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주당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정당

고려민주당

조선민족당

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

한국국민당

1. 개요
2. 창당 선언문
3. 성향
4. 역사
4.1. 창당과 세력 구축
4.2. 신탁통치 문제와 한민당의 성장
4.3. 대한민국 정부 수립
4.3.1. 김성수의 좌절감
5. 평가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

8.15 광복1945년 9월 16일 결성된 대한민국의 정당으로, 최초의 제1야당이다. 지주와 친일파 중심의 기득권 정당으로, 현대 대한민국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1] 광복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정당은 아닌데, 한민당 창당 이전 안재홍의 조선국민당, 박헌영조선공산당 등 수많은 정당들이 이미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풀네임인 한국민주당보다 약칭인 한민당으로 유명하며, 김병로, 김준연, 백남훈, 송진우, 원세훈, 조병옥 등 국내에 남아있던 독립운동가들과 김성수, 윤치영, 장덕수 등 친일인사 및 지주층이 결성한 보수 성향의 정당[2]이다. 한마디로 남한에서 친일 짓거리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냉전체제를 이용하여 기득권을 지키려고 반공을 내세워 잽싸게 똘똘 뭉쳐서 탄생한 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당시 다른 정당들과는 달리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에 반대했다.

김구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광복 후 3개월이 지난 1945년 11월 이후에나 귀국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정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여 임시정부의 자격이 아닌 개개인의 자격으로 귀국했기 때문에 당연히 정치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거기에다 독립운동에 많은 돈을 썼기 때문에 정치활동에 필요한 자금 또한 굉장히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한민당은 해외에서 활동해서 임정 요인들과 비슷한 처지였던 이승만과 협력하였고, 덕분에 이승만은 다른 독립운동가들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정치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승만과의 사이가 멀어진 이후 이승만의 자유당을 견제하는 제1야당 역할을 했다. 보수정당인 한민당이 보수정당인 자유당을 견제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은 미군정기 당시 우익 정당을 견제하던 여운형근로인민당은 여운형이 암살당하며 해체되었고, 박헌영의 남조선로동당은 미군정의 지속적인 탄압을 받아 당원 대부분이 월북하는 등 사실상 진보정당이 활동할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것에 큰 영향을 받았다.

2. 창당 선언문

(중략)

일본 제국주의 철쇄는 끊어졌다. 혈한의 투쟁! 참으로 36년, 세계사의 대전환과 함께 우리는 드디어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반만 년의 빛나던 역사를 도로 밝혀 완벽무결한 자주독립의 국가로서 구원의 발전을 약속하게 되었다. 3천만 가슴에 뒤끓어 용솟음치는 오늘의 기쁨이여! 이 기쁨은 곧 혁명동지들에게 바치는 감사로 옮겨지고 더욱이 포한종천하신 순국제현에게 생각이 사무치매 도리어 몰래몰래 슬플 쁜이다. 참으로 이 크나큰 광복의 공훈은 해내.해외의 들입고 감추인 무수한 혁명동지들의 혈한의 결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는 머지않아 해외의 개선동지들을 맞이하려 한다. 더욱이 인방중경에서 고전역투하던 대한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한 혁명동지들을 생각건대 그들은 두 번 거듭나는 세계의 대풍운을 타서 안으로 국내의 혁명을 고동하며 밖으로 민족의 생맥을 국제간에 현양하면서 나중엔 군국주의 박멸의 일익으로 당당한 명분 아래 맹방 중,미,소,영 등 연합군에 끼어 빛나는 무훈까지 세웠다. 오늘의 기꺼운 광복 성취가 이 어찌 우연한 바이랴.

우리는 맹서한다. 중경의 대한임시정부는 광복 벽두의 우리 정부로서 맞이하려 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약속한다. 군국주의의루(전쟁보루)를폭멸하고 세계평화를 확립시키는 세기적 건설기를 당하여 자주독립을 회복한 우리는 맹방 제국에 최고의 사의를 표하는 한편 국제평화의 대헌장을 끝까지 준수 확충하려 한다.

