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레 셀라시에


1942년 당시의 모습

이름

하일레 셀라시에 1세
(ኃይለ፡ሥላሴ )

생몰년

1892년 7월 23일 - 1975년 8월 27일

출생지

에티오피아 에제르사고로

사망지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왕조

솔로몬 왕조

재위기간

1930년 4월 2일 - 1936년 5월 2일
1941년 5월 2일 - 1974년 9월 12일

종교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배우자

메넨 아스파우

에티오피아의 역대 황제

자우디투 1세

하일레 셀라시에 1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1]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쿠데타로 제정 폐지)

1935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Time Man of the Year 1935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934

하일레 셀라시에
1935

월리스 심프슨[2]
1936

1. 개요
2. 생애
2.1. 에티오피아의 실세
2.2. 황제가 되기까지
2.3.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2.4. 한국과의 인연
2.5. 퇴위와 최후
3. 기타

1. 개요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로, 본명은 테페리 마콘닌[3](암하라어 : ተፈሪ፡መኰንን)이다.

2. 생애

2.1. 에티오피아의 실세

그의 아버지인 라스[4] 마콘닌은 솔로몬 황조를 개창한 메넬리크 2세의 사촌이었다. 테페리 마콘닌은 어린 나이에 하라리 주의 지배자가 되었다. 한편 메넬리크 2세의 뒤를 이은 이야수 5세(재위 1913~1916)는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등의 행위로 지지를 잃어 갔는데, 테페리 마콘닌은 기독교 세력의 구심점이 되어 1916년 이야수 5세를 폐위시키고 메넬리크 2세의 딸인 자우디투 1세를 황제로 즉위시켰다.

2.2. 황제가 되기까지

자우디투 1세 치하에서 '라스' 테페리는 섭정이자 황태자로써 실권을 행사하여, 1920년대 후반 들어 실질적으로 그가 에티오피아를 지배하였다. 보수적인 성향의 여황제와 달리 라스 테페리는 진보적이었고, 근대화를 원하는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았다. 그의 지배 하의 에티오피아는 1923년 국제연맹에 가입하였고, 다음 해에는 에티오피아 황족으로써는 최초로 세계 각국을 순방했으며, 각지에 학교를 세우고 치안을 강화하며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등 강력한 사회 개혁 정책을 폈다.

1930년 자우디투 1세가 서거하자 라스 테페리는 하일레 셀라시에[5]라는 이름으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1931년에는 의회의 권한을 제한하는 헌법을 제정했고, 선대부터 시도했었던 노예 제도 철폐를 단행하였다.

2.3.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1936년에는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아, 에티오피아군의 필사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패전하여 하일레 셀라시에는 결국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에티오피아 황제를 5년간 겸임하였으나, 국제 사회는 이탈리아 왕의 에티오피아 황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1941년 영국이 에티오피아에서 이탈리아군을 내쫓자 하일레 셀라시에는 복위하였고, 에티오피아는 연합국으로 참전하였다. 1950년에는 에리트레아를 편입하여 에티오피아의 주로 삼았고, 이에 에리트레아 독립 항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복위한 황제는 권력을 회복하면서 다시금 사회개혁을 실시했다. 에티오피아의 황제로써 개인적인 권위에 의존하여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1955년에는 새 헌법으로 더 많은 권한을 자신에게 부여하였는데, 반대가 심하였다. 1960년 12월 12일에는 황제가 브라질을 순방하는 동안 황실 경비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디스아바바를 잠시 장악하였으나, 왕당파의 반격으로 다시 쫓겨나 실패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설립에도 적극 참여하여, 1963년 아디스아바바에 본부를 설립하고 초대, 5번째 총재를 역임하였다.

2.4. 한국과의 인연

1951년에는 대한민국에 황실 직속 병력을 포함한 군대를 파병했다. 1963년 대한민국과 공식 수교하였고, 1968년에는 셀라시에 황제가 직접 방한하기도 했다.[6]

2.5. 퇴위와 최후

집권 말년에 접어들면서 실업 문제와 기근 등에 시달리게 되었다. 주로 북동부 지역에서 발생한 기근으로 인해 1972년에서 1974년 사이에 약 4만 명에서 8만 명 정도의 에티오피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가운데 제정(帝政)에 반대하는 세력이 증가하였고 1974년 육군 소령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일으킨 쿠데타로 폐위되어, 그 다음해 갑자기 사망하였다. 공식 발표는 수술 후유증이었으나 제정 지지파들은 멩기스투가 암살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황제의 유골이 멩기스투 정권이 붕괴된 후인 1992년에야 궁전 내부에서 발견되었고, 심지어는 화장실 바닥에 가매장되어 있다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으로 봐선 암살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나마 셀라시에 황제의 유해는 2000년에 아디스아바바 대성당에 안치되면서 겨우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3. 기타

한국에서는 6.25 전쟁 당시 멀리서 파병을 하고, 한국에도 방문한 것 때문에 이미지가 좋았으며 공산국가가 된 반대파에게 살해당한 점을 들어 반공적 이념으로 더욱 이미지가 좋아졌다.

하지만 오리아나 팔라치는 살아 생전 그를 만나보고 "독재자, 권력자일뿐이다." 라고 비난했었다.

문명 5의 신과 왕 확장팩에서 에티오피아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하기도 했다.


  1. [1] 국제적으로 공인받지 못함.
  2. [2] 최초의 여성 선정자. 에드워드 8세조지 6세에게 양위하게 만든 장본인.
  3. [3] 황제 즉위 전 이름 앞에 '라스'(왕자, 공작 정도의 뜻)라는 칭호를 붙여 '라스 테페리' 라 불렸는데, 여기서 그를 숭배하는 집단인 라스타파리안의 이름이 유래된다.
  4. [4] 공작 정도에 해당하는 칭호
  5. [5] 암하라 어로 '삼위일체의 힘'이라는 뜻이다.
  6. [6] 춘천에는 에티오피아 참전비가 있으며, 당시 황제가 심었던 상록수도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다. 덕분에 춘천과 아디스아바바 시와 자매결연할때 이걸 계기로 삼기도 했다. 사실 서울시와 하려고 원하던 걸 2003년 서울시가 돈 들어간다고 거부하는 바람에 에티오피아에서 무척 불쾌해하며 6.25참전국에 대하여 돈 들어가서 싫냐는 비난도 있었다. 자세한 건 에티오피아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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