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기본조약

  가입 후 15일이 지나야 편집 가능한 문서입니다.

언어별 공식 명칭

한국어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大韓民國과 日本國 間의 基本關係에 關한 條約)

일본어

日本国と大韓民国との間の基本関係に関する条約

영어

Treaty on Basic Relations between Japan and the Republic of Korea

1. 개요
2. 전문
2.1.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2.2. 청구권 협정
3. 체결 경위와 후속조치의 상세
3.1. 역사적 배경
3.2. 한국에서의 보상의 규모와 유사 사례
4. 법적문제
4.1. 순수 법적쟁점
4.1.1. 현재의 일본기업이 일제시대의 전범기업과 동일한 것인가?
4.1.2. 소멸시효의 문제
4.2. 일제지배가 불법인지 여부
4.2.1. 한일병합은 원천 무효인가? 이제는 무효인가?
4.2.2. 일제 지배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
4.3. 한일간의 합의 내용에 관한 문제
4.3.1. 모호하지 않다는 대법원 소수의견
4.3.2. 보충적 해석
4.3.2.1. 한일기본조약에서 차관 지급의 의미
4.3.2.2. 배상에서 불법행위 손해배상의 포함여부
4.4. 개인의 청구권 소멸 관련 문제
4.5. 한국 개인의 소권의 소멸 여부
4.6. 협정은 무효다?
5. 한일 양국 정부간의 입장 비교
5.1. 일본국정부의 입장
5.2. 한국 정부의 입장
5.3. 청구권에 대한 입장
6. 타국의 유사한 사례
6.1. 미국의 사례
6.2. 일본의 사례
6.3. 독일의 사례
6.3.1. 독일은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배상을 끝냈음에도 추가로 배상을 했다?
6.3.2. 독일은 재단을 만들어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법적 배상을 했다?
6.3.3. 독일 대법원의 개인 배상 기각 판결
6.3.4. 이탈리아의 배상 판결에 대처하는 독일의 자세
6.4. 여타 국가들의 사례
7. 문화재 협정
7.1. 문화재 문제
8. 비판
8.1. 3억 달러가 일본이 빌려준 차관이라는 주장
9. 중일공동성명과 비교
10. 한국 정부의 문서 공개 거부 논란
10.1. 한국 정부의 문서 완전 공개와 그 파장
10.2. 일본 정부의 문서 일부 공개와 근황
11. 합의의 이면
12. 관련 인물
12.1. 한국
12.2. 일본
13. 관련 정치적 사건
14. 바깥고리
15. 같이보기

1. 개요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약칭 한일기본조약은 1965년 국교 정상화와 전후 보상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한일기본조약으로 한국과 일본은 외교, 영사관계를 개설해 국교가 정상화되었으며, 청구권 문제가 해결됨과 동시에 경제협력관계가 시작되었다.

당시 제3공화국이었던 한국은 이 협정을 통해서 확보한 무상자금과 차관을 산업화를 위한 기간산업에 투자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시절의 실제 피해자에게는 대부분 전달되지 않았고 이후 한국 정부는 '위로금'의 형태로 피해자에게 보상하였다.

현재 한일기본조약에 대한 한일 정부 간의 (혹은 사법부 간의) 해석의 차이가 존재하여 한일 양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하의 인용은 원문 인용이기에, 명사 표기는 지금의 외래어 표기법/일본어와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2. 전문

2.1.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국민관계의 역사적 배경과, 선린관계와 주권상호존중의 원칙에 입각한 양국 관계의 정상화에 대한 상호 희망을 고려하며, 양국의 상호 복지와 공통 이익을 증진하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양국이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에 합당하게 긴밀히 협력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또한 1951.9.8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의 관계규정과 1948.12.12 국제연합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 제195호(III)을 상기하며, 본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여, 이에 다음과 같이 양국간의 전권위원을 임명하였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외무부장관 이동원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김동조

일본국

일본국 외무대신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다카스기 신이치(高杉晋一)

이들 전권위원은 그들의 전권위임장을 상호 제시하고 그것이 상호 타당하다고 인정한 후 다음의 제 조항에 합의하였다.

제1조 양 체약 당사국간에 외교 및 영사관계를 수립한다. 양 체약 당사국은 대사급 외교사절을 지체없이 교환한다. 양 체약 당사국은 또한 양국 정부에 의하여 합의되는 장소에 영사관을 설치한다.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제3조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연합 총회의 결정 제195호(III)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

제4조 (가) 양 체약 당사국은 양국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을 지침으로 한다.

(나) 양 체약 당사국은 양국의 상호의 복지와 공통의 이익을 증진함에 있어서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에 합당하게 협력한다.

제5조 양 체약 당사국은 양국의 무역, 해운 및 기타 통상상의 관계를 안정되고 우호적인 기초 위에 두기 위하여 조약 또는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교섭을 실행 가능한 한 조속히 시작한다.

제6조 양 체약 당사국은 민간항공 운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하여 실행 가능한 한 조속히 교섭을 시작한다.

제7조 본 조약은 비준되어야 한다. 비준서는 가능한 한 조속히 서울에서 교환한다.

본 조약은 비준서가 교환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이상의 증거로써 각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서명 날인한다.

1965년 6월 22일 동경에서 동등히 정본인 한국어, 일본어 및 영어로 2통을 작성하였다. 해석에 상위가 있을 경우에는 영어본에 따른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이동원 김동조

일본국을 위하여 椎名悅三郞 高杉晋一

2.2. 청구권 협정

대한민국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1965년 6월 22일 동경에서 서명

1965년 12월 18일 발효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및 양국 국민의 재산과 양국 및 양국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하고, 양국간의 경제협력을 증진할 것을 희망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제 1 조

1. 일본국은 대한민국에 대하여

(a) 현재에 있어서 1천8십억 일본 원(108,0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3억 아메리카합중국 불($ 300,000,000)과 동등한 일본 원의 가치를 가지는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을 본 협정의 효력발생일로부터 10년기간에 걸쳐 무상으로 제공한다. 매년의 생산물 및 용역의 제공은 현재에 있어서 1백8억 일본 원(10,8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3천만 아메리카합중국 불($ 30,000,000)과 동등한 일본 원의 액수를 한도로 하고 매년의 제공이 본 액수에 미달되었을 때에는 그 잔액은 차년 이후의 제공액에 가산된다. 단, 매년의 제공 한도액은 양 체약국 정부의 합의에 의하여 증액될 수 있다.

(b) 현재에 있어서 7백20억 일본 원(72,0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2억 아메리카합중국 불($ 200,000,000)과 동등한 일본원의 액수에 달하기까지의 장기 저리의 차관으로서, 대한민국 정부가 요청하고 또한 3의 규정에 근거하여 체결될 약정에 의하여 결정되는 사업의 실시에 필요한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을 대한민국이 조달하는데 있어 충당될 차관을 본 협정의 효력 발생 일로부터 10년 기간에 걸쳐 행한다. 본 차관은 일본국의 해외경제협력기금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것으로 하고, 일본국 정부는 동 기금이 본 차관을 매년 균등하게 이행할 수 있는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전기 제공 및 차관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유익한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2. 양 체약국 정부는 본조의 규정의 실시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권고를 행할 권한을 가지는 양 정부간의 협의기관으로서 양 정부의 대표자로 구성될 합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 양 체약국 정부는 본조의 규정의 실시를 위하여 필요한 약정을 체결한다.

제 2 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2. 본조의 규정은 다음의 것(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각기 체약국이 취한 특별조치의 대상이 된 것을 제외한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a) 일방체약국의 국민으로서 1947년 8월 15일부터 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사이에 타방체약국에 거주한 일이 있는 사람의 재산, 권리 및 이익

(b)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있어서의 통상의 접촉의 과정에 있어 취득되었고 또는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들어오게 된 것

3. 2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제 3 조

1. 본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양 체약국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한다.

2. 1의 규정에 의하여 해결할 수 없었던 분쟁은 어느 일방체약국의 정부가 타방체약국의 정부로부터 분쟁의 중재를 요청하는 공한을 접수한 날로부터 30일의 기간내에 각 체약국 정부가 임명하는 1인의 중재위원과 이와 같이 선정된 2인의 중재위원이 당해 기간 후의 30일의 기간내에 합의하는 제3의 중재위원 또는 당해 기간내에 이들 2인의 중재위원이 합의하는 제3국의 정부가 지명하는 제3의 중재위원과의 3인의 중재위원으로 구성되는 중재위원회에 결정을 위하여 회부한다. 단, 제3의 중재위원은 양 체약국중의 어느편의 국민이어서는 아니된다.

3. 어느 일방체약국의 정부가 당해 기간내에 중재위원을 임명하지 아니하였을 때, 또는 제3의 중재위원 또는 제3국에 대하여 당해 기간내에 합의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중재위원회는 양 체약국 정부가 각각 30일의 기간내에 선정하는 국가의 정부가 지명하는 각 1인의 중재위원과 이들 정부가 협의에 의하여 결정하는 제3국의 정부가 지명하는 제3의 중재위원으로 구성한다.

4. 양 체약국 정부는 본조의 규정에 의거한 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복한다.

제 4 조

본 협정은 비준되어야 한다. 비준서는 가능한 한 조속히 서울에서 교환한다. 본 협정은 비준서가 교환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하기 대표는 각자의 정부로부터 정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정에 서명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토오쿄오에서 동등히 정본인 한국어일본어로 본서 2통을 작성하였다.

대한민국을 위하여(서명) 이동원 김동조

일본국을 위하여(서명) 시이나 에쓰사부로오 다까스기 싱이찌

3. 체결 경위와 후속조치의 상세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미군정은 1945. 12. 6. 공포한 군정법령 제33호로 한국에 있는 일본재산을 국유와 사유를 막론하고 미군정청에 귀속시켰고, 이 일본재산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한 직후인 1948. 9. 20.에 발효한 「대한민국 정부 및 미국 정부간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에 의하여 한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한국내에 있는 일본재산에 대한 권리를 이양 받았다.

이후 미국 등을 포함한 연합국 48개국과 일본은 1951. 9. 8. 전후 배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해 1952. 4. 28. 발효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 4조

(a) 이 조항의 (b)의 규정에 따라, 제 2조에[1] 열거된 지역의 일본국 및 일본 국민의 재산의 처분과, 현재 그 지역을 통치하는 당국 및 그 주민(법인을 포함)에 대한 일본국 및 일본 국민의 청구권(채무를 포함)과, 일본국에서의 이들 당국 및 그 주민의 재산, 일본과 일본 국민에 대한 당국과 그 주민의 청구권(채무를 포함)의 처분은, 일본국과 이들 당국 간 특별협정의 주제로 한다.[2]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 4조에 의해,[3] 일본국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한국 정부와 재산과 청구권에 관한 특별약정 의무를 부담하였고,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1951년 말경부터 국교정상화와 전후 보상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논의는 1952. 2.15. 제1차 한일회담 본회의를 시작으로 총 8차례 진행되었고, 1965. 6. 22.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그 부속협정인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일명 청구권 협정)이 체결되었다.

청구권협정은 1965. 8. 14. 대한민국 국회에서 비준 동의되고 1965. 11. 12. 일본 중의원 및 1965. 12. 11. 일본 참의원에서 비준 동의된 후 그 무렵 양국에서 공포되었고, 양국이 1965. 12. 18. 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한국정부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지급되는 자금을 사용하기 위한 기본적 사항을 정하기 위하여 1966. 2. 19.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청구권자금법’이라 한다)을 제정하였고, 이어서 보상대상이 되는 대일 민간청구권의 정확한 증거와 자료를 수집함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기 위하여, 1971. 1. 19. 「대일 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청구권신고법에 따라 국민들로부터 대일청구권 신고를 접수 받은 후 실제 보상을 집행하기 위하여 1974. 12. 21.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1977. 6. 30.까지 총 83,519건에 대하여 총 91억 8,769만 3,000원의 보상금(무상 제공된 청구권자금 3억 달러의 약 9.7%에 해당한다)을 지급하였다.

일본정부는 1965. 12. 18.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일본국과 대한민국 간의 협정 제2조의 실시에 따른 대한민국 등의 재산권에 대한 조치 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주된 내용은 대한민국 또는 그 국민의 일본 또는 그 국민에 대한 채권 또는 담보권으로서 청구권협정 제2조의 재산, 이익에 해당하는 것을 청구권협정일인 1965. 6. 22. 소멸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후 한국 정부에서 2004. 3. 5.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적 진실을 밝힐 목적으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 '일제강점하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전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2005년 1월경 청구권협정과 관련한 일부 문서를 공개하였는데, 민관공동위원회에서는 2005년 8월 26일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간 재정적, 민사적 채권 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와 군대 등 일본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으며, 사할린 동포 문제와 원폭피해자 문제도 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라는 취지의 공식의견을 내었다.

  • 한일협상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의 법적 배상, 보상을 인정하지 않았음에 따라, "고통 받은 역사적 피해사실"에 근거하여 정치적 보상을 요구하였으며, 이러한 요구가 양국간 무상자금산정에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함.
  •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불은 개인재산권(보험, 예금 등),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 등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임.
  • 청구권협정은 청구권 각 항목별 금액결정이 아니라 정치협상을 통해 총액결정방식으로 타결되었기 때문에 각 항목별 수령금액을 추정하기 곤란하지만, 정부는 수령한 무상자금 중 상당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하여야 할 도의적인 책임이 있다고 판단됨.
  • 그러나 75년 우리 정부의 보상 당시 강제동원 부상자를 보호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도의적 차원에서 볼 때 피해자 보상이 불충분하였다고 볼 측면이 있음.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2006. 3. 9. 청구권보상법에 근거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불충분함을 인정하고 추가보상 방침을 밝힌 후, 2007. 12. 10.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 일제에 의하여 군인, 공무원, 노무자 등으로 국외로 강제동원되어 그 기간 중 또는 국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강제동원희생자'의 경우 1인당 2,000만 원의 위로금을 유족에게 지급
  • 국외로 강제동원되어 부상으로 장애를 입은 '강제동원희생자'의 경우 1인당 2,000만원 이하의 범위 안에서 장애 정도를 고려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금액을 위로금으로 지급
  • 강제동원희생자 중 생존자 또는 위 기간중 국외로 강제동원되었다가 국내로 돌아온 사람 중 강제동원희생자에 해당하지 못한 '강제동원생환자' 중 생존자가 치료나 보조장구 사용이 필요한 경우에 그 비용의 일부로서 연간 의료지원금 80만원을 지급
  • 위 기간중 국외로 강제동원되어 노무제공 등을 한 대가로 일본국 또는 일본기업 등으로부터 지급받을 수 있었던 급료 등을 지급받지 못한 '미수금피해자' 또는 그 유족에게 미수금피해자가 지급받을 수 있었던 미수금을 당시 일본 통화 1엔에 대하여 대한민국 통화 2,000원으로 환산하여 미수금 지원금을 지급

을 시행령으로 규정하였다. 추가로 2010. 3. 22에 사할린지역 강제동원피해자 등을 보상대상에 추가하였다.

