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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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사대문안

사대문

성저십리

漢陽

1. 개요
2. 역사
3. 방어
4. 여담

버튼 홈즈가 촬영한 대한제국 초기의 한양 모습. 무려 1900년에 촬영된 영상이다. 홈즈는 1899년에 입국하여 한국에 2년간 체류한 후 1901년에 돌아갔다. 활쏘기를 하는 사람들, 망건을 트는 사람, 거지 아이들 등의 모습이 담겼다. 참고로 위 영상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한국에서 촬영된 영상물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1. 개요

서울특별시의 옛 이름. 한(漢)강의 북쪽(陽)을 지칭하는 지명.

2. 역사

이곳의 지명이 처음 한양으로 정해진 것은 신라 경덕왕 때이다. 신라진흥왕고구려백제로 부터 현재 경기도 지역을 빼앗으면서 그 지방에 신주(新州)를 설치했고 곧 한산주로 이름을 바꿨다. 그 때 현 서울특별시 강북 지역이 위치한 지역은 진흥왕 때는 '북한산주(北漢山州)였다가 신라 경덕왕 때인 757년 전국 지명 한화정책에 따라 '한양(漢陽)'으로 이름 붙였다.[1][2]

이 명칭은 이후 고려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으며, 고려의 멸망 이후, 조선왕조가 창업하며 개성에서 천도하면서부터는 공식 명칭은 한성부(漢城府)가 되었지만 보통은 이전부터 계속 불린대로 한양으로 불린 듯하다. 물론 서울이라는 이름도 공식적 표기가 아닌 입말상으로는 함께 쓰였다.[3]

유의할 것은, 조선시대의 '서울'과 '한양/한성'은 동일한 지역을 가리키기는 하지만 그 말 자체의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서울은 원래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였고, 한양/한성은 그 지역 자체의 지명(고유명사)이었던 것에서 훗날 일반명사였던 서울이 지역 자체의 이름이었던 한양/한성을 대신해 지명으로서의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이전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도 한양이라는 이름은 사용됐지만 그 당시 한양은 수도가 아니었으므로 서울은 아니었다. 즉, 고려 왕조가 계속 존속됐거나 조선 왕조가 건국 직후 한양으로 천도하지 않고 계속 개경(개성)을 수도로 삼았다면, 지금의 서울은 '한양'이나 '한성'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고 대신 개성이 서울이 됐을 것이다.

남연군 묘를 도굴한 서양인으로 잘 알려진 E,J.오페르트의 책인 <금단의 나라 조선>에서는 조선인들에게 한양에 대해 물었을 때, 조선인들이 한양이라는 명칭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중에서야 "아하~ 서울!"이라고 말했다고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볼때 적어도 구한말에는 한양이라는 말보다는 서울이라는 말이 조선인들에게 더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京城府)[4]으로 개칭되었다. 8.15 광복 후에 서울특별시로 바뀌면서 주변의 경기도 지역(광주, 양주, 고양, 김포[5], 시흥, 부천 등..)을 왕창 흡수하여 거대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1963년 서울 대확장 이전의 서울특별시는 남쪽에 영등포를 붙여놓은 한양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1963년 서울 대확장과 강남 대개발로 강 남쪽의 비중이 커져버려서 더 이상 서울특별시 = (한강 북쪽이란 의미인) 한양으로 보기에 애매해졌다. 물론 서울특별시의 전신이 한양인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서울은 한자어가 아니라서 따로 한자 표기가 정해진 게 없었기 때문에 중국중화권에서는 20세기 이후에도 한성부에서 이름을 따와서 서울을 계속 한성(漢城)이라고 불렀다. 덕분에 서울대학교한양대학교한성대학교가 중국인들에게 혼동되기도 했다. 최근 서울의 음차표기로 '셔우얼(首爾, 으뜸가는 도시란 의미라고)'이라는 이름을 새로 만들어 중화권에 홍보하고 있는데 중국인들은 한성이 더 낫다면서 별로 마음에 안 들어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기분과는 별개로 많이 정착되고 있는 중. 아무래도 서울이라는 발음과 근접하기도 하고, 지명이기 때문에 한국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한양은 조선의 정치적 중심지로, 한양 성벽으로 둘러싸인 사대문과 사소문, 내부에는 여러 궁궐과 종묘가 갖추어져 있으며 양반관료 계층이 모여 살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주요 건물들을 허문 일(예를 들면 의정부 건물과 서대문, 한양성벽)과 6.25 전쟁, 목조 건물의 한계, 경제개발시기의 도심 재개발로 인해 과거 한양의 모습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사대문, 도심내의 궁궐, 복원중인 성곽, 북촌, 서촌의 한옥 등에서 19세기 말 및 20세기 초의 한양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구한말 1899년, 네덜란드계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 1855~1935)가 덕수궁 주변의 지금의 정동 언덕에 있던 미 공사관에서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그린 작품인 서울풍경이 남아있다.

