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 타이거즈

구 엠블럼 (1982-1995)

신 엠블럼 (1996-2001)

해태 타이거즈

Haitai Tigers

창단

1982년 1월 30일

매각

2001년 8월 1일

모기업

해태제과

연고지

광주광역시 (1982~2001)
전라남도 (1982~2001)
전라북도 (1982~1989)[1]

구단명 변천

해태 타이거즈(1982~2001)
KIA 타이거즈(2001~)

홈 구장

무등 야구장(1982~2001)[2]
(12,500석)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1982~1989)[3]
(10,000석)

최종 우승[4]

9회[5]
1983,1986,1987,1988,1989,
1991,1993,1996,1997

1983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팀

OB 베어스

해태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팀

삼성 라이온즈

해태 타이거즈

LG 트윈스

1991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팀

LG 트윈스

해태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

1993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팀

롯데 자이언츠

해태 타이거즈

LG 트윈스

1996년, 1997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팀

OB 베어스

해태 타이거즈

현대 유니콘스

1. 개요
2. 연혁
2.1. 창단 및 프로 원년(1981~1982)
2.2. 강력한 왕조(1983~1997)
2.3. 타이거즈의 암흑기(1998~2001)
2.3.1. 1998 시즌
2.3.2. 최강의 타선, 최악의 투수진, 최악의 성적, 1999 시즌
2.3.3. 왕조의 멸망
3. 팀 컬러
3.1. 소수 정예
3.2. 투수 왕국
3.3. 엄격한 군기
3.4. 부실한 연봉과 지원
3.5. 의의
5. 해태의 왼손잡이 선수 수난사
5.1. 해태의 좌타자 계보
6. 여담
6.1. 한동안 특정일에 광주 홈 경기를 못 치르던 팀
7. 해태 타이거즈 출신 현역 선수
8. 역대 성적

1. 개요

대한민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단일 구단으로는 가장 많은 챔피언 트로피를 보유한 구단[6]

한국시리즈에서 100%의 우승 확률을 자랑하는 구단이자 한국프로야구에서 최초로 왕조라는 타이틀을 얻은 구단[7][8]

1982년 호남 지방을 연고로 창단돼 2001년 7월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 KBO 리그 소속 구단. 홈경기를 치르는 핵심 연고지는 광주광역시[9]였고 1989년까지는 광역 연고권에 해당하는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홈경기를 분산 개최했다.

대략 이 구단은 프로야구 창설후 처음 20년간의 반, 즉 기아로 바뀌기 전, 1982-2001년 동안 9번 우승[10]했으니, 이 팀을 전설이라 불러도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즉, 당시의 야구 화두는 우승팀이 해태인가, 아닌가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82년부터 2001년 7월까지 해태 타이거즈라는 팀명으로 있다가 기아자동차가 인수한 후 2001년 8월부터 KIA 타이거즈로 전환되었다.

2. 연혁

2.1. 창단 및 프로 원년(1981~1982)

한국프로야구가 시작될 당시 기업주의 고향이 호남 출신인 기업 내지는 호남에 연고를 둔 기업 중에서 해태제과를 택해[11] 창단된 팀. KBO 쪽에서 호남 연고로 접근한, 당시 호남 출신 창업주의 전라도 기반 3대 대(?)기업이었던 삼양사, 금호고속,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에서 모조리 거부당하자[12][13] 정말 궁여지책으로 호남과 연관 관계가 있는 기업 중에서도 중소기업 수준이었던 해태제과가 선정된 것이다. 그만큼 호남 연고 대기업이 없었다는 사실. 해태의 참여가 확정되기 전 광주일보의 김종태 사장은 만에 하나 해태가 단독으로 창단할 능력이 없다면 일본 프로야구 '히로시마 카프'의 경우처럼 전라도민들의 공모 주를 모아 도민 구단을 만들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처음에 지역감정이 심화될까봐 지역연고제를 반대했던 청와대가 그것을 허락해 주었지만, 다른 지역에 하나씩 야구단이 생기는데 호남만 비어있다면 소외론이 나올수도 있고, 호남지역민의 정치관심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꼭 팀이 필요했던것이다.

1981년 10월 28일 동아일보에서 프로야구 창립과정이 처음 세상에 공개되었다. 당시 박삼구 회장이 긍정적으로 뜻을 밝히고 부친인 박인천 창업주에게 건의를 하기로 했었는데 부친이 고령에 병환이 있어서 말을 못하고 있다가 뉴스를 통해 박 창업주가 알게 된것이다. 프로야구 창립을 주도하던 인물 중 하나인 청와대 이상주 수석의 말에 의하면 보도가 나간 뒤, 금호그룹 부회장 박성용이 찾아와, 금호를 지명한것이 대통령 뜻이냐고 물어서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러면 우린 빼달라라고 말해서 사실상 금호의 참여는 물건너 갔다. 부회장 본인의 뜻인지 박인천의 뜻인지 둘다 같은 생각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설로는 창업주가 상의없이 아들들이 멋대로 정한일에 분통을 터뜨려서 [14]불발되었다고 하나 단순히 그 이유 하나만은 아니라는게 더 합리적이다.

현대, 럭키금성, 대우그룹, 선경 같은 최상위권 재벌은 참여하지 않고[15][16][17] 롯데,[18] 삼미, 해태 등이 선정되자 삼성은 이런 듣보잡 피래미들과 같이 못놀겠다고 창단을 포기하려는걸 억지로 주저앉혔다고 한다.[19][20][21] 몇년 후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해태가 프로야구에 참여한건 굉장히 의외인 일이었다. 롯데는 프로야구 창립계획서에 '경쟁 대상인 같은 업종은 가급적 피한다' 라고 써있는데 왜 해태가 들어오냐며 반대를 했다. 급기야 참여 안하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나중에 알려진것에 의하면 롯데 신격호 회장이 부산대신 서울을 연고지로 얻어내려고 강하게 나가가로 뒤에서 조종한것이라고 한다. 해태를 반대하던 롯데는 결국 추진위원회를 못이기고 부산을 연고로 정했다. 호남 연고가 붕뜬 상황에서 박건배 회장이 참여의사를 표력하여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때 해태는 김동엽을 감독으로 선임할 권리를 약속받는다. [22]

우여곡절 끝에 타이거즈는 창단되었지만, 절대적인 선수 숫자의 부족으로 창단 당시 6개 구단 중 가장 적은 14명의 선수로 창단식을 치렀다. 시즌 개막 직전, 1982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결성한 국가대표 선수단에서 무단이탈한 김일권을 우여곡절 끝에 영입하기도 했다. 김일권은 그 해 53도루로 초대 도루왕을 차지했다. 또한 약속대로 초대 감독으로 김동엽이 선임되었지만 코치진과의 불화로 인해 한 달만에 5승 8패라는 성적만 남기고 경질당했고, 조창수 코치의 감독대행 체제로 시즌을 치르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처음부터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한 한국프로야구였지만, 해태는 워낙 선수층이 얇았던 탓에 가끔 지명타자 없이 김성한이 선발투수와 타자의 투잡을 뛰기도 했었다. 한국프로야구에서 지명타자를 쓰지 않고 선수교체도 없이 한 팀이 한 경기를 9명만으로 치른 경우가 딱 2번 있는데, 전부 원년의 해태가 기록한 것이다. 김성한의 투타겸업이 없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참고로 김성한의 1982년 성적은 투수로서는 10승 5패(7위), 방어율 2.89(6위)였는데 다승과 방어율은 팀내 1위였다. 타자로서는 타율 0.305, 홈런 13개(4위), 타점 69점(1위) 도루 10개였다. 둘 중 하나에 더 전념했더라면 더 좋은 성적을 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중론.

1982년 원년멤버[23]

투수

강만식, 김용남, 방수원, 신태중, 이상윤

야수

김경훈, 김봉연, 김용만, 김우근, 김일권, 김종모, 김종윤, 김준환, 박전섭, 임경섭, 조충열, 차영화, 최영조, 홍순만

투타겸업(....)

김성한

선수층은 양적 기준으로 타 팀보다 허약해 보였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선수 개개인 수준이 굉장히 높은편이었다. 투수에 김용남, 이상윤은 국가대표 출신에 강만식, 방수원도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이름 좀 날리던 투수였다. 야수 중에서도 김봉연은 실업야구계를 평정하던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이자 원년 연봉 1위였고[24] 김성한, 김종모, 김준환에 뒤늦게 합류하는 김일권도 국가대표로 잘 뽑히던 선수였기때문. 한마디로 소수정예로 원년리그를 보낸 셈이다. 이름과 달리 스타선수 하나 없다고 감독이 푸념할 정도로 약체였던 삼미 슈퍼스타즈보다 더 얇은 선수층으로도 어째서 4위를 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2.2. 강력한 왕조(1983~1997)

우승 6회라는 전대미문한 대기록을 세운 해태의 상징 검빨유니폼.

1983년 미국에서 야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응용 감독을 영입하였고, 그 외에도 부족했던 선수를 보강하기 위해 재일교포 선수인 김무종주동식을 영입하면서 바야흐로 타이거즈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김응룡 감독은 부임 첫해에 팀을 전기리그 우승으로 이끌고 한국시리즈에서 후기리그 우승팀인 MBC 청룡을 4승 1무로 일축하고 우승을 차지하였으며[25] 이후 1984년과 1985년은 잠시 주춤했지만,[26]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단 둘뿐인 대기록을 세웠다.

참고로 1986년 시즌 우승에는 그 해 변경된 규정의 덕을 좀 봤다. 전해 시즌인 1985년 삼성 라이온즈가 전후기를 전부 싹쓸이하면서 한국시리즈를 소멸 시키는 통합 우승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흥행 참패를 하자 KBO는 전후기 모두 2위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 전후기 중 한 번만 2위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플레이오프를 거치는 방식으로 포스트시즌 규정을 변경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전후기 모두 2위를 한 해태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 전기 1위인 삼성 라이온즈와 후기 1위인 OB 베어스는 플레이오프로 밀려나게 된다. 콩라인이어도 득을 볼 수 있는 희한한 상황이라고 할까...