3.1. 역사적 배경

박정희 정권 이전부터 식민지배 배상 자체는 논의가 되고 있었는데,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의무는 만국공법에도 없다고 배상을 일관되게 거부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에 남겨놓고 간 사유재산에 대한 역청구권을 주장했는데, 이는 SCAP가 추산하기로는 약 60억 불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즉 연합군도 60억 불이라는 가치를 산정하였으니, 서로 배상을 외치는 상황에서 외교가 단절된 한일 양국이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일본의 한국내 국유 사유 재산은 패전후 미국 군당국에 모두 압수되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의해 한국내 일본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당했으나 헤이그 육전규칙에도 점령군이 민간 자산을 처분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국가 소유의 국유 재산을 처분한 것은 유효하지만 민간의 사유 재산을 처분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으로 한국 정부는 배상해야 한다는 것. 결국 1957년, 청구권과 역청구권을 통틀어 양국이 동등하게 모든 청구권을 포기하자는 큰 틀의 합의를 내놓았을 뿐 보상금(배상금이 아니다!) 규모에 이견이 있어 합의는 평행점을 달렸다.

그러던 와중 5.16 군사정변으로 쿠데타에 성공하여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협정이 급물살을 타게 된다. 경제개발 등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문제가 매우 시급하였고, 이에 따라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였으나 문제는 이를 실행할 자금이 없었다. 당시 포스코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세계은행이 한국의 기간산업에 채산성이 없다는 판정을 내리는 바람에 자금 조달에 빨간불이 켜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한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지역 경제 블록의 형성을 기획하고 있었으며, 일본, 대한민국, 대만 간의 외교적 관계를 정상화하고 장기적으로는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들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소련중국 공산진영에 대한 포위망을 완성, 효과적으로 압박하고자 하였다. 이에 더하여, 미국은 추가로 한일 간에 강화조약을 통해 6.25 전쟁 이후로 본격화된 냉전에서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를 견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지리상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일본을, 공산주의 진영 국가들과 맞닿은 한국을 자신들의 진영으로 끌어들여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원래 미국은 1953년 조인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배경에서 볼 수 있듯, 일본까지를 이념적 방어선으로 삼고, 한국은 DMZ와 같이 충돌을 예방하는 지점으로서 삼는 대제재선언을 발표하려고 하였으나,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며 한국을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상황이 바뀐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미국의 계획이 맞물리며 보상금 논의가 진전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미국의 강한 압박에 당시 외환보유고의 약 50%에 달하는 금액을 경제 협력 목적으로 지불하였다.[4]

한일기본조약 타결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김종필

이러한 배경에서, 이번에는 양측이 주장하는 지급의 명목과 방법이 대립하였다. 5차 한일 예비회담 13차 회의에서 한국측은 '강제징용으로 피해를 입은 개인에 대한 보상'을 일본측에 요구하였는데, 이에 일본측은 '개인의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인지', '한국은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를 할 용의가 있는지' 등에 묻자, 한국측은 '나라로서 청구하는 것이며,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은 국내에서 조치할 성질의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가 보상을 유용할 것을 알고 뒤탈없이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하기 위하여 피해자를 찾아가 직접 보상금을 지급하길 원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이 전략적으로 만든 논리이고, 본래의 의도는 한국정부에 구체적인 조사를 행하게 하여 징용, 징병의 인원수 증거자료 등을 확보해 보상금액을 낮추기 위한 것이다. 예상하다시피 서류 등의 증거를 모두 확보하기 곤란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기 때문에 구두와 정황에 대한 증거는 일본이 트집잡을 경우 협상이 길어지고 보상금액이 낮아지기 때문.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애시당초 보상금을 유용할 생각으로 조약을 맺으려 했기에 "외교 정상화도 되지 않은 시점에 공관을 설치하고 관리가 드나드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5] 그 결과 지급에 대한 전권은 한국 정부가 가져간 채 김종필을 앞세워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보상이 어떻게 진행될지 안봐도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러다보니 국내 정치가 완벽히 정비되지 않아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기 어려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6] 전국 각지에서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이 서울특별시로 올라와 격렬 시위를 벌였다.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1964년 6월 3일의 시위, 이른바 6.3 항쟁이다.[7][8]

위안부 피해자, 일제에 강제징용된 사람들 등 많은 사람들이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부역 매국노라며 손가락질당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다. 때문에 야당에서 자금에 대해 알게 되고, 국회에서 법률을 통과시켜 정부가 신문기사를 통해 보상금 지급 신청을 모집할 때에도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기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해당 조약은 한일관계 정상화 및 한국 기간산업 육성에는 큰 역할을 발휘했으나, 일본의 과거사 청산에는 죽 쒀서 개 줬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후 위안부 문제 관련 시민단체들이 "우리에게 와야 할 보상금이 본래 만들어질 수 없었을 포항제철이 만들어지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고, 이를 통해 포항제철과 국민경제가 이처럼 성장했으니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일말의 보상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라고 요청했으나 포스코는 무대응과 쫓아내기로 일관, 포스코 명예회장에게 도움을 얻고자 만남을 요청했으나 이마저도 묵묵부답, 피해자들이 사무실까지 찾아갔으나 문전박대. 결국 소송으로 이어졌으나 패소하였다. 당시 판결문을 보면 법적 판단 이외에는 언급을 최대한 금기시하는 판결문 작성 관례로는 이례적으로 "포스코가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에게 어떠한 법적 의무도 없지만, 청구권자금으로 설립된 포스코가 적어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측면에서 강제징용이나 임금미지급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하여 나름대로의 노력을 다해야 마땅할 것이다."[9] 하는 판사의 의견이 들어갔다.[10]

2005년 한국 정부는 한일협정 문서를 일부 공개하였다. 1963년 3월 5일 쓰여진 ‘한국의 대일청구권 8개항목에 관한 양측 입장 대비표’ 문서에서는 정부가 징병·징용 피해자 103만 2,684명에 대해 총 3억 6,400만 달러의 피해보상금을 일본에 요구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서 국가가 막아놓았던 강제 징용 임금 문제 등을 일본에 요구할 최소한의 근거가 생겼다. 링크

미국 중앙정보국(CIA) 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가 한·일협정 체결과정에서 일본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수수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한일협정 보상금을 민주공화당 예산에 편입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본이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일본 기업을 시켜 뒤에서 뇌물을 갖다 바쳤다는 의혹 제기. 보고서에 따르면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본기업이 1965년까지 5년동안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600만달러를 지원했다고 주장했다. 링크1 링크2

결국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그나마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준거해 타국에 비해 불리한 입지를 가짐에도 더 큰 보상금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냉전의 최전선이라는 입지상 미국에게 있어 이념 면에서 우호국인 한국과 일본이 차후 자국을 방어하며, 동맹국으로서 함께 싸울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할 필요성이 있었고, 때문에 미국이 일본에게 한국을 대상으로 큰 금액의 보상을 시행하도록 압박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본 사회에서도 한일기본조약에 대해 반대여론이 꽤나 극심했는데, 이유는 반일여론이나 식민지배 관련주제가 쟁점이었던 한국 내의 반대여론과는 명확히 달랐다. 좌익계열이 주축이었던 일본 야권 세력은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을 놔두고 한국과 단독수교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미국을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으로 여기고 반전, 평화를 외치며 안보투쟁에 나섰던 학생운동, 시민운동 계열세력은 베트남전에 파병을 결정한 한국을 미국의 하수인, 용병이라며 경멸해 마지 않았기 때문이다.

3.2. 한국에서의 보상의 규모와 유사 사례

또한 일본 내에서 한국에 대한 비판 여론에 불을 지피는 사유 중 하나가 바로 보상의 규모다. 자민당의 우츠노미야 도쿠마 의원[11] 또한 다음과 같은 발언을 남겼다.

"이 조약은, 전제적으로 일본으로서는 양보하는 바가 지나치게 많고 무상 공여 외에, 한국에 부여하는 경제적 이익이 과다하며, 그로 인해 일본 국민이 치르는 희생이 너무 크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상 공여 3억 달러, 장기 저리의 차관 2억 달러, 이외의 민간 상업 차관 1억 달러까지 합한다면 모두 합해서 6억 달러 이상의 대략 금액은, 법적 근거가 있다고 인정되는 대일 청구권에서 보자면 부당한 거액이고, 한국 경제의 반제 능력에 비추어 보건대 극히 위험한, 전망이 없는 투자라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반대했다. (윤노 후쿠쥬, 한국 병합사 연구, p.57.)

1960년대~2010년대의 달러화 인플레이션은 약 750% 수준이므로 현재 기준으로는 60억 달러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외환보유고가 2018년 기준으로 4천억 달러 정도인 대한민국에서도 정부가 60억 달러 수준의 일방적인 이익을 보면 이는 언론에 연일 대서특필될 엄청난 규모다. 그런데 한국 경제의 인플레이션과 경제규모가 당시에 비해 750%만 성장하지 않았으며, 당시 대내외 신용도도 바닥이라 차관을 발행할 수도 없었으므로 당시 한국 경제에 8억 달러는 현재 가치로 60억 달러를 훨씬 상회하는 가치를 지닌다.

이는 현재 가치로 추산하는 게 쉽지 않으나, 당시 국가예산이 850억 원이었으므로 약 2년치 국가예산이 들어온 셈이며[12], 원화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적어도 수십조 원에서 크게는 수백조 원의 가치가 있었다 판단할 수 있다. 원화 인플레이션이 2018년 기준 약 41배임을 고려한 수치다. 여기에 더해 당시 한국에서는 외화를 벌어올 기간산업이 전무했던지라 파독 광부 및 간호사, 월남 파병 등 인적자원을 수출하여 외환보유고를 확보하는 각종 방법이 동원되었는데 이러한 사람들의 노동을 인년으로 환산하면 이를 통해서도 최대 수백조 원의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수백조 운운은 둘째치더라도 어쨌든 당시 대한민국에겐 엄청난 금액이었다는 것까지는 그 어떤 사람도 부정하지 않았고 우츠노미야 도쿠마 자민당 의원의 발언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대신 지원을 발판으로 선진국이 되었고 이를 통해 일본도 주요 무역국을 확보하여 상당한 이익을 얻었으니[13] ‘반제 능력에 비추어 전망이 어두운 지원’이라는 예상만큼은 빗나갔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일본 측도 전부를 달러로 제공한 것은 아니고, 차관을 지급한 뒤 이를 일본 기업이 한국에서 일하는 데 사용하게끔 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제공되었기에 일본의 부담이 생각보다는 크지 않았을 수 있다는 일각의 반박이 있다. 하지만 정확히는 한일 양국에 도움이 되는 형태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예를 들자면, 우선 세계은행이 채산성이 없다는 판정을 내려 설립에 빨간불이 들어온 포스코는 한일기본조약 보상금으로 설립되었으나, 대성한 이후에도 시민단체와 양금모 위안부 피해자가 요구한 도의적 책임을 등한시하다가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한일기본조약 차관으로 일본 기업에 용역을 구매하여 한국 기업과 공동으로 소양강댐 설계용역을 체결할 수 있었고, 건설 당시에도 국가가 차관으로 건설장비를 구매하여 현대건설에 대여해줄 수 있었다. 이 당시 축적한 기술과 양성된 기능공은 현대건설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현대자동차는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모델이자 대한민국 자동차공업 자립화의 신호탄인 포니를 미쓰비시 랜서의 FR 플랫폼 및 구동계를 갖고 와서 스킨 체인지하여 만들었고, 이후에도 여러 도움을 받다 2009년에 이르러서야 미쓰비시와 종속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즉 거의 모든 한국의 대기업들은 일본 기업들이 차관을 받고 한국에 재화와 용역을 제공해주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차관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설비와 중간재를 수입하였는데 주로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국은 설비를 갖춰 중간재를 수입한 뒤 완제품을 생산하여 외국에 수출하는 현대 대한민국의 기간산업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었다.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준거한 전쟁 당사국도 아닌 한국이 무상차관 3억, 유상차관 2억, 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약속받았고 결국 상업차관을 3억 달러까지 늘려 8억 달러라는 거금을 받았으면 달러든 엔화든 차관이든 상당히 큰 금액이 맞다! 외환보유고로 채워놓을 것도 아니고 어차피 결국 다 재화 사는데 써야 하는 게[14] 당시 한국의 현실이고, 당연히 6.25 전쟁 당시 부를 축적했던 것처럼 일본에게 상당부분 흘러들어가는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타 전쟁 피해국들과 한국의 보상 규모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1955년부터 1959년에 걸쳐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남베트남에 대해 보상하였고, 당시 인도네시아 국회에서 조약 비준이 부결되거나, 남베트남과 필리핀이 배상청구권을 포기하지 않는 등 여러 잡음이 있었으나 결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준거하여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배상의 규모는 필리핀 100만명, 베트남의 경우 200만명 이상, 인도네시아 또한 24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들이 받은 전쟁배상은 ① 필리핀[15]의 경우 무상 6여 억 달러, 상업차관 2억 5천만 달러 규모, ② 베트남[16]의 경우 무상차관 3,900만, 상업차관 910만 규모 ③ 인도네시아[17]의 경우 무상차관 2억 2,300만, 상업차관 4억, 무역채권 1억 7천 만 달러, ④ 미얀마[18] 무상지원 2억, 추가지원 1억 4천만 달러다. 규모를 놓고 볼 때 필리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국에 비해 훨씬 작은 규모의 금액이다.[19]

물론 대한민국이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생각하지 못할 수는 있으며 이는 분명 일리가 있다. 하지만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규정하는 법이 국제조약 어디에도 없음을 고려하면 냉전으로 인한 자본주의 진영 부흥을 위한 미국의 압박이였으며 지역,국가에 대한 지배를 어떠한 기준으로 불법으로 규정하는 국제조약이 없기 때문에 배상금이 아닌 대승적 차원의 경제지원금을 바탕으로 청구권 협정이 성사되었다. 과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인 연합국이 패전국인 독일베르사유 조약으로 과도한 전쟁배상[20][21]을 요구하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전적이 있음을 생각해보자. 다른 나라는 둘째치더라도 일본이 전쟁하면서 죽이거나 부순 미군 피해만 전부 배상하라 해도 일본은 파산했을 것이다. 피해에 걸맞는 배상을 받지 못한 건 한국만이 아니다. 그리고 제3자의 입장에서도 21세기의 대표적 선진국인 G7의 전원이 제국주의 침략 전력이 있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배 피해에 대해서는 정당한 통치였다는 둥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피해 사실 자체를 인정받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리고 제3자의 입장에서도 21세기의 대표적 선진국인 G7의 전원이 제국주의 침략 전력이 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배 피해에 대해서 그와 연관된 국제조약이 없어 전혀 불법이 아니라는 입장이며, 그러한 지배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국제조약이 현대에 체결된다고 가정하여도 그것을 소급적용하면 현존하는 지구상의 거의 모든 국가가 역사적으로 약소한 국가및 지역을 침략,강탈,지배등을 통해 통일되고 형성된 국가 혹은 그러한 국가의 후신이기 때문에 소급적용이 불가능하다.

