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

漢四郡

한국의 역사 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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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BCE 108 ~ BCE 82

진번군

임둔군

*

BCE 82 ~ BCE 75

낙랑군

BCE 75 ~ CE 1세기

현도군
(흥경으로 이현)

CE 1세기 ~ CE 204

(무순으로 이현)

CE 204 ~ CE 313

대방군**

CE 313 ~ CE 404

(요서로 이현)

(요서로 이현)

* 현도군은 기원전 107년 설치되었음.
** 대방군은 311년 한반도에서 축출되었음.

1. 개요
2. 위치
3. 지배 성격
4. 최씨 낙랑국과 낙랑군은 같은 것?
6. 기타

1. 개요

한무제위만조선을 공격해 멸망시킨 뒤 그 자리에 세웠다고 하는 4개 군을 포함한 5개의 군급 행정 구역. 4개 군이 같이 유지된 기간은 25년으로 매우 짧아서 학술적으로는 '한군현'이라 부르기도 하며, '동방변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도 세간에 가장 잘 알려진 명칭은 한사군.

2. 위치

왼쪽 지도가 학계의 정설인 한반도 북부설이다. 오른쪽 지도는 난하 요수설을 기반으로 한 지도로, 비정 연구니 뭐니 잔뜩 폼을 잡고 있지만 재야사학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고고학적 성과를 보면 평양 낙랑 토성에서 낙랑 예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와당 발견, 한무제 때 쓰던 오수전 동전 + 3,000여 기에 이르는 목곽묘, 귀틀묘, 진실묘 발굴, 황해북도 봉산군에서 대방 태수의 무덤 발견되었다. 게다가 오른쪽 지도에 있는 요동군과 낙랑군 등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원안에 있는 영토, 오늘날 중국의 허베이성과 산둥성 영토는 전국시대 연나라제나라의 땅이었고, 당연히 전국 칠웅인 연나라와 제나라의 영토였던 만큼 진나라한나라 때도 매우 중요한 지방이었다. 당장 저 위에 대략 진번군 위치가 촉한의 황제 유비의 고향인 탁군이다.

주로 위치에 대한 논란이 많이 다뤄지는데, 금방 폐지되거나 이전되어 버린 나머지 세 군현보다 낙랑의 위치가 떡밥이었다. 물론 인터넷 등지에서 음모론의 형태를 띄고 있는 논란일 뿐, 학계에서는 위치에 대해서는 이미 일제강점기에 결론을 내고 더 높은 차원의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문헌 사료만 가지고 일부 학자들이 한사군의 위치를 놓고 다른 곳으로 비정하는 일이 있었으나, 대다수는 한반도 북부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보았다.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 등)이나 고려사 등 국가의 공인 사서 및 지리서, 그외 저명하고 가치 있는 사서들은 모두 평양 일대가 낙랑군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학계에서 낙랑군이 평양에 없었다고 보는 학자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사실상 논쟁이 끝난 상황이다.

위치에 대한 논란의 실질적인 시발점은 신채호, 정인보 등의 민족 사학자들로서,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발굴이 조작된 것이라 주장하며 민족주의적인 방어 논리로서 제기되었다. 신채호평양 지방의 지명이 '낙랑'이며, 진번, 임둔, 현토 역시 마찬가지로 각각 가리키는 지명이 있을 것이라 했고, 한사군은 한무제삼조선 전체를 공격해 합병한 뒤 각각의 지명의 위치에 세우려고 하다가 실패한, 즉 '가설'된 군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한사군에 관한 신채호 등의 견해는 대부분이 원전의 한문을 오독했거나 추측이나 희망 사항에 따른 결론이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재 대한민국의 사학계는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 물론 대다수 민족 사학자들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면서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없었던 측면, 그리고 일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민족 사학이 가지는 가치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낙랑군의 위치에 관한 논란으로, 평양 근처의 낙랑군은 사실 최씨낙랑국이 아니냐는 논란이 존재한다. 자세한 것은 하단 및 해당 항목 참조.

한편, 북한에서는 리지린을 필두로 하여 난하요수설을 토대로 한 낙랑군 요서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고 주장을 위해 증거를 끼워 맞춘 수준이라서 철저하게 논파되어 현재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계 어느 학계에서도 인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난하 요수설을 바탕으로 한 낙랑군 요서설 또는 요동설은 유사역사학자들에 의해 현재까지도 인터넷과 언론, 출판 시장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국회의원에게까지 전파되어 국회에서 토론회를 강제로 개최할 정도.

3. 지배 성격

1916년 조선총독부에서 지원을 받아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절대 아니다. 해방 이후에도 북한 측에 의해 고고학적인 발굴은 꾸준히 계속되어 왔다. 예를 들어 1992년에는 평양 정백동 364호분에서 논어 목간이 발굴된 것이 알려졌으며 2005년에는 낙랑군 25개 현의 인구가 기록된 이른바 초원 4년 호구부 목간이 발견되어 중요한 연구 소재가 되어 있다. 물론 환빠들은 이런 거 모르기 때문에 이런 얘기하면 일제의 발굴 조사 결과를 추종한다고 깐다.[2] 북한은 1990년대 이후에도 일본의 식민지였단 말인가! 심지어 '북한 가서 직접 발굴하기 전까지는 모른다'고 하다가 '북한에서 이미 발굴했고 남한에서도 자료를 입수했다'고 하면 종북주의자라고 까는 신종 환빠도 있다(...). 그럼 뭐 세상 사람이 다 당신처럼 바보 같이 살라는 말도 아니고 어쩌라고

지금까지 대충 나온 자료는 평양 낙랑 토성의 낙랑 예관이라는 와당, 한나라의 오수전 동전, 3,000여기의 이르는 목곽묘, 귀틀묘, 진실묘, 황해북도 봉산군의 대방태수 무덤 등이 대표적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기존의 중국계 유물과 무덤 양식에 더해 낙랑에 속하는 초기 목곽묘에서 세형 동검이나 인장[3] 등이 출토되고, 다른 한편으로 한나라의 율령과 관련된 문자 자료들이 보고되면서 현지 유력자들이 낙랑군을 비롯한 군현 지배와 어떠한 관계를 맺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대중적인 인식처럼 소위 한사군 지역이 단순한 중국의 식민지였다고 보는 시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말.