당시 후기리그가 끝난 후 해태와 OB는 동률로 공동 1위였다. 그런데 당시는 동률인 경우 3전 2선승제로 순위결정전을 치르게 되어 있었고, 포스트시즌 대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후기리그 우승결정전을 치렀다. 여기서 해태가 져서 2위. 전후기 통합성적은 70승 1무 37패를 마크한 삼성이 1위, 67승 4무 37패를 기록한 해태가 2위였지만 이 규정 때문에 삼성은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해태는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해태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결국 삼성과 OB는 플레이오프 끝에 삼성이 이기고 체력을 비축해 놓은 해태가 그 삼성을 잡고 통산 2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1986~89 시즌 해태의 페넌트레이스 성적을 보면(괄호 안은 통합 승률 순위)

1986 시즌 67승 4무 37패 .644(2위) (1위: 삼성 라이온즈 70승 1무 37패 .654)

1987 시즌 55승 3무 48패 .532(2위) (1위: 삼성 라이온즈 64승 44패 .593)

1988 시즌 68승 2무 38패 .642(1위)

1989 시즌 65승 4무 51패 .558(2위) (1위: 빙그레 이글스 71승 3무 46패 .604)

즉 16승 투수 둘(선동열, 이상윤), 30홈런(김성한), 26홈런(장채근)으로 56홈런을 합작한 슬러거를 앞세운, 팀타율도 .283으로 압도적이었던 1988년만 절대적으로 리그를 지배했을 뿐 나머지 시즌에서 해태는 강팀 수준일 뿐 리그를 지배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1986 시즌엔 전, 후기 규정이 있는데다 투타를 보면 삼성과 우열을 가리기 힘든 수준이었다. 방어율, 실점은 비슷했으며 타율은 삼성이 무려 1푼5리나 앞섰지만 홈런은 해태가 훨신 많은 수준(25개 차이), 말 그대로 단일시즌으로 시즌을 치렀다면 비슷하지만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 거기다 대 삼성전에서 11승 1무 6패로 다소 강했다는 점, 무엇보다 262이닝 24승 0.99을 마크한 선동렬의 존재를 보면 우승전력은 충분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1987년의 경우 다윗과 골리앗 수준이었다. 1987년의 삼성은 팀타율 3할을 기록했으며 23승의 다승왕 김시진까지 건재한, 말 그대로 그 다음해의 해태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팀이었다. 해태는 2위권에서 아슬아슬하게 치고받는 수준에다 주전의 줄부진 내지는 부상 때문에 팀타율 .252의 빈타까지 겹쳤다. 하지만 4전 전승으로 삼성을 셧아웃, 명실상부한 "왕조"를 세우는 해가 되었다.

이렇듯 정규시즌에서 롯데 자이언츠보다 8승을 더 거두고도 한국시리즈조차 나가지 못한 1984년의 OB 베어스, 1986년에도 한국시리즈에 나가지 못한 OB 베어스, 통합우승을 거두고도 해태 타이거즈에게 작살난 1987의 삼성 라이온즈가 겹치며 1989년부터는 아예 전ㆍ후기리그 제도를 폐지하고 단일시즌의 체제로 나가게 된다.

1989년에도 빙그레 이글스보다 사실상의 전력은 조금 약해보였다. 물론 기존의 선동열에 이강철, 조계현이 가세한 투수진은 이상군, 한희민의 빙그레와도 막상막하였지만 타선이 그해 홈런왕을 차지하면서 최초로 20-20을 달성한 김성한, 이 해 제2의 코끼리로 등극하며 .318을 찍은 박철우 이외에는 믿을만한 타자가 별로 없었다. 반면 빙그레는 이정훈, 이강돈, 장종훈에 말년의 유승안마저 타점왕에 홈런 2위를 달성한, 그야말로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절정을 찍던 시기였다. 하지만 오히려 4승 1패로 빙그레를 압도하면서 4연패를 이뤄내고 만다.

이러한 4년 연속 우승에는 선동열, 이상윤 등을 중심으로하는 강력한 마운드와 방수원[27], 신동수, 김정수 등이 중심인 불펜진, 김봉연, 김성한, 한대화, 김종모, 이순철 등으로 구축된 공포의 타선, 그리고 뛰어난 용병술과 팀 장악력, 카리스마를 발휘한 김응용 감독의 수완이 절묘하게 맞물려 이뤄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당시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인기팀으로 성장했다. 이때나 요즘이나 여성팬을 데려와야 흥한다는 주장이 나오는건 똑같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해태의 강력함은 변함없었다. 1991, 1993, 1996, 1997년 네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90년대에 들어 마운드에는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임창용, 야수진에는 이종범그 분, 홍현우, 장성호가 등장하여 선동열, 김성한 이순철 한대화의 뒤를 이었다. 1996년과 1997년의 한국시리즈 2연패는 선동열의 일본 진출김성한의 은퇴로 인해 '해태도 한물 갔다'는 평을 뒤엎고 나온 것이라 더 큰 의미가 있었다.

1991 시즌[28]과 1993 시즌은 압도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 해였다. 1991 시즌은 79승 5무 42패(.647), 1993 시즌은 81승 3무 42패(.655)로[29] 2위와 7~8경기차로 멀찌감치 떨어진 상태로 독주를 하였다. 1996 시즌과 1997 시즌은 상위권 4팀이 용호상박인 상태로 치고받았지만 역시 관록의 해태가 2위(쌍방울, LG)를 근소한 차이로 밀어내며 페넌트레이스 1위를 지켰다. 1990년대의 해태는 4번의 우승을 차지했지만 의미있는 것은 모두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이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해태에게는 징크스가 있었는데 우승한 시즌에는 그 해 페넌트레이스 2위팀에게 약했다는 것이다. 1991년에 빙그레와 상대하며 8승 3무 7패로 아주 근소한 우위이기는 했지만 단일팀에게 3무를 기록할 정도로 피튀기는 접전을 많이 벌였으며, 1993년의 삼성(7승 11패), 1996년의 쌍방울과 1997년의 LG(각각 8승 10패)에게는 열세를 보였다. 잘하니까 리그 2위지하지만 1996년을 제외하면 한국시리즈에서 그 2위팀을 상대로 한 수 위의 기량을 보여주며 패권을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1996년에 페넌트레이스 4위로 준PO, PO를 모두 이기면서 한국시리즈에 올라왔던 현대 유니콘스에게 고전하기도 했다. 최종시리즈전적 4승 2패, 정명원에게 노히트 노런을 당할 정도로.

이게 여담으로 달릴 정도로 시즌 팀 방어율 1위를 하고도 포스트 시즌에 못 나간 팀이 있는데 그게 바로 1995년도의 해태였다. 그 때는 타율이 .242(7위)로 엇박자를 달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당시에는 3위와 4위가 3.5게임 차이 이상이면 준플레이오프를 열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종범이 홈런왕을 먹을 뻔한 시즌이었다.[30]

2.3. 타이거즈의 암흑기(1998~2001)

2.3.1. 1998 시즌

그러나 1998년 이후로 해태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모 회사인 해태가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경영난에 허덕이게 되고[31] 이종범의 일본 진출로 팀 전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 선동열, 이종범의 일본 진출도 본인들이 원해서 간 것도 있지만, 팀 입장에서는 현금확보를 위한 면이 컸다. 특히 이종범의 경우 김응용 감독이 향후 10년은 팀을 이끌 주축 선수로 주목했었다는 점에서 그 공백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해태가 삼성, 현대같이 재정만 빵빵했다면 이종범을 잡았을 것이다 요즘 구단들 보자 3할2푼에 30-30, 3할9푼에 84도루를 해대는 선수 그것도 포수와 더불어 수비부담이 가장 크다는 유격수를 겨우 5시즌 뒤에 일본에 잡아가라고 내줄 구단이 있나.. ㄷㄷㄷ

이종범의 해외 진출에 묻혀서 그렇지 한때 에이스 역할을 하던 조계현을 현금 4억원에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고액연봉자인 이순철을 방출시키는 등, 지출을 줄이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8년 전체만 보면 말 그대로 "종범이만 있었어도" 정도로 괜찮았다. 이강철이 15승을 거두며 1992년 이후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고, 12승을 거둔 이대진도 현대와의 경기에서 10타자연속 삼진 잡을 정도로 건재했으며 故 김상진이 생애에서 마지막의 불꽃을 태우듯 3점대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마무리에는 임창용이 철벽같이 버티고 있었다. 일부는 임창용이 삼성 라이온즈 시절보다 이 시기에 더 강력한 구위를 구사했다고 평가한다. statiz 기준 1998시즌 WAR 1위는 임창용 도박꾼이지만 이종범에 버금가는 팀의 운명을 바꾸는 선수였다

게다가 타선도 나쁘지 않았다. 김창희가 조금이나마 성장세를 보이고, 장성호, 이호준이 본격적으로 3할 타자로 발돋움하는 시기였다. 오히려 이종범이 해태에 잔류해서 계속 1996~97년처럼 호령했다면 짜임새는 더 좋았을 뻔했다. 용병도입 첫 해인 만큼 다른 팀처럼 타이론 우즈는 바라지 않아도 스캇 쿨바나 3급의 용병이 있었다면... 하지만 현실은 숀 헤어

전체적으로 투수력도 좋았고 무엇보다 이강철-이대진의 원투펀치와 임창용의 철벽 마무리의 조화가 최고인 시즌이었다. 장성호는 15홈런+타율 5위를 기록하면서 볼넷도 골라내는 대단한 1번타자였다. 여기까지 장성호는 이종범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스피드에서 큰 차이를 보였고, 클린업의 축이었던 홍현우성님이 조금 부진했다. 그것은 이 해 해태가 최저득점(489)을 올리는 원인이 되었다.

마지막 OB와의 2경기를 남기고, 해태는 분수령에 서있었다. 2경기를 모두 이기면 시즌 3위[32], 1무만 거둬도 플레이오프 진출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OB에게 2연전 싹쓸이패(...). 특히 마지막 경기는 임창용이 3회에 등판했음에도 11:5로 대패를 당했다. 그리고 해태는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현대 유니콘스가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순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야만없이긴 하지만 이종범이 있었다면, 그래서 몇 승이라도 더 챙길 수 있었다면 1998년 포스트시즌의 양상은 크게 변했을 수도 있다. 아니 종범이가 아니라 중박이상 치는 타자 용병, 타이론 우즈급은 아니더라도 쿨바, 치멜리스 하다못해 숀 헤어가 풀시즌 .260 15홈런 정도만 하는 외국인 선수였다면 이런 탈락은 없었을 것이다.

2.3.2. 최강의 타선, 최악의 투수진, 최악의 성적, 1999 시즌

IMF 후폭풍으로 해태그룹은 점점 망조를 타고 있었고, 해태제과의 경영난이 악화되면서 팀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1998년 시즌 후 타이거즈는 주력 선수들을 현금트레이드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 팔려갔던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임창용. 대가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양준혁, 황두성, 곽채진, 30억원 등등을 얻어오긴 했다.[33] 하지만 이들도 임창용의 구멍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34] 그나마 쌍방울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쌍방울의 상황은 이보다 더더욱 비참했다. 해태는 이종범과 선동열의 이적료&임대료를 매년 수십억씩 받기라도 했지 쌍방울은 이런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양준혁을 데려옴으로서 1999년은 해태왕조의 마지막 불꽃을 발하듯 엄청난 화력을 뿜을 수 있었다.