보상과 배상은 양립이 불가능 하다는 것과 식민지배를 불법으로 제의하는 국제조약이 전혀 없다는 것도 무시한 한국 대법원의 입장은 보상이 이루어졌고 불법행위로 인한 개인에 대한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해괴한 주장으로 판결했다.

4. 법적문제

본격적 논의에 앞서 구분할 필요가 있는 부분부터 살펴보겠다.

현재 한일기본조약과 관련하여 '위안부'와 '강제징용'문제가 있다. 이 둘은 법적으로는 핵심쟁점이 차이가 있어서 구분이 되어야 한다. 가장 큰 차이점은 '강제징용' 문제는 1965년에 모두가 알던 문제이던 반면에, '위안부' 문제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위안부' 문제는 고려가 안된채로 한일기본조약이 맺어졌다는 점을 문제삼는 반면에, '강제징용'문제는 그러한 주장을 할 수가 없어서 보다 어려운 문제다.

또 한가지 많은 사람들을 낚는 부분은 2012. 5. 24 한국 대법원이 내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신일철주금에 대한 대한 판결의 내용이다. 이 판결은 얼핏보기에는 한국 일반 민사판례 같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국제법스러운 바탕을 두고 있다. 때문에 대부분의 법률가들이 대충 일반 민사판례 마냥 읽어서 오독하고는 한다. 그래서 국제법학자들은 그렇게 읽는게 아니라고 사람 만날 때 마다 지적하고는 있는데, 국제법이 워낙 법학계에서 안습일 정도로 극소수이다 보니까 답답해서 미칠려고 한다. 다만 대법원 판례 자체는 대법원이 의외로 국제법을 받아들일려고 노력한 점이 보여서 매우 신난 분위기라고 한다. 애초에 판례가 가뭄에 콩나듯 하는 분야랴...

4.1. 순수 법적쟁점

본 단락에서는 순수한 법적쟁점을 따로 모아서 정리한다. 본 쟁점들은 위안부 문제와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에서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쟁점들이었다.

일반인의 관심에서는 떨어져 있는 문제들인데,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피해자들이 여태까지 법원의 벽을 넘는데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해 왔었다. 이번 강제징용피해자 대법원 판결문에서도 이 부분에 관한 내용이 1/3은 족히 넘는다. 법적으로는 그 만큼 중요한 문제들이다.

4.1.1. 현재의 일본기업이 일제시대의 전범기업과 동일한 것인가?

법인격 동일성의 문제이다. 이전에 한일 법원은 모두 현재의 일본기업을 일제시대의 그 전범기업과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을 했었다.

전쟁동안 일제는 무분별하게 신용으로 거래를 했다. 줄 돈이 없으니 외상으로 처리한 것인데, 일제 정부뿐 아니라 기업들까지 줄줄이 이런식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끝나자 일본의 정부를 포함한 모든 기업의 채권이 복잡하게 얼킨 상황에서, 최종 지급자인 일본 정부는 어려운 상황에 있어 단체로 부실채권을 껴안고 망하게 생길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일본 의회는 '회사경리응급조치법'과 '기업재건정비법'이라고하여 기업으로 하여금 부채를 껴안은 채로 해산시켜서 부채를 모두 없애버리고, 동시에 같은 이름의 새로운 기업을 만들어서 해산된 기업의 인력과 핵심 영업재산을 그대로 인수한다는 과감한 법을 만들었다. 채권자들 입장에서는 하루 아침에 받을 돈이 사라진다는 것인데, 전후 부실채권 문제로 경제활동이 곤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 의회도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제 시대 전투기 만들던 미쓰비시는 위 전후의 일본법에 의해 소멸해버린 것이다. 지금의 미쓰비시는 법적으로 볼 때는 엄연히 다른 기업인 것이다. 피고는 일제시대 전범기업인데, 지금의 기업은 그 전범기업이 아니니까 청구의 상대방이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한국 대법원은 위 전후 일본의 '회사경리응급조치법'과 '기업재건정비법'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에 한국 법원에서는 적용될 수가 없다 하여 회사경리응급조치법과 기업재건정비법을 배제해 버렸다.

민사소송법 제217조(외국재판의 승인) ①외국법원의 확정판결 또는 이와 동일한 효력이 인정되는 재판(이하 "확정재판등"이라 한다)은 다음 각호의 요건을 모두 갖추어야 승인된다.

...

3. 그 확정재판등의 내용 및 소송절차에 비추어 그 확정재판등의 승인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지 아니할 것

한국 법원은 빚이 많은 회사들이 거의 같은 이름의 새로운 법인을 세우고, 영업자산을 헐값에 새로운 법인에 매각하고, 회사의 구성원들을 이동시켜버리는 방식으로 채무면탈하는 것을 막는 법리를 IMF 금융위기 즈음에 발전시켜왔다. 이에 따라서, 전쟁중 미쓰비시와 종전후 미쓰비시는 그 영업재산, 임원, 종업원을 실질적으로 승계하여 회사의 인적, 물적 구성에는 기본적인 변화가 없었으므로 실질적으로 같기 때문에 법인격이 동일하다고 봤다.

4.1.2. 소멸시효의 문제

일제전범기업이 주장한 항변사유다. 이 역시 이전 판례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다.

민법상 채권은 소멸시효가 10년이다.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 기산점은 불법행위시이다. 즉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청구권은 소멸시효는 늦어도 일본이 패전한 1945년 8월 15일 무렵부터는 진행되어 55년에는 소멸한 것이 된다. 다만, 몇가지 예외를 두고 있는데, 객관적으로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그 중에 하나이다.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문제에서 예외를 인정받기 정말 정말 어렵다. 일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서는 수준으로 인정을 안해준다.

그런데, 대법원은 민관공동위원회의 공식적 견해가 2005.8.26에 나올 때까지를 객관적 장애사유로 인정해버렸다. 왠일로 일반 상식에 부응하는 판단이었는데, 워낙 인정안하던 예외를 인정한 경우인지라 법률가 중에는 다소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종종있다. 물론 그렇다고 법원이 말도 안되는 판단을 한것은 아니다. 대법원의 판사가 아닌한 대부분의 법률가들은 평생 볼일도 적용할 일도 없는 것이다 보니까 나오는 푸념에 가깝다.

4.2. 일제지배가 불법인지 여부

원고측인 일제강제징용 피해자들은 과거 전범기업을 상대로 민법 제 751조 불법행위에 기한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민법 제5장 불법행위

제750조(불법행위의 내용)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제751조(재산 이외의 손해의 배상) ①타인의 신체, 자유 또는 명예를 해하거나 기타 정신상고통을 가한 자는 재산 이외의 손해에 대하여도 배상할 책임이 있다.

일제전범기업에 의한 강제징용 또는 그 과정에서 불법행위가 존재해야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만약에 피해를 줬더라도 합법적인 것이었다면 불법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4.2.1. 한일병합은 원천 무효인가? 이제는 무효인가?

논란의 대상이 되는 부분은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에서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부분이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조약이 '(체결 당시부터) 이미 무효', 즉 원천 무효였다는 입장을 편다. 원천 무효였다면 일제가 대한제국을 침탈하면서 단행한 일련의 조약들 자체가 그 당시부터 무효였으므로 일본의 한일병합은 불법행위가 된다.

일본 측에서는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고 경술국치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즉 제2차 한일협약 등의 협약이나 조약이 체결 당시에는 합법적이었으나,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조선반도에 관한 모든 권리, 권원의 포기를 명시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발효 시인 1952년 4월 21일부터 효력을 상실(무효)했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한일기본조약 체결 시점인 1965년에는 '(이제는) 이미 무효'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국권 침탈의 연장선상이자 최종 도착지인 한일병합조약은 무효가 아니므로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는 합법적인 것이 된다.

당연히 식민지배 자체가 불법인 경우와 합법인 경우는 청구권의 규모는 물론 식민지배에 대해 법적으로 사죄(謝罪) 유무 등 큰 차이가 존재한다.[22]

한국 측은 조약에 대한제국 시절 조약이 '무효'라는 표기를 반드시 하길 원했는데, 일본 측이 받아들이기 곤란해할 것을 염려한 유진오는 처음부터 이 문제를 법적으로 완결하는 것이 아닌 정치적 타결만을 목적으로 하였고, 구체적 해석에 대한 합의 없이 단순히 '무효'임을 표기할 것을 주장했다. 일본 측은 이에 '이미'라는 표기를 덧붙일 것을 제안하였다.[23] 결국 차관이 급했던 한국이 양보함으로서 '이미 무효'라는 표기에 합의하게 되었다.

이 부분은 일본이 한일기본조약 배상금을 독립 축하금이라는 명분으로 제공한 이유가 된다.

따라서 식민지배 불법성의 판단은 한일가본조약이 아니라 "과거 을사조약에서 외무대신 등의 장관급 인사가 과연 일개 신분으로서 외국과의 독자적인 조약 등을 체결할 권리가 있었고 당시 한국의 주권이 완전한 독립국의 지위를 국제적으로 상실되지 아니하였으며 인정받는 상태였는가"가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4.2.2. 일제 지배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

대법원은 1962년 개정된 헌법전문을 근거로 일제지배는 헌법상 불법이라 판단했다.[24][25]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이래로 몇 개정을 제외하고는 일관되게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3·1운동을 통해서 시작되었음을 선언하고 있어, 일제의 한반도 통치는 대한민국 헌법상 불법이다. 따라서 일제의 징용령 또한 일제의 법을 근거로 하여도 불법이 된다. 일제의 한반도 지배와 그 침략을 위한 강제징용은 모두 불법행위이고, 이로 인하여 동원되었던 한국의 강제징용자들은 그로 인해 정신적 손해를 입었기 때문에 일본정부와 해당기업에 청구권이 발생한다.

법적으로 볼 때 청구권이 발생한다는 것은 시작점에 불과한데, 이미 청구권이 정리되었다는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본 판결에 따르면 한국 강제징용 피해자들한테 정신적 손해배상 청구권이 존재했지만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지금은 없어졌다고 주장한다.

4.3. 한일간의 합의 내용에 관한 문제

한일청구권협정의 모호함으로 해석이 갈리게 되어 인하여 재판에서 쟁점이 되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법을 해석하는 원칙은, 일단 쓰여진대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만약에 모호하면 쓰여진 당시 상황을 봐서 그걸 쓴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썼는지 알아봐서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국가간의 조약을 해석할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국가간의 조약이 맺어지면 국회에서 비준을 하게 되고, 비준하게 되면 조약은 그 나라의 법이 된다. 한일기본조약도 한국-일본 간의 국제적인 조약이지만 동시에 한국과 일본의 법이기도 하기 때문에 대한민국 법원이 위 조약을 법적으로 해석을 하게 된다.

조약의 해석과 관련하여 대한민국은 1969년 체결된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Vienna Convention on the Law of Treaties)’을 1980. 1. 27. 발효했기 때문에 이 시점부터는 엄연한 법으로 따라야만 한다.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 제3절 조약의 해석

제31조 (해석의 일반규칙)

① 조약은 조약문의 문맥 및 조약의 대상과 목적으로 보아, 그 조약의 문면에 부여되는 통상적 의미에 따라 성실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

제32조 (해석의 보충적 수단)

제31조의 적용으로부터 나오는 의미를 확인하기 위하여, 또는 제31조에 따라 해석하면 다음과 같이 되는 경우에 그 의미를 결정하기 위하여, 조약의 교섭 기록 및 그 체결시의 사정을 포함한 해석의 보충적 수단에 의존할 수 있다.

(a) 의미가 모호해지거나 또는 애매하게 되는 경우', 또는

(b) 명백히 불투명하거나 또는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

비엔나협약의 일반해석원칙에 따르면 조약을 해석할 때는 문제가 되는 조약 자체뿐만아니라 그 문제가 되는 조약에서 언급된 문서를 같이 놓고 해석해야 한다. 때문에 한국법원은 "한일기본조약"과 거기서 언급된 일본이 미국과 전쟁 직후 맺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같이 놓고 해석했다.

한일청구권협정 제 2 조

1. 양 체약국은 ...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

(a) 이 조항의 (b)의 규정에 따라, 일본의 부동산 및 제2항에 언급된 지역의 일본 국민들의 자산 처분 문제와, 현재 그 지역들을 통치하고 있는 당국자들과 그곳의 (법인을 비롯한) 주민들에 대한 (채무를 비롯한) 그들의 청구권들, 그리고 그러한 당국자들과 주민들의 부동산의 처분과 일본과 그 국민들에 대한 그러한 당국자들과 주민들의 채무를 비롯한 청구권들의 처분은 일본과 그 당국자들 간에 특별한 협의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일본에 있는, 그 당국이나 거류민의 재산의 처분과, 일본과 일본국민을 상대로 하는 그 당국과 거류민의 청구권(부채를 포함한)의 처분은 일본과 그 당국간의 별도 협정의 주제가 될 것이다.

판결에서 승패가 사실상 갈린 가장 중요한 쟁점이다. 온갖 사실관계를 따져야 하고, 모호한 영역이 갈수록 늘어나기 때문에 결국은 일본측에 불리해진다. 한국측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청구권 주장을 방어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일본측 논리가 모호한 점이 있다는 것만 드러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비엔나 협약에 따라서 해석함에도 불구하고 한국법원은 한일청구권협정이 모호하다고 봤다. 모호성 문제가 된 부분은 2곳이다.