나아가 우리 민족이 장래할 세계의 신문화 건설에 뚜렷한 공헌이 있기를 꾀할진대 무엇보다도 완벽결한 자주독립국가로서 힘차게 발전해야 될 것이다. 이는 오직 전제와 구속 없는 민족주의 제도 앞에 개로개학으로써 국민의 생활과 교양을 향상시키며 특히 근로대중의 복리를 증진시켜 호말의 차별도 중압도 없기를 기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국민의 자반석 위에 두고 세계 신문화 건설에 매진하려 한다.

동지여, 모이라! 한국민주당의 깃발 아래로.

강령

●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 완성을 기함

● 민주주의의 정체 수립을 기함

● 근로대중의 복리증진을 기함

● 민족문화를 앙양하여 세계문화에 공헌함

● 국제헌장을 준수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

정책

● 국민 기본생활의 확보

● 호혜평등의 외교정책 수립

●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신앙의 자유

●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중공주의의 경제정책 수립

●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 국방군의 창설

(하략)

- 출처

3. 성향

광복 직후 미군정에 적극 협조하였고,[3] 이승만과도 정치적으로 협력하였기에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도 찬성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친일파 청산을 주도했던 반민특위에 대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반대했고, 나아가 반민특위를 해체시키는데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4] 게다가 한민당은 전국 각지에 대농장을 거느린 인사들이 많아 지주의 이익을 대변했기에 농지개혁을 비롯한 토지 개혁에도 비우호적이어서, 초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의 농지개혁에 가장 발끈하고 반대했다.[5] 2대 국회(5.30 총선거) 이후 이승만과의 사이가 멀어져 정치세력을 잃어가자 다수가 구 민주당, 소수는 이승만의 자유당으로 넘어갔다.

4. 역사

4.1. 창당과 세력 구축

1945년 광복 직후 좌익 및 중도파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빠르게 정치세력화에 성공한데 비해 우익 인사들은 한동안 사태를 관망했다.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뿐더러 국내의 우익 인사 대부분은 일제 말 독립운동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었기에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해서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에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8월 18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였던 원세훈이 민족주의 진영에서 최초로 고려민주당을 창당했다. 8월 말, 38도선 이남으로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은 우익이 관망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정치세력화하는 계기가 됐다. 8월 28일 김병로이인이 조선민족당을 창당해 고려민주당을 흡수했다. 유학 경험을 가지고 있던 국내 인사들도 정치세력화를 시도했는데, 김도연, 김성수, 송진우, 유억겸, 윤보선, 윤치영, 허정 등은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을 발기한 것이다. 이들 중엔 지주[6] 혹은 사회-경제 분야의 명망가가 많았다.

건준을 중심으로 뭉친 좌익 및 중도파와 달리 우익-민족주의 정당은 난립하였고, 이에 우익 통합 요구가 거세졌다. 9월 4일 조선민족당과 한국국민당은 통합 발기회를 개최하고 9월 6일 경성부 종로구 낙원정의 협성실업학교에서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주최측은 700명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200 ~ 300명 정도 모였다고 한다. 반면, 같은 날에 건준에서도 종로구 계동정의 경기여고 강당(당시 건준의 본부)에서 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는데 무려 1,000명이 모였다. 300명이나 1,000명이나 도찐개찐 같아 보여도 당시 참여 숫자는 굉장히 중요했는데, 참여 숫자는 곧 자신들의 세력을 의미했다. 그만큼 중도 성향의 건준이 대중들로부터 인기가 굉장히 많았고, 우익 성향의 한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9월 16일에 정식으로 한국민주당은 창당대회를 열었다. 이로써 광복 이후 최대 우익 정당인 한국민주당이 창당되었다.[7] 이어 한민당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던 장덕수가 발기문 및 성명서를 기초 작성했는데, 주 내용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대차게 까는 글이다.#

한민당은 미군정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결탁했다. 좌익의 득세를 걱정했던 미군정은 한민당을 환대했고, 한민당 인사들은 미군정의 고문관, 행정 관리로 대거 임용됐다.[8] 한민당 인사들은 미군정에게 "건준을 비롯한 조선인민공화국은 친일파 및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여운형안재홍"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친일파"라고 주장하였다.[9] 10월 10일 미군정 군정장관 아치볼드 아놀드가 인공을 "사기꾼에 의한 괴뢰국"이라 비난하자 한민당은 자신들의 성과라며 자찬했다.

