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1. 개요
2. 가치
2.1. 역사성
2.2. 문학성
2.3. 문화성
3. 정신과 의사들의 분석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閑中錄 또는 恨中錄[1]

사도세자의 정실 혜경궁 홍씨가 말년에 자기 일생을 회고하면서 쓴 수필. 인현왕후전, 계축일기와 함께 3대 궁중 문학으로 일컬어지며 조선시대 궁중 문학 가운데서는 보기 드물게 왕실의 여성이 저술한 책이다.[2]

한번에 쭉 저술한 책이 아니라 혜경궁 홍씨가 여러 차례 저술한 문장을 모은 것으로, 대략 4차례에 걸쳐 썼다고 본다. 첫 번째는 정조 시절에 조카 홍수영에게 요청받아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회고하여 쓴 것이다. 여기서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두루뭉술하게 회피하고 있다. 두 번째는 정조가 승하하고 남동생 홍낙임이 사사되는 슬픔 속에서 친정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이다. 세 번째 역시 친정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번에는 손자 순조에게 자기 한을 풀어달라고 청한다. 네 번째는 정순왕후 김씨 사후에 쓴 것으로 임오화변의 전말을 자세히 전한다.[3]

필사본으로 전해졌으며 여러 이본이 있어 조금씩 내용이 다르다. 예컨대 혜경궁의 어린 남동생들이 궁에 들어올 때 현빈 조씨[4]의 가족들에게 "당색이 다르니[5] 같이 못 놀겠다."고 하는 내용이 있는데, 판본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필사본들은 대부분 순한글로 쓰였다.

2. 가치

2.1. 역사성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의 직접 증언을 저술한 만큼, 사도세자 관련 문제에서는 가장 중요한 1차 사료이다. 혜경궁은 한중록에 사도세자의 광기나 뒤주에 갇혀 죽은 이야기 등을 서술했다.

두 번째 집필한 부분부터 사도세자를 본격적으로 미친 사람으로, 영조편집증적인 사람으로 묘사하는데, 다른 여러 사료에도 이와 일치하는 기록이 많다. 그리하여 임오화변의 전말을 밝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았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너무 간략하고, 승정원일기정조의 청으로 세초되었기 때문에 한중록을 제외하면 상세한 기록이 거의 없다.

현대에 와서는 혜경궁 홍씨가 친정을 옹호하고자 쓴 정치적 글이라며 가치를 폄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버지 홍봉한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자는 의견을 내었는데, 한중록은 세자의 죽음을 막으려 애썼다고 설명한다. 게다가 세자가 죽는 동안 홍봉한은 거의 집행관 수준으로 참여했으나, 한중록은 홍봉한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혜경궁의 작은 아버지 홍인한의 소위 삼불필지(三不必知) 사건에 대한 변명도 있다. 삼불필지란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3가지라는 뜻이다. 세손에게 대리 청정을 시키려는 영조에게 홍인한이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고한 것을 말한다. 영조가 "어린 세손이 노론이나 소론을 알겠으며, 남인이나 소북(小北)을 알겠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대해 한중록에서는, 홍인한은 세손이 다 안다고 답하면 "내가 금지하는 당쟁을 세손이 어찌 안단 말이냐?"라고 트집 잡힐까 봐 사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한 일을 보면 그러고도 남는다. 당황해서 답하기를 "(붕당에 대해)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이 말이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정조가 즉위하자 마자 홍인한이 유배 갔다가 사사되는 일은 없었겠지.[6] 정조 즉위 후에 다들 정후겸만 탄핵하자 "야, 이 대간님들아, 큰 놈은 왜 탄핵 안 하냐?" 꼬집으니, 그제서야 몇 명이 홍인한도 탄핵하였다. 정조는 홍인한도 같이 유배 보내고 곧 둘 다 죽였다.

한중록에서 세자가 미쳤다고 주장하는 기간을 영조 실록에서 찾아보면, 인원 천여 명을 데리고 온양 행궁으로 요양을 가는 동안, 아픈 사람 하나 없고 백성들의 고초도 해결해주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기간 중에 정말로 세자가 미쳤을까 싶은 부분. 영조가 경종 독살설에서 입장이 그리 떳떳하지 못했는데, 여러 벽서 사건 등으로 소론을 치려하자 세자가 막으려고 했다. 그래서 영조와 사도세자간 사이가 나빠졌다고 봄이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당시 조선 조정의 사정에 좀 더 부합하다는 지적도 있다.