한일청구권협정 제 2 조

1. 양 체약국은 ...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3.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위와 같은 문구가 매우 명확하고 흠잡을 데 없어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법적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법적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객관적 해석이 안되기 때문이다.

손해배상 청구권은 청구권의 일종이기 때문에 피고측은 "당연히"(법률용어다)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한국 피해자측 변호인은 "당연히" 포함된다고는 볼 수 없다고 했다.

법적 관점에서는 위 조약의 "모든 청구권"에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권"이 포함되는지가 모호하다. 위 조약은 관계인들의 권리를 포기 또는 제약하는 내용이다. 이런 합의는 애초에 내용이 확실한게 아니면 인정 안하는게 원칙이다. 만약에 이게 허용되면 사채업자들이 대충 모호하게 계약서쓰고 나중에 멋대로 확장해서 주장해도 판사가 들어줘야한다는 부조리한 결과가 나온다.

때문에 "모든" 이란 표현은 최악의 표현이다. 구체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더하자면 청구권은 법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으로, 안 들어가는 데가 없다(민사한정). 보통 청구권이라고 하면 돈 달라고 하거나 재산 돌려달라고 하거나 그 정도밖에 안 떠오르겠지만, 법에서 청구권이란 남에게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가령 인지청구권이라는 게 있는데, 사생아가 친아버지한테 가서 나를 아들로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방해제거청구권이란 것도 있다. 이건 가령 내 땅에 뜬금없이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건물을 짓고 있을 때 나가라고 하는 것이다.

한일청구권협정을 문언 그대로 해석하면 위에 예로 든 청구권도 행사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문제는 법적으로는 그 성질상 포기하는 게 불가능한 청구권도 여럿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편 문제가 된 부분은 청구권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이란 문구인데, 사실 법률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표현이다. 청구권이 단순 소멸한다는 뜻인지, 채무를 국가가 대신 인수라도 하겠다는 것인지, 앞으로 법적으로 소송을 걸지 않겠다는 합의문인지 명확하지 않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14조(b)

...연합국은 모든 보상청구, 연합국과 그 국민의 배상청구 및 군의 점령비용에 관한 청구를 모두 포기한다.

보다시피 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과 연합국 간의 조약에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3개의 청구권을 지정해서 "포기"한다는 법적표현을 명확히 해주고 있다.

평화 조약 제77조

4독일 및 점령국들의 이탈리아 및 이탈리아 국민의 이익을 위한 이들 및 기타의 어떤 규정을 해칠 것 없이 이탈리아는 1945.5.8 현재의 독일 및 독일 국민에 대한 일체의 미해결 청구권을 자국을 위해 및 이탈리아 국민을 위해 포기한다. ... 이 포기는 전쟁 중에 체결된 협정에 관한 금전 채권, 정부 간의 일체의 청구권 및 전쟁 중에 생긴 손실 또는 손해에 대한 일체의 청구권을 포함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독일 이탈리아의 전후 조약에서도 "포기", "금전채권", "전쟁 중에 생긴 손실 또는 손해에 대한 일체의 청구권" 과 같은 정확한 법률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다른 조약들과 비교해봐도 한일청구권협정은 매우 특출나게 비법률적으로 쓰여진 조약이다. 조약에 참여하였던 실무진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몰라도 한일 모두 법적 지식이 부족한 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국 대법원은 구체적으로 설시하고 있지 않지만, 조약 자체만으로는 해석하기에는 모호하다며 13명중 11명이 보충적해석 방법으로 넘어갔다.

이와 같은 모호성에 대해 피고측 변호인은 조약 문구가 다소 법적인 측면에서 모호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당사자들이 법률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라 행정 관료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모호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보상과 배상을 구분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원고측이 불법배상책임이 포함되지 않는 근거로 내민 것 중에 "배상"이란 문구가 조약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법에서 배상은 불법행위를 전제로 한 지급을 말하고, 보상은 합법행위를 전제로 한다. 이 구분은 법에서 매우 확고하다. 따라서 만약에 조약에 배상이란 단어가 나왔다면 한국은 불법행위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할 수가 없는데, 조약에는 "보상"만 등장한다. 이 부분을 놓고 일본측 변호인의 주장은 조약을 작성한 당사자들이 법을 잘 모른 게 분명하니까 법률가가 아닌 일반인 관점에서 조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피고측 변호인의 주장은 보통 민사에서 양측이 일반인일 때 가능하다. 정부는 당연히 법률 전문가라고 기대가 되고, 법과 무관하지 않은 외무성 관료가 조잡한 조약을 작성했다는 주장은 법에서 말하는 객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보상"과 "배상"이란 용어는 공교롭게도 한자로도 일본과 한국이 똑같은데, 한국 민법은 일본 법학자들이 조선식민지에 자신들이 만든 일본법을 이식한 게 기원이기 때문이다. 나라 하나를 법학 실험용 샘플로 쓴 셈인데 좌우지간 그래서 한국 민법은 일본민법과 거의 같다. 한 가지 사실은 한국이든 일본이든 법학과 1학년만 되어도 보상과 배상을 헷갈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일본 관료가 보상과 배상을 헷갈려 했다는 것은 일본법체계와 판례로 공부한 나이든 한국 법관들에게는 곱게 볼 수가 없는 핑계다.

4.3.1. 모호하지 않다는 대법원 소수의견

한국 대법관 13명 중 2명은 나머지 11명과는 달리 일본 측 주장대로 한일청구권협정의 내용이 모호하지 않아 문언적 해석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조약의 당사자들이 비법률가였으므로, 보상과 배상 개념의 구분도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문언적 해석을 따를 경우 피고 주장대로 불법행위 손해배상 청구권은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서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축 청구는 법적으로 당연히 이유가 없게 된다. 문언적 해석은 법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만큼 전혀 무리한 시각이 아니다. 때문에 소수의견을 낸 2명의 법관이 딱히 친일적이라서 이러한 판단을 내렸다기보다는 그냥 그들의 법학안에서의 신념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에는 문제가 있는데, 이를 따르면 순환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위는 조약 당사자가 비법률가들이었다는 보충적해석을 해야 가능한 해석이다. 즉, 문언적해석이 불가능해서 보충적해석을 했다가, 다시 문언적해석으로 돌아간 다음 결론 내고 있다.

"일본 정부가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청구권협정을 체결한 것이 과연 옳았는지 등을 포함하여 청구권협정의 역사적 평가에 관하여 아직도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청구권협정이 헌법이나 국제법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볼 것이 아니라면 그 내용이 좋든 싫든 그 문언과 내용에 따라 지켜야 하는 것이다.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게 됨으로써 피해를 입은 국민에게 지금이라도 국가는 정당한 보상을 하여야 한다. 대한민국이 이러한 피해국민에 대하여 지는 책임은 법적 책임이지 이를 단순히 인도적, 시혜적 조치로 볼 수는 없다.

...

이상과 같은 이유로 다수의견에 반대한다."

4.3.2. 보충적 해석

한일기본조약의 그 내용이 모호하면 단순히 글자 그대로 읽어서 해석할 수가 없다. 때문에 체결까지의 과정, 상황 등 사정 종합하여 당사자들이 무슨 의사를 가지고 그러한 조약을 체결했는지 알아보는 보충적 해석의 단계로 넘어간다.

한국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주장은 한일기본조약의 합의 내용에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포함이 되지 않아서 온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이에 관한 명시적, 묵시적 합의 그 어느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한국측의 증거제시와 온갖 주장이 집중되어 있는 부분인데, 양이 정말로 많다.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1. 한일기본조약이 바탕으로 삼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불법행위에 대한 언급이 부존재한다.

2. 한일기본조약 이전까지의 협상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은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대해 합치를 본 적이 없다.

한국 측은 한일청구권협정을 '한일청구권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양국간 재정적, 민사적 채권, 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일청구권협정 제 2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 4조

(a) 이 조항의 (b)의 규정에 따라, 제 2조에 열거된 지역의 일본국 및 일본 국민의 재산의 처분과, 현재 그 지역을 통치하는 당국 및 그 주민(법인을 포함)[26]에 대한 일본국 및 일본 국민의 청구권(채무를 포함)과, 일본국에서의 이들 당국 및 그 주민의 재산, 일본과 일본 국민에 대한 당국과 그 주민의 청구권(채무를 포함)의 처분은, 일본국과 이들 당국 간 특별협정의 주제로 한다.[27]

위와 같은 주장은 문제가 있는데, 한 가지는 한일청구권협정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범위에 제한되는 조약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범위를 포함하는 조약이다. 한일청구권협정은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한다는 문구가 있다. 그러니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뭐라 나와있든 한일청구권협정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제약을 받을 일은 없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는 재정적 채권, 채무 관계만을 다루는 게 아니다. 위에 4조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당국과 주민의 청구권, 즉 한국과 한국인의 청구권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재정적 채권이나 채무는 그 청구권에 포함되는 '일부'일 뿐이다. 결국 일본 측의 주장대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4조만 따져봐도 개인의 청구권은 포함된다.

한편 대한민국 대법원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4조(a)의 범위를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문언에서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14조에는 '일본은 전쟁 중에 발생한 손해 및 고통에 대하여 연합국에 배상을 지불하여야 함을 승인한다.'고 되어있는 반면, 한국은 승전국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으므로 손해 및 고통에 대한 배상청구권도 인정받지 못했다. 한일회담 당시 한국 정부가 발간한 한일회담백서에도 한국은 승전국이 향유하는 손해 및 고통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인정받지 못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 4조가 한일간 청구권 문제의 기초이며, 제 4조에 의한 대일청구권에 배상청구권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명시하였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일 청구권 협정 합의의사록(Ⅰ)에서는 구체적으로 청구권의 범주를 한일회담시 한국의 대일청구요강 8개 항목에 속하는 것으로 하기로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일회담 당시 한국의 대일청구요강 8개 항목은 다음과 같다.

⑴ 조선은행을 통해 반출해간 지금, 지은의 반환청구

⑵ 1945.8.9 현재 일본정부가 조선총독부에 지고 있는 채무 변제 청구

⑶ 1945.8.9 이후 한국으로부터 이체 또는 송금된 금품의 반환 요구

⑷ 1945.8.9 현재 한국에 본사, 본점 또는 주된 사무소가 있던 법인의 재일 재산의 반환청구

⑸ 한국법인 또는 한국자연인의 일본국 또는 일본국민에 대한 일본 국채, 공채, 일본 은행권,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 청구

⑹ 한국인(자연인, 법인)의 일본정부 또는 일본인에 대한 개별적 권리행사에 관한 항목

⑺ 전기 제재산 또는 청구권에서 발생한 법정 과실의 반환 청구

⑻ 전기한 제재산과 청구권의 반환 및 결재는 협정성립 후 즉시 개시하여 6개월 이내 종료할 것

모든 항목은 민사적, 재정적 청구권을 다루고 있으며, 다만 5항에 '피징용 한국인의 기타 청구권'에 강제동원 등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이 포함될 여지는 있어 보인다.

그러나 대법원은 여기에 불법행위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8개 항목 모두 재산상 관계를 다루고 있고, 어디에도 불법성을 전제로 하는 내용이 없으므로 언급되지 않은 기타 청구권에는 불법행위에 관한 청구권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석하였다.

한일기본조약 2조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해결된 것으로 한다'고 적혀있으나, 대법원은 이 또한 불법행위에 관한 청구권은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청구권 협정문이나 기타 부속 서류 어디에도 일제의 불법행위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점을 볼 때 특별히 제 4조(a)의 범주를 벗어나는 청구권을 인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4.3.2.1. 한일기본조약에서 차관 지급의 의미

만약에 배상금으로서 지급되었다면, 지급이 완료된 것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청구권이 만족을 얻어서 소멸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돈 받은 것은 사실이나, 배상금이 아니었다.'라는 재항변이다. 해당 조약은 분명 배상의 성격을 띄고 있으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배상은 "불법 행위로 인한 피해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의미하며 보상은 "불법이 아닌 행위로 인한 피해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의미한다. 일본은 국가적 차원에서 한일합병이 도덕적 과오임은 인정하고는 있으나 법리적으로 1910년 이후 조선인들은 일본 국민으로 분류되었기에 자국 내에서 벌어진 일로 인식하고 있다. 즉 한일합병 이후 발생한 자국민의 피해에 대한 책임만을 가질 뿐 한일합병조약 자체가 불법이었으며 식민지배까지 배상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일본 측은 "불법 행위가 없었으니 '배상'할 건 없고 '보상'은 하겠다"는 태도였다. 전술한 것처럼 미국의 의향이 강하게 들어간 상황이라 조약을 성립해야 했지만, 배상 규모 확대, 배상금 지급 주체 등 여러 부분에서 양보를 한 일본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박정희 또한 정권의 기반이 미약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기간산업을 일으킬 자금이 급하게 필요했고, 이미 많은 양보를 받아낸 상황에서 더 밀어붙이다간 조약 체결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으므로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지급하는 것에 동의하고 조약을 체결한다.

한일 양국은 각자 자국 국민들에게 설명하게 좋게끔 입맛대로 이 조약을 해석하였으나 변하지 않는 두 가지 사실이 '청구권 문제의 해결'과 '일본의 자금 지원'이다. 때문에 한국 입장에서는 일본에게 일제 시절의 전쟁범죄에 대한 배상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일본은 독립축하금을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대승적 차원에서 지급했다고 설명한 것이다.

2018년 대한민국 대법원은 식민지배 행위를 불법으로 보고[28] 배상을 하라고 판결하였고 이와 관련해서 양국 간에 논란이 재발되었다.

대법원에서 피고 일본기업은 한국이 제1한일회담에서 말한 "보상금"이 배상금을 포함한다는 주장을 했다. 문언상으로는 보상금이지만 한일 외교대표자들은 둘다 뭉뚱그려서 이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 나와있듯이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3.2.2. 배상에서 불법행위 손해배상의 포함여부

한국 강제징용 피해자측의 주장은, 한국이 제1차 한일회담에서 요구한 금액과 비교하여 일본이 지급한 금액이 턱없이 낮으므로,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은 한일기본조약에 포함이 되지 않은 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한국이 배상금을 받은 것이 사실일 수 있으나 여기에 불법행위 손해배상은 포함되지 않았다"라는 주장이다.

