 벗어야 했다. 하나회 육사 11기 최고 엘리트로 전략통으로 꼽히던 김복동도 전두환과 노태우 눈 밖에 나서 전역해야 했는데, 하물며 비하나회 장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야전에서 묵묵히 길을 닦아온 유능한 엘리트 장교들은 하나회 정권에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하나회 멤버들 중에서도 육사 대표화랑 출신으로 유능함을 인정받고 선후배 간 신망이 두터웠던 김진영 같은 인물들도 있었지만, 하나회 라인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 결코 오르지 못할 인물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밀려 끝내 국가를 위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유능한 장교들을 생각하면 군 내에 이러한 사조직이 다시는 없어야 함을 새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6.1. 전두환계와 노태우계 간 암투

노태우가 집권하면서 하나회는 분열되어 전두환계와 노태우계 간의 암투가 벌어졌다. 12.12 군사반란 이후부터 이미 하나회의 2인자로 여겨졌던 노태우는 오랜 기간 동안 2인자로서 설움[46]을 견뎌야 했다. 권력의 속성상 2인자에겐 견제가 쏟아질 수밖에 없었지만, 노태우는 이를 견디고 겉으로는 친구에게 충성을 다했다. 전두환은 노태우의 충성과 우정을 확신하며 그에게 권력을 넘겼다. 그러나 노태우는 권력을 쥔 후 전두환계를 가차 없이 숙청했다.

암투의 발단은 1987년 말 군인사에서 시작되었다. 집권 전 자신은 결코 중임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던 전두환이지만, 막상 임기 말이 되자 퇴임 후에도 국가원로자문회의의 의장으로서 노태우 위에서 상왕처럼 군림하는 것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퇴임 직전인 87년 12월, 전두환은 군 인사에서 군부 핵심 요직들에 자신의 직계 충복들을 깔아두었다. 정권을 이양하는 시기임에도 노골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다지는 군 인사를 행하며 향후 자신의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자신의 충복 육군참모총장 박희도의 임기가 끝났음에도 1년 더 유임시킨 것을 시작으로 합참의장에 최세창, 3군사령관에 고명승, 기무사령관에 최평욱, 수방사령관에 김진영 등 자신이 키워온 하나회 내 전두환 직계들을 군부 핵심 요직에 깔아두었다. 수도권 군사령관인 3군사령관, 군을 감시하는 기무사령관, 수도를 지키는 수방사령관은 정권의 안전과 직결된 핵심 요직들이다. 다른 보직들은 非하나회도 기용했지만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이 세 보직만은 절대적으로 전원 하나회가 독점했다. 거기다 쿠데타 시 병력 동원이 가장 유용한 특전사령관도 전두환계인 민병돈이었으므로, 쉽게 말해 마음만 먹으면 또 다시 군대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정권을 넘겨주지만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날려버리려는 의도였다.

'상왕'으로 군림하려는 전두환의 의도에 노태우는 분노했지만 속으로 분을 삭히며 일단 참았다.[47] 노태우는 겉으로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잘 참았다가 원한을 잊지 않고 보복하는 스타일이라는 평이 있다. 그 평대로 노태우는 시간을 기다린 후 전두환계 숙청에 나서 자신이 겪은 설움과 분노를 갚아주었다. 2인자로서 전두환에게 숱하게 갈굼받고 늘 고개 숙여 처신해 온 노태우였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첫째, 노태우는 대통령을 간선제 형식으로 물려받지 않았다. 비록 의 다툼으로 인한 어부지리 당선이었고, 전두환의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거나 직선제 당선이라 정권의 정당성이 있었다.[48] 둘째, 전두환계를 숙청할 명분도 확보했다. 비록 어이없게 노태우가 당선되긴 했지만 전두환 정권의 부패와 권력 남용에 대한 단죄를 요구하는 국민 정서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듬해 88년 4월 총선에서 민정당이 패배하며 여소야대 국면으로 흐르게 되며 더욱 증폭된다.

88년 6월, 취임 후 첫 군 장성 인사에서 5공 청산에 대한 국민 여론을 명분으로 박희도를 참모총장에서 경질하고 전두환계 군맥 제거 작업을 시작했다. [49] 그리고 그 후 1년 안에 합참의장 최세창, 특전사령관 민병돈, 기무사령관 최평욱, 수방사령관 김진영, 참모차장 권병식, 5군단장 정만길 등이 차례차례 한직으로 좌천되거나 예편했고, 자리가 빈 요직들에 그 동안 소외되었던 자신의 직계 하나회 장교들을 깔아두어 군을 장악했다. 군 밖에서도 국민 여론이 강해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전두환을 백담사로 귀양 보냈고, 5공 청문회 등을 활용하여 장세동, 이학봉 등 전두환의 충복들을 구속시켰다. 전두환계는 반발했지만 국민 여론을 등에 업은 노태우에게 사정 없이 당했다. 17기 선두주자이자 자타가 공인하던 차기 육군참모총장 김진영은 불만을 드러내다 수방사령관이라는 실세 자리에서 한직인 교육사령관으로 쫓겨났다. 특전사령관에서 쫓겨나 육사 교장으로 갔던 민병돈은 육사 졸업식에서 임석해있던 노태우의 북방정책을 강하게 비난하고 경례마저 하지 않으며 엿먹이고 예편당했다. 15기 선두주자 고명승은 3군사령관 임기가 끝나자마자 영전 없이[50] 전역해야 했다. 16기 선두주자 최평욱 역시 좌천 후 예편당했다.

그리고 그들의 빈 자리는 노태우의 직계 군맥, 이른바 '9-9 인맥'[51]들이 차지했다. 이진삼[52]같이 전두환 정권에서는 노태우를 견제하느라 전두환 직계들에게 밀려왔던 그들은 급부상하여 승승장구했다. 9-9 인맥은 非하나회, 非육사[53] 출신들도 더러 있었지만 역시 주류는 하나회 내 노태우계 장교들이었다. 대장 4차 진급자임에도 참모총장을 차지한 15기 이진삼, 합참의장 16기 이필섭, 특전사령관과 1군사령관을 역임한 17기 이문석, 수방/기무/3군 사령관을 모두 역임한 18기 구창회[54] 기무사령관을 거쳐 1군사령관이 된 18기 조남풍, 수방사령관을 역임한 19기 김진선과 20기 안병호가 대표적인 9-9 인맥 내 하나회 장교들로 선두에 섰던 전두환계를 제치고 승승장구했다. 자연스럽게 살아남은 전두환계와 노태우계 사이에 암투가 벌어졌고, 대표적으로 노태우 직계 김진선[55]이 지나치게 전두환계 하나회를 공격하다가 금족령까지 받은 일이 있다. 또한 전두환계 수장인 국방부장관 이종구와 노태우계 수장인 참모총장 이진삼은 인사권 문제를 두고 서로를 비난하며 극렬하게 대립했다.

이렇듯 하나로 똘똘 뭉쳐 대한민국을 장악한 하나회도 권력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졌다. 자신들은 이른바 '구국의 결단'으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위해서 반란을 일으켰는지, 왜 하나회를 조직하였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노태우는 임기 말이 되자 본인도 뒷날이 걱정되었는지 전두환계에 대해 유화적인 스탠스를 취해 하나회를 단결시키려 한 것 같다. 자신이 좌천시킨 전두환계 핵심 김진영을 복권시켜 참모총장에 발탁했고, 기무사령관에도 전두환계 서완수를 임명했다.