극단적인 타고투저 시즌이었던 1999년, 해태 타선은 왕조의 마지막 불꽃을 발하듯 핵방망이를 연신 터뜨려댔다. 양준혁의 가세에, 기존의 홍현우, 장성호가 커리어하이를 기록했으며 트레이시 샌더스, 스토니 브릭스 두 용병 또한 출중한 장타력을 가지고 있었다. 양준혁이라는 핵우산 효과가 엄청났다.[35] 샌더스의 40홈런은 2009년 김상현도 넘지 못한 역대 타이거즈 최다 홈런 기록이다.[36] 그해 팀홈런 개수만 210개를 기록하며 2003년 삼성의 213개에 이어 역대 한 시즌 팀홈런 개수 2위를 기록. 허나 몇몇 포지션에 생긴 구멍과 붕괴한 투수진 문제로 승률은 .457(전체 7위)에 그쳤다.

리그 전체가 타고투저를 타긴 했지만 이 해 해태의 타선은 역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경기 3홈런은 무려 24회를 기록했으며 4 홈런 이상 경기도 8번이었다. 4게임 중 1게임은 3홈런이상 경기였으며, 10득점도 우습게 해댔다. 광주구장에 심심할 때마다 A를 새길 정도로.[37] 1999년이 아무리 타고투저의 시즌이었어도 해태의 210홈런은 대단한 기록이다. 1999년 해태는 팀 홈런 말고도 프로야구에 여러가지 기록을 세웠다. 팀 최다홈런(210),[38] 팀 최다 득점,[39] 그리고 순득점(득점-실점)이 많은 팀 중 최초의 7위 달성!! 구장 문제에 관해 덧붙이자면 해태타선은 잠실 19경기에서 23홈런을 쳤다.[40][41] 이수치를 가지고 만약 이해 해태가 잠실을 홈으로 쓰는 구단이었다면? 산술적으로지만 잠실에서만 9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는 기록이 나오며[42] 원정경기까지 감안하면 210 홈런까진 아니어도 190 홈런정도는 충분히 기록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렇게 핵타선을 가지고도 7위밖에 하지 못한 이유는, 시망한 투수진과 수비진이었다. 우선 에이스 역할을 하던 이대진이강철이 나란히 부상으로 거의 몫을 하지 못했다. 1998 시즌 정도로 했다면 해태는 다시 포스트시즌을 갔겠지만.. 선발 투수진의 젊은 피로 주목받던 김상진마저 청천벽력같은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결국 이듬해인 1999년에 시즌 도중 향년 22세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뒷문을 잠그던 임창용의 부재도 너무나 뼈 아팠다.

원투펀치가 떠나고 김상진마저 암 투병을 할 시기 사실상 에이스로 활약한 곽현희는 팀 최다승인 11승을 올렸음에도 6점대의 방어율(6.15)을 기록했으며, 하나같이 믿었던 선발투수인 곽채진, 오철민, 최상덕 등이 4점 후반~5점대의 방어율을 올렸다. 그나마 유동훈이 신인으로서 4.75에 7승을 올려준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수비진도 영 아니었다. 타이거즈 역사상 손꼽히는 수비수 김종국은 부상으로 단 3경기만 출장하였으며,[43] 그 수비 안 좋은 장성호는 좌익수, 1루수를 떠돌아다녔고 때에 따라서는 흠좀무하게 중견수로도 나왔다. 양준혁은 지명타자로 주로 나왔으며 이호준도 그 전해 지명타자에서 3루수~1루수를 전전하였다. 그나마 1차지명으로 정성훈이 입단해서 3루를 봐준게 다행이었다. 당시 용병제도 도입 초창기상 비슷한 팀이 많았지만 해태는 유독 타력이 좋아도 떠도는 선수가 많았다.

2.3.3. 왕조의 멸망

1998~1999 시즌에 맹타를 휘두르며 활약했던 이호준은 2000년 성영재를 상대로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되었고,[44][45] 결국 1983년부터 장기 집권해 오던 김응용 감독마저 2000년 시즌을 끝으로 삼성으로 옮겼다. 감독의 빈 자리는 2001년부터 김응용 밑에서 타격코치로 있던 김성한 감독이 이어받았다. 그나마 장성호가 외로이 암흑기를 떠받치던 기둥이었다.

2000년 시즌은 전체 순위는 전년도 우승팀 한화 이글스와 신생팀 SK 와이번스가 손잡고 나란히 바닥을 기어주며 그나마 그전해보다 1단계 올라갔지만, 20홈런 타자의 부재, 13승 투수의 부재, 방어율 3점 투수의 부재 등으로 팬들 입장에서는 재미가 없는 시즌이었다. 장성호가 출루율왕을 먹어서 그나마 종범이와 창용이가 떠나고 남은 타이거즈의 꼴찌 추락은 막아줬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대진이 미친 듯이 킬끼리에게 굴려졌고, 다시는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지 못한다.그리고 시즌 끝나고 주전 3루수인 홍현우마저 FA를 통해서 LG 트윈스로 이적해버리면서 장타력이 있는 선수가 남아나지 않는 최악의 사태를 맞게 된다.

이 해에는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그래도 광주의 해태 팬에게는 의의가 있는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5월 18일의 홈경기이다. 해태 타이거즈는 창단 이후 매년 5월 18일에는 경기가 없거나 반드시 무등야구장을 떠나서 원정 경기를 치뤄야 했다. 5월 18일이 광주 시민들에게 어떤 날인지를 생각해 보면 왜 해태가 이날 홈경기를 할 수 없었는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다가 2000년 5월 18일에야 5월 18일에 광주에서 홈 경기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2001 시즌 해태는 그야말로 해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비밀번호 5-7-6을 찍었던 종전 3년을 뒤집을 정도로 끈질긴 모습을 보여주었다. 7월 29일 삼성과 마지막 경기를 벌일 때까지 4위를 놓치지 않았다.[46][47]

그리고 2001년 8월 1일, 해태제과가 기아자동차에 팀을 매각하면서 현재의 KIA 타이거즈로 변신한다. 당시 전라남도광주광역시 연고 기업 중 가장 대기업인 금호그룹에서 타이거즈를 인수해야 한다는 지역 여론이 끓었으나 금호그룹은 프로 구단에 관심이 없는 데다가 자신들의 호남색을 지우고 싶어하는 그룹이여서 무산되었다.[48] 때문에 수도권을 연고로 하는 프로 팀을 창단하려 했고, 그 산물이 인천광역시 연고의 금호생명 여자농구팀이었지만 투자는...

금호그룹 대신 광주광역시 서구 내방동에 아시아자동차 시절부터 군용 및 상용차량 생산 공장을 운영 중이었던 기아자동차가 인수하게 된다. 기아자동차의 인수에 대해 광주광역시 지역 여론은 좋은 편이었다. 기아자동차는 1976년에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하면서 호남에 자동차 공장을 보유하게 되었다. [49] 이 부분은 기아자동차 항목을 참조.

이후 역사는 KIA 타이거즈 참조.

3. 팀 컬러

붉은색으로 대변되며 빨간상의에 검정하의의 유니폼이 상대팀들에게 무시무시함으로 통했는데, 이 디자인은 초대 감독이었던 김동엽 감독이 자신의 취향을 적극 반영한 것이다.

3.1. 소수 정예

해태 타이거즈는 창단때부터 자원이 많지 않아[50] 소수정예로 운영되었다. 그리하여 주전과 백업선수들의 기량차는 엄청났으며, 이렇다 보니 2군도 원년 멤버 프로야구팀 중에서 가장 늦게 생겼다. 타팀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이미 2군을 만들고 있었으나, 해태는 그보다 한참 늦은 1994년에 2군신설했다.[51]

이후 모기업이 기아자동차로 바뀌었음에도 2군 시설은 여전히 부실했고, 팜의 역할을 거의 못하고 있다가 그나마 2012년 2군 구장을 새로 리모델링하며 상황이 나아졌다. 코치의 수도 전구단에서 가장 적었고, 2000년대 이전까지는 코치도 자기네 같은 명문구단을 본받았는지 순혈만을 선호하여 타팀 출신은 거의 오지 못했다.

3.2. 투수 왕국

KBO 역대 최고의 오버핸드, 사이드암, 언더핸드 투수를 다 가졌던 팀 그리고 MLB급 언더핸드 투수를 가질 뻔 했던 팀[52]

해태 하면 떠오르는 것을 물어본다면 많은 이들이 선동열, 조계현, 임창용 등의 투수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 정도로 해태에는 뛰어난 투수들이 많았다. 해태의 에이스는 당대 최고의 투수 중 하나로 반드시 꼽혔을 정도. 해태의 투수진은 1998년 IMF 사태로 모기업이 부도나기 전까지는 매우 탄탄했다. 1980년대에는 선동열, 이상윤, 차동철, 방수원, 김정수, 문희수 등의 쟁쟁한 투수들이 가득했고, 1990년대 초반까지는 선동열-조계현-이강철로 이어지는 강력한 선발라인을 가졌으며, 1990년대 중후반에는 선발 조계현-이강철-이대진 으로 이어지는 원투쓰리펀치에 선동열-김정수-임창용으로 이어지는 언터쳐블 마무리, 또 임창용, 김상진 등의 떠오르는 신예들을 축으로 우승을 이룩하였다.

사실 김봉연, 김성한, 이종범등의 화려한 장타력에 가려서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해태는 기본적으로 투수력에 의존하는 경기를 했다. 해태의 다른 포지션의 선수층은 매우 얇았으나 투수층은 매우 두터웠고, 특히 1980년대에는 방수원, 신동수, 김정수가, 1990년대에는 기존의 김정수와, 송유석, 선동열, 임창용이 중간계투나 마무리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해태 투수진은 난공불락이었다. 해태의 1990년대 이후의 우승은 대부분 투수력에 의존한 우승이었다. 선발-불펜-마무리 가리지 않고 모두 튼튼했던 덕분에 굳이 홈런과 대량득점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고 이는 1점을 내는데 특화된 이종범이 타이거즈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3.3. 엄격한 군기