한민당의 최대 계파는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등 동아일보 계열이었다. 동아일보 세력은 수양동우회[10], 흥업구락부[11][12]와 연합해 당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은 친일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독립운동 경력이 있어도 1910년, 1920년대에 집중되었으며, 1930년대 후반부터는 각종 친일 행위에 협력한 이들이 많았다. 때문에 당시 한민당은 대중뿐 아닌 미군정조차도 '친일파 정당'이라고 인식할 정도였다. 실제로 이 때문에 시민들로부터의 지지기반이 약했다. 한국민주당은 친일 지주 및 친일 자본가들이 주축이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당연 곱게 볼 수가 없는 일.

다만 김병로, 김약수, 원세훈 등 비주류 중에는 친일 경력이 없고 진보적이며 개혁적인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 중 김약수, 원세훈 등은 우파 사회주의자로 한민당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비주류 대부분은 좌우합작과 토지개혁에 대한 한민당의 소극적 태도에 크게 실망감을 느끼고 반발해 1946년 10월 무렵에 탈당하고, 대부분이 김규식 계열에 합류해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된다.[13]

9월 21일에는 중앙부서를 확정해 총무제를 실시했다. 1도(道) 1총무의 원칙에 따라 함경도의 원세훈, 전라북도백관수, 경상북도서상일, 경기도의 김도연, 경상남도의 허정, 충청남도조병옥, 황해도백남훈, 평안도김동원 등 8명의 총무를 뽑았다. 송진우는 수석 총무, 김병로는 중앙감찰위원장, 이인은 당무부장, 장덕수는 외무부장, 김약수는 조직부장을 맡았다.

이들은 국내 독립운동 세력(건국준비위원회, 조선공산당 등)과는 대립하는 관계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해외에 있었던 독립운동 세력을 봉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 원칙이 충칭(중경)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만을 정식정부로 봉대하고 기타 정부를 자칭하는 단체를 배격한다는 것이었다.[14] 한민당은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이승만, 서재필, 김구, 이시영, 문창범, 권동진, 오세창 등 임정 간부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미군정에 임시정부 인사들의 조기 귀환을 여러 차례 요청하기도 했다.

한민당은 임시정부를 이용하여 취약한 지지율을 보완하고 원로들의 이름을 빌려 우익 세력을 결집하려 했다. 한민당은 자신들의 광범위한 국내 기반을 이용하면 김구, 이승만 등을 바지사장으로 만들고 새 나라의 실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외에 있었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 지지도가 비교적 낮았고, 엄연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독립운동의 대표기관이 존재함에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자신들과 대등한 위치를 요구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아[15] 추대를 받아들이고 한민당과 협력하였다.

한민당은 임시정부 인사들이 귀환하자 환영성명을 통해 임정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 재편을 주문했다. 이승만이 자신의 추종 세력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우익 통합을 주장하자 임시정부 중심의 통합을 옹호하기도 했다. 12월 한민당은 임시정부개선환영대회를 개최하고 애국금헌성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인사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덕분에 임시정부가 중심이 된 '특별정치위원회'가 조직되어 정치 세력 재편을 시도한다. 신탁통치 문제로 1달 만에 무산된 게 함정이긴 하다. 한편 국내에 있던 권동진과 오세창은 영수직을 수락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국내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관점에서 한민당 세력은 친일 문제에서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4.2. 신탁통치 문제와 한민당의 성장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었다. 그런데 이때 동아일보는 신탁통치안을 제기한 것이 소련이라 보도(실제로는 미국이 제의)하는 신탁통치 오보사건을 터뜨렸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그 해에 다시 타국의 지배 아래 놓인다는 이 결의안은 시민의 반발을 불러오기 충분했다. 한민당 역시 12월 27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해 신탁통치 배격을 결의했다. 신탁통치 오보 이후 국내 정치 세력은 우파 중심의 반탁론, 중도 중심의 신중론, 좌파 중심의 찬탁론으로 나뉘었으며, 반탁론이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 이를 계기로 우파와 한민당은 크게 성장했다.