3당 합당 이후 노태우와 민정계는 김영삼을 대신하고 김대중에 대항할 만한 후계자를 찾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김영삼을 대선 후보로 선택했고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노태우는 전두환처럼 임기 말 군 인사로 수족들을 깔아두는 행위는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군 내 핵심 요직들을 하나회로 장악시켜논 상태였다.[56] 노태우는 하나회 조직으로 군부를 장악했으므로, 쿠데타 가능성 때문에 김영삼이 설마 자신을 치지 못하리라 생각했고, 세간 역시 김영삼이 하나회 세력과 불편한 동거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노태우와 하나회의 예상을 비웃듯 불도저 김영삼은 취임하자마자 전두환계와 노태우계를 가리지 않고 하나회 전체를 숙청했다.

7.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및 해체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 1993년 3월 5일 육군사관학교 제49기 임관식 연설에서, 이 연설 3일 후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을 해임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하나회 숙청작업을 시작했다.

속으로 웃기지 마라, 내가 대통령하면서 그렇게 더럽게 안한다, 왜 동거를 하느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김영삼, 2009년 SBS '한국 현대사 증언' 방송에 하나회 숙청을 회상하며

국군통수권자가 누군데?

- 김영삼

김영삼 대통령의 숙군(肅軍) 작업은 그야말로 '김영삼답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김영삼 대통령의 다른 업적들과 행보가 유사했다. 기존 행정조직이 아니라 측근들하고만 의논하며 철저히 비밀을 유지하다가, 결정적인 시점에서 깜짝쇼를 하듯이 터뜨리는 것이다. 하나회가 반발하다가 극단적으로는 쿠데타을 일으킬 가능성까지 있었으므로, 하나회 숙청에 있어서는 이러한 기습적인 방식이 더 알맞았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하나회 세력을 조용히, 천천히 물갈이하려다가 역으로 전두환을 위시한 쿠데타 세력에 당한 전례도 있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하기 전부터 하나회를 두고 고민했고, 특히 국방부 장관으로 생각하고 있던 권영해 국방부 차관으로부터 하나회를 숙청해야 한다는 말을 계속 들었다. 그리하여 취임 후 청와대에서 공식적인 직책에 있는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철저히 비선 조직을 통해 하나회 숙청 계획을 짰다.

당시 김영삼의 비선 조직은 절친한 사이인 김윤도 변호사가 이끄는 조직과 1군 사령부 방첩대장 출신의 예비역 중령 A씨를 비롯한 예편 장교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거사 이틀 전인 3월 6일 우선적인 제거 대상과 방법, 사후 조치 등을 최종 점검했다.

한편 대통령의 최측근 박관용 비서실장은 하나회의 수장 격인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부산중학교 동기동창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이 때문에 박관용이 대통령직인수위원(1분과) 시절에 많은 사람이 하나회 척결을 언급한다고 하자 대통령은 그냥 입 다물고 있으라고만 했고, 여기에 일종의 청와대 빨대라 할 수 있는 현역 장성 김희상 국방비서관과도 아무 상의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들 둘은 아무런 정보를 듣지 못했고, 당연히 김진영 육참총장은 마음을 놓고 있었다.

김영삼은 취임하자마자 하나회 출신인 서완수 기무사령관에게 "앞으로는 대통령과 독대하지 말고 국방장관을 통해 보고하라." 하고 말했다. 사실 이게 폭풍전야였다.

한편, 동년 3월 3일에는 육사 졸업식 때 장성들 얼굴을 모르면 안된다는 이유로 소집된 육해공 3군 중장 이상이 참석한 3월의 보고 회의에서 군 지휘부의 노고를 치하하는 등 아낌없이 칭찬을 쏟아 안심시켰다. 이후 3월 5일 육군사관학교 49기 졸업식 연설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아주는 일에 앞장서겠다는 말을 통해 에둘러서 군을 엎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임무에 충실한 군인이 조국으로부터 받는 찬사는 그 어떤 훈장보다도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는 일에 앞장설 것을 여러분에게 다짐합니다. (이하 하략) 연설 전문 (출처: 대통령기록관)

눈치가 빠른 하나회 출신 장성이 있었다면 이 연설의 내용을 파악했을텐데, 아니었네...

이 시기 용산구 국방부 내부 주차장에 하나회 척결을 주장하는 전단이 살포되었다. 비하나회파가 뿌린 듯한 이 전단을 두고 권영해 국방장관은 조사를 명령한 뒤 김영삼에게 보고를 했다.

김영삼이 본격적인 숙청에 들어간 때는 취임 11일째인 1993년 3월 8일이었다. 이 순간까지 군 수뇌부는 물론 청와대 비서진 중 단 한 명도 김영삼의 의도를 몰랐다. 김영삼은 철저히 비선조직들과 일을 의논하다 3월 6일 오후 늦은 시각 국방부 장관 권영해에게 3월 8일 오전 7시 30분까지 오라고 지시했다. 8일 권영해와 독대한 자리에서 "군인들은 그만둘 때 사표를 제출합니까?"라고 김영삼이 묻자 권 장관은 "군대엔 사표 내는 일 없이 인사명령에 따라 복종하는 각오가 언제나 되어 있습니다." 하고 답했다.

그러자 김영삼은 "아, 그래요. 그라모 됐구마는." 하더니 "내가 육참총장하고 기무사령관을 오늘 바꿀라캅니다."라고 선언했다. 장관이 극비리에 육군본부ㆍ기무사ㆍ수방사ㆍ특전사 등의 동향을 점검하도록 지시를 내린 상황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김영삼과 권영해가 수뇌부에 대한 인선에 들어갔고, 하나회 출신 육군참모총장이었던 김진영과 기무사령관이었던 서완수를 군 통수권자 권한으로 전격 해임했다. 그렇게 공석이 된 자리에는 非하나회 출신인 김동진 연합사 부사령관(육사 17기)과 김도윤 기무사 참모장을 각각 육군총장과 기무사령관에 임명했다. 하나회 파멸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기무사령관 교체시에 작은 해프닝이 있었는데, 서완수 사령관이 해임된 뒤 김도윤 참모장이 취임하는데 원래 기무사령관은 중장이 보임한다. 그러나 너무 빨리 교체되는 바람에 중장으로 진급시킬 시간이 없어 김도윤 기무사령관은 물러날 때까지 소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중장이 보임된 때는 다음 기무사령관에서였다. 여기까지 과정이 단 4시간. 여기에 이르러서도 이 일이 군 수뇌부 교체 정도가 아닌 하나회 숙청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김영삼 자신과 몇몇 측근에 불과했다.

다음날(3월 9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김영삼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 유명한 "놀랬제." 발언을 하여 뒷날 화제가 되었고, 이후에 개그 작가 장덕균이 자신의 김영삼 개그집 ≪YS는 못 말려≫에서 이 말투를 인용해 일종의 드립으로 승화시켰다. 이어 "저짝 사람들(하나회) 깜짝 놀랬을 기야."라고 하였고, 한 수석비서관은 "각하, 저희들도 그렇지만 국민 모두 얼떨떨해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하는 등 자리가 화기애애했다. 동아일보의 취재에 의하면 군부에서는 '대단하군, 역시 대단해.' 하며 충격을 넘어 경악하는 반응이 나왔다.