4. 최씨 낙랑국과 낙랑군은 같은 것?

미천왕 때 합병당한 낙랑군이 대무신왕 때 합병당한 최씨 낙랑국과 같은 존재인지 별개의 국가인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별개의 국가로 보는 쪽에서는 낙랑군을 평양과 그 주변으로, 낙랑국은 평양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을 것이라 추정한다. 또한 이에 관해서 경북 대학교 사학과 주보돈 교수 등은 낙랑군과 낙랑국이 평양 부근에 위치하면서 서로 다른 곳이라 보았다.

또한 낙랑공주의 아버지인 최리가 낙랑국의 이라고 기술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태수'가 아닌 것이다. 삼국사기 등이 쓰여진 시대에 '군'과 '국', '태수'와 '왕'[4]을 구별하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5] 또한 중국의 기록을 보더라도 낙랑 태수중에 최리라는 사람은 없었다.

별개의 국가가 아니라는 쪽에서는 낙랑군과 낙랑국의 이름이 같고 지리적으로도 같은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 유물의 발굴로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 만큼, 고구려와 맞설 만한 강국이 공존할 자리가 없다는 주장이다. 최리 이전에는 전혀 기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약점이다. (옥저동예 등보다도 존재감이 없는 셈이다.) 또한 대무신왕이 낙랑을 함락시킨 후 후한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낙랑 지역을 점령한 것도 대무신왕의 고구려가 점령한 것이 한의 군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일종의 절충설 내지는 제3설로, 후한 시대 자치화된 영동 7현, 즉 현재의 함흥 지역의 지배자 내지 군장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는 고구려가 대무신왕대 지배한 압록강 중류~두만강 중류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거리라는 점, [6] 옥저에서 낙랑국왕 최리를 만났다고 전해지는 점 등이 있다. [7] 왕이라고 불린 이유는 중국 문물을 받아들인 선진화된 해당 지역의 군장이 주변 토착세력에 왕을 과시하는 일종의 외후내왕 형식의 제도를 가졌을 수 있다. 실제로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기원후 25~40년 경에는 낙랑군 내에서도 반란과 재정벌이 일상화된 상태로 낙랑군의 일부를 고구려가 먹었을 충분한 개연성이 있는 시대이다.

결국 양쪽 모두 정황 증거에 불과하다. 실제로 평양 주변에 낙랑국의 별개의 유적이 있는지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최씨낙랑국 항목 참조).

5.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항목 참고.

6. 기타

코에이의 삼국지7에서도 낙랑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삼국지 10의 경우 당시 동북공정이 사회적 이슈가 되던 상황이라 게등위에서 이걸 문제 삼았다. 결국 국내판에서는 ‘동답’으로 개명 당하고 위치도 압록강 이북으로 변경되었다.


  1. [1] 313~314년 연간에 한반도에서 만큼은 한사군이 모두 축출 되었기에, 서구학계는 이때를 한국사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낙랑군 항목참고.
  2. [2] '바로 위에서 북한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고 주장을 위해 증거를 끼워 맞춘 수준이라서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 어느 학계에서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라는 서술이 있었는데 사료, 사적 자체와 그 것을 해석해서 내놓는 주장은 서로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똑같은 삼국사기를 가지고 어떤 환빠는 대륙 삼국설을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정상적인 한국사 연구를 한다. 이 어떤 환빠의 주장이 터무니 없다고해서 삼국사기 자체가 허구가 되는 게 아니다. 그 해석이 잘못된 거지. 물론 북한의 연구 환경이 환경인 만큼 그쪽 사료나 사적은 보다 더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3. [3] 예를 들어 '부조(夫租, 이후의 옥저(沃沮))' 지역의 (濊)의 군장(君)에게 주어진 이른바 '부조예군' 인장
  4. [4] 전근대 시기 동아시아의 천하 체제에서 '왕'이란 호칭을 쓰는 경우는 중국 내에서 태자가 되지 못한 황자들이 명목상 각 지방의 지배자(당나라 시기에 친왕이란 호칭이 붙음.)로 책봉되거나, 중국 바깥 주변국 중에서 중국에 입조하여 책봉을 받은 국가의 군주인 경우에 해당된다. 물론 전자와 후자의 지위는 확연히 다르다.
  5. [5] 그런데 최씨 낙랑국 항목에 지적된 대로, 삼국사기에는 '대방왕'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다만 '대방왕'이 나오는 시기는 후한 중기 ~ 말엽 중원에서 외척 및 십상시전횡 - 황건봉기 - 군웅할거 - 삼국지로 이어지는 권력 분열 및 쟁탈 시기라 상대적으로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지고 이에 따라 공손씨 세력이 요동 및 한반도 북서부로 넘어와 낙랑 - 대방 일대에서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확립하던 시기였음은 감안해야 한다.
  6. [6] 평양 지역은 누가 봐도 이미 낙랑군이 있고 그곳에 원정을 나갔다가 현도군에서 뒤를 치면 끔살...
  7. [7] 상식적으로 평양에 도읍을 둔 국가의 이 옥저에서 거리를 활보한다? 말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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