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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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당시의 모습

제호

하일레 셀라시에 시황제
ቀዳማዊ ፡ ዓፄ ፡ ኃይለ ፡ ሥላሴ
qädamawi ʿaṣ́e ḫaylä śəllase

출생지

에티오피아 제국 에제르사고로

사망지

에티오피아 제국 아디스아바바

왕조

솔로몬 왕조

종교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배우자

메넨 아스파우

자녀

로마네워르크
테나그네워르크
암하 셀라시에[1]
제네베워르크
체하이
메콘닌
사흘레 셀라시에

생몰 년도

1892년 7월 23일 - 1975년 8월 27일 (82세)

재위 기간

1930년 4월 2일 - 1974년 9월 12일 [2]

1. 개요
2. 생애
2.1. 에티오피아의 실세
2.2. 황제가 되기까지
2.4. 한국과의 인연
2.5. 퇴위와 최후
3. 기타

1. 개요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로, 본명은 터퍼리 머콘는(암하라어: ተፈሪ፡መኰንን, Täfäri Mäkonnən)이다.[3] 제호는 "유다를 정복하는 사자,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폐하, 하느님께서 택하신 자, 에티오피아의 왕중왕"이다.[4]

2. 생애

2.1. 에티오피아의 실세

그의 아버지인 '머콘는 구데사 (ልዑል ራስ መኮንን ጉዴሳ)'은 솔로몬 왕조를 개창한 메넬리크 2세의 사촌이었다. 터퍼리 머콘는은 어린 나이에 하라레 주의 지배자가 되었다. 한편 메넬리크 2세의 뒤를 이은 이야수 5세(재위 1913~1916)는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등의 독단적인 행보로 지지를 잃어 갔는데, 터퍼리 머콘는은 기독교 세력의 구심점이 되어 1916년 이야수 5세를 폐위시키고 메넬리크 2세의 딸인 아스칼러마리암(አስካለማርያም)을 저우디투 여제로 즉위시켰다.

2.2. 황제가 되기까지

저우디투의 치세에 터퍼리 머콘는은 섭정이자 황태자로써 실권을 행사하여, 1920년대 후반 들어 실질적으로 그가 에티오피아를 지배하였다. 보수적인 성향의 저우디투와 달리 터퍼리 머콘는은 진보적이었고, 근대화를 원하는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았다. 그의 통치하에서 에티오피아는 1923년 국제연맹에 가입하였고, 다음 해에는 에티오피아 황족으로서는 최초로 세계 각국을 순방했으며, 각지에 학교를 세우고 치안을 강화하며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등 강력한 사회 개혁 정책을 폈다.

1930년 저우디투가 사망하자 터퍼리 머콘는은 하일레 셀라시에(암하라어로 '삼위일체의 힘'이라는 뜻이다.)라는 이름으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1931년에는 의회의 권한을 제한하는 헌법을 제정했고, 선대부터 시도했었던 노예 제도 철폐를 단행하였다.

2.3.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36년에는 이탈리아 왕국의 침략을 받아, 에티오피아군의 필사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패전하여 하일레 셀라시에는 결국 대영제국런던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왕국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에티오피아 황제를 5년간 겸임하였으나, 국제연맹을 포함하여 미국, 소련, 중국, 멕시코 등 국제 사회는 이탈리아 왕의 에티오피아 황제 겸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에티오피아 고원 지역 일부는 여전히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지지하는 저항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5]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에티오피아 저항세력은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과 협력해 이탈리아 군과 싸웠다. 1941년 영국 주도 연합군이 에티오피아 저항세력과 함께 아디스아바바에서 이탈리아군을 축출하자 하일레 셀라시에는 환도(還都)했다. 그 해 12월 영국과 협정을 맺고 정식으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다.[6]

1947년 이탈리아와 연합국 간의 '평화협정(Treaty of Peace)'에서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강점이 불법이며 무효라는 점을 분명히 했으며 이탈리아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지급받게 되었다.