재밌는 점은 김영삼 대통령의 명령을 하달받고 시행하라 공지한 사람이 바로 김영삼에 의해 군복 벗는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이라는 것이다. 이 공지를 요약하자면 '군 내 사조직을 해체하라.'였는데, 김진영의 출신이 출신이다보니 이를 들은 하나회 구성원들은 초기에는 그 대상을 하나회가 아닌 학군장교 그룹으로 여겼다. 김진영과 서완수를 해임한 것은 학군장교 그룹을 정리하기 위한 일종의 "명분쌓기"용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7.1. 하나회 명단 살포 사건과 그 이후

1993년 4월 2일에는 당시 대령이던 백승도[57]가 육사 20기~36기 하나회 125명의 명단을 용산구 군인 아파트[58]에 뿌리는 일을 벌였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하나회의 깊은 뿌리가 제대로 알려졌다. 이후 언론에서 나온 각종 하나회 명단은 이른바 '백승도 명단'에서 일부 이름과 기수 오류 같은 오타를 수정한 명단이다.

장성급까지의 하나회 구성원들은 어느 정도 드러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을 대상으로 숙청이 진행되었는데, 이 하나회 명단 살포와 그 후 명단 확인 소동 등이 일어나면서 하나회 소속 영관급 장교들까지 전부 드러나게 되었고, 이후 이들 하나회 출신 영관급 장교들은 이전과 반대로 하나회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급에서 지속적으로 불이익을 받으며 차례차례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일로 육사 20기 안병호 수방사령관과 육사 19기 김형선 특전사령관까지 경질 후 교체되었다. 이 교체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이 목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은 다음은 자기 차례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특전사령관은 아예 포기하고 퇴역하면 운전병이 없어질 거라며 운전 연습을 하고 있었고, 수방사령관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이곳저곳에 줄을 대고 있었다 한다. 물론 결과는 사이 좋게 모가지. 이런 교체 의도를 권영해 국방부장관이 알게 된 건 겨우 발표 하루 전이었을 정도로, 이러한 진행은 김영삼과 측근들에 의해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하나회가 미리 알아차리면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4월 8일에는 1, 3 야전군사령관제2작전사령관이 교체되었고, 일주일 후인 4월 15일에는 군단장사단장급 인사까지 벌여서 하나회 출신 장군들을 자리에서 몰아냈다. 4월 동안 벌인 이런 기습적인 세 번의 교체로 군 주요 보직에서 하나회 인사들은 순식간에 밀려나고 만다. 취임 3달 만에 장군 18명이 옷을 벗고 떨어진 별이 40개가 넘었는데, 이는 전두환이 12.12를 일으켜서 상급 장성들의 목을 다 날리고 하나회로 군을 장악한 이후 처음 있었던 대규모 군 내 숙청작업이었다.

여기까지를 1차 하나회 숙청 작업으로 볼 수 있는데, 김영삼의 최초 의도는 여기까지였다. 하나회 숙청이 목적이 아니라 김영삼의 권력에 도전할 만한 세력만 도려내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하나회의 수장들만 날렸고 일부 장성들과 영관급 이하는 건드리지 않았다. 당시 중앙일보 특종 보도제목인 <3성 장군 이상 하나회 예편 조치> 등이 말해주듯이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할 만한 수뇌부만 숙청하는 것이었다. 장성급이야 정치색으로 찌들 대로 찌들었지만, 영관급 이하들은 원래 기수별로 영남 출신의 성적 최상위권자들을 선배들이 미리 찍어 집요하게 스토킹하여 구성했던 만큼 최소한 공부는 잘했던 자들이다.

그러나 그동안 하나회에게 당한 게 많았던 권영해 장관과 김동진 육군참모총장은 이 정도에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권영해의 경우 소장출신인 것을 두고 국방부 장관은 예비역 대장이 하던 관례를 들먹이며 일개 소장 출신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비난 첩보를 듣는 상황이었고, 김동진은 육사 17기 수석졸업자로 초 엘리트이지만 전북 전주 출신이라는 이유로 영남 사조직인 하나회에게 온갖 수모와 박해를 받아왔는데, 일례로 육참총장 이전 김동진의 보직이었던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 경쟁에서 밀린 4성 장군이 가는 자리였다.(현재는 최근 20년간 가장 많은 육군참모총장을 배출한 요직 중의 요직이다.) 그래서 권영해와 김동진 모두 하나회에 대해 이를 갈고 있었는데 일례로 박관용 비서실장의 증언에 따르면 유능한 초급장교 보호 차원에서 대통령 동의를 얻은 후 H호텔 일식당에서 이들을 만나 여기서 그만하자고 하였다. 권영해 장관은 그런대로 납득을 하는 눈치였지만 김동진 총장은 정색을 하였다. "실장님은 군 내부 사정을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여론을 따질 계제가 아닙니다. 우리한테 맡겨주시면 됩니다." 하며 물러서지 않았다[59]. 이 와중이 일이 터진다.

하나회 1차 숙청이 진정 국면으로 들어간 1993년 7월 9일, 합참 장성들이 모인 회식 자리에서 하나회 소속인 합참 작전부장 이충석 소장(육사 21기)이 물컵으로 탁자를 몇 차례 내려치면서[60] "군을 이런 식으로 막 해도 돼? 선배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뭐냔 말이야. 소신도 없고, 다 죽었어. 정부가 장군들을 함부로 대하니까 외부에서도 제멋대로 군을 매도하잖아. 이래도 되느냐 말이야."라는 발언을 해서[61] 회식 자리가 서둘러 마무리된 일이 있었다.

김영삼과 非하나회로 구성된 군 수뇌부는 이를 전해 듣고는, 이 사건을 하나회가 청산을 받아들이지 않고 군통수권자에 저항하려 한다고 판단하고[62], 하나회의 군사반란을 우려해 일부러 내두었던 일부 장성과 영관급 하나회를 모두 숙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먼저 문제의 발언을 한 이충석 장군을 보직 해임과 동시에 강제 전역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나머지 하나회 장성들을 모조리 강제 전역시켰다. 장성급들을 정리한 이후에는 영관급 인사들을 숙청했다. 결국 하나회 출신은 계급을 막론하고 하나회라는 이유만으로 진급과 직위에서 계속 배격당했고, 그렇게 하나회는 이전의 권력을 완전히 잃고 말 그대로 완전히 개발살났다.

다만 하나회라고 모두 숙청된 것은 아니었다. 권영해 국방부 장관이 동생의 율곡사업 비리 문제로 경질되자 후임 장관을 선출하는데, 김영삼은 '5.16 또는 12.12에 가담하지 않았어야 하고, 하나회 출신이거나 부정부패자는 안 된다'는 기준을 내세웠는데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릴없이 하나회 출신이지만 김영삼의 경남고 라인인 보훈처장 이병태(육사 17기. 예비역 중장)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나회 출신이라며 말렸지만, '진짜 하나회라면 왜 중장만 하고 예편했겠나.'는 논리로 김영삼은 임명을 강행하였다. 이후 이병태가 '일산 신도시의 군사전략적 측면' 발언[63]으로 설화를 일으키며 둘의 관계는 최악이 된다. 심지어 최초로 목을 날린 전 육군참모총장 김진영마저 1996년 여소야대 형국이 되자 부산으로 출마시킨다며 신한국당으로 영입하라는 황당한 지시를 박관용 정치특보[64]에게 시켰다. 그런데 마침 며칠 전 방영된 MBC의 12.12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김진영이 험악하게 나오게 된다. 이를 들은 김영삼은 김진영이 있다는 한 기도원에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던 중이던 박관용에게 그냥 돌아오라고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러한 일화들로 짐작하건데 김영삼의 목적은 하나회의 완전척결이 아니라, 자신에게 반기를 들 만한 세력의 축출이 목적이었다고 보인다. 하나회 자체를 뿌리 뽑으려던 것은 하나회라고 하면 치를 떠는 非하나회 출신 비영남권 군인들이었다.