임시정부는 신탁통치 문제를 군정청으로부터 곧장 정권을 접수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고, 이에 한민당 수석 총무이자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신중파 송진우는 12월 30일 경교장에서 반탁을 주장하던 김구에 대해 극렬한 반탁운동이 미군정에 의한 권력 이양으로 곧바로 이어질 공산이 거의 없으므로 반탁운동 방법 측면에서 신중히 접근해야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그날 새벽에 원서동 저택에서 암살당했다.[16] 신중론을 취하던 송진우가 암살당하자 한민당과 김구, 한국독립당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됐다. 대신 한민당은 이승만과 점차 가까워졌다.

1946년 1월 7일 한민당과 조선인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등 좌우의 주요정당 대표가 회동한다. 한민당에서는 임시 수석총무 원세훈김병로가 대표로 참여한다.[17] 4당 대표는 "삼상회의에 대한 이해하에서 결의안의 조선 원조 정신을 적극 지지하고, 신탁 문제는 향후 수립될 임시정부를 통해 자주독립의 정신으로 해결한다"는 4당 코뮤니케를 발표한다. 그러나 한민당 주류는 코뮤니케가 반탁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합의를 번복하고 원세훈을 임시 수석총무에서 끌어내린다. 주류파는 당의 재정권을 무기로 김성수를 새 수석총무로 옹립한다. 이후 한민당은 급격히 보수화된다.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자 한민당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공동위원회 참가는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신탁문제는 임정수립 뒤 민족총의로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 3일에 이승만이 정읍발언을 하자 한민당은 이를 지지하였으며, 이를 즈음하여 김구와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 단정 수립 비난 성명이 잇따르자 "일부에서는 무슨 역적질이나 한 것 같이 선전하니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대응하였다.

한편 미군정이 안재홍이나 김규식 같은 같은 중도파를 중요 자리에 임명하려하자 한민당은 안재홍을 겨냥해 "1개월이 넘지 않는 동안 이 자를 쫓아내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이들 한민당은 안재홍을 친일파라느니 공산주의자라느니 말도 안되는 억지논리로 마구 공격하였고, 극우단체를 동원하여 삐라를 뿌리게 했으며, 민정장관에 임명된 안재홍이 내린 인사발령 지시까지 거부하였다.

1946년 7월 좌우합작운동이 진행되자 한민당은 신탁통치나 토지분배 문제 등을 들어 좌우합작위원회를 공격한다. 이 과정에서 한민당 대표로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한 원세훈을 비롯해 김병로, 김약수 등이 당을 떠난다. 탈당 사태로 인해 한민당은 김성수, 장덕수 등 지주 세력만의 정당으로 전락했으며 대중의 지지도 크게 이탈했다.

한민당은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를 반전의 계기로 삼았다. 이 선거에서 한민당은 45명의 민선의원 중 14석을 차지했다. 서울에서는 4석 중 3석을 얻었다. 그러나 부정선거로 인해 서울과 강원 지역에서 재선거가 실시됐다. 재선거에서 한민당의 얼굴인 김성수, 장덕수가 각각 한국독립당의 조소앙, 신익희에게 패배하면서 한민당은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한민당은 입법의원에서 반탁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이승만 세력과 연합하여 단정수립운동을 전개했다.

자신감을 회복한 한민당은 독자노선을 시도한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자 불참을 선언한 이승만, 김구와 달리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한다. 한민당이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자 다른 우익 정파들도 이승만과 김구의 영향력에서 이탈해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한다. 이 즈음 이미 좌파는 미군정의 탄압으로 힘을 잃어 있었고, 중도파 또한 여운형이 암살당하면서 구심점을 잃은 상태가 돼버린다. 또한 미국과 소련은 한국 정부 수립에 대해 이미 안이 확연히 달라져 단정 지지파들에게 더욱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한민당에게 정국의 무게가 쏠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정당 단체 수 문제와 신탁/반탁 문제로 위원회는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고, 양측 입장만 확인한 채 결렬됐다. 이 상황에서 정치부장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한민당은 위기에 몰렸고, 이에 한민당은 이승만과 다시 손을 잡았다. 반면 김구는 미군정에 의해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의심되어 재판에 소환되었고 한민당은 김구를 비난하였다. 이후 김구는 한민당, 미군과 완전히 결별하고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중도적 선택에 김구의 한독당 세력은 오히려 우익 측 지지세력을 잃고 몰락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렇게 떨어져 나간 우익 세력은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이 흡수하였다.