해태는 다른 팀에 비해서도 군기가 센 것으로 유명했는데, 문제는 이것이 구타와 같은 폭력과 결부되는 똥군기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감독부터가 버젓이 TV 카메라 돌아가는 앞에서 을 구타하는 위인인지라 코치진들도 선수들에게 욕설이나 구타를 일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최향남의 경우 신인시절 해태의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을 못해 군대를 현역으로 갔으며, 한대화가 1993년도 시즌 끝나고 LG로 트레이드 된 것도 이런 똥군기로 인한 감독과의 불화[53] 때문이란 이야기가 있을 정도. 이런 상황인지라 다른 팀 선수들이 해태에 트레이드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LG 소속이었던 손혁과, 두산의 최용호[54], 그리고 삼성의 양준혁이 그 예. 1996년에는 선수들의 불만이 쌓이다 터져 해태 타이거즈 항명사건이라는 희대의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 박충식에 의하면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이런 구타문화가 남아 있었다고 하며, 팀내 멤버 중에서 나이가 3년차 이상은 "형", 5년차 이상은 "선배"라고 부르도록 호칭도 구분되어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선배에 대한 인사도 일단 정지후 90도 하도록 했다.[58] 이건 군대도 아니고.. 참고로 타 팀에서는 보통 나이 차이가 7~8년 이하면 XX(이) 형, 그 이상이면 XXX선배님[59]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30대 중반을 넘긴 최고참급의 선수만이 모든 선수들한테 선배님 소리를 들을 수 있다.해태에서의 호칭법과 인사법
  • 1994년 해태 소속이었던 한대화가 LG 트윈스로 가서 했던 일이 군기 잡는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 LG 트윈스는 신바람 야구란 컬러로 젊은 선수들이 서로 형, 동생하는 사이였는데 기강이 해이해질수도 있다고 생각해 연령이나 커리어나 고참 급이었던 한대화가 군기 반장을 했다고 한다. 해태와 LG의 팀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부분.
  • 1997년 LG 트윈스에서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한 후 얼마 안 되어 최훈재이종범, 홍현우, 이대진이 같이 운동장에서 도시락을 까 먹는 것을 보며, "너희들 밥 먹니?"라며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러자 그들이 먹는 것을 쓰레기통에 치우고 운동장에서 다시 연습하러 갔다고 한다. 또 어느 때는 최훈재가 연습 끝나고 연습 장비를 치우려고 하니 후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바로 치웠다고. 이때 당시 LG에서 이적한지 얼마 안된 상태였으며, 후에 회고하기를 어느구단에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적은 없었다고 한다.[60]최훈재 일화 #1
  • 양준혁이 해태로 이적 후 마련한 광주의 아파트에 이삿짐 트럭을 타고 도착했을 당시, 팀 후배이자 영남대 후배인 오철민과 곽현희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이삿짐 정리까지 다 했다고 한다. 강태원 딸의 돌잔치 때 일부러 양준혁이 늦게 갔으나 해태 선수들 모두 기다리고 있었고, 경기장에서 후배들이 선배들의 간식거리를 준비해 놓지 않으면 혼났다고 한다.양준혁이 말하는 해태 시절
  • 데드볼에 맞아도 아픈 내색은 할 수가 없었다.#
  • 선수들의 휘황찬란한 머리는 주장의 말 한마디에 정리했다.#

2000년대 KIA로 넘어가면서 이종범이대진이 총대를 메고 똥군기 및 악폐습을 줄이는데 노력했지만 2010년대 들어서도 다른 팀들에 비해서는 군기가 쎄다. 김주찬도 한 방송에서 다른 팀보다 군기가 쎈거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2015년에는 경기끝나고 단체로 원산폭격 비슷한 모습이 사진에 찍히기도 했다.

요즘은 군필 유격수가 군기반장을 맡는다고 카더라...#

빡센 군기와 달리 선수들의 충성도가 강한 걸로도 유명하다. 특히 해태의 영광을 겪었던 선수들이 더 그렇다. 없던 살림에 트레이드나 FA로 팀을 떠났던 김상현, 이호준, 정성훈, 홍현우, 장성호, 임창용 등이 그 예인데 김상현처럼 트레이드 되자 가기 싫다며 거부, 심지어 울었다는 에피소드가 꼭 들어있고, 이호준이나 정성훈처럼 이적 후에도 친정팀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61]이는 기아로 바뀐 이후에도 이어져 신종길같은 경우는 한화시절에 자신이 트레이드 대상에 올랐다고 하자 자신은 고향팀아니면 안간다고 선언했을 정도. 또한 임창용도 대표적인 예. 해태에서 삼성으로 팔려나간 이후 꾸준히 기아에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고 다녔고 트레이드까지 요청했었을 정도로 팀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그리고 돌고돌아 우여곡절 끝에 기아로 다시 돌아왔다.

3.4. 부실한 연봉과 지원

요약하자면 타이거즈는 모기업이 해태여서 9번 우승한 것이 아니라 해태였음에도 9번 우승한 것이다.

모기업 해태가 일단 공업화 정도가 낮았던 호남지역의 기업이었기 때문에 재정 상태가 부실했다. 그리하여 프로야구 구단에 많은 돈을 투자할 수 없었다. 구단의 연봉협상 관계자가 신인 계약금을 받으려는 이종범에게 "광주는 물가가 싸기 때문에 서울에서 1억받는 것보다는 광주에서 7000만원을 받는게 낫다"는 드립은 유명하다.

모기업인 해태제과가 당대의 삼미 슈퍼스타즈나 오늘날의 넥센 히어로즈처럼 재정이 영 좋지 못했고,[62] 선수들에 대한 대우가 매우 나쁠 수 밖에 없었다. 최소한 2000년대 후반 넥센처럼 트레이드를 대놓고 하는 악행은 아니었더라도[63] 1980년대 프로야구 구단들이 대부분 그랬지만 특히 해태의 경우 오프 시즌 때 연봉 분쟁이 거의 연례행사이다시피했다. 그런데 이것도 종범이와 동열이가 없었으면 쌍방울처럼 꼴날뻔했다.

당시 대구아재들이 일으킨 해태 버스방화 사건이 있었을 때 홈 구단이었던 삼성 라이온즈는 버스 수리비 및 버스안에 들어있었던 해태 선수들의 물품에 대한 보상도 이뤄졌었는데, 후일 김봉연 선수의 인터뷰를 보면 해태 선수들은 실제 피해액 말고도 버스안에 있지도 않았던 양복이나 야구 물품들이 불탔다고 보상을 요구했고 그런 것들도 삼성 측에서 군말없이 보상을 해줬다는 일화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해태의 지원이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80년대부터 선수단에 대한 대우는 1990년대 쌍방울만큼이나 악명이 높았다. 차라리 삼청태가 해태보다는 나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부상선수들의 재활비도 제대로 주지 않아서 자비로 재활훈련을 하는 등,[64] 지금 기준으로 도저히 프로 구단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다. 1차 선수협 사태의 단초가 됐던[65] '김대현·이순철 교통사고 사건' 역시 해태 구단에서 어떠한 위로도 제대로 해주지 못해 일어났던 일이었다.

심지어는 파파이스 치킨이 먹고 싶다는 외국인 투수 루이스 안두하에게 그냥 광주광역시 양동시장에서 파는 양동통닭을 사다주기도 했다. 이 파파이스 사건과 더불어 당시 김성한 감독이 피칭에 전혀 문제가 없었음에도 강판시키자 분노, 그대로 팀을 떠나버렸다.

이에 1984년에는 선수들이 시즌 개막 초반에 구단주가 참석한 회식 자리에서 회식메뉴로 나온 불고기를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태워 버리면서 침묵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김일권이 야구본색에서 밝힌바에 의하면, 팀내 최고참인 김봉연김준환이 계획했다고 한다. 그리고나서 1년후배인 김일권의 의사를 물어보고 그가 동조하자 벌인 일로 이른바 불고기 화형식 사건. 이후 개인주의적인 성향으로 구단에게 미움받던 김일권이 주동자로 오해를 사게 되었고 급기야 그날 회식 후에 김일권이 김응용 감독에게 항의하다가 따귀를 맞는 일까지 겹쳐 오해는 더 커졌다. 이 사건 이후 김일권은 김응용 감독의 눈 밖에 나버렸고 결국 1988년 태평양으로 트레이드 되는 단초가 된다. 구단이 잘 나갈 때도 이런 판국이었기에, 결국 후에 모기업 사정 악화로 인해 그나마 있던 지원마저 부실해지고 선수까지 팔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자 1997년까지도 기세등등했던 성적은 금새 곤두박질쳤다.

이종범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 당시 김응용이 있던 삼성을 돌아가고 싶은 구단으로 꼽은 것은 바로 이런 선수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KIA의 인수가 결정되고 이종범은 타이거즈에 복귀하게 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삼성에 가고싶다고 직접적으로 얘기한 건 아니고 김응용 감독 밑에서 뛰고 싶다.라는 이야기였다.

우승 후 선수단에 대한 우승보너스가 만원도 안되는 해태제과 종합선물세트였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구단에서 명절에는 종합선물세트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해태의 열악한 지원을 비꼰 진담같은 농담. 거기다 우승보너스를 줄 돈이 없어서 앨범제작까지 시키는 기행을 보여줬다. 참고로 아이디어를 낸것은 당시 해태타이거즈 단장인 이상국, 그래서 나온 게 양수경과 선동열&이종범의 투앤원.(...). 이는 선동열과 이종범이 현역에서 은퇴한 지금은 이것도 추억이 되었지만 당시엔 비웃음거리였다. 셋 다 이름값이 있었던데다가 프로야구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에 가창료를 적지 않게 받는 등(500만원, 당시 물가를 감안하면 결코 적다고 할수없는 금액이다. 2010년대 기준으로 1000만원 넘는 정도의 수준) 나름대로 기대할만 했다만 정작 흥행에서 철저하게 망했기 때문이다. 앨범을 3만장 찍었는데 100장도 채 안팔렸고 결국 앨범은 타이거즈 구단에서 직접 매입해서 팬들에게 기념품으로 나눠주는 신세가 되었다. 이 앨범이 망한 뒤에는 코끼리 감독(김응룡)은 선동렬, 이종범이 다치기만 하면 농담조로 코치에게 '나이트 자리 알아봐라'고 했다는 후문이다.

심지어 구단 담당자 측에서는...

롯데에선 아파트 지으면 되고 삼성에선 컴퓨터 만들면 되지만 우리는 너네 연봉 주려면 과자 몇 트럭을 팔아야 하는지 알아!

라고 선수들에게 대놓고 일갈했다고 전해진다. 이병훈 해설위원의 일화에 의하면 연봉 협상하는 자리에서 "너, 선동열한테 연봉 주려면 맛동산하고 써니텐 얼마나 팔아야 하는 줄 알아?"라고 말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선동열도 현역시절 연봉 1억을 요구했더니 구단 담당자 왈, "야, 1억이면 아카시아껌을 몇 통이나 팔아야 하는지 알아?"라고 답한것도 유명한 일화다. 그래서, 이병훈은 "부라보콘도 있잖아요?"라고 맞받아쳤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식의 말을 현재의 KIA 타이거즈로 빗대보자면 "니 연봉이 K5 몇 대인 줄 알긴 하냐?", "너희들 연봉 주느라 스포티지 몇 대나 조립해야 하는지 알아!" 라고 말하는 식이다. 물론 K5나 스포티지 한 3~40대 정도 팔면 현행 고액 연봉자 연봉이 나오지만, 맛동산, 부라보콘은 한 몇십 만개 팔아야 나오는 금액이다.