3. 방어

성벽을 갖추고 있기는 한데, 인구와 병력에 비해 성벽이 너무 길고 지형도 평탄해서 막상 농성전에는 그리 적합하지는 않다.[6] 사대문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숭례문 문서 참조.) 유교적 정치 관념을 반영시킨 도성이라는 의전적 의미가 강하며, 성곽은 한성부의 행정적 경계에 해당한다. 정확히 말하면 성저십리라고, 한양 성곽 바깥 10리 지역까지는 한성부의 관할지역이었다. 성저십리는 민락, 벌목, 매장 등이 금지된 도시(농업)산업배후지역이고, 한양성 안이 거주 및 생활지역이다.[7] 한양의 외성, 즉 서울 성곽은 로마 제국의 성벽과 마찬가지로 방어적인 성격보다는 행정적, 상징적 의미가 강했다.[8] 앞서 말했듯이 성곽의 규모도 거대한데다가 10만명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를 끼고 농성전을 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어서 서울 성곽을 사이로 공성전이 벌어진 적도 없고 그런 시도도 없었다. 심지어 이괄의 난에서 시가전이 아닌 무악재의 야전이 벌어졌다.

서울 성곽이 방어수단으로서 제 구실을 한 적이 딱 한 번 있는데, 바로 앞의 이괄의 난. 무악재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한 이괄군이 급히 도성으로 철수하려 하자 도성의 백성들이 서대문을 잠가버리고 못 들어오게 막았다(...) 사실 이괄도 남대문을 통해서 다시 입성하기는 했다. 하지만 방어능력 제로인 성의 비무장 민간인들을 상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하릴없이 남대문까지 우회하고, 게다가 보복조치조차 못 한 채 털레털레 도망간데서 이괄군의 비참함을 잘 알 수 있다.

한양성벽이 표시된 관광지도

어차피 난공불락의 철옹성은 없다는 점에서 더 현명한 방어정책일 수도 있다. 고구려는 2번이나 수도가 털린 이후에 천도하면서 계획적인 축성으로 행정성과 방어성을 통합하여 더 견고한 평양성을 구축했지만 단 한번의 한타 인해 결국 나라가 멸망했으며, 고려의 경우 개경성을 수도 없이 개축하며 방어에 치중했지만 개경(현 개성특급시)은 허구한 날 털렸다.

4. 여담

조선 건국 이후 정종왕자의 난 때 혈육들과 공신들의 피를 너무 많이 보았다는 이유로 도읍을 잠시 개경으로 옮겼는데, 태종 집권 이후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지만 개경과 무악(신촌)신도시를 주장하던 신하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전기의 관료층은 거의 대부분 구 고려의 관료층이다. 자신들의 기반인 개성을 버리고 신도시로 옮겨가는게 달가울 리가 없는 것. 게다가 천문과 풍수를 맡아보던 서운관 관리들도 거의 만장일치로(!) 개경을 밀었다. 위의 이유도 있을 뿐더러 이들에게는 다른 사람도 아닌 도선 대사가 점지해준 길지인 개경을 두고 풍수지리 따위 쌩까고 만든 도시인 한양으로 천거하는 게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한양이 수도가 되면, 자신들의 입지도 조금씩 줄어들 게 뻔하다.