황제는 권력을 회복하면서 다시금 사회개혁을 실시했다. 에티오피아 황제라는 개인적 권위에 의존하여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1955년에는 새 헌법으로 더 많은 권한을 자신에게 부여하였는데, 반대가 심하였다. 1960년 12월 12일에는 황제가 브라질을 순방하는 동안 황실 경비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디스아바바를 잠시 장악하였으나, 왕당파의 반격으로 다시 쫓겨나 실패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아프리카 통일 기구[7]의 설립에도 적극 참여하여, 1963년 아디스아바바에 본부를 설립하고 초대, 5번째 총재를 역임하였다.

2.4. 한국과의 인연

"가거라!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말고, 전부 거기에 가서 모두 맹렬하게 싸워서 전사하거라![8] 만약 사지가 멀쩡하게 돌아온다면, 짐의 이름을 걸고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너희들의 죽음의 대가로 저들에게 "자유"라는 것을 저들의 손에 꼭 안겨주거라! 우리민족이 과거에 이탈리아인들에게 무엇을 당해왔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그 고통은 뼛속까지 알고있을 것이다. 그렇다! 짐도, 너희 모두도 잘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 모른척 한다면, 침략자들보다 못한 더러운 위선자일 뿐이다."

1951년에는 한국에 황실 직속 병력을 포함한 군대를 파병했다. 이후 1963년 한국과 공식 수교하였고, 1968년에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직접 방한하기도 했다.

춘천에는 에티오피아 참전비가 있으며, 당시 황제가 심었던 상록수도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다. 덕분에 춘천과 아디스아바바 시와 자매결연할때 이걸 계기로 삼기도 했다. 사실 서울시와 하려고 원하던 걸 2003년 서울시가 돈 들어간다고 거부하는 바람에 에티오피아에서 꽤나 불쾌해하며 그래도 6.25 참전국인데 돈 들어가서 싫다니라는 비난도 있었다. 기타 내용은 한국-에티오피아 관계 항목 참고.

2.5. 퇴위와 최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석관

많은 업적을 남기긴 했지만, 막상 경제개발에는 실패하여 재임 후반기에 실업 문제와 기근 등에 시달리게 되었다. 주로 북동부 지역에서 발생한 기근으로 인해 1972년에서 1974년 사이에 약 4만 명에서 8만 명 정도의 에티오피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권위주의적인것은 타 아프리카 국가들도 비슷했기는 매한가지였지만 하일레 셀라시에도 비슷한 유형의 독재자였던것이었다. 그리하여 제정(帝政)에 반대하는 세력이 증가하였고 황제를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가 수차례 일어났다.

결국 1974년, 육군 소령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일으킨 쿠데타로 폐위되어 궁전에 유폐되었는데, 그 다음해인 1975년 8월 27일 갑자기 사망하였다. 당시 황제의 나이는 83세였다. 공식 발표된 사인은 전립선 수술 후유증이었으나 제정 지지파들은 멩기스투가 암살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황제의 유골이 멩기스투 정권이 붕괴된 후인 1992년에야 궁전 내부에서 발견되었고, 심지어는 화장실 바닥에 가매장되어 있다가 발견되었다는 루머까지 돈걸로 봐선 암살당했을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그나마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유해는 2000년 11월 5일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가 황실의 예법에 따라 장례식을 거행하고 아디스아바바 성 삼위일체 대성당에 안치되면서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영상 1962년에 황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메넨 아스파우 황후와 자녀들의 무덤도 성 삼위일체 대성당에 있다.