4.3. 대한민국 정부 수립

5.10 총선거에서 이승만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석을 차지하고, 한민당 세력은 29석을 차지하였다. 여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우파 세력들을 흡수하여 나름 여당과 같이 활동할 수 있었다. 후에 반민특위가 발대하였으나 우익 주도파는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친일파 청산을 뒤로 미룰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부의 노골적인 압박 속에 좌초되었다. 조봉암이 주도한 토지 개혁안 또한 한민당의 반대 속에 힘겹게 통과되었다.[18]

4.3.1. 김성수의 좌절감

이승만과 한민당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협력하는 공생관계로 출발하였지만, 이 밀월 관계는 제헌의회에서부터 틀어지게 된다.

헌법 제정 당시 이승만은 기존의 내각책임제 대신에 대통령 중심제를 강력하게 요구[19]했고, 한민당은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내용 수정이 원체 졸속이었던 탓[20]에 정부조직법상으로는 여전히 실권은 국무총리에게 있었다. 그래서 한민당은 이승만에 '김성수 총리, 그리고 내각의 절반(6인) 이상은 한민당계안'을 내걸어 이승만과 합의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자 그런 거 없다는 듯 바지사장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했다. 이에 격분한 한민당[21]이 이윤영안을 부결시키자, 이번에는 이범석을 총리로 지명했다. 김성수: 본인 방금 국무총리 되는 상상함ㅋㅋ ???: 어림도 없다! 암!! 아아암!!! 이 과정에서 이범석은 자신을 총리로 만들어주면 한민당에게 내각에 6석 이상을 내주겠다고 딜을 걸었고, 더 이상 총리 지명을 질질 끌기도 뭣했던 한민당은 이 제안에 응했다.

하지만 이범석 총리 지명이 통과되기가 무섭게, 이승만은 이범석의 요청도 씹고 한민당계를 한 명만 내각에 임명해 버렸다.[22] 거기다가 이승만은 한민당의 재정적 기반이던 지주층을 한방에 박살 낼 결전병기를 꺼내게 되니 그것이 바로 농지개혁법이다.[23]

2대 국회에서 우익 측의 세력이 약화되자 이승만은 대통령 권한 강화를 시도하였고, 한민당은 이에 맞서 의원내각제안을 제시하였다. 이 대립 속에서 이승만은 자유당을 결성하고 발췌 개헌을 강행하면서 한민당과 연을 사실상 끊었고, 이에 한민당은 조병옥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당을 결성하게 되었다.

5. 평가

이승만과의 사이가 멀어진 이후 반이승만을 내걸고 이승만을 견제하는 제1야당으로 활동했고, 이후 등장한 군사독재 정권과도 경쟁하였으며, 내부적인 정책에서 '그 정당'에 비해서는 온건한 보수 성향을 보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개혁적인 공약을 내세우기도 했다. 송진우 등 한민당 주류는 주요 산업 국유화, 계획경제, 경제통제, 토지 소유 제한-매매 금지, 8시간 노동제 등을 공약했고, 원세훈, 김약수 등 당내 우파 사회주의자들이 한민당의 경제-사회 공약을 입안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공감대도 여기에 반영되어 있다. 물론 토지개혁 같은 문제에 관한 한민당의 각론은 좌파의 공약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기본적으로 반공주의적이고 대부분 부르주아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체제 보전을 중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4.19 혁명으로 자유당이 무너진 뒤 일시적으로 집권 여당이 되었을 때 이들의 후신인 민주당이 시민들의 요구만큼 개혁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북한에 매우 적대적이어서 국제 정세라거나 시류를 고려해야 할 대북 정책에서 오로지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물론 당시 북한 정권은 남로당 계열을 숙청하면서 일당독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말이 통할 상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일제 말 부일협력, 정치적 반대 세력 탄압, 단독정부 수립 지지 등 과거 행보는 곱게 봐줄 수 없기 때문에 정의당이나 민중당과 같은 진보 진영, 민족주의 사관에서는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광복 이후 정국이 워낙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돌아갔기에 단순화된 설명은 무리이지만[24] 비판적인 평가를 하는 측에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민주공화당의 흠집 내기를 감안하더라도, 광복 직후 정국을 겪어본 이들에 따르면 한민당 세력은 조롱과 비판의 대상 그 자체라는 반응이 한결같다. 실제로 당시 신문사를 비롯해서 시사만화 등을 보면 한민당은 주로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었다고.

