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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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래연합

국민생각

한나라당 초기 로고 (1997~2004)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을 앞두고 변경한 로고 (2004~2012)

한나라당

공식명칭

한나라당
(한나라黨, Hannara Party 또는 Grand National Party)

창당일

1997년 11월 21일 (통합민주당과 합당)

당명 변경

2012년 2월 13일 (새누리당으로 당명 변경)

선행조직

신한국당, 통합민주당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0길 18
(여의도동, 한양빌딩)

대통령

이명박

국회의원

176석 / 295석(18대 국회, 당명 변경 직전)

당 색

파란색 (#003990, 2004년까지)

파란색 (#008CD7, 2004년 이후)

이념

보수주의

1. 개요
1.1. 당명
2. 계보
4. 이명박 정부 - 다시 여당이 되다
5. 당가
6. 역대 당대표
6.1. 총재
6.2. 대표위원
6.3. 대표최고위원
6.4. 원내총무/원내대표
7. 성소수자 문제의 스탠스
8. 계파 갈등
9. 역대 선거결과
10. 각종 논란
10.2. 과거사 청산 부분
10.2.1. 친일청산 법안 반대 논란
10.3. 차떼기 사건
10.4.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10.5. 법안 날치기 통과
10.5.1.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10.6. 성추행 논란
11. 그 외
12. 관련 문서

1. 개요

보수 정당의 전성기[3]

한국 정치의 기울어진 운동장 속에 보수 황금시대를 누린 정당[4]

1997년 11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정당. 여기서 한은 '크다', '위대하다' '크고 위대해'는 뜻과 '한(韓)'을 동시에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이다.[5] 영문 명칭은 Grand National Party. 쓸데없이 간지난다 약어가 GNP다(…). GOP(Grand Old Party)를 별칭으로 쓰는 미국공화당과 당명이 비슷한걸 보면 이쪽을 의식했던지도?

당의 공식 노선은 반공 색채를 띈 보수주의.[6] 창당 후 아주 잠깐 여당이였다가 야당이 된 뒤[7][8],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10년만에 여당으로 복귀하였으나, 돈 봉투나 대표자 선발에 관련된 비리 등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었다. (차떼기 사건 참조.) 여기에 설상가상, 혹은 사면초가라는 정도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 벌어져 사건의 진위여부를 떠나 민심이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고 당시 대통령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했으며, 2012년 열릴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 패색이 진해졌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게 됨에 따라 박근혜를 중심으로 한 당 전체 쇄신안을 발동, 결국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위해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교체하게 된다.

민주공화당(1963년) 이후, 즉 민주화 시대 이후 최장수 정당명이다. 격변이 많은 대한민국 정치 풍토에서 한 개의 이름으로 정당을 15년간 유지한 것만 해도 매우 대단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장수한 정당명은 민주노동당이다. 한국의 정당명 중 가장 레전드라는 평가를 받는다. 확실히 입에 착착 감기는 이름이다[9]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hannara.or.kr'이었다.

1.1. 당명

2. 계보

대략적인 한나라당계 정당의 역사

이 정당의 출발은 1963년 박정희가 창당한 민주공화당이며 직접적인 시초는 1990년 1월 창당된 민주자유당(민자당)이다. 당시 대통령 노태우가 총재로 있던 여당 민주정의당(민정당)과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김영삼)과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의 이른바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것. 특히 민정당의 전신인 공화당은 1963년 박정희가 창당했고 전두환이 창당한 민정당은 그 기반을 일부 흡수하였기 때문에, 한나라당을 깔 때 뿌리가 군사정권 시기의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이라는 공격이 많은 편이다. 다만 YS가 집권한 후엔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민정계가 가차없이 축출당함으로써 실질적인 민정계는 절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12][13]

어찌됐든 민자당은 1992년 말의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정권을 재창출하는데 성공하지만, 2년여 지난 1995년 초 김종필이 김영삼과의 갈등 끝에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이하 자민련)을 창당하면서 떨어져 나가고 그 해 말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비자금 문제와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되면서 구설수에 오른다. 결국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꿨고 이듬해 15대 총선에서는 139석을 얻으며 상당한 선전을 한다.

15대 대선 국면이었던 1997년 11월 21일에는 민주당[14]과 합당하면서 지금의 당명인 한나라당을 쓰게 되었다.[15]

3. '잃어버린 10년'

그러나 새정치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 후보 김대중과 자유민주연합 김종필의 연대(일명 DJP 연합)에 패하면서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의 세월을 겪게 된다.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 161석의 과반의석을 점하던 한나라당은 철새들의 국민회의 및 자민련으로의 이적으로 과반의석을 상실하게 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당시 상도동계와 민정계, 공화계 중 반 이회창 계열이 탈당한 것이다. 그래도 친 이회창 세력의 민정계와 공화계, 상도동계 덕분에 제1당을 유지했고[16], 하지만 그래도[17] 통합민주당 출신까지 합해서는 안정된 의석을 유지할 수 있었다.[18] 이후 2000년 16대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과반에 육박하는 제 1당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사실상 승리하게 된다. 물론[19] 민정계, 공화계, 상도동계의 원로 정치인들이 은퇴, 공천 탈락, 낙선하지만[20]<이들이 당선되며 한나라당 내 민정계와 상도동계, 통합민주당 계열 원로 및 중진들의 세는 크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21] 신진인사들이 재선에 성공[22], 새로운 신진 정치인들도 탄생했다.

당시 민정계는 15대 총선보다 더 세가 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세를 과시하였는데 김영구, 박명환, 박주천, 김기배, 최병렬, 김형오, 김진재, 유흥수, 강재섭, 김만제, 윤영탁, 박종근, 이해봉, 이양희, 강창희, 이재선, 김태호, 전용원, 이재창, 이해구, 한승수, 최돈웅, 최연희, 신경식, 정우택, 함석재, 이완구, 이상득, 김일윤, 이상배, 주진우, 정창화, 김광원, 김종하, 하순봉, 김영일, 김용갑, 김기춘, 나오연, 박희태, 김용균, 이강두, 현경대, 양정규, 서정화, 이상희, 김용환, 강창성, 신영균 등이 남아있었는데 여전히 세를 과시했다.[23]

이후 정인봉, 김영구, 정재문, 손태인, 김태호, 손학규, 유성근, 김호일 등이 당선무효 또는 지방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의원 직을 사퇴하거나 잃은 뒤 재보궐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 과반의석을 확보하였고, 연이어 박진, 홍준표, 오경훈, 이승철, 권영세, 김병호, 서병수, 정갑윤, 홍문종, 김황식, 김정부 등의 정치신인들이 탄생하거나 재선에 성공했고 이경재, 이해구, 양정규 등의 중진들과 원로들이 복귀했다. 또한 김원길, 박상규, 이양희, 강창희, 이재선, 원유철, 이근진, 강성구, 김윤식, 한승수, 송광호, 전용학, 함석재, 김용환, 이완구 등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의 국회의원들이 한나라당으로 입당하며 의석이 계속 늘어났다. 그리고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압승을 거두었으나, 이어 치뤄진 16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비리, 그리고 병풍의혹 등으로 패했다. 이미 15대 대선부터 알려진 96년 안풍사건, 97년 세풍사건, 총풍사건의 "3풍"도 여전했지만, 97년 대선 말 기승을 부린 병풍사건과, 2002년 차떼기 의혹이 그야말로 결정타. 이후 한나라당은 개혁 소장파들이 탈당한다.

