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토야마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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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각총리대신 (헤이세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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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유키오

鳩山 由紀夫(はとやま ゆきお)

생년월일

1947년 2월 11일(현재 만 71세)

출생지

일본 도쿄분쿄

출생학

도쿄대학 공학부 계수공학과 졸업
스탠퍼드대학대학원
공학부 박사과정 수료

전직

센슈대학 경영학부 교수

현직

동아시아 공동체 연구소 이사장

정당

자유민주당 → 신당 사키가케 → 구 민주당 → 민주당 → 무소속

칭호

Ph.D.(스탠퍼드대학, 1976년)

아내

하토야마 미유키

가족

하토야마 가즈오(증조부)
테라다 사카에(증조부)[1]
하토야마 하루코(증조모)
하토야마 이치로(할아버지)
하토야마[2] 가오루(할머니)
하토야마 이이치로(아버지)
이노우에[3] 가즈코(누나)
하토야마 구니오(남동생)
하토야마 기이치로(장남)
하토야마 다로(조카)
하토야마 지로(조카)

일본의 제93대 내각총리대신

내각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임기

2009년 9월 16일 ~ 2010년 6월 8일

중의원

선거구

(구홋카이도4구)홋카이도 9구

선거횟수

8회

임기

1986년 7월 7일 ~ 2012년 11월 16일

1. 개요
2. 활동
2.1. 정계 입문 이전
2.2. 정계 입문 이후
2.3. 총리 취임 이후
2.3.1. 독도 발언에 관하여
2.4. 총리 퇴임 이후
3. 트리비아
3.1. 가계
4. 관련 사이트

1. 개요

일본정치인이자 93대 일본 총리. 재임 2009.09.16~2010.06.02. 1947년 2월 11일생.

당시 민주당 소속으로 일본 역사상 최초의 단독 정당의 수평적 정권교대[4]를 실현시킨 주인공이었으나, 이후 주일미군기지(후텐마) 이전 문제와 정치자금 스캔들 등으로 위상이 추락하여 1년도 안 되어 퇴임한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 활동

2.1. 정계 입문 이전

1947년 2월 11일, 재무관료인 부친 하토야마 이치로(鳩山威一郎)와 모친 야스코의 장남으로 도쿄도 분쿄구 오토하의 하토야마 가 저택에서 출생(현, 하토야마 회관). 가쿠슈인(学習院)[5] 초등과, 중등과, 도쿄 도립 코이시카와 고등학교를 거쳐 도쿄대학 공학부 계수공학과를 졸업, 이후 1976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해 도쿄공업대학 조수, 1981년에 센슈대학 조교수로 취임하였으나, 1984년에 정계 입문을 이유로 퇴직하였다.

1975년 동반자이자 3살 연상인 하토야마 미유키와 결혼했다. 다카라즈카 가극단 배우이던 미유키는 20대에 미국으로 무용을 공부하기 위해 건너가, 당시 전 남편과 이혼하고 스탠포드 박사였던 하토야마 유키오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후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근데 사실 그도 재혼이다. 유키오의 어머니가 아들 혼사를 위해서 며느리인 미유키의 전 남편에게 죄송하다고 사죄하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유키오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유부녀였기 때문에...콩가루

결혼 당시 사진. 머리스타일이 참 묘하다 발랄하다 패러디도 당했다.

2.2. 정계 입문 이후

이후 자민당에 입당, 다나카 파의 신인으로서, 1986년의 제 38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가문의 지반이 있는 홋카이도에서 출마, 지역구 내 득표율 2위의 성적으로 당선되었다. 당시는 중대선거구제였다. 1988년에는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 라는 초파벌적 정치집단을 결성, 리쿠르트 뇌물수수 사건 등의 당내 비리를 폭로하였고, 이 집단은 '신당 사키가케(新党さきがけ)'로 이어졌다.