1995년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반란죄 및 횡령, 살인죄로 체포하고 법정 최고형인 사형까지 구형하였다. 그리고 모두가 아시다시피 반란수괴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 선고.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김영삼 임기 말에 특별 사면되었다.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었던 김대중의 요청에 의한 사면이라는 게 대체적인 정론.출처필요 [65]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에서는 김영삼 대통령 자신이 오래 전부터 이 두 사람을 사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다음 정권에 넘길 생각은 없었다고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김대중은 소극적으로 동의했다고 나온다. 9분 43초부터. 전반적으로 회고록의 성격이 잘한 건 다 내가 하고 못한 건 다 김대중이 했다는 식이기 때문에 판단은 개인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

김영삼 대통령은 훗날 인터뷰에서 "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사실 하나회 자체가 군을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군 장성들의 사조직이었던 만큼, 그들이 해체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군 김대중 비토(veto)설'이다. 이 주장은 5공 때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해서,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나설 때마다 흘러나왔다. 심지어 하나회가 완전히 숙청된 이후인 1997년 대선까지도 김대중 비토설이 흘러나왔다. 하나회 해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애써 이루어낸 민주화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하나회 출신 군 수뇌부를 제거하는 상황 때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군 지도부가 쿠데타 상황까지 경계하며 보름 동안 밤샘 대비를 하기도 했고, 실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숙청 과정에서 쿠데타설이 돌기도 했다. 아무튼 김영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평가가 대세이다. 김영삼은 노태우 대통령 이후 민정당 측이 대통령 후보를 물색하다가 사람이 안 나와서 모셔간 사람이기 때문에(물론 여기에는 김영삼의 계산도 작용했다.), 대통령 취임 이후 여당인 민자당을 전부 휘어잡을 명분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생각보다 쉽게 하나회를 해체했다. 만약 김영삼이 다른 당이었거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상태에서 하나회 해체를 시도했다면 12.12 군사반란 시즌 2를 찍었을 가능성도 있다.[66]

하나회 숙청 과정에서 하나회 출신들에 대한 자진신고를 받았는데, 하나회는 군 내 사조직이라 명단이나 체계가 따로 있어서는 안 되었기에 하나회 출신들과 잘 어울리고 진급이 잘 되던 장교들은 '나도 하나회인 것 같다.'며 자진신고를 해 오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하나회 명단이 살포된 후에야 그들은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하나회를 숙청하고 빈자리에 주요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비밀 유지를 위해 김영삼은 국방부나 군 관련 인물을 배제한 채 최측근들하고만 일을 논의했는데, 이런 인선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했던 김동진 육군참모총장(경복고), 김희상 국방비서관(경복고),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경복고) 등 이른바 경복고 라인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후 김현철은 권력 실세로 우뚝 섰다. 그러나 이렇게 권력 실세가 된 김현철은 이후 부패권력의 상징이 되어 몰락하고 만다.

김현철이 이 하나회 숙청의 브레인이라는 말도 있지만, 김현철은 스스로 부인했다. 자기도 몰랐다는 것이다. 조언자는 김희상 당시 국방비서관이었는데, 김현철은 김희상도 정확한 날짜는 몰랐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김희상도 전혀 몰랐다는 말도 있다.). 흥미롭게도 김영삼이 평소에 맺힌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한 방에 날려버린 것이라는 주장을 한 것도 김현철이다. 이런 김현철의 언급에서 보면, 과거의 원한은 반드시 푸는 것과 절대적인 보안을 유지하면서 과감하게 일을 저지르는 김영삼 특유의 정책 시행이 잘 드러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김현철 본인에게 가장 큰 업적이 될 수 있는 일을 부인한 것을 보면 정말 몰랐던 것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여러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숙청 과정에서는 김현철이 개입하지 않았고, 숙청 이후 인선 과정에서 경복고 라인으로 일부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7.2. 해체의 부작용?

노태우는 2011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하나회 숙청을 김영삼이 군을 잘 몰라서 한 일이라면서, 하나회 숙청으로 전투력 약화와 3류급 인사들의 지도부 발탁 등을 꼽았다. 한국논단 및 노태우 등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회의 구성원들은 주로 육군사관학교 성적이 우수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하나회에 가입했다가 하나회 영관급 숙청 때 대거 전역하면서, 1990년대 육군의 허리에 해당하는 영관급 장교단에 상당한 인적자원 공백이 생겨버린 것. 몇몇 군사전문가들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에서 국군의 대응이 이런 문제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회는 독일 1차대전 에이스들이 모여서 후학을 양성한 항공클럽[67]처럼 군사적인 능력이 출중한 사조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위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회 군인들은 전방이나 베트남 전쟁 같은 실전에서 복무한 경험은 적었고 국방부, 수방사, 기무사 등을 맴돌면서 편하고 중앙에 가까운 보직을 독차지하고, 기껏 파견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경기도 등지로 파견 나간 것이 고작이었고, 덕분에 사관학교 우등생들을 정치만 잘하는 정치군인으로 만들어 버린 게 하나회다. 대부분의 정치군인들이 그렇듯 이들도 군사적 능력은 대부분 엉망이었고 정치적으로 뇌물, 아부하는 능력만 뛰어난 이들이 대다수였다.

오히려 하나회 가입을 거부한 올바른 생각과 능력을 가진 장교나, 전방에서 복무하면서 군사적 능력을 쌓은 非 하나회 군인들은 이 하나회 때문에 대부분 대위나 영관에서 전역하는 판국이었다. 해체 과정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 당시 장성 임명은 대대로 하나회에서 임명하고 이걸 하나회의 두목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승인해야 하는 게 관행이였다. 이렇게 요직과 진급을 장악했기에 하나회 소속이 아닌 장성은 하나회 소속 대령의 눈치를 보는 사태에 이른다.

노태우가 주장하는 강릉 무장공비 사건도 자세히 살펴보면 박정희가 유신에 반대하는 채명신[68] 등을 내치고, 노재현같은 정치군인을 기용하면서 한국군은 베트남전에서 얻은 게릴라전에 대한 대처 능력을 상실해 버렸고, 이것이 곪아 터진 것이 강릉 무장공비 사건으로 볼수 있다. 예를 들어 위장용 식수(飾樹)를 여유 있게 가져가지 않는 점과, 인식되기 쉬운 노란색을 계급장으로 사용한 점 등이다.