한국 정부의 대일배상요구조서에서는 금융부문에서 일제의 자금 수탈 규모는 약 174억 3천만 엔이며 물자 수탈 규모는 약 93억 엔으로 추산하였다.##2

일제의 자금 수탈 > 금융 부문

일본계 유가증권액 : 7,435,103

대출금 : 847,433

대일 환거래 잔고 : 3,020,660

보험금 : 467,336

기타 미수금 : 893,245

체신관계 유출액 : 1,868,660

총계 : 17,429,362(단위 : 천 엔)

일제의 물자수탈

농산물 > 면화 공출액 : 984,027

축산물 > 우피 공출액 : 33,659,920

축산물 > 축우 공출액 : 203,544,760

축산물 > 군수용 건초 공출액 : 39,145,701

임산물 : 493,057,029

기타 > 전쟁으로 인한 물적 피해액 : 8,430,136,612

기타 > 유기 공출액 : 89,684,635

합계 : 9,290,212,685

사실 한국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청구권 문제를 해소하였으므로 이 수치는 실질적 배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나, 이 조약으로 한국 정부가 받은 배상이 적합하였는지를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당시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는 자료로는 사용할 수 있다. 이 자료를 근거로 한국의 민족주의 우파와 국내 진보 역사 학계에서는 일본의 무상 3억 달러 및 5억 달러 차관 지원이 식민지 수탈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작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이는 통계 자체가 신뢰성을 담보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우선 통계 산정에 한국과 일본 이외의 제3국이 산정에 참여하지 않은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반대로 일제가 조선에 들여왔으며 GHQ가 불하한 60억 불에 달하는 자산 규모의 경우, 연합군 각국이 참여한 GHQ에서 직접 산정한 규모임을 고려하였을 때 당연히 신빙성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일본에서도 60억 불은 터무니없이 적게 산정된 규모라 주장하지만, 애초에 이해당사자가 주장하는 주장은 편향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대내외적으로 60억 불로 보는 것인데 한국의 주장에는 이러한 제3자의 보증이 없는 상황. 또한 35년에 걸친 식민지배 피해를 산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를 고려하였을 때 갓 정부를 수립한 시기에 이를 신빙성을 담보할 수 없음을 고려하면 당연히 20세기 후반~21세기 해당 자료를 보강하는 추가 조사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민족문제연구소의 일부 조사를 제외하면 별다른 후속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후속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수탈 규모랑 상관없이 청구권 문제가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일배상요구조서는 신빙성과 별개로 그 자체로서 국민의 기본권이나 주요 통치구조 등에 전혀 영향을 줄 수 없다. 때문에 어디까지나 참고로 보는 편이 좋다.

4.4. 개인의 청구권 소멸 관련 문제

한일청구권협정 제 2 조

3.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협정의 효과에 관한 문제이다.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의 의미가 과연 청구권의 "소멸"을 의미하는지 여부다. "한국인에게 청구권은 있었지만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소멸하였다"는 항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멸하지 않는다. 위 협정은 분명히 청구권에 관하여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라고 적시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이 말이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것과 별 다를 게 없는 것으로 읽히지만 차이가 있다.

평상시에, 그러니까 일제강제징용 피해자가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일본과 전범기업이 이것을 무시하는 상황에서는 청구권이 "소멸"하는 것과 "주장할 수 없는 것"은 현실적으로 못 받는 것은 똑같기 때문에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만약에 일본이나 전범기업이 갑자기 덜컥 손해배상을 해줬다가 갑자기 또 다음날 마음이 바뀌어서 돌려달라고 할 때 청구권이 "소멸"했다면 돈 받았던 강제징용 피해자는 고스란히 돈을 다시 뱉어내야만 하는데, 청구권의 반대말은 "부당이득"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단순히 청구권을 "주장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후에 문제가 되는데, 만약에 청구권이 소멸한다고 한다면, 국가가 조약을 통해서 국민의 청구권을 멋대로 소멸시켜버렸다는 것이 된다. 때문에 그로 인해서 국민이 받은 피해에 대해서 국가가 보상해야 하는 책임이 발생한다. 즉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을 대신해서 한국 정부가 보상금을 줘야 한다.

이 문제는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는데, 이것을 주장해야 할 일본이 주장한 적이 없으니까. 일본은 처음부터 청구권이 소멸하는 것이 아닌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일본은 청구권이 소멸된다고 할 때 자국민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2018년 한국 대법원에서 강제 징용공들이 개인 청구권이 남아있다고 판결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설명회를 열어 국제법위반이라며 일본 기업들이 보상 혹은 배상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며,외무상은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국제사회에 대한 도전”이며 “폭거”라며 강하게 반발했다.게다가 강제 노동 자체를 부정하며 징용공이라는 표현 대신 ‘조선반도(한반도) 출신 노동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이들은 강제 노동이 아닌 자원해서 노동하러 왔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말했다. 국내의 국제법 전문가 사이에서도 외교로 개인 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입장과 국제법상 외교적 해결이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없다는 입장이 갈린다. 당연히 일본에서도 입장이 다르다. 이에 대해 후자의 입장을 가진 일본인 변호사 100명은 일본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문제의 본질을 흔들고 있다고 성명을 냈다. # 기사에서 인터뷰한 변호사 한 명에 따르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본이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일본 정부는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으나 외국인 피해자는 이를 행사할 권리(외교적 보호권)을 잃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 나온 일본인 변호사에 따르면 “최근 국제인권법 흐름은 우선 국내 재판소에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보장받지 못했을 경우에는 국제인권재판소 등을 통해서 구제받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2018년 11월 14일 고노 다로 외무상은 일본 외무위에서 공식적으로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는다고 발언하였다.# 하지만 한일기본권협정은 한국정부가 개인에게 보상하기로 약속한 협정이며, 한국정부가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

4.5. 한국 개인의 소권의 소멸 여부

그렇다면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문제된다. 이 부분은 의외로 큰 쟁점이 되었는데 가능한 해석은 크게 2가지이다.

첫째는 "소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소권이란 자신의 청구권을 가지고 법원에다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피해자는 자신의 청구권을 가지고 법원에서 소송을 제기해서 승소하면, 그 판결문을 가지고 강제집행을 통해서 가해자에게서 돈을 받는다. 즉 소권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 소송을 제기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만약에 소를 제기한다고 신청해도 법원에서 각하해버린다.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니 변론도 없고, 판결도 없으며, 강제집행도 당연히 없고, 돈도 받을 수 없다. 일반인이 가장 먼저 떠올릴 만한 해석이다. 법률가들도 별반 다를 바 없어서 강제징용 판결에서 대한민국 대법관 13명중 10명이 택했다.

둘째는 "외교적 보호권 한정 포기"하다는 해석이다. 국제법상 개념으로 좀 복잡한 말인데, 피해자의 나라가 가해자 나라의 정부를 상대로 피해자를 대신해서 소송을 걸거나, 외교적 수단을 동원한다든가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피해자가 혼자 알아서 가해자 나라에다가 소송걸고 하는 것은 막지 않는다. 언뜻 조약의 문언과 맞지 않는 이상한 해석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유력한 해석 방법인 이유는 바로 일본정부가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왜 "외교적 보호권 한정 포기"라는 국제법이론을 끌어다 쓰는 독특한 해석을 고집해 왔던 것일까? 상식적으로 일본에게 불리해 보이는 해석이다. 청구권을 행사 못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당연히 아예 청구권을 없애버리는 게 더 확실한 방법이고, 외교적 보호권 한정 주장 못한다는 것보다는 모든 주장을 못한다고 하는 것이 가해자 입장에서 유리하다.

사실 이 문제는 일본에게 한일기본조약은 한국의 손해배상 요구를 봉쇄하는 요구뿐만아니라 자국민인 일본인이 일본정부에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것을 봉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전쟁 동안 일본 밖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연합국에 의해서 그 재산을 빼앗겼다. 손해가 발생한 것이다.

전후에 일본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한일기본조약 등을 체결하고 자국민에게 "일본정부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손해배상 책임이 없으니 소멸하지 않은 청구권 가지고 당사자인 대한민국 정부에다가 요구하라고 하였다. 만약에 청구권이 소멸된다고 해석해 버린다면, 조약을 통해서 자국민의 권리를 없애버린 일본정부에 인과관계상 당연히 책임이 발생하고, 일본정부가 대신해서 보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일본정부는 한국인 일제 피해자뿐만 아니라 자국민 전쟁피해자도 무시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법적으로는 꽤나 중요한 쟁점이 된다. 왜냐면 국가간의 조약 따위가 감히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멋대로 없애버릴 수 있느냐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가능은 한데, 매우 까다롭다.

법적으로 국가는 국민이 자신의 생명, 재산 등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국민을 지키라고 만들어놨더니 국가가 멋대로 국민의 기본권리를 처분한다면 이건 심각한 모순이다. 같은 이유로 법률가들은 대체로 사형제를 반대한다.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게 있을 리가 없는데, 국민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국가에 바치면서까지 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이 국민의 더 큰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국민의 권리를 처분해야 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이런 것까지 못하게 막으면 결과적으로 국민에 더 큰 피해가 발생하는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꼭 필요한 경우에만 조건하에 제한적으로 가능하다.

여기서 조건은, 법률의 형태(조약 포함)로 일반성, 명확성, 구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명확성이란 법률적으로 정확한 용어를 쓰는 것이고, 구체성은 제한하려는 국민의 권리의 범위를 특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한일청구권협정은 모호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앞뒤없이 그냥 "모든 청구권"을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는 문언은 무슨 권리를 얼마나 제한한다는 것인지 전혀 제약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포괄적인 권리 처분"은 지구상 그 어느 나라의 법률체계도 용인하지 않는다. 다시 다른 조약을 비교해 보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14조(b)

...연합국은 모든 보상청구, 연합국과 그 국민의 배상청구 및 군의 점령비용에 관한 청구를 모두 포기한다.

독일-이탈리아 평화 조약 제77조

4 ... 이 포기는 전쟁 중에 체결된 협정에 관한 금전 채권, 정부 간의 일체의 청구권 및 전쟁 중에 생긴 손실 또는 손해에 대한 일체의 청구권을 포함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한일청구권협정은 이 부분이 분명 매우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법원은 당연히 최대한 엄격하고, 범위를 좁혀서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 법원은 그 누구보다도 국민의 권리를 보호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대법관 13명중 3명도 위와 같은 이유로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청구를 인용했다. 심지어 이 3명은 일본이 주장하는 내용 그대로 조약을 해석까지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청구를 인용한 것이다.

판시에서 대법관들은 비록 한일청구권 협정이 일괄처리협정(lump sum agreements)으로 보이기는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협정을 통해 국가가 개인의 청구권까지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려면, 적어도 해당 조약에 이에 관한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봤다. 권리의 ‘포기’를 인정하려면 그 권리자의 의사를 엄격히 해석하여야 한다는 법률행위 해석의 일반원칙에 의할 때, 개인의 권리를 국가가 나서서 대신 포기하려는 경우에는 이를 더욱 엄격하게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부분은 법적으로 심각한 문제고 치명적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볼 때는 한일청구권협정이 일본측 주장대로 받아들여지기는 매우 어렵다.

4.6. 협정은 무효다?

한일청구권협정이 있었던 것은 맞으나, 치명적인 무효사유가 있기 때문에 무효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비유하자면 사채업자가 빚 깊지 못하면 노예로 팔아버리겠다고 각서를 쓰게 한 경우가 그렇다. 노예제가 현행법상 불법이기 때문에 그런 내용의 각서도 무효가 된다.

이는 두 가지 상황이 있는데, 하나는 국제법에 위반하여 무효인 경우이고, 또 하나는 한국 헌법에 위배되어 무효인 경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쉽지 않다.

한국 강제징용피해자 측이 예비항변으로 주장했지만, 여기까지 가기도 전에 대법원에서 청구인용을 했기 때문에 다행히 판단이 된 적은 없다. 만약에 한국측이 여기까지 밀렸으면 아마 패소했을 공산이 크다.

한일기본조약 관련해서 한국 헌법에 위배되는지 여부는 근래에 헌법재판소에 사건이 하나 올라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가 장기간 사건을 계류시키다가 그냥 각하시켜버렸다. 한일기본조약의 위헌여부가 당시 올라온 사건과 관련성이 없다는 이유였는데, 사실 좀 구차한 핑계였다. 헌재가 엄밀히 말하면 관련성 없는 데도 끌고와서 판단을 내린 전례가 워낙 풍부하기 때문이다.

헌재도 국민의 칭찬을 받기 좋아하는 기관이다. 게다가 대법원과 영역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딱 헌재가 맡을 사건이 아니어도 "국민의 권리와 관련있다"는 논리로 별의별 사건을 다 게걸스레 받아서 판단내려왔다. 그런데 뜬금없이 관련성이 없다고 각하했다는 건 아마도 재판관들이 국민들에게 칭찬받을 결론을 낼 법리도출에 실패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즉 한일기본조약은 위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국제법상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해 가해국을 면책하는 조약은 원칙적으로 무효라는 주장도 있으나 간단하게 논파된다.

  • 1. 한일청구권협정 같은 조약은 전 세계에 널리고 널렸다. 아래 독일의 전후 배상 관련해서도 나오지만 독일도 중대한 인권침해 범죄를 국가간 협정으로 해결했다. 오늘날 이렇게 논란이 생긴 건 박정희 정권이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받은 돈을 피해자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지, 한일청구권협정 자체는 흔한 조약중 하나다. 이걸 무효라고 하는 건 세계적으로 굳혀진 2차대전 전후 배상 체제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
  • 2. 한일청구권협정은 가해국을 면책하는 협정이 아니라 가해국이 책임을 진 협정이라고 봐야 한다. 독일의 전후 배상 조약이 독일의 죄를 면죄한 게 아니라, 독일이 죄에 대해 책임을 졌다고 평가하는 것처럼 일본 역시도 한일협정을 통해 한일 양국 사이의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진 것이지 한일협정이 죄를 면책하는 협정이라고 하는 건 곤란하다.
  • 3. 강행규범의 범위와 강행규범으로 조약이 무효가 되는 경우에 대해선 학계에서도 여러가지로 의견이 갈린다. 애시당초 이런 식의 청구권 협정이 강행규범으로 무효화된 사례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일협정이 강행규범에 위반되고, 따라서 무효라고 하는 건 설득력 없는 주장이다. 우리나라 정부 역시 한일청구권협정이 무효라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종합하면 차라리 협정에 대해 다른 해석을 시도하는 거라면 모를까, 협정 자체를 무효라고 하는 건 무리수다.