서커스단 대기장

이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으로 17대 총선에서 큰 위기에 몰리는데, 강인섭, 이성헌, 김원길, 박명환, 박주천, 오경훈, 김기배, 이승철, 서청원, 박원홍, 최병렬, 오세훈, 정문화, 도종이, 박관용, 박종웅, 김진재, 권태망, 유흥수, 백승홍, 강신성일, 현승일, 박승국, 김만제, 윤영탁, 서상섭, 민봉기, 박상규, 이양희, 강창희, 이재선, 윤두환, 권기술, 박종희, 신현태, 홍문종, 원유철, 목요상, 이근진, 전용원, 조정무, 강성구, 김황식, 김윤식, 이해구, 한승수, 최돈웅, 김용학, 윤경식, 송광호, 신경식, 심규철, 전용학, 함석재, 김용환, 이완구, 김일윤, 박시균, 박헌기, 주진우, 정창화, 김찬우, 김광원, 김종하, 이주영, 강삼재, 하순봉, 김동욱, 김영일, 나오연, 윤한도, 김용균, 홍사덕, 강창성, 신영균, 서정화, 이상희, 윤여준 등의 중진들과 원로 정치인들이 많이 은퇴하거나 공천 탈락, 또는 낙선한다. 이 때 한나라당 내에서 민정계 정치인들이 많이 없어지고 있었다. 같은 보수정당인 자민련도 같은 상황을 겪었는데 정진석, 원철희, 오장섭, 김종필, 조희옥, 김종호, 조부영, 안대륜, 변웅전 등도 낙선했다. 하지만 여전히 민정계와 공화계, 상도동계의 원로 정치인들과 중진들이 건재했는데 박진, 박성범, 이재오, 홍준표, 원희룡, 권영세, 김덕룡, 맹형규, 박계동, 정의화, 김형오, 김병호, 김무성, 정형근, 허태열, 서병수, 안경률, 엄호성, 권철현, 박창달, 강재섭, 안택수, 이한구, 박종근, 이해봉, 박근혜, 황우여, 이윤성, 이경재, 정갑윤, 최병국, 정몽준, 남경필, 고흥길, 임태희, 심재철, 김문수, 전재희, 김영선, 안상수, 이재창, 이규택, 박혁규, 정병국, 최연희, 이병석, 이상득, 임인배, 권오을, 김성조, 이상배, 이인기, 김광원, 김정부, 김학송, 이방호, 김용갑, 김기춘, 박희태, 이강두 등이 무사히 당선되며 아직까지 그 중에는 민정계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진영, 정두언, 고진화, 이혜훈, 이종구, 공성진, 김충환, 유기준, 이성권, 이재웅, 김정훈, 박승환, 김희정, 박형준, 주성영, 유승민, 이명규, 주호영, 김석준, 김기현, 한선교, 유정복, 허천, 이계진, 심재엽, 정문헌, 홍문표, 정종복, 김태환, 장윤석, 이덕모, 최경환, 김재원, 권경석, 안홍준, 최구식, 김재경, 김양수, 김영덕, 송영선, 나경원, 이주호, 이군현, 황진하, 진수희, 서상기, 박순자, 전여옥, 박재완 등의 정치신인들도 탄생했다. 당시 살아남은 민정계와 공화계는 박희태, 강재섭, 이해봉, 김기춘, 김형오, 이상득, 김용갑, 이강두, 이상배, 박종근, 이재창 등이었는데 세가 줄어들었음에도 아직은 건재했다. 이에 자기반성 차원에서 천막당사로 잠시 옮겼었다. 구 여의도 중소기업박람회장 부지로 이후 서울국제금융센터가 자리잡은 곳이다. 이후 일부러(...) 조금 허름한(?) 건물로 옮겼었다. 그 위치는 강서구 염창동 274-17[24], 등촌역LG전자 강서본점 자리다.

그러나, 이런 흑역사를 뒤로 하고 천막당사 시절을 거쳐 2006년 지방선거, 승리로 다시 힘을 비축해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 지금도 한나라당 내부에서 뭔가 일이 터지면 당의 일부에서는 '천막당사 시절을 생각하라!'는 투의 반성조의 발언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당 내부에서도 충분히 반성을 하고 되새겨 볼만한 과거였던 듯하다. 하지만 더 큰 위기가 왔는데 천막당사 쇼도 없이 당사 매입이나 한다.#

그런데 한가지 '반전'으로, 이 천막당사의 임대료는 오히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당사 건물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천막 당사를 설치하기 위해 서울특별시에 임대료로 약 4200만원을 지불하였는데, 총 기간은 50일 정도였다. 반면 당시 열린우리당 당사의 건물 임대료는 월 2500만원 선. 이 때문에 당시에도 보여주기식 행사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으며, 부지 임대에 대한 서울시의 특혜 논란도 약간 있었다.