후에 해태 타이거즈가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넘어간 이후 박건배 전 구단주는 전 해태 선수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이렇게라도 해서 팀을 이끌어 오지 않았는가. 그 당시 섭섭하게 했던 건 미안하네." 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기도 했다. 김응용의 말에 의하면 박건배 회장은 야구단에 돈을 쓰고 싶어 했으나 박건배 회장 아래 이사진들이 야구단에 돈쓰는건 돈낭비라고 했다고 하며 박건배 회장을 옹호하고 있었다고 한다.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겠지만.

이후 해태그룹은 전자사업, 중공업사업까지 진출하는 몸집불리기를 했는데, IMF 크리를 맞고 쌍방울과 선수를 팔아 연명하는 지경까지 이르자 결국 야구단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연습 구장도 마련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체력단련실은 일개 동네 헬스클럽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해태제과에서 생산하는 일부 제품들 문서를 보면 "너희들 연봉 줄려면 ○○○ 몇 개 팔아야 하는지 알아?!" 하는 개드립이 달려있다(...). 이 개드립의 예외라면 해태 타이거즈가 현대자동차그룹으로 인수된 이후에 출시된 마루시리즈[66], 오사쯔허니버터칩 정도이다.

3.5. 의의

해태 타이거즈의 강력함은 다른 팀들에게는 공포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끈끈한 근성야구[67]는 당시 호남인들의 일상의 유일한 낙이요 희망이었다. 우스갯소리로, 해태를 응원하지 않는 타 구단의 야구팬들은 "우리 팀이 이기는 것을 보러오는 것이 아니라 해태가 지는 것을 보러온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지금으로 비교하자면, 우스갯소리로 해태 타이거즈같은 국가대표팀 VS 기타 야구 구단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당대의 최강 라인업이자 국가대표급의 슈퍼스타들만 모여있던 곳은 명문구단 해태 타이거즈였기 때문이다.

워낙에 전설적인 그 이름의 무게로 인해서 지금의 KIA 타이거즈는 해태의 전설에 좀 눌려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KIA는 해태의 계보를 계속 이으려고 함과 동시에 해태색을 지우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야구 오래봤던 올드팬들의 반발이 심해지니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워낙에 성적이 좋은 전설적인 구단이며 호남을 연고로 한 탓에 지역 출신 선수들에게는 선호도가 높았다. 예를 들면 군산상고를 나온 최해식은 쌍방울이 창단되는 해 졸업하여 지역 우선 지명을 당하면서 '해태 가고 싶은데 1년만 늦게 창단되지...'하며 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뒤 트레이드 되어 해태 선수가 되었는데 최해식의 증언에 따르면 우승 보너스는 나쁘지 않았던 편이라고 한다.

위의 탄생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해태의 재정이 영 좋지 못한 상황에서 구단을 억지로 창단했고 마음대로 해체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 마냥 해태 구단만을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전라도 지역에 대기업이 없는 것이 모든 것의 원인이다. 만약 풍족한 모기업을 뒤에 두고 창단을 했다면 해태와 같은 성적이 나왔을까. 그런 점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지금도 해태 전성기를 보낸 김봉연, 김성한, 이병훈 등의 OB들의 해태 부심은 대단하다.

하지만, 광주일고 출신인 박재홍은 많은 계약금을 줄 수 없었던 해태를 거부하고 현대와 계약했다.[68]

최초의 응원단장 임갑교 옹과 구슬픈 곡조의 응원가 목포의 눈물로도 유명하다. 이는 해태의 첫 우승 당시 잠실야구장에서 제창한 것이 유명한 장면인데, 프로야구의 출범이 소위 3S 정책의 일환이였지만, 역으로 호남 지역에서는 역사의 상처를 프로야구 승리의 기쁨으로 표출하는 분출구가 된 것이 아닌가하는 해석을 할 수 있다.

야구 자유기고가 김은식은 2009년에 펴낸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에서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을 통해서 표출된 호남의 정서를 1980~90년대 현대사의 주요 장면과 연결시켜서 서술하고 있다. 당시 "타지에 나가 일을 하면서 살던 전라도 사람들에게도 별로 다를 바가 없어서, 전라도 바깥에서 마음놓고 자유롭게 전라도 사투리를 쓸 수 있는 곳은 야구장밖에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는 지역연고가 더욱 강했던 시절임에도 해태 타이거즈가 전국구급의 구단으로 인기가 많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4. 유니폼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해태 홈경기 유니폼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경기 유니폼을 본딴 것이었다.

그러나 원정경기 유니폼은 매우 독특해서 다른 나라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빨간상의에 검은 바지였고, 이는 김동엽 초대감독의 디자인으로 알려져 있다. 해태 런던 드라이진에 붙어있었던 영국 버킹검궁 근위병의 복장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설이 있다. 이 유니폼은 하도 강렬한 인상을 줘서 해태 타이거즈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69] 또한 검은 바지는 열을 흡수하여 여름만 되면 선수들이 땀 때문에 고생했다고 한다. 이종범이 예전에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일명 "검빨 쫄쫄이" 유니폼의 단점을 자세히 이야기한 적이 있다.

1996년부터는 원정과 홈경기 유니폼 모두 앞가슴의 "해태" 한글 로고를 영문으로 바꾼 새로운 유니폼이 도입된다.

해태의 검빨 유니폼은 아직도 올드 야구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팬들은 올드 유니폼 데이를 하면, 당연히 하얀색의 홈팀 전용 유니폼만 보다가 검빨 유니폼을 보니 적응이 잘 안되는 모양..

구단 쪽의 반응은 영 미지근했지만, 2011년 7월 26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실시.[70] 아이러니한 것은 이 유니폼을 입은 2연전을 삼성에 전패했고, 이것이 KIA 후반기의 몰락의 시초가 되었다. 결국 4위로 정규 시즌을 마치고, 포스트시즌에서도 광탈... 저주받은 유니폼인가...

2013년 8월 11일에도 올드 유니폼 데이를 실시했다. 이날도 삼성과의 경기를 가졌으며, 이번에는 삼성전 연패를 끊는 귀중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5. 해태의 왼손잡이 선수 수난사

KBO 리그 내에서 희한할 정도로 왼손잡이 선수가 희귀하거나 잡아와도 제 역할을 못하는 두 팀[71] 중에 하나였다. 삼성 라이온즈랑 정 반대다

선동열, 김성한, 이순철, 조계현, 이종범, 홍현우 등등 해태왕조를 이끈 선수들은 예외없이 오른손잡이다.[72] 타자쪽에선 그나마 장성호라도 있지[73] 투수쪽에선 왼손잡이는 김정수, 신동수, 강태원 정도를 제외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74] 때문에 김응용 감독은 투수든 타자든간에 왼손잡이를 데려오려고 그렇게 동분서주 했고[75] 트레이드로 박노준, 정성룡, 김상훈, 동봉철 등을 데려오고[76], 결국 양준혁을 데려오면서 그 소원을 풀었지만......1년만 뛰고 LG행(...) 1980년대 중반에는 주전 라인업중 이순철 한 명 빼고 죄다 '김'씨에 오른손잡이라서 킴스클럽'김씨타선', '가장 한국적인 타선'[77] 소리도 들었다. 그런데 정작 주전라인업중 왼손잡이가 3~4명이되던[78] 1999년에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돈이없었으니 이해하자

왼손잡이에 혈안을 띈 해태와는 다르게 LG 트윈스는 정반대로 뛰어난 왼손잡이들이 많았다. 이상훈, 김재현, 이병규, 박용택, 봉중근 등등... 물론 왼손잡이들이 넘쳤던 만큼 LG에는 희한하게도 뛰어난 오른손잡이 거포가 없는 실정이다. 사실 오른손 거포는 리그에서도 드물긴 하다. 해결사로 통했던 한대화도 오른손잡이였지만 거포는 아니었고, 그 외에 오른손 거포는 현재까지 없다시피하다. 거포로 키우려 했던 김상현, 박병호, 정의윤타 팀에서 펄펄 나는데(...)

그나마 왼손 타자들은 KIA 타이거즈로 넘어오면서 이용규, 김원섭, 최희섭 같은 선수들이 들어오며[79] 해태 시절에 비해 많이 나아졌으나 왼손 투수는 여전히 없다시피할 정도다.(...) 왼손으로 공 던질줄만 알면 투수한다는 농담이 공공연히 돌 정도. 그나마 2009년 이후에 양현종이 포텐이 터지면서 조금은 나아졌다. 물론 지금도 왼손으로 공 던진다는 이유로 1군에 있는 투수는 수두룩하다.[80][81]