다만, 임오화변을 노론이 꾸민 음모라고 주장하는 노론 음모론자들이 이 점을 과다하게 부풀려서, 마치 혜경궁 홍씨마저 사도세자 죽이기에 참여해놓고 한중록에서 이를 미화했다고 주장하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물론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 정치 권력 싸움에서 풍비박산나는 것을 감싸고 옹호한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것이 노론 음모론의 근거로 연결되기에는 부족하다. 아래의 정신과 의사들의 분석을 봐도 그렇고. 또한 위에 언급한 세자의 광증이나 친소론 논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해명이 가능하다는 해석도 있다. 이 부분은 사도세자임오화변 문서에 있다. 즉, 결론을 내리면 한중록은 다른 사료에도 꼭 필요한 교차검증 및 사료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로 충분하며, 내용 전체를 부정할 정도는 아니다.

2.2. 문학성

조선시대의 궁중 문학으로 여인의 관점에서 궁중의 일과 심각한 정치적 격변을 서술한 드문 기록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2.3. 문화성

상세한 서술에서 궁중 용어, 궁중 풍속 및 사대부 사회의 인정 풍속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간택을 상세히 설명했다. 조선의 복식을 포함한 궁중 풍속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다.

3. 정신과 의사들의 분석

2014년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정하은·김창윤 의사가 한중록을 분석했는데, 여기서 사도세자의 정신병 증세가 현대의 정신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오직 상상력만으로 쓴 허구라고 보기엔 어려운 내용이라고 봤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홍씨 집안을 방어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 사후에 기록한 것이므로 내용이 왜곡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사도세자는 당쟁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 Lee DI. The world dreamed by Prince Sado. Goyang: Wisdomhouse;2011. p.53-54. ) 하지만 한중록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신병적 증상에 들어맞는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정신 증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순전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술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접근 가능한 역사적 자료의 양이 부족하여 자료 수집에 제약이 많았고, 이로 인해 근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연구의 가장 큰 제한점이다. 또한 연구자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을 살펴보면 증상에 대한 기술이 상당히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현대의 정신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허구로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하은, & 김창윤. (2014년). 사도세자에 대한 정신 의학적 고찰 : 사도세자, 양극성 장애 환자인가 당쟁의 희생양인가. J Korean Neuropsychiatr Assoc, 53(5), 299-309.

4. 대중매체에서


  1. [1]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이란 이름을 직접 지어 붙이진 않았다. 전해지는 이본에 붙여진 제목들 중 하나를 취해 후대에 붙인 것이다. 그 외에도 한중만록, 읍혈록 등 여러 제목이 있다. 당시에 책 제목을 붙이는 방식이나 정서를 고려하면 한가할 한(閑) 쪽이 좀 더 올바르다는 것이 정설. 혜경궁 홍씨가 극도로 비탄에 빠져 있더라도 역설적으로 '한가한 가운데 저술했다'고 제목을 붙이는 편이 당대 정서상 더 부합한다고 한다. 그러나 恨中錄이라고 표기된 이본도 있으니 恨을 써도 오류는 아니다.
  2. [2] 그외에도 인원왕후선군유사(先君遺事)와 선비유사(先妣遺事)도 있다.
  3. [3] 사도세자의 죽음에 가장 많이 관여한 사람들이 바로 풍산 홍씨이다. 유교 국가의 '효'라는 명분이 없었다면 정조에게 능지처참당했을지도 모르나, 혜경궁은 그저 억울하다고 한다.
  4. [4] 사도세자의 형 효장세자의 빈.
  5. [5] 혜경궁의 친정 풍산 홍씨는 노론, 현빈 조씨의 친정 풍양 조씨는 소론 계열이다.
  6. [6] 정조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데 반강제로앞장섰던 외할아버지 홍봉한과 그의 아들이자 본인의 외삼촌인 홍낙임은 살려주었고, 홍봉한은 봉조하에 제수하기까지 했다. 외가에 이정도로 성의를 보인 정조가 단순 오해만으로 홍인한을 사사했을 리 없다. 설령 혜경궁의 말대로 저 삼불필지 발언이 와전되었다 치더라도, 실록에는 홍인한이 세손 정조의 요청을 대놓고 씹었다는 기록이 있다.이런 점으로 미뤄보아 홍인한이 세손 정조의 승계를 저지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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