4. 이명박 정부 - 다시 여당이 되다

이후 차곡차곡 비축해둔 힘으로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며 이원복, 윤두환, 정진석, 이주영 등이 정계에 복귀하고 신상진, 임해규, 차명진, 고희선, 정진섭, 고조흥, 이진구, 정희수, 김정권 등의 정치 신인들이 정치에 진출하며 지지율이 상승하였고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대승을 거쳐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경제살리기 공약으로 2007년 17대 대선에서 승리하게 되어 10년만에 여당이 된다. 이후 2008년 18대 총선에서도 과반수의 의석인 153석을 확보하게 된다.[25] 그런데 당시에 현역 의원들 중에서 공천 탈락, 불출마, 낙선한 사람도 있는데 이재오, 김덕룡, 맹형규, 박계동, 김병호, 이성권, 이재웅, 정형근, 엄호성, 박승환, 김희정, 박형준, 곽성문, 김석준, 임인배, 권오을, 이상배, 김재원, 김광원, 김용갑, 김기춘, 김영덕, 박희태, 이강두 등은 공천탈락, 낙선, 불출마를 했다. 그리고 남아있던 민정계들이 거의 공천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무소속, 친박연대 당선 후 복당한 사람까지 합하면 현역 의원들 중에서는 박진, 나경원, 진영, 진수희, 장광근, 홍준표, 이성헌, 정두언, 원희룡, 전여옥, 권영세, 정몽준, 이혜훈, 이종구, 공성진, 김충환, 정의화, 유기준, 김형오, 김정훈, 김무성, 허태열, 서병수, 안경률, 주성영, 유승민, 홍사덕, 이명규, 서상기, 이한구, 주호영, 박종근, 이해봉, 박근혜, 황우여, 이윤성, 조진형, 이경재, 정갑윤, 최병국, 김기현, 윤두환, 강길부, 박종희, 남경필, 신영수, 신상진, 고흥길, 임태희, 심재철, 임해규, 이사철, 차명진, 전재희, 원유철, 박순자, 김영선, 안상수, 황진하, 한선교, 유정복, 정진섭, 정병국, 허천, 이계진, 최연희, 송광호, 이병석, 이상득, 김일윤, 김성조, 김태환, 장윤석, 정희수, 최경환, 이인기, 권경석, 이주영, 안홍준, 최구식, 김재경, 김학송, 이군현, 김정권, 서청원, 송영선 등 현역 의원들이 당선된 예도 있고 이 때당시 민정계는 거의 정치에서 물러났지만 그래도 아직 약간이나마 건재했다. 그리고 김동성, 권택기, 유정현, 진성호, 정태근, 김효재, 정양석, 신지호, 김선동, 현경병, 권영진, 홍정욱, 강승규, 강용석, 김용태, 구상찬, 김성태, 이범래, 안형환, 김성식, 고승덕, 박영아, 유일호, 윤석용, 허원제, 이종혁, 이진복, 박민식, 현기환, 김세연, 박대해, 유재중, 장제원, 배영식, 조원진, 박상은, 홍일표, 윤상현, 조전혁, 구본철, 이학재, 안효대, 정미경, 신영수, 김성수, 이화수, 홍장표, 손범규, 김태원, 백성운, 주광덕, 김성회, 박보환, 박준선, 김학용, 김영우, 이범관, 황영철, 이철우, 김광림, 성윤환, 이한성, 정해걸, 강석호, 조해진, 윤영, 허범도, 조진래, 여상규, 신성범, 조윤선, 김장수, 이달곤, 원희목, 정옥임, 이정현, 김성동 등 정치신인들이 많이 정치에 진출했다. 당시 남아있던 민정계 출신은 김일윤, 이상득, 김형오 등이었다. 또 정몽준 역시 공화계와 민정계의 힘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검역 문제로 인한 2008년 촛불시위, 당내에서 2007년 경선부터 갈라진 자유선진당과 친박(박근혜)계열, 그리고 친이(이명박)세력의 내부 다툼 등으로 인해 2009년 4.29 재보선에서 5곳의 선거구 중에서 한나라당 후보는 단 한곳에서도 당선되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당시에 구본철, 윤두환, 김일윤이 의원직을 잃었는데 한나라당이 차지하였던 2곳은 민주당에 빼앗기고, 그래도 친박 계열 무소속이 당선된 경주는 보수텃밭을 사수했다. 당시 살아온 보수성향 정치인은 정수성 밖에 없었다.

같은 해 10.28 재보선 역시 5곳의 선거구에서 치러졌는데, 수도권 2곳을 민주당에 내주고, 텃밭인 경남 양산시(당시 단일 선거구. 2016년 분구)에서도 고전 끝에 신승을 거두는 등, 야당에 3:2로 패배하여 심상찮은 민심을 겪어야 했다.[26] 당사자들은 재보궐에서 이만하면 잘했다고 자축했으나, 한나라당이 확실히 승리한 곳은 민주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은 강원도 강릉시 뿐이었다. 그래도 권성동이 정치에 진출했고, 박희태 전 대표가 복귀하며 민정계가 잠깐 다시 숨통을 틔게 되었다. 당시 한나라당 계열 정당에서는 허범도가 의원직을 잃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수도권을 주축으로 혼전이 예상되었다. 야당 측에서는 야권 단일화를 추진했고, 한나라당 입장에서도 세종시 문제 등 몇가지 이슈로 인해 한나라당이 야당이었던 2006년보다는 고전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실제로 선거는 한나라당의 참패였다. 여당은 선거 전까지는 상당한 우세를 자신하였으나, 막상 선거가 끝나고 보니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서울시장마저 한명숙 후보가 상당히 따라왔으며[27] 부동의 텃밭이라고 생각했던 경남과 충남, 강원도[28]에서도 김두관, 안희정, 이광재 후보에게 져버렸을 정도다. 2030 유권자들은 한나라당 지지자의 2배 이상이 민주당을 지지했다.

패배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당내 내분이 다시 불 붙었다. 경남 도지사를 비롯해 경선에서 승리했으나 본선에서 져버린 친이 계열은 패배의 책임을 추궁받았다. 친박역시 박근혜 전 대표가 친박 계열 후보들만 지원 유세를 해줬는데도 친박은 단체장 자리는 하나도 얻지 못했다. 친박은 선거 직후인 6월 29일 자유선진당, 민주당과 함께 세종시의 행정도시화를 중단하는 수정안을 부결시켰으며, 이로서 친박이 여당내 야당 노릇을 한다는 사실은 뚜렷해졌다. 결국 친이/친박 모두 대선 후보 지지율 동반 하락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

세종시 수정안 부결에도 불구하고, 당시만 해도 현직 대통령의 힘이 아직 강한 집권 3년차였다. 2010년 7월 14일의 제11차 전당대회에서도 안상수, 홍준표, 나경원, 정두언 등 대표적인 친이계 의원들이 대거 대표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친박계 의원은 서병수 한명으로 그나마도 꼴찌였다. 무당파나 개혁계 후보들도 당선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7.28 재보선에서 승리하며 친이계의 좌장격인 이재오가 돌아왔고 이상권, 한기호, 윤진식, 김호연 등의 정치 신인들도 탄생했다. 이후 잠깐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오르게 된다.