1993년에는 정계 개혁의 소용돌이 가운데 자민당을 탈당, 신당 사키가케의 창당에 관여하였고, 55년 체제의 붕괴와 함께 등장한 호소카와 내각에서는 내각 관방 정무부장관을 담당하였다. 이후 성립된 자사사(自社さ)[6] 연립정권 하에서는 사키가케의 간사장을 맡았다. 1996년에는 사키가케를 일신하여 새로이 창당하고자 하였으나 실패, 그 해 여음에 간 나오토, 남동생 쿠니오 등과 함께 구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999년의 당 대표 선거에서 승리하며 당수가 되었으나, 2002년 총선거에서 자민당에게 참패를 당하며 당 대표를 사직하였다. 그러나 대표 사직 후에도 당내 최대 파벌인 하토야마 그룹의 대표로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2007년의 참의원 선거의 대승 이후에도 간사장직을 유지하였으나, 2009년 5월에 오자와 이치로가 대표직을 사임하면서 열린 대표 선거에서 오카다 카츠야를 꺾고 승리, 7년여만에 당수로 돌아왔다.

2009년 8월 30일의 제45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단독 정당으로서는 사상 최다 의석인 308석을 기록하면서 대승, 9월 16일에는 중참 양원의 지명으로 제93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2.3. 총리 취임 이후

총리 취임 이후에는 선거 전에 내건 공약의 이행을 놓고 자민당 등과 대립, 연립정당인 사민당, 국민신당 등과도 마찰을 빚었다. 주요 공약은 아동수당, 고속도로 무료화, 오키나와 현의 주일미군 후텐마(普天間) 기지 이전 등인데, 이 중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인해 미국과 사이가 불편해져 대미관계에 먹구름을 드리우게 되었고, 2010년 5월 말까지 이전지를 확정짓지 못하면 총리직을 사임한다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그리고 현실이 되었다. 이외에도 전 비서의 정치자금 비리 등으로 야당의 공격을 받았고, 스스로도 이것을 취임 때부터 우려하고 있었다고.

기본적으로 큰 정부의 복지수준을 주장하는 데 비해, 선거를 이유로 증세에는 반대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오자와가 쇼군이고 바지사장에 불과하다는 관측도 있었다.

정치, 외교적인 부분에선 "우애"를 강조하면서 나름대로 동아시아 자유주의 정당에서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덕분에 한국, 중국 등으로부터 일본과의 원만한 외교관계 형성을 통해 동아시아 지역 질서의 안정, 평화에도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 섞인 반응이 나오기도했다. 그러나 하토야마 내각이 채 1년도 못 가면서 용두사미(...).

결국 일본 사회민주당이 후타마 주일미군 기지 문제로 연정에서 사퇴하자 7월 참의원 선거의 패배를 막기 위해 2010년 6월 2일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오자와 간사장도 함께 사임했으며, 후임은 간 나오토 부대표. 잠깐 그날 한국은 제5회 지방선거를 치르지 않았나? 결론적으로 한국과 중국, 러시아와 같은 주변국들에게는 역사 관련 발언 등으로 호감을 살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 점이 일본 보수세력에겐 도리어 밉보인 감이 있고 결정적으로 외교문제에서 동맹국인 미국과 갈등을 일으키며 화를 자초한 셈이 되었다. 그렇다고 미국과 멀어진만큼 중국과 러시아에게서 어떤 양보를 얻어냈느냐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라...그리고 결정적으로 내정이 기대에 못 미치면서 정치 자금 스캔들 등으로 인해 불명예 퇴임하게 된다.

2.3.1. 독도 발언에 관하여

소위 하토야마의 독도 망언으로 보도된 일련의 사건은, 2010년 4월 8일의 중의원 외교위원회에서 오카다 카츠야 외무대신이 "불필요한 마찰을 부르지 않도록 하고 싶다. 그 단어(불법 점거)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교섭하고 있다." 고 발언한 것이 그 발단으로, 하토야마 본인은 그날 저녁의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생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약간의 답변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본인 또는 정부의 생각을 바꿀 뜻은 결코 없다." 고 답변하였다. 결국은 표기의 문제로, 일본 정부가 일관되게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해온 것을 감안하면, 이를 '망언'이라 보도한 것은 과장이라 할 수 있다.