5. 한일 양국 정부간의 입장 비교

야마모토 세이토 변호사의 글을 보면 일본 정부와 법정에서 벌어졌던 일을 자세히 알 수 있다.참조

주의 할 것은 일본 정부가 '대외용'으로 표명하는 것과 '법정용'으로 주장하는 내용이 다른 적이 많다는 것이다. 즉, 뉴스 기사로 나오는 일본 정부 각료가 말했던 내용하고, 법정에서 일본국 정부측 변호인이 주장했던 내용이 꼭 같은란 법이 없다. 본 단란은 '법정용'을 기준으로 했다.

5.1. 일본국정부의 입장

일본정부의 입장 변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정부가 처했던 딜레마를 우선 알아야 한다. 흔히 일본정부가 한국의 일제시대 피해자들을 골탕먹이려는 목적으로 움직여왔다고 오해하는데, 사실 일본정부가 가졌던 더 큰 고민은 식민지에서 도망나온 일본인들이 일본정부에다가 옛 식민지에 버리고 온 재산을 물어내라고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일본정부는 한일기본조약의 청구권 해석을 놓고 양자택일 상황에 빠지는 것이다. '소멸'한다고 해석해서 한반도 출신 일본인들에게 손해배상을 할 것인가, 아니면 외교보호권 포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청구권이 '존속'하기 때문에 바다 건너 한국인들이 일본에다가 손해배상 요구하는 것을 허용 할 것인가.

여기서 1965년 일본은 후자를 택했다. 한반도에서 돌아온 일본인에게 줘야할 돈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반도 출신 일본인들은 한국에가서 한국 정부를 상대로 피해보상을 소송해야할 지경에 빠졌다. 문제는 한국 정부에도 책임을 물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면 한국에 남아있던 그들의 재산은 전쟁중에 '적산'으로써 미군에 귀속되었는데, 즉 미국정부의 소유였다. 그런데 미국정부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인해 일본인에게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 상태에서 미국이 한국 이승만 정부에 적산을 넘겼기 때문에 졸지에 재산이 세탁된 효과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 재산은 한국정부를 통해서 한국인들에게 분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전혀 권리행사를 할 수가 없었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 출신 일본인들은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셈인데, 물론 일본정부도 이들을 완전히 등한시하지는 않아서 이들을 위한 지원을 나중에 조금씩 해줬다. 다만 본래 일본정부가 이들에게 물어줬을 수도 있는 금액에 비하면 까마득히 새발의 피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은 대신에 한국인 피해자들이 일본에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것을 어떻게 하냐가 문제가 된다. 이에 관하여 일본은 대한민국 등의 재산권에 관한 조치법 이란 법을 한일기본조약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만든다. 그 내용은 한일기본조약에 포한된 청구권을 제외한 이전의 모든 한국인의 일본국과 일본인에 대한 채권과 담보권을 아무런 보상없이 일방적으로 소멸시킨다는 것이다. 이 법에 의하면 한국인 피해자들은 일본정부와 전범기업 누구에게도 청구권이 없어져버린다.

그야말로 막나가는 내용인데, 때문에 일본법원에서 한국 피해자들을 변호해주었던 일본인 변호사들은 이 법이 위헌적이라는 이유로 일본의 최고재판소에 가져갔지만, 합헌이라는 판시만 2004.11.29.에 받았다.

이러한 일본정부의 법적 입장은 일본언론에는 들어나지 않았다. 언론앞에서는 한국인 피해자들에게 어떠한 권리도 없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진행된 소송에서는 물론 청구권이 존속한다는 주장을 계속 펼쳤다.

그렇게 모순되게 공존하던 정치용 입장과 법정용 입장이 합쳐지게 되는 것은 1991년이다. 소련이 무너지면서 2차세계대전 당시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던 일본인들의 청구권 문제가 다시 떠오르면서 1991.3.26 참의원 내각 위원회에서 결국 일본정부는 "완전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이란 '외교적보호권의 포기에 불과'하다는 답변을 한다. 그리고 이어서 1991.8.27 참의원 예산 위원회에서 일본에서 소송을 진행중이었던 한국인 일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질문이 들어왔는데, 여기에서 외무성은 드디어 일본정부의 법정용 입장과 똑같이 '외교적보호권의 포기에 불과'하다는 답변한다. 이 입장표명은 일제 식민지사 반성관련 일본단체들의 큰 주목을 받아서 대대적인 소송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일본정부의 법정용 입장은 줄곧 잘 유지되어오다가 위기를 맞기 시작한다. 일본 국내에서 시효•제척기간 등의 쟁점에서 국가와 기업에 불리한 판단이 나오면서 변화할 필요가 생긴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가 2000.11.17 한국의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소송의 관할을 인정해버린것인데, 이 때문에 미국 법원을 통해서 일본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할 지도 모르는 위험에 노출되게 된다.

이에 겁을 집어먹은 일본정부는 한바탕 혼란을 겪는데, 어떻게든지 패소하여 손해배상하는 사태를 막기위해서 '실체적권리가 소멸'했다는 의견을 미국법원에 제출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이전까지 일본의 입장과 상충된다는 점이 지적되고, 특히 식민지 일본인들이 일본정부에 대한 손해배상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다시 떠오르면서 '실체적 권리가 소멸'했다는 해석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5.2. 한국 정부의 입장

한국 정부의 입장은 2005년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한일회담문서가 일부 공개되면서, 정부의 입장 발표와 후속대책을 마련하면서 확립되었다.

2005년 이전의 한국 외교부는 외교에 관한 내용이라는 이유로 한일청구권협정에 관한 입장표명을 거부했었다. 따라서 이전의 한국정부의 입장은 공식적으로 없으며, 한국 정부가 입장을 내지 않음에 따라 정치계, 시민단체, 그리고 각 개인들이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고 있었다.

흔히 오해하는 것으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일본 정부와의 대결구도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한국의 정치계나, 사법부, 시민단체, 개인의 의견을 한국 정부의 입장으로 오해해서 일어나는 일이다.[29]

2005년 이후 한국 정부의 입장은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하여 일본의 배상문제는 종결되었다는 입장이었고, 정부차원에서 한일청구권협정 이슈는 어디까지나 한국 사회 내부적인 일로, 협정에 따른 일본의 자금이 당시 독재 정권의 의도하에 실제 피해자 개인에게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배에 따른 한국인(조선인)의 피해 회복을 위해 한국 정부나 기업들이 어떻게 보상해 줄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 시기,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간 재정적, 민사적 채권 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와 군대 등 일본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으며, 사할린 동포 문제와 원폭피해자 문제도 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라는 취지의 공식의견을 내부적으로 내었지만 일본 정부와의 마찰은 없었다.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와 본격적인 대립구도를 가지게 된 시점은 한국의 사법부 판결이 나옴에 따라 일본 기업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시점부터이다.

하지만 2018.10.30에 일제 강제징용피해자들의 청구가 대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서, 한국 사법판결의 물리력이 일본의 기업을 향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정부가 대립 구도를 형성하게 되는데,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한국 정부는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겠다고 표명했으나, 한일기본조약이나 한일청구권협정에 관한 입장은 밝히지 않았다. 다만, 한국 외교부가 일본 정부에 양국 기업이 공동 자금을 마련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보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이 사법부의 해석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음은 추정가능하다. 사법부의 표면적인 판결은 국내 기업이 자금을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5.3. 청구권에 대한 입장

2005년 한일회담 문서 공개가 이루어지면서 참여정부에서는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를 개최하였고, 여기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정부․軍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해당 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고 발언하였다. 그러나 2009년 헌법재판소의 한일청구권협정 부작위 사건 변론에서 한국 정부는 "법적 책임이라는 게 배상을 뜻하는 건 아니다"라고 밝혔으므로, 이를 종합하면 추가적 배상이 필요하다는 입장보다는 법적 책임이 반드시 배상만을 의미하지는 않음으로 해석하여야 한다.[30]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말하는 법적 책임이란 독일의 반나치법과 같은 차후 과거사 부정 행각을 막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고, 비록 실질적 배상이었다곤 하나 명분상 독립축하금으로 한일기본조약 배상금이 지급되었음을 감안하여 추가적인 사죄가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31] 즉 이 입장은 한국 정부가 한일기본조약으로 청구권 문제가 해소되었음을 부정하는 행보로 해석할 수 없다. 여담으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준거한 전쟁피해국에 대한 배상 또한 강화조약 4조 항목에 기술되어있듯 재정적, 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다룬다기보단 포괄적 청구권을 다루고 있는 등, 실제 한국이 청구권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음을 주장하더라도 국제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원폭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에 대한 해석상 분쟁을 해결하지 않고 있는 외교통상부의 부작위의 위헌 여부에 대한 판례[32]에서 헌법재판소는 해석상의 분쟁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즉 분쟁 상태 자체가 원폭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이라는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외교통상부는 해석상 분쟁을 협정 제3조에 의한 분쟁해결절차에 따라 해결해야 함을 주문하였다. 즉 원폭 피해자들은 배상청구권이 소멸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못박은 것이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법부는 결국 분쟁해결절차를 한국 정부에 넘겼을 뿐이고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취지의 판결은 내리지 않는다. 애시당초 한일청구권협정 조문이 명시하는 청구권이 워낙 광범위해 애초에 분쟁이 성립하질 않는 상황이므로 한국 정부는 국민정서를 고려해 일부러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고 있을 뿐 실제로 일본에게 배상을 요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도 사람인지라 그분들 안에서도 서로 갑론을박이 많다. 1995년 일본이 재단을 설립했을 때에도 보상받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었고, 반면 이걸 받았다고 배신자라고[33] 말하는 위안부 할머니도 있었다. 또한 자신들에게 와야 할 돈을 한국 정부가 멋대로 포스코에 줘 버렸다고 포스코에게 소송을 건 사례도 존재한다. 마냥 일본을 욕하기만 하는 할머니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당연히 이러한 소송은 법정에서 패소했고[34]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례만을 집중 조명하는 경향이 있고, 이에 대해서는 일본의 유력 일간지에서도 강하게 경계한 바 있다. 예시

2017년 8월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청구권 문제에 대한 NHK 기자의 질문에 "말씀하신 것 중 일본군 위안부 부분은 한일 회담 당시 알지 못했던 문제였습니다. 말하자면 그 회담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문제입니다. 위안부 문제가 알려지고 사회 문제가 된 것은 한일 회담 훨씬 이후의 일입니다. 위안부 문제가 한일 회담으로 해결됐다는 것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강제 징용자 문제 양국 간의 합의가 개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습니다. 양국 합의에도 불구하고 강제 징용자 개인이 미쓰비시를 비롯한 회사를 상대로 가지는 민사적인 권리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한국의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의 판례입니다. 정부는 그런 입장에서 과거사 문제에 임하고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해석.[35]

대한민국 대법원이 2018년 강제 징용공들이 일본 기업들을 대상으로 낸 재판에서 다수 판관들이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함에 따라 판결을 내렸다.[36] 한일기본협정이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지배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었으며 "한·일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일본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명시했다.

더불어 "한·일 청구권협정 제1조에 따라 일본정부가 대한민국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이 제2조의 양국 및 양국 국민간 청구권 등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인 대가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며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의 발표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대한민국정부의 입장도, 정부가 수령한 무상자금 중 상당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하여야 할 책임은 '도의적 책임'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한국 대법원은 또한 청구권 문제 해결과 자금 지원 간에 법적인 대가관계는 없다고 판시했다. 청구권 협정에서는 무상 3억, 유상 2억 달러에 대해 실행한다고만 적혀있을 뿐 구체적인 명목에 관한 내용이 없고, 차관은 일본의 경제협력기금에서 행하되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유익한 곳에 쓰이면 된다는 제한만 있을 뿐이다. 일본 측 또한 한일기본조약 1조에 따른 자금 지원은 경제협력의 성격이며 2조 청구권 문제 해결과 법률적 상호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라 보았다. 또한 1975년 청구권보상법, 2007년 희생자지원법, 2010년 희생자지원법에 의해 한국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자금을 지급한 적이 있으나 이 또한 모두 위로금과 같은 도의적 성격의 보상일 뿐이라고 명시하고 있고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은 아니라고 밝혔다.

일각에선 제5차 한일회담에서 한국이 강제동원의 고통에 대한 피해보상을 요구한 적이 있고, 제6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에서 구체적으로 12억 2천만 달러를 요구하면서, 그 중 3억 6400만 달러는 강제동원 피징용자에 대한 피해보상금으로 산정한 적이 있다는 반론도 있으나, 대법원은 이 언급들이 정부의 공식적 입장이 아닌 교섭 과정에서 교섭 담당자가 언급한 것으로 정황을 볼 때 협상에서 유리한 지위를 점하기 위한 발언으로 보이고, 한일회담에서 일관되게 주장된 내용도 아니며, 5차 한일회담은 일본의 반대로 타결되지 않았으며, 6차 예비회담에서 12억 2천만 달러를 요구한 것에 비해 실제 타결된 금액은 무상 3억달러에 불과하므로, 강제동원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도 포함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겠다고 말했다. # 일본 정부가 강하게 항의하자 이낙연 국무총리는 “이런 사법부의 판단은 외교적 사안이 아니”고 “사법부는 법적 판단만 하는 기관이며 사법부의 판단에는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다.”라고 삼권분립을 설명했다. 또한 대법원의 판결문이 한일기본조약을 부정한 것이 아니며 조약의 적용 범위를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6. 타국의 유사한 사례

6.1. 미국의 사례

1999년 캘리포니아주에서 2차대전 피해자들이 독일, 일본 기업 등에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미국 연방정부에서 "배상 문제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끝났고, 정부의 외교권한을 침해했다"며 캘리포니아 주법(州法)은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기사

이후 캘리포니아 주법(州法)에 자극 받아 2차대전 전쟁포로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합작으로 미국에서 독일, 일본 기업에 배상 소송을 걸었다.

재판 결과 전쟁포로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패소했다.