하지만 친이계는 나름대로 이명박 대통령과 각을 세우며 차기를 준비하려고 했지만, 이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불만(이른바 "진노")만을 샀다. 이른바 보온병 논란과 함께 안상수 대표의 이미지는 무참하게 무너졌다.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김태호 의원[29]을 제외한 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패했으며, 심지어 민주당 측 이광재 지사의 비리문제로 터진 강원도지사 재보궐 선거에서조차 또 패했다. 한나라당의 텃밭이었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을에서 거물인 강재섭 전 대표가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게 나가떨어진 것 역시 치명타였다.

안상수 대표는 사퇴했으며, 한나라당은 지리멸렬해지기 시작했다. 원내대표에 황우여 의원, 당대표에 홍준표 의원(전당대회 2등 승계)을 선출하며 당을 일신하려는 노력을 해 보았지만,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이 발의한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인하여 그야말로 나락의 길로 떨어지게 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측했듯이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투표율 미달로 개봉도 하지 못한 채 끝나버렸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약속한 대로 서울시장을 사퇴하게 되었다.

홍준표 체제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나경원 의원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웠지만 20~40대 유권자들의 이반과 후보자에 대한 각종 의혹과 그에 대한 반박[30] 등으로 인하여 여론이 좋지 않아졌고 결국 야권 단일후보인 무소속 박원순 후보에게 1:1 정면 대결에서 패배하였다. (박근혜 전 대표가 선거를 돕지 않은 것도 한 몫 했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 여파는 커서, 당 내부에서는 백가쟁명식으로 당 쇄신 요구가 분출하기 시작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선관위 DDOS 공격 사건이 벌어지자 당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여당은 그럼에도 한미 FTA 강행 처리를 주도했으나 이 역시 야당에게는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었다.

결국 12월 8일 남경필, 원희룡(당시 소장파), 유승민(당시 친박) 최고위원이 사퇴한 데 이어, 9일에는 홍준표 대표까지 사임하면서 최고위가 사실상 와해되었다.관련 기사 이에 결국 박근혜가 구원투수로 재등판하게 되었다.

2011년 12월 말 비대위가 설치되어서 위원장에 박근혜가 임명되었으며 각종 쇄신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이 폭로되면서 한나라당이란 브랜드 자체의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관련기사 결국 상황을 타개하고자 2012년 2월 당의 이름을 바꿔 재결성하게 되었고, 기본적인 당헌과 규칙, 당원들은 새누리당이 승계하게 된다.

5. 당가

(1절) 나라를 책임질 우리는 하나

자유와 정의 넘치는 통일한국 만드세

미래 위한 횃불 들고 함께 나아가자

(후렴) 민족의 꿈을 이루는 새희망 한나라당

국민과 하나되어 사랑받는 한나라당

(2절) 헌신과 봉사의 열정 모아서

희망찬 미래 향하여 우리 두 손 잡았네

21세기 통일한국 함께 열어가요

6. 역대 당대표

아래 대수는 총재, 비대위, 권한대행 등을 가리지 않고 매겨져 있다. 추후 수정 바람.

6.1. 총재

6.2. 대표위원

6.3. 대표최고위원

6.4. 원내총무/원내대표

7. 성소수자 문제의 스탠스

미국공화당보다 강경하다. 동성애를 비롯한 차별 금지 법안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다. 정확히 말하면 동성애에 대한 증오발언을 하는 보수정치인들은 많지 않으나, 사회적 반대를 무릅쓰고 동성애 차별 철폐를 외치는 정치인들은 별로 없고, 보수 정치인들은 거의 아예 없다. 동성결혼DADT까지 사실상 모든 것을 다 인정한 미국 공화당보다도 훨씬 강경한 입장. 적어도 공화당은 차별 금지법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미국에서 성소수자를 2등 시민으로 만들자는 발언을 할 수는 없다. 과격한 발언으로 유명한 트럼프조차도 동성애 반대 같은 발언은 하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한국 사회가 전체적으로 보수적이고 성소수자 유권자의 힘이 미국에 비해 크게 약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성소수자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정치 주도권을 잡을 수 있고, 특히 보수정당을 먹여 살리고 지지하는 보수 유권자들이 성소수자를 썩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수 정당의 지지자들이 대체로 덜 개방적이고, 보수적인 고연령층인 것도 있고,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들도 또한 겉으로 나쁜 말은 안해도 "동성애 존중은 하는데, 강요좀 하지 마라. 우리도 동성애자에게 이성애를 강요하지 않는다."라는 식의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기 때문이다.[66]

2007년 당시 이명박 후보는 동성애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는데도 당선되었다. 미국이였다면 난리났겠지만, 한국은 성소수자 유권자의 힘이 약해서 별 영향이 없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군 내 동성애(이른바 "계간법")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표시하기도 했다.

8. 계파 갈등

선행 조직이였던 민주자유당이나 신한국당 역시 계파간 갈등이 심하긴 했지만 한나라당에 이르러서는 계파 간 갈등이 절정에 이르러서 공천학살과 경선/공천 불복 후 탈당이 밥먹듯 일어났다. 민주자유당, 신한국당의 계파갈등이 민정, 민주, 공화의 3자대결이였다면 한나라당의 계파갈등은 그 유명한 친이 vs 친박의 양자구도였기 때문.

사실 계파간 갈등이 이렇게까지 심했던 이유는 한나라당이 가진 폭넓은 정치적 스팩트럼이 주 원인이다.

지금의 더불어민주당 vs 자유한국당의 구도는 진보 vs 보수의 구도가 명확하지만 이 당시 한나라당 vs 민주당계 정당의 구도는 영호남간의 지역구도가 강했다. 그 때문에 한나라당에는 극우적 인물, 중도 우파 성향의 인물 뿐 아니라 개혁적인 인사들까지 여럿 포진해 있었고 다양한 정치 스팩트럼을 가진 이들이 모이다보니 자연히 계파갈등이 심해진 것.

다만 2004년을 전후로 열린우리당이 창당하면서 개혁적 색채가 강한 인물들은[67] 열린우리당으로 이탈하고 남은 인물들 중 민정계를 필두로 한 정통 우파세력들은 박근혜에게로 상도동계[68]를 필두로 한 청년 우파세력들은 이명박을 중심으로 뭉쳤고 여기에 당권을 잃은 이회창계 세력, 그리고 자민련에서 넘어온 구 민정계들까지 합세하며 계파간 갈등은 자연스레 눈덩이처럼 커졌다.