그리고 노태우는 12.12 군사반란 당시 휴전선에 배치된 9사단의 29, 30연대를 반란에 동원했는데, 당시는 박정희 암살로 인해 2급 비상사태[69]가 선포된 상황에서 전방사단의 병력 절반 이상을 빼내가버렸다. 만에 하나 혹부리가 이 사실을 알아채고 공격을 시도했다면 한국군은 대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진짜 잘못되었으면 30년 전처럼 낙동강까지 밀리거나 밀렸을 수도 있는 상황이였고 자칫 잘못하면 대한민국중화민국처럼 제주도로 이전하거나 멸망 또는 붕괴 될지도 모를 정말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70] 결국 노태우가 말하는 전투력 약화, 3류급 인사들의 지도부 발탁, 하극상은 모두 노태우가 소속된 하나회의 악영향이고, 결국 노태우는 자기 디스를 해버린 셈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은 불법 조직이고, 대한민국을 혼란하게 하여 전복시키려던 반란세력이다. 반란불법 조직을 해체하고 그 조직원을 처치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무엇보다 군사반란을 일으킨 시점에서 군인으로써 실격이다. 군인에게 능력만큼 중요한것이 명령에대한 복종인데 명령 불복종도 아닌 군사반란을 주도하고, 지켜야할 국민들과 정부에게 총부리를 들이민 순간부터 이들은 능력에 상관없이 해체대상 확정이다.

여담으로, 부작용이 있다면 그 당시 하나회 해체하겠다고 장성들을 많이 교체했는데 너무 많이 바뀐 나머지 중장들에게 달아줄 별이 부족하자[71] 다른 국장들의 별을 빌려서 달아주었다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었다고(...)

8. 기타

본문 맨 앞의 기념사진에 나온 인물 중 총 11명은 하나회 소속이 아니다.

앞줄 가장 오른쪽에 있는 김기택 준장이 이런 경우로, 신군부 세력의 서울 통과를 사실상 방조했고 위의 사진에 나와 있듯 사진 촬영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반란군이라는 측면도 있다. 반대로 군사반란 당시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에게 경복궁의 수경사 30경비단에 모여 있는 반란군 장교들의 명단을 적은 쪽지를 건넨 점과 반란 성공 직후 신군부에게 배제되어 수훈명단에는 빠졌다는 점에서 진압군의 성격도 갖고 있다.

둘째 줄 왼쪽에서 3번째 인물인 권정달 대령 또한 하나회 출신은 아니지만, 12.12 군사 반란 이후 보안사령부 정보처장으로서 언론 통폐합과 검열을 주도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불러온 1980년 5월 17일의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에 깊숙이 관여했다. 이 공로 민주정의당 초대 사무총장과 11대, 12대 국회의원으로 5공화국의 권력 핵심부에 진입했다. 그러나 장영자, 이철희 부부 금융사기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무총장을 사퇴했고,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에는 권력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

둘째줄 왼쪽에서 7번째 인물인 우국일 준장도 하나회 소속은 아닌 사람인데 보안사 참모장 자격으로 사진 촬영에 나왔다. 한편, 전두환은 자기 부대 참모장인 우국일에게도 반란 거사 계획을 일체 비밀로 했기 때문에, 우국일은 쿠데타 계획을 전혀 모른 채 전두환 사령관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었다. 나중에 우국일은 전두환 일파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쿠데타가 끝나고 6일 후인 12월 18일 합동참모본부로 전출 명령을 받고 보안사를 떠난다.

이 외에도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한 박종규 중령은 군사정권 시절에 소장까지 진급하긴 했지만 하나회는 아니었다. 또한 안병호 前 수방사령관은 자신이 하나회가 아니었다고 부정하고 있다만 글쎄...

하나회 선후배로 맺어진 군 인사들이 5·6공 시절 정치 테러를 사주했다는 말도 있다. 보안사가 정보를 제공하고 정보사령부북파공작원들을 동원해 테러를 가했으며, 이 두 조직의 수뇌부는 하나회 선후배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 이들이 관련된 사건으로 6공 시절 크게 불거진 일이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부장에게 정보사 소속 요원들이 벌인 테러 사건이다. 오홍근 테러사건 참조. 이 당시 이를 주도한 정보사령관은 이진삼, 이진백 등이다.[72]

김영삼 정권의 하나회 숙청을 김영삼이 자신의 대선자금 관련 비리를 덮으려고 벌인 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지만, 앞선 내용에 있듯이 하나회 숙청은 1993년에 벌어진 일이고 김영삼의 대선자금 문제가 불거진 건 1995년이다. 12.12 사태와 5.18 관련자들을 잡아들인 일이 김영삼의 대선자금 비리를 덮으려고 벌인 일일 가능성이야 있지만, 1993년에 일어난 하나회 숙청 건을 1995년의 일과 연계시키려는 주장은 어불성설. 하나회 숙청은 오히려 김영삼 전 대통령 본인의 하나회에 대한 혐오에 의한 것에 가깝다. 3당 합당으로 인해 그 진실성에 의혹을 보내는 이가 종종 있지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민주화 운동가였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선고에 비하면 약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 본인도 온갖 독재정권발 테러나 탄압을 당하고 전두환 정권 당시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하나회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은 사람이다. 당시 한국에서 경찰이나 형사가 가장 많았던 곳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자택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한편, 당시 정황을 2012년 3월 팟캐스트 라디오 '저공비행'에서 유시민이 언급했는데 내용은 이렇다. "하나회 숙청이 있잖아요, 제가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게 사실인 줄은 모르겠는데 들은 얘기로...군에서 인사안을 가지고 왔대요. 대통령한테 보고를, 비서실장이...대통령이 보니까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군 인사는 대통령 권한이므로.). '이거 누가 짜온 거야' 했더니 '아, 군에서 짜온 겁니다' '군에서 왜 이렇게 짜왔어?' '아 지금까지 군에서 관례화 되어있어서...' 딱 비서실장에게, '어이, 국군 통수권자가 누꼬?' '가...각하십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다 짤러!' 그날 밤에 별이 50개 이상 날아갔다는 거 아니에요". 흠좀무.

위 동영상은 2005년 11월 3일 오후 6시 아주대학교 율곡관 대강당에서 열린 '참여정부 끝나는 개혁을 위해'란 주제의 강의의 한 부분이다.

하나회 숙청이 벌어진 지 10년이 훨씬 넘게 지나고 기자들조차 당시 상황에 대한 정확한 확인 없이 기억만 가지고 기사를 쓰다 보니,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건이 백승도가 하나회 명단을 뿌린 일이 계기라거나, 하나회 소속 장군이던 이충석이 술자리 난동 부린 게 계기라거나 하는 식의 말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하나회 숙청 란에 있듯이 하나회에 대한 숙청은 김영삼이 취임 직후부터 명단 살포나 술자리 난동 건이 있기 이전에 시작한 일이다. 명단 살포와 술자리 난동 건은 하나회 숙청의 확대와 심화를 부른 계기이지 하나회 숙청 자체의 계기가 아니다.