이런 전력을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현재 민주당계 정당의 구성원들 중 다수가 90년대 이후 정계에 입문한 사람들이고 당에 영향을 끼치는 주요 인사들 상당수가 8~90년대 이후 입당한 사람들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더불어민주당은 한국민주당이 아니라 1955년에 창당된 민주당을 자신들의 뿌리로 삼고 있다.# 다만 현재 민주당계 정당의 정신적 구심점 중 하나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민주당부터 시작해 꾸준히 그 후신 정당을 따라 이어지는 정치 역정을 밟았던 것은 사실이다.

6. 여담

한민당을 대변한 대표적인 신문은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의 창업주부터가 한민당을 이끌었던 인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당계 정당의 경우 그 뿌리가 한민당이라는 것이 진보 성향의 매체에서 언급되고 있으며, 비판받기도 한다. 현대 보수정당이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원죄로 꾸준히 까이는 것과 비슷한 원리. 가령 프레시안의 경우 칼럼에서 2008년 창당된 민주당의 뿌리가 한민당이라고 했다.# 또 다른 진보 매체인 시사인에서도 민주당의 뿌리가 한민당이라고 했다.# 오마이뉴스에서는 박상천 전 의원의 논지를 반박하는 과정에서 민주당의 뿌리를 한민당으로 보는게 '학계의 일반적 견해'라고 못박은 바 있다.# 이렇듯 진보 매체에서도 한민당을 민주당과 결부짓는 근본적인 원인은 민주당계 정당의 계보 중 최소한 60년대 말까지 한민당을 꾸준하게 계승해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뿌리로서의 상징성과는 별개로, 한국민주당의 출현으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지났고 그 사이에도 정치 지형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에 현대 민주당계 정당이 노선에 있어서는 한민당처럼 확실한 강경 보수 노선은 결코 아니며, 중도/진보 개혁세력 정도로 이념적 좌표 분포가 다소 애매해지긴 했다. 이는 김영삼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지만 당내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군부계열을 숙청하면서 보수정당에서 친독재 성향이 상당히 타파된 것과 비슷하다.[25]

또한 언급한 3당 합당으로 인해 한민당에서부터 내려온 인력과 조직의 일부는 현대 보수정당과 이어져 있기도 하다. 1955년 출범한 민주당에서 한민당을 뿌리로 둔 계파는 민주당 구파, 비한민당 출신 계파는 민주당 신파로 분류하는데, 1987년 통일민주당 분당 당시 김영삼은 민주당 구파, 김대중은 민주당 신파에 속했기 때문이다. 민주당계 정당 내에서도 민주당 구파, 즉 한민당을 뿌리로 하는 세력이 3당 합당으로 보수정당에 합류한 셈이다.

위의 프레시안 기사에서도 한국민주당이 민주당의 뿌리임은 사실이지만 본질적인 연장까지는 아니라 밝혔고, 강준만 교수는 '인물과 사상', '한국 근현대사 산책' 등의 저서를 통해 민주당계 정당의 이념적 특징은 특정짓기가 애매하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한홍구, 고종석[26] 같은 사회민주주의,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진보 계열 인사들은 현대 민주당계 정당의 성향도 여전히 보수주의 성향이라 여기고 있으며, 같은 계열의 손호철 교수 같은 경우는 현대 민주당계 정당은 자유주의 정당이라는 중도적 평가를 내린다.