2.4. 총리 퇴임 이후

2012년 4월 이란 방문으로 일본 정계를 발칵 뒤집었다. 미국이 이란의 핵개발 문제로 인해 이란에 강력한 무역제제를 가하고 주변국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가운데 일본의 전 총리였던 하토야마가 "이대로 전쟁 분위기로 가는 것은 좋지 않다. 내가 직접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등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겠다"며 이란 방문을 감행한 것.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일본의 입장에서 하토야마의 이런 돌출 행동은 외교적으로는 큰 악재일 수밖에 없다. 의원이 가도 외교적으로 말이 많을 정도로 민감한 사안인데 하토야마는 어쨌든 전임 총리이니 무게감이 다르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대로 남의 선심을 이용하기 바쁜 이란 측에선 "하토야마 전 총리도 IAEA가 불공정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며 비판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하토야마 본인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곧바로 해명을 했지만 애당초 저렇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누가 봐도 뻔한데 간 게 문제라는 비판이 자민당은 물론 민주당 내부에서도 나왔다.

이후 오자와 이치로와 마찬가지로 소비세 증세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결국 소비세 증세안이 통과되자 오자와는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탈당하여 신당을 차렸다. 이런 가운데 하토야마도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탈당해 신당을 창당할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토야마가 주도하고 있는 "소비세 연구회" 소속 중의원이 30명이기 때문에 이들 중 16명 이상만 탈당해도 민주당의 중의원 과반이 붕괴되는 상황. 다만 하토야마 측은 "나는 당내에서 일하겠다"라면서 탈당 및 신당창당을 강력부인하고 있는 상황.

세간의 소문과는 달리 결국 민주당에 잔류했으나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에 임한 노다 총리가 TPP에 찬성해야 공천을 주겠다는 방침을 천명하자 이를 반대했고 결국 공천을 받지 못했다. 하토야마는 탈당해서 무소속 출마를 강행할수도 있었으나 결국 출마를 포기하는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사실상 정계은퇴를 선언한 셈이다.

2013년 1월 17일 중국 내 학술단체의 초청 형식으로 중국을 방문했는데, 일본이 책임 인정을 꺼려하는 난징대학살 추모 박물관을 방문했다. 여기에 중국과의 영유권 갈등이 강화되고 있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다오위댜오)에 문제에 대해 "분쟁지역임을 인정할 필요 있다"고 언급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일본의 전임 총리가 한 발언이라는 점에서 일본 내에서는 대단한 충격으로 받아들이고있다. 한국으로 치자면 전직 대통령이 '독도는 분쟁지역 맞다'고 발언한 것과 다름없는 사건이다. 영유권 분쟁에서는 보통 실효지배 중인 측에서 분쟁의 존재를 부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자칫 영유권의 변경 내지 타협 가능성을 인정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

실제로 발언 직후 일본 방위상이 '역적'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특히 일본에서는 분쟁지역 언급보다도 문제시 된 부분이 "중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에게 센카쿠 열도를 빼앗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어째 앞뒤 다 잘라먹고 "일본에게 빼앗겼다"라는 부분만 강조하면서 전직 총리가 "일본이 센카쿠를 훔쳤다"라고 발언했다면서 난리가 났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자국에서 욕먹을거 뻔히 알면서도 저런 소리 하는거 보면 소신은 있는 모양

(괴뢰정권이라 불릴 생각은 없어...) 참고로 하토야마 뒤는 오자와 이치로... 그리고 그 뒤엔 중국

2015년 3월 10일 크림반도에 직접 가서 문제가 되었다. 일본 정부러시아의 크림 합병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서방과 함께 러시아 제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하토야마는 "이번 방문 동안 크림반도의 실제 상태는 제가 일본에서 보고 들어왔던 것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라는 발언을 했다.