1심에서 재판부는 "미일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르면 전쟁포로들이 일본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고 판결했다. 기사

2심에서 재판부는 "미국이 서명한 협정들은(샌프란시스코 조약) 포로들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1999년 캘리포니아 주법(州法)에 대해서도 "외교문제에 관한 연방정부의 독점권을 침해하여 위헌"이라고 밝혔다. 기사

3심에서도 마찬가지로 전쟁포로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패소하며 재판이 끝났다. 기사

6.2. 일본의 사례

1945년 8월 9일, 전쟁 막바지에 소련은 만주, 사할린 등을 침공했는데, 이때 소련군에 의해 일본군 일부가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소련에 의해 강제노역당한 역사가 있다. 억류 및 강제노역 피해자들은 1979년 전국억류자보상협의회를 결성하고 일본 정부에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는데,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일소 공동선언에 의해 외교적 보호권은 소멸하였지만 개인의 청구권은 여전히 유효하므로 일본은 이에 대해 보상할 의무가 없다"는 입장으로 응수한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일본국에 대해 일체의 배상 청구권을 포기한다.

일본국 및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1945년 8월 9일부터 전쟁의 결과로 생긴 각각의 나라, 그 단체 및 국민의 각각 다른 나라, 그 단체 및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상호간에, 포기한다.

일본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간의 공동선언 (1956)

일본은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있던 2010년 소련 억류 피해자인 '현' 일본 국민에 대해 특별급부금의 형태로 강제징용에 관련된 피해를 보상하도록 하는 입법을 하였으나 조선인 등 국적을 이탈한 사람들은 보상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6.3. 독일의 사례

6.3.1. 독일은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배상을 끝냈음에도 추가로 배상을 했다?

1950~1960년대 독일이 서유럽 국가들과 나치 피해 관련해서 청구권 협정을 맺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해당 청구권 협정은 일반적인 전쟁범죄에 대한 청구권까지 포함한게 아니라 나치즘에 의한 피해에만 한정한 협정이었다. 예를 들어, 당시 독일은 강제징용은 나치즘에 의한 피해가 아니라며 청구권 협정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그 뒤에도 끝끝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법적 배상을 하지 않았다. 또한 1950~1960년대 독일은 공산권이었던 동유럽 국가와는 아예 청구권 협정조차 맺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니 당연히 1990년 독일 통일 이후에 동유럽 국가 배상 문제나 전쟁범죄 배상 문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1960년대 독일과 프랑스는 '독불간 나치피해 박해조치로 피해를 입은 프랑스 국민을 위한 지불에 관한 조약'을 맺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조약은 독일과 프랑스간의 나치 피해에 관한 포괄적인 배상협정이었다. 즉, 나치 피해 이외의 전쟁범죄나 강제징용 등의 배상 문제는 빠졌고, 나중에 프랑스 측에서 강제징용 문제 등 추가 배상을 요구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배상 요구에 독일은 해당 문제에 대해선 배상한 적이 없기에 당연히 배상을 한 것이다. 한마디로 독일은 배상을 한 적이 없어서 배상을 한 거지, 배상을 했음에도 다시 배상을 한 게 아니다.

이는 한일관계에서도 동일하다. 우리나라 대법원도 불법적인 식민지배로 인한 배상은 청구권 협정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입장이다.

6.3.2. 독일은 재단을 만들어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법적 배상을 했다?

2000년도에 설립된 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은 법적인 책임이나 배상이 아닌 어디까지나 인도적인 차원의 보상과 지원을 하는 재단이었다. 독일은 개인의 청구권 자체는 소멸되지 않았다고 인정하였으나, 끝내 법적 배상을 하지 않았다.

일본도 1995년 위안부 피해자들 관련해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 재단을 설립하였다. 일본도 위안부 문제의 법적 배상은 청구권 협정으로 끝났다는 입장이었으나, 독일과 마찬가지로 인도적 차원의 보상과 지원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였다. 정대협 측은 일본정부의 법적 배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원을 거부했다. 그리고 보상받은 사람들을 배신자라고 욕했다[37]

6.3.3. 독일 대법원의 개인 배상 기각 판결

2003년, 나치 독일군에게 학살당한 그리스인들의 유족들이 독일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건 적이 있었다. 이에 독일 정부는 "1960년대 그리스 정부와 협정을 맺어 더 이상 그리스인들에 대한 배상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그리스 유족들은 "국제법 상 독일 정부의 면책은 국가 대 국가 간의 관계에 한정하며 정부와 개인 간에 관한 책임은 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사

그러나 독일 연방대법원은 "1960년대 독일 정부가 그리스 정부에 배상금을 지불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독일 정부에게 개별적으로 배상금을 받을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기사

6.3.4. 이탈리아의 배상 판결에 대처하는 독일의 자세

심지어 독일은 이탈리아의 강제징용 피해자, 학살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에 불복하여 이탈리아를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한 적도 있다. 2008년, 독일이 강제징용 피해자 및 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 배상이 끝났다며 배상하길 거부하자 이탈리아 법원이 독일에게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기사

이에 독일은 1. 강제징용, 학살 등의 배상 문제는 국가간 조약으로 이미 끝났으며 2. 국가 면제 특권을 무시한 판결이라고 반발했다. 기사 그러자 이탈리아는 1. 강제징용, 학살 등의 배상 문제는 국가간 조약으로도 끝나지 않았으며 2. 반인륜적인 범죄에 국가 면제 특권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다시 반박했다.

한일 양국의 입장과 굉장히 유사했던 이탈리아-독일의 대치는 결국 독일의 이탈리아 제소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판가름이 나게 되었는데...

독일이 승리했다.

15명의 국제사법재판소 판사 중에 단 3명의 판사만이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배상 청구권은 국가간 합의에 의해 포기될 수 없다며 이탈리아의 손을 들어줬고, 나머지 12명의 판사는 반인륜 범죄라도 국가 면제 특권은 적용된다고 독일의 손을 들어줬다.기사#

결국 2015년 현재까지도 독일은 강제 징용이나 학살 등 전쟁 범죄에 대한 법적 배상은 끝났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실상이 이러니 독일만 높이고 일본을 비난하는 건 잘못된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적어도 배상과 관련해서는 독일과 일본의 입장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배상에 한정해서는 일본이 독일보다 나은 점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본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1965년 이전의 일에 대한 법적 배상에 대해 모두 종결시켰으나, 독일은 강제징용 등 일부 문제에 관해선 특별히 청구권 협정을 맺지도 않았으면서 법적 배상을 거부했다. 이러한 독일의 태도에 분노한 독일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1990년대 소송을 걸었으나 결국 독일은 법적 배상은 거부한 채 인도적 차원의 보상만 했다.[38]

6.4. 여타 국가들의 사례

식민지가 아닌 전쟁 피해국의 지위에 있던 2차대전 승전국 중에서도 대일청구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사례가 제법 있으나, 식민지였던 나라가 과거 지배국에 보상을 받은 사례는 본협정이 유일하다.

전쟁 피해국 중에는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이 그 중 하나인데, 오랜 내전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화되어 한국 못지 않게 배상금이 필요한 나라였으나 중화민국은 타이완으로 쫓겨난 상황에서 일본과 대일배상청구권에 대해 협상함으로써 자신을 정통 중국 정권으로 인정해줄 우방을 확보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대소관계가 악화되면서 데탕트가 찾아오는 70년대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대일배상청구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중일국교정상화를 하였다. 각각 어느정도 계산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면 청구권을 자진 포기한 것.[39] 다만 이건 국가 차원의 배상포기라 개인의 배상청구는 가능하다. 일본 기업들이 중국인들에게는 배상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거하여 전쟁 피해국의 지위를 갖던 캄보디아라오스는 배상 청구권을 자진해서 포기했다. 사실 피해를 입은 기간도 상대적으로 짧고 거리도 멀다보니 동북아 국가들에 비하면 피해가 약하긴 했다. 다만 절대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이후 이어지는 일본의 경제원조는 톡톡히 받았다.

7. 문화재 협정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문화의 역사적인 관계에 비추어,

양구의 학술 및 문화의 발전과 연구에 기여할 것을 희망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제 1 조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는 양국 국민간의 문화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가능한 한 협력한다.

제 2 조

일본국 정부는 부속서에 열거한 문화재를 양국 정부간에 합의되는 절차에 따라 본 협정효력 발생후 6개월 이내에 대한민국 정부에 인도한다.

제 3 조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는 각각 자국의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 및 기타 학술문화에 관한 시설이 보유하는 문화재에 대하여 타방국의 국민에게 연구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의 편의를 제공한다.

제 4 조

본 협정은 비준되어야 한다. 비준서는 가능한 한 조속히 서울에서 교환한다.

본 협정은 비준서가 교환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하기 대표는 각자의 정부로부터 정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정에 서명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토오쿄오에서 동등히 정본인 한국어 및 일본어로 본서 2통을 작성하였다.

대한민국을 위하여(서명) 이동원 김동조

일본국을 위하여(서명) 시이나 에쓰사부로오 다까스기 싱이찌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

1965년 6월 22일 동경에서 서명

1965년 12월 18일 발효

한국측 대표는, 일본 국민의 사유로서 한국에 연유하는 문화재가 한국측에 기증되도록 희망한다는 뜻을 말하였다.

일본측 대표는 일본 국민이 소유하는 이러한 문화재를 자발적으로 한국측에 기증함은 한일 양국간의 문화협력의 증진에 기여하게도 될 것이므로, 정부로서는 이를 권장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토오쿄오에서

7.1. 문화재 문제

문화재 협정에서 문제가 되는 건 '반환'이 아닌 '인도'란 표현이 사용된 점이다. 당초 문화재 협정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게 빼앗긴 문화재를 반환 받기 위해 체결한 협정이었으나 '인도'란 표현을 씀으로써 일본의 문화재 강탈을 정당화시켰다. 또 일본의 문화재 반환 책임을 의무가 아닌 '가능한 협력', '기증되도록 희망' 등의 표현을 씀으로써 우리의 문화재를 돌려받는 데 일본의 자비를 구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이 협정으로 돌려받은 문화재도 소수라서 더 암담한 상황.

문화제청은 이 협정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8. 비판

우선 이 조약은 한미일 삼국의 외교/경제적 필요성에 의해서만 체결되었다는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 실제 한국으로서는 정작 피해 당사자인 국민의 정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합의되었고 그 결과 국민들이 여전히 배상 문제가 종료되지 않았다고 생각할만한 불씨를 만들었다. 최악의 병크

물론, 위에서 설명했듯 이와 별개로 해당 조약은 법리적 하자 없이 맺어졌다. 대한민국 헌법 제6조에 따라 정식으로 체결된 조약은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과 같은 효력을 지니며 입법권[40], 사법권을 구속한다. 또한 해당 조약은 조약으로 성립하는 데 문제되는 그 어떠한 법리적 하자도 없는 상황이므로, 당연히 국제 사회에서는 이 조약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맺어진 조약으로 인식될 뿐 한국 내의 사정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41] 따라서 당시 정권이 제3공화국이었으며 이들이 청구권 문제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해당 조약으로 정당한 배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한국 내부에서 해결해야 한다. 왜냐하면 피해자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조약을 체결한 제3공화국에 책임이 있으며 이를 계승한 제6공화국이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 때문에 일본 정부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42] 이렇기에 더더욱 해당 조약과 관련해서 박정희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그나마 한국 정부도 배상 요구 일변도에서 벗어나 문재인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 당시 체결된 위안부 협상에서 지급된 위로금도 돌려주겠다며 한국 국민을 자극한 언사에 대한 사죄에 집중하기로 결정한 태도를 보였다.

한편, 박정희 정부가 피해자들과 상의도 없이 받은 이 돈을 유용했다는 비판이 당시에도 현재도 존재한다. 실제 이 조약을 전후로 박정희를 비롯한 당시 정부 여당에 엄청난 음성적 정치자금이 흘러들어간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감시하는 주체도 없으니 유용하려면 얼마든지 유용할 수 있는 셈.

게다가 지금까지도 박정희 지지자들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나 정치적 지향을 떠나 객관적으로 분명한 것은 경제가 발전한 이후에도 한국 정부는 자국민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그에 따른 보상도 하지 않았으며 피해자 조사 등도 하지 않고 묻어버렸다. 역사적 사실은 민간단체의 노력에 의해 발굴되었다.

실제 이 조약으로 받은 돈 중 상당부분을 투입해 세운 포스코의 경우, 초대 회장인 박태준은 조상의 핏값으로 세운 회사라고 스스로 말했으면서도 정작 2천년대 피해자들이 이제 기업도 성공했으니 배상금을 좀 해결해달라고 직접 찾아가자 만남을 거부했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차관이 투입된 기업의 주식이라도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좀 제공했다면 비난 받을 이유가 없을 테지만, 그런 것도 없이 국영기업의 주식은 국가가 보유하고 있다가 민영화 한다면서 일부를 팔았고, 차관이 공여된 대기업의 이익은 피해자가 아닌 총수 일가의 재산만 늘렸다.

조약 프로세스와 별개로 일본국 외무 특사로 파견되었던 에츠사부로와 신이치 둘다 일본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망언참조.

8.1. 3억 달러가 일본이 빌려준 차관이라는 주장

한일기본조약으로 인해 한국이 받은 3억 달러는 일본에게 갚아야 할 차관이고, 개도국 이하의 경제상황이었던 한국이 이 거액을 갚으려면 우선 위안부 피해자들보다 기업에 우선적으로 배분하는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주장의 문제는 일단 한일기본조약에서 이 3억달러가 "현재에 있어서 1천8십억 일본 원(108,0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3억 아메리카합중국 불($ 300,000,000)과 동등한 일본 원의 가치를 가지는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을 본 협정의 효력발생일로부터 10년 기간에 걸쳐 무상으로 제공한다."라는 1조 A항과 정면으로 대치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게다가 일본이 3억 달러를 차관으로 제공하면서, 그 빚을 돌려 받으려고 박정희 정부가 3억 달러를 어디에 사용했는지 내역을 철저히 감시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 주장의 문제는, 일본이 감시했다는 건 한국의 예산집행에 일일이 간섭할 정도로 내정간섭을 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 당시 극도로 나쁜 한국의 경제상황을 감안할 경우 만약 3억 달러가 상환의무가 있는 유상 차관이었다면 이 주장에 설득력이 있겠지만, 1조 A항에 있다시피 이 차관은 상환의무가 없는 무상 차관이다.

9. 중일공동성명과 비교

한-일, 중-일은, 전자는 식민지배/피지배 관계이고, 후자는 전쟁가해/피해 관계여서 직접비교는 곤란하나, 한일협정과 중일공동성명을 단순비교해보는 항목이다.