5.1. 해태의 좌타자 계보

  • 김일환 (1983~1987)
    • 1982년 롯데 자이언츠 창단 멤버였으나 이듬해 해태로 트레이드된 1루수. 실업야구 한국화장품 시절에는 27경기 연속 안타라는 대기록을 세운 강타자였으나, 해태에서는 김봉연, 김성한 등에 밀려 잘해야 백업 신세였다. 1987년 태평양으로 이적하여 이듬해 은퇴할 때 까지 통산성적은 타율 0.240, 76타점, 8도루였고 홈런은 한 개도 없었다.(...)
  • 송일섭 (1983~1988)
    • 1983년부터 해태에서 뛰기 시작한 좌타 외야수이다. 그가 그때부터 이적한 88년까지는 87년 박철우, 88년 흑역사김성규 빼고는 그가 정말 말 그대로 유일한 좌타자였다. 1985년 해태에서 103경기 338타수 104안타 15홈런 41타점 타율 0.308을 기록했다. 이후 1989년 빙그레에서 반짝 부활한 것을 빼면, 주로 대타 전문으로 활동했다. 해태에서는 좌익수와 우익수로 뛰었고, 빙그레에서는 중견수도 봤다.
  • 김성규 (1988~1991)
    • 1988년 입단한 외야수이다. 해태의 좌타 갈증을 풀어줄듯....했으나, 기대에 비해서 너무 못했다(...) 첫해 80경기 출장해 타율 2할 8푼에 8도루로 나름대로 선전했다. 그런데 그 다음해 시즌의 1/3도 못 뛰고 타율은 1할 5푼대로 추락하더니 그 다음해도 겨우 80경기 뛰고는 0.245에 6타점 2도루. 91년까지 뛰고 쌍방울로 이적해 93년에 은퇴했다.
  • 박철우 (1987~1993)
    • 1987년 입단하였다. 포지션은 좌익수였다가 전성기 찍고는 지명타자로 활약하였으며, 가끔 1루수로 나오기도 했다. 1993년까지 해태에서 뛰었고, 1997년 쌍방울에서 은퇴한 선수. 큰 덩치와 느린 발로 전형적인 거포의 외형.......이었으나, 커리어 하이인 1989년 홈런이 13개(...)였다. 타율도 3할을 넘긴 것은 1989년밖에 없었다(0.318). 하지만 좌타자가 그밖에 없었던 해태의 사정상 중심타선에서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짧고 굵은 선수생활을 했다.
    • 933경기 출장 2813타석 2487타수 695안타 58홈런 370타점 통산타율 0.280
    • 아들은 두산 베어스 우투좌타 포수 박세혁이다.
  • 박노준 (1992)
    • 지금 SBS에서 해설하는 "손가락을 살짝 벌렸죠? 스플리터에요" 와 "아 넘어갔어요, 끝났어요 기아우승"으로 악명높은 그 박노준 맞다. 1992년 OB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되어 왔다. 1991년 OB에서 타율 0.293에 19도루의 준수한 성적으로 전성기를 계속 구가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92년 딱 서른이 되던 해 해태에서의 성적은 2할 4푼에 11도루(...). 1시즌만 뛰고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었다. OB-해태-쌍방울 테크트리라니 안습. 보통 이런 테크트리(강팀-열악한 강팀-신생팀)면 그냥 어영부영 은퇴할텐데... 쌍방울로 트레이드 된 이후에는 보란듯이 부활한다(...) 심지어 1994 시즌에는 OB시절에도 못 한 3할 타율을 기록했다. 김응용이 배아파했을 선수.
  • 김상훈 (1994~1995)
    • 2000년대 중반 위의 박노준과 함께 직구 아님 변화구, 초시계 드립으로 야구팬들에게 욕을 먹던 SBS 스포츠의 전 해설위원이자 현 SPOTV의 해설위원. 그렇지만 해설위원 시절과는 달리 선수시절은 미스터 청룡/LG라 불리운 MBC 청룡LG 트윈스의 대표 타자였다. 88년 타격왕과 90년 1루수 골든글러브를 차지했고 이적 직전 시즌인 1993년에는 타율 0.285, 12홈런 71타점으로 주포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 연봉협상 마찰과 올스타전 쪼인트 사건으로 한대화와 사이가 안좋던 해태와 송구홍의 입대, 김상훈의 하락세에 의구심을 가지던 LG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1993년 12월 1일 한대화, 신동수, 허문회, 김봉재 - 김상훈, 이병훈의 트레이드가 성사된다. 당시 전문가들은 해태의 승라라고 생각했으나... 1994 시즌이 시작하자 트레이드의 핵심이었던 김상훈은 부상에 시달리며 2할 3푼대로 주저앉은 반면 한대화는 타율 0.297, 10홈런 67타점으로 부활에 성공하였다. 결국 이해 무너진 김상훈은 1995 시즌까지 뛰고 은퇴를 선언, 이 트레이드는 해태에게 있어 흑역사가 되었다.
  • 동봉철 (1996.05~1996.11)
    • 신인 시절인 1992년 3할-두자릿수 홈런-20도루로 삼성 라이온즈의 톱타자로 활약했으나 방위시즌인 1993년을 정점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거기에 양준혁 ,최익성 ,신동주가 외야주전을 차지한데다가 백인천 삼성 감독과의 불화가 겹쳐서 잉여자원이 된 1996년에 김태룡과 같이 이병훈, 김훈을 상대로 해태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는 1할 중후반의 타율에 그치며 패망. 결국 우승반지만 득템하고 96년 11월에 LG로 이적하면서 저니맨 커리어를 쓰기 시작한다.
  • 최훈재 (1996.11~1998.12)
    • 어떻게 보면 해태의 제대로 된 왼손잡이 타자 계보의 끝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 LG에서는 김재현박준태, 노찬엽, 심재학 에 밀려서 왼손 대타-외야 백업 역할이었고 96년 11월 6일에 최향남을 상대로 트레이드를 되어 해태로 오게 되었다[82]. 해태에서의 2년간은 97년엔 3번타자로 뛰며 우승을 이끄는 등 상당히 준수한 기량을 보여주면서 탈쥐효과를 입증하나 싶었으나, 트레이드 당시 LG로 건너간 최향남의 포텐이 터지면서 묻혀버렸다(...) IMF 이후 재정난이 심해진 해태는 최훈재를 1998년 시즌 종료 후 두산 베어스(당시 OB)로 넘기면서 그와 해태의 인연도 끝나게 된다.

이상하다. 박재용은 왜 언급이 없지?

6. 여담

6.1. 한동안 특정일에 광주 홈 경기를 못 치르던 팀

해태 타이거즈는 1982~1999년까지 5월 18일광주에서 경기를 한적이 없다. 출범 전부터 지역감정 때문에 문제가 생길것을 우려한 5공 군사정권이 지역연고제를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허락을 해줬는데, 그렇다고 손을 놓을 생각은 없었는지 KBO에 압력을 넣어서 5월 18일에 광주에서 경기가 안열리는 일정을 만들도록 압력을 가한것이 아닌가 추정하는 의견이 있었는데, 실제로 문건을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5월 18일어떤 날인가를 생각한다면 이해가 쉽다. 그날 경기가 없더라도 전후로 해서 광주경기가 잡힌다면 손을 쓰려고 했던것이다. [83]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5월 15일부터 이틀간 무등 야구장에서 해태와 삼성의 주말 2연전이 편성돼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정부에서 그 시합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치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해당 경기 날짜가 5월 18일과 가장 가까운 주말이었던 만큼 5.18 추모기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분노한 시민들이 야구장에서 소요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84][85]

KBO 총재 서종철이 정부 관계자들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을 하고 경기를 그대로 진행시켰다. 정부의 우려와 달리 경기중이든 경기 후이든 아무 소요사태가 없이 일정이 무사히 진행됐다.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해당 사항은 4분 29초부터 보면 된다.

2017년 경향일보에서 보도한 내용을 보면 국군 기무사령부의 ‘5·18 대비 광주지역 프로야구 경기 일정 일부 조정’문건에서 지난 1986년 당시 5월17일을 전후한 광주권 안정을 위한 당국의 권유라는 이름으로 5월 18일 MBC 청룡과의 경기를 전주로 바꿨다는 내용이 나온다.

5.18에는 광주경기를 하지 않는다는 이 암묵적 룰은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에서야 깨지게 됐다.[86]

기록을 보면 1991,93, 95, 97, 98년의 5월 18일에는 전주와 군산 등에서 홈경기를 치렀다. 즉, 1983~1990년에는 아예 해태의 홈경기가 이날 일정에 잡히지 않았으며, 그 이후에는 홈경기는 하되 전주와 군산 등으로 장소를 옮겨서 열리게 했던 것이다.

프로야구 출범 이후 5월 18일무등 야구장에서 해태 홈경기가 열린 첫 해는 2000년이었고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였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경기에서 해태는 회장님에게 노히트 노런을 조공하는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7. 해태 타이거즈 출신 현역 선수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단 하루라도 입었던 선수 중에서 여전히 현역 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 선수는 2018 시즌을 기준으로 두 명이다.[87]

2016년 삼성에서 방출된 임창용이 기아에 입단했고, 2018년 LG에서 방출된 정성훈이 다시 고향팀 KIA 타이거즈에 돌아오면서 기아는 마지막으로 남은해태 출신 투수 타자를 모두 보유한 팀이 되었다. 둘 모두 빼어난 실력을 가지고서도 원치 않은 트레이드 대상이 되어, 오랫동안 돌고 돌아 다시 고향팀으로 돌아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해태 타이거즈가 치른 마지막 한국시리즈이자 우승 시즌인 1997년 한국시리즈를 경험한 현역 선수는 임창용이 유일하다.[88]

8. 역대 성적

­

우승

­

준우승

­

포스트시즌 진출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 순위

팀이름

경기수

승률

1982

4위/6팀[89]

4위

해태 타이거즈

80

38

42

0

0.475

1983

2위/6팀[90]

우승

100

55

44

1

0.556

1984

5위/6팀[91]

5위

100

43

54

3

0.443

1985

3위/6팀[92]

3위

110

57

52

1

0.523

1986

2위/7팀[93]

우승

108

67

37

4

0.644

1987

2위/7팀[94]

우승

108

55

48

5

0.532

1988

1위/7팀[95]

우승

108

68

38

2

0.639

1989

2위/7팀

우승

120

65

51

4

0.558

1990

2위/7팀

3위

120

68

49

3

0.579

1991

1위/8팀

우승

126

79

42

5

0.647

1992

2위/8팀

3위

126

71

54

1

0.567

1993

1위/8팀

우승

126

81

42

3

0.655

1994

4위[96]/8팀

4위

126

65

59

2

0.524

1995

4위/8팀

4위[97]

126

64

58

4

0.524

1996

1위/8팀

우승

126

73

51

2

0.587

1997

1위/8팀

우승

126

75

50

1

0.599

1998

5위/8팀

5위

126

61

64

1

0.488

1999

7위/8팀[98]

7위

132

60

69

3

0.465

2000

6위/8팀[99]