결국 이는 17대 대선, 그리고 18대 총선을 거치며 폭발. 대선에서 승리하며 당권을 장악한 친이계가 친박계의 서청원, 김무성 등을 대거 공천 탈락시키고 이에 반발한 친박계가 친박연대, 친박 무소속 연대를 만들어서 이른바 이재오, 이방호 낙선운동을 벌이며 경남 사천에서 이방호 후보가 강기갑에게 밀려 낙선하고 이재오 역시 은평구에서 낙선했다가 보궐선거로 다시 돌아오는 등 웃지 못한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홍준표[69] 대표 체재가 무너지고 이명박 정부 말기로 들어서면서 마땅한 대권주자가 없던 친이계는 당권을 빼앗겼고 박근혜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하여 친이계를 사실상 궤멸시키면서 계파간 갈등 역시 친이 vs 친박에서 친박 vs 비박으로 변화. 이후 새누리당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진다.

9. 역대 선거결과

선거 년도

선거종류

출마직위 및 총 지지율

결과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후보 - 이회창

38.7% - 낙선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6명/16명
74명/232명
224명/616명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

39.8%

133명/273명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11명/16명
155명/232명
467명/682명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후보 - 이회창

46.6% - 낙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

35.7%

121명/299명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12명/16명
165명/230명
557명/733명
1627명/2888명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후보 - 이명박

48.7% - 당선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

37.8%

153명/299명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6명/16명
82명/228명
287명/762명
1247명/2888명

10. 각종 논란

10.1. 환생경제

2004년 한나라당에서 만든 정치풍자극이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갖은 인신공격과 색깔론으로 맹비난을 받았고 당시 정당 대표였던 박근혜에 대한 자화자찬으로 빈축을 샀다.

10.2. 과거사 청산 부분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일해온 정부 관료 출신들, 전두환 정권 시절 집권 여당이었던 공화당-민정당 인사로 구성돼있던 데다가 과거 친일파도 껴 있었던 재벌들의 지지까지 업혀 가고 있는 당이기 때문에[70]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시절 진행된 과거사 규명 작업의 발목을 잡아 왔다. 즉, 독재정권 시절 벌어진 간첩조작사건, 군 의문사, 정치미제사건, 부정축재 의혹, 친일청산 좌절 등의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반대해왔기 때문에 반대자들에게서 한나라당=보수정당=친일파란 비판을 받아온 주된 이유가 됐다. 결국 MB정부에서 기한연장없이 활동이 종료되었다.

10.2.1. 친일청산 법안 반대 논란

참여정부 시절인 2004년 2월 18일 최용규 의원 등 여야 55인이 발의했으나 당시 총선거로 논의도 못하고 임기만료로 폐기되었다. 그후 17대 국회가 구성된 후 2005년 2월 24일, 노회찬 최용규 의원 및 167명이 발의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친일재산환수법)을 발의했다. 한나라당 이해봉 안상수 배일도 김성조 박계동 주성영 의원도 발의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관련기사[71] 이후 이 법안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155명 만장일치로 통과된다친일재산환수법 국회통과. 당시 한나라당은 재경위 소위원회의 부동산 관련 법안 강행처리에 반발해 국회 의사 일정 거부를 선언하며 본회의에 불참했다정기국회 막판 파행.

반면 제16대국회 제245회 제11차 국회본회의(2004년03월02일)에서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안(친일진상법)에 관해서 본회의 당시에는 찬성인 155명 중 78명이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하지만 법안 반대자 2명이 한나라당 소속(이강두·김광원), 기권자 10명 중 7명도 같은 당 소속(김동욱·김기춘·박진·윤두환·하순봉·이상배·정문화)[72]이었다. 법안 처리 며칠 전인 2월 27일에서 당 지도부가 본회의 연기를 요구하는 등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관련기사.

이후 이 법안은 개정안 논의가 이루어졌다. 한나라당은 자체 개정안을 만들었는데 이는 열린우리당안보다 조사범위가 넓었다. 장교의 경우 소위 이상인건 같지만 헌병과 경찰의 경우 기준을 둔 열린우리당안과는 달리 한나라당은 기준을 두지않고 전부 대상에 포함했다. 또한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의 경우 열린우리당은 중앙조직 간부만이지만 한나라당안은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조직 간부까지 대상으로 했다관련기사. 하지만 여당안과 달리 당연범 규정이 없으며 여당안은 동행명령에 불응할 경우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게 했지만 한나라당은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다. 조사기간 또한 여당은 5년인데 비해 3년으로 잡았다. 또한 위원회 소속과 위원의 자격도 다르다관련기사.

열린우리당은 비공개회의에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핑계삼아 '친일'을 '부일'로, 조사 대상을 '지위'에서 '행위'로 변경한다는 소식에 욕을 엄청 먹었다. [73] 이후 한나라당안을 대폭 수용해 조사범위를 확대했고 동행명령에 불응할 경우 한나라당 요구대로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만 부과키로 했다관련기사. 헌데 행자위 전체회의에서 표결을 해 찬성 13, 반대 5, 기권 1표로 가결됐는데 반대 5인이 전원 한나라당이었다관련기사. 간사인 이인기 의원만 찬성했다. 지들이 조사범위 대폭 넓혀놓고 반대하는건 뭘까. 법사위에서 법 적용 시점을 `국권침탈 전후'로 규정했지만, 이날 처리된 법사위 대안에서는 법 적용 시점이 1904년 러일전쟁 이후로 확대됐다관련기사. 12월 '부일'이 아닌 '친일' 그대로 전면개정되어 통과되었다. 하지만 법안명에서는 '친일'이 빠져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법 개정안'에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법 개정안'로 변경되었다. 법안명에서 '친일'이 빠진 이유는 여당이 외교 때문에 뺐다는 얘기와 일본의 요청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정확한 얘기가 없다. 당시 투표의원은 227명으로 찬성의원 166명 중 한나라당 의원수가 55명이었다. 당시 국회회의록

10.3. 차떼기 사건

너무나도 유명해서 별도 문서로 분류되었다. 2002년 16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이 삼성, SK, 현대자동차, 롯데 등의 대기업으로부터 각 100억원씩을 받는 등 총 823억 원의 뇌물을 받았던 불법적인 정치자금 사건으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뇌물을 수송하여 이슈가 됐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10.4.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전당대회는 한나라당의 최고의결기관이다. 한나라당은 전당대회를 통해 1) 당강령의 채택과 개정 2) 당헌의 채택 및 개정 3) 당의 해산과 합당에 관한 사항 4) 대표최고위원 및 최고위원의 지명 5) 대통령후보자의 지명 6) 기타 주요 당무에 관한 사항의 의결 및 승인을 결정한다. 그런데 당시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는 최고위원 선출 및 대선후보 지명 과정에서 돈봉투가 오가는 등 부정한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2011년 고승덕 의원(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못난 애비가 미안하다' 발언으로 이슈가 된 인물)이 2008년 전당대회에서 돈봉투가 전달된 사실을 폭로하면서 난리가 났다.#

이후 고승덕이 채널A에서 관련 논란으로 대담을 진행하면서 한나라당의 부정한 관행이 언론에서 확대재생산되어 주요 정치권 논란으로 확산되었고 위기감을 느낀 한나라당은 전당대회를 취소, 박근혜에게 전권을 위임한 뒤 검찰에 수사의뢰를 하였다. 이로 인해 박희태 국회의장과 김효재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전당대회 캠프 상황실장이었음)은 각각 직위에서 사퇴하였고 박희태의 경우 혐의를 인정하며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다.