하나회 명단 살포 사건의 경우 사건의 원인과 배경에 대해 말이 많다. 백승도 스스로는 의기에 의해 벌인 일이라 하나, 하나회를 제거하려는 군 내 세력이 백승도를 하수인으로 쓴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백승도는 명단 살포 사건을 일으킨 몇 년 후 "내 의도는 하나회 소속 영관급 장교들마저 계속 진급에서 누락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회에도 건전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선별적으로 구제돼야 한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기타 자세한 사항은 실록! 하나회 참조.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김재홍이 쓴 관련 시리즈 칼럼도 읽어볼 만하다. , , , , , ,

한편, 정부는 2011년 11월 10일 단행한 '후반기 장성 진급 및 보직 인사' 가운데 중장으로 진급시킨 육군소장 5명 중 2명인 최익봉 소장, 김현집 소장은 하나회 출신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기사. 그러나 2012년 3월 9일 특수전사령관에 취임한 지 4개월이 된 최익봉 중장이 과거 여군 부사관을 성추행 한 것이 밝혀져 보직 해임되었다. 기사. 최익봉 전 중장은 지금 모 기업 임원으로 들어가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 어쨌든 2016년 9월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김현집 대장이 전역한 것을 끝으로 하나회 출신들은 군에서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하나회 숙청이 끝나고 십수년이 지났음에도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여전히 여의도 정치 바닥 이곳저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19대 국회의장을 역임한 강창희(육사 25기. 예비역 중령.)가 있으며, 황진하(육사 25기. 예비역 중장.), 권경석(육사 25기.) 등이 있었다.[73]

한나라당 - 새누리당 외에도 2010년 4월 30일 국회 국방위에서 있었던 천안함 피격사건 원인 규명 회의당시 '군번줄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자유선진당이진삼(육사 15기. 예비역 대장.)도 있다. 이진삼은 대표적인 노태우 라인이었고 하나회 숙청이 끝났음에도 15대 총선을 앞두고 YS에 의해서 신한국당에 영입된 케이스.

청와대 출신 인사로는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위기관리실장을 역임한 안광찬(육사 25기. 예비역 소장)이 있다. 강창희 의장과 황진하 의원, 권경석 의원, 안광찬 실장은 12.12 사태 때 쿠데타군을 막고자 했던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지키다가 반란군의 흉탄에 전사한 특전사 비서실장 김오랑 중령과 동기다. 심지어 강창희 의장과 김오랑 중령은 1978년 소령때 육군대학에서 교육을 받던 중 같이 찍은 기념사진도 존재한다. 기사.

정치권외에도 성우회,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육사 동문회를 비롯한 국내 주요 예비역 장성모임 등에서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아직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세직 같은 하나회 출신들이 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니...2012년 터진 전두환 육사 사열 논란 등의 배후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관련 기사. 거기에 이들 단체가 군 원로라는 이름으로 국내 군에 아직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 만큼, 군 내 하나회의 영향이 아직 완전히 제거됐다고 보기는 힘들다. 전역 후에 사조직 만드는 것을 뭐라 할 수 없고, 그러면서도 선배란 이름으로 조언까지 하니.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청죽회라는 대항 조직 성격의 사조직도 있었다. 하나회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영남 중심 인맥이라면, 청죽회는 이북과 경기도 출신 인맥으로 유명한 사람은 김종호 전 내무부 장관, 이종찬 전 국정원장,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등이 있다. 하나회와는 경쟁관계였던터라 견제도 많이 받았다고 하지만, 이종찬 같이 중용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 외에 만나회, 알자회, 나눔회 등의 사조직 등도 있었다. 이 사조직들은 하나회가 해체되면서 같이 해체되었다고 하나, 2000년 이후에도 나눔회 인맥이 조직적으로 군인사에 개입한다는 폭로성 언론 기사가 몇 차례 나왔다. 2016년에는 알자회에 대한 언론 기사가 많이 나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청문회 과정에서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거라 믿었던 군대 내 사조직이 아직도 건재하며,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이 폭로되었다. 참조 1, 참조 2. 2014년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 육사 34기부터 43기까지 기수 별 10명씩 총 120명이 가입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름의 유래는 "알고 지내자"는 모임이란 뜻에서 알자회라고 한다. 육군 내에서는 알짜 보직을 주고받아 '알짜회'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저 있다고 한다. 박근혜정부에서 알자회 출신 인사가 기무사 사령관, 국정원 국장에 # 임명되는 등 아직 건제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또한 다음 인사이동 시 알자회 출신 인사들로 수도권 일대를 채우려 했다는 내용도 청문회를 통해 나왔다. 하나회의 전례를 볼 때 매우 우려스러운 부분.

가끔 생각 없는 어르신들이 그래도 하나회는 의리 하나만은 끝내준다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이들이 아버지와 같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배신하고 하극상을 일으킨 자들을 보고도 그들이 과연 의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정병주 소장이 특전사령관으로 있던 시절 여단장과 참모 목록을 보면 하나회의 주요 수뇌부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이 중 박희도는 자신의 과실로 예편당하게 생겼을 때 상관이던 정병주 사령관이 몇 번이나 비호해주고 준장 진급에도 도움을 주었지만 배신...

애초에 하나회에서 의리를 지킨 사람은 김복동 한 사람 뿐이다. 당연한 거지만 조폭 집단 보고 조폭이 범죄는 일으켜도 의리 있는 집단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9. 서브컬처에서의 하나회

  • 이원호밤의 대통령 4부, 개백정에서 등장하여 일개 깡패인 김원국에게 패배한다. 애당초 무협지니. 사실 하나회도 정치 깡패지만 말이다.
  • 창천항로의 스토리 작가 이학인이 스토리를 쓴 남북한 현대사물 '봉황의 성골'에서 주인공이 이 조직에 입문을 강요받는다. 주인공 대신 악역 포스의 주인공 친구가 가입해서 대립각을 세우는 스토리로 진행되었다. 정치군인의 길을 거부한 주인공과 그를 고깝게 보는 친구, 그리고 우연하게 고등학교 때 판문점 견학에서 북한 측 관람 탑에서 우연하게 눈이 마주쳐서 인사하는 것으로 알게 된 북한 공작원과 함께 묘한 분위기를 그리며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결국 연중되었다.
  • 기동전사 Z건담에 등장하는 군벌 조직 티탄즈의 모티브가 하나회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이 있었다. 그러나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이 그렇지 않다고 밝혔고, 시기적으로도 Z건담은 하나회의 실체가 밝혀지기 한참 전의 작품이다. 오히려 상호 무관하기 때문에 두 조직의 유사성에 놀라는 팬도 많다.[74]
  • 더 킹에서 한강식 검사(정우성 분)가 '김영삼 때 하나회 숙청을 주도한 유능한 검사'라고 나오는데, 당연히 고증오류.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회 숙청은 검찰을 동원하지 않고 김영삼과 최측근들만으로 은밀히 진행한 것이다. 검찰 등 외부기관을 동원했다간, 군부에 숙청작업이 새어나가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군대는 상명하복 조직이므로,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인사명령만 내리면 끝이다. 거기에 하나회 숙청이라 불리는 93년 숙군작업에는 검사가 관여하는 형사처벌이 아닌 좌천이나 경질 같은 인사조치나 심해야 파면 등 검사와 전혀 무관한 행정조치만 이루어졌고, 형사처벌이 시작된 95년에도 처벌은 12/12 반란에 가담한 반란군이나 비리와 관련된 비리 범죄자만 해당되었지 범죄와 무관했던 하나회 인사는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10. 관련 항목


