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뮐러

"게슈타포는 어디에나 있다."

1. 개요
2. 생애
3. 전후
4. 기타

1. 개요

하인리히 뮐러(Heinrich Müller)

(1900년 4월 28일 생 -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

나치 독일의 인물. 게슈타포의 3대 국장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핵심 측근들 중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흔히 "게슈타포 뮐러"라고 불리며 게슈타포아인자츠그루펜 부대를 이용하여 무려 140만 명이 넘는 인간들을 학살하며 엄청난 악명을 떨친 나치의 핵심 인물로 무자비한 대학살을 저지른 전쟁범죄자다. 또한 반제 회의에 참석했던 참석자이며, 악명 높은 나치의 학살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상관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제2차 세계 대전 후부터 지금까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나치 인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2020년. 1900년부터 2000년까지는 살아있었다 해도 인간에게도 수명이 있는지라 20년을 더 사는 건 어지간해선 누구에게나 무리이다. 아마 뮐러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단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만 모를 뿐.

2. 생애

시골 경찰관의 아들로 뮌헨에서 태어난 뮐러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1914년부터 바이에른의 비행기 공장에서 일하다가 제 1차 세계대전시기 서부전선에서 공군 정찰부대에 조종사로 활동하며 1급 철십자 훈장과 바이에른 전공십자훈을 받았다. 독일패전 후에는 바이에른 주 경찰본부에서 보조원으로 일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데모를 진압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번은 뮌헨의 공산주의자들의 인질극 도중 인질을 쏴죽이는걸 목격한 그는 평생동안 공산주의자들을 증오했다고 한다. 1929년부터 바이에른 경찰서 기관이 된 뮐러는 이후 경찰간부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나치당원은 아니었지만 뮌헨경찰의 정치부를 운영하던 관계상, 하인리히 힘러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포함하여 나치당의 많은 인물들과 친분이 있었다. 뮐러는 평소 정치에는 무관심하며 맡은 일에만 충실했기에 역사학자들은 그가 전형적인 공무원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나치당이 정권을 잡자 친위대 보안부장이 된 하이드리히는 소련에 대해 잘 알며, 경찰에서 실력자인 뮐러와 그의 부하들을 포섭하여 1934년에 친위대에 가입시켰다. 친위대 파일에 기록된 뮐러의 성격에 관한 공식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이 보고서에 적었다 "그는 타고난 경관이다. 그는 자신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그 어떤 것도 용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보여주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친위대에 들어간 뮐러는 급속하게 지위가 올라갔고 1939년에 친위대 중장으로 승진했다. 1939년 9월에 게슈타포와 다른 경찰조직이 국가보안본부에 통합되자 국가보안본부 제4국 게슈타포의 3대 국장이 된 뮐러는 다른 동명의 지도자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훗날 알려지게 될 악명높은 게슈타포 뮐러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게슈타포의 수장이 된 뮐러는 1935년에 독일 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의 하부조직에 침투하여 조직을 파괴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나치정권의 안정화에 큰 공을 세웠고 첩보기관장이던 카날리스 해군대장과 경합하여 공산주의자 스파이 조직인 붉은 오케스트라에 조직원을 잠입시켜서 거짓 정보를 소련측으로 보내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하인리히 힘러와 함께 회의를 하고 있는 하인리히 뮐러

힘러괴벨스의 담당분야였던 유대인 이주 계획에도 깊이 관여하여 1939년까지 유대인 이주계획 전국본부장으로 일한 뮐러는 유대인의 이주만하다가 유대인 절멸정책 즉, 홀로코스트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독소전쟁이 한창이던 뮐러는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를 조직하여 1941년 단 1년만에 소련 점령지역의 유대인을 무려 140만명이나 학살했고 그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고 상부에 보냈으며.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을 결정한 1942년의 반제 회의에도 참석했다. 1942년 5월에 프라하에서 직속상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당한 사건을 수사하여 암살자 색출에 공적을 세우기도 했지만. 힘이 커졌다고 생각한 힘러, 보어만에게 방해를 받기도 하면서, 정권에서 점차 권한이 축소되었다.

결국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힘러의 라이벌이던 마르틴 보어만과 손을 잡은 뮐러는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서 반역 음모자 색출과 체포를 담당했다. 이 때 빌헬름 카나리스를 포함해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되어 약 200명이 처형당했다. 전쟁말기였던 때에도 뮐러는 이미 추축국의 패배로 끝난 전쟁에서아직도 독일의 승리를 확신하여 독일군이 파리를 탈환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소련군이 베를린까지 다다르자 뮐러는 히틀러가 있는 총통지하벙커에서 그를 보좌했다. 그러다가 힘러가 무단으로 서방연합국과 화친을 진행하며 히틀러의 뒷통수를 치자 뮐러는 히틀러에게 힘러의 연락장교였던 헤르만 페겔라인을 체포하고 처형하라는 지시를 받아서 그를 처형한다.[1]