1. 과거사 부분

일본은 일본국이 과거 전쟁으로 인해 중국 인민에게 입힌 중대한 손해와 책임을 통감하며 심각한 반성을 표한다.

-중일공동성명 中-

한일협정은 일본에게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받지 못했고, 사과 역시 받지 못했다. 결국 이로 인해 일본은 현재까지도 식민지배는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일공동성명은 일본이 중국에게 피해를 입힌 사실을 인정받고 사과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2. 포기한 청구권의 범위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중략)

3. 2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일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하여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 요구를 포기할 것을 선포한다.

-중일공동성명 中-

한일협정은 위 여러 항목에 나와있듯이 정부 뿐만 아니라 개인(법인 포함)의 모든 청구권을 포기하였으나, 중일공동성명에서 청구권 포기의 주체는 오직 중국 정부뿐이라는 중국 정부의 입장이 있다. 중국 정부는 개인 청구권의 여지를 남겨두었다고 하나 일본 정부의 입장은 개인 청구권 문제도 해결되었다는 입장이다. 다만 일본 기업이 중국인 피해자들과 합의에 나서는 경우가 있다. 이런 합의는 일본 기업들의 중국 시장 공략을 위한 이미지 개선 작업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기업과 중국인 피해자들의 합의 사례

2차 대전 당시 약 4만 명의 중국인이 일본에 강제 징용돼 일했으며 이 기간 7천 명의 중국인이 일본에서 사망했다. 강제노역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와 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일본 법원은 중국이 1972년 체결된 '중일공동성명'을 통해 배상권을 포기했다며 1995년 이후 제기된 14건의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3. 배상금 부분

한일협정으로 일본은 한일협정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공식적인 입장과 달리 일본의 공식적인 입장은 자금지원은 독립 축하금이었다.

10. 한국 정부의 문서 공개 거부 논란

현 한국 정부의 관련 문서 공개 거부 역시 문제이다. 법적으로 비공개 기간인 30년이 훨씬 지난 마당에 문서 공개를 거부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협정 과정에서 스스로 배상청구권이라는 무기를 버린 점이나 협정 체결 이후 개인에게 돌려줘야 할 배상금을 거의 돌려주지 않고 관련 공지도 거의 하지 않은 것을 한국 정부 측에서 자행했다는 점이 문서 공개 거부의 원인이다. 이쯤 되면 국가의 기본 의무인 국민의 편의와 안전을 책임지는 것을 한참 어긴 셈이다.

10.1. 한국 정부의 문서 완전 공개와 그 파장

2004년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이 정부에 협정문 공개 소송을 걸었고, 일부 승소했다. 그 결과 전체 협정문 중 청구권 관련 5권이 일부 공개되었다. 이후에도 시민단체들과 일제 피해자들이 문서 완전 공개를 요구했다. 결국, 정부는 2005년 8월, 알 권리를 명분으로 협정문을 완전히 공개하였다.

10.2. 일본 정부의 문서 일부 공개와 근황

일본 정부도 2006년 8월부터 2008년 5월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협정문을 공개해서 어느 정도 대조해 볼 수 있었으나, 6만 페이지 중 25%의 중요 부분에 먹칠되어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일본이 나머지 25%를 공개해야만 해결이 될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한일관계가 사실상 냉전 상태라 가능할지는 의문.1 2 3 4

2014년 7월 25일, 도쿄 고법에서 독도 관련 한일 교섭, 한일 청구권 협상, 일본 내 한국 문화재 등과 관련한 48건의 문서에 대해 1심 재판부의 공개 명령을 취소했다.#

결국 이에 대해 소송단은 상고를 포기했다.#

11. 합의의 이면

2019년 8월 5일 JTBC 뉴스룸에서 당시 빌려온 차관이 국내 경제 개발 과정에서 되려 미쯔비시 같은 전범기업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계약상 일본 기업 물건을 사게 되어 있다든가 물건을 팔 때도 배 이상 폭리를 취하는 식으로 죄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원조로 생색을 내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도 모자라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한국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원조' 둔갑 8억달러 추적해보니..그 뒤엔 '전범기업'

대표 원조사업 서울지하철, 납품가 빼돌려 전범기업 배불려

고리로 돈 빌려주고.."일본 물자 구입 조건" 족쇄

환경문제로 공장 못 세운 전범기업..'공해산업' 떠넘긴 정황

"일본과 겹치는 산업 육성 안돼"..'야쓰기 안'에 담긴 일 속내

전범으로 얼룩진 '한일협력위'…한국 정치에도 영향

12. 관련 인물

12.1. 한국

12.2. 일본

13. 관련 정치적 사건

14. 바깥고리

일본 전문 뉴스인 JP뉴스의 기사. 협정으로 인해 당시 재일동포들이 받은 영향과 협정을 주도하게 된 정치적 흐름과 세계정세, 한일기본조약과 연관된 독도 관련 회담 내용 등을 자세히 조사하여 기사화했다.
한일기본조약으로 합법 전제인 미수금, 보상금, 기타 청구금은 해결되었지만 불법 전제인 위자료는 미해결 상태라는 MBC의 뉴스 기사이다.

15. 같이보기


  1. [1]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2. [2] (a) Subject to the provisions of paragraph (b) of this Article, the disposition of property of Japan and of its nationals in the areas referred to in Article 2, and their claims, including debts, against the authorities presently administering such areas and the residents (including juridical persons) thereof, and the disposition in Japan of property of such authorities and residents, and of claims, including debts, of such authorities and residents against Japan and its nationals, shall be the subject of special arrangements between Japan and such authorities.
  3. [3] 1965. 3. 20. 대한민국 정부가 발간한 '한일회담백서'(을 제18호증)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가 한일간 청구권문제의 기초가 되었다고 명시하고 있고, 나아가 "제4조의 대일청구권은 승전국의 배상청구권과 구별된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조인당상국이 아니어서 제14조 규정에 의한 승전국이 향유하는 '손해 및 고통'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한일간 청구권 문제에는 배상청구를 포함시킬 수 없다"라는 설명이 있다. 다만 2018년 대법원에서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살아있다고 판결했다.
  4. [4] 물론 다 달러였다는 소리는 아니고 규모가 그렇다는 의미.
  5. [5] 일본은 국교 정상화 후 개별지급도 제안했었다.
  6. [6] 물론, 박정희 정부 이전에 장면 내각에서도 한일국교정상화 논의는 이루어져왔다.
  7. [7] 여담으로, 고려대학교 쪽에서 시위를 주도한 사람이 당시 고대 학생회장 대행이자 훗날 서울특별시장을 거쳐 대통령이 된 이명박이다. 그는 이 시위를 주도했다는 명목으로 체포되어 6개월 간 유치소에 구금된 뒤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 전과 때문에 졸업 후 한동안 취직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잘못 알려진 이야기. 이명박의 고려대 졸업과 현대건설 공채 입사는 1965년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이명박청와대에 편지를 썼다는 것도 이르면 현대건설 입사가 진행되던 시기, 좀 박하게 보는 경우는 입사한 다음이다.
  8. [8] 의사 겸 시인 마종기도 군의관 복무 도중 제대를 1년 앞두고 이 협정에 반대한다고 대놓고 말했다가 고초를 겪었다. 결국 마종기는 제대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다.
  9. [9] 서울중앙지방법원 2007. 8. 17. 선고 2006가합42288 판결
  10. [10] 사실 정부가 포스코에 돈을 준 것이기에 피해자들은 정부에 보상금과 배상금 지급을 요구해야 하는데 이것 자체가 특별법 제정 등 여러 모로 골치아픈 문제다.
  11. [11] 제암리 학살사건 당시 일본군 사령관이던 우츠노미야 다로의 장남. 당은 자민당인데 한-일 밀월관계를 비판하면서 군사정권에 탄압받던 김대중 구명운동에 발벗고 나섰고, 알제리의 사회주의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고, 북한 태조와 여러 차례 독대하는 등 자민당 주류와는 이질적인 행보를 보였다. 애초에 당의 규모상 자민당에도 여러 파벌이 존재하기 때문.
  12. [12] 참고로 2019년 기준 한국정부 예산이 470조원이다. 단순비교는 무리가 있지만 2019년에 2년치 예산이면 940조원(!)이다. 사실 일본이 역사인식&태도에 관한 문제 때문에 외교관계가 좋지 않치만 은 다른 국가에 비해서도 많이 주었다.
  13. [13] 특히 한국은 전통적으로 일본과 무역하여 적자를 보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일본은 흑자를 본다는 의미다.
  14. [14] 상식적으로 당장 굶어죽게 생겼는데 장기적인 안목에서 원화 가치 확보를 위해 일종의 저축에 비유되는 외환보유고 확보가 가능하겠는가?
  15. [15] 일본의 침략 당시 미국의 식민지였다.
  16. [16] 일본의 침략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17. [17] 일본의 침략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18. [18] 일본의 침략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다.
  19. [19] 물론 상기한 국가들이 전쟁배상을 받은 것과 한국과 일본간의 청구권 협정은 성격이 다르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20. [20] 당초 베르사유 조약에서는 금액이 확정되지 못하고 협상을 거듭한 끝에 1921년에 타결된 런던 스케줄에서 정해진 배상금액이 1320억 금태환 마르크였다.
  21. [21] 1320억 금태환 마르크가 어느 정도의 금액이냐면 당시 역시 금태환되던 330억 미국달러에 상당하는 액수로서, 순금 5000 가량의 가치였다. 이 막대한 금액의 배상금을 제때 받지 못한 프랑스는 라인강 동쪽의 루르 지역을 점령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고, 독일 내부적으로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엄청난 혼란을 겪었으며, 이후 독일에서 나치스 집권의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22. [22] 참고로 종주국(식민지배국)이 종속국(피식민지배국)에게 법적으로 사죄를 인정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강대국들 대부분(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미국, 러시아 등)이 18~19세기 식민지배로 국력을 강하게 하는 기반을 닦았고 피지배국가들 대부분은 독립 후 경제난, 쿠데타, 내전, 독재 등으로 사회혼란이 꾸준했기 때문에 발전이 더뎌 국제사회에서 목소리가 약했기 때문이다.
  23. [23] 한국일보 《한국 "병합조약 애초에 무효", 일본 "해방 이후에 효력 상실"》, 2015년 2월 9일
  24. [24] 이 내용은 '대법원 2018. 10. 30. 선고 2013다61381 전원합의체 판결'이 아닌 '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68620 판결'에 나와있다. 아니 그전에 친일파 재산환수 2009년 헌재판결에서 이미 도출된 법리다.
  25. [25] 대한민국 제헌헌법은 그 전문(전문)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상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하고, 부칙 제100조에서는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하며, 부칙 제101조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현행헌법도 그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비추어 볼 때,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강점)에 지나지 않고, 일본의 불법적인 지배로 인한 법률관계 중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그 효력이 배제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일본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판결 이유가 담긴 일본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결과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26. [26] 한일기본조약에선 대한민국과 그 국민이 해당하게 된다.
  27. [27] (a) Subject to the provisions of paragraph (b) of this Article, the disposition of property of Japan and of its nationals in the areas referred to in Article 2, and their claims, including debts, against the authorities presently administering such areas and the residents (including juridical persons) thereof, and the disposition in Japan of property of such authorities and residents, and of claims, including debts, of such authorities and residents against Japan and its nationals, shall be the subject of special arrangements between Japan and such authorities.
  28. [28] 참고로 한국정부는 식민지배를 명확한 불법이라 하진 않았지만 유사한 유권해석을 하였다.
  29. [29] 이 문서에도 정부의 공식 입장과, 한국 사회에서의 기관, 단체, 개인의 주장을 혼동하는 서술이 자주 보인다.
  30. [30] 실제로 일반 국민들의 경우에도 상황에 따라 벌금 이외에도 징역, 금고, 사회봉사, 약물치료 등 다양한 법적 책임이 부과된다. 국가간의 문제이므로 1:1로 매칭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31. [31] 역사왜곡에 대해 일본에서는 요시다 세이지의 좌편향 날조 / 좌편향 위협기사로 경계하였다.
  32. [32] 2008헌마648
  33. [33] 법적 배상이 아닌 위로금 형태인데 이걸 왜 받냐는 주장.
  34. [34] 법리적으로 포스코는 국가에게 돈을 받았을 뿐이고 그 지원금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진 않은 것. 오히려 국가에 소송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그랬다고 돈을 받으실 수 있었을지는 과연....
  35. [35] 2005년 8월 노무현 정부는 사할린 동포 문제, 원폭 피해자 문제, 위안부 피해자 문제 등 세 가지는 한일기본조약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36. [36] 2013다61381
  37. [37] 취소선이 그어져 있어 장난 같이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사실이다. 실제 당시 일본 정부의 공식적 배상이 아니기에 보상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경제적 문제로 보상금을 수령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부 있었고(200명이 넘는 당시 생존자 할머니들 중 60여 명이 수령하였다) 이에 대해 보상을 거절한 측의 비난이 있었다.
  38. [38] 이게 위에서 언급된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 얘기다. 법적 배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과 '아시아 여성기금'은 동일한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39. [39] 하지만 이런 현실과는 달리 중화민국은 '중국의 관대한 도량'을 일본에게 보여준다고 자국민에게 선전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보다 더 관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도량'을 일본인에게 보여준다고 자국민에게 선전했다.
  40. [40] 일반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간의 합의이기에 특별법으로서 효력이 다른 법보다 우선적으로 적용된다.
  41. [41]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의 경우 명문화된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 해당 협약이 법률적 효력을 지닐 수 없음은 한국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제3자의 해석으로도 동일하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한일기본조약이 무효라는 일각의 주장은 말 그대로 일각의 주장이며 제3자에게 이해와 공감을 구할 수 있는 영역이 절대 아니다.
  42. [42] 과거에 체결된 조약이라는 이유로 정권의 연속성을 부정하면 애시당초 일본도 일제 제국주의 시절, 즉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일본국이 된 뒤에 배상을 할 이유 자체가 없다. 연속성이 없다면 애초에 일제와 일본국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43. [43] 진위가 확실하지 않다.
  44. [44] 진보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일본의 회담 당사자나 막후(ex.기시 노부스케)들이 거의 만주국에 관련해서 한몫 단단히 챙겼던 인사들이라(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측 외무대신 특사중 한명이었던 시이나 에츠사부로 역시 기시 밑에서 만주국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박정희의 만주시절과 당시 만주국 관료들의 만남, 소위 '만주국 커넥션'에 의한 야합이라고 주장한다.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403.94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