이에 대조적으로 고원, 김호기 교수 등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지금의 민주당이 한민당의 강경 보수 성향에서 어느 정도만 완화된 보수주의 성향이라고 해야 할련지, 리버럴(중도좌파)~중도나 아니면 중도우파로 규정해야 할련지는 사람마다 이견이 분분하며 당내 계파가 워낙 다양하니만큼 여러 노선들이 모두 혼재되어 있다는 견해도 있다.

한민당에 가까운 인물을 굳이 찾자면 민주당 신파 인사로 스스로가 송진우-김성수 직계라고 주장하는 호남 지지기반의 정치인 이철승이다. 이철승은 연고지가 전라북도로 같았던 김성수의 제자였고, 광복 직후 신탁통치반대운동을 비롯한 우익 청년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소위 '정치깡패' 활동을 나서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민주당 신파 계열 정치인으로 쭉 활동하다 1988년 정계은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극우세력인 국민행동본부 애국기동단이 모태로 삼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7. 관련 문서



  1. [1] 보수언론 동아일보를 창간한 김성수는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활동했고, 이승만의 비서실장 및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자 친이승만 정당인 대한국민당을 창당한 윤치영 역시 한국민주당에서 활동했다. 민주당계 정당의 정신적 지주 김대중도 한국민주당에서 활동했다.
  2.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에서도 한국민주당을 전형적인 보수정당 또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민족주의 보수세력이 집결하여 창당한 정당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3. [3] 물론 친미라는 점을 빼고는 자신들 개개인 집단의 가치관이나 이익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활동했다.
  4. [4] 일례로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의 지시 하에 벌어진 친일경찰들에 의한 반민특위 습격사건으로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이 사퇴한 이후 한민당 인물인 변호사 이인이 특위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이인은 이승만의 측근인데다 애시당초부터 친일파 청산에 강력히 반대해왔기 때문에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자마자 반민특위를 축소시키고 체포된 친일파들을 죄다 증거불충분 무죄처리하였다. 그렇게 노덕술, 박흥식, 이종형 등 악질 친일파들은 무죄석방되었고, 이후 반민특위는 해체되고 만다.
  5. [5] 이후 제3대 대통령 선거 전 조봉암은 한민당 세력과 합작하고자 손을 내밀었지만, 한민당은 조봉암을 내팽개쳤다.
  6. [6] 일제강점기 당시 대부분의 지주는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일제와 협력했다. 이전 문서에는 전라도 지역의 지주라고 작성되어 있었는데, 단지 전라도가 한반도 최대의 곡창지대여서 농지가 많아 지주도 많았던 것이다. 반면, 경상도 지역은 노동자가 많아 공산주의 성향이 매우 짙었다.
  7. [7] 사실, 건준에 대항하기 위해 한민당 발기 이전 '국민창당준비위원회'(약칭 국준)을 발족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지지기반이 너무 약했다.
  8. [8] 경무국장 조병옥, 경기도 경찰부장 장택상, 대법원장 김용무, 대법관 이인, 인사과장 대리 정일형, 학무국장 유억겸, 위생국장 이용설 등 미군정 군정 장관 고문 11명 가운데 9명이 한민당이었다. 1명은 여운형, 1명은 조만식.
  9. [9] 그러나 여운형은 일제강점기 말기에도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해 활동하는 등 엄연한 독립운동가였고, 안재홍 역시 철저한 비타협 민족주의자로 절대 변절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오히려 김성수, 윤치영 등 한민당 인사들 대부분이 친일 시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시민들로부터 지지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광복 직후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았던 여운형과 안재홍 등 건준 세력을 '골수 친일파이자 좌빨'이라는 굴레를 씌워버린 것이다.
  10. [10] 안창호 등 서북 지방의 장로회 인사가 중심이 됐다. 흥사단의 자매단체로 조병옥이 수양동우회 회원이다.