2015년 8월 12일 서대문형무소를 방문, 유관순 열사가 수감되었던 감방에 헌화했으며 광장에 있는 추모비 앞에서 무릎 꿇고 도게자까지 하며 사죄했다. 역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본의 정치인 중에서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도게자까지 해가며 사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특히 이번 행보에 대해서는 도게자에 대해서 일본에서 논란이 많이 일고 있는데, 일본에서의 최대의 사죄를 의미하는 도게자인지 한국에서의 상대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의미하는 큰절인지, 일본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큰절이라면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입장이 되지만, 도게자라면 일본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빈다는 입장이 되기 때문에, 일본의 입장에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가 보기엔 도게자로 밖에 안 보이지만, 큰절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에게 큰절을 시키면 실제로 도게자처럼 한다.

하토야마의 큰 결단이 경색된 한일관계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016년 4월 중일관계의 악화가 대부분 일본에게 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젠 중국에서도 까임방지권 획득할 기세.[7]

3. 트리비아

특유의 발랄한(?) 패션 센스와 아내로 유명하다. 참고로 미유키(幸) 여사는 역대 일본 총리 부인과 달리 적극적인 자기 표현과 대외 활동으로 하토야마 총리 못지 않게 주목 받았다. 한류에도 많은 호감을 표시했고, 특유의 멋진 패션으로 남편과 천지차이여서 나름 인기를 끌었지만 하토야마 총리가 퇴임하면서 빛을 바랬다. 당시 남편의 퇴임도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다고.

키가 꽤 크다. 177cm로 역대 총리 3위(!?). 1위는 오쿠마 시게노부(180cm), 2위는 나카소네 야스히로(178cm), 그 외 아베 신조가 175cm 이런 식이다. 다만 한국의 대통령과 달리 총리만 100명 가까이 배출된 일본에서 1위한 총리 키가 180cm라는건 좀 안습이긴 하다. 물론 키 작다고 정치 못하는 건 아니다만...일본인 평균이 작은 건가 아님 총리가 작은 건가 한국의 경우 가장 키가 컸던 대통령 최규하가 182cm 였지만 임기가 1년도 넘지 못했고 임기를 마친 대통령 중엔 1위가 노태우로 175cm, 김대중, 이명박, 문재인이 173~172cm 그외 대통령은 170cm도 넘지 못했다.하지만 가장 작은 박정희도 163은 된다구글엔 158로 나오는데. 요시다 시게루처럼 150대인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일본보다 작았다는 소리. 애초에 정치와 키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거기다가 정치가들이 대부분이 1950년 이전에 태어났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아무리 젊어도 1970년대에 20대가 되었다는건데 이때 평균 신장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160초중반이다. 170cm만 넘어도 장신이라는 이야기. 거기다가 오쿠마 시게노부는 19세기 사람으로 시대를 고려했을때 180cm면 어마어마한 거구라는 소리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못하고 180cm가 안습이라는건 멍청한 소리다.

신토불교가 대세인 일본에선 꽤 드문 개신교(침례회) 신자이다. 할아버지이자 마찬가지로 총리였던 하토야마 이치로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인 듯.

일본에서는 넷우익들의 압도적인 사랑(...)을 받는 존재로, 넷 우익들은 그를 거의 악의 화신으로 규정하고 있다.(...)[8]하토야마 폿포라는 AA캐릭터를 만들어 까기도 하는데[9] 이 AA는 등장시 99%의 확률로 무능하고 사악하고 사리사욕만 챙기는 악역만 맡는다. 과거 인터넷에서는 자주 사용하는 우애라는 표현의 기묘한 어감과 총리 자체의 전파계 이미지와 겹쳐 20세기 소년친구(...)에 종종 비유되기도 했다.