10.5. 법안 날치기 통과

국회선진화법이 없던 시절엔 원내 과반수의 찬성만 있으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으므로, 18대 총선에서 원내 과반석을 차지한 한나라당은 이를 악용해 각종 법안들을 야당과 협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처리하여 야당 지지자들의 분노를 샀다. 날치기는 주로 새해 예산안 처리 혹은 서민 생계 지원 법안과 관련되었는데, 예산안의 날치기 처리의 경우 정상적인 검토와 심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부실 예산안이라는 비판과 민의 대변 기관인 국회의 성격을 크게 더럽히는 처사란 비판, 그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민들이 국회 전반에 대해 불신을 갖게하는 계기가 된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국회 공성전 문서에 날치기 진행 과정과 일련의 폭력사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새해 예산안은 3년 연속 한나라당의 단독 처리로 통과되었다. 그외에 미디어법과 한미FTA재협상안, 최저임금, 4대강 관련 예산안 등도 같은 방법으로 날치기당했다. # ## 특히 2011년 예산안 날치기 사태가 가관이었는데 당시 박희태 국회의장[74]질서유지권을 발동하여 국회 경위들의 호위 속에 처리하였다. 결국 예산안 처리에서 이전에 야당과 합의한 내용과 다르게 처리되는 경우가 빈반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고흥길 정책위의장이 사퇴하기도 하였다.

10.5.1.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소위 '종편' 방송이 생기게 된 법안 통과 과정에서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대리 투표 등 갖은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으나, 투표가 종료되고 보니 재적 145명, 찬성 142명으로 재적 의원의 수가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 하지만 의장을 필두로 재투표라는 전례 없는 절차 무시 방식으로 법안이 날치기 통과되었고 결국 재적 153명, 찬성 150명으로 가결되었다. 한나라당의 다음과 같은 처사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헌법재판소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단 사실을 인정했지만 법적 효력 또한 인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날치기까지 해서 나온 종합편성채널들은 훗날 큰 보답을 한다.

10.6. 성추행 논란

한나라당은 2012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기 전까지 보수정당을 자처함에도 불구하고 부적절한 성적 태도를 보여와 지탄을 받았다.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강재섭 의원의 경우, 중앙일간지의 수위소설 주인공인 '조철봉'을 언급하며 "조철봉이 요즘 왜 안 해? 하루에 세 번 하더니 한 번은 해 줘야지. 너무 안 하면 철봉이 아니라 낙지야 낙지"라고 한 발언으로 도마에 올랐으며[75] 최연희 의원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76], 미안, 식당 아줌만 줄 알았어. 이명박 대통령의 '마사지걸' 발언, 정우택 충북지사의 '관기' 발언, 박계동 의원의 술집 여종업원 성추행[77]관련기사, 2010년 7월에는 대학생들과의 뒤풀이 모임에서 벌어진 강용석의 "아나운서가 되려면 다 줘야 한다", "대통령이 너만 쳐다보더라. 김윤옥 여사만 없었으면 네 휴대전화 번호를 땄을 것" 성희롱 발언 등 성추행 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민주, 진보 지지자들은 '성나라당', '성희롱당'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만들어 부르게 됐으며 이후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이 바뀐 지금도 '색누리당', ‘자위한국당’, ‘발정당’ 등 성적인 것을 엮어서 조소하고 있다. 그 이후에도 심학봉 의원과 김형태 의원이 성추문을 일으켰으며, 자유한국당으로 개편된 뒤에는 홍준표 대선후보가 19대 대선 기간 중에, 회고록에서 발정제 사건을 언급하는가 하면, 실수로 '홍준표 찍어야 자유대한민국 지킨다'라는 선거문구를 축약하는 과정에서 홍찍자지라는

괴악한 선거문구가 나오는 바람에 그런 이미지가 더 강해졌다.

10.7.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사건

검찰 수사 결과 한나라당 의원과 정부관료가 공모하여 디도스 테러를 가한 사건. 결국 책임을 지고 지도부가 사퇴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를 참고.

11. 그 외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 당 이름을 패러디한 듯한 '핵나라당'이 나오기도 했다. 핵나라당의 대표는 '정희원'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실제로 출마하지는 않았지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만든 공보가 뭔가 허경영스러워서(...) 인터넷에서 유머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분이 돌아온다!! 핵.나.라.당!