6위

133

57

72

4

0.442

이후 역사는 KIA 타이거즈


  1. [1] 제8구단 쌍방울 레이더스의 창단으로 전북 연고권 양도
  2. [2] 이후 무등야구장은 KIA 타이거즈가 2013년까지 사용하다 챔피언스 필드로 옮겨간 후에는 아마 야구장이 되었다.
  3. [3] 전북 연고 제8구단 쌍방울 레이더스가 창단되기 전까지 전북은 해태의 광역 연고지였다. 이 때문에 전주가 홈 경기 분산 개최도시로 선정됐다.
  4. [4] 우승 엠블럼은 KIA 타이거즈항목 참조.
  5. [5] 80년대, 90년대 18시즌동안 절반인 9시즌 우승을 차지하였다. 우승률 50%!
  6. [6] 타이거즈는 무려 11회(해태 9회+KIA 2회)에 걸쳐 챔피언 타이틀을 얻었다. 프로야구는 삼성 라이온즈가 8회 우승으로 따라가고 있고, K리그성남 FC가 7회(일화 시절 포함), KBL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기아 시절 포함)가 6회, V-리그대전 삼성 블루팡스가 8회에 걸쳐 우승을 차지했다.
  7. [7] 1983, 1986, 1987, 1988, 1989, 1991, 1993, 1996, 1997년 총 9번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모두 우승했다. KIA 타이거즈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한국시리즈에 2009, 2017년 2번 진출해 모두 우승을 거두었다.
  8. [8] 이 팀에 이어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 삼성 라이온즈가 차례로 왕조 타이틀을 얻었다.
  9. [9] 창단 당시에는 전라남도 광주시.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돼 전라남도에서 분리된 것은 1986년이었다.
  10. [10] 좁게 보면 1983~1997년의 15시즌동안 9회 우승
  11. [11] 해태제과는 당시 광주광역시전주시에 공장을 두고 있었다. 광주공장은 지금도 있지만 전주 팔복산단에 있던 공장은 사라졌다. 더불어 해태제과 창업주였던 박병규 회장의 고향이 광주광역시이기도 했다.
  12. [12] KBO 리그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호헌(전 MBC 야구해설 역임)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호남 출신 후보 기업군 중에서 프로야구단을 맡을 만한 능력이 되는 대기업은 매우 적었다"고 했을 정도로 호남의 기업 경제 기반은 수도권이나 영남권에 비해 매우 취약한 편에 속했다.
  13. [13] 참고로 저 세 기업 모두 스포츠 쪽 보다는 문화예술 분야나 학술 지원 분야에 더 관심이 많은 기업들이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을 통해서 클래식 음악과 순수미술 분야 쪽을 꾸준히 지원해왔고, 교보그룹은 창업자 신용호 회장의 호를 딴 대산문학상을 통해 문학계 인재 양성쪽에 큰 공을 들였다. 삼양그룹 역시 창업자 김연수 회장의 호를 딴 수당재단을 통해 중고교 장학사업을 전개해왔다. 그나마 삼양사는 휘하에 사이클 실업팀을 두고 있기는 하다.
  14. [14] 실제로는 금호그룹이 프로스포츠에 참여하는것을 꺼리는 풍토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에도 금호그룹은 계열사인 금호생명에서 잠깐 여자 농구팀(현대의 구리 KDB생명 위너스)을 운영한것을 제외하면 프로스포츠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1988년에 축구계의 요청으로 호남 연고 컨소시엄 구단을 창단하려다가 포기했고 2003년에도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을 창단하려했으나 광주/전남권의 초강력 반발로 재차 포기했다. 그 뿐만 아니라 삼성처럼 시스템이 탄탄하지 못한것도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15. [15] 시간이 지나며 프로야구가 시장성과 홍보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검증되고 나서야 이들도 야구판으로 끼어들게 된다. 대우는 그러기도 전에 해체되었지만
  16. [16] 당시 현대그룹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준비해야된다는 이유로 고사했고, LG그룹구자경 회장이 해외에 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실무진에서 책임질수 없는 큰 결정을 할수 없기에 고민만 하다가 결국 MBC 청룡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때문에 구자경 회장이 한소리 들었다고 한다.
  17. [17] 그리고 선경그룹은 스포츠팀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전두환의 반농담으로 인해 축구팀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유공 코끼리였다.
  18. [18] 2000년대 이후로 한국 5대 그룹으로 언급될 정도로 성장한 롯데지만, 1980년대 당시 롯데는 재벌순위 49위였다.
  19. [19] 일본도 사실 프로야구 참가 기업들 면면을 보면 재계 일류기업은 아니다. 언론사(요미우리, 주니치), 철도회사(한신, 세이부), 유통기업(라쿠텐), 식품회사(니혼햄, 야쿠르트, 롯데), 인터넷기업(DeNA), 2선급 자동차회사(토요), 금융업체(오릭스) 등등. 그나마 일류기업이라고 할만한게 소프트뱅크 정도. 과거에는 한신을 포함해 고쿠테츠(국철, 야쿠르트 전신), 니시테츠(세이부 전신), 난카이(다이에 - 소프트뱅크 전신), 한큐(오릭스의 전신), 킨테츠(오릭스에 합병) 등 아예 철도회사로 12개팀 절반(6개팀)을 채웠고 특히 칸사이권 4개팀(한신, 난카이, 한큐, 긴테츠)은 모두 철도회사팀이었다. 그래서 일본도 한국과 같이 기업명제로 운영하는것이다.
  20. [20] 삼성 입장에선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 누가뭐래도 삼성은 대한민국에서 내노라하는 대기업이고 프로야구에 선정된데는 다 삼성과는 비교 자체가 안되는데였기 때문. 삼성이 아닌 타 대기업들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것이다.
  21. [21] 그렇게 경쟁자들을 비하했던 삼성은 프로야구가 시작되자마자 MBC에게 7:11 대역전패라는 매운맛을 본걸 기점으로 2001년까지 그렇게 비하했던 팀들에게 매운맛을 제대로 보게 된다. 장본인은 당근 해태.
  22. [22] 창립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감독 한명 쯤 원하는대로 해주는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23. [23] 창단은 14명이었지만 뒤에 김일권을 포함에서 몇 명이 더 들어오기는 했다.
  24. [24] 프로야구 출범 당시 KBO에서 선수들의 롤모델로 지정한 것만으로도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25. [25] 공교롭게도 당시 MBC 감독은 바로 전해 감독직에서 물러난 김동엽이었다. 그는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한껏 복수심을 불태웠지만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해 한국시리즈 개막이 약 1주 정도 연기되었고 그 와중에 터진 보너스 지급문제로 인해 선수단의 결속력이 와해되면서 해태에게 속절없이 깨지고 만다.
  26. [26] 1984년은 롯데 자이언츠위대한 거인의 별을 내세워 삼성을 격파해 우승하였고, 1985년은 삼성 라이온즈가 지난번에 당한 것 땜에 빡쳤는지 혼자 다 해먹었다.
  27. [27] 패전 처리조로도 출전하였다.
  28. [28] 이때 해태는 한국시리즈에서 빙그레를 3번째로 꺾었는데, 이로 인해 빙그레는 창단한 뒤 5년 동안 4번 한국시리즈에 올라 3번은 해태에게, 1번은 롯데에게 모두 깨지며 4회 준우승에 머무르는 안습한 행보를 보였다.
  29. [29] 126경기 체제에서는 역대 2위이다. 1위는 83승 43패를 기록한 08년의 SK(.659)
  30. [30] 당시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치르던 이종범은 규정으로 인해 홈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종범은 광주에서만 출전하면서 63경기에서 16개의 홈런을 쳤다. 그해 홈런왕 김상호가 25개의 홈런을 친 것을 감안하면, 사상 최초 홈런 - 도루왕 달성도 불가능한 것 만은 아니었을듯.
  31. [31]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우승후 정확히 1주일뒤 모기업인 해태제과가 부도났다.
  32. [32] 승패는 같지만 10승 8패로 LG에 우위를 보였기에 준플레이오프 1차전은 광주에서 치루게 되는 것이었다.
  33. [33] 임창용에 앞서 삼성은 위에 서술한 것 처럼 조계현을 4억원에 사갔다. 비슷한 시기에 삼성은 이순철, 정회열을 영입했는데 이쪽은 해태에서 방출된 것을 영입한것이다.
  34. [34] 역시 마무리투수와 중심타자의 가치 차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압도적인 마무리투수는 1994, 97년의 이종범급이 아닌 이상 아무리 뛰어난 타자라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양준혁은 1년간 32홈런, 21도루를 기록하며 괜찮게 활약했지만 곽채진은 임창용만큼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황두성은 아예 1군에서 10경기도 뛰지 못하고 2000년 시즌 후 방출되었다. 그리고 그는 현대로 들어가 현대의 마지막 세이브 투수가 된다.
  35. [35] 양준혁이 떠난 이듬해 해태는 이호준을 SK로 보내고 홍현우마저 길고긴 하락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절반도 안되는 86홈런을 기록한다. 파크팩터상 광주가 잠실보다 홈런이 잘나오는 구장이므로 해태 입장에선 매우 쪽팔린 기록이다
  36. [36] 샌더스는 당시 40홈런, 94타점 .247/.408/.575를 기록했다. 타율만 가지면 공갈포지만 이 해 출루율이 타율 2위(.349)의 이병규를 능가할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101개의 볼넷 뒤에는 133개의 삼진 또한 있었다. 즉 이 선수는 홈런/볼넷/삼진 3개중 하나였던 독특한 선수였다.
  37. [37] 한 이닝에 10득점 이상을 기록할 때, 당시 전광판들은 이닝별 점수를 한 자릿수밖에 표시하지 못하는 성능 때문에 10 이후의 숫자를 알파벳으로 표기했다.
  38. [38] 4년 후에 이승엽이 56홈런을 친 삼성이 깼다.
  39. [39] 2000년 현대가 깼다.
  40. [40] 그 요인에는 괴물이었던 트레이시 샌더스의 활약이 컸다. 잠실에서만 무려 9개의 홈런을 치며(이승엽이 1999년 잠실에서 4개 2003년 2개를 쳤다는 것을 기억하자.. 물론 이승엽이 잠실에서 잘했던 적도 있었다 1998년에는 무려 8개, 2002년에는 7개를 쳤었다. 하지만 샌더스에게는 안됐다.) 진정한 파워히터의 홈런은 구장이 문제가 아니라는것을 보여줬다. 하지만 홍현우양준혁도 잠실에서 많은 홈런을 기록했으며, 홈런과는 관계없는 최해식이나 박계원도 잠실에서 홈런을 기록할만큼 이팀은 이해에 홈런에서만큼은 복이 있었다.
  41. [41] 그와 반대로 해태의 2연속우승이었던 1996,97년에는 OB 베어스를 상대로 잠실에서 단 한개의 홈런도 기록하지 못하면서 피홈런만 15개를 기록했다. 잠실이 아무리 넓다 해도 18경기에서 홈런을 단한개도 치지 못한것 또한 진기록. 반면 LG 트윈스상대로는 1997년에만 9경기에서 7개의 홈런을 치긴 했다.
  42. [42] 이것은 다른 잠실 팀 원정경기까지 합산
  43. [43] 그 빈 2루수자리는 홍현우가 채우게된다.
  44. [44] 다만 이쪽은 1999 시즌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진이 안습이라 투수진 보강을 위해 트레이드됐다는 의견도 있다.
  45. [45] 2000년도 투수진은 여전히 나빴다. 곽현희, 곽채진, 오철민 등의 투수들은 역시 그저그런 성적을 내 주었다. 유동훈은 2년차 징크스로 묶였으며, 이대진은 마무리 알바 뛰면서 혹사당하다가 길고긴 재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게다가 잠수함 투수도 없었다. 이강철은 삼성에 FA로 이적했고, 보상 선수인 박충식은 재활중이였기때문, 결국 이호준을 주고 성영재를 받아오는 트레이드를 하게 되었다. 이 절망적인 투수진에서 그나마 최상덕오봉옥이 제 몫을 해 주었다.