  11. [11] 이승만, 이상재, 윤치호, 유억겸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다. 경기 지방의 감리회 신자가 중심이 됐다. 이승만의 독립운동단체였던 대한인동지회의 자매 단체였다.
  12. [12] 흥업구락부와 수양동우회는 서로 경쟁 관계였다. 참고로 대한인동지회와 흥사단의 모체인 대한인국민회로부터 이들은 기호파 대 서북파로 대립했다.
  13. [13] 대표적으로 송남헌의 경우 처음 한민당에 있다가 한민당에 혐오감을 크게 느껴 김규식 인사로 갈아탄다. 그리고 이후 김규식의 비서로 쭉 수행해왔다.
  14. [14] 충칭임시정부 지지를 보였던 또 다른 인물은 안재홍이 있었는데, 안재홍은 건준과 임정이 협력할 수 있는 관계로 보았고, 임정을 뼈대로 과도정부를 세우더라도 충칭의 임정 그대로는 안 될 것이니, 그를 보완하는 역할을 건준이 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임정 지지를 선언했다. 즉, 안재홍은 임정과 국내의 건준을 동급의 선상으로 놓고 임정을 지지한 것이다. 반대로 한민당은 임정을 명분 삼아 친일파 정당이라는 대중들의 비난을 회피하고 정치적 세력을 확대하기 위함이었다.
  15. [15] 이는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시정부가 고수해온 입장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임시정부 외 세력들은 임시정부의 위치를 다른 독립운동 단체와 동등히 할 것 혹은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통일적인 새로운 단체를 만들 것을 주장하였으나, 1920년대 국민대표회의에 제대로 데인 바 있는 김구는 이를 거절해왔다.
  16. [16] 정황이 정황이니만큼 우파, 그중에서도 김구에 의한 암살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17. [17] 당시 한민당 비주류에서는 친일 경력이 없다는 점을 내세워 원세훈을 송진우의 후임 수석총무로 지지했다.
  18. [18] 사실 이건 좀 지저분한 뒷이야기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농지개혁법 문서 참조.
  19. [19]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 안 되면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생떼까지 부려댔다. 친일파 지주 정당 이미지를 벗으려고 이승만을 모셔온 한민당으로선 미치고 팔딱 뛸 노릇.
  20. [20] 사실상 개헌이나 다름없는 내용을 꼴랑 10분만에 끝냈다.
  21. [21] 이윤영은 월남자라 정치기반이 정말 전무했고, 그 때문에 제헌의회 총선거 당시에도 남의 지역구를 빌려 당선되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지역구의 원래 주인은 바로 김성수. 한민당이 길길히 날뛸만도 했다.
  22. [22] 엄밀히 말하자면 세 명이지만, 둘은 사실상 이승만의 개인 지명에 가깝기 때문에 한민당계는 한 명만 들어갔다.
  23. [23] 심지어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추진하려고 훗날 자신이 숙청하게 되는 중도좌파 성향의 조봉암까지 데려와 농림부장관에 앉히기까지 했다. 이때 아무도 조봉암을 앉히리라 생각하지 못했고 심지어 조봉암조차 자기가 임명되리라 생각도 못했다.
  24. [24] 미군정 및 소련군정 자체에 대한 논쟁, 좌우 대립, 남북 분단, 6.25 전쟁 등 이 시기 한국사는 정말 큼직큼직한 사건들로, 그것도 수많은 세력들이 개입하면서 복잡하게 돌아간다. 한민당이 큰 영향을 줬다고는 해도, '다 한민당 탓!'이라고 하는 것 역시 한국 현대사를 너무 단순하게 보는 큰 오류를 부를 수 있다.
  25. [25] 다만 박근혜가 정계에 입문한 뒤 친박 진영이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에서 득세하면서 다시 친독재 성향이 강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자유한국당, 바른정당 등으로 분열한 뒤 강경 친박 정당들을 제외한 보수정당들이 미래통합당이라는 정당으로 통합하면서 새누리당에 비해서는 친독재 성향이 옅어졌다.
  26. [26] 그는 민주당이 진보주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치므로 '진보 정당들이 제자리를 찾으려면 민주당계 정당이 축소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해답이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참고로 고종석은 중도보수우파 자유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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