백괴사전에서는 화투야마 유키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2015년 10월엔 일본 현지에서 일본 우익세력에게 위협을 받기도 했다. 도쿄 시내 한 대학에서 열린 중일관계 관련 심포지엄에 참가했다 돌아가는 하토야마 전 총리의 차량을 우익단체 차량 12대가 가로막고 왕복 6차선 도로를 10분 동안 불법으로 점거한 채 비난을 퍼부은 것. 못지나가는 차량들은 먼 죄 그리고 그 대가로 우익들은 업무 방해 혐의로 자택을 압수수색 당하고 선전용 차량을 경찰에 압류당했다(...). 자업자득

2015년 11월 5일 서울대학교 문화관에서 "일본 정부는 위안부의 뜻에 따르는 답을 이끌어내야 한다." 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였다.

2016년 11월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변호인에 대해 "국가권력이 관계된 폭력, 누명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다. 이 영화를 통해 민주국가 일본을 소생시키고 싶다."라는 코멘트를 했다.

워낙 유명인이 자주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긴 하지만 사우스 파크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시즌 13의 'Whale Whores[10]' 에피소드에서 현직 총리로 등장하는데, 고래 조업에 대한 전 세계의 비난이 쇄도하자 공식 성명 발표 방송에서 "Fuck you dolphine, and fuck you whale!"이라는 무지막지한 대사를 내뱉는다. 홧끄 유 도르휜! 안도 홧끄 유 웨-루! 여담으로 재위 중인 아키히토 덴노도 등장.

3.1. 가계

본래 하토야마 가는 미마사카 국 카츠야마 번 출신으로, 고조부인 하토야마 히로후사(鳩山博房)는 에도의 관료였다. 후술되어있지만 보면 말 그대로 후덜덜한 가계다.