무악을 민 것은 태종의 최측근이었던 하륜. 하륜은 무악 신도시의 열성 지지파였다. 이유는 이미 이전에도 주장한 적이 있어서 관철시켜야 자기 입지가 더 강화되기 때문이다.[9]

하지만 강력한 왕권 정치를 지향한데다가 엄연히 유학자인 태종은 당연히 못마땅했다. 실록을 보면 개성을 뜨고 싶어하는 태조와 부소명당(송악)이 최고라는 서운관 관리들 사이의 입씨름이 지겨울 지경. 결국 태종은 "내가 종묘에 들어가서 엽전을 던져 볼 테니 그 결정에 따르라"라는 말과 함께 사촌 형님 완산부원군 이천우를 시켜 엽전을 던져 점을 치게 한다. 결과는 길(吉) 2 대 흉(凶) 1로 결과가 나와서 다시 한양으로 천도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인 실화다.#[10]

한성부 관아가 중부, 북부, 남부, 동부별로 건물이 따로 분포했었다. 마치 서울지역 검찰청서울중앙지검, 서울남부지검, 서울동부지검, 서울북부지검 이런 식으로 나뉘어진 것과 비슷. 한성부 중부 관아는 지금의 KT 광화문지사+주한미국대사관 건물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역사적 지명이 되었지만,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지방 소도시나 시골 노인들은 '서울'을 '한양/한성'이라 일컫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수도로서 한성의 역사가 500년 남짓인데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은 무려 1500명이었다고 한다. 1년에 3명씩 교체가 된 것. 주진형 전 한화증권 사장은 고위직을 짦은 임기로 돌려먹는 한국사회의 구태가 이미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사실 한성판윤 가지고 놀랄 것도 없이 삼도수군통제사 같은 건 3일만에 바뀌기도 한다.교지 받고 짐도 꾸리기 전에 다시 인사명령 이것도 다 경력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1. [1] 양(陽)은 강의 북쪽 지역, 산의 남쪽 지역에 붙이는 접미사로 한양은 한강의 북쪽을 의미한다. 다른 예로 낙수(洛水) 북쪽의 낙양이나 훈허(渾河)의 옛 이름 심수(瀋水) 북쪽의 심양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반대쪽은 음(陰)이라 하는데, 중국의 회음과 한국 산청군의 옛 이름인 산음(山陰)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럼 오늘날의 한강 이남 서울 지역은 한음(漢陰)?
  2. [2] 중국에도 한양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1926년까지는 한양현이라는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존재한 현재의 우한시 한양구에 해당한다. 지도로 보면 양쯔강 북쪽에 있어서 한양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듯 하나 한수(漢水)이북에 있다하여 한양이라고 한다. 그런데 명나라 때 물길이 바뀌어 현재는 한수(또는 한강) 남쪽에 있고, 한양의 초입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커우는 한양의 초입이 아닌 강 반대 쪽에 존재하게 된다. 이후로 한커우는 상해 다음으로 잘 사는 도시가 되었고 한양은 한커우에 합병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3. [3] 1668년의 하멜표류기에 조선사람들은 수도를 sior(서울)이라 부른다고 나온다.
  4. [4] 단, 경성이란 명칭은 조선시대에도 흔히 쓰였다. 다만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로서 쓰였지 공식 명칭은 아니었다. 즉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일반명사로서의 경성은 일제의 잔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경성이라 하면 북경의 별칭이다. 하지만 아예 기존 명칭을 없애고 고유명사화시켰다는 점에서는 일제가 잔재가 맞다고 볼 수 있다.
  5. [5] 이것 때문에 김포국제공항이 서울특별시에 있는 것이다.
  6. [6] 한성 성벽에서 그나마 지형이 험한 곳은 북악북쪽의 북악산과 인왕산 자락 정도이다. 나머지는 남산을 제외하면 사실상 완전한 평지였다. 이런 이유를 들어 숙종북한산성을 포함해 경기도 일대에 산성을 여기저기 만들고 청나라에는 외적방어용이라고 강변한다. 그래놓고 한양성곽은 잘만 개축했다. 실상은 강화도남한산성을 제외하곤 반란대비용이었을거란 견해도 있다.
  7. [7] 물론 후기에는 인구가 늘고, 제한이 느슨해지면서 민락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8. [8] 이와는 반대로 로마제국 후기에 건설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은 순수한 의미의 '방어'용이었다. 이 때는 로마 시 외곽 전체를 시벽(市壁)처럼 둘러싸는 형태였다.
  9. [9] 정작 태종조차도 무악에는 반대했다.
  10. [10] 태종 8권, 4년(1404 갑신/명 영락(永樂) 2년) 10월 6일(갑술)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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