  46. [46] 물론 2001 시즌은 삼성-현대-두산 3강체제에 5개팀이 나머지 한 장의 가을잔치 티켓을 놓고 유례없는 전쟁을 치룰 때였다. 2001 시즌의 롯데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순득점(득점-실점)+, 그것도 48점이나 득점이 실점보다 많음에도 꼴찌를 차지하는 수모를 당했고, 이게 고 김명성 감독의 타계와 함께 8888577이라는 비밀번호로 이어졌다.
  47. [47] 2001년 7월 29일 경기는 마지막 홈 경기이고(마지막 홈경기 상대가 삼성이었고, 당시 감독은 해태왕조를 이끌었던 김응용이었다.), 진짜 해태의 고별 경기는 동년 7월 31일. SK 와이번스 전이었다.
  48. [48]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스포츠에 인색한 편이며, 상대적으로 문화예술 쪽에 투자를 많이 한다고 한다.
  49. [49] 2000년 근처까지 일부 택시기사는 기아자동차, 삼성광주전자를 지역기업이 아닌 것처럼 말하기도 했다.
  50. [50] 호남 야구가 꽃피기 시작된 것은 1970년대이다. 경북 쪽의 야구 명문고들이 1950년대부터 나온 것을 보면 한참이 지난 후다. 2000대 이후 각 팀의 주축 선수들이 호남 출신인 경우가 많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모습.
  51. [51] 사실 공식적으로 2군이 있던건 그 이전인데, 2군이 본격적으로 활성화 된 것은 김성근이 부임한 1994년부터 이다.
  52. [52] 1997년 고졸우선지명으로 김병현을 뽑았으나 김병현은 대학을 가더니 MLB로... 나중에 한국 복귀했을 때 후신팀인 KIA에서 활동했었지만, 그 때 김병현은 퇴물이 되어 있었다...
  53. [53] 1993년도 올스타전에서 한대화에게 발길질을 했으며, 이게 전파까지 타서 한동안 논란이 되었다.
  54. [54] 이 선수는 해태가 아니라 KIA로 바뀐 다음에도 트레이드를 거부했다.
  55. [55] 단 타 구단에서 나이 많은 선수가 들어올 경우 해태 팀내 고참이 "나와 비슷한 연배니 잘 모셔라." 라고 얘기하면 군기 바짝든 후배들이 알아서 기는 직속 선배 대접을 해줬다고 한다.
  56. [56] 다만 타지 출신들도 적응을 해서 성공한 케이스가 없는건 아니다. 서정환이나 한대화, 최상덕, 이범호 등 이 팀에서 성공한 타 지역 출신들도 많기 때문.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런 천대시 하는 분위기가 옳은 것은 절대 아니다.
  57. [57] 다만 이병훈 본인의 말을 보면 이 사건 때문에 이호성과 친해졌다고 한다.
  58. [58] 여담이지만 박충식은 오히려 인사를 받는 쪽이었다. 당시 그보다 나이 많은 고참선수라고 해 봐야 이호성이나 최해식, 김태룡 정도였으니
  59. [59] 친한 사이인 경우 성만 붙여 X선배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60. [60] 최훈재가 이강철, 조계현과 같은 1989년 입단 동기라서 이 둘이 최훈재를 잘 챙겨줬었다. 그러니 후배들이 최훈재를 우습게 볼수 없던 것이다.
  61. [61] 이호준은 SK와 기아가 한창 대립각을 세울때도 공공연히 기아가 우승했으면 좋겠다 라는 얘기를 서슴없이 했고, 양팀 사이의 벤클시에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정성훈은 현대 이적 소식이 나오자 떠나기 싫다고 대성통곡했고 그 후 올스타전때 기아 헬멧을 쓰고 나오는 기행을 선보이기도 했다.
  62. [62] 프로 야구팀은 여러 프로 스포츠 중에서도 돈이 많이 들어가는 편이다. 한국의 프로야구팀의 모기업들은 대개 삼성, LG, 롯데, SK, 기아(현대자동차), 두산, 한화, 현대 등 재계에서도 손꼽히는 대기업들이다.
  63. [63] 지금이야 트레이드가 잉여 전력을 내주고 즉전감이나 유망주를 받아오는 등 각 팀의 약점을 보완하는 수단, 즉 비지니스 중의 하나로 인식이 변했지만 1980년대~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트레이드 당한 선수는 그 팀에서 거의 토사구팽 당한 꼴이나 다름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최동원. 꼴떼프런트 개새끼 해봐!
  64. [64] 삼성에서 트레이드해서 온 박충식의 증언이다. 해태는 와보니까 재활은 커녕 일개 헬스클럽만도 못한 운동시설만 있었다고. 일례로 웨이트 기기에 쇠로 된 추가 아니라 을 매달아 놨었다고 한다. 여기가 군대야? 사회야?
  65. [65] 그리고 최동원이 롯데에서 토사구팽 당하다시피 하며 떠난 계기도 되었다.
  66. [66] 체리마루, 호두마루, 피스타치오마루 등
  67. [67] 한국시리즈에 진출 시 우승확률이 100%라는 해태 타이거즈였지만, 압도적인 전력이라고 평가 받은 시즌은 1988, 1991, 1993 시즌 정도 밖에 없다. 1987년, 1996년은 오히려 예상을 깬 우승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
  68. [68] 그리고 KIA로 바뀐뒤에도 KIA에서 뛰다가 KIA를 떠나고 싶었는지 FA 취득일수 문제 등으로 구단과의 마찰을 빚다가 SK로 이적했다. 그 결과 호남팬들은 박재홍을 천대시하는 취급을 하게 되었다.
  69. [69] 이 때문에 기아에서 올드 유니폼 데이에 매우 소극적인 면도 있을것이다. 기아는 해태의 계승을 외치지만, 동시에 해태색을 지우고 싶어하기도 한다.
  70. [70] 그런데 하필이면 유니폼을 제작한 회사가 네포스다! 그래서 팬들 사이에서는 1회용 이벤트로 끝내는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71. [71] 나머지 한 팀은 윤석환, 유희관 외에는 제대로 된 왼손투수가 없던 두산 베어스.
  72. [72] 이 중 이종범은 왼손잡이다. 하지만 우투우타.
  73. [73] 그나마 해태왕조시대 이후 해태말기 ~ 기아시절이 전성기인 선수.
  74. [74] 거기에 이 좌완들도 뭔가 하나 모자란 선수들이었다. 김정수만 보더라도 제구력이 워낙 나빠서 김응용이 내가 발로 던져도 너보단 잘할것이라고 까버렸고, 강태원은 성준처럼 구속하나는 느린 좌완이었다.
  75. [75] 오죽했으면 1990년 말 신인드래프트때 인하대 거포 김기태와, 한양대 좌완에이스 투수 오희주를 두고 고심했다가 좌완투수가 더 급한 사정상 오희주를 지명했다. 근데 김기태도 좌타자인뎁쇼? 그러나 프로데뷔이후 둘의 차이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김응용감독도 김기태를 못데려온걸 제일 아쉽게 생각한다고. 만약 김기태가 해태유니폼을 입었다면 해태 전성기는 더욱 더 연장될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신 쌍방울 레이더스는 더 폭망했겠지
  76. [76] 이상하게도 이 선수들은 빨간 유니폼을 입자마자 모두 폭망했다. 특유의 팀분위기에 적응을 못했다거나 그 외 모종의 사건이 있었을듯 하다.
  77. [77] 한국에서 제일 많은 성씨가 김씨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른손잡이니까
  78. [78] 장성호, 양준혁, 트레이시 샌더스, 장일현도 경우에 따라 선발
  79. [79] 사실 최희섭은 1998년에 이미 1차지명을 받은 상황이었다. 만일 예정대로 1998년에 그가 MLB에 가지않고 해태에 입단했더라면 그 해 해태가 4강을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구에 만약은 없다. 그리고 이용규와 김원섭은 모두 트레이드로 넘어 온 선수들이다.
  80. [80] 후에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다시 현장에 복귀한 김응용은 류현진 때문에 한화 감독직을 수락했다면서 류현진을 메이저리그로 보내기 싫었다고 집착했다.
  81. [81] 해태 시절에 좌완에 한이 맺힌 김응용 전 감독은 현역시절에 좋아하던 유형의 투수는 류현진과 같은 덩치좋은 좌완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렇다보니 삼성 감독이 되고서 해태 시절에 아끼던 강영식을 데려가기도 했었고....
  82. [82] 동봉철송유석은 1996년 11월 5일, LG의 조현을 상대로 트레이드 된 상황이었다. 트레이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다음날에 최훈재최향남 트레이드가 이루어진다.
  83. [83] 같은 호남지역이지만 전북지역은 5.18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5.18 당시 광주 봉쇄 작전이 진행될 때도 신군부는 호남선 철도와 도로의 통행을 전북의 최남단 지역인 정읍시까지 허용됐다. 그 정도로 전북지역 내부에서는 통행이 자유로웠다. 이 때문에 이 시기 홈경기를 치러야 할 상황(한 주 내내 타 지역 원정을 다녀온 후라든가...)에서는 광주가 아닌 전주에서 홈 경기를 치러야 했다.
  84. [84] KBO 초대 사무차장이던 이호헌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정부가 흰색 소복을 입은 수천명의 시민들이 야구장으로 몰려와 소요사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정보를 언급하면서 경기 장소를 옮기라고 압박했다"고 한다.
  85. [85] 여담이지만 이러한 정부당국자들의 우려는 현실화되기는 했다 물론 광주가 아닌 마산에서(...) 정확히 얘기하자면 1987년 6월 10일 당일 마산에서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한국 A팀 대 이집트 팀간의 경기가 펼쳐지던 도중에 최루가스가 경기장 내부로 흘러나와서 경기가 도중에 중단되었는데 환불이 되지 않자, 관중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했다.
  86. [86] 5월 18일 전후로는 경기가 열린 적이 있다. 1985년 5월 16일에 해태와 삼미의 경기가 광주에서 열린 적이 있다. 물론 해태의 승리.
  87. [87] 2017 시즌 종료 후 이호준, 강영식은 은퇴, 김경언은 방출당했다.
  88. [88] 2015년 시즌 종료 후 임창용이 삼성에서 퇴단한 후 이호준이 유일한 생존자였지만 임창용이 복귀하면서 두 명으로 늘게 됐다. 그리고 이호준이 2017시즌을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나게 되면서 임창용이 1997년 V9 달성 당시 멤버 중 마지막 생존자로 남게 됐다.
  89. [89] 전기리그 4위, 후기리그 4위
  90. [90] 전기리그 1위, 후기리그 4위
  91. [91]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3위
  92. [92]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3위
  93. [93]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2위, 후기리그에서 실제로는 33승2무19패로 공동1위였으나 1위결정전에서 OB에게 패했다. 82~85시즌의 제도였다면 죽을 힘을 써서라도 1위에 도전했겠지만 제도가 바뀌어서 어짜피 한국시리즈 직행하는데 별 의미 없는 경기였기도 했고
  94. [94]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2위
  95. [95] 전기리그 1위, 후기리그 1위
  96. [96] 한화와 승-패-무가 완전히 같은 공동 3위. 2017시즌 현재의 계산법이라면 해태가 11승7패로 팀간전적이 우위인데다 한화가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에 3위였겠지만 당시는 준플레이오프 승자팀에게 3위를 주기로 했기 때문에 한화가 3위, 해태가 4위가 된다.
  97. [97] 왜 4위하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냐면 3위인 롯데 자이언츠와 3경기 이상 벌어져 준플이 생략되고 대신 플레이오프가 7전 4선승제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95년의 해태는 팀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하고도 포스트시즌에 나간 유일한 팀이었는데, 22년후 LG가 2번째를 차지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일주일 후 추가바람
  98. [98] 드림리그 4위/4팀
  99. [99] 드림리그 4위/4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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