  1. [1] 군인이라면 당연히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충성해야 하므로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사실 어느 나라의 군대나 군 통수권자에게 충성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2. [2] 전두환의 저 발언이 말도 안되는 소리인 것과 별개로 현역 장성이라는 사람과 국군 통수권자라는 사람 사이에서 저런 말이 오갔다는 건 당시 국군의 불안정성을 나타낸다.
  3. [3] 박정희의 국회의원 출마 권유(사실상의 국회의원직 하사 권유)를 거절하고 군대에 남아있길 원하면서 한 말. 이 인용문의 저 한 마디에 의해 만들어진 사조직이 하나회이다.
  4. [4] 군대에서는 따로 조직을 만들거나 패거리를 만드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5. [5] 전두환이 영관급 때부터 대령 때 베트남전에 연대장으로 파견된 이외에는 사실상 전방부대 근무 경력이 없이 철저히 서울과 청와대 근처(청와대 외곽을 경비하는 30경비단장 역임, 그외에도 청와대 경호실 등에서 근무)를 오가며, 보안사령관에 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6. [6] 박정희는 대놓고 하나회 출신들 위주로 진급시켜 주었고, 전두환이 준장에 진급할 땐, 최고급 세단까지 선물로 하사했을 정도.
  7. [7] 육사 11기 준장 1차 진급자 4명이 전원 하나회였고, 2차 진급자 4명 중 2명이 하나회였다. 1/2차 진급자 8명 중에 6명이 하나회란 소리.
  8. [8] 물론 이 사건으로 찍힌 조천성 장군은 더 이상 진급을 못하고 전역 후 10년 넘게 행적이 없다가 87년에 한국가스공사 이사장에 취임되었다. 사실 조천성도 박정희 사단장시절 최측근 참모 중 한사람이었고 516에도 가담했었다. 또한 특전사령관 시절에도 전두환의 직속상관이었다.
  9. [9] 그럼 그에 대비되는 '구'군부가 있다는 것인데, 당연히 5.16 군사정변의 주도세력을 뜻한다.
  10. [10] 한국전, 베트남 전에서 사병출신에서 장교로 임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과거에는 3사, 학군, 학사장교들보다 기수도 훨씬 높고 비중이 높았었다. 대체로 하나회보다는 선배들이었고 한국전 직후 1954년에 임관한 육사 11기에게는 최대의 경쟁자였다. 한국전으로 임관한 갑종 장교는 학군, 학사가 생기기도 전에 임관한 사람들이다.
  11. [11] 출처: 노태우 회고록, 2장.
  12. [12] 김재홍, 軍(군) 어제와 오늘 30화, 『동아일보』, 1993년 7월 29일 p5.
  13. [13] 출처: 노태우 회고록, 2장, p74~75
  14. [14] 혹은 여기에 육사 13기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직속 후배인 육사 12기는 머릿수로 보나 가입 시기로 보나 연관이 없었다.
  15. [15] 출처 <한국의 군부정치> 한용원, 321쪽.
  16. [16] 장도영은 5.16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이를 지지하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었다가 쫓겨났다.
  17. [17] 아마 2000년대에는 기독자유민주당 대표로 서울시장 출마도 했던 김충립 목사로 더 유명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 시기에서는 한반도 프로세스 포럼 회장이자 전두환 측근으로 다시 뉴스에 많이 등장한다. 2016년 5월경에는 전두환에게 5.18 묘소 참배하러 가자고 제안하여 언론에 크게 탔다.
  18. [18] 하나회에 대해 꽤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하나회는 영남계 사조직이 아니며 호남의 장세동 등 비영남 출신이 있다는 것이 그 증거라는 등 황당한 소리가 꽤 많다. 김충립은 이미 노태우 말기인 1991년 신동아 9, 10월호에 '하나회 파워게임'이라는 기사를 통해 하나회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사람이다.
  19. [19] 당시 박정희의 계급은 대장. 보직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20. [20] 진급에 필요한 인사자료를 검증하는 부서.
  21. [21] 이때 실드를 처준 대표적인 인물이 정병주 특전사령관이였으나, 12.12때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22. [22] 경찰로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대규모 시위발생시 공세적인 시위 진압을 위해 준비된 수도권 지역 군부대. 하나회 장교들은 충정부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5.18 민주화운동도 광주에 투입된 충정부대들이 잔인한 유혈 진압을 하면서 촉발된 것이다.
  23. [A] 23.1 23.2 당시에 5사단의 주둔지는 철원이 아닌 양평이였다.
  24. [24] 77년 10월 유중령 월북으로 양주로 이전하기까지는 해당 지역에 있었다.
  25. [25] 현재는 부대 주둔지가 부천에 있다.
  26. [26] 다만 61년 5월 16일 이전까지의 경력에서 일어난 것들은 박정희 前대통령과는 상관이 없다. 당장에 남로당 사건으로 군복을 벗었다가 한국전쟁으로 다시 군복을 입어서 57년에야 육군 소장 진급이때도 당시 副副統領 곽영주 경무관이 막았던 것을 당시 국방장관이였던 김정렬이 진급심사위원회 결정을 가지고서 겨우 통과시켰다.이 되었고, 61년에는 겨우 2군 부사령관정도였다.이때 육본 작전참모부장으로 임명될 수도 있었으나, 당시 참모차장 김형일 장군이 미군사령관 카터 매그루더에게 '박정희는 좌익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보직이 2군 부사령관으로 변경되었다. 자기 앞길도 모르는 판국에 새파란 11기생들을 챙겨주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27. [27] 그 외 참모 보직을 1회 맡아야 하지만 어차피 중대장 보직의 특성 상 참모 보직을 환영하니 별 의미 없는 조항이다.
  28. [28] 사실 지만원은 김대중 집권 후 한겨레의 월남 파병 장병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보도를 기점으로 태세전환하기 전까지는 매체를 가리지 않는 군사 전문가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다.
  29. [출처] 29.1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30. [30] 굳이 하나회가 아니라도 직업 군인들 부인 사이에서 남편의 계급대로 서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대한민국 국군의 오래된 병폐이다. 하다못해 부대에서 김장을 담궈도 부대장 부인은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까딱까딱하고 하급자 부인들은 서열대로 개처럼 구르는 게 현실...
  31. [31] 국민통일주체회의에서 전두환 지지하는 모임으로 투표율 100% 당선
  32. [32] 하지만 대장 진급 및 예편은 노태우의 의사가 아니라 전두환에 의한 강제적 진급 및 예편이였다.
  33. [33] 전두환과는 달리 대통령 직선제로 뽑힌 대통령이다.
  34. [34] 편제상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통제를 받지만, 사실은 청와대 경호실의 직속 부대로 경복궁에 위치하였다. 그런데 10.26으로 통제를 할 청와대 경호실이 사실상 와해되버리면서 12.12때에는 사실상 누구의 통제를 받고 있지 않았다.
  35. [35] 여기도 편제상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 직속 부하이지만, 청와대 경호실의 통제를 받는다.
  36. [36] 33 헌병대는 청와대 경호실 배속 부대이나 10.26 직후 전두환이 본부장으로 취임하게 된 합동수사본부에 임시로 배속됨. 이후 12.12때에는 정승화 총장 연행과 공관 점거에서 중요한 역할 담당.