12. 관련 문서


  1. [1] 창당은 2006년에 했지만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으로 변경 등록한 건 2012년이다.
  2. [2] 창당은 2013년에 했지만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으로 변경 등록한 건 2014년이다.
  3. [3] 물론 후술해 있듯 국민의 정부참여정부 때 응어리 진 것이 크긴 하지만 2007년에 여당이 되었고 야당으로 있을 때에도 존재감은 거대했다.
  4. [4] 외환위기 정국에서 펼쳐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탄핵정국의 17대 총선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의 여파가 미친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제외하고는 총선, 지선에서 죄다 승리했다. 게다가 언론을 등에 업고 있었기에 당내 친이vs친박과 같은 계파갈등을 제외하고는 여당이었든, 야당이었든 두려울 것이 없었다.
  5. [5] 북한과 대한민국을 통일시키겠다는 의미에서 한나라당(하나가 된 나라)인줄로 아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근거가 없다. 그러나 멸칭인 딴나라당도 그렇고 사람들 인식은 하나 된 나라라는 의미가 명백한 듯.
  6. [6] 다만 진보와 마찬가지로 이 노선은 한국에 들어와 의미가 상당히 변했다.
  7. [7] 창당 직후부터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8. [8] 다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실제 한나라당에 입당한 적은 없다.
  9. [9] 나이든 어른들 중에는 한나라당의 이름이 새누리당으로, 그리고 다시 자유한국당으로 바뀐 지금도 자유한국당한나라당으로 부르는 분들이 많다..
  10. [10] 외신에서는 후속 정당인 새누리당은 한국어 발음을 옮긴 Saenuri Party를 쓰는 게 일반적이지만 한나라당은 영어로 번역한 Grand National Party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이 보였다.
  11. [11] 물론 구자체를 고집하는 소수의 보수파 일본인을 제외하고는 이런 표기는 안 쓴다고 봐도 무방하다.
  12. [12] 군부정권시절 주류는 육법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군인 출신과 법조인이 주류였는데, 한나라당의 후신인 자유한국당 역시 당내에 법조인과 관료, 교수 및 전문가 출신 의원이 많다. 이는 운동권 투사 출신이 많은 민주당과 대조되는 면이다.
  13. [13] 살아남은 5공 인사라고 해봐야 최병렬이나 김용갑 정도였는데 이 두 사람도 2008년을 끝으로 완전히 정계에서 은퇴했다.
  14. [14] 여기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 김대중이 한축을 이루던 당이 민주당이었는데 1995년에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떨어져 나갔고 이 때의 잔류 세력이 민주당 간판을 지키다가 신한국당과 합당한 것. 현재의 민주당은 엄밀히 말하면 새정치국민회의가 2000년에 새천년민주당으로 확대 개편된 것이 이어진 정당이다.
  15. [15] 초대총재인 조순이 작명했는데, 순우리말이라 처음에는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을 쓰는데 저항이 많았다 한다.
  16. [16] 김학원, 노승우, 김충일, 백남치, 박범진, 김명섭, 유용태, 이상현, 한이헌, 김운환, 서석재, 신상우, 서훈, 서정화, 이강희, 서한샘, 김인영, 오세응, 홍문종, 원유철, 이택석, 이성호, 정영훈, 이한동, 박종우, 한승수, 김영진, 송훈석, 이용삼, 김종호, 이완구, 강현욱, 권정달, 박세직, 김윤환, 장영철, 차수명
  17. [17] 박성범, 서정화, 이세기, 김영구, 강성재, 이재오, 박명환, 박주천, 이신범, 이우재, 서청원, 박원홍, 김덕룡, 서상목, 홍사덕, 이회창, 맹형규, 김중위, 정의화, 정문화, 김형오, 정재문, 김정수, 박관용, 강경식, 이상희, 김무성, 정형근, 김기재, 서석재, 박종웅, 김진재, 김도언, 최형우, 권철현, 백승홍, 강재섭, 박승국, 안택수, 박종근, 이해봉, 김석원, 심정구, 이윤성, 이원복, 조진형, 이재명, 안상수, 이경재, 남경필, 이사철, 김문수, 목요상, 이국헌, 안상수, 전용원, 김길환, 이웅희, 이해구, 류종수, 함종한, 조순, 최연희, 박우병, 이응선, 김기수, 신경식, 오장섭, 이상득, 김일윤, 임진출, 임인배, 박시균, 박헌기, 이상배, 신영국, 주진우, 정창화, 김찬우, 김광원, 김종하, 황낙주, 김태호, 김호일, 강삼재, 하순봉, 허대범, 김동욱, 황성균, 김영일, 김용갑, 김기춘, 윤한도, 노기태, 나오연, 박희태, 권익현, 이강두, 현경대, 양정규, 변정일, 김명윤, 김수한, 신영균, 정재철, 황우여, 김영선, 박창달
  18. [18] 이부영, 제정구, 이규택, 황규선, 장을병, 권오을, 권기술, 이중재, 이미경, 김홍신
  19. [19] 박성범, 이세기, 강성재, 이신범, 이우재, 서상목, 김중위, 심정구, 이원복, 조진형, 안상수, 이경재, 이사철, 이국헌, 이웅희, 이해구, 류종수, 함종한, 박우병, 조순, 황낙주, 허대범, 노기태, 권익현, 김수한, 김명윤, 김정수
  20. [20] 김영구, 강인섭, 박명환, 박주천, 김기배, 서청원, 박원홍, 김덕룡, 최병렬, 이부영, 정문화, 김형오, 정재문, 박관용, 박종웅, 김진재, 유흥수, 강재섭, 김만제, 윤영탁, 박종근, 이해봉, 김태호, 권기술, 손학규, 목요상, 전용원, 조정무, 이재창, 이규택, 최돈웅, 최연희, 신경식, 이상득, 김일윤, 박시균, 박헌기, 이상배, 주진우, 정창화, 김찬우, 김광원, 김종하, 김호일, 강삼재, 하순봉, 김동욱, 김영일, 김용갑, 김기춘, 나오연, 윤한도, 박희태, 김용균, 이강두, 현경대, 이회창, 홍사덕, 강창성, 신영균, 서정화, 이상희, 유한열, 윤여준
  21. [21] 이재오, 맹형규, 정의화, 도종이, 정형근, 권철현, 백승홍, 박승국, 안택수, 박근혜, 황우여, 이윤성, 남경필, 김문수, 안상수, 임인배, 권오을, 김영선, 장광근
  22. [22] 정인봉, 김영춘, 이성헌, 원희룡, 오세훈, 도종이, 허태열, 손태인, 안경률, 엄호성, 권태망, 현승일, 서상섭, 민봉기, 안영근, 최병국, 윤두환, 박종희, 신현태, 고흥길, 임태희, 심재철, 전재희, 김부겸, 유성근, 박혁규, 정병국, 김용학, 윤경식, 심규철, 이병석, 김성조, 이인기, 이주영, 김학송, 이방호, 이한구
  23. [23] 당시 한나라당에 남아있던 민정계 정치인은 총 49명이었다. 당시 자민련이나 새천년민주당 세력까지 합치면 정몽준, 박종우, 한승수, 송광호, 원철희, 오장섭, 이만섭, 김종필, 조희옥, 김종호, 조부영, 안대륜, 변웅전 등까지 합하면 당시 국회 내에 남아있던 민정계와 공화계는 총 62명이었다. 비록 15대 국회 때보다 더 세가 줄었지만 국회 내에서 민정계와 공화계는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다.
  24. [24] 도로명주소는 공항대로 541.
  25. [25] 이후 친박연대 지역구 당선자들이 복당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180석 남짓의 초거대 여당이 된다. 18대 국회 말기에 통과된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의석이기도 했다.