  • 하토야마 카즈오(鳩山和夫)
1856.05.06~1911.10.03증조부인 하토야마 카즈오는 1856년 에도에서 출생, 1875년에 카이세이 학교(후의 도쿄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미국으로 유학, 컬럼비아 대학에서 법학사 학위를, 예일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오쿠마 시게노부가 총장이었던 와세다대학제3대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1885년에는 외무성에 입성, 1894년에는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96년에 중의원 의장을 역임하였다. 이후에는 홋카이도 개척에 관여하여 하토야마 가문의 지반을 닦았다(정사위 훈삼등).
  • 하토야마 하루코(鳩山春子)
1861.05.02~1938.07.12증조모인 하토야마 하루코는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기독교인 교육가의 한 사람으로, 와타나베 번주의 장녀로 태어난다. 이후 공립여자대학을 세우고 초대 학장이 되며, 이어 며느리인 카오루가 이어받는다.
1883.01.01~1959.03.07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는 1883년에 카즈오의 장남으로 출생, 1908년에 도쿄대학 영법과를 졸업한 이후, 1915년에 국회 입성, 이누카이 내각에서 문부대신을 역임하는 등 전전부터 정계의 거물로 활동, 전후에는 일본민주당을 결성하였고, 1954년 총리 대신이 되어 자민당을 결성하고 55년 체제를 이뤄냈다.타임지 모델에도 선정되었다!총리직 사임 이후에는 자민당 결성에도 관여하였다(15선, 정이위 대훈위). 즉 할아버지가 만든 자민당 일당 독재를 손자가 완전히 끝장냈다...라고 볼 수 있겠다.
  • 하토야마 카오루(鳩山薫)
1888.11.21~1982.08.15조모인 하토야마 카오루는 스즈키 공가의 공녀로 공립여자대학 원장으로 재직한다.
  • 하토야마 이이치로(鳩山威一郎)
1918.11.11~1993.12.19 순서대로 유키오, 이치로, 쿠니오.부친인 하토야마 이이치로는 1918년에 도쿄에서 출생, 1941년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수석으로 졸업 이후 대장성(大蔵省)에 입성(入省)하였다. 이후 착실하게 승진하여 1971년에는 일본 관료 사회의 정점인 대장성 사무차관에 임명되었다. 1974년에는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 76년의 후쿠다 타케오 내각에서는, 초선 의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외무대신에 임명되었다(3선, 정삼위 훈일등).
  • 하토야마 야스코(鳩山安子)
1922.09.11~2013.02.11모친인 하토야마 야스코는 타이어 제조업체 브리지스톤의 창업주인 이시바시 쇼지로의 장녀. 현재 브리지스톤의 주식 1,200만 주를 보유하고 있으며 현 시가 170억엔에 이른다고 한다. 홋카이도 선거구에 나왔을 때 하토야마는 게이샤와의 스캔들에 휘달려 낙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 때 미유키 여사가 "스캔들이 사실이라면 남편이 얼마나 외로워서 그랬을까. 참 불쌍하다"라면서 공개적으로 남편을 두둔하여(...) 위험에서 벗어났는데, 사실은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시킨 거였다. 또 하나의 일화로는 주택공사 관련 스캔들로 자민당과 정국이 시끄러워지자 당시 둘 다 중의원이었던 유키오&쿠니오 두 형제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 "중의원 뱃지를 떼어버려라!"라고 호통쳤다. 결국 이런 조언이 자민당 탈당의 계기가 되었다. 당선 당시에는 어머니의 수렴청정까지 거론되었으나 결과는 보시는대로. 1996년 아들 형제가 민주당을 창당했을 때에는 수십억 원의 자금을 용돈에서 준비. 이것은 후에 정당 보조금에서 전액 회수했다. 2013년 2월 11일 별세했다.
  • 하토야마 쿠니오(鳩山邦夫)
1948.09.13~2016.06.21남동생인 하토야마 쿠니오는 1948년 9월에 도쿄 도에서 출생, 도쿄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 후, 형과는 달리 정계 입문을 강하게 희망하였다. 이후 자진해서 다나카 가쿠에이의 비서로 정계 입문, 1976년에 도쿄 8구에서 처음으로 당선된 이래 11선 연속으로 당선되었고, 대신직을 5번 역임하였다(총무, 내각부 특명 담당, 법무, 노동, 문부). 법무대신 시절 적극적인 사형집행 찬성론자로 死神이라는 위명을 떨쳤다. 2016년 6월 21일 지병인 십이지장 궤양으로 병원에서 별세했다.

4.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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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가오루의 아버지
  2. [2] 결혼전 성 테라다
  3. [3] 결혼전 성 하토야마
  4. [4] 정당간 연합을 통한 수평적 정권 교대는 호소카와 내각에서 실현한 바 있다.
  5. [5] 본래 왕족과 귀족을 위해 세워진 관립학교였으며, 패전 후 사립학교로 전환되고 평민에게 개방된 후로도 금수저들이 많이 다니기로 유명한 일관제 학교이다.
  6. [6] 민당-일본민당-신당 키가케
  7. [7] 일본 민주당(후신 민진당)은 호헌파 정당답게 대개 일본이 가해자라는 인식을 내세운다. (단, 영토 문제는 별개 취급한다.) 문제는 자민당 장기집권으로 사실상 1당 독재나 다름없는 현 일본의 정치 상황에선, 지지기반 자체가 약하다 보니 집권부터가 요원할 뿐더러 집권하더라도 정치력 부재로 상술되었듯 빨리 무너지기 쉽다는 것이다.
  8. [8] 일베랑 비슷한 행보라 보면 된다.
  9. [9] 폿포는 비둘기의 울음소리를 가리키는데, 하토야마의 하토가 비둘기를 의미하기 때문.
  10. [10] 에피소드 자체가 일본의 고래 조업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육류 소비도 비판하는 내용인지라 일본의 비중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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