  37. [37] 12.12 당시 쿠데타를 저지할 수 있는 주요부대 지휘관들인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진기 육군헌병감을 전두환의 명령을 받아서 서울 마포구 연희동의 모 요정에 유인, 1시간여 동안 잡아두었으며, 부단장 신윤희에게 수경사로 이전한 육본 지휘부와 장태완 사령관을 무장해제 시키도록 명령하였다.
  38. [38] 79년 12월14일 사진에서 2째줄 왼쪽에서 3번째에 있다. 조홍(군인) 나무위키에는 육사13기라고 되어있는데, 밑에 명단에는 없다.
  39. [39] 수경사 점거.(조용하게 숨어 있다가 마지막에 장태완 사령관을 체포하였다. 12.12 당시 서울에 위치한 주요 핵심시설들의 요소요소에 하나회의 입김이 있었고, 막는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40. [40] 육본 헌병감 김진기 준장 직속 부하로 정승화 육참총장 불법 연행에 직접 관여.
  41. [41] 육본 헌병감 김진기 준장 직속 부하.
  42. [42] 사진은 특전사령관 시절.
  43. [43]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부하.
  44. [44]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부하.
  45. [45]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부하.
  46. [46] 설에 의하면 전두환한테 갈굼당하고 한강에 가서 펑펑 울었던 적도 있다고 한다. 청와대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47. [47] MBC 제5공화국 드라마에서 노태우는 이 소식을 듣고 '내는 허수아비가 될 생각이 없어. 사람들이 물태우라고 내가 진짜 물이가?'라며 격노하는 장면이 나온다.
  48. [48] 남편이 전두환에게 순종한 것처럼 자신보다 5살이나 어린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를 형님이라 부르며 늘 고개 숙여온 노태우의 부인 김옥숙이 대통령 당선 후 태세를 전환해 '재국이 엄마(이순자), 우린 (누구처럼) 체육관 대통령이 아니잖아요? ㅋ'라며 이순자에게 일침을 놓은 일화에서 노태우의 속마음이 잘 드러난다.
  49. [49] 신임 육군참모총장인 '하나회의 황태자' 이종구도 계파로 따지면 전두환계에 속했으나, 노태우의 고교 후배인 그는 6공화국에서는 노태우에게 충성했고 후일 국방장관까지 오른다.
  50. [50] 황영시, 정호용, 박희도, 최세창 등 전임 3군사령관들은 모두 2차 보직으로 영전했다.
  51. [51] 노태우의 9사단장 및 9공수여단장 시절 부하들로 노태우의 직계 군맥들을 부르는 말이다. 참고로 전두환의 1사단장 및 1공수여단장 시절 부하들로 이루어진 전두환의 직계 군맥은 1-1 인맥이라 불린다. 각각 9땡 인맥, 1땡 인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52. [52] 육사 15기로 5공화국에서는 전두환계 동기들에 밀려 찬밥 신세였다. 15기 선두주자는 전두환 직계로 3군사령관에 오른 고명승이었으나 영전하지 못하고 전역했고, 고명승보다 1년 반이나 진급이 늦은 이진삼이 참모총장을 차지했다.
  53. [53] 대표적인 인물이 엄삼탁.
  54. [54] 노태우의 9사단 시절 참모장으로 12.12 때 이건영 3군 사령관에게 대놓고 구라친 후 노태우의 명령으로 전방 병력을 서울로 불법 출동시킨 그 사람 맞다. '하나회의 황태자' 이종구 못지 않게 이쪽도 화려한 진급 코스를 달렸다. 인사참모부장-수방사령관-기무사령관-3군사령관으로 최고 실세 보직들을 모두 역임했으나, 참모총장을 눈 앞에 두고 김영삼에게 철퇴를 맞는다.
  55. [55] 이 인간은 본래 하나회의 라이벌 조직인 청죽회였지만 12.12 이후에 하나회에 들어왔다. 이 때 기존 하나회 멤버들의 반대가 있었고, 이 때 겪은 설움까지 갚아주려 했던지 지나치게 전두환계를 공격하다 하나회 내부의 극심한 반발이 이어지자 노태우가 자제 명령과 금족령을 내렸다. 웃긴 건 김영삼발 하나회 척결 작업이 시작되자 자신은 하나회가 아니라며 살아남으려 했다. 한 번은 살아 남았는데 계속해서 말이 나와서 얄짤없이 예편당했다.
  56. [56] 정권 안전과 직결된 3군/보안/수경 사령관은 모두 하나회였다. 또한 17기 김진영을 이어 차기 참모총장이 될 만한 18기 대장 자리를 구창회, 조남풍, 김재창의 하나회 18기 3인으로 구성해놓아 당분간은 하나회 군부가 지속되게 만들어 놓았다. 임기 말 군 인사로 노골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낸 전두환보다 미리 계획적으로 수족들을 깔아둔 노태우가 한 수 높았다고 볼 수 있지만, 김영삼은 싹 다 예편시켜버리고 군 인사 관행(차기 참모총장은 후임 기수로 이어지는 것)을 뒤짚어 엎어 관례상 진급하지 못하고 예편해야 할 17기 김동진을 총장으로 끌어올린다. 덕분에 18기는 참모총장 혹은 합참의장을 배출하지 못한 정규 육사 기수로 남았었다.
  57. [57] 육사 31기, 당시 교육사 근무. 2005년 1월 동기생인 최광준 준장과 같이 준장 예편.
  58. [58] 현 이태원동 남산 대림아파트
  59. [59] 김동진 총장의 주장대로 여기서 중단했다간 남은 하나회 출신들이 반격을 일으킬것이 명백했으니 끝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곧이어 서술된 바와 같이 하나회 잔당들이 반발로 반응했다.
  60. [60] 물컵을 던졌다는 둥 술잔을 던졌는 둥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61. [61] 민주주의의 주요 원칙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문민통제 문서 참조.
  62. [62] 저항 수준이 아니라 쿠데타를 벌이기 전 단계였다는 주장도 있다.
  63. [63] 유사시 아파트를 무너뜨려 북한군의 남침을 막는 장애물로 활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
  64. [64] 김진영 숙청 당시에는 비서실장.
  65. [65] 사실 사면은 임기 막바지에 당선인과 함께 논의해서 정하는데, 임기 막바지인 대통령은 끈 떨어진 갓 신세이고 가장 힘이 셀 때가 당선인 때이다. 김영삼도 당선인 신분 때 장세동을 날렸으니...기사.
  66. [66] 실제 칠레는 우리나라와 반대로 피노체트가 물러난 이후 민주화 진영인 야당이 바로 정권을 잡으면서 피노체트와 군부 세력의 반발을 대응하지 못해 피노체트 시절의 유산을 제대로 청산시키지 못했다.
  67. [67]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군이 전투기를 가질 수 없자 파일럿 육성을 위해 꼼수로 만든 집단.
  68. [68] 채명신의 회고록을 보면 박정희의 정권 연장에 반대하고 명예로운 퇴임을 요구하였다는 이유로 채명신 장군은 쓸쓸하게 전역하였다. 72년 5월 30일 오후 5시 유재흥 국방장관에게서 국방부로 와달라는 명령을 받고 국방부로 갔는데, 국방부 직원들은 모두 퇴근하여 삭막했고, 유 장관은 어두운 표정으로 책상에서 전역 명령서를 꺼내주었다고 쓰여있다.
  69. [69] 전투 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전투 상태에 들어가는 작전 명령.
  70. [70] 아니면 또 해외에 임시정부를 만들었을지도 모를 뻔한 상황.
  71. [71] 중장들에게는 대통령이 직접 별을 달아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72. [72] 이진삼은 육사 15기로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민병돈, 고명승 등에게 밀리며 정보계통에서만 일했지만 노태우가 집권하자, 1군 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 같은 요직에서 일했다. 이진백은 갑종장교 출신인 그의 동생이었는데, 형의 빽으로 잘 나갔다.
  73. [73] 다만 권경석은 일찌감치 소령으로 예편하고 유신사무관을 통해서 공무원으로 오래 재직하다가, 정치인이 되었지만 알고보면 하나회 출신이다.
  74. [74] 실제로 Z건담을 시청한 대부분의 국내 시청자들의 감상에 의하면 티탄즈는 하나회와 일베(+박사모)를 섞어놓은 듯하다는 감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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