  26. [26] 그러나 민주당 역시 텃밭인 전주 덕진구에서 무소속 출마한 정동영 전 후보와 무소속 연합을 이룬 신건 후보(전주 완산구갑)에게 참패해 이미지를 크게 구겼다.
  27. [27] 개표 결과 0.6% 2만 6000여표 차이였다. 하지만 끝내 강남몰표를 이기지 못하고 져버렸다.(강남 3 선거구에서만 12만6930표 차이가 나왔다. 참고로 다른 22개 선거구에서는 1만표 이상의 차이가 난곳은 불과 3곳이며 3만5245표 차의 관악구를 제외하면 1만 1000표 정도차이 였다.)
  28. [28] 북한과 가깝고, 영동 지방의 보수적 정서 때문에 친한나라당 성향이 강한 곳이다.
  29. [29] 1998년 37살의 최연소 경남도의원, 2002년 41살의 최연소 거창군수를 거쳐서, 2004년 6.5 재보선 당시 43살으로 최연소로 경남도지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30. [30] 2016년 2월 현재 재판 진행 중.
  31. [31] 구 민주당 계열의 수장이다. 그러다가 2000년 16대 총선에서 공천탈락해서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지만 낙선해서 정계에서 은퇴했다.
  32. [32] 당시 한나라당의 총재로 재임했으며, 15대 총선에서는 김윤환, 조순, 한승수 등의 거물을 줄줄이 숙청하기도 했다. 이후 2002년 대선출마로 인해서 당 총재직과 전국구 의원(1번)직을 사임했다.
  33. [33] 총재직 폐지 및 대표최고의원 중심제로 변경
  34. [34] 2000년 한나라당 탈당 후 자민련 총재, 국무총리 역임. 2007년 복당 후 상임고문 위촉
  35. [35] 1997~1998년에는 총재직과 대표직이 별도로 존재.
  36. [36] 당시 5선 지역구 국회의원(서울 동작구 갑)을 맡고있었다. 이후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37. [37] 이한동-서청원간의 공백기가 길고 대표의원과 대표최고의원의 역할이 어느 정도 달라서 따로 서술
  38. [38] 집단지도체제에서의 대표이다. 당시 최고의원은 서청원, 강창희, 김진재, 강재섭, 박희태, 하순봉, 김정숙 이었다.
  39. [39] 서청원 대표 퇴진에 따른 승계.
  40. [40] 노무현 대통령 탄핵여파과 불법대선자금 의혹으로 수감된 서청원, 최돈웅 등을 석방가결안 날치기 건으로 사퇴했다.
  41. [41] 단일지도체제에서의 당 대표이다.
  42. [각주] 42.1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
  43. [43] 단일지도체제에서의 당 대표이다.
  44. [44]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
  45. [45] 당시 최고의원은 박근혜, 원희룡, 김영선, 이강두, 이규택 이었다.
  46. [46] 박근혜 대표가 커터칼로 피습당하면서 대표직을 수행할 수 없었다. 또한 차기 대선 출마를 위해서 박근혜 대표가 당규에 따라서 사임한 것도 있다.
  47. [47] 저거 어떻게 쥐어박고 싶었어로 유명한 대표다.
  48. [48] 이 당시 박근혜는 당권장악을 위해서 민정계 출신의 강재섭을 지원했고 이명박은 자신의 최측근인 이재오를 지원했다. 결국 강재섭이 대표가 되었다.
  49. [49] 당시 최고의원은 강재섭, 이재오, 강창희, 전여옥, 정형근 이었다.
  50. [50] 경남 양산시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로 사직
  51. [51] 당시 최고의원은 박희태, 정몽준,허태열, 공성진, 박순자(여성)이었다.
  52. [52] 당시 친박계는 허태열을 지원했으나 친이계가 주류가 된 상황이었기에 6인회의 좌장인 박희태가 유리했다.
  53. [53] 지방선거 패배로 사직.
  54. [54] 박희태의 사직으로 차순위인 정몽준이 승계받았다.
  55. [55] 당시 당 원내대표였다.
  56. [56] 보온병을 폭탄으로 착각한 그 분 맞다. 인천시장을 지냈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며, 현재 경남 창원시 시장을 맡고있다.
  57. [57] 당시 최고의원은 안상수, 홍준표, 나경원, 정두언, 서병수이다.
  58. [58] 국회부의장직을 겸임했다.
  59. [59] 이후 2017년 7월, 한나라당의 후신인 자유한국당의 대표를 맡게 된다.
  60. [60] 당시 최고의원은 홍준표, 유승민, 나경원, 남경필, 원희룡이 당선. 친이계는 홍준표를, 친박계는 유승민을 지지하는 구도였다.
  61. [61] 원내대표 겸임. 이후 새누리당으로 바뀌고서 당대표.
  62. [62] 새누리당으로 당명 개정.
  63. [63] 홍사덕 의원까지가 원내총무 칭호 사용.
  64. [64] 김덕룡 의원부터가 원내대표 칭호 사용.
  65. [65] 당명 개정 이후에도 원내대표직 역임. 2012년 5월 8일에 공식임기 종료.
  66. [66] 민주당 지지자들도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있다.
  67. [67] 대표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핵심 중 하나인 김부겸이나 충남지사 후보로 출마한 양승조
  68. [68] 단 상도동계 중에서도 서청원과 김무성은 박근혜를 지지했다.
  69. [69] "독고다이 정치인"을 자처하고 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도와주고 친이계의 지원을 업어 당대표로 취임하는 등 엄연히 친이계의 일부로 보는게 맞다.
  70. [70] 단, 이승만 정권 시절의 관료들과 정치인들은 박정희의 5. 16 쿠데타와 집권으로 상당수 숙청당하거나 강등당하면서 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거의 쫓겨 나가고 대부분 박정희의 5. 16 군사정변 참여자들로 공석이 채워지게 된다. 그렇지만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거의 30년 가까이 장기 집권한데다가 그 와중에 기득권층에도 손을 뻗친 만큼, 재벌 계열들도 이쪽 지지율이 압도적이거나, 재벌 계열, 장교 계열 인사들은 정치에 입문할 때도 대부분이 이쪽으로 입문하는지라...
  71. [71] 당시 기사엔 열린우리당 152명을 149명이라고 잘못써서 166명이라 써있으나 169명이 맞다.
  72. [72] 나머지 3명은 박상희·박병윤·양승부로 민주당 소속 의원이다.
  73. [73] #
  74. [74] 2014년 코디 성추행으로 논란을 산 인물
  75. [75] 관련기사
  76. [76] 이 사건의 여파로 2006년에 최연희 의원은 출당되었고 무소속으로 18대 총선에서 당선되지만 복당하지는 못 했다. 결국 19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은퇴했다.
  77. [77] 저 사건이 터지고 박계동 의원은 18대 총선에서 지역구를 유일호 박사에게 빼앗겼고 국회사무총장이 되었다가 19대 총선에서 또 낙천되자, 박세일, 전여옥과 손을 잡고 국민생각을 창당해서 나가지만 또 낙선되었고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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