3. 기타

한국에서는 6.25 전쟁 당시 멀리서 파병을 하고 이후 한국에도 방한한 것 때문인지 괜찮게 보는 사람들이 꽤 많았으며, 공산정권을 세운 반란군에게 살해당한 점을 들어 당시 반공적 이념까지 더해져 그의 최후에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지만. 그래도 한국전쟁 파병으로 생긴 인연 덕분인지 21세기 한국 NGO의 구호개발사업이나 한국기업의 경제협력 등에서 어느정도 에티오피아가 특혜를 보는 점은 있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살아 생전 그를 만나보고 "독재자, 권력자일뿐이다." 라고 비난했다. 물론 팔라치의 특성상 인터뷰했던 대부분의 대상에게 비판적, 호전적이었던 성향임을 감안하면, 그녀의 주장은 어느정도 걸러들을 필요는 있을 것이다. 허나 걸러듣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일단 전제 황제였다는 점에서, 군주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마냥 곱게 보이기 힘들긴 하다. 다만 에티오피아에서는 셀라시에를 몰아낸 맹기스투가 하일레 셀라시에 시절의 폐단을 없애기는 커녕 오히려 수십만명을 죽여대고 경제개발에도 실패하여 수백만이 굶주림에 시달려 죽을 정도로 막장스러운 통치를 해댄지라 상대적으로 좋은 평을 듣고있기는 하다. 그러나 셀라시에 본인도 대외적으론 거의 식민지 독립 신생국이나 다름 없는 에티오피아의 위상을 올렸지만 국내 정책에서 이런 만연한 사회적 문제를 방기해버린 점에서 책임을 피할수 없다. 특히 6.25 전쟁의 인연으로 셀라시에를 좋게 볼 수 밖에 없는 한국이나, 아예 대이탈리아 항전의 역사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며 신학적으로 받아들이는 래스터패리교에 영향을 받은 아프로센트리즘 성향의 흑인 민족주의자들에게 굉장히 부풀려진 칭송을 받을때가 있는데, 정책적으로 봐도 셀라시에는 사실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판 면이 크다. 엉뚱한 자메이카, 북미의 흑인들이 셀라시에를 영웅시 하는 반면 에티오피아 자국 내에선 거의 호응이 없고 흔한 왕정복고 운동도 세력이 미약한것만 봐도 그렇다.

문명 5의 신과 왕 확장팩에서 에티오피아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하기도 했다.

제정 시절에는 아디스아바바 볼레 국제공항이 하일레 셀라시에 1세 국제공항이었고, 아디스아바바 대학교는 하일레 셀라시에 1세 대학교였다.

현재 에티오피아에서는 그의 손자인 자라 야코브 암하 셀라시에(암하 셀라시에 황태자의 아들)가 왕위 요구자로 거주 중이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유니버시티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1. [1] 그의 아들인 제라 셀라시에는 현 솔로몬 왕조의 수장이다.
  2. [2] 1936년 5월 5일부터 1941년 5월 6일까지는 망명 상태에서 망명 정부를 이끌었다. 국제연맹을 포함하여 미국, 중국, 소련, 멕시코 등의 국가들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강점을 승인하지 않았다.
  3. [3] 황제 즉위 전 이름 앞에 '라스(왕자, 공작 정도의 뜻)'라는 칭호를 붙여 '라스 터퍼리'라 불렸는데, 여기서 그를 숭배하는 집단인 라스타파리안의 이름이 유래된다.
  4. [4] 암하라어: ሞዓ ፡ አንበሣ ፡ ዘእምነገደ ፡ ይሁዳ ፡ ግርማዊ ፡ ቀዳማዊ ፡ ዓፄ ፡ ኃይለ ፡ ሥላሴ፡ ሥዩመ ፡ እግዚአብሔር ፡ ንጉሠ ፡ ነገሥት ፡ ዘኢትዮጵያ።
    EAE 표기: moʿa anbäśa zäʿəmnägädä yəhuda, girmawi qädamawi ʿaṣ́e ḫaylä śəllase, śəyuma ʿǝgziʿäbəḥer, nəgusä nägäśt zäʿItyop̣ṗya
  5. [5] 이런 상황은 1941년 영국 주도 연합군의 에티오피아 진공까지 계속된다.
  6. [6] 에티오피아 저항세력은 1940년 동아프리카에서 전투가 발발했을 무렵부터 연합군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7. [7] 아프리카 연합의 전신.
  8. [8] 당연하지만 이는 정말로 가서 죽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원정군의 결의와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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