3. 전후

뮐러는 히틀러가 자살한 이후,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소식이 끊긴 뮐러는 베를린 공방전 중에 자살했다, 남미로 도망쳤다, 미국 정부에 의해 소련 첩보원으로 고용되었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일단 미국의 첩보원 등용 소문은 2001년에 미국은 정보자유법의 시행으로 구 CIA의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었는데, 이때 뮐러는 전쟁범죄자로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었기에 첩보원 등용의 가능성이 없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에 의해 붙잡힌 떡밥 제조기 아돌프 아이히만이 재판에서 뮐러가 남미로 달아났다는 주장을 해서 논란에 불을 지피기도 했는데, 이에 서독 정부가 조사에 나섰지만 명확한 증거나 사실은 찾을 수 없었다. 그중 흥미로운 것은 국민 돌격대원이었던 발터 뤼더스가 뮐러의 사체를 유대인 공동묘지에 매장했다는 증언이었는데, 이 묘의 장소가 1961년동독 지역에 있었기에 서독 정부는 조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폴란드의 첩보원이 서방으로 망명하면서 뮐러를 모스크바에서 봤다는 증언을 해서 CIA를 자극해 조사에 나서게 했지만 이는 뜬소문으로 결론 났다. 현지에서는 뮐러가 알바니아에서 스파이로 일한다는 소문도 나돌기도 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에 소련에 잡혀갔다가 독일로 돌아왔던 많은 병사들에게서는 뮐러를 소련에서 봤다는 증언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의혹은 더욱 커져갔다. 실제로 히틀러의 직속 비행사였던 한스 바우어는 뮐러가 '나는 소련 쪽에 아는 사람이 많다, 나는 포로는 되지 않는다.'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가 그토록 소련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 그가 소련의 스파이가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그가 행동할 때나 포로들을 심문할 때도 심문 방식이 마치 소련의 KGB에서 사용하는 심문 방식과 많이 닮았으며, 그의 방에서는 은밀한 통신내역들이 있기도 했었는데 이것이 소련으로 중요정보를 보내기 위해서였다는 것과, 히틀러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랐던 이유가 나치의 최고위층에 들어가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가 아녔냐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모스크바의 게슈타포 하인리히 뮐러

1990년 이전까지 CIA는 만약에 뮐러가 살아있다면 소련이나 체코에 있을 것으로 여겼지만 소련이 붕괴된 후 공개된 공문서 자료에는 뮐러에 관한 기록은 단 한 건도 없었다고 한다. 현재 CIA는 뮐러가 베를린에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소련이 그가 이미 스파이로서의 임무를 마쳤기 때문에 그에 대한 모든 기록을 폐기하고 그가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라는 의혹도 있다. 그런데 2013년 11월 초, 뮐러의 사망신고서를 통해 그가 공군본부 인근에서 사망, 그 해(1945년) 8월에 시신이 발견되어 유대인 공동묘지에 매장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뮐러의 시체나 그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많은 의문이 남아있다.

4. 기타

토요미스테리 극장에선 뮐러의 반지란 이야기가 나와 당시 초등학생들을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다. 정확히는 SS 장교 임관반지인 The SS-Ehrenring[2]와 관련된 이야기다. 이 반지 중 일부가 하인리히 뮐러의 특별주문을 받아 제작할때 유대인의 피를 넣었다고 한다. 피가 들어간 반지를 낀 SS 장교 대부분이 불의의 사고나 의문사를 당했고, 개중 몇개는 전쟁이 끝난 뒤에 반환되거나 파기되지 않고 수집가들 사이에서 떠돌게 된다. 끼면 불운이 찾아온다는 말에 몇몇 수집가들이 반지를 꼈다가 사고를 당했으며, 돌고 돌다보니 투고자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투고자는 설마 싶어서 반지를 한 차레 꼈다가 벗었는데, 그날밤 누군가가 고문당하는 악몽을 꾸게 되었고 며칠 뒤에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치고 만다. 이후 반지를 성수 속에 담궈서 보관하고 있다는 것까지 방송이 되었다. 단, 고증은 엉망이라, SS 장교 역을 맡은 배우들이 동독 육군 복장을 하고 있다.

바티칸 기적 조사관 1권 '검은 학교'에서는 뮐러가 죽지 않고 미국으로 도망쳐 미하일 브라운이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세탁한 다음 세인트 로사리오 학원을 열어 교장이 된 뒤 나치스 세뇌 교육을 학생들에게 은밀하게 실시한 것으로 나온다. 사인은 자연사. 학교 관계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라 죽은 뒤에도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


  1. [1] 헤르만 페겔라인이 처형당한 날은 1945년 4월 28일인데, 공교롭게도 그 날은 뮐러의 45번째 생일이었다.
  2. [2] SS Honour Ring. 비공식적으로는 Totenkopfring(Skull Ring or Death's Head Ring)으로 불렸다.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14.78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